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 문학동네 시인선 73
고영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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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민? 이 사람이 누구? 해서 인터넷 검색해봤더니 프로야구 선수 고영민이 뜬다. 야구 선수 아래 작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시인 고영민. 1968년 서산 출생 기타 등등. 개인정보가 너무 세세하게 뜨는 거 아냐? 이 양반 생일까지 나오더만. 하여간 보니까 서른네 살에 등단시인이 되어 박재삼 문학상 받은 이력이 있으며, 시단에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거 같다. 이상해. 요새 읽는 남자 시인들이 대개 1960년대 충청남도 태생인 거다. 시집 한 권 살 때 이딴 거 다 알아보고 사는 인간이 아닌데 어째 그렇게 됐다. 남자 시인의 경우 신문기사를 가끔 검색해본다. 하도 성sex 관련 이야기가 분분해서. 이런 내가 싫지만 뭐 어쩌겠나. 그런 시인 아니더라도 읽을 시집은 넘쳐흐르는 걸. 이야기가 또 삼천포. 좌우간(난 이 단어 쓰면 좀 캥긴다. 좌우간. 왼쪽과 오른쪽 사이, 딱 그 중간에 뭐가 있기에 좌우간, 좌우지간, 어떤 사람들은 ‘좌우당간’ 이렇게들 얘기하는지. 모르긴 하나 뭔가 중요한 것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앞에서 읽었던 충남 출신 시인들의 공통점은 겁나게 사투리를 구사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인데, 고영민 이 사람의 시에서는 사투리가 등장하지 않고, 검색해보지 않았더라면 충남 출신인지도 몰랐을 지도 모른다. 난 문학작품에 사투리 자꾸 나오는 걸 반기거나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인종이 아니라서 고영민의 이 점에 대해서 흡족했다. 시, 소설에 사투리 좀 쓰지 말자. 우리나라 문학작품도 이제 세계문학을 지향해야 할 때. 번역한 서양 소설 읽을 때, 세계를 정복한 충청도 사투리 나오면 기겁을 하겠다. 들은 말에 의하면 서양 또는 일본 조폭들이 사투리 쓰는 걸 번역할 땐 경상도 사투리 나오다며?
 아, 그러나. 고영민의 시는 아쉽게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물론 여태까지 한 번도 빼지 않고 다 그랬지만 특히 이번엔 전적으로 내 기호 또는 취향에 입각해 시를 읽은 감상을 쓴다는 걸 분명하게 밝힌다. 이런 의미에서 고영민의 시들이 ②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말씀. 그가 쓴, 이 시집에 들어있는 시들의 품질이 처진다는 의미는 단연코, 조금도 없다.
 시집 한 권을 읽으면 (특별히 시인과 독자의 코드가 맞는 경우는 예외로 하고) 적어도 하나 혹은 두 편 정도의 시는 건질 수 있어야 하겠으나, 이 책의 경우(한국 사람들의 경우 적어도 삼 세 번은 얘기를 해야……) 나하고 도무지 그놈의 (드디어!) 코드가 맞지 아니하여, 대단히 불행하게 건진 시가 한 편도 없었다. 그건 아마 시집을 펼치고 읽은 첫 번째 시 <식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였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식 물



 코에 호스를 꽂은 채 누워 있는 사내는 자신을 반쯤 화분에 묻어놓았다 자꾸 잔뿌리가 돋는다 노모는 안타까운 듯 사내의 몸을 굴린다 구근처럼 누워 있는 사내는 왜 식물을 선택했을까 코에 연결된 긴 물관으로 음식물이 들어간다 이 봄이 지나면 저를 그냥 깊이 묻어주세요 사내는 소리쳤으나 노모는 알아듣지 못한다 뉴스를 보니 어떤 씨앗이 700년 만에 깨어났다는구나 노모는 혼자 중얼거리며 길어진 사내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준다 전기면도기로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레 흔들어본다 몇 날 며칠 병실 안을 넘겨다보던 목련이 진다 멀리 천변의 벚꽃도 진다 올봄 사내의 몸속으론 어떤 꽃이 와서 피었다 갔을까 병실 안으로 들어온 봄볕에 눈꺼풀이 무거워진 노모가 침상에 기댄 채 700년 된 씨앗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다



 시집을 읽어보면 시인 아버지가 세상을 뜬다. 그때 병원에 입원을 했을 것이고, 시인은 막내아들이니 당연히 아버지 문안을 갔을 것이고, 그때 이 병실 저 병실, 아니면 아버지 옆 병상에 젊은이 하나가 기관지를 절개해 이중 금속 튜브를 박아 숨도 쉬고, 금속 관 속으로 분홍색의 얇은 고무관을 또 삽입해 기계에 연결해서 고통스럽게 가래를 제거하고, 코에 호스를 꽂아 음식물을 섭취하고, 콘돔의 정액받이 부분을 잘라 링거 줄과 연결해 소변을 보고, 욕창이 생길까봐 늙은 어머니가 시간마다 왼쪽 오른쪽 똑바로 몸을 돌려놓았었나보다. 아픈, 죽어가는,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쁠 것이 없는, 조금만 더 지나면 가족 모두가 차라리 얼른 죽어버렸으면, 하고 생각할, 사내를 보고 시인은 과.감.하.게. 식물이라고 칭한 거다. 언필칭 식물인간을 염두에 두었겠지.
 이해한다.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한다.
 그런데 말이지.
 만 24년 동안 시인이 말한 ‘식물’을 화분에 담는 바람에 완전 풍비박산한 집구석의 일원이 이 시를 읽으면 어떤 기분이 들 거 같아? 이해하고 납득하지만 저절로 ‘닛소리’가 입에서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700년 만에 행여라도 씨앗이 싹을 틔울까봐 겁나는 심정을 시인은 알까? 이런 걸 “탱자 탱자 한다.”라고 칭하는 거다. 하필이면 이런 시를 시집의 제일 앞에다 떡하니 박아놨느냐고.
 처음부터 틀어진 시인과 나의 코드는 결코 좋아지지 않았다. 인생이 다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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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스크로노스
윤해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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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하루 안에는 읽지 못할 줄 알았다. 근데 읽었다. 흥미진진. 내 독서 목록에 이 작가를 보탠다는 것이 축복이다. 출근해서 아침 일 끝내고 (짱 박혀서) 독후감 쓰고 있는데, 아우, 졸려 돌아가시겠다. 여덟 편의 중단편을 싣고 있는 소설집. 본문만 430쪽(7~437). 판형이 작아도 하루 만에 읽기는 녹록하지 않다. 게다가 스토리 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민등록초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 같은 공적인 존재의 사실이 확실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골 때리는 작품들. 그러나 여기저기서 어딘가 봤던 장면들도 심심찮게 등장하기도 하고, 문장의 음악성, 회화성, 그 경계의 깊은 골짜기에서 외줄타기 해야 하는 진퇴양난도 겪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읽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독자들이 결코 쉽지 않은 윤해서의 소설을 읽으며 시간관념 또는 시간의 1차원적 수열에서 작가와 동시에 벗어날 각오가 되어 있어야한다는 점이었다. 작가는 아예 솔직하게, 소설집의 서론 또는 서문격인 첫 단편 <테 포테레케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시간이 사라지자 세계는 일그러진다. 세계는 작은 한 점으로 쪼그라들고 세계는 무한대로 확장하고 세계는 한쪽 면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흐름의 방향을 잃고, 세계는 모든 시간대의 그물에 걸려 사방으로 마구 튀어오른다.
 문장에서 시간이 사라진다.
 문단에서 시간이 사라진다.
 모든 시간이 동시에 출몰한다.
 나는 오직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건너뛴다.
 미지의미이미지의미이미지의미이미지의미이미지의미
 모든 시간이 한꺼번에 흘러간다.)”  <테 포케레케레> 18쪽


 책의 제목 《코러스크로노스》가 코러스(합창)과 크로노스(시간의 신)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시간의 합창"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무식한 나는 크로노스가 시간의 신인지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나가면서 위 인용문이 이 소설선집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중요할 것이란 생각이 번쩍 들었다. 무식한 나도 그랬음에, 이 독후감을 읽는 분들도 《코러스크로노스》의 일독에 머뭇거릴 필요가 없을 듯하다.
 책에서는 “코러스크로노스”가 무엇을 뜻할까. 다음과 같다.


 "코러스크로노스.
 시간합창,
 골목 입구에 눈에 띄는 간판이 걸려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코러스크로노스가 있는 골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골목 안쪽으로는 곧 재건축에 들어갈 것 같은 4, 5층짜리 빈 건물들이 이어져 있었다." <테 포케레케레> 27쪽.


 도심 한 가운데 있는 일종의 화장장이다. 어떤 것이든지 태울 수 있는 장소. 물론 태우지 않고 그냥 구경만 해도 괜찮은데 그때에도 입장료 3만원은 꼭 내야 한다. 그런데 뭘 태워. 당신 마음이다.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도 상관없다. 해진 신발짝도, 구멍 난 양말도, 며칠 동안 갈아입지 않은 지저분한 팬티도. 100년간 여성을 구속해왔던 브래지어도. 별 필요 없는 것 같은 왼쪽 다리 한 짝? 뭐 그것도 괜찮고, 하다못해 완전 비어버린 내 해골도 그냥 태워버릴 수 있다. 앞에서 얘기한, 내 마음, 즉 나의 마음, 염통과 허파 사이에 있다고 믿는 마음도 확 태워버리면 그만이다.
 “코러스크로노스”가 들어있는 단편 <테 포케레케레>는 이 책에 두 번 실려 있다. 맨 처음과 맨 나중. 그러니까 음악으로 얘기하면, 4악장 교향곡을 예로 들어 얘기하자면, 4악장의 끝부분에 1악장 주제선율부터 각 악장의 중요부분을 다시 환기시킨 후 코다(끝 부분)로 치닫는 형식과 유사하다. 시 한 수로 예를 들면 수미쌍관법? 실제로 그렇다. 책의 마지막 <테 포케레케레>는 발표시기가 2011년이지만 앞의 <테 포케레케레>는 미발표.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 단지 제일 앞에서 한 번 얘기했던 것을 마지막에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나? 천만에. 아홉 편의 중단편 가운데 여덟 편을 읽은 다음 제일 마지막 <테 포케레케레>를 보면 책에서 전반적으로 이야기했던 것들하고 조금씩은 다 연결이 된다. 2010년에 등단하여 2017년에 첫 소설집을 낸 이 과작寡作의 작가는 자신이 쓰고자하는 몇 편의 작품들(맨 뒤 작가의 말을 보면 이이가 직장생활을 하는 거 같다. 그러니 장편소설을 쓰기보다 몇몇 주요 주제를 구상해놓고 그것들을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 수도 있다)을 통합하는 작품을 하나 구상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궁금증은 여태 발표하지 않고 이 책에서 비로소 처음 모습을 보인 앞의 <테 포케레케레>. 그걸 먼저 썼을까, 아니면 이 책을 발간하기 위해 앞에서 언급한 ‘문장과 음악과의 경계선에서의 줄타기’를 위해 썼을까, 여기에까지 미쳤던 거다.
 책에서는 아무것도 규정된 것이 없다. 예컨대 중편 <아>를 보면, 사실 제목 “아”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고, 작가가 친절하게 알려줄 리도 없고, 알려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테 포케레케레>에선 시간이 난장판을 벌이더니 <아>에서는 또 인물(들)과 단어 등이 마구 헷갈리는 경지에 이른다. 중편의 등장인물(등장인물이 있기는 있다!) 가운데 ‘말로’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이 나온다. 말로? 난 번쩍 앙드레 말로를 생각했지만 별 말씀을. 물론 앙드레 말로일 수도 있고, 한 여성의 이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쓰는 말, 언어일 수도 있다. 윤해서는 이렇게……


 "말로는 이렇게 썼다. 말로의 말로. 그야. 밤이 시체처럼 팽창한다. 그야. 밤이 시체처럼 팽창해. 말로는 마를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른다. 때로 거칠게 야, 하고 소리쳐 부르고. 그, 라고 조심스럽게 적기도 한다. 말로가 나를 조심스럽게 부를 때 나는 헤롯이거나 다윗이거나 말로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그’에 속해 있고. 그는 아무것도 몰라.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지."   <아> 111~112쪽


 "말로의 말로. 죽은 붕어가 물에 뜬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
 모든 접속 부사들 속에 ‘그’
 내가 속해 있어.
 나는 말로의 말로. 문장과 문장을 연결한다. 문단과 문단을 연결한다. 부채와 부채를. 부재와 부재를. 이 도시의 말로. 나는 당신과 당신 사이에.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잇닿아 있다." <아> 187쪽


 말로는 이렇게 썼다. 말로의 말로. 근데 이건 알고 보니까 모든 ‘관계’를 이어주는 접속사 속에 있어서, 문장과 문장 사이, 말과 말 사이, 심지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있”거나 “있”고 싶은 무엇. 사람일 수도 있고, 언어(말)일 수도 있고, 문장이나 문단일 수도 있는 것. 즉 모든 것을 소통시켜주는 역할을 대표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헷갈리시지? 직접 읽어보시라. 윤해서. 이 젊은 작가의 골 때리는 아홉 편의 중단편들을 (그나마)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내공, 문장과 문단을 만들어내는 공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만일 현대 프랑스 작가가 이 비슷한 작품을 내서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 나왔다면 내가 그걸 읽고 이리 감탄할 수 있을까? 백퍼 아닐 거다. 윤해서의 문장을 읽어보면 독후감의 앞부분에서 얘기한 것처럼 음악성, 문장의 음악성과 문단의 음악성, 즉 문장과 문단에 음정과 박자만 주면 곧바로 음악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리듬을 탄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으리. 심지어 난 책의 특정 작품은 소설이라고 단언할 수 없기도 하다. 반시反詩, 또는 반시半詩. 역으로 반소설 또는 반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하나 만들어 그 그룹에 집어넣고 싶기도.
 더 할 얘기, "【∞】왜상", "읊" 등등 무지 많은데, 독후감이 너무 늘어지는 거 같아서 이쯤에서 막 내린다. 모쪼록 뜻 있으신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읽고 난 다음 당신의 감동 혹은 동의, 그것도 아니면 감상은 내가 책임지지 않는 거, 그건 아시지?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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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1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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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6 1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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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이빨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0
제이디 스미스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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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디 스미스 본인이 자메이카 이민 여성과 영국 남성 사이의 혼혈이다. 1975년생. 작중 여자 주인공 가운데 아이리 존스, 일찍이 1907년 자메이카 대지진이 일어난 날 폐허의 기적처럼 태어난 외할머니 호텐스 보든 여사의 1975년 생 외손녀와 여러 가지로 일치한다. 책 뒤에 역자가 쓴 ‘작품 해설’을 보면 자메이카에서 이주해 온 영국인 제이디 스미스가 캠브리지 다닐 때 저지른 놀라운 사기행각, 물론 좋은 의미에서 사기행각의 결과로, 이 작품의 탄생비화를 써놓았는데 그것(사기행각)만 가지고 책을 한 권 쓸 수 있을 정도로 흥미진진하니 관심 있으시면 직접 책 사서 읽어보시라. 나도 <하얀 이빨>, 제목만 보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싼 값의 중고책 아니었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텐데, 정작 읽어보니 햐, 대.박.이.다. 읽고나서 검색해보니까, 저런, <하얀 이빨>은 절판. 품절도 아니고 절판. 중고책이라도 참 잘 샀다.

 

 말 나온 김에 자이디 스미스, 얼굴 한 번 보자.

 

 

 구글 검색했다. 왜 두 장의 사진을 올렸느냐 하면, 왼쪽이 원래 헤어스타일과 비슷하다. 자메이카 인들의 표준 머리카락. 그걸 영국인, 백인들하고 같이 살면서 튀어 보이지 않기 위해, 흑인들이 머리카락 미용에 들이는 돈이 백인보다 2.5배가 많다고 책에 써있다. 소위 스트레이트 퍼머. (한국과 비교해) 미용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영국에서 스트레이트 퍼머를 하다 부작용이 벌어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책에 아주 재미있고 상세하게 나온다. 그 생각이 나서 두 장의 사진을 올리니, 이런 충정에 눈물이 앞을 가리시지?

 

 눈 밝은 사람이 이 독후감을 봤다면 척, 한 눈에 알 수 있었을 것. 할머니가 1907년 생이고, 손녀딸이 1975년? 20세기 초, 아이 일찍 낳기에 관한 한 눈부신 세계신기록을 갖고 있을 거 같은 자메이카, 서인도제도 여성의 손녀가? 하고 의심할 수 있을 것. 놀라지 마시라. 호텐스 여사가 다커스 보든 씨와 결혼하고 한참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다가 드디어 외동딸, 주인공 아이리 보든의 생모가 될 클라라 보든을 생산했을 때의 나이가 마흔 여덟. 불행하게 할아버지 다커스 보든 씨는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에 벌써 안락의자에 앉아 침을 질질 흘리며 하루 종일 TV만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이며, 이후에 독자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진지하고 오래된 기다림, 즉 죽음의 선을 넘어버리고 만다. 당연히 독자는 누가 우리의 여주인공 아이리 존스의 외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했는지 영원히 모르고 넘어갈 수밖에. 이거 아무것도 아닌 거 같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건장한 키에 장대한 골격을 자랑하는 흑인 혼혈 영국 여성 아이리 존스는 철저하게 모계로 관련을 맺게 된다는 말씀. 아이리의 아버지 아치볼드 존스는 1945년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로 2차 세계대전에 불가리아 전선에서 공병 전차병으로 출전하는데, 참으로 웃기게도 뱅골 출신이며 아치볼드보다 두 살 더 많은 방글라데시 젊은이이자, 아군의 총알이 오른쪽 팔목 힘줄을 관통하는 바람에 오른 팔은 그냥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동료 흑인이랄까 하여간 짙은 갈색 피부의 사병 사마드 익발과 평생을 함께하는 우정을 품고 산다. 아무리 1940년대라도 오른 팔은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하는 벵골인을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영국 군대가 공병 전차부대에 배속을 시켜줬을까? 이건 지은이 제이디 스미스가 여성이라 군대에 관해서는 완전 무식해서 이렇게 써놓은 것이 아니고, 이 소설이 기본적으로 길고 긴 우화, 알레고리로 설정한 중요한 단서라고 봐야 한다.
 정말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메이카 계 영국인 제이디 스미스는 몇 군데 더 이 알레고리를 숨겨놨으니, 아이리 존스의 아버지 아치볼드 선생 역시 2차 대전 종전 후 소련군대가 진주한 불가리아 지역에 칩거해 있던 프랑스 출신의 젊은 의학박사 페레 선생, 심각한 당뇨에 의한 망막질환을 겪고 있어서 인슐린을 제때 맞지 않아 눈물 대신 눈물샘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이 중증 환자, 일찍이 유대인 대량 학살의 주범 가운데 한 명인 전범자를 처형해야 하는 경우를 당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과정에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관통을 당하지만 일부 파편은 몸속에 지니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인물. 자신의 일에서조차 특정 사건에 대하여 결정 혹은 결심을 하지 못해, 결국 동전을 던져 나온 결과에 충실함으로써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주위에 이런 사람, 없지? 그렇다, 거의 없다. 아주 없지는 않고. 내가 빌어먹고 사는 회사의 저번, 저번, 저번, 그러니까 지금부터 세 번 전 사장이 그랬다. 사소한 것도 결정 못하고 비싼, 엄청난 연봉이나 축내는 인간. 또 얘기가 경상남도 삼천포 시로 흐른다. 삼천포와의 자매결연을 빨리 깨야 하는데, 이거 병이다, 병. 하여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치볼드 씨는 거의 유일하게 등장하는 순수 영국인. 하지만 보시다시피 우리가 알고 있는 저물지 않는 섬나라 인간종하고는 좀 거리가 있다. 이 아치볼드가 한때는 진짜 예뻤지만 유전자 속에 정신분열의 씨가 있는 줄 모르고 결혼한 이태리 여성한테 이혼을 당하고 새로운 새해를 맞이하여 기막힌 동전던지기를 하는데, 앞이 나오면 계속 삶을 이어나가고 뒷면이 나오면 깨끗하게 자살하기로 결심을 했는데, 그만 뒷면이 나왔다. 그리하여 자신의 차 배기구에 전기청소기의 호스를 연결해 1975년 1월 1일 새벽, 자살을 시도하고 있는데, 어느 '파키', 즉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가 턱, 보니까 자기가 운영하는 할랄 정육점 앞에 주차를 해놓고 그 짓을 하고 있어서, 어이, 차 빼, 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운명은 죽음 다음엔 생명의 탄생을 약속하는 것. 별로 기대할 것도, 남길 것도 없는 세상, 차를 몰고 어슬렁거리다 한 무리의 질퍽한 파티장소에 우연히 합류하고, 거기서 만난, 아름답게 보이는 클라라 보든 양과 혼인에 성공하는데, 그때 아치볼드의 나이 47세. 클라라와 스물일곱 살 차이다. 일찍이 오토바이도 아니고 스쿠터 뒷자리에 타고 달리다 사고를 만나 위쪽 앞니가 몽땅 빠진 클라라 보든 아가씨.
 또 다른 주인공 사마드 익발. 증조할아버지가 일찍이 인도에서 벌어진 세포이 반란 사건 당시 제일 앞에 나와 첫 방아쇠를 당겨 반란에 불을 붙인 영웅적 인물. 영웅의 후손이 다 좋은 줄 아셔? 천만의 말씀. 사마드 씨는, 앞서 얘기했듯, 오른 팔을 전혀 쓰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자신이 증조부 만갈 판디에게 필적할 기념적인 행위를 빚지고 있는 듯한 일종의 구속을 평생, 아니면 인생의 상당기간 동안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보다. 우리 집구석엔 영웅이 있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으며, 이 책 읽어보니 그런 조상 없는 게 다행이다. 그러나 사마드 익발 씨가 방글라데시에서 영국으로 이민 와서도 이민자로서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의식, 문화, 종교, 기타 등등은 원래 영국인이었던 아치볼드 씨보다 훨씬, 아주 훨씬 복잡한고로, 내가 여기서 구차하게 설명을 하느니, 이 독후감을 읽고 계신 분들이 좋은 책 <하얀 이빨>을 직접 읽으면서 알아내시기를 권한다. 사마드의 아름다운 두 쌍둥이 아들, 그러니까 이민 2세대의 행각까지.
 간단히 말해서 소수인으로 영국에서 살아가는 다채롭고 복잡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그린 소설이다. 대서양의 자메이카와 인도양의 방글라데시 이민자들로 대표하는 이들. 1세대는 자신들 모국의 전통과 종교, 문화에 집착하는 반면, 2세대는 영국의 일반 젊은이와 같은 문화를 누리고 즐기는 데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충돌. 그리고 영국인, 원래부터 영국인이었던 사람들과, 원래 영국인이 아닌 사람들, 유대인 가정을 비롯한 진보적 젊은 영국세대를 포함해서, 복잡한 충돌, 이리 부딪고 저리 부딪는 난장판을 가벼운 필치로 척척 그려냈다. 젊은 작가가 몇 가정의 총체적인 역사와 그것이 궁극적으로 영국 안에서 하나로 합해지는, 비록 영국화가 완전하게 이루어졌다고는 하기 힘들지만, 하여간 세대간, 인종, 문화들이 화해하거나 어찌했건 같이 살게 되는 장면을 킥킥거리면서 쓴 소설. 무지 재미있다.
 난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을 거다. 내년에. <온 뷰티>, 오늘 주문할 예정! 얼마나 재미있길래? 읽어보면 아신다니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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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연인
홍잉 지음, 김택규 옮김 / 한길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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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이름이 홍잉, 무지개 그림자 ‘虹影’이다. 당연히 여자고 책 표지 사진이 실물이다. 젊어서는 이렇게 생겼었다.

 


 예쁘다고? 젊어서 안 예쁜 사람 있나? 내 사진 올려봐? (이렇게 말하고 보니 심각하게 캥긴다.) 이 아가씨가 나이가 조금 차 서른일곱 살 때 낸 책, <영국연인>. 말 그대로 영국인과 중국 유부녀가 연애하는 얘기다. 즉, 불륜. 유사이래 소설의 소재로 가장 흥미 있는 분야가, 일찍이 여러번 얘기했다시피 바로 불륜이다. 불륜은 남이 해도 불륜, 내가 해도 불륜. 불륜 저지르는 남자들(여잔 모르겠고), 정말 존경한다, 존경해. 난 여자 하나도 힘들어(혹은 ‘지겨워’) 죽겠는데 그걸 둘 이상씩? 그것도 동시에? 하이고, 재주도 좋아. 이렇게 써 놓고 보니 큰일이다. 혹시 마누라 이 독후감 읽으면 그야말로 내 제삿날이다. 그건 그거고, 이 책에선 실제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1908년 생. 스물일곱 살 먹은 잘 생긴 청년.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를 졸업하고 자유주의자들의 모임 블룸즈버리 클럽의 멤버로 활약했던 시인 줄리언 벨.

 엄마 이름이 버네사 벨. 누군지 모르시겠지? 좋다, 이모 이름이, 버지니아 울프. 두 자매의 성적 취향도 독특해서, 버지니아는 버네사의 남편 클라이브 벨과 심심하면 같이 자고, 그걸 알고 있는 버네사는 양성애자 덩컨 그랜트를 평생의 남자친구로 두면서도, 소설의 주인공 줄리언이 자신의 생부라고 믿는 로저 프라이와 법적 아버지는 서로 막역한 친구. 이 두 아빠는 학문적으로 현대미학에 관해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 심지어 줄리언의 여동생 퀜틴은 어머니와 어머니의 양성애자 친구 덩컨 그랜트의 딸. 버네사가 낳은 2남 1녀는 똑같은 법적 아빠인 클라이브 벨을 공유하며 각기 다른 생부를 가져서, 이런 경우를 흔히(사실 그리 흔하진 않지만) 아빠부자라고 하나?
 어려서부터 바람직한 환경에서 자란 우리의 줄리언은 지극한 자유주의자로 성장해 인종 간 발생하는 차별, 종교로 인한 차별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건 당연하다. 정말로? 그건 두고 봐야 알 일. 실제로 이 젊은 친구를 1935년에 중국 우한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보다도 훨씬 더 많은 보수를 받고 2년 계약서에 서명한다. 줄리언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한 번 봐야하는 거 아냐?

 

 

 난 황인종이라서 이렇게 생긴 백인이 잘 생긴 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소설에선 키 크고 아주 잘생긴 바람둥이로 나온다. 지금도 일부는 그렇지만 자칭 자유주의자들은 결혼이라는 제도 역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로 거부감을 숨기지 않는데 이 친구도 그랬다. 이미 열 명의 여자와 당연히 섹스를 포함한 연애를 경험했으며, 결혼을 요구하는 여자한테는 조금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친 전력이 있는 상태. 줄리언은 예상 외로 우한에서 자기보다 여덟 살이 많은 중국 여인에게 홀랑 빠지고 만다. 여인은 학과장 청의 부인으로 린이란 이름이지만 줄리언은 친애해마지않는 엄마 버네사에게 그녀를 “K”라고 칭하며 이미 관계를 가졌다고 편지한다. 편지가 적어도 두 달 정도 지나야 엄마한테 도달한 것인데 자신은 그때쯤 벌써 동양, 중국인 여자 하나 자빠뜨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편지’한 것은 소설 내용이고 K라 칭하는 여인과 연애했단 건 위키피디아에 씌어있다. 그걸 홍잉이 <K: 사랑의 기술>이란 제목으로 소설을 썼고, 영어판을 낼 때 <영국연인>으로 제목을 고쳤다는 것까지. K라는 건 사실 그의 연인 “린”의 이름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냥 알파벳 순서로 열한 번째 여자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젊은 줄리언에겐 여자란 그냥 만나서 한 번 하고, 가능하면 여러번, 심하면 질릴 때까지 하다가 기어이 질리거나 (결혼하자는 요청, 협박, 간청 등과 비슷한)과한 요구를 하면 그냥 헤어지면 되는 인격체. 즉 학문이나 사업이나 인간 생활의 거의 다에 관해서는 동등하지만 성적으로는 그냥 만나서 즐기는 상대로만 여긴다는 뜻. 바람직한 가정교육에서 받은 영향이 클 것이다. 여자도 자기처럼 하라는 거다. 질투하지 말고, 규칙 만들지 말고, 제도에 구속받지도 말고, 그냥 즐기라고.
 처음에 홍잉은 소설의 제목을 <K: 사랑의 기술>이라고 했다는데, 난 이 제목이 훨씬 좋다. 영어로 써볼까? <K: The Art of Love>. 책을 읽어보면 내 의견에 동의하실 수 있으리라. 스펠링 하나가 빠졌다고. 즉, <K: The Art of Making Love>로 하면 더 환상적일 걸? 이걸 굳이 한국말로 제목을 만들자면, 이 책의 아홉 번째 장章의 제목과 같이 하면 된다. <방중술을 익힌 미녀>. 이 책? 딱 300쪽. 작가 서문이 무려 두 편이 나온다. 이 서문까지 포함해 300쪽. 역자 해설이나 연표 같은 것들은 300쪽 이후에 달려있고. 서문 포함 300쪽에서, 아이고 좋아라, 그 중에서 야한 베드씬이 거의 100쪽에 육박한다. 올해 연말에 책 시상식을 한다면 2017년에 읽은 최고의 베드씬 상은 틀림없이 이 책이 받을 거 같다.
 작가 홍잉은, 저 위 사진에서 보셨듯이, 세상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자였던 적이 없어서, 남성의 오르가즘을 여성의 것과 비슷하게 묘사하기도 하는데, 하여간 그건 뭐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이 책을 거칠게 정의하자면, 자살 전의 버지니아 울프를 이모로 둔 키 크고 잘 생긴 영국청년이 중국에 영어 가르치러 와서 유부녀 아랫도리에 불붙이는 이야기라고 대강 이야기 할 수 있다. 천박하게 “유부녀 아랫도리에 불붙이는 이야기”라고 하냐고? 그렇다. 린은 외할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어머니의 중국 전래의 비술이자 규방술을 다시 전수받은 천하신공을 지녔으면서도, 마치 옹녀가 강쇠를 만나야 비로소 만족할 수 있듯이, 남편을 포함해 여태 딱 맞는 남자의 것을 만나지 못했다가, 마치 소설처럼 아주 잘 맞는 상대를 만났으니 바로 그가 영국연인이자 버지니아 울프의 조카인 줄리언. 줄리언 입장에선 그 나이에 무려 열 명의 유럽 여자와의 섹스를 포함한 연애를 경험하고 이제 열한 번째로 아름다운 중국 여인을 만났으니 그 신비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거기다가 머리카락과 눈썹을 제외하고는 몸에 아무 털도 나지 않은 천하의 비기秘器로 온갖 비기秘技를 구사하는 환상적인 여인네.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몸매부터 시작해 동양인 특유의 매끄러운 피부, 나이는 서른다섯 왔다갔다지만 서양 여자하고 비교하면 마치 십대인 것 같은 믿을 수 없는 모습. 거기다가 늦어도 오전 열시에 시작해 점심밥 건너뛰고 연달아 아홉 번의 방사를 가능하게 하고(아, 씨. 젊은 게 좋긴 좋다!) 섹스를 통해 피곤하기는커녕 젊음을 되찾아오는 천하신공. 나이 어린 줄리언으로부터 젊음을 빼앗아오는 것이 아니라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어 서로가 서로를 충만하게 하는 도교적 규방술을, 줄리언은 더 이상 미신이라고 우습게 여기지 못한다. 으떠셔? 얘기만 들어도 후끈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리언은 여전히 자유주의자로 결혼제도에 반대하며 남녀 관계에 관한 한 결코 질투하지 않고(진짜?), 중국혁명에 참여하고 싶은 충동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에서 여자가 남편 아닌 남자와 섹스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 남편과 이혼 후 줄리언과 다시 결혼하는 방법 말고는 사회적으로 용인을 받을 수 없고, 만일 그러하지 않다면 심각한 경우 특정 계급 집단에 의하여 살해당할 가능성까지 있다(난 중국에서 불륜을 저지른 여자의 몸을 100 토막을 내 죽이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이 딜레마는 어이할꼬.
 입이 간질거려 마구 얘기하고 싶지만 어느 수위에서 멈추어야 하는지 참 애매하다.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 나머지 지역을 야만으로, 혹은 적어도 개화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규정하는 인종들이 유럽 백인종들이다. 제아무리 자유주의자라고 해서 과연 이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살갗 허연 것들이 정말 색깔 든 인종들을 자신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할까? 전쟁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심지어 라틴 아메리카나 다 비참하고 끔찍하고 절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걸 굳이 겪어봐야 아나? 아시아, 동양, 중국이라서, 여기서만 포로를 고문하고 칼로 전쟁범죄자의 머리통을 잘라버리는 야만이 횡행한다는 영국 청년의 오만. 유럽에서의 혁명이라면 전투를 통한 깨끗한 살인과 정당한 재판 후 처형 같은 지극히 신사적인 것들만 있다고 생각하는 순진무구, 라기보다 아직 철딱서니 없는 부잣집 도련님.
 실제로 책의 주인공 줄리언 벨은 이모 버지니아 울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스페인 내란에 참여해 1937년, 짧은 생을 마감한다. 만 29세. 얜 중국 혁명에 치를 떨며 좌절하더니 왜 스페인까지 가서 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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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2-04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만 사두고 읽지 않았네요...

1930년대 전세계 인터내셔널 혁명에 동참
했던 지식인들의 허무주의 뭐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Falstaff 2017-12-04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것들은 거의 안 보이고요, 저는 동서양 간의 문화충돌, 뭐 이런 식으로 읽었습니다.
 
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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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적어도 서른 살 넘어서는 헝가리 말로 작품을 쓴 헝가리 작가. 이 책의 번역은 독문학자 김인순이 했다. 중역본이란 얘기다. 하긴 우리나라에 헝가리 어 전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마음 넓은 독자들이 이해해주자. 게다가 헝가리라면 19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왕을 겸직한데다가, 산도르 마라이의 조상이 작센에서 이주해온 독일인이면서도 19세기에 있었던 헝가리 독립운동에서는 적극적인 헝가리 독립군 편을 들었는데, 그러면서도 집구석에선 또 독일어를 사용했단다. 이런 이유로 이왕이면 영어 중역보다 독문학자가 독일어 버전을 번역한 것이 조금은 더 바람직하겠지. 다 좋다. 소비에트가 헝가리를 점령하는 바람에 자유로운 창작활동에 대단한 장애물이 생기자 유럽 각지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89세에 캘리포니아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 이런 것도 다 좋은데(작가 스스로가 평소부터 ‘지나치게 오래 사는 건 분별없는 짓이다’라고 주장했다니까 279쪽, 역자해설), 아시다시피 헝가리는 성을 먼저 쓰고 이름을 나중에 쓴다, 그래서 ‘산도르’라고 불러야 할 거 같지만 역자 해설 보면 줄창 ‘마라이’라고 칭하는 것이 무척 신경 쓰이고 헷갈리는 거, 이거 어쩔겨? (구글 검색하면 '마라이'가 성姓이고 '산도르'가 이름이다)
 좋아. 시작하기 전에 이 정도 구라를 풀었으면 일단 됐고, 책 이야기로 들어가면, 마라이가 1942년에 발표한 소설 <열정>이 1989년 이탈리아에서 다시 발행된 다음부터 폭발하기 시작해서, 물론 광고문구 특유의 과장이 큰 역할을 하겠지만, 거의 최고 수준의 20세기 작가로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책 뒤표지 보면, “이미 고인이 된 거장巨匠을 20세기 문학에 선물했다. 우리는 앞으로 토마스 만, 카프카, 로베르트 무질과 나란히 이 거장 산도르 마라이를 거론할 것이다.”라고 어마어마하게 뻥을 쳐놓았다. 대단하지?
 근데, 정가 11,000원으로 솔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 웬만하면 한 번씩 읽어보심이 어떠하실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와 친밀한 관계를 이룬 헝가리의 막강한 귀족 가문의 외아들 헨릭. 말이 쉬워 귀족이지 이 정도면 수준이 귀족 중에서도 저 꼭대기, 가문대대로 정승판서 안 한 조상 없는 그런 집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근데 이런 집안의 외아들 헨릭은, 얘네 헝가리 아빠하고 프랑스 엄마 사이에 극복하기 힘든 성격상 차이가 있어서 그랬는지 아주 어려서부터 자신의 곁에 누군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신체적, 그리고 당연히 정신적 공황상태로 빠지는 경향이 있었다. 소년기엔 열여섯 살 위의 유모 니니가 없으면 당장 체온이 급상승하고 정말 며칠 안으로 짧은 생을 마칠 것 같은 위험한 지경에 이르다가, 저 헝가리 벌판에서 열차를 삼박사일 타고 파리를 거쳐 북부 해안까지 유모 니니가 달려오자 금방 병에서 낫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인 적도 있다. 물론 전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겠지. 그 일화는 소년기에 접어들어 사관학교에 입학한 다음에 절친한 친구, 진정한 우정으로 운명(난 분명히 ‘운명’이라고 했지 ‘죽음’이라고는 안 했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정을 나누는 폴란드 출신의 가난한 귀족 집안의 자제 콘라드와의 친교가 헨릭에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강조하기 위한 연출일 확률이 높기는 하다. 하여간 책의 주인공 헨릭이란 캐릭터가 그렇다는 말씀.
 헨릭. 놀라운 인물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용감하지도 않고 비겁하지도 않게 전투에 임하면서 오직 하나, 자신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적을 어떻게 해서든지 달성하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 저 헝가리 촌구석, 자신의 영지, 자신의 저택에 칩거하기를 무려 41년 43일째에 이른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퇴역 장군. 이제 아흔한 살이 된 니니와 여전히 함께 살며, 노파에게 오늘 41년 만에 손님이 올 터이니 저녁식사를 준비해줄 수 있느냐고 물으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이 집안에서 벌어진 모든 사건, 모든 자그마한 소란 등을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는 니니. 비록 한쪽 눈은 백내장으로 하얀 막에 싸여 보이지 않지만, 나머지 하나,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 같은 파란 눈을 초롱이면서 기꺼이 41년 전, 저택에서 있었던 마지막 만찬과 비슷하게 식탁을 차리겠노라 응한다.
 한 인간이 41년이 넘도록 넓은 영지와 저택 안에서 전화나 TV, 라디오조차 설치하지 않고, 오직 사색과 가끔가다 사냥으로만 소일하며, 많고 많은 주어진 시간을 다 바쳐  깊은 숙고를 거듭했으니, 어찌 이 인간을 우리는 ‘도사’ 또는 ‘신선’으로 칭하지 못할까. 모르긴 몰라도 이 양반 죽은 다음에 화장하면 몸에서 사리 같은 건 좋이 나오리라. 실제로도 소년 헨릭은 이미 일흔다섯 살의 오늘 낼, 하는 노인으로 늙어갔다. 그건 그와 필생의 우정을 나눈 콘라드도 마찬가지. 둘이 동갑이니까. 말은 오늘 낼 한다고 썼지만, 이들은 나이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이쯤에서 스포일러 하나 꽝. 41년 전, 이들 사이에 비극적인 일이 생겨 콘라드가 장교직을 사임하고 해외로 떠나게 됐는데, 두 사람 다 당연히 비극적인 일의 당사자이며, 헨릭은 틀림없이 콘라드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한 번은 자신을 방문할 것을 믿어 평생 영지와 저택을 떠나지 않았고, 콘라드 역시 자신이 죽음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기 전에 언젠가는 한 번 헨릭을 방문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잊지 않아, 둘 다 그때를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생존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가 서로를 만났을 때를 위하여 보통 이상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런 이상 상태의 생명유지와 건강은, 이들이 만난 다음이면 급격하게 쇠퇴할 수 있다는 전제다. 오직 하나, 둘이 언젠가 만나 41년 전에 있었던 비극에 대한 비밀, 바꿔서 얘기해 진실을 밝히면, 그 일 한 번으로 더 이상 생을 이어갈 목적이나 이유가 소멸된다는 뜻. 그럴 만큼 41년을 묵힌 진실은 두 인물한테는 절대적이다.
 나는 당연히 저 먼먼 시절의 비극적인 일에 관해서 그게 어떤 일이었는지 조금도 귀띔해주고 싶지 않다. 다만, 41년을 저 광활한 헝가리의 영지와 저택에서 인생을 관조하고 한 사건을 집중해 사색한 헨릭, 그의 묵은 사색이 중첩하여 인간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에 관한 놀라운 성찰을 읽을 수 있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이 책을 선택하는 이유일 수 있다는 점만 강조하겠다. 거기다가 전편을 걸쳐 차분하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문장들까지.
 책을 읽고 산도르 마라이의 다른 저작들을 검색해봤지만 거의 다 절판 아니면 품절이다. 매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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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2-01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사의 어떤 분이 이 책 한 번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중고 서점에서 이 책 발견하고는 살까말까 하다 결국 관뒀거든요. ㅋㅋㅋ 근데 폴스타프 님이 읽어보라고 하니 사올걸 하는 후회가... ㅋㅋㅋㅋㅋ (도서관에도 있더라고요. 빌려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17-12-01 10:06   좋아요 2 | URL
옙. 도서관에 있는 책, 괜히 사실 필요 없습지요. ㅎㅎㅎ
근데 좋은 회사 다니시네요. 전 회사에서 누군가에게 이 책 읽어봐라, 이렇게 권할 직원이 안 보여요. ㅠㅠ 하긴 원래 중원의 고수는 죽림에 묻혀 있는 것이지만요. ㅋㅋ

레삭매냐 2017-12-01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중역본이군요. 하긴 우리나라에서 헝가리말을
번역할 인재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부리나케 검색해 보니 근처 중고서점에 구판버전
으로 중고책이 있다고 하네요. 커피 한 잔 값보
다 싸다고 하니 바로 달려 가서 땡낄까 고민 중
입니다.

다른 책들도 거의 다 살 수가 없네요.

Falstaff 2017-12-01 16:5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을 추천받아 읽어본 건데, 하도 오래 전이라 추천해준 사람(또는 믿을 만한 매체)인지 기억나지 않네요.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중고책이면 읽어보세요. 마라이의 대표작이라 하더라고요. 저 사는 동네도 중고서점이 있는데 책이 별로 없어서요. ㅠㅠ

레삭매냐 2017-12-01 17:30   좋아요 0 | URL
오옷 중고서점에 산도르 마라이의 책이
세 권이나 있다고 하네요. 가서 쓸어와야
겠습니다.

Falstaff 2017-12-03 12:11   좋아요 0 | URL
지금쯤이면 마라이는 다 건지셨겠군요. ^^
저도 한번 책방 뒤져봐야겠습니다.

sprenown 2017-12-02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장철인데 묵은 김장김치 같은 책인가 봐요. 3년묵은 묵은지도 아니고 41년 깊은 맛! 게다가 체코도 아니고 헝가리..김치는 항아리에 묻어둬야 아삭하면서 깊은맛이 나는 법!

Falstaff 2017-12-03 12:13   좋아요 0 | URL
ㅎㅎ 맞습니다. 깊은 맛이 나는 소설이더군요.
작가의 다른 책도 얼른 중쇄를 찍었으면 좋겠는데 힘들 거 같아 아쉽네요.

2017-12-02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3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