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어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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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란의 소설 목록을 보면 <식빵 굽는 시간>, <국자 이야기>, <혀> 등, 내가 읽어보진 않았지만 먹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많아 <복어> 역시 치명적인 맛과 독을 지닌 음식 재료에 관한 재미있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하고 기대했다. 또 한 편에는, 책 표지 펠릭스 발로통이 그린 <빨간 의자 위의 여인>에서처럼 한 여인의 권태, 절망, 고독 또는 소외 같은 주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언제나 맛있게 먹는 얘기가 권태나 절망 같은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근데, 이 책은 주로 복어의 독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상황에 대하여 서술했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자살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하는 용도.
 모든 예술 장르가 생겼을 때부터 먹는 것과 연애, 그리고 죽음은 예술가들의 영원한 숙고이자 가장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조경란도 이 책 <복어>에서 죽음, 그 가운데서 인간만이 선택할 수 있는 죽음의 형태인 자살을 아주 심란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모두 4부로 구성. 한 부는 17개의 장으로 되어 있으니, 만일 제일 마지막 ‘작가의 말’을 4부의 한 장章으로 친다면 모두 17 곱하기 4, 68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홀수는 여자 주인공 ‘그녀’를 관찰하고 있고, 짝수는 남자 주인공 ‘그’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러니까 독자는 그녀와 그 사이를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머리를 써야 한다는 뜻.
 소설의 무대는 세계적인 두 도시, 서울과 도쿄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녀는 조각가, 그는 건축가의 직업을 갖고 있으며, 한 소설의 주인공들답게 실력이 아주 출중해 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실력자들이다. 여기까지는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알아두면 좀 도움이 되는 말. 물론 이야기 안 해줘도 전혀 난감할 일 없지만 그래도 먼저 읽었으니 좀 티를 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불문과 후배가 있었다. 부모가 일찌감치 세상 하직하시어 이 친구와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보육원에서 자랐다. 보육원 출신은 대학 못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워낙 착실하고 똑똑했던 후배는 어찌어찌해 대학 진학을 했고, 입학금과 등록금은 면제를 받았으며, 생활비 일부도 지원을 받았고 늘 박재삼과 천상병을 좋아했다. 학교 잘 다니다가 점점 동네 코흘리개 아이들하고 친하게 지내더니 덜컥, 퇴행이라던가 하는 정신병 진단을 받아 입원을 하고 얼마 뒤 퇴원을 하더니, 며칠 학교에 나오지 않다가 한강다리 교각 옆에서 떠오른 걸 누군가 발견했다. 선후배, 동료들 가운데 후배의 사인signature, 나 좀 구해줘, 도와달라고! 하는 걸 눈치 채지 못했으며, 동생은 군복무 중이었다. 여태 살면서 주위에 자살한 친구들 몇 명 있지만 이 후배의 죽음이 아직도 안타깝다. 내게도 분명히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신호를 보냈던 걸, 나중에 알았기 때문에. 그때 우리는 동생을 통해서 알았다. 일찌감치 돌아간 부모들 모두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것을. 자살, 심각한 우울증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건 유전적 요인이 클 수도 있다고 당시 의학 본과 다니던 친구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친구는 신경정신과가 아니라 정형외과 전문의가 됐다.
 <복어>의 그녀, 일본인 마에스트로 생선장수 아베 씨가 복어를 두 부분으로 해체하는 것을 눈으로만 배운다. 독이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 먹으면 행복해지는 부위와 먹으면 골로 가는 부위. 그러나 아베 씨는 그녀에게 결코 칼을 잡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조각가. 칼날을 다루는 일에 관해선 천부적 소질이 있는 편.
 1950년 서울 원남동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정여사는 피난지 학교로 전학한다. 피난지 마산고녀에 재학하던 중 집을 통째로 전세 내 살고 있던 집이 크기도 하고 몰려드는 피난민에게 공간을 내주지 않을 수도 없어 문간방에 손주 둘을 데리고 있는 할머니에게 셋방을 내주었다고 한다. 전시에 젊은 부부 없이 손주 둘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늙은이의 삶이 얼마나 팍팍 했겠는가. 어느 날, 문간방 할머니가 시장에서 생선의 알과 내장을 한 소쿠리 얻어와(또는 주워와) 찌개를 끓이는데 음식 냄새가, 한창 발육이 왕성한 시절이었던 정여사의 코에 매우 감탄할 만한 그랑제테로 날아들었다. 정여사 댁에서는 아무리 전시라 하더라도 음식 맛난 거 있으면 두 아이들 불쌍해서라도 조금씩 나눠주고 그랬는데 이 늙은이는 냄새가 그리 좋은 찌개를 끓이면서도 정여사에게 먹어보라는 얘기 한 마디 없이 그걸 아이들하고 맛나게도 먹더라고 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할머니와 두 손주는 이미 싸늘해진 주검으로 발견됐다. 아이들 둘 데리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 늙은 할머니는 알면서도 복어 알과 내장으로 탕을 끓여 마지막 만찬을 즐겼던 거다.
 이 1951년 실화는 언젠가 내가 써먹으려고 꼬불치고 있던 것. 근데 조경란이 <복어>에서 써먹었다. 이런 에피소드는 먼저 쓰는 게 임자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어부였는데, 먼 바다에까지 나가 직접 잡아온 복어로 맛난 국을 끓여, 할머니의 생일날, 할아버지와 아홉 살 먹은 아버지한텐 미역국을 올리고, 자신은 복엇국을 들이킴으로서, 남편과 어린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입술과 코 사이에 갑자기 주르륵 코피를 쏟으며 모로 넘어지면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버렸다. 복엇국을 맛나게, 그러나 장렬하게 들이마시고 생을 마감한 엄마를 두 눈으로 직접 본 그녀의 아버지는 어떻게 됐을까? 그건 내가 가르쳐드릴 수 없다. 직접 읽어보시라. 그럼 할머니의 유전자는 그녀 피 속에서는 안전할까? 죽고자 하는 마음, 그것의 정체는?
 심각한 우울증을 자각하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의 아버지. 도쿄탑을 보며 저기서 뛰어내릴 수 있을까? 묻던 형에게 죽으려면 3층에서 떨어져도 죽는다는 걸 알려준 그. 어느 날 형은 웃으면서 지금 곧장 집에 올 수 있느냐는 전화를 하고는 5층에서 자유낙하를 해버린다.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자세와 위치로 두 팔과 두 다리를 배열하고 머리통에선 피와 뭔지 모를 검붉은 액체를 쏟아내며 누워 있는 형.
 그녀와 그의 공통점은 자살 혹은 우울증의 유전자가 가문 대대로 유전하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책 <복어>는 시종일관 우울하고 어둡다. 간혹 그로테스크하다. 계절은 거의 언제나 겨울이고, 봄이라도 꽃샘추위가 기승을 떨며, 벚꽃이 만발한 유일한 날엔 구구거리며 모이를 쪼던 비둘기를 독수리가 낚아채 날개를 찢고 머리통을 부순다.
 이런 소설을 쓴 건 이해한다. 앞에서 말했다. 예술이란 것이 태어났을 때부터 사랑과 죽음은 영원한 주제일 수밖에 없었으니. 이해하고 또 이해한다. 죽음, 그것 중에서도 자살을 선택해 소설을 쓰고자 했던 마음을. 근데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많고 많은 책 중에서 내가 그 소설을 읽었다는 것. 이해는 하는데 나는 읽고 싶지 않은 거, 이것도 정당하다. 내가 읽고 싶지 않았던 소설을 당신에게 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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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10-2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꼭이라고 붙이기는 좀 그렇지만 출판되어야만 하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저만은 그 책을 그저 들어서 알 뿐 읽지는 않았으면 싶은 그런 책이 있죠;;;;하...이 리뷰를 읽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읽고나니 리뷰도 좋고, 책은 또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렇군요^^;;
좋은 주말 되시길!

Falstaff 2017-10-27 14:44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얘기하신대로) 왠만하면 그냥 이런 책도 있구나, 선에서 ㅎㅎㅎ
 
간결한 배치 민음의 시 129
신해욱 지음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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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독후감을 쓰기가 난감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께서 지금부터 쓰려고 하는 것이 요즘 흔히 말하는 ‘서평’이라 생각하실까봐 겁난다. ‘서평’이야말로 단어의 과도한 확장이다. 책 한 권 읽고 아마추어가 자신의 느낌을 쓰는 것을 서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자신이 글을 읽고 책을 ‘평가’하는 자격은 평론가한테 맡기자. 그저 우리 평범한 아마추어들은 천진난만하게 책 읽고 자신이 즐긴 내용만 쓰면 된다. 그리고 얼마나 좋으냐, 느낀 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이. 같은 이유에서 나는 지금부터 신해욱이 쓴 시집 <간결한 배치>를 읽고 고통 받은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독후감, 즉, 다 읽고 내가 느낀 대로 쓰는 거니까. 맞지?
 일단 시집을 사서 읽으면, 언젠가는 표제 작품이 나오겠지, 하면서 읽게 된다. 근데 이 책엔 표제작 <간결한 배치>가 등장하지 않는다. 왜냐고? 책 <간결한 배치>가 무지하게 큰 시 한 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것이 작가의 처녀시집(작가의 처녀막이 뜯어졌다, 뭐 이런 그로테스크한 얘기 하지 마시라. 저번에 써먹었다. 그리고 신해욱 시인은 아마 남잘 걸? 이라고 썼다가 검색해보니 여자닷!)인데, 그동안 써왔던 시(들)을 시집의 제목처럼 시인 나름대로 간결하게 배치해놨다는 뜻일 수도 있다. (시인의 성gender을 헷갈린 이유는, 양장본일 경우 일단 겉표지를 벗겨내고 읽은 다음에 다 읽고 다시 표지를 입히자마자 책꽂이에 꽂아 놓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지 앞날개에 붙인 시인의 사진을 못 본 거다. 그냥 이름과 시어들을 보고 남자라고 때려 맞췄다가 꽝인 경우.)
 시에 대해 진짜 아는 거 없는 내가 읽기에 중요한 작품 하나 뽑았다.



 

 103번 국도



 시야가 지워졌다.


 나는 가파르게 정지했다.


 비가 없지만
 나는 젖어가고


 돌아보면 까마득한 벼랑.
 그리고 나에게는 등이 없다.


 하룻밤쯤
 이곳에서 묵어야 할 것 같다.  (전문. 14쪽)



 이 시는 1부 격인 “오래된 휴일”의 두 번째 시다. 시인은  (우리나라엔 없는)103번 국도를 따라 달렸거나 뛰었거나 아니면 걷고 있다가 끼익, 멈췄다. 비 오는 날은 아니지만 하여간 여러 가지 이유로 젖어가면서.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까마득한 벼랑. 자기가 벼랑 위에 있는지, 벼랑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별로 친절하지 않아서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없나보다. 근데 시인한테는 등이 없다. 여기서 등이 뭘까? 등light일까, 아니면 등back일까. 둘 중에 어느 등이 없어서 벼랑 앞이거나 벼랑 위에서 묵어야 할까. (지금 쓰고 있는 건 서평이 아니라 독후감!) 앞에 서 있는 벼랑 속으로 시인은 쑥 들어가 하룻밤쯤 묵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 등back이 없는 거 아냐? 즉 벼랑으로 은유하고 있는 자신의 틀 혹은 (좋다!)예술, 생각, 똥고집 기타 등등 속으로 박힌다는 선언일 수도 있....을까? 없으면 말고.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 내고 사 읽어본 독자가 읽기에 그렇다면 그런 거다.
 앞에서 시집 자체가 큰 시 한 수일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 바로 다음 시 <某某> 세 번째 연에서는,


 오 분 뒤에 숨었던 바람이, 다시 나를 들어 올릴 때, 머무르라, 그대는 아름답다, 는 마르고 깔깔한 속삭임. 모르는 이름이 나를 가둔다. 여기는 다시 

 오 분 전이다.


 라고 노래함으로써 앞의 시 <103번 국도>에서 빠져나와 시인을 가두었음을 확정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혹시 모던 시치고는 그래도 평이한 수준이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정말 오산. 일단 알아들을 수 없는 시는 휙휙 지나치고 1부 “오래된 휴일”의 마지막 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접어들면, 드디어 시인이 자신을 가두어 놓은 장소가 나타난다.


 모텔 첼로가 있는 오랜 벌판에 이따금
 낡은 짐승들이 배회하고 있었고
 어두운 객실에서 당신이 죽을 때마다
 인디언 인형은 사라져갔네
 어딘가로 가라앉은 당신의 눈들
 일렁이며 눈 뜨는 당신의 아름다움
 아무도 없는 모텔 첼로의 열 꼬마 인디언과
 당신의 죽음은 열두 번 계속될지니, (후략)


 모텔 첼로라는 곳에 자신을 가두어 놓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모텔 첼로’는 천안시 서북구 망향로에 있던 진짜 ‘모텔 첼로’, 일찍이 대한민국 모텔 역사상 최초로 세계품질표준 ISO9001을 획득한 바 있는 바로 그 모텔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신해욱 시인이 경춘가도를 지나가다 한 번 간판만 보았거나 아니면 하루 묵어봤는데 방이 진짜로 간결하게 배치되어 아주 인상 깊었거나, 장래 희망이 모텔 주인이라서 정말로 모텔을 짓거나 인수하면 이름을 첼로라 하겠다, 작정한 그런 이름일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2부의 제목이 “모텔 첼로”라는 거. 이리하여 1부까지 읽고 드디어 2부의 제목을 읽는 순간, 혹시 이 시집은 제목 <간결한 배치>의 큼지막한 시 한 수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게 된다. 모텔 첼로의 입구로 들어가는 순간, 즉, 앞에서 벼랑 속으로 들어가 등back이 없어지는 순간을 한 번, 최초의 죽음이라고 치면, 앞으로 열한 번의 죽음이 남아 있는 바, 2부 “모텔 첼로”는 열한 수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참으로 간결한 배치다.
 물론 지금 이 감상문을 읽는 분들께서 참 가져다 맞추기도 잘 한다, 라고 하면 독후감 전문 아마추어는 그냥 깨갱, 하며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내 말이 아주 조금은 맞을 걸? 이 글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여태 살면서 모텔 한 번 안 가보신 분 거수. 난 침대 시트 위에 고불거리는 털 몇 올 떨어져 있을까봐 겁나 여간해선 호텔에 가는데, 모텔이나 호텔이나 거기가 거기라서 공통점이 무수한 셀, 세포, 방, 밀실, 폐쇄공간으로 만들어졌다는 거. 간결하게 말해서, 그렇게 배치되었다는 거. 그곳에서 열한 번의 죽음을 더 경험한 시인은 마지막 시 <벽>에서 또 노래한다.


 (전략)
 나는 눈을 뜬다.


 생각 속에서 어떤 손이
 불쑥 나타나
 이유 없이
 오래도록
 내 얼굴을 만진다.


 나는 자꾸 사실 바깥으로
 벗어나고 있다.  (38쪽)


 죽음을 끝마친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제 죽을 만큼 다 죽었으니 바깥으로 한 번 벗어나볼까, 하고 모텔에서 나오는데 그곳은 3부 “환한 마을”이다. 이어 계속 “즐거운 번화가”에서 어슬렁 거려보기도 하고, “흑백의 마을”과 “사각 지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그때에도”라는 7부에 도착하면 이제야 각 부部의 제목과 같은 제목의 시 한 수가 등장한다.



 그때에도



 나는 오늘도
 사람들과 함께 있다.

 

 누군가의 머리는 아주 길고
 누군가는 버스를 탄다.

 

 그때에도
 이렇게 햇빛이 비치고 있을 테지.

 

 그때에도 나는
 당연한 것들이 보고 싶겠지.



 1부 “오래된 휴일”에서부터 6부 “사각 지대”까지 쌔빠지게 죽고 살고 다시 죽고 또다시 부활해 맞이한 오늘. 가파르게 정지해서 뒤 돌아보니 까마득한 벼랑이 결국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거다.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그랬나, 파마도 하지 않은 생머리를 길게 길렀고, 누군가는 택시비가 없어 버스를 타는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보고 싶은 거. 이게 시를 쓰는 일이고 세상사는 일이라고, 시인은 혹시 길고 긴 하나의 시 <간결한 배치>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뭐, 아니면 말아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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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사막 펭귄클래식 124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최율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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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펭귄 클래식 코리아에서 발간한 모리아크는 (친애하는 서재 동무님 잠자냥 님 말마따나)올 클리어. 모리아크, 정말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내 취향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아시고 싶은 분은 모리아크 한 번 읽어보시면 된다. 아, 이딴 거 좋아하는 인종이구먼! 맞습니다.
 이거 괜히 가방에 넣어 회사 통근버스에서 들춰본 것이 사달이 났던 거다. 당최 손을 뗄 수가 있어야지. 회사 가서도 저 멀리 창고 뒤편 나만 아는 비상피난처에 짱박혀 점심도 안 먹고 오후 세시까지 한 방에 다 읽고 퀭한 눈으로 매점 가서 사발면 하나 사 먹었다. (회사)식당 아줌마한테 김치 좀 달라고 하니까 들은 척도 안 한다. 염병, 평소에 잘 해준 거 다 필요 없다.
 이 책 읽고 독후감 쓰면서 지금 쓰는 것처럼 경박 또는 잘해봐야 경쾌하게 쓰면 안 되는데, 어찌하랴 천성이 그런 걸. 조금 양해하시압.
 우리한테도 그렇고 유럽 사람들한테도 마찬가지로 의사란 직업이 일반 서민한텐 존경받는 직업이지만 귀족(양반), 천석꾼 부르주아들은 뭐 별로 눈에 차지 않았던 신분. 그리하여 돈 많은 바스크 가문의 따님 뤼시께서 지참금 넉넉하게 갖고 마지못해 의학박사 쿠레주 씨와 혼인한 건 분명히 낙혼落婚이라서 돈만 많지 교양이라곤 참 귀하디귀한 것이라 그저 할 줄 아는 것이 남편으로 하여금 뤼시 여사한테 정나미 떨어지게 만드는 거하고 시어머니 쿠레주 부인 사이에 고부갈등 일으키는 거였다. 물론 그게 주 전공은 아니지만 어쩌랴, 워낙 어려서부터 오냐오냐 해가며 키워 도무지 혓바닥과 입술에 필터장치를 달 생각도 안 하고 여태 산 걸, 이제 와서 고쳐? 무슨, 새삼스럽게.
 동네에 남편의 환자 가운데 어여쁜 마리아 크로스라고 아주 어여쁜 과부가 있는데 그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다. 마리아가 과부가 되어 혼자 살기 힘들어 빅토르 라루셀이란 돈 많은 남자의 빈집을 얻어 월세 안 주고 살다가 점차 생활비도 받아쓰고 차도 한 대 그냥 얻어 타고(그것도 새 차!) 이러다보니 정부 비슷한 처지로 떨어졌는데, 보르도 촌구석에선 무지하게 큰 스캔들이라 뤼시 여사가 보기엔 정말 꼴불견이었다. 그래 뤼시 여사께서 뇌막염으로 어린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거야말로 하느님께서 내리신 정의의 심판이지요.”
 문제는 혼인의 순결을 지키려고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있는 쿠레주 박사께서 마리아를 흠모, 아니, 아직 본격적인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을 뿐이지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이라 착각하고 있는 중이란 거. 쿠레주 박사는 일생일대의 첫사랑, 진정한 순결을 바쳐 마리아를 사랑하고 있는 거디었던 거디었다.
 그렇다고 쿠레주 박사를 옹호하는 건 아닌데, 왜냐하면 쿠레주 박사댁이야말로, 비록 말로 하지 않는 가족애가 각자의 마음에 충만할망정,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의사소통은 구성원 모두가 스스로 거의 완벽하게 차단한 상태, 저 먼 먼 사막의 모래땅처럼 삭막하기 그지없는 상황으로 만든 1차 책임은 불행하게도 하여간 가장이 지어야 마땅하니까. 다시 말하는데 쿠레주 박사는 (마치 나처럼) 깨끗한 영혼과 도덕의식, 일탈을 하고 싶어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주어진 길을 꼼꼼하고도 정확하게 걸어가며 늙어가는 사람이다.
 문제가 쿠레주 박사한테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라서, 이이의 외아들 레몽 쿠레주가 19세에 이른 어느 날 전차를 타고 한 여덟아홉 살 더 많아 보이는 여자한테 필이 꽂힌 것이다. 누구냐고? 말하면 입 아프지, 바로 마리아 크로스. 나이 많은 남자의 정부로 살고 있는 과부 마리아는 날마다 죽은 아들의 묘를 찾는다는 핑계로 오후 6시 전차를 타는 걸 습관들였고 당연히 그건 묘하게 끌리는 청춘 레몽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이해 가시지?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그런 거 말고, 그냥 안 보면 좀 허전하고, 남자를 아주 모르는 여인도 아니고, 지금 스캔들도 있는데 또 사고를 치기는 거시기하고, 얌전하게 집에만 있자니 몸에서 열불이 나 외출을 하긴 해야겠는데 아무데나 다닐 수도 없는 거. 그래 오지게 비 오는 어느 날 레몽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긴 했겠다! 충동이 막 뻗칠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좀 마음이 있어 집으로 불러들이긴 했지만 암만해도 이건 좀 과한지라 그냥 보내버리고 마는데, 이 사건이 어린 레몽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마리아로부터 받은 수치와 모멸은 그를 완전한 성인으로 성숙시키는 계기가 되어 잘생긴 레몽은 그때부터 아가씨, 유부녀, 어린 소녀 등등 모든 여성을 노리는 헌터, 돈 후안이 돼버리고 마는 거다.
 지금 글을 줄줄이 써내려가니 그냥 재미있는 연애 이야기라고 짐작하실 수 있겠다. 천만에. 여태까지 쓴 글은 위에서 밝혔듯 천성이 고급하지 못한 잡것이 최고 수준의 심리소설이자 성장소설에 대해 자기 마음대로 막 쓴 것일 뿐이다. 진짜로 읽어보면, 이걸 뭐라 해야 하나, 좋다, 프랑스적 에스프리가 은은한 가운데 제목처럼 인간 사이의 사랑과 관계가 알고 보면 사막처럼 황량한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는 것이 눈에 훤하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고 기타 참 사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저 옛 시절의 한 컷,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당신도 있고 나도 있고, 내 마누라한테도 분명히 있는 저 먼 먼 시절의 흑백 사진 한 장, 심장 속 깊숙이 감추어놓았던 것, 아 썅, 이런 거 슬쩍 한 번 꺼내보게 만든다.
 독후감 더 길게 쓰는 것보다 내게 맞는 책 한 권 읽은 기념으로 소주 한 병을 비우는 것이 더 진정한 감상이라고 굳게 믿어 지금부터 술 마시러, 나는 간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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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0-25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김치 이야기에서 빵 터졌습니다. 모리악은 국내에서 그다지 많이 읽히지 않는 것 같은데 참 안타깝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프랑스적 에스프리가 은은한,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흑백사진 한 장‘ 같은 그 느낌이 일품인데 말입니다. ㅎㅎ 아니 그런데 이 아침부터 술을 드십니까?!

Falstaff 2017-10-25 10:53   좋아요 1 | URL
ㅎㅎㅎ
목요일 아래한글로 써놓고 저장했던 겁니다. 아직 안 올린 거 몇개 더 있고요, 차근차근, 하루에 하나씩, 토,일요일은 쉬고 뭐 그렇게 ^^;
맞아요, 모리악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별로 없단 말입죠. 내년엔 다른 출판사로 이 양반 책을 훑어봐야겠어요.
 
강철 폭풍 속에서 뿌리와이파리 알알이 4
에른스트 윙거 지음, 노선정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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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며칠 전 독후감을 쓴 베르타 폰 주트너의 <무기를 내려놓으라>는 오스트리아 인의 입장에서 오스트리아-이탈리아 전쟁부터 프러시아-프랑스 전쟁, 즉 보불전쟁까지 전쟁의 참상을 민간인 여자의 눈으로, 그러나 가문 대대로 장군을 배출한 백작 집안 19세기 여인의 시선으로 그려놓았었다. 폰 주트너는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젊은이들의 생생한 모습을 한 감상적感傷的인 여인이 끔찍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당대엔 여성의 미덕으로 가르치기도 했던, 졸도까지 해가며 전쟁 자체를 반대하기 위해 세계만방에 당장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웅변한 반면, 에른스트 윙어는 스스로가 독일제국의 군인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자신이 스스로 겪은 전쟁을 최대한 객관적인 모습으로 전하고 있다. 책을 읽기 전에, 윙거가 용감한 독일 군인이었을 뿐이란 것을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사병으로 참전하다가 첫 휴가를 나와 아버지의 권요로 사관 교육을 받고 소위, 즉 장교로 전쟁을 끝까지 치룬 말 그대로 뼈 속까지 군인이다. 윙거에게 우군은 독일군이고 적군은 주로 영국군인데 프랑스군, 스코틀랜드군, 인도군, 심지어 뉴질랜드 군인까지 아우른다. 윙거는 애초부터 폰 주트너 여사와 달리 전쟁이 옳은지 부당한지, 정의로운지 불의로 가득 찬 짓인지는 관심이 없다. 오직 군인으로 참전했으니 자신에게 주어진 군인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이건 주트너의 <무기를…>에서도 주인공 마르타 알트하우스의 진지하고 정의롭고 진심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군인 남편 프리드리히 폰 틸링 남작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군인으로서 전쟁에 찬성을 하건 반대를 하건, 옳건 그르건 간에 일단 참전을 하면 자신의 본분을 다해 조건 없이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라는 것. 근데, 어쨌든, 윙거는 명예니 뭐니 따지지 않고 오직 군인으로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할 뿐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을 굳이 분류하자면, 경험담, 즉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죽음, 고통과 비명, 휴식과 훈장 등으로 도배가 된 책을 다 읽은 것은 ① 돈 주고 산 것이 아까워서, ② 1차 세계대전의 특징인 전장의 변화가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어서, 즉 초기 참호전塹壕戰 중기 이후 무기의 발달로 인한 기계전으로 본격적인 대량 살상전에 흥미를 느껴서, ③ 인류 최초의 독가스전(난 독일만 가스를 사용한 줄 알았더니 이 책 읽어보니까 영국이 이 방면으로는 선구자였네, 윙거가 독일군이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에 관해 좀 알고 싶어서, ④ 전쟁 중 기계와 포탄보다 더 인명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 즉 싸우는 걸 보다 못한 지구가 에라 이 염병할 놈들, 하며 선물해준 천형이 궁금해서 등등이었다. 전쟁은 어떤 경우가 있어도 지구상에서 허용되면 안 된다. 위 ②번 사항에서 보면 서로 얼굴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대량 살상이 가능하고, 심지어 한 도시를 완전한 폐허로 만드는 것도 벌써 100년 전부터 가능했다. 이제는 100년 전 도시보다 수천 배는 더 커진 도시와 인구를 단 한 번, 손가락 하나로 버튼을 누름으로써 가능하게 된 시대이며, 일단 폐허 상태가 되면 영구히 복원 불가능한 환경으로 지구는 진화했다. 아, 이건 제일 나중에 얘기할 건데 너무 미리 썼다.
 하여간 윙거는 자신이 경험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전장에서 무참하게 벌어진 참상을 전하는데 형용사를 굉장하다고 할 정도로 생략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이런 식. “상사의 머리는 육체와 분리됐고, 로돌프 상병의 창자가 몸 밖으로 튀어나왔다.” 딱 보이는 만큼만 서술한다. 스스로 무수하게 총에 관통당하고, 포탄 파편이 박혔으며, 유산탄알을 몸속에 간직하고 있는 윙거는 놀랄 정도로 무덤덤하게 그냥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읽고 전장을 상상하며 전쟁의 끔찍함을 체험하는 건 그리하여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혹시 별점이 있으면 10점 만점에 10점을 주겠지만, 이 책, 그리고 폰 주트너 여사의 <무리를 내려놓으라>를 훌륭한 문학작품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면 왜 만점을 받는가. 그건 오직 하나. 앞으로 지구상에서 전쟁은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절대 명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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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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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쿠 “久方の雲井の空の子規”를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라고 번역하다니! 책의 표지에 굵지 않은 나무 두 그루 서있고, 가지에 두견이 앉았는데, 바로 그 옆, “久方の雲井の空の子規”가 종從으로 쓰여 있다. 한자 사이의 일본어가 전부 조사 “の”라 그냥 한시 읽듯 그림이 그려지지만 정작 그걸 한글로 바꿔보라면 어찌 역자 송태욱처럼 “멀리 구름 걸린 하늘의 두견새”라 했을 수 있을까. 이쯤 돼야 외국 시를 번역하는 거다. 그래도 (독자가) 가능하면 원문을 그대로 감상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겠지만. 일본이 외국문학을 수입하면서 벌써 100년 전에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번역에 공을 들였는지 이 책에서 조금 나온다. 대학생, 졸업생, 대단한 실력의 영어교사 등이 모여 한 문장, “Pity's akin to love.”를 어떤 일본어로 바꿔야할 것인가를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지는 장면(127쪽). 주인공과 가장 친한 친구 요지로란 인물 왈, “가엾다는 것은 반했다는 것이니라.” 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지청구를 듣는다. “안 돼, 안 돼, 졸렬하기 짝이 없군.” 109년 전의 일본 문과대학에서는 이런 사소한 문장 하나를 두고 올바른 번역을 위해 토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쓴 건 이 책의 옆가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소개한 맛보기다.

 책은 20세기 초, 후쿠오카 촌 동네에서 도쿄로 유학을 떠나는 소천삼사랑, ‘오가와 산시로’를 태운 열차 안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열차 안에서 얼굴이 가무잡잡한 유부녀를 알게 되고, 여인의 부탁(당시가 20세기 초, 여자 혼자 여관을 잡는 건 좀 무모한 일이었던 모양이다)으로 중간 기점에서 여관을 잡아주다가 엉겁결에 목욕도 하고, 그러다가 거의 벗은 여인이 “때밀어줄까요?” 독특하고 바람직한 일본 특유의 목욕 문화적 친절에 기겁을 해서 (덜렁거리며)뛰어 나오고, 어쩔 수 없이 한 방에 묵을 수밖에 없게 되고, 밤새 툇마루에 앉아 있기엔 모기가 하도 극성이라 엉금엉금 그녀가 모로 누어있는 모기장 안으로 기어들어가서는 이불을 톡톡 두르려 도드라지게 하여 여자와 자기 사이에 마치 전쟁의 진지인 것처럼 금을 긋고는 여자의 몸엔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잠만 쿨쿨 자버리는 남자. 이거 참 죽일 놈이다. 넌 그렇다 치고 옆에서 밤새 잠 한 숨 못자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인의 앙가슴을 도대체 어찌할 거나. 하여간 그리하여 다음 날, 다시 무대는 기차역. 두 남녀, 좀 서먹서먹했겠지? 여자가 남자의 도움을 받아 하룻밤을 잘 잤으니 먼저 인사하길, “여러가지로 귀찮게 해드려서… 그럼 안녕히 가세요.” 산시로의 습관적인 대꾸, “안녕히 가세요.” 근데 여자는 산시로의 얼굴을 계속 가만히 바라고보 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했다.
 “당신은 참 배짱이 없는 분이로군요.”
 책은 15쪽부터 시작해 335쪽까지 이어지는데 이 대사는 24쪽, 딱 열 번째 줄에서 등장한다. 이 한마디로 나쓰메 소세키는 산시로의 성격을 콱, 규정해버리고 만다. 여자가 말하는 ‘배짱’이란 것이 뭘까? 한 번 보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질 여인과 한 방, 같은 모기장 안에 자면서 손가락 한 번 까닥하지 않는 거? 일단 그렇다고 봐야한다. 여인의 남편은 오래 전에 고향을 떠나 히로시마에서 군함을 만들다가, 러일전쟁을 맞아 여순(뤼순)에서 돈을 벌었고 지금은 대련(따롄)에 있으니 그거 참, 여자가 애초에 산시로한테 있는 줄 뻔히 알고 좀 달라는 걸, 그걸 안 주었으니 배짱이 없단 비아냥은 정말로 받아 마땅한 거 아냐? 물론 농담이다.
 당시 나이 스물 서넛의 산시로. 배짱 없는 산시로가 후쿠오카를 떠나 당시 일본인 시각에선 험하기 짝이 없어 눈 감으면 코 베갈 도쿄에 도착/정착하여 숱한 배짱 있는, 그리고 배짱 없는 인간 속에서 보낸 대략 1년을 그리고 있다. 여전히 성실하기는 하지만 농촌 청년의 시각을 버리지 못하는 산시로 앞에, 도시적인 뻔뻔스러움과 특별한 친화력, 가벼운 지식으로 무장한 요지로가 등장하고, 물리학을 공부하는 동향 선배이며 국내외에 성가를 높이고 있는 노노미야 씨와 그의 여동생 요시코를 알게 되고, 요시코를 통해 또 대단한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도쿄대의 연못 근처에서 한 번 본적이 있는 미네코와 친해진다. 여기에 일찍이 도쿄에 오는 3등 열차에서 만난 적이 있는 대단한 실력의 히로타 선생이 중요한 역할을 하며, 후반엔 산시로가 마음에 둔 여자 미네코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린 하라구치 화백까지.
 소세키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오니, 바로 노동하지 않고 공부하거나 예술만 하는 돈 있는 집안의 젊은이들. 딱 둘만 꼽으면 산시로와 요지로. 요지로는 관계의 지속, 심화를 위하여 친한 친구 산시로에게 30엔을 빌려 절대로 갚을 마음이 없다. 왜냐하면 요지로 생각으로는 자기가 돈을 갚게 되면 오히려 둘 사이가 서먹서먹해질 것이란 우려가 있어서. 대책 없이 요지로에게 30엔을 꿔준 산시로는 하숙비를 내지 못하게 되는 곤란을 피하기 위해 미네코로부터 30엔을 빈다. 배짱 있는 요지로는 산시로에게 꾼 돈을 그냥 꿀꺽하고 마는데, 시골 출신의 배짱 없는 산시로는 홀어머니에게 부탁해 시골 수준으로 말하자면 근 1년 양식에 해당하는 30엔을 받아 기어이 미네코에게 돈을 갚으려고 한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마는 건, 더 이상 조잘대는 주둥이를 건사하지 않으면 책의 내용을 송두리째 일러드리게 되기 때문. 얼핏 보면 참으로 대책 없는 인생을 사는 요지로의 어디로 뛸지 모르는 개구리 식 뜀박질이 아슬아슬하고, 산시로의 사는 방법이 답답해 가슴이 컥 막히기도 하지만, 사이에 그 둘을 절충해줄 아무런 쿠션도 소설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소세키다운 작품. 디테일한 성격 묘사와 인물들 간 서로 부딪는 사소한 감정의 파동을 섬세하게 찾아낸다. 소소한 재미가 참 그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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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10: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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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1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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