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죽음 열린책들 세계문학 49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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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잇! 2016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이런 엽기라니.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참 잘 쓴 소설인 거 같다(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인 거 같다'라고 함은 내가 전적으로 아마추어 독자이기 때문임을 감안하십사 하는 마음에). 근데 왜 에잇! 이냐 하면, 그래도 엽기는 엽기다. 거 있잖은가. 많고 많은 생명종 가운데 하필이면 인간종으로 태어나 자연스럽게 체득한 바람(희망), 다른 건 몰라도 주검에 대해서는 경건해지고 싶고, 사실과 달리 지금 내 앞에 놓인 주검은 살아생전 그가 실제로 저지른 죄악이나 범죄의 양과 질보다 훨씬 선량했을 거 같고, 죽은 몸체 안에 있었을 영혼이란 것이 비록 뇌의 회백질에서 발생하는 화학작용이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차게 식은 몸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 불멸의 삶을 시작해야할 거 같고, 그리하여 전적으로 인간의 뇌활동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래서 실제로는 지구 40억년 히스토리 가운데 한 번도 있지 않았던 하느님의 오른편으로 날개를 단 천사가 보필해 날아올라야 할 거 같은 그런 바람, 기대, 희망, 선의, 심지어 당연한 믿음까지. 이 책을 읽으면 초장부터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기대, 희망, 바람, 선의, 개뼉다귀 같은 건 말짱 도루묵이 되어버리고 만다. 실제로 죽으면 만 24시간이 되기 전에 장례지도사의 손에 의하여 비싼 에틸 알콜 대신 공업용 메틸 알콜로 전신이 닦여지고, 얼굴엔 진한 파운데이션으로 죽자마자 생기기 시작한 죽음의 반점이 지워지고, 몸의 구멍이란 구멍은 메틸 알콜을 흠뻑 적신 솜뭉치로 단단히 메꿔야 하는데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전에 몸에 쌓여있던 부산물 혹은 노폐물 등 하여간 몸 밖으로 내보내기로 약속되어 있던 모든 물질을,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줄줄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짐 크레이스는 이 책을 통해 사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굳이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죽은 후에 관한 모든 진실을, 아 썅, 다 까발려버린다.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초로 또는 갱년기의 부부가 자신들이 30년 전에 처음으로 성적으로 관계했던 인적 드문 해변의 풀밭으로 찾아가 대낮에 또 한 번의 섹스를 나누고자 한다. 근데 나이 먹어 쉬운 일이야? 남자는 흐물흐물 영 힘이 없고, 여자는 바짝 마르고, 그게 인생인 걸. 불쾌까지는 아니고 유쾌하지 않은 수준의 부부관계가 끝났으면 얼른 얼른 옷입고 집에 가야지, 그렇지 않고 남자는 나체로, 여자는 반나로 서로 기대 앉아 은은한 노년의 사랑을 감각하고 있는 나름대로 아름답기도 한 순간, 한 손에 그러쥐기 마춤한 화강암을 손에 든 죄의식 없는 악당 하나가 살금살금 뒤로 접근, 여자의 정수리와 얼굴을 일곱 번 강타하여 오른쪽 두개골이 화강암에 의하여 박살이 나고 허연 뇌수가 줄줄 흘러나와 곧바로 죽음에 이른다. 악당은 곧이어 남자에게 접근, 그의 가슴 부위를 수십번 화강암으로 강타해 갈비뼈와 쇄골 등이 부러져 내장기관을 마구 찔렀으나 반 시간 정도 가는 목숨을 이어가다가 이미 죽은 아내의 발목에 손을 댄 채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이게 책을 들추면 거의 곧바로 나오는 장면. 아, 지금 생각하기만 해도 속이 다 니글거리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을 잘 쓴 소설이라고 했으니 참 성격이 좋다고 해야하나 뭐라고 해야하나. 소설은 죽은 다음 두 시체가 변화하는 과정을 시시각각 새, 쥐, 게 등 한 글자로 된 생명체에 의하여 훼손되는 걸 상세하게 설명하다가, 조금 더 부패가 진행되면 파리, 애벌레 등 시신을 파먹고 사는 생물 등을 설명하기도 하고, 시신들이 죽어 자빠질 때 하필이면 그 밑에 깔린 식물들의 생장에 관해서도, 결코 시신을 먹이로 삼지 않는 곤충이 인간 시신에 깔려서 빠져나오는 장면 까지 읽다보면 마음 좋은 당신도 이 소설의 지은이 짐 크레이스를 향해,아 이 드런 새끼, 한 바탕 욕을 하지 않을 수 없을.....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독후감 중간 중간에 잘 쓴 소설이라고 주접을 떨곤 했는데, 왜 그런고 하니, 젊지도 않은 노인 시체 썩는 거만 소설 속에 있을까? 물론 그런 거 읽으면서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비위좋은 분들이 읽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서도 충분하게 이 책을 읽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게 뭔지 지금 좀 썼다가, 아 이런 거 써놓으면 분명 스포일러라고 생각해 얼른 삭제했다. 진짜다. 우린 재수없고 불행하게 다세포 생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불멸의 영광을 누릴 수 없다. 필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은 인간종이 멸망할 때까지 정말 온전한 필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거야? 나는 동의하지 않음. 내 새끼, 새끼의 새끼.... 뭐 이런 식으로 나와 당신은 불멸을 진행하고 있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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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 양장본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끼 지음, 김규종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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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직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한 권을 낳기 위한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키의 삶은 뜨겁고 짧았다.”
이 책을 번역한 김규종은 책 표지의 뒷면에 이렇게 썼다.
일찍이 빠벨 꼬르차긴의 삶보다 더 치열한 그것은 보질 못했다. 20세기가 이제 막 그 폭풍을 열기 시작한 1904년, 우클라이나의 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그의 창조주 오스트로프스키의 삶과 비슷하다. 다만 책에서는 소년 빠벨 꼬르차긴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1980년 초. 한반도의 남쪽에서 큰 기운이 뻗어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리하여 백가쟁명, 자신의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이 허용되기 시작했을 때, 한반도의 북쪽에 고향을 둔 작가들한테는 그러나 조심스레 자기 문학의 시발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 또한 허용되었나보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학적 토양이자 거름이 된 선배 작가들을 꼽으면서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를 입에 담았다.
오스트로프스키? 그 사람이 누구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북쪽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작가들이 감명을 받아 이미 귀밑머리 허연 늙은이가 되었을지언정 결코 잊지 못하는 한 편의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도대체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는가. 그 서슬 퍼런 반공의 세월 속에서 말이지.
그러나 그 작품의 내용도, 줄거리도, 하다못해 경향도 알지 못하면서 금강석의 강도로 대뇌에 박혔던 책의 제목,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누군들 강철이 어떻게 단련되는지 모르지 않을 터. 섭씨 천 도를 넘나드는 불길 속에서 벌겋게 달궈지고, 모루에 얹혀 쇠망치로 두드려 맞으며 깡깡깡…. 귀 속의 달팽이관을 통한 파장이 등뼈 까지도 저리게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비명을 질러야 비로소 강철은 나관중의 입을 통해 청룡언월도가 되고, 앙드레 말로의 펜을 거쳐 중국 혁명 당시 한 무정부주의자의 암살용 권총이 되며, 신경림의 노랫가락과 더불어 땅을 파는 쟁기며 호미가 되는 것.
그러니 책의 내용은 한 불굴의 투사가 징글맞게 끈질긴 시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투쟁을 전개해나가거나, 아니면 처음에는 비록 소시민적 안온함에 길들여졌던 사람이 시련을 통해 강인해지는 내용일 거라 짐작 정도는 했을 거였다.
그렇게 10년 여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혼자 흐르지는 않는 법. 인간사, 인간사들이 모인 세계사도 세월에 맞춰 유구하게 흘러가는데, 세상에나 누가 상상이나 했었을까. 1989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어느 순간 무너지고 그 잔해 위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하더니 이윽고 100년을 지켜오던 볼셰비키가 끝장이 나버렸다.
한반도의 남쪽에서 80년대에 청춘을 비켜간 사람들의 정신적 공황은 한 여류작가로 하여 등푸른 생선을 생산하게 만들고, 그 등푸른 생선 때문에 장안의 종잇값이 천정을 모르게 치솟기 바로 전, 비로소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오스트로프스키의 유일한 작품 <강철은….>의 번역과 출판을 허용했다.
어찌 서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 읽었다, 하면 붙잡혀가는 책의 명부에 이름이 올라갈지 모르는데. 너나 할 것 없이 이 책의 한글판을 읽을 수 있다면 일숫돈도 아깝지 않았을 터. 아… 빠벨 꼬르차긴.

 1980년에 한반도의 남녘에서 있었던 대단히 불행한 사건. 그 사건을 토대로 무수한 문학작품을 우리의 현대사는 만들어냈다. 홍희담의 불꽃 같은 소설 <깃발>을 떠올리며 혹시 홍희담은 지하, 그러니까 당시 언어로 말하자면 언더에서 그는 오스트로프스키를 읽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분명 그러하리라 단정한 사람은 비단 하나 둘이 아니었을 거다.
그렇게 빠벨 꼬르차긴은 치열하다. 그리하여 빠벨 꼬르차긴에게 볼셰비키와 소비에트는 종교.

 그리고 또다시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다시 읽는다. 무릇 세월 앞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법이거늘 15년 전의 빠벨 꼬르차긴이 오늘의 그와 과연 다를 것인가.
빠벨은 그대로이지만 시정이 변했구나. 오늘 이 땅의 노동자들을 보고 빠벨은 통탄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헌신에 대한 보람을 얻겠는가. 타락한 노동이여, 타락한 노동자여.
그는 한반도 남쪽에 유령으로 내려와 2006년, 어떤 지양점을 가리킬 것인가. 혹시 100년 전의 자본가보다 더 탐욕스러운 노동을 보지는 않을지, 그래서 속 깊은 울음을 처음으로 울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읽기 전에 관련된 정보의 모든 것을 차단하시기를…. 신문서평은 물론이요, 하다못해 책 표지조차 읽지 말고 곧바로 첫장을 넘기기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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