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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0
세스 노터봄 지음, 김영중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평점 :
* 기독교인께선 아래 독후감이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들께 미리 사과드립니다.
노터봄의 책은 예전부터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여간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 디자인 때문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에 그의 책이 두 권 있는데, 둘 다 표지에 에곤 실레의 그림을 올려놨다. 아시다시피 그가 그린 것들의 공통점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건 그로테스크하다는 거. <의식>의 표지에 쓴 실레의 자화상 역시 벽에다 걸어놓으면 밤에 잠 못 잘 거 같다. 정말 그런 엽기적, 적어도 심히 그로테스크한 내용 아닐까 싶어 선뜻 읽지 않은 것. 노터봄 아니더라도 읽을 책은 얼마든지 많으니까.
그러나 드디어 읽었다. <의식>. 몇 달 전 같은 제목을 한 레슬리 마몬 실코의 책 <의식>을 읽었는데 그 책은 표지에 영어로 “Ceremony”라 써놓았었다. 그래서 의식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노터봄의 <의식>은 네덜란드 말 “Rituelen"이라고 적혀 있다. 네덜란드 말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말이야. 한글2010에 의식이라 써놓고 한자변환 해보자. 衣食(입고 먹는 거), 意識(뇌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 儀式(행사를 치루는 법칙). 솔직히 책 읽어보기 전에 난 두 번째 의식, 즉 意識인줄 알았다.
초장부터 왜 이리 삐딱하냐고? 책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쪽을 보면 “제행무상”이란 단어가 나온다. 제행무상. 불교에선 이걸 “우주의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는 모양이지만, 책에선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 무상하다. 이런 뜻으로 사용한 건데, 그냥 놔두지, 왜 괄호를 치고 안에다가 諸行無裳, "모든 행동엔 치마가 없다", 라고 헛소리를 하느냔 말이다. 이거 여성 차별 아냐? 치마가 없으니 모든 행동은 바지 입은 인간들, 즉 남자들의 것이란 뜻이라고 이해하겠다고 주장하면 어쩔 건데. 번역서를 읽으면서 내가 주구장창 주장하는 거. 한국말과 한국의 문자를 제대로 사용해주라. 읽는 내내 조금 불편한 것이 있었으나, 전체적인 라인을 따라가는 데 큰 문제가 없어서, 그리고 눈 침침해 일일이 따따부따하기 피곤해서 그냥 넘어갔지, 할 말 무지 많았다. 그래, 말을 말자.
왜 열을 내냐 하면, 세스 노터봄의 <의식>이 내가 짐작했던 것과 달리, 매우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기 때문. 물론 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그건 차차 이야기하자. 이 책의 의식은 儀式ceremony를 말한다. 가톨릭 성당에 가면 사제가 붉은 포도주가 든 금잔을 번쩍 들고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의 잔이니, 너희는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는 걸 들을 수 있고, 사제는 (내가 구경해본 미사에 한해 말하자면)그걸 혼자서만 쪽 들이켜고, 거기다 성수를 좀 부은 다음 휘휘 휘둘러 대충 설거지를 하더니 또 홀랑 마셔버린다(유물론자인 내가 보기에, 아 드러!). 그 전이던가 후던가, 하여튼 흰 밀떡을 성체,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몸이라고 하며 신자들의 입 속에 넣어준다. 물론 나 같은 속인들은 밀떡을 얻어먹을 수 없다. 수개월 동안 도 닦고 공부하고, 국영수 시험 치뤄 합격해야지 자격증이 나오고, 자격증이 나와야 비로소 기독교 동포, 즉 형제, 자매로 불리는데, 형제자매들만 맛도 없는 밀떡을 먹을 수 있다는 거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성당 갈 때마다, 옛말로, ‘연봇돈’을 내야하니 절대적으로 교회가 남는 장사다. 이게 현재 좀 사는 지구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의식”이다.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는 거. 불과 지난 세기까지 이 형제자매에 등록된 인간들의 연맹은 자기들을 제외한 모든 인류를 이교도라 지칭하며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형제자매로 만들기 위한다는 핑계를 대고 무차별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해온 거 아냐? 그러니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의식이며 자격증이냐고. 예수의 피와 살을 먹을 수 있는 흡혈과 식인의식 말이지.
세스 노터봄은 여기다가 한 번 삽질을 해버린다. 일본의 다도. 다도는 무슨 뜻인지 아시지? 혹시 해서 한문으로 茶道라고 추가한다. 내 의식意識이 참 독특한 것이, 난 다도마저도 정말 개뿔로 아는 인간이다. 사람 몇 명이 풍로, 또는 사모바르를 둘러앉아서 물을 끓이고 별 희한하고 겁나게 비싸고, 하나도 편리하지 않은 기구를 써, 뜨거운 물로 찻잔을 데우고, 데운 물을 따라 버린 다음, 차를 적당한 온도(섭씨 약 80도)의 물에 넣어 우려서 찔끔 따라 마시는 거. 그 몇 잔 마시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이 차 마시는 의식ceremony가 다 끝날 때까지 무릎을 꿇고 한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생고생. 별 맛도 없는 차 한 잔 마시고 일어나면 다리가 풀려 팽그르르, 지구의 중력이 이렇게 막강한 힘이 있었구나,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의 경험까지. 차 한 잔 마시자고 진짜 별 지랄을 다 한다. 차라는 거, 그거 누가 마셨나? 일본에선 사무라이도 아니고 쇼군과 그의 바로 아래 계급, 칼을 잘 갈았는지 잘 못 갈았는지 시험해보기 위해 지나가는 백성 아무나 무작위로 한 명 불러놓고 단 칼에 목을 쳐볼 수 있었던 개자식들이나 마셨던 거다. 전체 인구의 99.5%한테 차 마실 여유가 어디 있어, 다 굶어죽어 나가는 판국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 밖에 나 할복을 해야 했던 리큐는 자기 수하들과 이 다회茶會(차 한 잔씩 하려고 인간들 모아놓고 별 우습지도 않은 짓을 하는 의식)를 연 다음, “불행의 입술로 더렵혀진 이 잔을 다시는 인간에게 사용되지 않기를”(258쪽) 바라면서 찻잔을 박살을 낸다.
(위 인용, 따옴표 안의 문장 보시라. ‘이 잔’에 붙어있는 조사. 이상하지 않으셔? “잔을 다시는 인간이 사용하지 않기를” 또는 “잔이 인간에게 사용되지 않기를”이 맞는 거 아냐(물론 앞의 문장이 더 바람직하지만)? 이렇게 시비걸기 애매한 자잘한 삽질이 책 전체에 숱하게 깔려있음을 참고 바람. 저 위에서 얘기한 '제행무상'은 하다 하다 너무 해서 한 번 예를 든 거 뿐이다. 어쨌든)
가톨릭 성당에서 신부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성수로 헹궈 홀랑 마시는 예수의 피는 모든 인간의 죄를 덮어쓰고 죽은 예수를 기념하기 위한 부활의 피인 반면에, 일본의 성배 파괴는 죽음의 전조 의식.
좋다. 여기까지. 아니, 하나 더. 여태까지 말한 의식 말고, 다른 의식. 살과 살이 맞붙는 의식의 장면도 등장해 읽는 재미까지 더해주니 이를 어려운 말로 하면 금상첨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