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을 뛰어넘는 사람 대산세계문학총서 97
페터 슈나이더 지음, 김연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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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두 번째 읽는 슈나이더. 재작년에 <에두아르트의 귀향>을 재미있게 읽고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한 권 더 읽은 것. <에두아르트의 귀향>이 1999년 작품이고,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이 1982년에 출간되었으니 두 작품 사이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독일 현대사의 거대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앞서 읽은 책엔 통일 후 생각지도 못하게 동 베를린 지역의 한 건물을 상속받아 상속건물을 방문한 에두아르트가 그동안 비어있던 건물의 소유권을 주장해야 하는 아주 복잡한 얘기를, 격변기에 곳곳에서 끊임없이 도시개발 중인 동쪽 베를린의 모습을 그렸던 반면, <장벽을 뛰어넘는 사람>에선 불과 7년 후인 1989년 말이면 무너진 장벽 위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연주하게 될지는 꿈에도 모른 상태에서, 마치 등산가들이 산이 있어 산을 오르듯이, 장벽이 있기 때문에 장벽을 넘는 사람들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런 작품의 한계는, 장벽이 유구하게 서 있다면 슈나이더가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가 언제라도 효용이 있겠으나, 이미 장벽이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동독과 서독이 통일까지 되어버린 현재 상태에서 장벽으로 나뉜 두 체제에서 살던 인물들 간 묘하게 발생해버린 사고방식의 차이점 같은 것이 이젠 아무 의미가, 아니, 조금 양보해서 말하자면,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 하겠더라는 것. 적절한 비유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굳이 비교를 해서, 대한민국의 1980년대 후반의 첨예했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참여시와 서정시의 논쟁에서 당대엔 당연히 리얼리즘과 참여시 앞에서 상대편에 선 문학은 잔뜩 주눅이 들었었지만, 그리하여 시대를 넘어 유행하는 시인 기형도마저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라고 부채감이 잔뜩 든 유명 시를 썼지만 그때부터 38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살아남아 (평론가들에게는 별개로 하고)독자들로 하여금 보다 더 즐겁게 읽게 하는 것은, 모더니즘과 서정시인 것과 비슷하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을 읽자면, 분단 독일과 양쪽 독일인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선택, 서로의 차이점 같은 것들보다는, 당시 유럽인들이 생각하기론 세상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던 열전의 현장 베를린 장벽을 수시로 뛰어넘던 괴짜 인간들을 구경하는 것이 이 책을 보다 효율적으로 즐기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베를린 장벽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좀 보자.

 

 “서베를린을 에워싸고 있는 국경의 둘레는 총길이가 165킬로미터나 된다. 그중 106킬로미터는 장벽판의 꼭대기를 둥그런 모양의 도관으로 덮어 씌웠고, 55.1킬로미터는 금속 스탬핑을 해서 만든 창살 울타리로 둘렀다. 이 국경을 따라 260개의 감시탑이 서 있으며, 그 두 배나 되는 수의 국경감시병들이 밤낮으로 망을 본다. (중략) 동쪽에서 국경 분리선으로 가는 길은 부가적으로 내부 장벽에 막혀 있는데, 이 내부 장벽은 다양한 폭으로 간격을 유지하며 외부 장벽과 나람히 뻗어 있다. 내부 장벽의 발치에는 곳곳에 못을 친 나무판들이 놓여 있는데, 그 나무판에 박혀 있는 12센티미터의 철못들은 뛰어내리는 사람을 말 그대로 못박아버린다.” (56~57쪽)

 

 으시으시하시지? 근데 서베를린에 카베 씨라고 하는 40대 중반의 직업 없는 사내가 있었다. 이 양반이 장벽을 보니, 장벽 아래가 폐허지대인데 거기 폭스바겐 수송차, ‘수송차’니까 트럭일 것이고, 트럭이면 높이 또한 상당할 터, 눈이 번쩍 띄었던 거다. 그래서 볼 것 없이 냅다 달려 트럭 꼭대기에 발을 쿵, 딛어 도움닫기를 해서, 40대 중반인데 힘도 좋지, 장벽을 훌쩍 서쪽에서 동쪽으로, 뛰어 넘어갔던 거다. 서쪽 순찰대가 뒤늦게 탐조등을 비추고 난리를 부렸지만, 장벽은 꼭 동쪽에서 서쪽으로만 넘어가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한 카베 씨를 잡을 수 없었고, 난데없이 말 그대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서독 국민을 바라본 동독 정부는 도대체 카베 씨가 장벽을 넘은 이유를 알지 못해서 틀림없이 스파이일 거라고 짐작해, 고문까지는 하지 못하고 신문을 했다고 한다. 근데, 담 넘은 이유가, 정치적 의도도 없고 오직 자신이 원해서 넘어온 건데 그렇다고 동쪽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단다. 즉, 아무 생각 없이 넘어온 거다. 이렇게 동쪽에서 3개월 동안 잘 대접받고 벤츠까지 태워줘 서쪽으로 다시 ‘반환’된 카베 씨를 서독에선 아무런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단다. 베를린 장벽은 국경이 아니어서.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여행의 자유를 누린 것일 뿐. 카베 씨의 모험으로 밝혀진 것은, 장벽 뒤 모든 곳에 지뢰나 쇠못이 박혀있지는 않다는 것이 유일하달까. 어쨌거나 동쪽에서 잘 지낸 석 달 동안, 서쪽 은행 구좌에 그동안 한 푼도 안 쓴 사회연금이 꼬박 모여 있어, 그걸로 파리 여행까지 즐겼다는 거 아냐? 여기에 맛들인 카베 씨, 파리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훌쩍 넘어간다. 이번엔 동쪽에서 역시 3개월 동안 정신병원행. 3개월 지나 서쪽으로 돌아와도 또다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 그러나 역시 독일은 동서를 불문하고 민주주의 사회라서, 양심적인 정신과 전문의는 카베 씨한테, 지극히 정상이란 판정을 내린다. 이젠 카베 씨는 심심하면 도움닫기를 하는 단계까지 왔는데 몇 번이나 훌쩍 담을 넘었는가 하면, 무려 열다섯 번. 하도 열 받은 서독 정부(경찰 아니면 병원이겠지)가 카베 씨한테 도대체 왜 자꾸 담을 넘으려는지 물었다고 한다. 이에 카베 씨 왈,

 

 “집 안이 너무 조용하고, 밖은 너무 흐리고, 안개는 너무 짙고, 그리고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이런 생각을 하죠. 아, 다시 한 번 장벽을 뛰어넘어보자.” (38쪽)

 

 그냥 이유가 없는 거다. 위에서 얘기했듯, 에베레스트나 K2에는 죽자사자 왜 오르나. 거기 산이 있어서. 그래, 장벽이 거기 있어서 그냥 뛰어넘는 거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나보다.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반발해서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던 미국 등의 서방세계. 이런 시절에 그냥 밤 마실 가듯 아무렇지도 않게, 여차하면 자동화기에 벌집이 되든지, 12센티미터 대못으로 못 박혀 버리든지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냥 거기 장벽이 있어서, 서베를린의 개봉관에 가서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를 보기 위해서, 뛰어넘은 많은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 물론 다른 얘기도 좀 섞이긴 했지. 그 얘기는 하지 않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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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새로운 소송
페터 바이스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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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또 페터 바이스. 작년 5월에 길고 긴 장편소설 <저항의 미학>을 읽느라고 짧은 인생 마감하는 줄 알았으면 좀 알아서 삼가야 하는데, 터무니없이 책 욕심을 부려 <소송 · 새로운 소송>을 또 읽고 말았다. <저항의 미학> 3권을 보면 바이스가 카프카에 대하여 상당할 정도의 애착이랄까 관심이랄까, 를 가지고 있는 걸 눈치 챌 수 있어서, 아무리 바이스라지만 희곡이라면 일단 길이가 장황하지 않을 터이니 언제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읽어보리라, 작심을 했었다. 그때 작심만 하고 말았어야 했다. 어떻게 우연히 책 검색을 하다가 페터 바이스를 클릭 했었나보다. 그랬더니 고려대학출판부에서, 놀라지 마시라, 청소년문학시리즈로 이 <소송 · 새로운 소송>를 팔고 있는 거 아닌가. 아하, 청소년 문학이라. 흠. 이 정도면 뭐. 당연히 부담 느끼지 않고 사 읽었고, 코피 났다.
 이 책은 희곡 두 작품을 실었다. <소송>하고 <새로운 소송>. <소송>은 카프카의 동명소설을 연극으로 유사하게 만든 드라마. 바이스가 처음부터 소설만 쓴 것이 아니라서 희곡과 시나리오까지 두루 섭렵을 했다고 하니 스스로는 자연스런 일이라고 할 만하겠다. 그러나 1975년 브레멘에서 초연을 한 <소송>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그냥 막을 내려서, 어허 이거 봐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K를 주인공으로 작품을 써 1982년에 스톡홀름에서 초연하고 그해 5월 같은 도시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이때의 제목이 <새로운 소송>.
 1975년의 <소송>에선 카프카의 원작과 같이 K가 체포당하고, 체포당했으면서 일단의 사회활동은 계속해나가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경찰국가나 뭐 제도적인 국민 감시체제 등을 이야기하는데 <새로운 소송>에선 K가 체포당한 상태가 아니면서도 거대 카르텔 기업에 신체와 영혼을 구속당하는 것으로 묘사가 된다. 두 작품 공히 무대는 1923년 7월 3일, K의 서른 번째 생일 아침부터 1924년 7월 2일까지 만 일 년으로 되어 있다. 내가 이 책을 선뜻 손에 든 이유를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난 카프카의 <소송>을 그리 인상 깊게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조금 다른 시선으로 카프카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 진짜 이유다.
 그리하여 내가 진짜로 놀랐던 것은 바이스가 읽은 카프카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기로 한다.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내 눈에 띄었던 사실은, K를 끌어내려 결국 파괴하는 힘이란 전체적으로 보아 소시민성의 힘이란 점이었다. 그가 고통당한 모든 것, 그리고 절망적 노력에도 그가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은 부르조아 시민계급Bürgertum이 만든 완고한 편협성, 법률 그리고 광기의 영역에서 나온다. 가장 가까운 그의 주변 사람이란 소시민들이고, 그는 이들의 판단에 노출돼 있다.” (13쪽)


 당시 인텔리겐치아 계급을 대표하는 K를 체포하여 서서히 결딴을 내는 제일 궁극적인 힘은 소시민성이라는 거다. 부르조아(왜 ‘부르주아’라고 표기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내 청춘시절엔 흔히들 ‘부르조아’라고 부르기도 했다) 계급의 편협성과 법률, 광기의 영역을 깨서 물리치지 못하고 주저 앉아있던 당시 시민들의 운동성 미흡이 K로 하여금 파멸의 길로 몰아갔다는 시각. 왜 나는 카프카의 <소송>과 <성>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해 볼 마음도 먹지 못했을까. 물론 나는 카프카 역시 바이스하고 같은 심정으로, 그런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소설을 썼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텍스트를 읽고 그 속에 숨은 의미를 찾는 것은 독자와 평론가 고유의 권한이니, 나는 찍 소리 하지 못하고 바이스의 눈에 띄었던 진실에 대하여 온전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런 시각은 <새로운 소송>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는데, 어떤 장면인지는 직접 읽어보실 분들을 위해 여기서 밝히지는 않겠다. 하여간 <새로운 소송>에선 시민들에 의한 운동성과, 인텔리겐치아 K의 이들에 대한 동조가 분명히 드러나고, 이미 역사를 경험한 바이스 입장에서, 시민운동들에 대한 억제와 동시에, 카르텔 등 부르주아 계급이 만든 억압적 광기에 의하여 전쟁이 발발한다고 예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견은 결코, 절대 유일한 것도 아니며 이미 1910년대 말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 계속 거론되어왔던 것이라 새롭지는 않지만, 나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한 건, 중복해 얘기하는 것이 틀림없겠으나, 이 논조의 전개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프카의 것에서 가지고 왔다는 데에 있다.
 솔직히, 재미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을 한다면 글쎄 흥미는 느끼겠지만 굳이 가서 볼 정성까지 생기지도 않는다. 페터 바이스가 원래 그렇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면 되는 것이지 섣불리 따따부따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진짜 못 말리는 건, 고려대학출판부가 이 책을 “청소년문학시리즈”의 020번으로 냈다는 거. 하여간 대학하고 출판사 인간들 아는 척, 잘난 척 하는 거 보면, 무섭다,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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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톨츠 대산세계문학총서 124
파울 니종 지음, 황승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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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니종은 이름만 몇 번 들어본 작가. 문학과지성사(이하 “문지”)에서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나오자마자 보관함에 넣어두었으나 이름이 워낙 비까번쩍해서 감히 주문해 읽어볼 생각을 못하다가 2017년 1월, 이제야 읽은 바, 2014년 7월에 나온 책이 아직도 초판 1쇄다. 첫째는 문지가 문지답게 독자들이 읽건 말건 도대체 광고나 이벤트 같은 걸 멀리하는 저 구름 위의 출판사인 것이 이유일 거고, 둘째가 니종 역시 니종이라서 니종의 작품 중에선 그나마 읽기 쉬운 축에 든다고 해도 도무지 이걸 읽고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이라거나 하여간 어떤 종류의 찬사를 가져다 붙이는 인종들이 거의 없어서일 텐데, 사실 문지가 잘난 척하는 거 밥맛이 좀 떨어지기는 하지만 3년 반 동안 아직도 초판 1쇄가 팔리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여간한 독자들이라도 찾지 않을 줄 번히 알면서 실험적인 대산 시리즈로 계속 작품을 찍어내는 건, 솔직히 다른 출판사들도 본을 받아야 하며, 독자 역시 좀 사서 읽어줘야 우리나라 번역문학의 수준이 올라갈 거라는 덴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책인데 이리 설레발을 늘어놓느냐, 라고 궁금해 하지 마시라. 할 얘긴 벌써 다 했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써 놓은 책이다. 근데 이 <슈톨츠>가 니종이 1인칭시점이 아닌 3인칭시점으로 쓴 유일한 소설작품이란다. 책 뒤에 작품해설을 읽어보니, 작품의 주인공 이반 슈톨츠가 거의, 그러니까 전부 다는 아니고 거의 작가 파울 니종의 젊은 시절을 그대로 베낀 거더구먼.
 주인공 이름이 책 제목이다. 이건 낯설지 않다. 슈톨츠라는 스물다섯 살 먹은 스윗쩌란트 젊은이가 있었는데 김나지움을 졸업하자 홀어머니가 자신을 더 이상 지원해줄 수 없음을 당연하게 알아듣고 즉각 독립을 해 대학을 가는 대신 노가다 반년을 뛰더니 번 돈을 갖고 이탈리아 반도 장화 코 부분에 해당하는 부둣가 도시 칼라브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기골이 당당하고 근육에 지방질이 풍부하게 붙은 이탈리아 여인네한테 동정을 뗀 슈톨츠. 아줌마한테 위협을 느꼈는지 곧바로 나폴리로 행선지를 바꿔 거기서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머물다가 다시 스위스로 돌아온다. 어느 회사 도서관의 임시직 사서로 취직한 슈톨츠가 여러 명의 아가씨들과의 연애를 경험하다가, 기회가 생겨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해 낮엔 학교에 다니고 밤엔 야간 우체국에서 일을 하던 중, 남부 독일의 목사 따님과 엮여 결혼을 한 다. 고흐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남부독일의 숲가에 있는 외딴 농가에서 고흐를 연구한다는 핑계로 아내와 갓난 아들은 처가에 보내놓고 자기는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세월 죽이는 이야기. 이게 전부다. 정말이다. 아니, 아직 덜 얘기한 것이 좀 있긴 하다.
 전혀 이야기 감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모아, 주제theme가 만일 있다면 주제와 가까운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주제란 것도 그리 확실하지 않고 그냥 주인공 이반 슈톨츠가 아무 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을 한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건조하게 바라보는 것이 다다. 당연히 은유, 직유 같은 수사법도 없고, 형용사도 별로 나오지 않고, 문장을 윤택하게 꾸미려는 시도도 별로 보이지 않는, 그래서 오히려 현대성을 확보했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거의 완벽하게 외딴 농가에서 보낸 겨울 이야기가 책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그 중의 약 30%는 빈센트와 동생 테오도르(테오) 반 고흐 사이의 편지를 비롯한 주로 초기 그림 이야기로 채워져 있으나, 그래서 뭐 어쨌다고. 대강 그림은 그려지실 것으로 믿는다.
 난 지독하게 평범한 독자 가운데 한 명. 그리하여 이 얇은 책 <슈톨츠>를 읽으며 조금도 감명을 받지도 않았고, 전혀 재미있게 읽지도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은 읽어볼 만하다는 것이 정직한 내 의견이다. 살면서 언제나 재미있고 감동적인 책만 읽을 수는 없는 거 아냐? 한 번 쯤은 나하고 지독하게 맞지 않지만 읽은 다음에, 흠, 이런 것도 그럴듯한 소설이 될 수 있구나, 싶은 책도 일 년에 한 권쯤은 읽어야지. 많이는 말고. 안 그랴?
 오늘의 독후감에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작가 니종과 슈톨츠의 차이점에 관해선 써놓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으시겠지만 혹시 호기심 동하시는 인구, 아니 실례, 독자의 0.1%에 해당하시는 분들에게 행여 실례라도 할까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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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2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이거 사두기만 하고 아직 안 본 책인데, 언젠가는 읽겠죠- ㅎㅎ

Falstaff 2018-01-24 10:14   좋아요 0 | URL
^^ 건투를 빕니다.
 
운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
임레 케르테스 지음, 유진일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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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4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 이혼한 아버지와 새엄마하고 같이 살고 있던 열네 살의 소년 케비슈톄르시 죄르지. 이름부터 짚고 넘어가자. 헝가리 사람들은 우리처럼 성family name을 앞에 쓰고 이름을 뒤에 쓴다. 그러니까 케비슈톄르시 죄르지, 라고 하면 성이 케비슈톄르시, 이름이 죄르지. 그런데 임레 케르테스의 경우엔 헝가리 이름을 유럽식 이름으로 바꿔 쓴 것이다. 헝가리 식 이름으로 쓰자면 ‘케르테스 임레’. 내가 알고 있었던 케르테스는 역시 헝가리 출신 유대인 음악가, 케르테스 이스트반.
 하여간 1944년 어느 초봄, 죄르지 소년의 아버지가 노동 봉사대에 징집되어 출발해야 하는 전날을 아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 해서 조퇴를 허락받고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당연히 말이 노동 봉사대일 뿐이고 사실은 노동 수용소라 해야 마땅할 것임을 우리는 안다. 죄르지의 아버지 역시 가슴에 노란별을 꿰매 달고 다녀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자신이 운영하던 목재상의 거의 모든 권리와 귀중품을 선량한 헝가리인 직원 슈퇴 씨에게, “사업에서뿐 아니라 인생의 여러 다른 영역에서도 보장을 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증서도 받지 않고 그냥 맡긴 채 부다페스트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낸다. 역시 우리는 안다. 이날이 부다페스트에서 그의 진짜 마지막 날이 될 것임을.
 아버지의 지침에 따라 친엄마 대신 새엄마와 살던 죄르지는 여름이 되자 정유회사에서 노력봉사를 해야 하는 유대인 학생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된다. 학교 대신 전차 혹은 버스를 타고 셸 정유회사로 출퇴근하는 신세가 됐지만 승인 없이 시내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던 유대인 신분에서, 자유롭게 시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출입증이 생긴 건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하는 도로 위에서 버스를 세운 헝가리 경찰이 유대인들을 전부 ‘수집’해 기차를 태워 보낸다. 도착한 곳이 바로 아우슈비츠. 나는 새로운 것을 알아낸다. 아우슈비츠가 악명 높은 수용소인 건 알았지만 그곳이 강제노동을 시키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곳이 아니라, 노동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유대인만 추려서 노동 위주의 수용소로 다시 보내고 건강하지 않다는 (불편 혹은 장애를 포함해 노동하는데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판정을 받은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보낸 ‘중간 정거장’ 같은 곳이란 건 몰랐다. 이곳에서 자신의 나이를 두 살 올려 열여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해서 가스실 행을 피한 죄르지는 부헨발트 수용소와 차이츠 수용소, 다시 부헨발트를 거쳐 해방을 맞아 헝가리로 돌아온다. 이 과정이 케르테츠의 소년시대하고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 작품 <운명>은 분명히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소설의 스토리. 수용소 내에서 당한 구타와 굶주림 같은 것도 당연히 묘사가 되어 있고, 영양실조에서 시작하는 생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마음, 쉽게 감염되는 전염병 등도 당연히 등장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처럼 심심풀이 사격연습으로 살인을 하거나, 안나 제거스가 쓴 소설 <제7의 십자가>에서 독일 군 장교의 악랄한 고문의 장면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스필버그는 본인이 유대인이기도 하고(이건 풍문이다. 확증할 정도로 정확한 정보를 나는 갖고 있지 않다), 유대인이기에 앞서 흥행에 목숨을 거는 영화제작자이기 때문에 <쉰들러 리스트>에서 붉은 옷을 입은 소녀의 죽음을 상징으로 학살의 장면을 적나라하게 그렸을 것이며, 안나 제거스는 본인이 독일인이라는 부채감을 안고 자국민에 의하여 저질러진 반인륜적인 범죄를 더욱 강조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스필버그와 제거스의 공통점은, 아무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수용소를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 게르테츠는 세 군데의 수용소,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차이츠 수용소를 거쳤고, 작중에선 악명 높은 부헨발트 수용소를 최상의 곳으로 추억하기도 한다. 당연히 차이츠에서 극도의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긴 하지만 그의 추억 속에선 수용소도 역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정말이다. 읽어보시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우리 과장하지 말자! 내가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는 정말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284쪽)


 위의 인용문은 독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 상당히 중요한 문장이며, 이런 문장이 하나 더 있어서 함께 소개한다.


 “운명이 있다면 자유란 없다. 그런데 만약(내가 점점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자유가 있다면 운명이란 없다. 그 말은(여기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말을 멈췄다.) 우리 자신이 곧 운명이란 뜻이다.” (282쪽)


 위의 대사를 하는 죄르지. 15세 소년이다. 약 10개월에 이르는 수용소 생활과 부헨발트에서부터 부다페스트까지의 여정으로 갑자기 철학자가 되어 이런 얘기를 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 문장들은 등장인물, 열다섯 살의 죄르지가 아니고 완전한 성인이고 지식인이자 소설가인 44세의 케르테츠 임레가 한 말이라 생각하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이다. 자신이 근현대 세계사 상 가장 극한의 고통이라 일컫는 수용소를 경험해보고 근 30년이 흐른 다음에 뒤를 돌아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란 것.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이곳에 있고, 어떻게 해서든지 존재를 이어가야 하는 어려운 문제에 당면해 있다는 뜻은 아닐까. 그곳이 수용소 안이었든 헝가리 경찰과 독일 헌병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던 부다페스트 게토지역이었든 모든 유대인(혹은 모든 인간)은 자신이 처했던 시기가 가장 어려웠을 것이라는 담담한 독백. 이리하여 이 작품 <운명>은 르포르타주의 영역에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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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카운슬러>, 뒤 라스의 <내 사랑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 읽는 시나리오. 완전 타임 킬링용.
 민음사의 ‘책 소개’를 소개해볼까?


 “서부 장르 소설을 고급 문학으로 승격시켜 ‘서부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코맥 매카시의 신작”
 “코맥 매카시가 써 내려간 핏빛 서사시”


 책 뒤표지엔 《워싱턴 포스트》가 이렇게 평을 했다고 자랑이다.


 “멜빌, 도스토옙스키, 포크너 등 그가 존경하는 작가들처럼, 매카시는 그 어느 책보다 위대하고 깊이 있으며 창조적인 작품들을 써냈다.”


 <카운슬러>를 읽고 작가를 ‘서부의 셰익스피어’라고 부르는 것들은 도대체 어떤 종자들일까? 워싱턴 포스트 문화부 문학담당자는 어떤 새끼라서, 매카시한테 얼마나 뇌물을 받았으면 이 책이 멜빌, 도스토옙스키, 포크너의 책들보다 (“그 어느 책보다”라고 했으니까)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걸까? 이것들이 다 미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건 이유가 있어서다. 민음사 광고 담당 팀장과 워싱턴 포스트 문학평론 담당자라고 하는 인간들은 한 권의 셰익스피어도, 한 권의 멜빌이나 도스토옙스키나 포크너도 읽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거 정신 나간 인류가 이렇게 많아서 어찌 세계 평화가 오겠느냐 말이지.
 직접 읽어보니 위의 허망한 찬사 가운데 그래도 조금이나마 수긍할 수 있는 수사는 오직 하나 “핏빛 서사시”라는 거. 그냥 마구 총 쏘고, 신체 절단하고 그런 것에 ‘서사시’라는 헌사를 가져다 붙일 수 있다면. 하긴 <일리아드>나 <삼국지연의>를 보더라도 인간의 모가지들은 추풍의 낙엽처럼 날리니까 마음 넓은 내가 그러려니 하겠다. 좋다, 핏빛 서사시. 광고 카피니까 이 정도는 수긍을 해 줘야 속 좁다는 말은 안 들을 테니.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이걸 영화로 만들어 은막에 빛이 비치면 어떤 영상이 나올까, 생각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생각해보라. 동양인 남자와 프랑스 국적의 백인 여자가 길고 긴 섹스를 나누고 있는데 그 위에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터져 버섯구름이 뭉실 솟는 흑백 장면이 오버랩 되는 거. 마치 희곡을 읽을 때처럼, 시나리오를 읽는 독자는 자신만의 화면을 연출할 권리가 있다. 영화가 아니라 문학작품으로의 시나리오 혹은 희곡을 읽는 진짜 재미는 각자가 다 다른 화면이나 무대를 만든다는 거 아닐까. 사실 시청각이라고 하지만 (음악을 듣는 행위는 별개로 하고) 인류에게 상상력을 촉발해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행위는 시청각을 제외한 평면 위의 문자들, 인쇄물을 읽는 거라 생각한다. 만일 당신이 이런 생각에 동의한다면 절대 <카운슬러>를 읽지 마시라.
 <카운슬러>는 독자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시나리오가 그럼 개판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이런 종류는 영화로 만든 다음 정신없이 스토리를 따라가는 은막의 화려한 빛을 보는 편이 훨씬 좋을 거 같다. 나 같은 일반인, 거기다가 동양인들은 생각하기 힘든 마약 제조 판매상들의 잔혹하기 비할 데 없는 무협지 드라마를 어떻게 동감하면서 읽을 수 있겠나. 킬링 타임 목적으로 영화관에 가서 팝콘 집어 먹으며 두 시간 동안 멍하니 즐기다가 나오는 것이 장땡이지.
 멕시코 후아레스라는 절대 무법 지대에서 분뇨차 윗부분을 절단해 마약을 가득 들은 드럼통 세 개와, 바야흐로 제대로 숙성되기 시작한 사람의 시체를 담은 드럼통 하나를 실은 다음 그 위에 다시 분뇨통을 용접한 차량을 타고 무려 2천만 달러어치 코카인이 미국 땅으로 들어온다. 시신을 담은 드럼통은 무슨 역할을 할까. 궁금하시지? 그건 마약 조제, 공급상들의 유머란다. 이런 위험한 일을 할 때는 유머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아무렇지도 않은 그들의 ‘유머’. 돈을 위해 범죄 집단에 의하여 대도시 한 가운데에서 목이 절단당하는 이야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모든 인류에게는 이 책은 말 그대로, 멜빌, 도스토옙스키, 포크너의 책들보다 훨씬 위대하다고 갈채하다가 급기야 매카시를 ‘서부의 셰익스피어’라고 계관을 씌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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