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 흰 장미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3
장애령 지음, 오수경 옮김 / 연극과인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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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아이링(張愛玲)이 1944년에 발표한 동명의 단편소설을 티엔친신(田沁鑫)과 저우허양(周鶴洋)이 각색해 연극을 위한 드라마로 만들었다. 장아이링의 원작은 창비에서 출간한 중·단편집 《경성지련傾城之戀》에 실려 있으나 읽어보지 않아 어떤 내용인지 모르겠다. 장아이링은 청 제국의 귀족 집안에서 장군 이홍장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우여곡절을 겪다가 1949년 중국혁명이 끝나자 미국으로 망명해 1995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외로운 머리를 뉜 작가로,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해 골분을 태평양에 뿌렸다고 들었다. 중국에서는 모국에 머물지 않고 체제를 달리하는 자본주의의 표징인 미국으로 망명한 이유로 친일 작가라는 빨간 줄이 갔다고 하는데, 망명하기를 잘했지, 베이징이나 상하이에 머물렀다면 1960년대에 사람 잡던 문화혁명에 걸려 돌 맞아 죽던지, 조리돌림 끝에 울화병이 돋아 벽에 머리를 박고 스스로 숨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장아이링의 작품과 경향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채, 원작을 극도로 왜곡시킨 희곡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연출이 무한정으로 변형 가능한 현대희곡이라 더욱 그러했다.
 책 뒤에 달린 해설을 보면 원작 <붉은 장미 흰 장미>의 내용이 대략적으로 나온다. 먼저 희곡을 읽고 원작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되면, 단박에 뒤집어진다. 크게 보아 두 쌍의 부부가 출연한다. 근데 원작이 희곡으로 변이하면서, 주인공의 성gender가 바뀐다. 즉 아내가 남편이 되고, 남편이 아내가 된다. 더구나 남편으로 바뀐 원작의 아내 멍옌리(극중 남편)는 아내 퉁전바오가 지역 대표로 있는 투자사의 일개 영업사원이며 인터넷 게임 X크래프트에 거의 중독 상태로 빠져 지낸다. 그러니 남녀 주인공만 바뀐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도 완전한 현대로 옮겨왔다. 구태여 장아이링의 원작을 강조한 것은 부부 두 쌍의 불륜의 구조와 원작에 장아이링이 써 놓은 문장들을 사용하기 위함일 뿐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진 않을 것 같다.
 공연의 형식도, 나는 연극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그저 짐작에 그치는 수준이지만, 한 번에 많은 등장인물이 무대에 올라, 즉흥적이거나 사전에 계획한 움직임과 더불어 계속해서, 쉬지 않고 각자의 대사를 하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등장인물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의 대사를 하기 위해 무대 한 구석에 앉아 고뇌에 싸인 표정을 지을 필요 없이 자기 순서가 되면 적절한 몸짓과 표정을 취하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다만 몸짓이란 것이, 한 무대에 많은 등장인물이 있는 관계로 동선이 서로 엇갈리지 않는 한도 안에서의 움직임만 가능할지도 모른다. 또는 다수가 같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일종의 스탠딩 코미디로 만들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전적으로 연출자 마음대로 하면 될 것이다. 이런 연극적 표현방식은 이번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하고 비슷하기도 한 것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하여간 그렇다.
 주인공은 퉁전바오-멍옌리 커플의 아내 퉁전바오. 사람에겐 누구나 이쪽과 저쪽의 성격이 존재하는 법. 이건 좌뇌와 우뇌가 합쳐서 뇌 하나를 구성하는 것과 비슷하리라. 퉁전바오는 투자회사 로이터로이스의 화북지역 대표인데 한심한 남편 멍옌리를 사실상 부양 비슷하게 하며 부부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가, 날이 갈수록 ‘성격차이’ 또는 ‘능력차이’, ‘관심사 차이’ 등의 이유로 불만족스러운 단계로 접어든다. 퉁전바오의 한 달 출장 동안 회사에서 정리해고 당한 철없는 남편 멍옌리는 불륜으로 접어들지는 않지만(애초에 그럴 의도도 없었고) 인터넷 게임을 위해 젊은 여자를 한 명 집에 들이는 것을 보고 잔뜩 열을 받아 별거를 선언하고는 ‘홧김에 서방질’을 시도하려다 좌뇌와 우뇌, 혹은 나와 또 다른 나의 갈등을 시작하는데, 이때 또 다른 나의 역할을 하기 위해 ‘전바오을(乙)’ 역할을 하는 배우를 한 명 등장시킨다. 홧김에 서방질의 대상은 미국유학 중에 친해져 회사에 같이 투자한 ‘왕제루이’로 어려서부터 친구인 왕스홍의 남편이다.
 얘기한대로 1940년대 단편소설을 2010년대 연극으로 공연하기 위해 젠더와 시대적 환경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희곡은 단막극을 위한 작품이지만, 티엔친신은 한 무대에, 내 수준으로는 복잡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많은 등장인물이 여러 장면, 아니 가지가지 대사를 동시에 쏟아냄으로서 읽으면서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내가 현대 연극에 아는 것이 없고 경험도 부족해서 그런 것이고, 다른 면으로 보면 이런 드라마를 읽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라 할 것이다. 전에 <워 아이 xxx>처럼 슈프레히코어 희곡을 읽을 때 느꼈던 충격보다는 덜하다. 비슷한 희곡을 한 편 더 읽을 기회가 생기면 훨씬 더 친숙해질 것 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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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핑 뉴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9
애니 프루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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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덩치만 컸지 어수룩한 사내. 캐나다의 황량한 뉴펀들랜드 섬에서 폭풍과 바람과 더불어 살다가 뉴욕까지 흘러들어온 가족의 둘째 아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마초적인 훈육과 조금은 야비한 성격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형에게 숱한 비아냥거림과 무시와 냉대를 받으며 스스로 실패자의 길을 가는 젊은이로 성장한 코일. 빨래방에서 우연히 만난 흑인 청년 파트리지의 주선으로 영세한 지역신문사에 들어가 임시직 기자 활동을 할 때까지 앞으로 계속해서 기자라는 직업을 갖게 될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숱한 직장을 거치며 뉴욕의 뒷거리를 배회하는 우울한 청춘이었던 그가 비록 대학을 중퇴하여 웬만큼 글줄이나 쓸 줄은 알았지만 그동안 별다른 독서도 없었고, 글을 쓸 일도 없어 처음 쓴 기사 첫 꼭지부터 머리도 좋고 운도 좋은 청년이자 이제는 상관이기도 한 파트리지의 냉정한 수정용 ‘붉은 펜의 학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다 한 모임에서 아담한 체구에 예쁜 용모를 지녔으나 이미 걸레처럼 너덜너덜한 아가씨 페틀을 만나 무턱대고 결혼을 하고, 딸 버니와 선샤인을 차례로 낳는다. 그럼에도 아내 페틀은 여전히 향락을 좇아 다른 남자들과 연애행각에 날 새는지도 모르다가, 결국 두 딸을 낯선 남자의 차에 태우고 몸을 실으면서 “이혼 서류는 우편으로 보내줄게.”라고 선언하고 떠나버린다. 어린 두 딸을 변태한테 팔아넘기고 그 돈을 움켜쥔 채 꿈의 땅 플로리다로 폭주하다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언덕 아래로 구르는 와중에 목뼈가 부러져 죽고 만다. 아내가 죽기 바로 전에는 절대 죽지 않을 거 같던 간암에 걸린 아버지가 치료의 가망이 없어 보이자 바르비투르산 염, 즉 수면제를 다량 복용해 자살을 해버렸는데, 아버지의 장례를 위해 초대한 유일한 친척인 고모가 뉴욕에 도착한 때는 이미 코일이 아이 둘 달린 홀아비 신세가 돼버렸을 때였다. 실내 천갈이를 직업으로 하고 있는 고모가 조카에게 와보니, “냉담한 눈과 요염한 포즈만 봐도 하이힐 신은 잡년임을 알 수 있는” 페틀이 그래도 생명보험에 가입을 해놓아 코일과 딸에게 많지는 않지만 상당한 액수의 보험금을 남겨놓았던 거였다.
 이때 고모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생 혼인하지도 않고, 그래서 자식 하나 없는 고모가 뉴욕이란 정글에 적응하지 못하고 실패자의 삶을 사는 덩치만 큰 자기 핏줄, 혈육에게 조상의 땅 뉴펀들랜드 섬으로 돌아가자고 제의한 것은 왜일까. 고모는 폭풍과 바람과 빙산과 물범과 대구의 땅, 남자는 언젠가는 얼음이 자박자박한 바다에 빠져 죽고, 여자는 언젠가는 과부가 되고야 마는 거대한 바위섬보다 뉴욕의 자본주의가 더 황량하고 살벌한 곳이라고 생각했을까? 적어도 조카 코일에게는?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제 40년이 넘어 고모는 자신의 비극적인 과거가 아직도 살아있고, 불과 열두 살 때 물범 사냥을 하다가 바다에 빠져죽은 의붓아버지의 손자인 코일의 가족을 솔가하여 기어코 뉴펀들랜드 섬으로 떠나고야 만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야 본문이 펼쳐진다. 뉴펀들랜드. 젊은이에게 두 가지의 기회만 주어지는 땅. ① 토론토나 밴쿠버, 또는 뉴욕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거나 화재가 난 잿더미 속의 칼날 같은 성격으로 바뀐 뒤에야 돌아오는 기회와, ② 조상 대대로 거의 빠짐없이 그랬듯이 언젠가 셔벗 같은 바닷물 속에 거꾸로 박히거나, 배와 함께 빠져 죽음을 맞이하는 기회. 어쨌거나 세상 어디라도 사람은 살아가는 법. 우리의 코일과 고모와 두 딸, 버니와 선샤인 역시 험한 환경 속에 처박혀도 그곳의 투박하지만 정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뉴욕과 죽은 아내이자 엄마인 페틀을 서서히 극복해 나간다. 이런 과정이 바로 소설의 본문이자 결론이라 할 수 있을 듯.
 500 쪽에 약간 모자라는 장편이지만 재미있어 빠르게 읽힌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 애니 프루의 간결한 문장이 마치 기사문 같아 정확한 뜻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것도 큰 이유겠지만, 독자도 결국은 어떤 결말로 끝낼지 중간쯤 벌써 환하게 눈치 채게 만드는 스토리의 전개도 읽는 재미에 빠지게 만든다. 독자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짐작하는 결론을 향해 어떤 식으로 한 발 한 발 이야기가 전개되는지 확인하는 걸 좋아하는 습성이 있는 집단이다. 애니 프루는 이런 독자들의 일반 취향에 딱 떨어지는 작품을 만들었다. 주인공에게 어렵고 난처한 초반부를 제공하고 나서 한 계기를 만들어 환경을 바꾸게 만들고 선량한 주변인들의 도움과 숨겨왔던 성실함으로 그가 속한 커뮤니티에서 성공적으로 소소하게 행복한 삶을 다시 만드는 일. 전형적인 미국 영화를 보는 듯 일종의 틀에 맞춰 가공한 작품을 읽은 느낌.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느낌이 난다. 세상의 어느 땅에도 안식이란 원래부터 없다는 진리에 대해, 애니 프루는 한 번쯤 부당하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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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0-2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버전으로 읽었던 책이네요.

영화도 있는데 영화에서 사람들이
집을 질질 끌고 가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Falstaff 2019-10-29 13:23   좋아요 0 | URL
옙. 전 이번에 문둥이가 새로 번역을 한 줄 알았습니다. 순진하기는 참... ㅋㅋ
저도 독후감 쓰고난 다음에, 2001년에 케빈 스테이시, 줄리안 무어 등의 호화 캐스팅으로 만들었다고 어느 분께서 귀띔해주시더군요.
 
수치
살만 루슈디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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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만 루슈디가 쓴 일련의 작품 군을 읽고, 굳이 장르를 대보자면, 인디아 또는 파키스탄 식 붐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붐 문학’이라고 하면 저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사이에 한때 유행했던 소위 마술적 리얼리즘을 일컫는데, 루슈디의 작품 속에선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은 마술도 아니다. 루슈디의 다른 작품들, 예컨대 호메이니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아 단번에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만든 <악마의 시>, 동화와 소설의 중간쯤에 위치한 <하룬과 이야기 바다>, 마술적 요소로 보면 조금 약한 <한밤의 아이들>까지 모두 이슬람 또는 인디아-파키스탄 사람이 아니라면 묘사할 수 없는 절묘, 기묘, 기상천외한 우화나 마술, 환상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글쎄, 내 경우엔 이 이슬람, 인도/파키스탄의 신비한 이야기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당최 이해하기 곤란한 지경에까지 이를 정도였던 것을 고백하고 시작하자.
 내가 생각하기에 살만 루슈디의 역작 <수치>의 가장 큰 수치는, 루슈디가 모국어가 아닌 오랜 세월 자기민족의 식민지배자였던 영국의 언어로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이런 의견은 올해 들어 집중해 읽은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어 작가 아시아 제바르를 통해 공감하게 된 것이다. 식민지배자들의 언어로 하필이면 자기 민족의 “수치스러운 현대사”를 써야 했던 것이 두 번째고, 세 번째는 책의 주인공 오마르 하이얌 샤킬의 탄생과정, 그리고 나중에 샤킬의 아내가 될 수피아 지노비아 하이더의 지체장애가 마지막 수치이자 모든 수치의 청산이 되는 것으로 읽었다.
 작품의 무대는 14세기부터 15세기 까지 파키스탄의 현대사. 현대사인데 14, 15세기? 그렇다. 이슬람력歷으로 14세기는 622 + 1,300 = 1,922년부터 2,021년까지이고, 15세기는 그 후 100년 동안이란다.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고, 4부의 제목이 “15세기에는”이니 작품의 초판이 나온 1983년을 기준으로 하면 소위 미래소설이기까지 하다. 작품을 쓰던 1980년대 초반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파키스탄은 정치적으로 안정적이라 말하기 좀 그런 수준, 이슬람의 각 계파들 사이의 공격과 테러로 치안이 불안한 나라로 구분을 한다. 그래서 책에도 두 명의 국가 원수급 등장인물이 출연을 한다. 라자 하이더와 이스칸더 하라파. 둘은 사촌 동서지간으로 한 때 미모의 유부녀 핑키 아우랑제브를 두고 대립을 하기도 했으나 주인공 오마르 하이얌 샤킬과 방탕한 생활을 즐겼던 이스칸더 하라파가 핑키도 얻고, 나중에 정신을 차려 먼저 국가의 수반이 되어, 사촌동서 라자 하이더를 육군의 수장으로 임명한다. 뭐 결국엔 이 육군 수장이 지시해 죽은 채 목이 매달리는 교수형을 받게 되지만. 이 정도면 주가 되는 굵직한 내용은 다 끝난다. 육군 수장이 쿠데타 아니면 어떻게 국가수반을 목매달 수 있나. 그렇게 해서 차기 대통령이 되는 라자 하이더 역시 좋은 팔자로 생을 마감할 수 없을 테니 줄거리는 이미 다 밝힌 것이라는 뜻. 책에서도 처음, 아니면 적어도 상당히 앞부분에 정치투쟁의 결과를 밝혀놓고 진행을 하니 지금 내가 하는 행위는 스포일러 아니……지?
 명색이 장편소설인데 위에서 이야기한 정치투쟁 하나로 된 단일 구성일 수는 없는 것. 그럼 주인공 오마르 하이얌 샤킬에 대하여 좀 알아보자. 오마르 하이얌의 할아버지 올드 미스터 샤킬이 거대한 침대 위에서 마지막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지 못했을 때, 그에게는 무진장한 돈을 가지고 있다는 거짓말과 저택과 거대한 기름진 땅과 무지하게 쌓여있는 가재도구들과 세 명의 딸만 있었다. 하여간 이이가 죽자마자 차용증을 들고 들이닥친 채권자들에게 시세 이하로 평가된 부동산을 다 내주고 세 따님이 마지막으로 속세에서 벌인 일이 영국인들과 영국인들하고 친한 사람들에 국한해 초대한 초호화판 파티였다. 이날 밤, 세 따님 가운데 한 명이 임신을 하게 되고, 셋은 저택에다 무시무시한 엘리베이터를 장치한 후 집 안에 파묻혀 이후 65년 간 고요히 살게 된다. 그날부터 아홉 달 조금 넘게 지나 누구의 아이인지 밝히지 않고 태어난 인물이 바로 오마르 하이얌 샤킬. 이 아이는 한 방에 엄마 세 명을 갖게 되는 팔자를 타고 나, 애초부터 총명한 두뇌로 파키스탄 최고의 외과의사로 성장하지만, 엄마로부터 모든 행위에 대한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키워진 매우 뚱뚱한 남자로 자란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대단히 건조하게 읽힌다. 루슈디가 쓴 <수치>를 읽어보면 이런 모든 장면에도 환상과 우화와 마술적 요소가 비프스테이크(거의 날고기) 위에 뿌린 소스처럼 듬뿍 배어 있어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다는 건 지금도, 저 앞에서도, 그리고 뒤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오마르 하이얌은 정말로 특이한 캐릭터의 주인공이다. 이이는 절대로 이야기를 주체적으로 끌어가는 능동적 주인공이 아니다. 파키스탄의 권력과 소설책의 흐름은 위에서 말한 힘 센 작자 두 명이 죽을힘을 다 해 견인하면, 오마르 하이얌이 견인차 위에 턱,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그냥 묻어가는 구도다. 이스칸더 하라파가 유부녀 핑키 아우랑제브를 인터셉트 할 시절에는 그와 더불어 술과 여자를 비롯한 모든 환락을 같이 했고, 라자 하이더가 하리파 치하 육군총수로 힘을 기르기 시작할 무렵에는, 뇌열병(뇌염과 뇌막염으로 구분하지 못해 대강 이렇게 부르던 병)으로 정신지체가 된 라자 하이더의 큰딸 수피아 지노비아 하이더의 생명을 구해주고 그 아이가 크자 그만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고 만다.
 아, 정말 독후감 쓰기 힘들다. 써놓고 보면 재미난 텍스트를 읽고 어찌 이리 재미없게 독후감을 쓸 수 있을까 싶어 쪽팔리기 이를 데 없다. 루슈디는 책 속에서 스스로 이 <수치>는 기본적으로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 사랑은 사랑인데 좀, 아니, 많이 살벌한 사랑 이야기. 삶의 사랑. 삶 속에서 여자와 남자의 사랑. 평생 마음속에 애정이나 증오나 권태나 진력이나 질투를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한 순간에 폭발하거나 표현하거나 실행해버리는 끔찍하기도 하고 겁나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하고 현명하기도 한 사랑 이야기란다. 그건 책을 직접 쓴 루슈디의 의견이고, 독자인 나는 영국에서 영국의 언어로 쓴 자기 조국의 (쪽팔린)현대사를 위한 변명 같았다. 재미있다.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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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2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 지음, 박채연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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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많이 읽는 서재 친구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작품. 320쪽에 불과한 비교적 짧은 장편소설이지만 그리 쉽게 읽히지 않는다. 작가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살라망카 대학의 의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살라망카 대학 졸업생으로 번쩍 떠오르는 인물이 <사랑과 교육>, <안개>를 쓴 미겔 데 우나무노, 18세기 중엽이 무대인 <운명의 힘>에서 주인공 레오노라의 오라비 돈 카를로가 떠오를 만큼 대단한 학교이다. 수재 스타일인 산토스는 외과의사 수련의 시절을 거친 후, 불과 스물일곱 살 때 산 세바스티안 정신병원의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왜 그의 이력을 열거하느냐 하면, 책의 주인공 페드로가 비록 외과전문의 자격증을 소지하지는 않았지만 암이 유전되는지, 환경에 의한 것인지를 암세포를 가진 실험용 쥐를 이용해 규명하려는 (해부학과 관련한 뛰어난 손기술을 지닌)연구원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만일 페드로가 연구원이기도 하고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외과의 자격증을 보유한 상태였다면 이 작품은 완성될 수 없었을지 모르고, 끝을 맺었더라도 만인의 동감을 얻지는 못했을 터이다. 왜 그런지는 직접 읽어보시면 아실 것이다.
 출판한 해는 1962년이지만 시간적 배경은 1949년이다. 책 속에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나라를 대표해서 ‘한국’이 등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 집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도 월세를 전전해야 하는 이는 ‘한국인’이라 말이 나오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유럽인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다가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서 자신의 ‘거지꼴’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게 되는 기회를 만드는데, 산토스 역시 시기적 배경인 1949년과 불과 1년 차이가 나는 전쟁 시기를 잠깐 헷갈렸던 것으로 보인다. 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1949년이라면 스페인도 다른 유럽국가와 비교해 그리 잘난 것이 없어서, 파시스트 프랑코가 내전을 일으켜 3년 동안 나라를 거덜 냈고 이어진 2차 세계대전에 은근히 독일 편을 드는 바람에,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번번한 상공업적 기반시설 하나를 갖추지 못한 지경에 떨어진다. 그리하여 작의 시작부분에 “가난한 민족. 누구도 다시는 노벨상에 도전하지 못할 것이고, 다시는 지고한 왕의 미소, 위엄을 갖춘 왕의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며, 이 메마른 반도에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들과 강물이 넘쳐흐르기를 바라는 현자의 출현을 말하지 못할 것”이라 단정한다. 실험에 사용해야 하는 쥐가 다 떨어졌다. 그까짓 쥐, 그러나 특별한 암 유전자를 보유한 쥐 하나를 배양하지 못해 비싼 돈을 주고 미국의 일리노이에서 비행기로 공수해 와야 하는 쥐를 다 써버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맞아 절망하고 있을 때, 그의 조수 아마도르가 말하기를 한때 연구소에서 잡일을 하던 무에카스라는 작자가 쥐를 한 쌍 집에 가지고 갔으며 (그때는 쥐가 많아 한 쌍 정도는 그냥 줄 수도 있었으니까), 그 사람 집엔 이 쥐들이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새장 하나에 한 마리씩 얼마든지 있다고 알려준다. 그리하여 우리의 페드로와 아마도르가 무에카스의 집으로 떠나며 이 우화적이고, 사회 비평적이고, 무엇보다 포스트 모던한 단락들이 즐비한, 뛰어나게 매력적인 소설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대략적인 스토리를 이야기하자면, 페드로와 아마도르가 무에카스의 집에 가서 쥐의 존재를 확인하고, 힘도 센 칼잡이 카르투초의 애인이자 무에카스의 큰딸인 플로리타가 쥐들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만들어 왕성한 번식을 유도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여간 쥐들의 공급을 확보해놓은 것도 잠시, 한밤중에 페드로가 사는 하숙집에 무에카스가 들이닥쳐 큰딸 플로리타가 죽어간다면서 페드로를 부르러 온다. 그의 집으로 달려가 보니 누군가가 야매로 플로리타에게 소파수술을 했고, 와중에 생긴 것이 분명한 자궁벽의 천공에서 무수한 피가 흘러내리고 있어 벌써 가사상태로 들어가 있다. 이미 거의 죽은 플로리타를 관찰한 페드로, 이 외과의사 자격증이 없고 뛰어난 해부학적 손기술을 가진 연구원은 즉시 수혈과 정확한 소파수술이 필요하다는 걸 확신하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간다. 물론 수혈 없이. 그리고 역시 플로리타는 죽는다. 며칠 후 공동묘지에 삼단으로 묻히고. ‘삼단’이 뭐냐고? 서양식 매장법인데, 나도 미국 드라마 <과학수사대>를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터로, 땅을 아끼느라 묘혈을 파서 관을 세 단으로 안치하는 방법이다. 며칠 후, 마드리드 과학수사대가 영장을 들고 와 다시 세 구의 시신을 꺼내고 그 가운데 플로리타의 관을 해부해본 결과 의문의 여지없이 ‘타살’이란 결론을 내리게 되며, 의리 없는 조수 아마도르의 애매한 발언으로 페드로가 플로리타를 죽인 범인으로 체포된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책은 더 복잡한 상황들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침묵의 시간>이란 작품은 스토리만 좇아가서는 재미의 반도 낚아채지 못하는 전형적인 작품. 나는 읽어가며 페드로가 한밤중에 무에카스에 의해 잠이 깨 그의 집으로 떠나기 전쯤에, 어째 좀 익숙한, 아니면 적어도 한 번쯤 본 듯한 묘사기법이 등장한다는 걸 발견했고, 연이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상당한 부분이 비슷하다고 단정을 했다. 하여간 그리 생각하면서 책을 다 읽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책방의 ‘책 소개’를 보니 “주인공의 내면독백이나 의식의 흐름 기법을 구사한 다양한 문체로 ‘스페인의 <율리시즈>’로 불”린다고 한다. 여러 번 이야기했듯 나는 속물이다. 이렇게 딱 찍어서 내가 생각했던 것이 그대로 씌어 있는 것을 보고 어찌 기분이 으쓱하지 않겠는가. 우리 아마추어 독자들에게는 이런 것도 ‘사소한 책 읽는 즐거움’이니 그리 고깝게는 여기지 말아주시기 부탁한다.
 그렇다. <율리시즈>와 매우 흡사하다. 만일 이 책이 조이스의 그것처럼 18부, 어마어마한 분량의 번역문학이라면, 끝까지 읽어내기가 대단히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읽어보시라. <침묵의 시간>도 기념할 만한 문학적 성과이며, 적어도 <댈러웨이 부인> 비슷하게 명작의 반열에도 올라야 한다. 독자들에게 아직도 낯설게 다가가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작가가 39세 때인 1964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일찍 숟가락을 놓아야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그의 이른 죽음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을 만큼 빼어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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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0-25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렇군요! 별 다섯 작품이군요! 사놓고 아직 안 읽었는데 조만간 곧 읽어보겠습니다. 그 사이 이 책 품절이네요. ㅎㅎ 미리 사두길 잘했네요. ㅎㅎ 이 리뷰도 책 다 읽은 다음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19-10-25 10:42   좋아요 0 | URL
옙. 이런 책 품절시키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
 
바라바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4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지음, 한영환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바라바>도 오래 전 신년 연휴가 3일일 때 거의 한 해도 빼지 않고 흑백 TV를 통해 봤던 영화다. 안소니 퀸이 타이틀 롤을 하고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아마 실바나 망가노도 출연하지 않았나 싶다. 난 그때도 유물론자 비슷한 기질로 영화를 하나도 재미없게 봤는데, 작년에 영화는 진짜 지루하게 봤던 <쿠오바디스>를 소설로 대단히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은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은근한 기대를 걸고 <바라바>를 골라 읽게 됐던 거디었던 거디다.
 책 뒤에 있는 역자 해설을 읽어보면, 작가 라게르크비스트 자신은 스스로를 “신앙 없는 신자, 종교적 무신론자”라고 칭하면서, 주인공 바라바 역시 기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하여 이런 시각을 갖고 방황과 회의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추어 독자로 드는 의심을 솔직하게 말하자면,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라게르크비스트의 <바라바>가 완역인가, 하는 점이다. 본문이 160쪽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는 결정적 작품이 바로 이 <바라바>라는 건, 그가 노벨상을 수여하는 한림원이 자리한 스웨덴 사람이라는 이유 말고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설의 길이가 길지 않다고 해서 책을 폄훼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이 책의 미덕은 성경엔 몇 줄 나와 있지 않다고 하는 산적 두목 바라바에 관한 언급을 저 멀리 로마로까지 영역을 확장했다는 거 말고 또 뭐가 있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러나 바라바가 늙어 로마에 도착할 당시를 다룬 책으로 1905년에 역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위에서 말한 시엔키에비츠의 <쿠오바디스>가 있는데, 이 <바라바>가 1951년의 노벨 문학상을 받기 위해서는 <쿠오바디스>를 능가하거나 대등한 작품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어림도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막 읽기를 마치고 혹시 이 책이 라게르크비스트의 역작을 대폭 축소한 요약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 중이다.
 혹시 모르겠다. 우리나라에 무수하게 많이 분포하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께서 몸소 읽어보시면 하느님의 은총에 감동, 감화 받을 수 있을지는. 하지만 아직도 집 나간 검은 양에 머물고 있는 나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비록 짧기는 하지만 읽기가 매우 곤란한 경험 말고는 느낀 게 없었으니, 이걸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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