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 고대 중세 편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1
움베르토 에코.리카르도 페드리가 지음, 윤병언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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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8만원, 할인가 7만2천원
ㅎㅎㅎ 정가 80만원 하면 사서 읽겠습니다. 할인가 72만원 주고요.
번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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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강기 2018-07-23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 다 합치면 100만원쯤 될 것 같네요..ㅎㄷㄷ 합니다..ㅎㅎㅎ

Falstaff 2018-07-23 22:14   좋아요 0 | URL
호호호...
세상이 너무 더워 다들 미쳐 돌아가요!

여백 2018-08-24 0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디 80만원 될 때 사서 읽을 수 있을 만큼 번창하시기를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사바하틴 알리 지음, 이난아 옮김 / 학고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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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심금을 가장 효과적으로 울리는 것을 우리는 흔히 “신파”라고 부른다. 자신의 문화적 소양에 대하여 약간은 과장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이들은 신파 알기를 좀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파야말로 사람이 문자를 만들어 이야기를 꾸며내기 시작한 이후 단 한 시기도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뭇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여왔던 분야다. 가난한 고학생 이수일의 진실한 사랑과 부모님의 강압을 등에 업은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 사이에서 눈물을 쏟으며 오열하는 심순애부터, 하필이면 같은 하늘을 이고는 살 수 없는 원수 집안의 자제들이 서로 눈이 맞아 열세 살의 줄리엣과 이 아이의 열댓 살 먹은 애인 로미오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각각 자살을 해버리는 것. 같은 신파임에도 불구하고 대동강변 부벽루를 산보하는 원조 신파 <장한몽>이 감히 셰익스피어한테 비비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를 한 마디로 하면 문학성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소위 문학성이라 함은 작품을 이루고 있는 문장들과 그것들이 조합을 이루어 얼마나 섬세하게 심금을 울릴 수 있는가, 즉 측정할 수 없는 작가와 독자의 공명이라 할 수 있다.
 <모피 코트를 입은 마돈나>. 요즘 읽은 최고의 신파였다. 더욱 놀라운 것이 이런 신파가 1940년대 초의 터키에서 나왔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 게다가 원작이 그런지 번역을 한 이난아의 대단한 한국어 실력에서 비롯했는지 모르겠지만, 문장의 나열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바하틴 알리’는 1907년 출생해서 국가 장학생으로 독일 유학을 한 작가. 이이가 글을 써서 1932년에,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자 흔히 ‘케말 파샤’라 일컫는 국민영웅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모욕했다는 죄로 1년간 옥살이를 한 후부터 쓰는 글마다 족족 검열관에게 걸리는 걸 참지 못하고 1948년에 조국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해, 계획을 진짜 실행하다가 불가리아 국경에서 경비대원에게 총 맞아 죽임을 당했으며, 시신은 무려 두 달 반만에 발견된 참으로 험한 팔자의 소유자였다(책 앞날개의 작가소개 참고했음).
 작가 본인은 이렇듯 적극적인 글쓰기 및 표현의 자유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선 아무 이유 없이 해고당해 대학 동창에게 박봉의 사무원 자리를 얻은 별 볼일 없는 인텔리 ‘나’와 별 볼일 없는 직장에서 만난 ‘라이프Raif 선생’이란 의미의 라이프 에펜디, 두 명을 등장시킨다. 화자 ‘나’에 대한 설명은 이쯤이면 충분하고, 문제는 라이프 에펜디인데, 그건 이 책이 전적으로 라이프 선생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라이프로 말할 거 같으면, 일찍이 터키 부르주아 슬하의 세 남매 가운데 유일한 아들로 태어나, 처음부터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사색적이며, 탐미성향이 강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슬람 터키 남성들이 원하는 아들’하고 완벽하게 반대쪽에 있는 존재였다. 저것이 나중에 커서 진짜 사내구실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하던 아버지가 하루는 라이프를 불러, 내 소유 가운데 비누공장이 두 개 있으니 너는 1차 세계대전에 패전해 물가가 싼 독일에 가서 비누공장에 취직해 향내 나는 비누를 어떻게 만드는지 배워, 나중에 내 비누공장을 더 잘 경영할 수 있도록 실력을 쌓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지긋지긋한 남성주의 사회에서 벗어나 유럽문명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너무 황홀해 곧바로 터키를 떠나버린다.
 문제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벌어진다. 독일 현대 화가들의 전시회를 둘러보던 중 자화상 한 점이 눈이 부시게 확 들어온다. 모피를 입은 여인. 한 눈에 그림에 빠져버린 라이프. 평론가들은 이 자화상의 여인이 15~16세기 피렌체 화가 안드레아 델 사르토의 <아르피에의 성모>를 닮았다고 신문에다 기고를 했다. 그래서 자화상의 여인과, 자화상을 그린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여성 마리아 푸데르가 표제 “모피를 입은 마돈나(성모)”가 되는 것.
 난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겠다. 이제 소설이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설명했으니 이것으로 됐다.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엮어지고, 무슨 과정을 거쳐 부르주아의 외아들 라이프 에펜디가 월 40리라의 박봉을 받는 찌질한 가장이 됐는지는 직접 읽고 밝히시라.
 단 하나. 확실하게 보증할 수 있는 건, 이 책을 읽는 당신, 후회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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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23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전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다 일단
읽기는 시작했었는데, 미처 다 못 읽었습니다.

나중에라도 다시 한 번 도전을...

Falstaff 2018-07-23 12:43   좋아요 0 | URL
옙. 참 심금을 울리는 소설입니다.
제가 별을 하나 뺀 이유는, 결말 부근에 가서 독자가 예상하고 있었던 등장인물이 한 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거만 아니었으면 당연히 만점을 주겠는데요.
진짜 궁금한 건, 사바하틴 알리의 문장이 원래 좋은 건지, 아니면 역자 이난아가 글을 아름답게 번역을 한 건지....였습니다. ^^

잠자냥 2018-07-23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별 하나 뺀 그 이유에 저도 좀.. 공감합니다. ㅎㅎ 그렇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럼에도 저는 별 다섯 개를 준 작품입니다. 정말로 문장이 참 좋죠? 터키어로도 그랬을지 궁금합니다.

Falstaff 2018-07-24 08:42   좋아요 0 | URL
ㅋㅋㅋ
20세기 중반임을 감안해도 조금 그렇더라고요.
역자 이난아씨가 번역가들 사이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그러는 모양입니다. (당연히 풍문으로 들었습죠.)
그리하여 혹시 이난아 씨의 번역체를 거치면서 문장이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조금 궁금하더란 겁지요. 그런데 이런 경우엔 원문 좋고 번역 좋은 좋은 합작일 확률이 더 높을 거 같아요. ^^
 
인간 희극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9
윌리엄 사로얀 지음, 안정효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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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영어 제목이 <The Human Comedy>. 이걸 ‘인간희극’으로 번역하는 건 난센스라고, 이 책의 역자 안정효도 뒤편의 작품해설에서 분명히 했다. 안정효는 제목으로 <인간극장>이 어울린다고 단정하며 심지어 “《인간희극》이라고 우리나라에서는 제목이 굳어진 《인간극장》은 1943년에 발표되었고”라 운운하고, 이걸 굳이 ‘인간희극’으로 번역하는 것은 “단테의 《신곡》이 Divina Commedia라고 해서 ‘하나님의 희극’이라고 번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꼬았다. 그럼 역자인 안선생이 출판사한테 딱 부러지게 주장해 <인간극장>으로 제목을 바꾸지 말이야, 자기주장을 작품해설 자리에서만 불평하듯 설파할 건 또 뭐야. 문학동네를 필두로 다른 출판사에선 그냥 <휴먼 코미디>로 제목을 다는 경우도 많다. 그냥 그렇다는 것. 굳이 시비하지는 않겠다. (시비할 거 다 해놓고 이런 말을 또 써놓는 심보는 뭐냐고? 내 맘이지.)
 작가 윌리엄 사로얀은 아르메니아 이민자 가정의 아들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단다. (이하 네이버 지식백과, ‘해외저자사전’에서 참고함) 세 살 때 작가인 아버지가 사망해 윌리엄과 동생들은 고아원에 맡겨져 5년 후에야 다시 가족이 함께 모여 살았으며, 이때부터 윌리엄은 학업과 가정생활을 이어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해야 했단다. 이 모습은 방과 후에 전보배달원 일을 하는 주인공 호머 매콜리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또 작품 속에 아르메니아 이민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관계가 있을 듯. 아르메니아. 나는 아르메니아, 하면 위고의 책을 통해 알게 된 바르톨로메오가 떠오른다. 앙리 4세 시절에 가톨릭  교도에 의하여 벌어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밤의 학살이 아니라, 당시 터키 영토의 일부였던 아르메니아에서 예수의 말씀을 전하다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다 죽은 기독교 성인. 물이라고는 큰 호수 하나 있고, 사방이 육지로 막혀 바다 구경을 할 수 없는 작은 땅. 딱 거기까지인데 허튼 소리한다고 산채로 사람의 가죽을 벗겨 죽인 종족의 후손들도 글을 쓰고 소설도 썼다. 물론 그들 탓이 아니다. 유럽과 서아시아 일대의 고문/사형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냥 해본 얘기다.
 작가 윌리엄 살로얀은 이 재미난 책을 타쿠히 살로얀이란 이름의 누군가에게 헌정한다. 헌정사를 보면 아르메니아에 있는 자신의 선대의, 또는 현재 아르메니아에 살고 있는 누군가다. 영어로 된 책이 아르메니아 언어로 번역이 되어 그가 읽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고, 특히 이런 문구가 눈에 띈다.
 “이 이야기는 당신을 위해서 썼습니다. 당신이 이 작품을 좋아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당신이나 우리 집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엄격함과 경쾌함을 융화시키며 가능한 한 쉬운 글로 이 작품을 썼습니다. (중략) 당신에게는 분명히 만족스러울 터이니, 그것은 이 작품을 당신의 아들이 썼으며, 그토록 좋은 의도에서 썼기 때문입니다.”
 일찍 작고한 아르메니아 이민자의 아들이 소설을 썼다. 아르메니아 출생일지도 모르는 작가의 아버지에게 헌정했을 수도 있고, 그곳에 사는 선조 또는 모든 아르메니아 사람을 대표하는 이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지칭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에서 작가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일요일 오후에 자동차를 타고 간 피크닉 장소에서 눈에 띄는 이탈리아 사람들, 그리스 사람들, 세르비아 사람들, 아르메니아 사람들 모두가 미국인이라고.
 “미국인들이지! 그리스인, 세르비아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멕시코인, 아르메니아인, 독일인, 흑인, 유대인, 프랑스인, 영국인, 스코틀랜드인, 에이레인, 다 꼽아보라구. 그게 우리 민족이니까.”
 이민자들로 구성된 위대한 아메리카 합중국이 자신의 모국이라고 반듯하게 선을 긋는 가운데, 불행하게 아시아 사람은 반듯한 선 안에 들어온 종족이 하나도 없다. 전쟁 중이니 식민지 조선을 포함한 일본인은 빼더라도(사실 독일인을 포함시켰으니 일본만 빼는 것도 말이 안 된다만)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인, 그에 못지않은 인도인, 인구에 관한 한 아쉬울 거 없는 인도네시아인, 인도차이나 반도 사람들에 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이해하자, 이해해. 책을 낸 당시가 1943년. 사로얀의 입장에선 거기에 흑인을 집어넣는 것도 쉽지 않은 용기였을 수도 있다. 근데 도시에서 가장 험악한 우범지대로 차이나타운을 꼽은 건 뭐지? 하여간 그렇다는 말씀. 왜 이리 유별나게 까탈을 잡느냐 하면, 정말 특별하게 착하고 아름다운 심성을 지닌 사람들만 등장시키는 선량한 보통 사람들의 집합체인 <인간희극>에서 가장 강조한 것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를 믿는 미국인의 일반적 특성이기 때문.
 정말 읽어보시라. 유년, 소년, 청소년, 처녀총각, 결혼적령의 젊은 남녀, 기혼자, 중년, 장년, 노년 등 모든 등장인물이 딱 한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착한 역할의 천사들이다. 악당 한 명조차 결국 다른 천사들에 의하여 용서를 받고, 강도로 등장하는 젊은이마저 삶의 곤고함에서 진짜로 믿을 만한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그냥 시험을 해봤을 뿐. 부유하고 훌륭한 심성을 지닌 젊은이와 가난하고 훌륭한 심성을 지닌 젊은이들이 등장해 만들어내는 전쟁 중 미국의 지방도시 이야기.
 캘리포니아 한 구석에 이타카라는 작은 도시가 있어, 도시 안의 아르메니아 출신 가정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따뜻하고, 선량하고 그래서 눈물깨나 빼기도 하는 이야기. 근데 이런 소설은 청소년기에 읽어야 좋을 거 같다. 아름다운 이야기에 감동하기엔 내가 너무 낡았다.


 * 이타카. 어디서 들어보신 도시 이름일 걸? 책의 주인공이 호머 매콜리. 이 아이가 열네 살이고, 네 살 먹은 참 괜찮은 유년의 동생이 있는데 이름이 율리시스 매콜리인 거. 아이의 특기이자 가장 즐겨하는 일이 이타카에서 벌어지는 온갖 기이한 일, 구경거리를 쫓아다니며 관찰하는 것. 작명부터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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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20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낡았는지 아닌지 조만간 꼭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ㅎㅎㅎ

Falstaff 2018-07-20 16:06   좋아요 0 | URL
ㅋㅋㅋ
분명한 건, 이 소설이 독자를 울린다는 겁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착한 소설이더군요.
전 착한 것들하고 좀 척이 져서요. ^^;;
 
희망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3
앙드레 말로 지음, 김웅권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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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 읽은 앙드레 말로는 딱 세 권. <인간조건>, <왕도> 그리고 <정복자들>. 두 번째 작품만 인도차이나에서 문화재 약탈한 전력 또는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고 나머지 두 편은 중국혁명의 과정에서 벌어진 일을 정말 실감나게 쓴 책들이었다. 이 세 권의 책을 흔히 말로의 동양 3부작이라고 하는데, 이에 반해 <모멸의 시대>, <희망>, <알텐부르크의 호두나무>를 서양 3부작이라 한단다. 이 중에서 <....호두나무>는 1980년대 중/후반 직장인이 거의 그랬듯 한 달 정도 걸려 억지로 읽은 기억이 난다. 앙드레 말로 전집 가운데 한 권이며 혹시 일어 중역본 아니었을까?(‘혹시’다, 혹시. 그랬다는 게 아니고!) 그리 오래 걸려 꾸역꾸역 읽어치우느라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말로의 <희망>이란 제목을 딱 보았을 때, 이 책을 구입하는데 조금도 망설임도 없었으며, 엉뚱하게도 수수께끼 하나를 떠올리면서 결제하기 버튼을 클릭했다.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다.
 “어두운 밤에 환영幻影은 무지개 색으로 날개를 펼쳐 끝이 없이 어두운 인간의 위로 춤추며 날아오른다. 모든 이는 이것을 기원하고 탄원한다. 그러나 환영은 새벽이 되면 사라진다. 마음  속에서 다시 살아나기 위해 밤마다 태어나 아침에 죽는 것! 이것은?”
 결혼하러 온 이국의 왕자에게 수수께끼를 내서 맞히지 못하면 목을 뎅겅 자르는 이색적인 취미를 자랑하던, 스핑크스의 유일한 친구이자 중화의 아름다운 공주 투란도트. 이 공주님이 내는 첫 번째 수수께끼를 듣고, 중화에 의해 정복당한 왕국의 왕자 칼라프는 이렇게 대답한다.
 “말 그대로! 다시 되살아난다. 다시 되살아난다! 환영은 나를 유혹해 희열 속으로 들어간다. 투란도트, 그것은 바로 ‘희망’!” La Speranza!
 어떤 장면인지 들어보실까?

 

 

 말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조건>과 <정복자들>의 무대가 중국이었으니 나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정작 작품의 무대는 1936년 7월 프랑코에 의하여 저질러진 반정부 쿠데타가 터지고 본격적인 내전상태로 진입한 다음 초기 여덟 달. 물론 쿠데타는 1939년 3월에 파시스트 군부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말로는 1936년에 조종사로 참전해 직접 국제비행대國際飛行隊 “에스카드리유 에스파냐(이후 ‘앙드레 말로 비행대’로 다시 명명)”을 조직하고 무려 65회의 출격을 감행하다 부상을 당해 귀국, 이듬해인 1937년에 작품 <희망>을 썼다(책 뒤의 작가 연표 참고했음). 나중에 전세가 역전이 되어 프랑코 개자식이 쿠데타에 성공할 줄은 몰랐겠지. 그래서 내전을 소재로 한 소설의 제목을 <희망>, 즉 앞날에 대한 밝은 전망이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내가 읽은 스페인 내전과 관련이 있는 책들로는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살라미나의 병사들>,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가 대표적이다. 아, 페터 바이스가 쓴 <저항의 미학>에서도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가 국제여단에 참가하기 위해 내전 중인 스페인으로 떠나는 장면이 나오기는 한다. 조지 오웰의 찬가에서 그(라고 추정할 수 있는 주인공 ‘나’)는 시에라 산맥 중턱의 참호에 몇 달 동안이나 하는 일 없이 지루해 미치려고 하다가, 하루는 어디서 누가 쐈는지도 모르는 총알에 목을 맞아 귀국해야 하는데, 스페인에 있던 내내 공산주의 안의 권력투쟁, 즉 코민테른에 의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차별과 탄압을 불평하는 게 다이며, <살라미나의 병사들>에선 내전 말기 포로로 잡히는 순간 파시스트 병사의 선처를 받아 무사히 살아서 프랑스로 넘어온 사람의 이야기인 반면, <희망>은 정말로 말로답게 치열한 전투장면과 전투 속에서 유독 빛나는 영웅의 모습까지 묘사하는 진짜 “전쟁소설”이다. 자신이 직접 전투기를 몰고 적진에 침투해 공중전 및 폭격을 감행해봤기 때문에(그것도 65회나!) 실감나는 장면의 묘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역시 앰뷸런스 운전병으로 복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를 썼다. 그러나 그에게는 바르셀로나 호텔 바에서 쿠바산 시가를 입에 물고 코냑을 홀짝거리며 소설을 쓰는 이미지가 더 와닿는 건, 왜? 헤밍웨이는 내전이 끝난 다음에 작품을 써서? (아, 난 왜 헤밍웨이와 궁합이 맞지 않는 걸까!)
 내가 읽은 스페인 내전을 무대로 한 작품들의 공통점, 공통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 당대 세계의 파시즘 국가/정부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독일 히틀러, 중국의 장제스, 일본 군부와 새롭게 대두하고 있는 스페인의 프랑코 정도를 들 수 있으며, 이들의 후손들은 라틴 아메리카와 극동, 동남아시아에서 세기가 끝날 때까지 쉼 없이 등장한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로 대표하는 유럽의 맹주와 미국은 왜 스페인 정부를 지원해 프랑코를 초장에 박살내지 않았을까, 하는 점. 프랑코 군부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 정부로부터 전차와 전투기 등을 지원받아 당시 수준으로 거의 완벽하게 기계화에 성공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강철조각을 인간의 몸에 박아 넣거나 관통시킬 수 있었던 반면, 정부군(공화군)은 거의 재래식 무기로 힘겹게 파시스트들과 겨룰 수밖에 없었으니, 공화군의 패배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작가도 입을 열지 않는다. 오히려 스페인 정부군을 위해 전투기를 지원한 나라는 소련밖에 없었다. 난 스페인 내전에 관해 공부한 적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러 책을 읽고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보니, 스페인 내전에서 과반 이상을 공산당원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차지하는 국제여단이 공화군에 속해 전쟁을 하고 있고, 거기에다가 세계 공산주의의 어머니국가 소련이 지원을 하고 있었으니,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열강들은 오히려 프랑코를 밀어주고 싶었지 않았을까? 차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너희 내전에 함부로 우리가 참전할 수 없다며 손을 딱 떼는 것으로 프랑코를 간접 지원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이렇게 생각이 들 정도로 영국, 프랑스, 미국의 작품 속에서 부르주아 국가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강박과 경원은 심각한 수준이라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프랑스 언론인, 그래봤자 요즘 말로 프리랜서인 나달이란 작자가 등장하여 스페인의 상황을 조국에 전하는 걸로 먹고 사는데, 나달과 프랑스 인의 스페인 내전을 보는 시각은 이랬다.
 “그(나달)의 신문은 100만 명 이상의 무산자들이 읽고 있었다. 따라서 사장을 위해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주의와 이들 호감 가는 (특히 프랑스인) 비행사들에 대한 찬사이고, 용병들에 대한 특이한 이야기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분이고, 죽은 자들과 중상자들(유감스럽게도 하이메는…… 결국 그는 스페인 사람에 불과했다)에 대한 감동적인 눈물이지―공산주의가 아니었고 정치적 신념 같은 것도 가능한 한 최소화해야 했다.”  (380~381쪽)
 프랑스 인들이 마지막으로 경험하는 낭만적 전쟁이 바로 스페인 내전 아니었을까. 어떤 정치적 신념도 중요하지 않았으며 오직 전투 중 극히 드물게 등장하는 인간애와 영웅담만이 필요했던 마지막 전쟁. 이 인용은 나중에 드골 정권 하에서 무려 10년 동안 문화부장관을 역임하는 앙드레 말로 자신이 청춘시대 때 객관적으로 바라본 프랑스와 프랑스 사람들의 진실이었을 것이다. 정의는 어디로 가든지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상태. 그리하여 내전이 끝나자마자 프랑코의 절친이 된 히틀러는 그해 9월 폴란드를 침공하고 다음해 1940년 6월엔 무참하게도 프랑스 파리를 함락해버렸다.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면 과할까? 열강들 스스로가 빌미를 준 거라고?
 그건 그렇고, 이 책 <희망>에서 희망은 무엇일까? 그걸 간단하게 몇 문장으로 이 자리에서 쓸 수는 없고, 공중전 중 눈에 부상을 당한 병사의 아버지이자 고미술학자가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학자 지원병 스칼리에게 하는 대사로 각자 이 책에서 말하는 “희망”이 무엇일까를 짐작하시기 바랄 뿐이다.


 “인간에게는 무시무시하게 강렬한 희망이 있습니다…… 부당하게 단죄당한 자, 어리석음이나 배은망덕 혹은 비겁함을 너무도 많이 만났던 자는 희망을 미루어야 하지요…… 혁명이란 무엇보다 예전에 영원한 삶이 맡았던 역할을 하는데, 이것이 혁명의 많은 특징들을 설명해줍니다. 각자가 오늘날 정부의 형태를 위해 기울이는 노력의 3분의 1만 자기 자신에게 기울인다면, 스페인에서도 살 만해질 겁니다.” (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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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9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우짜 이럴 수가 !~

<그랜드 호텔>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제가
읽다 만 책들만 그렇게 딱딱 골라서 리뷰를
해주시는지 깜딱 놀랐습니다.

Falstaff 2018-07-19 15:12   좋아요 1 | URL
ㅋㅋㅋ 아, 그랬습니까?
그럼 놀라지 않으시게 다음 독후감을 예고해야겠습니다.
담엔 윌리엄 사로얀의 <휴먼 코미디>고요, 그 담엔 사바하틴 알리의 <모피 코트 마돈나>입니다. ㅎㅎㅎ

잠자냥 2018-07-19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 읽으셨어요? ㅋㅋㅋ 전 두꺼워서 일단 모셔만 두고... ㅋㅋㅋ(모셔만 둔 책이 쌓입니다.) 저 위에 레샥매냐 님은 읽다가 그만 두기라도 하셨지, 전 첫 장 들추지도 않은 ㅋㅋㅋㅋ 독후감 예고제 좋네요. 윌리엄 샤로안 작품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인간 희극>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문예출판사 책을 사두고 아직 안 읽... ㅋㅋㅋ (읽지 않은 책을 다 읽고 책을 사야 할 텐데 말이죠)

Falstaff 2018-07-20 08:1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문예출판사 책인데요, 제목이 맘에 들지 않아서 걍 <휴먼 코미디>라고 썼답니다. ㅎㅎㅎ
 
그랜드 호텔 대산세계문학총서 145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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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빈의 부르주아 유대인 가족에서 태어나 잘 자란 작가 비키 바움. 오케스트라의 하피스트로 활약하며 독일로 이주해 음악활동을 계속 했단다. susanbkason.com에 의하면, 아이들을 재운 다음에야 조금씩 글을 써서 발표했다고 한다. 바로 이 책 <그랜드 호텔>을 써서 세계적인 스타덤에 할리우드에 진출을 했으며, 거기서 정말로 미합중국을 사랑하게 되어 가족 전부를 불러와, 결과적으로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학살에서 가족을 구하게 됐다고 한다. <그랜드 호텔>의 원래 제목은 "Menschen im Hotel" 즉 “호텔 사람들” 정도이겠지만 영어권에서도 제목을 <그랜드 호텔>로 했다. 이 정도면 작가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적당하겠다. 여러 권의 책을 냈으나 한국어 번역본은 <그랜드 호텔> 하나만 눈에 보인다. 책 앞날개 보면, 하필이면 늙고 좀 추레하게 나온 사진을 실었다. 이런. 젊어서 찍은 사진 소개한다. 출처는 susanbkason.com 이다.

 

 

 책을 한 마디로 하면, 재미있다. 첫 페이지를 열면, ‘젠프’라는 이름의 노련하고 정중한 도어맨이 전화실電話室에서 나온다. 전화실이 무엇인가 하면, 1920년대 베를린의 최고급 호텔 안에 마치 공중전화 부스 비슷하게 몇 개를 두어, 숙박인을 찾는 전화가 왔는데 전화를 받을 숙박인이 객실이 아니라 로비 등에 있을 경우, 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만든 작은 공간이다.
 그럼 왜 젠프가 전화실에서 나왔느냐. 아내가 아이를 낳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아이가 도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인 젠프는 아내의 출산이란 사적인 일에 전문직으로의 명성을 흐리지 않기 위해 능숙하고 친절한 손님 접대에 응한다. 호텔엔 젠프처럼 프로 의식으로 무장한 호텔리어들이 몇 명 있다. 리셉션 총책은 슐레지엔의 로나 백작 가문 태생으로 장교로 참전하고 전역한 전형적인 귀족이지만 다른 귀족들을 접대하기 위해 자신을 낮출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서먹함, 서걱거림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거대 호텔 체인의 사장 아들 게오르기 역시 훗날 자신이 거대 호텔체인을 경영하기 위하여 경험상 일을 하고 있음에도 호텔의 하급 일을 하는 젠프의 조수를 하면서 충실하게 일을 배우고 있다. 호텔 전속 수사관 필츠하임은 중요한 사건일 경우 새벽에도 출동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한다. 그러나 호텔의 주인공은 이들 (좋은 말로)호텔리어, (그냥 말하자면)종업원들이 아니라 거의 부르주아들로 구성된 숙박인일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베를린의 최고급 호텔에서는 갖가지 비즈니스 계약을 위해 점잖고, 매너 넘치고, 때론 위협적이며 비열하기도 하며 가끔가다간 거짓과 사기가 판을 치는 협상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한편, 하루도 빠짐없이(현충일만 빼고) 무도회가 벌어져 청춘들의 교통사고를 장려하며,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르주아 숙박인의 호주머니를 노린 사기꾼과 고급도둑들이 눈알을 함부로 굴리고 있기도 하다. 가끔가다가 시골에서 올라온 시골부자들이 최고급이란 타이틀 하나만 염두에 두고 호텔방이 좋은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비싼 돈을 주고 묵기도 한다. 이들이  (당시 법률에 의하여)자신의 주소와 직업을 숙박계에 적는 순간 동등한 ‘숙박인’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오터른슐라크 박사. 의사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플랑드르 전투 중 얼굴 바로 옆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바람에 얼굴 반쪽은 잘 생긴 모습 그대로인데 반하여 다른 반쪽은 온통 꿰맨 자국과 의안으로 뭉개진 인물. 그는 언제나 로비의 소파에 앉아 코냑 한 잔을 소파 손잡이 위에 올려놓은 채, 또는 코냑 잔을 빙빙 돌리며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한 시간에 두 번 가량 도어맨 젠프에게 다가와 묻는다. “내게 편지 온 거 없나?” 젠프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걸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빼지 않고 뒤를 돌아 확인 차 편지통을 들여다본 다음 대답한다. “오늘은 아직까지 온 것이 없습니다, 박사님.” “나를 찾아온 사람은 없었나?” “없습니다, 박사님.” “전보는?” “오늘은 없습니다, 박사님.” 어렵게 구한 모르핀을 날마다 하나씩 투약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오터른슐라크 박사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굴까? 혹시 고도?
 약간 작은 키이지만 세련된 외모와 의상, 무엇보다도 놀라울 정도로 잘 생긴 얼굴과 체격에다가 놀라운 춤 솜씨까지 겸비한 가이거른 남작. 사교에 능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여 아주 쉽게 사람을 사귀는 경향이 있는 이 남자의 턱 주위에 눈에 잘 보이지 않기는 하지만 깊은 상처자국이 나 있다. 이것 역시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작지 않은 부상이었다. 나중에 밝혀지는바 군의관 오터른슐라크 박사가 포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에도 정성껏 꿰매 최소한의 흉터만 남기고 잘 아물었던 것. 비록 나중에 박사 자신은 돌팔이 의사임이 분명한 아무나가 그냥 마구 얼굴에 난 상처들을 꿰매버려 엉망이 됐을지언정. 젊은 나이에 삶의 목표를 전쟁터에 남기고 돌아와 아무 하는 일 없이 최고급 호텔의 가장 비싼 방에서 호의호식하는 삶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남작. 삶의 질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잘 생긴 남작이 할 수 있었던 오직 하나는?
 평생을 경리보조로 근근이 먹고 살던 작센 주 방직공장의 말단 봉급쟁이 오토 크링엘라인 씨. 도저히 베를린 최고급 호텔에 어울리지 않는 두텁고 낡은 외투와 자신의 발보다 적어도 두 수치 큰 진흙 뭍은 신발을 신고, 험하게 낡고 투박한 인조가죽 트렁크 가득 짐을 담은 채 외투 주머니에서 버터 바른 바짝 마른 빵이 로비 바닥에 툭 떨어진 걸 얼른 주워 다시 호주머니에 넣는 소시민. 위암에 걸려 위를 통째로 잘라내고 이제 남은 생이 몇 주밖에 남지 않아, 자신이 평생 번(벌어 마누라 모르게 꼬불쳐 둔) 돈과 생각지도 못한 고모에게 상속받은 약간의 돈을 몽땅 털어, 죽기 전에 회사의 프라이징 총회장이 베를린에 올 때마다 묵는 호텔의 가장 좋은 방에서 한 번 자봐야겠다고 작심한 이.
 정말로 프라이징 총회장은 바로 그날, 이 그랜드 호텔에 짐을 풀고 동종업계 경쟁사이기도 한 켐니츠 사와 합병을 위한 협상을 진행한다. 원래 크링엘라인 씨가 다니는 회사의 말단 직원이었던 프라이징 총각은 당시 회장이었던 영감의 딸과 눈이 맞아 졸지에 고속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신분상승에 성공했으나, 약혼 하루 전까지 크링엘라인 씨의 장인에게 단돈 몇 마르크 씩을 꾸어 쓰고는 했던 것. 천성이 무식하고, 세련되지 못하고, 돈 무서운 줄 잘 아는 이 구두쇠가 비즈니스 협상을 하려는데 온갖 것이 전부 다 자신을 방해하기 위해 몰려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황은 악화되기만 하던 차, 정작 협상 테이블에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받은 전보의 내용과 완전히, 180도 다른 내용으로 뻥, 새빨간 거짓말 대포를 터뜨림으로써 협상안에 상대의 늙고 노회한 회장의 서명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좋은 일엔 거의 언제나 더 좋은 일이 이어지는 법. 베를린에서 급하게 구한 일회용 속기, 타이피스트 겸용 비서가 완전히 연예인 급이라, 거짓말 대포를 수습하기 위해 떠나야 하는 영국의 맨체스터에 그녀를 동행하기에 이른다. 조건은 1,000 마르크와 영국에서 옷 한 벌.
 하지만 인생이 마음대로 돼? 하필이면 프라이징 총회장, 호텔방에서 사랑하는 애인하고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똑, 두드리고, 회장은 직장에서의 버릇으로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 했다. 그게 누군가하면 26년 동안 방직공장의 경리보조로 청춘을 바쳤으나 아직도 사택의 보일러를 회사에서 제때에 고쳐주지 않아 마누라로부터 숨 쉬는 데 고통스럽다는 편지를 받아야 하는 우리의 크링엘라인 씨. 이제 자신에게 남은 인생은 몇 주에 불과한 이 사람은 애인 앞에서 프라이징 회장의 구질구질한 과거사를 몽땅 까발리고, 그것도 모자라 울퉁불퉁 살이 찐 저 인간이 얼마나 악랄한 악질 기업가인지를 성토해버리니 협상을 잘 마무리 짓고 예쁜 아가씨와 하룻밤을 지낸 프라이징 씨가 아주 제대로 체면을 구겨버리고 만다. 그랬겠지?
 이렇게 남자들만 나오는 건 아니라서, 일찍이 로마노프 왕가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사랑을 받아 지구에서 가장 최고급 진주 목걸이와 진주 귀고리, 진주 반지를 선물 받은 발레리나 엘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 그루진스카야. 근데 그건 옛 이야기. 지금은 비록 16세 때와 똑같은 몸무게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벌써 손자까지 둔 늙은이. 춤을 춘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공연 전마다 무대공포증에 의한 히스테리 현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지독한 깽판을 부리는 공포스런 주인공. 그러나 아직도 무대가 끝나면 몇 번의 커튼콜을 받는지, 관객이 앙콜을 요구하는지 아닌지, 갈채의 데시벨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척도이기 때문. 어느 날, 자신은 당연히 모르지만, 자기를 짝사랑하는 크링엘라인 씨가 특별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밤, 1부를 마치고 관객이 거의 없어 썰렁하기 그지없는 무대에서 프로다운 혼신의 공연을 마쳤으나 겨우 한 번의 커튼콜을 받고 숙소로 도망쳐, 수면제 두 알을 먹은 상태에서, 진한 차에 다시 수면제 한 통을 다 넣어 잘 섞은 다음 탁자 앞에 올려놓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마지막으로 베를린 시내의 야경을 바라보려 베란다 문을 여는 순간, 난데없이 다가온 아도니스. 그게 누구? 안 알려줌.
 모든 사람은 회전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회전문을 열든지 아니면 뒷문의 시멘트 계단을 통해서든지 밖으로 나가는 곳. 그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인생의 요지경. 그리고 희한하게 연결되는 인간들의 끈. 이걸 영화로 만들었다니, 영화도 정말 재미있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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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18 1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는 사놓기만 하고 아직 안 읽었는데, 비키 바움 젊은 시절 외모가 한 미모하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책 앞날개에 있는 사진으로는 전혀 유추할 수 없는 외모랄까... ㅎㅎ 늙음이 뭔지 원... 저도 다 읽고 나서 별 다섯 개 중 왜 한 개를 빼셨을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18-07-18 16:23   좋아요 1 | URL
재미있는 책입니다!
근데, 독일 유대인 집안에서 하피스트로 오케스트라에서 활약할 정도 부르주아인데요, 이이가 글쎄 베를린의 유명 호텔 두곳에서 객실 정리 담당 메이드 일도 했다는 겁니다. 그때 경험하면서 주워 들은 이야기를 모아모아 책을 썼다네요.
이해 안 가는 것이, 메이드는 당시엔 상당히 천한 직업인데, 오케스트라의 다른 악기도 아니고 하피스트라.... 그죠? 책 쓰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나 싶기도 하고요.
ㅎㅎㅎㅎ 읽으신 다음에 백자평 말고 꼭 서평을 올려주세요!

Falstaff 2018-07-18 16:27   좋아요 0 | URL
아, 또 있습니다.
<그랜드 호텔>이란 제목으로 이 책을 영화로 만들기도 했거든요. 그게 무려 1932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고 해요. 전 영화를 보지 않아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그루진스카야 역을 글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레타 가르보가 했다는 겁니다.
실제 책을 보면 가르보보다 체격이 훨씬 작아야 할 거 같지만, 분위기가 가르보하고 아주 딱! 떨어집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