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번역성서 RCH72E-1C - 대(大) 단본 무색인 - 보급판, 가톨릭용
대한성서공회 편집부 엮음 / 대한성서공회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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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에 최초로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한 것은, “20세기 후반기에 있어서 기독교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깊은 의미를 가진 큰 일”이었다고 이 책의 머리말에 쓰여 있다. 그 전에는 구교용 성서와 신교용 성서가 있었다는 뜻일 터이다. 그래 같은 하느님을 모시면서 다른 성서를 써온 것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공동으로 번역하기로 했는데, 책표지 아래쪽에 보면 괄호 열고 ‘가톨릭 용’ 괄호 닫고, 이리 표기가 되어있다. 그러니까 1977년에 어찌됐든 공동으로 번역을 했지만 신교 쪽에서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들만의 ‘성경’을 따로 사용하는 바람에 ‘공동번역 성서’는 가톨릭용으로만 쓰인다는 의미, 라고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한테 들었다. 나는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에게 소주 한 잔을 따라주며, 1977년에 신구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한 일은 너희들, 신구교를 막론하고 기독을 믿는 너희한테는 모르지만 ‘너희들을 제외한 인류 전체’에겐 전혀 깊은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고 발언하는 것으로 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공동번역 성서> 가운데 애초부터 신약에는 흥미가 있지 못해 구약만 읽기로, 읽기는 읽는데 단 한 글자로 빼놓지 않고 모두 읽기로 작정을 하고 이제 막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모두 읽기를 마친 지금, 과연 성서를 읽고 나서도 독후감을 쓰는 게 옳은지 걱정부터 앞선다. 원래 <공동번역 성서>의 구약을 읽을 자리(순서)에 갑자기 다른 책을 끼워 읽고 독후감을 썼다가 야훼의 불칼을 맞은 바 있어, 다른 책도 아니고 ‘구약성서’의 독후감을 쓰기가 오금이 다 저리다. 책 자체가 진리인 성서/성경을 읽었으면 그냥 진리를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감히 ‘읽은 느낌’이 이러니저러니 나댄다고, 전 세계는 그만두고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신도들한테, 예수가 세리들에게, 야훼가 애굽인들에게 했듯, 귀싸대기 한 대씩만 맞는다고 쳐도, 최하가 중상일 테니.
 그러나 이교도도 아니고 무신론이자 유물론자인 내 입장에서는, 애초부터 <성서>를 ‘그냥 책’으로 인식을 하고 읽었으니 가톨릭 환자 증세가 농후한 술친구처럼 <성서>의 내용이 어찌됐든 그냥 쓰여 있는 대로 알아서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분명 느낌이 있었으며, 그걸 속으로만 가지고 있는 대신 글로 써두어, 나중에 내가 <성서>의 구약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었구나, 알 수 있게, 이를 기념한다는데 누가 까탈을 잡으랴. 또 까탈이 잡혀 내 독후감을 읽은 기독교도들이나 다른 종교인한테 한 번 더 불칼, 이번엔 조금 더 해서 불창, 불총, 불대포를 받더라도 이를 어이하랴. 할 수 없는 일이지. 내가 쓴 독후감이 어찌 됐든 내가 책임진다. 어째 좀 비장하지? 독후감의 대상이 되는 책도 그렇고, 야훼의 불칼 맛이 어떤지 몇 주 전에 경험을 해 조금은 알 듯해서 더욱 그러는 듯. 어쩌랴, 책을 읽으면 독후감을 쓰고 싶고, 썼으면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을. 이런 짓하다 가끔 얻어터지기도 하고, 욕도 먹고, 말로는 안 해도 실망스러워 하기도 하고. 그게 인생이지.
 <구약성서>를 읽어보기로 결심을 한 건, 어느 책에서든가 기억나지는 않지만(솔직히 이거 아니면 저건데, 섣불리 하나 찍었다가 아니면 창피하잖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가 구약의 시편이라는 거. 그래 여주인공이 늘 시편을 읽는 장면이 인상 깊어서였다. 그거 말고도 숱하게 창작의 재료가 되어왔던 창세기와 출애굽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판관 삼손의 머리카락, 솔로몬의 지혜, 홀로페르네스의 대가리를 잘라온 유디트, 흔히 ‘느브갓네살’ 또는 ‘나부코’로 알려진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한 바빌론 유수, 기타 등등. 또 있다. 황석영이 썼다고 했다가 나중에 양아치 출신(진짜 양아치 출신이다) 제13대 국회의원 이철용이 쓴 소설로 밝혀진 <어둠의 자식들>에서 ‘범털’이 아니라 ‘개털’로 감옥에 간 이동철이 구약성서를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하면, 바로 “이스라엘 삼국지.” 다분히 이스라엘 민족, 즉 유대인의 역사서라고 생각해서 읽기 시작했다가, 죽는 줄 알았다. 물론 재미있는 부분도 많았지만, 아이고 머리야, 한 얘기 또 하고, 그 얘기 한 번 더 하고, 한 번 더 한 얘기 또 하고, 그리하여 n번쯤 반복하는 데야 어떻게 견딜 방법이 없더라. 시편도 진심으로 기독교를 믿는 신자/신도들이면 감동 감화 가득해서 마음을 울리며 읽겠지만 애초부터 유물론적 사고방식이 꽉 들어찬 불쌍한 인간은 도대체 이걸 감사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집단에 경의를 표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름다워? 그건 선생님들이나 그런 거고.
 시편에 이어지는 잠언도 뭐 별로. 가까운 사이에선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솔직한 말을 해줘야 한다는데, 아이고 랍비님, 경험상 말씀드리는 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되는 사람한테 일수록 솔직한 말 해주면 ‘가까운 사이’가 결딴나더라. 이건 그냥 예를 하나 든 바이며, 구약성서니까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교가 막 생기기 시작할 당시에 기록한 율법과 바른 행동양식, 미풍양속, 기타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 되살려 너도 나도, 젊거나 늙었거나, 여자들은 빼고 남자들만, 새삼스레 할례를 받을 수도 없는 거고 말씀이지. 적어도 구약에 의하면 할례를 받지 않으면 사형이다. 지금이야 가정의학과, 비뇨기과, 심지어 피부과에서도 할례를 해주지만 당시 기준으로 보면 예언자 또는 선견자들 또는 레위의 후손들만 할례를 베풀 수 있었는데 도대체 유대인들은 귀두포피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그까짓 껍데기에 목을 맬까? 궁금하시지? 글쎄 기독교도도 아니며 모든 종교에 관심도 없는 인간이 처음 구약을 읽으며 든 생각인데, 할례는 단순히 위생적 측면에서 귀두포피를 잘라내는 의료행위라기 보다 야훼를 믿는 집단의 정화의식이라고 봐야할 거 같다. 중간 너머 읽어 가다보면, 가슴에 또는 머리에 할례를 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봐 그렇다는 말이다. 많이 아시는 기독교인 계시면 무슨 엉뚱한 이야기를 하느냐 지탄하실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생각대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다. 당신이 기독교도/기독교인이라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고, 만일 기독교는 믿지 않지만 나처럼 ‘살면서 한 번 읽어봐야 할 책’ 정도로 가톨릭 용 <성서>나 개신교용 <성경>을 꼽는 분이 있다면, 강력하게 권하니, 재고해보시라. 무엇보다 과하게 장황하다. 1,474 페이지. 한 페이지에 양면 분할 인쇄. 그래서 읽어야 할 면은 1,474 x 2 = 2,548 면이다. ‘습자지’라고 하면 젊은 분들은 무슨 야한 얘기가 나올 거라 기대할 수 있겠으나 습자지는 1970년대 붓글씨 쓰던 얇은 종이를 칭하는 것으로, 습자지만큼 얇은 종이로 1,474 페이지, 737 장을 넘기는데,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그냥 그 자리를 읽고 있는 듯한 지루함은 진짜 읽어봐야 안다. 위에서 얘기한 양아치 출신 지체장애인 13대 국회의원 이철용이 쓴 작품의 주인공 이동철(작가 자신은 나중에 자신이 정말로 목사가 되지만)은, 성경을 감방 안에서 한 장씩 찢어 몰래 담배를 말아 피우는 목적으로 애용하기도 한다. 이젠 담배 피우는 인종은 야만인으로 대접받는 냉혹한 현실에서 비 기독교인에게 성서의 용도는 점차 좁아지기만 할 뿐이다. 성서에서 모든 역사적 사건은 야훼의 관점으로 극단적인 왜곡을 당하고 있으며, 그게 한 사건 당 수십 차례 되풀이 되며 믿음 없는 독자를 콱 질리게 만든다. 기독교도들은 시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귀라고 했으나, 나는 읽으면서 정말로, 시각에서 비롯하는 육체적 멀미를 느껴야 했다. 비기독교도로 나처럼 <성서>를 교양의 대상으로 섣불리 겪으려는 분들, 다시 말씀드리오니, 신중하게 재고해보시라.
 독후감 다 썼다. 돌 던지실 분은 지금부터 던지시면 된다. 단, 나는 야훼의 돌보심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인종임을 감안해주시면서 팔매질을 하시기 바랄 뿐이다.

 

 

 한 마디 더. 쾰른 대성당, 파리 노트르담 성당, 로마 대서당,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이런 건축물을 (비행기 타고 가서 직접 본 게 아니라 TV를 통해)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미의 태중에 있을 때 낙태 당하지 못한 것을 한탄할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불행한 운명을 견디는 동안에 분명히 하느님은 자신을 위한 이런 웅대하고, 거창하고, 화려하고, 눈부신 전당을 짓는 걸 바라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왔다. 난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출애굽기에서부터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자신의 성막聖幕과 제사장을 위해 에봇이란 초호화판 의상을 입히는 등, 당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장치와 의상을 요구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지은 최초의 성전 역시 당시 기술로 최고로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요란난만하게 지었으며, 성전 준공식에는 황소 이만 이천 마리, 양 십이만 마리를 도살해 불에 태웠다. 이른바 번제.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는 소와 양이 타면서 하늘로 치솟던 초미세먼지를 흠향하고 있었던 거다. 수소 22,000 마리라고 하니까 실감이 안 나시지? 이게 돈 가치의 하락 때문이다. 수소 마리당 꼬리 빼고 코끝부터 엉덩이뼈까지 길이가 2미터라고 가정하면 이 수소들을 한 줄로 늘어세우면 얼마나 되는 줄 아시나? 44,000미터. 44킬로미터. 화곡동에서 천호동 가는 거리다. 양 십이만 마리. 한 마리에 1미터로 계산하면 120킬로미터. 검색해보시라. 한 줄로 세우면 서울 시청에서 원주시청까지 가고도 십 킬로미터 더 간다. 이거 말고도 각종 번제와 십분의 일 세금 등등은, 그만 하자.
 성전의 화려함은 또 말도 못해서, 거의 대부분이 금과 은으로 도금되었다고 하는데, 전기도금 장치가 없던 시절이라 금과 은을 얇게 펴 바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 상상도 못하게 많은 진짜 금과 은을 성전 짓는데 소비해야 했다. 그러니 내가 틀렸다. 쾰른, 노트르담, 로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은 종교권력을 형성했던 인간들이 자신들의 허영과 권위와 집권욕과 과시욕, 그리고 종교라는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건축물이 아니라, 야훼 스스로가 말했듯 질투의 하느님, 복수의 하느님이 다른 신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뻑적지근하게 자신이 얼마나 숭앙받고 있는지 과시하고자 하는 천부의 랜드 마크였다.
 기독교 신자/신도께선 용서하시라. 위의 모든 것은, 한 불쌍한 유물론자가 감히 구약을 읽고 헛소리 한 것에 불과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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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 시티 민음사 모던 클래식 17
레나 안데르손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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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 시티. 표지에서 보듯 오리들이 사는 도시다. 굳이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을 거론하자면 도널드 D. 그냥 쉽게 연상되듯 도널드 덕. 스웨덴 사람이 쓴 풍자적 우화소설. ‘덕 시티’는 미국을 모델로 한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고, 실제 역자 해설에서도 “그로테스크한 미국을 상징한다.”고 콕 집어서 이야기했다. 도널드에게 (패스트푸드를 하도 많이 먹어 뚱뚱한)조카가 세 명 있는데, 날씬한 청년들이 다 전쟁터에가 몰살을 당하니까 일찌감치 지원했음에도 부적격자로 입대하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던 조카 셋이 전부 세상의 어느 곳에 있는 사막에서 전쟁을 치루고 있다. <덕 시티>가 2006년 작품이며, 스웨덴은 애초에 이 전쟁과 상관이 없으니 당연히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이야기하는 것이겠다.
 방금 다 읽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 21세기 들어 스칸디나비아 출신 작가들이 (이탈리아 작가들과 더불어) 한국 문학계에 블루칩으로 떠오르기 시작해, 조금, 아니, 많이 관심을 갖고 읽기 시작했다. 독후감의 처음부터 솔직하게 얘기하긴 조금 그렇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작품을 설계하는 단계에서 작가가 왜 사막에서의 전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스토리 중간 중간에 참전한 조카들 이야기를 삽입하고, 마지막에 세 조카 가운데 한 명이 생존해 돌아오는 것으로 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처음부터 에이햅, 아 참, ‘에이햅’이라니까 나중에야 눈치 챌 수 있었잖은가, 흔히 쓰듯이 ‘에이해브’라고 해야 <모비딕>의 광기어린 포경선 선장을 떠올릴 텐데, 하여간 에이햅 군대에 의하여, 뉴욕에서 벌였던 원조 ‘범죄와의 전쟁’ 비슷한 ‘흰 향유고래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권력자들, 작전과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패스트푸드를 열라 만들어 파는 회사 JvA 사장이자 ‘덕 시티’ 대통령의 친구, 흰 고래들, 흰 고래는 아니지만 그들의 인권을 위해 함께 투쟁하는 인간들만 작품의 대상으로 했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싶었으나, 글 읽고 이리 생각하는 것이 독자의 권리이듯이, 하고 싶은 얘기 쓰는 건 작가의 권리이니, 뭐 그러거나 말거나. 여기서 흰 고래라는 게 뭐냐 하면, 초고도비만자들. 그들이 공통적으로 몸에 달고 다니는 지방 덩어리를 일컫는다.
 국민들이 점점 고도비만의 지경으로 처하는 걸 보다 못한 대통령이 하루는 에이햅 작전을 벌여 뚱보(흰 고래)들을 대상으로 지방 퇴치 작전을 벌이는 이야기. 날이 갈수록 비만을 악덕시하는 바람에 덕 시티에선 체지방률이 높은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비인간 비슷하게 취급을 받기 시작하고, 시간이 좀 더 지나가니까 정상인들도 체지방률 0(zero)를 위해 단식과 과격한 운동으로 죽어 자빠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다분히 문명 비판적이고, 현대 육체에 대한 미학을 비꼬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솔직히, 별로 재미가 없다는 거. 지금은 품절. 민음사 모던클래식 시리즈에 좋은 작품이 많아 기대하고 골랐다가 김이 좀 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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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투스의 승부수 -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3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3
막스 갈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예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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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네로 황제 말기 시절부터 티투스의 죽음까지를 그리고 있다.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1부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에서 기록자로 나온 가이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의 후손인 세레누스가 화자話者 ‘나’로 등장하는 건 2부 <네로의 비밀>과 같다. <네로의 비밀>에서 보면 아그리피나가 네로를 낳을 때 옆에서 시립해 있어, 대가리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네로를 제일 처음으로 본 신하로 등장한다. 3부 <티투스의 승부수>에선 티투스가 죽고 벌써 2년이 흘러 이제 자신도 죽음의 신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쓰기 시작한 <내 삶의 연대기>가 거의 끝난 시점에서 시작하고 있다. 그러니 화자 세레누스를 대강 기원 10년 경에 출생했다면, 이이가 거친 황제만 (위키피아를 참고로 해서) 읊어 봐도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이렇게 총 11명의 황제 시대를 걸쳐 살았다.
 막스 갈로의 기준으로 보면 로마 최초의 황제 그룹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에선 유일하게 현명한 황제가 초대 아우구스투스였을 것이고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책에서는 클라우디우스가 참 어진 황제로 나오는데 갈로는 어질기는 하지만 형편없는 황제라고 슬쩍 넘어가고 만다) 네로 이후 혼돈기와 베스파시아누스 황조에선 역시 유일하게 티투스만 좋은 황제였다. 네로를 다룬 2부에서 네로는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로 질탕하고, 폭력적이고, 우스꽝스럽고, 잔인하고, 변태적인 인물로 일관하다 중도에 뚝 끊어버린다. 려, 뭐 이딴 게 있나 싶을 정도의 중동무이. 그러다 3부 <티투스의 승부수>에서 네로는 친위대의 배신으로 주위의 아첨꾼들이 모두 떠나자 유모의 도움을 받아 자살을 하는 것으로 너무 간단하게 취급해 읽기가 허탈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후에 로마 역사는 사실 정신없이 팽팽 돌아가게 되는데, 실제로, 이후 황제를 해먹는 갈바는 7개월, 네로의 아내 포퐈이아의 전남편 오토는 3개월, 게르마니아 지역 사령관이었던 비텔리우스는 8개월 동안 황위에 올랐을 뿐, 이후 베스파시아누스 일가가 세 번에 걸쳐 황제를 할 때까지 너무 속도를 내서 휙휙 지나가, 사실 중요한 사건은 없고 그냥 힘 센 놈이 덜 센 놈 잡아 죽이는 쌍권총시대였을 뿐이기는 하지만, 달리는 말 잔등 위에서 먼 산 바라보는 느낌을 숨길 수 없다.
 어쨌든, 화자 세레누스로 말할 거 같으면, 네로 시절을 다룬 2부에서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의 밥이 됐던 기독교인들의 영향을 받아, 유대교가 아닌 기독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바, 이번 3부에선 티투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에 황자의 자격으로 떠난 예루살렘 원정이 주요 장면인 관계로, 한없이 벌어지는 살육과 고문 등을 보며 자연스레 부활과 기독교를 믿게 되는, 가능하기는 하지만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벌어진다. 암만해도 네로 이후의 황제들을 보는 작가 갈로의 시각은 기독교를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겠다 싶기도 하다. 친 기독이면 우리 편, 반 기독이면 너네 편, 이런 식.
 다수의 유대교와 극소수의 기독교인들이 똘똘 뭉쳐 대 로마 항쟁에 나선 갈릴리와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 그러나 당시 로마는 세상의 어떤 민족과 싸워도 쉽게 이길 수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상태. 이스라엘과 갈릴리의 아그리파 왕과 여동생 베레니케 여왕, 이집트 군단을 지휘하는 유대인 출신 로마 시민인 티베리우스 알렉산드로스 같은 이들은 역불급이니 유대민족의 군사력이 로마를 능가할 때까지는 좀 굴욕스럽지만 생명을 이어가면서 인구를 늘리는 것이 상책이라 주장하는 반면(출애굽기 때부터 유구한 전통이다), 젊은 투사들의 집단인 ‘열심당’과 ‘단검자객단’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은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유대인이 로마인들의 지배하에 있다는 걸 참지 못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는데, 어떤 것이 옳은 건지, 화자 세레누스는 헷갈린다.
 책은 그리하여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 연합군과 유대인들의 전투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어린애 팔 비틀기 정도의 무력이 충돌하니 당연히 로마가 이기겠지만, 과거 유대인의 깡다구 역시 만만하지 않다. 근데, 잘 나가다가, 1인칭 시점을 사용하는 책에선 화자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제일 중요한 법이라서, 점점 그리스도라는 신을 믿는 집단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독자는 환장하겠더라. 전쟁에서 당하는 피지배민족 유대인의 참화를 너무 강조하는 것. 비단 티투스의 정벌뿐이랴. 세상에 정당한 전쟁이 언제 한 번이라도 있었더냐. 이래서 2/3쯤 지나면 김이 팍 새버리고 만다. 내 조부께서 이런 경우에 말씀하셨지. 스팀 아웃?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시리즈가 모두 다섯 권으로 이어졌는데, 세 권을 읽었고, 네 번째가 로마 오현제五賢帝 가운데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관해서다. 5현제가 언제 적 이야기냐 하면, 티투스가 즉위 2년 만에 숟가락 놓고(동생에 의한 독살설도 있단다) 친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를 먹었다가, 이왕 황위에 올랐으니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겠다는 일념 하에 온갖 난장판을 다 저지른 결과, 암살을 당하신 다음에 추대된 이가 네르바 황제. 이이가 초대 5현제다. 이후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이때부터 호칭이 복잡해지는데)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 다섯 명을 일컫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드님이 누군가 하면,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아주 얍삽하게 생기고 누이를 사랑하며, 감히 러셀 클로한테 맞짱 뜨자고 하던 (물론 영화에서만 그랬다) 바로 그 콤모도스 되겠다. 왜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쓴 <명상록>은 나도 읽어봤을 정도로 아직도 명작으로 치지만(근데 읽어보면 정말 재미없다), 책 소개를 보면, 이 황제님이 기독교를 탄압했다는 거 때문에 막스 갈로 선생의 미움을 좀 받는 거 같아서다. 물론 읽어봐야 알겠지만 이런 정도의 정보만 보고도 책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5현제 시절이야말로 아직 기독교가 세상에 퍼지기 전에 일부 혼돈스럽고, 일부 야만적이지만, (서쪽에서만)거의 자연적인 상태의 인류였던 시절이라, 앞으로 이천 년을 지배하게 될 이데올로기를 굳이 벌써부터 가까이 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싶어서.
 에이, 됐다. 로마 인물소설 시리즈는 여기서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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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밝혀졌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엮음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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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서 2차 세계대전 중의 드레스덴 폭격과 뉴욕 세계무역센터빌딩 폭파 사건에 연루된 가족의 비극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고래 싸움에 날벼락을 맞은 보통의 인간 모습을 잘 그린 바 있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 그의 데뷔작이 이번에 읽은 <모든 것이 밝혀졌다>이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국경을 흐르던 브로드 강변의 슈테틀(2차 대전 이전까지 중부, 동부 유럽에 산재해 있던 유대인들의 작은 마을을 칭함) 트라킴브로드에서 있었던 학살을 찾아가는 여정. 단 두 명의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을 할아버지로 둔 미국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 이 이름을 단 등장인물의 직업이 소설가이라,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상당히 아리송하지만, 독자들이여 기억하시라, 이 작품은 소설이란 사실을. 더구나 작가 자신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떠리. 우리는 그냥 읽기만 하면 된다.
 이야기는 모차르트가 죽은 해인 1791년까지 올라간다. 그해 3월 트라킴 B가 전속력으로 몰던 이중굴대 마차가 브로드 강에 처박히는 일이 벌어졌고, 이때 W 쌍둥이가 강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잔해들을 목격했는데 품목은 다음과 같았다. 뱀처럼 꾸불꾸불 엉킨 흰색 끈, 쫙 뻗은 손가락이 붙은 구겨진 벨벳 장갑 한 짝, 실이 거의 감기지 않은 실패들, 구지레한 코안경, 나무딸기와 보이젠베리, 배설물, 주름 장식, 산산조각 난 분무기 파편, 피처럼 붉은 잉크로 결의 ‘난 할 거다…, 하고 말 거다….’를 적은 필적 등등. 쌍둥이 한나와 차나가 물에 떠오른 잔해들을 밀어내며 마차에 가까이 다가가니, 불명예스러운 대금업자 늙은 양켈 D가 쌍둥이의 시야를 막아선다. 순식간에 슈테틀에서 사람들이 모여 아수라장이 됐는데, 쌍둥이 중 눈썰미가 좋은 어린 한나가 유대인 아버지가 기도할 때 입는 숄의 깃 아래로 거품이 이는 강물을 가리킨다.
 “끄나풀과 깃털들 속에, 양초와 푹 젖은 성냥, 참새우 떼, 저당물, 해파리처럼 하늘거리는 비단 장식술에 둘러싸여서, 아직 점액질에 덮여 있어 번들거리는, 자두 속살 같은 분홍색의 여자 아기가 거기에 있었다.”
 마차와 함께 브로드 강에 빠져죽은 여인이 죽어가면서 물속에서 낳은 아기. 랍비는 이 아이를 불명예스러운 대금업자 양켈이 키우도록 의탁하고 강 이름을 따서 ‘브로드’라고 호적에 올린다. 이 브로드란 여자 아이가 열세 살이 된 1804년. 매년 그랬듯이 당시 사고를 기념하던 것이 축제로 승화되어 축제의 꽃인 인어로 분장해 거리행진을 마친 브로드가, 집에 돌아오던 길에 겁탈을 당하고, 몸을 씻기 위해 옷을 모두 벗은 상태에서 자기보다 네 배나 더 나이가 들은 의붓아버지 양켈이 하필이면 그날 갑자기 죽었음을 확인한 순간, 창밖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눈이 있었으니, 앞으로 그녀의 남편이 될 콜키인. 브로드와 콜키인. 이들이 작중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7대 조부모가 된다.
 콜키인은 사랑하는 브로디와 결혼생활을 위해 남성의 의무인 돈을 벌려고 조금 위험한 직업인 물방앗간에 취직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원반형 톱이 회전하다가 핀이 부러지면서 튕겨나가는 일이 발생하고, 철근으로 만든 지지대에 튕겨 콜키인의 머리통에 세로로 박혀버린다. 기적 같은 생존. 양쪽 뇌 사이에 정확하게 박힌 톱날을 제거하면 과다출혈로 그 자리에서 죽는다는 의사들의 견해. 그냥 해골에 톱날이 박힌 대로 둔라면 비록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살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게 뇌의 화학작용에 부작용을 일으켜 이를 계기로 콜키인의 행동에 문제가 생긴다. 어여쁜 아내 브로디를 학대하기 시작하는 것. 이미 아들 둘을 둔 이들은 이 와중에도 셋째 아들을 하나 더 만들고 결국 콜키인은 숟가락 놓고 만다. 예술품 제작과 감상과 감식안엔 세계적으로 안목이 있는 유대인들, 콜키인의 사체에 청동을 입혀 동상 비슷하게 세우고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 하면, 머리에 박힌 원반형 톱을 이용해, 해시계로 쓰는 것과 동시에 소원을 비는 토템으로도 만들어버린다. 동상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나.
 150년을 별 탈 없이 살던 브로디, 콜키인의 후손들. 그러다 1941년을 맞이한다.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점령해버리는 해. 나치에 의하여 인종청소라는 명분으로 유대인을 학살했던 시기. 이미 그 전에도 우크라이나에선 유대인들을 학살한 적이 있고, 이후에도 유대인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관습이 있어, 처음에는 나치에 귀순하자는 유대인도 있었으나, 슈테틀에 들어선 나치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유대인을 골라 회당 안에 몰아넣고 불을 싸질러 화형에 처하는 일. 회당 앞에 모든 유대인들을 집합시키고 아무에게나 먼저 걸리는 사람한테 묻는다. “누가 유대인인가. 한 명만 지명하라.” 그의 앞에 불려나온 아내 입 속에 쑤셔 박힌 총구. “말하지 않으면 쏘겠다.” 슈테틀에 단 두 명만 살아남는데 한 명이 조너선의 할아버지이고, 다른 한 명은?
 1997년. 미국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바랜 사진 한 장을 들고 우크라이나를 방문한다. 사진엔 자신의 할아버지가 서 있고, 옆에는 할아버지의 목숨을 구할 수 있게 숨겨준 고마운 은인 오거스틴. 비록 젊고 건강한 여인이지만 지금은 틀림없이 형편없이 늙었을 테고 아니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포어는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이 아닌 척하면서 아직도 살고 있는 유대인 가족 가운데 할아버지와 손자에게 이젠 이미 지도에서 사라진 트라킴브로드를 찾아 나선다. 할아버지는 알렉산드르, 손자도 알렉산드르. 그래 손자는 애칭인 사샤로 부른다. 알렉산드르 할아버지는 여태 자신의 고향이 바닷가 도시 오데사라고 주장했지만, 오거스틴인줄 알고 찾아낸 다 쓰러져가는 집에 사는 할머니와의 대화 도중에, 할아버지의 고향이 오데사가 아니라 콜키임이 밝혀진다. 콜키 역시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피할 수 없었던 곳. 할아버지도 극적인 생존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리하여 조너선이나 사샤나, 유대인의 불행했던 과거사 안에 자기도 포함될 수밖에 없는데…….
 재미있다. 곳곳에 젊은 미국인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미국식 유머가 깔려있기도 하고, 각 인물 간에 얽히고설킨 드라마의 칡뿌리. 작품은 미국인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자신의 우크라이나 방문을 소재로 쓰는 소설을 사샤에게 먼저 보내고, 사샤 역시 오거스틴 탐색작전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며 사실에 입각한 내용을 조너선에게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나 더는 사샤가 조너선에게 보내는 편지. 다시 한 번 보자. 조너선이 쓰는 건, 공감할 수 있는 허구로의 소설. 사샤의 글은 조너선이 우크라이나에서 겪은 일을 사실에 입각해 영어로 쓴 것. 그래서 사샤의 글 속에선 매우 어색한 단어가 출몰하고 표현도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또 사샤가 조너선에게 쓴 편지는 자연스레 사실과 허구의 간극이 불행한 과거를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뒷부분에 가면) 보여준다. 아주 재미있는 구성.
 엇! 근데 이제 보니 품절이다. 왜 그랬을까. 민음사가 예전 같으면 이런 책 품절되면 조금 있다가 “민음사 모던 클래식” 시리즈로 다시 찍고는 했건만, 이제 눈치를 보니 모던 클래식 시리즈는 잘 팔리는 가즈오 이시구로 말고 다른 책은 3년이 넘도록 한 권도 내지 않아 과연 절판을 시키고 말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전적으로 그 사람들 마음대로이긴 하다.
 참고로 한 마디만 더 하면,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여기다 하나도 써놓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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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명작 희곡선집 - 연인희곡총서 5
김성희 지음 / 연극과인간 / 2000년 9월
평점 :
품절


 

 

 

 본인 스스로 극작가이며 한양여대 문학창작과 교수로 재임 중인 김성희가 직접 고른 열 편의 한국 현대 희곡. 한국극예술학회가 엮은 두 권의 희곡집은 191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의 작품을 선정했고, 이 책은 1974년부터 1994년까지의 작품에서 골랐다. 이제 시대는 1972년 10월 유신을 시작으로 1987년 6.29 선언까지 본격적인 한국적 민주주의이자 한국적 파시즘의 시대가 펼쳐지고 이후 자동차, 철강, 화학, 건설, 조선 등의 중공업, 반도체의 발전에 힘입어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세계통화기금의 지원을 받기 전,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급속한 민주화, 세계화가 이루어져 각 계층의 목소리가 광장에 쏟아진 백화제방의 시대까지의 희곡들 가운데 제목대로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을 수록했다. 말 그대로 격랑의 시기였다. 한국전쟁이 숱한 사람들의 피를 뿌린 거대지진이었다면, 74년부터 94년까지는 독재와 민주투쟁, 급속한 경제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뿌리내렸던 천민자본주의의 시대였다.
 1970년의 전태일 분신사건으로 지식인들이 벼락같이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각성을 겪어 노동 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연합하기 시작했으며, 유신시대의 종말 이후 광주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 탄생한다. 정의사회구현사제단과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역시 본격적으로 탄압을 받기 시작한다. 엄혹한 파시즘 정권 아래에서 극작가들 역시 도전적으로, 마치 1920~30년대 카프 문학과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정권과 부르주아에 의하여 핍박받는 국민들의 삶을 직접, 간접적으로 표현했으며, 파시즘 정권은 공연 불가 판정과 작가 일신상의 불이익으로 이에 대응했다.
 이 책에서도 첫 작품, 윤대성의 <출세기>는 사북 탄광에서 일어난 매몰사고와 갱내에서 16일을 버텨 당시 세계기록을 세운 김창호를 내세워 비정한 자본주의와 황색 저널리즘에 대해 일침을 가했는데, 이는 1967년 충남 청양의 한 탄광에서 매몰 후 16일 만에 구조된 양창선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몇 년이 지나고 아이러니컬하게 박정희 암살 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 초기시절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무신정권의 도방이 만들어지기 전, 사북 탄광에서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기도 한다. 당시엔 내용 상 어쨌건 간에 체제비판이라기보다 천민자본주의와 저널리즘을 풍자의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공연이 가능했을 거라고 본다.
 그러나 두 번째 작품 박조열의 <오장군의 발톱>은 남북전쟁이 아니라 가상의 집단체제인 동서전쟁 중 순박한 청년의 희생을 다루면서 사실상 군인출신의 현 정권에 대한 비판 역시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부가 취한 행동은 1975년 작품으로 공연을 위해 거의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공연예술윤리위원회로 하여금 ‘공연불가’ 결정을 극단劇團에 ‘하달’하는 것이었다. 1975년이면 통기타, 미니스커트, 외국어 이름 등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수많은 가수, 희극배우 등에 대하여 방송출연 금지를 단행했던 야만의 시절이었으니 누구를 탓하랴.
 이 책에 작품을 수록시킨 극작가를 보면, 윤대성, 박조열, 이근삼, 최인훈, 오태석, 이강백, 윤조병, 정복근, 조원석, 이만희, 이리 열 명이며 드디어 극작가 가운데서도 여류 작가 정복근이 처음으로 소개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는 또한 백낙청의 유명한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에서 ‘민족문학’ 담론을 처음으로 꺼낸 시기였으며, 문단은 ‘창작과비평’을 맹주로 한 리얼리즘 문학과, ‘문학과지성’을 지주로 해 명맥을 확실하게 이어간 순수문학의 시기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엔 창비 또는 리얼리즘 계열이 우세했다고 판정할 수 있는데 그건 놀라운 수준의 경찰주의 또는 선군주의 적的 압제에 대한 반작용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이런 시대가 이 희곡선집의 전반부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윤대성, 박조열, 이근삼(아벨만의 재판)은 현재 시점에서 또는 과거 시점을 이용하여 현 체제비판으로 읽힐 수 있는 풍자적 작품을 썼으며, 최인훈(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은 순문학적 토대 위에서 민족문학 계열에서 볼 수 있는 민중 메시아(어린 장수)의 탄생을 소재로 했다.
 오태석(자전거)과 이강백(봄날)은 한국의 토속적 소재로 각기 특색 있는 우화적 드라마를 이 책에 담았다, 윤조병은 결혼하는 날 결혼식장에서 도망해버린 신혼부부를 주인공으로 갖가지 은유와 상징을 사용해 복잡한 연극을 만들기도 한다. 오태석, 이강백, 윤조병의 작업은 1980년대 초반, 1984년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시각에 따라 국민생활 전반에 걸쳐 박정희 독재보다 훨씬 가혹한 통치를 한 깡패 전두환 정권을 지내면서 나름대로 생명유지 장치를 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탄압을 가장 효과적으로 피해가는 방법은 우화寓話, 우의寓意, 상징象徵인 것이 분명하니까.
 이후엔 창작을 하는데 특별한 제약이 없는 시대로 접어든다. 그래 정복근, 조원석, 이만희 같은 이들은 자신들이 쓰고자 하는 대로, 표현하고 싶은 만큼 자유롭게 지난 시절의 파시즘 치하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희생을 그렸으며(정복근 <실비명>, 조원석 <박사를 찾아서>), 단군 이래 가장 부유했던 1993년 김영삼 정권 시절에 이르러서는 촌스럽게 리얼리즘이니 순수문학이니, 더구나 민족문학 같은 구분은 전혀 따지지 않고 마음 놓고 늙은 도굴꾼 세 명을 등장시켜 인생과 삶에 대하여 논한다.(이만희 <피고지고 피고지고>)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작품들이라 각 희곡의 무대, 당시의 생각, 사조, 사건들이 아주 친숙해서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었고, 시기적으로도 가까워 앞에 읽은 1910년대부터의 대표 희곡 스물세 편보다 훨씬 호소력이 있었다. 또, 내가 뭘 알까마는, 각 작품의 질도 (당연히) 매우 세련되고, 수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다. 최인훈을 빼고 나머지 거의 대부분 극작가는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해 평생 연극과 영화계에 종사하거나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것도 극작가로서 이들의 전문성을 더 확실하게 하지 않았을까. 앞 세대 선배들은 극작가로 시작했다가 TV 드라마 작가, 라디오 연속극 작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로 진출한 반면, 1970년대 후반부터는 TV에도 전문 연속극 작가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 맞습니다. 김수현. 김수현의 등장 이후 극작가가 TV 드라마를 맡는 경우가 대폭 줄지 않았을까 싶다. 이건 극작가 본인의 생계에는 타격을 주었을 수도 있겠으나, 우리나라 연극계엔 뜻하지도 않게 긍정적인 측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 세상에 다 좋기만 한 것도 없고, 다 나쁘기만 한 것도 없으니, 그러면 됐지.
 이 책, 정말 한 번 읽어보시라. 우리나라 희곡 수준도 이 정도면 꽤 괜찮다. 문제는 책이 품절이란 거. 나도 헌책방에서 샀는데, 책에 밑줄 그어져 있고 뭐 그렇다. 그냥 시간 나면 동네 도서관 이용하시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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