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민음사 모던 클래식 5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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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제목을 ‘키친’이라 한 건 원제 <キツチン>을 영어로 보냈다가 다시 한글로 쓴 거다. 일어 ‘キツチン’을 음가 그대로 한국말로 쓰면 ‘키쯔찡’ 정도. 학창시절에 잠깐 일어 독학할 때 제일 애먹었던 것이 카타카나 문자를 해독하는 일이었다. 그땐 요새 젊은이한텐 그냥 줘도 안 읽는 <공산당 선언> 같은 거 읽어보려면 죽으나 사나 일본어 공부를 해야 했던 시절이었으니 일어 독학이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제목을 그냥 ‘부엌’ 또는 우리말 쓰는 걸 그리 천하게 생각하면 ‘주방’ 정도로 해도 좋았을 텐데 아쉬워서 쓸데없는 말 덧붙였다. 요시모토 바나나. 1987년에 바로 이 책 <키친>을 히트시킴으로 해서 등장과 더불어 잘 팔리는 작가로 이름을 굳건히 한다. 그때 하도 찬란하게 한국의 매스컴에서도 난리굿을 벌이는지라, 괜히 가자미눈을 뜨고 이이를 꼬나보고 있다가, 정작 작품은 하나도 읽어보지 않았다. 한국에선 1999년에 초판이 민음사에서 나오고, 10년 후인 2009년에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란 형식으로 중판이 나온다. 초판의 책 광고에 이렇게 써놓았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가볍고 경쾌하게 글을 쓴다. 가볍고 경쾌하다는 건 그의 글이 경망스럽다는 말이 아니다. 그녀의 글에는 심하게 고통받거나 괴로워하는 사람도 없고 스스로의 심연에 빠져 허덕이는 이도 없다. 그들 또한 상처를 받고 상실에 슬퍼하지만 서로를 다독이는 따뜻한 분위기 속에 생을 꾸린다.”


 요시모토의 다른 작품들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가볍고 경쾌한 글을 쓰는지 아닌지 굳이 찾아 읽어볼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키친>에 들어 있는 세 편의 단편소설은 전혀 가볍지도 않고 경쾌하지 않다. 경쾌하기는커녕 화자 ‘나’를 포함한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심하게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스스로의 심연에 빠져 허덕인다. 그러다 상처와 상실 때문에 스스로 파멸의 길로 접어들면 진짜 삼류소설이 될까봐 어떻게 해서든지, 예를 들어 친구와 애인 사이의 남자가 자살을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자 돈까스 덮밥을 싸들고 한밤중에 택시를 타고 달려가 조그마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거나, 안개 낀 한 겨울의 새벽 5시 5분 전에 다리 위에서 이미 죽은 애인의 유령을 만나는 식으로 삶과 화해하는 거다.
 등장인물로는,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완전히 외톨이가 된 인물, ① 사랑하는 아내가 죽자 성전환을 해 여자의 몸으로 갓난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 겸 엄마, ② 그 아버지 겸 엄마가 불의의 폭행사고로 살해당한 이제는 다 큰 아들. ③ 4년의 애인관계 끝에 교통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애인이 죽어버린 여자와 애인의 동생. ④ 형과 함께 교통사고로 죽은 자기 애인을 잊지 못해 애인의 교복인 (치마를 포함한)세일러 복을 입고 다니는 남자애, 등등. 주인공들이 어떤 상태인지 알면 이 책은 일본의 1980년대 젊은이들의 우울과 고독과 상처와 내밀한 위안을 묘사하고 있으며, 가장 주된 병증은 억지로 외면하고자 하는 우울증이란 걸 금방 알아낼 수 있다. 완전 개인의 취향이지만, 이 책 역시 일본의 사소설들과 유사하게 다 읽은 다음에 뭔가 좀 찜찜하게 남아있는 개운하지 못한 정서를 가득 느끼게 된다.
 세 편의 단편 가운데 앞의 두 편, <키친>과 <만월>은 연작 형태이며, 마지막 <달빛 그림자>는 추천을 받아 요시모토가 등단할 수 있었던 것처럼 작가후기에 쓰여 있는 독립된 작품이다. 일조시간이 짧아져 비타민 디 흡수량 부족으로 가뜩이나 우울증이 도지는 시절에 굳이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을 읽어 불행한 일을 초래할까 겁난다. 이왕 읽으시려면 해 길어지는 내년 봄에나 읽어보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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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에 입맞춤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9
에펠리 하우오파 지음, 서남희 옮김 / 들녘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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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고기, 어류가 물을 벗어나 육지에 터를 잡으면서 가장 큰 곤욕을 겪는 것이 코와 입의 위치였다. 여태 물속에서 아가미 호흡을 하다가 낯선 대기 중의 산소를 얻기 위해 코를 만들어야 했고, 하필이면 코가 음식을 먹는 입 위에 생김으로 해서 목 깊은 곳에서 식도와 기도가 겹치게 디자인 되고 만다. 그래 가끔가다 밥 먹다 재채기하면 코를 통해 밥알도 나오고, 콩나물 대가리도 나오고, 심지어 라면 가닥도 나오는 횡재수를 당하는 것. 뭐라? 맞다. 고춧가루는 기본이다.
 인간이 땅에 두 발만 딛고 척추를 곧추세울 수 있게 되면서 역시 몇 가지 대가를 치룬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대장 옆에 붙어 있는 충수. 사람마다 그런 건 아닌데 만일 여기서 염증을 일으키게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불과 백 년 전까지 만해도 며칠 동안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속을 헤매다 결국 제삿날 예약해야 했다. 또 뭐가 있느냐 하면, 입으로 섭취한 각종 음식물에서 영양분을 흡수하고 남은 것, 소화시키지 못한 약 70%의 영양분을 포함해서 참 훌륭한 퇴비이긴 한데 담즙이 섞여있어 아름답지 못한 냄새와 덩어리진 모습을 갖춘 음식뭉치를 몸 밖 세상으로 내보내는 마지막 기관, 미주알에 중력gravity이 가해지게 되었다. 거기다가 소화물消化物을 체내에서 방출하기 위한 안간힘까지 더해져 네발짐승들과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의 높은 비율로 인간의 미주알에 치명적 부담을 지게 만든 것. 그리하여 거의 모든 인간은 주로 “치痔”자로 시작하는, 사실 그럴 필요 전혀 없지만, “치恥”스러운 질병을 숙명처럼 달고 산다. 치질痔疾, 치루痔漏, 치핵痔核, 치열痔裂 등등 참 여러 가지다. 오늘 아침 변을 보고 화장지로 뒤를 닦을 때 휴지에 묻은 잔류물이 거의 없는 사람이 백 명 가운데 한 명 정도 있다. 최상의 미주알을 가진 축복받은 존재들. 나머지, 99%의 호모 에렉투스들은 불행하게도 조금이나마 문제를 가지고 산다. 미주알이 밖으로 비죽 나온 건 이름도 재미있지, 수치질. 안으로 옴쪽 밀려들어간 건 암치질. 수치질은 외과에 가서 싹둑 잘라버리면 되지만, 나 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서 옆집 석호네 엄마는, 편히 쉬시기를, 암치질을 견디지 못해 끔찍한 고통 속에 세상 하직하고 말았다. 나처럼 술, 그것도 소주를 일 년 내내 장복하는 사람들은 일 년 중에서 한 열흘 정도는 따끔거리면서, 화장지에 조금의 개양귀비 색깔 피가 묻는다. 쉬운 얘기로 째진 거다. 멀쩡하다가도 며칠의 변비에 시달리다가 재수 없는 사람들한텐 미주알 끄트머리가 물집처럼 부풀어 오르는, 그러나 물집 속에 물 대신 혈액이 담기는 현상 때문에 유사시 때마다 매우 큰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그중에서 가장 고약한 건 미주알 속에서 천공이 생겨 그게 점점 깊어져 나름대로 길을 내긴 하는데 거기서 그만 염증까지 도지는 병. 바로 치루. 여기서 잠깐. 말은 그냥 그렇다. 염증. 근데 그걸 순 우리말로 하면 뭔 줄 아시나? 맞습니다. 고름. 그러니 미주알을 뚫고 옆길로 샌 천공마다 고름으로 가득 찼다는 얘기. 거기다가 유사시 때마다 천공 속으로 변이 들이차면 피와, 고름과 변의 기막힌 반죽이 생기겠어, 안 생기겠어. 머릿속에 그려지시지? 나, 오늘 휴일이고, 아직 조반朝飯 전이다. 주방에서 새로 산 전기밥솥 꼭지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밥 다 됐나보다. 이런 때 이런 아름답지 못한 질병에 관해 쓰는 일 역시 좋을 리가 없다. 밥 먼저 먹고 좀 쉬었다가 이어서 쓰자.
 (사이)
 이젠 작가에 대하여. 1939년 파푸아 뉴기니에서 태어나 피지의 수도 수바의 병원에서 2009년에 세상을 뜬 피지 국적의 에펠리 하우오파.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피지의 수바에 있는 남태평양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친 인류학자였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그냥 병원에서 죽었다고만 나오지, 죽음에 이르게 한 병명은 나오지 않는다. 책 뒤의 인터뷰 자료를 보면, 1981년, 그러니까 작가가 마흔두 살 때 통가에서 항문에 생긴 염증과 고통을 직접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 간단한 수술을 받았는데, 1년 후에 또다시 재발했음에도 작가는 그때까지 치루에 대하여는 아무 것도 몰랐던 상태였단다. 두 번째 수술 후엔 좀처럼 수술 받은 자리가 아물지 않고 그때부터 일상적인 대단한 고통의 습격을 받으면서 살았다고 하니 소위 ‘삶의 질’은 곤두박질치고 말았을 것이다. 참다가, 참다가, 얼마나 아픈지 이웃에게 이야기를 해주니 이웃이 얼른 나가 수염이 허연 늙은이를 데리고 오더라는 것. 소위 말하는 민간요법을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 후 숱하게 민간요법을 써봤지만 종기와 고통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종기의 크기는 점점 커지면서 더욱 자주 재발되곤 해서 결국 병원에 가 의사의 설명을 들었단다. (그땐 공부하던 시절이라 병원에 갈만큼 돈이 많지도 않았고, 워낙 후진국이라 병원에 대한 신뢰도 없었단다.) 의사 가라사대, 종기(라고 말하지만 극심한 치루)는 매우 세밀한 수술을 해야 하는데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에 가서 받으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병원 갈 돈도 없는 사람이 어찌 비싼 비행기 타고 그런 치유여행을 꿈이나마 꿀 수 있었으랴. 와중에 약물에 대한 과민성 쇼크 때문에 저승 문을 노크한 경험도 있어 수술에 대한 심적 저항도 작지 않았고. 미주알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느냐 하면, 피와 고름이 엉겨 흘러나오는데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여성용 생리대를 하루 종일, 그것도 매일 하고 있어야 했을 정도였단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어이가 없었답니다. 저는 끝도 없이 생리를 하는 암컷 만드릴(서아프리카 큰 비비) 같은 기분이었어요.” 이후 3년을 더 고생한 1985년에야 학교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뉴질랜드 병원으로 날아가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친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질병과 고통, 그리고 인류학자라는 직업은, 제목이 좀 바람직하지 않은 이 책 <엉덩이에 입맞춤을>을 매우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낸다. 무대는 남태평양의 가난한 작은 섬나라. 통가나 피지쯤으로 생각하면 될듯한데 정확하게 어디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작가 대신 미주알 질병과 엄청난 고통을 견디는 주인공은 전 헤비급 복싱 챔피언이자 예비 상원의원이며 나름대로 사업에 성공한 오를레이. 첫 장면이 오전 6시의 침상. 아내 “마카리타는 옆에서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고 있다. 남편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고 코를 고는 건 22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입 냄새가 고약했다. 오일레이는 제 입을 틀어막으며 뒤척뒤척 몸을 옮겼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랐다. 티포타 말로 ‘푸프푸프’라고 부르는 ‘연발 폭발’이 터졌기 때문이다. 지금 이 폭발음은 저도 모르게 시동이 걸려 깜짝 놀라는 오토바이의 비명처럼 들린다.” 우리의 챔피언이자 지독한 항문 염증에 시달리고 있는 오를레이의 아침일상. 침대에서 멈추지 않고 냄새 또한 경이적인 연발 방귀를 뀌어대고, 질식할 듯한 아내 리타는 친정으로 내빼버리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오를레이는 전에 도시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항문 염증 환자가 뇨urine와 변을 동시에 실금하게 된 결과를 들은 다음부터 민간요법으로 병을 치유하기로 결심한다. 작가 에펠리 하우오파가 누군가. 브라질과 함께 세계적으로 민간치료와 주술 등이 많이 남아 있는 남태평양 지역의 인류학자 아닌가. 작가는 자신의 전공과 경험한 바대로 정말로 다양한 방식의 민간요법으로 오를레이의 항문을 관찰하고, 비록 방식이 야만적이기 짝이 없을지언정, 뭔가를 바르고, 뭔가로 쑤시고, 연기를 쬐고, 뜸을 들이고, 침을 놓으면서 환부의 상태를 점점 악화시켜나간다. 자신이 경험한 피와 고름이 쏟아지는 것도 그대로 표현해놓았으며, 심지어 침술 시술중인 (중국인이라고 잘못 표현한 것이 분명한) 한국인 약재상의 얼굴에다 대고 힘차게 방귀를 뀌어댐으로 해서 얼굴에다 피고름과 변 범벅을 만들어놓기도 한다. 환부가 환부이니만큼 주인공을 농민출신 전 세계챔피언으로 해놓고 마음대로 그가 떠드는 대로 내버려두니, 속어와 외설과 욕설과 적나라한 표현이 서슴지 않고 등장하는데, 이 책은 절대로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으면 안 되는 것이, 날것대로의 문장이 과하게 세속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재미있어서 웃다가, 웃다가 눈물까지 질금거리게 만들어서다. 남이 보면 미쳤다 할 것이 틀림없을 정도로.
 왜 하필이면 제목이 엉덩이에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 했는가, 하는 것만 이야기하고 독후감을 끝내자. 서구열강에 의한 100년이 넘는 침략의 역사와 히로히토 군대와의 전쟁 말고는 별로 남은 것이 없는 남태평양의 정체성. 그걸 민간치료요법으로 대신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서로가 서로의 항문에 코를 박고 키스를 하는 날, 세계의 평화가 도래할 거란 담론. 물론 상징적인 의미이며, 이 상징 또는 의미를 해석하는 건 세계 각처 독자들의 몫이다. 책 속에 인도 요가 선생 바부가 오를레이의 항문에 입을 맞추면서 이렇게 얘기한다.


 “저는 선생의 신성한 항문에 사랑과 존경을 담아 입을 맞추었습니다. 만약 미국과 소련의 두 지도자들이 다음번 회담에서 이렇게 한다면 핵으로 인한 전멸의 위협은 더 이상 없을 테고, 세계 모든 지도자들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위에서 시작해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위가 아래와 만날 때 영원한 평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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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빛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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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맹 가리는 남자. 그의 책 <여자의 빛>을 우리말로 번역한 사람 김남주는 여자. 김남주,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쓰는 한국어 문장이 아주 좋다. 또 뭐가 좋은가 하면, 전에도 한 번 얘기한 것 같은데, 책 앞날개에 쓰인 옮긴이 소개가 조금 웃겨서.
 “서울에서 태어나 자아를 의식할 무렵 사르트르와 카뮈, 랭보를 통해 프랑스 문학을 만났다.”
 흠. 난 자아를 의식할 무렵 뭐했나? 하긴 뭐해, 만날 미적분 풀고, 상춘곡賞春曲 외고, 종합영어에 실린 지문 해석하고, 간간히 헤세, 말로, 레마르크 이런 사람들이 쓴 문고판 읽고 그랬지. 그래 이 모양 이 꼴이지, 안 그래? 그렇다고 뭐 후회하는 건 아냐. 일단 세상에 나오면 주어진 날들을 살아가는 거 자체가 참 대단한 거니까.
 로맹 가리의 책 <여자의 빛>에도 어쨌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미셸과 리디아. 미셸은 남자이자 화자. 왜 남자인 걸 밝히느냐 하면, ‘미셸’이란 이름의 여자도 간혹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미셸은 에어 프랑스의 자회사에서 지금 반년짜리 휴직을 한 상태인 항공기 조종사. 카라카스로 출발하는 항공편을 예약하고, 가지고 있는 돈도 샤를드골 공항에서 달러로 다 바꾼 다음,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그냥 취소해버리고 택시를 타고 파리 부르고뉴가 담배 가게 앞에 도착해 택시 문을 왈칵 열어젖혔는데, 에구머니, 슈퍼에서 장을 봐오던 마흔 살 가량의, 벌써 반백의 머리를 한 여자 리디아를, 하필이면 그녀가 장 본 종이봉지를 툭, 쳤고, 그래 꾸러미에서 빵, 달걀, 우유가 인도 위로 흩어져버린다. 달걀이 땅에 떨어지면서 깨졌는지 멀쩡한지, 우유팩이 터졌는지 안 터졌는지는 책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의문이 있을까봐 우리나라 소설가 같으면 절대로 포장된 인도 위로 떨어진 품목에 ‘달걀’은 포함시키지 않는다는데 만 원 건다.) 이 장면에서 땅에 떨어진 식료품을 다시 꾸러미에 담고 각자 갈 길 가면 얘기는 끝나버리는데, 소설이 되기 위해 작가는 애초에 공항에서 미셸이 가지고 있던 프랑화를 전부 달러로 바꿔버리게 해버렸다. 택시 운전수가 어이 여보, 여긴 프랑슨데? 라고 똬리를 붙자 어쩔 수 없이 마음 착한 리디아가 택시비를 내 주고, 신세 진 건 꼭 갚아야 하는 서양 예의범절에 충실한 상류계급(비행기 파이로트면 동서를 불문하고 상류계급이라 할 수 있겠지? 영화 <Catch me, if you can>의 잘 생긴 청년 디카프리오를 보신 분은 아시리라.) 미셸 역시 리디아에게 돈을 갚기 위해 수표를 써주겠다고 하고, 준 돈 받는 거에 관해선 다른 어떤 민족보다 악착같은 유대인 리디아 역시 당연하게 그러라고 하며 찻집에 들어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드디어 이 두 불행한 남녀의 관계가 시작한다.
 여기까지 얘기했으니 두 중년 남녀가 어떤 식으로 불행한지 좀 보자. 왜냐하면 톨스토이의 명문,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이유로 불행하다는 게, 아주 가끔은 맞지 않을 수 있으니까.
 미셸.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14년 동안 회사 동료인 아름다운 야니크와 동거 중. 그동안 둘은 숱한 말다툼과 갈등을 거쳐 서로의 악습과 결점과 비루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해 이젠 진정한 서로의 빛 속에 자신들을 가둘 수 있는 지경에 와 있는 상태. 올림포스 산 위에 있는 아름다운 전당에서 넥타르를 마시고 사는 신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지극히 짧은 행복만 허여하는 것이 아주 오래된 전통이라, 야니크에게 회복할 수 없는 암종을 보내 이제 죽음의 침상에 오르도록 만들어버렸다. 고통과 질병의 가혹한 품 안에서 거의 완벽하게 망가진 야니크는 미셸과 합의 하에 스스로 죽음에 이르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미셸이 하루 혹은 이틀 정도, 자세한 건 나오지 않지만 야니크가 자신이 마련한 스스로의 방법에 의해 죽음에 이를 시간 동안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카라카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가 취소하고, 다시 부르고뉴로 돌아오는 길에 리디아를 만나, 그날로 8층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섹스를 하고, 하루를 더 지낸 다음날 리디아와 함께 야니크가 죽어있는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윽. 너무 많이 얘기했나?
 마흔 살의 리디아 토바르스키는 어느 재수 없는 날, 남편 알랭 토바르스키가 뒷자리에 딸을 태우고 드라이브 중에 큰 교통사고가 나서 딸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남편은 뇌에 충격을 받아 지금은 러시아 출신 백만장자 시어머니 올가 토바르스카야와 함께 살며 간호를 받고 있다. 물론 최고의 의료진이 끊임없이 최선의 치료를 하는 덕택에 실어증이 많이 호전되기는 했으나 고부갈등이 심한 리디아는 남편의 사고나 치료보다는 딸의 죽음에 남편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
 근데 두 사람의 경우, 먼저 미셸을 보면, 동거녀 야니크는 명쾌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의 죽음을 결정한 거고, 그 결과 스스로에게 가장 짧은 시간 동안만의 고통을 갖게 한다. 리디아는 딸의 죽음으로 일단 (무정하다고 비난해도 소용없다. 난 이렇게 얘기해야겠다.) 깔끔하게 끝난 슬픔이다. 진짜 비극은 말이지, 야니크-미셸 커플의 경우, 야니크가 죽음에도 이르지 못하고 그렇다고 살지도 못한 상태에서 끈질긴 삶의 본능으로 심각한 고통을 오래 오래 겪는 경우이고, 리디아의 경우도 굳이 말은 안 하겠지만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미셸과 리디아의 고통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래서 독후감의 첫머리에 주어진 삶을 사는 자체가 참 대단한 일이라고 밑밥을 깔아놓은 것. 내 말이 조금 과격했더라도 이런 의미에서 용서하시기 바람.
 여기에 늙은 개를 데리고 다니며 자기도 심근경색 기미가 있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동물조련공연가 세뇨르 갈바가 등장한다. 이이가 소설을 이끄는 중요한 스티어링steering 기능을 하는데, 이 사람에 대한 설명을 하면 말 그대로 책을 통째로 옮기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건 직접 읽어보시라는 뜻에서 생략한다.
 로맹 가리. 이이가 1980년에 파리에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걸로 봐서, 특히 말년에는 우울증이 심각했으리라. 이 책은 그가 죽기 3년 전에 쓴 소설. 소설은 병과, 예정된 죽음과, 어둠과, 아침에 우울하게 돋보이기 시작하는 여인의 주름살과, 8층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섹스와, 느닷없는 죽음까지 온갖 우울증 증세를 엿볼 수 있다. 책 한 권이 소금물에 담긴 배추처럼 우울증에 푹 절여 있는 느낌. 매우 세련되고 의미심장한 문장을, 자아를 의식할 무렵부터 사르트르, 카뮈, 랭보를 통해 프랑스 문학을 만난 김남주가 섬세하게 한국어 문장으로 돋보이게 바꿔 썼으나, 만의 하나, 당신 역시 우울증 증세가 있는 인류 가운데 한 명이라면, 권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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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
조르지 아마두 지음, 안정효 옮김 / 서커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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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의 깊은 가을. 나는 조르지 아마두가 쓴 소설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을 읽고 단박에 브라질이라는 나라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기로 결심함과 동시에 <도나 플로르....>를 (비록 걸작의 계관을 쓰지는 못하겠지만) 내 수준에 가장 근접한 나만의 명작으로 임명했으며, 만일 내 눈에 이 절묘한 재미를 제공한 작가의 다른 작품을 발견하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조건 없이 사서 읽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때 이미 아마두의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라는 소설책이 출판사 ‘서커스’를 통해 나왔던 것을 알았으나, 서커스라는 회사는 2007년 1월에 첫 작품을 내고, 2010년 4월에 마지막 작품을 찍었다, 쉬운 얘기로 망했다. 그래 잊고 있다가 몇 달 전에, 맞아, 아마두가 있었지, 라는 생각이 번쩍 떠올라 검색을 해봤고, 시중 헌책방에서 (불과) 몇 권의 책을 내놓고 있어서 날름, 집어 들어 감개무량하게 드디어 첫 장을 넘길 때의 기분이라니.
 시리아 이민의 아들임에도 아랍인, 또는 터키인이라 불린 ‘나시브 사아드’라는 이름의 독신남자. 이이는 소도시 ‘일레우스’에서 ‘베수비우스 바’을 운영하고 있는 키 크고 뚱뚱한 남자. 어느 화창한 봄날, 좋은 요리사이자 살림꾼이었던 늙은 필로메나가 이젠 아들하고 함께 살기 위해 아구아 프레타로 떠나겠나고 종종 얘기했지만, 이걸 늙은이의 푸념으로만 여겨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로 보따리를 싸 여덟 시 기차를 타기 위해 떠난다고 최종 통보를 하자마자 나시브는 놀라 자빠졌다. 그러나 필로메나가 진짜 떠남으로 해서 세상에서 가장 천진하고 아름답고, 몸 이곳저곳(어딘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음)에서 정향 향기가 나고, 계피 색의 피부를 갖고 있는 무구한 사랑의 여신이자 요리사이자 하녀인 가브리엘라와의 놀라운 사랑 이야기가 시작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같은 날 늙은 제수이노 멘돈사 대령은,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으나 정작 자신 혼자만 자기 이마빡에 뿔이 돋았는지 몰랐던 것을 드디어 알아채고는, 벌건 대낮에 열쇠로 조심스레 소리 나지 않게 자기 집 문을 열고 들어가 오직 두 다리에 검정 스타킹만 신고 있던 약간 퉁퉁한 아내 도나 시나지냐 궤데스 멘돈사와, 우아하고 아름답게 생겼지만 대령의 침상 위에서 대령이 할 일을 대신 해주고 있는 벌거벗은 의사 오스문도 피멘텔 앞에서, 처용가를 부르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는커녕,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을 꺼내 각자에게 각각 두 발씩의 총알을 박아버리고 만다. (솔직히 말하자면 총알이 검정 스타킹만 신고 나머지는 벌거벗은 여자와, 아무것도 입지 않고 그냥 벌거벗은 남자의 몸통에 박혀 있는 상태인지 관통해서 벽이나 침대를 때렸는지는 책에 안 나온다.)
 사통 중에 난데없이 날아든 총알을 받아 거의 동시에 두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일레우스 사람들은 항구 초입에서 모래톱에 좌초한 별로 크지도 않은 코스테이라 회사의 여객선과, 모래톱 자체를 없애버려 일레우스에서 유럽으로 직접 코코아를 수출하는 길을 뚫자고 주장하고 있는 젊은 총각, 리우 출신 거물 정치인 집안의 셋째 아들이자 백만장자인 문디뉴 팔상에 대하여, 그리고 이웃도시 이타부나 사이에 처음으로 개통한 버스 노선과 이 버스 회사의 공동 주인인 두 명의 러시아인이 내일 오후에 열기로 한 성대한 버스 노선 개통 축하식에 대해 침을 튀고 있다가, 네 발의 총성과 함께 모든 논의가 갑자기 뚝, 그쳐버린다. 그리고는 그들의 대화는 한 순간에 검정 스타킹만 신고 있는 약간 살찐 여인의 모습과, 자신들의 아내 또는 애인에게도 검정 스타킹만 입히면 어떤 광경이 연출될까, 혹시 그 소도구가 각자의 엑스터시를 더 향상시키는데 공헌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느라고 멈춰버렸고, 아내와 아내의 애인을 권총으로 간단히 쏴 죽여버린 대령의 명예스러운 행동이 당연하다고, 앞으로 재판을 받겠지만 배심원의 만장일치 결정으로 무죄선고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때는 1925년. 장소는 바다를 면한 브라질의 시골 소도시. 이십여 년 전만 하더라도 땅과 농장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힘깨나 쓰는 것들이 무리를 지어 서슴없이 총질을 해대 토지를 무단히 탈취해 지역의 토호가 되면서 스스로를 ‘대령大領colonel’이라 칭하던 농장주이자 실력자이자 깡패두목들이 통치하던 지역. 이제 늙은 부르주아 계급으로 그중에 왕초 격을 했던 이는 상원의원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스스로 생각하고, 비슷한 대령들 역시 그렇게 받들어 모시면서, 각자 대령의 자식들을 대처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 지역에서 의사, 변호사, 공증인 기타 등등 ‘박사’로 불리게 하고, 시장, 국회의원 등의 높은 자리를 꿰고 있는 상태. 여전히 포르투갈 혹은 스페인 이베리아 방식의 도덕률에 충실해, 남자는 얼마든지 바람을 피워도 여자가 딴 놈팡이를 봤다하면 부정한 쌍이 흘린 피를 통해 자신의 추락한 명예를 회복하는 지난 시절의 율법이 서슬 퍼런 곳.
 여기에 진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 등장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문디뉴 팔상. 이 젊은이가 촌 동네 일레우스에서 펼치는 새 세대로의 전환노력. 그건 앞 세대의 타파를 전제로 해야 하건만, 80대의 왕초 대령인 라미로 바스토스 상원의원을 꺾어야 가능한 것. 바스토스 대령에게는 일레우스 전 지역에 걸쳐 거의 모든 땅을 소유하고 있는 동료 대령들이 있으며, 20여 년 전 도덕률에 의하여 바스토스 대령의 뜻이 옳은지 아닌지 전혀 관계없이 의리 하나로 그를 굳게 지지하고 있고, 배신자에겐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탄이 기다리고 있는 땅이다.
 이곳에 머리도 못 감아 떡이 지고, 누더기가 찢어져 허벅지가 다 드러난 때(垢: 피부 위에 죽은 피부의 각질이 먼지를 비롯한 각종 오물과 함께 쌓여있는 상태) 투성이 촌년 하나가 내륙에서 도시를 향해 무조건 걸어온 몇 명의 인간들과 함께 예전 노예시장이 섰던 인력시장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것이다. 늙은 요리사 필로메나를 잃은 아랍인 하시드가 새 요리사를 구하기 위해 이곳에 도착해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을 고르려 했지만 먹고 살 것이 없는 깡촌에서 무작정 도시로 온 것들이 요리는 무슨 요리, 그냥 돌아서려 할 때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나지막한 한 마디. “정말 아름다운 남자야!”
 이 말에 귀가 솔깃한 하시드는 때가 덕지덕지하고 머리카락도 떡이 진 처녀를 고용하기로 결심해 데려오는데 아이고, 얼마나 쉰내가 나는지 목욕부터 시키고 외출해버린다. 밤이 깊어 귀가한 하시드. 입이 떡 벌어진다.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고, 보퉁이에 들고 온 누더기지만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가브리엘라. 그녀에겐 계피 색 나는 반짝이는 피부와 정향 향기가 은은한 몸을 가지고 있던 것이라. 이것만 해도 미혼남자 하시드는 넋이 나가는데, 아이고, 천부적인 감각으로, 무엇을 기가 막히게 하느냐면, 침대 위의 일도 그렇거니와 그것보다, 진짜 지역요리, 이 책에선 ‘바이야 요리’라고 하는 전통요리를 죽여주게 잘 하는 거디었던 거디었다.
 물론 지금 그냥 등장인물을 소개하기만 하고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 것인지는 전혀 귀띔도 하지 않았다. 정말 재미있는 책이라서 직접 읽어보시란 의미라는 건 다 아시리라 믿으면서.


 아쉽고 아쉽다. 우리나라에서 번역해 시중에 나온 조르지 아마두는 이제 다 읽었다는 것. <도나 플로라와 그녀의 두 남편>과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 위키피디아를 보니 스물여덟 작품이 있는데 말이다. 세계문학전집을 펴내는 출판사 가운데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번역해줄 착한 회사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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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be00 2019-06-1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태프님 리뷰읽고 위시리스트에 올려둔 책이 중고로 나와서 얼른 샀습니다. 기대되네요~

Falstaff 2019-06-13 13:28   좋아요 0 | URL
하하하.... 이거 은근히 걱정되는 걸요. 혹시 실망하실까봐요.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기대가 크면 언제나 거기에 미치지 못하더라고요. ^^

2022-08-26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6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8-26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봇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카렐 차페크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비딕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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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차페크의 <로봇>을 읽었다. 1921년 프라하에서 초연한 연극 <로봇>의 대본, 즉 희곡을 (1920년에)발표함으로서 세계 최초로 “로봇”이란 말이 등장하게 된다. 난 이 희곡을 읽기 바로 전까지도 로봇은 기계인간인줄 알았다. 우주소년 아톰이나 태권 V 같은. 근데 아니다. 굳이 비교를 한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황금박쥐 비슷하다. 나이 든 세대는 기억할 거다. 우렁찬 주제곡을. “빛나는 해~골에 빤쓰 하나 걸치고 무엇이 잘났다고 웃어대느냐!”
 로봇은 유기화학이 발전한 결과물이다. 차페크 본인의 <로봇>에 대한 기고문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중세의 화학생물학자가 꾼 꿈이 호문쿨루스homunculus를 만들어내는 것이었고, 그것이 현대에 이르러, 한 천재적인 화학생물학자 로숨Rossum씨(Mr. Intellect 또는 Mr. Brain이란 뜻)가 나타나 “생명”은 있으나 영혼이 없는 일하는 생명체를 발명했으니 그게 바로 로봇이다. 로봇은 심장이 있어 피도 흐르고, 허파로 숨도 쉰다. 수명은 20년 가까이 되며,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명령대로 일만 한다. 인간의 유토피아를 위해 만들어진 로봇. 인간은 그리하여 모든 노동에서 벗어나 태초의 에덴과 비슷한 별유천지비인간의 지경에 이르는 것이 목적이다. 이 로봇을 만드는 회사가 R.U.R(Rossum's Universal Robots). 회사가 독점적으로 로봇을 생산하면서 주가는 당연히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예금을 별도로 하고 회사의 금고 속에 현금만으로 무려 (1920년 화폐가치로) 5억2천만 달러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 이 놀라운 제작품을 만드는 광경을 구경하기 위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세계적 유명인사들이 공장이 있는 섬에 방문을 하는데, 하루는 유명회사 글로리 사장의 딸 헬레나 글로리오바가 R.U.R의 대표이사 도민 씨를 방문하면서 극이 시작된다.
 아쉽게도 책을 읽어가면서 점점 재미의 효용이 떨어졌다. 차페크가 1936년에 발표한 소설 <도롱뇽과의 전쟁>을 읽어봤기 때문이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살며, 섬 주위를 배회하는 천적 상어 때문에 일정한 개체수를 유지하던 사람 2/3 크기의 대형 도롱뇽 무리에게, 천연진주 채집을 위해 철제 칼을 줘 진주를 무한정 얻다가, 나중에 정신차려보니 도롱뇽들이 강철로 만든 칼을 사용해 섬 주변의 상어들을 싸그리 몰살시키고, 점점 개체수도 불리고, 현대식 무기도 구입해, 도롱뇽이 살 수 있는 건 습지뿐이라서 인간에게 구입한 무리로 인간과 전쟁을 벌이고, 동시에 거대 폭탄을 사용해 대륙을 이리저리 관통하는 운하를 만드는 이야기. 여기서 중요한 모멘트는 사람이 도롱뇽에게 무기를 공급해 자기들 대신 전쟁에 투입함으로서 (동물적인 감각을 가진!) 용맹한 군대를 만들었다는 것. 즉, 인간의 부를 위한 노동에서 전투요원으로 탈바꿈. 개체수의 증가와 서식지 확보를 위한 대륙 횡단 운하 건설, 인간의 피폐화, 라는 구도가 <로봇>에서도 비슷하게 전개된다.
 사람 대신 노동만을 위해 개발한 로봇. 트로이를 작살낸 전환점을 마련한 헬레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 헬레나 글로리오바가 과학자 한 명을 꼬드겨 생각할 수 있는 로봇을 몇 개체 만들었다. 이미 로봇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는 노동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인간은 비교할 수도 없이 용감한 병기로도 사용하고 있던 터. 세상의 모든 로봇은 영혼을 가진 몇 개체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 인간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로봇이 인간이 되려면? 책에 나와 있다.
 “너희가 사람처럼 되고 싶다면, 너희는 죽이고 정복해야만 한다. 역사를 읽어보라! 인간들의 책을 읽어보라! 너희가 사람이 되고 싶다면 너희는 정복하고 살육해야만 한다.”
 대장 로봇의 지시로 애초부터 진짜 사람보다 더 강하고, 영리하며, 인간보다 더 잔인하게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로봇들은 인간 말살 작업을 시작한다. 총으로 쏘고, 칼로 찌르고, 베고, 절단한다.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어린이도, 아기들도, 태아도.
 그러나 수명이 20년에 불과한 로봇. 로봇 공장에 무리지어 쳐들어가 살아 있는 인간을 몽땅 죽였을 즈음해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들이 다른 로봇을 만들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는 거다. 레시피가 적혀있는 낡은 리포트는 이미 불탄 재로 사라졌고. 딱 한 명의 인간을 살려주었는데 로봇들은 이 늙은 건축가에게 로봇을 만드는 유기체 제조 레시피를 요구하고 심지어 살아 있는 로봇을 생체실험에 쓰라고 강요까지 하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나는 언제나처럼,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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