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똥영감의 열반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
류진윈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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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작가 류진원이 1938년생. 우연이겠지만 소설가 다이허우잉과 같은 해 출생했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작품의 시대적 분위기도 비슷하다. 다만 소설가 다이허우잉의 경우엔 그의 수작(나는 놀라운 작품이란 뜻으로 “경작”이라 하고 싶은) 세 편이 다 당대 지식인들이 시대의 격랑 속을 어렵게 헤치며 부패하거나, 절망하여 파멸하거나, 극복하는 광경을 담았다면, 극작가 류진원은 <개똥영감의 열반>에서 소작농 출신의 전형적인 중국 평민이 굴곡 심한 역사에 휩쓸려 뒤집히고 자빠져 결국 제목처럼 열반에 드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류진원의 작품은 이것 하나만 읽었기 때문에 더 깊은 이야기는 하지 못하겠다. 다만 역자의 해설을 읽어보면, 북경대학 중문과를 수료한 후 당의 배치에 의하여 16년 동안의 농촌생활 경험을 지니게 된 작가가 비슷한 드라마를 여럿 만들었다니 그리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중국판 그리스 신화 같은 희곡 <뇌우>를 쓴 차오위가 이이를 아꼈다고 한다. 내가 알았던 중국인 희곡 작가가 차오위와 라오서, 가오싱젠, 딱 세 명이었는데, 이들이 이리저리 엮이는 걸 새롭게 아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독후감 본론으로 들어가, 열반을 한 개똥영감. 열반이라는 불교 용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흔히들 알고 있는 것으로, 중이 죽는 거. 입적入寂과 같은 말. 그리고 다른 뜻으로 “모든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진리를 깨달아 불생불멸의 법을 체득한 경지. 불교의 궁극적 실천 목적”이라 나와 있으며 비슷한 말로, “비르나바”, “대적정”, “멸도滅度”가 있단다. 저 오대산 중턱에 가면 적멸보궁이란 곳이 있다. 불교에선 그리도 열반에 대한 강박/갈망이 있는 걸까. 난 불교에 대해서도 완전 무식하다. 그래도 아무리 ‘열반’이 불교의 완벽한 실천 목적이라 하더라도, 산길을 가다가 중을 만나 두 손바닥을 붙여 합장한 상태에서 고개를 숙이며 “스님, 열반하세요.”라고 인사하면 귀싸대기 얻어터지겠다는 건 짐작할 만하다. 근데 뭐라 인사해야 하나? 소설책 보면 “성불하세요.” 대강 이렇게 말하는 거 같기는 한데. 중이나 신부, 목사들 만나면 그냥 아무 말 없이 생까버리는 게 최고다. 그러면 적어도 나중에 지옥의 유황불엔 떨어지지 않을 듯해서. 근데 가만 생각하면, 불생불멸의 법칙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할 거 같다. 그렇지 않고 산 상태에서 열반에 드는 일은, 해당자가 미치면 되지 않을까? 죽은 상태나 선한 광인의 상태나 그게 그거니까.
 그럼 다시 개똥영감으로 돌아오면, 개똥영감이 죽었다는 얘길까,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불생불멸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일까. 결론은, 별로 두껍지 않으니 직접 읽어보시고 스스로 내시라는 거. 하여간 둘 가운데 하나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작품에서 개똥영감은 미친 상태로 등장하니. 즉, 처음부터 열반의 상태일 수도 있고, 나중에 어찌하여 진짜 열반, 즉 죽음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이 희곡을 1985년 가을에 썼단다. 그럼 독자 혹은 연극의 관객이 작품을 읽거나 본 다음에 각자 알아서 결정을 하게 했을 수도 있다. 이른바 열린 결말이라는 장치. 이때 개똥영감의 나이가 75세 가량이니 어느 열반이든지 다 어색하지는 않다. 더구나 일찌감치 우리의 주인공 개똥영감은 이미 미친 상태, 즉 광인의 반열에 올라 벌써 죽은 공산주의에 의한 해방 전 지주 치융니엔의 귀신과 대화를 비롯한 접신도 가능하며 심지어 함께 술잔도 기울인다. 젊은 시절 치융니엔의 집에서 머슴을 살 때, 융니엔이 개똥이를 문루에 매달고 물에 적신 삼줄을 채찍삼아 등짝의 살점이 떨어져나가도록 때린 적이 있어 이 문루에 대한 애증이 대단하다. 일찍이 일본과의 전쟁과 이어진 내전 당시에 치씨 가문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갔을 때, 개똥이 혼자 남아 드넓은 평야의 익은 곡식을 추수했던 적이 있다. 그리하여 개똥이 혼자 넓은 평야에 가득한 참깨를 털어 항아리란 항아리, 심지어 신발에까지 참기름을 그득하게 재워놓을 수 있었으며, 참기름에 튀긴 꽈배기를 보기만 해도 질려버릴 정도였단다. 그러다가 일본군이 철수하고 백군을 지지하는 환향단還鄕團이 몰려와 졸지에 생사가 왔다 갔다 할 때, 개똥이가 득달같이 달려가 도움을 요청한 곳이 공산당 팔로군. 흠. 그러니 무대는 틀림없이 중국의 북쪽 어느 촌 동네렸다. 그렇게 공산당에 의해 해방이 되자, 치씨 집안은 동네 빈민들한테 균등하게 배분이 되고, 치씨는 당연히 마을의 가장 저급의 출신성분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때, 개똥이는 치씨 가문의 부동산 가운데 애증의 대상이었던 문루를 차지한다.
 전쟁 중에 땅을 포기하지 않고, 거기에 자신의 노력을 더해 작지만 좋은 땅을 구입한 개똥이는? 불행하게도 공산당에 의한 토지 몰수를 피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넋이 나가버린다. 광증이 생긴 것. 이때부터 개똥영감은 새로 얻은 젊은 아내도 못 알아보고, 대신 이미 최하급 출신성분인 치융니엔의 귀신을 볼 수 있게 된다. 한 부지런하고 천생 농사꾼인 개똥영감을 미치게 만든 중국의 근대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문화혁명을 준비하고, 이어서 개방과 현대화를 이루게 되는데, 조금씩, 조금씩, 이것들이 다 모여서 결국 결정적으로 이미 살짝 미쳐버린 개똥영감을 드디어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게 만든다. 세상 어느 곳보다 격정적으로 휘몰아친 중국의 20세기를 관통해 삶을 산 개똥영감. 그리하여 영감은 기어이 문루에 불을 붙이려 성냥을 긋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뜬금없이 나타난 치융니엔 귀신은 옆에서 쓸데없는 나발이나 불어대고……. 그게 20세기를 관통해 살았던 농촌지역 보통의 중국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 됐던 간에 열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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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5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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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졸라가 1891년에 발표한 작품. 필생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20편의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열여덟 번째 작품으로, 두 번째 작인 <쟁탈전>이 끝난 바로 다음해부터 4년 여 간을 그렸다. <쟁탈전>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티드 루공이었다가 ‘사카르’라고 성姓을 바꾼 탁월하지만 탐욕과 광기의 인물이 다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내가 읽은 여덟 편의 총서에서 사카르가 유일하게 두 편의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사카르 말고 다른 인물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쟁탈전>의 마지막 장면에는 부동산 투기사업에서 파산한 사카르 곁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젊은 아내는 죽고, 3백만 프랑이란 거액의 지참금을 가져온 며느리가 일찍 죽어 졸부가 된 외아들과도 거의 완벽하게 절연한 상태이며, 나폴레옹 3세 제정 정부의 장관에 오른 둘째 형 위젠 루공은 친동생이 파산했기 때문에 남의 이목이 두려워 오히려 그를 도와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재미있는 모티브가 등장한다. <쟁탈전>에서 사카르는 지중해 항구 다수를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회사를 사기꾼 집단으로 치부하고 한 푼도 투자하지 않았으며, 해운회사는 정말로 허위의 유령회사임이 밝혀지는 일이 생겼었다. 그러나 <돈>에서는 다년간 소아시아에서 지내면서 ① 지중해를 연결하는 (여객선을 포함한)해상운송 회사, ② 리비아 지역의 거대한 은 광산을 개발하는 회사, ③ 소아시아 일대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철도 회사가 필요하며, 궁극적으로 이 회사들의 건설과 분명한 성공을 통해 교황은 로마에서 베이루트로 안전하게 모셔와 세계를 지배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가톨릭 세계주의자 자매 아믈랭과 카롤린 부인이 등장해, 사카르로 하여금 다시 한 번 화려하게 재기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당시 이태리와 유럽은 교황이 지배하는 로마를 이탈리아 영토로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결론은 다들 아시겠지만, 그리하여 아믈랭 자매는 시끄러운 로마에서 예수의 고향인 베이루트로 교황청을 옮길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들의 주장 또는 아이디어에 착안한 사카르는 위 세 가지 사업 아이템에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해 은행을 만들고 스스로 이 ‘만국 은행’의 사장에 취임한다. 문제는 회사 창설에 필요한 주식발행을 하면서 진짜 돈을 내고 주식을 손에 쥐는 인간이 거의 없다는 거. 일단 회사를 먼저 만들어놓고 수익이 발생하면 배당을 통해 자신들의 주식대금을 지불하는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행각이다. 발기인 대회에 참석한 이사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아믈랭을 이사회의 대표로 추대하였으나 아믈랭은 엔지니어로서 회사를 설립한 다음 거의 모든 시간을 소아시아와 로마에서 지낸다. 그리하여 만국 은행에 남은 이사들이라고는 거의 전부 사기꾼. 이들은 두 번에 걸친 증자로 거액을 모으고, 구름 높이만큼, 거의 성층권을 뚫을 기세로 주식가격을 올려놓는데 전력을 다한다. 여기에 사카르가 하는 짓이란 바로 자사주 매입. 나는 아직까지 주식투자를 해보지 않아 잘 모른다(그래서 여태 이 모양 이 꼴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마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주식에 관해 많이 아시는 분은 더욱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하여간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에게 일확천금의 꿈속을 헤매게 하다가 결국 한 방에 파산에 이르게 하고 만다는 내용. 내가 여간해서는 이렇게 작품의 결말을 소개하지 않지만, <돈>의 경우 졸라 특유의 질주, 최고가까지 주가를 몰아 올려칠 때부터 결국 이런 결말이 등장할 것이란 건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 앞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여러 행태들. 아믈랭과 카를린 부인처럼 정직하지 않게 번 돈에 관해선 애정이 없는 사람, 남편이 부도덕하게 벌어들인 수억 프랑의 상속재산을 모두 빈민구휼이나 고급스런 고아원, 양로원, 학교 등을 위한 사업에 마지막 한 푼까지 다 쏟아 부은 다음 애초 예정처럼 카르멜회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대공부인, 평생 정직하게 돈을 번 사람들이 우연히 손에 넣은 증권 덕에 30년 간 번 돈보다 한 시간 만에 오른 주식으로 더 큰 소득을 얻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눈이 돌아가 전 재산을 날리는 풍경, 투기에 유리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서슴없이 몸을 허락하는 남작부인 등, 돈에 얽힌 숱한 일화가 담겨있다.
 이 정도면 책에 대한 소개는 다 했다고 본다. 곁가지 몇 개만 더 얘기하면 되겠다.
 작 중 두 명의 거대 악당이 등장한다. 주인공 사카르와 그의 필생의 적 군데르만. 군데르만은 가까운 시기에 프러시아와 프랑스가 전쟁을 벌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프러시아가 단숨에 프랑스를 정복하리라는 걸 예언하는 냉정한 유대인 승부사다. 당연히 사카르는 군데르만에 대한 악감정에 싸여있다. 그리하여 사카르는 이렇게 선언한다.
 “아! 더러운 유대인 같으니라고! 개가 고기 뼈를 으스러뜨려 먹어치우듯 그자를 이빨로 으스러뜨려 먹어치워야 직성이 플릴 것 같아! (중략) 스스로 향연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몰락시키기 전에 그 이론의 여지 없는 왕부터 처치하는 거야.” (131쪽)
 이 책을 간행한 것이 1891년. 드레퓌스 사건이 1894년. 나는 혹시 사카르의 입을 통해 졸라가 자신의 생각을 발언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고, 그리하여 책 읽다가 드레퓌스 사건의 시기를 검색해봤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그래. 평소에 반유대인 의식이 있었지만 드레퓌스 사건이 자신의 의식을 바꾸었을 계기로 작용했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내 생각이 틀렸다. 544쪽에 여주인공 카롤린 부인이 콩시에르주리 감옥에 갇힌 사카를 찾아가 이렇게 얘기한다. (콩시에르주리 감옥이 워낙 유명해 굳이 감옥의 이름까지 썼다. 왜 유명한지는 직접 검색해보시라. 나 기특하지?)
 “정말 유별난 생각을 하시네요! (중략) 저한테 유대인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에요. 만약 그들이 별도의 인간들이라면, 그건 사람들이 그들을 그렇게 취급했기 때문이죠.“
 그렇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평생을 산 에밀 졸라가 다른 것도 아니고 인종적인 편견을 가졌을 리가 없다.
 두 번째는 역시 졸라의 총서에서 거의 빠짐없이 볼 수 있는 ‘질주’가, 이 책에선 정말로 구체적인 단어로 나온다.

 

 “특히 그녀(카롤린 부인)를 괴롭힌 것은 만국 은행을 몰고 가는 그 끔찍한 속도, 그 멈추지 않는 질주였던바, 만국 은행은 모든 것이 최후의 일격으로 산산이 파괴될 때까지 석탄을 가득 채운 채 악마의 철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를 연상시켰다.” (302쪽)

 

 이 문장에선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는 “최후의 일격으로 산산이 파괴될 때까지 석탄을 가득 채운 채 악마의 철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는 이미 졸라의 앞선 작품에서 마지막의 결정적 장면으로 뜨겁게 묘사를 해놓았었다. <인간 짐승>. 술 취한 수천 명의 병사를 태우고 죽음이 기다리는 전선으로 무한질주를 하는 석탄을 가득 채운 열차. 다른 문제는 이 문장이 나쁜 문장의 대표적인 예라는 점. 3인칭 대명사나 지시 대명사가 아닌 관형사로의 “그”를 역자는 한 문장에서 두 번이나 쓰고 있다. “그 끔찍한 속도”와 “그 멈추지 않는 질주.” 위 문장에서 이 두 개의 “그”를 빼고 읽어보시라. 훨씬 부드러울 걸? 만일 역자가 이 독후감을 읽는다면, 원작을 원형대로 번역하기 위해서 그랬다 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내가 생각하는 이 역자의 문제는, 일반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라갈 때에는 자연스럽게 읽히던 문장이, 사색적 기술이나, 졸라가 나름의 철학으로 현상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자칭 책 좀 읽는 독자 중의 한 명인 나도, 같은 문장을 대여섯 번씩 읽어야 했으며, 그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있었다는 거. 직역을 하든, 의역을 하든, 번역을 하든, 오역을 하든, 한국의 일반적 독자는 프랑스 언어로 된 원본을 대조해가며 읽지 못하고 오직 역자가 다시 쓴 책을 읽는다. (내가 프랑스 소설을 원어로 읽을 줄 알아도, 미쳤다고 그걸 대조해가며 읽을까, 그냥 원서를 보고 말지!) 그럼 돈을 내고 책을 산 독자가, 번역한 한국어 문장을 편하고 알기 쉽게 써달라고 요구하는 건 욕심이 아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문장을 찾기 위해 다시 책을 뒤져볼 생각은 없다.
 세 번째로, 사카르는 감옥에서, 자신의 그릇된 행위 때문에 졸지에 파산상태에 이른 숱한 개미 투자자들의 비참함을 토로하고 있는 카롤린 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승리할 수 없었다고, 말도 안 돼! 내겐 돈이 모자랐을 뿐이야. 단지 그뿐이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십만 명의 군사만 더 있었다면 그는 승리했을 것이고, 세계지도는 바뀌었을 것이오. 내게 몇억 프랑만 더 있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거요.” (542쪽)
 사카르의 돈은 나폴레옹에겐 군사와 같다. 워털루 전쟁에서 스러져간 많은 인간들은 역사에서 거의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한다. 그는 군사, 즉 개미 투자자들을 위해서는 조금도 애정이 없다. 나는 왜 여기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를 떠올렸을까. 라스콜리니코프가 나폴레옹을 떠올릴 때마다 진땀을 흘리며 한 누추한 개인의 무의미함, 이蝨 같은 존재인 개인의 사소함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과, 사카르가 개미 투자자의 불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이 조금은 닮은 듯해서 그랬나 싶다.
 마지막으로 루공 가문 특유의 탐욕과 광기라는 측면에서 사카르의 돈에 대한 집착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쟁탈전> 독후감에 써놓았으니 여기에선 사카르의 아들 막심이 그의 아버지를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만 인용하면서 독후감을 접겠다.
 “오! 그렇지만 분명히 해둡시다. 아버지(사카르)가 수전노로서, 돈을 태산처럼 쌓아 지하실에 감춰두기 위해 돈을 사랑하는 건 아녜요. 정말 그건 아녜요! 아버지가 도처에서 돈이 쏟아지기를 바란다면, 어떤 샘에서도 돈을 퍼올린다면, 그것은 돈이 자기 집에서 격류처럼 흘러다니는 걸 보기 위해서이고, 돈이 가져다주는 사치, 쾌락, 권력을 즐기기 위해서죠.... 정말 그렇다니까, 아버지는 핏속에 그런 게 있어요.”  (306~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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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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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오디오를 껐다. 비록 시인이 시 속에서 베토벤과 바흐를 인용했을지언정, 시편들이 내게 준 감정이 흩어지길 바라지 않아서. 마흔 해가 넘도록 서울 토박이로 살다가 느닷없이 하행선을 타고 해남 미황사 아래동네로 거처를 옮긴 시인. 해남엔 내가 가 본 절집이 두 군데 있다. 큰 절 대흥사와 저 꼭대기에 금천이란 금빛 나는 샘이 있다는 달마산 중턱에 다도해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절집 미황사. 내 기억 속 미황사는 씩씩하게 근육이 울퉁불퉁한 중들과 갓 낳은 송아지만한 개, 그리고 매끄럽게 깍은 나무 기둥으로 오랜 대웅전 앞에 신나게 불사 중이던 바쁜 절이라는 거. 하긴, 거길 다녀온 지 벌써 20년도 훌쩍 넘어버렸으니 이젠 당시에 짓고 있던 건물들도 오래된 티가 나겠구나. 차 두 대가 비켜 지날 수 없는 좁은 시멘트 도로를 타고 절 아랫동네 이른바 사하촌을 거쳐야 갈 수 있었던 절집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여태까진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었다가, 김태정의 시집을 읽고는 무척 가보고 싶어진다. 서울 토박이가 해남, 이 미황사 아랫마을로 이사가서 만 마흔여덟 살 되던 해에 짧은 생을 마치고 만다.
 그러나 나는 시를 읽는 독자로서 시인의 죽음에 관해서는 별 의미를 두지 않겠다. 세상에 김태정 혼자 이른 나이에 암에 걸려 죽는 건 아니니까. 다만 시를 읽으면서 예전의 미황사를 다시 깊게 생각하게 만들만큼 시들이 내 마음 속에서 공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김태정의 시는 가난하고 궁핍하다. 그러나 이런 시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 가난하고 궁핍해서 급기야 궁상맞기까지 한 골짜기로 들어서지 않는다. 이 기묘한 경계선의 이편에 서는 일. 곤고하고 고단한 시인의 삶을 김태정만큼 깔끔하게 노래하는 시인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나는 시집을 펼치고 맞는 첫 작품부터 예사롭지 않게 읽었다. 감상해보자.




 호마이카상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닳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서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전문)



 제목에서부터 시인은 이십년 동안 그 위에서 시도 쓰고, 책도 읽고, 밥도 차려먹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도 아니고, 술 마신 애인이 발로 걷어차서도 아니고, 이젠 시인이 포마이카 상 앞에서 더 이상 거짓으로 시도 쓰지 못하겠고, 삼시세끼 자신의 초라한 끼니를 구경시키기도 쪽팔려 이젠 스무 해 동안 정든 밥상이자 책상인 너를 버릴 때가 됐다는 거다. 결국 시도 안 되고, 다른 밥벌이도 안 되는 시인의 초라함 또는 자존심이 포마이카 상을 버리는 것으로 결심을 하여, 시는 궁상스러움이란 다모클레스의 검으로부터 비켜서게 된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적어도 한 명의 독자인 내게 시를 쓰는 어려움과 시인으로의 생활인이라는 곤고함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나는 어리석게도 마음 한 구석에서 <조침문弔針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바람은 소박하다. 삶은 언제나 팍팍한 것이라 애초부터 풍요라는 게 자신의 팔자에 없음은 사십 년에 가까운 체험으로 익숙하지만 그래도 시골 산촌에 자그마한 공간을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동백꽃 피는 해우소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전문)


 
 시인이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 장춘이라는 지명의 윤씨 할머니댁에서 방을 얻어 살았던 모양이다. (55쪽 <달마의 뒤란>에서 인용) 그래 자주 미황사에 들렀을 테고, 건강이 좋지 않으니 달마산 꼭대기까지는 오르지 못한 거 같다. 아닐 수도 있지만 만일 올랐다면, 시인이 병풍같이 생긴 바위산에 올라 보길도를 비롯한 올망졸망한 남해의 그림 같은 시를 한 수도 쓰지 않았을 리가 없었으리라. 미황사 경내를 산보삼아 다니던 시인은 절 근처 모르는 나무도 없고, 풀도 없으며 들꽃 이름도 다 알았을 터. 그렇게 다니다 해우소에 들러 삶의 즐거운 안간힘을 동반한 똥을 누면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이 절집의 소박한 화장실 같은 집이라면 아주 딱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시 속에서는 더 이상 시를 쓰는 어려움이나 시를 써서 먹고 사는 생활의 곤고함은 보이지 않는다. 병이 깊어갔으리라. 그러나 조금의 엄살도 없다. 이른바 요새 몇몇 시인들이 주장하는 ‘병시病詩’라는 집단하고는 고급지게 다르다. 소박하게 그냥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자그마한 집 하나가 산골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 병이 깊어 오히려 마음도 깊어가는 한 인간이 나를 울리고 만다.
 시는 삶이어야 하리라. 오직 하나,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독특하고 사치스러운 고통을 최대한의 은유를 써서 끄집어내는 일만 시가 되는 건 아니다. 포마이카 상을 이젠 버리고 싶은 일, 절집의 해우소에 두 다리로 지구를 버티고 앉아 좁은 공간을 바라보는 것도 매우 훌륭한 시의 제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부는 시인이 서울살이를 하면서 쓴 시를 모아놓았는데 앞쪽의 시보다는 울림이 덜하다. 좋은 시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으면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기억하시라.




* 언제나처럼 시집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인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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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탈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에밀 졸라 지음, 조성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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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총 스무 편의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이고, 내가 읽은 일곱 번째 총서이다. 따라서 루공 가문과 마카르 가문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이젠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었으므로, 시리즈에서 루공 가의 비조鼻祖 피에르 루공의 셋째 아들 아리스티드가 무대 전면에 등장하여, 드디어 이제 막 개화하려 하는 프랑스의 태평성대 벨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의 시발점, 1850년대 후반부터 1860년대 초반까지의 파리를 무대로, 기질적으로 유전병적인 집착 혹은 광기가 어떻게 발현될까 애초부터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리스티드 루공은 1851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12월 2일 쿠데타 소식을 듣자마자, 1852년 초에 남부 플라상 지역에서 단박에 파리로 올라왔다. 아들 막심은 할머니 무릎 아래에 두기로 하고, 허약체질의 아내와 딸 하나만 데리고 상경을 하면서, 마치 대한민국의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서울 강남 지역에서 광풍을 일으켰던 것과 비슷한, 부동산 투기의 현장 파리에 뛰어든다. 아리스티드가 갖고 있는 유전병적인 기질은 돈에 대한 집착 또는 광증이었던 거다. 아리스티드가 그냥 맨몸으로 상경했느냐하면 그건 아니어서, 쿠데타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으며 지금도 은밀한 세력을 주도하며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보필하고 있는(소설이 진행하며 장관자리까지 올라가는) 친형 위젠이, 적어도 자기한테 한 자리는 얻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과 달리 형은 동생에게 시청 말단 공무원자리를 겨우 하나 얻어주었는데, 이 자리가 보통이 아닌 것이, 위에서 얘기한대로 본격적인 벨에포크 시대를 열기 위해 첫 번째 사업으로 벌이고자 하는 도시 재개발에 관한 비싼 고급 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리였던 거다. 처음부터 동생의 집착 또는 광기를 알고 있던 위젠 형은 나중에라도 동생의 광기와 자신이 엮일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생의 성姓을 ‘루공’에서 제수(동생의 아내)의 성인 ‘시카르도’ 비슷하게 ‘사카르’로 바꿔버린다. 그리하여 책에선 이 인간의 다섯 글자 이름 ‘아리스티드’ 대신 주로 세 글자 성인 ‘사카르’로 표기하고 있다.
 수년 동안 시청에서 파리 재개발 사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인맥을 키우기 위해 시청 곳곳의 장소와 인물들을 샅샅이 훑어가던 사카르가, 이제 드디어 큰 건을 발견한 찰나, 아뿔싸, 부동산 투기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종자돈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가능하단 걸 뼈저리게 실감하고야 만다. 조금의 종자돈을 형도 안 빌려줘, 자기 보스인 도시개발과장도 안 빌려줘, 마누라 형제들도 안 빌려줘, 일찌감치 파리에 나와 작은 가게를 하고 있던 여동생 시도니 부인도 모른 척, 정말 마중물만 조금 있으면 펌프에서 우물물 쏟아지듯 하늘에서 금화, 은화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그걸 못하는 거다. 아, 안타까워. 원래 그런 거다. 없이 사는 인간들은 기회가 눈에 번히 보여도 그걸 확 잡아채지 못하는 거.
 이때 혜성같이 등장해 예상치 못했던 도움을 주는 한 여인이 있으니 바로 여동생 시도니 부인. 원래부터 파리의 대표적 마당발이었던 여사가 어디서 뉴스 하나를 물고 온다. 파리의 옛 부유층이 살던, 아 그게 파리 중심가의 무슨 섬이더라, 시테 섬이던가, 하여간 거기서 살던 공화파 법조인, 그러니까 시대적 배경이었던 나폴레옹 3세 시절엔 골수 야당이어서 거의 두문불출했던 인물한테 딸이 둘 있는데, 그중에서 첫째 따님이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계속 다니다가 학업을 마치고 이제 집에 돌아와야 하는 순간, 길을 가다가 들판에서 어떤 부잣집 유부남한테 겁탈을 당하고 임신을 한 채 집에 돌아오는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집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큰딸 르네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는데 이를 불쌍히 여긴 엘리자벳 고모와, 사카르의 누이동생이자 파리의 왕발 시도니 부인이 연결이 되어, 몸이 약했던 마누라가 죽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사카르가 르네 배 속에 있는 아이의 (거짓)생부이니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 말고, 사카르가 마침 홀아비 신세라 둘을 결혼시키자고 설득, 정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돈벼락을 맞게 된다. 르네가 지참금으로 수십만 프랑을 가져오는 동시에, 이를 불쌍히 여긴 엘리자벳 고모 역시 비싼 땅을 상속해주는 거였다. 세상 참 불공평한 것이, 어찌하여 나한텐 이런 행운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인지, 참. 이쯤에서 한숨 한 번 쉬어도 큰 까탈은 아닐 터, 제위의 양해를 바람.
 대한민국 서울의 강남 개발과 아주 유사하게, 이제 전면적으로 파리를 때려 부수고 다시 건설하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벌어질 판. 고급 정보와 정신 못 차릴 정도의 자금을 확보한 사카르는, 정신 못 차릴 만한 자금을 정신 못 차릴 만큼 불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불과 몇 년 만에 파리 중심가에 대규모 저택을 무지 화려하게 짓고, 그러나 문화적 수준은 아직 남프랑스 플라상 촌놈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해 흔하지만 나중에 천문학적 재산이 될 그림 한 장 벽에 걸지 못하면서, 그저 국가를 상대로 국민들 세금 축내기에 혈안이 된다. 문제는 이게 병적이라는 거. 돈이란 건 쓰자고 버는 거다. 그 정도는 아무리 광적으로 돈 벌기에 눈알이 벌건 사카르도 아는 거라서, 젊고 아름다운 아내 르네의 무한정한 사치와 낭비를 눈감아주는 정도가 아니라 기꺼이 거금을 오직 하나, 아내의 기분전환을 위해 가져다 바친다. 결혼은 했지만 침대 생활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도 맞지 않아 거의 관계가 없는 상태여서 각자가 서로 알아서 즐기기로 암묵적으로 인정한 당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부르주아 계급의 관례도 칼 같이 지킨다. 심지어 파산한 정부의 다이아몬드를 거액을 주고 사서 그걸 아내에게 선물할 정도. 당시 파리 부르주아들은 이걸 당연시하고 칭찬까지 쏟아 붓는다. 한 여자를 살리는 휴머니즘과, 그리 쉽게 거금을 쓸 수 있는 재력에 반해버리는 거다. 우와, 우리 집 같으면 너 죽고 나 죽는다. 하긴, 그래서 나는 절대 부자가 못되는 것이겠지만.
 그리하여 이 부부가 평생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어디 소설이겠는가. 소설의 가장 중요한 갈등 가운데 하나를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파리에 올 때 할머니한테 맡겨놓은 아들 막심. 막심이 어느 새 열 살이 됐고, 이제 돈도 벌만큼 벌었으니 막심을 파리로 데려오는데, 지금이야 열 살이지만, 얘가 언제나 열 살인 줄 알아? 조금 있으면 머리통 커지고, 머리통 커지는 거만큼 (키 말고)다른 것도 커지고, 어느 날부터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자신의 유전자를 살포하기 위해 별 짓을 다 할 거 아닌가 말이다. 아니나 달라, 열일곱 살을 먹자마자 계모 르네의 몸종의 배 속에 아이 하나를 담아 놓는다. 르네는 점잖게 몸종에게 연수 1,200 프랑의 재산과 함께 고향 앞으로 보내버리는데, 점잖기는 했지만 참 인색했다, 인색했어. 자신은 의상실 주인한테 15만 프랑 이상씩 빚을 지면서 명색이 손자를 밴 하녀에게 연수 1,200 프랑, 월 100 프랑이 말이 돼? 그렇다고 막심과 계모 르네의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천만의 말씀.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좋아서 탈이다. 여덟 살 차이의 아들과 계모. 어때 그림이 그려지시나? 뭐라? 페드르? 그렇다. 작 중에서 막심과 르네는 <페드르> 연극을 보는 장면도 나오긴 한다. 하지만 문제는 루공 가문 특유의 기형적 신체조건. 졸라는 막심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루공의 피가 그 안에서 정제되어 미묘하고 사악하게 나타났다. 너무 어린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아버지의 격렬한 욕망과 어머니의 나약함과 체념이 이상하게 결합되고 상충되어 나타난 기형적 산물이 그(막심)였다. 그 안에서 부모의 결점들이 서로 맞물리며 더 나쁜 결과를 낳았다.” (183쪽)
 궁금하시지? 여러 번 얘기 했던 바와 같이 졸라 작품의 특징은 “질주”다. 하나는 이야기 했다. 남자 주인공 사카르의 돈에 대한, 오직 돈을 버는 행위를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질주. 사카르의 탐욕적 광기의 질주에 대해 졸라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쇠처럼 거무스름한 사카르가 집게 같이 뾰족한 웃음을 띠고 가느다란 다리로 비웃으며 서 있었다. 이 남자는 욕망 그 자체였다. 십 년 내내 그녀(르네)는 그가 용광로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금속 속에서, 자기 자신도 깔릴지 모를 위험 속에서 불에 달아오른 몸으로 헐떡이며 자기 팔보다 스무 배나 더 무거운 망치들을 들고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아 왔다.” (439쪽)
 그리고 또 하나는, 안 알려드림.
 위에서 막심 사카르(루공)의 성격을 인용한 이유는, 막심이 진짜 결혼을 하는데, 상대는 지참금으로 3백만 프랑을 가져오기로 계약한 하원의원 드 마뢰이으 씨의 딸 루이자이며, 루이자에 대한 묘사가 아래와 같았기 때문이다.
 “기형적 몸에, 추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는 젊어서 죽을 몸이었다. 일종의 폐병이 그녀를 은밀히 파 들어가고 있었고 그녀의 지나친 쾌활성이나 교태 있는 매력도 그 때문이었다. 197쪽  어머니 쪽을 물려받은 루이즈는 부족한 피, 비틀린 수족, 손상된 뇌, 이미 추잡한 생활로 가득 찬 기억들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 (198쪽)
 그래서 혹시, 막심과 루이자가 결혼을 해서 사이에 나온 아이가 정말로 혹시 <목로주점>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는데, 그건 아닌 거 같다. 하여간 이 루공 마카르 총서는 이렇듯 책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조금씩 관계를 알아채거나 오해하는 즐거움도 아주 독특하다. 이 책 <쟁탈전:La Curée>의 제목을 또 다른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하나인 <돈>을 번역한 유기환은 <이전투구> 즉 진흙탕 개싸움이라고 한 바 있고 <돈>의 주인공이 이 <쟁탈전>의 주인공인 사카르인 것으로 미루어, 총서 가운데 두 번째로 쓴 작품이 열여덟 번째 작품으로 연결될 것이 틀림없으리란 것만 얘기한다. 즉, 뒤끝이 있는 소설이란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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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인당 이야기 - 페라귀스.랑제 공작부인.황금 눈의 여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1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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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0년대 초반에 쓴 중편소설 세 편을 책 한 권에 담았다. 문학동네가 오랜만에 중편 세 편을 한 권에 담는 기특한 짓을 했다.
 발자크라면 20대 청춘시절에 인쇄, 출판, 활자주조 사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기는커녕 6만 프랑의 빚을 떠안기만 했단다. 6만 프랑의 돈은 지금 가치로 약 2억 원가량이라고 하는데(역자 해설 인용), 말이 2억 원이지, 지금처럼 돈과 재화가 넘쳐나는 시기와 19세기 초반의 2억 원이라는 건 화폐의 가치 자체가 다르다. 마치 도시 번화가에서 백만 원과 산골마을에서의 백만 원의 차이처럼. 6만 프랑은 사업실패에 따른 것일 뿐, 이것 포함해서 그의 채무는 당대 파리 인텔리들에 어울리는 사치를 위한 비용까지 합해 12만 5천 프랑에 달했다고 나이 스물아홉 살 시절, 1828년에 쓴 편지에 나와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발자크가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열라 소설을 쓰는 일 말고는 없었다. 그리하여 하루에 최소 9시간, 심하면 14시간, 이렇게 하루 평균 12시간 동안 쓰고 또 쓰고, 쓰다가 또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사람이 제대로 살겠어? 발자크는 18년간 이메일서신을 주고받아온 한스 백작부인과 드디어 결혼한 1850년 3월, 불과 다섯 달의 신혼생활을 끝내고 쉰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이것저것을 뒤져보니, 발자크의 이른 죽음을 많은 매체에서는 과도한 집필로 인한 건강악화로 보고 있어서 나도 이렇게 쓰는 것이지 뭐 내가 아는 게 있나.
 자의건 타의건 간에 빚을 청산하기 위한 과도한 노동으로써의 집필을 한 결과, “저녁밥을 주둥이에 처넣고 여섯 시에 잤다가 자정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정오까지 일”을 해, 그것도 20년 동안, 사람은 골로 가고 대신 숱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지금부터 짐작인 바, 발자크가 많은 작품을 써내기 위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고단한 소설 쓰는 일을 만들기 위해 일정한 틀을 준비한 거 아닐까? 이른바 “풍속”, “철학” 그리고 “분석.”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쓴 산더미 같은 결과물을 보며 그걸 크게 이 세 가지 틀에 입각해 창작해낸 “인생극” 또는 “인간 희극”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라.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다. 겨우 예닐곱 작품만 읽어본 하찮은 독자의 짐작이다. 어디 가서 이거 인용해 말 하지 마시라. 개망신당할 수 있다.
 《13인당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세 중편 <페라귀스>, <랑제 공작부인>, <황금 눈의 여인>은 당연히 “풍속”의 범위 안에 들어야 할 것. 발자크를 칭하기를 사실주의의 대가라고 한다. 이 세 작품은 사실주의자가 쓴 당대 풍속, 특히 파리와 왕정복고 시기의 귀족, 부르주아 등을 아주 세밀하고 다양하게 묘사한다. 귀족의 시대가 저물고 부르주아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19세기 초반. 멸망한 나폴레옹의 광휘를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파리의 신귀족 등등. 13인당이란? 작가가 만들어낸 비밀결사다. 마치 프리메이슨이나 카르보나리 같은. 그러나 기꺼이 살인 등 범죄를 저지르고, 당원들의 개인적 욕망과 목적만을 위해 행위하는 경제, 권력적으로 힘 있는 악당들의 비밀조직. 그렇다고 이들을 공작, 주교, 법원장, 징세청부인 등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다만 당원인 주인공의 문제를 13인당의 적극적 협조 하에 해결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스토리라야 베리즈모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은 잔혹 애정, 치정극 수준이다. 작품에서의 문제해결 방법에 당시 계급 간의 한계와 새로운 방법 및 승패가 은유되어 있다고 해설에서 열라 설명하고 있으나 그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면 될 것.
 문제는, 지금부터 180년 전의 파리와 파리 시민들의 계급적 이동관계 같은 것이 “지극히” 사실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걸 동아시아의 일반 독자가 두 세기 전의 파리 골목이나 광장, 길거리, 건물 이름을 읽으며, 아하 그땐 이 거리를 그렇게 불렀으며 분위기는 어떠했구나, 이렇게 공감하기 쉽지 않다는 거. 한국의 작가가 18세기의 한양을 무대로 운종가와 진고개, 시구문, 청계천과 그곳에서 살던 딸깍발이, 상민, 깍쟁이 등을 묘사한 세밀한 기술을 읽으면서 그것들에 흥미를 느끼는 프랑스 사람이 별로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는 바, 세 편의 작품 다 같이, 앞부분의 상당량을 차지하는 당대 풍속의 사실주의적 긴 묘사가, 분명하게 기념할만한 성과인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루함을 느껴야 했다. 파리의 한 길거리가 당시엔 뒤라 가街라고 불렸다가, 이후에 랑베르 가로 명명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지금까지 아스시 가로 불리고 있는 게 뭐 어떤데?
 그럼 이 책이 지루할까? 아니다. 재미있다. 파리 시내와 계급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서 지루함을 조금 느낄 수 있을 뿐이지, 사실 인간들의 이야기 가운데 제일 재미있는 건 애정과 치정 이야기 아닌가. 거기다가 적당하게 잔혹극까지 섞여 있으니 말 해 뭐하나. 앞에서 스토리 라인이 베리즈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의견은 21세기 인간이 소설을 읽고 느끼는 것일 뿐, <13인당 이야기>는 19세기 초반 작품이고, 베리즈모는 20세기 초반의 예술 형태. 그리고 베리즈모가 화끈하게 재미있음을 누가 부정하겠느냔 말이지. 그저 지금 읽으면 좀 촌스러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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