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남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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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사용법>, <사물들>, <W 또는 유년의 기억>에 이어 네 번째 읽은 페렉. 여태까지 읽은 페렉과 조금 다르다. 2인창 소설이며, 소통하지 않는 현대 젊은이의 미분적인 삶을 그리고 있는 1960년대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 누보로망이라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 역자 조재룡이 쓴 해설을 대충 훑어보니 첫 마디 비슷한 자리에다, “조르주 페렉은 필경 사르트르와 누보로망, 이렇게 둘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라 썼다. 사르트르는 모르겠고, 다만 하여튼 글의 여러 부분이 로그브리예나 뷔토스의 것들과 “문장 간 유사성”을 체험했다는 얘기다. ‘포스트’를 누보로망 앞에 붙인 것은 페렉이 <잠자는 남자>를 쓴 시기가 누보로망이라 하기에는 조금 늦은 1967년이라서 이었을 뿐이다. 괜히 잘난 척 더 하다가 나중에 코피날 거 같다. 난 프랑스 문학에 조예가 있지도 않고 그냥 주워들었을 뿐이며, 몇 작품을 읽다보니 페렉의 선배작가들과 유사성을 느낀 수준, 즉 진정한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러니 “소설 하나를 읽는데 지식이 뭐가 중헌디!”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고.
 일단 내 주장대로 이 작품을 누보로망(비슷한 것)이라 가정하면, 그것도 소통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일상을 잘게 쪼개 현미경을 통해 본 것을 기록했다면, 일단 지독하게 드라이한 작품이란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선입견은 또한 타당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서간체가 아닌 2인칭 소설이란, 화자가 ‘다중의 독자’가 아니라 오직 ‘너’에게만 전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화자가 관찰한 ‘너’의 행동 또는 행위를 묘사하는데 국한한다. 화자는 결코 ‘너’의 대뇌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까지 알 수는 없을 테니까. 정말 그런지 책의 처음 두 문장을 인용해보자.


 “네가 눈을 감자마자, 잠의 모험이 시작된다. 방의 저 익숙한 박명薄明에, 세세하게 나뉜 어두운 체적이, 네가 수천 번을 지나다녔기에, 힘들이지 않고서도 네 기억만으로 길을 알아낼 수 있는 그곳에서, 불투명한 사각 창으로부터 그 길들을 되짚어내고, 반사광으로부터 세면대를, 조금 더 명료한 책 한 권의 그림자로부터, 선반을 되살려내면서, 이보다 더 검은, 걸려 있는 옷가지의 뭉텅이가 또렷이 확인되는 그곳에서 이어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네 콧등 위로, 온전한 직각은 아닌 것 같은, 네 두 눈의 두덩 위로 아주 작은 일각一角을 드리울, 또렷한 테두리도 없는 어떤 그림 한 점과도 같은, 얼핏 보아 일률적으로 회색이거나, 색깔도 형태도 없어, 네게는 오히려 무채색으로 보일 수도 있을, 그러나, 재빠르게 형성될 것이 또한 분명한 그런 그림과도 같이, 이차원의 공간 하나가, 최소한 두 가지 특징을 지니면서 나타난다: 첫째는, 네가 다소 힘을 주어 네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정도에 따라, 보다 정확히 말해, 네가 눈을 감을 때 네 눈썹 위에서 행해지는 근육의 수축이 네 몸 전반에 평면의 기울기를 변형시키는 것 같은 효과를, 마치 네 눈썹이 네 몸에서 접점을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같이,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아니, 이 귀결이 자명하다는 것 말고는 증명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더라도, 네가 지각할 어둠의, 밀도 혹은 특질을 변형시키는 효과를 초래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공간이 다소 흐려진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하 하략. 아직 반도 안 썼다)”


 파리에서 “하녀의 골방”이라 일컫는 방. 대개 건물의 꼭대기에 있으며 20세기 초반까지 주로 하녀들이 기거하던 작은 방. <라 보엠>의 미미가 향기가 나지 않는 꽃을 수놓으며 살았고,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드니즈 보뒤 양이 숱한 백화점 점원 아가씨와 함께 산 곳. 이제 하녀들이 없어져 방은 가난한 빈민들의 차지가 됐고, 파자마 하의만 입고 침대로 사용하는 장의자長椅子 위에 앉아 112쪽이 펼쳐진 책 <산업사회 강론>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너’는 오늘도 누구와의 소통을 스스로 거부한 채, 옆방의 누군가가 기침을 내뱉고, 발을 질질 끌고, 가구를 옮기고, 서랍을 열고, 층계참의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는 소음이 들린다. ‘너’가 세계의 다른 인간으로부터 받는 신호이며 책의 결말부로 가면 자신의 신호 역시 옆방의 기숙인이 느끼고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는, ‘소통의 가능성’으로의 소음이 될지 아직은 모르는 상태이다. ‘너’는 시간의 흐름을 완전하게 무시하고, 아무 때나 파리의 모든 곳을 탐색하고, 하루에 15프랑을 사용하는 것만 허용하는 삶을 산다. 매일 똑같이. 골루아즈 담배 한 갑, 성냥 한 통, 식사 한 끼, 영화 한 편, 영화관 안내인한테 주는 돈, <르 몽드>신문, 커피 한 잔. 나머지 돈으로 건포도 빵 하나 또는 바게트 반 조각으로 때울 두 번째 끼니와 두 번째 커피 한 잔, 교통비, 치약, 세탁비 등등.
 이제 할 말은 다 했다.
 누보 로망으로도 읽을 수 있는 현미경적 묘사와 이에 따른 건조한 문장. 소통을 거부하며 사는 젊은이의 행위 묘사로만 채워지고, 나중엔 옆방 남자와의 신호로 소통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란 가능성. 심지어, 세상과의 화해? 그건 직접 읽어보시고 해결하시기 바람.
 나는 이런 작품을 좋아해서 즐겁게 읽었는데, 이 의견을 덜컥 믿고 쉽게 구입하지는 마시라. 고백하거니와, 쇤네는 20대 초반부터 잘난 척하기 위한 유일한 목적으로 읽히지도 않는 누보로망 계열의 작품을 읽었으며, 읽다가보니 20대 초반이라는 시절이 특별히 풍부하게 갖추고 있는 감수성 또는 흡수력이 있는 시대여서 그랬는지, 별 내용 없는 건조한 책들을 매우 심각하고 흥미롭게 받아들였었다. 그래서 지금도 하이퍼 레알리즘 적인 묘사로 일관한 이런 책에 여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뿐이다. (사실 페렉은 조금 덜하긴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내 경우일 뿐이라는 걸 딱 꼬집어 미리 말씀을 드리는 바, 정말 책을 사서 읽고 후회하신다면 그건 내 책임이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책 뒤의 “역자 해설”마저 읽어보시면, 내가 지금 쓴 독후감이 얼마나 엉터리인줄 단박에 알아채실 수 있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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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
잉게보르크 바하만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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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잉에보르크 바흐만이 쓴 <말리나>를 읽은 다음, 다시는 바흐만을 읽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말리나>를 감상하면서 제대로 발휘한 인내력을 망각하고, 바흐만의 위명威名에 혹해서 이이가 쓴 첫 번째 산문집 <삼십세>를 구해 읽게 됐다. 구입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당연히 바흐만의 이름값이었지만, 중고 책이 싼 가격으로 나와 있던 것도 그에 못지않은 이유였을 걸?
 역자 차경아는 책을 “산문집”이라 표현했다. 읽어보니 <삼십세>, <살인자와 광인의 틈바구니에서>, <고모라를 향한 한 걸음> 등등은 소설로 분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긴, 소설도 산문이란 큰 범위 안에 포함되니까 산문집이라 한들 틀린 말은 아니겠다. 일곱 편의 이야기 가운데 표제작 <삼십세>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한다. 무엇보다, 작가 바흐만과 독자인 내가 궁합이 극적으로 맞지 않는 상극 정도 된다는 걸 감안하시면 좋겠다.
 <삼십세>는 바흐만이 서른다섯 살 되는 해에 29세 생일부터 30세가 되는 날까지 ‘그’의 행적을 따라간 단편이다. 첫 두 문단을 인용한다.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젊다고 부르는 것을 그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해져간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도 곧 잊어버리게 될 어느 날 아침, 그는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는 문득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는 것이다. 잔인한 햇빛을 받으면, 새로운 날을 위한 무기와 용기를 몽땅 빼앗긴 채. 자신을 가다듬으려고 눈을 감으면, 살아온 모든 순간과 함께, 그는 다시금 가라앉아 허탈의 경지로 떠내려간다. 그는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고함을 쳐도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고함 역시 그는 빼앗긴 것이다. 일체를 그는 빼앗긴 것이다!) 그리고는 바닥없는 심연으로 굴러 떨어진다. 마침내 그의 감각은 사라지고 그가 자신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해체되고 소멸되어 무(無)로 환원해버린다.



 위 두 문단을 읽자마자 또다시 고난의 행군을 시작해야 함을 즉각 알아차렸다. 두 번째 문단을 보면, 아무렇지 않은 그냥 보통의 어느 날, 잠에서 깬 ‘그’가 일어나지 않고(못하고) 그냥 누워 있는 장면이다. 그거 하나 묘사하기 위해 동원된 기재들을 보면, 잔인한 햇빛, 빼앗긴 무기와 용기, 살아온 모든 순간, 허탈의 경지로 떠내려감, 가라앉음, 고함, 그러나 소리 나지 않음, 바닥없는 심연, 추락, 사라지는 감각, 해체, 소멸, 무. 등등. 구체적인 물체는 별로 눈에 띄지 않고 거의 추상단어들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이런 추상적인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위의 두 문단이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단편 <삼십세> 전부에 대한 감상은 이렇다.
 “‘화려하고 강건한 문체로’ 처음 맞닿은 전환점(30대 진입)을 건너 새로운 전환으로 계속 걸음을 옮기는 변곡점을 그리고 있다.”
 정말이다. 문장들은 화려하고 강건하다.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러나 문장을 이루고 있는 단어들은 좋게 얘기해서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은유적이고, 상징적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책을 읽다가 눈은 글자를 따라가고 있건만, 머릿속에선 곱창구이가 좋은지, 곱창전골이 좋은지 고민하는 갈림길에서 헤매는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같은 문단을 또다시 읽어야하는 비능률을 겪었는데, 어쩜 그렇게 <말리나> 때와 같았는지. 물론 <말리나>가 훨씬 더 심하긴 했지만. 독일어를 모국어로 쓰는 작가들이 한 시절 형성했던 “47 그룹” 작가들 가운데 몇몇이 이런 경향이 있다. 그중에서도 바흐만은 좀 심하다. 바흐만과 연애했던 프리쉬도 간혹 비슷한데 이이와 비교하면 약하다.
 삼십 세. 참 갑갑한 시절이다. 이젠 작품 속 나이 삼십이나, 작품을 썼던 당시 작가의 나이 서른다섯이나 그게 그거인 때를 맞았지만, 바흐만은 그래도 기특하게 서른 살 즈음에서 “생기에 넘쳐 닥쳐올 것과 손을 잡”는 결론을 내린다.
 김광석은 나이 서른에, “조금씩 잊혀져간다 /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 또 하루 멀어져간다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고 궁상을 떨었고,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던가 하여간 서른을 맞으며 이제 청춘도 물러간 것을 인식했다는 의미의 발언을 한 것으로 기억하고, 최승자는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 서른 살은 온다. / 시큰거리는 치통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 기쁘다 우리 철판 깔았네” 노래하면서 독한 배갈 한 병 나발을 불었고, 최영미는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라고 파장난 잔치의 뒷설거지를 한 것에 비하면 대단히 건강하긴 하다.
 30세로 접어드는 건 정말 특별한 사건이다. 역자 차경아가 쓴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서른 살의 문턱을 넘어선 것을 깨닫는 날, 목구멍으로 무턱대고 차오르는 언어의 발효를 막을 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게 되고, “그것이 후회이든, 변명이든,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관조이든 개안(開眼)이든 간에 서른 살이라는 에폭(epoch)에 매달려, 무작정 호소하고 싶은 충동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기막힌 표현이다. 차경아의 ‘옮긴이의 말’을 읽으면 사실 바흐만의 <삼십세>는 읽으나마나한 거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사실 <삼십세> 역시 “에폭에 매달려 호소하는 충동의 순간"의 이어짐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한 번 읽어볼 만하지만 권하지는 않겠다. 누군들 서른 즈음해서 한 번의 곡절이야 없었겠느냐만, 자신의 곡절이 유난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한테는 좋을 수도 있겠다. 큰 아이가 내년에 서른. 다음 주에 집에 온다니 이 책 한 번 읽어보라고 오랜만에 꼰대 티 한 번 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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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8-08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또한 <말리나> 읽고 난 뒤로는..(아니 저는 <말리나>를 끝까지 다 읽지도 못했어요. ㅋㅋ 절반쯤 읽다가 포기.) 바하만의 책을 다시는 안 읽고 있습니다. <말리나> 읽기 전에 <삼십세> 읽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죠. -_-;;

Falstaff 2018-08-08 12: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인내력 테스트를 했던 작품이 <말리나>였습지요. 게다가 두껍기까지 해서요.
하여간 47그룹 멤버들, 좀 지긋지긋한 듯하더라고요. ㅋㅋ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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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소재의 마샤 블레인 여학교. 19세기 중반 에든버러에 제본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놓고 죽은 남자의 과부가 있었는데, 이 과부로 말할 거 같으면 가리발디를 열렬하게 추종하는 민족주의자로, 스코틀랜드의 여성교육을 위하여 거금을 쾌척해 학교를 설립한 거였다. 학교의 중앙 복도에 여사의 늠름한 초상이 걸려 있어 해마다 창립자의 날(이라 표현했다. 개교기념일인지 여사님의 제삿날인지는 모르겠다)이 되면 초상화 아래에 있는 성서대에 꽂아놔도 오래가는 국화, 달리아가 놓였고, 바로 옆에 성서가 펼쳐 있어서 한 구절에 붉은 밑줄이 쳐져 있었으니, 바로 이랬다.
 “누가 어진 아내를 얻을까?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다.”
 쉽게 얘기해서 마샤 블레인 여학교는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고루한 보수주의적 학교라는 뜻이다. 지금은 바꿨는지 모르지만 나 대학 다닐 때도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일을 대학의 교훈에 집어넣은 여자대학이 몇 곳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 정말이라니까!
 소설의 시대적 무대가 1930년대이니 그럴 수 있다. 이 점은 양해하고 지나가자. 하지만 그래도 완고하고, 보수적이고, 이른바 왕당파 비슷한 그런 분위기의 학교라는 점. 세상은 참으로 다양하여 완고한 보수적 여학교에, 저학년을 담당하는 진 브로디 선생이라는 좀 진보 성향인 교사가 있었다. 이이는 예술이 모든 학문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고 아랫단에 철학, 제일 말단에 처량하게 앉아 있는 것이 과학이라 믿는 한편, 교과를 진행하는 방식 등을 감안하면 진보적 자유주의자로 얼핏 생각하게 만드는 교사였다.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참 재미있고, 매력 있어서 존경할 교사로 보이기 십상이며, 교사 역시 자기 마음에 드는 학생들을 따로 몇 명 모아 고학년으로 올라가도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쉬운 얘기로 자기 병사들을 길렀단 것이지. 물론 우리의 진 브로디 선생과는 달리 의도가 조금은 순수하지 않은 교사로 탁월한 학생들을 자신이 관리하고자 하는 인물을 우리는 영화를 통해 한 명 알고 있다. 누구인가 하면,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에서 시작해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기어이 살아남는 순수혈통의 마법사 호레이스 슬러그혼. 가물가물하신가본데, 사진 한 번 보시면 기억날 듯.

 

 

 슬러그혼 교수는 사람이 좀 띨빵해 학생들에게 따돌림도 받고 그러지만, 브로디 선생은 학과 시간에 마치 정상 수업을 진행하는 것처럼 학생들에게 책을 반듯이 들고 있으라 하고,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한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휴전 1주일 전에 전사한 첫사랑 ‘휴’ 이야기, 작년에 휴가차 다녀온 이집트 여행, 가장 감명 깊었던 유적지로 이탈리아 이야기 등등. 지식주입을 강요하는 학교 정책에 반기를 드는 거 자체가 열 살 먹은 소녀들에겐 참신한 매력이고,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정한 금과옥조인 걸 어찌하나. 그러나 선생은 자신의 팔로 단 몇 명의 학생만 거둔다. 소설은 몇 명의 ‘브로디 학생들’ 중에서 작은 눈 때문에 나중에 미술교사로부터 자신이 여태까지 본 가장 못생긴 여자 가운데 한 명이란 극언까지 듣는 ‘샌디’의 시선이 제일 중요하게 작용한다.
 샌디. 이름이 Sandy, 어째 좀 모래알처럼 서걱거릴 거 같지 않은가? 근데 총명한 학생이다. 이 학생이 만 8년 동안 브로디 무리의 우두머리 비슷하게 있으면서,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가며 동시에 브로디 선생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면서, 독자는 선생에 대한 진짜 모습을 조금씩 알게 된다. 선생으로부터 거의 습관적으로 질책과 무시를 당하던 메리는 불이 난 건물 복도에서 매우 당황한 채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질식해 불에 타 죽고, 관능적 외모로 천부적인 모델이랄 수 있는 예술 감각이 뛰어난 로즈는 돈 많은 평범한 남자와 숫처녀로 결혼해버리고, 선생이 가장 의지했던 샌디는 난데없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더니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가 돼버렸다. 와중에 보수적인 마샤 블레인 여학교에서 미운털이 박혀 계속 해고의 위협 속에서 끝까지 견뎌내던 선생은, 자신의 군대 중 배신자 한 명의 고발로 인해 학교로부터 해고당하고 만다. 지극히 정당한 사유로.
 좀 이상하시지? 극히 보수적인 학교에 재직하며 총명한 학생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 진보적이고 예술지상주의적인 고상한 의식을 가진 교사가 해고라니. 그것도 정당한 사유라니. 진 브로디 선생도 사람이었던 것. 그도 사랑을 했고, 애인이 전사를 했고, 유부남을 사랑했을 수도 있고,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한테 (줄 듯 말 듯?)애를 먹이다가 기어이 다른 여자하고 결혼해버리게 만들고, 하필이면 전체주의를 사랑하게 되는 반면에 (걸스카우트의 전신인) 걸 가이드의 줄맞춘 행진은 경멸하고, 자신의 소망을 무리의 일원으로 하여금 대신 충족시키게 하고 싶어 하는, 그냥 인간의 모습도 분명히 있었던 것. 나는 지금 여기서 한 마디도 삐끗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더 힌트를 주면, 재미있는 이 책을 정말로 읽으실 분에게 김을 확 빼버리는 일이 될 것이라서. 주인공 진 브로디 선생을 정의내릴 수 있는 딱 한 단어가 있는데, 차마 밝히지 못하겠으니, 궁금하신 분은 비밀 댓글 쓰시라. 그러면 가르쳐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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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07 1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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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12: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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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7 1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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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아이 XXX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4
멍징후이 지음, 장희재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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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제목 <워 아이 XXX>가 뭘까? 한자로 하면 我愛XXX, 즉 “나는 XXX를 사랑한다.”라는 뜻.
 책의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희곡이라면 당연히 등장인물을 소개해야 하고, 무대 장치 및 배경을 설정해야 하는데, 아니, 여태 그런 줄 알았는데, 다짜고짜 이런 것부터 나온다. 처음 열 줄만 인용한다.

 


              제1부분 다짜고짜 하는 말
 나는 빛을 사랑한다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곧 빛이 생겨났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곧 네가 생겨났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곧 내가 생겨났다

 

 나는 1990년을 사랑한다
 나는 1990년의 신년 종소리를 사랑한다“

 

 

 희곡은 연극의 대본을 일컫는 말이다. 요새 연극이니까 무대 설정은 필요 없다 치자. 그래도 배우가 등장해서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니 적어도 다음과 같아야 하리라.

 

 호레이쇼 : 나는 빛을 사랑한다
 요릭 :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곧 빛이 생겨났다

 

 이런 거 아닌가? 분명히 대사는 있는데, 대사를 하는 배우는 보이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 대사라고는 아아아~, 어어어~, 으으으~ 만 있던 연극 <산씻김>을 본 적 있다. 대사는 대단히 간단하지만 아이고, 배우들 연기하려면 숨넘어가겠더라. 온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고,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또 누웠다가,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고, 막 내리는 대신 암전으로 끝나고 인사하는데 보니까 여배우 온몸이 땀투성이였다.
 뭐 좋다. 먼저 읽어보고 얘기하자 싶어서 읽었다. 금세 읽는다. 아홉 개의 부록까지 합쳐서 70쪽도 안 된다. 여기까지 읽고 느낀 것.
 “근데 뭐?”
 그래서 해설을 봤다. 이렇게 씌어있다.

 

 “<워 아이 XXX>는 스토리의 해체와 말하기에 대한 강박이 드러난다. 대사들 사이에 스토리는 없다. 멍징후이는 스토리를 해체한 대신, 못 다한 말을 쏟아낸다. ‘나는 XXX를 사랑한다’라는 동일한 문장 구조 속에 반복, 치환, 삭제, 삽입의 방법으로 어휘를 배치하여 절묘한 리금감을 만들어낸다. 동시에 그는 음성언어, 침묵의 언어(자막), 수화, 신체언어 등 다양한 언어형식과 말하기(speaking), 속삭이기(whispering), 외치기(shouting), 혼자 말하기, 함께 말하기, 이어 말하기, 끼어들어 말하기, 등 다양한 발화방식을 사용한다.”

 

 아이, 나 같은 연극 문외한이 처음부터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런 해설은 책의 뒤편에 싣는 대신 머리말 비슷하게 앞에다 배치했으면 좋을 뻔했다. 한 방에 알아듣겠다.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소통방식으로 하여간 대사를 관객한테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러다보면 대화의 운율에 따라, 더구나 중국어는 사성이 있으니 한국어에 비하면 더욱 효과적인 음악적 표현이 될 수도 있고, 수화나 화면의 자막을 통한 시청각에 호소할 수도 있는 것.
 그러려면 희곡만큼이나 연출이 중요하겠구나. 흠. 나 같으면 어떻게 연출을 할까. 이거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잘 하면 재밌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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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안뜰 외 을유세계문학전집 4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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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편의 중, 단편이 실린 선집. 표제작 <저주받은 안뜰>이 책 본문의 절반을 넘게 차지한다. 표제작을 비롯한 모두 다섯 편이 수도원의 사제 ‘페타르 수사修士’가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직접 이야기하거나, 수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풀어낸 것들이다.
 한겨울. 세상이 함빡 내린 눈에 싸여 흰 빛을 발할 때, 어제 죽은 페타르 수사를 묻고 이제 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살아생전 수사가, 수사의 젊은 시절 이스탄불 출장길에 애꿎은 혐의를 쓰고 구치소에 두어 달 간 구금되었던 당시의 강렬했던 추억/기억을 두서없이 얘기한 것들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쓴 것이 표제작 <저주받은 안뜰>이다. 이스탄불 교외 한갓진 곳에 자리 잡은 ‘데포시토(창고)’란 이름의 구치소엔 검은 악마라는 뜻의 별명 “카라조즈”로 잘 알려진 머리 좋은 악당이 소장으로 있었다. 구치소를 자꾸 증축을 하면서 이상하고도 커다랗게 변형된 교도소는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안뜰 역시 지극히 비정상적인 운동장으로 변했는데, 운동장을 포함한 데포시토 전부를 구치당한 죄인들은 “저주받은 안뜰”이라고 불렀다 한다. 페타르 수사의 경우, 이 저주받은 안뜰에 겨우 두세 달 있으면서 경험한 바를 평생에 걸쳐 후배 수사들에게 조금씩 살을 붙여 이야기를 했겠지만 사실 수사의 구금기간 동안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터키의 수용시설답게 각종 범죄자들과, 적지 않은 수의 정치범이 늘 수용되어 있으며, 잡범들은 은근히 정치범과 선을 긋는 것도, 정치범 가운데 적어도 두어 달에 한 명 정도는 골로 보내는 것도, 당시가 양차대전이 다 끝난 상태임에도 터키를 떠올리면 그리 이상하지 않다. 1481년 정복자로 이름을 날리던 메메드 2세가 아무 준비도 없이 전쟁터에서 갑자기 사망을 하자 노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바예지드와 귀족 출신의 다른 여인에서 태어난 이복동생 젬은 왕권을 놓고 경쟁을 하게 된다. 다툼에서 패한 동생 젬은 이집트를 거쳐 프랑스로, 다시 이탈리아로 전전하면서 결국 1499년 유골이 되어 터키로 돌아오는데, 역사를 공부하면서 평생 형에 대한 반란을 골몰하던 한 불우한 파샤의 아들이 젬에 대하여 연구했다는 죄목으로 저주받은 안뜰에서 행방불명 됐다는 걸 중점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런 건 터키에서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을 거 같다.
 하지만 이 중편소설 <저주받은 안뜰>을 누가 썼는가. 바로 이보 안드리치다. 일찍이 <드리나 강의 다리>와 <제파 강의 다리>를 통해 필력을 과시한 작가. 이이의 작품을 읽다보면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안드리치의 문장 속으로 흠뻑 빠져드는 경험을 한다. 사색적이면서도 하고 있는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그림 그리듯 떠올려지는 듯한 아름다운 글. 이 작품에서도 문장 하나하나가 개인과 개인, 특정인과 과거의 역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후반에 무려 50쪽에 달하는 해설과 작가 연표를 포함한다. 이 정도면 해설이라기보다 작은 논문 수준이다. 좀 과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나는 이 책을 안드리치의 문장을 즐기면서 읽었다. 더구나 오랜 세월 내가 참 좋아해온 출판사 을유문화사에서 찍은 책이니 읽는 즐거움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을 숨길 필요 없으리. 하지만 그게 아니다. 을유문화사가 그 사이에 좀 바뀐 거 같다. 한 시절, 오탈자 없는 책을 자랑하던 회사가 아니다. 여러 말 말고 예를 들어보자.


 “끝도 없이 묘한 그의 유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는 마치 단 한 번도 어느 누구를 믿어 보지 않은 것처럼 범죄자나 증인뿐 아니라 그 스스로도 믿지 않은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그에게 범인의 자백은 유일한 것이었고 모든 인간이 유죄로 재판받아야 할 존재인 이 세상에서 그럭저럭 공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소나마 신뢰성 있고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 자백 외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저주받은 안뜰” 34쪽)


 위는 새로운 문단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이 어떤 뜻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수바람. 무슨 뜻인지는 앞 문단과 연결해서 읽어야 알 수 있다. 물론 원문과 가장 가깝게 번역하기 위해 이렇게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 비록 원문에는 없었을지라도, 앞 문단과 이 문단을 연결시켜주는 접속사나 짧은 구句를 포함시켜줘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머리 안 좋은 내 경우를 말씀드리면, 도무지 이 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열댓 번을 읽었다. 그래도 도통 깜깜이라 페이지를 통째로 다시 읽으니 그때야 감이 왔다.
 문장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주어와 술어를 찾는 것. 주어와 술어만 써보면 문장은 이렇다.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 자백 외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문장이 “∼ 때문이었다.”로 끝나기 때문에, “때문이었다.”로 끝나게 하는 원인이 한 문장에 나와 주어야 한다. 아니면 바로 앞 문장이든지. 근데 이게 문단의 첫 문장이란 말이지. 이 문장에서 가장 근접한 “때문에”의 원인은 제일 앞에 나오는 “끝도 없이 묘한 그의 유희”이지만 그건 쉼표 앞에서 독립적으로 씌어있어서 문장을 이해하는 걸 아주 효과적으로 방해한다. 먼저 나오는 “때문에”는  “그에게 범인의 자백은 유일한 것이었고”로 이미 설명이 된 사안. 그러면 뒤에 나오는 새로운 “때문이었다.”의 또 다른 원인은 무엇일까. 그건 저주받은 안뜰의 소장 검은 악마가 어떻게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고, 자백이 아무리 사소해도 잊는 법 없이 자백한 자를 재량껏 도와주거나 형을 경감해주는 이유, 즉 수용소장 카라조즈의 “끝도 없이 묘한 그의 유희”다. 문제의 구절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쉼표 앞에서 이미 종결사항처럼 쓰여 있다는 점.
 책 읽으며 문장 하나 가지고 이리 해골 복잡하게 만드는 거, 정말 싫다.
 다른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언젠가 성자(聖者)의 얼굴을 한 여행객이 올루야크 사람들에 대해 평한 말은 이랬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을 함께 선사하셨다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이 성자의 얼굴을 한 사람의 말이 단 한 번도 거슬리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올류야크 마을” 161쪽)


 문단의 마지막도 대단히 까다로운 문장이다.

 문장을 이렇게 바꿔보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을 함께 선사하셨다"는 말이 단 한 번도 거슬리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술어 쪽만 보자.

 1. 말이 ~ 거슬린 일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지 않은" 일

 2. 거슬리지 않은 일

  "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신" 일

 3. 거슬리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신" 일이 일어났다.

 4. 거슬리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 부와 온갖 불행을 선사하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즉, 이 문장을 알아듣기 쉽게 다시 써보면 이렇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을 함께 선사하셨다'는 말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즉 올류야크 마을 사람들에게 부와 온갖 불행은 절대 생기지 않을, 다시 말하면 가난하지만 불행하지도 않을 거란 얘기. 작가가 주장하는 바와 정확하게 반대 방향이다.
 맞는가? 나도 모르겠다. 이번엔 술어의 문제. 문장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내가 꼭 이 지랄을 해야겠어? 책을 이런 식으로 뜯어서 읽는 나도 알고 보면 참 불쌍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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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08-03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근길에 저도 옮겨주신 문장 3번쯤 읽었네요 ^^; 원문이 저렇게까지 난해할 것 같지는 않은데 번역의 문제일까요.

Falstaff 2018-08-03 09:07   좋아요 1 | URL
글쎄요.
번역한 사람은 틀림없이 ˝원문을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기다보니, 운운˝ 할 겁니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두 명도 아닌걸요. 다만 을유문화사가 이번에 펴내는 세계문학전집의 ˝한글 텍스트˝ 품질이 몇십 년 전 것보다 못하다는 건 확실합니다.
정말 좋아했던 출판산데 아쉽습니다. 시리즈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몇 책에서 마땅하지 못한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더군요.
최근에 읽은 DH 로렌스의 <사랑에 빠진 여인들>도 그렇고 불레스와프 프루스의 <인형>도 좋은 문장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지요.
날 더운데 에휴, 고생하십시요. ^^;

레삭매냐 2018-08-0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보 안드리치 책들은 몇 권 컬렉션해두긴
했는데 당최 손이 가질 않는군요.

그런데 역자가 번역을 하시면서 문장을 좀
끊어서 번역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문장이 너무 길어서 정말 헷갈리네요.

그나저나 <드리나 강>부터 읽어야겠다는.


Falstaff 2018-08-03 10:26   좋아요 0 | URL
<드리나 강의 다리>는 정말 좋아요!
제가 2016년이던가에 읽었는데, 그 해에 가장 좋게 읽은 책으로 <드리나 강의 다리>를 꼽았던 적이 있습니다.
우습게도 <저주받은 안뜰>과 같은 역자군요. ㅋㅋㅋㅋ
날 더운데 살살 읽으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