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소녀 쟈지
레몽 크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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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간 번역한 소설책 읽으며 주인공인 척하는 작가가 레몽 크노의 <지하철 소녀 쟈지>를 대단한 작품으로 소개하는 바람에 2008년에 간행해서 아직도 팔리고 있는 초판 1쇄를 정가 다 주고 사 읽었다. 초판을 찍은 다음에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쇄를 살 수 있는 소설이라면, 다른 건 다 몰라도 하여간 이 작품이 우리나라 독자들한테는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도마뱀출판사의 매력적인 희극 <바보들의 결탁>은 아직도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반면 <지하철....>은 그러하지 못하니까.
 쟈지라는 소녀. 어느 날 쟈지가 집에 들어가니까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사랑스런 딸을 끌어안고 여기저기 얼굴에다 뽀뽀를 해대더니 갑자기 주물러대기 시작했다. 절대로 안 된다고 아빠한테 말하니 술에 잔뜩 취한 아빠는 문 쪽으로 뛰어가 열쇠로 잠그고 영화에서처럼 눈알을 굴리며 하하하하 웃어젖히는 거였다. 그러더니 추잡하게도, 널 망쳐버리고 말겠어, 라고 으름장을 놓았는데 입가엔 거품까지 조금 물려 있었다. 아빠를 피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고주망태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문만 잠겨있지 않으면 냅다 도망을 치겠는데 좁은 집 안이라 결국을 잡혀버렸고, 다시 온몸을 주무르고 있던 순간, 현관문이 살며시 열리며, 볼이 불그스름한 돼지고기 장수 조르주 씨가 미리 날을 세워놓은 도끼를 든 엄마가 들어오더니 사정없이 아빠의 머리통에 도끼날을 박아 넣었다. 조르주 씨는 엄마의 애인이었으며, 딸을 보호하기 위해 (하필 바로 전날 애인 조르주 씨가 날을 새파랗게 세운 도끼로 머리통을 내리쳐)남편을 살해한 엄마 잔 랄로셰르는 입심 좋은 변호사를 만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끔찍한 사건을 읽는 모든 분들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이건 쟈지가 한 이야기. 정말 그리 되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설의 작가 레몽 크노조차 모를 확률이 높다.
 애인이 생기면 가족, 하나밖에 없는 딸 같은 건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쟈지가 말하는 엄마 잔은 애인과 2박 3일의 연애를 위해 딸을 파리에 사는 외삼촌 가브리엘에 맡기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거구와 몸집에 어울리는 완력의 소유자 외삼촌 가브리엘은 게이 클럽에서 뭉실뭉실한 허벅지의 털을 싹 면도하고 발레복을 입은 채 <빈사의 백조>를 춤으로써 클럽에 모인 모든 호모들에게 포복절도한 웃음을 주는 걸 직업으로 하는 선량한 사람. 역시 총명하고 유순한 마르슬린 외숙모와 자식은 없지만 순탄한 가정을 만들어가는 그냥 보통의 파리 시민이다. 친한 친구로 택시 운전을 하는 샤를이 있으며, 샤를은 아파트 일층에 있는 식당의 종업원 마들렌과 책의 뒷부분에서 약혼을 한다. 식당의 주인이자 건물주이기도 한 투란도트 씨는 가브리엘의 슬하에 아이가 없어서 집을 빌려주었는데 발랑 까진 쟈지가 며칠이긴 하지만 아파트에 살게 된 것이 못내 마땅하지 못한 상태.
 제목이 지하철 소녀 쟈지인 만큼 시골 출신 쟈지는 파리에 가면 반드시 지하철을 타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아쉽게도 파리에선 지하철과 일부 공용 버스가 파업을 하고 있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65세까지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꼬마.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언제나 쉬지 않고 줄지어 입학하는 꼬마 학생들을 괴롭혀주고 싶어, 장래희망을 초등학교 교사로 정해버린 악동. 정확한 나이는 끝까지 밝히지 않는데 대강 보면 만 9세에서 10세 가량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저질 지방 주간지 <선데이 파리>, <주간 피가로>, <빨간 르몽드> 같은 걸 탐독하여 남녀관계 및 유사행위를 숱하게 포함한 패관문학에 심오한 견해를 밝힐 수 있을 만큼의 재주를 보유했다. 이 아이가 세계의 수도라 일컫는 파리에 와서 좌충우돌을 일삼는다.
 그럼 쟈지를 중심으로 하는 코미디냐고? 아닌 거 같다. 쟈지의 돌출행동을 빌미로 하는 숱한 언어의 변화와 중의, 기타 등등이 깔려 있어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면 동의하지 못할 코드가 범벅이 된 듯하다. 발문을 보면 역자 정혜용이 이 책을 대표적인 “번역불가”의 관을 쓴 작품이라 설명하고 있는 바, 정말 읽어봐도 역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막 책을 다 읽고 덮었는데, 한 마디로 소감을 말하자면 이렇다.
 “대략 난감.”
 1959년에 출간한 일종의 희극 작품이지만, 신기하게도 ‘재미있으나 결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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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 민음의 시 210
심언주 지음 / 민음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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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비는 게릴라처럼


 

 


 풀잎에 나뭇가지에
 눈알을 매달고 우글거리지.

 

 봄비는
 떼거리로
 묵은 플라타너스 잎을 에워싸지.

 

 무거워지는 플라타너스의 명분과
 빗소리와
 시간,

 

 나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양철 지붕의 투덜거림을 세지.
 숱 많은 봄비의 머리카락을 세지.

 

 봄비는 한랭전선마다
 비누 냄새를 널어놓지.

 

 봄비는 아무한테나 시비를 걸고
 나는 민들레 곁에서
 젖은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지.

 

 여승이 쪼그리고
 거울에 뒤통수를 비춰 보다가 웅덩이를 보다가

 

 한 솥 가득 끓고 있는 봄비.

 

 내 실핏줄이 터지고 있지. (전문)



 이 시가 시집 가운데 가장 좋아서 전문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시집 <비는 염소를 몰고 올 수 있을까>에서 유일하게 시를 읽으며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시이기 때문이다. 첫 연부터 봄비가 풀잎에, 얇은 나뭇가지에 떨어져 방울방울 맺혀있는 장면이다. 그걸 시인은 “눈알을 매달고 우글거리지”라고 표현한다. 나름대로 참신한 시어다. 플라타너스는 잎이 널찍하다. 빗물이 눈알처럼 오글거리며 매달려 있지 않다. 빗물에 적셔져 있는 모습을 “봄비는 / 떼거리로 / 묵은 플라타너스 잎을 에워”싼다고 말한다. 이하는 읽는 분이 직접 상상해보시라.
 이 시 말고는 오리무중. 난감한 시어들이 넘실대 시인이 “시”의 옷을 입혀 주장하고 있는 바가 과연 무엇인지 도무지 추리할 수 없다. 이럴 때 시적 조예가 가비야운 독자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우린 평론가라고 부른다. 이 책 뒤편에 ‘김수이’라는 이름의 문학평론가가 “질문만이 존재의 가능하고 유일한 화법?”이란 제목으로 일반 독자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심언주의 시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 부분 부터 역시 문학평론가라는 이름은 그냥 얻은 게 아님을 증명한다.
 “어떻게 하면, 언어의 안에서 또 밖에서 의미의 공회전을 멈출 수 있을까. 의미 없는 것,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것, 의미가 모호한 것 들을 언어화하려는 가망 없는 작업을 의미에 대한 강박 없이 수행할 수 있을까. 언어 속에서 말할 때나 언어의 밖에서 침묵할 때, 의미 없는, 의미 아닌, 의미를 넘어선, 또 그 밖의 모든 언어를 우리가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도 그 한계에 갇히지 않을 수 있을까.” (87쪽)
 라고 하면서, 의미의 언어화를 직업으로 삼는 시인 심언주의 첫 번째 시집 가운데 <시뮬레이션 - 새>라는 시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나는 부서져 내린 언어의 등에 불을 지핀다. 부서진 언어들이 도르르 말린다. 번데기처럼 웅크린다.” (88쪽)
 나는 양 팔을 번쩍 들었다. 쏘지 마! 항복!
 백기투항이다.
 2004년에 등단해, 2007년 45세의 나이로 처녀시집 <4월아, 미안하다>를 펴낸 범띠 시인의 관심사는 이렇단다. (물론 시인 본인이 아니라 평론가의 의견이지만) 의미 없는 것,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것, 의미가 모호한 것들을 언어화하려는 시도. 과거에도 이런 시도가 없지 않았을 것이긴 하나, 의미가 없는, 심지어 의미가 있다고 우길 수도 없는 것, 의미가 모호한 것들을, 언어화하여 기호로 표시하려는 높은 단계의 시적 실험에 나는 독자라는 이름의 관객으로 참여하고 싶지 않다. 의미 없는 것들은 “의미 없음”의 상태로 의미가 있으니 그걸 기호화 했겠지. 그러나 결과는 기호화한 문자들의 나열은 또다시 “의미 없음”으로 읽힌다는 것. 적어도 내가 읽기에 그랬다. 대표적인 시를 하나 인용한다.




 축구공이 날아가는 동안


 

 

 

 아침에 안 일어나면
 살았나 죽었나
 당신은 꽁치를 뒤집는다
 전복을 좋아하는 당신
 뒤집힌 옷을 뒤집어 세탁 바구니에 던지며
 겉과 속이 뒤집힐 때
 항복을 좋아하는 당신
 당신과 구운 생선의 눈동자를 흘깃거리며
 바둑을 두어도 괜찮을까
 뒤집어 놓은 풍뎅이가 날아갈 확률을 점치며
 축구공을 몰아도 괜찮을까
 흑, 백, 흑, 백이 견해를 바꿔 가며 날아가는 동안
 맨 앞에 선 사람부터 맨 뒤 달리는 사람까지
 발등과
 발바닥과
 눈동자는
 몇 번이나 뒤집힐까
 공이 골문에 다다르는 순간
 공은 당신의 눈치를 살핀다 (전문)



 평론가 ‘님’ 김수이는 이 시를 해설하며, “심언주는, 소통의 진정한 의미는 소통의 달성 여부가 아니라 소통의 열망과 실행 과정에 있다고 믿는다. 소통의 완성도와 순도로 말한다면, ‘당신’도 ‘나’도 용맹 정진하기에는 안팎의 여건이 녹록지 않다”(98쪽)고 말한다. 이 시를 읽으면서 당신도 평론가 ‘님’처럼 시를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의 불통, 소통을 위한 용맹정진도 불허하는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겠나. 평론가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님이 확실하게 증명된다. 나는 진정한 창작은 시나 소설을 쓰는 작가가 아니고, 작가가 쓴 시나 소설을 읽고 그걸 온갖 방식의 이야기로 재창조하는 평론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가끔 든다. 혹시 모른다. 날이 하도 더워 내가 미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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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0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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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1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 대산세계문학총서 147
리온 포이히트방거 지음, 문광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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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18세기 말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유대인 작가 포이히트방거는 책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18세기 말 무렵 서유럽의 거의 모든 곳에서 중세는 말살되었다.”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에서는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치 아래 아메리카 합중국이 독립선언을 했으며, 인권에 대한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뜬 파리 시민들은 위대한 대혁명을 완수하여 공화정을 수립했다. 기존 가치의 급격한 몰락을 발견한 영국의 부르주아들은 보다 굳게 결속하여 혁명사상의 침투를 경계하면서, 왕국의 몰락을 우려하는 합스부르크와 로마노프 왕가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의 고립을 꾀하였으나, 혁명 후 프랑스에는 키 작은 코르시카 사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제1 통령으로 임명되면서 군사독재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책의 무대인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절과 비교하여 별 차이 없는 “완고한 중세가 계속 이어졌다.” 매우 부유한 종교재판소는 성경과 다르다는 이유로, 악마적이란 주관적 판결만 가지고, 때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한 율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간혹 왕실과 힘겨루기를 위한 목적으로 종교재판을 열었으며, 무죄판결은 거의 없는 반면에 심심치 않게 진보적이거나 선량한 사람을 산 채로 태워 죽이고는 했다. “군중은 이단자의 화형식을 열광하며 구경했는데, 그 열광은 투우의 황홀감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죄인이 유죄 판결 후에 뉘우치게 되면, 그래서 교살되어 불태워지지 않게 되면, 군중들은 투덜거렸다. 그러한 ‘신앙 행위’는 즐거운 시간들, 예를 들면 왕의 즉위식이나 혼례식, 아니면 왕세자의 출생 같은 일을 축하하기 위해 자주 거행되었다.”(209쪽)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선왕이 죽고 아직 즉위하지 않은 필리페 2세의 대관식 날을 잡아 하필이면 대규모의 화형식을 거행하는 지 이해할 수 있었다. 화형은 스페인 왕가와 귀족, 백성 모두에게 축제였던 거다.
 여기에 후손 없이 죽어 비어있는 왕좌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루이 14세의 손자가 차지해 카를로스 3세라 했는데, 작 중에서는 그의 아들 카를로스 4세 치하다. 멍청하고 무능하고,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바이올린 연주자에다 간혹 사냥을 즐기는 거구의 귀여운 왕을 대신해, 욕심 많고 음란한 아내 도냐 마리아 루이사와 그녀의 정부 마누엘 고도이가 격랑 속 낡고 큰 배, 스페인의 키를 쥐고 항해하고 있었다. 도냐 마리아 루이사는 파르마 대공국의 공주 출신이고, 마누엘 고도이는 포르투갈 태생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이들은 스페인의 이익과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금, 은, 보석과 자기 후손의 번영과, 더 높은 곳으로의 출세를 위해서 정책을 결정하고,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과 협상을 맺으며, 종교재판관과 주고받기 식 흥정을 도맡는다. 왕가와 최고위 귀족들의 번영을 위하여 스페인 백성에 대해 저질러지는 폭압으로 국민들은 오직 신만이 “끝날 줄 모르는 경제적 궁핍으로부터 구원해줄지도 몰랐다.” (656쪽)
 아메리카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은 필연적으로 이웃 국가들의 진보적 귀족, 지식인들에게 인권과, 자유, 평등, 박애에 관한 개념을 새로이 할 수밖에 없었고, 실제인물 가스파르 호베아노스, 솔라나 후작부인, 마누엘의 악의적인 추천으로 사심 없이 총리직을 맡는 유능한 돈 마리아노 루이스 데 우르키호 등을 등장시켜 진보적 지식인의 대표선수로 활약하게 한다. 부패한 권력 아래, 더구나 권력이 왕에 의한 것이라면 진보 지식인은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 그리하여 호베아노스는 파리에서 돌아와 몇 년 만에 새로 간행한 출판물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체의 종이와 펜을 지급하지 않은 채 구금당하고, 우르키호 총리 역시 자신을 추천한 전 총리 마누엘에 의해 타당하지 않은 혐의로 창문 없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렇게 전반적인 사회를 개관하는 것은, 프란시스 고야와 그의 의식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4세의 궁정수석화가가 됨으로서 궁정의 모든 왕가와 부패한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들의 초상화로 대표하는 일련의 작품들은 아직도 중세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스페인답게 고전적 양식을 띨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결혼이란 거의 대부분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비록 십계명으로 금지하고 있었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는 부부는 서로 노골적인 정부를 두었다. 고야에게도 나이 어린 과부 정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돈 마누엘이 그를 찾아와 과부 페피타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는다. 그러지 않아도 이제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한 정부를 자연스럽게 정리할 기회를 준비 중이던 고야는 기꺼이 그렇게 하고, 서양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서로 사이좋게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고야에게도 높은 신분의 새로운 정부가 생기는 등 귀족사회의 어지러운 성적 이합집산 과정을 통해 고야도, 마누엘로 시골농부의 아들이 점점 스페인 최고의 자리를 향해 올라가는 것.
 그러나 한편, 고야는 진보적 인사들과 의견을 같이하며 종교재판소가 보면 기꺼워하지 않을 그림만 잔뜩 그려놓는다. 책에서는 고야의 정부인 알바 공작비를 모델로 했다고 하고, 백과사전에서는 전 정부였던 페피타를 모델로 그렸다는 <누드 마하>를 비롯하여, 왕권신수설을 거의 완전히 부정하는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종교재판관의 시각으로는 악마주의라고밖에 여길 수 없는 에칭 판화 작품 <변덕>등. 책에선 <누드 마하>로 인해 기어이 종교재판을 받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원래 작가가 고야 시리즈를 두 편의 작품으로 구상하고 정말로 2권을 조금 쓰기도 한 바, 종교재판은 나중에 마누엘이 실각당하고 그가 소유하던 작품이 다중에 공개된 후인데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에서 마누엘은 최후까지 스페인의 최고 권력자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이렇게 잔뜩 써놓은 것은, 고야의 주변이 부패한 왕가와 귀족들, 소수의 진보적 귀족이자 지식인, 그리고 농민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보고 배우고 몸에 익힌 서민적 기질을 모두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화가로 출세하고자 아득바득 공부하면서 당대 궁중수석화가였던 바예우의 여동생과 결혼한 다음에 궁중 태피스트리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들어간다. 그조차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당대 최고라고 불리는 화가의 동생과 결혼했다는 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궁중에 들어간 다음엔 온갖 천박한 왕족과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의 주문대로 초상화를 그려야했고, 궁중수석화가가 된 다음에 비로소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이 변하기 위해서는 화가의 의식이 먼저 변해야 하는 것. 책의 제목을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로 한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림도 변하게 할 수 있도록, 화가 자신의 의식 또는 인식이 변해가는 과정, 길을 그리고 있어서이다. 작품 속에 고야는 초상화로 대변하는 고전주의에서,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서 볼 수 있는 추함의 적나라한 묘사와 화려한 색의 대비를 거쳐, <누드 마하>의 철저하게 금기시됐고, 심하면 화형에 처해질 수 있는 가리지 않은 전면누드의 반 율법적 실험에 이어, 왕족과 귀족들을 악의적으로 사정없이 괴물로 만들어버린 에칭판화집 <변덕>까지 시대적 혹독한 길 또는 진보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꺼운 독일 소설이 그렇듯, 읽으면서 처음부터 재미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나처럼 회화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사람은 더욱 그러하다. 나는 한 100쪽 읽고 나서 다시 첫 페이지부터 시작했다. 앞에 노트북을 켜놓고 고야의 그림들을 함빡 올려놓고,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 어느 것인지 꼽아가며 읽었다. 그러니 좀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카를로스 4세의 가족>에서 스페인 왕의 누나가 얼마나 추하게 그려졌는지, 그러나 추한 모습이 또한 얼마나 재미나는지 발견하는 건 참 재미난 경험이었다. 한편으론 페터 바이스가 그의 책 <저항의 미학>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가며 작품의 미학적 관점을 설파했던 <5월 3일의 학살>이 등장하지 않아 아쉬웠다. <5월 3일의 학살>은 책이 진행하는 과정 이후의 역사, 기어코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공해 카를로스 4세의 아들 필리페 7세를 퇴위시키고 나폴레옹의 형 조세프가 왕위를 차지한 후 벌어진 소위 ‘반도전쟁’ 중이었으니 2부를 썼으면 그 속에 들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책을 읽으며 묘사하는 그림을 인터넷 서핑을 하며 찾아보는 일. 책 읽기에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린다. 그러나 한 작가의 그림에 집중하며 화가의 인식이 변화하는 혹독한 길을 함께 가는 일이라면 심지어 재미있기도 하다.
 더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이 책을 비록 한 생을 살면서 읽어볼만한 책으로 꼽을지언정 작가 포이히트방거가 <고야>의 2부를 쓰지 않은 것이 얼마나 나를 다행스럽게 만들었는지....




* 카를로스 4세의 누이 마리아 호세파의 얼굴을 보시려면 (뿐만 아니라 고야가 왕가 사람들의 모습을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그렸는지 보시려면) 클릭하세요. 옷만 화려하지 생긴 건 멍청하고, 욕심덩어리고, 고집불통의 인간들.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IV_of_Spain_and_His_Family#/media/File:La_familia_de_Carlos_IV.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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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3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기 쉽지 않아 보여서 도전할 엄두가 안 나던데, 역시 쉽지 않은 책이군요-

Falstaff 2018-07-31 14:39   좋아요 0 | URL
쉽지 않다...라기 보다는 읽는데 참 많은 시간을 써야하는 책이더군요.
특히 (위에서 얘기했듯) 미술에 별 조예가 없는 제 경우엔 말입니다.
날은 덥지 진도는 안 나가지, 책 읽으면서 고야 검색해 무슨 그림을 얘기하고 있는지 확인해야지,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습니다. ^^;;
 
레우코와의 대화 열린책들 세계문학 153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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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사레 파베세, 이 양반이 1950년 8월 어느 날, 마흔 두 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토리노에 있는 호텔 ‘로마’의 객실에서 수면제를 한 통 다 삼켜버려 자살에 성공했을 때, 침대 테이블에 수면제 포장지와 함께 놓여있던 책이 바로 이 <레우코와의 대화>라고 한다. 자신을 스타덤에 올린 작품은 아니지만 가장 아꼈던 책이라는 증거라고 역자는 말한다. 혹시 자살하고 싶은 분이 파베세의 예를 따라 수면제를 먹고 실행을 하려 하신다면, 포기하시라. 요즘 수면유도제는 독성을 거의 제거해서, 수면제 먹고 죽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은 많이 먹어 배 터져 죽는 일이라니까. 우리나라 여성주의 작가 누구의 책에서 읽었지만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은 까닭은 어떤 책을 읽는데 작가가 이 작품을 예로 들어서였다. 지금은 작가가 누군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유럽이나 아메리카 작가였을 것이다. 서양 소설책을 읽자면 숱하게, 유럽인들이 태내적 지식 비슷하게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유하고는 한다. 파베세는 이런 신화의 주인공, 신이 됐건 반신반인이 됐건, 그냥 인간이건, 또는 님프 요정이건 간에, 그들을 등장시켜 해당 오브젝트에 관한 대화를 수록하면서 기존의 신화를 사정없이 비틀어댄다.
 한 예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비명횡사하자 슬픔을 못 이겨 온 숲을 돌아다니면서 리라를 켜며 자신의 비통함을 노래하는 통에 숲 속의 모든 동물들까지 다 절통해하는 참극을 발생시킨다. 너무도 죽은 아내가 보고 싶었던 오르페우스는 땅속나라에 들어가 저승에서도 아무데나 돌아다니며 노래를 하는 바람에 하데스마저 감동하게 만들어, 저승의 왕 하데스는 에우리디케에게 다시 생명을 주기로 약속을 한다. 단, 하늘을 보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리하여 에우리디케의 영혼 또는 그림자를 이끌고 지상을 향한 긴 계단을 오르는데 오르페우스의 뒤에서 졸랑졸랑 따라오던 에우리디케가, 아니 여보, 날 사랑한다면서 내 모습을 어찌 한 번도 바라보지 않는 거야? 너 혹시 마음에도 없는데 그냥 의무감에서 나를 다시 살리려는 거 아냐? 뭐 이딴 식으로 바가지 득득 긁어 어쩔 수 없어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를 바라보는 순간, 마누라님은 한 줄기 안개가 되어 사라진다는 거. 다들 아시지? 애초에 에우리디케가 죽었을 때, 죽은 마누라를 품에 안고 얼마나 오열을 했던가. 한 번 들어보시라. 

 

 저렇게 누워 있는 사람 품에 안고 노래하면, 오르페우스 역을 하는 가수 쟈넷 베이커의 침이 얼마나 많이 튈까? 세수한 거 같지 않을까?


 그런데 파베세의 오르페우스는 좀 다르다. 절통한 마음으로 땅 속으로 들어가 코키토스와 스틱스 강의 배를 타 저승에까지 간 건 맞다. 하데스를 감동시켜 에우리디케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지상을 향한 긴 계단을 오르는 것도 맞다. 계단을 오르며 등 뒤에서 아내의 가벼운 발소리가 나고,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아직 지하세계의 차가움에 휩싸여 있으면서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이 결국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려는 것뿐임을 자각한다. 에우리디케는 다시 뼈와 피와 살과 골수를 가진 몸으로 완성되고, 입을 통해 무엇인가를 위장으로 쉬지 않고 집어넣어야 하며, 하루에 한 번씩 먹은 양과 비례하여 일정량의 물질을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야 한다. 하물며 다시 이 차가운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데, 그게 과연 가치가 있을까,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결론을 내린다. “이제 끝내자.” 단호하게 에우리디케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 그렇게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에게 생로병사의 사이클을 끊어준다. 파베세의 오르페우스 이야기가 훨씬 깔끔하지 않나? 우화적이기도 하다. 보리슬라프 페키치가 쓴 <기적의 시대>에서 예수가 지나다가 눈먼 봉사의 눈을 뜨게 해줬더니 눈 뜬 바로 전까지의 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 이런 오지랖하고는! 누가 당신더러 내 눈 뜨게 해달라고 했어? 너나 잘 하세요! 그러고 스스로 다시 자신의 눈을 파내더라는 것. 어째 좀 비슷하지 않나? 우리의 오르페우스, 기껏 에우리디케를 지상에까지 문제없이 이끌어 다시 부활하게 만들었더니 에우리디케 하시는 말씀이, 어째 너는 한 번도 내 의견을 묻지도 않고 네 맘대로 일을 벌이니, 하며 다시 목매달아 죽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 사는 것만 힘든 게 아니다. 죽은 다음에도 힘든 인간 또는 영혼이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신화를 비튼 것이 총 27편의 대화 가운데 26편이나 된다. 여기에 들어있지 않은 그리스 신화는 거의 없다시피 한다. 그리스 신화 자체가, 몇 개의 서사가 다 이리저리 얽혀있기 때문에. 문제는 나도 우리나라의 보통 독자들과 비교해서 그리스 신화 또는 고전을 많이 알고 있는 편이기는 한데, 태생적으로 신화를 습득하고 있는 유럽인과 비교할 수준은 도무지 안 된다는 거. 그리하여 해당 대화의 주인공들이 어떤 신화의 어느 장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더군다나 기존의 것과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의 차이를 단박에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이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익시온과 네펠레의 대화. 이걸 알려면 익시온, 네펠레가 누구인지, 어떤 사고를 친 인물/신/반신반인/반인반수인지 알아야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익시온? 이름은 기억난다. 하지만 누군지는 모르겠다. 두 번째가 사르페돈과 히폴로코스의 대화. 이하동문. 세 번째는 오이디푸스와 테이레시아스의 대화. 그래, 이건 알겠다.
 역자도 한국의 독자가 이 책을 읽을 때의 곤란함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13개의 각주를 달았는데, 아주 간략한 각주만 읽고 어떻게 26편의 대화를 제대로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시간이 남아 쉬엄쉬엄 인터넷 검색해가며 꼼꼼히 읽을 수 있는 독자에게 재미있는 시간, 날들을 줄 수 있을 거 같기는 하다. 시간이 넉넉한 분들이 이 책을 잡으면, 한 서너 달은 훌쩍 지나갈 거 같다.
 한 번 시도해보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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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인간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3
궈스싱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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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극작가 궈스싱은 대대로 이름난 바둑 명인을 배출한 기가棋家에서 태어나 이것저것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결국 신문사 북경만보北京晩報에서 수습기자를 했는데, 이때 주어진 ‘업무’가 연극에 대해 취재하고 공연평을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궈스싱은 단기간에 수백편의 연극을 관람하면서 연극에 관한 모든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똑같은 직업 또는 업무를 한다고 해도 누구나 궈스싱처럼 단숨에 한 분야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이 해야 하는 일과 궁합이 맞아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며,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보다 조금이라도 더 깊게 알고 싶어 하는 끊임없는 호기심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다. 여기까지 이른다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관해서 확실한 관점, 이른바 일가견이란 것이 생긴다. 이쯤에서, 특정 노래를 자주 들으면 반드시 그 노래를 불러보는 것처럼, 이이도 어느 날 드디어 자신이 직접 희곡을 써보기에 이르렀다.
 사람에게 따라 간혹 주어지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행운이 이런 사람을 맞이할 때, 드디어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인데, 연극과 희곡에 대한 궈스싱의 경우, 그가 맞이한 행운은 당대 중국 최고의 연출가 린자오화였다고 한다. 린자오화는 주로 프랑스로 망명한 극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오싱젠과 작업을 하다가 이젠 궈스싱과 작업하며 그를 독려하여 드라마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비록 나이차이가 16년이나 나지만 이 둘의 궁합은 저 춘추시대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예를 좇을 정도였다고 역자는 말한다.
 고백하건데, 난 가오싱젠의 <버스 정류장>을 대단히 재미없게 읽은 바 있다.


 (여기까지 쓴 시간이 2018년 7월 21일 오전 8시 조금 넘었었다. 이 날이 토요일. 더워도 너무 더워서, 이제 겨우 오전 8시 조금 넘어 아직도 한국방송에선 <남북의 창>이 한창인데, 그만 썼다. 엉덩이에 진물 날까 도무지 더는 못 앉아 있겠다. 책 읽는 방엔 에어컨이 없다. 여름 끝날 때까지 도무지 휴일엔 책을 읽지도, 독후감을 쓰지도 못하겠다! 지금이 23일 월요일 오전 열시. 시원한 사무실에 앉아 계속한다. 얼마나 좋은 회사인가. 하늘에 달린 시스템 에어컨에서 시원한 바람 쏟아지지, 하루 종일 놀다 퇴근하면, 내일 모레, 또 봉급날 돌아오지. 불평하지 말고 하여간 은퇴할 때까지 잘 다녀야겠다. 오해하지 마시라.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아 쫓아내기 좀 그런지 업무를 최소한으로 줄여주어 하루 종일 시간이 많은 거다. 만 32년 직장생활 중 제일 힘든 게 뭔지 아시나? 바로 ‘놀고먹는 거.’ 나도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다. 웃어야 해, 말아야 해.)


 다시 이어 쓰자면, 문학적 소양이 별로 없는 내가 읽기에 (위대한 극작가)가오싱젠의 <버스 정류장>보다 <물고기인간>을 포함한 중국현대희곡총서의 작품들이 훨씬 편하고, 쉬워 좋은데, 그게 <버스 정류장>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문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코드가 숨어있으나 그걸 찾아내지 못해 그런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물고기인간 魚人>은 지극히 우화적이다. 가상의 호수 대청호에 ‘대청어’라는 신화적인 물고기가 산다. 일흔 살 먹은 노인 ‘낚시의 신’이 30년 전에 대청어를 잡다가 함께 낚시를 하던 큰아들이 호수에 빠져죽고 말았다. 대청어란 영물이 대청호에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서 30년에 한 번 보이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30년 전, 낚시의 신이라 불리는 노인이 화제의 물고기를 거의 잡아채는 순간, 갑자기 소리를 질러 물고기의 주위를 돌려버리는 바람에 대청어 대신 맏아들만 물에 빠져죽게 만든 위씨 영감도 중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이는 호수의 대청어에 대하여 애니미짐animism 비슷하게 숭앙하는 인물로, 대청어가 다시 나타나면 낚시의 신 영감도 돌아와 기어이 대청어를 죽일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30년 동안 호수에서 양어장을 운영하며 시기를 기다린 사람이다.
 물론 희곡에는 한 번도 대청어가 등장하지 않지만, 낚시의 신이라 일컫는 노인은 미끼 없는 빈 바늘과 자신이 직접 나일론 줄을 엮어 만든 낚싯대로 30년 만에 만나는 대청어와 자신의 인생 마지막 대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30년 만이라니까)세대의 대결이 이루어지는데, 어찌 되는지는 알려드릴 수 없다. 다만 앞에서 이야기했듯 대단히 우화적인 장면이 연출된다는 것만 일러드릴 뿐.
 다른 문학작품 또는 문학 장르와 마찬가지로 희곡 또는 연극도, 읽고 보는 독자/관객이 어떻게 작품을 해석하는가, 느끼는가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물론 극작가, 연출가의 의도도 있겠지만 그들도 독자/관객이 받아들이는 방식까지는 좌우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 드라마를 다분히(또는 단순히) 우화적 관점에서 읽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내 독법을 권하지는 않는다. 현대화에 따라 희생하는 자연으로 읽을 수도 있겠고, 해설에서 나와 있듯이 부조리극으로 읽어도 좋으며, 심지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는 말장난만 따라가도 왜 안 되겠는가. 마지막은 도저히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로 마감해버리는 건, 혹시 짓궂은 작가의 경쾌한 심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두 여덟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중국현대희곡총서’를 읽어나가며, 내가 그동안 한국의 현대 희곡을 읽어본 적이 있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최인훈 전집’에 실린 희곡집 <옛날 옛적의 훠어이 훠어이>에 실린 것들과 천승세의 <만선> 이후 단 한 편의 한국 현대 희곡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게 부끄럽다. 중국의 현대 희곡들을 읽는 일이, 앞으로 이쪽으로도 시야를 넓혀보리라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최인훈 전집에 있는 <옛날 옛적의 훠어이 훠어이>를 위에서 잠깐 얘기한 오늘, 최인훈 선생의 부고가 떴다. 나로하여금 소설읽기의 재미를 알게 해준 분 가운데 한 명이 또 저물었다. 아, 이런 날 소주 한 병 해야 하는데, 날이 너무 덥다. 아무쪼록 가시는 길, 평안하시라. (앞으로 줄창 삼복 더위에 제사 지낼 자손들이 조금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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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7-24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어떤 의미로든 이 나라에서 의미 있던 사람 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요. 최인훈 선생의 죽음이 그 바람에 너무 조용히 다뤄진 것 같아서 어떤 면에서는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저는 대학 졸업논문을 최인훈으로 썼었거든요. ㅎㅎ 암튼 이런저런 이유로 어제는 저도 술 좀 마셨습니다. 더워서 소주는 아니고 맥주로요. ㅎㅎ

Falstaff 2018-07-24 16:02   좋아요 1 | URL
저도 특정 마트에서만 파는 진로소주 사다가 한 병 깠습니다. 제 좌우명이 ˝진로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여서 말입죠. 쿨럭.
저도 최인훈 선생의 전집을 싹 독파한 1인 가운데 한 명으로 당대 작가로 최인훈, 장용학을 최고로 아는 인종입지요. 다른 한 분은 (아, 죽긴 왜 죽어!) 거 참... 생각은 많지만 이야기하기는 좀, 그런 거 있잖아요. ㅠㅠ

잠자냥 2018-07-24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문지에서 나온 <한국 현대 희곡선>이 저는 좋았습니다. 시대별로 엮어놔서 그 흐름을 살펴보는 데도 도움이 많이 됐고요.

Falstaff 2018-07-24 15:1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저도 지금 희곡 책들 헌팅 중인데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