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은 목마르다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3
아나톨 프랑스 지음, 김지혜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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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아나톨 프랑스에 굉장히 박하다. 그의 책이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이 책 <신들은 목마르다>를 빼고 이이의 단행본은 전부 품절이고, 소위 말하는 메이저 출판사에선 한 권도 책을 내지 않았다. 우리나라 출판사가 유난히 좋아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데도. 책 뒤에 아나톨 프랑스에 관해 약간 써놓은 걸 보면 다작의 작가였으며 에밀 졸라와 함께 드레퓌스 사건에 적극 참여한 경험을 계기로 그의 문학관이 사회참여적으로 획기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드레퓌스 사건 무렵을 배경으로 한 소설책에선 아나톨 프랑스의 이름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나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기회가 있으면 아나톨 프랑스의 작품을 겪어봐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던 거 같다. 지금 읽고 있는 스콧 핏제럴드의 단편집에서도 단편 <바다로 간 해적>의 여주인공 아디타가 읽고 있는 책이 아나톨 프랑스가 쓴 소설 <천사의 반란>이다(<천사의 반란>도 번역본이 없다). 서양소설을 유심히 살펴보면 작중 등장인물이 프랑스의 책을 생각보다 많이 읽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의 대화 중에 이름이 등장하던지. 오래 전에 얘기했듯이 난 책 중 등장인물이 거론하는 작품에 상당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인종이라 애초부터 이이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는데, 도무지 책, 우리말 번역본을 구할 수 있어야지. 그러다가 드디어 한 풀었다.

 책 표지를 보면 세로무늬 긴 바지(상퀼로트)에 조끼와 블라우스(카르마뇰), 붉은 모자를 썼던 거 같은 머리의 발목 잘린 인민의 조각상이 왼팔에 삼색기를 들고 있다. 그럼 당연히 1789년 시작한 프랑스 혁명 시기가 소설의 배경이란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을 터. 원래 조각상은 오른 팔엔 착검한 소총을 들었지만 상의 손목이 부러져나가 땅바닥에 그냥 널브러져 있다. 서준환이 쓴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에 앞서 이 책을 읽었더라면 더 재미있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었는데 그건 두 작품이 거의 동시대고, 등장인물도 많이 비슷해서이기 때문이다. 아나톨 프랑스의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서준환이 이 책을 참고했을까? 아닐까? 좀 궁금했다. 많이는 아니고. 이 책이 '뿌리와이파리' 출판사에서 나온 시점이 2011년, 서준환이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을 낸 것이 2013년. 그러면 적극적을 참고하기엔 시간이 좀 부족했을 거 같고, 그렇다고 읽어보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힘들고, 그런 수준. 확실한 건, <로베스피에르...>의 클라이막스, 파리 코뮌의 명령을 받고 파리 시청에 모인 국민공회 위원, 그리하여 기꺼이 생쥐스트, 로베스피에르와 더불어 단두대에 오르게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신들은 목마르다>의 주인공 가믈랭이다.

 신들은 목이 말랐다. 때는 1794년. 이미 많은 인류들은 아직도 신은 목이 마르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뭐에? 신들은 아직도 피에 목이 마르다. 원제 Les Dieux ont Soif. 확실히 신을 복수로 표기한다. 따라서 '신들'인데 복수형인 것을 보면 기독교나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의 유일신은 아니다. 18세기 유럽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다신多神이 설마 힌두나 도교의 다신이겠는가. 이교도라고 칭하던 그리스의 다신이겠지. 그것도 아니면? 혁명으로 신권이 벌써 인간에게 허여된 것인가? 에잇, 그건 모르겠고, 하여간 신들, 혹은 신처럼 전능한 인간들은 혁명이 진전될수록 더 많은 피를 요구하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일찌기 마오가 그랬잖여?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총구는 권력에서 나온다. 무슨 뜻인가 하면, 권력을 갖고 있는 자가 혁명의 순결함을 지키고 위대한 공화국을 만들기 위하여 무차별로 총구를 사용하게 된다는 말씀. 백퍼 내 말이니 어디가서 쓰지 마시라. 개망신 당해도 책임 안 진다. 이런 인간형의 특징은,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학살과 변론없는 사형판결과 집행 같은 것은 혁명 혹은 혁명이라고 자신이 믿는 행위의 순결함과 지고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불가피하게 벌어져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이상주의자 화가 가믈랭이 우연한 기회에 혁명공회의 배심원으로 임명되어 졸지에 코뮌의 핵심멤버, 진짜 핵심은 아니지만 적어도 재판에 회부된 피고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핵심멤버로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수직이동시킨다. 가뜩이나 이상주의자 적인 성향의 가믈랭은 날이 갈수록 더욱 이상적인 혁명과 인민의 나라, 순결한 공화국의 완성을 위해 공화국의 적들을 단두대 아래로 밀어넣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이젠 좌우로 아는 사람도 없고 절친도 없고, 친척, 애인, 심지어 부모형제도 없는 인간, 즉 괴물이 되버리고 마는 과정. 이게 이 책의 모든 것이다.

 지미럴 변증법. 정반합? 혁명의 피로가 과중하게 인민들을 끝까지 밀어부친 순간, 날을 숨긴 온건주의자들이 반혁명적이라고 볼 수 있을 반동을 저지르고, 그리하여 등장하는 이가 프랑스혁명을 종식시켰다고도 볼 수 있는 키 작은 사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닌가. 이게 역사고 인생이다. 죽 쒀서 개주는 일. 아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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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26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아나톨 프랑스의 <타이스>를 아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무희 타이스를 구원하고 말겠다는 당찬(!) 포부로 악전고투하는 수도원장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이 작품은 근데 우리나라 출판사에서 누가 다시 안 내주나 모르겠습니다. 워낙 아나톨 프랑스 작품이 번역되어 나온 게 없어서 좀 팔릴 거 같은데.. 흠.

Falstaff 2017-07-26 11:13   좋아요 0 | URL
진짜 미스테리예요. 아나톨 프랑스가 유독 대한민국에서 이리 박대를 당하는 것이.
저도 어제 읽었는데, 아나톨 프랑스가 에밀 졸라 장례식에서 한 연설, 정말 기가 막힌 명문장이더라고요.
프랑스 정부가 졸라의 레지옹 도뇌르 서훈자격을 박탈하자 이미 훈장을 받은 아나톨이 다른 훈장도 아닌 최고급 레지옹 도뇌르를 반납해버리는 장면도 압권이고요.
이런 전력을 보면 창비나 실천문학사, 한길사 같은데선 기꺼이 내줄 만한데 참.
우리나라에서 아나톨 프랑스를 전공했거나 연구한 사람이 적어서 그렇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만.
 
목요일이었던 남자 - 악몽 펭귄클래식 76
G. K. 체스터튼 지음, 김성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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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스터턴 선생이라면, 당연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도 완결 번역판이 나온 <브라운 신부> 시리즈다. 나도 가지고 있다. 다른 탐정 시리즈하고 비교하면 다분히 소프트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운...>이 흥미를 끌었던 이유는, 일반적인 사람, 그러니까 나하고 비슷한 종자들이 늘 생각하고 있는, 여기서 난 '생각하고 있는'이라고 말하지 '추리할 만한'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에 주의하시고, 그러니까 일반인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삐딱한지, 실상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지를 콕 집어내기 때문이었다.


 이 책이다. 시중엔 전부 일시품절. 중고책은 구할 수 있을 거다. 근데 특별한 재미는 없어서 악착같이 읽어보실 필요는 없고 싼 값에 중고책이 눈에 띄면 걍 한 번 구경이나 하심이....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고전에 능통한 한 시인이 살인 강도의 누명을 쓰게 되는데, 다분히 주위 인간들이 그의 외모,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어서 과장되게 커보이는 눈과 매일 책상에 앉아 책 읽고 글 쓰는데 시간을 죽이느라 만들어진 똥배, 흐트러지고 듬성듬성한 머리칼, 늘 싯구를 떠올리느라 신경질적인 인상 등을 감안하여 전체적으로 범죄형이라 판단해, 동일 조건의 용의자 여러명 가운데 그를 범인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라는 점. 근데 체스터턴의 분신인 작은 키에 까만 얼굴을 가진 브라운 신부는, 그의 후줄근한 외모로 인해 생겼을 법한 열등감 등이 그를 책읽기와 시 쓰기를 집중하게 만들어 시인이 됐을 거란 인생철학을 설파하기에 이른다. 이런 식. 사실 우리나라 문학계에서도 작은 키에 놀림감이 되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죽자고 책 읽고 소설 써서 성공한 이가 최일남, 최인호 등 여러 작가가 고백했고, 거꾸로 큰 키로 인해 여럿이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가 돼버려 소설가가 된 인간이 <아베의 가족>을 쓴 전상국 등이 있다. 열등감, 알고 보면 성공의 씨앗일 수 있다.

 이를 미리 알고 체스터턴의 작품 <목요일이었던 남자>를 읽었다. 글쎄 이게 추리물이라던지, 수사반장이나 형사 콜롬보 류의 범죄소설이라고 하기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그것보다는 세기말과 전쟁 전의 혼돈, 불안 같은 대중의 심리를 기호상징적으로 쓴 소설이라고 해야할 듯.

 시인 가브리엘 사림이란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날 느닷없이 이름도 떠르르한 영국 경시청 지하의 어두운 방으로 인도되어 어둠 속에 앉아 있는 거구의 사내로 부터 영국 경찰로 임명된다. 런던 서부지역 사프론 파크 주택가의 한 정원에서 사림은 또다른 시인이자 무정부주의자인 그레고리와의 대화끝에 대규모 폭탄 테러를 꾸미고 있는 집단에 잠입하게 된다.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일요일. 이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모두 일곱 명의 주요멤버가 있는데 시인 사림은 그중에 목요일로 불린다. 그리하여 제목이 한때 목요일이라고 불렸던 남자가 되는 것. 도버 해협 건너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 황제와 러시아 황제의 회담이 예정되어 있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두 명의 황제를 동시에 골로 보낸다는 목표를 정한 무정부주의자 집단. 애초 사림이 이들 속에 잠입할 시기에 맺었던 또다른 시인 그레고리와의 맹세 때문에 자신은 이들을 체포하지 못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부터가 사실 웃기기 시작한다. 이어서 벌어지는 황당한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하는데도 웃지못할 한 판이 벌어지고, 아쉽게도 책이 중간을 넘어설 대 부턴 머리회전이 좀 둔한 독자도 집단의 막강한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도한다.

 중간부터 책은 아예 노골적인 코메디 소설로 접어든다. 그런데도 독자는 마음놓고 웃어버릴 수 없는 애매한 상황을 경험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위험집단으로 공식 인정된 무정부주의자들의 무리, 정체가 밝혀질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져 도대체 얘네들 뭥미? 정말 두 거대국가의 황제,로 대변하는 기존 세상을 뒤엎을 만한 거야? 다이너마이트 몇 개가? 세기말, 세기초 그리고 전쟁 전 당시에 진정으로 위험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며 눈에 보이기는 하는 거야? 라는 질문을 던진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에서 본 거 같은 기시감이자 체스터턴이라는 괴짜 추리소설가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이상한 매력.

 그래도 솔직히 얘기하자면 크게 재미나지는 않다. 정상적인 추리소설의 틀에서 무지하게 많이 벗어나 있는 (당시 시선에선) 실험적 작품이랄 수도 있고, 이건 추리소설이 아니라 사회소설이라고 하는 게 맞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어떻게 주장하건 간에 뭘 주장하려면 이 책을 직접 읽어봐야 하는데, 책 뒤표지에 휘황찬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들어 이 작품을 필독서라고까지는 추켜올리고 싶지 않다. 그래도 좀 색다른 책을 좋아하시는 부류의 독자들 입맛에 딱 들어맞을 수 있겠다. 결정은 당신이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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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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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열 서너 페이지 읽으면 단박에 눈치 딱 때릴 수 있다. 신문연재 소설. 각 절節이 두쪽 조금 넘는 분량에서 절대로 많이 왔다갔다 안 한다. 근데 처음부터 끝까지, 문학과지성사 편집으로 370쪽, 현암사 편집으로 414쪽, 전부가 다, 몽땅, 딱 이런 분량의 백 수십개의 절로 되어있다. 어려서 신문보면 항상 아랫면에 달려있던 연재소설 보는 재미를 빼지 않았을 때부터 월간도 아니고 매일 소설을 연재하는 작가들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궁금해했다. 일정 분량에서 더하기 빼기 원고지 한 장 가량으로 일년 삼백육십오일 하고한 날 똑같은 긴장을 갖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거, 거 참. 하긴 80년대까지 우리나라 장편소설의 대부분은 신문연재를 마친 원고를 다시 편집, 퇴고, 기타등등을 거쳐 단행본으로 만든 것이긴 했다.

 이 책은 네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벗 / 형 / 돌아와서 / 번뇌. 첫 장 '벗'을 보면 오사카로 놀러간 책의 화자 나가노 지로가 젊은 시절 집의 서생이었던 오카다의 집에서, 오사카에서 가까운 산에 함께 오르기로 약속했던 벗 미사와를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약속한 날이 와도 미사와는 도착하지 않고 조금 늦겠다는 엽서만 도착해 좀 께름칙한 상황, 드디어 연락이 왔다. 오사카에 며칠 전에 도착했는데 평소 좋지 않았던 위에 탈이 나 병원에 입원해 있다나? 옛 서생 오카다의 집을 나와 병원에 가보니 그새 옆 병실에 입원한 게이샤하고 벗 미사와는 벌써 모종의 인연이 있었던 거다. 거참. 이 인연이 뭔지 궁금하시지? 별거 아님. 필름 돌아가면 다시는 해당 게이샤는 등장하지 않으니 신경 끄는 것이 좋다. 분량이 좀 길지만 이거 보다 책 전편에 걸쳐 혹시 뭔 인연이 없을까? 이거 복선 아냐? 라고 짐작을 하게끔 만드는 일화가 훨씬 더 중요하다. 미사와가 사랑했던 한 여인. 이혼당하고 본가에도 들어가지 못해, 중매를 섰던 미사와의 아버지 집에서 기숙했던, 정신이 좀 왔다갔다 하던 젊은 여인. 미사와가 외출이라도 하면 언제나, 한번도 빼지 않고 대문까지 쫓아나와 '나갔다가 일찍 돌아오셔요' 당부하던.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걸로 끝이 아니라 이 미사와 놈이 여인이 죽은 다음에 죽은 시체의 이마에다 대로 키스까지 했다네, 참나.

 정신이 이상한 여인이 미사와를 사랑했을까? 하는 고민, 글쎄 고민까지는 아니더라도 심사숙고를 누가 하느냐 하면 '나' 나가노 지로가 아니고 '나'의 형 나가노 이치로가 한다. 이치로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당시 일본 최고 지성인의 하나로 대학에서 철학인지 뭔지를 가르치고 있는 대단한 수재. 그럼 행복할 거 같지? 천만에. 하루는 동생을 불러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암만해도 내 마누라 나오가 너한테 반한 거 같은데, 아버지를 닮은 네가 아니라고 하니까 너는 아닌 줄 알겠다. 하지만 나오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으니 가까운 시일 안에 나오하고 너하고 짧게 길을 떠나 여관에 들어 하루 밤을 새우고 와라. 글쎄 정말이라니까. 여기까지 읽으면 독자는 이 책에서 중심이 뭘까? 미사와와 죽은 여인의 사랑, 이치로와 아내와 지로의 삼각관계. 이런 생각이 들면서 난데없이 <디미니의 프란체스카> 생각이 벌떡 들게 된다. 단테의 <신곡> 1권, 지옥편에서 거의 제일 앞대가리에 나오는 불타는 지옥불 장면. 베르길리우스와 단테가 본격적으로 지옥 구경에 나설 때 첫빠따로 보는 광경이 "제일 불행핼 때 제일 행복했던 시절을 생각하는 것보다 불행한 건 없다" 아우성치는 젊은 남녀,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다들 아다시피, 프란체스카의 남편 란체오토 말라테스타가 암만봐도 미남 동생 파올로하고 마누라가 뜨거운 관계인 거 같아 증거를 잡기 위해 전쟁에 나간다고 거짓말을 꾸며 전 군을 이끌고 나갔다가 살짝 돌아와보니,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두 잡년놈들이 귀네비어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흥분, 그만 서로 막 더듬기 시작하는 걸 눈으로 봐버린다. 그리하여 그걸 본 눈알이 확 뒤집어져 허리에서 긴 칼을 꺼내 단칼에 허리를 두 동강 내 죽여버린 사건. 난 이 장면이 머리 속에서 제일 먼저 확 떠오르며 이 작품이 결국 이 비슷한 비극으로 끝나고야 말겠구나, 짐작을 했다(책 속에서도 이치로의 입을 통해 이 일화를 소개하기도 한다. 나처럼 자세하게는 아니지만). 아직까지 화자 '나' 지로와 형수 '나오' 사이의 러브라인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그까짓 거야 작가가 마음 먹으면 한 시간 안에라도 벌써 불씨 튕겨 황소라도 한 마리 잡아먹고 남게 만들 수 있는 거니까.

 형으로부터 이런 지시 또는 부탁을 받은 지로는 어떻게 했을까? 1913년. 이 책이 나온 시기인데, 설마 시동생하고의 불륜을, 남편의 권고로 만들어내는 여인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지 않으시겠지? 지로는 거절한다.

 여기까지가 2장 까지 내용. 근데 3장, 4장으로 진입하면 또다른 주제가 등장해버린다. 그리고 거의 모든 장편소설의 경우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제가 진짜 주제. 이걸 여기서 얘기해야하나? 마지막 주제가 진짜 주제라는 말도 괜히 한 거 같은데 말씀이야. 그게 진짜 주제면 1장과 2장에서 나오는 흥미진진한, 흥미진진할 거 같은 주제는 다 구라야? 아이고, 입 간지러워.

 하여간 소세키, 이야기는 정말 잘 만들어낸다. 비록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나쓰메 소세키답게 부르주아 인텔리겐챠를 위한 그들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참 흥미를 자아내는 에피소드를 만들고 그걸 또 이리저리 얽어매 진짜 하고 싶은 얘기로 이어가는 거. 근데, 읽어보라고 권하지는 않을 거 같다. 물론 당시에 했던 문명비판이 오늘날까지 유효하긴 하지만 좀 진부하거든. 물론 내 생각에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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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7-2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쓰메 소세키는 신문연재때문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감이 없잖아 있는데 ㅎㅎ 그게 또 그냥 잘 읽힌단 말이죠. 암튼 이 사람은 별것아닌 이야기를 길게 잘 풀어놓는 재주만큼은 매우 빼어난 것 같습니다.

Falstaff 2017-07-24 11:4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옙. 그래 앞에서 열라 했던 이야기가 뒤에선 전혀 안 나오는 재미난 경우도 그렇고요. 소세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그의 작품을 이리 많이 읽게될 줄은 몰랐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이야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라서 그런가봐요. ㅋㅋㅋ

han22598 2023-08-17 0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팬은 아니지만 많이 읽으셨단 말씀이죠? ㅎㅎㅎ

Falstaff 2023-08-17 05:55   좋아요 0 | URL
옙. 팬 까지는 아닙니다. 책은 좀 읽었습지요. ㅎㅎㅎ
저는 겐자부로 팬입니다. 요새 새 책이 나와 다음 달에 읽을 거 같습니다. ^^
 
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61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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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취향 아님. 사드 남작이 쓴 <미덕의 불운>을 읽었을 때의 불쾌감하고 거의 완전히 반대방향에 자리잡은 불쾌감. 에잇. 언젠가 한 번 인용한 거 같은데, 맞다, 플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국일미디어 판의 독후감이었다, 김정은과 임원희 주연의 <재밌는 영화>에서 와타나베 형사로 분장한 김응수가 김정은과 호텔에 들어 하신다는 말씀이, "자기 나 좀 더 때려줘, 아 좋아, 더 때려줘!" 배꼽을 잡은 적이 있다. 바로 이 현상의 원조가 기어이 책을 다 읽고 책 뒷장에 써놓은 걸 읽고서야 알았는데 바로 이 책의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라는 인간이란다. "사도마조히즘의 성적 강박"을 보고서야, 아하, 마조히즘,할 때 마조흐가 이 책의 저자 자허-마조흐라는 거구나! 이런 형광등. 그걸 이제 알았다니. 그러니 당연히 사드의 정 반대편에 딱 그만큼의 불쾌감을 느낀 것이지.

 어제 읽은 소위 여성문학, 그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은 혹시 모르겠다. 이 책 읽으며 통쾌감을 만끽하실 수 있을지. 주로 담비 가죽을 대표로 하는 최고급 모피를 입은 비너스. 남국의 따뜻한 기후 속에서 사랑과 섹스와 질투와 장난을 무차별적으로 해대던 여신 비너스가 추운 나라 독일로 왔으니 여신은 모피를 입을 수밖에. 비너스를 찬미하여 찬 대리석 석상의 발가락에 입맞춤하면서 성장한 제베린은 모피를 입은 비너스와 딱 비슷하게 생긴 스물 네살의 어마어마한 부자 과부한테 홀딱 빠져, 그이의 남편이 되길 요구하지만 뺀찌. 그러자 기어이 젊은 부자 과부 반다의 노예가 되길 희망하여, 드디어 나온다, 자기 나 좀 더 때려줘, 아 좋아, 더 때려줘! 연발탄.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을 학대하고 다른 남자새끼와 깊은 관계를 맺어 몸과 마음에 치명적인 아픔/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더욱 여인을 사랑하는 완벽한 변태. 아참, 변태성욕을 가진 사람도 '성소수자'에 포함시키는 건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거다. 아시는 분 있으면 진정 답글 바람. 난 변태성욕을 가졌건 말았건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다. 남한테 원하지 않는 고통을 주지 않는 한, 그분들이 서로 고통을 주고 받으며 아 좋아, 하건 말건 그건 내 일이 아니다. 알아서 즐기시면 될 일. 나하고 다른 것일 뿐.

 근데 자허-마조흐Sacher-Masoch 이 양반이 19세기 초반 1836년 태생이라 당시 분위기 상 노골적인 변태성욕을 설파하진 못했을 터. 그리하여 불행하게도 사드 남작만큼 용감한 초지일관으로 밀어부치지 못하고 반다Wanda 여사께서 제베린에게 모진 고통을 통해 노예가 되고싶어 하는 버르장머리를 고치게 했다는 결론으로 가는 건, 비록 내가 이런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경멸하지만, 참혹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뭐 세상이 그랬으니.

 결론. 이 책 읽고 좋다하시는 분 수없이 많다. 근데 난 추천 않는다. 읽고 싶은 분은 내가 굳이 추천하지 않아도 찾아 읽으실 것이니 이 정도면 뭐,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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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의 여명 - 신화와 민담과 판타지 펭귄클래식 44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지음, 서혜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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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전래 구전 이야기. 한 겨울 밤이라면 화로에서 군 밤 꺼내 까먹으며 할머니한테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 말로만 들었던 예이츠의 명문을 기대했다가, 억지로 다 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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