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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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 모리슨. 이이의 <빌러비드: Beloved>. 나로 하여금 아메리카 흑인문학에 매력을 느끼게 만든 작품이다. 그 후 조라 닐 허스턴, 리처드 라이트, 랠프 엘리슨, 엘리스 워커, 글로리아 네일러 등을 찾아 읽었다. 자연스레 모리슨의 다른 작품에도 호기심을 느껴왔는데, 그래서 <재즈>를 아주 오랜 시간동안 인터넷 책방 보관함 목록에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지금, 왜 이 책을 진작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고 보관만 해 놓았었을까, 한탄하고 있는 중이다. 책을 읽은 다음 이런 후회를 하게 만드는 작품을 읽었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책을 읽는 재미, 감동, 만족을 흠뻑 느끼게 해주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작가가 1931년생. 작품의 무대는 1926년. 그러나 1926년을 만들기 위한 흑인 등장인물들의 아픈 과거 배경은 1870년대 생인 남자 주인공 조 트레이스의 탄생 이전 약 20년 전까지, 그러니까 1850년대 까지 내려간다. 열여덟 살이 되기까지 자신이 틀림없이 백인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황금색 피부와 금발의 아름다운 청년 골든 그레이가 열여덟 살이 되어 드디어 독립을 하기 바로 전에, 어려서부터 함께 지내온 늙은 흑인 하녀로부터, 자신이 도도하고 미모에 눈부신 금발의 어머니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흑백 혼혈임을 알고, 하도 수치스러워 친부를 살해하기 위해 성인으로의 첫 번째 발길을, 흑인 아버지를 향해 가다가 사필귀정이라, 자신마저 스스로 흑인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대목 같은 것이 난데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즉 각 관련 사건이 순차적으로 나열되는 것도 아니고, 독자가 같은 감정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게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어떻게 보면 모리슨이 대단히 불친절한 작법을 구사했다고 볼 수 있겠으나, 바로 그것이 책 제목을 “재즈”라고 달 수 있는, 애초부터 그리 작정을 하고 글을 쓴 것임을, 누가 알 수 있었을까.
 솔직하게 얘기해서 토니 모리슨의 <재즈>는 무대가 뉴올리언스나 세인트루이스, 시카고 아니면 뉴욕이며, 담배연기가 가득한 실내에서 쿵쿵거리는 더블베이스의 낮은 음이 착 깔려있는 청각공간에서 때론 클라리넷이, 때론 색소폰이나 트럼펫 등의 금관악기가, 작은 퍼커션과 함께 거칠 것 없고, 규칙도 없고, 그저 염화시중의 미소 같은 그들만의 소통 속에서, 악사들의 관자놀이에서 뺨을 거쳐 목에 타고 굵은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리는 광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시기가 1926년이잖은가. 스콧 조플린이 죽고 어느덧 10년이 흘러 카운터 베이시, 듀크 엘링턴 등이 찬란한 시기를 예약한 상태이며, 위대한 양대 재즈 아티스트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이 머리통에 쇠똥을 뒤집어쓰고 이제 막 세상 구경을 한 때였다. 음반시장에 블루노트 레이블은 아직 생기지도 않았고 재즈 음반, 이때, ‘음반’이 아니라 요새는 ‘비닐’이라 불리는, ‘레코드 판’은 오케, 블랙스완, 체스, 사보이, 킹, 피코크가 흑인 재즈의 메인 레이블임을 주장하고 있던 시절.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은 즉흥연주, 라고 주장할 수 있겠고, 토니 모리슨도 그의 후기에 밝혔듯이 바로 즉흥적인 연주, 작가에겐 즉흥적인 글쓰기, 예컨대 클래식 협주곡의 카덴차나, 보컬의 경우 스캣 같이 처음부터 작품의 틀을 마련하지 않고 그냥 손목 돌아가는 대로 썼다는 것. 이걸 곧이곧대로 믿으실 분은 믿으시라. 난 인정하고, 일리 있다고 생각하는 한편, 전적으로 손 가는대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 만 원 건다. 물론 꽉 짜인 규격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결과적으로 독자가 쉽사리 술술 읽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사실 재즈도 그렇다. 결코 쉽게 들리지 않는 장르, 웬만큼 도가 트지 않으면 협주/협연이 불가능한 즉흥연주와 마찬가지로 귀 명창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투자가 없으면 즐기기 쉽지 않다. 거기에 각 장章마다 등장하는 인물도 다르고, 심지어 작가 모리슨이 툭툭 등장해 교통정리를 해주기도 하는데 그게 오히려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기도 하는 거.
 원문은 모르겠지만 한글로 번역한 <재즈>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음악적 리듬을 타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대신 참으로 절묘한 문장들과, 문장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진정한 글들이 참으로 많다. 딱 하나만 예를 들어보면, 318쪽에 쉰 살이 넘은 아줌마 바이올렛 트레이스가 이렇게 조언한다.

 

 “바로 그게 문제란다. 만일 네가 삶을 바꾸지 못하면 삶이 너를 바꿔놓을 거야. 그리고 그건 전부 네 잘못이 되지.”

 

 책을 열자마자 상황은 마치 소설의 절정 상태 비슷하게 이르게 만들었다. 쉰 살이 넘은 화장품 외판원 조 트레이스 씨가 열여덟 살 먹은 아가씨 도카스와 바람을 피우다가, 당연히 도카스가 싫증을 느끼면서 청년을 사랑하게 되니 질투에 눈이 먼 조가 파티장에서 도카스의 어깨에 총알을 박아버린다. 총을 맞은 도카스가 끝까지 누가 자신에게 총을 쐈는지 밝히지 않고 죽는 바람에 트레이스 씨는 여전히 자유상태이지만 도카스에 대한 사랑에 이젠 죄의식까지 더해 무척 피폐해져 있다. 그리하여 며칠 후 드디어 도카스의 장례식. 장례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교회에 이제 관을 덮기 바로 전 조 트레이스의 아내 바이올렛 트레이스 여사가 도카스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자 접근하더니 칼로 이미 죽은 도카스이 얼굴을 내리 찍었지만, 귀 밑에 약간의 상처만 내고는 젊은 남자들의 손에 들려 교회 밖으로 내팽개쳐진다.
 이건 책을 열자마자 불문곡직하고 등장하는 장면이니 굳이 이야기하지 않으려 애쓸 필요가 없을 듯하다. 다만 이 스토리의 시작을 읽는 분이, 장면소개 때문에 책 전체를 엽기, 불륜, 부도덕 등의 색안경을 쓰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은 꼭 첨가해야겠다. <빌러비드>에서도 그랬듯이 <재즈>에서도 아메리카의 흑인들이 받아온 불평등과 당연시된 차별, 이런 것들만 연속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들도 백인, 심지어 동아시아 우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사랑하고, 신뢰하고, 배신하고, 질투하고, 서로 도와주고 그렇게 사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진정한 사랑이 어떻게 공고해지는가 하는 과정이라고 읽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하여간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흐름 가운데 그래도 괜찮은 길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합당한 물결을 따라 가는 과정을 그렸다고 읽을 수도 있고, 아니다, 아니다,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 살면서 사랑하고 늙어가는 너무나 보편적인, 그래서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진지하게 말해서, 이런 책을 우린 흔히 이렇게 말한다.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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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3-2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빵이시네요 :>

전 지금 <술라> 읽고 있는데 마침 집에
예전에 들녘에서 나온 <재즈>가 있더라구요.

문학동네 버전으로 읽어 보고 싶은데 굳이
새 책을 살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

토니 모리슨의 신간도 나와서 어떤 책부터
먼저 시작해야 하나 고민이네요.

Falstaff 2018-03-22 15:09   좋아요 0 | URL
<술라>도 재미 있을 거 같아서 저도 지금 보관중입니다. 그러니 매냐 님께서도 선빵입니다. ^^
맞아요. 먼저 나온 책이 있는데 굳이 새로 나온 같은 책을 ˝사서˝ 읽을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혹시 모르겠지만요!
 
쌀 (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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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화가 1960년 쥐띠, 쑤퉁이 63년 토끼띠. 둘이 처음 만나니까 서로 비슷하게 느낀 것이, 어려서부터 같이 놀던 동네 친구 같았다나? 난 영화 <홍등>, 장이모우 감독에 공리가 주연을 한 이 영화를 참 재미있게 봤는데, 그게 쑤퉁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거란 걸 알고, 그래? 그럼 쑤퉁의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쌀>을 고른 거다. 말인즉 <쌀>이 내가 처음 읽은 쑤퉁이란 말이다. 그리고 거의 틀림없이 마지막으로 읽은 쑤퉁의 작품이 아니겠느냐, 하는 점도 부인하기 힘들다. 참 다행인 것이 알라딘 헌책방에서 사서 그나마 좀 위안이 된다는 거. 조만간에 아파트 단지 도서실에 기증해야겠다.
 용 다섯 마리를 일컫는 이름의 우룽(五龍)이 주인공. 고향 펑양수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유래 없는 대 풍년이 도래할 찰나, 그만 늦장마가 피눈물 나는 폭우로 이어지는 바람에 끝없는 들판에 넘실대던 익은 벼들의 황금물결이 진짜 황토 물에 몽땅 잠겨, 이제 남은 것은 겨울바람 소슬하니 불어오기 전에 굶어죽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지자, 이렇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도시로 향하는 화물열차에 몰래 올라 도시에 도착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우룽은 사흘을 내리 굶다가 부두에서 쌀을 실은 수레를 무작정 따라 상가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시장거리 와장가(瓦匠街)의 싸전 대홍기(大泓記)에 도착해, 싸전 주인 펑사장에게 사정사정을 해 임금 없이 밥만 먹여주는 조건으로 취직을 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낯선 도시에 떨어져 싸전으로 오기 전까지 겪은 더럽고 수치스런 경험은 소개하지 않았다.
 싸전에 딸이 둘 있는데, 큰 것이 쯔윈(織云)이요 작은 것이 치윈(綺云). 쯔윈으로 말하자면 몸매 빵빵하고 얼굴도 동그라니 당시 중국인의 시각에 입각한 전형적인 미인에다가 살집도 적당하니 붙어 사내새끼라면 어떻게 한 번 껄떡거려볼만한 방년 열여덟의 젊디젊은 아가씨요, 작은 치윈으로 말하자면 모든 일을 차갑게 계산적으로 따져서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지만 아버지 펑사장 이상으로 싸전의 경영을 거의 혼자 해나가고 있는 당찬 아가씨다. 쯔윈, 역시 예쁘고, 성격 발랄하고, 오픈되어 있는(까졌다는 얘기) 아가씨가 20세기 초반, 계산해보면 1910년대 중반쯤이라면 태생부터 문제를 갖고 태어난 것이라, 쯔윈 역시 예외가 아니라서 벌써 열다섯 살 때 자진volunteer해서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귀족계급이자 암흑가의 최고 보스인 뤼대감의 정부자리를 꿰찬다. 그리하여 얻는 것이라고는 와장가에서 단연 돋보이는 스캔들과 뤼대감으로부터 얻어내는 수많은 고급 옷들. 쯔윈은 스캔들 따윈 눈도 하나 깜박거리지 않는다. 눈 깜박? 천만의 말씀. 오히려 뤼대감이 자신을 조금 멀리 하는 듯 보이자마자 뤼대감의 암흑가를 대리해왔던 도시의 항구harbor 방면 총대장이자 주인공 우룽의 첫 번째 원수인 아바오를 밤마다 창문을 통해 자기 방에 들이는 놀라운 엽색행각도 서슴지 않는다. 불과 나이 열여덟에.
 아차, 쯔윈이 임신을 해버린다. 아바오가 쯔윈의 창문을 넘나든다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우룽이었는데, 어떻게 도시의 권력자 뤼대감도 연인의 배신을 알아내어, 어느 날 유장하게 황토색 강물이 흐르는 장강 속으로 아바오가 가라앉을 수 있었을까. 하여간 그랬다. 이제 배는 불러오지, 뤼대감으로부터 완전 소박을 맞았지,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쯔윈의 아버지 펑사장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한 숟가락 가득 겨자를 퍼먹는 심정으로 촌놈 우룽과 쯔윈을 혼인시켜버린다. 난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정상적인 20세기 초반 중국 아니겠는가 싶었다. 근데 혼인 날, 뤼대감이 꼭 첫날밤에 열어보라고 칠기를 한 고급 목합을 선물하는 장면에서 첫 번째로 작가 쑤퉁에게 질려버렸다. 임신한 여자에게 장가든 촌놈 우룽이 자신을 우롱한 아바오와 쯔윈의 밀통을 몰래 뤼대감에게 알려줘 아바오를 죽게 만든 건 그렇다고 쳐도, 썩어가는 아바오의 생식기를 첫날밤에 열어보라고 목합에 담아 선물했다는 설정은, 오버다, 오버. 거기다가 바로 다음날, 먼 곳에 가서 배 두 척의 쌀을 사오라는 장인의 심부름을 가게 된 우룽. 심부름의 목적은 우룽을 죽여 쯔윈으로 하여금 과부 신분으로 만들려는 꼼수였던 것. 이쯤 되면 이후 우룽의 처가에 대한 악행은 일면 당위성을 갖기는 하지만, 엽기 스토리, 정말 해도 너무한다.
 몇 달 후 쯔윈이 아들을 낳음으로 해서 자손 없는 뤼대감의 여섯 번째 첩으로 들어가 거의 하녀 수준으로 살게 되고, 뇌졸중 후유증으로 펑사장이 죽어가며 마지막 남은 힘으로 더럽고, 길고, 노인 특유의 바짝 말라 두껍게 각질이 덮인 손톱으로 우룽의 왼쪽 눈알을 파 애꾸로 만들어 놓고 죽은 다음, 우룽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처제 치윈을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인다. 이후 우룽이 죽을 때까지 싸전 대홍기와 대홍기를 둘러싼 와장가와 도시 속에서 우룽, 쯔윈 남매, 쯔윈 남매의 후손들이 펼치는 눈뜨고 못 볼 행각들의 나열. 중국인과 정서 차이인줄 모르겠지만 어떻게 이런 작품을 모옌, 위화, 심지어 다이 허우잉과 비견하는 위치로 올릴 수 있는지 정말 난감하다. 그러고 보니 <홍등>마저 내게 인상 깊게 남아있는 건 장이모우 감독의 영상미, 쉽게 얘기해서 필름의 색채감이었지(공리의 미모는 논외로 하자 뭐!), 결코 작품의 스토리 라인은 아니었던 거다.
 하여간 죽고 죽이고, 물고 물리고, 때리고 맞는 순환. 이것이 도시에서 사람이 사는, 또는 1910년대부터 30년대까지 중국에서 사는, 살아내는, 생존하는 방식이었다고 주장하는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는지, 난 도통 모르겠다. 당연히 문학이 구름 위의 궁전에서 천상의 노래만 하라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인간들이 오직 생각으로만 품을 수 있을 거 같은 악행으로만 점철하면서 그걸 보고 사실주의입네, 리얼리즘입네, 함부로 주장하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의미에서 <쌀>은 수준 이하의, 습작 정도의 작품이라고 결론 내는 것이며, 다시는 쑤퉁을 읽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 어, 이 책도 양장본, 반양장본이 있네. 난 반양장본을 읽었다. 새삼 그쪽으로 글을 옮기려고 하니 귀찮다. 그냥 내비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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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키핑
메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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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릴린 로빈슨의 처녀작. 이이가 쓴 <길리아드>를 읽고 기독교적 세계관에 아주 학을 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사실 <하우스 키핑>을 읽으려다가 마우스 클릭을 잘못해 <길리아드>를 샀던 거다. 그런데 <길리아드>를 너무 재미없게 읽어 정작 마음먹었던 <하우스 키핑>을 읽기 위해서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앞서 읽은 책이 얼마나 재미없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3년 전, 메릴린 로빈슨의 <하우스 키핑>이 타임지인가 어딘가에서 선정한 100대 문학작품에 포함됐다는 걸 알고 궁금증이 도졌었다는 거. 그런데도 <길리아드>에 관한 추억이 하도 험악해서 이거, <하우스 키핑>은 정가의 37% 가격인 5천 원 주고 헌 책 샀다. 지금, 후회막급. 이런 책은 새 것으로 사고, 3년 전에 산 새 책은 헌 것으로 사야했던 거다. 난 타임지 같은 기관의 100대 명작, 이딴 거 안 믿는다. 아니, 그런 평가가 내 취향하고 같지는 않다는 걸 이해한다. <앵무새 죽이기>와 <동물농장>을 어떻게 명작이라고 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 못하는 인종이다. 근데 <하우스 키핑>은 정말 대박.
 일반적으로 ‘하우스 키핑’을 한국말로 하면, 아니, 인터넷 뒀다 뭐하나, 네이버 검색해보니까, “살림, 집안일, 집안 돌봄, 시설관리” 등으로 쓰는데, 이 책에서 ‘하우스 키핑’은 흠, 물론 그런 의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각개 단어의 뜻, 그러니까 하우스를 키핑하는 일, 집안을 간수하고 보살피는 일, ‘집안일’ ‘살림’ 대신, “집‘House' 및 집을 구성하는 가족을 지키고, 유지하고, 심지어 사라진 가족을 기다리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거 같)다.
 콩가루 집안을 소개한다.
 미국 중서부 지역에 에드먼드 포스터 씨가 살았다. 광막한 평야지대에 바람이 한 번 불었다하면 거칠 것 없이 몰아치는 거센 바람의 발톱을 막아낼 방법이 없어 땅을 깊게 파고 집을 지어 창문이 지표면과 같게 만든, 이른바 반 지하 집에서 살았는데, 이 양반이 하도 평야지대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평소에 산을 동경해 세상의 모든 유명한 산을 (사진이나 그림을 보며) 스케치하는 취미가 생겼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해 꽃피는 봄이 오자 에드먼드 씨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열차 정거장으로 냅다 달려가 매표소에 돈을 한 움큼 내밀더니, 산이 있는 곳으로 가는 차표를 달라고 했단다. 그래 그 길로 열차를 타고 떠난 곳이 미국 북서부 워싱턴 주의 시애틀 부근이라고 짐작하는 가상 소도시의 가상 촌 동네이자 넓은 호수가 있는 완전한 산골마을 핑거본이었다. 여기사 에드먼드 씨는 어여쁜 아내 실비아와 결혼을 하고,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핑거본에서도 높은 지역에 터를 골라 벽돌로 튼튼한 집을 지어, 깨가 쏟아지지는 않지만 그냥 덤덤하고 성실한 철도원으로 살며 딸을 셋 두었다. 첫째가 몰리요, 둘째가 주인공이자 화자 ‘나’ 루스의 친엄마인 헬렌이고, 셋째가 또 다른 주인공 혹은 주연급 조연 실비였다. 첫째가 16세, 둘째가 15세, 막내가 13세, 즉 세 딸이 자랄 만큼 자랐을 때, 에드먼드 씨가 타고 근무하던 열차가 핑거본의 넓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웅혼하게 달리다 과감하게 호수 안으로 자유낙하를 시도하여 에드먼드 씨는 기어이 실비아를 과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잠수부가 며칠을 찾았지만 단 한 구의 시신도 건지지 못해, 과부가 된 동네의 여인(들)은 시신 없는 장례를 치룰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조금 지나자 맏딸 몰리는 과감하게 개종을 하고나서 선교사들을 따라 태평양을 건너 중국 땅으로 건너가 경리직원 정도의 자리를 잡았고, 둘째 헬렌은 도시로 가 일단 결혼부터 한 다음 딸만 둘을 두니 첫 아이가 화자 ‘나’루스요, 작은 애가 루실이다. 막내 실비 역시 머리 굵어지고 곧바로 도시로 가더니 결혼은 분명히 했는데 아이도 없고, 남편도 없고 그냥 정처 없이 떠도는 여자가 돼버렸다. ‘나’의 엄마 헬렌의 남편(그러니까 ‘나’ 루스와 동생 루실의 친 아버님)은 벌써 가정에서 도망해 새장가 가버리고 이제 도무지 혼자 두 딸을 키우기 벅찬 지경에 몰리니, 친구의 차에 둘을 데리고 핑거본의 엄마(‘나’의 외할머니)한테 찾아와 엄마가 없는 사이에 두 딸을 집에 둔 채로,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아버지의 영혼이 헤엄치고 있을 거 같은 호수로 돌진해버린다.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하자. 이건 책의 앞부분, 전체의 10분의 1 가량만 읽으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니까 그냥 전제사항만 일러두었다고 여기시면 된다. 그래서 ‘나’ 루스와 루실은 할머니하고 살게 되고, 할머니가 죽은 다음엔 전 재산을 상속받은 상태에서 할머니의 두 시누이들, ‘나’의 대고모 두 분의 보살핌을 받다가, 자기 엄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한 번 편지를 보낸 막내 이모 실비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잘 읽어보자.
 할머니 살아생전 호수의 영spirit이 소용돌이치며 열차를 빨아들였고, 몇 년 후 거의 같은 장소에서 둘째 딸이 또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는데, 두 경우 다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시신은커녕 열차와 자동차도 건져낼 수 없었다. 그럼, 정말 죽은 건가? 호수의 밑바닥엔 아버지와 둘째 딸의 유해가 서로 빈 동공을 바라보며 가라앉아 있을까? 혹시 할머니는 숨이 다 하기 전까지 남편과 딸이 어디선가에서 낡은 옷에 뭍은 먼지를 툭툭 털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고 늘 창가의 소파에 앉아 들녘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중국으로 가버린 맏이 몰리는 이젠 거의 완전히 남이고, 어느 날 문득 집을 나가 도시의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인식 망에서 사라져버린 막내 실비. 죽었다는 말은 없지만 정말 살아 있기는 한 것일까. 그리하여 할머니 실비아 포스터 여사께선 전 재산을, 직접 낳은 두 딸을 완전히 배격하고 둘째 딸이 낳은 두 손녀에게 유증해버린다. 직접 만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이 둘 말고는 없었으니까.
 여기에서 독후감을, 누구나가 읽을 수 있는 공간에서 쓴다는 조건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다. 몇 십 년 전 손으로 쓰던 독서일기라면 하고 싶은 얘기까지 다 하겠지만,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도 이 책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인에 공개하는 서재에 독후감을 올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미국 북서부 지방의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여성 3대에 걸친 가족과 가족애에 관한 이야기. 외로움의 피를 이어가는 여인들의 고독과 방랑과 기다림의 안타깝고 애잔한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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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
존 치버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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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존 치버라는 이름 자체가 영미 소설의 한 브랜드로 자리한 현대 영문학의 별. 이 정도면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를 쓰고 몇 달 후 생을 마감한 치버에 대한 적절한 헌사가 되지 않을까싶다. 세월이란 참. 150쪽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장편소설이지만 스스로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임을 분명하게 알았을 치버는, 자신의 생을 바쳐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쓴다.
 “내가 맨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비 오는 밤 낡은 집에서 침대에 앉아 읽는 이야기일 뿐이다.” (143쪽)
 아직 거동이 불편하지는 않는 노인 레뮤얼 시어스, 어느 겨울의 일요일 아침, 대단히 실용적인 우호관계를 맺고 있고 심지어 여태 서로 사랑하기까지 하지만 신뢰하는 사이는 아닌 큰 딸에게 전화를 해, 딸의 집 벽장에 있는 스케이트를 들고 100년 만에 꽁꽁 언 비즐리 연못으로 향한다. 소설은 노인이 스케이트를 즐기는 비즐리 연못을, 도시의 쓰레기로 메워 그 위에 참전용사의 집을 건립할 계획인 도시의 시장과 폭력배 집단의 시도를 물리치고 이미 오염된 연못을 정상적인 습지로 보관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모습까지를 그리고 있다. 연못의 보존이란 굵은 줄기를 중심으로 자잘한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도 몇 개 첨가되어 읽는 재미를 준다.
 삶을 많이, 그리고 비교적 성공적으로 살아내 이제 부유한 은퇴자의 생을 즐길 수 있는 노인에게, 아직도 여인과 여인의 살에 대한 동경이 넘쳐 아름다운 여인을 유혹하고, 즐기고, 버림받고, 그래서 흐르는 슬픔을 눈물에 담는 시어스. 그는 작가 치버 자신이거나 치버가 상상 속에 스스로 되고 싶었던, 스스로이고 싶었던 한 등장인물로 나는 읽었다. 여전히 삶과 이성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연못이 급격하게 더러워지면서 연못 속의 생명체가 사라지는 것에 분노하여 자신의 돈을 써 권력과 싸우려하는 것. 치버가 생각하는 노년의 모습이 비단 이 둘 뿐이겠느냐만, 개인으로서의 희망사항으로 사랑을, 사회적 희망으로 환경보전을 꼽아 그의 말대로 “비 오는 밤 낡은 집에서 침대에 앉아 읽는 이야기”로 만들지 않았을까.
 이미 시간은 23시 59분. 콩팥에 암이 생겨 전신에 퍼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라고는 단 1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신장부전으로 인한 죽음에선 정상적인 뇌 활동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는 존 치버. 그 역시 사람이기에, 이 책이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진정으로는 믿지 않았다고 해도, 커튼콜이 없는 인간으로의 삶이 눈썹만큼 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사람의 사랑과, 내일을 위한 지구환경을 남긴 것이다. 사랑과 환경이란 보편 주제에 대하여 마지막 작품으로 썼다고 해서 내가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그저 소박한 읽을거리, 이야기 감으로 조근거린 것이, 나로 하여금 기껏 다 읽고 마지막에 헛기침을 하게 만들었다.
 짧은 작품이라서 더 이상의 책 이야기는 바람직하지 않기도 하고, 이쯤에서 그의 ‘이야기’를 접는 것이 또한 그의 겸양에 대한 예의 같기도 하여 짧은 독후감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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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마몬 실코 지음, 강자모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레슬리 마몬 실코, 비록 완전한 아메리카 인디언이 아니라 백인의 피가 조금, 사실 그리 적지는 않게 흐르지만, 어려서부터 뉴멕시코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아온 작가로 데뷔작 <의식Ceremony>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소외와 몰락의 과정을 소설을 통해 그린 작품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원주민 아가씨가 백인의 꾐에 넘어가 아이를 낳으니 이 혼혈 아이는 혈족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태생부터 종족의 수치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알고 있는 어린 엄마는 1920년대, 인디언이라면 오히려 흑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던 시기에 아이와 함께 살아내기가 너무 힘들었으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몸을 파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얼기설기 바람막이만 세워둔 움집에서 누더기에 갓 낳은 아이를 둘둘 말아 쓰레기장에 버리고 돌아와서는 혼혈 아이, 책의 주인공인 타요를 데리고 뉴멕시코 고향으로 돌아와 언니에게 양육을 부탁하고 떠난다. 엄마의 언니, 타요의 이모는, 이모의 건강하고 운동 잘하고 백인 식 학교공부도 빼어난 자랑스런 아들 록키와 함께 타요를 키우며 록키 대신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서 소와 양을 키우는 목축 일을 시키려고 마음을 먹는다. 록키는 백인의 성공 공식과 같은 코스의 가도를 걷도록 배려하고. 근데 뜻대로 되면 그게 세상살이야? 어느 날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록키와 타요, 그리고 동네의 젊은이란 젊은이들은 모두 군대에 입대해버린다. 록키는 모병관에게 동생 타요와 같은 부대에 배속되는 조건으로 입대하겠다고 타협을 해 그렇게 되는데, 그게 타요로 하여금 최악의 조건이 될 줄은 미처 몰랐겠지. 둘은 필리핀 근처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해병으로 배속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을 한 명도 해치우지 못하고 포로로 잡혀버리고 만다. 그것도 록키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백 퍼센트 가까운 습도와 송곳처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록키가 누워있는 모포의 양끝을 포로병들이 들고 행군하는 밀림. 일본군의 개머리판이 관자놀이에 와 부딪는 것보다 비와 더위가 더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행군 속에 문득 타요는 일본인의 얼굴 속에서 사랑하는 외삼촌 조사이어의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고통 속에서 기어이 록키는 절명해버리고.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타요를 비롯한 인디언 참전용사들. 인디언 부족 간엔 백인들의 전쟁에 나가 싸우고 온 것이 별로 자랑할 만하지 않지만 그래도 전쟁 중엔 캘리포니아에서 참전 군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백인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고, 백인들이 드나드는 바에서 마음껏 술도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유일하게 얻은 것이라고는 극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어려서부터 타요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에모가 술에 잔뜩 취해 역시 만취한 타요의 엄마와 백인과의 관계를 모욕하자 인사불성의 상태에서 타요는 깨진 맥주병으로 에모의 배를 쑤시고 LA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백색의 사각형 안에서 서서히 황폐화되는 타요의 정신세계. 필리핀의 한 섬에서 그토록 내린 비를 저주했기 때문에 고향 뉴멕시코의 황량한 벌판에도 6년째 지독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는 자책까지. 그리고 왜 조사이어 외삼촌은 다시 보이지 않을까. 수시로 불쑥 나타나는 일본군과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는 록키, 빗속에서 환영처럼 보이던 조사이어는 내리는 비처럼 술을 마셔야 다시 모습을 드러낼 뿐. 타요의 정신은 완전하게 황폐화되고, 별로 나아지지 않은 상태로 다시 고향, 길쭉한 메사가 있는 뉴멕시코로 돌아간다. 이게 책의 거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1부.
 그저 그런 얘기 같지? 그러나 만일 내가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이면 작가가 직접 쓴 그대로의 작품을 읽고 싶은 책. 우리가 간혹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했던 말, 그들의 사상 같은 것을 읽을 기회가 있으면, 그들의 자연과 동물과 한 포기 풀, 한 그루의 나무, 돌멩이, 돌멩이 위를 흐르는 냇물, 냇물소리 돌물돌 물돌물*, 이 모든 자연 정령과 인간의 합일된 모습에 감탄한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책의 작가 마몬 실코의 글도 이 비슷한 정조情調로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위 문단의 끝 부분에 ‘메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떤 것을 말하는가 하면, 그로 설명하는 것보다 사진을 하나 보시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2부에서 (일종의)주술사 베토니 노인에게 성공적인 치유 의식을 받은 타요가 3부에선 외삼촌이 남긴 소들을 다시 찾아와 메사의 솟은 언덕 사이에 뚫린 굴에 기거하며 키우는 장면이 나온다. 4부는 결론이니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다.
 저 넓은 거친 황야에서 생존할 수 있는 소는 백인들이 외국에서 품종 개량해 들여와 키우는 살집 좋고 다리 짧은 종이 아니라 사슴처럼 가는 다리에 구운 선인장과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가며 생존할 수 있는 토종 소이듯이, 지금 완전하게 약탈당한 아메리카의 모든 비옥하고 깨끗한 물이 넘쳐흐르는 토지는 전적으로 원주민의 것이라는 건 슬프게도 사실이다. 희망이나 비전이 전혀 없는 원주민들,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에게 오직 허가된 것이라고는 술과 매춘과 오직 그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끝없는 폭력. 보호지역 안에선 국가가 보호를 해줄 테니 안에서 서로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는 FBI(로 대표하는 미국 정부). 그러나 백인들은 오직 한 군데, 도무지 생명이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황무지만을 아메리카의 원래주인인 원주민에게 불하했으며, 모든 자연과 동식물의 생명과 인간성을 약탈당한 원주민들은 알콜과 약물과, 그걸로 다스릴 수 없는 절망과 빈곤 속에서 그나마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작가는 비록 참전 인디언들을 모델로 하긴 했으나 현재까지 유효하며, 모든 인디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처한 소외와 절망과 몰락의 상태에 대한 치유의 의식ceremony이라고, 참으로 아름다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 의성어/의태어 "돌물돌 물돌물"은 서정춘의 시에서 가져왔음. 어떤 시인지는 기억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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