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잎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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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의 불의에 저항하고 백성의 소리를 올곧게 듣겠노라는 민음사의 대표적 간행물인 세계문학전집 170번. 현재까지 350번에 육박하는 시리즈이니 분명 중쇄일 것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그러나 초판 1쇄였다. 원래 170번은 유대인 작가 솔 벨로우의 <오늘을 잡아라>였는데, 역자 또는 판권을 갖고 있는 원작 출판사와 계약문제인지 절판을 시키고 대신 찍어 삽입한 책이다. 좋다 뭐. 그러나 이 책 <썩은 잎>을 읽으면 읽을수록 시대의 불의에 대한 저항도 백성의 소리를 제대로 듣겠다는 다짐도 다 개떡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돋보이는 것이라고는 ‘대단한 배짱’. 적어도 백성의 소리, 출판사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백성이란 독자일 텐데, 그러면 독자의 소리를 올곧게 들을 마음은, 창사 50년이 넘는 동안 개가 물어갔고, 이젠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막 책 만드는 거 같아 안타깝다. 번역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의 편집위원 가운데 한 명이거나 말거나, 중학교 2학년에 재학하는 공부 잘 하는 학생을 아르바이트로 채용해서 최저 시급 주며 교정 작업을 했으며, 그걸 데스크에서도 검토 안 하고, 번역자도 그냥 패스해 찍지 않으면 이런 책은 나올 수 없다. 원래부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이 아주 균일한 정도로 고르게, 불행하게도 타 출판사보다 잦은 빈도로 오탈자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건 책 좀 읽는다 하는 독자들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해도 너무한다. 읽다가 100쪽 넘어가니까 그냥 웃음만 나오더라. 제발 출판사를 문화사업이란 생각하지 말고, 그냥 철저하게 이윤을 내기 위한 회사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부탁하는 거야?). 백성을 올곧게 만들 생각은 당신들 아니어도 너무 충분하오니 더 이상 하지 마시고, 책, 그러니까 상품merchandise을 상품처럼 만들기만 하세요.



 책 표지를 넘기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첫 장면이 나온다. 물론 서문 대신이다.


 비참하게 죽은 폴리네이케스의 시체에 대해, 어떤 시민도 매장하거나 울어서는 안 되며, 새들의 맛있는 먹잇감으로 주어 먹어 치우게 하라는 포고문이 공포되었다는 말이 있어, 착하디착한 크레온께서 너와 나를 위해, 그러니까 나를 위해 포고문을 발표했고, 아직도 그 명령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내가 있는 이곳으로 온다는 거야. 이 포고문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면 안 돼. 감히 금지한 것을 행하는 사람은 백성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테니 말이야. (7쪽)


 글쎄,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서문은 그냥 서문. 본문으로 넘기는 순간 서문은 기능을 멈춘다. 그러나 이 책은 다 읽고 나서 다시 서문을 읽으면 이마를 탁, 칠 수밖에 없다. 법으로 엄하게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라비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치러주는 안티고네. 소설 속에선 한 집단, 소도시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증오를 받아온 자의 시신을 매장하려 하는 늙은 대령. 작품을 맛있게 읽으려면 콜롬비아의 현대사에서 불행했던 사건 두 가지를 미리 알아두면 좋다. 천일전쟁이라 일컫는 정부군과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된 자유당 게릴라와의 비정규 내전(1898~1902)과, 1928년 12월에 자행된 식품회사 파업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대학살. 대령의 가족은 천일전쟁을 피해 가상의 도시 마콘도에 정착했으며, 그 해 대령의 첫 번째 아내는 딸을 낳다가 죽는다. 1903년에 우연히 두 인물이 도착하는데 한 명은 마콘도의 신임사제 ‘풋내기’ 다른 한 명은 유럽에서 있었던 모종의 전쟁에 참여했던 의사. 사제 풋내기는 천일전쟁에서 자유당 게릴라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며 희한하게도 의사와 비슷한 외모를 지닌 것을 주인공 대령은 나중에야 알아차린다. 물론 작가가 마르케스 아닌가. 결코 이 두 명의 관계는 밝혀지지 않지만.
 의사는 대령의 집에 무료로 기숙하며 눈부신 의술을 발휘해 돈을 많이 벌어도 대령의 집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바나나 회사가 마콘도에 설립되어 여태 의사에게 치료를 받던 시민들이 모두 회사의 의료 시스템으로 흡수되는 바람에 환자 한 명 없는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로 떨어진다. 이러길 몇 년. 그 사이 의사는 대령네 하녀와 눈이 맞아 따로 집을 얻어 나간다. 시계는 쉼 없이 1928년 12월을 향해 달려가고, 도시에 살육이 벌어지는 와중에 문제의 의사를 제외하고 마콘도의 모든 의사는 폭력을 피해 도망한다. 총과 칼에 벌집이 된 무수한 환자를 들것에 싣고 의사의 집 앞에서 치료를 요구하는 시민들에게, 의사는 노란 눈알을 굴리면서 문을 굳게 닫고, 이제 자신은 의사가 아니라고, 그동안 치료법을 다 잊었노라는 말만 되풀이해 무수한 부상자를 방치에 의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세월이 또 흐르고, 어느 날, 의사(였던 자)가 목 매 죽었다. 마콘도 주민들은 결코 의사를 매장시켜 영혼에게 안식을 주기 거부한다. 이때 대령은 딸, 외손자와 함께 죽은 이가 침상에 누운 그의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소설의 본문은 시작한다.
 소설의 스토리 소개는 여기까지.
 전형적인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보다는 <백년의 고독>에 더 가까운 작품. 숱한 은유와 비의가 얽힌 읽어볼 만한 소설. 특유의 중의적이고 쓸쓸한 문장들. 다 좋은데 그 우라질 오타typo가 봄날 제방에 핀 꽃처럼 눈부시게 만발하고 지랄하는 것이 차라리 예술 수준이다. 다른 책도 아니고 마르케스 책에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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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4-30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려고 하는데 오타가 굉장히 심하군요...ㅠ.ㅠ 한가지 여쭤볼게요. 백년의 고독을 읽기 전 이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
별2개는 이 소설이 아닌 민음사에 주신거죠? ㅎㅎ

Falstaff 2021-04-30 20:20   좋아요 0 | URL
아, 답글 달았다가 다 지워졌네요. ㅜㅜ
걍 먼저 백년고독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백년하고 이 책하고 아무도 대령이 같은 마르케스의 마음의 고향인 마콘도를 배경으로 한 거거든요. (씨, 지우기 전엔 더 잘 썼는데, 아........)
콜레라 사랑도 잊지 마세요.
별점은 당연히 민음사한테 준 겁지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4-30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답변 감사합니다. 폴스타프님 옛날 글들은 북플에서 안들어가집니다. ㅠ 알라딘 어플로 들어와야 읽을 수 있네요. 지난번 오류 생기고 후유증인가 봅니다 ㅎ아! 콜레라도 잊지않겠습니다.

Falstaff 2021-04-30 22:12   좋아요 0 | URL
옙. 저번에 한 번 폭파 당한 이후로 북플 데이터, 접속 다 망가졌습니다. 북플 자료에 의하면 제가 소장하고 (소장? 웃기죠? 갖고) 있는 책이 한 권도 없다고 나온답니다. ㅋㅋㅋ 알라딘 전산 수준이 아직은 좀 모자란 것 같아요.
알라딘이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맨입에? 그랬더니 적립금 만원 주더라고요.
음하하하하.... 그게 어디예요!!!!
 
마사 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2
도리스 레싱 지음, 나영균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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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고 보니 은근히 레싱의 소설을 제법 읽었다. <다섯째 아이>, <풀잎은 노래한다>, <런던 스케치>, <황금 노트북>에 이어 이번에 <마사 퀘스트>까지. 이이는 페르시아, 그러니까 지금의 이란 지역에서 나서, 짐바브웨를 비롯한 남부 아프리카에서 서른 살까지 살다가 영국으로 이주한 작가다. 제도권 교육은 열세 살까지밖에 받지 않았고 독학을 했다는데, 당시 남부 아프리카의 여성 거의 다가 이러했던 모양이다. 작가가 열다섯 살이 됐을 때 대문을 박차고 나가 타이피스트, 전화교환원 등의 잡일을 하며 두 번의 결혼까지 겪은 것을, 이 책의 주인공 마사 퀘스트가 열여덟 살이 되어 법률사무소의 타이피스트로 취직하면서 집을 나와 몇 번의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는 걸 보고, 굳이 이 책을, 출판사가 광고를 하듯이,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 할 필요가 있을까? 세상의 어느 작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 그것이 뭐가 됐듯이 자기의 내밀한 한 모습을 투영(“거울 속의 나”)하지 않은 사람, 있으면 두 명만 대보세요. 만일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겠다.
 한 영국 남자가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사소한 부상을 입어 후송된 바로 그 기간 중에 자신이 속한 부대가 악명 높은 솜 전투에 투입되어 아주 깡그리 몰살을 당했다. 그것도 장교가. 어쨌건 간에 부대의 유일한 생존자로 남은 퀘스트 선생은 전쟁 후 제대를 하고, 다시 생업인 사무직으로 복귀했으나 도무지 적응을 하지 못하는 상태. 이제 우리는 이런 경우를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란 긴 병명으로 부르지만 1920년대 제국의 땅 런던에선 그냥 실패자일 뿐이었다. 남자는 이런 주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민지 개척을 위한 설명회에 참가했다가, 1~2년만 제대로 옥수수 농사를 지어도 투자금액을 몽땅 뽑고도 많이 남길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젊은 아내를 데리고 남부 아프리카의 저 깡촌에 있는 넓고 넓지만 말 그대로 황무지에 농장을 마련한다. 이집의 열다섯 살 먹은 딸내미가 바로 책의 주인공 마사 퀘스트.
 아프리카 식민지로 떠난 식민모국 출신의 지주 모두가 다 행복하지도 않고 부유하지도 않았다는 건 레싱의 처녀작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재미있고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생략한다. 그러나 행복하지도 않고 부유하지 않은 영국 이민자들의 삶조차도 흑인 원주민이자 거의 노예 비슷한 참혹한 지경에 처한 원주민이 평생 뼈가 빠지고 혀가 빠지게 일을 한다 해도 결코 이들과 비슷한 환경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란 걸, 열여덟 살의 마사 퀘스트는 알아낸다. 고향 비슷한 아프리카 농장에서의 삶에서도 마사는 질식할 것 같고, 그리하여 탈출한 도시에서도 결코 만족한 삶을 살 수 없는 진퇴양난. 이 책이 출판된 다음 꼭 10년 후에 발표한 그녀의 최고작 <황금 노트북>에선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역 이주한 아이 딸린 두 이혼녀를 중심으로 지역차별, 성차별, 인종차별, 공산주의운동, 성소수자 차별 등등에 대한 발제를 했지만, 이 책에서는 인종주의와 성차별, 그리고 사회주의에 관해 약간의 문제 제기만 할 뿐, 적극적인 이슈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엔 조금 더 시간적 성숙이 필요했었나보다. 그리하여 책을 읽으면, 신경이 날카로워 주변 사람들을, 마음속에서 생각으로이거나 실제로이거나 날선 말과 대화, 선언을 일삼는 십대 후반, 하이틴의 예민한, 그래서 나이 먹은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매우 피곤한, 정말 피곤해서 상대도 하고 싶지 않을 만한 성격을 주인공에게 부여했는데(당연히 많은 부분이 도리스 레싱이 젊었을 때 이랬을 거라고 유추해볼 수도 있으나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여기서 주목, 내가 읽은 레싱의 다른 작품들을 보면, 그리하여 도시생활을 꾸려나가다가, 당연히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서 다시 농장으로 돌아가 농장 사모님의 자리에 오르면 <풀잎은 노래한다>가 되는 것이고, 아이까지 낳고도 만족을 못해 결혼을 물린 다음 유럽으로 날아가 동성의 애인을 만나면 <황금 노트북>이 되는 것이고, 결혼은 돌이킬 수 없는 구속이라는 마사 퀘스트의 신념을 그대로 지녀 돈을 모아 스스로 아프리카 내의 지방주의적 활동을 위해 자기 자신이 농장을 건설해 농장 사장님이 되면 또 다른 남아프리카 출신의 소설가 존 맥스웰 쿳시가 쓴 <추락>이 되는 거다. <황금 노트북>은 아직 읽어보지 않은 독자들이 대부분일 테니, 비록 지금은 절판이지만 다시 팔기 시작하면 꼭 읽어보시란 말씀으로 대신하고, <풀잎은 노래한다>에선 흑인 하인의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하며, <추락>에선 늙고 더럽고 음흉한 흑인의 첩 가운데 한 명이 될 상황으로 처해질 텐데, 과연 마사 퀘스트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도리스 레싱이 이 소설을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 속 무대는 1차 대전이 끝나고 2차 대전을 시작할 무렵인 1930년대 후반의 시간 공간이다. 벽촌의 농장. 영국인 부부는 이웃한 보어인, 즉 네덜란드 출신 이민자 부부와 친한 이웃으로 지내다가 서서히 서로 보이지 않는 잉글랜드-보어인 사이의 벽이 생기는 것을 목격하고,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던 시내 유대인 남자형제들과도 부모의 반유대적 성향으로 멀리하면서 책을 빌려보곤 했던 취미까지 잃어버린 절정의 사춘기를 통과하는 소녀, 스스로는 민족 간은 물론이고 피부색에 따른 인종 간 차별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만 저 깊은 마음속에서는 뭔지 모르는 거리감이 있는 상태. 이런 상태가 어떻게 발전되어 사건을 극적으로 만들어낼 것인지는, 책을 먼저 읽어본 사람 입장에서, 가까운 시일 내에 읽어보실 분들을 위해 여기에 적지는 않겠다. 식민지 지배계급으로 식민 모국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 혹은 꿀림이랄까, 하여간 점수를 몇 점 잃고 시작하는 게임을 하는 듯한 기분. 이런 거 아시지? 더해서 식민지 젊은이들 사이에 결코 가입하지 않을 수 없는 스포츠클럽에서 생기는 일종의 합법적 일탈, 한없이 불량하고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이 사회의 정점에서 사회를 이끌고 갈 백인들과 그들의 아내가 될 아가씨들의 방종, 그리고 분명하게 그들의 미래를 흩어놓을 2차 세계대전, 전쟁의 그림자. 이런 불확실 속에서 마사 퀘스트는 지켜지지 않는 다짐과 보이지 않는 미래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줄 인식과 독서를 통해 의식이 성장하지만, 집을 나와 시내에서의 독립까지를 도와준 조스 코언, 유일한 조언자이자 후원자이지만 언제까지 가까이 하지 못할 유대인 공산주의자와의 관계도, 한 발도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그걸 기대하지도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젊음의 낭비. 언제가 됐든 지금은 한낱 꿈일망정 그것 하나, 남프랑스에서 포도농사를 짓겠다는 꿈 하나를 간직한 채, 마사 퀘스트와 이들은 오늘도 함부로…….



*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번역을 한 나영균의 글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애써서 영어를 한국말로 옮기긴 했는데, 같은 문장을 몇 번 읽어야 할 때가 많았다. 국내 초역이라 참고할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보자.


 “여자들이 나타나자마자 남자들 목소리는 전에 없던 활기를 띠며 커졌다. 그리고 그들은 마사 자신도 그런 것을 느낀 적이 있어서 잘 알 수 있는 꺼림칙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로 이 가정적인 정경에서 등을 돌렸다. 그녀는 야단스럽게 법석대는 여자들을 지켜보았는데, 마치 눈빛이 거센 두려움 속에 그들에게 들러붙은 듯했다. 그녀는 다짐했다. ‘절대절대 저렇겐 안 될 거야. 차라리 죽어버리지.’ 그녀는 침착을 가장하며 태연한 표정으로 접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215~216쪽)


 전체적으로 무지 헷갈리는 문단인데 특히 위 붉은 글씨의 문장이 과연 무슨 뜻인지, 내가 이해한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주어가 분명히 "눈빛"인데 그게 '그녀의 눈빛'인지 '여자들의 눈빛'인지 모르겠다. 혹시 (숨은)주어가 "그녀" 또는 "여자들" 아냐? 예컨데,

 "그녀가(혹은 여자들이), 눈빛이 거센 두려움 속에서, 그들에게 들러붙은……"

 이라고, 두려움은 두려움인데 눈빛이 하도 거세 생긴 두려움 속에서, 라고 읽을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 하여간 애매한 문장인 건 맞다.


 아울러, 대명사 ‘그들’ ‘그녀’ ‘그’ ‘이’ 같은 것들을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독자는 점점 더 오리무중에 수렴한다는 걸, 번역하시는 분들은 제발 유념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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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8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르두발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카렐 차페크 지음, 권재일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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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카렐 차페크의 팬이 되기를 선언한 바 있다. 처음 읽었던 <도롱뇽과의 전쟁>에서 시작해 <곤충극장>에 실린 드라마 세 편으로 나는 그의 세계관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제는 그가 쓴 동화집 <작은 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의 독후감을 올렸고 오늘도 <호르두발>을 읽은 독후감을 쓰기에 이른다.
 역시 차페크.

 

 먼저 출판사 이야기부터. 출판사 이름이 “지식을만드는지식”이다. 띄어쓰기를 해야 하는지 아닌지 애매해서 책을 온통 뒤졌더니 맨 마지막 쪽에 출판사 이름이 “지식을만드는지식”(아우, 자판 두드리기 힘들어, 앞으로 ‘지만지’라고 함)이며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에 있단다. 책 고르다보면 숱하게 보이는 출판사로 굳이 특징을 들자면, ① 이 회사에서 찍은 책이 과연 책 전문全文인지 발췌본인지 확신이 가지 않으며, 그건 ② 나이 들어 글자 읽기 불편한 노인들을 위한 출판사처럼 소위 “큰글씨책” 시리즈의 사이즈도 큰 책을 내기도 하는 걸로 미루어, 글씨가 크니까 혹시 발췌본이 아닐까라는 선입견을 주는데다가, 진짜로 “천줄읽기”란 희한한 요약본도 활발하게 만들고, ③ 무엇보다 책값이 경악할 수준으로 비싸다는 것. 이 책도 (직접 한 번 재보자. 가로 127mm, 세로 182mm) 작은 판형의 보통 활자체로 꾸민 것으로 본문, 해설, 역자소개, 판권 등을 모두 합해 딱 300 쪽의 평범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를 주고 샀느냐 하면, 18,520원. 정가가 무려 19,500원인데 여기서 딱 5% 할인해준다. 그런데 왜 이 출판사를 눈여겨볼 수밖에 없느냐 하면, 뭐겠어, 당연하지, 이 출판사 말고는 읽어볼 수 없는 유명한 작품들을 찍는다는 거. 이 책도 20세기엔 “리브로”란 출판사에서 찍었지만, 소위 차페크 3부작(<호르두발>, <유성>, <평범한 인생>)을 낸 다음, 곧바로 망했다. 그 가운데 <호르두발>을 지만지에서 골라 다시 찍었으니 지만지 아니었으면 차페크를 제대로는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시험 삼아 한 번 사서 읽어본 것. 결과는 합격. 요약본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앞으로 지만지 책을 가끔 사볼 것인데, 전적으로 ‘가끔’인 이유는 당연히 너무 비싸서 그런 거다. 벌써 한 권 찍어 놨다. 어떤 책인지는 올해 안으로 아실 수 있을 듯.
 얼마나 비싼지 한 번 비교해 봐?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2월 중에 읽으려 샀는데, 큰 판형의 보통 글씨, 1,120쪽, 1kg 더하기 8g의 무게, 이 책의 정가가 16,000원, 판매가가 10% 깎아서 14,400원. 물론 동서문화사는 나로 하여금 예전 해적판인데 해적질 한 시기가 너무 오래전이라서 합법적으로 저작권을 지불하지 않으며, 일어 중역의 의심(저작권 포함해서 이것까지 몽땅 의심이다, 의심. 확실하다는 게 아니고!)을 일으키는 시리즈이긴 하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거.
 책은 참 잘 만들었다. 이게 지만지가 공을 들인 건지, 아니면 전에 같은 텍스트를 찍었던 리브로가 처음부터 소위 심혈을 기울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오탈자 거의 없고(있긴 있다), 편집 깨끗하다. 이걸로 출판사 및 하드웨어로의 책 소개는 끝. 이젠 작품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호르두발은 사람의 이름이다. 유라이 호르두발.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가 탄광에서 8년 동안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이젠 무려 700달러(당시론 거금)를 주머니에 넣고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정말 위험한 작업도 무릅쓰고 개처럼 벌어 돈 생길 때마다 고향의 (자신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아내 폴라나에게 송금을 하다가, 같이 탄광에서 일을 하던 동료가 죽은 후엔 (호르두발은 글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인데)꼬박꼬박 은행에 저금을 해 3,000달러를 모았지만 한 방에 사기를 당해 몽땅 잃고, 다시 힘을 내 700달러를 벌어 금의환향의 길에 올랐으니 꿈엔들 잊힐까, 사랑하는 아내와 딸 하피에를 만난다는 즐거운 설렘이여. 그러나 행복은 결코 현실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전적으로 호르두발의 시각에 의하여 씌어진 1부를 읽는 일은, 대단히 아름다운 문장과, 인간 본성을 바라보는 작가의 객관적인 듯하면서도 넉넉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끝 모를 안타까움의 손톱을 깨물게 한다. 그리하여 읽다가 잠시 책을 내려놓고, 다시 읽다가 잠깐의 산책을 하게 만들고, 또다시 읽다가 한숨을 한 번 쉬게 만든다. 한 선한 인간의 마음을 문자로 적는 일. 지나간 8년의 세월을 옆에서 보고 들은 사람들의 객관적인 상황설명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람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으려 다시 생각하고 또다시 생각하고, 그리하여 믿고 싶은 것을 기어이 믿는 호르두발의 슬픈 이야기, 그걸 읽는 건 참 쓸쓸한 일이다. 독자로 하여금 가슴의 한 부분이 비어져가는 느낌이 들게 하는 소설.
 하지만 2부로 넘어가면 상황이 급변하는데, 나는 어떻게 변하는지 알려주고 싶지 않다. 인간이 도롱뇽과 전쟁을 하고, 딱정벌레와 나비들이 사랑과 투쟁을 하며, 한 소프라노 가수가 300년을 사는 이야기와 흑사병이 아닌 백사병이 창궐하는 시대를 만들어낸 작가가 사람 사는 모습도 이렇게 아름답고 쓸쓸하게 쓸 수도 있다니. 여전히 카렐 차페크를 읽는 일은 내게 대단한 즐거움이다.

 

 지만지가 만든 다른 책들의 수준이 이 <호르두발>과 균일하게 같다면, 천정부지의 책값도 (전혀는 아니고, "조금")아깝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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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17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이 작품 마지막에 정말 가슴 미어지는 줄......;;

지만지가 요즘 찍어내는 책 (예전 연두색 양장 말고 하얀색 책)은 괜찮은 것 같아요. 무시무시한 가격 때문에 저는 거의 도서관에 주문 신청해서 빌려 읽었지만 하얀색으로 나온 책들 가운데 실패한 책은 아직은 없네요. 차페크의 <별똥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편집도 깔끔하죠? ㅎㅎ

지만지에서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도 나오면 좋겠습니다...

Falstaff 2018-01-17 09:38   좋아요 0 | URL
근데 얘기하신대로 너무 비싸요! 아무리 비싸도 살 놈들은 산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책 좀 많이 사는 인간들에겐 가혹해요! ㅠㅠ
이 책도 잠자냥 님이 지만지에서 나온다, 축약본이 아닌 거 같다, 하고 지르시는 바람에 완전 낚였다가 아주 만족해가며 읽은 겁니다. ^^

독서괭 2023-09-09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값 겁나 비싸지만 사서 읽었는데, 저도 만족입니다^^ 골드문트님은 이미 오래전에 sf로 시작하셨군요. 저도 sf도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3-09-09 18:47   좋아요 0 | URL
옙.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이 양반, 참 좋아합니다. ^^
 
작은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 - 체코 아름드리 어린이 문학 1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변은숙 외 옮김, 이오덕 우리말 다듬기 / 길벗어린이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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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거, 작가 이름 딱 하나 보고 고른 책. 알라딘 중고책방에서 산 거다.
 책의 제목이 이상하지? 천사의 알이라니, 천사도 난태생이야? 박혁거세가 난태생인 건 알지만 천사도? 나정이란 우물 옆에 말이 울어 가보니 알이 놓여 하나 있었다. 동네 노인이 나서서 알에 손을 대는 순간 알이 쪼개지면서 팬티도 입지 않은 사내아이가 우렁차게 울어대는데 이를 들은 온갖 날짐승과 길짐승이 춤을 추고 해와 달도 동시에 하늘에 떴다는 건, 나라를 세운 사람이 어찌 너희 잡것들과 같을 수 있을소냐, 신화 창조작업, 이 가운데 한 글자 빼서, ‘신화 조작업’의 결과로 당연히 성인(成人 혹은 聖人 둘 다 포함해서) 문학의 영역으로 쳐야할 것이다.
 근데 밤하늘에서 휙 금을 긋고 저 산 아래로 떨어지는 눈부신 불꽃, 별똥별, 그걸 보고는 저 속에 유리 가가린 같은 한 인간종이 들어 있는 거 아냐? 밤새도록 궁리하다가 새벽 놀이 붉게 물든 동녘에 온갖 잡새가 날아드는 모양이 정말 그림이라, 왜 새만 날 수 있는 거지? 같은 샌데 닭과 타조는 왜 날지 못했을까? 이렇게 별똥별과 하늘을 가르며 나는 새를 연관시키는 건 동화, 아동문학의 영역이다. 그리하여 동화작가이기도 한 척추질환 환자 카렐 차페크는 별똥별을 하늘의 천사가 낳은 알이라고 탁, 가정 하고나서, 이때 공룡의 후예인 온갖 잡새들이 별똥별로 모여들어 뜨거운 알을 잠깐씩이라도 품었지만 땅 속 벌레잡기에 미쳐서 알을 품지 않은 닭은, 다른 새들과 달리 천사의 가호를 입지 못해 날지 못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게 성인adult 문학이라면, 그 천사도 참 칠칠맞은 것이 어떻게 자기가 낳은 알을 간수하지 못하고 세상에 흘리고 다녀? 그러고 나서 자기 알을 품어준 모든 새들은 대가로 세상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게 만든다고? 당연히 이런 질문을 해야겠지만, 동화책을 읽을 때는 이야기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는 법. 기가 막힌 이야기 아닌가. 하늘에서 천사가 알을 낳아 빛나는 별똥으로 세상에 내려 보내 새들로 하여금 품게 만들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알을 만진 황새는 뜨거운 별똥을 만져 다리가 붉게 변한 채 하도 뜨거워 오늘도 물속에 다리를 담그고 있으며, 칠면조도 별똥이 식지 않았을 때 품어서 가슴이 붉게 변해 버렸다는 이야기. 칠면조는 내가 꾸며낸 거다. 당신들도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있으면(지금 절판 상태니까), 차페크가 이야기한 것 위에 당신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다른 새를, 아이가 있다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같이 얘기해보는 것은 어떨까.
 모두 여섯 편의 동화가 실려 있는 선집이며 표제작 <작은 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는 그 가운데 가장 짧은 이야기다. 여섯 편 모두 “…… 이야기”라는 제목을 갖고 있어서, 차페크가 어린이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해준다는 느낌이 들도록 동화를 썼다. 이 가운데 첫째와 두 번째 동화 <어느 의사 선생님의 길고 긴 이야기>와 <어느 경찰 아저씨의 길고 긴 이야기>는 마치 <팔리아치>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같은 “극 중 극” 형식처럼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즉 ‘짧은 이야기’를 연결시켜 크게 하나로 만드는, 동화에선 신선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카렐 차페크가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반인 1938년에 죽었으니 지금 시대에 특히 도시 아이들이 읽으면 어색한 장면이나 묘사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기만 하면, 또는 도시 아이들에게 왜 특정 장면이나 묘사가 어색한지 설명해줄 수 있기만 하면 아직도 이 책을 권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일 것이다. 차페크 작품의 특징인 기발한 상상력이, 도롱뇽과 인간 사이의 전쟁이나 곤충들이 의인화한 인간들의 먹고 사는 것과 번식하는 문제, 300년 이상을 사는 인간이 삶에 대해 취하는 비정상적 멸시 같은 건 성인을 위한 소설과 드라마로, 도깨비와 요정과 마법사 같은 대상이나 정직함, 도움, 선함 같은 깨끗한 이미지는 동화로 모습을 바꾼 건 아주 상쾌하며 정당한 선택이었지 않을까.
 그러나, 내 경우에도 아이들에게 외국 동화를 권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읽고 후에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사주었는데(인정! 동화‘책’에 관해선 내가 좀 유별나다) 주로 창비아동도서 시리즈나 산하아동도서 시리즈에서 선택 했었으며(벌써 20년도 훨씬 넘은 이야기다) 권정생(당연히!), 이 책을 다듬은 이오덕, 이상권, 노경실 등이 떠오른다. 위인전은 전봉준, 우장춘, 이육사, 신채호 등이 기억에 남고. 전적으로 내 생각인데, 아이들이 읽을 동화책은 보다 흡수력이 좋을 수밖에 없는 한국 작품이 낫지 않을까 싶으며, 요샌 좋은 동화작가도 무척 많다고 한다. 다만 한 가지, 그거 있잖은가, 전집. 무슨 동화 전집이니, 아동 과학전집이니, 그림책 전집 같은 거, 제발 좀 사들이지 마시라. 동화책은 상대적으로 많이 얇으니까 부모가 책방에서 길어야 한 시간만 서서 읽어보면 어떤 책이 좋을 듯하다는 거 금방 안다. 그런 거 골라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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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16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페크의 동화까지 찾아 읽으셨군요. ㅎㅎㅎ. 전 차페크 작품 다 읽어보고 싶어도 동화에는 손이 안 가던데 ㅎㅎ

혹시 앞으로 차페크 책 더 찾아 읽으시려다가 <프라하 - 작가들이 사랑한 도시> 이거 보시면 그냥 패스하세요. 전 이 책이 헌책방에 있어서 찾아가서 직접 펼쳐봤는데, 거기 담긴 차페크 작품은 ‘영수증‘이라고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에 있는 단편과 똑같고요, 그나마 그 짧은 단편을 다 수록하지도 않았더라고요. 원 대체 뭔 생각인지...;;

Falstaff 2018-01-16 10:02   좋아요 0 | URL
옙. 오른쪽 왼쪽 이야기 다 장만해놓았습죠. ㅎㅎㅎ
영수증은 한국의 출판사에서 찢어다 놓은 것이겠지요. 다행히 그런 옴니버스 책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
 
아르세니예프의 인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3
이반 부닌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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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불민한 독후감 때문에 전문全文이 화면에서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친애하는 서재친구 잠자냥 님의 서평이 기막혀 선택한 책.

 이반 부닌의 글이 정말 아름답다. 부닌을 번역한 이항재의 글과 단어 선택도 참 좋다. 물론 번역자와 출판사의 합의로 그랬겠지만, 작품의 80% 이상이 자서전 적 글이란 것을 처음부터 숱한 각주를 통해 독자에게 말해주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 좋은 글을 읽어가며 독자가 작가의 내밀한 유년시대, 소년시대, 청년시대를 고백한 작품인 것을 조금씩 알아가는 것도 매력 있었을 텐데.

 검색해보니 이반 부닌, 러시아의 시인이자 소설가란다. 책 읽어봐도 시를 먼저 썼고 후에 산문도 쓰는 과정이 나온다. 아시다시피 난 우리나라 시인이 쓴 소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부닌은 며칠 전 읽어본 <내 책상 위의 천사>를 쓴 재닛 프레임처럼 참 저릿저릿하게 문장을 쓰면서도 글을 읽는 것이 담담한 동감, 격렬하지 않아 오히려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놀라운 힘을 지닌다. 그러고 보니 <내 책상……> 역시 자서전.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놀라운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을 수 있겠다.
 왜 난데없이 재닛 프레임을 들먹이는가 하면, 두 명 다 시를 먼저 쓰고 후에 소설을 썼으며, 나로 하여금 자서전이나 거의 자서전 격인 소설을 그들의 첫 작품으로 읽게 했고, 비슷한 수준의 동감으로 심금을 울렸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상당히 다르다.
 그래, 말 나온 김에 한 번 비교해보자.
 부닌은 농노를 거느린 지주계급이니까 러시아에선 귀족집안 축신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드라마틱하게 몰락해가는 지주. 19세기를 통틀어 땅만 가지고 떵떵거리던 러시아 시골 귀족들이 백 년 동안 차근차근 몰락해가는 모습을 당대 소설가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고골, 투르게네프 등을 통해 익히 읽어본 바 있듯이, 그게 당대엔 일종의 트렌드였던 모양이다. 부닌의 아버지 알렉산더 부닌께서도 읽어본 러시아 소설에서처럼 (가진 건 쥐뿔밖에 없으면서도)최상류 계급의 취향과 도박으로 1차 거덜이 났다가, 그나마 다행으로 후손 없는 고모님이 죽어주는 바람에 잠깐 기사회생했으나 자신의 버릇을 개에게 주지 못해 또다시 넓은 영지를 자신의 “취향”에 갖다 바친다. 아버지를 닮은 이반 알렉세예비치 부닌(이라 읽히는 주인공)은, 가난하게 지내다가도 일을 조금 했거나 쥐꼬리만 한 인세를 받기라도 하면 곧바로 최고급 호텔에 가서 먹고 자고, 옷도 맞춰 입고 뭐 이러다가 돈 떨어지면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는 반면, 오스트레일리아도 아니고 뉴질랜드 깡촌년 재닛 프레임은 정말로 지지리 궁상 빈민의 가정에 태어나서 오빠는 간질, 언니와 여동생은 일찌감치 물에 빠져죽고, 자신도 멀쩡한 정상상태에서 전전두엽 절제수술을 받아야 하는 위기상황에 처했다가 극적으로 구조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하는 여성. 이반 부닌과 제닛 프레임을 같이 이야기하는 이유가 이렇다. 이왕이면 두 사람의 인생을 다 읽어보시는 편이 좋지 않겠나, 하는 거.
 혁명 후 프랑스로 망명한 러시아 귀족자제 시인과, 다수와 다르다는 거 하나 때문에 비정상 판정을 받은 하층계급 출신의 시인.
 나는 이 두 명의 자서전 또는 자전적 소설을 읽고 부러워 미치는 줄 알았다. 이들이 행복을 찾았을 때 공통점이 있었는데, 가르쳐드릴까? 오직 자신만을 위해, 격하게 얘기해서 이기적인 삶을 살 때, 가장 행복했다는 거. 불행한 당신, 더욱 불행해지고 싶으면, 어제처럼 내일도 당신의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을 위해 살아라.


 * 다시금 알아채는 시간의 위력. 행복은, 만일 그런 것이, 그 비슷한 것이라도 있다면, 왜 언제나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 이 책에 관심 있으면 이 글에 앞서 달린 독자서평 "가슴 절절한 아름다움"을 읽으시라. 난 그만큼 쓸 자신이 없어서 여기서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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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1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이렇게 몸 둘 바를 모르게...과찬을... ㅎㅎㅎ 감사합니다.

이 작품 정말 아름답죠? 좋은 책을 읽으신 것 같아 제가 다 기분이 좋습니다. ^_^

‘불행한 당신, 더욱 불행해지고 싶으면, 어제처럼 내일도 당신의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을 위해 살아라.‘ 격하게 공감합니다. ㅎㅎㅎ

Falstaff 2018-01-15 10:2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사실을 사실대로 얘기하는 건데요.
덕분에 좋은 책, 즐겁게 읽었습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