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스피에르의 죽음
서준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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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준환의 장편소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을 읽은 건, 언젠가 좀 오래전에 이 책에 대한 신문서평을 읽고 한 번 읽어봐야겠다 마음 먹고 있었던 것이라서. 나름대로 신선했던 것이 한국인이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 시절 끝무렵을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서술했다는 점인데, 파리에서 오래 거주한 경험이 없는 한국의 작가가 타국의 일정 장소를 무대로 자연스럽게 글을 쓰기란 사실 좀 무리. 아니라고? 정말일 걸? 책을 읽는 내내 독자를 좀 답답하게 만든 건 다름아닌 '공간적 폐쇄성'. 서준환은 파리의 장소들, 예를 들어 팔레 루아얄, 생제르맹, 샹 드 마르스, 에투알, 뤽상부르, 몽파르나스, 생 루이 섬, 마레, 테른, 오페라, 마들렌, 몽소1 등등을 원고지 또는 PC 화면 위에서 산보한 경험적 익숙함은 없었을 터라서 좀 심하게 과장하자면, 이야기의 공간적 제한은 독자로 하여금 감각의 폐색증을 유발할 지경까지 이른다. 이런 현상은 서준환 스스로도 아마 알아챘듯 싶었는데 왜 내가 이렇게 추리하느냐 하면, 작가는 매우 영리하게도 소설을 다분히 희곡 형식을 차용하여 썼기 때문이다. 작가가 스스로 공포정치 와중의 혼란과 음모와 권력을 뒤집기 위하여 여러 집단들이 파리 각처에서 자신들의 이해에 의해 이합집산하는 광경을, 같은 이방인이라도 시간적 공간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두 도시 이야기>를 쓴 찰스 디킨스 만큼 묘사할 수 없음을 일찌감치 알았기 때문에 마치 희곡을 읽는 듯한 느낌이 나도록 쓰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소설은 거의 다 대화 또는 독백, 방백 등으로 이루어진다. 공포정치가 끝나고 파리지역 보안사령관으로 재직중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시내 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의 취미인 인형극 관람을 하는데 인형극이 바로 이 책의 제목처럼 로베스피에르가 죽는 장면을 담고 있는 것. 그러니 희곡 형식이라도 연극이 아닌 인형극이고, 또 정확하게 말하자면 희곡을 읽는다기보다, 인형극을 보는 사람이 극의 모든 장면을 글로 써 놓은 것같은 느낌이다. 연극이나 인형극이나를 막론하고 무대극은 어차피 공간적 제한으로 인해 장면이 한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고 그리하여 서준환은 로베스피에르가 죽음에 이르는 며칠을 각 장소, 실내나 한 골목 등의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연결로 쓸 수 있었다.

 참 좋은 시도, 그리고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걸로 끝. 서준환 스스로가 게오르크 뷔히너의 희곡 <당통의 죽음>을 읽고 이 책을 썼다고 했다는데, 나도 그걸 먼저 읽어볼 것을 그랬다. 어디가 서준환으로 하여금 그리 매력적으로 받아들이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로베스피에르를 탄핵한 혁명공회의 결정을 만들어낸 복잡다단한 음모와 사건들을 가볍게 처리한 대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궁금증, 과연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것이 진짜 로베스피에르인가, 로베스피에르는 체포 직전에 권총자살하지 않았는가, 하는 단순한, 그리고 그거나 저거나 사실 별 중요하지도 않은 질문의 해소에 그리 관심을 두었는지 참... 오리무중이다.

 물론 프랑스 혁명을 보는 작가의 시각에 관해서는 동의 비슷하게 하지만, 거기다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그동안의 호기심이 없어 그의 진심이 서준환이 말한 것과 같은지, 비슷한지 잘 알지 못한다. 로베스피에르를 문학적으로 다시 조명한 것은 어떤 면에선 바람직하고 마땅히 그래야 하겠다. 이것에 대하여 지리적이니 문화적이니 하고 까탈을 잡는 건 지금시대에 덜 떨어진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의 작가처럼 무대뽀로 작품의 주인공을 정의파, 진실남, 의리의 사나이, 고뇌하는 혁명가, 야심가가 아닌 인민을 향한 애정남으로 전력을 다해 설득하려고 하는 건 동의하지 않음.

 일독을 하시든 마시든 알아서 하시고, 다만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책을 읽으면서 난데없이 공간적 폐쇄 공포 같은 걸 느낄 수 있다는 점은 감안하시압.

 

 


1. 파리 시내 각 지명은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 (펭귄 클래식 코리아, 2011) 21 쪽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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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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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식 탐미주의 작품.

 이렇게 딱 한 줄로 독후감 끝내려고 마음 먹었었다가 에이 씨, 좀 더 써야겠다. 내가 졸업한 중학교에선 1학년 딱지 코딱지들은 박박 깍은 대가리를 받친 검은 교복 목 둘레 빳빳한 깃의 오른쪽에다 영어 알파벳 "F"자를 붙이고 다녔는데 그건 아메리카의 대표적 욕설 Fuck의 F가 아니라 1학년 딱지 코딱지를 일컫는 Freshman이란 뜻이었다. 2학년은 "S"orphomore, 3학년은 "T"hird. 이렇게 아주 지랄을 했다 지랄을 해. 어디? 지금은 잊힌 당대 최고 문화유적지 미아리 텍사스 바로 옆에 위치한 당대 최고 명문 가운데 하나 서라벌 중학교. 거기 1학년 다닐 때 집구석은 바야흐로 거덜이 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방바닥엔 책꽂이에서 뽑은 책들이 함부로 나뒹굴었다. 원래 주인 없는 집구석이 다 그런 법이다. 어느날 그중에 제목이 하도 그럴싸해 책꽂이가 아닌 방바닥에 시체처럼 널부러진 거 한권을 골라 읽어봤으니 이름하여 <금각사金閣寺>. 어땠느냐고? 벌써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는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는가. 내용까지 완벽하게 깜깜한걸. 하여간 그래서 미시마 유키오란 이름이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았던 것.

 세월이 흘러 한 우라질 도둑년이 대한민국 소설판에 등장해 소위 "즐거움을 아는 몸" 운운해 다시 미시마 유키오란 이름이 세간에 회자되고 난 그제서야 그의 진짜 모습을 구글에서 검색해봤다.

 

 

 윽, 미시마 유키오가 이딴 새끼였어?

 난 책을 한 방에 좀 많이 사서 몇 달을 두고 읽는 습관이 있다. 이번 2월까지 읽으려 작년에 책을 살 때 몇십권을 사는 와중에 설마 이 미시마 유키오인줄 잠깐 잊고 수중에 들어온 책이 <가면의 고백>. 정확한 정보라고 보기엔 좀 무리가 있지만 하여간 문학동네의 책소개를 보면 작가 스스로의 고백문학이어서 미시마를 연구하기 위한(아, 씨바, 한국사람이 굳이 이새끼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면 말씀이야) 중요한 책이라고 했다. 그 말을 믿는다면 미시마 유키오 이 작자는 어려서부터 선병질적으로 허약한 신체와 그 컴플렉스를 덮기 위한 자의식의 과잉으로 유소년 시절과 청춘을 소비해버린 작자라고 할 수밖에 없다. 비정상적일 정도의 미美에 대한 과잉반응. 일단 아래 사진을 먼저 보시고.

 

 

 귀도 레니가 그린 <성 세바스티아누스>인데, 화살을 맞고도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며 오직 하늘, 즉 기독교의 하느님을 올려다보는 미남자의 육체를, 아버지의 화첩에서 처음 본 순간, 미시마 유키오는 태어나서 첫 사정射精을 하고만다. 청소년기 미시마의 남자를 향한 성적 취향을 빗대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동성애는 젊은 시절 그의 취향이고 난 절대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이니까 그건 별문제가 아니고, 정작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세상의 어떤 남자도 위와 같은 시각 정보 하나 가지고는, 그림 속 남자의 몸이 정말 아름답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사정에 이르지 않는다는 점. 근데 미시마는 그랬다고 고백을 한다. 난 비록 그 말을 소설적 허구라고 보지만 또 혹시 아는가 정말 그랬을 줄. 그러니 미시마는 허약한 선병질적 체질을 보완하느라 미적 감각이 과잉분배된 그런 인류인 것 같았다.

 그런 인류가 쓴 소설이니 미적 감각 하나는 확실하다. 그건 내 말을 믿으셔도 좋을 듯.

 그가 군국주의자로 변하여 1970년인가 언젠가 위 사진처럼 기다란 사람 백정의 칼을 들고 설치다가 함부로 휘두른 끝에 자기 배를 푹 쑤셔 죽은 건 자기 마음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이제 내 생각 속의 미시마는 그것마저 자신의 청춘시절을 지배했던 미감각의 과잉집착이 만들어낸 변태짓이 아니었을까 궁금하다.

 책을 읽어가며 미시마 이 작자가 쓴 아래의 결정적 문장들이 눈에 들어온 순간, 난 치명적으로 미시마 이 썅노무개새끼한테 질려버렸다.

 "나는 그(일본의 항복을 전하는 영문 호외) 복사본을 받아들고 다 읽기도 전에 사실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것은 패전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를 부르르 떨게 만드는, 게다가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자신을 속여왔던 인간의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이제 어쩔 도리 없이 내일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193쪽

 왜 일본 열도의 지식인들은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동아시아 침공에 관한 (반성이나 참회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진정한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지 난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다못해 자국 국민 수만명의 목숨이 죽어간 전쟁이 패전으로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시마 유키오의 뇌 속에는 지긋지긋한 일상생활이 다시 펼쳐진다는 것 말고는 없다. 웃기지? 그러나 내 생각을 굳이 밝히자면, 미시마 이새끼의 전쟁과 패전에 대한 인식수준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처참한 인식수준을 보상하기 위해 급진적인 군국주의자로 변신했을 수도 있다는 거.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미시마 이새끼야말로 천하의 개잡놈이다. 할복자살로 끝내 자신의 우화를 마감한 전후 퇴폐미의 전령. 참으로 개잡놈이다. 그리고 이 개잡놈의 글을 그대로 배껴 쓴 대한민국의 잡년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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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23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 사진에서 뿜었습니다. ㅋㅋ 극혐사진이네요. 우욱.... 정말 이 작가의 문장을 표절한 그 작가는 참....

Falstaff 2017-01-23 12:47   좋아요 0 | URL
저하고 친한 인터넷 친구 가운데 한 분 들려준 얘긴데 어디서 저 윗사진을 보고 ˝완전히 게이 포르노 DVD 표지˝라고 촌평해놓은 걸 봤답니다. ㅋㅋㅋㅋ
전 소위 문학소비자, 즉 독자로서 ‘표절‘이야말로 아무리 큰 속죄를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문학적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이거든요. 에구 밥 잘 먹고 또 이런 쪽으로 얘기나오면 ㅎㅎㅎ 입 험악해집니다. 이쯤해서.... ㅎㅎ
 
풀 먹는 가족 1
모옌 지음, 박명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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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판사 랜덤하우스 코리아에서 만든 책의 띠지를 보면 "21세기 중국 최고의 천재 작가"라고 설래발을 쳐놨는데, 그걸 약간 심술궂게 해석하자면 모옌이 1989년, 20세기에 쓴 이 소설은 절대 중국 최고도 아니고 그때 까지 모옌 역시 천재가 아니었다는 거 (물론 아직까지도 천재는 아닌 거 같다). 이거 말 돼? 아시다시피 모옌이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87년이라면 마오가 죽고 강청을 비롯한 사인방이 체포됨으로 해서 개같은 문화혁명이 드디어 종말을 고하고 10년 세월이 지났을 때다. 이 10년 세월동안 중국의 소설판은, 나도 물론 들은 얘기에 불과하지만, 문혁 당시의 생경한 공산주의 문학, 문혁 이후 문혁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한 리얼리즘 문학(이 부류에 내가 경애하는 다이허우잉이 포함되는데 평론가들은 불경스럽게도 '상흔문학傷痕文學'이라고 부르나보다)으로는 중국개방 이후의 넘쳐나는 분위기를 더이상 담을 수 있지 않기 때문에 토속 전설, 노변爐邊의 옛이야기, 신화 등을 사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되지도 않는 이바구를 슬슬 풀어놓는 거 같다. 며칠 전에 독후감 썼던 나이지리아 작가 벤 오크리의 <굶주린 길>. 기억나셔? 어떻게 그렇게 두 소설가가 똑같은 말을 들을 수 있는지. 평론가들이 짠 거 아냐?

 실제로 작품해설에서 역자 박명애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므로 현실적 리얼리즘이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는, 소설이 설 자리를 잃고 사라져가고 있던 시대에 모옌은 산둥성 까오미 둥베이향의 황무지를 개간해, 아득히 먼 과거 속으로 숨어버린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를, 오늘을 살아가며 날마다 갈등하는 '나'의 일상생활과 접목해 이야기가 앞으로도 쉬지않고 계속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2권 367쪽

 박명애, 아쭈, 웃겼어. 인류가 이야기, 즉 소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현실적 리얼리즘이 발을 붙일 수 없는 시대는 없었고, 마찬가지로 소설이 설 자리를 잃고 사라져가고 있던 시대 역시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박명애는 문화혁명을 이야기하고 있던 거 같은데, 천만의 말씀. 이야기를 만들고 그걸 남한테 들려주고, 또한 써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건 불행한 호모 사피엔스의 본능이고 구석기시대 이래로 인류 가운데 불행한 본능 또는 유전자를 지닌 직립보행인은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다. 그들이 입과 펜을 멈췄다고? 아니다. 다만 그걸 듣고 읽어본 사람이 지극히 적었을 뿐. 근데 그걸 모를 리 없는 박명애가 왜 이렇게 썼을까. 헤, 당연하지. 자신이 번역한 책 자기가 광을 내야지 누가 대신 해주겠어. 안 그랴? 이해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얘기. 듣는 사람이 감안해서 들어줄게.

 책 속에 써있다. 모옌이 윌리엄 포크너와 가브리엘 마르케스에 경도됐었다고. 아메리카의 환상문학의 영향을 받아 이런 소설을 썼다고, 독자가 알아채게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는데, 아참. 이런 얘기 꺼내기 전에 이 책 <풀 먹는 가족>이 어떤 내용인지를 잠깐 얘기해야겠구나.

 '풀 먹는 가족'이란 베지터리안, 채식주의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모옌의 마음의 고향, 산둥성 까오미 둥베이향에 띠풀을 약 1인치 가량으로 자른 다음 잘 볶아서 입에 넣은 다음 줄기차게 씹어 드디어 섬유질이 다 삭아 흐물흐물해지면 꿀꺽 삼키는 행위를 집안 내력으로 하는 가족을 말한다. 거친 띠풀을 씹으면 섬유질이 마찰해 이와 잇몸을 강화시키고 입냄새가 없어지며, 그걸 꿀꺽 삼키면 역시 거친 섬유질이 대장 내에서 습기를 충분히 머금고 원활한 운동을 유발해 영낙없이 바나나처럼 생긴 쾌변을 만드는데 바나나 닮아 굵고 길고 노란 황금색의 물질이 인간의 막창을 뚫고 드디어 대기를 호흡하는 순간 거친 섬유질이 바로 그 막창을 간질간질 자극하며 인간에게, 아니, 풀 먹는 가족의 식구들한테 지구상 어느 가족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자지러지는 쾌감을 준다고 한다. 참으로 아쉬운 건 이 가족들 사는 곳이 산둥성에서도 아주 격리된 오지에 자리잡은 늪지대로 혼인을 통한 인류의 이동과 교환에 참가할 기회가 별로 없어 누대에 걸친 친족 내 결혼으로 말미암아 독특한 문화를 만든 것은 그렇다치고 독특한 신체구조를 가지고 태어난 구성원도 많았으니 바로 손과 발에 물갈퀴가 돋은 채 태어나는 것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어디서 한 번 본 거 같으셔? 모옌이 평소 존경해마지 않았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은근히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나 싶다. 근데 내 말 믿을 필요 없다. <백년....> 읽어본지 하도 오래라.

 이쯤에서 앞 문단에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을 계속하자면, 그들의 영향을 받아 환상소설을 썼고 이것도 그 일환으로 본다는 건데, 참나. '환상'을 이유로, 그걸 깔고 하고싶은 얘기 다 하겠다는 일념하에 인류를 죽이고, 죽이는 것도 모자라 팔 다리 자르고 산 채로 눈알을 파고, 여태 살아있는 할멈의 살코기 네냥을 떼어 가지고 가서 삶아먹고.... 이런 것들이 다 환상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허용을 해도... 아니지, 허용 못할 건 없지만, 굳이 장면을 세세하게 묘사해야만 모옌이 하고 싶은 얘기를 성공리에 다 할 수 있었다는 건 동의하기 쉽지않다. 그리하여 읽는 내내 심정이 불편하고 소설적으로 읽는 재미가 분명히 있을 텐데, 내 기호상 너무나 극적으로 맞지 않아 읽는 내내 불편한 심정이 극을 달해 참 어렵게 읽었다. 그리고 기어이 본전 생각났다. 본전이 뭐냐고? 본전 = 책값.

 하지만 분명히 밝혀야 할 점이 있다. 이건 전적으로 내 취향의 결과다. 하드코어 좋아하는 분들은 너무 재밌어 뒤로 자빠질 수 있겠다는 거. 그건 밝혀야 공정할 터.

 또 하나 분명히 밝혀야 할 점. 군데군데 교정, 교열이 개판이다.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도 보이고 철자법도 개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그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군데군데. 이런 개판 무인지경의 책을 만드는 랜덤하우스코리아, 요새 이름을 RH Korea, 몽땅 영어로 바꾼 걸 보니까 이젠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려는 모양인데, 그나마 다행인 건 절판 상태인 이 책을 다시 간행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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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3
피에르 드리외라로셸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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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들의 견해는 잘 모르겠고, 나는 하여간 괜찮게 읽었다. 한 헤로인 중독자 이야기.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단 치료를 받고 있지만 중독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필요도 사실 별로 없어 보이는데 가진 거라고는 잘 생긴 외모 한가지. 그것도 이제 나이들어 별 볼일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여자들이 끊이지 않아 그들한테 얻은 현금을 기꺼이 술과 마약과 호텔비를 충당하는 잡놈이자 기둥서방이자 양아치이자 쓰레기, 좋은 말로 해봤자 다다이스트. 세상에 뭐 한 가지 자기 인생의 전부를 바쳐 이루고자 하는 것도 없고, 이루기는커녕 파리의 대로변과 골목, 길이란 모든 길마다 심장의 바리케이트가 쳐져 가는 곳마다 덜거덕거리고, 진정한 숙녀들은 하나 빠짐없이 전부 목마를 타고 떠나가 황량하기 그지없는 1차대전 전후의 파리 젊은이들.

 참 아름다운 문장과 광경으로 도배를 했을지라도 전후 (전승국)프랑스 수도에 돈 좀 있는/있었던 집구석 자재분이 아무 걱정없이,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기론 세상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진 것처럼 엄살을 떨어가며 술과 히로뽕에 절다가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 발걸음을 떼는 이야기.

 소설은, 다시 말하지만 전후 퇴폐와 허무 같은 것이 진짜로 잘 묘사되어 읽는 도중 빨간 색연필로 밑줄 좍 긋고 싶은 곳이 수다했을 정도로 아 참 때로 가슴 시리게 잘 읽었다. 그러면서 기어이 이 작품을 폄훼하고자 하는 건, 작가 드리외라로셸의 진짜 생각은 이 책에서도 볼 수 있는 전후 불안과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유럽에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고 외곬로 치달았으며, 그리하여 파시즘에 동조를 했고, 심지어 나치한테 협력하기에 이르러 나치의 멸망을 앞두고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해서다. 그래서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드리외라로셸이 이 책에서 말했던 건 역설적으로 파시즘 혹은 히틀러 나치에 동조하기 위한 전초로 기능하기 위해서, 라고, 아닐 수도 있고 아닐 확률이 90%를 넘겠지만 나로하여금 그렇게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작가가 진정으로 쓴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

 근데, 나치에 협력했던 작가는 음독자살했는데, 일제에 부역했던 (구)조선의 작가들은 어찌해서 한 평생 잘 먹고 잘 살았지? 이게 진정한 자존심이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의 차이 아냐? 에이, 아님 말고. (나도 지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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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19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이나 묘사가 아름다워서 밑줄 그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가슴 시리다는 표현이 적절하고요. 루이 말의 동명의 영화 <도깨비불>도 참 좋았습니다. 에릭 사티 음악하고 정말 잘 어울렸거든요.

Falstaff 2017-01-19 12:36   좋아요 0 | URL
아, 영화도 있었군요. 사티...라면 물론 피아노 곡이겠고요. ㅎㅎㅎ 검색 한 번 해봐야겠습니다.
 
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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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아이들 책꽂이에 꽂혀 있어서 걍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 쥐스킨트라고 하면 일찌기 <좆머 <좀머씨 이야기>가 좋다고 한밤의 이명耳鳴까지 들리길래 사 읽어봤더니, 하이고 참 나, 그딴 걸 달러화貨 또는 마르크화 혹은 유로화로 인세까지 지불해가며 읽는 대한민국의 문화수준, 참으로 경악스러워서 다신 쥐스킨트 읽나봐라, 각오를 했건만 이왕 내가 뼈빠지게 번 돈으로 새끼들이 사온 거 그거 읽지 않는 것도 심각하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어쩔 수없이 그것도 휴일에 시간을 내 읽어봤다. 결론? 뭐겠어, 걍 버킹엄이지. 시간 베렸다. 참 우리말 재밌다. '버렸다'라고 쓰는 거 하고 '베렸다'하고 쓰는 고 아슴아슴한 차이란.

 18세기 초중반 세계적으로 가장 냄새나는 시궁창 파리의 생선 좌판. 생선내장에서 발산하는 비린내가 진동하고 썩은 비늘이 질척거리는 진흙탕 위에 부유하는데 대구 내장을 손질하던 20대 중반의 여인이 다섯번째 아이의 출산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진통이 시작되자 그의 후각으론 아무런 악취도 틈입할 수 없었으니 그렇게 진통의 강도가 그의 모든 혼을 빼놓고 있었던 거다. 드디어 다섯째 아이, 아들을 출산한 그는 여태까지 네번의 출산과 마찬가지로 생선 피와 내장 찌꺼기가 묻어 있는 칼로 아이의 탯줄을 잘랐고, 언제나 죽어서 나오거나 반쯤 죽어나오던 아이와 같겠거니 싶어 아이를 생선내장 부산물 더미에 버렸고 그때까지 녹슬었지만 날이 시퍼런 칼을 손에 쥔채 까물어치고 말았다. 상인들이 서둘러 여인을 둘러싸고 비슷한 시간에 쓰레기 더미를 한꺼번에 쓸어버리려는 순간 생선 내장과 비늘과 대가리와 뼈들 사이에서 갓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하여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맞이한 막다른 생의 골목에서 극적으로 구조되었고 아이의 어머니는 며칠 후 그레브 광장에서 참수됐다.

 쥐스킨트. 웃겼다. 18세기, 1738년에 비천한 신분의 영아 살인자한테 참수형? 단번에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참수형은 형을 집행하는 입장에서 상당한 관용을 베푸는 일이며, 비싼 임금을 주어야 하는 집행인 및 참수대 설치와 시민관객들의 호응을 이끌 수 있어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선 장사꾼도 아니고 생선의 배를 따는 일을 하는 여인한텐 부르봉 왕가는 결코 참수형의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 거라는 걸 쥐스킨트가 몰랐을까? 하여간 좋다. 중요한 건 아이를 낳자마자 어미가 죽었다는 거니까.

 하도 악취가 심한 곳에서 태를 끊어 그랬던가? 이 아이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는 날 때부터 체취없는 인간이었으며, 우리가 흔히 아는 절대음감 비슷하게 절대후각을 지니게 되었는데 성능 또한 대박이라 공기중에 분포해 브라운 운동을 하는 분자를 집어내 후각 정보로 만드는 능력이 개코보다 10만 배 가량 발달했다는 것이 이 책의 전제사항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잘 하면 흥미진진한 소설이 될 수 있겠다 싶었던 거다. 근데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이하 "<향수>")는, 물론 내 경우에 그랬다는 거고 내 의견이 절대로 보편성을 지닐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얘기해서, 이후 흥미진진한 엽기소설로 치닫고 만다. <향수>는 곧바로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가 이런 저런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끈질긴 인내와 후각천재성으로 그의 주특기인 냄새를 통해 인류를 정복하는 과정을 꾸며내는데 전력을 다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내가 시비하고자 하는 건, 어떻게 된 인류가 말씀이지, 여기서 '인류'라고 하는 건 이 책의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를 일컫는 건데, 자신의 모든 행위와 행위 뒤에 따라올 후속의 것들에 대해 조금도 의심을 품거나 회의를 하거나 하다못해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 물론 전제가 그렇다. <향수>의 주인공 그르누이는 감정도 없고 사랑도 없고(하다못해 '수컷의 꼴림'도 없고), 사색도 없고, 말 그대로 냄새 빼고는 아무것도 그의 관심이 아닌 거다. 그래서 하는 일이 기껏해야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십대 아가씨들 스물 다섯명의 목숨을 빼앗고 아가씨들의 사랑스런 체취를 훔쳐 세상 유일의, 최강의 사랑의 향수를 만들어 모든 인간들을 지배하는 거? 하이고, 됐네, 됐어.

 내 책장에 쥐스킨트는 더 이상 없을 거다. <향수>. 읽자마자 얼른 아이들 책장에 다시 꽂아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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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18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쥐스킨트 책은 제 돈 주고 사본 적은 없습니다! 하하하. 한국에서 유독 인기있는 외국 작가들이 몇 있는데... 그중 쥐스킨트가 가장 거품 아닌가 싶습니다;;

Falstaff 2017-01-18 10:42   좋아요 1 | URL
예, 거품은 거품인데 아 진짜, 짜증까지 난단 말입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