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플로야 을유세계문학전집 91
샬럿 대커 지음, 박재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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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초반인 1806년에 출간한 작품. 작가 샬럿 대커가 1771년 말과 72년 초 사이에 태어났다. 조금 차이가 나지만 책을 읽으면서 더불어 생각나는 영국 여류 작가가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 이 사람들의 작품을 흔히 ‘고딕소설’이라고 한다. <조플로야> 역시 고딕. 한 마디로, 조금 괴기스럽다.
 15세기가 저물어 갈 무렵 베네치아에 로레다니 후작 가문이 있었는데, 후작은 17년 전에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라우리나 디 코르나리 양과 혼인을 해서 연년생으로 아들 레오나르도와 딸 빅토리아를 두었다. 라우리나 코레다니 후작부인에겐 자신이 언제나 찬사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 허영심, 자부심이 과도한 것이 흠이었다. 후작부인이 열다섯 살에 스무 살 먹은 로레다니 후작을 만나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낳아 이제 자식들이 사춘기의 문턱을 넘어설 때까지, 라우리나 부인은 그저 사치를 떠는 일 말고 별로 생각할 거리가 없었다. 심지어 정조를 지켜야 하는 이유도, 노력도. 왜냐하면 감히 후작부인을 유혹할 정도로 간이 부은 사내가 베네치아에선 없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후작 내외는 만날 가면무도회와 파티 등의 풍요와 경박함 속에서 사느라 자식들을 제대로, 19세기 초반 작품이니 그때 기준으로 ‘사랑의 매’를 전혀 쓰지 않고 그냥 방치 비슷하게 키우고 있었다. 이쯤 되면 독자는 이 책이 한 귀족 가정의 불행한 연대기가 될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 있다. 불행한 복선은 행복한 전망보다 언제나 훨씬 더 눈에 띄는 것이라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후작의 저택에 하루는 로레다니 후작의 절친한 친구인 부름스부르크 남작의 추천서를 가진 젊고 잘 생긴 독일인 아돌프 백작이 방문하여 장기간 투숙을 하기에 이른다. 그림이 그려지시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도? 아돌프 백작은 후작부인이 결혼할 때의 나이를 이미 지난 후작 영애 빅토리아와 백만 촉광이 넘는 눈빛을 교환하고 어느 달빛 교교한 날 밤 도금향 나무 아래 깊고 깊은 키스를 나눈 후 살그머니 빅토리아 양을 자빠뜨리면, 아, 너무 식상한 연애 이야기에 그칠 것이라서, 따님 빅토리아 대신 결혼 후 17년 동안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던 라우리나 부인과 죽기 살기의 욕정어린 연애를 벌이고 만다. 15세기 말이면 대강 연산군 재위 초기 정도. 당시 유럽에서도 귀족 집안에 아내가 바람이 나면 할 수 있는 일이 야반도주 말고는 별로 없었나보다. 아돌프와 아이들 엄마 라우리나 역시 야반도주를 해버리는데, 깨끗하게 도망가서 자기들끼리 지리산 옆에 터를 잡고 화전을 지어먹든지 어쨌든지 어쨌든 알아서 살면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겁도 없이 베네치아를 벗어나지 않고 거리를 배회하는 거였다.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만난 로레다니 후작과 아돌프. 당시의 규범대로 이들은 곧바로 단도를 꺼내들고 결투를 벌였으나 일순간에 흥분해 정신이 몽롱한 후작이 냉정한 아돌프를 당해낼 수 없어 치명상을 입고 결국 죽어버린다. 아들 레오나르도는 엄마가 도망을 가버리자마자 집안 꼴 좋~다, 한 마디 하고 가출해버린 상태에 이제 빅토리아 홀로 남을 수밖에. 이 때가 기회다 싶은 엄마와 엄마의 정부가 빅토리아를 까다롭고 완고하기 짝이 없는 늙은 친척에게 맡겨버리고 다시 둘 만의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버리는데, 여기까지가 소설 <조플로야>의 시작부분.
 나도 여기까지 읽으면서 왜 제목을 ‘조플로야’라고 했을까를 많이 궁금해 했다.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베네치아. 그럼 무대는 아니고, 사람 이름? 이탈리아에서 ‘조플로야’라면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올 거 같은데 왜 이리 등장이 늦지? 걱정하지 마시라. 드디어 작품의 절반, 200쪽이 넘어가면 빅토리아가 꾸는 꿈 또는 환상 속에서 무어인 노예 또는 하인 조플로야가 등장한다. 무어의 귀족출신이긴 하나 15세기 말에 있었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져 엔리케 씨의 하인으로 들어와 있던 것. 엔리케는 빅토리아가 우여곡절을 겪고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 베렌차 씨의 동생. 아이가 아버지를 빼닮았을 때 흔히들 “씨도둑은 못 한다.”라고 말한다. 그럼 엄마를 빼닮았을 때는 뭐라 그러나? “알 도둑은 못 한다.”라고?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하여간 빅토리아가 완전히 엄마를 빼닮았다. 새색시 빅토리아가 그만 시동생 엔리케한테 홀딱 반해버려 전전긍긍하다가, 심지어 열일곱 살이나 더 먹은 늙은 남편 베렌차가 무슨 사고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삼신산 신령님께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딱 이 즈음해서 빅토리아의 꿈 또는 환상 속에 흰 터번을 둘러쓴 존귀한 몸가짐을 가진 거구의 흑인 사나이 조플로야가 등장해, 빅토리아가 원하는 것을 거의 다 들어주기 시작한다. 어디서 읽어본 내용 같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메피스토펠레. 조플로야가 바로 19세기 초반에 다시 등장한 메피스토펠레, 바로 그다. 그 족속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원하는 바를 다 들어주면서 결코 그 행위를 통해 만족이나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피비린내가 폴폴 나지만 다른 책들보다 역겹게 읽히지 않는 건, 19세기 초반의 고딕소설답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한 이십 년쯤 더 흘러 19세기 프랑스 소설가들이, 예컨대 알렉상드르 뒤마 선생이 <조플로야>를 한 다섯 권 정도의 분량으로 쓴다면 정말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19세기 초 영국에선 왜 이리 음산한 이야기를 많이 만들었을까? 안개 많이 끼는 날씨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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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위의 세계 - 2012년 제4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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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했다는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소설가. 1996년. 그러면 내가 정영문이란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데 조금은 타당한 이유가 된다. 먹고 살기위해 가장 바쁘게 지냈던 시절이다. 1년 후엔 국제화, 세계화를 부르짖던 한반도에 외환위기가 닥쳐 회사로부터 당신이 희망퇴직을 희망하는 것이 회사의 희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남들이 보기엔 어느 때보다 더 바쁘지만 사실은 바쁜 거 없이 바쁜 척하기에 바빴던 시절이 도래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자기 혼자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하는) 어느 직장인이 있어 소설 따위를 읽어볼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 내가 아는 정영문은, 여태까지도 ‘정영목’인 줄 알았던 책 존 파울스의 <마법사>를 번역한 이라는 것밖에 없었는데, 글쎄 이이가 소설을 썼다는 거 아니야?
 <어떤 작위의 세계>. 어떤 책보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 어울린다. 난 이 책 딱 한 권 가지고 정영문을 좋아하기로 작정했다. 아직 다른 책을 검색해보지는 않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적어도 한 권은 더 읽을 생각이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이 책은 2010년 봄과 여름 동안 대산문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물며 쓴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에 가까운 체류기라고 한다. 작가의 표현대로 ‘표류기’라고 하면, 이 작품이 5년 전 캘리포니아를 방문해 멕시코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전 애인 커플과의 만남을 기억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두 계절을 보낸 스토리는 있을지언정, 그것 이외의 어떤 플롯도 보이지 않는다. 즉, 기존의 소설을 생각하면서 어떤 서사를 기대한다면 애초에 틀린 선택이란 말씀.
 5년 전에 ‘나’는 캘리포니아 황무지에 있는 전 애인의 별장에서 전 애인의 멕시코 애인을 포함해 세 명이 눈을 뜰 때부터 다시 잠들 때까지 데킬라를 퍼마시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우두커니 정물처럼 서 있는 용설란을 향해 권총을 쏘아 갈기고, 벌거숭이로 다니는 멕시코 남자의 (당연히 생식기를 포함한) 알몸을 감상하고, 빈둥거리기조차 힘들어지자 함께 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악명 높은 짙은 안개 속으로 쳐들어갔다가, 히피의 21세기 버전일 수도 있는 호보Hobo족을 만나 담배를 나눠 피우다가 전 애인 커플을 떠나보내고 홀로 샌프란시스코에 남은 적이 있었다.
 근데 그건 그걸로 끝난다. 5년 전의 기억은 5년 전의 기억일 뿐, 전 애인이나 전 애인의 애인이 ‘나’에게 베풀었거나 ‘나’가 베푼 의식주 및 여흥 또는 유흥, 심지어 용설란을 향해 불을 뿜던 권총, 용설란에다 힘찬 오줌줄기를 뿌리던 ‘나’의 전 애인의 현 애인의 비뇨기 등이 5년 후인 2010년 봄과 여름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도 않고, 2010년 봄과 여름에 ‘나’가 다시 다른 호보를 만나거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 관심을 쏟거나 금발의 조그만 여자 아이에게 복수심을 품거나, 샌드위치에 뿌려진 마요네즈를 걷어내기 위해 깨지락거리는 일과 아무 관계가 없다. 정영문 혹은 작가 혹은 <어느 작위의 세계>에 등장하는 ‘나’가 2010년 봄과 여름에 걸쳐 샌프란시스코와 감깐 동안의 하와이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그냥 쓴 작품.
 이런 의미에서 <어느 작위의 세계>는 작가의 말처럼 ‘표류기’라고 보기 힘들다. ‘나’는 대산문학재단의 도움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자발적으로 도착했으며, 애초부터 그곳에서 목적을 갖고 하다못해 금문교 위 서쪽에서 666미터 지점에서 태평양으로 떨어져 죽겠다는 각오 같은 것도 하나 없이, 초장부터 멕시코에도 우드스톡 같은 히피문화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둥의 힌트를 주면서 오직 하나, 일 하지 않기, 노력하지 않기, 심지어 빈둥거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에도 도전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의 무위의 지경에 도달하기 위해 도를 닦는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야? ‘나’의 두뇌는 마음과 달리 세밀함과 광대함 사이에서 자유로이 말장난을 하고, 근거 없는 무의미들을 탐색한다. 물론 탐색에 성공을 했는지 아닌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지만 어쨌든 말장난에 관한 한 무난한 성공을 거두어 읽는 이로 하여금 간혹 얼굴을 구기며 웃게 만들기도 한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자신이 아는 것을 과장하지도 않고, 뽐내지도 않으면서 주위에 실재하거나 사람의 심리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정확한 표현을 해내는 정영문이라는 작가. 좋다. 기꺼이 또 다른 책 한 권을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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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0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휴가 때 이 책을 들고 갔다가
결국 못 다 읽은 기억이 납니다...

무작위의 작법이라고나 할까요.

저자가 번역을 맡았던 이창래 선생의
어떤 모습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Falstaff 2019-08-05 13:53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전형적으로 독자의 취향에 의해 호, 불호가 갈릴 거 같더라고요. ㅋㅋㅋㅋ
맞고 안 맞고는 완전 팔자소관입지요. ^^;;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시선 303
강성은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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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지성사에서 낸 시집 <Lo-fi>가 작년에 나와 주목을 받았다. 그래 나도 읽어볼까 싶었는데, 이왕 강성은을 읽는다면 처녀시집을 먼저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수 있을 거 같아 집어든 것이 창비에서 나온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첫 느낌은 이제 시집에 관해서 창비와 문지 사이의 격벽은 없어졌구나, 였다. 강성은이 출판사를 옮겨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집을 낸 것도 그럴 듯하다.
 그런데 정작 이 시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건 “동화연산 시기계장치의 탄생”이란 제목을 단 시인이자 건축평론가인 함성호의 해설. 조금 길지만 첫 문단을 그대로 복사해보겠다.


 “강성은이 옹호하는 세계는 없다. 강성은은 아무것도 옹호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부정(否定)하고 있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不定)한다. 너무  많은 해(解)가 나올 수 있는 방정식을 수학에서는 부정(不定)이라고 한다. 이 수학적 의미를 그대로 빌려와 설명한다면, 세계관을 부정(不定)한다는 말은 세계관이 없거나 무수히 많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무엇을 부정(否定)한다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거나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성은이 이 정해지지 않는 이야기의 방식을 자신의 시적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함성호가 방정식의 예를 들어 설명을 했으니, 나도 집합론을 써서 말을 좀 보태자면, 부정(否定denial)은 ‘어느 것도 택하지 않거나 정하지 않는다는 것’보다는, 자신이, 지목하고 있는 특정 집합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의미가 더 크고, 부정(不定)은 두 집합이 같은 집합인 경우다. 발음이 같은 부정denial과 부정indefiniteness를 써서 말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그렇지, 위의 문단은 짧게 한 문장으로 끝낼 수 있다. “강성은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不定indefiniteness)한다.” 해설의 제목도 매우 아리송하다. “동화연산 시기계장치”가 도대체 뭐야? 함성호라는 그래도 이름이 난 시인은 정작 한문을 써야 할 때 쓰지 않아서 동화연산이 뭔지, 시기계장치가 뭔지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동화연산? 첫 문단에 방정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동화연산同化演算이라고 억지로 생각해줄 수 있겠지만, 시기계장치는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동음이의어 否定과 不定과 함께 제목, “동화연산 시기계장치” 자체가 요새 시인이나 요새 평론가, 답다, 다워. 좋다. 강성은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한다. (이제 한문은 안 써도 되겠지.) 이게 무슨 뜻인가. 독자가 시와 시어를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세계관이 저마다 다르다, 또는 다를 것이라는 뜻일까? 그렇게 이해하고 있겠다. 참고로 부정이란, 방정식의 풀이가 분자, 분모 둘 다 영zero이 될 때, 함수에선 두 곡선이 같은 곡선일 때 만나는 점의 개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 시집이 나온 시기가 2009년. 시인의 나이 37세. 시는 전체적으로 그로테스크하다. 시는 당연히 시어 속에 많은 비유와 은유를 포함해야 하겠지만, 내가 ‘요즘 시’를 읽지 않는 이유가 바로 과도한 비유와 은유로 인해 만연하는 시적 애매모호함 때문이다. 즉, 강성은 한 명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요새 시들 속에, 자의식이 시인 자신의 내적 표현으로 고착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도무지 시적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강성은도 당연히 이들의 집합 가운데 한 명으로 스스로가 시집의 첫 번째 시 <세헤라자데>에서 밝히듯,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중략)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후략)”들을 마구 쏟아내겠다고 선언한다. 책 뒤표지에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이를 두고 “우리 시대의 세헤라자데는 하룻밤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초현실적이고 부조리하기도 하고 인과율이 파괴된 즉흥성과 기발함으로 가득 차”있다고 촌평을 한다. 근데 내가 시집을 읽고 해설이나 촌평을 들여다보니, 좀 과한 칭찬이다.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내 머리털에 기름을 끼얹고 성냥을 그어요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내 머리는 불타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불 속으로 싱싱한 장미꽃을 피워올리지요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소리질러요 환호해요

                                  <서커스 천막 안에서> 부분


 남편이 마술사인데 아내인 내 머리털에다다가 기름을 끼얹더니 성냥을 긋는다고? 여기서 조금 더 진행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 “줄기와 가시만 남은 내 머리 속에 신비한 향신료를 넣고 휘휘 저어요 /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내 머리는 부글부글 끓어넘쳐요”로 넘어간다. 자, 이제 이해하시나? 시인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당연히 남편, 마술사, 기름, 성냥을 긋는 행위, 불, 장미꽃, 신비한 향신료, 끓어 넘침 같은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어느 대상이나 행위, 아니면 시인의 생리 전 증후군쯤에 겪은 기분을 은유한 것이리라. 그런데 그걸 이리 써 놓으면 누가 아느냐는 말이지.

 우리는 달려간다 중세의 검은 성벽으로 악어가 살고 있는 뜨거운 강물 속으로
 연필로 그린 작은 얼룩말을 타고 죄수들의 호송열차를 얻어타고
 (중략)
 죽은 군대의 첫 전쟁터로 우리의 발자국이 잠든 사원으로
 우리는 우리를 읽지 못해 장님이 되는 밤
 어둠속에서 총으로 서로의 심장을 정확히 쏘는 마술
 톱으로 잘라낸 피투성이 몸을 다시 이어붙이는 마술
 (후략)
                                        <오, 사랑> 부분


 아, 강성은은 사랑을 해도, 오, 사랑을 해도 이리 전쟁터에서 서로의 심장을 쏘고 그것도 모자라 이미 죽은 시체를 전기톱으로 절단할 정도의 치열한 사랑을 하는구나. 그럼 앞의 시 <서커스 천막 안에서>의 마술사 남편이 ‘나’의 머리통에 기름을 쏟아 붓고는 성냥을 칙, 그어버리는 것도 사랑의 행위겠네? 거참 말 된다.
 이 시집을 읽고 이이의 세 번째 시집 <Lo-fi>의 구입을 하지 않기로 했다. 시적 표현과 대상의 내재화가 시를 읽는 소양이 부족한 나를 너무나도 앞서가기 때문이다. 이건 시인의 잘못이 아니다. 시를 읽는 독자의 자질이 안 되거나 시의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강성은 뿐만 아니라 당분간 ‘요즘 시’ 읽기는 미루어야 하겠다.
 시인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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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대 - 열아홉 살 엽기소녀의 반위생학적 사랑법!
샤를로테 로쉬 지음, 김진아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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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가족 단위에서 노인 간병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이혼 가정의 자녀들이 그렇듯 나도 우리 부모님이 다시 합치는 게 소원이다. 엄마 아빠에게 간병인이 필요하게 되면 엄마 아빠의 애인들만 양로원에 집어넣고, 이혼한 우리 부모님은 내가 집에서 돌볼 테다, 돌아가실 때까지 한 침대에 눕혀놓고. 이 상상은 내게 최대의 행복감을 안겨준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거다. 언젠가는 내 손 안에 들어올 문제다.”

 첫 문단이다. 작품의 내용과 관계없이 소설은 한 결손가정 출신으로 이제 19세, 법적으로 성인이 된 여성 헬렌 메멜 양이 이혼한 부모가 재결합 해 다시 한 가족으로 살 수 있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는지가 핵심이다. 헬렌은 열세 살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과 성적 접촉을 해왔고, 마약을 복용했다. 무대가 아무리 유럽, 독일이라 해도 이 정도면 전형적인 ‘결손가정 출신의 문제아’이긴 하지만 부모가 이혼한 아이가 헬렌 혼자도 아닐 터인데 이리 유난을 떠는 건, 어느 날 집에 가보니 엄마가 동생 토니와 함께 졸피뎀을 먹은 듯 주방에서 깊은 수면에 빠져 있고 대형 가스 오븐의 열린 밸브를 타고 프로판 가스가 무한정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을 헬렌이 직접 발견해 엄마와 동생의 동반자살을 막았던 사건이 어린 인생의 한 가운데에 큰 변곡점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고 봐야겠다. 작품 속의 부모 어느 쪽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특징인, 일상적으로 통용하는 위생관념에 의도적으로 반하는 행위를 헬렌이 수시로 저지르고 그것이 습관화 되어 있는 이상행위를, 이제는 낡아빠진 프로이트적 방식으로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뜻이다. 그의 이상행동이 비위생적인 생활방식과 성기와 항문에 집중되니 이리 생각해도 큰 무리는 아닐 듯하다.
 19세가 되어, 아직도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인종차별주의자 농부가 운영하는 야채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약간의 차별을 받은 에티오피아 출신 남자 카넬을 알게 되고 그로부터 제모를 배운다. (카넬은 헬렌의 제의에도 불구하고 성적 접촉을 갖지 않는다. 헬렌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이런 종류의 책에서는 대체로 소수자 및 약자들 가운데 선한 사람이 많이 등장하니까 이상하지는 않다.) 그가 헬렌의 전신을 아주 말끔하게 면도를 해주었더니, 예상외로 헬렌의 성적 흥분의 세계에는 신세계가 펼쳐지는 거였다. 그래서 이젠 자기 혼자 정기적으로 제모를 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문제는 어려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아빠 쪽을 닮아 치질이 있다는 것(엄마와 외할머니는 치질이 없다고 하니까). 그것도 좀 심한 편이라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 마치 꽃양배추처럼 활짝 펴질 정도. 의사 말에 의하면 그저 삶의 질이랄까, 자존감이랄까 따위에 스크래치가 좀 갈 수 있지만 고통을 수반하지도 않고 특별히 염증도 일으키지 않으니 그냥 관리하면서 살면 된단다. 문제의 근본이 이 치질은 아니다. 항문 근처에도 몇 가닥 안 되지만 털이 나 있어, 면도에 익숙하지 않고, 매사를 꼼꼼하지 못하게 대충 처리하는 덜렁이 성격의 헬렌이 극히 요망한 자세로 항문 주변의 털을 면도하다가 그만 주름 근처를 벤 것이 탈이었다. 부위가 부위인 만큼 수도 없이 많은 세균이 번식하는 영양 많은 환경이라 염증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서, 예상대로 극도의 고통을 수반한 염증이 발병해, 수업 도중 교사의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통에 관해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염증에 의해 부어오른 치질이 이제 온 힘을 다해 면도상처를 헤집는 거 같은 고통이 헬렌의 19년 동안 겪었던 고통 중에 가장 심한 고통이란다. 두 번째로 치는 것이 차 트렁크에 몸을 숙이고 있는데 아빠가 실수로 트렁크 덮개를 등골에다 내리 찍었을 때였으며, 셋째로 많이 아팠던 건 스웨터를 벗다가 젖꼭지의 피어싱이 떨어져나갔을 때였단다. 그래서 헬렌은 지금도 오른쪽 젖꼭지가 마치 뱀의 혀처럼 보인다는데, 트렁크 덮개에 찍힌 등골의 아픔은 얼마 정도였을까. 그리고 지금 앓고 있는 항문 염증의 아픔은 두 번째 아픔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모든 인류는 항문염증에 각별한 공포를 갖고 그곳의 위생관리에 미리미리 만전을 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래서 종합병원에 입원해 문제의 염증 말고도 소위 ‘꽃양배추’마저 말끔하게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 우리의 헬렌. 헬렌의 속셈은 여기서도 다른 곳에 있다. 딸이 아프다는데 부모가 문병을 안 오지는 못할 거 아닌가. 그럼 여기서 엄마와 아빠가 몇 년 만에 재회를 하고, 비록 지금 각기 다른 가정을 갖고 있긴 하지만, 둘이 다시 사랑의 불꽃을 피우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혹시 아나, 둘이 재결합해 네 식구가 오순도순 살게 될지. 인간사를 누가 있어 알리오. 안 그랴?
 내가 지금 말은 이리 쉽게 하지만, 정작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을 걸? 위와 같은 심오한 잔머리를 굴리는 헬렌이지만, 메멜 양이 열세 살부터 저질러온 갖가지 엽기 행각을 온갖 방식으로 하도 화려하게 묘사를 하는 바람에 완독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 ‘독자서평’을 통해 이런 엽기 내용을 알고 있어서 오히려 얼마나 엽기일까, 기대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상상 이상이다. 여태까지 나는 주로 항문과 꽃양배추에 관해서만 언급을 했다. 근데 책에선 꽃양배추 밭 바로 옆에 있는 놀이동산에 대한 상세한 서술까지 더해 있을 뿐만 아니라, 놀이동산과 꽃양배추 밭에서 즐길 수 있는 갖가지 비위생적 방법에 관한 비 학술적 주장까지 보태고 있으니 잘 생각해보시고 책을 고르실 사. 역자 김진아도 글의 말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소설은 어떤 편견도 없이 독자에 의해 평가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웃고 싶은 곳에서 웃고, 내던지고 싶을 때 내던질 수 있는, 개인으로서의 독자를 위한 소설이다.”


 

 

 


 이 책은 중고를 샀다. 헌 책을 구입하는 일의 재미 가운데 하나가 먼저 읽었던 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 책을 넘겨 첫 빈 페이지에, 아후, 아래와 같은 헌사가 쓰여 있었다. 사진을 찍어 올릴까 했지만, 혹시 아는가, 필체로 전 주인을 알아보실 분이 있을지. 그래 그러지는 않고 그대로 옮겨본다.

   “뜨겁게 타오르던 태양 아래에서 처음 너를 만났고…
    잔잔한 호수 같던 마음에 커다란 파장을 주었고…
    따가운 햇빛을 따뜻한 햇살로 바꿔준 J…
                           사랑해

   From A."

 A가 J에게 이 책을 선물한 것으로 보이는데, 글쎄, 이 책을 연인에게 선물을 해? A, 참 대단하다. 난 마누라한테도 읽어보라 권할 생각이 나지 않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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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20-03-29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세요? @@@@@@

Falstaff 2020-03-29 18:40   좋아요 0 | URL
윗 글을 좀 길게 써서 그렇지 사실 본문의 10% 정도만 공개한 거거든요. 왜 입원하게 됐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읽으신 분이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시면 스포일러 맞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군요.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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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에 겐자부로의 등단 50주년 기념작품이라고 한다. 그가 25세에 등단을 했다니 어느덧 75세, 아무리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는 일본이라 하더라도 노익장이다. 참 쑥스럽게도, 그동안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본 작가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좋아하는 소설가임에도 여태 사 읽어보길 머뭇거렸다는 걸 고백한다. 그러나 역시 오에 겐자부로.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
 작품은 책 속에는 알파벳으로 Kenzaburo라 쓰인 작가가 화자로 등장하고, 다른 작품을 통해 일찍이 탄생에서 중년에 이르기까지 성장과정을 독자들이 다 지켜봐왔던 작가의 아들 히카리도 작품의 서장과 종장에 중요 인물로 활약한다. 자폐증세를 앓는 대신 음악에 천재성을 보이는 아들 히카리와 일흔이 넘은 작가가 시내에서 있었던 콘서트를 보고 귀가하던 중 갑자기 히카리가 간질 발작을 일으킨다. Kenzaburo가 누군가. 10여 년 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의 소설가이자 양심적 지식인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낸 사람. 순식간에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오고, 일본인 특유의 친절 공여에 관한 제의가 쏟아지지만, 5분만 저러고 있으면 괜찮아지니 상관하지 말고 가던 길 가시오, 라는 무뚝뚝한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5분은커녕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히카리를 부축하며 귀갓길을 서두르던 ‘나’의 화면 속에 저 먼 기억 속의 인물 하나가 찍혀 있었던 것. 대학 동창 고모리.
 작가가 고모리를 만나면서 순식간에 소설은 본론으로 접어들어 무대가 30년 전으로 바뀐다. 1970년대 중반. <미하엘 콜하스>라는 책이 있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라는 사람이 1810년에 쓴 단편소설로 우리나라에서는 창비가 번역 출간했다.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유럽에서 민란을 다룬 아주 드문 작품이며, 민란을 소재로 한 것 답게 당시 사회, 정치 등에 대한 비판과 종교 등에 관해 생각할 것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책의 지은이 폰 클라이스트가 1777년 생으로 그의 출생 200년을 기념해 영화인들이 모여 대표작 <미하엘 콜하스>를 각 나라의 상황에 맞게 변형시킨 영화를 세계 각 대륙에서 제작한다는 M 프로젝트를 구상했고,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동학혁명에 맞추어 제작하려 하였으나 박정희 정권이 때를 맞춰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던 김지하를 잡아들여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화자의 대학동창 고모리가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마침 작업이 없어 쉬고 있던 Kenzaburo가 그의 작품 <만엔 원년의 풋볼>에서 심도 있게 다루었던, 두 번에 걸쳐 시코쿠에서 발생한 민란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
 그래 소설의 본문에는 <만엔 원년의 풋볼>과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나오게 된다. 패전 후 불법으로 고급종이를 만들어 화가들에게 팔아 돈을 번 ‘나’의 어머니가 시코쿠에 극장을 짓고 메이지 유신 당시 발생한 민란 가운데 두 번째 사건에 관한 연극을 공연해 스스로 주연을 했다는 것, 1차 민란에서 옥사한 메이스케의 어머니가 죽은 맏아들의 뜻을 이어 소위 ‘환생한 메이스케’ 자신이 다시 낳은 아들과 함께 두 번째 민란을 도모했다가 잡혀 아이는 돌에 눌려 죽고, 어머니는 윤간을 당하고 죽음을 맞았던 향토사적 진실, 그러나 일본 국민이 흔히 그렇듯 공식적으로는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불행한 과거를 마치 해원解寃 굿처럼 공연했다는 것이 다시 나온다. (오에 겐자부로야말로 지식인이다. 자신들이 저질렀던 창피한 과거를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이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익사>에서 큰 상징을 갖는 상해에서 도착한 아버지의 붉은 가방도 <… 애너벨 리…>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리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애너벨 리…>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는, 1935년생의 ‘사쿠라’라는 여배우가 등장해서이다. 종전과 동시에 고아가 된 사쿠라는 일본, 미국, 멕시코 등지에서 활발하게 영화 활동을 했으며, 특히 미국과 멕시코에서 중요한 조연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미군 장교였다가 종전 후 일본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한 데이비드가 그녀를 후원해 아역배우에서 시작했던 터였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살다가 조그만 문제가 생겨 출국당하지 않기 위해 데이비드와 법적 결혼을 해 현재에 이른 여인인데,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해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의 기억 속에 확실하지 않은 불안 또는 불행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이런 사쿠라가 만엔 원년에 있었던, 특히 두 번째, 민란에 대단한 흥미를 느껴, 영화화 하고, 자신이 환생한 메이스케의 어머니 역할을 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소설은 드라마틱한 꼭짓점으로 몰려가는데, 그곳에 어떤 장면이 있을까. 안 알려드림.
 겨우 227쪽에 이르는 짧은 장편이다. 게다가 <익사>, <만엔 원년의 풋볼>에서 벌써 충분히 알고 있던 내용이 큰 흐름으로 흐르고 있다. 만일 내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이 책을 읽었을까? 안 읽고 말았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제 늦게나마 읽었다는 게 다행스럽다. <… 애너벨 리…>는 기본적으로 한 불행한 인간의 치유의 과정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번엔 작가 본인, 처자식, 가족, 고향이 아니다. 누구를 위한 치유? 안타깝게도 그것도 알려드리지 않겠다. 오에 겐자부로. 이이의 작품은 믿을 수 있으니 직접 확인하시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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