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 밀러 펭귄클래식 27
헨리 제임스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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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제임스를 몇 작품이나 읽었더라? <한 여인의 초상>과 <나사의 회전>이 (앞의 것은)재미있었고, (뒤 것은)엽기적이라 기억에 남는다. 이거? <데이지 밀러>? 중편 소설 분량. 헨리 제임스의 작품 가운데 제일 많이 팔렸다는 베스트 셀러. 베스트 셀러가 언제나 베스트 작품은 아니라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사람들 참 웃겨. 몇 번 얘기한 거 같은 바, 앞뒤 따지지 말고 얘기하자면, 유럽에서 먹고 살기 팍팍해 배타고 건너온 사람들을 선조로 둔 아메리칸들. 대륙에 나라를 건설하자마자 최고의 가치는 인권과 평등. 물론 유럽 백인 출신들에 국한한 인권과 평등. 어쨌거나 그들의 최고 가치는 실용주의다. 대륙의 무한한 자원을 바탕으로 아메리카 달러의 위세가 세상을 흔들기 시작할 즈음, 미국 부르주아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낸다. 전체 인구의 1/50,000 , 얘네들이 뭐 했을 거 같은가. 유럽 귀족들의 풍속을 그대로 카피하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본데 없는 것들이라고 하면 너무 야박한 거고, 본토 즉 유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언제나 동경해마지않던 유럽 귀족들보다 오히려 더 완고하고 보수적인 그들만의 리그에서 통용하는 규범을 만들어낸다. 당대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인간종족이 바로 미국 동부에 서로 모여 살던 백인 부르주아들이다. 이런 부류가 제일 한심하게 바라보는 족속이 있으니 자신들 바로 아래에서 자기들 역시 부르주아 계층에 진입했노라고 소위 '척'하는 인간들. 가소로운 것이지 뭐. 이거 진짜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19세기에서 20세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나온 소설책에 무수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내가 제일 혐오하는 족속들이다.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극소수 미국인들은 아직까지 이따위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건 모르겠고 관심도 없다 읎다.

 무척 아름다운 열 아홉살 아가씨, 데이지 밀러가 스위스 휴양지 브베의 한 호텔에서 주인공 프레드릭 윈터본의 눈에 띄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척보니 날마다 별만 올려다보고 사는 아름다운 스테파네트 아가씨처럼 순진무구하며 예쁘기 그지 없는데, 이미 세상물정에 관해선 좀 아는 윈터본의 눈에는 데이지가 발랄하고 거침없는 것이 여지없이 바람둥이 기질이 보이는 거다. 한 마디로 자유분방해 19세기 중반의 규범을 초월하는 행위와 언행을 서슴지 않는 것이 또 매력적이고. 대개 소설을 비롯한 드라마, 영화, 오페라 등의 남녀관계는 거의 한 번 딱 보고 숨넘어가게 사랑에 빠지는 것. 그러나 현명한 윈터본 씨는 데이지가 마음에는 들지만 홀딱 빠져 너죽고 나죽자의 참경에까진 도달하지 않는다.

 왜?

 윈터본은 미국 동부, 그것도 한때 미국의 수도였던 뉴욕에 기반을 둔 대 부르주아 가문이고, 데이지 밀러가 속한 밀러 가문은 뉴욕의 옆구리 스키넥터디에서 사업을 해 자신들도 부르주아 족속의 일원인줄 착각하고 있는 인간종이기 때문. 실제로 윈터본의 숙모 코스텔로 부인은 이렇게 단언한다.

 "그 사람들은 아주 천박해. 그런 부류의 미국인들은 절대,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란다." (78쪽)

 헨리 제임스가 제일 막강한 실력을 뽐내는 것이 바로 풍속소설. <아메리칸>에선 돈 많은 정의파 미국남자를 내세워 전 유럽의 귀족들을 물리쳤으며, <한 여인의 초상>에서도 역시 이모부 잘 만나 떼돈을 상속받은 여인의 자유분방하게 사는 모습을 그렸으니, 이 작품에서도 코스텔로 아주머니를 비롯한 일단의 미국 부르주아들의 엄혹한 견제를 모른 척하고 프레데릭 윈터본과 데이지 밀러가 세기의 사랑을 이루어내겠구나, 하고 김칫국 먼저 마셔두었다는 걸 고백한다.

 원래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데이지처럼 세상의 모든 남자로하여금 발정나게 할 정도의 미모를 갖춘 여자들은 조금쯤 바람둥이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이가 세상의 많은 남자들을 저울에 올려두고 자신에게 제일 풍족한 복지를 가져다줄 수 있는 젊은 미남을 고르겠다는데 그게 뭐 잘못된 거 있어? 세상의 모든 포유류 암컷이 하는대로 하겠다는데. 난 절대 반대 안 함.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

 하.지.만.

 명색이 헨리 제임스. 나 따위 변방의 독자가 생각하는대로 소설을 쓰면 일찍이 19세기를 떠르르하게 만든 헨리 제임스겠느냐, 하는 점. 내 생각은 여지없이 망가지고 소설은 아주 다른 방향으로 선회하다 어느덧 스위스 브베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장소를 옮긴다. 여기서도 아름다운 데이지 아가씨는 로마 최고의 미남자를 골라, 세상의 가장 똑똑한 미녀들이 하는 짓, 줄듯 말듯 하는 거. 뭘 줄듯 말듯 하냐고? 순정. 마음 말이다, 마음. 마음을 줄듯 말듯 온갖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던 건데, 소설이란 건 여지없이 최상의 우연을 만들어내는 것이 본질. 밀러 가문 최대의 적수, 코스텔로 아주머니 역시 겨울을 나기 위해 로마로 오고, 아주머니를 따라 윈터본, 원래 겨울에 나서 윈터본인줄 모르겠는데 하여간 원터본 씨도 겨울을 나기 위해 로마에 도착, 데이지 양과 재회하면서 소설은 급커브를 튼다.

 재밌겠지?

 난 아무리 재밌어도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 헨리 제임스가 <데이지 밀러>를 그리 아꼈다 하더라도 그건 19세기 일이고, 아직까지 이 책의 효용이 가슴팍에 팍!  와닿는 것도 아니며, 무엇보다 어찌하여 이리 황당한 끝맺음이 있겠느냐 하는 거. 어떻게 황당하냐를 말씀드리면, 내가 아무리 말려도 읽어보실 분은 책을 읽어보실 거라 미리 알면 재미 없고 재수도 없을 터라 언급할 수 없다.

 책의 3장에 벌써 로마에 가 있던 코스텔로 아주머니가 윈터본에게 편지를 써서 셰르뷜리에의 재미있는 소설 『폴 메레』를 좀 갖다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103쪽에 나온다. 여기서 셰르뵐리에라는 스위스 소설가가 진짜 있었고 <폴 메레>라느 소설도 정말 있었다 한다. 책 뒤편의 후주를 보면 <폴 메레>의 대강의 줄거리가 나온다. 그거하고 <데이지 밀러>하고 어쩜 그리 비슷한지. 이 정도면 내 수준의 힌트는 다 드린 셈이다. 읽어보실 분은 읽어보시고 안 그러실 분은 맘대로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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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12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슷한 느낌의 소설이긴 한데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가 훨씬 낫죠. ㅎㅎ 암튼 <데이지 밀러>는 짧아서 베스트 셀러가 아닐지 ㅋㅋㅋㅋ

Falstaff 2017-07-12 10:59   좋아요 0 | URL
윽! <순수의 시대>에선 영국인가 하여간 유럽에서 온 늙고 가난하고 조그마한데다가 비쩍 마른 남작한테 미국 부르주아들이 온갖 환대하는 묘사가, 으...
ㅎㅎㅎ 그 책도 진짜 WASP 들의 향연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서 누가 그러더라, 하여간 이렇게 말하는 게 기억나네요.
˝찰스 디킨스와 마크 트웨인의 작품은 신사가 등장하지 않아서 싫어요.˝
ㅋㅋ 전 화장실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을 거 같은 신사숙녀만 등장하는 <순수의 시대>가 별로던데요. 전 헨리 제임스도 <한 여인의 초상> 말고는 뭐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워튼이나 제임스, 가까이 하기엔 시대 차이가 너무 나는 듯해요. ㅠㅠ

잠자냥 2017-07-12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 속물스러움의 묘사를 지겨우리만치 참 잘도 했다는 점에서 ㅋㅋㅋ 높이 샀어요. 전 빅토리아 시대 때 이야기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미국의 저 시절 부르주아 이야기도 읽긴 읽되, 별 감흥이 없더라고요. 이디스 워튼은 <순수의 시대>를 대표작으로 많이 꼽던데 전 그 작품 보다는 <이선프롬>을 가장 좋아합니다. ㅎㅎ

Falstaff 2017-07-12 12:4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워튼이 그 계급 사람들의 터무니 없는 허위를 사정없이 비튼 건 맘에 들더군요. ㅎㅎㅎ
<이선프롬>, 나중에 기억나면 한 번 시도해보겠습니다만, 워튼하고는 당분간 별거생활 중이라 언제가 될지는 잘..... ㅋㅋ
 
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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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부암동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인왕산 언덕배기 산동네. 충청북도 괴산군 노루배미에서 고등학교 1학년 까지 마치고 상경해 외국계 무역회사에 다니는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중학교 졸업 학력으로 십 년 동안 남편과 시어머니로부터 무식하다느니 배운데 없다거니 하는 타박만 좋이 얻어자시며 이 책의 주인공 '나'를 여덟살 먹을 때까지 키워주신, 목포 출신의 요리 명장이지만 정식 직업은 오르다가 가겟방 앞에서 한 번은 쉬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언덕배기 달동네 오두막집의 솥뚜껑 운전사, 엄마. 끔찍하게 깔끔을 떠는 엄마가 눈 오는 날 키보다 큰 싸리 빗자루로 쓱쓱 눈을 치우다가, 아이고 저걸 저걸, 이를 악물고 끙끙 앓는 소리로 시어머니에게 "어머니 애가 나오려나봐요. 너무 급해 차리고 병원에 못 갈 거 같아요. 동네 산파 좀 알아봐주실래요?" 한 마디 하고 그길로 1977년, 한국적 민주주의가 든든히 토대를 잡고있던 20세기 중반의 민족중흥 시대에, 흔한 산과 병원도 아니고, 손톱 밑에 때가 새까만 아줌마가 지물거리는 눈으로 엄마의 가랑이 사이를 째려보는 종로구 부암동의 찌그러진 조산원에서 드디어 터울 많이 나는 내 동생 영주가 태어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제 육십이 넘어 목소리마저 메조 소프라노로 바뀐 할머니는 영주가 드디어 엄마의 태 속에서부터 탈출하기로 결심을 하기 바로 전까지, 영어로 말하자면 솔리테어solitaire, 우리말로 하자면 재수떼기를 하고 있다가 마지막 장을 뒤집기 바로 전에 급하게 옷보따리를 하나 만들어 나와 함께 판자처럼 생긴 지저분하고 좁은 조산원으로 뛰어왔는데, 연속극에서 본 거 처럼 아이를 낳고 있는 중인 엄마가 아이고 죽겠네, 으악, 으악, 소리소리 지르지 않고 그냥 음, 음 하는 신음만 들려오는 중에 우리의 칠성님께 간곡한 기도를 시작한다. "아이구, 칠성님. 이 늙은이가 둘째 손자 하나만 안아보게 해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저 토란 같은 불알 달린 손자놈만 낳아라.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러다 내가 가슴에 안고 있는 보온병을 내려다보더니 내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이 새끼야, 마호병은뭐 하러 들고 왔어?" 하는 거였다. TV 보니까 사람이 아이를 낳으려면 제일 먼저 사람들한테 물 끓이라고 소리치는 걸 보고 분명히 뜨거운 물이 필요할 거 같아서 부엌 연탄불 위에 끓고 있던 솥단지에서, 그 비상사태에도 불구하고,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온 건데, 비록 일상이 돼버려 아무렇지도 않지만, 뒤통수만 한 방 얻어터지고 만 거였다.

 잠시 후 조산원 아줌마의 '그렇지!'하는 말과 캑캑캑 하는 아이 울음 소리가 들리고 할머니와 난 득달같이 달려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비린내가 가득한 방 공기가 확 들이 닥치고, 난 비린 냄새에 비위가 확 상해 토할 거 같아 고개를 돌렸으며, 바람들어온다는 조산원 아줌마의 지청구와 함께 다시 문이 쾅 닫혔다. "딸이에요, 딸." 그 말을 듣자마자 할머니는 땅을 쿵쿵 구르며 아이고 내 팔자야, 통곡에 통곡을 거듭했으며 집에 가자마자 머리에 질끈 끈 하나 동여매고 아침에 하다 만 재수떼기 화투의 뒷장을 기어이 넘겼는데, 딱 떨어지는 재수가 흑싸리 껍데기.

 "사흑싸리 껍데기! 육시랄허게 복도 없는 지집년이 나왔구나!"

 어느새 두달이 흘러 6년 터울이 나는 내 동생의 이름을 지어야 하는 때가 왔다. 할머니가 달력 찢은 종이에 뭐라 한 글자를 써 아버지한테 던져 주면서 하시는 말씀이, "옛다. 저년 부를 이름은 있어야지." 나는 안고있던 아이를 엄마한테 얼른 넘겨주고 종이쪽지를 주워 들여다 봤고 그 위엔 뭔가 꼬불꼬불한 글씨가 적혀 있었으나 도무지 읽을 수가 없었다.

 "한복자. 좋쟈? 저년 낳던 날 사흑싸리 껍데기가 떨어졌으니 저년 복이 오죽하겠냐. 그러니까 이름자에 복복 자를 넣어서 기를 올려줘야 우리 집안도 좋고 저년도 좋은겨."

 사실 바로 위에 이 책의 내용은 다 설명이 됐다. 정말이다. 일단 현재 시점까지 보면, 할머니가 가족 구성원 중에서 아버지를 뺀 나머지 인간들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고, 할머니가 적어준 달력 찢은 쪽지에 쓴 아이의 이름을 읽지 못하는 나는 아홉살이 되도록, 3학년에 이르도록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중증 난독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자세히는 밝히지 않겠으나, 거의 모든 작품에서 비극에 관한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진리를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걸 천명해둔다.


 난 이 책이 2013년에 나와서 불과 4년 전 작품인줄 알았다. 근데 다 읽고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기에 검색을 해보니 우헤, 2002년 작품이다. 그러니까 중판. 심윤경. 서울대 분자생물학과와 동 대학원 같은 전공으로 졸업하고 직장생활 하다, 아 이거 아냐, 때려치고 소설 쓰는 아줌마. 햐, 근데 어찌 분자생물학적 접근은 전혀 찾지 못했을까? 이이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니 동화책이 여럿 있다. 전혀 놀라지 않았음. <나의 아름다운 정원> 역시 다분히 동화적인 시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른들이 읽는 동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꿈꾸고, 꿈마저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종이 위의 꼬물꼬물한 직선과 곡선에 불과했던 것이 문자로 바뀌고, 동생의 잘못을 아무도 모르게하기 위해 대신 기꺼이 엄마한테 두드려 맞고, 할머니와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벌어지는 가정학대와 멸시와 조롱과 폭력과 기타등등을 가슴 속에 푹 절여두기만 하고, 그래서 난독증은 날로 심해져 가고, 글씨도 못 읽는 놈이란 딱지를 달고 다니며, 그러나 동생과 동네 삼촌과 담임 선생님과 몇몇 친구들과 쌓아가는 우정, 사랑, 믿음, 동감 비슷한 커다란 우산.

 날로 진지하고 심각하고 중대하게 확장되어 가는 엄마에 대한 할머니의 증오와 학대와 막말은 나, 한동구를 더욱 압박하고 숨도 못쉬게 하지만 나는 주변에서 나에게 많은 아름다운 영향을 끼치고, 끼졌던 사람들을 통해 할머니, 할머니가 바라는 진정한 것은 무엇일까를 탐색하는 결실을 맺는 과정. 그게 나의 아름다운 정원,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으로 짐작되는 그곳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이제 소년기의 나를 괴롭혀왔던 무수한 질곡을 극복하는 일, 그래서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가슴 따뜻한 성장소설로 규정짓게 만드는 일이다.

 잘 쓴 성장소설이 제일 지랄맞은 것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곳곳에서 눈물을 짜게 만드는 거. 에잇! 하지만 당신도 예외는 아닐 것이니 진짜 조심해서 읽으시라.

 근데 나, 한동구의 아름다운 정원은 무엇일까? 종로구 부암동으로 짐작되는 인왕산 허리자락 부근을 통칭하는 걸까? 유독 달동네 한켠에 커다랗게 자리잡은 3층 저택의 아름다운 친 자연적 정원일까, 아니면 조심스레 몰래 3층집의 정원에 들어가 가슴이 붉은 곤줄박이(책 속에선 "곤줄백이")에게 빵조각을 건낼 때면 커다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있던 사모님의 그윽한 눈동자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한동구의 소년시절을 겪게 했던 내 귀엽고 똑똑했고 작은 누이동생 한영주와, 크기가 산 만한 고시준비생 동네 삼촌과 천사보다 몇 백배 착하고 아름다운 3학년 시절의 담임 박은영 선생님들이 나를 위해 만들어준 모든 미덕을 다 합친 따뜻함, 다 합쳐 소년시절이 아름다운 정원이었을까.

 결론은, 당신 의견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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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랜포드 현대문화센터 세계명작시리즈 4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심은경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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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크래그헌 개스켈. 이이의 작품 <남과 북>을 읽고 난 그냥 홀딱 빠져버렸다. 권위를 보전하기 위해 철권을 휘두르면서도 엄중한 도덕률을 강요한 우중충했던 빅토리아 시대. 핍박받고 착취당하던 시민들이 생존권을 위해 목숨을 걸고 파업을 벌이던 당시, 부르주아의 각성을 완곡하게 요구하던 <남과 북>의 마거릿 헤일. 나는 빅토리아 시대의 최고 작가의 반열에 엘리자베스 크래그헌 개스켈을, 찰스 디킨스와 함께 올려놓았다.

 <남과 북>에 마거릿 헤일이 있었다면 그것보다 2년 앞서 쓴 중편소설 <크랜포드>에선 매리 스미스가 있더라. 크랜포드란 시골 동네 이름으로 전에 주인공 매기 스미스가 살았던 동네. 매기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대처에 나가 살지만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먼 친척이면서 소설의 척추를 이루는 젠킨스 일가의 집에 수시로 머물며 크랜포드 동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무척이나 따뜻한 시선의 일인칭 화법으로 적고 있다. 작품은 읽기 편하게 모두 16개의 옵니버스 식 단편斷片, 혹은 단편短篇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군다나 작가의 솜씨인지 역자의 솜씨인지 아니면 두 사람 다의 공헌인지는 모르지만 쉬운 문장으로 술술 읽히는 미덕까지 겸비했다. 그리하여 마음 먹으면 휴일 아침에 집어들어 아침 거르고, 점심 거르고 드디어 끝까지 다 읽은 다음, 딸아 배고픈데 자장면 시켜먹자, 할 정도는 된다. 그러나 댁의 따님은 분명히 이렇게 대답할 걸? "아버님, 오늘은 휴일이라서 짜장면 주문하면 두 시간 있다 옵니다. 걍 라면이나 손수 끓여 드시옵소서."

 무슨 말이냐 하면, 한 번 손에 잡았다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른다는 말씀. 왜? 재미있으니까. 재미도 그냥 재미가 아니다. 소설책 그리 많이 읽어봐도 제일 재미난 건, 어떻게 그리 TV 연속극하고 비슷한지, 적당한 신파가 가미된 해피엔드 소설이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게다가 열 여섯편 거의 모두 눈물선을 적당하게 자극하고 있음에야 뭔 말이 필요할까. 아 썅, 270쪽에 불과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세번이나 눈물을 짰지 뭐야, 쪽팔리게.

 <남과 북>이 그렇듯이 이 소설에서도 지독한 악당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고집이 느므느므 완고하고 뼈 속까지 귀족의식, 염병할 선민의식을 말하는데, 그런 재수없는 사고방식 속에서 스스로 질식사해가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러나 어떻게보면 좀 억지인 듯도 하달 수 있으나, 결국 고집을 굽히게 될 것임을 시사하면서 마지막에 이르니 악당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터.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 타임 킬링용으로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는 선택. 심지어 청소년 권장도서에 이거 들어가도 아주 좋을 듯.

 그래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 개스켈의 <남과 북>은 한 번 읽어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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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펭귄클래식 36
다니엘 디포 지음, 남명성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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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시절에 축역본으로 읽었던 옛날 이야기, 다시 읽어보는 프로젝트(햐, 외래어 사용할 때의 이 기묘한 울림. 이래서 외래어 쓰는 거다) 일환으로 과감하게 중고책 사서 읽었다. 책 나온 시점이 1719년. 글쎄, 300년 전으로 돌아가 이 책을 읽는다면 정말 기막힌 독서를 경험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뭐 그냥.

 책 표지, 기둥에 붙어있는 현판을 보시면 이렇게 써있다.

 "I came on these shores on the 8th day of June, in the year 1659"

 이 장면이 두가지 측면에서 구라다. 첫째, 크루소가 무인도에 떨어진 날짜는 6월 8일이 아니라 1659년 9월 30일, 둘째로 이 푯말을 설치해둔 장소가 그림과 같은 저택이 아니고 해변가다. 이건 작가와 삽화가 혹은 표지 제작자 간의 일이니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나중에 크루소가 프라이데이와 함께 섬을 떠나면서 날짜를 계산할 때 1년 며칠의 차이가 나는 건 어쩔겨? 300년간 세계명작으로 알려져 있던 작품이며 후배 작가들이 숱하게 인용한 위대한 유산에서도 이런 에러가 발생한다. 이건, 그냥 웃고 넘어가도 될 듯. 누가 혹시 알아? 300년 전엔 작가들이 재미있으라고 소설 속에 고의로 트랩을 설치해놓았을지. 그냥 그렇게 넘어가자.

 내용? 다들 아시잖여?

 정말?

 난 아니던데?

 이거, 흠. 디포가 자기 방에 단풍나무로 만든 책상에 앉아 오직 머리 속에서 기어나오는 상상력에 의해 쓴 책. 어려서 축약본 읽었을 땐 전혀 몰랐다. 만일 무인도에서 정말 크루소처럼 살 수 있었다면, 크루소는 분명 반신반인 또는 삼배체 염색체 인간이었을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형제란 얘기. 물론 크루소 문명의 이기, 특히 총과 화약, 총알을 비롯한 문명의 잔재와 과학적 사고방식이란 최고의 도구를 갖고 무인도에 떨어졌으나 무려 삼십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혼자 살면서도 모국어인 영어를 비롯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의 약간을 몽땅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물론, 점차 섬에서 그야말로 신의 지위에 앉게 된다.

 근데 이건 그냥 로빈슨 크루소의 행적에 관한 거고, 내가 이 책을 지독하게 재미없게 읽었던 이유는, 놀라셨지, 재미없다고 그것도 지독하게 재미없다고 얘기하는 거. 근데 그게 사실인 것이 책의 거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의 신에 대한 고마움, 은혜가 넘실넘실 흐르는 증거 대기에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잘 쓰는 말이, 꽃노래도 삼세번. 하이고, 차라리 광신적 개신교 교회에 들러 바로 옆자리에서 아저씨 아줌마들이 넋 놓고 하는 방언을 듣지 말야. 초간이 1719년이었던 걸 충분히 감안을 했어야 하는데 준비 없이 재미있겠거니 그냥 책을 읽기 시작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딴 거 읽느라 이틀 반이나 썼다. 물론 만날 쇠주 마시느라 밤엔 책을 읽지 않기는 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그리 크게 재미있을 거 같지 않지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선택은 전적으로 당신 마음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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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셀레스티나 을유세계문학전집 31
페르난도 데 로하스 지음, 안영옥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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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예전부터 읽어볼까 망설였던 건데, 책 표지 그림이 하도 엽기라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었다. 16, 17세기 스페인 마녀, 책에 나온대로 말하자면 턱수염까지 거무스름하게 돋았으니 <맥베스>에서 '장차 나린 왕위에 오르실 거예욥', 마녀하고 거의 비슷하게 생겼다. 그리하여 보자마자 화형식 장면이 떠오르는 바람에 차일피일.

 유럽 각국의 진짜 오래된 고전들, 예컨데 프랑스에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 영국의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이탈리아의 <데카메론> 등은 작품 자체를 극동 아시아 사람이 감상을 해서 감명깊다, 이딴 말을 하기는 쉽지 않지만 유럽 문학을 읽으면서 숱하게 인용하는지라 후대의 작품들을 위한 기초체력을 기르는 셈치고 읽어두면 아주 좋다. 같은 의미로 <라 셀레스티나>도 언젠가 얽어야 할 목록에 포함시켰었는데 이제야 끝냈다(물론 로렌스 스턴의 작품은 지금 읽어도 시공간을 초월하여 충분히 멋있다).

 칼리스토, 라고 하는 22세던가 24세던가 하는 스페인 귀족 청년이 사냥길에 나섰다가 멜리베아라는 처녀를 보고 한눈에 홀딱 반해 겪는 우여곡절. 칼리스토도 부자에다가 귀족계급이긴 하지만 멜리베아는 칼리스토보다도 훨씬 더 부유하며 훨씬 더 높은 계급의 귀족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따님이어서 도무지 언감생심, 이었다가 혼자서 끙끙 상사병 앓다가 죽느니 그나마 '짹' 소리라도 내보고 죽느라고 동네에서 가장 머리가 좋고 온갖 곡절을 다 겪으며 모진 세월을 살아온 가난한 늙은 여인 셀레스티나에게 중매를 부탁하며 드디어 사건은 벌어지는 거디다.

 원 작품이 15세기에 나온 거다. 당시 일반 백성, 그중에서도 여자 혼자 살면서 이웃을 비롯한 다른 인간들한테 만만하게 보이면 행여 잘, 평화롭게 먹고 살 수 있을 거 같은가? 시대는 페스트와 콜레라, 겨울엔 티푸스까지 온갖 죽을 전염병이 창궐하고, 전염병보단 인명을 덜 살상했지만 못지않게 백성들을 간난과 고통 속에 빠뜨린 쉼없는 전쟁의 와중이었음에야. 하긴 전염병과 전쟁이 없던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에서도 여자 혼자 살려면 별 거지같은 새끼들이 다 꼬여 어떻게 해서든지 가진 거 홀딱 다 뺐어먹고 튈 생각으로 눈알이 벌겋게 물든 인종들 숱하게 꼬이던 것도 숱하게 보긴 했다. 역사이래 홀어멈, 홀처녀 살기 끔찍하기가 그래도 좀 덜 하기까지 예수 죽은 후 2,000년이 필요했던 거다.

 내 보기에도 이 책의 진짜 주인공 셀레스티나라는 노파, 이웃들에게 간교하고, 독사같고, 저주를 퍼붓고, 밤마다 악마와 교접하고, 고양이 뿔과 암소의 고환을 끓여 사랑의 묘약을 만드는 마녀라고 지목을 당하지만, 사실은 당초(唐椒: 호고추. '호'는 중국을 대표하는 외국산을 얘기하는 것으로, 외국에서 건너온 존나 매운 고추. 울나라에서 청양고추를 먹기 전에 신도가 제일 셌던 고추를 일컫는다)보다 매운 시절을 홀어멈으로 악착같이 살아내느라 이웃들과 좀 불편한 관계를 맺어 어쩔 수 없는 평가를 받고 있던 거 같은데, 뭐 어떤 상황인지 이해 가시지? 근데 작가 페르난도 데 로하스, 얘도 당시에 글자를 자유자재로 읽고 쓴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먹고 살 만한 인간이어서 그랬는지 하여간 무지무지한 악당으로 묘사해놨다. 이해해주자. 책은 15세기 내용을 16세기에 쓴 거니까. 그리하여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백성들, 칼리스토의 하인들까지 몽땅 포함해 일반 백성들은 교활하고, 언제나 상전 몰래 상전의 재물을 훔쳐낼 생각에만 골몰하는 추잡한 인간으로 묘사한다.

 아, 얘기가 또 경상남도 삼천포 시로 빠졌다.

 하여간에 얼굴에 깊은 상처가 있는 늙은 셀레스티나가 칼리스토와 멜리베아 사이를 시계불알처럼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칼리스토에 대한 막강한 저항 또는 분개해 있던 멜리베아의 마음을 녹여 사랑에 불을 붙이는 거까진 내가 얘기할 수 있어도, 이렇게 멋지게 사랑을 이어준 셀레스티나가 왜, 어찌하여 죽음에 이르는지, 칼리스토와 멜리베아가 노파의 죽음과 하인들의 불행한 운명에 조금도(물론 '조금'이야 신경 썼겠지만) 개의치 아니하고 사랑에 몰두하는지,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됐는지는, 이 독후감을 읽으시는 분들이 아무리 궁금해도 가르쳐드릴 수 없다. 왜냐하면 진짜로 이 책을 읽어보실 1/100 명을 위하여.

 다만 한 가지. 나도 16세기에 나온 스페인 최고最古의 문학작품이 그렇게 끝을 맺을지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거. 뻔한 결말이겠지, 쉽게 생각했다면 나처럼 한 방 얻어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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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0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궁금하네요. 제가 그 1/100 명이 되어 보겠습니다. ㅋㅋㅋ

Falstaff 2017-07-06 10:44   좋아요 0 | URL
아후....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습니닷!
이렇게 오래된 책의 경우엔 이 말을 뺄 수가 없어요. ㅠㅠ
오랜 옛 이야기 책인것을 감안해 독특한 결말이지 지금 시각으론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려야 후환이 없지않나 싶네요. 긁적긁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