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사나이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7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흥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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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 전, KBS 명화극장을 통해 본 흑백영화 <제3의 사나이>. 캐롤 리드 감독이 만든 불멸의 엔딩 씬. 이것이 기억나서 내가 아직도 밥 먹고 사는 회사의 사보에 지난 세기인지 이번 세기 초인지에 기고를 했던 적이 있다. 이제 독후감을 쓰려다 이 생각이 나서 파일을 뒤져보니 아쉽게도 보관하고 있지 않다. 흔히 허니문 카로 불리는 대관람차를 타고 꼭대기에 올라 주인공 롤로 마틴스(영화에선 Holly Martins)와 자그마치 오손 웰스에게 배역을 맡긴 해리 라임Harry Lime의 대화가 인상 깊었었다.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간 관람차 안에서 악당 해리가 밑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검은 파리 떼처럼 오밀조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하고 죽마고우 롤로에게 말한다.

 

 

 

 “자네는 저 점들 중 어느 하나가 동작을 멈춘다면, 영원히 멈춘다면 진정으로 동정심을 느낄 셈인가? 동작을 멈추는 점 한 개당 2만 파운드씩을 벌 수 있다고 해도 자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돈을 갖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점들을 보유할 수 있을까 하고 계산해보겠는가? 소득세도 없는 돈일세, 이 친구야. 소득세도 없는 돈이라구.”
 이건 책 속에 쓰인 것을 옮긴 것이고 내가 기억하는 건, “저 많은 점 가운데 하나가 없어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이 정도였다. 해리라고 하는 악당은 그토록 많은 점들 가운데 몇 백만의 점을 소멸시킨 나치에 승전을 거둔 영국인이다. 그가 다시, 이번에는 자본주의, 즉 돈을 위해 수많은 점들 가운데 불행하게 선택된 몇 개의 점을 삭제하는 대신 점 하나에 2만 파운드의 세금 안 내는 돈을 벌려고 한다. 젊은 시절, 이 영화가 그레이엄 그린의 원작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건지 모른 채 그저 이 대사와 엔딩 씬에 매료되어버렸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몇 장 안 되는 영화 DVD 목록에 <제3의 사나이>가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책을 다 읽고 확 깨는 건, 엔딩이 소설의 결말과 다르다는 것. 어떻게 다른지는 당연히 가르쳐드리지 않겠다.
 고전 스릴러로 일독할 만하다.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난 영화를 더 재미있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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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기 창비세계문학 4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애숙 옮김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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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큐우슈우에 사꾸라지마라는 온천 지역이 있는 모양이다. 거기 여관집에 따님이 한 분 있었다. 그 동네 습관이 외지 사람하고는 혼인을 맺지 않는 거였는데, 이 따님이 하루는 고향이 시코쿠 ‘이요’인 광목 행상하고 눈이 맞아 덜컥 혼인을 해버렸다. 관습법에 입각한 여관집 주인 내외는 가차 없이 따님을 내쳐버려 이 외로운 신혼부부는 야마쿠치 현의 시모노세키에 터를 잡고 살게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남편은 광목 행상을 다니며 틈틈이 아이를 만들어 딸을 둘 두었다. 행상 다니느라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아이 만들 시간은 있는 법이라서. 없는 집에 이거면 됐을 터이지만, 남자는 포목장사로 돈을 제법 모으자마자 그만 기생첩을 하나 얻어 집으로 데려오고 말았다. 머리 꼭대기까지 열을 받은 여자는, 내가 집안에서 쫓겨나는 것까지 무릅쓰고 자기하고 혼인을 했으면 지랄을 하시더라도 적당히 해야지 말이야, 눈이 폴폴 날리는 음력 정월에 여덟 살 먹은 작은 딸 후미꼬의 손목을 잡고 드런 집구석을 뛰쳐나오기에 이른다. 이 때를 굳이 서기력으로 꼽는다면 1911년 아니면 1912년. 요새 같으면 정식으로 이혼 소송해서 재산의 절반 이상을 분할 받고, 자식들 양육권에다가 다달이 교육비도 청구할 수 있겠지만 그때야 못 견디겠으면 기생첩에 안방을 물려주고 맨입으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겠지. 게다가 아이 딸린 여자 혼자 험한 세상 살 수 있었겠나. 그래 오까야마 출신으로 행상에 잔뼈가 굵은 젊은 남자를 얻으니 이름은 뭐 중요하지 않고 그저 ‘후미꼬의 새아버지’라 하고 말자. 다른 소설에서 등장하는 새아버지는 흔히 엄마와 딸의 노동력과 몸을 동시에 착취하는 괴물로 그리고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후미꼬의 새아버지는 원래 소심한 성격에다가, 고스톱, 도리짓고땡, 섰다 등등의 화투 게임을 즐기는 습관에 푹 절어 있으면서도 의붓딸한테 늘 잔정을 베풀었으나 언제 한 번 주머니가 두둑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사주에 역마살이 끼어 아무리 살풀이굿을 해봤자 소용이 없는지라 한 곳에 느긋하게 주질러 앉아 살지를 못했다. 이리하여 후미꼬는 여덟 살에 방랑을 시작해 이십 대 중반에 이르러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일본 곳곳을 전전하며 세계적 불경기를 당한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에 스스로 돈을 벌어 사는 와중에 고독과 굶주림과 약간의 부적응 적 증상에 시달리면서도 시와 동화와 소설 작업을 멈추지 못한다.
 역마살 낀 부모와 함께 방방곡곡을 다니며 행상을 했는데 어떻게 시와 동화, 소설을 쓰느냐고? 열세 살이 되자 후미꼬는 여공생활을 시작한다. 이때 정기적으로 돈을 벌면서 고등여학교를 다녔다고 하는데, 책에서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정에 관해서 자세하게 기술해놓지 않았다. 원래 이야기책 읽기를 좋아하던 후미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책을 섭렵한 것 같다. 독서의 즐거움이란 것이 사실 중독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라, 이후 (작가 말고 책의 주인공으로서의) 후미꼬가 지독하게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도중에도 틈틈이 헌책방을 들락거리며 책을 사고팔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때 읽은, 노르웨이의 국가대표 소설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십여 년이 지나면 ‘바이킹의 후예들이여, 나치 군대에 입대하여 성전에 목숨을 바치자!’ 라고 침을 튀며 부역을 한 죄를 죽을 때까지 씻지 못할 크누트 함순이 쓴 <굶주림>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작중 수시로 등장하는 소설이 바로 <굶주림>. 근데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은, 사흘 굶어 담장 넘지 않는 인간 없고, 칼 안 빼는 인간 없다는 진리. 함순의 소설 <굶주림>에서, 계속되는 결식으로 영양실조가 극심해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지는 와중에도 우연히 들어온 현금을 자신보다 더 불쌍해 보이는 노파에게 줘버리는, 지극히 위선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나는 그 장면이 결코 고결하거나 우아하거나 명예스럽게 읽히지 않았다. 작가 자신으로 짐작되는 <방랑기>의 주인공 하야시 후미코는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의 주인공 ‘나’보다 훨씬, 훨씬 인간답다. 후미꼬는 물론 지극한 쪽팔림을 무릅쓰고, 조금의 안면만 있는 그냥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어 일단 뱃속에서 굶어죽을 판인 회충을 기아선상에서 구해주고, 단 한 번도 빈 돈을 갚았다는 걸 보지 못했다. 밥을 벌기 위하여 별의 별 직업을 전전하며 나중엔 카페 여급으로까지 전락하여 손님들이 사는 저질 위스키를 단번에 열 잔을 들이키는 쇼를 시전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끝까지 가는 거다. 몸 파는 일만 빼놓고. (몸을 팔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기술해놓지 않았을 뿐.) 이게 정상 아냐?
 일기 형식의 소설. 그런데 고독과 굶주림에 관한 많은 소설 가운데 사실 별 스토리가 없는 이 책을 읽는 건, 어쩌면 특이한 문장들 때문일 수도 있다. 문장의 기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들이 뭉쳐 한 인격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참으로 쓸쓸하게 표현하는 것. 작가가 소설가이기 전에 시인이라서 그런지 곳곳에 독자의 염통이 뚝 떨어지는 듯한 감성의 지뢰를 묻어 놓았다. 아름다운 책이지만,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독자에 따라 좀 궁상맞게 느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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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위로 떨어지는 편지 창비시선 316
이기인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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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을 읽기 전에 이기인이란 시인의 이름을 들어본 적 없다. 그리하여 그가 1967년 인천 생이며,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는 책의 앞날개 소개말만 읽고, 어쨌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니까, 먹고 살만 한 시인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런 전제로 시집을 여니 첫 페이지에 “최하림 선생님의 영전에 바칩니다.”라고 헌사가 쓰여 있어, 서울예대 문창과에서 선생을 사사하고, 시집이 나온 2010년에 졸한 스승을 애도하는 시도 있겠다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시를 읽어보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오랜만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당신을 만났지요
 나는 당신의 등뼈를 본 첫번째 사랑이지요
 당신의 등뼈에 붙은 살이 얼마나 얇은지 알고 있는 사랑이지요
 그렇게 얇은 삶이 바람에 견딘 것을 알고
 손가락으로 당신의 등을 더듬어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과
 뒤돌아서서 날 깨우쳐주신 마른 가슴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내가 처음부터 만질 수 없었던 당신의 몸은 바람이 부는 동안
 내가 사는 골목까지 날아와 기다렸지요
 당신은 그때 젖은 시집 속으로 부끄러워하는 몸으로 들어왔지요
 혼자서, 납작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어줄까요
 불빛처럼 아름다운 당신의 이야기를 밤새 읽다가, (전문. 띄어쓰기가 어긋나지만 원문에 따랐음. 이하 인용시도 같음.)



 시는 은유의 잔치. 시인 이기인이 은사 최하림의 진짜 등뼈를 쓰다듬어본 적이 있을까, 없을까. 사우나 같이 가봤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선생의 시를 가슴으로 읽었다는 은유로 이해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은사의 시를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으니까. 매우 아름다운 시다.
 내가 시집을 고르는 방법은 언젠가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다. 요즘 인터넷 책방에서 미리보기 기능을 써 앞쪽에 있는 시 몇 수를 읽고 마음에 들어야 구매하는 것. 이 책 역시 첫 번째 시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가 마음에 들어 사게 됐다.
 그런데, 시집을 읽어가면서, 첫 번째 실린 시가 내 생각처럼 문창과 은사 최하림을 기억하는 헌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 정철의 <관동별곡>을 천하에 둘도 없는 연애 시로 읽은 거하고 비슷한 기분이다. 위의 시에서 말하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만난 ‘당신’은 하필이면 시집을 낸 2010년에 죽은 은사 최하림일 수도 있지만, 이후 고르게 등장하는 시적 대상, 과일장수, 장발의 지저분한 거지, 청소부, 철거지역 주민, 건축노동자, 외국인 노동자, 공장 노동자, 나이 든 농부 등등 세상의 모든 약자들일 수도 있다. 뒤에 해설을 읽어보니 이기인의 처녀시집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에서 ‘ㅎ방직공장’ 여성 노동자를 소녀로 호칭했다가, 이제 처녀시집 속의 소녀들이 시인과 함께 나이를 먹어 각계각층의 약자가 되어 있어 그들을 노래한다는 의미로 씌어있다. 암만해도 해설이 타당하다.
 예를 들어 이런 시 한 번 읽어보자.



 소금꽃


 그날에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지 못한 것은 공장에 피어 있는 꽃 생각 때문이네
 오직 나를 위해 피어난 꽃그늘이 있는데
 그 꽃들은 생일도 없이 한줄기 꽃으로 혼자서 피어 있네
 일하는 사람의 젖은 작업복을 보면서 한나절을 걱정한 적 있는데
 그의 등에 소금꽃이 하얗게 핀 걸 나중에 나중에야 보았네
 등에 핀 꽃을 보지 못하였던 이, 밥풀 냄새 나는 젖은 가슴만을 안고서
 그날에
 버석버석한 웃음 흘리며 한송이 꽃처럼 흔들, 흔들거렸네
 그날에 그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이는
 공장에서부터 따라와 그의 등에 미안하게 앉아 있는 하얀 소금꽃이었네  (전문)



 아름다운 시다. 근데 좀 이상하다. 시인은 관찰자에 머문다. 현장에서 함께 노동하는 운동성을 시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 왜 그럴까. 21세기라서? 땀이 말라붙어 등판에 남아있던 소금의 결정이 셔츠에 그대로 남아 있는 채 동료의 생일 축하 자리에 가는 일은, 공장에 샤워 시설이 없다는 뜻이다. 아직도 그런 현장이 남아 있을까? 만일 있다면, 그런 공장에서 기꺼이 노동을 하는 노동자 가운데 우리나라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이 시에서는 조금도 밝혀주지 않지만 나는 등짝에 소금꽃을 피운 채 생일 파티에 참석한 노동자가 외국인이라는 데 만원 건다. 그래서 시의 운동성이 없는 걸까? 시를 책상 위에서 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만국의 노동자라는 건 그냥 구호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라서?
 내 생각으로는 아니다. 책 뒤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면, 그동안 시인의 아이가 심장수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곤궁과 고뇌를 겪으며 한줌 시를 소망’했을 것이다. 이런 처지에 어찌 운동성을 유지하는 시를 쓸 수 있었겠는가. 다른 이도 아닌 ‘자기 자식’의, 다른 수술도 아니고 ‘심장수술’을 견디는 스트레스 속에서 시적 운동성을 발휘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래 시인은 흔히 ‘용산참사’라고 불리는 용산 4구역 철거현장을 노래하면서도,



 달의 검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밤


 검어진 용산을 지나가는 버스가 멈춘다 불이 난 망루에서 함께 내려오지 못한 이의 외투와 신발이 한쪽으로 치워졌다 그들의 불안이 치워졌다 그들의 불면이 깨끗하게 치워졌다 버스에서 내린 검은 얼굴들이 한주먹 파편처럼 길바닥으로 쏟아져나왔다 검게 그을린 뒷모습이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져버렸다 뜨거운 망루에서 뛰어내린 달빛이 이봐요 저기요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타버린 집의 허공에서 살아남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당신의 이야기는 저 높은 곳에 살았잖아요 당신의 이야기는 옛집에 지금도 살아요 불면의 잠옷을 차려입은 아이들이 긴 밤을 돌아다니며 달의 쪽방으로 기어들어가 호오 입김을 분다 뜨거운 계단에 주저앉은 아빠들의 이야기는 숯처럼 검은 눈물을 흘린다  (전문)



 아직도 식지 않은 계단에서 검은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 내일의 새로운 싸움을 약속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시를 전형적인 ‘먹물시’라고 칭한다. 지식인 또는 그와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이 약자나 일반적으로 약자로 인식하고 있는 계급의 주장에 동의하고, 지지하는 성격을 지녔지만 그들의 싸움엔 반 발짝 거리를 두는 시.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시인이라고 별 수가 있는 게 아니니까. 시를 써서 먹고 살려면 월간 수입도 아니고 연간 5백만 원 벌이로 버틸 수 있는 깡다구가 있거나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한단다. 어쩔 수 없이 시인 역시 소시민이니까. 게다가 노조 가입도 못해 누구한테 구조요청을 할 수도 없는 백척간두에서 물구나무를 선채로 사는 인간들을 우리는 시인이라 일컫는다.



 쌀자루



 마루 위에서 뒹구는
 쌀자루 흰 평구리를 부축하던 아내는 허리가 아파서 누워버렸다
 동전을 모으는 아이는 빈 맥주병을 들고 나가 30원을 받아들고 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낮인데도 형광등을 켜야 신문을 읽을 수 있다니
 나는 슈퍼로 달려가서 맥주병은 50원인데 왜 30원이냐고 따졌다
 아이는 슈퍼 주인처럼 옆에 서서 이 동네에서는 모두가 그래요 한다
 30원을 먹은 돼지저금통의 내장은 그렇게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날 나는 돈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미발표 시의 제목을 바꾼다
 ‘나는 미쳤다’라는 시의 제목을 ‘처음에 나는 미치지 않은 아버지였다’
 가난하지만 시가 변명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은행에 가져갈 고지서를 모으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한때는 계산이 미숙한 것까지를 좋아했던 아내는 슬슬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호기심 많은 아이는 돼지저금통을 찰랑찰랑 흔들다 잠에 빠지고
 아이가 갖고 싶은 지구용사 썬가드 로봇은 꿈속에서 변신을 시도할 것이다


 아내가 겨우 방문을 열고 나와 쪼그려앉았다
 자루에서 끌려나온 쌀은 오늘 저녁에도 끓어넘친다
 나는 꺼진 촛불처럼 있다가 밥상으로 달려가 정다운 수저 네 벌을 차례대로 눕힌다
 아이들 것은 그렇다 치고 저 잘난 나의 수저는 왜 이토록 입이 큰가


 온 가족을 모아놓고 첫술을 떠야 하는데 첫술을 떠야 하는데
 어떻게 밥을 먹어야 하는지 씹어야 하는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문)



 시인 자신이 사회적 약자다. 미발표 시들이나 써 모아놓는 가난한 가장이 어떻게 다른 약자들을 위해 시 속에 운동성을 삽입할 수 있나. 나폴레옹이 했던 말이 진리다. 승리는 위stomach에서 나온다는 거. 운동도, 혁명도, 진보도, 문학도 밥 먹은 후에나 가능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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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레이즈 엔드 1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77
포드 매독스 포드 지음, 김일영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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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권 구입가 93,000원. 합해서 정확하게 1,600쪽의 장편소설. 완독에 걸린 시간은 닷새 반나절. 93,000원이면 내가 즐기는 진로 골드 25% 소주가 70병이다. 두 달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걸 닷새 반 만에 홀랑 없애버려? 그렇게 하시라. 이게 네 권, 총 10부, 1,600쪽을 방금 전에 다 읽은 정직하지만 짧은 감상이다.
 포드 매독스 포드는 문예출판사의 “문예 세계문학선” 시리즈에서 놓치면 아쉬운 작품인 <훌륭한 군인>을 읽고 단박에 매료되었던 작가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신사계급들을 스위스의 한 요양시설에 모아놓고 등장인물 각각이 서로 처한 갈등과 갈증을 매력적으로 묘사해놓은 것에 완전히 넘어가버렸었다.
 <훌륭한 군인>은 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5년에 출간해 원 제목이었던 “가장 슬픈 이야기”를 바꾸어야 했던 반면, 9년이 지나 1924년에 집필을 끝낸 <퍼레이즈 엔드>는 크게 나누어 1권에는 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2권은 처음 참전을 하고 전쟁신경증을 판정받아 영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전장에 복귀할 때까지, 3권은 복귀한 전장부터 1918년 빼빼로 데이인 11월 11일 종전기념일 장면까지, 마지막 4권은 전후 다시 찾은 삶에 관하여 묘사를 하고 있다. 누가 1차 세계대전을 포함해 전쟁 전후까지를 아우르는 작품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퍼레이즈 엔드>보다는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작품 <티보가의 사람들>을 권하겠지만, 이 책도 만만하지 않은 아우라를 가지고 있다고, <티보가....>를 읽은 다음에 기회가 또 있으면 읽어보라고 권하겠다.
 긴 장편소설이니 당연히 스토리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책은 영국의 티전스Titjens 가문의 네 번째 아들 크리스토퍼의 삼각관계를 그린 이야기이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전혀 감흥이 오지 않는다. 20세기 초반, 1910년대 크리스는 아직도 17, 18세기 적 의식인 신사도와 명예에 목을 매고 사는 마지막 토리주의자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당시 토리주의자를 21세기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진정한 꼰대’ 정도? 또는 ‘진정한 보수’? 당연히 여자가 등장한다. 삼각관계니까. 큰 키에 늘씬한 외모와 천성적으로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경국지색의 미인 실비아. 그러나 전형적인 팜 파탈. 크리스의 법적 아내다. 드디어 막이 오르면 크리스는 잉글랜드라는 섬에, 실비아는 대륙에 있어, 부부 사이엔 북대서양이 가로막는 형상. 영국 육군에 대단한 겁쟁이 장교가 하나 있었으니 이름을 ‘퍼론’이라 하고 계급이 소령이었는데, 생긴 건 뭐 그리 나쁘지 않아 실비아가 퍼론 소령을 옆에 끼고 무도회에서 야반도주(책에선 ‘야간도주’)를 벌였던 것. 이를 안 실비아의 총명한 어머니 세터스웨이트 부인께서는 딸의 불륜 소식이 런던 사교계에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요양 차 스위스로 떠나며, 조만간에 딸이 합류하여 자신을 간호해 줄 것이란 소문을 퍼뜨린다. 그러나 그런 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법.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게 된다.
 그러면 실비아는 왜 크리스의 이마에 뿔이 돋게 했을까. 실비아가 아직 결혼 전일 때 드레이크라고 하는 유부남하고 정을 통해왔었다. 20세기 초반에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생기면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임신. 자신이 임신을 한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한 실비아는 자기보다 나이어린 크리스토퍼 티전스를 꼬드겨 결혼을 하고 아홉 달을 채우지 못한 상태에 아들 마크 티전스 2세를 출산한다. 그래 우리의 크리스토퍼 역시 법적으로는 완벽하게 자신의 아들로 호적에 오른 아들이 자신의 소생인지, 아니면 공무원인 자신의 신분기록에 형편없는 평판을 적어놓은 드레이크의 아들인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이게 그리 간단하지 않는 이유는, 크리스가 형이 셋 있지만, 첫째 마크는 프랑스 무용수 출신 여성과 아이 없이 동거 중이고 여성은 이미 출산할 수 없는 나이에 처했으며, 둘째와 셋째 형, 그리고 누이동생은 인도와 인도 부근의 바다 위에서 군인과 간호병의 신분으로 전사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작품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등장하는 ‘그로비’ 지역의 저택과 철광산을 포함한 대지의 상속권이 크리스의 아버지 마크에서 자기 큰 형 마크에 이어 자기 아들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은 마크 2세로 넘어가게 되기 때문. 이런 과정 속에 실비아와 크리스의 사이가 좋을 수 없는 건 세상 사람이면 다 이해할 수 있을 터. 크리스는 천성이 신사라 누구의 부탁도 쉽게 거절하지 못해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많은데, 이 가운데 미치광이 두쉬민 목사의 아내도 포함되어 있으나 목사 부인은 크리스의 친구인 맥마스터란 남자와 눈이 맞고 나중에 동거를 거쳐 혼인까지 하게 된다. 실비아는 이 사실을 악의적으로 비틀어 런던 사교계와 상류층에 자신의 남편 크리스가 두쉬민 목사의 불쌍한 아내, 이디스 에텔 두쉬민과 불륜관계라고 거짓 선전을 하고 다닌다. 경국지색의 미모와 세련된 매너, 훌륭한 치장을 한 귀부인의 우아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말을 누가 있어서 부인하고 의심하겠는가. 런던의 거의 모든 사람은 크리스가 정신 빠진 인간이고 실비아가 불쌍한 피해자인 것으로 단정을 한다. 심지어 아버지의 친한 친구의 딸 발렌타인 워놉 양을 구워삶아 출산까지 했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퍼뜨려, 이 소식을 믿은 성인聖人같은 어머니는 심적 타격을 받아 죽어버리고, 역시 거짓말을 사실로 이해하고 있던 큰 아들 마크를 찾아와 사실 여부를 확인한 아버지 역시 심상해 자살을 해버린다. 이 정도면 실비아야말로 서양 문학사에 기록할 만한 팜 파탈 정도 아닌가.
 처음부터 비겁하고 찌질한 퍼론 소령을 사랑해 야반도주한 실비아가 아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 남편 크리스의 마음을 상하게 하려는 것. 애초 목적에 모자람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실비아는 잠깐 동안의 애인 퍼론 소령을 버리고, 어머니가 평생 의지하던 콘셉 신부와 함께 머무는 스위스의 요양소에 가서 콘셉 신부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하지만 실비아 남편이 다른 여자에게 미쳐 쫓아다니게 될 때 실비아의 삶은 지옥으로 변할 거요.”
 원래 소설에서 불길한 예언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 실비아는 사실 남편 크리스토퍼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얻는데 실패함에 따라, 사사건건, 가는 곳마다, 심지어 전쟁터까지 쫓아와 남편에게 치명적 불행을 안기려 하는 것. 실비아한테 나가떨어진 크리스토퍼 앞에 등장하는 아가씨, 발렌타인 워놉 양. 실비아의 선언이 진실이라면, 성 마리아 이후 최초로 순결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여인. 이이는 전직 최고의 라틴어 전문가였으며 크리스의 아버지와 막역한 관계였던 죽은 부친과, 17세기 이후 가장 훌륭한 소설을 쓴 어머니를 둔 젊고 가난한 아가씨. 크리스토퍼와 발렌타인, 둘의 순결한 사랑은 오랜 군불을 때듯 묵지근하니 달아오르는데, 모든 인간이 자기 같은 줄 아는 실비아는 콘셉 신부의 예언대로 곧바로 지옥에 빠져 점점 더 극악한 고통을 크리스에게 쏟아 부으려하는 점입가경에 이른다.
 꽤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은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더 이상은 직접 읽어보시라 이쯤에서 말겠다. 1권 1부 정도만 가비얍게 언급했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사실 포드 매독스 포드의 작품을 한 마디로 하면, 유구하고 심심하다. 그러면서도 독자를 깊게 몰두시키는 성격묘사 같은 것이 탁월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든다. 딱 두 편을 읽었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는 게 말도 안 되는 거 알지만, 만일 당신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전쟁터나 사건들을 기대한다면 후회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좋은 소설은 근본적으로 심리소설 아닐까 싶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하고, 영향을 받으며, 영향을 끼치는지 보고 싶은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할 만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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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6-1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일로 이렇게 자세하게 줄거리를 밝히실까! 하고 생각하면서 줄거리 부분은 띄엄띄엄 읽었는데, 이게 고작 1권 1부 정도까지의 스토리군요! 기대됩니다. 이 작품. 그런데 책값이 만만치 아니하여,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어야겠군요.

Falstaff 2019-06-10 14:00   좋아요 0 | URL
녭. 현명한 선택입니다.
이런 책은 도서관 대출로 아주 적격입니닷!!! ㅋㅋㅋ
 
느릅나무 아래 욕망 열린책들 세계문학 171
유진 오닐 지음, 손동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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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닐의 대표작 <밤으로의 긴 여로>를 단장의 슬픔으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느릅나무 아래 욕망>을 이제야 읽은 이유는 에드워드 토머스가 작곡한 동명의 오페라를 진짜 재미없게 들어서다.

 

 

 조지 매너헌이 런던 심포니를 지휘하고 당시 미국 국가대표 남성 성악가였던 제리 해들리와 제임스 모리스가 각각 에벤과 케벗 씨 역을 했음에도, 작곡가가 각 소절, 거의 모든 소절을 레가토처럼 쓸데없이 길게 끄는 바람에 어처구니없게도 원작 자체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끄게 만들어버렸다. 물론 오페라도 원작과 마찬가지로 저 까마득한 선배 작가들이 만든 <페드라와 이폴리트>, <메데이아>에서 조금씩 재료를 가져와 의붓 엄마와 아들 사이의 성적 접촉, 유아 살해 등을 다루고 있지만, 하여간 오페라는 이번에 읽은 원작과 비교하자면 한참 재미없었다. 그래 지금 뭐라 후회하고 있는가 하면, 아 씨, 진작 읽을 걸.
 엇, 이제 보니 책의 주제를 노출해버렸잖아?
 나는 <밤으로의 긴 여로>의 독후감을 딱 한 줄 썼다. “피를 토해 쓴 백조의 절창”이라고. 이거 말고 더 할 말이 없었다.
 <밤으로의 긴 여로>도 그렇고 <느릅나무 아래 욕망>도 그렇고, 둘 다 이이의 절창이다. 도무지 어떻게 반론을 펼 여지가 없을 만큼의 욕망과 사랑과, 집착과 광기가 몰아친다. 이 책을 이미 읽으신 분은 틀림없이 동의하시리라 믿는다.
 그래서, 다 읽고나면, 심정적으로, 후달린다.
 피곤하지만 않으면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의 희곡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 뭐랄까, 만만하지 않은 부담감이 한 방에 확 밀려드니 각오하고 읽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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