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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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책을 다 읽고 이제 독후감을 쓰려 표지를 넘기니 원래 제목이 나오는데, 제7천(第七天), ‘일곱 번째 하늘’이란다. 원래 제목이 작은 글씨로 씌어있어 모르고 그냥 넘어간 거다. 게다가 서문을 이렇게 해놓았음에야.
 “하느님께서는 /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 손을 떼고 쉬셨다  - 창세기”
 이러니 애초부터 “하느님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뭐 이런 거, 그래서 바야흐로 세상이 창조되고 마지막 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즉 세상을 만드는 일의 완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걸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설레발 꾼으로 이름이 높은 위화가 어떻게 구라를 풀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근데 원래 제목하고는 좀 다른 거 아냐? 무척 유명하지만 정작 전편을 다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는 <서유기>나  <봉신연의> 같은 책에서 나오는 도교적 분위기의 “일곱 번째 하늘”이나 “아홉 번째 하늘”이니 뭐 이런 것들하고 좀 헛갈리는데, 책을 다 읽고 마지막 페이지까지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또 단테가 20세기 중국에 다시 태어나 “지옥”을 고쳐 쓰는 과정에 마치 “림보”, 즉 지옥의 변방에 있는 지옥과 천국의 경계에서 차마 천국의 선을 넘어가지 못한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를 갖지 못한 착한 사람들의 영역”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책의 무대가 바로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이기 때문이며, 그곳은 “물이 졸졸 흐르고 푸른 풀이 가득하며 나무가 무성하고 나뭇가지에는 과실이 가득하고, 전부 심장 모양인 나뭇잎이 심장박동의 리듬으로 흔들리는” 장소로 거기서 유留하는 영혼들 모두 진짜 선량한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지옥의 림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으리오.

 (이렇게 썼는데, 어느 분이 말씀 하시길, '第七天' '일곱 번째 날'이란 뜻이란다. 그러니 위에서 짐작했던 건 틀린 말이다. 참고하시기를.)
 40년, 정확하게 41년 전에 중국의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는 번잡한 기차에서 이미 두 자녀를 둔 만삭의 여사님 한 분이 일이 급해 수화물을 든 사람들을 피해 기차 화장실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기차 화장실에는 위생시설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고, 변기도 그냥 구멍만 뻥 뚫려 있어서 내려다보면 변기 아래로 침목이 휙휙 지나갔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이야 눈으로 보지 않아서 에이, 설마 하겠지만, 198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 열차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만삭의 여사님은 배가 하도 불러 바지를 벗고 쭈그려 앉을 수 없어 지저분한 화장실에 무릎을 꿇고선 힘을 주었는데, 아 글쎄 나오려면 앞으로 한 달을 기다려야 하는 아이가 그만 쑥 빠져버렸던 거다. 아이는 곧바로 달리는 기차 아래 침목으로 떨어지는 불상사를 당했는바,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이제 정거장에서 막 출발하는 때가 되어 침목 위로 털썩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변기 모서리에 탯줄만 탁, 끊어진 채로 차가운 땅 위에 안착을 할 수 있었던 거였다. 산모는 처음엔 자신이 아이를 낳은 지조차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사실을 알고는 그만 혼절을 했고.
 당시 스물한 살의 철도원 양진바오가 밤에 철길 위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가 새끼 새소리처럼 힘없이 삐약대는 게 들려서 가 보니, 발갛고 조그만 갓난아이가 철로 위에 떨어져 있었고 이 아이에게는 놀랍게도 꼬리까지 달려 있었던 거였다. 그래 깜짝 놀라서 얼른 들쳐 안고 마침 며칠 전에 아이를 낳아 젖을 생산해내는 동료 철도원의 아내한테 냅다 달려가 젖을 물려 아이를 살려내니 세상에 이렇게 운이 좋을 수 있었을까. 아이한테 달린 꼬리는 너무 길게 잘린 탯줄임을 알고 밝은 날 의사를 찾아가 잘라낸 다음, 스물한 살의 착한 청년 양진바오가 그냥 데리고 살기로 결정해서 이름을 양페이라 했단다. 졸지에 나이 스물하나의 청년에게 아들이 하나 생긴 턱. 얼른 아이를 고아원에라도 보내야 자신의 인생이 좀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을, 엉뚱하게 얻은 아들 때문에 평생을 홀아비 또는 노총각으로 살게 되니 그것도 인생이다, 인생.
 이런 것들. 그러니까 1960년대 출생한 양페이가 어느 날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식당에 들러 국수를 먹으며 신문을 보고 있는데, 신문에는 날 버리고 부잣집 남자와 결혼한 전처가 권력자의 정부임이 밝혀져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는 기사에 넋을 잃고 있는 순간, 하필이면 식당 부엌에서 뭔가가 크게 폭발하여 인생을 종치고 만다. 그런데, 주인공 양페이가 죽음을 맞는 순간, 당연히 소설은 끝나버리고 마는 게 아니라, 이제 바야흐로 20세기 중국판 <신곡>의 “지옥편”을 시작하는 거다. 그중에서도 림보.
 위에서 얘기한 주인공 ‘나’ 양페이의 출생과 죽음, 전처 리칭과의 결혼과 이혼, 양아버지와 이웃 젖어머니와의 가슴 절절한 부성과 모성, 서로 사랑하는 가난한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애정 등은 이제 죽어 일곱 번째 하늘, 림보에 도착한 영혼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밝혀지는 이야기들이다. 위화는 놀랍게도 20세기 중국의 <신곡>, 달리 말하면 ‘어른들을 위한 우화’를 쓰기로 작정을 했다. 모든 이들은 사랑, 그것도 지독하게 진실한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작중에 쉼 없이 20세기 후반 중국의 부패와 부조리, 사회적 폭력 등을 적절하게 포함시켜나가기도 한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소설을 쓰는 직업인이기 때문에 문제들을 표현하기만 하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나 행동은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중국 소설들의 문제점이기도 하지만, 어쩌랴, 그들에게 ‘그럼 뭐가 중헌디?’ 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생존”이란 답이 나올 터이니. 기억하시라. 내가 읽어본 그의 전작들로 감을 잡아 말씀드리자면, 위화가 유토피아로 여기고 있는 모습은 문화혁명 전의 순진한 공산주의 시절하의 중국이 아니겠느냐, 하는 거. 그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의 매운 손톱이 지나간 중국의 도시와 농촌은 언제나 큰 한 부분이 상당히 궁핍하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서 벌어지는 영혼들의 이야기. 다른 말로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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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벽 트루먼 커포티 선집 5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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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콜드 블러드>의 작가가 Truman Capote 트루먼 커포티('카'포티 또는 '캐'포티일 거 같은데 왜 '커'포티라고들 쓰는지 모르겠다)가 1943년부터 1982년까지 완성한 단편소설 스무 편을 실었다. 단편선이어서 작은 분량의(두껍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했었다가 책을 펴보니 레이놀스 프라이스가 쓴 서문을 포함해서 505쪽이다. ‘시공사’에서 찍었다. 그래, 이런 게 책이지. 요새 스무 편의 단편을 모아 500쪽을 넘기는 책을 보기 힘들다. 다른 몇몇 메이저 출판사 같았으면 두 권으로 분책했을 확률이 높다. 시공사도 고민을 해봤을 텐데 원래의 책 그대로 한 권으로 만들었다. 작가도 이미 세상을 떠 굳이 원작자의 눈치를 봐야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 분책의 고민도 그만큼 더 심하지 않았을까?
 단편 소설집은 독후감 쓰기가 난감하다. 물론 김승옥이나 오정희의 절창들이 섞여 있으면, 예를 들어 <서울, 1964년 겨울>이나 <중국인 거리>에 집중해서 독후감을 만들어나가면 괜찮겠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없을 땐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변명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들이 수준이 낮다는 얘기, 아니다. 먼저 나는 (단편)소설의 수준을 논할 자격과 소양이 되지 않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더구나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트루먼 커포티의 작품을 읽고 수준 운운하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장편과 달리 단편은 짧은 텍스트 안에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의 의미와 분위기, 까다롭고 배타적인 은유의 맛에 동감해야 진짜 해당 작품을 읽었네, 할 수 있는 것이라서, 1940년대 중반 미국 남부지역의 전반적 공기를 극동아시아 변두리 지역 출신의 한 이방인이 그것도 번역된 소설을 읽고 해당 작품에 공감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남부 미국에서 1940년대 중반에 벌어진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내용이라면 언뜻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카슨 매컬러스. 매컬러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만큼의 고딕 적 요소는 아니지만 비슷한 분위기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으로 그냥 갈피만 휘적휘적 넘기고 말았던 레이놀스 프라이스의 서문에서 정말로 카슨 매컬러스를 짚어나가는 걸 읽고 기분이 조금은 삼삼했다(아직도 하찮은 거에 우쭐거리는 모습이라니!).
 책에 실린 스무 편의 단편소설들 가운데 중요한 한 부류가 자신의 소년시절 이야기임에 틀림없는 비슷비슷한 작품들이었다. 부모가 어려서 세상살이를 모르는 채 결혼을 해 주인공을 낳고, 서로의 개성과 삶의 방향이 다르다는 걸 알아차려 헤어지기로 결정을 한다. 그리하여 주인공을 외가 쪽 친척들 가운데 나이든 미혼의 남자 하나, 역시 미혼의 여자 셋이 모여 사는 남부의 (부르주아 수준까지는 아니고)중산층 저택에 의뢰해서 키워주기를 부탁한다. 주인공은 친족 간 촌수를 몰라 이들을 그냥 나이든 사촌이라고 칭하는데, 이중에서 늙은 개를 키우는 아주, 아주, 아주 선량한 ‘숙’이란 이름의 나이든 여성과 돈독한 우정을 맺으며 지역사회에서 (즉, 이방의 꼬맹이로)성장하다가 기숙학교로 떠나기까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쓴 단편들. 나이 든 ‘숙’사촌의 진짜 이름은 뭐였을까? 희숙? 창숙? 영숙? 진숙? 정숙? 미숙? 신숙? 기숙? 재숙? 혜숙? 성숙? 문숙? 상숙? 인숙? 동숙? 명숙? 한숙? 남숙? 화숙? 부모. 그 가운데 특히 어머니의 정을 모르고 유년을 거쳐 소년기를 마감하는 ‘나’는 트루먼 커포티의 삶을 소개한 짧은 글만 읽어도 금방 작가 자신임을 알 수 있는데, 그래도 ‘나’는 숙이란 이름의 사촌으로부터 항상 겸손하고, 검약하고, 자애롭고, 독실한 기독교도 적인 배려를 받고 자랄 수 있어서, 정말로 친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시골을 떠나 나름대로 대도시인 뉴올리언스를 방문하는 것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랜만에 친아버지를 만나는데 그게 반갑지 않느냐고? 충분히 그럴 걸? 이제 막 소년으로 접어든 아홉 살 꼬마, 우리나이로 열 살 꼬맹이가 자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본 적도 없고, ‘나’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 보낸 편지 한 장 받은 적 없던 친아버지란 인물은 그냥 얼굴 아는 성인 남자 이상이 아닐 것이다. 바로 그런 유소년 시절을 따듯한 남부 시골 지역에서 보낸 건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트루먼 커포티에게 주어진 선물일 수도 있었지 않을까.
 그 외 세계대전 중 미국의 도시에서 만난 군인들처럼 차마 내놓고 당신들과 더 이상 엮이기 싫다고 얘기하진 못해도 마음속에선 그들을 심하게 경원하는 사람들의 진짜 고백, 예전의 좋은 시절을 떠나보낸 친구가 등장해 자신의 물품들을 떠넘기고 돈을 얻어가는 장면들, 이런 것들도 비슷한 내용으로 두어 작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문제는 앞에서 얘기했듯 그런 분위기를 공감해서 책에 빠져들 수 있느냐 하는 건데, 내 경우엔 나름대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임에도 다리를 치며 참으로 멋있는 단편이다, 정말 내 취향하고 딱 맞는다,라고 감탄할 만한 건, 유감스럽게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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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제6회 무명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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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정말 아름답게 읽고 나서 이이의 작품을 검색해서 고른 책. 2002년에 쓴 <나의.....>가 데뷔작인데 그걸로 덜컥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 만 서른 살에 잔치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수유를 하고, 아이가 거의 친정엄마 손에 자라는 동안 (내가 읽기로는)고통스럽게 쓴 작품이 2004년에 발표한 <달의 제단> 아닌가 싶다.
 전작에선 난독증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글씨를 읽지 못하는 한동구가 똑똑하고 매사 똑 부러지는 어린 동생 영주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사람을 울리는, 한겨울의 난로 같은 이야기였는데, <달의 제단>은 영남지방의 한 종갓집에서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뜨겁게 써놓았다.
 주인공 조상필은 서안 조 씨의 중시조 양정공 조춘억의 17대손으로, 대문간채 열 칸, 행랑채 열두 칸, 헛간채 열 칸, 안채 여덟 칸, 사랑채와 서고 열네 칸, 별채 여섯 칸에다가 부속으로 사당과 별묘, 연못과 정자까지 딸린 저택 ‘효계당’에서 산다. 이 큰 저택 효계당엔 딱 네 명, 조상필과 상필의 깐깐한 조부와, 부엌데기 달시룻댁과 80kg이 넘는 거구의 지체장애자 달시룻댁의 딸 정실이만 함께 산다. 그러니까 숱하게 많은 방들이 그냥 비어있으며, 일 년에 수십 번 되풀이되는 여러 형태의 문중제사나 되어야 한 번 열릴 뿐이다. 좀 이상하지? 이토록 큰 저택에 안주인이 없다. 상필의 칠칠한 조모는 일찍 돌아가고, 양정공의 16대손이자 부모로부터 못생긴 외모만 골고루 빼다 박은 상필의 아버지는 부친이 정해준 여인과 혼례를 올렸으나 옷고름 한 번 끌러주지 않고 서울로 내빼버렸다. 거기서 중등학교 미술교사와 혼인신고를 해서 상필을 낳고는 잘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어느 새 돈 많은 아버지와 자신의 법적 아내(상필 엄마)의 화끈한 거래로 인해 다시 효계당으로 잡혀오는데, 그녀가 날 버렸다는 자괴감이 들었는지 아니면 평소에 심한 우울증 증세가 있어서 그랬는지 콱 자살해버리고 말았다. 서안 조 씨 집안에선 상필의 부모가 혼인신고를 했건 말았건 어쨌든 가문에서 정해줘 혼례를 올린 바 있는 배필 ‘해월당’ 여인을 정실부인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니 우리의 주인공 조상필은 이른바 서얼. 즉, 집 밖에서 낳아 데리고 들어온 서자인 셈이지만, 16대 종손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할아버지로부터 17대 종손으로 인정받게 된 인물이다. 남자가 저고리 끈도 풀어준 적이 없는 숫처녀를 어머니라고 칭하며 자랐으니 이 여인의 길지 않은 평생도 참 냉랭했을 것이란 건 척 봐도 알 만하다.
 주로 우리나라 소설에서 보면, 실제 인간사에선 잘 모르겠지만, 주인공들이 종종 자신의 출생과 비슷한 장면을 만들어버린다. 이 책의 주인공 조상필 역시 마찬가지. 아주 못생긴 얼굴에 80킬로그램이 넘는 살덩어리, 선천적으로 발목이 유난히 약한 장애자이며 늘 열 손톱 아래가 새까맣게 더럽혀진 상태로 냄새를 풀풀 풍기는 정실. 어려서 어머니라고 불렀던 매정한 해월당 부인 대신 엄마처럼 잔정을 듬뿍 주며 상필을 키워준 ‘달실 웃댁’이란 뜻의 ‘달시룻댁’의 친딸, 동갑나기 정실을 덮쳐버린다. 이것 가지고는 소설의 소재로 한참 부족하다. 좀 모자란 여자라서 어려서부터 동네 아저씨나 심지어 친척 아저씨, 노인네들의 성적 노리개로 쓰이곤 했던지라 그냥 덮치기만 해가지고는 약하다. 스물세 살이 되도록 생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정실, 잠깐 왜 이 아가씨 이름을 ‘정실’이라고 지었을까? 정실부인 할 때의 ‘정실’의 의미는 없었을까? 하여간 그런 정실이 조상필과 맺은 숱한 관계를 통해 임신을 해버리고 마는 것.
 내용 소개는 여기까지.
 심윤경은 이 책을 쓰기 위해 참 여러분야로 공부를 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이는 애초 서울대 분자생물학과를 나온 이과 출신이다. 1972년생이면 국어시간에 고문古文을 배웠을까? 적어도 이과에선 배우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안 조 씨 문중의 산소를 옮기는 도중에 발굴한 몇 대 위 소산 할매가 언문으로 쓴 서찰을 당시 고어체 비슷하게 인용/사용하고 있다. 이 편지가 바로 서안 조 씨, 뼈대 있는 가문으로 근동에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의 숨겨진 추악한 면, 주로 여성을 희생시키는 증거로 사용된다. 조상들에 의하여 벌어진 이런 추악한 행위가 현대에 이른 종갓집의 마지막 수행자인 조상필의 조부 조일우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아니, 조일우는 조상들의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고 싶었을까.
 심윤경은 고어체를 사용뿐만 아니라 각종 제사에 쓰이는 축문 같은 것을 자연스럽게 사용하려 노력하다보니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법을 포기하고 지난 세기에 쓴 것 같은 글을 만들어냈다. 내가 읽기엔 책의 성격상 오히려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읽는 사람 마음대로니까 이 의견과 다를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읽는 도중에 혹시 이 소설이 이러저러한 종결부로 가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겼으며, 아니나 달라, 예상한대로 아주 정확하게 끝을 맺고 말았다. 무슨 뜻인가 하면, 작가 심윤경이 너무 쉽고 편한 결말을 선택한 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는 말씀. 해소 또는 파국의 결말보다는 이 책의 경우 결론을 독자에게 선택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확장해주는 편이 훨씬 좋았지 않나 싶은 건데, 사실 이런 의견은 내놓고 할 말은 아니다. 결말의 결정이야말로 작가의 고유 권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독자가 읽기에 그랬다는 거만 참고하면 좋겠다. 심윤경의 다른 장편소설도 또 읽어봐야겠다. 재미난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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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다른 곳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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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1936년생. 이 책을 쓴 시점이 2003년. 67세. 이후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여 심지어 83세인 올해, 2018년에도 <이웃>이란 작품을 썼다, 라고 위키피디아에 나온다.

 

 이렇게 생겼다.

 

 외국 작가들 보면 도무지 은퇴란 걸 모른다. 어느 시점이 되면 글을 쓰는 힘이 달리기 시작하는데, 그때가 은퇴할 시점이라고 조정래의 어느 인터뷰에서 본 적이 있다. 그건 우리나라 작가들한테만 해당하는 건가?
 아무튼, 이 장편소설 <천국은 다른 곳에>. 요사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을 읽어보면 1973년에 이미 발표한 <판탈레온 특별 봉사대>에 나오는 종군 위안부 부대는, 이 양반이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저질러진 종군위안부를 모티프로 삼아 썼나 싶었는데, 아니다, 1834년 페루 내전 당시 세계 최초로 군인들의 처나 애인, 창녀 등을 모아 정규군으로 편성한 위안부대가 정말로 있었으며, 남편이나 애인이 총에 맞아 전사하면 그들의 무기를 대신 잡고 아주 용맹하게 전투에도 임했다고 나온다. 요사의 작품을 크게 두 개로 분류하자면 이른바 정치소설과 에로티시즘 소설로 나누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 책은 다분히 정치 소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인데, 무대는 라틴 아메리카가 아니라 프랑스의 공산주의 운동이다.
 여기에 흥미롭게 등장하는 여인이 플로라 트리스탕. 실제 인물이다. 이 꽃(플로라) 트리스탕은 이렇게 생겼다고 구글 이미지에 나온다.

 

 

 스페인 아빠와 프랑스인 엄마 사이에 태어났으나,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려 엄마 아빠가 혼인신고를 하지 못해 사생아 신분으로 떨어진 여자. 만 18세가 되어 열 살 많은 인쇄업자 앙드레 샤잘과 혼인해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낳는다. 맏이는 죽고, 둘째는 샤잘이 키우고, 셋째 딸을 엄마에게 맡긴 다음 진짜로 대서양을 건너 페루로 가 삼촌 돈 피오 트리스탕을 찾아 친족관계를 증명해달라고 하는데, 페루의 대표적 부자이지만 원래부터 쪼잔하기 이를 데 없는 삼촌은, 만일 친조카임을 증명해주면 플로라에게 거액을 상속해줘야 하는 부담 때문에 그냥 넌 사생아일 뿐이야, 라고 단칼에 물리친다. 네이버 인물백과에 나오는 얘기다. 소설 속에선 딸을 어머니가 아니라 여동생에게 맡겼다고 하지만 이 정도의 차이는 그냥 넘어가자.
 더 놀라운 것이 19세기 초중반에 여성해방과 노동조합 운동에 몰두하던 그녀가 41세 되던 1844년, 프랑스 전국을 혼자(19세기 중반에 여성 혼자 여행하는 자체가 이미 큰 센세이션이었던 건데) 순회하며 자신의 운동과 신념을 널리 퍼뜨리기로 작정을 하고 전국공연에 나섰다는 거. 그리하여 디종, 리옹, 생테티엔, 아비뇽, 마르세유, 툴롱, 님므, 몽펠리에, 베지에르, 카르카손느, 보르도 등지를 다니면서 궁극적으로 노동자와 여성의 연대를 통한 해방을 주장하고 다닌다. 숱한 동조자와 비난자, 그리고 당국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가며, 태생부터 인간 말종이었던 남편이 쏜 총알을(빼지 못해) 심장 옆에 달고 다니면서 대장암이 자궁과 척추까지 번져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이는 왈가닥 아줌마의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프랑스를 누비게 된다. 이 플로라 트리스탕의 활약과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책의 절반. 홀수 장章은 온전히 이이에게 헌정하는 바르가스 요사. 근데 더욱 놀라운 것은, 플로라(꽃) 트리스탕이 또 화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라는 거. 나는 플로라 트리스탕이라는 여인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고(혹시 언젠가 한 번 정도는 들었을지도. 그러나 곧바로 잊었겠지), 이이가 폴 고갱의 외할머니로 사회주의와 여성해방운동에 헌신했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거의 고갱 이야기인 것처럼 읽히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도 이 비슷한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머지 짝수 장章은 바로 고갱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고갱의 자화상. 1888


 아시다시피 ‘미친 네덜란드 환쟁이 놈’과 몇 주에 걸친 동거 또는 작은 공동체 생활 끝에 유럽문명 대신 원시의 발랄함이 아직 거세되지 않은 신천지를 찾아 남태평양 타히티로 거처를 옮긴 고갱. (타히티와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를 혼동하지 마시라. 둘 다 프랑스의 식민지였지만 거리는 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있다) 거기서 열세 살 먹은 작고 발랄하고 똑똑한 현지인 아가씨 ‘테하마나’와 중혼을 하고 얻은 이름 또는 별명이 ‘코케.’ 책은 ‘폴’과 ‘코케’가 번갈아가며 마구 쓰이는데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라. 결코 헛갈릴 일 없으니까. <달과 6펜스>에서 미리 감을 잡았다시피 잘 나가는 파리의 증권 딜러로 부르주아의 삶을 즐기다가, 결코 화가가 될 소명의식도 없이 우연한 기회에 별 볼 일 없는 화가와 친하게 되고 그이와 어울려 그림도 그리고 조각도 좀 하다가 처남한테 준 습작 가운데 하나를 출품했더니 덜렁 최우수상을 먹어, 그것도 팔자지, 그때부터 미쳐 돌아가기 시작하다가, 마누라와 아이들은 친정집 코펜하겐으로 도망가 버리고, 거기까지 따라가 처갓집에 빌붙어 살다 쫓겨나 그야말로 19세기 식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 화가의 삶으로 진입한 고갱. 그가 1892년 4월, 화폭으로 쓸 천 100야드, 그림, 유화물감, 붓, 뿔나팔 하나, 만돌린 두 대, 기타 한 대, 브르타뉴 지방 담배물부리 여럿, 권총 한 정, 입던 옷가지 몇 벌만 챙겨, 아참, 이것도 있다, 책에선 “입에 담기 거북한 병”이라고 묘사하며, 기어이 그 병의 후유증으로 다리에 온갖 염증이 생기고 눈도 멀어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갈 매독까지 함께 짊어지고 배에 오른다. 그곳에서의 생활과 과거 ‘미친 네덜란드 놈’ 고흐에 대한 애증과 “관념 속에서의 화해”와 스스로 화가의 길로 접어들기까지의 생활과, 예술을 하는 고난에 대한 회상을 빼곡하게 채워 놓았다.
 바르가스 요사는 플로라 트리스탕과 폴 고갱 사이의 관계 또는 이어짐에 관해 억지로 말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독자는 외할머니의 혁명과 해방에 관한 지독한 집념과 외손자의 예술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 유사하다는 느낌을 숨기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일찍이 1997년에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 노트>에서 에곤 실레의 그림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그림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게 설명한 바 있는 요사는 이 책에선 고갱의 그림들을 여러 각도로 볼 수 있는 (과하지 않은)설명을 해주었으나, 전작과 달리 책 속에 그림을 삽입하지 않아 안타까웠던 건 어쩔 수 없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혼란스러운 정치판이 아니라(물론 페루 내전에 관해 약간의 페이지를 할애했으나 그건 조족지혈) 유럽, 특히 프랑스의 사회주의운동과 여성해방에 관한 정치적 관점에다 고갱의 그림을 중심으로 요사의 예술관까지 한꺼번에 읽을 수 있는 작품으로, 글쎄 몇 명이나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읽은 요사의 책들 가운데 최상급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출판사 ‘새물결’은 도대체 뭐 하고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책이 품절이라니. 혹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좋아하시는 분들 계시면 얼른 <세상 종말 전쟁> 개정판을 구입하시라. 난 구판, 거의 마지막 고객으로 비싼 값 주고 샀는데, (혈압 오른다!) 이젠 “정가인하” 타이틀 달고 반값으로 나왔다. 어쨌든 이 책의 조속한 중쇄를 기대하고, 가능하면 요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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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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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만 155쪽. 첫 문장이 9쪽에서 시작하니까 사실은 147쪽에 불과한 짧은 소설. 그러나 전체가 딱 두 문단으로 되어 있는데, 두 번째 문단은 이렇다.
 “그 후 지랄 같은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생각 외로 볼라뇨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은 거 같아 새삼스레 이런 얘기 하는 게 쓸데없을 거 같지만, 말씀드리오니, 이 책은 하루 날 잡아 책상에 딱 앉아서 그냥 앉은 자리에서 한 방에 읽어버리는 편이 좋다. 하지만 쉽지 않을 걸? 독자가 읽고자 하는 대상이 다른 작가도 아니고 볼라뇨란 말이거든.
 소설은 죽음의 침상에 누워 죽음의 신이 침대의 맞은편에 기대 짝다리를 짚고 서 있는 걸 감각하면서 자신이 평생을 지나온 행적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냥 조용히 죽고 싶었으나 갑자기 “그놈의 늙다리 청년”이 생각나는 바람에 그리된 것. 이 “늙다리 청년”의 정체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밝혀지는 바, 굳이 여기서 누구라고 얘기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다만 작가가 끝까지 시치미 뚝 떼고 작품을 끝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라는 쓸데없는 의견 하나를 첨부할 뿐이다.
 누가 죽어 가느냐 하면,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라는 이름의 사제. 이이가 신품성사라고 하나, 하여간 막 정식 신부가 된 인물인데, 시도 쓰고, 평론도 쓰는 문학인이기도 하다. 시는 자신의 본명으로, 평론은 ‘이바카체’란 필명으로 발표하며, 젊은 시절에 칠레의 대표적 평론가이자 위대한 시인 네루다와 돈독한 친분을 맺어온 ‘페어웰’과 친하게 지내면서 적어도 평론 쪽으로는 탄탄한 길을 가게 된다. 페어웰. 원어로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으나, 영어 farewell이라면 ‘안녕’ 또는 ‘잘 가’지만 순서를 바꿔 쓰면 welfare, 행복과 복지를 의미한다. 물론 억지인 거, 나도 안다. 근데 왜 억지를 부리느냐 하면, 암만 생각해도 평론가 이바카체는 선배 평론가 페어웰과의 돈독한 유대를 맺으면서 칠레의 대표적 지성이라 일컬을 정도로 칠레 문학계의 큰 나무로 성장해가는 거 같기 때문이다(페어웰의 입장에서 보면 괭이 새낀 줄 알았더니 범 새끼였던 거겠지).
 대개 등장인물, 그것도 주인공으로 등장하면 시대에 대한 정의감이나, 아니면 적어도 시대를 보는 정확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보편적이다. 이 책의 주인공 우루티아 신부이자 화자인 ‘나’는 평화적이고 민주적 투표를 통해 칠레 역사상 최초로 집권에 성공한 아옌데 대통령이 자신의 대통령궁에서 비행기에 의한 폭격을 당하고 기어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이후 피노체트가 권력을 탈취해 군부독재를 펼치는 순간까지 다른 생각 조금도 안 하고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등등 그리스 고전문학에 심취해 있다가, 사태가 어쨌든 진정이 되자 이렇게 말한다.
 “참 평화롭군. 나는 일어나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정말 조용하군. 하늘은 파랬다. 여기저기 구름이 표식을 해놓은 그윽하고 깨끗한 하늘이었다. 멀리 헬리콥터 한 대가 보였다. 창문을 열어 둔 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칠레를 위해, 모든 칠레인을 위해, 죽은 자들을 위해, 산 자들을 위해.” (99쪽)
 심지어 독일 점령하의 파리에서 칠레 문학인이 자랑스러운 만남으로 묘사하는 인물이 누군가 하면, 나도 <강철 폭풍 속에서>를 읽고 독후감 한 번 쓴 바 있는 에른스트 윙거다. 1차 세계대전의 독일 군대의 영웅이자 예비역 대위. 윙거와 몇 번 만난 것을 몇 십 년이 흘러도 자랑스러운 기억으로 페어웰은 주인공 ‘나’ 우루티아 사제에게 우쭐거리며, 우루티아 역시 아무런 비판 없이 그럴 듯하다 인정하고 넘어간다. 윙거가 파시스트는 아니었다지만 평화주의자도 아니었잖은가. 더구나 점령지에서 1차 대전의 영웅을 만났음에야.
 뭔가 좀 이상하다. (나도 잘 아는 건 아니지만)칠레의 현대사를 전혀 모르는 독자들이 이 장면을 읽었다면, 아옌데라는 못된 대통령을 학식이 뛰어나고 머리 좋고, 결단성 있는 피노체트 장군이 몰아내고 칠레에 평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는 에피소드. 이건 실화란다. 아, 그런데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앞으로 읽을 분들께 이 실화를 얘기해도 좋은지 좀 생각을 해봐야 한다. 아니다. 적어도 공개적으로 독후감을 쓰는 한, 이 에피소드를 밝힐 수는 없다. 그냥 책을 읽어가며 저절로 속아 넘어가게 놔둬야 한다.
 그러나, 다시, 아니다. 이 책은 애초 칠레 사람들 읽으라고 쓴 거 아닌가. 칠레 사람들은 처음부터 내가 지금 숨기고자하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책을 읽는 순간, 아 그 사건을 말하는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럼 나하고 반대로, 처음부터 에피소드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겠다. 좋다.
 피노체트 치하에, 별로 잘 쓰지 못하는 여류 소설가가 있었다(‘여류’라고 칭하는 건 이유가 있어서다. 이 단어가 마땅하지 않은 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별로 재능이 없는데도 잘 나가는 인물. 어디가도 이런 사람들이 적어도 하나는 꼭 끼어 있으니 큰 불만은 없다. 나도 없고, 이 여류와 친하게 지내던 우르티아 신부도 그랬다. 이 소설가의 남편은 미국의 대기업에 다니는데 아르헨티나와 칠레에 새로 지점을 설치하기 위해 파견 나와 있는 상태로 산티아고에서 저택을 하나 구입해 늘 밤새도록 파티를 벌이고는 했다. 문학계의 온갖 권력들을 다 불러 모아 (통행금지 시간이 있는 관계로)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시를 읊고, 웅변을 하고, 기껏 먹고 마신 걸 토해놓았으니 어찌 이 여류를 위하여 주례사 비평을 남발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이제 굳이 ‘여류’에 힘을 준 이유가 나온다. 남편이 문제라는 의미다). 사실 남편은 미국 CIA와 칠레 국가정보국을 위해 일하던 ‘마이클 타운리’라는 실제 인물이고, 이 저택의 지하 골방에선 군부독재 시절의 칠레와 미국의 이익을 해칠 수 있는 위험인물에 상당한 수준의 고문을 자행하고 있었던 거다. 지하실에서는 선한 칠레인이 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손상된 채 더러운 몸으로 사지가 묶여 있는 동안, 휘황찬란한 볼룸에선 주요 문학인들이 모여 온갖 고귀함을 뽐내고 있었던 거다. 문제는 이 칠레인 여류 소설가 역시 파티의 시간에 자신의 발아래에 한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
 볼라뇨는 이렇듯 칠레 문학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을 숨 막히게 쏟아내고 있다(전체가 한 문단이며, 오직 사용하는 부호는 쉼표와 마침표 딱 두 개 밖에 없다). 기꺼이 군부와 독재자에게 협조하며, 좋아할 만한 이야기들로 입술을 적시며, 최고의 미덕인 문학인으로서의 성취를 위해 영혼을 팔아버린다. 이런 더러운 문학인의 모습을 치명적인 은유로 서슴없이 확 비꼬아버리는 볼라뇨. 우리나라에도 이런 작가, 아니, 이런 작품이 몇 개는 나와 줘야 정상 아닌가? 나도 참 답답했다. 볼라뇨의 주인공은 내가 아는 칠레 현대사, 특히 아옌데와 피노체트 치하에서의 상황과는 달리 엉뚱한 사고思考와, 실망할 수밖에 없는 행위/협력과 대중을 향한 시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책의 페이지를 넘기면서 천천히 칠레 문학에 대한 자기비판임을 깨닫게 되면서 풀리긴 했다. 바로 앞에서 말했던 “늙다리 청년”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를 눈치 채는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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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6-05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칠레의 밤은 제가 두번 째로 만난 볼라뇨의 책
이었습니다.

볼라뇨의 모든 책들을 출간해 준 열린책들에
절이라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조국 칠레를 떠나 메히코와 에스파냐에서 주
로 작품활동을 한 볼라뇨는 라틴 문학계의
이단아라는 생각이 듭니다.

루이스 세풀베다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칠레 문학계를 넘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
문학을 지향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나저나 실존 인물인 마이클 타운리는 정말
문제적 인간이었나 봅니다.

Falstaff 2018-06-06 16:09   좋아요 0 | URL
예. 작품을 만드는 방식이 아주 색다른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열린책들의 볼라뇨 전집도 얘기하신대로 칭찬해줄 만한데요, 이왕이면 이런 ˝얇은˝ 책은 다른 작품(예를 들면 <안트베르펜>)하고 묶어서 냈더라면 더욱 좋았을 뻔했을 텐데요.
이 양반은 참, 읽는 각 권마다 진짜 전부 대단한 개성과 유난스런 특별함이 함께 있어서 읽는 맛이 나더군요.

coolcat329 2024-03-20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늙다리 청년 알려주지 말고 그냥 넘어갔으면 더 좋았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같은 생각을 하셨다니 넘 기뻐요 ㅋㅋㅋ 이번에 볼라뇨 책을 처음 읽었는데, 작품 자체에 엄청난 카리스마가 있는 거 같아요. 반골 기질이 강한 작가의 아우라가 독특한 작품과 어우러져 아주 멋진 거 같아요. <야만스러운 탐정들>도 가지고 있는데, 당분간은 바빠서 못 읽을 거 같지만 사두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Falstaff 2024-03-20 21:11   좋아요 0 | URL
그죠, 그죠. ㅎㅎㅎ
저는 볼라뇨 가운데 <야만스런 탐정>이 제일 좋았습니다. 좀 골때리는 작가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