발터 하젠클레버의 아들
발터 하젠클레버 지음, 장순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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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는 <아들>. 읽으면서 파우스트는 아니더라도 메피스토펠레는 생각이 많이 났다. 제목이 짧아서 그런가, 아니면 자전적 작품이라서 그랬나, 원제 앞에 작가의 이름을 가져다 붙였다.

  발터 하우젠클레버(1890~1940)는 라인강 서쪽 지역, 아헨 지방 부르주아 시민 계급 유대인 의사 카를 게오르그 하젠클레버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젠클레버의 젊은 시절까지가 중요한 이유는 이이의 청소년기 자체가 바로 <아들>의 줄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발터의 어머니 마틸데 안나는 조현병, 정신질환으로 발터를 임신한 상태에서 오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당연히 정상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할 수 없었으며, 발터의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생을 마감한다. 가뜩이나 어머니의 정을 알지 못하고 자라는 발터에게 아버지는 너무나 가혹하고 엄격한, 수구적, 유대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하여,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지만 아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못했다. 아주 잡도리를 했는데 이게 유대인답게 학교 공부 측면에서는 훨씬 심했다. 소위 말하는 유대식 교육법. 역자 해설에 장순란을 이런 장면을 인용했다.


  “숙제를 못하면 승마용 채찍으로 자주 얻어맞았다. (…) 내가 학교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는 30분이 걸리는 등굣길을 등교 시간 10분 전까지 공부하다가 가도록 강요했다. 정신없이 급히 학교로 달려가다가 거의 매일 아침 먹은 것을 토해야 했다.”


  발터 하젠클레버가 이 정도면 그래도 착한 아들이다. 조금만 격렬한 사춘기를 겪었다 해도 벌써 아버지 금고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얼마를 훔쳐내 드런 집구석에서 도망했다가 돈 떨어진 다음에 기어 들어와 의사 아버지한테 맞아 죽었을 것이다. 나는 희곡을 읽는 내내 아들의 험한 청춘이 불쌍했던 것처럼 철없는 아버지도 불쌍했다. 어찌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자신은 분명히 아들을 위한 최선의 훈육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들에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겨버리고 여차하면 인생도 거덜이 날 수 있다.


  “나를 때리기 전에, 제발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 잠옷을 입고 잠들기 전, 내 몸은 회초리에 맞아서 줄자국이 나 있었죠! (…) 선생님조차 동정했고 내게 더 이상 벌을 내리지 않았어요. 아버지! 저는 모든 수모와 곤경을 다 치렀어요.”


  정말 이런 부모들 있다. 나도 몇 명 봤다. 아이를 들들 볶는 부모. 이런 부모한테 말 잘 듣는 체질로 태어난 아이들은 속으로 점점 찌그러지는지는 몰라도 부모가 소원하는 대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나라로 유학도 가고, 그래서 마지막까지 부모 등골 빼먹는데, 부모는 그것도 모자라, 특수대학원에 진학하라고 더 닦달을 하니 그만 최고 대학의 기숙사에서, 이제 공부는 지긋지긋해서 못 하겠다고, 목매달아 버리는 것도 봤다. 이 작품에서 아들은 몰랐을 것이다. 주인공 아들이 아들 노릇을 처음 해보는 것처럼, 아버지도 주인공 아들의 경우엔 언제나 초보 아버지였다는 것을. 반면에 아버지는 자신이 초보 아버지여서 미숙하고 몰랐다는 점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힘이 있고 돈이 있고 권세가 있어서 늘 아들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인생 뭐 있니. 그냥 내버려 두지. 부르주아 의사가 자식이라고 딱 한 명 있는데, 하고 싶은 거 좀 하라고 하지. 꼭 의학이나 법학을 시키려다 인생 쫑난다. 하긴 그게 말이 쉽지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작품 속에서 주인공 ‘아들’은 대학입학고사 아비투어에서 장렬하게 미역국을 먹는 것으로 시작한다. 문제를 몰라서 못 푼 것이 아니라 1800년경에 있었던 아스페른 전투에 관한 서술이었는데, 갑자기 대공국 제후비들과 함께 끝없이 뻗어가는 가로수 길이 아스라하게 떠오르면서 역사고 수학이고 다 망쳐버렸다는 거였다. 속내를 남자 가정교사에게 털어놓았고, 남자 가정교사는 아들을 이해했으며, 결과를 아버지에게 전보로 알려줄 수밖에 없었는데, 아들의 아비투어 낙방은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한 가정교사의 해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의 하젠클레버는 열여덟 살에 영국의 옥스포드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하다가 스위스 로잔 대학으로 옮겼다. 이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1914년까지 공부했는데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문학과 철학 전공이었는지, 여전히 법학을 공부했고 관심만 두었는지는 위키피디아에 나오지 않는다.


  <아들>에서 아들이 대학입학자격고사에 낙방한 때가 스무 살.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3수 실패 정도 된다. 가정교사도 남자, 여자 각 한 명씩 두고 학업에 전념시켰음에도 좋은 꼴을 보지 못한 아버지는 잔뜩 열이 받아 있다. 아버지는 스무 살 아들이 아직 미성년이기 때문에 전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여전히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머리통 다 큰 아들 역시 이젠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사느니 자유롭게 죽어버리고 말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대학입학에 떨어졌으며 자신이 바라는 문학이나 연극을 할 수 있는 길도 사라져버렸다고. 그러나 이제 메피스토펠레를 닮았지만 결코 메피처럼 근본적인 악마는 아닌 친구의 도움으로 집을 나가버린다.

  친구는 아들을 자유로운 젊은이들의 모임인 “환희의 유지를 위하여” 클럽의 비밀모임으로 안내한다. 이 모임에 연미복을 입고 등장한 아들은 아버지의 구속에서 탈피하자는 내용의 극렬한 웅변을 쏟아내고 한 방에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청년들은 아들을 어깨에 올린 채로 가두행진을 하며 모든 아버지에 대한 투쟁에 박차를 가하자고 외친다.

  스타덤에 오른 아들. 그에게 제공된 매춘부 아드리엔을 보내자 호텔방에 찾아온 친구. 그는 아들에게 권총을 한 정 건넨다. 체홉이 그랬던가? 권총이 등장하면 최소 한 번은 발사를 해야 하는 법이라고? 친구는 아들에게 진지하게 친부살해를 언급한다. 물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친부살해는, 비록 정말로 친부 살해의 씬이 나오더라도 오이디푸스 적인 친부살해를 포함해서 거의 대부분 메타포이다. 하여간 아들은 친구가 준 권총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버지가 보낸 형사들에게 체포당해 수갑이 채우진 상태로 아버지 집에 도착한다.

  드디어 부자상봉. 아들에게 우호적인 형사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아들의 수갑을 풀어주고 퇴장해서 단 둘이 남은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는 늘 가지고 다니는 말채찍을 들었다가 놓고 다시 들었다 놓았으며, 그럴 때마다 아들은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슬쩍 뽑았다 넣고 다시 뽑았다가 놓는다. 그렇게 마지막 절정을 향해 치닫는 부자의 갈등. 체홉의 의견이 옳았을까?


  짠하고 아쉬운 아버지와 아들. 젊은 시절에 읽었다면 당연히 아들의 입장에만 서 있었을 텐데, 이제 양육까지 모든 의무를 다 마친 나는 둘 다 안타까웠다. 부르주아 댁의 귀한 아들이 어리광부린다고 여기지 말기.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사는 건 다 힘들고, 대개 불행하며, 세상의 어떤 부모도 하여간 한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자식들을 절망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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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1-09 2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마지막 어떻게 되었을까 설마 ㅠㅠ
저는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생각이 나네요. 아버지도 아들도 다 불쌍해요.
사망한 해가 1940년이라 설마 하고 찾아봤더니 역시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네요.ㅠㅠ
폴스타프님 글 읽으며 마음이 아팠는데 더 아프네요.

Falstaff 2024-01-10 05:39   좋아요 1 | URL
연극의 대본이라서 대개 파국으로 끝나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가르쳐드릴 수는 없지요. ㅎㅎㅎ
유대인에게 특히 1930~40년대에 걸친 10년은 생각하기도 싫은 시기일 겁니다. 이후 계속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한테 생각하기 싫은 시대를 만들어주고 있기는 합니다만.
 
프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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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 최대의 장난꾸러기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을 읽어보면, 아무리 각주, 미주, 벼라 별 주석 같은 역자 훈수를 보태더라도 이이가 쏟아 놓은 단어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이해하는 농담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책을 읽었으면 그날 안으로 잽싸게 독후감을 써야 하는데, 이제 시간은 바야흐로 2023년 12월, 우리나라 중늙은이들이 본격적으로 해를 잊을, 즉 망년忘年을 핑계로 날마다 천국행을 도모하고 있는 이때, 물론 핑계지만 3일이 지나 감상문을 쓰려 하니 읽을 당시의 기막힌 촌철살인의 장면과 행위와 하다못해 사람의 이름까지 다 잊고 말았다. 오호라. 이 작품을 발표한 것이 1957년의 미국.  나보코프는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부르주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워낙 고급 교육을 받은 데다가, 애초부터 빼어난 자질까지 가져 누구보다도 많은 지식을 함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작품 속에서 숨기지 않고 슬쩍, 슬쩍 드러내는 잘난 척을 결코 멈추지 않았는데, 이게 얄밉거나 뵈기 싫지 않은(‘보기 싫지 않다’보다 좀 센 표현으로 이게 어울릴까?) 희한한 재주까지 가졌다. 이 책에서도 나보코프는 음악, 미술, 문학 그것도 유럽과 아메리카를 두루 섭렵하여 작품 속 주인공들의 이름을 적재적소에 특징지을 수 있는 등장인물한테 엣다, 너는 이 이름으로 해라, 넌 이렇게 행동해라, 하는 바람에 독자가 읽다가 어어, 하면서 싱긋 웃음짓게 만드는 컷도 여럿 있었다. 도서관 열람실에선 맘놓고 웃지도 못하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글쎄 어느 장면, 어느 등장인물을 가지고 지금 이리 침을 튀는지 3일 전이었다면 이 자리에 척척 가져다 붙이겠다만 3일이면 소 한 마리 잡아서 이미 푹 고아 다 먹었을 시간이라 나도 못내 아쉽다. 하여간 나보코프, 소설 정말 잘 쓴다. 돌려차고 감아차고 옆으로 차면서 독자의 옆구리를 사정 보지 않고 간지르다가 결국 망명 러시아 지식인의 우울한 고독에 함께 마음 아파하는 일을 어쩌면 이리 맛있게 썼는지.


  티모페이 프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점잖고 상당히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벨 프닌 박사는 안과의사로 평생의 명예로 삼는 일은 레프 톨스토이 백작의 결막염을 치료해준 일이라고. 엄마는 독일 귀족의 따님이었다 하니 의사라고 같은 의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이 집에도 불행의 구름이 덮쳤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그냥 저냥 지나가겠는데 가만히 보니까 혁명 러시아는 이게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레닌화化 한 독재체제인지라 도무지 견디지 못하고 러시아를 탈출해 체코 프라하 대학에서 사회학,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이후 15년간 파리 16구에 살다가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유럽에 살 때는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프록코트는 아닐지언정 넥타이와 조끼를 받쳐입은 슈트 차림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완전무결한 대머리와 그은 피부,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에 뿔테 안경을 쓴 신대륙의 52세 프닌 박사는 일광욕을 즐기고 스포츠 셔츠에 슬랙스 차림에다가 여성 앞에서도 버젓이 맨살 정강이를 노출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 양반의 지금 직업이 뉴욕 근방 도시에 있는 웬델 대학의 러시아어 교수다. 명문 웬델 대학에는 정식으로 러시아문학과가 없다. 프라하 대학에서 받은 사회학, 정치경제학 박사 학위는 20세기 중반이 되자 불용학위로 구별되어 이제는 그 타이틀로는 교편을 잡지도 못한다. 이를 어엿비 여긴 독문과 학과장 (알베리히의 아들)하겐 교수는 독문과에 러시아어 과목을 하나 배치하고 프닌을 교수로 초빙했다. 러시아어 중급반 수강인원 1명. 상급반도 1명인데 얜 출석부에 이름이 올랐다는 의미일 뿐이고 얼굴 한 번 본적 없다. 초급반 3명. 러시아어 실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혁명 직후엔 파리, 이후엔 세계 주요 도시 각처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구 러시아 왕족, 귀족 나부랭이들의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나이든 할머니 무리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지만 학생들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실력있는 교사라기 보다는 혁명 후 혼돈기, 적백 내란기, 망명기에 자신이 겪었던 경험함을 재미있게 엮어서 드라마틱한 내용까지 보태 들려주기 때문이었다. 그럼. 실력 없으면 이런 거라도 해야지.


  자꾸 프닌 선생의 러시아어 실력을 이야기하게 되는 데, 어느 수준인지 보자. 프닌은 일단 강의 노트를 먼저 만든다. 러시아의 관용 속담과 민담, 신화 같은 것을 넘치게 인용하여 근사하게 작성을 하고 이것을 독문과 교원에게 영역을 부탁한다. 독문과 대학원생이 러시아 관용어를 제대로 번역할 수 있겠어? 그래도 한다. 번역해 영문으로 개발새발 쓴 것을 프닌이 아니라 밀러라는 조교가 수정을 하고 이번엔 하겐 박사의 비서 아이젠보르 양이 타이핑을 한다. 최종적으로 프닌 앞에 도착한 원고를 프닌 교수가 읽어보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삭제만 한 후 수업에 들어간 교수는 눈을 원고에 박고 그냥 읽는 것으로 수업을 갈음하는 거다. 이 장면만 보면 모교 아르센 루팡 대학의 한모 교수가 생각난다. 김일성 대학 교수로 재직할 때부터 써먹던 강의노트를 시작과 동시에 그대로 칠판에 베껴 쓰던 학계의 전설적 인물. 나한테 F학점 줬다. 생존해 있느냐고? 어딜. 진짜로 김일성대학 교수 출신인데 벌써 갔지. 그땐 이런 교수들 몇몇 있었다. 선풍기에 시험지 날려서 가까이 떨어진 놈 A주던 시절. 헛갈리지 마시라. 멀리 간 시험지는 학점이 낮다. 가까이 떨어진 것이 멀리 간 것보다 무거울 것이고 그만큼 시험지에 답안을 많이 적은 것이 분명하니 A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당시 국보의 채점법이었다.

  프닌 교수가 사실 나사가 좀 빠지기도 했다. 도대체 정신이 어디에 있는 사람인지 꼭 실수를 하고, 아니더라도 대개 이런 사람들한테 실수 또는 불운의 별이 빛을 모아서 쪼이는 법. 한 번은(작품이 시작하자마자) 크레모나 여성 클럽 부회장 주디스 클라이드 여사가 크레모나에서 열리는 금요 야간 강연회에 연사로 초빙을 해 가서 강연을 해주기로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강의록을 준비해 가방에 챙겨 두었다. 협회는 거마비와 함께 가장 효과적으로 도착하는 기차편을 소개했지만, 평소에 여러 팜플렛을 수집하는 프닌 박사는 그것보다 적어도 20분을 절약할 수 있는, 토요일만 특별 편성하는 열차를 알고 있어서 그 시간표에 입각해 열차에 탑승했다. 객석에 앉아 세상의 어두운 정보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우둔함에 떠올리며 우쭐하고 있다가, 어머나, 지나가는 차장이 하시는 말씀이 이 열차는 크레모나에서 정차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열차 시간표를 디밀고 무슨 말씀이세요, 따지니까, 아이고, 승객님, 이건 5년 전 열차표 아닙니까요? 20분 벌려다가 졸지에 두 시간을 까먹게 생겼다. 프닌은 할 수 없이 위트처치 정거장에서 내려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네 시 버스를 타면 여섯 시에 도착한단다. 아직 시간이 있어 트렁크를 안내원에게 맡기고 배가 출출해진 프닌은 햄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는다. 네시 5분전에 안내원에게 가서 가방을 달라며 손가락질을 하는데, 어 참, 손가락이 엉뚱한 가방을 가리켰다. 그리고 가방을 맡았던 안내원은 아내가 출산을 한다고 자리를 비운 상태. 이제 엉뚱한 가방을 지목한 프닌 교수에게 쉽게 가방을 바꿔줄 안내원이 있을 턱이 없지. 이때 네 시 버스가 승강장에 도착한다. 프닌 교수는 머리를 잽싸게 돌려본다. 저 버스를 타지 못하면 오늘 스케쥴은 끝이다. 다음 버스는 여덟 시에 있으니. 프닌은 가방 없이 맨몸으로 출발하고 짐은 돌아올 때 들러 가지고 가기로 결정하고 버스를 향해 헉헉 뜀박질을 한다.

  그렇게 도착한 크레모나 금요 야간 강연회. 앞줄 가운데 자리에 눈에 확 들어오는 관객이 한 명 있었다. 발트해 연안에 살던 친척 할머니 중 한 명. 자신의 옛 동창생. 부모 연배의 러시아어 전문가들. 이렇게 프닌의 인생은 꼬여만 간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도무지 거절을 하지 못한다는 거. 1925년 프랑스 파리 시절에 리자 보골레포브나 양, 검은색 실크 점퍼와 맞춤 스커트 차림의 막 20세가 된 의대생을 만나 연애를 한다. 이 당시 리자는 로제타 스톤(!) 여사가 운영하는 당시의 가장 파괴적인 뫼동 정신 요양소에서 근무하며 간혹 읽기 참혹한 수준의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만 둘은 결혼을 해버리고 만다. 이게 프닌의 유일한 결혼이었고, 리자는 드디어 결혼식을 하기 시작한 거였다. 몇 년을, 그렇다고 오래는 아니고 잠깐 살다가, 신대륙으로 항해하는 여객선에 올랐을 때 리자의 배는 북통만 했었는데, 아이는 당연히, 라기보다 짐작하셨다시피 다른 남자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다른 남자’는 신대륙행 여객선 갑판에서 티모페이 프닌과 우정을 돈독하게 쌓아올린 에릭 빈트, 혹은 에릭 윈드, 또는 에리히 빈트,라는 이름의 아르헨티나 남자였고.

  혼인 전에 리자 보골레포브나였다가 리자 프닌이었다가 리자 빈트가 되었다가 후에 또다시 성이 바뀌는 이 여인은 티모페이 프닌이 나이가 더 들어 한 번 더 이혼을 결정하면서 득달같이 프닌을 찾아와 “당신의 아들이기도 한” 아이의 대학 학비와 생활비를 대달라고 요구하고, 마음 약한 프닌은 이걸 또 거절하지 못한다. 왜?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라서.

  이 독후감을 읽으시는 분들은 여기까지만 알아두시라. 프닌이 이렇게 한심하고, 나사가 몇 개 풀려있고, 먹고 사는 분야의 실력도 엉망이고, 불운의 별이 그를 위하여 반짝이는 인간일 뿐이라고 여기시라.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이방의 땅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망명객을 향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변명도 언젠가는 한 번 준비되어 있을 것. 미국 땅에서 부유하는 루저의 삶 속에 마르지 않는 습기를 발견할 수 있을지 혹시 모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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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개
하인리히 뵐 지음, 안인길 옮김 / 미래의창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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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권째 하인리히 뵐의 책을 읽었다.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부터 뵐을 읽어서 권력의 남용과 이에 따른 시민의 피해와 저항 같은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작가인 줄 알았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나중에 <카탈리나…>가 예외적인 작품이란 걸 알았다. 이후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거치면서 이이의 관심사가 전쟁과 전쟁 후 폐허가 된 도시와 독일인들이란 것을 저절로 알게 됐다. 스스로 징집되어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포병으로 참전했다가 부상도 당하고 꾀병도 부리고 하다가 탈영해 미군 포로가 된 경험도 있어서, 전쟁의 참상과 전쟁 자체가 인간을 얼마나 하찮은 미물로 만들기도 하고, 겁쟁이로도 만들며, 얼마나 지독한 악마로 만들기도 하는지 지긋지긋하게 경험을 해 누구보다 진심으로 반전주의자가 되었을 터이다.

  이 작품집 《하얀 개》는 작가의 비교적 초기 작품 가운데 미발표작을 모아 1995년에 사후출판한 책으로 첫 작품 <불타는 가슴>만 1936년 (또는) 37년, 나머지는 1947년, 1949~1951년 작품이라고 역자 해설에 쓰여 있다. 나는 사후 출판일 경우엔 원고를 왜 살아생전 발표하지도 않고 책에 싣지도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는 인간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유고작품집 《마지막 이야기들》 독후감에서도 비슷한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시피. 특히 《하얀 개》의 경우엔 초기작품 위주 미발표 작품의 모음이라서, 작가가 자신이 쓴 결과물을 잊었다는 건 별로 호소력이 없고, 어떤 연유가 됐든 간에 하여간 마음에 그리 차지 않아 나중에 손을 볼 의향으로 가지고 있거나, 다섯 편의 극도로 짧은 단편의 경우엔 일단 작품의 스케치나 메모를 한 것 정도로 가지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독자는 어쨌거나 읽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굳이 의심을 숨기지 않는 이유는, 여섯 편의 ‘단편소설 같은 단편소설’의 경우에(다섯 편의 극도로 짧은 단편소설은 단편소설 같지 않지?) 뵐의 다른 단편집에 실린 작품과 비교해 별로 빠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숨을 거둘 때까지 책상서랍에 꿍쳐 놓았던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열아홉, 스무 살에 쓴 <불타는 가슴>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폐허의 쾰른이 무대가 아닐까 싶기도 했었음에야. 하긴 좋은 작가는 보통 청소년 시절부터 애늙은이 경향이 심하긴 하지만.


  물론 내가 뵐의 작품에 관한 선입견이 있어서 <불타는 가슴>을 전후 폐허 독일일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읽어보시라. 아마 내 짐작도 얼핏 타당하다고 여기실 것이다. 1936년이면 파시즘 국가 나치 독일의 거의 모든 국민들이 유대인 차별/탄압은 물론이고 “총통 각하가 명령하면 우리는 싸운다!” 연호하며 군비증강에 혈안이 된 시절이다. 어쨌거나 군수산업은 나라에 물자와 돈이 활발하게 돌게 만들어 독일인의 생활이 다른 서구 유럽과 동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살인적 불경기에서는 벗어났을 때이다. 아무리 이랬던 시기의 12월이라도, 열여섯 살 먹은 하인리히 페르코닝 소년은 처음으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하니 뵐의 성향을 알고 있는 독자가 애초에 단편 <불타는 가슴>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무대가 대도시이긴 하지만, 그리고 단 한 번도 무너진 집이나 건물, 깨진 보도블록 같은 묘사가 나오지도 않지만 파괴된 거리의 즐비한 폐허를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어서 “한 노신사가 젊고 뻔뻔한 창녀를 따라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라고 이어지며, 하인리히도 대략 열일곱 살 된 창녀차림의 예쁜 소녀, 결국 창녀로 밝혀지는 소녀 수잔네와 급속하게 친하게 되는데 말이지. 독자인 나는 당연히 전후 궁핍한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도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상했다. 어쨌거나 제일 중요한 문제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니까. 수잔네는 창녀이면서도 구원과 종교를 말하고, 하인리히의 가슴에 기댄 채 도스토옙스키가 괴테를 천재적으로 모방했다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며,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베네딕트와 막달레나 커플과 친해지는 등 사랑은 계급과 종교의 범주를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제로 열아홉 또는 스무 살에 썼다는 얘기다.


  그래도 재미있는 건 역시 사랑 이야기다. <실락원>. <실락원>하면 하여튼 나한텐 와타나베 준이치가 쓴 무지무지하게 야한 유부녀와 유부남의 치정 이야기인데, 뵐의 <실락원>은 다른 의미에서 괜찮게 읽었다. 작가 본인도 그랬지만 작품의 남자 주인공 ‘그’도 전쟁터로 떠나 7년만에 귀향한다. 다른 곳에 비해 그나마 덜 파괴된 고향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꿈엔들 잊힐리야, 마리아 X를 찾아간다. 건물은 극도로 쇠락해있고, 어두운 복도 맨 마지막 쪽방이 마리아의 방.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방문을 두드린다. 적막. 더 거세게 두드린다. 그래도 아무 응답이 없다. 그러다가 문에 종지쪽지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일곱 시에 돌아옴. 열쇠는 옆방에 있음. M.”

  ‘나’는. 시점이 자주 바뀐다. 뵐의 작품에서 종종 그랬듯이 ‘그’가 등장했다가 곳곳에서 ‘나’로 바뀐다. 여기서 ‘나’는 옆방문을 두드렸고 조금 있다가 문이 열려 얇은 목걸이를 단 여인이 고개만 내밀고 열쇠를 건네며, 틀림없이 벌거벗었을 이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 당신이 침대 위에 걸려 있는 분이시군요”

  “예, 아마도……”

  여인의 직업은 뭘까? 여인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같은 마리아는 또 어떻게 돈을 벌어 생활했을까? 이게 속물인 독자가 궁금했던 거였다. 하여간 나는 마리아의 방을 열고 들어간다. 그리고 7년 전의 마리아에 관한 회상. 나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 마리아. 정수리까지 곧고 깨끗하게 뻗은 가르마. 내 오른쪽 가슴에서 팔딱팔딱 뛰던 심장의 고동. 그리고 몸의 의식.

  그의 사색은 계속 깊어진다. 방에서 은근히 산포하는 부드러운 비누와 옷 냄새. 그리고 약간의 담배연기가 빚은 깨끗한 냄새. 전후 시절에 비누와 깨끗한 속옷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7시 20분 전. 그는 방을 나와 천천히 어두운 복도를 걸어 역시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과연 떠나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한 그는 갈 수밖에 없다고, 지금 가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여기까지 읽으면서 속으로 말했다. “그래, 생각 잘했다. 한 번 보면 뭐해!”

  인생이 그렇지. <실락원>의 주인공, ‘그’였다가 갑자기 ‘나’로도 변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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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1-05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프닌>
화요일. 발터 하젠클라버, <발터 하젠클라버의 아들>
수요일.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목요일. 전예진, 《어느 날 거위가》
금요일. 루이스 어드리크,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

stella.K 2024-01-05 11:24   좋아요 1 | URL
오, 드디어 다음 주 수요일 저도 읽은 책이 나오는군요. 작년인가 재작년에 읽고 리뷰는 안 썼던 것 같은데 팔님 어떻게 읽으셨을지 궁금하네요. 그럼 새해 첫 주말 잘 보내세요.^^

Falstaff 2024-01-05 15:42   좋아요 1 | URL
음... 무라카미 아니면 어드리크 둘 가운데 하나겠지요. 다른 세 권은 신간이거든요. ㅎㅎ

yamoo 2024-01-05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인과 군중...이거 읽다가 관뒀으묘~~ 완역도 아니고 끊임없는 등장인물때문에...
뵐은 카타리나로 종결 볼까 합니다. 카타리나가 너무 좋아 읽기 시작한 <여인과 군상>이었는데...완역되어도 읽기 힘들거 같아요. 뵐의 특유한 문체는 읽는 맛이 있긴 하지만...^^;;

Falstaff 2024-01-05 15:43   좋아요 0 | URL
윽. 완역도 아닙니까? 알고는 못 읽지요. ^^
 
어부와 아들
쥴퓌 리바넬리 지음, 오진혁 옮김 / 호밀밭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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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만에 리바넬리를 또 읽는다. 그만큼 <세레나데>가 좋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대한 만큼 재미나게 읽지는 않았다. <세레나데>와 달리 튀르키예의 서민층을 등장시킨다. 튀르키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관광도시 보드룸에 근접한 작은 어촌의 가난한 어민들. 산업화를 진행하는 과정에서의 필연적 부조리인 부정부패가 지역 사정은 거의 감안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건설, 설치, 개발 승인을 해주었다. 그 결과 어촌 마을은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 짙은 숲을 자랑했던 천혜의 휴양지이자 항구였으나, 하늘은 화력발전소에서 날아오는 연기로, 바다는 대규모 양식장의 침전물에 의한 부영양화로, 숲은 청산가리를 사용하는 금광 개발로, 동네는 대규모 관광호텔 건설로 날이 갈수록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었다. 나라 밖에서는 아프리카,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서 대규모의 난민들의 중간거점으로 조그만 고무보트에 수십명이 몸을 싣고 유럽으로 밀항하다가 풍랑을 만나 익사한 시신들이 바다에 둥실둥실 떠다니기 시작한 201X년. 삼십대 초반의 어부 무스타파와 그의 아내 메수데 커플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무스타파는 세계적인 장수촌인 어메 마을의 백세가 넘은 노인에게 배운 대로 매일 동트기 전에 일어나 공복에 유리 찻잔 가득 올리브유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느끼하지 않을까? 김치 쪼가리 한쪽 집어먹으면 좋겠다 싶다. 도무지 말이 없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마른 체구의 키 큰 남자는 무심하고 다른 것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한 남성미를 드러내는 어부. 험한 일을 해 먹고 사는 이 답게 어쩌면 야성적이고 거칠어 보일 수 있는 분위기를 풍긴다. 한 마디로 괜찮은 외모지만 가까이하기엔 좀 재수없는 스타일이라고 하면 될 듯. 그의 아버지도 평생 줄담배를 입에 물고 사는 가난한 어부였다가, 담배 때문에 폐암으로 죽었다. 얼른 죽지도 못해 없는 살림에 병구완을 하느라 낡은 조각배마저 몽땅 팔아먹고 집 하나만 달랑 남겨두고 숟가락 놨다. 어머니는 공무원한테 시집가서 조금 내륙지방 시내에 살고 있는 여동생 필리즈의 집에서 살고 있다. 무스타파는 어린 시절부터 노장 타흐신 선장에게 바다 일을 배우다가 세월이 흘러 선장이 은퇴를 한 후 낡았지만 멋있고 모터가 달린 고깃배를 월부로 인수해 폭풍이 불지 않는 한 해가 뜨기 한참 전에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고 돈을 얻었다.

  스무 살 때 열아홉 살의 메수데와 결혼해 아들 데니즈를 난산 끝에 낳았다. 병원에 가지 않고 동네에선 실력 있다고 알아주는 산파를 불러 출산을 했지만 굉장한 하혈을 동반한 난산으로 출산 후에 병원 진료를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늙은 산과 여의사는(‘여’의사라 썼다고 시비 안 하셨으면 좋겠다. 이슬람 문화권 튀르키예에서는 이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자기라면 더 이상 임신 출산을 하지 않겠다고 해 데니즈를 외동아들로 알고 키웠다. 데니즈는 바다를 몹시 좋아해 어려서부터 아빠를 졸라 함께 배를 타고 조업에 나가고는 했다. 일곱 살 되던 해. 아빠와 아들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고, 갑작스럽게 폭풍이 불어 닥치는 바람에 배가 뒤집어졌으며, 이 와중에 데니즈가 사라져버렸다. 무스타파는 넋이 나가 이후 몇 주일이나 아들의 시신이나마 찾으려 바다와 바다 속까지 뒤졌지만 결국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젊은 시절부터 잠수부로 이름을 날린 아버지는 이후 절대 잠수하지 않았다.

  엄마 역시 넋이 나갔다. 모든 것을 잃은 슬픔은 이들 부부 앞에서 데니즈 이야기는 물론, 아이들에 관한 어떠한 단어도 사용하지 않는 배려를 주민들은 알아서 베풀었다. 그토록 사이가 좋던 부부 사이엔 건조한 모래바람만 불고, 대화라는 것은 증발해버렸으며 어쩔 수 없는 성생활도 무미한 과정에 불과했다. 둘째 아이라도 낳았으면 하는 아내의 바람도 의사의 조언을 깊게 명심하고 있는 남편의 피임을 막을 수 없었다. 말없는 사람들. 말없는 부부.


  그러나 바다는 여전히 무스타파의 직장이고 삶이며 연인. 그는 끊임없이 고기를 잡고, 낚시 여행을 온 사람을 태우고 난바다에 나가 낚시를 던졌다. 이때 들은 헤밍웨이 이야기. 노인이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황새치를 낚았는데 밤이 새도록 황새치와 싸우느라 기진맥진 나가 떨어져, 운운. 그걸 들은 무스타파는 그 노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며 시답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황새치가 그렇게 굉장한 물고기고, 며칠 밤낮을 항복하지 않고 버텼으면, 어부도 줄을 끊고 ‘자, 용감한 녀석. 넌 살 자격이 있어. 바다로 들어가 잘 살아’라고 해야 맞지요. 나도 엄청 큰 물고기를 잡을 때가 있어서 배로 끌어올리다가 엄청난 녀석과 눈이 마주칠 때가 있는데요, 어찌나 슬프게 바라보는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놈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냈답니다.”

  무스타파는 엄청난 물고기를 좋아하고 특히 돌고래를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 바다가 변했다. 할아버지 시대 때부터 알고 있던 물고기 말고 처음보는 이상한 물고기들이 번식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어종이 복어와 쏠배감펭. 쏠배감펭은 독이 든 가시만 조심해서 구워 먹으면 맛이 기막힌 흰살생선이지만 복어는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다행히 정부는 복어 꼬리를 잘라오면 마리 당 5리라를 보상해주겠다고 한다. 대신 꼬리를 잘라 바다에 버리라닌 지시. 시체를 먹은 바다 속의 생명체는 죽거나 말거나.

  이래저래 날이 갈수록 팍팍해지기만 하는 어부 생활에 무스타파는 자신만 알고 있는 포인트가 있었다. 비밀의 암초지대. 


  때는 2010년대. 전세계는 내전과 정세불안으로 국민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리는 나라가 곳곳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거론하지 않지만 베네수엘라를 필두로 하는 라틴아메리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걷거나 브로커의 운송수단을 이용해 이란에 도착하고, 이란에서 다시 걷거나 운송수단을 얻어 타며 튀르키예로 집결한다. 이렇게 모인 난민들은 튀르키예의 숨겨진 곳에서, 하나에 수 천 달러를 하는 고무보트에 적정인원을 훨씬 초과하는 인원을 태운 채 많고 많은 그리스의 아무 섬에나 떨구어 놓는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타 바다가 고요하더라도 언제든 빠질 수 있는데 하물며 심한 파도나 폭풍이 치면 그때는 몰살의 위험도 각오해야 한다.

  자신만 아는 어장에 도착해 그물을 올리려는 무스타파의 눈에 물에 뜬 자루 같은 것이 들어온다.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 그는 작업을 멈추고 다가간다. 저런. 다갈색 피부에 얼굴에 멍이 든 이십대 여인의 익사체. 그리스의 섬으로 가다가 고무보트에서 떨어졌겠지. 힘들여 배 위로 끌어올려 서둘러 귀항하던 중에 또다른 시신을 발견한다. 이십대 남자 익사체. 배에 자리가 없어 낚시줄로 그를 묶어 배에 매달고 끌고 간다. 그러다가 만난 익숙한 돌고래. 가만히 보니까 붉은 구명환 비슷하게 생긴 작은 고무보트, 라기 보다 아동용 물놀이 보트 같은 장난감 비슷한 것을 주둥이로 무스타파를 향해 몰고 오는 거였다. 그가 배를 몰아 건져보니, 에그머니나, 겨우 숨을 쉬는, 아직 숨이 멎지 않은 갓 낳은 사내 아이가 들어 있는 거였다. 무스타파는 관광객이 놓고 간 초코릿을 햇볕에 달궈진 프라이팬에 녹여 아이 입에 문질러 주고 서둘러 항구로 돌아온다.

  그리고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품에 안고 집에 데려와 아내 메수데에게 건네주는데, 알라신이여, 위대한 알라신이여, 당신의 능력은 끝이 없습니다, 바다는 아들 데니즈를 데려가더니 이제 피부는 더 짙어 다갈색이지만 또다른 아들 데니즈를 돌려주는 거였다.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한다. 리바넬리다운 여러가지 세계적 문제, 환경, 개발, 난민 이슈를 포함한 개인, 가족, 지역사회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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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04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 거 같네요. 세상엔 왜 그리도 죽는 사람이 많은지. ㅠ 작가가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추앙을 받고 있네요.

Falstaff 2024-01-04 16:31   좋아요 1 | URL
옙.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강추 수준까지는 아닙니다. ㅎㅎㅎ 이이의 <세레나데>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대박입니다.

그레이스 2024-01-04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길게 쓰시고, 이렇게 이야기는 시작한다...;;;
ㅎㅎ
튀르키에는 파묵만 생각나는데...
리바넬리 입력합니다.^^

Falstaff 2024-01-04 21:25   좋아요 1 | URL
튀르키예 작가들 몇 명 있는데 그새 잊었습니다. ㅎㅎㅎ 이 양반이 쓴 <세레나데> 문지 세계문학에서 나오는 데요, 재미납니다. 소위 강추! ㅋㅋㅋ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나탈리 사로트 지음, 이광호.최성연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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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탈리 사로트는 누보로망 계열의 소설가인줄 알았다가 검색 중에 희곡 작품이 눈에 들어와 얼른 읽어봤다. 뭐 그렇다고 사로트의 소설을 많이 읽어본 것도 아니다. 꼴랑 두 편 읽었다. <황금열매>와 <어린 시절>. 아마 사로트에 관심이 조금 있는 분들 가운데 이 독후감을 읽는 분 역시, 사로트의 희곡이라고? 약간의 의아심과 궁금증과 호기심이 솟는 것을 숨기기 힘들 듯하다. 사로트의 누보로망 작품은 읽기 어렵다. 내용이 난해해서도 아니고 현학적 철학의 철갑옷을 입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 장면을 미분하듯이 세밀하게 쪼개 그걸 낱개로 묘사하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시트르의 바닷가>를 쓴 쥘리앙 그라크가, 특별한 주장도 없으면서 한 물체나 형태를 과하게 세밀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누보로망이 쇠퇴하게 될 것이라고 했듯이, 아니 독자가 저절로 그라크가 한 이야기가 맞는 말이기를 바라게 되는 현상과 비슷한 방법으로, 읽기 어렵다. 하여간 나는 그랬다. 로브그리예보다 더 힘들었다. (며칠 후에 로브그리예를 읽게 될 지는 지금은 전혀 몰랐다. 그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이 작품은 1985년 5월 말에 뉴욕 연극클럽에 의하여 세계 초연되었다. 사로트가 1900년생. 이때 나이 85세. 프랑스어 공연은 다음해인 1986년에 파리 롱푸앙 극장에서, 우리나라 초연은 2023년 제주도 세이레아트센터에서 극단 사자자리가 공연했다. 등장인물이 남자 1과 남자 2로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공연에선 여자 1과 여자2가 등장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활발한 창작생활을 하다가 1999년, 망백의 나이로 세상을 접기까지 이 러시아 유대인 출신 여성 극작가는 20세기의 온갖 전쟁과 사건과 문명의 발달과 인종의 교류와 사상의 전도를 겪으면서도 전 생애를 걸고 개인의 마음 속 움직임, 동향, 기울어짐, 지향 같은 것을 천착했다. 이이의 소설은 쉽지 않지만 직접 극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시청각을 통해서, 우리나라 공연에서는 부분적으로 관객의 극 참여를 통해 극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관객이 짐작한 것을 분명한 문장으로 설명하기는 곤란했을 수 있겠지만.


  이야기는 간단하다. 극도 단막극이다. 절친한 친구 사이인 남자1과 남자2. 남자1은 결혼해서 아이도 하나 낳고 사회적, 가정적으로 성공적이고 안정적으로 살고 있다. 남자2는 결혼 여부는 나오지 않지만 미혼인 것처럼 보이고 문학에 종사하거나 상당히 관심이 있으며 일반적 시선에 의하면 남자1보다 잘 나가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자2는 남자1을 예전처럼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는다. 언제나 남자1이 남자2에게 전화를 하고, 만나서 이야기하고, 술도 한 잔 하고,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계획을 상의하기도 했는데 남자1 입장에선 영문도 없이 남자2가 전화를 받아도 시큰둥하기 시작했던 거다. 남자2는 전화를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이런 사람 많잖은가. 그런 인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1은 차츰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감지하고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다. 혹시 남자2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아니면 오해라도 하고 있는 거 아냐, 이거?

  그래서 남자1은 남자2를 만나 솔직하게 물어본다.

  “너는 내가 이런 얘기하게 될 거라는 거 알고 있었을 거야. 왜냐면 우린 요즘 예전 같지 않아.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게 느껴져. 그게 뭔지 머리를 쥐어짜고 쥐어짜도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없거든. 너는 뭔가 변했어. 저번에 전화했을 때 네가 나를 완전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대해서 나 정말 상처받았어,”

  남자2도 대답한다.

  “나는 안 그랬을 거 같아? 난 여전히 너를 좋아하는데, 넌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란 생각은 안 드니? 아냐, 아냐. 말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까지 나쁜 일은 아니야. 관둬.”

  남자1은 남자2가 자기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에 상처를 받았다. 반면에 남자2는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성공하고 있는 남자1에게 상처받은 일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자기가 받았다고 하는 상처를 드러내는 일이 그렇게 자랑스럽지도 않고 내세우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굳이 말로 하기도 싫다. 하지만 이 극은 애초부터 무언극이 아닌 걸.


  “좋아… 음… 사실 전에…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데 그게… 그러니까 내가 그때 약간 자랑을 했나, 아니… 그건 잘 모르겠고… 원가 소소하게 해낸 일이 있어서… 아, 물론 되게 웃기는 일이지만 암튼 그런 일이 있었을 때, 네가 이러더라구. ‘대~단하다…’”


  남자2가 비록 사회적 성공은 거두지 못했을지라도 자잘한 성공은 언제나 거둘 수 있어서 아마 자랑 비슷하게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잘 나가는 남자1이 절친 남자2를 향해, “대단하다, 야!” 감탄을 터뜨려주지 않고 “대~~단하다.”라고 말해서 이걸 들은 남자2는 아무리 생각하고, 궁리하고, 고민하고, 술 석 잔을 마시면서 다시, 생각하고, 궁리하고, 고민해봐도 역시 칭찬이 아니라 비꼬는 것일 뿐이라고 결론을 냈던 거다. 남자1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이룬 작은 성공이야말로 비웃어도 마땅할 사소한 것이라고 아예 마음 속으로 확정했기 때문에.

  남자1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 비슷하게 행동을 하거나 말한 기억도 없거니와, 스스로도 자신이 잘 나가는 걸 알고 있어서 평소에 쓸데없는 구설수에 휩쓸리기 싫어 이 비슷한 말도, 행동도 특별하게 주의하고 있어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 틀림없이 자신은 격려나 축하의 의미로 이야기한 것을 쪼잔한 남자2가 그렇게 들은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렇게 직접 대놓고는 이야기하지 않지만 희곡을 읽거나 극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알아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자기 고집을 꺽지 않는 남자1과 남자2. 이들은 드디어 길거리에 서서 여보시오 지나가는 사람들아, 소리쳐 진짜로 지나가는 남자3과 여자1을 불러 세운다.

  우리나라 공연에서는 남자3과 여자1 대신 관객 두 명을 진짜로 무작위로 뽑아 무대에 올려서 남자1, 남자2가 (제주도는 여자 많은 섬이라 젠더를 바꾸어 여자1, 여자2로 공연) 이들에게 누구 말이 맞는가 시비를 가려달라고 부탁하건만, 세상에서 남의 일에 끼어들기 가장 싫어하는 프랑스 사람들이라, 아 몰라, 몰라, 빈말로 넘겨버리고 자리를 뜬다.

  이후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남자1은 또 자기 나름대로 남자2에게 수틀렸던 점을 끄집어낸다. 다섯 명이 등산 갔는데 남자2가 풍경이 근사하다며 얼른 하산해서 뜨끈한 닭백숙에 쐬주 한 잔 걸치고 싶어하는 일행 네 명을 그렇게 추운 날씨에 한참이나 기다리게 했던 일이다. 등산이라고 해도 우리나라 등산을 생각하면 안 된다. 알프스 얼음 능선을 건너는 일이라 다섯 명이 전부 자일로 몸을 연결해 일렬 행진해야 하는 전문가 코스라서 한 명이라도 낙오를 하면 전원이 꼼짝하지 못한다.


  남자1과 남자2, 둘 다 쪼잔하다. 뭐 세상이 다 그런 것이란 주장, 쉬운 얘기로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게 사람 사는 일이란 걸 나탈리 사로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아쉽게도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스타일이 달라 내 경우만 주장하고 싶지 않지만, 나 같으면 벌써, 너 좀 만나자, 해놓고 곧바로 물어볼 거 같다.

  “내 귀엔 ‘대~단하다’ 할 때 발음이 날 우습게 보는 것 같이 들렸는데 맞아? 천만의 말씀, 아니라고? 알았어. 하여간 그렇게 들렸으니까 그건 네 잘못이다. 그러니까 술 사라.”

  이렇게 끝냈을 거 같고, 알프스에서 네 명을 기다리게 만들면서 경치 구경을 하는 남자2한테는

  “염병하지 마시고 얼른 내려가자 4대 1, 다수결이다 새꺄.”

  했을 거 같은데, 참 그걸 여태 가슴 속에 넣고 끙끙 앓는 프랑스 사람들, 짠하다, 짠해.

  내가 읽기에 나탈리 사로트는 읽기가 곤혹스럽지만 그래도 소설이 좋았다…… 정말?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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