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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에 입맞춤을 ㅣ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9
에펠리 하우오파 지음, 서남희 옮김 / 들녘 / 2008년 7월
평점 :
바닷고기, 어류가 물을 벗어나 육지에 터를 잡으면서 가장 큰 곤욕을 겪는 것이 코와 입의 위치였다. 여태 물속에서 아가미 호흡을 하다가 낯선 대기 중의 산소를 얻기 위해 코를 만들어야 했고, 하필이면 코가 음식을 먹는 입 위에 생김으로 해서 목 깊은 곳에서 식도와 기도가 겹치게 디자인 되고 만다. 그래 가끔가다 밥 먹다 재채기하면 코를 통해 밥알도 나오고, 콩나물 대가리도 나오고, 심지어 라면 가닥도 나오는 횡재수를 당하는 것. 뭐라? 맞다. 고춧가루는 기본이다.
인간이 땅에 두 발만 딛고 척추를 곧추세울 수 있게 되면서 역시 몇 가지 대가를 치룬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대장 옆에 붙어 있는 충수. 사람마다 그런 건 아닌데 만일 여기서 염증을 일으키게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백 년 전까지 만해도 며칠 동안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속을 헤매다 결국 제삿날 예약해야 했다. 또 뭐가 있느냐 하면, 입으로 섭취한 각종 음식물에서 영양분을 흡수하고 남은 것, 소화시키지 못한 약 70%의 영양분을 포함해서 참 훌륭한 퇴비이긴 한데 담즙이 섞여있어 아름답지 못한 냄새와 덩어리진 모습을 갖춘 음식뭉치를 몸 밖 세상으로 내보내는 마지막 기관, 미주알에 중력gravity이 가해지게 되었다. 거기다가 소화물消化物을 체내에서 방출하기 위한 안간힘까지 더해져 네발짐승들과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의 높은 비율로 인간의 미주알에 치명적 부담을 지게 만든 것. 그리하여 거의 모든 인간은 주로 “치痔”자로 시작하는, 사실 그럴 필요 전혀 없지만, “치恥”스러운 질병을 숙명처럼 달고 산다. 치질痔疾, 치루痔漏, 치핵痔核, 치열痔裂 등등 참 여러 가지다. 오늘 아침 변을 보고 화장지로 뒤를 닦을 때 휴지에 묻은 잔류물이 거의 없는 사람이 백 명 가운데 한 명 정도 있다. 최상의 미주알을 가진 축복받은 존재들. 나머지, 99%의 호모 에렉투스들은 불행하게도 조금이나마 문제를 가지고 산다. 미주알이 밖으로 비죽 나온 건 이름도 재미있지, 수치질. 안으로 옴쪽 밀려들어간 건 암치질. 수치질은 외과에 가서 싹둑 잘라버리면 되지만, 나 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서 옆집 석호네 엄마는, 편히 쉬시기를, 암치질을 견디지 못해 끔찍한 고통 속에 세상 하직하고 말았다. 나처럼 술, 그것도 소주를 일 년 내내 장복하는 사람들은 일 년 중에서 한 열흘 정도는 따끔거리면서, 화장지에 조금의 개양귀비 색깔 피가 묻는다. 쉬운 얘기로 째진 거다. 멀쩡하다가도 며칠의 변비에 시달리다가 재수 없는 사람들한텐 미주알 끄트머리가 물집처럼 부풀어 오르는, 그러나 물집 속에 물 대신 혈액이 담기는 현상 때문에 유사시 때마다 매우 큰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그중에서 가장 고약한 건 미주알 속에서 천공이 생겨 그게 점점 깊어져 나름대로 길을 내긴 하는데 거기서 그만 염증까지 도지는 병. 바로 치루. 여기서 잠깐. 말은 그냥 그렇다. 염증. 근데 그걸 순 우리말로 하면 뭔 줄 아시나? 맞습니다. 고름. 그러니 미주알을 뚫고 옆길로 샌 천공마다 고름으로 가득 찼다는 얘기. 거기다가 유사시 때마다 천공 속으로 변이 들이차면 피와, 고름과 변의 기막힌 반죽이 생기겠어, 안 생기겠어. 머릿속에 그려지시지? 나, 오늘 휴일이고, 아직 조반朝飯 전이다. 주방에서 새로 산 전기밥솥 꼭지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밥 다 됐나보다. 이런 때 이런 아름답지 못한 질병에 관해 쓰는 일 역시 좋을 리가 없다. 밥 먼저 먹고 좀 쉬었다가 이어서 쓰자.
(사이)
이젠 작가에 대하여. 1939년 파푸아 뉴기니에서 태어나 피지의 수도 수바의 병원에서 2009년에 세상을 뜬 피지 국적의 에펠리 하우오파.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피지의 수바에 있는 남태평양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친 인류학자였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그냥 병원에서 죽었다고만 나오지, 죽음에 이르게 한 병명은 나오지 않는다. 책 뒤의 인터뷰 자료를 보면, 1981년, 그러니까 작가가 마흔두 살 때 통가에서 항문에 생긴 염증과 고통을 직접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 간단한 수술을 받았는데, 1년 후에 또다시 재발했음에도 작가는 그때까지 치루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몰랐던 상태였단다. 두 번째 수술 후엔 좀처럼 수술 받은 자리가 아물지 않고 그때부터 일상적인 대단한 고통의 습격을 받으면서 살았다고 하니 소위 ‘삶의 질’은 곤두박질치고 말았을 것이다. 참다가, 참다가, 얼마나 아픈지 이웃에게 이야기를 해주니 이웃이 얼른 나가 수염이 허연 늙은이를 데리고 오더라는 것. 소위 말하는 민간요법을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 후 숱하게 민간요법을 써봤지만 종기와 고통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종기의 크기는 점점 커지면서 더욱 자주 재발되곤 해서 결국 병원에 가 의사의 설명을 들었단다. (그땐 공부하던 시절이라 병원에 갈만큼 돈이 많지도 않았고, 워낙 후진국이라 병원에 대한 신뢰도 없었단다.) 의사 가라사대, 종기(라고 말하지만 극심한 치루)는 매우 세밀한 수술을 해야 하는데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에 가서 받으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병원 갈 돈도 없는 사람이 어찌 비싼 비행기 타고 그런 치유여행을 꿈이나마 꿀 수 있었으랴. 와중에 약물에 대한 과민성 쇼크 때문에 저승 문을 노크한 경험도 있어 수술에 대한 심적 저항도 작지 않았고. 미주알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느냐 하면, 피와 고름이 엉겨 흘러나오는데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여성용 생리대를 하루 종일, 그것도 매일 하고 있어야 했을 정도였단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어이가 없었답니다. 저는 끝도 없이 생리를 하는 암컷 만드릴(서아프리카 큰 비비) 같은 기분이었어요.” 이후 3년을 더 고생한 1985년에야 학교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뉴질랜드 병원으로 날아가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질병과 고통, 그리고 인류학자라는 직업은, 제목이 좀 바람직하지 않은 이 책 <엉덩이에 입맞춤을>을 매우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무대는 남태평양의 가난한 작은 섬나라. 통가나 피지쯤으로 생각하면 될듯한데 정확하게 어디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작가 대신 미주알 질병과 엄청난 고통을 견디는 주인공은 전 헤비급 복싱 챔피언이자 예비 상원의원이며 나름대로 사업에 성공한 오를레이. 첫 장면이 오전 6시의 침상. 아내 “마카리타는 옆에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다. 남편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고 코를 고는 건 22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입 냄새가 고약했다. 오일레이는 제 입을 틀어막으며 뒤척뒤척 몸을 옮겼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랐다. 티포타 말로 ‘푸프푸프’라고 부르는 ‘연발 폭발’이 터졌기 때문이다. 지금 이 폭발음은 저도 모르게 시동이 걸려 깜짝 놀라는 오토바이의 비명처럼 들린다.” 우리의 챔피언이자 지독한 항문 염증에 시달리고 있는 오를레이의 아침일상. 침대에서 멈추지 않고 냄새 또한 경이적인 연발 방귀를 뀌어대고, 질식할 듯한 아내 리타는 친정으로 내빼버리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오를레이는 전에 도시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항문 염증 환자가 뇨urine와 변을 동시에 실금하게 된 결과를 들은 다음부터 민간요법으로 병을 치유하기로 결심한다. 작가 에펠리 하우오파가 누군가. 브라질과 함께 세계적으로 민간치료와 주술 등이 많이 남아 있는 남태평양 지역의 인류학자 아닌가. 작가는 자신의 전공과 경험한 바대로 정말로 다양한 방식의 민간요법으로 오를레이의 항문을 관찰하고, 비록 방식이 야만적이기 짝이 없을지언정, 뭔가를 바르고, 뭔가로 쑤시고, 연기를 쬐고, 뜸을 들이고, 침을 놓으면서 환부의 상태를 점점 악화시켜나간다. 자신이 경험한 피와 고름이 쏟아지는 것도 그대로 표현해놓았으며, 심지어 침술 시술중인 (중국인이라고 잘못 표현한 것이 분명한) 한국인 약재상의 얼굴에다 대고 힘차게 방귀를 뀌어댐으로 해서 얼굴에다 피고름과 변 범벅을 만들어놓기도 한다. 환부가 환부이니만큼 주인공을 농민출신 전 세계챔피언으로 해놓고 마음대로 그가 떠드는 대로 내버려두니, 속어와 외설과 욕설과 적나라한 표현이 서슴지 않고 등장하는데, 이 책은 절대로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으면 안 되는 것이, 날것대로의 문장이 과하게 세속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재미있어서 웃다가, 웃다가 눈물까지 질금거리게 만들어서다. 남이 보면 미쳤다 할 것이 틀림없을 정도로.
왜 하필이면 제목이 엉덩이에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 했는가, 하는 것만 이야기하고 독후감을 끝내자. 서구열강에 의한 100년이 넘는 침략의 역사와 히로히토 군대와의 전쟁 말고는 별로 남은 것이 없는 남태평양의 정체성. 그걸 민간치료요법으로 대신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서로가 서로의 항문에 코를 박고 키스를 하는 날, 세계의 평화가 도래할 거란 담론. 물론 상징적인 의미이며, 이 상징 또는 의미를 해석하는 건 세계 각처 독자들의 몫이다. 책 속에 인도 요가 선생 바부가 오를레이의 항문에 입을 맞추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저는 선생의 신성한 항문에 사랑과 존경을 담아 입을 맞추었습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의 두 지도자들이 다음번 회담에서 이렇게 한다면 핵으로 인한 전멸의 위협은 더 이상 없을 테고, 세계 모든 지도자들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위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위가 아래와 만날 때 영원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