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흰 글씨로 쓰는 것 ㅣ 민음의 시 232
김준현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평점 :
시를 읽는 데도 요령이 생긴다. 예컨대 김준현의 처녀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같은 시집을 펼쳐 처음에 나오는 시 한 두 편을 읽을 경우에는, 일찌감치 책을 끝으로 넘겨 평론가가 쓴 해설을 ‘대충’ 훑어본다. 그렇지 않으면 난수표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시들을 도무지 읽어낼 도리가 없다. 이때 주의할 건 해설을 대충 훑어볼 뿐 정독하면 안 된다는 것. 당연히 내 경우를 말하는 것인데 만일 애초부터 평론가의 해설을 숙독한 다음에 특히 시를 읽으면 글 잘 쓰는 평론가의 의도대로만 시가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그러면 곤란하지. 특히 시는 독자의 것이지 시인이나 평론가의 것은 아니잖은가.
그래서 일단 “작품해설”의 앞부분에 휙 일별을 주었다. 문학평론가 임지현은 당연히 무지하게 현학적으로, “인공 언어 제작자, 지구―헵타포드의 비정한 세계의 기록”이란 뻑적지근한 제목을 달아 김준현의 시집을 해설한 바, 이 시집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변종 인간의 자기 기록”이라고 선언을 해놓고 시작한다. 자기 고백이 아니라 “환유적인 자기 기록”이라 하며 고백과 기록의 차이점에 관해 잠깐 설명한다. 그 다음에야 내가 진짜로 관심이 있는 말을 하는 바, 같이 읽어보자.
“기록은 특정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쓰기 행위이다. 이 시집은 쓰기에 대한 기록이며, 쓰기 주체의 수행성과 쓰기 과정의 비밀에 대한 기록이다. 왜 김준현은 쓰기 주체의 행위와 언어에 집중하는 것일까? 이 시집은 의미의 해독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시를 해독하는 비밀 열쇠를 깊이 숨겼거나 아니면 분해해서 시집 전체에 흩뿌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아니면 처음부터 비밀 열쇠는 없으며, 그는 그저 허심탄회하게 쓰기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한 “쓰기”는 당연히 시를 쓰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테고, 시집의 테마는 ‘시를 쓰는 주체의 수행성’(말을 평론가처럼 해서 어렵지 쉽게 하자면 그냥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라는 얘기다)과 시 쓰는 과정, 그러니까 시의 재료인 언어를 선택하는 일을 하면서 그 속에 숨은 비밀을 기록했다는 말인데, 시인은 비밀을 해독하는 열쇠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뜻. 이를 더욱 쉬운 얘기로 다시 설명해드리자면,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공감은 애초부터 쥐뿔도 감안하지 않고 자신의 시를 온갖 환유와 은유와 암호로 덮어놓았다는 거다. 완전히 개인적인 노래이며, 자기 직업이 얼마나 비의에 싸여 있는지를,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모를 언어로 포장했다는 뜻, 이라고 오해할 수 있고, 나는 그렇게 오해하기로 작정했다. 물론 시인은 무지하게 심각하게 단어를 선택하고, 단어의 다중성과 동음이의同音異義를 이용한 놀이를 시도했겠지만, 독자 입장에서 그 놀이에 동참하지 못해, 즉 공감하는데 실패한다면, 이젠 독자의 자격으로 시를 읽고 그냥 ‘시인의 말장난’일 뿐이라고 판정을 해도 비난받지는 않을 거 같다.
시집의 앞쪽에 있는 시 가운데 의미심장한 제목을 달고 있는 작품이 있었다. 감상해보자.
쓴 것과 쓰는 것
양말의 전부는 양말이 뒤집힐 자유 발톱에서 발톱의 색을 벗기면 속이 다 보이는 사람처럼 벗기고 싶은 마음과 벗은 마음의 모양이 다르다 한 사람의 발에서 함께 자란 발톱의 길이가 다 다르다
집을 나간 개의 이름이 개의 목에 걸려 있을 자유
집을 나가고 싶은 자유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와
집이 될 자유가 다르고
집에 들어서서 콜라의 뚜껑을 비트는 숨소리가 남아 있는 콜라와 같을 때 콜라의 호흡은 언제나 죽음 직접의 것처럼 간신히 유지되고 엄마가 안 보이고
저 방에 있을까 물음표가 물어보는 것들은 묻기 전부터 있었고 환청이 소리를 낳는 소리라면 엄마의 침묵과 나의 침묵이 다르고
고구마는 어두운 곳에 두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남아 있는 건 고구마가 자랐기 때문이고
고구마의 몸을 뚫고 자란 싹들이
고구마를 더 살게 한다면
나는 어두운 곳에 있어야 했다 나는 고구마와 다르고 생선과 달라서 생선이 상하면 생선의 냄새가 나고 기분이 상하면 기분의 냄새가 나는 것처럼 집보다 집이라는 말이 더 가까운 지면에서 나는 입을 벌리고 같은 말을 쓰고 또 쓴다 같은 말들이 다 달라지고 있다 (전문)
시를 읽는 것이 시가 품고 있는 내용과 공감을 해서, 감정이입을 통해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 것이라고는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겠다. 장황하게 이 시를 전부 다시 읽어보지는 말고 그냥 마지막 연만 슬쩍 읽어보자. ‘어두운 곳에 있어야 했던 나’를 고구마가 환유하고 있었다가, 난데없이 생선이 등장해 이제 어두운 곳에 보관해야 하는 고구마와 별개로 냄새가 나고 냄새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 생선이 또 나를 환유하다가, ‘집’이라는 실체의 주거지보다는 ‘집’이라는 언어로 입을 벌리고(노래를 하고) 같은 말을 쓰고(시를 쓰고) 또 쓴단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는지는, 당연히 모르겠다. 평론가 임지현의 말대로 암호를 푸는 열쇠를 시인은 절대로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즉, 완전히 ‘개인적인 기록’이란 말이다.
표제작 <흰 글씨로 쓰는 것>에도 이런 성향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전략)
구름의 흑심에도 물기가 있다는데 책과 책의 시체가 쌓인
여름, 모두 폭우 속에서 혈육이 되어라
혈과 육이 다 엉키고 붙은 자음모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음매로 우는 울음소리의 주인들이여, 처음이란 침대에 묻은 약간의 피였을까
나는 약의 의지로만 흰소리를 하지
(중략)
검은 프라이팬보다 단단한 밤이면
내리는 비가 내린 비를 때리는 자학의 파티 속에서
나체가 되고 싶다
내린 비가 내리는 비를 끔찍하게 만드는 세계, 눈이 멀어서
예외가 보이지 않는 오이디푸스
(하략)
이 시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시를 쓴 시인 말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역시 내 손을 이미 뜬 시에 대해 내가 뭘 왈가왈부하겠는가, 라고 말 해버릴 것이 분명한 바, 이제 이 작품 <흰 글씨로 쓰는 것>은 모호함의 대양에서 영원히 길을 잃고 표류할 거 같다. 내리는 비와 내린 비의 상호 관계 같은 건 시집 전체를 통틀어 고루 분포하고 있다.
손가락이 다 있는 장갑을 걸치고
털모자와 털목도리를 두르고
털 하나 없는 몸이 말라 가고 있다
시체 놀이를 자주 하던
아이의 시체처럼
죽을힘을 다해 숨을 쉬려던 사람의
죽을힘 (<거식증> 부분)
구김살 없는 사람도
구김살이 많은 소복을 입는 날
그러나 신발은 언제나 당하는 것 (<신은 날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것이다> 부분)
이걸 보고 시인의 “조어법造語法”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모국어이되 인공 언어이며, (인공 언어가 모여 있는)시집은 헵타포드라는 이질적 존재의 세계를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건 많이 배운 평론가들이나 할 이야기지 나 같은 무지렁이의 것은 아니다.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자면, 시가 시인의 비공감할 개인적인 서술에 머물면서, 그것도 모자라 풀어내기 힘겨운 암호 안에 가두어두는 일은 독자로 하여금 시를 멀리하게 만드는 아주 효과적 방법이라는 것. 그리하여 시라는 장르를 시인과 평론가들만으로 이루어진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게 한다고 주장 해야겠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시를 모르겠다. 암만해도 안 되겠다. 이젠 시집을 사는 일을 대폭 줄일 수밖에. 그건 몇 명의 시인들, 당신들이 조장했을 수 있다.
어느 분이 지나시다가 아마추어가 쓴 이 독후감을 읽고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을 쉽게 하지 마시구요 본인 수준에 맞...."이라는 댓글을 썼다가 지우셨다.
이에 대한 변명.
현대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 예를 들어 음악, 미술, 무용 등은 벌써 오래 전에 전문 교육을 받은 전문가들만이 즐길 수 있는 리그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제임스 미치너도 그의 훌륭한 작품인 <소설>에서 문학의 경우도 문학의 진화나 진보를 이해하는 전문가들이 인정하는 것이 진정 훌륭한 작품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고요. 아직 수준이 문학의 진화나 진보를 이해할 수 없는 저 같은 다중들의 눈으로 보면 "그들만의 리그"가 맞습니다.
조언을 해주신 것처럼 요새 저는 제 수준의 맞는 시들을 읽고 있습니다. 한용운 부터 김소월, 이육사, 서정주, 신석정, 김영랑, 청록파 세 명, 조태일, 신경림, 이성복 등등 말이지요. 말씀하신 것이 맞습니다. 이 시집은 제 수준에 맞지 않아서 저는 좋게 평가를 할 수 없는 것 뿐입니다. 만일 다중이 저하고 수준이 비슷하다면 (그런 것 같은데요), 시집이 팔리지 않을 것이고 그건 진화, 진보적 시를 쓴 시인과 출판사, 평론가들 책임 같습니다. 그렇다고 독자의 구미에 맞는 낡은 시를 쓰란 말씀이 아닙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들에 의하여 예술은 발전하고 있는 중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