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록집 -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3인 시집
박목월.조지훈.박두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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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불허전.
 지금시대, 21세기에 이처럼 시를 쓸 필요도 없고, 쓸 수도 없고, 써서도 안 되겠지만, 70여 년 전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갖지 못한)신생국이자 신탁통치를 받는 후진국에 이런 서정시인들이 있었으며, 지금 그들의 시를 읽는다는 일이 이렇게 감격적일 수가 있을까. 고백하노니, 이들의 시라고는 교과서에 나오는 것 말고는 겨우 하나나 둘 정도만 읽고, 마치 다 아는 것처럼 허세를 부려왔다.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이 있는 사람치고 <청록집>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것. 그러나 진짜로 <청록집>을 읽어보기 위해서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40여년이 더 필요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창피한 것인지, 이 시집을 읽어보고 절감했다.
 ‘술 익는’을 어떻게 발음하는 것이 맞는지, 이때 일어나는 현상을 무엇이라 하는지 만을 배웠다. ‘술 익는’은 ‘술링는’으로 발음해야 하며 기억이 까마득하지만 억지로 끄집어내면 아마도, 자음 첨가, 연음법칙, 자음접변 상호동화 이런 거 같은데, 이 시어가 나오는 시 <나그네>가 지훈의 시 <완화삼>의 답시라는 건 몰랐다.



玩花衫

 ―木月에게―


 차운산 바위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우름 운다.


 구름 흘러 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이냥하여
 달빛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완화삼玩花衫이 무엇인지는 사전을 찾아보시라. 그리고 다시 시를 읽어보면 무릎을 탁, 치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먼저 지훈이 목월에게 헌시를 바치자, 목월의 답시가 탄생하니,



 나그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芝薰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렇게 나오는 거였다. 내가 이들의 시를 배운지 아무리 오래됐다고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앞에서 목월, 지훈, 혜산의 시의 특징 같은 것을 이 자리에다 써놓는 파렴치한 짓은 하지 못하겠다. 그리하여 책 이야기나 하겠다.
 책은 1946년 6월 6일, 초판이 을유문화사에서 나왔고, 놀랍게도 2006년, 60년이 지나야 중판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다. 내 책은 2016년에 찍은 중판 11쇄. 초판은 예전 책이 다 그랬듯, 책갈피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넘기고, 문장도 종縱으로 썼다. 60년 동안 문법도 바뀌고, 단어 자체도 변하여, 이제 70년 전의 시를 읽기 위해서는 새 편집이 필요하다. 시에 나오는 한문을 한글로 바꾸고, 지금 표기법으로 편집한 중판의 뒤편에 놀랍게도 초판을 찍을 때의 원래 시가 전편 수록되어 있다. 여전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피를 넘기며 종으로 쓰인 문장을 한 채. 아, 이러니 내가 을유문화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 내 경우엔 옛 표기가 그리 낯설지 않아 책을 뒤집어놓고 갈피를 왼손으로 넘기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정말 멋있는 광경이지 않나!
 혜산 박두진의 시를 한 번 읽어보자.



 墓地頌

 


 北邙 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속 어둠에 하이얀 髑髏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ㅅ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太陽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메ㅅ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군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었네.



 박두진의 시 가운데 <묘지송>이 가장 좋아 여기 쓴 것이 아니라 제일 짧은 시라서 옮겼다. 세 사람의 사진을 보면 박두진과 조지훈이 힘 좀 쓰게 생겼고 (지훈은 반도가 알아주는 술꾼이기도 했으며), 박두진은 피골이 서로 붙어 좀 빌빌할 거 같은데, 사람은 생긴 것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 박두진이 제일 오래 살고, 지훈이 가장 짧은 생을 살았다. 참, 인생이란.
 서재 친구분들이시어, 지나가는 과객님이시어, 진정 말씀드리니 미욱한 나처럼 후회하지 마시고 하루라도 서둘러 <청록집>을 즐겨보시라. 크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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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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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먀찐. 이름은 족히 들어보았으나 어째 손이 가지 않던 작가. 보관함에 오랜 세월 들어 있다가 이제야 겨우 일독을 했다. 이번에도 많이 망설이다가 석영중의 번역을 믿고 그냥 한 번 읽어본 건데, 이럴 경우 흔히들 이렇게 얘기한다. 대박.
 진짜 자먀찐이 대단한 건, 이 소설을 1920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표했다는 것. 작가가 18세에 이미 볼셰비키 당에 입당을 하고 일찌감치 유배생활도 경험한 소위 혁명가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이다. 1920년, 러시아혁명을 마치고 남쪽에선 카자흐 반란군과, 동쪽에선 백계 러시아 반혁명군과 내전에 여념이 없어서 전 인민이 기아와 추위에 내몰리고 있던 시절이다. 러시아 문학판에선 <어머니>를 쓴 막심 고리끼를 필두로 우리도 잘 아는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 등이 사회주의적 명작을 쏟아내던 시기였다. 문학도 당연히 혁명에 이바지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 했던 것이다.
 이 빛나는 새로운 세상에 자먀찐이 등장해 <우리들>을 써서, 쓴 걸 그냥 보관한 것이 아니라, 비록 소련 밖의 영토일망정 러시아어로 발표해버렸던 거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소설 <우리들>이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시려나?
 ‘미래 소설’이다. 한 30세기쯤의 지구. 전 지구인구의 80%를 희생시킨 2백년 전쟁을 끝내고 세계는 단일국가로 통일됐다. 위대한 영도자 ‘은혜로운 분’의 치하에서 초록색 벽을 높게 둘러친 거대국가는 벽 안에서 오직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모든 자유를 포기했다. 전 국민은 이름 대신 번호가 주어져 주인공 D-503, 그가 사랑하는 여인 I-330처럼 불리며, 작가는 이들을 ‘인간’ 혹은 ‘국민’으로 칭하지 않고 (20세기 사람의 시각에선) 냉정하게 ‘번호’라고 말한다. 국가의 모든 번호들은 같은 시간에 울리는 경종으로 침상에서 일어나 석유추출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같은 시간에 산책을 하며 주어진 노동을 일정시간 해야 한다. 갑이 을과 섹스를 하고 싶으면 적절한 서류를 제출하여 승인을 얻어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몇 분 동안 관계를 맺는데 임신은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걸리면 사형이여!). 수없이 많은 대형 강당에 매일 몇 시간씩 모여 위대한 영도자의 말씀과 번호들의 진정한 행복과 이성과 과학에 대한 강연을 들어야하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모든 번호들은 같은, 적어도 상당히 비슷한 사고를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번호의 행복을 위한 이런 조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일부 지각없는 것들은 진공 튜브 안에서 일종의 (고통 없는) 고문 또는 취조를 거친 다음 수만 볼트의 전압을 흘리는 은혜로운 분의 손끝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것이 ‘인간’이 수행한 소위 ‘마지막 혁명’의 결과이다.
 ‘마지막 혁명’이라는 건 한 마디로 더 이상의 혁명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애초부터 변증법의 무한 고리에서 벗어나는 허위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실험실에서 태어나자마자 번호를 부여받은 인류는 초기부터 번호의 행복을 위한 인간의 기계화에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에.
 그러나 국가를 둘러싸고 있는 초록색 벽의 밖에는? 얼굴의 일부를 제외하고 온몸에 털이 숭숭 난 (그렇게 진화한) 또 다른 인류가 벌거벗은 채 살고 있다. 이들은 폐허로 변한 광막한 벌판에서 추위와 기아에 노출되고 있으나 거의 무한정의 자유를 향유한다. 당연히 서로 눈이 맞으면 자유로운 ‘액체교환방식’에 의하여 임신하고 출산하고 수유하고 양육한다. 아울러 벽 안의 신인류, 즉 모든 번호들 속에서도, ‘비이성적이고 불안정하고 불쾌하고 위험스러운’ 자연의 흔적을 지워내지 못한 번호가 있기 마련이어서 지금 주어진 행복과 감시와 통제 아래의 것들이 진정한 행복이 아님을 일찌감치 알아챈 번호들이 있어, 마지막 혁명 이후에도 또 다른 혁명이 존재함을 입증하려 한다. 자유롭게 사는 벽 밖의 인류와 함께.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자먀찐이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이 1920년. 소비에트에서 이제 막 발생한 공산주의 체제를 경험한지 불과 3년차. 작품을 쓴 기간이 1년이라고 치면, 공산 혁명 2년차에 자먀찐은 이미 공산주의 또는 볼셰비키 또는 레닌 치하의 정치체계를 보고 앞으로 레닌에 이은 스탈린 등의 권력구조와 또 다른 획일화의 미래를 예상한 것이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죽고 싶어 환장을 하다’라고들 하는데, 이런 생각을 소설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작가의 숙명이다. 완벽한 통제와 세뇌. 자유의 박탈. 주장하는 바는 국민들의 행복을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어느 경우나 국민, 소설의 경우 ‘번호’들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즉 독재자의 영구 집권을 위해서이다.
 이 훌륭한 소설을 읽으면서 난 도스토옙스키의 몇 작품을 떠올렸다. 주인공 ‘나’ 즉 D-503이 번호들에게도 영혼이 있을 수 있고, 영혼이 틈입한 번호는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병균에 감염된 상태인데, 자유라는 것 혹은 자유의지가 생기자마자 D-503은 일종의 섬망 상태로 빠져든다. 그런데 놀랍게도(사실은 나로 하여금 우쭐하게 만들게도) 석영중의 ‘역자해설’에서도 도스토옙스키를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2X2=4의 반복적인 사용과 『대심문관의 전설』에서의 행복과 자유의 관계, 대심문관과 ‘은혜로운 분’의 유사점 등을 예로 들었지만 일반 독자에 불과한 나는 대심문관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주인공의 심리상태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또는 드미트리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와 유사하다는 생각만 했을 뿐. 석영중에 의하면 자먀찐의 <우리들>이 뒤에 나올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오웰의 <1984>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럴 만하다. (둘 다 읽어봤지만 신기하게도 <1984>는 스토리조차 완벽하게 잊었다. 아마 오웰을 혐오해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어서, 오직 이 이유 하나만 가지고, 아직도 이 책이 독자에게 큰 효용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지극히 불행하게 아직도 유효하다. 지금 역시 <우리들>에서 나오는 ‘단일제국’은 전 지구적으로 존재한다. 다만 정치형태가 아니라 기업이라는 형태를 갖춰서. 물론 제3세계 일부에서는 아직도 절대권력을 향유하는 독재자가 있겠지만 세계적으로는 거의 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대신, 거대기업 내부에서는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체제가, “능률”이라는 이름으로, “성과의 배분”이란 행복을 보상으로, 행해지고 있다. 다만 다른 것은 이 체제, 즉 거대기업의 조직적 능률과 행복 대신 자유롭고자 하면 언제든지 ‘체제에서 벗어날 자유’가 개인 또는 ‘번호’에게 주어진다는 것. ‘체제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선택하는 ‘번호’들에겐 죽음 대신, 벽의 바깥, 황량한 정글 아니면 사막으로 던져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 자유를 원해 벽의 바깥으로 나왔건, 아니면 ‘은혜로운 회장님’의 사형집행으로 처리가 됐건, 이런 ‘번호’들을 우리(또래)는 대충 ‘닭 튀기는 인간’으로 부르기도 하고 뭐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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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21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3이요..... 누군가 503이라는 숫자로 연상되는 관념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바람에 ˝주인공 D-503과 그가 사랑하는 여인 I-330˝이라는 대목에서 어떤 사람 두 명을 떠올리고 말았네요.

옛날에 읽었는데 <1984>와 <멋진 신세계>, <우리들> 중에서 전 이 작품이 제일 좋았던 기억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17-12-21 10:23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 것. 그림은 그려지는데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좋은 그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 부디 좋은 그림이었으면....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왕자 2022-02-09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리뷰를 보고 있는데 긴 리뷰를 이렇게 집중해서 읽기는 처음이네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2-02-09 06:06   좋아요 0 | URL
좋은 마음으로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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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롱뇽과의 전쟁>을 하도 재미나게 읽어서 바로 그날 보관함도 아니고 ‘바로구매’ 버튼을 클릭, 샀다. 세 편의 희곡이 담겨있는 선집. <곤충 극장>,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하얀 역병>. 체코의 거장 가운데 한 명이라고 일컫는 카렐 차페크의 작품답게 20세기 전반기의 시대적 고민을 담고 있는 <곤충 극장>과 <하얀 역병>, 아시는 분은 아실 테지만 내가 워낙 좋아하는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의 걸작 오페라 <마크로풀로스 사건>의 원전을 읽는 기쁨은 실로 상당한 것이라 읽는 내내 매우 즐거웠다. 이제 드라마 이야기를 해보자.
 <곤충 극장>의 등장인물은 나그네 한 명과 나비 채집에 열을 올리는 교수 한 명을 빼고는 전부 곤충들이다. 프롤로그가 끝나고 1막이 올라가면 나비들의 세상. 첫 페이지부터 나는 야나체크의 또 다른 오페라 <작고 영리한 암 여우>, 찰스 맥케라스가 지휘하는 파리 샤틀르 극장 실황 DVD에 재미나게 등장하는 무수한 곤충들이 번쩍 떠올랐다. 딱 그 수준의 무대를 생각하면 될 듯. 문제는 영상물을 난 봤지만 당신들은 아마도……. 나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와중에 이들 속에서 시인도 있고, 떠들기 좋아하는 것들도 있어서 서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2막에선 하루살이의 번데기와 쇠똥구리 부부, 귀뚜라미 부부, 유충을 키우는 맵시벌 아빠, 기생충 등이 서로 먹고 먹히는, 그냥 먹고 먹히면 될 것을 굳이 식량을 저장해놓음으로 해서 필요 없는 살상을 하는, 누가 읽어도 자본주의의 부르주아 비판임을 알 수 있는 촌극이 이어진다. 3막은 두 개미떼들 간의 전쟁.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서로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하고 숱한 살상행위를 벌이는 것에 대한 비난. 이건 마지막 작품 <하얀 역병>에서도 무거운 주제로 다시 읽을 수 있는데, 카렐 차페크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대상이 무엇이든지간에, 나비가 됐건 쇠똥구리가 됐건, 아니면 하루살이나 개미떼들이 됐건 간에 그건 애초부터 사람의 실제 행위 혹은 당대 인간들이 벌일 수 있는 위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밝힌 작가다. 1920년대부터 일정기간 차페크가 본 서구사회는 사랑과 성에 관한 속박이 만연했으며, 부르주아에 의한 착취가 극에 달했고, 독재자에 의한 군비확장으로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대단히 불안한 상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두가 상징이나 은유가 아닌, 곤충 자체가 인간이니까. 그는 작품을 통해 동시대인에게 지금은 모든 인류가 엄정하게 눈을 뜨고 지켜볼 때라는 걸 호소하고 있던 건 아닐까. 하긴 한 작가 붓끝으로 어찌 황하의 물결을 막을까.
 실제로 <하얀 역병>에서는 ‘갈렌’이라는 이름의 의사 한 명이 강대국에 의하여 다른 강대국들을 상대로 벌어지는 큰 전쟁을 막아보려 애를 쓰는 스토리가 나온다. 거창한 구호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매우 애매하고 사소한 명분으로 국민들을 호도해 흥분하게 만들어 전쟁에 이르고야 마는 독재자와, 군수산업을 필두로 하는 거대기업들. 15세기 검은 역병이었던 흑사병과 유사하게 전 유럽을 휩쓰는 하얀 역병, 그 치료제를 무기로 국가 또는 호전적 체제에 대항하여 외롭게 투쟁하는 의사. 그의 치료제로 과연 거대전쟁을 막아낼 수 있을지는, 재미있는 책이니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역시 내가 제일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건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지 제일 공감을 했다는 말은 아니다. 가장 공감을 한 것은 차페크의 반전주의였다.) 이 드라마는 연금술사 아버지를 두었던 17세기 그리스 아가씨 엘리나 마크로풀로스가 주인공인데, 지금 나이가 무려, 자, 박수 준비, 우리의 전통, 그러나 일제의 잔재일 것처럼 보이는 337 박수, 삼백서른일곱 살이다. 연금술사 아버지가 드디어 죽지 않고 젊음을 유지하는 명약을 만들어 엘리나에게 준 것. 엘리나는 명약의 레시피 또는 처방전을 양피지에 적어 품에 안고 크레타 섬을 탈출해서 터키인지 어딘지로 도망한다. 이후 수없이 이름을 바꾸고, 아이도 열 댓 낳고, 숱한 사내들과 연애를 해 이날까지 온 거다. 지금은 에밀리아 마르티란 이름의 소프라노 오페라 가수로 활약 중. 수많은 가짜 이름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건 알파벳 이니셜로 E.M을 지켜왔고, 3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필적도 변하지 않았다. 원래 그건 바뀌지 않는 거라며? 그러나 연금술사 아빠가 만든 명약도 약 300년이 지나면 약발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 하지만 처방전 혹은 레시피가 적힌 양피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서류라고 해도 떠돌이 아가씨가 온전하게 보존을 할 수 있었겠는가. 대신 100여 년 전에 잠깐 동거하던 남자의 집(저택 혹은 성)의 서류함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에밀리아. 사실은 몇 백 년 전에 자기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니 뭐 당연하지만. 마침 지금 문제의 집과 장원, 토지에 관해 소송중이며 곧 판결이 나올 것이란 걸 신문에서 보고 변호사 사무실로 방문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300년의 삶. 그건 너무 길고 길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런 환희나 행복이나 경이나 만족을 주지 못하는 세월. 깊은 심연에서 생명 없이 사는 것과 비슷한 삶의 이어짐일 뿐이다. 이런 양피지가 당신에게 주어지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음을 유지하면서 300년을 살 것인가, 아니면 모른 척하고 활활 타는 아궁이 속으로 던져버릴 것인가. 그리고 지금 내린 결정이, 확실한가. 불멸은 재앙이다. 내 생각으로는.
 야나체크의 오페라가 원래부터 소리치기shouting와 (레치타티보가 아닌) 대사 비슷한 읊조림이 계속 나열되어 듣기가 그리 쉽지 않지만 그건 많은 내용을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는 작곡가의 애로사항이기도 했을 것이다. 물론 야나체크가 이 드라마를 매우 좋아해 오페라로 만들었겠지만, 아이고, 희곡으로도 대사가 무지하게 많은 편이다. 그걸 가지치기 별로 하지 않은 것처럼 각색하면서 다만 4막 작품을 3막의 짧은 오페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걸 보고 들은 사람들도 원작인 이 희곡을 읽으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적어도 이 드라마에 관해선, 나도 오페라작품을 좋아하지만, 희곡을 읽는 것이 갑이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유튜브에서 오페라 <마크로풀로스 사건> 마지막 부분을 링크한다. 이 영상물에선 주연 에밀리아 마르티가 죽고(죽은 것처럼 보이고) 조연 크리스티나가 300년을 살 수 있는 처방전이 적힌 양피지를 탐욕스럽게 품에 쥐는 것으로 끝난다. 오페라 대본에선 크리스티나가 벽난로에 던져버리는 반면. 그러면 원래 드라마는 어떻게 끝날까? 힌트. 둘 다 아니다. 그럼 어떻게? 안 알려줌. (궁금하시지도 않겠지만)

 

독일 바이에리쉐 국립 오페라 실황

 

 

 

 

* <곤충 극장> 제2 막 ‘청소부와 약탈자’에서 이런 지문이 나온다.
 “듬성듬성 풀이 돋아 있는 모래 언덕. 풀잎이 나뭇등걸만큼이나 두껍다.”
 잘못 읽었나? 풀잎이 나뭇등걸만큼 두껍다니. 아니면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나뭇등걸이 ‘그루터기’ 얘기하는 거 아냐? 수주대토守株待兎 할 때 주株. 사진으로 봬줘?

 

 

 나뭇등걸에 두꺼비 한 마리 올라가 있다. 이게 나뭇등걸 아냐? 어떻게 풀잎이 이만큼 두꺼울 수가 있냐고! 난 책 읽을 때, 이런 거 나오면 여간해서 다음 줄로 넘어가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끙끙 앓다가, 냉수 한 컵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읽다가, 도무지 안 되겠어서 신발 신고 나가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책상에 앉아 그건 그러려니, 하고 그냥 읽어 내려가는데 바로 다음 문장에 글쎄 이런 게 나오는 거다.
 “풀잎에 붙은 번데기 하나가 시체를 먹는 벌레 떼에 습격을 당하고 있다.”  (40쪽)
 에잇. 제목이 <곤충 극장>이면 곤충을 전부 사람이 연기해야 한다. 그러니 풀잎에 붙은 번데기도 사람이다. 사람이 어떻게 풀잎에 붙어 있을 수 있겠냐고. 그러기 위해선 아무리 풀잎이라도 적어도 저 사진 만큼 두꺼울 수밖에 없잖아. 아, 성질은 급해서 말이지 그걸 못 참고 똥을 싸요, 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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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2-20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수록 감탄하게 되는 작가입니다! <호르두발>이나 <별똥별>도 틀림없이 좋아하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지만지 책이라 좀 비싼 것이 흠;;

Falstaff 2017-12-20 10:13   좋아요 1 | URL
질문 있습니다!
ㅎㅎㅎ 그동안 지만지 책은 한 권도 사지 않았는데요, 그건 비싸서가 아니라, 정말 완역을 했을까가 궁금해서였습니다.
얘기하신 책들, 잠자냥님 읽어보시기에 완역 같았었나요? 그 출판사가 좋은 책들을 아주 많이 찍더라고요. 완역이기만 하면 진짜 고려해볼 만할 텐데요. ^^

잠자냥 2017-12-20 10:26   좋아요 1 | URL
네, 지만지 책이 완역이 아닌 것들이 있어서 좀 꺼려지지요. 그런데 <호르두발>이나<별똥별> 이번에 나온 것(하얀책표지)은 완역인 것 같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세요.

Falstaff 2017-12-20 11:2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얼른 가서 뒤져봐야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대산세계문학총서 111
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 지음, 안지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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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더라? 애정? 예컨대 헤세를 좋아한다는 얘기를 소위 급식체로 쓰면 ‘헤세를 애정한다’고 하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난 다분히 러시아 작가와 작곡가를 애정한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생소한 러시아 극작가라는 점이 이 책을 선택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어제, 퇴근버스에서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냥 푹 빠졌고, 과하게 집중을 하는 바람에, 무려, 두 정류장이나 더 가서 내렸다.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추워 죽는 줄 알았다. (지금 독후감 쓰는 날짜가 12월 14일. 오늘 최저온도 영하 14도, 어 춰!) 오다가 소주 두 병 사와서 다 마시고 잤다. 일어나 거울 보니까 저게 인간인지 한 마리 축생인지 막 헷갈린다. 그래도 마누라, 바가지 안 긁는다. 햐,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온다. 물론 콩나물국 같은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 책, 읽지 마시라. 밖이 내다보이는 버스 타고도 두 정류장을 더 가는데, 만일 지하철 2호선이라면 무한 순환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세 편의 희곡을 담고 있다. <즐거운 죽음>, <제4의 벽>, <가장 중요한 것>.
 다 매력이 있다. 첫 작품 <즐거운 죽음>부터 난 극작가 예브레이노프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다섯 명에 불과한 소품. 아를레킨, 콜롬비나, 피에로, 의사, 죽음. 스토리는 죽음의 침상에 누운 아를레킨이 죽음여사와 포옹하기까지. 전형적인 궁정 희극의 등장인물이 나오니, 당연히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까지를 겸비해, 프롤로그에서는 피에로가 나와 지금 아를레킨이 죽어가고 있고, 자기는 아를레킨의 아내 콜롬비나와 내연의 관계에 있다는 얘기로 배경 설명을 해주고, 짧은 에필로그에서도 나름대로 극을 정리해주는데, 에필로그의 내용은 안 알려드림. 이 작품을 읽고 예브레이노프가 상당히 감각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일까, 아니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작품을 썼을까, 조금 궁금했다.
 <제4의 벽>에서 ‘제4의 벽’이 무엇일까. 일반적인 연극무대를 상상해보시라. 관객은 무대를 향한 터진 공간 안에서 움직이고 대사하고 노래하는 배우들을 본다. 이 작품에선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공연하는데, 극장주가 괴테의 조수였던 에커만이 쓴 책 <괴테와의 대화>를 보니, 메피스토펠레는 또 다른 파우스트의 자아라고 했던 기억이 나서, 그러면 메피스토펠레는 극에 등장하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른다. 파우스트의 또 다른 자아라면,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도 노래해야 한다는 주장. 그런데, 파우스트는 테너, 메피스토펠레는 베이스. 어떻게 같은 사람이 노래를 해야 하나. 그냥 오케스트라가 조를 바꿔 테너 음역에 맞추면 된다. 마르가리타는 16세기의 촌년. 그러므로 맨발에 때가 줄줄 흐르는 거친 옷을 입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아무리 러시아에서 공연을 한다고 해도 프랑스 작곡가 구노의 <파우스트>는 중세 독일어로 노래해야겠지? 당연하지! 문제는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를 소환하는 장소. 그게 말씀이야, 아시다시피 파우스트 박사의 방이다. 연극 또는 오페라를 지극히 사실적으로 공연하려면 진짜 그 모습을 담아야 하거늘 어찌하여 파우스트의 방구석은 벽이 세 개밖에 없느냐는 것. 그리하여 제4의 벽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의견. 연극 또는 오페라 연출계의 이 놀라운 실험은 결국 이루어져 관객은 제4의 벽에 붙은 창문을 통해 파우스트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재미있겠지? 이런 생각, 아무나 못한다. 책 뒤에 붙은 ‘옮긴이 해설’을 보면 러시아에선 예브레이노프 보고 ‘연극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아편쟁이’라고 한다던데, 이런 아이디어는 평생을 연극판에 있던 작자들이나 생각해낼 수 있는 거다.
 어제 나로 하여금 버스 정류장 두 개를 지나치게 했던 건 표제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4막 구성의 장편. 1920년대 중반에 쓴 작품이라서 이미 현대적 실험 같은 것이 가미되어 있다. 한 인간이 여러 인격을 갖추어 다양한 인간을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인데, 내가 이렇게 재미없게 말한다고 해서 단순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수원 밑에 병점 찍고 ‘오산’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이 훤히 보이는 듯한, 재미난 희곡을 읽을 때 경험할 수 있는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책의 앞부분에 있는 두 편의 희곡이 다시 이 <가장 중요한 것>에서 재연하여 문학과지성이 이 세 드라마를 책 한 권으로 묶은 걸 납득하게 된다. 등장인물로 다시 아를레킨도 나오고 재미나게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도 나오니 절로 웃음이 픽 새는 건 어쩔 수 없다.
 이쯤 구라를 풀어놓았으면 구미도 좀 당기시려나? 하여튼 읽어보시라. 물론 당신의 재미를 내가 보장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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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2-19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4의벽>에 대한 썰에서는 왠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덕구빌>에 연상되네요.

내용이 흥미롭기도 하구요, 항상 폴스태프님의
낚시질에 파닥거리는 일인이엇습니다.

아~ 저희 동네 도서관에는 없는 모양입니다
아쉽네요.

Falstaff 2017-12-19 12:26   좋아요 0 | URL
지금 없는 거겠지요 뭐. ^^;
근데 언제나 말씀드리는 거지만, 낚인 분들이 진짜로 읽은 다음은 절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음하하하....
 
바텍 열림원 이삭줍기 10
윌리엄 벡퍼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림원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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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책이다. 작가 백퍼드가 1760년 생. 19세기도 아니고, (발음조심!) 18세기 사람으로 그가 스물일곱 살 때 엉뚱하게도 프랑스어로 발표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18세기나 21세기나 사기꾼은 틀림없이 있는 것이라서 새뮤얼 헨리Samuel Henry라는 작자가 백퍼드의 감독 아래 영어로 번역하며 자세한 주석까지 달았건만, 하이고 정작 1786년에 영국에서 영어번역본을 출판할 때는 저자의 허락 없이, 누구의 창작물이 아니라 아랍 책을 번역한 것처럼 사기를 쳤단다(책 뒤 <작품해설> 참조). 백퍼드는 (지금 시절이면 청소년 나이지만) 청년 시절에 페르시아에서 잠깐 산 적이 있어서 특히 아랍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아주 많았다고 하는데, 18세기 초 영국에선 리차드 버튼Richard Burton(글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두 번 결혼했던 영국 배우하고 이름이 같지 뭐야)이 <천일야화>를 번역 출판하고, 버튼보다 조금 이르게 프랑스에서도 역시 앙투안 갈랑이 같은 책을 번역 출판해서, 소위 오리엔탈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다.
 난 앙투안 갈랑의 <천일야화>를 읽어봤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다섯 권짜리. 어려서 대충 야화의 단편을 요약한 것들 또는 만화 또는 만화영화로 봤던 것인데 전편이 궁금해서 읽어봤더니(솔직히 말해버려? 좋다!), 괜히 읽었다. <천일야화>를 재미나게 읽기에는 이미 나이가 너무 들어 상상력이 무뎌졌거나, 이젠 셰헤라자데의 노가리 정도 가지고는 흥미를 자아낼 시대가 아니기 때문일 거다. 또 모르지. 리차드 버튼의 <천일야화>는 또 달랐을지. 하여간 그랬다. 그렇다고 버튼 버전으로 다시 읽어볼 정성 같은 건 없다.
 왜 얘기하다가 갑자기 <천일야화>를 들먹거리느냐하면, 이 책 <바텍>이 <천일야화>의 한 에피소드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거 같지 않아서다. 선한 이슬람 사람이 배화교도의 유혹에 넘어가 갖은 고생하다가 지옥 불 앞에서 간신히 구조받는 이야기.
 오늘 독후감, 끝.
 왜냐하면, <천일야화>를 괜히 읽었다고 했고, <바텍>이 괜히 읽은 <천일야화>의 한 에피소드 같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했으니, 결론은? 맞습니다. <바텍>도 괜히 읽었습니다. 그냥 이야기책입니다. 우, 씨. 중고책도 아니고 2003년에 나온 구간을 정가 다 줘가며 샀는데!


 * 근데 이거 왜 산 거야? 예전부터 구입 예정 목록의 상당히 앞자리에 있었던데. 잠깐 미쳤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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