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편의 단편소설을 실은 <순박한 마음>을 다 읽고 책 끝의 '옮긴이의 말'을 보니까, 놀라워라, 이런 문장이 있다.

 

 “플로베르의 작품은 초기 습작을 제외하면 여섯 권에 지나지 않는다.”


 얼른 내가 읽은 플로베르를 세어봤다. 이 <순박한 마음>, 책의 앞날개에 쓰인 대로 원제목이 <세 가지 이야기>가 여섯 번째 플로베르였다. 초기 습작을 제외한 모든 작품을 다 읽었다는 말씀. 책의 발간 순으로(위키피디아 참고) 하면 이렇다.


 <보바리 부인>  1857
 <살람보>  1862
 <감정교육>  1869
 <성 앙투안느의 유혹>  1874
 <세 가지 이야기>  1877
 <부바르와 페퀴셰>  1881


 <세 가지 이야기>, 우리 제목으로 <순박한 마음>이란 책에 (사실 단편집은 『순박한 마음』, 해당 작품은 <순박한 마음>, 이렇게 써야 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막 쓸 테니 알아서 읽어주시면 좋겠는바) 마지막 이야기에 <헤로디아>가 나온다. 그러하다. 오스카 와일드가 <살로메>를 1893년에(초연은 96년에) 냈으니 와일드보다 16년 빨리 헤로디아의 친 딸 살로메의 ‘일곱 베일의 춤’을 만든 셈이다. 뭐 꼭 ‘일곱 베일의 춤’이 아니면 어떤가. 춤을 췄고, 의붓아버지가 의붓딸이 춤추는 모습에 미쳐서 자기 재산의 절반과 나라 땅의 절반을 뚝 떼 주겠다고 하는 거, 그렇지만 살로메는 쟁반 위에 요카난의 머리를 담아 달라고 땡깡을 부리는 거까지 같으면 그냥 와일드보다 16년 앞섰다고 해도 무방하지 뭐.
 이 <헤로디아>는 쥘 마스네가, 역시 이 책에 실린 <구호성자 쥘리앵의 전설>은 카미유 에르롱쥐Camille Erlanger가, <보바리 부인>은 엠마누엘 봉드빌Emmanuel Bondeville이, <살람보>는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가 미완성 오페라로 만들었고, <보바리 부인>은 무려 8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단다. 책을 겨우 여섯 권 낸 작가로는 진짜 대단한 성과라고 해야 하겠다. 지금 같으면 판권만 가지고도 한 평생 즐기면서 살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플로베르의 전편을 다 읽어본 인간의 특권으로 좀 잘난 척을 하자면, 나도 알고 보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바리 부인> 하나만 읽고 플로베르는 졸업한 줄 알던 족속이긴 하지만, 

 

플로베르 하면 숱한 사람들이 <보바리 부인>을 연상하고 다른 작품들도 그와 비슷하리라고 지레짐작을 하기 십상일 거 같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정말 다양한 상상력을 그의 작품들에 쏟아냈다. (난 <감정교육>은 재미없게 읽어서 그건 별도로 하자.) <보바리 부인>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성 앙투안느의 유혹>은

 

 

상상도 하지 못한 플로베르의 다른 면모를 일별할 수 있는 기회였으면서, <성 앙투안느의 유혹>을 기점으로 눈에 띄는 플로베르란 플로베르는 모두 읽어보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공연할 수 없거나, 정말로 공연하기엔 매우 불편한 희곡의 형태를 갖춘 소설로 결코 짐작도 하지 못했던 예상외의 모습에 경탄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예전에 ‘열린책들’에서 최고의 작품을 선정하는 작은 행사가 있었는데, 나는 서슴없이 <성 앙투안느의 유혹>을 꼽았었다.

 

 다음에 큰 기대를 한 상태에서 <감정교육>을 읽고 플로베르한테 잠깐 감정이 생겼었다가,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살람보>를 읽게 된다. 이 작품은 난데없이 1차 포에니 전쟁 이후의 로마도 아니고 카르타고를 무대로 벌어지는 내전을 다뤘다.

 역시 새로운 플로베르의 모습으로 41세,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절정기에 달한 그가 모르긴 몰라도 프랑스의 웬만한 도서관은 다 뒤졌을 만큼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 소설을 썼다. 전쟁 이후 카르타고에 남은 성난 용병들이 보상을 요구하고, 이를 진정시키기 위한 카르타고의 집정관 간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내전. <보바리 부인>을 플로베르라고 생각한 나는 여지없이 코피 터졌던 기억이다.

 

 다섯 번째 플로베르는 <부바르와 페퀴셰>.

 

 미완성 작품이긴 하지만 대단한 완성도를 지니지 않았는가 싶었다. 조카딸의 파산을 면해주기 위해 전 재산을 다 쏟아 붓고, 자그마한 도서관애서 나오는 미미한 돈에 의지해 가난하고 고독한 말년을 꾸리던 작가가 지난 삶을 돌아보며 썼음직한 참 쓸쓸한 희극이었다. 이 작품은 몇 년 후 은퇴해서 시간이 남아돌면 꼭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을 하고 있다.


 마지막 플로베르 <순박한 마음>에는 표제작과 위에서 잠깐 언급한 <구호 성자 쥘리앵의 전설>과 <헤로디아>가 함께 실려 있다.

 이 가운데 내가 제일 좋게 읽은 건 표제작 <순박한 마음>. 단언하는데, <순박한 마음>은 21세기인 오늘, 프랑스가 아닌 우리나라의 어느 작가가 발표한다고 해도 여전히 독자의 정서에 공감을 줄 수 있고 그들의 가슴 속에 숨어있는 따뜻한 심상을 확인하게 해줄 수 있다. 즉 보편적 인간애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는 말씀. 플로베르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1876년 4월에 어머니의 고향 퐁레베크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래서 퐁레베크라는 도시에 사는 오뱅 부인과 하녀 펠리시테를 등장시킨다. 청춘과부 오뱅 부인과 처녀로 늙어 죽는 펠리시테. 이 외로운 커플들 사이에 어김없이 발생하는 삶의 비극들. 남편이 죽고, 첫사랑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돈 많은 늙은 여자한테 장가들고, 딸이 죽고, 아들도 죽고, 홀로 늙어가는 하녀의 위안이지만 친절하지 않았던 늙은 앵무새도 죽고, 기어이 오뱅 부인도 먼저 가고, 펠리시테도 평생 누었던 침상에서 숨을 거두는 이야기. 이렇게 건조하게 말하니까 그냥 그런 소설이겠거니 할 수도 있으나 정말 읽어보면 그 쓸쓸함이라니. 줄리언 반스는 이 <순박한 마음>을 영국에서 읽고, 어느 날 도버해협을 건너 플로베르가 살았던 프랑스 각지를 돌면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앵무새의 박제를 찾는 노정을 기록했으니 그게 바로 <플로베르의 앵무새> 아니겠는가. (내 말은 믿지 못하더라도 줄리언 반스는 믿겠지.) 참 마음에 와 닿는 단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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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9-2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박한 마음>은 짧지만 참 좋죠. 저도 이 작품 참 좋아해요. 제목도 왠지 좋고. 근데 저도<감정교육>은 1권까지만 읽고 2권을 못 읽고 있어요. <성 안투안느의 유혹>이 그렇단 말이죠? 꼭 읽어보겠습니다. 참, 추석 연휴 소주와 책과 함께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연휴 때 몇 병 드셨는지 나중에 계산 좀.... ㅋㅋㅋㅋㅋ

Falstaff 2018-09-21 12:39   좋아요 0 | URL
<성 앙투안느....>는 아마 극과 극일 겁니다.
제 경우에 좋았다는 얘기라서요, 언제나처럼 책임지지 않습니다. ㅋㅋㅋ
옙. 고맙습니다. 한 바탕 잘 때려먹고, 쐬주도 장하게 마시고 오겠습니다.
잠자냥님도 즐거우시기 바랍니다. (어디 길게 여행이라도..... ^^;)
 
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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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시 라디오에서는 FM 방송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곡은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이렇게 시작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 무려 2,000 쪽에 달하는 장편을 펼치기 위해 작가는 비교적 덜 대중적인 체코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실황녹음을 꺼내들었다. 독후감 시작하기 전에 우리도 <신포니에타> 실황을 먼저 들어보자.

 

Jukka-Pekka Saraste, 서부독일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2007

 

  극도의 정체를 겪고 있는 도쿄의 수도(고가高架)고속도로 위, 도요타 크라운 로열살롱 택시 안에서 도무지 약속시간까지 장소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 초조해하는 우리의 주인공 아오마메는 <신포니아>를 들으면서 야나체크가 이 곡을 작곡한 해가 1926년이고, 1926년이면 다이쇼 일왕이 죽고 새로 쇼와로 연호가 바뀐 해이며, 유럽에서는 양차대전 사이 잠깐의 평화시기인데 2년 전에 카프카가 불우했던 세상을 뜨고 곧 히틀러라는 키 작은 남자가 불쑥 나타나 아담하고 작은 나라 체코를 덥석 집어삼킬 시기임을 떠올린다. 책을 다 읽으면 이게 중요한 복선이라는 걸 늦게나마 알게 된다. 왜 하루키는 여기서 굳이 2년 전에 죽은 카프카를 언급했을까. 카프카의 대표적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 ‘그레고르 잠자’. 2,000쪽, 정확하게 1,997쪽의 긴 소설 가운데 카프카가 만든 주인공 이름이 딱 한 번 나온다. 그것도 ‘잠자’라는 성姓으로만. ‘잠자’는 다 알다시피 어느 날 갑자기 딱정벌레로 변신한 은행원.
 시간이 촉박하다는 얘기를 들은 택시 기사는 고가 고속도로에 비상구가 있는데, 비상구를 열고 계단을 타고 지상까지 내려가, 거기서 지하철을 타고 가면 늦지 않을 거라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고가도로로 건설된 수도고속도로의 비상계단을 내려간다는 특별한 일을 할 경우엔 일상풍경이 평소와 조금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나 겉모습에 속지 말라고. 현실은 언제나 하나란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리송하다. 아오메마도, 대사를 읽는 독자들도. 하지만 쉽게 알아차리지는 못할 것. 아오마메가 정말로 택시에서 내려 비상구로 가 가로로 놓인 철책을 건너기 위해 하이힐을 벗고, 짧은 치마가 허리까지 말려 올라가는 것을 무릅쓰고 다리를 번쩍 들어 넘어간다. 맨 스타킹 발로 철제 계단을 내려가 지상에 도착했다. “겉모습에 속지 않도록 하세요. 현실이라는 건 언제나 단 하나뿐입니다.” 운전사의 말을 떠올리며.
 잠자는 어느 아침에 딱정벌레가 돼버렸고, 아오메마는 거미줄을 헤치며 오랜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은 적 없던 오층 높이의 (거의 사다리 수준의)철제계단을 내려오면서 잠깐 마치 뱃멀미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는데 그게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선 거였다. 즉 카프카는 잠자의 외형을 변화시킨 반면 하루키는 평행우주(라고 일단 가정하자. 지금 차원이 아닌 다른 시간 속의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양쪽 우주를 연결시키는 고리를 건너게 한다.
 아오마메. 푸른 콩, 청두(靑豆)란 이름의 여인의 기억 깊숙이 새겨진 한 남자. 남자라기보다 소년 덴고. ‘증인회’라는 소수 종교에 깊이 빠진 부모 때문에 어려서부터 또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자란 아오마메. 일요일마다 NHK 방송국의 수신료 수금원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도시를 돌아다니며 지내야 했던 덴고. 덴고는 덩치도 크고, 힘도 세고, 모든 교과에 우수하고, 그 중에서도 산수, 특히 수학에 관한 한 신동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소학교 시절에 벌써 고등학교 수학 문제를 술술 풀어낸 수재 덕에 따돌림을 당하지 않았을 뿐. 과학시간 그룹과제를 하다 따돌림을 당하자 덴고가 아오마메를 자기 팀으로 들어오게 하여 원만하게 마무리 지어준 일이 있었다. 소학교 4학년 때. 그해 12월,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둘이 남게 된 날. 창밖을 바라보고 섰던 둘. 아오마메가 덴고의 손을 꼭 잡고 한 동안 있다가, 손을 놓고 교실 밖으로 나간다. 두 소년소녀는 급작스럽게 성장하여 소년은 여인의 모습을 그리게 되고, 소녀는 몇 달 후 초경을 경험한다. 그러나 5학년이 되자마자 도시를 떠난 아오마메. 도시와 함께 가족에게서, 절대 이탈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종교의 굴레에서도 소녀는 떠나고 만다. 이후 아오마메와 덴고의 저 깊숙한 가슴 속에서는 서로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의 끔찍스럽게 질긴 사랑으로 점점 고착되고 있었음을 아무도 몰랐다.
 그때부터 20년이 지난 1984년.
 덴고는 학원의 수학 강사이면서 아직 등단은 하지 않았지만 유망한 작가지망생이 됐고, 매주 금요일 오후에 자신의 아파트를 찾아오는 열 살 위의 유부녀와 오직 몸의 즐거움을 정기적으로 누리며 살고 있다. 최근에는 ‘후카에리’라는 열일곱 먹은 아가씨가 쓴 소설 <공기 번데기>를, 뼈대를 유지하고 문장을 바꿔 쓰는, 소위 리라이팅re-writing을 해 약간의 수입을 올리기는 했지만 책 속의 모델이 되는 종교집단과 매우 위험한 관계에 빠져들고 만 것을 그리 심각하게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아오마메는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소프트볼 특기생으로 대학까지 마치고 지금은 유명 스포츠클럽의 인스트럭터로 이름이 높아져 유명인들의 개인 인스트럭터 일도 겸하면서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를 찾았다. 스물여섯 까지 처녀였다가 이후 조금 스트레스 받는 일이 생기면 가끔 바에 들러 두상이 잘 생긴 중년 남자를 골라 성욕을 만족시키고는 했다. 그러나 아주 간혹이긴 하지만 아오메마는 섬세한 손끝에서 나오는 천재적 감각의 침술로 외상外傷없이 한 목숨을 거두어가는 연쇄살인범이기도 하다.
 이들은 우연하게도 다른 세상에 떨어져 서로 어디 있는지 모르나 사실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살게 된다. 덴고는 다른 차원의 세상을 “고양이 마을”이라 부르고, 아오마메는 1984년을 “1Q84”년이라고 칭한다. 진짜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질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간절하게 바라는 일을 이해하고 있더라고, “진짜” 간절하게 바라는 일은 이해할 수 있을까? 거꾸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진짜 간절하게 바라지 않아서였을까?
 두 번째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하루키의 어쩔 수 없는 먹물기가 곳곳에 배어있다. 사할린에 징용간 조선인의 아들로, 홋카이도 고아원에 살다가 도망쳐 자위대 특수병과에 입대해 인간병기로 길러진 게이가 도피생활에 접어든 여성에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권하면서 감방에 가거나 도피하면서 읽기에 적당한 책이라 말하고, 비트겐슈타인과 쉬르레알리즘을 서슴없이 입에 올리긴 쉽지 않을 텐데. 뭐 그럴 수도 있지. 한 명 정도면. 비록 그가 일본 최악의 카스트일지언정. 이 책을 읽으면서, 하루키는 당연히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 밥 딜런이 같은 상을 받았다는 측면에서만. 대중적이고, ‘새롭지는 않지만’ 재미있고, 또 많이 팔릴 책을 쓰는 능력. 이건 세계 제일인 거 같다. 움베르토 에코도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한 바 있었듯이.


 “어떤 음모를 폭로하는 문서를 만들어서 팔아먹으려면 독창적인 내용을 구매자에게 제공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구매자가 이미 알아낸 것이나 다른 경로를 통해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만을 제공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 <프라하의 묘지 1>  146~147쪽, 열린책들 2013. 밑줄은 쇤네가 그었음.)


장르소설이라 할 수 있다. 평행이론이나 차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 외계 등등에 관심이 있는 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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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공의 체면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8
원팡이 지음, 장희재 옮김 / 연극과인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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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공? 여기서 공은 귀족의 계급 공公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공작公爵인데, 1940년대 중국에서 장 공이면 딱 한 명, 바로 장제스蔣介石를 일컫는 말. 그러니까 장개석의 체면이란 뜻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장개석 당시 우파 군부독재자의 체면이 69년이 지나서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스물두 살 젊은 극작가로 하여금 이런 제목으로 희곡을 쓰게 했을까. 이 희곡은 2012년에 발표했고, 무대는 1943년 겨울의 중경重慶과 1967년 여름의 남경南京이다.
 1943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남경을 점령하자 장개석은 수도를 중경으로 옮겼다. 이때 남경에 있던 당시 중국의 최고 명문대학인 국립중앙대학 역시 중경으로 이사를 했는데,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일본과 맞서 싸우는 대신 중국 공산당과의 전투에 더 열을 올려 비열한 방법으로 공산당군 3,000명을 학살하고 3,600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행방불명 된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을 본 중국 국민들은 이것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국민당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1년 후 임시수도 중경의 중앙대학. 교수 세 명이 교묘하게 뇌를 쓰고 있다. 장개석이 다른 곳도 아니고 중앙대 총장으로 부임할 계획이고 부임하기 전에 (특히 중문과)교수들에게 저녁을 한 턱 내기로 작정을 해서 초청장을 보냈는데, 문제는 교수들이 독재자 장 공의 초대를 그리 흔쾌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고 초대에 응하지 않기도 쉽지 않은 것 역시 당연하다. 만찬에 참석하지 않으면 장 공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 될 터이고, 어쨌든 실권자에게 당장 밉보이는 일이 생길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니까.
 그리고 24년 후의 남경. 마오저뚱의 문화대혁명을 시작한지 1년이 지난 후. 벌써 74세와 69세의 노년이 된 세 명의 전직 대학교수들은 인텔리에게 유달리 혹독했던 홍위병들의 발톱을 피하지 못해 남경대학의 한 건물에 반동분자의 낙인이 찍혀 갇혀있는 처지로 떨어졌다. 장개석 정부에 가장 완고하게 반대했던 시임도 전 교수가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를 반성문을 쓰고 있을 때 하소산 전 교수가 이이에게 들른다. 정상 상태면 반동분자끼리 만나는 일은 불가능할 터. 마침 홍위병 두 파벌간의 싸움이 벌어져 아무도 반동분자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바람에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 이어서 이들보다 다섯 살 아래인 변종주 전 교수까지 합세해 24년 만에 중경이 아닌 남경에서 다시 한 자리에 만나게 된다. 문제는 24년 전 장 공의 초대 만찬에 누가 참석을 했느냐 하는 일. 교수 하나가 다른 교수가 장개석의 만찬에 참석했다고 고발을 했고, 그 교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가 거기 참석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 혹은 참석은 했지만 가뜩이나 반동분자로 몰려 고생이 자심한데 그걸 피하려 고발자의 기억을 흐리게 만들 목적인지도 모르고.
 이렇게 세 명의 인텔리가 24년의 터울을 두고 극우(장개석 정권)과 극좌(문화혁명의 홍위병) 정권에 의한 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발언하는지를 드라마로 만들었다. 스물두 살의 젊은 극작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갈등의 시절’에 지식인들의 의견 충돌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보면 지식인 속물인 것처럼 보이고, 어떻게 보면 속물 그 자체가 틀림없게 묘사를 하는데 읽는 사람에 따라 이들 가운데 ‘가장 진정한 속물’이 누군가는 달리 생각할 여지를 두었다. 이거 재미있지 않은가. 그렇다. 세상 누구나 다 자신이 완전하게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러니 조금씩은 속물 기운을 가지고 있는 바, 그걸 어떻게 묘사할까, 하는 거, 그리고 판정은 관객이나 독자에게 맡기는 솜씨를 겨우 스물두 살의 아가씨가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놀랍다. 내 경우엔 희곡 속에 두보를 비롯한 당시 몇 귀절이 나와 잠깐이나마 구절을 해석하며 우리말로 바꾼 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아보는 잔재미도 주었다.
 이것으로 출판사 “연극과 인간”에서 나온 중국현대희곡총서 여덟 권을 모두 읽었다. 이 중국현대희곡총서를 읽은 영향으로 우리나라 희곡집을 두꺼운 책으로 세 권 장만했다. 새삼스레 불민한 나로 하여금 우리나라 희곡에 관심을 갖게 했으니 그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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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글씨로 쓰는 것 민음의 시 232
김준현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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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는 데도 요령이 생긴다. 예컨대 김준현의 처녀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같은 시집을 펼쳐 처음에 나오는 시 한 두 편을 읽을 경우에는, 일찌감치 책을 끝으로 넘겨 평론가가 쓴 해설을 ‘대충’ 훑어본다. 그렇지 않으면 난수표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시들을 도무지 읽어낼 도리가 없다. 이때 주의할 건 해설을 대충 훑어볼 뿐 정독하면 안 된다는 것. 당연히 내 경우를 말하는 것인데 만일 애초부터 평론가의 해설을 숙독한 다음에 특히 시를 읽으면 글 잘 쓰는 평론가의 의도대로만 시가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그러면 곤란하지. 특히 시는 독자의 것이지 시인이나 평론가의 것은 아니잖은가.
 그래서 일단 “작품해설”의 앞부분에 휙 일별을 주었다. 문학평론가 임지현은 당연히 무지하게 현학적으로, “인공 언어 제작자, 지구―헵타포드의 비정한 세계의 기록”이란 뻑적지근한 제목을 달아 김준현의 시집을 해설한 바, 이 시집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변종 인간의 자기 기록”이라고 선언을 해놓고 시작한다. 자기 고백이 아니라 “환유적인 자기 기록”이라 하며 고백과 기록의 차이점에 관해 잠깐 설명한다. 그 다음에야 내가 진짜로 관심이 있는 말을 하는 바, 같이 읽어보자.


 “기록은 특정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쓰기 행위이다. 이 시집은 쓰기에 대한 기록이며, 쓰기 주체의 수행성과 쓰기 과정의 비밀에 대한 기록이다. 왜 김준현은 쓰기 주체의 행위와 언어에 집중하는 것일까? 이 시집은 의미의 해독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시를 해독하는 비밀 열쇠를 깊이 숨겼거나 아니면 분해해서 시집 전체에 흩뿌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처음부터 비밀 열쇠는 없으며, 그는 그저 허심탄회하게 쓰기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한 “쓰기”는 당연히 시를 쓰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테고, 시집의 테마는 ‘시를 쓰는 주체의 수행성’(말을 평론가처럼 해서 어렵지 쉽게 하자면 그냥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라는 얘기다)과 시 쓰는 과정, 그러니까 시의 재료인 언어를 선택하는 일을 하면서 그 속에 숨은 비밀을 기록했다는 말인데, 시인은 비밀을 해독하는 열쇠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뜻. 이를 더욱 쉬운 얘기로 다시 설명해드리자면,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공감은 애초부터 쥐뿔도 감안하지 않고 자신의 시를 온갖 환유와 은유와 암호로 덮어놓았다는 거다. 완전히 개인적인 노래이며, 자기 직업이 얼마나 비의에 싸여 있는지를,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를 언어로 포장했다는 뜻, 이라고 오해할 수 있고, 나는 그렇게 오해하기로 작정했다. 물론 시인은 무지하게 심각하게 단어를 선택하고, 단어의 다중성과 동음이의同音異義를 이용한 놀이를 시도했겠지만, 독자 입장에서 그 놀이에 동참하지 못해, 즉 공감하는데 실패한다면, 이젠 독자의 자격으로 시를 읽고 그냥 ‘시인의 말장난’일 뿐이라고 판정을 해도 비난받지는 않을 거 같다.
 시집의 앞쪽에 있는 시 가운데 의미심장한 제목을 달고 있는 작품이 있었다. 감상해보자.



 쓴 것과 쓰는 것



 양말의 전부는 양말이 뒤집힐 자유 발톱에서 발톱의 색을 벗기면 속이 다 보이는 사람처럼 벗기고 싶은 마음과 벗은 마음의 모양이 다르다 한 사람의 발에서 함께 자란 발톱의 길이가 다 다르다

 집을 나간 개의 이름이 개의 목에 걸려 있을 자유
 집을 나가고 싶은 자유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와
 집이 될 자유가 다르고


 집에 들어서서 콜라의 뚜껑을 비트는 숨소리가 남아 있는 콜라와 같을 때 콜라의 호흡은 언제나 죽음 직접의 것처럼 간신히 유지되고 엄마가 안 보이고


 저 방에 있을까 물음표가 물어보는 것들은 묻기 전부터 있었고 환청이 소리를 낳는 소리라면 엄마의 침묵과 나의 침묵이 다르고


 고구마는 어두운 곳에 두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남아 있는 건 고구마가 자랐기 때문이고
 고구마의 몸을 뚫고 자란 싹들이
 고구마를 더 살게 한다면


 나는 어두운 곳에 있어야 했다 나는 고구마와 다르고 생선과 달라서 생선이 상하면 생선의 냄새가 나고 기분이 상하면 기분의 냄새가 나는 것처럼 집보다 집이라는 말이 더 가까운 지면에서 나는 입을 벌리고 같은 말을 쓰고 또 쓴다 같은 말들이 다 달라지고 있다   (전문)



 시를 읽는 것이 시가 품고 있는 내용과 공감을 해서, 감정이입을 통해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는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다. 장황하게 이 시를 전부 다시 읽어보지는 말고 그냥 마지막 연만 슬쩍 읽어보자. ‘어두운 곳에 있어야 했던 나’를 고구마가 환유하고 있었다가, 난데없이 생선이 등장해 이제 어두운 곳에 보관해야 하는 고구마와 별개로 냄새가 나고 냄새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 생선이 또 나를 환유하다가, ‘집’이라는 실체의 주거지보다는 ‘집’이라는 언어로 입을 벌리고(노래를 하고) 같은 말을 쓰고(시를 쓰고) 또 쓴단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당연히 모르겠다. 평론가 임지현의 말대로 암호를 푸는 열쇠를 시인은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즉, 완전히 ‘개인적인 기록’이란 말이다.
 표제작 <흰 글씨로 쓰는 것>에도 이런 성향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전략)
 구름의 흑심에도 물기가 있다는데 책과 책의 시체가 쌓인
 여름, 모두 폭우 속에서 혈육이 되어라
 혈과 육이 다 엉키고 붙은 자음모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로 우는 울음소리의 주인들이여, 처음이란 침대에 묻은 약간의 피였을까
 나는 약의 의지로만 흰소리를 하지
 (중략)
 검은 프라이팬보다 단단한 밤이면
 내리는 비가 내린 비를 때리는 자학의 파티 속에서
 나체가 되고 싶다
 내린 비가 내리는 비를 끔찍하게 만드는 세계, 눈이 멀어서
 예외가 보이지 않는 오이디푸스
 (하략)


 이 시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시를 쓴 시인 말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역시 내 손을 이미 뜬 시에 대해 내가 뭘 왈가왈부하겠는가, 라고 말 해버릴 것이 분명한 바, 이제 이 작품 <흰 글씨로 쓰는 것>은 모호함의 대양에서 영원히 길을 잃고 표류할 거 같다. 내리는 비와 내린 비의 상호 관계 같은 건 시집 전체를 통틀어 고루 분포하고 있다.


 손가락이 다 있는 장갑을 걸치고
 털모자와 털목도리를 두르고
 털 하나 없는 몸이 말라 가고 있다
 시체 놀이를 자주 하던
 아이의 시체처럼
 죽을힘을 다해 숨을 쉬려던 사람의
 죽을힘  (<거식증> 부분)


 구김살 없는 사람도
 구김살이 많은 소복을 입는 날
 그러나 신발은 언제나 당하는 것   (<신은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것이다> 부분)


 이걸 보고 시인의 “조어법造語法”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모국어이되 인공 언어이며, (인공 언어가 모여 있는)시집은 헵타포드라는 이질적 존재의 세계를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건 많이 배운 평론가들이나 할 이야기지 나 같은 무지렁이의 것은 아니다.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자면, 시가 시인의 비공감할 개인적인 서술에 머물면서, 그것도 모자라 풀어내기 힘겨운 암호 안에 가두어두는 일은 독자로 하여금 시를 멀리하게 만드는 아주 효과적 방법이라는 것. 그리하여 시라는 장르를 시인과 평론가들만으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게 한다고 주장 해야겠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시를 모르겠다. 암만해도 안 되겠다. 이젠 시집을 사는 일을 대폭 줄일 수밖에. 그건 몇 명의 시인들, 당신들이 조장했을 수 있다.

 



어느 분이 지나시다가 아마추어가 쓴 이 독후감을 읽고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을 쉽게 하지 마시구요 본인 수준에 맞...."이라는 댓글을 썼다가 지우셨다.

이에 대한 변명.

현대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 예를 들어 음악, 미술, 무용 등은 벌써 오래 전에 전문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만이 즐길 수 있는 리그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제임스 미치너도 그의 훌륭한 작품인 <소설>에서 문학의 경우도 문학의 진화나 진보를 이해하는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것이 진정 훌륭한 작품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요. 아직 수준이 문학의 진화나 진보를 이해할 수 없는 저 같은 다중들의 눈으로 보면 "그들만의 리그"가 맞습니다.

조언을 해주신 것처럼 요새 저는 제 수준의 맞는 시들을 읽고 있습니다. 한용운 부터 김소월, 이육사, 서정주, 신석정, 김영랑, 청록파 세 명, 조태일, 신경림, 이성복 등등 말이지요.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이 시집은 제 수준에 맞지 않아서 저는 좋게 평가를 할 수 없는 것 뿐입니다. 만일 다중이 저하고 수준이 비슷하다면 (그런 것 같은데요), 시집이 팔리지 않을 것이고 그건 진화, 진보적 시를 쓴 시인과 출판사, 평론가들 책임 같습니다. 그렇다고 독자의 구미에 맞는 낡은 시를 쓰란 말씀이 아닙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들에 의하여 예술은 발전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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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9-1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독하게 공감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요.

Falstaff 2018-09-17 12:04   좋아요 0 | URL
여전히 시인들이 공감할만한 시를 계속 쓰고 있지만, 문제는 찾아내기가 힘든다는데 있는 거 같습니다.
 
냉장고에서 연애를 꺼내다
박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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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을 졸업하고 절친 ‘유리’를 따라 취업준비하다 스스로 직장생활 체질이 아님을 깨닫는 서나연. 그래 꽃꽂이, 자수, 수예 같은 자격증을 따고, 통통한 몸집에 어울리게 음식 만드는 거, 먹는 거 좋아하는지라 당연히 요리 자격증도 딴다. 나연은 보통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침밥으로 뭘 해먹을까 궁리해 냉장고에 들어있는 재고 식재료의 범위에서 가장 맛난 아침을 해먹는다. 아침을 해먹자마자 점심엔 뭘 해먹을까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다가 역시 냉장고 안에 들은 재고 식재료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가장 맛난 점심밥을 또 해먹는다. 하여튼 책 안에선 아침에 먹고 남은 밥이나 반찬 또는 기타 음식을 다시 데워 먹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는다. 점심밥을 먹자마자 저녁엔 뭘 먹을까를 구상하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먹는 일 틈틈이 3년째 연애를 이어가고 있는 성우와 만나 영화도 보고, 성우는 좋아하지만 자기는 전혀 관심 없는 농구 이야기도 들어주고, 근데 성우는 언제 결혼하자고 할까, 의심을 해가면서 아무 생각 없이, 초등학교 시절의 첫사랑이며 지금은 친구 유리의 애인이자 자신의 ‘말 그대로 친구’, 다만 성 염색체만 자기하고 조금 다른 친구 지훈이하고 저녁 먹은 얘기, 영화 같이 본 얘기 등을, 진짜 아무 생각 없이 애인 성우한테 툭툭 던짐으로 해서(얘, 바보 아냐?), 그것도 한 두 번이지 매번 이딴 식이라 성우로 하여금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천진무구한 20대 후반의 아가씨였다가 이젠 30대 초반의 아가씨. 몇 년이 흐르는 동안 천진무구, 좀 언짢은 말로 하자면 아무 개념 없이 사는 서나연을 중심으로 그의 주변 인물들, 아버지(미국에 사는 별거중인 엄마에 관해서는 별로 나오지 않는다), 언니, 고등학교 동창생들 열 명과 그 중에서도 뛰어난 미모의 은주, 대학시절부터 온갖 고민을 공유했던 두 친구, ①수진과, 자기 애인이 될 뻔한 지훈을 재빨리 자기 애인으로 삼은 ②유리, 이들이 주로 연애관계로 엃히고설킨 이야기. 한 마디로 수다.
 일찍이 엄마와 아빠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언니가 엄마 배속에 듦으로 해서 결혼에 이르렀고, 그래 나연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별거를 시작한(것처럼 보이는) 부모를 보며 자기는 어쨌거나 서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평생 사랑하면서 살고자 하는 진짜 순진한(어리석은과 비슷한) 나연. 십년을 연애하고서도 다른 여자 새로 만나 결혼해버린 애인한테 걷어차인 은주, 어쩌다보니 ‘네 이웃의 남자’ 즉 유부남과 얽혀버린 똑똑한 수진,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의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 유리, 이들 사이에서 나연은 지훈과 진짜 친구 사이를 유지함으로써 제 애인 성우와, 지훈의 애인 유리를 돌아버리게 하는 걸 전혀 짐작 못한다. 이쯤 되면 이건 순진, 천진한 게 아니라 좀 모자란 거 아냐? 하여간 마음씨 하나는 좋아서 이웃들 챙겨 먹이는 걸 즐겨하고, 친구를 위해 자기가 연애하고 싶었던 지훈이도 넙죽 가져다 바치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 진짜 있기는 있다.
 근데 사람은 보이는 면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걸 차근차근 알게 되는 나연. 이걸 뭐라 해야 해, 성장? 하여간 비슷한 건데, 알고 보니 엄마와 아빠는 서로 느므느므 사랑해 양가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일단 애(나연의 언니)부터 만든 다음, 양가의 입을 다물게 해놓고 결혼에 성공했는데, 진짜로 결혼을 해보니 그 염병할 사랑이란 것의 유통기한이 진짜 짧다는 진실 앞에서 허둥지둥하다가 어쩌다 또 덜컥 나연까지 만들어버리고 만 것. 급기야 나연이 열 살이 되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이혼은 아니고, 같이는 못살겠고 해서 별거상태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것.
 언제가 깐깐하기 이를 데 없는 언니란 년의 대학 후배, 같은 동아리활동을 했다는 남자에게 “동아리에서 선언문이나 격문, 이딴 거 전담했겠지요 뭐.” 시니컬하게 얘기했다가 천만의 말씀,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언니가 문학 동아리에서 그놈의 ‘시’를 썼다는 놀라운 사실을 듣고 나서 다시 언니를 관찰해보니, 소 안심과 왕새우에 초콜릿 무스 디저트보다는 가래떡 넣고 무친 잡채를 더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아 사람은 보이는 걸로만 판단하다간 코피 터지는 거구나, 하나하나 알아간다. 다른 사례는 생략함. 왜냐하면, 스포일러가 되기 십상이니까.
 먹는 얘기로 치면, 맛보다는 요리에 중점을 둔 이야기. 레시피 같은 것이 나오기는 하지만 책만 보고는 아무 것도 성공적인 요리 작품을 만들 수 없는 수준. 맛에 관해서 말하자면 뮈리엘 바르베리의 짧은 소설 <맛>의 아기자기한 혀의 감촉에 비하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서, 사실 요리나 맛의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젊은 여성들의 사랑과 연애와 실연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 해야 마땅하겠다. 중산층 이상 가정의 결혼 적령기 여성들의 사랑 타령. 걔네들도 사랑은 쉽지 않나보다.
 그래, 그렇게 사랑하고, 이별하고 다시 사랑하고 또 이별하고, 이별하고 살고 있구나, 노래하는 것이 지나가는 청춘이지, 인생 별 거 있어? 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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