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펭귄클래식 59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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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버로스는 미국에서 케루악과 더불어 비트 세대의 대표선수로 인식되고 있는 작가라고 한다. 하는데, 하지만, 난 <길 위에서>는 정말 가슴에 팍 와 닿게 읽은 반면 버로스의 <정키>하고 <퀴어>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지금 생각나서 <길 위에서>를 검색해보니까 종전 후에 잭 케루악이 앨런 긴즈버그, 윌리엄 버로스, 닐 케시디와 함께 미대륙을 횡단하고도 모자라 멕시코시티까지 휘저으며 온갖 골통짓을 한 걸 토대로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 작품에선 젊은이들이 한바탕 난장판을 벌이는 것이 전후 세대의 절망과 무대책과 더 이상의 도덕률을 폐기해버리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처럼 받아들였는데 윌리엄 버로스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와 주제가 케루악과 비교해 훨씬 과격해서 그런가 작품에 공감하기는커녕 좀 거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케루악은 알콜의존증과 무책임에 매우 근접한 프리섹스, 버로스는 마약과 동성애의 범벅. 둘 다 대책없는 청춘들이긴 하지만 버로스는 케루악보다 약간 더 나이든 미국인이 (버로스 스스로가 저지른 범죄, 실수로 권총을 발사해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으로 여길 수 있는) 모종의 사건과 관계하여 귀국할 수 없는 처지에서, 어디에서 돈이 꾸준하게 생기는지는 몰라도 멕시코시티 내에서 특별한 돈벌이에 관한 언급 없이 끊임없이 마약성 약물과 동성애를 갈망한다. 분명 남의 이야기인데 왜 내가 불편할까?  더러운 마약을 이야기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자가 남자에게 사랑이 아닌 욕정을 느껴 끊임없이 쫓아다니기 때문일까. 남자가 여자에게 욕정을 느껴 끊임없이 쫓아다니는 걸 읽으면서 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가? 아니다 그것도 불편하다. 두 경우 다 매우 불편하다. 그럼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불편하다고 얘기하는 것에 관해 이의 없으리라. 글로 쓴 건 지워지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일은 매우 불편했다. 당신이 이 책을 어떻게 평하는지에 관계없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버로스를 읽지 않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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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2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마지막으로 버로스를 읽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잭 캐루악이 버로스보다는 왜 좀더 비트제너레이션의 대표처럼 여겨지는 까닭도 알겠더군요;; ㅋㅋㅋㅋ

Falstaff 2017-08-22 10:29   좋아요 0 | URL
케루악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
하여간 버로우스, 정말 맘에 들지 않아요. 책 서문에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멕시코시티에서 약과 남자들한테 빠져 있을 동안 돈은 미국에서 늙은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부쳐주었다는군요. 에휴, 난 그런 아빠도 읎고 참 거시기.... ㅎㅎ

잠자냥 2017-08-2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는 케루악도 그닥; ㅋㅋ 근데 그래도 버로스 보다는 나은 듯;; ㅋㅋ 이 비트제너레이션을 다룬 영화 중에 <킬 유어 달링>이란 작품이 있는데요, 거기 보면 정말 버로스 뺀질이 부잣집 도련님... 으윽. 인간적으로도 아무런 정이 안가는 캐릭터입니다.

Falstaff 2017-08-22 11:11   좋아요 0 | URL
ㅎㅎㅎ 바로 오늘 아침에 어느분이 그 영화 소개해줬어요.
그거 보면 해리 포터로 유명한 다니엘 레드클리프한테 완전히 정 떨어질 수 있다고 하시던걸요. ㅋㅋㅋ 그래서 모르면 걍 지나겠지만 알게된 김에 한 번 볼까 궁리중입니다. ㅋㅋㅋㅋ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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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표제는 나쁜 소년이 서 있다라고 표기하고, 각 시의 제목은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식으로 써야 마땅하나 그딴 거 구분하지 않고 다 <우짜구저짜구> 이렇게 쓰겠다. 특수문자 골라오기 귀찮아서.

 

  처음 들어보는 시인. 근데 많고 많은 이름 가운데 허연이 뭐야, 허연이. 그럼 미세스 허연의 이름은 하얀이야? 이건 뭐 그냥 지나가는 말. 하여간 책 뒤에 나오는 허연의 약력을 보니 1966년에 태어나서 1991년에 현대시세계신인상으로 등단했으며 이 시집은 2008년에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42세 때. 민음사 시집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목차 바로 앞 페이지에 자서自序라고 스스로 시집을 시작하는 말씀이 적혀 있는 거. 허연은 자서를 어떻게 써놓았는가 하면,

 

 

 自序

 

 결국,

 범인(凡人)으로 늙어 간다.

 다행이다.

 

 200810

 허연

 

 

  기껏 마흔 두 해를 살아보니 젊어서 시인이라고 해봤자, 허연의 말대로 마흔 넘으니 결국 범인, 평범한 사람으로 나이 먹어간다는 고백. 근데 그게 다행이라는 천만다행의 자각. 주변에 시인으로 등단한 사람 몇 명 있다. 이들의 공통점? 가관. 시인이 가관이란 뜻이 아니라 시인의 주변에 있으면서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지망생들, 시인에 대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환상을 갖고 시인을 바라보는 보통 인간들의 몰지각한 우상숭배가 꼴불견이란 말이다. 등단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법이다. 한 번은 내가 등단 시인을 우상숭배하는 시인 지망생에게, 너도 시인이다. 시를 쓰고 읽고 진짜로 좋아 몇 수를 외고 있으면 그이가 시인이지 꼭 등단을 해야 시인이냐, 했다가 만장하신 신사숙녀 앞에서 개망신 당한 적도 있다. 물론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뜻을 굽힐 내가 아니라서 아직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다만 등단하지 않아서(이것도 못해서가 아니다) 공인받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근데 내가 개망신 당할 때, 문제의 그 시인새끼는, 숱한 인간들이 자신을 숭배하는데 그게 기분나쁠 이유가 없으니 그저 싱긋, 웃음 짓고만 있었다. 분명히 그랬다. ? 자신 스스로 조금은, 어느 정도는 그냥 보통 인간과 애초부터 다른 종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리하여 젊은 시절을 보통 인간과 애초부터 다른 종자로 살기 위해 시를 쓰고 월月도 아니고 연年 5백만 원 안팎의 수입으로 늙으신 부모 등골을 휘게 하며 살다가 이제 나이 먹으면 대개 젊어서 숭배받으며 몸에 익었던 다른 종자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급기야 나도 그냥 보통인간임을 자각하는데, 그걸 다행으로 생각한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허연의 두 번째 시집이라고 하는 이 책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눈알이 뚫어지게 읽어보면 크게, 그동안 시인의 건강에 문제가 있었는데 혹시 귀를 비롯한 이비인후과 질환이 아니었는가 싶고, 분명 피라미드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사막지대를 여행했으며, 그간 스스로의 상태를 빙하기로 표현하는 일종의 혹한기를 보냈다고 여기며, 시를 쓰는 것도 일종의 자연상태, 즉 생태의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 거처럼, 네 가지 부류boundary로 나눌 수 있을 거 같은데 당연히 예외는 있는 법이라서 여기에 포함시키기 애매한 시도 물론 있다.

  ①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상이라 그걸 시로 써놓았을 경우에 독자가 시인과 더불어 같이 백년 된 병원에서 귀여운 환자가 되어 베토벤도 있는데 이 정도야, 할 수도 없고(<박수소리> 40), 같은 모래 언덕에 서서 저 멀리 지평선에서 푸른 하늘이 1차 하늘, 2차 하늘, 3차 하늘, n차 하늘이 다 모여 마치 바다 같아서 그 위를 지나는 위그르 족(위그르 족이라면 이거 고비사막일 텐데 끙) 처녀는 틀림없이 바다 위, 물 위를 걷는 것(<바다 위를 걷는 것들> 34)처럼 보이길 바라지는 않는다.

  내가 주목한 것은 슬픈 빙하기 시리즈다. 이제 시인이 자서에서 밝힌 것처럼 어느덧 범인, 평범한 보통사람이 됐다. 평범한 보통사람? 시인이 보는 보통의 인간은 이런 종류다.

 

 

 

  슬픈 빙하시대 2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날 그 병과 헤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한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 말 한마디가 힘겹고, 돌아놉는 것이 힘겨울 때 그때 난 파란색이었다.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같이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시는 읽는 사람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으며 그런 자의적 해석은 언제나 정당하다는 인식 아래서 이 시에 관해 말하면, 이 시야말로 지랄 염병을 하는 시다. ‘한 번 앓았던 병은 집요한 이념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병의 한가운데 있을 때 차라리 행복했다는 진짜 시인이 병을 앓았던 시기와 경험을 뜻할 수도 있고 본격적으로 시를 썼던 한 시절을 은유할 수도 있으며, 이 두 경우를 적절하게 합해서 하나로 은유하고 있는 줄도 모른다. 나는 세 번째, 진짜 병을 은유하여 한 때 목숨걸고 시를 썼던 시절을 얘기하는 걸로 이해하겠다. 그러니 그때가 행복했겠지. 한데 그 시절이 정말 행복했었던 것도 세월이 지나 당시를 뒤돌아보니 그렇다는 말씀이다. 이제 시인은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을 자유스러움과 편함이 아니라 비굴과 설움으로 느끼며,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즉 술 마시는 일이,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즉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술 한 잔의 짜릿함 대신 출처불명의 난데없는 일이 돼버리고 만다. 여기까진 넓은 아량으로 봐줄 수 있는데(시인이 암만해도 열등감에 절어 있는 모양이다. 혼술의 아름다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니), 문제는 다음 연이다. 이제 40대가 되어 모든 죄가 다 어울리는 나이로 접어들었다고 선언하는 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이 어울리는 나이란 세상에, 없다. 그럼 20대는 폭력과 살인, 강간이 어울리는 나이? 물론 시인은 나와 내 친구가 이런 모든 죄와 어울리는 나이라고 했으니, 시를 쓰지 않으면, 이라는 가정을 달아 그런 범죄가 어울린다고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줄도 모르겠으나(암만해도 어리광이 맞는 거 같음. 이런 오만이 어딨어!) 몇 번을 읽어보고 또 읽어봐도 기분 나쁘기 짝이 없다. 더구나 짧은 마지막 연, 청춘이 갔기 때문에 죄가 어울린다니. 이런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창백한 시인의 허약한 고백. 청춘이 백번을 떠나가도 모든 죄가 어울리는 나이란 세상에 없다. 사랑하지 않는 죄 말고는. 시인들이 흔히 범하는 죄. 그냥 읽으면서는 참 맛있는 문장들을 나열하면서 속으론 나약하고 썩는 냄새가 나는 말을 교묘하게 숨기는 일. 그게 시적 범죄다.

  다른 시 하나 더 읽어볼까?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굳은 채 남겨진 살이 있다. 상스러웠다는 흔적. 살기 위해 모양을 포기한 곳. 유독 몸의 몇 군데 지나치게 상스러운 부분이 있다. 먹고살려고 상스러워졌던 곳. 포기도 못했고 가꾸지도 못한 곳이 있다. 몸의 몇 군데

 

  흉터라면 차라리 지나간 일이지만. 끝나지도 않은 진행형의 상스러움이 있다. 치열했으나 보여 주기 싫은 곳. 밥벌이와 동선이 그대로 남은 곳. 절색의 여인도 상스러움 앞에선 운다. 사투리로 운다. 살은 굳었고 나는 상스럽다.

 

  사랑했었다. 상스럽게.

 

 

  살은 굳었다는 표현은 물론 굳은살을 의미하겠다. 발뒤꿈치! 또 직업에 따라 몇 군데가 있겠지. 주로 손바닥이거나 손가락 부분에 많이 있는 듯. 그건 좋은데, ‘상스럽다는 건 뭘 의미할까? ‘상스럽다의 사전적 뜻은, ‘말이나 행동이 보기에 천하고 교양이 없다. 먹고 살기 위해서 말이나 행동이 보기에 천하고 교양이 없었을까? 차라리 상처라면 지나간 일인데 굳은살은 아직도 진행중이니까 그야말로 상스럽지 않을 방법이 없게 상스러운가? 시인이 쓰는 말을 사전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나도 그건 안다. 시인에게 상스러운 일은? 시를 쓰는 일 자체. 혹은 시 작업의 결과물로서의 시. 그게 상스러웠을까? 물론 반어 혹은 은유로 상스럽다는 거겠지만. 시 작업을 염두에 두고 굳은살, 즉 시를 쓰기 위한 고뇌와 안간힘을 상스럽다고 했을 거라고 믿겠다. 절색의 여인마저 시인의 굳은살을 보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이 시와 앞의 <슬픈 빙하시대2>를 함께 보면, 시를 쓰느라 시인의 뇌 곳곳에 굳은살이 박일 고통의 시기가 그래도 행복했던 것이고, 시를 쓰지 못하는 단계, 그리하여 시인의 자서처럼 범인凡人으로만 늙어가 드디어 모든 죄가 어울리게 됐을 때 시를 썼던 청춘이 간 것이 불행했을 것이다. 다만 시를 쓰는 너만 독야청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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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의 악마 창비세계문학 51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정소영 옮김 / 창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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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에서 발간한 <피의 꽃잎들>을 읽고 응구기 와 티옹오(민음사에선 '응구기 와 시옹오'라고 표기)의 다른 작품을 주저없이 골라 읽었다. 먼저 개인의 호오에 관해 언급하자면 <피의...>가 이 작품보다 더 좋았다는 걸 밝히는데, 그렇다고 이 책이 그냥 그런 범작이란 얘긴 결코 아니다.

 창비의 책소개를 보면 "아프리카 현대 문학의 거장이자, 치누아 아체베 등과 함께 탈식민주의 문학을 이끌어온...."이라고 해놓았다. 탈식민이란 의미에선 뭐 아체베와 동류로 묶는 건 동의하지만 두 거장의 문법은 확실하게 다르다는 말을 전에 <피의...> 독후감에 써놓은 거 같은데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아체베와 페르디낭 오요노로 대표하는 이들의 탈식민문학은 식민주의 하에 피식민민중들이 경제적, 심리적, 문화적으로 수탈을 당하는 모습을 그린 반면, 응구기 와 티옹오나 에스키아 음파렐레 같은 이들은 일단 정치적으로는 식민주의가 종식되어 독립된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 문화적으론 여전히 아메리카, 유럽, 일본에 의한 식민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수탈당하고 있다는 걸 주장하면서, 대한민국의 1970년대와 80년대에 숱하게 논의되었던 신식민주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종의 문학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보시면 되리라. 처음에 내가 <피의 꽃잎들>이 더 좋다고 했던 것은 '소설'이란 장르로 국한하여 평가한 결과다. <피의...>와 비교하면 <십자가 위의 악마>는 작가가 1977년 교도소 수감 중에 화장지에 몰래 쓰기 시작해서 그랬는지 (내가 생각하는)소설 장르로서는 과하게 웅변적이다.

 몇가지 담론이 나오는데,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세명의 노예에게 각각 5달란트, 3달란트, 1달란트를 남기고 주인이 먼 길을 떠나 오랜시간이 흐른 후 돌아오니 그동안 5달란트는 10달란트로, 3달란트는 6달란트로 불렸는데 반하여 1달란트를 받은 노예는 돈을 땅에 묻고 주인이 돌아온 후에 파보니 그냥 1달란트더란 얘기. 다른 동포나 찢어지게 가난한 백성을 착취하지 않고는 돈을 불릴 수 없더란 건데, 주인은 어쨌거나 그간 돈을 불린 두 노예에게 상을 내리더란 거. 여기서 주인은 식민상태를 종식하고 자국으로 돌아간 식민모국과 서구 선진국의 종합상사, 은행, 거대기업 등을 일컫고, 돈을 불린 노예들은 독립한 신생국의 힘있는 도둑과 강도들, 즉 매판자본가들을 비유한다.

 다른 하나의 담론은 표제와 같은 십자가 위의 악마. 난 성경을 읽어보지 못한 무식꾼이라 모르지만, 가난한 백성들이 악마를 십자가 위에 못박아 죽였다고 생각했으나 악마가 그리 쉽게 죽으면 그게 악마야?,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지 사흘만에 양복입은 신사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악마를 십자가 위에서 끌어내렸더니 악마는 다시 찬연하게 빛을 발하며 세상의 창공을 날아다니면서 지악스런 마귀짓을 하더란 얘기. 그땐 양복장이 신사들이 사흘이 지난 다음에 몰래 악마를 십자가에서 끌어내렸으나 요샌 억눌린 백성들이 힘들게 힘들게 악마를 잡아 십자가에 매달면 양복장이들이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조금도 눈치보지도 않고 그냥 십자가로 달려가 악마를 풀어준다나. 당연히 악마는 서구 자본주의의 대표선수들이고 양복장이들은 제삼세계의 매판자본가들.

 여기에 한술 더 떠 신생 독립국인 아프리카의 모처에선 도둑과 강도들의 대표선수 선발대회가 열리고 대회에 잠입한 노동자, 학생 등의 양심세력은 매판자본가들과 결탁한 경찰, 군인, 사법세력에 의해 거덜이 나는 광경이 장황하게 설파하여, 나로 하여금 이 소설을 '과하게 웅변적'이라고 평가하게 만들었다. 응구기가 김지하의 <오적>을 읽고 조금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이 씬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케냐에 자신타 와링가, 라고 하는 여여쁘고 (당연히) 새까만 아가씨, 아니, 미혼모가 있는데, 어렵게 취직한 무지하게 큰 건설회사에서 속기사 겸 타이피스트로 겨우 며칠을 근무하다가, 사주 영감이 입사 당일부터 은근히 추파를 던지더니 급기야 하루는 겁도없이 덥치고 말았지만, 건강한 아가씨가 늙은 영감 하나를 당해내지 못할손가, 딱부러지게 거절했더니 다음날 해고 당했다. 해고 당한 바로 그날, 그동안 죽네사네 사랑해 마지않던 남자친구 새끼한테 얘길 했더니, 넌 원래가 헤픈 년이구나, 곧바로 이별 통보를 받았고, 다 쓰러져가는 빈민촌의 집구석에 힘없이 도착, 이번엔 임대료 인상에 동의하지 않아서 졸지에 거리로 내쫓기고 만다. 와링가 아가씨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모부의 주선으로 돈 많은 늙은이 하나를 만나서 우여곡절 끝에 정부가 됐다가 덜컥 임신을 해버렸더니 이 늙은이가 하시는 말씀이, 열 일곱살 먹은 청소년에게 하시는 말씀이, 넌 약도 안 먹고, 루프도 안 하고 도대체 뭘 한 거야?  그 애가 내 아이인줄 어떻게 알아? 해서, 딸을 하나 둔 애엄마. 딸은 지금 외할머니 손에서 잘 자라고 있다.

 또 한 명의 주인공, 당연히 여주인공이자 진짜 주인공인 와링가 아가씨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는 청년이 등장한다. 거부, 큰 부자의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사업체를 물려받아 경영하기 바라는 아버지의 뜻과는 완전히 반대로 미국에 건너가 음악, 특히 작곡을 전공하고 돌아온 청년이다. 청년은 오선에 표시할 수도 없는 특유의 아프리카 악기와 아프리카 성악을 자신이 공부한 클래식과 융화시켜 거대한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위해 끊임없이 궁리하고 노력하는 순진, 열혈파. 난 이 청년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클래식과 아프리카 음악을 훌륭하게 섞어 진짜로 오라토리오를 작곡한 한니발이란 아프리카 사람을 떠올렸다. 바렌보임이 시카고 교향악단을 지휘한 <아프리카의 초상: African Portrait>.

 

지금은 표지 바꾸고 다른 곡 삽입해서 발매하지만, 국내 시장에서 품절이다.

 

 이 음반은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도착해서 원주민들을 무지막지하게 학살하고, 자원을 약탈해가고, 사람을 산 채로 잡아 유럽과 아메리카에 노예로 파는 세월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화해를 시도하는 거대한 오라토리오로, 재즈와 아프리카 토속음악이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근사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근데, 아프리카, 그중에서도 응구기의 조국 케냐에선 매판자본을 백성들이 효과적으로 몰아내고, 우리의 용감하고 건강한 와링가 아가씨는 죽고 못사는 애인 청년과 근사한 연애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딱 하나의 힌트를 드린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난 주먹을 쥐고 두번째 손가락과 세번째 손가락의 마디로 내 머리통을 한대 쥐어박았다. 아이고 짱구야, 아까 그거 복선이었어, 복선. 그것도 눈치 못챘냐! 하면서. 책을 다 읽고나서야 아까 그게 복선이었다는 걸 알아채게 만드는 소설은, 단언컨데, 잘 쓴 소설이다. 그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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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샤
아이작 B.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다른우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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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원수들, 사랑 이야기> 이후 6년이 지나, 노벨 문학상을 받은 1978년에 발표한 수작 <쇼샤>. 근데 안타깝게도 이 번역서를 찍은 출판사 '다른우리'가 마지막으로 책을 발간한 것이 2013년. 한 마디로 망한 거 같다. 더 갑갑한 건 이 아름다운 책을 간행할 권리도 그냥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것인지 그후로 이 작품의 판매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 <원수들, 사랑 이야기>를 참 재미나게 읽고나서 아이작 싱어의 작품을 뒤지다가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이 책을 찾던중 깨끗한 중고책을 사서 참 보람찬 일박이일을 보냈다.

 <원수들...>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뉴욕에 자리를 튼, 즉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유대인 남자와 현재 아내를 포함해서 세 여인(지금 마누라,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전처, 러시아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모면하고 도망쳐온 정부)을 슬프고도 유쾌하게 그리고 있는 반면, <원수들...>보다 6년 늦게 발표한 <쇼샤>는 전쟁 바로 직전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거리 클로크말라 가에서 끔찍한 불안과 죽음의 공포로 두려움에 떨고 있으나 차마 오랜 세월 태를 묻고 살던 폴란드를 떠날 수 없기도 하고, 실제적으로 폴란드 땅을 벗어나기가 무척 힘든 상황에서,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말살을 눈 앞에 번히 예언했던 유대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예술을 하고, 공연도 기획하면서 이를 통해 사회적 성공을 (그 와중에도) 기대하는 실제적 삶의 모습,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조건없이 사랑하며 헌신하고 희생을 무릅쓰는 아름다운 광경을 그리고 있다.

 남자 주인공 아론이 10번가 아파트에 살 때, 그냥 조건없이 마음이 끌렸던 유로지비와 매우 가까운 성향의 동갑내기 계집아이 쇼샤. 랍비의 총명한 아들 아론은 부담없이 쇼샤의 집에 놀러가 즐겁게 지냈던 것인데 세월이 지나 시절을 돌아보니 자신이 쇼샤하고 놀고싶어 했던 것이 마치 자력과 같은 끌림 때문이었더라는 걸, 주변의 유부녀들과 내연의 관계를 갖기를 서슴지 않는 단계로 진화한 상태에서 불현듯 깨달아버리고 만다.

 전쟁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는 폴란드 땅에서 돈과, 명예와 심지어 미국으로의 탈출까지 보장해줄 수 있는 온갖 조건을 물리치고 아론은 소녀시절 이후 키와 체격도 별로 자라지 않은 병약한 쇼샤와 함께 폴란드에 남기로 결정한다.

 아직 중고책으로는 얼마든지 읽어볼 수 있으니 그분들을 위해 스토리는 여기까지. 이 정도의 소개도 과했다.

 작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스스로가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이디시 언어로 소설을 쓴 사람이다. 이디시어. 독일, 폴란드, 러시아 등 북부 유럽에 분포해서 살았던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의 언어. 물론 그가 작품을 문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이디시어로만 간행, 판매한 건 아니고 거의 모든 작품을 다시 영어로 바꾸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학상을 탄 것이겠다. 이건 다음에 소개할 응구기 와 티옹오가 케냐어로 책을 쓰고 곧이어 영어로 다시 출판해 요새 매년 강력한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거와 비슷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이디시어는 물론이고 영어책도 한글처럼 자유자재로 읽지 못하니 한글 번역본이라도 이이의 책을 좀 다양하게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 2017년 8월 현재, 아이작 싱어의 번역본은 동화책 두 권 빼고는 <원수들....> 하나밖에 없다.

 재미있는 책. 그러나 어쨌든 절판 상태에 있는 책을 두고 이렇고 저렇고 더 얘기를 보태려하니 솔직히 힘이 빠진다. 등장인물들 사이에 얽히고 설킨 복잡미묘한 관계와 약간의 질투를 포함한 상호인정 같이 흥미있는 '관계'도 많이 나온다. 사람들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관계' 아닌가. 내가 죽고 살지 못할만큼 사랑하는 정부가 요새 내 눈에 안띄게 만나 진한 사랑을 나누는, 그러니까 정부의 정부. 그와 나의 관계. 참 복잡하지? 이 책에선 복잡하지 않다. 대신 쌈박하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믿을 건 믿는다. 내 아내의 정부에게도 내가 진실하게 신뢰할 수 있는 면모 역시 있는 법. 그거 인정하는 힘, 어디서 나오는 거야? 유대인의 합리성에서? 아니면 인간 누구나에서. 난 두번째 경우에 만원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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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코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1
존 치버 지음, 박영원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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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권의 왑샵 가문 이야기책에 이어 세번째 읽은 치버. 이이의 작품에 관해 별로 알지 못했고, 무엇보다 책 표지 그림이 너무 드러워서 후져서 <팔코너>는 읽지 않으려고 했었다가 어? 거기다가 품절 사태까지, 왠 품절? 거 읽고싶은 생각 안 들었는데 잘됐네, 이런 대쪽같이 곧은 마음가짐으로 잘 지내고 있다가, 친애하는 서재 동무님께서 아주 은근하게 권하시는 걸 이기지 못해 사서 읽고는, 아이고야, 어찌하여 아직까지 이 책을 모르고 살았던가, 그동안 안 읽고 지낸 세월이 아쉬운 바 컸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찍은 것이 중쇄가 아닌 중판인데도, 보시는 바와 같이 드런 후진 표지를 바꾸지 않은 것에 관해 여전히 불만이란 건 좀 밝혀야겠다.

 세상에서 제일 분위기 살벌한 곳? 해병대 막사? 아니다. 단언컨데(이 말 무척 좋아했다가 광고에서 이병헌이 '단언컨데 메탈' 어쩌고 하는 바람에 잘 안썼다) 세상에서 가장 살벌한 동네는 남자 교도소. 내가 사는 동네의 조폭 아저씬 감방 안에서 드런 꼴 안 보겠다고 바늘로 위 아래 눈꺼풀을 꼬매버렸다는 전설적인 소문 났던 곳이 남자 교도소 내부다.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유일한 여자는 주인공 에제키엘 패러것과의 사이엔 이미 사랑의 흔적이라곤 남아있지 않는 미모의 아내뿐이다. 에제키엘 패러것. 2차대전 참전용사이자 대학교수, 그리고 마약중독자.

 아참, <팔코너>에서 팔코너가 뭔지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다. 한 세계를 일컫는 말. 이곳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리라. 이 문장이 딱 들어맞는 곳. 교도소 이름이다. 누구한테도 등을 찔릴 위험이 있어 절대 뒤돌아서면 안 되는 곳. 교도관에 의한 폭행과 인권유린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지만 호소할 수도 없는 곳. 어느새 남자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곳. 으때, 살벌하지? 더구나 <쇼생크 탈출>처럼 교도소 안엔 누군가가 독방에 갇히고 줘 터지는 댓가로 야노비츠와 마티스가 노래하는 모차르트도 들리지 않는다. 이 노래. 아시지?

 

 아, 내가 오늘 왜 이리 횡설수설이지? 어제 탕수육 먹으면서 고량주를 너무 벌컥벌컥 들이켰나? 하긴 마실 수 있을 때 마셔야 한다. 남자들, 언제 교도소 구경할지 모른다. 거기가면 별 지랄을 해도 고량주 냄새도 못 맡는다. 교도소 구경하는 거? 물론 파렴치 악당들이 주로 드나들지만 갑작스런, 난데없는 모욕을 제어못하고 순간적으로 화딱지를 내면서 당신도 누군가를 푹 쑤실 수 있다는 거. 그럴 확률이 남자가 여자보다 무척 높다는 건 이미 다 알려진 사실. 아, 책의 주인공 패러것도 이 경우에 속한다. 물론 당사자야 자기 형을 때리긴 때렸지만 죽은 진짜 이유는 형놈이 너무 취해 넘어지면서 자기가 스스로 벽난로 모서리에 머리통을 처박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는 해도. 쯧쯧. 마약중독자만 아니었더라도 어떻게 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성경책에 손을 얹고 진실만을 얘기하겠노라 선언한 패러것의 아내한테, 마약중독자의 가족으로 살면서 가끔 문제가 닥치진 않았습니까? 하고 물어보니, 증언대 위에서 남편 페러것을 바라보며 한 번 미소를 짓고는, 예, 가끔 그랬습니다, 라고 답변하는데,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여, 당신들 살면서 남편 때문에 문제에 부딛히지 아니하고 여태까지 살았는가, 라고 패러것은 아내가 아니라 재판장에게 호소하고 싶었으리라. 지금 살인사건을 심리하고 있는 건지 만성 마약중독을 심리하고 있는 건지 말야. (책엔 분명히 "만성" 마약중독이라고 나오는데 혹시 이 글 읽는 의사 선생 계시면 좀 가르쳐주시라. 만성 마약중독이 맞는지, 습관성 마약중독이 맞는지. 써놓고 보니 만성이 맞는 거 같기도 하다. 중독이란 말 안에 이미 습관성이란 의미가 포함되니)

 근데 왜 패러것 교수가 더러운 마약중독자가 됐을까? 세상에 둘 있는 더러운 종자들 가운데 하나(나머지 하나는 거짓말장이다). 국가가,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가 패러것이 마약중독자가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가정인데, 조금은 이해가 가고 조금은 설마 그렇게 했겠어? 하는 기분. 세계대전에 참전한 패러것. 돌격 앞으로! 외치며 적군을 쏴죽이고 찔러 죽이고, 진짜 죽었는지 한 번 더 쏴보고, 찔러보고, 바로 옆에서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손톱만한 금속에 목이 관통당한 입대 동기, 차라리 즉사라도 하지 숨은 안 끊어지고 살고는 싶고 살 확률은 없고 게다가 말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고통까지 두 눈 번히 뜨고 바라보게 만들기 위해 미합중국의 위대한 군대에선 병사들에게 약한 모르핀, 휴대용 모르핀 성분의 약물을 허벅지에 콱 찌르게 지시했다는 거다. 아무리 위대한 미국이라지만 <팔코너>처럼 유명한 소설에서 치버가 거짓주장을 했다면 소송이라도 하지 그냥 문학적 표현 운운하면서 조용히 넘어가지 않았을 거 같기도 하고 뭐 좀 생각이 복잡해지는데, 그건 대한민국 충청남도 영동군 노근리에서도, 황해도 신천에서도 그리고 몇군데 더 있지만 뭐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좔좔 써대긴 좀 그렇고, 하여간 타국의 양민들을 학살하는데 그게 맨정신이었겠을까, 의심이 들기도 해서다. 약한 정도의 마약, 그래서 그냥 약물이라고 칭하는 수준이었던 것이 제대 후 제대로 된 마약, 히로뽕, 물뽕, 모르핀, 아편 등등의 양질의 마약을 만났으니 환각의 아름다움에 관한 수준이 애초부터 달랐을 터, 어떻게 본격적인 중독자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말이지. (근데 지금 뭐하는 거야, 마약 중독자 변명해주는 거야, 뭐야. 반성하겠다.) 패러것이 얼마나 마약에 쩔어 살았던지, 패러것의 담당의사는 팔코너 안에서도 매일 일정량의 마약 대체제를 복용할 수 있도록 처방했을 정도다.

 자, 어느 틈에 벌써 이야기는 다 나왔다. 막을 수 없는 가족간의 불화로 형을 충동적으로 살해했고, 국가기관에 의하여 마약에 중독되었으며, 아내와는 어떻게 먹는 것부터 체질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안 빼고 아주 정 반대에다가 둘 사이에 사랑이란 환상은 남자의 유방이나 꼬리뼈, 75세 남자의 페니스같은 흔적기관처럼만 존재하고, 현재 처해진 곳에선 남성간의 동성애와 폭행, 인권모독및 유린이 자행되고 있는 상태. 저 멀리 '더 월 The Wall'이란 교도소에선 민간인 스물 아홉명을 인질로 잡아두고 교도소 내 폭동이 일어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기대 반 걱정 반에다가, 우리도 한 번 해볼까 싶어서 낼 모래 죽을 팔자인 힘없는 노인네 치킨 넘버 투(넘버 원은 얼마 전에 죽었단다)는 급기야 매트리스에 불까지 싸지르지만 세상에 맘대로 되는 일 있어? 이 평생에 걸친 절망의 구렁텅이. 그게 인생이다, 인생. 팔코너 밖이라고 뭐 뾰족한 거 있나?

 얼마 지나 이 책 꼭 다시 읽어볼 거다. 지난 화요일에 폭음을 하고 수요일에 책을 읽어서 컨디션이 진짜 좋지 않았다. 그때 독후감을 다시 쓴다면 어떻게 쓸까, 나도 몹시 궁금하거든!



* 혹시 책 구입하시려는 분들, 절대로 페이지에 떠있는 '출판사 책소개'는 읽지 않았기를 바란다. 아주 제대로 된 스포일러. 끝장면까지 다 나와있다. 그거만 읽고 어디 가서 나 <팔코너> 읽었는데 말야, 이렇게 얘기해도 될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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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8-14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드런 책표지 ㅋㅋㅋ 그러고 보니 정말 드럽네요. ㅋㅋㅋㅋ 마약과 동성애 조합 소설의 종종 있는데(윌리엄 버로스 <퀴어> 같은...) 보통 그런 조합은 지루했거든요, 근데 이 책은 끝까지 흥미진진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한 몇 년 뒤에 다시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에요.

Falstaff 2017-08-14 14:47   좋아요 0 | URL
제가 이 책에 관해서 주구장창 주장해온 것이 표지 그림이 드럽다는 건데, 중판임에도 바꾸지 않았어요. ㅠㅠ
문학동네하고 저하고 합이 맞지 않는 건 확실한가 봅니다. ㅎㅎㅎ
며칠 있다가 <퀴어> 읽을 거예요. 원래 버로우스가 별로라고 생각했다가 그래도 한 권 더 읽고 혹시 마음 바뀔까 싶어서 골랐던 겁니다. 또 마음에 안 들면 완전 끝이지요 뭐. 그때 작품이 <정키>였나, 아마 그럴 겁니다.

coolcat329 2023-01-16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가 정말 후져서 저도 살까말까 했는데 이 글 읽고 사기로 했습니다. 최상 중고가 있어서요~~^^

Falstaff 2023-01-16 16:1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좋은 선택하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