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을
 지난 1월 1일. 서른 살이 된 큰 아이가 집에 들렀다. 어미가 끓여준 떡만둣국을 맛나게 먹더라. 소위 말하는 엄마 손 맛? 웃겨. 내 입엔 이게 떡만둣국이냐?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새해 벽두부터 쌍코피 터질 필요가 없어 그냥 조용히 넘어갔다. 하여간 잘 먹더니 시원하게 물 한 컵을 들이켠 다음 하는 말이, 아버지, 할 말이 있는데. 앞니를 빼고 인공 이를 심었더니 영 칠칠치 못하게 자꾸 음식을 흘린다. 아무래도 내 이가 아니라서 그런 모양이다. 그래 휴지로 식탁 앞에 떨어진 떡국 찌꺼기를 닦고 있던 내가 무심하게 곧바로 이를 받았다. 물론 완전한 농담이었다. 왜, 임신했니?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응.’ 속으로는 염통이 뚝, 떨어지는 느낌. 그러나 쪽팔리게 그런 거 갖고 티 낼 수 있나. 그래 또 물었다. 몇 주? 이제 겨우 두 주 됐단다. 작년 8월에 청혼을 하고 승낙을 받고, 요새 아이들 영악해서 신부가 한 살 많아 지들 생각에 소위 노산인가 싶어 둘이 손잡고 산부인과 갔더니 의사 하는 말이 여자는 전혀 문제없는데, 남자 쪽 정자의 운동성이 정상 바로 아래쪽이라고, 이제부터라도 결혼할 관계라면 피임을 하지 말라고 권하더란다. 그래 넉 달 만에 아이가 생긴 것. 나는 계속 맛대가리 하나도 없는 떡만둣국을 입에 떠 넣으며 (아무리 유명한 주방장이 조리를 했더라도 그 상황에서 내가 맛을 알겠어?) 소주 한 잔을 꿀꺽 마셨다. 매년 1월 1일 아침 떡국을 먹을 때 아이들이 따라주는 소주 한 잔씩 마시는 건 벌써 이십년이 넘는 내가 만든 일종의 ‘아름다운’ 가풍이자 미풍양속이다. 혼인이 두 집안 사이의 행사에서 그냥 한 쌍의 삶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 그래라. 아이 이름은 내 벌써 지어놓은 거 알지? 아들이건 딸이건 관계없이 그냥 ‘하을’이라 해라. 노을 하, 새 을. 한문으로 쓰면 霞乙. 글씨가 작아 잘 안 보이시지? 크게 쓰면 이렇다.
 霞乙
 무슨 뜻이냐고? 그림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할아비 권한으로 첫 아이 이름은 내가 짓는다. 둘째는 외할아버지가 짓든지, 네가 직접 짓든지 그건 너 좋을 대로 해라. 맏이 이름은 양보 않겠다. 라고 도장 찍었다. 아, 무식한 마누라. 하필이면 이름으로 노을이 뭐냐, 새벽이면 새벽이지. 그리고 갑이 좋지, 왜 을이냐. 요 지랄을 한다. 그런 생각이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름이 ‘귀복’이게? 귀할 귀, 복 복. 혹은 요샛말로 ‘대박’이? 왜, 아예 ‘예수’라고 하지. 그건 서른세 살까지밖에 못 살까봐 안 된단다. 하여튼 새해 아침에 난 손주가 생겼음을 알았고, 아이에게 ‘하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태까지 지내온 새해 첫날 가운데 제일 좋은 선물을 받았다. 그래 다른 해엔 소주 한 병이었는데 올해엔 두 병 마시고 아침부터 고꾸라져 잤다.




서재
 내 취미는 책 읽고, 음악 듣고. 책 읽은 느낌을 독후감으로 쓰고, 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알라딘 서재에 업로드 하는 일. 근데 더 즐거운 취미, 내가 아는 최고의 취미여서, 이미 약한 중독 증상까지 보이는 건 바로 알코올 흡수하기. 예를 들어 2019년 1월, 나는 스무 권의 책을 읽었고, 서른 병의 소주를 마셨다. 위스키 한 병, 와인 한 병, 맥주가 글쎄 한 5천 밀리리터쯤, 중국 백주가 한 병. 이런 건 세지도 않는다. 오직 소주 서른 병. 그러니 내 일상생활이란 것이 책을 읽지 않으면 술에 취해 있다. 이쯤에서 서재 친구들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서재 운영, 또는 서재 생활을 잘 하고 있지 못해서. 나는 다른 분들의 서재에 자주 방문하지 못한다. 더구나 댓글을 다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읽다가 주둥이가 근지러워 참지 못할 정도가 돼야 그냥 한 마디 하는 수준이다.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로 벌써 몇 년을 버티는지 모르겠다. 서재 친구들을 자주 방문하고, 함께 웃고, 떠들고, 이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이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1월에 읽은 책 스무 권. 이렇게 세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얇은 책도 있고, 두꺼운 책도 있으니. 페이지 수로 한 달에 6,501쪽이다. 다른 해보다 한 800쪽 이상 적게 읽은 편이다. 해가 갈수록 책을 읽는 것도 알코올의 방해를 심하게 받는다. 서재 친구분들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정독하는 것 같은데 독서량도 어마어마하고, 그분들이 쓰는 건 나같이 독후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서평’이다. 하긴 책 읽고 느낌을 적는 수준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사는 내가 (훨씬)더 행복한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 능력으로는 읽고, 독후감 쓰고, 술 마시고, 기분나면 음악 듣고, 이런 몇 가지만 가지고도 다른 여유가 없다. 그러니 친구분들, 내가 자주 방문하지도 않고, 댓글도 없을 수밖에 없는 걸, 조금만 더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상품권
 내 지갑 속엔 신세계 상품권과 SK 상품권이 합해서 50만원어치가 있다. 다 회사에서 받은 거다. 백만 원어치 상품권 한 장 사려면 얼마나 드는 줄 아시나? 딱 백만 원 든다. 안 깎아준다. 곧바로 현금만큼의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유사)유가증권이니 깎아줄 이유가 없다. 그래 상품권은 협력회사가 발주회사에 가져다 바치는 뇌물로 작용한다. 현금 준 건 아니니까. 나도 한 때는 많이 받아봤다. 20세기에. 그땐 의례 명절마다 총력을 다해 상품권을 수집해서 팀장한테 가져다 바치면, 팀장이 이를 수거해 다른 부서에 할당을 하고, 우리 부서원들에겐 조금 더 많이 주고, 뭐 그래서 일종의 직장 에티켓 정도로 치부되고는 했다. 물론 이제 시대가 변해 그런 거 전혀 없다. (다른 회사는 모르겠다.) 문제는 (예를 들어) 신세계 상품권으로 뭐든지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난 상품권으로 책을 좀 더 사고 싶은데 아무리 뒤져봐도 신세계 상품권으로 인터넷 서점에선 단 한 권의 책을 살 수가 없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왜 상품권을 주지? 어차피 그것도 전 직원에게 일정 액수에 해당하는 금액의 복리후생비 계정과목으로 주기 때문에 소득세를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려면 차라리 돈을 주지 왜 상품권이냐고. 어제 집에 가서 지갑의 상품권 다섯 장을 뽑아 마누라 브래지어 속에 쑥 집어넣어 줬다. 에이그, 쭈그렁바가지 같으니라고. 상품권 50만 원어치 받고 헤헤 웃는 마누라 뽕 브라 속에 그럴 듯한 건 아무 것도 없더라.



한라봉과 낑깡
 그제 일인데 아이들한테 카톡이 왔다. 큰 아이, 작은 아이 다. 엄마가 한라봉을 한 박스씩 보내줬는데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게 그리 맛이 있다고. 어미한테는 며느리(후보)한테도 카톡이 왔단다. 맛있다고, 잘 먹겠다고, 아기는 잘 크고 있다고. 어쨌거나. 아참. 이 이야기 나왔으니 상견례 얘기도 해볼까. 한식집에서 상견례를 했다. 사돈이 나보다 한 살 위인데, 내가 생일이 빨라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다녔다. 이리저리 따져보니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단다. 딱 나만큼의 머리숱, 딱 나만큼의 흰 수염, 딱 나만큼의 덩지. 근데 모든 운동을 다 잘한단다. 그이는 덩지가 다 근육이고, 난 이 덩지가 전부 지방이다. 그거 하나 차이가 난다. 그래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예단은 무슨 예단, 우리 그런 거 없기로 합시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이들 예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저희들 결혼반지 줬습니다. 그걸 다시 세팅을 하든지 그냥 쓰든지 지들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양식 결혼 하면서 폐백이란 것도 그거 웃긴 겁니다. 우린 폐백 안 할 겁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리저리 설왕설래, 하면서, 소주병을 기울였는데, 참이슬도 그냥 참이슬이 아니고 뚜껑 색깔이 빨간 진한 도수의 소주를 둘이서 여섯 병 깠다. 아, 그 영감. 술 참 장하게 하더라. 하마터면 골로 보내려다가 내가 골로 갈 뻔했다. 역시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세긴 세다. 한라봉으로 돌아와, 카톡을 보니 흠, 오늘 집에 가면 나도 한라봉 맛을 볼 수 있겠군. 이랬다. 그거 뭐 먹으나 마나 무슨 특별한 거 있나. 있으면 먹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그렇지? 근데, 아니더라. 집에 갔더니, 없다. 마누라가 아이들한테 한 박스씩 보내고, 나한텐 딱 두 개, 뭘 주느냐 하면, 낑깡 두 알을 주더라. 그림 한 번 보자.

 

 

왼쪽이 한라봉. 가운데가 귤. 오른쪽이 낑깡. 내가 가운데 ‘귤’ 수준이었으면 그래도 좀 덜 했을 텐데 (여기서, 정말? 이라고 묻지 마시라) 애들한텐 한라봉 먹으라 하고, 한라봉 사 줄 돈 벌어다준 나는 낑깡 두 알 먹으라고? 이게 마누라야, 웬수야. 이러니 내 알코올 섭취량이 늘겠어, 안 늘겠어. 생각들 해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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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설명절 잘 보내시고 손주가 생기신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하을이 이름 이쁘네요 ㅎㅎ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Falstaff 2019-02-01 10:4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벨루치 님도 즐거운 설 연휴 보내세요. 복도 많이 받으시고, 돈도 많이 버세요. ^^

카알벨루치 2019-02-01 10:55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2-01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을이 이름 참 예쁘네요. 딸, 아들 다 어울릴 이름이고요- 폴스타프 님 독후감도 재미나지만 이런 소소한 글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설연휴, 소주와 책과 함께 즐겁게 보내시고요.

Falstaff 2019-02-01 12:37   좋아요 0 | URL
하하하, 고맙습니다.
여기가 책 가게 서재라 이런 잡글 올리기가 부담이 되는 건 사실입지요. 그래도 이번엔 용감하게 한 번 써봤습니다.
연휴 잘 보내세요. 집에 계시지 말고, 일단 떠나셔요!!!! ㅋㅋㅋ

syo 2019-02-01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노을 사진보다 하을이가 훨씬 더 어여쁜 아이로 태어날거예요!! 축하드립니다 ㅎㅎㅎㅎ

Falstaff 2019-02-01 12:37   좋아요 0 | URL
아이고, 고맙습니다.
사이오님도 축하드릴 일이 곧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hnine 2019-02-01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이렇게 글을 재미있게 잘 쓰시는군요. 단숨에 읽었습니다.
하을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으셨는지 궁금해요.
사모님께서는 혹시 그나마 낑깡도 못드시고 다 가족들 주신건 아닐지. 가재는 게 편이라고 여기서 또 사모님 편을 들고 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3=3=3

Falstaff 2019-02-01 12:39   좋아요 0 | URL
윽. 재미 있으셨습니까. 고맙습니다.
‘하을‘은 그냥 떠오른 겁니다. 어느 날 멍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떠오른 이름.
전에도 그런 이름이 하나 있었습니다. ‘담원‘ 딸 낳으면 담원이라고 지으려 했더니 둘째도 아들이 나와서 조카딸한테 준 이름입니다.
마누라는 타파 통에 낑깡 가득 담아 스카이 캐슬 보면서 그걸 한 통 다 먹던걸요!!! ㅋㅋ

coolcat329 2019-07-2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늦었지만 손주 축하드립니다. 이름도 참 좋구요... 이런 글도 쓰시는지 이제 알았는데 너무 재밌습니다. ㅋ야심한 밤이라 두 번 입을 틀어 막았네요.

Falstaff 2019-07-25 09:12   좋아요 1 | URL
잘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벌써 시간이 흘러 다음 달 말쯤엔 손녀딸이 나온다네요.
^^
 
그리스인 조르바 -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유재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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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 1980년대, 90년대에 읽고, 시간이 흘러 대표적 조르바 팬이었던 이윤기가 죽어 드디어 그리스어 원전 작품의 직역이 감행돼 또다시 읽었다. 들은 이야기라서 정확한지 풍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윤기 씨가 그리스어를 공부한 이에게 자신 살아생전엔 <....조르바>는 번역하지 말아달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나도 몰랐는데 이번 유재원 번역의 후기에 보면, 여태까지의 <....조르바> 번역이 그리스어→영어→한국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불어→영어→한국어였단다. 내가 지금 고 이윤기의 다단계 중역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유재원의 이번 번역이 나오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조르바>를 읽기 위해 훨씬 더 긴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었을 터이니. 후기를 보면 고 이윤기와 유재원이 미노타우로스의 섬 크레타에 있는 카잔자키스의 묘를 방문해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소주와 마른 오징어를 놓고 절을 두 번 반 했다는 일화도 적어 놓았다. 그만큼 고 이윤기도 특별히 이 작품을 아꼈다고 한다.
 20대에 한 번, 30대에 한 번, 50대가 저무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읽는 <그리스인 조르바>. 책을 읽으며 나는 엉뚱하게 헤세가 생각났다. 헤세는 한 살이라도 젊어서 읽어야 제맛인데, <그리스인 조르바>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깊게 공감하는 종류의 작품이다. 주인공 조르바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63세의 노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화자 ‘나’와 나누는 다양한 대화를 읽으면서, 젊은 시절이었다면, 이런 주책없는 늙은이를 봤나, 혀를 끌끌 찼을 장면이, 이번엔 키득거리면서 즐거운 유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숱하게 많았다. 그렇다고 앞으로 10년 정도 세월이 더 지나, 또다시 읽어볼 생각은 없다. 그리하여 이번의 일독이 내 평생 마지막 <....조르바>가 될 터.
 앞선 두 번의 <...조르바>에선 없던 프롤로그가 붙어 있는 것이 놀라웠다. 그것이 다단계 중역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인지, 우리나라 출판사의 편집자가 이딴 건 빼버리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롤로그가 붙어 있다는 점 하나만 가지고도 이번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유재원 번역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아쉽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프롤로그를 편집과정에서 삭제했으면 혹시 마지막 장인 26장도 아예 빼버렸거나 대폭 축소해버린 건 아닐까? 고 이윤기 번역의 열린책들에서 나온 <....조르바>는 해설까지 합해서 482쪽. 문학과지성사는 본문만 539쪽, 해설까지 587쪽. 이런 생각이 조금은 타당할 정도로 페이지 수에서 차이가 난다. 프롤로그는 겨우 10쪽에 불과하니.
 유재원은 번역보다 더 힘들고 피를 말리는 과정으로 문학과지성사의 편집자 김은주 팀장이 이끄는 교정과 수정, 표현 다듬기 과정이었다고, 한쪽, 한줄, 한 낱말, 한 글자, 심지어 행간까지도 독수리처럼 매서운 눈매로 잘못을 짚어냈다고 밝혔지만, 그래도 오타는 나온다. 내가 발견한 것이 네 번. 몇 쪽 몇 행에서 나오는지 가르쳐 드리려다가 관둔다. 그래야 매의 눈을 가진 편집팀이 한 번 더 완벽한 교정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처음부터 끝까지 팔 것이니까.
 오늘 독후감에선 내용 소개가 없다. 독서 자체가 삼독이었으며, 원래 유명하게 소개된 작품이라 내용에 관해서 말을 더 보탤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  보너스. 조르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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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30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스인 조르바>가 있지만 이 번역서를 또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덕분에..
삼독이라.... 먼훗날 또한번 이 소설을 읽었다는 리뷰를 보고싶네요. ^^

Falstaff 2019-01-30 15:00   좋아요 1 | URL
ㅎㅎㅎ 글쎄 이 작품을 또 읽게 될 지는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 책은 언제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딱 읽어버리게 되더라고요. ^^

붕붕툐툐 2019-01-30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진짜 좋아하는 책이에요!! 직역 나와서 넘 좋다는!!

Falstaff 2019-01-30 15:45   좋아요 1 | URL
저도 직역본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득달같이 사서 읽은 책입니다.
이 책 정말 좋아요. 한때 인터넷 이름으로 ‘조르바‘를 썼던 시절도 있었습지요. ^^

coolcat329 2019-12-0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이글을 일주일만 일찍 읽었다면 좋았을텐데요... 그리스번역책이 나온줄도 모르고 지난주에 샀네요 ㅎㅎ

Falstaff 2019-12-03 19:57   좋아요 1 | URL
ㅎㅎ 인생이지요 뭐.
본문에 썼다시피 저도 <...조르바>만 세 권을 가지고 있는 걸요. ^^;;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4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정동섭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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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소설의 초장에 등장해,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스페인의 바다호스 지방, 그 중에서도 아주 촌구석인 알멘드렐라호에서 약 삼십 리 떨어진 벽촌에서 진짜로 태어나 성인이 되고, 사고를 치고, 죽어간 파스쿠알 두아르테의 육필 수기 또는 회고록을, 그저 오탈자의 교정 정도를 보는 수준으로 옮겨 적은 일 말고는 없다고 능청을 떤다. 설마 이런 장치를 진짜인줄 아는 독자는 없겠지. 그리하여 일종의 피카레스크 소설이 쓰여 지는데,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피카레스크 양식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폭력적인 아버지와 매몰찬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파스쿠알이 성인이 되어 흉악범죄라고 분류되는 살인을 두 번 저질러 사형에 처해지는 여정을 담았다. 사실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이 살아온 바를 순서대로 기술한다면 피카레스크의 범주에 들지 않기도 쉽지 않을 터이긴 하지만.
 역자 해설에서 정동섭은 스페인·중남미어 문학과 교수답게 스페인의 현대문학 일반을 소개하면서 이 작품을 1940년대 스페인에서 등장해 살아남은 “전율주의”의 대표 작품이라 말하고 있다. 1940년대라면 프랑코 반란군에 의하여 저질러진 내전이 반란군의 승리로 끝나고, 이 와중에 스페인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인재들이 나라 밖으로 몸을 피해 이른바 빈 동굴 현상, 즉 동공현상이 벌어졌던 시기. 그래도 스페인에 남아 있던 작가들은 프랑코의 적대적인 문학검열을 피해야 했을 텐데, 검열에 관한 한 국제적 명성을 떨친 바 있는 우리나라 작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듯, 시인 소설가 극작가들이 스스로 먼저 자체 검열의 함정에 빠져버리고는 했나보다. 말이 멋있어 전율주의지, 그거 사실 별거 없다. 1970년대 대한민국 소설 판에서 유부남과 여대생의 불륜 얘기, 밤에 호스티스로 일하며 동생이나 애인 뒷바라지 하는 이야기가 창궐했던 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는 말씀. 로베르토 볼라뇨는 <야만스런 탐정들>에서 독재 치하에서 전위문학을 주창하는 ‘내장주의’라는 문학 장르를 소개하는데, 스페인의 전율주의와 (작품 속)칠레의 내장주의가 표현방법 외의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후장주의’와는 확실히 다르기는 하지만. 즉 정치나 사회적인 문제에서 좀 떨어진 것을 쓰면 검열을 피할 텐데, 이 책처럼 무지렁이들의 범죄 이야기 같은 걸 쓰면 어떨까, 해서 생긴 ‘주의’ 가운데 하나가 전율주의 아니겠는가 하는 의견. 세상의 모든 사조는 당시 환경에 적응해 발전시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다분히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뭐 아니면 말고.)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단, 재미있게만 읽었다. 동의하지도 않고, 동감하지도 않고, 바람직하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대한성서공회가 공동번역한 <성서> 독후감에 써먹은 바 있는 국회의원이자 양아치 출신의 절름발이 목사 이동철이 쓴, 그러나 황석영의 이름으로 간행했던 <어둠의 자식들>을 읽어보면,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와 친숙한 1960년대와 70년대의 뒷골목 범죄자들의 이야기라서 더욱 ‘친밀하게’ 느껴질 텐데, 그것이 만일 스페인에서 쓰였다는 가정 아래, 모르긴 몰라도 최고의 ‘전율주의’ 문학이라 각광을 받았을 수 있었을 거다. 그러니 내가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을 읽으면서 무슨 특별한 감동이나 동감을 느낄 리가 있었겠느냐는 것이지. 이 책이 스페인 문학사에 어떤 위치를 누리고 있는 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건 스페인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암기 사항이다. 작년 말에 이이가 쓴 <벌집>을 읽었다. 두 권이면 됐다. 호세 셀라는 더 볼 일이 없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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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0
쥘리앵 그린 지음, 김종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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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센 강
 서울시 성북구에도 센 강이 흘렀다. 북악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모여 정릉천을 이루었고, 더 큰 지류인 중랑천에 합류하기 위해 왼편으로 그 유명한 미아리 텍사스를 에둘기 바로 직전, 한 시절엔 대한민국의 문학청년들의 집합소였던 서라벌 예술대학이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었으며, 예대가 중앙대 예술대학으로 흡수된 이후 단과대학의 캠퍼스를 중·고등학교가 나누어 썼으니 중등학교로는 규모가 컸던 셈이다. 1970년대 초중반, 모교 서라벌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텍사스 뒷골목으로 걸어서 통학을 하며 바람직한 산교육을 받던지, 길음시장 앞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센 강을 건너는 가장 가까운 골목을 통과해 구멍이 뻥뻥 뚫린 공사장 철판을 잇대 만든 임시 다리를 건너야 했다. 정릉천 주변에 밀집했던 염색공장에서는 흐르는 물을 매일 총천연색으로 물들였으며, 재수 없이 발목 하나라도 물에 담갔다 하면 너무 아름다워 차라리 발목을 잘라버리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만드는 냄새를 하루 종일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장마가 지면 철판으로 만든 임시 다리가 떠내려가고, 학교에서는 가마니에 모래를 채워 징검다리처럼 폴짝 폴짝 뛰어다니게 장치를 해두었는데, 이게 문제여서, 학생들 등굣길에 동네 꼬맹이들이 아침부터 이리저리 뛰놀고는 했다. 등굣길 학생들은 아침엔 학교 쪽으로, 저녁엔 길음시장 쪽으로 일방통행이었으나, 꼬맹이들이야 어딜 그럴 수 있나. 간혹 동네 꼬마들은 반대편에서 펄쩍 날아오는 큰 덩치의 형들과 공중에서 정면충돌하여 빨갛거나 노랗거나 새파란 정릉천 물속으로 머리카락 끝까지 풍덩 빠지곤 했다. 그 꼬맹이들 아직 잘 살고 있는지 몰라.


 2. 센 강
 늙수그레한 남녀가 서로 다투고 있다. 둘 다 초라한 입성에 남자는 술에 취해 있고, 여자는 제르베즈 여사만큼 다리를 전다. 남자는 무어라 고함을 치기도 하지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한다. 여자는 남자의 주먹과 발길질의 사정권 밖에 있으려 무척 조심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둘은 센 강의 선착장 쪽으로 향한다.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필리프. 곧 무슨 험한 사고가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둘 사이에 개입해 남자를 제압하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근처에 경찰이라도 있다면 부탁하고 싶다. 하필이면 밤이 깊어 아무도 없다. 그들의 뒤를 밟는 필리프. 석탄회사 이사로 부르주아 계급의 신체 건강하고 키 크고 건장한 체격의 보유자. 그러나 외양과 달리 키 작고 술 취한 중늙은이 앞에 다가가 어쩌면 당장이라도 벌어질 수 있는 폭력, 예를 들어 다리를 저는 여인을 산 채로 센 강에 던져버린다든지, 교살을 한 다음에 시체를 강에 유기한다든지, 하는 가능성을 완력으로 제압하기엔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들의 뒤를 밟다가 결국은 놓쳐버리고, 대신 모자를 깊숙이 쓴 각진 얼굴의 키 작은 사내가 등장해 약간의 현금을 요구하자 대항할 생각 없이 속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사내의 머리 위로 높이 던져, 잠깐의 시간을 벌어 죽자 사자 달아나는 인물. 그에게도 센 강은 일 년여에 걸쳐 초라한 입성의 중늙은이 남녀, 특히 다리를 저는 여인의 죽음과, 하마터면 실제로 일어났을지도 모를 자신의 죽음으로의 강이 된다.

 

 3. 센 강
 필리프의 두 여인. 아내 앙리에트와 처형 엘리안. 예쁘기만 하지 알고 보면 그리 비싸지 않았던 가난한 여인 앙리에트와 한 침상에 들기 위해 유약한 필리프가 제시한 조건은 결혼. 결혼 첫날 밤, 드디어 작업에 들어가려는 순간 앙리에트는 높은 소리로 한없는 웃음의 폭포를 쏟아내고, 딸꾹질까지 겸해 점점 더 참을 수 없는 홍소를 퍼붓는 것에 질려버린다. 결혼과 동시에 앙리에트를 향한 사랑은 종말을 고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로베르가 태어난 다음부터 둘은 절대로 한 침대에 오르지 않는 단계로 고착된다. 더구나 부모 둘 다 서로가 사랑하지 않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오직 육체의 결합이 만들어놓은 아들 로베르를 향한 애정도 없어 파리 외곽지역의 기숙학교에 처넣어버린 상태. 앙리에트가 고집을 부려 처형 엘리안을 같은 집으로 데려와 집사 비슷한 위치로 만들어놓고, 그녀는 아침 먹을 때 외에는 얼굴 한 번 맞대지 않는 무관심과 비겁함과 매사 주관이 없는 남편이 알거나 모르거나 가난하고, 키 작고, 별로 잘 생기지도 않은 애인을 만들어 주 2회 밀회를 즐기고 있다. 심지어 애인이 요구하는 칠천 프랑을 남편에게 뜯어내기 위해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언니에게 부탁해 기어이 애인이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 언니 엘리안의 평생소원은 동생 앙리에트가 죽거나 이혼을 당해 필리프가 홀아비 혹은 이혼남이 되면 자신이 차지하는 가망 없이 가책만 되는 일. 필리프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처녀의 몸으로 동생의 남편을 사랑하는 불행한 여인은 동생이 남편에게 전혀 애정이 없고, 애인만을 사랑한다는 것을 은근하게 알려줘도, 매사에 맺고 끊는 것이 없는 필리프는 사설탐정을 고용해 아내의 정부를 확인했으면서도, 어영부영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대신 아들 로베르와의 사이는 돈독해지고. 어느 안개 낀 9월 30일 아침. 필리프는 로베르의 손을 잡고 센 강으로 산책을 가, 로베르를 다리 위에서 기다리게 해놓고 강변으로 내려가 장갑을 벗은 다음 손목을 흐르는 센 강의 물속으로 넣는다. 이어 팔꿈치까지. 또 어깨까지. 이제 발뒤꿈치에 약간의 힘만 주어 근육을 튕기기만 하면 약 이삼 분 질식의 시간이 준비가 되어 있고, 그 단계만 지나면 그토록 기다리던 ‘아무 의미도 없는 삶’을 끝낼 수 있을 텐데.

 

 4. 나는 이런 작품을 좋아한다. 그러나 섣불리 다른 분께 권하지 못하겠다. 분명히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인간의 형질 속에 있는 본성의 미묘함을 세밀하게 잡아채는 작품. 1890년 생으로 1932년에 이런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에 놀랐다. 전적으로 아마추어 독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프루스트와 누보 로망, 딱 그 사이에 걸쳐 있는 소설을 읽은 느낌. 물론 문장은 프루스트와는 달리 간결하다. 적어도 간결한 편이다. 해설을 읽어보면 사르트르의 <구토>나 까뮈의 <이방인>과 유사한 실존 소설이라는 설명도 있다. 수긍이 가기는 하지만 세밀한 감정의 묘사는 나로 하여금 누보 로망 쪽으로 더 기울어지게 만든다. 역자 김종우의 우리말 문장도 좋다. 독자 평에는 번역이 좋지 않다는 의견도 있으나, 내가 읽기로는 원작 자체가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닌 거 같다. 읽기를 끝내자마자 쥘리앵 그린, 이이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보았으나, 번역한 작품은 이거 말고 하나도 없다. 이름을 기억해놔야 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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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1-28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넘 아름다운 리뷰에요~ 저도 지루함을 잘 느끼는 독자지만, Falstaff님의 리뷰를 읽으니 읽어보고 싶은 맘이 샘솟네요~~

Falstaff 2019-01-28 09:48   좋아요 1 | URL
이런 과찬을 하시다니. 고맙습니다.
선택의 결과는 ㅎㅎㅎ 책임지지 않겠습니다.

bgkim 2019-04-02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린의 다른 번역본이 두권 있습니다.80년대 초에 간행되엏네요.<레비아탕>과<모이라>가 학원

bgkim 2019-04-02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에서 <미친사랑의 노래(아드리엔 므쥐라)>가 중앙일보사에서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왔어요.헌책으로 간혹 눈에 띄니 꼭 구입해 읽어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에요.

Falstaff 2019-04-02 20:53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예, 기회가 닿으면 꼭 읽어보겠습니다.
 
지옥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8
앙리 바르뷔스 지음, 오현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이 대단히 유명한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바르뷔스의 번역 저작이 이 <지옥> 말고는 한 권도 없다. 이이가 말년에 공산주의에 심취해, 1934년 모스크바 방문 중 현지에서 사망해 그랬나? 1873년 생. 이 작품은 1908년 출간. 역자 오현우 선생은 작품 해설에서 “바르뷔스는 에밀 졸라를 계승한 극명한 사실주의풍의 작품세계로 프랑스 문학사에서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내 눈에는 이 책 <지옥>에서 졸라의 그림자는 발견할 수 없었다. 졸라라기보다 오히려 세기말 주의 비슷한 탐미, 허무, 비장, 죽음 같은 어두운 무드가 초지일관 계속되는 데 조금 질렸을 뿐이다. 매우 아름다운 문장들. 작가 자신이 시집 <흐느끼는 여인들>로 스물두 살에 데뷔를 해서 그런지 시적인 산문으로 위에서 얘기한 세기말 적 분위기를 정말 아름답게 써놓았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단박에 바르뷔스의 글에 빠져버렸고, 문학 창작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필독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감각적이고 치명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하나 둘이 아니어서 만일 그것들을 독후감에 인용한다면 A4 용지로 열 장은 넘겨 써야할 거 같다.
 그러나, 할머니가 내게 가르쳐준 만고의 진리. “꽃노래도 삼세번.”
 100쪽을 넘기면서 엉뚱하게도 스페인의 시인이자 소설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생각났다. 저절로 그이가 떠오르더라. 탐미적이고, 아름다움을 찾는 뛰어난 시선과 단어를 가진 매력적인 문장가. 그이가 쓴 <인상과 풍경>을 읽고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 세상에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 하, 그런데. 처음에 깜짝 놀랐던 로르카 표 몽상과 탐미와 섬세한 감각이 하도 계속되니까, 나중엔 아주 질려버리고 말았다.
 바르뷔스의 이 책은, 고독한 한 프랑스 남자가 당연히 여성을 찾다가, 몇 번의 좌절 끝에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방 벽의 빈틈으로 옆방을 들여다보는 행위를 담았다. 우연히 찾게 된 빈틈으로 처음엔 그냥 빈 방, 그 텅 비어 있음의 나체 상태를 보는 것에서, 하녀가 혼자 들어와 반라의 상태까지 되는 것을 지나, 드디어 방에 든 첫 번째 커플. 사촌 관계인 둘이 서서히 피부를 맞대고, 키스를 하고, 옷을 벗고 벗기는 순간 그들을 찾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여성 동성애자 커플을 지나, 드디어 성인 남성과 여성이 저녁 어스름 빛 속에서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남자는 시인, 여자는 ‘에메’라는 이름의 유부녀. 이른바 불륜 관계. 당연히 이 소설은 작가의 뇌 활동에 의해서만 쓰인 것이어서, 이들이 쉬지 않고 입을 맞추며 나누는 대화 역시 전부 작가의 상상력일 터인데, 매우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치명적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하다가, 너무 장황하게 늘어져 지쳐빠지게 만든다. 남편을 통해서는 성적 만족도, 사랑의 확인도 감지하지 못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한 방에 들어 이리도 장황한 말을 할 수, 들을 수 있을까. 여자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내가 여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러면 남자는? 리비도의 분출을 억제하고 자연의 어둠이 그대와 나 사이를 막아 서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 없을 때까지 적극적 몸의 접촉을 억제하고, 죽자 사자 아름답고 치명적이고 감각적인 단어로 만들어진 문장만 나불대며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농담해? 이런 의미에서 “졸라를 계승한 극명한 사실주의 풍”은 헛소리, 또는 이 작품을 뺀 다른 소설에 해당하는 말이라 단정했다. 이들의 대화에서 주가 되는 명사들은, 거의 다 추상명사들이다. 꿈, 슬픔, 죽음, 과거, 사랑, 구원, 선량, 겨울, 비탄, 기타 등등, 기타 등등, etc, etc. 그래, 그래. 나중에 하긴 한다. 작품을 처음 출간한 1908년 수준으로 보면 매우 선정적일 수도 있는 언어로.
 이어서 난데없이 죽음을 앞둔 그리스 출신 부자 노인이자 병자와, 젊은 아가씨와 출산을 앞둔 여자. 이렇게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필이면 임산부는 화자이자 며칠 후 실업자가 되면서 호텔방을 해약하고 나가버릴 음험한 관찰자 앞에서 산도를 훤하게 드러내놓고 출산을 하며, 병자는 데려온 젊은 처녀와 결혼을 통해 거액을 상속해주고, 그리하여 부인이 된 여자는 눈만 살아 있는 남편에게 (그리고 벽의 빈틈 사이로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에게) 이제 온전히 남편의 것이 된 자신의 동정녀 상태인 나신을 공개하고, 그리스 정교를 믿는 병자는 가톨릭 신부 앞에서 다분히 사회주의적 토론을 통해 회개하기를 거부한 후 죽음을 맞으며, 죽음을 앞둔 환자 앞에서 호텔 주인이 몰래 들어와 가방 속에서 지폐뭉치 한 다발을 훔쳐나간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추상명사의 대행진. 이어 상복을 입은 처녀 과부 안나가 자신의 처녀성을 던져버린다. 독자는 자신이 읽고 있는 장면을 소설의 진짜 스토리의 하나로 읽어도 되고, 작가 또는 화자의 상상력의 힘으로 이야기를 꾸며내고 있다고 생각해도 된다.
 자신을 벽의 틈새로 옆방을 엿볼 수 있는 한 호텔방에 유폐한 채 스스로를 관음의 지옥 속으로 떨어뜨린 남자의 이야기. 나중에, 벽에 작은 구멍을 뚫고 옆방을 들여다보는 남자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는, 그 즈음 각광을 받기 시작한 소설가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글쎄. 내 생각엔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지난 세기말적 작품이 조금 더 발전한 상태인 것 같다. 20세기 초반 작품임에도 상당히 모던한 감각이 돋보이는데, 내 취향엔 조금 과했다. 내가 18세기, 19세기 초반 독일의 낭만주의 작품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잠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남이 써놓은 글 열심히 필사하는 작가 지망생들은 읽어볼 만하겠다. (근데 ‘필사’가 좋은 방법이긴 한가? 필사 좋아하다가 자신이 필사해놓은 대목을 자기 작품 속에 그대로 베낀 경우는 없을까? 난 있다는데 만원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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