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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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들어 시도하기 시작한 재독再讀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작품. 첫 번째는 설 전에 독후감 쓴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앞으로 생각을 해두고 있는 것으로,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개선문>,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 나지브 마흐푸즈의 <우리 동네 아이들>, 이탈로 스베보의 <제노의 의식>,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등이 있(었)다. 근데 정말로 읽을지, 안 읽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개선문>과 <시스터 캐리>는 읽어본지 하도 오래되어 당시 기억으로 소위 ‘인생책’ 레벨이었는데 영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스터 캐리> 같은 경우는 딱 맞춤하게 인터넷 지인께서 서평을 올려주시어 읽어보니 훤하게 그림이 그려져 일단 제외하려고 한다. <우리 동네 아이들>과 <제노의 의식>은 이번에 읽은 <백년의 고독>과 마찬가지로 중역본을 읽어서 이제 직역본이 나와 다시 읽어야 하나 궁리중이며,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걸작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은 책이 어딘가 좀 미흡한 거 같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읽어볼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이번에 <....조르바>와 <백년의 고독>은 먼저 읽어버렸다.
 전에 읽은 <백년의 고독>은 90년대 초반 문학사상사에서 안정효 번역으로 낸 것이다. 지금도 책꽂이 어딘가 꽂혀 있을 텐데 이중으로 쌓아놓은 책 더미를 헤쳐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확인절차는 생략한다. 이번엔 민음사에서 조구호의 번역으로 된 두 권짜리를 선택했다. <백년의 고독> 검색해보시라. 두 권으로 간행한 건 <민음사> 딱 한 경우다. 나도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합해서 본문 600쪽 가량, 해설과 작가 연보로 20쪽 좀 넘으니 합하면 630쪽이면 충분한데.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696쪽, <에마>는 728쪽. <에덴의 동쪽 2>도 660쪽. 책장 얼핏 둘러보니까 이 정도라, 암만해도 두 권 편집은 아쉽다.
 그런데.
 누가 만일 <백년의 고독>을 읽어보고 싶다고 한다면, 아직까지는 민음사 두 권짜리를 권한다. 지금 책이 내 앞에 있고, 다른 책, 예컨대 내 책장 저 깊숙이 숨어 있는 문학사상사의 안정효 역 <백년 동안의 고독>을 ‘미리보기’ 기능을 써서 비교해보니, 안 된다, 비교가.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그때 담임선생이 잘 내준 숙제가 교과서 몇 페이지부터 몇 페이지까지 공책에 베껴오라는 거였다. 그 지겨운 숙제를 누가 곧이곧대로 하나. 먼저 왼 손바닥을 펴고, 오른 손바닥을 세워 칼날 모습을 만든 다음 손칼로, 빠른 동작으로, 왼 손목 쪽을 한 번 치고 이어서 손가락이 시작하는 부분을 또 한 번 친다. 무슨 뜻이냐 하면,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 정도만 열심히 베끼고, 중간 부분은 그냥 떼어 먹든지 문단을 솎아 띄엄띄엄 쓰자는 신호였다.
 안정효라면 우리나라에서 문장가로이름이 높은 이다. 이번에 마르케스를 다시 읽으면서 새삼스레 느낀 건 이렇다. ① 마르케스 문학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당연히 내가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아몰랑주의’라고 일컫는 환상문학적 상상력이겠지만, 이에 못하지 않는 것으로 마르케스 특유의 문장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안정효에 비하면 한참 후배인 조구호는, 나는 당연히 스페인 언어를 전혀 모르는 인간으로 번역의 질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용한 또는 번역한 문장으로 미루어 얼마나 원문에 가깝게 실감나는 우리말로 번역을 했느냐를 이야기하는 바, 마르케스만이 낼 수 있는 문장의 감칠맛을 제대로 전달해주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한 것처럼 보인다. 마르케스 특유의 만연체 문장을 편의대로 자르지 않고 우리말로도 같은 한 문장으로 만드는 것, 그게 그리 쉽지는 않다는 걸 나는 콧대만 높고 우리말 실력은 별 볼일 없는 역자 몇 명을 통해 알고 있다. 특히 허먼 멜빌이나 마르셀 프루스트, 윌리엄 포크너 같이 긴 문장을 어렵게 쓰는 작품의 경우, 뜻을 효과적으로 전하면서도 긴 호흡을 그대로 유지해주는 번역이 나올 때, 역자의 노고에 경탄을 할 수밖에 없다. 읽는 사람도 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② 안정효는 조구호 번역의 묘사와 많이 다른 의미로 해 놓은 것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보자.


 “그가 발굴해 냈던 것이라고는 녹이 잔뜩 슬어 각 부분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 같은 15세기 갑옷뿐이었는데, 그 안에서는 돌이 가득 담긴 거대한 호리병에서 나는 것과 같은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탐험대의 남자 넷이 그 갑옷을 뜯었는데, 그 안에는 여자의 곱슬 머리카락에 매단 구리 로킷을 목에 건, 석회처럼 변한 해골 하나가 들어 있었다.” 조구호 역, 민음사 <백년의 고독 1> 13쪽.


 “그러나 그가 마술 쇠붙이로 찾은 것이라곤 돌멩이로 가득 찬, 15세기에 쓰던 큰 투구뿐이었다. 녹이 잔뜩 슨 그 투구를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그의 조수 네 명이 뜯었더니, 그 속에서는 여자 머리카락이 든 구리 로켓 다 썩어 푸석푸석한 해골만 나왔다.” 안정효 역, 문학사상사 <백 년 동안의 고독> 6쪽


 이와 같은 이유로 문학사상사를 비롯한 많은 출판사에서 간행한 <백년(동안)의 고독>들은 해설을 포함해 500쪽 미만으로 줄여 쓸 수 있었지만, 조구호는 기어이 600쪽을 넘겨버리고 말게 되는 건 아니었을까. 이미 우리나라 문학계에서 문장가로 높은 성가를 지니고 있는 분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과거 이이는 외국문학을 원서로, 아니면 번역한 영어로 읽지 못하는 우매한 한국 독자를 우습게 알고 있던 거다. 그냥 뜻과 대강의 스토리만 제대로 얘기해주면 끝났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내가 이렇게 침을 튀는 이유를 짧게 이야기하자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혀서 그렇다. 안정효는 한 시절 <시장과 전장>이란 제목으로 실천문학지에 연재를 했던 <하얀 전쟁>부터 <헐리웃 키드의 생애>를 이어 작품이 나오는 족족 찾아 읽었던 추억이 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그의 문장을 좋아했는데 말이지. 생각할수록 짜증난다. (하긴 자기가 번역한 건 미국말로 된 책이라고 하면 또 그냥 넘어가겠지.) 유명한 소설가들이 번역한 작품 대부분이 영어 작품이 아닌 비 영어권 문학의 중역이란 것도 매우 생각해볼 만하다.
 민음사가 세계문학전집을 내는 취지, 번역 역시 세대를 달리하면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은 진리다. 과거의 올바르지 못한 번역으로 나는 그동안 <백년의 고독>을 얼마나 낮게 평가했나. 실제로 그간 누가 마르케스 이야기를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마르케스 하면 쉽게 <백년의 고독>을 이야기하지만, 내가 읽어보니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 오히려 더 좋던데.”

 이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던지.​
 이번에 조구호(나는 이 역자와 아무 관계도 없다. 그 흔한 학연, 지연 같은 것도 없고 심지어 돈 천 원이라도 꿔준 적 없다.) 덕분에 <백년의 고독>이 이렇게 재미있는 작품이었고, 마르케스가 이토록 맛있는 문장을, 멋있게 만들어내는 연금술사인지, 이제야, 너무 늦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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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8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원전을 바로 번역한 것과 2차, 3차 텍스트로 옮겨가면서 의역한 것과는 차이가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

Falstaff 2019-02-08 16:30   좋아요 1 | URL
아이고 그럼요. 그러니 같은 텍스트를 또 읽는 것 아니겠습니까. ^^

카알벨루치 2019-02-08 16:45   좋아요 1 | URL
제목부터가 <백년동안의 고독>보다 <백년의 고독>이 더 훅하고 다가옵니다 제목도 어떻게 그렇게 지었나 싶어요 ㅎㅎ

Falstaff 2019-02-08 17:20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제목 짓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작품 속 주인공들은 또 얼마나 오래 사는지, ㅋㅋ, 대단들 합니다.
 
바다와 독약 창비세계문학 28
엔도 슈사쿠 지음, 박유미 옮김 / 창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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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강>에 이어 두 번째 읽은 엔도 슈사쿠. 가톨릭 신자로 평생 종교적 사색에 깊이 잠겼다는 건, 나 같은 유물론자로 하여금 작가와 작품에 거리를 두게 만드는 효과적인 광고방법이다. <깊은 강>에도 물론 종교적 사유가 깊게 밴 작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쓸쓸한 갖가지 삶의 여정을 차분히 써내려가서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다. ‘갖가지 삶의 여정’이라고 하면 그건 개별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는 뜻. 행복한 사람들은 서로 비슷비슷하니까. 하여간 <깊은 강>을 읽고 나서, 엔도 슈사쿠의 이름을 기억해놓았다가, 창비 세계문학에서 이이의 다른 작품을 간행한 걸 알자마자 곧바로 보관함에 넣었다가 이제야 읽었다.
 패전 후 재건에 나선 일본. 수요가 많았던 못 도매상에서 일하는 평범한 봉급쟁이 화자 ‘나’는 비싸지 않은 집을 찾아 아직 도로포장을 하지 않아 차가 지날 때마다 풀썩 풀썩 먼지투성이가 되는 도쿄 외곽지대의 작은 주택가로 이사를 했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 내과 의사, 양복점 주인, 주유소 사장 기타 등등. ‘나’도 역시 중국 침공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을 했지만 당시가 전쟁의 막바지여서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퇴역을 한 처지. ‘나’는 화물차가 달릴 때마다 고운 황토 먼지가 간판이며, 창틀이며, 사람들 콧구멍이며, 눈썹에까지 뽀얗게 앉아버리는 변두리 길거리를 구성하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알고 보면 불과 몇 년 전엔 중국여인들을 윤간하고 중국 남자들을 기둥에 묶어놓은 채 돌격 연습을 했거나(주유소 사장), 남경 사변의 주인공인 헌병 출신으로 학살의 중요한 일원이었다(양복점 주인). 그들이 악인이어서? 아니, 아니. 지금 이이들이 도쿄 변두리에서 그냥 보통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듯이 전쟁 전에도 보통의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세월, 특히 전쟁과 학살과 고문과 윤간의 독약에 취해 자신들이 저지르려 하는 짓이 최악의 범죄인줄 알면서도 그냥 저질러버리게 되던 거였다.
 이들 가운데 아리송한 인물. 내과 의사 스구로. ‘나’는 허파 기흉氣胸으로 흉부내과에서 정기적으로 공기(산소)를 주입하는 주사를 맞아야 하는 만성 질환자. 이상하지? 흉막에 공기가 차서 폐에 압박을 주는 기흉 환자에게, 주사를 통해 공기(산소)를 넣어주면 폐가 더 찌그러지지는 않을까? 그래서 검색해봤다. 그래야 한단다. 의학 지식을 설명할 만큼 소양이 없는 관계로 이유는 생략. 하여간 도쿄에 살 때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작은 돌멩이를 던지면 내과 의사가 맞았지만, 변두리에선 병원이라고는 스구로 의사가 운영하는 내과병원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 이이에게 흉막 안을 주사하는 처치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고, ‘나’는 이게 결코 즐겁지 않다. 불친절할뿐더러 흰 가운gown에 작고 검붉은 핏자국이 하나 찍혀 있는 것이 영 께름칙하고, 두꺼운 손가락의 손톱 밑에 때가 새까맣게 끼어 있는 것도 모자라, 주사바늘을 삽입하기 위해 늑골 사이를 더듬는 손길이 싸늘하니 매우 불길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주유소 사장 말에 의하면 솜씨도 괜찮은데다가 돈 없는 시골 농부들한테 무료로 진료도 해주고 약도 지어주며, 심지어 자신한테도 작년에 진료한 비용을 아직까지 청구하지 않은 호인이란다. 물론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도쿄에서도 유명한 의사한테 주사 처치도 많이 받아봤지만, 이 스구로라고 하는 ‘이상한 구석이 있는’ 의사만큼 정확하게, 고통 없이, 능숙하게 처치를 하는 흉부내과 의사를 만나본 적이 없다. 여기서 말한 ‘이상한 구석’은 희한하게도 이이가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점도 포함한다.
 마침내 ‘나’의 처제가 일본의 경상도 F시 출신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어, F시로 가는 기회가 생긴다. 거기서 한 의사를 알게 되고, 그 의사에게, 선생, 혹시 F 의과대학에 다녔으면 스구로라고 하는 자와 동창 아니슈? 자연스럽게 질문을 했으며, 생각한 것보다 의아한 대답을 들어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지역 신문사까지 일차 왕림, 기어이 스구로의 ‘잊고 싶어 하는’ 과거를 듣게 된다. 1945년 5월. 패전이 거의 확실한 일본 땅을 향해 미국의 B29기는 쉴 새 없이 폭격을 퍼붓고, 이 와중에 몇 대는 격추당하거나 재수 없이 이륙 전에 연료 확인을 하지 않아 일본 땅에 불시착을 한 열두 명의 미군이 포로로 잡힌다. 이중에서 여덟 명이 재판도 없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규슈 의과대학에서 그냥 죽이느니 인류의 건강과 전쟁 의학의 발달을 위해 생체 해부를 해보자고 제안을 했고, 군부가 이를 바람직한 일로 받아들여 기어이 생체 실험을 하기에 이르는데, 스구로는 당시 말단 훈련의로 전후 2년 형을 받은 것으로 밝혀진다.
 슈사쿠가 이런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쓴 소설. 여기까지가 책의 1부다.
 2부와 3부에는 이 모든 사실을 밝혀낸 주인공 ‘나’가 증발해버리고, 생체 해부에 참여했던 몇 명이 화자로 등장해 당시 자신들이 처해 있던 개인적 삶의 모습과 생체 해부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던 (별 시답지 않은) 핑계, 같은 것들이 적혀있다. 2부와 3부를 읽으면서, 같은 패전국이고, 비슷하게 침략 중 대량 학살을 저질렀으면서도 완전하게 다른 독일과 일본의 행동양식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천 년을 걸쳐 유구하게 흘러온 일본인들의 혈관에는 아주 독특한 DNA가 흐른다. 여기서 말한 ‘천 년’은 일본 무신정권을 말한다. 무신정권과 사무라이의 지배 아래 목숨을 이어가야 했던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죄의식이 아니라 어떤 수를 쓰더라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다. 자기보다 강한 계급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했으니까. 근데 이건 일반 백성들의 모습이었다가, 점점 개화되어 백성들의 마음속에도 자신 역시 무사 계급과 유사해지려는 마음이 강해지고 (조선시대 말기에는 백성들 거의 다 양반이었듯이) 그리하여 가장 고급한 가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으로 변질된다. 죄 같은 것을 지었더라도 그것이 밝혀져 수치스러운 처지로 떨어지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유전자가 일본인은 천 년에 걸쳐 고착되어 있던 것이라고, 슈사쿠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수치’라는 단어는 내가 머리를 굴려 발견한 것이 아니라 책 뒤쪽 역자해설에 맞춤한 단어로 내 생각을 설명하고 있어서 거기서 따온 것임을 밝힌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생체 해부를 시행했던 (스구로를 제외한)나머지 인간들 역시, 도쿄 외곽 신흥주택가의 주유소 사장, 양복점 주인, 목욕탕 사장처럼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저질렀던 패륜적 범죄를 누가 알아내 자신들을 수치로 몰아가지 않는 한, 그들은 죄의식 없이 한 평생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으리라. 그러니 아베 총리가 미쳤냐, 힘 센 중국은 모르겠고, 비벼볼만한 한국한테 사과를 하게.
 짧은 소설이다. 재미도 있고.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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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을
 지난 1월 1일. 서른 살이 된 큰 아이가 집에 들렀다. 어미가 끓여준 떡만둣국을 맛나게 먹더라. 소위 말하는 엄마 손 맛? 웃겨. 내 입엔 이게 떡만둣국이냐?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새해 벽두부터 쌍코피 터질 필요가 없어 그냥 조용히 넘어갔다. 하여간 잘 먹더니 시원하게 물 한 컵을 들이켠 다음 하는 말이, 아버지, 할 말이 있는데. 앞니를 빼고 인공 이를 심었더니 영 칠칠치 못하게 자꾸 음식을 흘린다. 아무래도 내 이가 아니라서 그런 모양이다. 그래 휴지로 식탁 앞에 떨어진 떡국 찌꺼기를 닦고 있던 내가 무심하게 곧바로 이를 받았다. 물론 완전한 농담이었다. 왜, 임신했니?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응.’ 속으로는 염통이 뚝, 떨어지는 느낌. 그러나 쪽팔리게 그런 거 갖고 티 낼 수 있나. 그래 또 물었다. 몇 주? 이제 겨우 두 주 됐단다. 작년 8월에 청혼을 하고 승낙을 받고, 요새 아이들 영악해서 신부가 한 살 많아 지들 생각에 소위 노산인가 싶어 둘이 손잡고 산부인과 갔더니 의사 하는 말이 여자는 전혀 문제없는데, 남자 쪽 정자의 운동성이 정상 바로 아래쪽이라고, 이제부터라도 결혼할 관계라면 피임을 하지 말라고 권하더란다. 그래 넉 달 만에 아이가 생긴 것. 나는 계속 맛대가리 하나도 없는 떡만둣국을 입에 떠 넣으며 (아무리 유명한 주방장이 조리를 했더라도 그 상황에서 내가 맛을 알겠어?) 소주 한 잔을 꿀꺽 마셨다. 매년 1월 1일 아침 떡국을 먹을 때 아이들이 따라주는 소주 한 잔씩 마시는 건 벌써 이십년이 넘는 내가 만든 일종의 ‘아름다운’ 가풍이자 미풍양속이다. 혼인이 두 집안 사이의 행사에서 그냥 한 쌍의 삶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 그래라. 아이 이름은 내 벌써 지어놓은 거 알지? 아들이건 딸이건 관계없이 그냥 ‘하을’이라 해라. 노을 하, 새 을. 한문으로 쓰면 霞乙. 글씨가 작아 잘 안 보이시지? 크게 쓰면 이렇다.
 霞乙
 무슨 뜻이냐고? 그림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할아비 권한으로 첫 아이 이름은 내가 짓는다. 둘째는 외할아버지가 짓든지, 네가 직접 짓든지 그건 너 좋을 대로 해라. 맏이 이름은 양보 않겠다. 라고 도장 찍었다. 아, 무식한 마누라. 하필이면 이름으로 노을이 뭐냐, 새벽이면 새벽이지. 그리고 갑이 좋지, 왜 을이냐. 요 지랄을 한다. 그런 생각이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름이 ‘귀복’이게? 귀할 귀, 복 복. 혹은 요샛말로 ‘대박’이? 왜, 아예 ‘예수’라고 하지. 그건 서른세 살까지밖에 못 살까봐 안 된단다. 하여튼 새해 아침에 난 손주가 생겼음을 알았고, 아이에게 ‘하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여태까지 지내온 새해 첫날 가운데 제일 좋은 선물을 받았다. 그래 다른 해엔 소주 한 병이었는데 올해엔 두 병 마시고 아침부터 고꾸라져 잤다.




서재
 내 취미는 책 읽고, 음악 듣고. 책 읽은 느낌을 독후감으로 쓰고, 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알라딘 서재에 업로드 하는 일. 근데 더 즐거운 취미, 내가 아는 최고의 취미여서, 이미 약한 중독 증상까지 보이는 건 바로 알코올 흡수하기. 예를 들어 2019년 1월, 나는 스무 권의 책을 읽었고, 서른 병의 소주를 마셨다. 위스키 한 병, 와인 한 병, 맥주가 글쎄 한 5천 밀리리터쯤, 중국 백주가 한 병. 이런 건 세지도 않는다. 오직 소주 서른 병. 그러니 내 일상생활이란 것이 책을 읽지 않으면 술에 취해 있다. 이쯤에서 서재 친구들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서재 운영, 또는 서재 생활을 잘 하고 있지 못해서. 나는 다른 분들의 서재에 자주 방문하지 못한다. 더구나 댓글을 다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읽다가 주둥이가 근지러워 참지 못할 정도가 돼야 그냥 한 마디 하는 수준이다.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로 벌써 몇 년을 버티는지 모르겠다. 서재 친구들을 자주 방문하고, 함께 웃고, 떠들고, 이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이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1월에 읽은 책 스무 권. 이렇게 세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얇은 책도 있고, 두꺼운 책도 있으니. 페이지 수로 한 달에 6,501쪽이다. 다른 해보다 한 800쪽 이상 적게 읽은 편이다. 해가 갈수록 책을 읽는 것도 알코올의 방해를 심하게 받는다. 서재 친구분들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정독하는 것 같은데 독서량도 어마어마하고, 그분들이 쓰는 건 나같이 독후감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서평’이다. 하긴 책 읽고 느낌을 적는 수준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사는 내가 (훨씬)더 행복한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 능력으로는 읽고, 독후감 쓰고, 술 마시고, 기분나면 음악 듣고, 이런 몇 가지만 가지고도 다른 여유가 없다. 그러니 친구분들, 내가 자주 방문하지도 않고, 댓글도 없을 수밖에 없는 걸, 조금만 더 용서해주시기 바란다.




상품권
 내 지갑 속엔 신세계 상품권과 SK 상품권이 합해서 50만원어치가 있다. 다 회사에서 받은 거다. 백만 원어치 상품권 한 장 사려면 얼마나 드는 줄 아시나? 딱 백만 원 든다. 안 깎아준다. 곧바로 현금만큼의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유사)유가증권이니 깎아줄 이유가 없다. 그래 상품권은 협력회사가 발주회사에 가져다 바치는 뇌물로 작용한다. 현금 준 건 아니니까. 나도 한 때는 많이 받아봤다. 20세기에. 그땐 의례 명절마다 총력을 다해 상품권을 수집해서 팀장한테 가져다 바치면, 팀장이 이를 수거해 다른 부서에 할당을 하고, 우리 부서원들에겐 조금 더 많이 주고, 뭐 그래서 일종의 직장 에티켓 정도로 치부되고는 했다. 물론 이제 시대가 변해 그런 거 전혀 없다. (다른 회사는 모르겠다.) 문제는 (예를 들어) 신세계 상품권으로 뭐든지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난 상품권으로 책을 좀 더 사고 싶은데 아무리 뒤져봐도 신세계 상품권으로 인터넷 서점에선 단 한 권의 책을 살 수가 없다.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왜 상품권을 주지? 어차피 그것도 전 직원에게 일정 액수에 해당하는 금액의 복리후생비 계정과목으로 주기 때문에 소득세를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려면 차라리 돈을 주지 왜 상품권이냐고. 어제 집에 가서 지갑의 상품권 다섯 장을 뽑아 마누라 브래지어 속에 쑥 집어넣어 줬다. 에이그, 쭈그렁바가지 같으니라고. 상품권 50만 원어치 받고 헤헤 웃는 마누라 뽕 브라 속에 그럴 듯한 건 아무 것도 없더라.



한라봉과 낑깡
 그제 일인데 아이들한테 카톡이 왔다. 큰 아이, 작은 아이 다. 엄마가 한라봉을 한 박스씩 보내줬는데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게 그리 맛이 있다고. 어미한테는 며느리(후보)한테도 카톡이 왔단다. 맛있다고, 잘 먹겠다고, 아기는 잘 크고 있다고. 어쨌거나. 아참. 이 이야기 나왔으니 상견례 얘기도 해볼까. 한식집에서 상견례를 했다. 사돈이 나보다 한 살 위인데, 내가 생일이 빨라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다녔다. 이리저리 따져보니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단다. 딱 나만큼의 머리숱, 딱 나만큼의 흰 수염, 딱 나만큼의 덩지. 근데 모든 운동을 다 잘한단다. 그이는 덩지가 다 근육이고, 난 이 덩지가 전부 지방이다. 그거 하나 차이가 난다. 그래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예단은 무슨 예단, 우리 그런 거 없기로 합시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아이들 예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저희들 결혼반지 줬습니다. 그걸 다시 세팅을 하든지 그냥 쓰든지 지들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양식 결혼 하면서 폐백이란 것도 그거 웃긴 겁니다. 우린 폐백 안 할 겁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리저리 설왕설래, 하면서, 소주병을 기울였는데, 참이슬도 그냥 참이슬이 아니고 뚜껑 색깔이 빨간 진한 도수의 소주를 둘이서 여섯 병 깠다. 아, 그 영감. 술 참 장하게 하더라. 하마터면 골로 보내려다가 내가 골로 갈 뻔했다. 역시 운동으로 다져진 몸이라 세긴 세다. 한라봉으로 돌아와, 카톡을 보니 흠, 오늘 집에 가면 나도 한라봉 맛을 볼 수 있겠군. 이랬다. 그거 뭐 먹으나 마나 무슨 특별한 거 있나. 있으면 먹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그렇지? 근데, 아니더라. 집에 갔더니, 없다. 마누라가 아이들한테 한 박스씩 보내고, 나한텐 딱 두 개, 뭘 주느냐 하면, 낑깡 두 알을 주더라. 그림 한 번 보자.

 

 

왼쪽이 한라봉. 가운데가 귤. 오른쪽이 낑깡. 내가 가운데 ‘귤’ 수준이었으면 그래도 좀 덜 했을 텐데 (여기서, 정말? 이라고 묻지 마시라) 애들한텐 한라봉 먹으라 하고, 한라봉 사 줄 돈 벌어다준 나는 낑깡 두 알 먹으라고? 이게 마누라야, 웬수야. 이러니 내 알코올 섭취량이 늘겠어, 안 늘겠어. 생각들 해보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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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2-01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설명절 잘 보내시고 손주가 생기신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하을이 이름 이쁘네요 ㅎㅎ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Falstaff 2019-02-01 10:4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벨루치 님도 즐거운 설 연휴 보내세요. 복도 많이 받으시고, 돈도 많이 버세요. ^^

카알벨루치 2019-02-01 10:55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2-01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을이 이름 참 예쁘네요. 딸, 아들 다 어울릴 이름이고요- 폴스타프 님 독후감도 재미나지만 이런 소소한 글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설연휴, 소주와 책과 함께 즐겁게 보내시고요.

Falstaff 2019-02-01 12:37   좋아요 0 | URL
하하하, 고맙습니다.
여기가 책 가게 서재라 이런 잡글 올리기가 부담이 되는 건 사실입지요. 그래도 이번엔 용감하게 한 번 써봤습니다.
연휴 잘 보내세요. 집에 계시지 말고, 일단 떠나셔요!!!! ㅋㅋㅋ

syo 2019-02-01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노을 사진보다 하을이가 훨씬 더 어여쁜 아이로 태어날거예요!! 축하드립니다 ㅎㅎㅎㅎ

Falstaff 2019-02-01 12:37   좋아요 0 | URL
아이고, 고맙습니다.
사이오님도 축하드릴 일이 곧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hnine 2019-02-01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팔스타프님 이렇게 글을 재미있게 잘 쓰시는군요. 단숨에 읽었습니다.
하을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으셨는지 궁금해요.
사모님께서는 혹시 그나마 낑깡도 못드시고 다 가족들 주신건 아닐지. 가재는 게 편이라고 여기서 또 사모님 편을 들고 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3=3=3

Falstaff 2019-02-01 12:39   좋아요 0 | URL
윽. 재미 있으셨습니까. 고맙습니다.
‘하을‘은 그냥 떠오른 겁니다. 어느 날 멍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떠오른 이름.
전에도 그런 이름이 하나 있었습니다. ‘담원‘ 딸 낳으면 담원이라고 지으려 했더니 둘째도 아들이 나와서 조카딸한테 준 이름입니다.
마누라는 타파 통에 낑깡 가득 담아 스카이 캐슬 보면서 그걸 한 통 다 먹던걸요!!! ㅋㅋ

coolcat329 2019-07-2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늦었지만 손주 축하드립니다. 이름도 참 좋구요... 이런 글도 쓰시는지 이제 알았는데 너무 재밌습니다. ㅋ야심한 밤이라 두 번 입을 틀어 막았네요.

Falstaff 2019-07-25 09:12   좋아요 1 | URL
잘 읽으셨다니 기쁩니다. 벌써 시간이 흘러 다음 달 말쯤엔 손녀딸이 나온다네요.
^^
 
그리스인 조르바 -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유재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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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 1980년대, 90년대에 읽고, 시간이 흘러 대표적 조르바 팬이었던 이윤기가 죽어 드디어 그리스어 원전 작품의 직역이 감행돼 또다시 읽었다. 들은 이야기라서 정확한지 풍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윤기 씨가 그리스어를 공부한 이에게 자신 살아생전엔 <....조르바>는 번역하지 말아달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나도 몰랐는데 이번 유재원 번역의 후기에 보면, 여태까지의 <....조르바> 번역이 그리스어→영어→한국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불어→영어→한국어였단다. 내가 지금 고 이윤기의 다단계 중역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유재원의 이번 번역이 나오기까지 우리나라에서 <...조르바>를 읽기 위해 훨씬 더 긴 세월이 필요했을 것이었을 터이니. 후기를 보면 고 이윤기와 유재원이 미노타우로스의 섬 크레타에 있는 카잔자키스의 묘를 방문해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소주와 마른 오징어를 놓고 절을 두 번 반 했다는 일화도 적어 놓았다. 그만큼 고 이윤기도 특별히 이 작품을 아꼈다고 한다.
 20대에 한 번, 30대에 한 번, 50대가 저무는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읽는 <그리스인 조르바>. 책을 읽으며 나는 엉뚱하게 헤세가 생각났다. 헤세는 한 살이라도 젊어서 읽어야 제맛인데, <그리스인 조르바>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깊게 공감하는 종류의 작품이다. 주인공 조르바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63세의 노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화자 ‘나’와 나누는 다양한 대화를 읽으면서, 젊은 시절이었다면, 이런 주책없는 늙은이를 봤나, 혀를 끌끌 찼을 장면이, 이번엔 키득거리면서 즐거운 유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숱하게 많았다. 그렇다고 앞으로 10년 정도 세월이 더 지나, 또다시 읽어볼 생각은 없다. 그리하여 이번의 일독이 내 평생 마지막 <....조르바>가 될 터.
 앞선 두 번의 <...조르바>에선 없던 프롤로그가 붙어 있는 것이 놀라웠다. 그것이 다단계 중역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인지, 우리나라 출판사의 편집자가 이딴 건 빼버리는 것이 독자의 이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롤로그가 붙어 있다는 점 하나만 가지고도 이번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유재원 번역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아쉽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프롤로그를 편집과정에서 삭제했으면 혹시 마지막 장인 26장도 아예 빼버렸거나 대폭 축소해버린 건 아닐까? 고 이윤기 번역의 열린책들에서 나온 <....조르바>는 해설까지 합해서 482쪽. 문학과지성사는 본문만 539쪽, 해설까지 587쪽. 이런 생각이 조금은 타당할 정도로 페이지 수에서 차이가 난다. 프롤로그는 겨우 10쪽에 불과하니.
 유재원은 번역보다 더 힘들고 피를 말리는 과정으로 문학과지성사의 편집자 김은주 팀장이 이끄는 교정과 수정, 표현 다듬기 과정이었다고, 한쪽, 한줄, 한 낱말, 한 글자, 심지어 행간까지도 독수리처럼 매서운 눈매로 잘못을 짚어냈다고 밝혔지만, 그래도 오타는 나온다. 내가 발견한 것이 네 번. 몇 쪽 몇 행에서 나오는지 가르쳐 드리려다가 관둔다. 그래야 매의 눈을 가진 편집팀이 한 번 더 완벽한 교정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처음부터 끝까지 팔 것이니까.
 오늘 독후감에선 내용 소개가 없다. 독서 자체가 삼독이었으며, 원래 유명하게 소개된 작품이라 내용에 관해서 말을 더 보탤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  보너스. 조르바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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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30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스인 조르바>가 있지만 이 번역서를 또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덕분에..
삼독이라.... 먼훗날 또한번 이 소설을 읽었다는 리뷰를 보고싶네요. ^^

Falstaff 2019-01-30 15:00   좋아요 1 | URL
ㅎㅎㅎ 글쎄 이 작품을 또 읽게 될 지는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 책은 언제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딱 읽어버리게 되더라고요. ^^

붕붕툐툐 2019-01-30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진짜 좋아하는 책이에요!! 직역 나와서 넘 좋다는!!

Falstaff 2019-01-30 15:45   좋아요 1 | URL
저도 직역본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득달같이 사서 읽은 책입니다.
이 책 정말 좋아요. 한때 인터넷 이름으로 ‘조르바‘를 썼던 시절도 있었습지요. ^^

coolcat329 2019-12-03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이글을 일주일만 일찍 읽었다면 좋았을텐데요... 그리스번역책이 나온줄도 모르고 지난주에 샀네요 ㅎㅎ

Falstaff 2019-12-03 19:57   좋아요 1 | URL
ㅎㅎ 인생이지요 뭐.
본문에 썼다시피 저도 <...조르바>만 세 권을 가지고 있는 걸요. ^^;;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4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정동섭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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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소설의 초장에 등장해,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스페인의 바다호스 지방, 그 중에서도 아주 촌구석인 알멘드렐라호에서 약 삼십 리 떨어진 벽촌에서 진짜로 태어나 성인이 되고, 사고를 치고, 죽어간 파스쿠알 두아르테의 육필 수기 또는 회고록을, 그저 오탈자의 교정 정도를 보는 수준으로 옮겨 적은 일 말고는 없다고 능청을 떤다. 설마 이런 장치를 진짜인줄 아는 독자는 없겠지. 그리하여 일종의 피카레스크 소설이 쓰여 지는데, 우리가 아는 전형적인 피카레스크 양식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폭력적인 아버지와 매몰찬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파스쿠알이 성인이 되어 흉악범죄라고 분류되는 살인을 두 번 저질러 사형에 처해지는 여정을 담았다. 사실 어떤 인간이라도 자신이 살아온 바를 순서대로 기술한다면 피카레스크의 범주에 들지 않기도 쉽지 않을 터이긴 하지만.
 역자 해설에서 정동섭은 스페인·중남미어 문학과 교수답게 스페인의 현대문학 일반을 소개하면서 이 작품을 1940년대 스페인에서 등장해 살아남은 “전율주의”의 대표 작품이라 말하고 있다. 1940년대라면 프랑코 반란군에 의하여 저질러진 내전이 반란군의 승리로 끝나고, 이 와중에 스페인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인재들이 나라 밖으로 몸을 피해 이른바 빈 동굴 현상, 즉 동공현상이 벌어졌던 시기. 그래도 스페인에 남아 있던 작가들은 프랑코의 적대적인 문학검열을 피해야 했을 텐데, 검열에 관한 한 국제적 명성을 떨친 바 있는 우리나라 작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듯, 시인 소설가 극작가들이 스스로 먼저 자체 검열의 함정에 빠져버리고는 했나보다. 말이 멋있어 전율주의지, 그거 사실 별거 없다. 1970년대 대한민국 소설 판에서 유부남과 여대생의 불륜 얘기, 밤에 호스티스로 일하며 동생이나 애인 뒷바라지 하는 이야기가 창궐했던 것과 비슷할 수도 있다는 말씀. 로베르토 볼라뇨는 <야만스런 탐정들>에서 독재 치하에서 전위문학을 주창하는 ‘내장주의’라는 문학 장르를 소개하는데, 스페인의 전율주의와 (작품 속)칠레의 내장주의가 표현방법 외의 어떤 면에서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후장주의’와는 확실히 다르기는 하지만. 즉 정치나 사회적인 문제에서 좀 떨어진 것을 쓰면 검열을 피할 텐데, 이 책처럼 무지렁이들의 범죄 이야기 같은 걸 쓰면 어떨까, 해서 생긴 ‘주의’ 가운데 하나가 전율주의 아니겠는가 하는 의견. 세상의 모든 사조는 당시 환경에 적응해 발전시키기 위해 자연스럽게, 다분히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뭐 아니면 말고.)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단, 재미있게만 읽었다. 동의하지도 않고, 동감하지도 않고, 바람직하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대한성서공회가 공동번역한 <성서> 독후감에 써먹은 바 있는 국회의원이자 양아치 출신의 절름발이 목사 이동철이 쓴, 그러나 황석영의 이름으로 간행했던 <어둠의 자식들>을 읽어보면,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와 친숙한 1960년대와 70년대의 뒷골목 범죄자들의 이야기라서 더욱 ‘친밀하게’ 느껴질 텐데, 그것이 만일 스페인에서 쓰였다는 가정 아래, 모르긴 몰라도 최고의 ‘전율주의’ 문학이라 각광을 받았을 수 있었을 거다. 그러니 내가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을 읽으면서 무슨 특별한 감동이나 동감을 느낄 리가 있었겠느냐는 것이지. 이 책이 스페인 문학사에 어떤 위치를 누리고 있는 지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건 스페인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암기 사항이다. 작년 말에 이이가 쓴 <벌집>을 읽었다. 두 권이면 됐다. 호세 셀라는 더 볼 일이 없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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