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모아젤 보바리
레몽 장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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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작가 이름만 보고 선택한 책. 레몽 장. 내가 읽어본 장은, 글쎄 프랑스에도 장 씨가 있지 뭐야, <책 읽어주는 여자>와 <카페 여주인> 두 편. 둘 다 생각만큼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데 왜 또 읽었느냐고? 레몽 장은 우리나라에도 두 번인가 온 적이 있고, 책 깨나 읽었다 하는 사람들한텐 입에 와서 착착 감기는 이름들, 김화영, ‘최윤’이라고 필명을 쓰는 최현무, 평론가 김치수, 이들의 지도교수가 장 씨였으며, 특별히 김화영이 <책 읽어주는 여자>의 ‘역자해설’에서 이이가 얼마나 특별한 작가이며 교사였는지를 입에 침이 마르게 ‘과찬過讚’ 즉 지나치게 칭찬하는 바람에 <책 읽어주는 여자>가 그리 감명 깊지도 않았음에 불구하고 한 권 더 고른 것이 <카페 여주인>이었으며, 그것 역시 별로여서, 이제 레몽 장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것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완전히 끝이다, 하는 마음으로, 구하기 쉽지 않은 책을 헌책방을 뒤져 사 읽은 내력이다.
 141쪽. 근데 본문이 29쪽에서 시작하며, 한 페이지에 달랑 열여섯 줄, 한 줄에 원고지로, 즉 띄어쓰기도 한 자로 봐서 모두 서른 자가 들어가는 현묘한 편집을 했다. 즉 한 페이지에 원고지 2.4매. 모두 113쪽 (초등 수학: 29~141쪽은 141-29+1 = 113)이니 원고지로 치면 271.2, 즉 272 장이면 단편 소설, 기껏해야 짧은 중편으로 봐야 하겠다. 이걸 도서출판 여백은 책 껍데기에 레몽 장, 점 찍고, 장편소설, 이라고 해놓았으니 출판사 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 여백餘白. 지금은 절판.
 본문이 29쪽에서 시작하면 앞에는? 당연히 역자 서문. 책을 넘기면 “이 소설을 읽는 기쁨을 배가하기 위해서는 필히 옮긴이의 말을 읽기 바랍니다.”라고 첫 장에 써 놓았다. 책의 길이고 편집이고 간에 나는 옮긴이의 말을 건너뛰고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건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쓴 모든 작품을 읽은 상태였고, 심지어 플로베르 평전까지도 완독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플로베르 평전에 대한 독후감을 썼다가 완전 쪼다 된 바가 있었지만(그래 지금은 독후감도 흔적 없이 삭제해버렸고 비싸게 주고 산 책도 내다 버렸다. 그 후 다시는 특정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책 읽는 루틴을 어기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 평전 역시 플로베르의 작품을 섭렵하지 않은 독자가 읽기엔 재미없을 거 같다는 취지였는데, 이 책 <마드모아젤 보바리>를 재미나게 읽기 위해서도 반드시 먼저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의 선행독서가 있어야 한다, 라고 나는 단정한다. 그것 말고도 이왕이면 줄리언 반스가 쓴 <플로베르의 앵무새>도 미리 읽어두면 금상첨화이며, 더없이 좋으려면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까지 미리 읽어두는 일.
 이 책에선 레몽 장의 아이디어가 재미있다. 본문 첫 페이지(그러니까 책의 29쪽)를 열면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마지막 장면이 그대로 씌어있다.
 “모든 것을 팔고 나자 12프랑 75쌍띰만이 남았다. 이것은 보바리 양을 할머니 집으로 보내는 여비로 쓰여졌다. 할머니는 그 해에 돌아가셨고, 루오 영감 또한 중풍에 걸려 한 분 남은 숙모가 그녀를 키웠다. 가난했던 숙모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그녀를 방직 공장에 보냈다.”
 즉 보바리 부인이 극약을 먹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보바리 씨 역시 어린 베르뜨 하나를 남겨둔 채 피식, 고꾸라져 죽었으니 이제 세상에 남은 보바리는 오직 하나, 베르뜨. 아직 결혼하지 않았으니 이 고아 소녀 베르뜨가 ‘마드모아젤 보바리’가 된다. 즉 <마드모아젤 보바리>는 <보바리 부인>의 속편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건, <보바리 부인>에서 일종의 악당으로 등장해 결국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가슴팍에 달고 마는 약사 ‘오메’를 기억하시나? 세월이 흘러 방직공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베르뜨 앞에 역시 다 커서 이제 성인이 된 오메의 아들 나폴레옹이 나타나 낡은 책을 한 권 건네주니, 한때 금서禁書 판정을 받았던 <보바리 부인>. 베르뜨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렸던 시절의 소꿉동무 나폴레옹은 여전히 베르뜨를 사랑하고 있어 그녀를 수소문한 끝에 찾아온 것.
 그러니까 소설 속에서 <보바리 부인>의 내용은 전부 정말로 있었던 일이었고, 그걸 콧수염만 울창한 대머리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소설로 만들었다는 전제가 깔린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나는 저절로, 흔히들 그러하니까, 마드모아젤 보바리인 베르뜨가 앞으로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메의 아들 나폴레옹과 연인 사이로 발전하려는가 보다, 하고 뻔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베르뜨는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는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한테 연락도 없이 찾아가, 자신의 가정에서 벌어졌던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를 그렇게 까발릴 수 있느냐고 항의하기에 이르고 실제로, 조카 꺄롤린을 파산에서 면해주기 위해 거의 전 재산을 팔아 이제 거렁뱅이 비슷한 처지로 전락해 늙은 하녀 펠리시떼, 앵무새 루루와 함께 셋이서 살고 있던 플로베르 씨에게 일요일마다 찾아가 몇 번의 대화를 하는 가운데 쉰다섯 살의 노인과 스무 살 처녀 사이에 은근한 사랑의 군불이 지펴진다.
 자, 스토리는 여기까지. 그러니 나폴레옹과의 연애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어머니의 방종한 삶과 아버지의 찌질한 일생을 적나라하게 묘사하여 사법 당국에 의해 외설 판정을 받은 책을 쓴 플로베르와의 연애 이야기라니 참 포인트 하나는 잘 짚었다. 아니 그런가.
 재미있다. 분량이 책 한 권으로 만들기엔 너무 짧긴 하지만 흥미로운 건 사실이다. 그리고 절판. 뭐라? 플로베르가 베르뜨하고 하냐고? 에라, 이……,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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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턴 휴스 -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 외 4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0
랭스턴 휴스 지음, 오세원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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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문학사에서 랭스턴 휴스의 단편집을 출간해 읽을 때까지 나는 이이의 책은커녕 이런 작가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연표를 보니 1902년생이고,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캔자스 주에서 외할머니와 유년 시절을 보내고, 소년 시절은 재혼한 어머니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는 이혼하고 멕시코로 날라버린 아버지한테 엉겨 붙어 1920년, 놀랍게도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기에 이른다. 아참. 진작 밝히고 시작해야 할 것이 있었다. 랭스턴 휴스는 미국 국적의 아프리칸-아메리칸, 즉 흑인이다. 인종차별이 만발한 대학을 일 년 만에 때려치우고 이번엔 화물선에 일자리를 얻어 아프리카, 유럽 등지를 구경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고, 24년에 시인으로 등단을 해 주로 시를 발표하는 한편 미국도 시만 써서는 밥 먹고 살기가 팍팍한지 호텔 급사 등의 자잘한 일자리를 거친 듯이 보인다. 또 인종차별에 대한 대안으로 공산주의에 경도된 적도 있는가보다.
 그의 인생에서 화물선 승선에 따른 아프리카 등 온갖 항구의 모습, 불경기 시절 흑인으로 일자리를 구해 생계를 꾸려가는 어려움, 쿠바 혁명세력 지원, 그리고 흑백을 불문하고 인간의 영원한 탐구인 연애와 불륜 등이 바로 이런 연표를 만들 수 있는 삶을 살았던 랭스턴 휴스의 마흔한 편에 달하는 단편소설이 담고 있는 소재가 된다. 우리 같은 보통의 사람들한테는 휴스 같은 파란만장하고 징글징글한 삶을 사는 게 하나도 좋은 게 없지만,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인간들, 우리가 흔히 작가라고 일컫는 소수의 인종들한테는 이런 삶을 통해 (평론가 강상희의 정의에 의하면) “경험의 언어”로 작용해 작품에 생명력과 삶을 부여하기도 한다.
 휴스의 작품 속 흑인들은, 내가 읽은 것이 단편소설뿐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다른 흑인 작가들에 비해 투쟁 또는 고발, 평등의 주장 같은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그러나 모든 작품 속에 자신이 흑인임을 자각하고 있으며, 직접 경험한 사회 역시 여전히 한 기차에 흑인과 백인이 함께 앉지 못했으며,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흑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해티 맥다니엘도 남부지방의 시사회 자리에 서지 못했고, 대형호텔엔 뒷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했던 지독한 시절이라, 휴스의 경험 수치는 후배작가 군group이 아니라 자신보다 아홉 살 많은 조라 닐 허스턴과 더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글 속에 백인들의 기득권에 대한 집착을 더 상세하게 묘사한 것을 보면. 휴스가 태어나고 6년이 더 지나 세상을 구경한 리처드 라이트와 12년 후배 랄프 엘리슨은 작품 자체가 장편이고 이제 흑인 문학이 어느 정도 활발하게 논의를 시작해 본격적으로 백인을 살해하고 시신을 화로에 태워 없애며(미국의 아들), 단체를 구성해 체계적으로 흑백평등을 주장하기 시작한다(보이지 않는 인간). 이런 행동파 작가들의 바로 앞에 랭스턴 휴스가 있는 듯하다는 말을 이리 지겹게 길게 했다.
 그럼 랭스턴 휴스는 그저 완곡하기만 할까. 천만의 말씀. 이이의 단편들에서는 흑인들의 머릿속에 충만해 있는 스스로의 왜소성, 백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자신의 이익을 좇는 흑인 지도자들의 위선, 백인들이 품는 흑인에 대한 동정의 허위성 같은 것을 은근히 비틀고 있다. 초지일관 모든 작품을 통해.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에서는 남편이 죽어 엄청난 돈벼락을 맞은 백인 노인 엘즈워스 여사가 음악에 천재가 있는 흑인 아가씨 오시올라를 발굴해 백인식 또는 유럽식 문화의 영혼을 심어주기 위해 최상의 환경을 마련해주지만 정작 오시올라는 음악이면 음악이지 고귀한 영혼은 뭔 말라비틀어진 것인지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것하고, 건달 출신의 흑인 개신교 존스 목사가 대박을 치기 위해 스스로 24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있다가 부활한다고 사기를 치려다 목사 자신의 정부favorita인 메기 브래드포드 자매의 전 애인 불도그 힉스와 공모를 하긴 했는데, 힉스 형제가 메기를 뺏긴 복수를 하기 위하여 정말로 왼손 손바닥에 못질을 쾅쾅하고, 이에 맞춰 존스 목사가 비명을 질러대는 코미디 <어느 부활>을 재미있게 읽었다.
 라이브러리에 랭스턴 휴스라는 미국 흑인 작가 한 명을 더 보탠 것도 좋은 일인데, 좋은 단편 몇 편을 읽는 기회이기도 해서 더 좋은 경험이 됐다.



 한 가지 유감이라면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의 첫 문장이 “피아니스트 오시올라 존스는 파리에서 필리프에게 사사를 받았다.”라는 것. 사사師事하다라는 단어 자체가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으로 ‘사사를 받았다’는 말은 여차하면 주객이 전도되게 읽힐 수 있다. 번역하는 사람들이 흔하게 저지르는 오류다. 이렇게 써야 한다.
 “피아니스트 오시올라 존스는 파리에서 필리프를 사사했다.”
 나 참, 프로 역자한테 아마추어 주제에 별 걸 다 지적한다. 이런 거 슬쩍 일러주지 않고 공개된 장소에서 지적질한다고 타박이나 안 받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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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20-01-08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든 작품이 다 좋았지만 내가 연주하는 블루스를 특히 재밌게 읽었어요ㅋㅋㅋㅋ 뭔 말라비틀어진 고귀한 영혼 ..격하게 공감

Falstaff 2020-01-08 15: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가 마리아 칼라스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근데 김추자 나오면 미쳐버린답니다. ^^
 

르 클레지오 지음, 홍상희 옮김 / 책세상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여태까지 읽은 르 클레지오가 네 권. <조서>, <황금물고기>, <사막>, 단편집 《열병》. 이번에 읽은 <섬>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여태 내가 알던 르 클레지오에 비교할 수밖에 없는데, 굳이 한 마디로 하자면 이렇다. 대박.
 처녀작 <조서>는 제쳐놓자. 읽어본지도 오래됐고, 어쨌든 내 기억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해변의 빈집에 숨어들어 사는 청년의 허망한 초상 정도. <황금물고기>도 읽고 난 다음에 흥분을 했었다. 이 책을 읽고 르 클레지오의 팬이 되기로 결심을 했을 정도였으니. <사막>은 어쩐지 <황금....>과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어 감도가 좀 떨어진 느낌이 들었었고.
 큰 의미에서 <섬>, 원래 제목이 <La Quarantaine>. 불어사전을 열어 검색해보니 “검역”, 즉 ‘전염병이 돌고 있는 지역으로부터 오는 사람·선박·화물 따위를 검역당국이 일정기간 격리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해놓았다. 책의 주된 흐름은 아닐지언정 작가는 조연助演격인 자크 아르샹보가 어린 시절 파리의 한 카페에서 술에 잔뜩 취한 무례한 랭보를 만났적이 있으며, 1891년 부모가 죽자 아내 수잔, 친동생 레옹과 함께 그들의 선조들이 살던 모리스 섬, 즉 모리셔스로 향하던 중 첫 번째 기항지인 소말리아 아덴에서 다리 화농으로 죽어가는 랭보를 의사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만난다고 설정을 해두었다. 랭보. 움베르토 에코 선생이 말하기를, 진짜 시인은 스무 살 때까지 쓴 낙서를 찢어버리고 상아장사를 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떠나는 법이라 했다. 그러니 에코 역시 랭보를 ‘진짜 시인’으로 꼽았다는 것. 나 역시 그리하여 드디어 내 돈으로 처음 외국 번역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샀다가, 결국 와다닥 읽고 나서 휙, 던져버렸다는 거 아닌가. 아, 번역시는, 그게 비록 위대한 불문학자 김현이 번역의 업을 맡았다 해도, 읽는 게 아니다. 근데 왜 뜬금없이 랭보? 다시 에코의 말로 돌아가서, 스무 살 때까지 쓴 낙서, 앞으로도 낙서 비슷하게 끼적이기만 해도 프랑스 국가대표 시인이란 이름으로 확실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으나 그까짓 것 싹 무시하고 자유를 찾아 검은 대륙으로 떠나 상아와 무기 장사로 남은 삶을 소비한 시인. 이처럼 이 책 <섬>에서도 귀족 또는 유력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음에도 자유와 사랑을 찾아 세상이라는 정글로 떠나는 인물 ‘레옹’을 주인공으로 삼아 전적으로는 아닐지언정 상징적으로 랭보와 유사한 길을 걷게 하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이 책은 사랑 이야기다. 그것도 아주 독한 사랑. 모든 것을 버리고 죽음마저 불사하며, 그러나 불꽃 같이 활활 타는 대신 마치 운명의 실에 이미 꿰어진 채 세상에 나온 연인들 간의 자연을 닮은 필연적 사랑.
 1891년. 자크와 그의 아내 수잔, 자크의 동생 레옹이 모리셔스 섬을 향해 아바 호를 타고 항해를 하다가 폭풍우가 치던 5월 27일, 몇몇 유럽인들과 함께 모리셔스 섬 못미처 플레이트 섬에 긴급 상륙을 한다. 인도에서 출발한 다수의 이민자들도 함께. 사실은 배 안에서 콜레라 혹은 천연두로 보이는 전염병이 발생해 큰 섬인 모리셔스를 방어하기 위해 전염병 환자 및 환자가 될 확률이 많은 정상인들을 작은 플레이트 섬에 격리시키기 위한 하선이었던 것. 섬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역시 격리 수용되었다가 그곳에 아예 정착해버린 인도인과 극소수의 유럽인이 살고 있었다. 이 가운데 복잡한 내력을 가진 여인이 한 명 있다. 세포이 전쟁 때 죽은 유모의 품에서 발견된 영국 아이가 현명한 인도 여인 ‘지리발라’에 의하여 구출된 후 그녀의 딸로 삼아 이름을 ‘아난타’라고 했다. 지리발라는 아난타를 데리고 인도를 탈출해 모리셔스 섬으로 이민선에 올랐으나 배에 역병이 도져 역시 플레이트 섬에 격리되었고, 여기서 살아남아 섬에서 살다가 생을 마치고 힌두교 식으로 화장을 했다. 아난타는 다시 인도에 갔다가 딸 하나를 낳았고, 어머니 지리발라의 혼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플레이트 섬으로, 이곳에서 죽기 위해 딸 수르야바티와 함께 온 터.
 몇 달 동안 모리셔스 섬에서는 이들의 생존을 위한 최소량의 식량만 건네줄 뿐 이들이 다른 땅에서 가져온 죽을병이 물러날 때까지 결코 구원해줄 생각이 없다. 그래 플레이트 섬은 죽음의 땅. 그것도 사방이 바다로 막혀있어 이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병에 걸려 죽거나, 굶주려 죽거나, 아니면 병을 이기고 살아남아 모리셔스 섬에 도착해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가 되는 일. 물론 유럽에서 온 백인들과 절대 플레이트 섬에서 떠날 생각이 없는 인도 이민은 예외로 한다. 절박한 상황이 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 가슴 속에 비밀로 간직해온 진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야만이 드러나고 이기심이 백일하에 튀어나오고 숨겨왔던 지배욕구 마저 솟구친다. 이리하여 인간의 인간에 의한 정글 상태가 되었을 때, 그래도 한 편의 애틋한 사랑의 꽃이 핀다. 레옹과 수르야바티. 이들의 사랑은 불붙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서로 다가서다 사랑만이 자신들의 운명인 것을 알아내고, 드디어 섬에서 해방시킬 구원의 배가 도착함과 동시에, 여태 수르야바티의 도움으로 삶을 이어나가고 병을 이긴 백인들조차 레옹과 수르야바티의 이별을 당연시 했을지라도, 레옹은 백인들과의 모든 관계를 끊는 편을 택한다.
 정말 오랜만에 소설의 내용을 거의 다 말했다. 이 책은 스토리가 중요하지 않은 듯해서 그랬다. 르 클레지오가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삶에 도착하는 광경,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되는 연인들의 모습을 얼마나 뭉근하게 그리고 있는지, 이게 바로 진짜 소설가의 솜씨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작가의 부계가 정말로 18세기에 모리셔스 섬에서 살다가 영국으로 왔다고 한다. 사생활을 거의 노출하지 않는 르 클레지오가 자신의 정체성을 작품을 통해 조금씩 알린다고 역자 해설에 씌어 있기는 하지만, 독자는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다. 어차피 르 클레지오 자신이 영국인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니다. 영국인이기도 하고 프랑스인이기도 하지만 이미 세계인cosmopolitan으로 사는 사람이니 그냥 작품의 재미만 느껴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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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시대의 연애 창비세계문학 64
왕샤오보 지음, 김순진 옮김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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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편 <황금시대>와 짧은 장편 <혁명시대의 연애>를 담은 책. 창비가 이런 면에서 마음에 든다. 다른 출판사 같았으면 마법의 편집술을 써서 각 편을 한 권씩 만들어 모두 두 권의 단행본을 내지 않았을까 싶은데, 쪽 당 스물다섯 줄을 배치하면서 굳이 웬만한 분량의 책을 만들어놓았다. 잘난 척할 때는 무지 밉다가 이럴 땐 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애증의 출판사가 바로 창비다.
 책의 앞날개에 나온 작가소개를 보면, 왕샤오보(王小波)의 생몰연대가 1952~97. 베이징에서 태어나 97년 45세 경에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진 인물이다. 뭐 아까운 나이지만 마흔다섯에 죽는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라서 그럴 수 있다고는 쳐도, 1949년 중국혁명 후 하필이면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힌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고, 중학교 일학년 때 문화혁명을 만나 한 번 더 조리돌림을 당하는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하는 운명에다가 학교도 그만두어야 했으며 이 년 후엔 대륙의 남서쪽 끝, 일찍이 제갈량이 촉의 2대 황제 유선에게 출사표를 써 던지고 출정을 했던 윈난(雲南)지역의 생산건설병단 일원으로 일해야 했다. 참 힘든 시대를 살았던 이. 이때부터 우리 나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의 윈난에서의 경험은 나중에 중편소설 <황금시대>로 다시 탄생하게 된다. 이후 산둥성 소재 생산대를 거쳐 71년부터 약 5년간 몇몇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을 하고, 이 시절의 경험 역시 다른 작품의 소재가 되니 바로 <혁명시대의 연애>다. 어느 작가가 있어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나중에 작품의 소재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만, 작은 물결(小波)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왕샤오보의 <황금시대>와 <혁명시대의 연애>의 주인공(들)이 행위하고 생각하고 경험한 모든 것들이 바로 작가의 그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이 들만큼 구체적이다. 역자 김순진은 해설에서 왕샤오보를 ‘중국의 제임스 조이스’니 ‘중국의 카프카’니 말도 안 되는 별명을 소개하기도 하지만, 두 작품의 주인공 왕얼(王二)이 “작가 자신의 그림자(페르소나)라고 말해”진다고 설득력 있는 평을 전하기도 했다.
 작가의 청소년 시절의 교육은 중학교 1학년이 끝이다. 그리고는 곧바로 문혁의 파도에 휩쓸려 윈난에서 3년, 산둥성과 베이징에서 7년 세월을 보낸 왕샤오보는 놀랍게도 학교를 그만 둔 12년째 되던 해에 중국인민대학에 합격을 하니 그의 나이 스물여섯. 결혼과 졸업 후 2년 간 교사 생활을 한 왕은 서른두 살 때 아내와 함께 피츠버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2년 만에 석사 학위를 받고 그 뒤 또 2년 동안 아메리카와 유럽 등지를 실컷 돌아다니다가 서른여섯 살 때 베이징으로 돌아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 강사로 교단에 서면서 본격적인 자기 작품을 출간하기 시작한다. 그가 45년의 길지 않은 생을 산 것은 이렇게 파란만장한 인간사를 보내, 인간이 겪을 삶의 총량을 서둘러 끝마쳐서이었을까? 남다른 재주와 행동력과 용기가 있었던 사람으로 보여 그의 짧은 삶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여태까지 읽어온 중국 작가들의 문화혁명에 대한 시각과 조금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러다가 역자 해설을 통해 ‘조금 다름’이 무엇인지 한 번에 이해가 됐다.
 다이허우잉, 모엔, 위화, 옌롄커 등의 작품을 통해 본 문화혁명은, 주로 ‘선한 우리편’이 혁명의 주체였던 홍위병 등의 핍박을 간신히 버텨내든지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든지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왕샤오보는 자신의 가족이 ‘인민의 적’으로 분류되는 계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선한 우리편’도 아니고 홍위병을 비롯한 가해자들이 ‘나쁜 너네편’도 아닌 것으로 규정했다. 그저 혁명시대, 우연히 자신의 황금시대가 겹친 역사적 전환시절에는 누구나 복권에 당첨될 수 있을 뿐이라 이야기한다. 복권 당첨은 당첨인데 복권이 두 종류가 있어서 하나는 행복복권, 또 하나는 불행복권. 특히 혁명시대엔 불행복권에 당첨되면 특성상 당첨된 이들이 사라짐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내가 당첨될 확률이 높아지는 반면, 행복복권에 당첨되는 확률은 점점 줄어드는 시기라고 시니컬하게 이야기한다. 이는 작가 스스로, 또는 두 작품의 주인공인 두 명의 왕얼이 혁명시기의 고난을 그리 큰 불평 없이 그냥 넘어온 것하고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왕샤오보는 소설 속에서 다량의 성적 묘사를 첨가했다. 심지어 <혁명시대의 연애>의 서序, 첫머리에 이렇게 써놓기도 했다.
 “이것은 섹스에 관한 책이다. 섹스는 본인의 힘을 추진력으로 하지만, 때로는 자발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하 생략)
 오호, 그래? 이런 머리글을 읽고 어찌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언제나 그렇듯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지만. 이 책이 섹스에 관한 책이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섹스다. 그렇다. 바흐를 들으면서 섹스를 느낀다는 노 시인의 말을 다시 따올 것도 없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은 섹스라고 은유하는 교감交感 또는 소통疏通의 진행과정이니까. 황금시대나 혁명시대에는 더 특별한 교감과 소통이 필요했으리라. 그런 의미라면, 이 책은 섹스에 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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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4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눈 먼 암살자> 한 편으로 마거릿 애트우드의 팬이 됐다. 이후 이이의 작품을 특별히 검색해 찾아 읽는 정도는 아니지만, 쇼핑 중에 눈에 띄면 유심히 바라보는 단계에 접어들었고, 그래서 <시녀 이야기>를 읽었는데, 비록 올해 영국의 맨부커 상을 <시녀 이야기> 15년 후를 다룬 소설 <Testament>가 받았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독자들로부터 극찬을 받기는 했지만 정작 특별히 인상 깊게 읽지 못하는 바람에(페미니즘 적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은 이거 말고 게르드 브란튼베르그가 쓴 <이갈리아의 딸들>이 확실하게 깨는 작품 아닌가 싶어서.) 애트우드의 다른 작품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한국어로 바꾼 <눈 먼 암살자>도 우리말 문장이 별로 매력이 없었다는 것이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 하겠고. 그래 <도둑신부>를 몇 년째 책방 보관함에 담아두고는 있었지만 정작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가 이제야 사 읽게 된 것. 이제 책을 읽고 난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마거릿 애트우드가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 가운데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라는 것. 애트우드만큼 탁월한 구라꾼은 쉽게 발견하지 못하리라. <눈 먼 암살자>도 그렇고 <도둑신부>도 그렇고,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보장한다. 1권 507쪽, 2권 327쪽, 합해서 834쪽에 쪽 당 24행 편집. 이거 이틀 반이면 다 해치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어보실 분은 섣불리 월요일이나 화요일에 첫 장을 여는 우를 범하지 마시라. 나야 밤엔 한 병의 소주를 마시느라 이틀 반이 걸렸지 눈하고 신체 건강한 독자가 금요일 오후에 시작하면 일요일 새벽엔 다 읽을 수 있으리라. 주중에 시작하면 어쩔 수 없지 뭐, 연차휴가 내야할 걸?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책은 대학 동창 토니, 로즈, 캐리스가 한 달에 한 번 모여 점심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날부터 4년 6개월 전인 3월에 전쟁사학자 토니와 성공한 기업가 로즈, 심령술에 관심이 많은 친환경 잡화점 점원 캐리스는 그들과 같은 대학 선배 ‘지니아’의 장례식에 참석을 한 적이 있다. 이 문제적 여인 지니아로 말할 거 같으면, 러시아에서 탈출한 백작부인의 딸로서 엄마의 생계를 위해 어려서부터 매춘도 불사해왔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폴란드 계 유대인으로 독일의 탄압을 피해 캐나다로 이주해왔다고 주장하기도 하며, 원래는 동유럽 집시족의 후예로 갖은 고생 끝에 캐나다로 굴러들어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니아가 세 명의 주인공에게 접근해서 한 일은 사실 대동소이하다. 일단 트렁크를 끌고 와서 갖은 핑계와 궁상을 떨어대 주인공 집에 몇 주 동안 머무를 수 있게 허락을 받고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몇 달간 무료로 기숙한다. 밥과 돈을 축내면서도 설거지 한 번 도와주지 않고 점점 불편한 관계로 성숙, 발전시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의 남자친구 또는 남편과 함께 사라지는 일. 사라지면서 집안의 현금은 물론이거니와 자기가 부정 서명한 수표까지 한 장 들고. 그까짓 돈이야 주인공들이 원래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있어 그리 큰 타격은 아니지만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남자까지 주머니에 홀랑 담아 내빼버리는 건 어떻게 감당이 되지 않았던 거다. 자신은 저 옛 시절의 인연으로 정성을 다 해, 아니면 가능한 한 선의를 가지고 돌봐주었는데 그걸 이리 큰 원수로 갚아버리니 인간에 대한 신뢰 자체가 붕괴의 위기를 맞을 수밖에.
 금발, 아름다운 얼굴과 훌륭한 몸매, 실리콘 유방, 거기다가 남을 설득하는데 탁월한 천재가 있는 여자 지니아. 얼굴과 몸매는 모르겠고, 정말 이런 사람들이 있다. 설득 천재. 중국에서 이런 유형의 대표적 인물로 합종연횡과 관련한 소진과 장의를 따를 수 없고, 우리나라에선 역시 봉이 김선달을 으뜸으로 삼아야 하리라. 장의는 사람을 잘못만나 늘씬하게 얻어터져 자리보전을 하다가 마누라한테, 여보 내 혀가 잘 붙어 있는지 좀 보소, 해서, 뻘건 살점이 제대로 붙어 있소, 하니, 그럼 아무 문제없소, 이제 일어나기만 하면 한 나라의 재상자리가 내 것이오, 했다는 거 아닌가. 이런 인물들이 한 번 마음먹고 특정인을 속여 넘기려 안짱다리 걸기를 했다하면, 이건 알고도 당하게 되어 있는 거다. 사람이 살면서 절대 하면 안 될 말이, 다른 사람 다 속여도 나한테는 사기 못 친다, 하는 것도 들어 있다. 명심하시라. 그런데 잘 보면, 사기 당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쉽게 돈 벌려다 뒤통수 제대로 맞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토니, 로즈, 캐리스, 이 세 명의 여자들은 공히 순전히 선의에 입각한 친절을 베풀었다가 귀싸대기 맞는 지경을 당했으니, 귀싸대기도 보통 귀싸대기가 아니고 집안이나 생활 자체가 완전히 전도될 정도의 타격을 입었으니 이이들의 상실감은 심리치료사의 진료를 받아야할 정도였다.
 그런 지니아가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폭탄 테러가 벌어질 때 하필이면 그 자리에 있다가, 로즈의 표현대로 하자면, 꼴까닥 해버렸다. 그래 현지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이 도시락 통에 밀봉된 채 캐나다에 도착했고, 세 친구는 장례식에 참가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자기들 눈으로 직접 땅에 묻히는 장면까지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공동묘지까지, 꽃샘추위에 발발 떨면서도 가야 했던 거였다. 그리고 4년 6개월이 흘러 이 세 명의 40대 중후반의 여성들은 주로 젊은이들이 밤에 약간의 마약도 즐기고, 펑크 음악도 듣고 술도 마시는 음식점 ‘톡 시크’에서 점심을 먹으며 여전히 동일한 주제, 즉 지니아가 얼마나 죽일 년이었는지를 토의하며, 구덩이에 지니아의 유골을 묻은 나무가 말라죽어 뼛가루에조차 한 점 선선한 그늘을 만들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악담을 쏟아 부으며 깔깔깔 홍소를 퍼부을 때, 역시 제일 재미있는 건 여기 없는 애들 흉보는 거라니까, 하면서 말이다, 거의 검은 빛깔이 나는 진보라 색 옷을 입은 묘한 분위기의 여자가 이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로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저편 자리를 향해 걸어갔고, 다른 여자들에 비해 머리통 하나 정도의 키가 작은 여성 전쟁사 연구가 토니가 한 눈에 검은 옷의 여인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지니아임을 단박에 알아채, 로즈와 캐리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 봐. 소리는 지르지 말고.”
 죽어 이미 나무 밑에 묻어버린 지니아가 죽은 지 4년 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이들이, 방금 전까지 와인과 생수를 겸해 점심으로 당근, 코티지 치즈, 차가운 렌즈 콩 샐러드로 만든 래빗 딜라이트(캐리스), 허브와 캐러웨이 씨를 넣은 빵, 구어메이 토스티드 치즈 샌드위치(로즈), 팔라펠, 샤실릭, 쿠스쿠스와 후머스로 이루어진 중동요리 스페셜(토니)을 먹고, 디저트까지 다 해치운 식당, 톡 시크에 온 것이며, 지니아가 왜 하필 이곳에 왔을까, 하나만 가지고도 세 친구들은 등골을 타고 소름이 쪽 끼친 것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상당량의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이후 소설은 이들이 어떻게 지니아에게 당했는지 토니, 캐니스, 로즈의 순서대로 설명을 하고, 지니아가 어떻게 살아났으며 어떤 목적으로 다시 이들 앞에 선 것인지가, 아주 재미있게 펼쳐진다. 읽어보시라. 번역한 문장도 나무랄 데 없어 읽기에 아주 좋다. 물론 우리네 살림에서는 이렇게 극적인 사건들이 친구 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겠지만, 그건 우리네 살림을 그대로 쓰면 소설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끔 우리도 주인공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고 있지 않나.
 “잘 해주면 이것들이 아주 날 바보로 생각한단 말이야!”
 “오냐 오냐 하면 사람을 우습게 봐요!”
 또 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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