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0
세스 노터봄 지음, 김영중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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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께선 아래 독후감이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들께 미리 사과드립니다.

 


 

 노터봄의 책은 예전부터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여간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 디자인 때문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에 그의 책이 두 권 있는데, 둘 다 표지에 에곤 실레의 그림을 올려놨다. 아시다시피 그가 그린 것들의 공통점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건 그로테스크하다는 거. <의식>의 표지에 쓴 실레의 자화상 역시 벽에다 걸어놓으면 밤에 잠 못 잘 거 같다. 정말 그런 엽기적, 적어도 심히 그로테스크한 내용 아닐까 싶어 선뜻 읽지 않은 것. 노터봄 아니더라도 읽을 책은 얼마든지 많으니까.
 그러나 드디어 읽었다. <의식>. 몇 달 전 같은 제목을 한 레슬리 마몬 실코의 책 <의식>을 읽었는데 그 책은 표지에 영어로 “Ceremony”라 써놓았었다. 그래서 의식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노터봄의 <의식>은 네덜란드 말 “Rituelen"이라고 적혀 있다. 네덜란드 말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말이야. 한글2010에 의식이라 써놓고 한자변환 해보자. 衣食(입고 먹는 거), 意識(뇌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 儀式(행사를 치루는 법칙). 솔직히 책 읽어보기 전에 난 두 번째 의식, 즉 意識인줄 알았다.
 초장부터 왜 이리 삐딱하냐고? 책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쪽을 보면 “제행무상”이란 단어가 나온다. 제행무상. 불교에선 이걸 “우주의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는 모양이지만, 책에선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 무상하다. 이런 뜻으로 사용한 건데, 그냥 놔두지, 왜 괄호를 치고 안에다가 諸行無裳, "모든 행동엔 치마가 없다", 라고 헛소리를 하느냔 말이다. 이거 여성 차별 아냐? 치마가 없으니 모든 행동은 바지 입은 인간들, 즉 남자들의 것이란 뜻이라고 이해하겠다고 주장하면 어쩔 건데. 번역서를 읽으면서 내가 주구장창 주장하는 거. 한국말과 한국의 문자를 제대로 사용해주라. 읽는 내내 조금 불편한 것이 있었으나, 전체적인 라인을 따라가는 데 큰 문제가 없어서, 그리고 눈 침침해 일일이 따따부따하기 피곤해서 그냥 넘어갔지, 할 말 무지 많았다. 그래, 말을 말자.
 왜 열을 내냐 하면, 세스 노터봄의 <의식>이 내가 짐작했던 것과 달리, 매우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기 때문. 물론 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그건 차차 이야기하자. 이 책의 의식은 儀式ceremony를 말한다. 가톨릭 성당에 가면 사제가 붉은 포도주가 든 금잔을 번쩍 들고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의 잔이니, 너희는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는 걸 들을 수 있고, 사제는 (내가 구경해본 미사에 한해 말하자면)그걸 혼자서만 쪽 들이켜고, 거기다 성수를 좀 부은 다음 휘휘 휘둘러 대충 설거지를 하더니 또 홀랑 마셔버린다(유물론자인 내가 보기에, 아 드러!). 그 전이던가 후던가, 하여튼 흰 밀떡을 성체,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몸이라고 하며 신자들의 입 속에 넣어준다. 물론 나 같은 속인들은 밀떡을 얻어먹을 수 없다. 수개월 동안 도 닦고 공부하고, 국영수 시험 치뤄 합격해야지 자격증이 나오고, 자격증이 나와야 비로소 기독교 동포, 즉 형제, 자매로 불리는데, 형제자매들만 맛도 없는 밀떡을 먹을 수 있다는 거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성당 갈 때마다, 옛말로, ‘연봇돈’을 내야하니 절대적으로 교회가 남는 장사다. 이게 현재 좀 사는 지구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의식”이다.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는 거. 불과 지난 세기까지 이 형제자매에 등록된 인간들의 연맹은 자기들을 제외한 모든 인류를 이교도라 지칭하며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형제자매로 만들기 위한다는 핑계를 대고 무차별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해온 거 아냐? 그러니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의식이며 자격증이냐고. 예수의 피와 살을 먹을 수 있는 흡혈과 식인의식 말이지.
 세스 노터봄은 여기다가 한 번 삽질을 해버린다. 일본의 다도. 다도는 무슨 뜻인지 아시지? 혹시 해서 한문으로 茶道라고 추가한다. 내 의식意識이 참 독특한 것이, 난 다도마저도 정말 개뿔로 아는 인간이다. 사람 몇 명이 풍로, 또는 사모바르를 둘러앉아서 물을 끓이고 별 희한하고 겁나게 비싸고, 하나도 편리하지 않은 기구를 써, 뜨거운 물로 찻잔을 데우고, 데운 물을 따라 버린 다음, 차를 적당한 온도(섭씨 약 80도)의 물에 넣어 우려서 찔끔 따라 마시는 거. 그 몇 잔 마시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이 차 마시는 의식ceremony가 다 끝날 때까지 무릎을 꿇고 한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생고생. 별 맛도 없는 차 한 잔 마시고 일어나면 다리가 풀려 팽그르르, 지구의 중력이 이렇게 막강한 힘이 있었구나,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의 경험까지. 차 한 잔 마시자고 진짜 별 지랄을 다 한다. 차라는 거, 그거 누가 마셨나? 일본에선 사무라이도 아니고 쇼군과 그의 바로 아래 계급, 칼을 잘 갈았는지 잘 못 갈았는지 시험해보기 위해 지나가는 백성 아무나 무작위로 한 명 불러놓고 단 칼에 목을 쳐볼 수 있었던 개자식들이나 마셨던 거다. 전체 인구의 99.5%한테 차 마실 여유가 어디 있어, 다 굶어죽어 나가는 판국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 밖에 나 할복을 해야 했던 리큐는 자기 수하들과 이 다회茶會(차 한 잔씩 하려고 인간들 모아놓고 별 우습지도 않은 짓을 하는 의식)를 연 다음, “불행의 입술로 더렵혀진 이 잔을 다시는 인간에게 사용되지 않기를”(258쪽) 바라면서 찻잔을 박살을 낸다.


 (위 인용, 따옴표 안의 문장 보시라. ‘이 잔’에 붙어있는 조사. 이상하지 않으셔? “잔을 다시는 인간이 사용하지 않기를” 또는 “잔이 인간에게 사용되지 않기를”이 맞는 거 아냐(물론 앞의 문장이 더 바람직하지만)? 이렇게 시비걸기 애매한 자잘한 삽질이 책 전체에 숱하게 깔려있음을 참고 바람. 저 위에서 얘기한 '제행무상'은 하다 하다 너무 해서 한 번 예를 든 거 뿐이다. 어쨌든)


 가톨릭 성당에서 신부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성수로 헹궈 홀랑 마시는 예수의 피는 모든 인간의 죄를 덮어쓰고 죽은 예수를 기념하기 위한 부활의 피인 반면에, 일본의 성배 파괴는 죽음의 전조 의식.
 좋다. 여기까지. 아니, 하나 더. 여태까지 말한 의식 말고, 다른 의식. 살과 살이 맞붙는 의식의 장면도 등장해 읽는 재미까지 더해주니 이를 어려운 말로 하면 금상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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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8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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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8 1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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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섹스를 한다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 자작나무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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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은 이렇게 생겼다.

 

 


 

 출판사 ‘자작나무’가 뽑은 것이 거의 확실한 제목, “미국은 섹스를 한다.” 아,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넌 안 하고 사냐? 원 참. 원래 제목이 “Diana o la cazadora solitaria". 당연히 스페인 말을 모르니 구글 번역기 돌렸다. 그랬더니 이렇게 나온다. ”Diana or hunter lonesome". 우리말로 하면 “다이아나 또는 외로운 사냥꾼.” 이걸 뭐라? “미국은 섹스를 한다”? 그래서 책 좀 팔아먹었을까? 저번에도 이 출판사 한 번 얘기한 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책 낸 것이 1997년. 망하지 않았으면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세 번째 읽은 푸엔테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통해 아주 매력적인 환상소설 <아우라>를 읽고 나서 이런, 이런 작가를 아직도 몰랐다니, 감탄을 하고 곧바로 재미난 스릴러 <의지와 운명>을 거쳐 그의 이름이 머릿속에 콱 박히게 된다. 카를로스 푸엔테스. 만일 푸엔테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미국은 섹스를 한다>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커서를 옮겼을 것이다. 다행히 패스하지 않고 읽어보니, 이 책도 대박!
 <미국은 섹스를 한다>. 한국어 제목이 너무 후져서 더 쓰기가 싫다. 앞으로 원 제목과 비슷한 <다이아나>라고 부르겠다.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이 책을 쓴 시점이 위키피디어엔 1995년이라고 나온다. 그러면 이이의 나이 만 67세. 와우! 1995년에 1970년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말이지? <다이아나>는 1969년 12월 31일에서 197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60년대 쫑파티를 무대로 작품을 시작한다. 1960년대. 미국에 국한한 1960년대를 말하자면, 마틴 루터 킹, 케네디,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말콤 X를 잡아먹었고, 닉슨과 레이건 같은 잔인한 계부들을 우상화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한쪽 발은 달(하늘에 떠 있는 달, 또는 달과 사냥의 여신 디아나Diana?)에다 걸쳐놓고, 다른 발은 베트남의 정글에 걸쳐놓은 상태에서(여기까지는 책의 224쪽 구절을 조금 변경해 인용) 70년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모든 미국인은 위대한 미국이 동남아시아의 키 작고 비쩍 마른, 거기다가 피부색도 황갈색인 인간들이 복닥거리는 가난한 나라 베트남에게, 위대한 미국의 군대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얻어터질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며, 그들의 군대의 최전선엔 백인이 아닌 흑인들과 중국인들(혹시 한국군 아니었을까?)을 세웠던 건 미군 작전장교 말고는 세상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1968년엔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 언론인, 시민이 펜타곤을 향해 전진하다가 헌병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피떡이 되기도 했고, 같은 시기의 프랑스, 멕시코, 일본 기타 등등의 나라에서도 젊은이들은 자유의 기치를 높이 든 채 미국의 젊은이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얻어터지고 있었다. 물론 멕시코 같은 개발도상국에선 다른 나라들하고 조금 달리 박달나무 육모방망이 대신 기관총 세례를 받기도 했지만. 이런 60년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밤. 화자 ‘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지만 문학을 위한 기재임을 주장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연인을 쫓아다니기에 바쁜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아내와 함께 자리를 빛내주고 있었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국의 여배우, (스페인 말고 멕시코에 있는)산티아고에서 서부영화를 촬영하고자 날아온 다이아나 소렌이 등장해버리는 거다. 직감적으로 남편새끼가 저년에게 넋이 나갔음을 알아챈 아내가 “너무 늦지 않게 오세요.” 먼저 자리를 피해줌으로 해서 ‘나’는 다이아나에게 접근했고, 다이아나가 묵고 있는 스위트룸을 방문했으며, 샹파뉴 한 잔을 마신 다음, 했다.
 이후 두 달 동안 다이아나와 푸엔테스가 벌이는 엽색행각. 그리고 이 책 <다이아나>를 쓴 1990년대 초반에 당시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책은 구성된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간단하겠다고 생각하시지? 천만의 말씀.
 조금 추운 기가 있는 깜깜한 밤. 미국 중서부 아이오와 주 제퍼슨빌의 원형극장에 달과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려. 응? 그래, 자 내 치마를 들어 올려봐. 아래를 부드럽게 만져줘. 이제 달이 뜨면, 너는 나의 처녀성을 빼앗아가는 거야. 그녀의 첫 경험은 다이아나에게 평생의 그림으로 박혀있으며, 수렵의 여신답게 세상의 많은 남자를 사냥하면서 언제나 처음, 달이 뜨기 시작할 때를 상상한다. 다이아나. 말 그대로 외로운 사냥꾼으로 인생을 살았던 것. 근데 이게 다? 한 번 더, 천만의 말씀. 다이아나가 ‘나’에게 바랐던 것은 작가 또는 교수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 작가 또는 교수는 자신의 법적 남편인 프랑스 사람 이반 그래배트에게서 너무 많이 봐왔고, 그래서 애당초 질린 상태. 그녀는 마치 앙드레 말로 같은 능동적 ‘진영’을 동경해왔던 것이었는데 ‘나’는 모든 것을 문학적 기재로만 관찰할 따름일 뿐이다. 그러니 속궁합이 아무리 좋을지언정 그게 오래 가겠느냔 말이지. 원래 잘 쓴 연애소설치고 관계가 행복하게 끝나는 거 별로 없다. 그러니 독자가 이해해야할 밖에.
 혹자는 주인공 ‘나’의 이름이 작가의 본명인 카를로스 푸엔테스인 것을 보고 이 책이 자기 이야기일 것이라 짐작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읽기엔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자기 얘기를 뼈대로 하겠으나 작가는 별로 길지 않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미국과 멕시코의 정치상황과, 문학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다 풀어내고 있는, 다분히 문화비평적 서술로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비록 책 속에 노골적인 성애 묘사가 몇 군데 있지만 그렇다고 한국어 제목을 <미국은 섹스를 한다>로 뽑는 거 자체가 야만스럽다. 원래 제목이 얼마나 좋으냐 말이지. <다이아나 또는 외로운 사냥꾼>. 책 좋아하시는 분들, 책 좀 읽어보려 하시는 분들에게 요새 말로 강추할 목록 속에 올려야할 재미난 소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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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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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카잔차키스는 그만 읽어야겠다. 다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나중에 시간 나면 한 번 더 읽던지 하고.
 전에 읽은 <크노소스 궁전>이 정말로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이야기이고, <성 프란체스코>가 정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적은 것처럼, <알렉산드로스 대왕> 역시 진짜 위인전이다.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어려서 정여사께서 사주신 위인전, 얼마나 읽기 싫었는데 이제 나이 들어 새삼스레 위인전? 그것도 서른세 살로 죽을 때까지 그냥 남의 나라 쳐들어가기에 여념이 없었던 침략자에 불과한 알렉산드로스를 영웅으로 칭하는 것을? 아이고 머리야. 이 양반 죽은 다음 한 삼백여 년 흐르면 서른세 살 먹은 또 다른 한 청년이 등장하여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었다가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오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 젊은이라면 혹 몰라도 한 명의 침략자를. 흠.
 알렉산드로스 왕 아시지? 일찍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발이 됐던 지금의 알바니아 바로 오른쪽 옆에 붙은 산동네이자 불가리아 왼쪽의 조그만 나라,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와 더불어 근대사 이후 숱한 전쟁의 싸움터가 되어 변변하게 남아있는 유적도 별로 없는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 혹시 몰라 부언하자면, 지금의 마케도니아 사람들과 알렉산드로스 왕 시절의 인종은 조금 다르다는 거. 혹시 모른다, 완전히 다를지도. 지금은(아니, 1차 세계대전 훨씬 이전부터) 소위 슬라브 체인이라 일컫는 남 슬라브계 사람들이 대다수 또는 거의 전부를 차지하지만 카잔차키스가 쓴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는 (지금은 흔히 라틴 계열을 일컫는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종족의 무리로) 스스로를 완벽한 그리스 인이라 여겼으며, 자신들을 야만인이라고 비하하는 아테네의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에게 야유를 보낼 정도였다. 그들은 남쪽 그리스 사람들보다 더 검소했고, 부지런했으며 용맹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산악지역이라 뭐 먹을 게 있어야지. 당연히 한창 시절의 스파르타를 능가하지는 못했겠지만 이미 스파르타는 늙은 귀족 여인처럼 힘은 다 빠지고 자존심만 남은 처량한 신세.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마케도니아와 필리포스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시기를 잘 만난 거다. 3차에 걸친 페르시아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리스에 마지막으로 테베가 왕초를 먹고 있었는데 거기도 심한 내분으로 비실거리고 있었으며, 페르시아 역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고질적인 내전으로 크세르크세스 시절 같은 위엄을 지니고 있지 못했으니, 이른바, 아니, 이렇게 얘기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틈새시장? 혹은 블루 칩? 하여간 이 비슷한 것이 생겼거나 가능했다는 완전 아마추어의 의견.
 동양에서 가장 유명한 말horse은 동탁, 여포, 조조의 손을 거쳐 관우가 죽을 때까지 타던 적토마, 서양에선 열다섯 살 먹은 알렉산드로스 왕자가 누구도 길들이지 못한 완전 검은색의 커다란 야생마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옷을 훌렁 벗고 올라타더니 질풍처럼 들판을 질주했던 부케팔로스. 근데 16세기 화가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는 그림 <부케팔로스를 길들이는 알렉산드로스>에서 왕자는 옷을 근사하게 입었고, 말도 백마다.

 

 

 그러니 작가나 화가나 알고 있던 건 그냥 알렉산드로스 왕자가 말 한 마리를 길들였다는 건조한 내용뿐이었으며, 거기다 자기 상상력을 보태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린 듯.
 책의 내용은 한 깡패 같은 왕이 있어서 마케도니아 산골에서 시작해 그리스를 먹더니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페르시아를 침공하고, 이어서 지중해변을 따라 아프리카의 이집트까지 침공, 다시 페르시아로 접어들어 그 위대했던 나라를 완전히 거덜을 내고, 내친 김에 저 사마르칸트 고원, 그러니까 아프가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지역까지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한 왕임을 선언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드디어 인더스 강과 히다스페스 강을 넘어 인도에 도달해 코끼리 구경도 했다는 거. 이쯤 되면 야망이 아니라 집착, 그걸 넘어 강박증, 즉 정신이상 수준의 인간으로 봐야 한다. 거기서 자신을 최초로 스타로 만들어준 준마 부케팔로스가 전사해버리지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알렉산드로스는 산등성이에 올라 또 동쪽의 광활한 밀림을 보고 침을 흘린다. 하지만 이젠 장군들을 비롯한 전사들이 지쳐 나가떨어져 자칫하면 자신이 골로 갈 수도 있다는 걸 알아채 눈물의 회군을 결정한다. 그냥 집에 가면 될 것을 숱한 병사를 죽음으로 몰아가며 기어이 이란과 인도 사이의 게드로시아 사막을 건너가는 건 또 뭐야. 그러다가 바빌로니아에 도착해 그리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귀환시키고, 새로이 얻은 페르시아, 이집트, 인도 등 외국병사를 이끌고 아프리카 원정을 구상하던 중 병 들어 죽는 이야기.
 딱 여기까지다. 그렇게 세상을 헤집고 다니면서 애먼 사람들 죽여가며 정복한 땅덩어리가 전부 자기 것이 되나? 아니면 조국 마케도니아, 그것도 아니면 그리스 땅이 되냐고? 저 몽고 대평원까지 정복했던 고구려가 정말 끝도 없는 몽고 평원을 다스렸을, 지배했을 거 같아? 이제 꿈에서 깰 때다. 알렉산드로스가 비록 후손이 없지만 만일 있더라도 그가 이룬 정복활동으로 넓어진 국토를 다스렸을 거 같은가? 천만의 말씀. 역사에는 위대하게 거론이 되지만 내 눈엔 그냥 한 미친 왕이 있어서 인도까지 한 번 갔다가 온 거 뿐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내 의견인데, 만일 누가 알렉산드로스를 탐험가라고 하면 난 위대한 탐험가라는 데 완전 동의. 하지만 영웅이라 한다면, 개뿔 영웅은 무슨. 그냥 쌈 잘하는 쌈꾼이었을 따름이지. (그리스의 영웅을 찬양하려 했던 카잔차키스의) 책에도 나온다. 그리스 문명을 아시아에 전파하려고 시작한 정복활동이 나중엔 거꾸로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문명에 적응이 돼버리는 모습이. 알렉산드로스와 마케도니아 혹은 그리스는 자신의 점령지를 한 번도 다스려보지 못하고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근데 영웅은 무슨, 개뿔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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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변의 피크닉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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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스트루가츠키 형제 이름만 보고, 다른 거 아무 생각 없이 선뜻 사 읽은 책. 기억하시지? 김희선이 쓴 <무한의 책>에서 나오는 ‘신’이자 ‘외계에서 온 존재’인 파충류 형태의 두 관찰자,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개체인 관찰자들의 이름이 하나는 아르카지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스였던 거. 그때 물론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이디어가 기발해서 좀 웃었다. 협업을 해서 SF 소설을 쓴 형제의 이름을 동일한 두 개체로 썼으니 그러하지 않겠는가 말이지. 게다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이란 매우 흥미롭고 재미난 소설의 작가(들)이니 말 하면 뭐해. 이 형제들 이름을 그냥 기억만 하고 있었는데 쇼핑 중에 눈에 이 형제들이 번쩍 띄어 뭐 두 번 생각할 거 없이 그냥 구입해 두 달 스무날이 지난 오늘, 드디어 읽었다. 아시잖아, 책 사놓고 처음 출판한 시기 순서대로 읽는 습관. 이 책이 러시아가 아닌 소비에트 연방이었고,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지 않아 체코슬로바키아였던 1972년에 발간되어 순서가 밀렸을 뿐이지 읽기를 미뤄두었던 건 아니다.
 이 책 <노변의 피크닉>도 외계생명체 이야기다. 하지만 외계생명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하다못해 그 생명체가 13년 전에 왔다 간 걸 제외하고, 어디서 왔는지조차 밝혀지지 않는다. 어디서 왔는지는 백조자리의 알파성과 지구를 잇는 한 지점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그걸 믿는 인종은 한 명도 없다. 심지어 그걸 밝힌 자신의 이름을 딴 ‘필먼 방사점’ 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과학자 밸런타인 필먼 박사마저도.
 정확한 건 아니지만 상당한 근거를 가지고 말하자면 13년쯤 전에 상당한 지능을 갖춘 외계인이 지구에 무슨 목적인지 하여간 와서 잠깐 놀다 갔다. 마치 우리가 어느 날 차를 몰고 캠핑장에 가 바비큐 파티를 곁들여 실컷 놀다온 것처럼. 그런데. 시대가 1970년대 초반. 경치 좋은 동네 가서 밤새(사실은 ‘밤새’는 구라다. 우리나라에선 거의 모든 국토가 밤 열두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는 통행금지라서 밤새 놀지는 못했으리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난 다음날, 늦잠을 자고 깨서 아침밥 해먹기도 귀찮아 어이, 어이, 일어나. 아침 대신 가다가 삼백집에 들러 콩나물 해장국이나 한 그릇씩 하자고, 할 거 아닌가. 그래 대충 정리하고 (21세기가 아니라 1970년대 초니까) 쓰레기도 그냥 함부로 막 버려 서둘러 뜬 자리엔 안주 찌꺼기, 소주 반쯤 찬 병과 빈 병들, 삶은 닭다리, 옛날 헌 차에서 흐른 엔진오일, 깡통따개, 병따개에다가 혹시 알아, 쓰고 던져버린 콘돔도 두어 개 있었을지? 심지어 순금반지 하나도 끼어 있지 않다고 누가 얘기할 수 있을까. 물론 스무 걸음 쯤 떨어진 곳에 푸짐하게 싸놓은 똥 무더기도 몇 덩어리 있고. 하여간 인간들이 떠나고 좀 시간이 지나 드디어 그곳에서 터를 잡고 사는 생물들. 참새도 좋고 너구리도 좋고 맹꽁이, 남생이도 좋으며, 하다못해 쇠똥구리, 사슴벌레, 하늘소, 물방개 등 곤충들도 좋다 이거다. 이 터줏대감 격인 생물들 입장에서 인간들이 버리고, 놓고, 싸고, 아깝지만 잃어버리고 간 온갖 것들을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어떤 용도의 것인지 도대체 알지를 못하겠는 거다. 달착지근한 콜라가 밑창에 깔린 매끈한 병 속에 망설이지 않고 퐁당 빠진 풍뎅이는, 아무 생각 없이 콜라병을 그냥 놔두고 온 인간들하고는 달리 풍뎅이 입맛에 딱 맞는 설탕물 속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할지 아닐지, 어떻게 아느냐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이 시작한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13년 전에 외계 생명체가 지구의 여섯 곳을 방문한 건 틀림없다. 물론 외계인한테도 한반도는 관심이 전혀 없어서 포함되지 않는다. 거기다가 어떤 용도인지 현생 인류로서는 짐작도 하지 못할 쓰레기와 (책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자면) 똥 무더기를 (탑처럼)쌓아놓고, 어질러놓고 가버렸다. 방문지 여섯 곳을 지구인들은 ‘구역’이라 일컫고 각 구역은 파란 헬멧을 쓴 유엔 평화유지군이 지키기로 지구인들은 합의를 해버렸다. 그중 한 곳이 이 책의 무대가 되는 하몬트. 여기가 어딘지는 모른다. 다만 미국은 아니다. 미국에선 하몬트 출신의 이민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책에 나오니까. 하몬트 출신은 하몬트를 떠나 지구상 어떤 곳을 가든지 정말 재수 없는 일(그냥 재수 없는 일 수준이 아니고 기근, 가뭄, 해일, 토네이도, 역병 등등 거의 재앙에 가까운 일을 포함)이 발생하는 걸 전 세계인이 다 깨달았기 때문. 하지만 인류는 위에서 예로 들은 풍뎅이가 아니라서 외계인이 남기고 간 ‘것’들에 대해 인간 특유의 왕성한 호기심을 느낀다. 그것들을 일단 보호하기 위해 유엔 평화유지군이 파견된 것이고, 평화유지군이 보호한다면 그만큼 중요한 물건들이 구역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어서 물건들이 도대체 어떻게 쓰이는 것인지, 해당 용도를 인류의 발전을 위해 어떻게 응용할 것인지를 궁리하는 연구소도 생겼고, 외계인들의 쓰레기가 그리도 중요하니 그걸 훔쳐 내다 파는 족속들도 생겨났는데, 이 도둑놈들의 무리를 ‘스토커’라 부른다.
 책의 21쪽 각주를 보면 스토커stalker는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사용한 스토커는 접근 금지 지역인 구역에 잠입하여 방문자들이 남기고 간 물체를 가져와 팔아넘기는 자들을 말한다. ‘스토커’에는 ‘남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히는 사람’인 범죄자 외에도 ‘사냥꾼’이란 뜻이 있다”고 해놓았다. 현재 최고의 스토커로는 ‘대머리수리’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버브리지.
 아참. 스토커들이 외계물자를 훔쳐낼 때, 일찍이 콜라병에 빠진 풍뎅이의 예를 들었듯이 해당 물품의 용도와 효과 등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이 그 물자에 접근하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어서 스토커들의 도둑질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주로 빼오는 물자는 그것의 정확한 이름과 용도를 몰라 그냥 편하게 깡통, 옷핀, 배터리, 팔찌, 스펀지, 근질이, 탄산진흙, 도자기함 등등으로 부른다. 비싼 값에 거래되는 이런 것들을 훔쳐 내오는 스토커로 엄지손가락 톰, 주인공 빨강머리 레드릭 슈하트, 두꺼비자식, 뼈가죽, 쉰목소리, 안경잡이, 철면피, 푸들 등이었으며 책을 쓰는 시점에는 거의 다 죽었다. 설탕물에 빠져 죽은 풍뎅이처럼 각 물체들이 포함하는 알려지지 않은 힘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도 역시 죽음으로 보상을 해야 했기 때문에. 물론 살아남는다 해서 안전한 건 아니다. 외계물건의 내재적인 힘은 가끔 인간의 생식세포에도 영향을 주어 처음에는 틀림없는 인간이었다가 자라면서 짐승의 단계로 퇴행하는 아이를 생산하기도 하는 것.
 SF 소설의 매력은, 나처럼 평소 SF를 특별히 챙겨 읽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하기로는 특히, 박진감 넘치는 인간박멸작전과 대 외계인 항쟁운동을 기대할 텐데, 이건 전혀 아니다. 높은 수준의 과학을 갖고 있는 외계 생명체는 아무 생각 없이 (인간이 유원지의 풍뎅이를 고려하지 않듯이) 그냥 피크닉 와서 한 판 놀고 갔을 뿐이다. 졸지에 원주민 또는 아마존의 석기시대 인으로 변한 인류가 고급한 문명을 앞에 놓고 벌이는 몬도가네. 그걸 구경하는 일.

 이거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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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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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보코프는 이 책 영어 판의 (오만한)서문에서 소설의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를 그의 대표작 <롤리타>의 험버트와 닮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반면 독자는 소설 속에서 나보코프 스스로가 독자로 하여금 그리 생각을 하게끔 수시로 도스토옙스키를 거론하여, 저절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연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위의 표현으로 책의 성격은 대강 나왔다. 범죄 소설이며, 험버트와 닮았다는 건 게르만이 악당이라는 숨길 수 없는 사실. “그렇지만 험버트에게는 일 년에 한 번 땅거미가 질 무렵 거닐도록 허락된 낙원으로 가는 푸른 오솔길이 있다. 반면 게르만은 보석금을 얼마를 내든 결코 잠시라도 지옥에서 풀려날 수 없을 것이다.”(작가 서문. 240쪽)라고 선언하여, 책의 제목이 <절망>이 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주장했다. 절망Despair을 키릴 문자로 쓰면 영어로 읽는 것보다 울부짖음 소리가 훨씬 우렁차다나.
 반면 역자 최종술은 “나보코프는 ‘예술로서의 살인’이라는 주제 속에 도스토옙스키와 푸시킨의 문맥을 통일시킨다. 게르만의 형상은 라스콜니코프뿐 아니라 푸시킨의 위대한 시인과도 그로테스크한 유사성을 지닌다.”라고 주장하며(260~261쪽) <절망>은 무수한 작품들을 패러디한 완성체로 정의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출판한 책 <죄와 벌>에선 주인공의 이름을 ‘라스콜니코프’라고 하는 것(민음사, 을유문화사 등)과 ‘라스콜리니코프’(동서문화사 등), ‘라스꼴리니꼬프’(열린책들) 등등 많고 많으니 이름 갖고 시비하는 일 없으시기 바람)
 나는 먼저 게르만과 험버트의 비교는 두 작품을 쓴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악당들을 그냥 비교해서 얘기한 것이라고 치부해버렸고, 라스콜리니코프와의 유사성에선 동의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고 나니 비단 라스콜리니코프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는 모든 살인자들과도 어딘지 모르게 유사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여, 역자의 의견에도 동의해버렸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염두에 둔 것은 널리 알려졌듯이 1919년 적군이 내전에 승리하자마자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유럽으로 터전을 옮겨 (작품 활동은 훨씬 전부터 시작했지만)스물두 살부터 “블라디미르 시린”이란 필명을 써 발표한 것, 1934년에 잡지에 <절망>을 연재하고 다음 해에 <사형장으로의 초대>와 1937년에 <재능>을 연재한 다음부터 모국어인 러시아를 버리고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근데 뭐 때문에 이리 구구절절 사연이 기냐고?
 잠깐 스토리 얘기 해드리지.
 위에서 잠깐 비쳤듯이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는 러시아 출신이고 지금 베를린에 살고 있는 초콜릿 사업가인데 싼 가격에 가공기계를 구입하러 프라하에 갔다가 우연히 자기와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여겨지는, 그래서 아주 똑같이 생겼으리라 스스로 최면을 걸어버리는 펠릭스란 사내를 만난다. 자기 생각에 둘이 얼마나 닮았느냐 하면, 한 사람인데 둘로 쪼개진 느낌이라 빈혈이 생길 정도라나? 뭐 약간 미친 듯. 왜 이런 얼토당토 않는 기분이 들었느냐 하면, 지금 초콜릿 사업이 거의 망해가는 수준이라 파산선고가 불을 보듯 확실하여, 비록 불법이라도 한 방에 거금이 생길 모종의 범죄를 구상하고 있어서 그렇다는 내용은 책 중간을 넘어갈 정도면 알 수 있다. 완전히 자신하고 똑같이 생긴(생겼다고 착각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해, 자신이 특정한 곳에 가서 범죄를 벌이고 있는 시간 이 펠릭스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잔머리. 물론 나부코프가 이런 뻔한 스토리 라인을 구성할 인간이 아니라는 건 세상이 다 알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건 직접 읽고 나서 아시면 되는 거니까 그리 하시고, 자, 만장하신 신사숙녀 여러분! 자기하고 완전하게(는 아니고 거의) 똑같이 생긴 인물이 특정 행위를 하는 거, 이것과, 진짜 내 이름이 아니라 필명을 써서 소설작업을 하는 것과, 이방의 나라에서 자기가 버리고 온 조국의 문자로 작품을 쓰는 것하고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는 분 혹시 안 계실까요?
 이 소설이 원래는 러시아 키릴문자로 썼다가, 몇 년 후에 영어로 작가가 직접 옮겼다고 하는데,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스스로가 어려서부터 대단한 문재로 인정을 받은 영재였음은, 너도 알고 나도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이어서 당연히 본인도 알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비교적 젊은 30대 초반에 써서 중반에 출간한 책에도 숱한 말장난, 번역서는 아무리 읽어도 감흥이 없는 그런 말장난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인 독자는 그게 아무리 재미난 거라도 뭐 이해할 수 없으니 그렇다고 치고,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에 개입하여 상상력으로 쓰고 있는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건, 흔히들 뭐라고 하느냐면, 독자가 작가 자신이 겪을 일에 관해서 글을 쓰고 있다는 의미의 수기手記적 기록이라는데, 설마 <절망>을 나보코프의 수기적 기록으로 읽는 종자들은 없겠지. 내가 읽기로는 이건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책상 위에서 머리로만 쓴 소설이라. 주로 러시아 작가들을 중심으로 역자 최종술의 해설처럼 숱한 작품의 주인공들을 떠올릴 수도 있고, 하다못해 작품 중에 작가가 직접 다른 작품과 주인공들을 불러내는 것들 말이다. 거기에 만일 내 생각도 추가할 수 있다면 필명 사용에 따른 효용이랄까 진실이랄까, 조금 확장하면 비단 필명 사용이 아니더라도 자신 즉 작가와 작품이 서로 얼마나 진실한 것인가 하는 고민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주인공 게르만 카를로비치처럼 조금의 쉼도 없이 지옥의 불길을 향한 가시밭길을 가야하는 작가의 숙명도 이야기한 것 아니겠느냐, 하는 백퍼 아마추어의 의견이었습네다.
 (하여튼, 나보코프는 책 읽고 독후감 쓰기 참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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