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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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가 토카르추크. 201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통해 처음 들은 작가. 당시 기사엔 시인이라고 소개했던 것 같다. 외국 시는 읽지 않는 습관이 있어 관심을 끊었는데 의외로 이이의 소설 몇 권이 시중의 종이 값을 올려놓아 찾아 읽게 됐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흥미로운 책이다. 책은 ‘태고의 시간’, ‘게노베파의 시간’ ‘미시아의 천사의 시간’ 같은 짤막한 에피소드들이 작은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다양한 색채를 주면서 오밀조밀하게 모여 폴란드의 작은 마을이 191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의 격랑을 여자들의 계보를 통해 그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옮긴이의 말에서 본 것도 같은데) 마르케스 작품의 주요 무대가 되는 마콘도 마을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중에 저절로 들게 된다. 비단 작품의 무대뿐만 아니라 신, 천사, 심지어 귀신과 이를테면 가구 같은 사물의 정령까지 동원하는 모습이 라틴 아메리카의 환상문학, 붐 문학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는 것까지 그렇다. 편집도 널럴하고 자그마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촘촘히 나열되고, 표현의 방식까지 재미있어 마음먹으면 휴일 하루에 책 다 읽고 독후감까지 쓸 수 있다.
  위에서 여자들의 계보를 언급했던 바, 제일 먼저 거론이 되는 이가 게노베파다. 서양의 옛 이야기 속에서 게노베파는 지금으로 보면 독일 땅의 영주 지크프리트의 아내로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면서 아내의 안위를 위해 남겨놓은 심복 골로의 위협과 계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정절을 지킨 여인으로 이름이 높다. 이름을 러시아식으로 하면 미하우 유제포비치 니에비에스키인 게노베파의 남편이자 물방앗간 주인 역시 러시아 군대에 의하여 강제징집 당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데, 토카르추크가 이야기하듯 신의 직업이 일종의 회계사 비슷한지라 한 사람을 인출해 가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른 한 명을 채워 넣는데 게으름이 없어 게노베파가 임신을 한 상태였다. 그래서 다음 해에 태어나는 생명이 ‘미시아’. 미시아가 성장해 옆의 옆집에 사는 의욕적인 젊은이 파베우 보스키와 결혼해 딸 넷을 두고, 이중 맏이 아델카가 모든 태고 마을의 추억과 땅과 집을 두고 떠남으로 이야기를 마감하게 된다.
  미하우 니에비에스키 씨, 사실상 이야기의 주인공인 미시아의 아버지의 성姓 니에비에스키는 폴란드 말로 ‘하늘의’ 또는 ‘천국의’라는 뜻의 형용사라고 한다. 발음이 쉽지 않아 애먹었는데, 중간쯤부터 이 이름을 ‘니 애비 애 새끼’로 발음하니 쉽게 읽혔다. 그저 참고만 하시라. 하여간 니에비에스키 씨는 세계대전에 참전해 (태고 마을 사람들은 이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살아있기는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질 않는 거다. 그 사이에 게노베파는 미시아를 낳고, 미시아가 벌써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됐는데도. 폴란드의 게노베파는 옛이야기 속 게노베파와 조금, 아주 조금 달라 물방앗간에 아르바이트로 임시 채용했던 잘 생기고 젊은 유대인 엘리와 서로 연정을 품게 된다.연정은 원래 파박! 하고 불꽃처럼 오는 법. 곧이어 본격적으로 후다닥 옷을 벗고 베드 씬을 벌이려는 순간 게노베파라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 엘리에게 남편이 죽었다는 확실한 소식을 듣기 전에는 자신의 몸을 만지지 않을 것임을 유대 신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라고 요구하니, 다 된 줄 알았던 엘리의 몸과 마음이 어땠겠는가. 그런데 남편이 돌아왔다. 저 멀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폴란드까지 걸어오느라 일 년이 걸렸단다. 나 참. 이 정도면 작가 토카르추크의 뻥치는 스케일도 보통을 넘는다. 하여간 집에 돌아온 미시아의 아빠 미하우. 게노베파가 남편에게 처음 한 말이, “미하우, 그 어떤 남자도 날 건드리지 않았어요.” 그래, 맞는 말이긴 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흘러 1928년 11월에 게노베파가 아들 이지도르를 낳았을 때, 유대인 총각 엘리는 게노베파에게 자기 아이라고 주장을 했다나?
  게노베파가 새댁이었을 때, 한 겨울에 어느 맨발의 거지 소녀에게 코페이카 동전을 하나 준 적이 있어, 이 아이가 이름을 ‘크워스카’라고 했고, 책에서 상당히 중요한 배역을 맡는다. 점점 나이가 들어 10대 중반부터는 태고 마을의 거의 유일한 창녀로 이름을 드높이면서도 나와 당신이 서로 동등하니 내가 당신 밑에 누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며 결코 누워서 행위 하지 않았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그러다가 결국 임신을 해 만삭이 되었을 때, 태고 마을의 서쪽에 위치한 성castle의 여주인 포피엘스카야 부인이 자기가 주인인 보호소에서 아이를 낳으라고 권하며 이 지역의 모든 땅과 숲이 자기 소유라고 하자 코웃음을 탁 치며 “전부 당신 거라고요? 작고 말라빠진 가여운 암캐 같으니라고……” 대꾸해 쫓겨나 다 허물어져 지붕도 없는 폐가에서 나은 아들은 ‘조용한 탄생’ 영어로 still born, 다시 한자어로 하면 사산死産하고 만다. 이렇게 주인공 주변의 여인들이 아들을 낳으면 사산을 하거나 게노베파의 아들 이지도르처럼 뇌수종이라 조만간 죽을 팔자임을 판정을 받는 등 심각한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 그래 태고 마을의 주인공 명맥은 저절로 여자들에 의하여 이어지는 것. 이후 크워스카는 앞날을 내다보는 신통력을 갖게 되고, 숲과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와 섭리 같은 것에 달통하는데 또 한 명의 문제의 여인 ‘루타’라는 딸도 낳는다.
  이렇게 게노베파-크워스카 세대가 미시아-루타의 세대로 이어지며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잠깐의 황금기와 사회주의 폴란드의 경제적 궁핍에 이어 바웬사에 의한 자유노조 혁명과 민주화까지 태고라는 이름의 유럽 변두리 국가의 작은 마을의 흥망이 환상적 리얼리즘, 내 식대로 이야기하면 아몰랑주의적 기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독후감에서는 환상적 리얼리즘 식의 묘사에 관해서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만일 이 요소를 뺀다면 토카르추크의 작품을 읽는 즐거움을 반쯤 잃어버릴 것은 분명하다. 사회주의 정부에 의하여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성과 토지와 숲이 국유화되는 과정에서도 결코 멈추지 않았던 ‘이그니스 파투스’라는, 팔면체 주사위로 하는 '한 명의 게이머를 위한 유익한 게임' 같은 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직접 읽어서 알아보십사 하는 의미로.
  다른 거 다 빼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잖은가. 이름값만 갖고도 한 권 쯤은 읽을 만하다. 그 한 권을 읽고 나서 작가가 쓴 다른 책을 찾아볼까, 생각해보는 것은 당신의 선택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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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1-28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몰랑주의‘의 작품은 읽어본적이 없어 이 작품은 자꾸 피하게 되지만 폴스타프님의 리뷰는 참 읽고 싶게 만드네요.

Falstaff 2020-01-28 13:56   좋아요 1 | URL
ㅎㅎㅎ 말씀만 들어도 황감합니다.
재미있는 책입니다. 근데 선뜻 권하지는 못할 거 같습니다. ^^;;
 
고양이 눈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5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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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번째 읽은 애트우드. 이 가운데 가장 재미가 ‘덜’했다. 애트우드의 작품 출간 순으로 네 권을 나열하면 <시녀 이야기>1985, <고양이 눈>1988, <도둑 신부>1993, <눈 먼 암살자>2000. 마거릿 애트우드의 정체성은 페미니스트이다. 기본적으로 페미니즘, 그러나 전투적 여성주의 운동가들의 시선으로 보면 여전히 개선시키고 싶어 할 대상일 정도이며, 만일 자신을 여성주의 운동의 대표 역할로 내세운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주인공인 화자 일레인의 입을 통해 고백하는 수준이다. 이 책이 비록 여성주의에 기초하여 씌었으며, 화자 ‘나’가 소설가가 아닌 화가임에도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다분히 자기고백적인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나’ 일레인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원조 캠핑카인 스터드베이커 차를 몰고 동북부 캐나다 지역을 유랑하는 곤충학자 슬하의 남매 가운데 동생이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가 토론토에 있는 대학의 교수로 임용이 되자 그곳에 정착한다. 화자는 토론토의 유년시절 부터 다 자라 벤쿠버로 독립해 옮길 때까지를 추억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애트우드 자신이 유년기에 주인공과 비슷하게 북부 캐나다를 유랑하다가 겨울이 되면 도시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나’ 일레인은 지금 태평양을 면한 브리티시컬럼비아에 살고 있는 노년, 또는 적어도 갱년기의 성공한 화가. 그래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낸 토론토의 미술 기획자가 화가의 고향으로 알려진 토론토에서 회고전을 하고자 하니 일차 왕림해주시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여 토론토 방문을 결심해, 전남편 존의 작업실에서 프랑스 식 이불인 듀베로 몸을 둘둘 감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 전남편의 작업실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 없다. 한 때는 온갖 식기와 가전제품이 상대방의 얼굴과 몸통을 향해 비행한 적이 있었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극동과 극서지방이라는 거리와 그들 사이의 혈육으로 곧 의사자격증을 취득할 예정인 세라가 있어 서로의 증오는 이미 친구 관계 수준의 우정으로 순화되었으며, 예술가였던 존은 직업을 괴기영화 특수 분장으로 바꿔 촬영장으로 장기 출장 중이라 작업실이 비었기 때문이다. 물론 토론토의 엄청나게 비싼 호텔비도 한 몫을 했고. 그러나 일레인의 유년시절과 소녀시대, 청춘시대를 보낸 토론토에 다시 도착하고 보니 지난 시절의 기억이 ‘나’를 덮쳐 온갖 상념과 허상과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고양이 눈’이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도 꼬마들이 겨울이면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의 한 종류다. 투명한 유리 안에 빨강, 노랑, 초록, 파랑 꽃잎이 들어가 있는 구슬로 구슬을 들고 돌릴 때마다 안의 문양이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1960년대까지는 상당히 드물었고 70년대 초엔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아마 그걸 ‘사방 구슬’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 긴가민가하다.) ‘나’ 일레인이 자신의 작은 가방 속에 보물처럼 예쁜 문양의 고양이 눈을 하나 담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지하실을 정리하다가, 부모의 집을 떠나 수십 년이 지난 후 다시 발견하게 되는 유리구슬로 ‘나’ 또는 ‘나’라고 읽는 애트우드의 유년시절을 대표하는 단어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대개 유년시절을 그리는 작품을 보면 어렴풋한 추억 속의 아련한 파편들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애트우드는 그렇지 않다. 책 속에는 네 명의 어린 소녀가 등장한다. 나와 캐럴은 동갑내기이고, 코딜리어와 그레이스는 한 살 위다. 어린 시절의 한 살이란 매우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서 네 명의 우정과 권력은 가장 늦게 합류한 코딜리어의 정치권 안으로 수렴을 하게 되고, 권력을 쥐면 또 그것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지라 코딜리어는 이름과 달리1 ‘나’ 일레인을 왕따 시키기를 즐겨하는 습관이 생긴다.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생각해보니 코딜리어의 언행은 거의 전부 어른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지만 당하는 일레인의 입장에서 따돌림과 불공정한 행위는 심각한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었을 터였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라서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코딜리어는 한 번 월반을 하고 북쪽에 있는 사립학교에 입학했음에도 다시 일레인이 다니는 학교의 같은 학년으로 전학을 오게 된다. 사립학교에서 학교의 표상인 박쥐 문양에다 남자의 생식기를 그려놓은 죄목으로 퇴학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알고 보니 와중에 유급까지 당해 그동안 공부 잘 해 월반을 한 일레인과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 된 것. 이거 <도둑 신부>에서 본 거 같은 구도다. 예전에 자신을 괴롭히고 인생마저 왕창 망가뜨렸던 친구가 몇 년 후 다시 눈앞에 등장하는 거. <도둑 신부>와 많이는 아니고 조금쯤 유사하게 일레인은 역전에 성공하여 원래 마음이 약했던 코딜리어가 일레인에게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해가 감에 따라 거의 완전한 실패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식물에 수재가 있던 일레인이 학문을 포기하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해 그림을 공부하는 과정, 애정 행각을 벌이고, 존을 만나고, 딸을 낳고, 결혼을 하고 급기야 온갖 회한을 품은 채 토론토를 떠나기까지, 한 똑똑하고 성공한 여자의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물론 토론토를 뜬 이후의 삶도 서술을 하지만 분량도 많지 않고 더 중요하지도 않다.
  살면서 주인공과 비슷한 회한이 하나 없는 사람 몇이나 되겠는가. 다 그게 그거지. 배우 엄앵란 씨 말마따나 201호나 202호나. 하지만 작가가 애트우드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이이가 만든 등장인물은 회한이 있어도, 슬픔과 절망을 겪어도 심하게 앓는다. 그래 네 명의 초등학교 동창 가운데 끝까지 조명을 받는 두 친구, 일레인과 코딜리어로 하여금 기어이 손목까지 긋게 만든다. 내가 이상한 건가? 난 이런 오버 액션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살면서 그런 거 생각 한 번 안 해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시라. 그리고 진짜로 면도칼로 팔목 그어보신 분, 천국행 직통 약물을 자셔본 분이 계시면 또 손 들어보시라. 거봐라.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생각만 한 번 해보는 정도이지 않은가. 왜 애트우드의 소설에서는 꼭 끝까지 가야 하는 건지.
 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주인공의 전남편 존이 침실을 광택 나는 검은색으로 페인트  칠을 해놓고 “내가 이사하고 나서 저 벽 색을 바꾸려고 하면 페인트칠을 열다섯 번은 해야 할 걸.”이라고 말하는데, <도둑 신부>에서 팜-파탈, 러시아 백작부인의 딸이자 폴란드 계 유대인이자, 동유럽 출신 집시의 후예이자, 전부 다이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기도 한 지니아의 초대로 주인공의 한 명인 토니가 참석했던 파티가 열린 아파트의 검은 페인트와, 파티를 주최한 아파트 주인의 대사가 똑같다. 아무리 자기 책이라도 이런 건 한 번만 써먹어야지 자꾸 반복하면 어디 되겠어? 부커 상 수상자에다가 늘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라고 하더라도 말이지.

  1. 사실 이건 각주를 달기도 좀 뭐한 것이 다들 아시다시피 ‘코딜리어’는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착하고 아버지께 진심으로 효도하는 딸. 그러나 그의 속내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프랑스 왕한테 시집 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결국 도마 위에서 큰 도끼로 목이 뎅거덩 잘리고 마는 셋째 딸의 이름입니다. 이 책의 코딜리어도 두 언니한테는 찍소리도 못하고, 아빠를 되게 무서워 해서 아빠만 떴다하면 요실금 현상이 생길까 말까 할 정도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집에서는 말 한 마디 못하다가 밖에만 나가면 불쌍한 일레인에게 못된 짓을 하는 꼬마 악동입니다.
    이 아이의 부모에게는 딸만 셋 있는데 이 양반들이 셰익스피어의 사생팬들이라서 셋의 이름을 차례로 <겨울 이야기>의 퍼디타, <폭풍>의 미란다. 그리고 <리어 왕>의 코딜리아로 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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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혹 창비세계문학 75
헤르만 브로흐 지음, 이노은 옮김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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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먼 옛날, 멀고도 먼 까마득한 시절엔 하늘이 땅 위에 놓여 있었단다. 하늘이 땅 위에 닿아 있으면 그것은 언제나 천국이라는 이야기. 사람들은 언재든지 하늘에서 산책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시절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 인간보다 먼저 거인들이 땅으로부터 삐질삐질 머리통을 내밀더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거인들은 하늘이 땅 위에 놓여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거인들은 악하고 질투심이 많아서 땅을 통째로 자기들이 갖기를 원했던 거다. 오직 자기들만. 그래서 돌을 가져다가 높이 쌓았다. 돌로 온 하늘을 받쳐 땅으로부터 완전히 떨어뜨릴 때까지. 그래서 하늘은 더 이상 땅 위에 놓여 있지 않게 됐으며, 하늘은 슬퍼했음에도 어쩔 수 없었고, 그때 거인들이 쌓은 돌로 ‘쿠프론’ 산을 만들었단다. 그렇게 하늘은 다시는 아래로 내려올 수 없었다고 하는데, 혹시 모른다. 누군가 마음이 깨끗하고 어린 눈으로 보면 아무도 보지 못하는 밤에 살짝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곤 했는지도. 헤르만 브로흐의 이야기는 저 먼 시절에 거인들이 쌓아올린 돌의 산, 쿠프론 절벽의 비탈에 자리한 두 마을을 배경으로 풀려나간다. 상부 쿠프론과 하부 쿠프론.
  스물여덟 살의 소아과 전문의 바르바나. 뛰어난 실력과 환자는 물론이고 동료 의사와 간호사까지 한 눈에 사로잡는 장악력, 그리고 헌신적인 직업의식까지 어디 한 군데 나무랄 곳이 없는 전문인. 마흔두 살의 외과의사가 날이 갈수록 바르바나에게 우정을 느끼다가 당연한 수순으로 애정으로 발전하고 넘치는 사랑을 견디지 못해 청혼을 했지만 부드럽게 거절당한다. 그러다 교통사고로 심한 뇌진탕이 생긴 아이를 혼신을 다해 치료했으나 바르바나가 우려한 증상을 그대로를 겪으며 결국 숨지자 그녀는 결국 외과의를 자신의 침상에 불러들이고 한 번의 일탈은 임신으로 이어진다. 임신사실을 알게 된 외과의는 바르바나에게 다시 한 번 청혼을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두 가지 직업과 아이 엄마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없다고 하니, 두 번째 직업이란 공산당 행동대원. 자신이 ‘현재’ 맡고 있는 두 번째 직업은 병원 내 세포조직을 만드는 일이란다. 두 번째 직업과 상관없이 바르바나는 외과의의 실험실에서 새로운 실험에 몰두하며 외과의로 하여금 희망을 끈을 이어가게 했으나 바르바나는 어느 날 한 호텔방에서 바로 그 실험실에서 빼낸 청산가리를 삼키고 자살해버리고 만다. 외과의는 점점 도시에서의 삶에 환멸을 느껴 급기야 의사면허를 가진 어떤 사람도 찾지 않는 산골 오지의 의사를 지원해 쿠프론 절벽 윗동네로 부임해 십 수 년이 흐른 어느 여름, 작년 3월부터 11월까지 벌어진 사건들을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기록하고 제목을 <현혹>이라 한다.
  요란한 역사를 가진 모라비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난 요제프 브로흐는 가난을 견디지 못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인 빈으로 와서 행운과 노력과 사주팔자 덕에 섬유업계의 거상으로 성장한 다음, 친척누이이자 가죽업계 거상의 딸인 요한나 브로흐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는다. 둘 가운데 첫째가 이 책을 쓴 헤르만.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과 글쓰기가 탁월해 수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가업을 잇기 위해 공학과 경영학을 배웠단다. 그러나 자신이 부친의 소원대로 가업을 물려받았으나 마흔이 넘어서면서 회사를 홀랑 팔아먹고 본격적인 집필활동에 들어서서, 소비성향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해, 나중엔 쪼들리는 생활을 겪었다고 한다. 헤르만은 몰랐지. 세상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빵이란 엄혹한 사실을.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때를 맞춰 브로흐 가족에게 들이닥친 건 나치의 폭력. 브로흐 자신도 1938년에 3주 가량 불법 수감되어 고초를 겪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1938년이면 그의 나이 52세. 마흔이 넘어 늦게 시작한 작가생활일지라도 그의 대표작이자 문제작인 <몽유병자들>을 간행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라 토마스 만, 알베르 아인슈타인, 제임스 조이스 등이 도와줘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가족 중 어머니 요한나 브로흐는 1942년 테레지엔슈타트의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나치 입장에서도 브로흐가 더욱 눈꼴시었던 이유는 더러운 유대인 주제에 감히 ‘반파시즘적인 민족연합’을 결성해 함부로 입을 놀린 죄가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어차피 이리 당하나 저리 당하나 시간이 문제였을 뿐이긴 했지만. 이런 상황이니 브로흐가 전체주의, 파시즘에 관해 작품 하나 남기지 않고 생을 마감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 그리하여 1935년에 집필을 시작해 36년에 초고를 완성하고 이후 개작을 하다가 1951년 3본 집필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뉴욕에서 운명한다. 향년 65세. 당시 나이로 그 정도면 짧게 살지는 않았지만 <현혹>은 그래서 결국 ‘미완’이며 ‘유작’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다.
  브로흐의 <몽유병자들>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내가 본문이 겨우 557쪽에 불과한 <현혹>을 무려 나흘에 걸쳐, 입시공부 하듯 노트에 빽빽하게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위, 사건의 개요 같은 걸 요점정리 해가며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브로흐의 소설은, 비록 이것이 스토리가 있는 소설이라는 외피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상징과 의미의 중복, 철학적 논제 같은 것 때문에 잠시라도 맥을 놓으면 곧바로 혼돈의 골짜기로 빠져버리고 말기 때문에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유독 눈에 힘을 주고 읽어야 했다. 물론 다 읽고나면 <몽유병자들>에 비교해서 훨씬 수월한 난이도 덕에 비교적 편하게 읽힌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면 어떨까 생각해보시라. 정작 읽기 전에 먼저 또 브로흐를 겪어야 한다는 걱정이 오죽했었는지.
  상부 쿠프론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광부의 후예로 이들 사이에는 오래 전에 난쟁이들이 금을 채굴하던 시기에 사람들이 난쟁이들을 노예로 만들어 황금을 약탈하려 하자 난쟁이 왕이 사람들에게 학살당하면서 난쟁이가 아니라면 이 갱을 확장하거나 갱의 높이를 더 높이지 못하리라고 저주하면서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진짜로 난쟁이갱坑이란 폐광이 존재하기도 하고 주민들도 이 갱을 더 깊이 파기만 하면 틀림없이 황금을 캘 수 있으리라 믿고 있지만, 중요한 등장인물인 산山마티아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훌륭한 인격체이며 자연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예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 기손, 이들과 매우 친분이 있는 토마스 주크 등은 진짜로 금을 캐내기 위해서는 먼저 산이 허락을 해야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하부 쿠프론에는 원래부터 이 지역에서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던 농부들의 집단으로 어떤 의미에선 이방인인 상부 쿠프론 사람들을, 비록 두 집단 간의 친목과 상호부조와 종교행사 등을 차별 없이 나누지만 은근히 멸시하는 경향이 있어 후에 산신부山新婦라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이름가르트의 아버지 로렌츠 밀란트 씨가 젊은 시절에 상부 쿠프론 출신의 아가씨 에르네스티네 기손 양을 아내로 맞이하자 부친이 극도로 불쾌하게 여겨 죽을 때까지 며느리를 외면했으며, 아들에게 재산을 유증 하느냐 마느냐로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작은 고을에 3월의 어느 날, 석탄을 운반하는 트럭을 얻어 타고 피곤한 몰골에 형편없는 신발을 신은 ‘마리우스 라티’라는 젊은 남자가 도착하면서 이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소설의 막이 올라간다. 마리우스는 얻어 타고 오는 차 속에서 운전기사와 두 명의 조수에게 끊임없이 ‘정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바람에 이들의 분노를 사면서 등장한다. 마리우스는 밀란트 씨의 고용인이 되는데, 밀란트 씨는 마땅하지 않았음에도 우연인지 아니면 지역의 운명인지 그를 받아들였고, 마리우스는 자연스럽게 맏딸 이름가르트와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이 지역에서 내려오는 금광의 꿈과 자기가 주장하는 정결을 기치로 점점 하부 쿠프론의 농부와 지역공동체의 젊은이들에게 독자들만 실체를 알 수 있는 '헛된' 꿈을 심어주기 시작하고 고을이 생긴 이래 공통적인 ‘꿈’을 가져본 적 없던 장년층과 지도층까지 모두 이것을 성취 가능한 목표로 설정을 하게 된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키가 작지만 상당한 팔 근육의 사나이 벤첼. 벤첼은 급기야 상부, 하부를 막론하고 젊은이들로 구성된 군대편성 비슷한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자신이 거의 난쟁이 수준의 작은 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전설로만 내려오는 난쟁이갱을 파내려가려 하다가 상부 쿠프론에 사는 소수의 현명한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아, 한 명의 등장인물만 더 소개하자.
  라디오 대리점이자 농기구 대리점에다가 보험외판까지 하는 도시출신의 못생기고 가난하고 허약한 ‘베취’ 씨. 마리우스가 지역에 들어와 밀란트 씨의 고용인이 되어 책 속에서 제일 처음 한 일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률에 맞춰 밀란트 씨의 작은 딸 체칠리에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고 아무런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라디오를 꺼버린 일이다. 음악과 춤은 도시용이어서 땅과 연결하는 정결의 의지와 반대되기 때문에. 이후 마리우스와 그의 하수인으로 볼 수 있는 키 작은 벤첼과 벤첼의 부하들은 수시로 베취 씨를 괴롭히다가 급기야 그를 나무에 묶어놓고 린치를 가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지역 주민에게 금, 즉 부와 정결과 약한 사람들의 추방을 약속하는 마리우스와 키 작은 벤첼. 초고를 쓰기 시작한 1930년대 중반의 오스트리아, 독일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독자는 안다. 마리우스는 지역 주민들에게 거대한 최면의식으로 기독교적 축제를 이용하여 피에 의한 정화를 주장했음에도 책이 끝날 때쯤에는 공동체위원으로 발탁된다. 현혹이란 무엇인가. 이런 거대한 공동최면 상태에 휩쓸리는 일. 주인공인 의사 화자 ‘나’조차 숱한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 역시 집단 최면에 취하게 되는 힘. 그게 바로 전체주의의 실체이며, 실체의 핵심인 최면상태에 빠지게 하는 현혹이다. 현혹은 언제나, 어디서나 반복될 수 있음을 인류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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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1-2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 있는 책인데...
도서관이나 좀 묵혀서 중고로
만나는 것으로.

Falstaff 2020-01-23 09:59   좋아요 0 | URL
브로흐 책 중에서 그래도 제일 편하게 읽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선택이야 어떻게 하시든 한 번은 읽어봄 직한 작품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얄라알라 2020-01-23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우 557쪽^^:;;;
겸손하신 Falstaff님.

동의도 하지 않고 라디오를 꺼버린.
이 부분은 실제 묘사를 더 자세히 읽고 싶어지네요.

Falstaff 2020-01-23 12:36   좋아요 0 | URL
아니... 그게, 페이지 수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거였는데요. ^^;;;

마리아스가 밀란트 씨의 피고용인이잖아요. 일꾼 주제에 주인댁 둘째 따님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걸 그냥 팍 꺼버리는 장면입니다. 이제 어린 애는 자야 할 시간이며, 그다음 이유로 라디오는 도시용이라 우짜구 저짜구 하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아무도 마리아스의 허튼 짓에 뭐라하지 않는 것이지요. 뭔가 주위를 지배하는 힘, 아우라가 있는 그의 모습이 처음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랍니다.
 
모리스 열린책들 세계문학 244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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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연애소설. 무릇 소설의 꽃은 연애소설이라는데 나는 이의가 없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라도.
 책 소개 글에도 나왔듯이 작품은 1913년에 시작해 1914년에 끝을 맺었지만 작가의 말에서 보듯 원고는 포스터의 책상 서랍 안에서 오랜 세월 동안 바싹 말라가다가 “성인들 간의 합의된 동성애에 관해서는 처벌하지 말 것을 권고한” 1957년의 ‘울펜든 권고’가 법제화된 1967년 이후에, 비로소 세상에 나와도 될까? 이제는 이 작품을 발간해도 여태 쌓아온 E.M. 포스터,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의 명성이 진흙탕에 쑤셔 박히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 간을 보다가 그가 죽고 일 년이 지난 1971년에 이르러서야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작품이다.
 작가는 1879년에 태어나 퍼블릭스쿨을 거쳐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를 졸업한 영국의 상류계급, 노동하지 않거나 변호사나 금융업 등의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새로운 신사계급으로 당연히 집안에 하인과 하녀를 수다하게 거느린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19세기에 출생한 거의 모든 작가들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수 요소인 다독,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신분에서만 나왔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니까. 그런데, 포스터보다 불과 1년 늦게 태어났으며 심지어 포스터와 같은 킹스칼리지 출신의 또 한 명의 영국 작가 래드클리프 홀1이 있다. 이 사람도 <모리스>와 유사한 주제의 <고독의 우물>을 써서, <모리스>를 쓴 시기와 비교해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 1928년 런던의 하늘 아래 붉은 불온 삐라처럼 자신의 작품을 살포하고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죄목으로 ‘당당하게’ 출판금지 처분을 접수했다. 같은 해, 포스터보다 6년 늦게 태어난 D.H. 로렌스는 동성애는 아니지만 러브씬이 대단히 끔찍하다고 외설이라는 판정을 받아 필생의 역작 <채털리 부인의 연인> 역시 출판 금지의 월계관을 쓴다. 포스터는 자신의 문제작(이 될 수도 있었던) <모리스>를 세상의 법에 의거한 ‘자유로운 출판’을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자유롭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자신이 천국의 즐거움이 어떤 맛인가를 확인 한 다음 해에야 세상에 나오게 한 반면, 홀과 로렌스는 기존의 율법은 개나 물어가라고 외치면서 속세의 콘크리트 바닥에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물론 <모리스>가 대단히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어느 연애소설이 그렇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 연애소설의 초점은 외로움과 기다림과 고통을 어떻게 묘사하느냐는 것에 결판이 나고, 이 방면에 관해서 E.M. 포스터만큼 담백한 문장으로 절절하게, 말이 쉽지 어떻게 ‘담백한 문장으로 절절하게’ 만드느냐는 것인데, 그렇게 쓰는 작가는 별로 보지 못했다. 그것도 “잘 생겼고 건강하고 육체적 매력이 있고 정신적으로 둔하지만 사업능력이 있고 또 얼마간 속물”의 성향을 지닌 모리스 홀이 작품의 중후반까지 계속 유지하는 신사계급의 위선과 거만과 아집과 고정관념과 부의 약속을 물리치고 기꺼이 사랑을 좇아 하층 계급으로 스스로 편입한다는 점에서 포스터의 (상대적으로)진보적인 시각을 엿볼 수는 있지만 ― 그날 밤 내내 그의 몸은 알렉의 몸을 갈망했다. 그는 그 욕망에 <음탕함>이라는 간단한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직업, 가족, 친구들, 사회적 지위를 거기 맞세웠다. 이 목록에는 당연히 그의 의지도 포함시켜야 했다. 의지가 계급을 초월할 수 있다면 우리가 건설해 온 문명을 산산조각 날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랑을 위해 계급과 문명마저 타파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그의 작품 속에만 있는 바였으며, 작가는 작품의 출간을 포기, 또는 의도적으로 지연시킴으로 해서 자신의 진보적 운동성이 허구에 불과했음을 자인하게 된다. 이런 해석이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비슷한 책을 발간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을 밝히고 작품 역시 영불해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영국 내 문화의 협소성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다른 작가들과 대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터는 홀과 로렌스가 고통을 당하는 와중에 심정적으로는 당연히 그들을 지지했겠지만(포스터는 1949년 영국 왕실이 작위를 주고자 했으나 정중하게 사양한 이력이 있다) 나서서, 엄혹한 영국의 법정의 증언대에 서서 그들을 위해 자신의 소신을 밝힌 적이 있을까? 이건 내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다. 모르고, 또 의심이 들어.
 133쪽 부근에, 이미 모리스와의 사랑에 금이 가버린 클라이브 더럽, 모리스로 하여금 동성애의 즐거움으로 인도해놓고 자신은 다시 이성애의 벽 너머로 가버리면서 진정한 동성간의 사랑은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소리만 늘어놓는 개자식이 이미 마음속으로는 모리스를 떠났음에도 그걸 내색하지 못할 즈음, 그의 어머니 더럽 부인은 모리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클라이브는 대신 여행을 해야 돼. 아메리카에 가야하고, 가능하다면 옛 대영 제국령에도 가야 해. 요즘에는 그게 필수코스처럼 굳어져 있으니.”
 “클라이브도 졸업 후에 여행을 가겠다고 해요. 저더러 같이 가자고 했어요.”
 E.M 포스터는 동성 간의 사랑을 위하여 계급과 문명 따위는 폭파해버릴 수 있어도 제국주의적 영토 확장, 식민지 수탈로 인한 서구 문명의 발전까지는 포기하지 못했다. 포스터는 이 작품을 써놓고 무려 46년이 지난 1960년, 서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 2차 대전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이 목숨을 걸고 독립투쟁을 벌이던 당시, 런던의 서재에 앉아 이 책에 관한 열 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쓰면서도,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자신의 작품에 결코 한 줄의 퇴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미 위에서 <모리스>가 좋은 연애소설이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식민주의적 세계관을 혐오하며, (다른 작가와 비교해)작가적 용기라고는 눈곱만큼도 발견할 수 없는 그의 행적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1. <고독의 우물>을 쓴 용감한 래드클리프 홀은 여성입니다. 요즘 '여류작가'란 말을 썼다가 꾸짖는 댓글을 여러번 받아(왜요, 남류 독자님?) 젠더에 관계없이 그냥 '작가'라고 썼습니다. 독후감을 쓰고 다시 읽어보니까 1920년대에 동성애 소설을 쓴 (남자가 아닌)여자 작가라는 위상이 더욱 E.M. 포스터와 비교되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래 '여류'라고 다시 쓸까 말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고독의 우물>은 여성간의 동성애를 다룬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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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 사이의 식사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56
강봉덕 지음 / 실천문학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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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시집의 제일 마지막 페이지는 ‘시인의 말’을 싣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더 낮아진다는 것이다

 더 낮아진다는 것은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세상을 맑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맑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인의 말’을 길게 써놓은 시인 강봉덕. 그러나 시인이여, 세상은 시가 없어도 기가 막히게 잘 굴러갈 것이며, 특별히, 시를 빙자해 교묘한 주장을 펼치지 않는다면 심지어 아름다운 세상이 될 가능성도 있을 것이며, 더욱 특별하게, 껍데기들이 가 주기만 한다면 대한민국의 인구증가율까지 높아질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 사랑하며 살게 될 거 같으니까.
 공개된 장소에 독후감을 쓰면서 난감한 일은 아직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우리 작가, 시인들의 작품에 대하여 ‘솔직하게’ 독후감을 쓰는 일이다. 몇 번 인용을 했지만 누군가가 유명 시인 김x정에게 “이게 시냐?”라고 문자를 보내자 적어도 오줌발 하나에 관해서는 지고 싶은 마음이 없는 시인이 “이게 시다, 씨발놈아!”라고 답글을 쓰려다 말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일개 독자의 독후감일망정 혹평을 하면 “xxx입니다.” 자신이 글을 직접 쓴 작가임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해, 쉬운 얘기로 하자면, 쥐똥도 모르면서 함부로 짖지 말라는 취지의 댓글이 달리는 일이 제법 있다. 나? 당연히 나도 몇 번 경험했다. 처음에는 대응하다가 이제 그런 댓글 올라오면 안면 덮고 그냥 지워버리고 말지만 절대 개운한 기분을 유지할 수 없다. 당연하지. 작품을 쓴 시인, 작가들은 나름대로 전력을 다 해 자기가 뽑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씨줄과 날줄을 엮었을 터이니. 근데 문제는 독자인 내가 읽기에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을 뿐이란 점. 내가 무식한 것도 알지만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유사 이래 독자의 수준이 낮은 걸 통탄해마지않았던 쥐뿔도 없는 시인, 작가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궁무진하게 많았지 않은가. 독자의 낮은 수준은 시인, 작가들이 깔고 앉아야 하는 형틀이다. 그걸 핑계로 독자의 혹독하고, 이해할 수 없고, 무식하기까지 한 비평을 비난하지 말지어다. 너희들은 똑똑한 족속이니까.
 시집의 경우엔 한 권 읽으면서 두 편의 마음에 드는 시를 발견하면 횡재, 한 편의 시는 본전, 아예 없으면, 꽝이지 뭐. 이런 의미에서 강봉덕의 시집 《화분 사이의 식사》는 나한테는 꽝이다. 오죽했으면 독후감에서 첫 번째로 소개하는 것이 책의 뒤 끝에 달린 ‘시인의 말’이었겠는가.
 내 취향에 이 시집은 맞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시들에 관해 독후감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아, 이 다음에 줄줄이 써내려간 나머지는 싹 지워버렸다. 그러나 시인이여, 나는 그저 일개 아마추어 무식한 독자일 뿐이니 당신은 계속해서 시를 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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