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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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부산에서 출생해 인천에서 성장한 소설가. 서른 살에 등단해 몇 권의 단편선을 냈다. 이후 첫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을 출간해 2018년 파주 출판단지의 종이 값을 한정 없이 올려놓고, 2020년엔 지적재산권과 관련해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을 거부해 그나마 이 문학상으로 거의 끊어져가는 명목을 가늘게 이어가던 문학사상사의 마지막 뻘짓을 세상에 드러낸 작가. 1979년 출생치고는 마치 고모님, 심지어 이모할머니 같은 이름을 가진 김금희는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의 주인공으로 자신의 이름에 관한 억하심정을 풀어놓듯 당숙모 이름 비슷한 ‘경애’라는 35세 독신 인물을 선택했다. 2018년에 하도 <경애의 마음>이 인터넷 책방마다 폭풍으로 몰아쳐 이런 작품은 일단 한 숨 들이고 읽어야 제대로 라는 엉뚱한 고정관념이 있어서 이제야 읽어봤다. 당시 열광했던 독자의 평과 작품의 내용이 더는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요즘 작가들은 대체로 우울하다. 이 작품은 1999년에 실제로 있었던 인천호프집화재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이 화재 사건은 두산백과에도 나와 있으며 <경애의 마음>으로 다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이젠 네이버에 ‘인천 화재’ 검색만 해도 저절로 ‘인천호프집화재사건’이 뜰 정도가 됐다. 짧게 두산백과를 인용하면 “1999년 10월 30일 오후 7시경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에 위치한 4층 상가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건물 2층 라이브호프집과 3층 그린당구장에 있던 10대 중·고교생들과 20대 초반의 청소년 등 손님 56명이 불에 타거나 연기에 질식해 숨”진 사건이다. 주인공 박경애가 이 장소에 있었다. 물론 맥주도 조금 마셨다. 경애가 1981년생이니 고3의 10월 말. 소설에 의하면 인천 소재 모 고등학교에 축제가 있었고, 이때 소규모의 영화제 비슷한 행사에 경애의 남자친구 E가 단편영화 <마음>을 찍어 상영을 하고 뒤풀이로 호프집에서 한 잔 꺾은 걸로 설정을 했다. 뭐 그럴 수 있지. 2000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아직도 19일이나 남았으니까. E와 경애는 당시 하이텔 영화동호회 멤버로 번개를 포함한 각종 감상회에 참가함으로서 친분을 쌓았고,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으며, 상대를 소위 첫사랑이라 생각하는 단계로 올라, 만일 첫 경험을 한다면 상대방이 자신의 파트너가 되리라고 서로 믿어온 사이였다고 전제한다. 문제의 장소, 문제의 시간에 경애는 집에 전화를 하기 위해 건물 밖에서 공중전화를 걸고 있었고, 통화가 끝나 계단에 오를 때는 벌써 삽시간에 불길과 연기가 계단을 메우고 있었다고 한다. 10대 후반에 꾸밈없이 사랑했던 남자애를 눈앞에서 잃어야 했던 경애의 트라우마. 이건 평생을 짊어지어야 할 내상으로, 자기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경애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내적 우울의 발화점으로 지배하게 된다. 실제로 경애는 대학에 진학하고, 선배 산주와 연애를 하면서도 2002년, 평소 E가 좋아하던 감독 데이비드 린치 특별전 가운데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보기 위해 동인천의 한 극장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홀로 관람을 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E가 죽고 나서 3년이나 지난 후에 경애가 동인천의 극장까지 <멀홀랜드 드라이버>를 보러 갔을 때, 같은 줄의 저 끝에 드레이닝 복을 입은 고도비만 급의 뚱뚱한 청년이 얼굴에 깁스를 한 채 훌쩍훌쩍 울고 있었던 것을 13년이 흐른 어느 날에도 어렴풋하게 기억을 하는데, 이 청년은 2002년 당시 전직 재선 국회의원 아버지가 원하는 대학에 도저히 진학할 자신이 없다고, 그래서 4수는 하지 않겠다고 자신의 결심을 사뢰었다가 주먹으로 얻어터져 코뼈가 부러져 병원에서 깁스를 했던 터였다. 청년은 그때부터 13년이 흘러 전 국회의원인 아버지의 재수학원 동기가 운영하는 재봉틀, 그러니까 반도미싱 주식회사의 팀장대리로 근무하는 공상수라는 이름의 간부사원으로 성장한다. 팀장 대리란 것은 팀장이기는 하지만 팀원이 한 명도 없는 이름뿐인 자리다. 공상수, 회사의 회장과 상수의 부친이 아직도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결정적으로는 회장 사모님과 상수의 새어머니가 여전히 함께 골프 라운딩을 하고 있기 때문에 희망퇴직을 시켜버리기도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붙여준 직급이고 직책이었으나, 상수는 자신이 낙하산이 결코 아님을 우기고 다닌다. 상수는 부장을 찾아가 팀원이 한 명도 없는 팀장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다가, 이와 같은 주민등록부를 상기한 부장이 회사에서 가장 골치 아픈 직원인 박경애를 상수의 영업팀으로 보내버려 둘은 서로를 모르는 상태로 13년 만에 상봉을 하게 된다. 상수네는 어려서 부모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병을 다스리기 위해 일본 삿포로에 있는 이모네 집에 체류하다가 병사하고, 현지에서 장례를 치루고, 화장하고 뼈를 추슬러 모르긴 몰라도 현지 사찰에 위패를 모셨던 일, 그 가운데서도 특히 어머니의 뼈를 추스르는 일이 기억에 박혀 역시 소극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고착되고 만다. 여기에 작고 근육질인 형의 폭력과 아버지의 완고함까지 겹쳐서. 그런데 알고 보니 상수 역시 하이텔 영화동호회에 가입해 활동한 전력이 있었다. 동호회를 통해 만난 다른 학교 친구 은총이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고 모든 고민을 서로 나누는 관계였으나, 1999년 10월 30일, 인천 인현동의 호프집 화재로 죽어버린 다음엔 우울과 고독과 아버지, 새어머니, 형이 쉬지 않고 쏟아내는 가정 내 스트레스와, 재수, 삼수 시절 사관학교식 재수학원의 엄한 규율로 인해 과체중을 넘어, 비만, 그것을 초과해 고도비만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 이때 경애를 처음 만났고, 팀장과 팀원으로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멀홀랜드 드라이브> 12년 후, 상수의 반도미싱 짬밥 경력이 벌써 10년 이상일 때는 키만 크고 홀쭉한 몸매를 지녔음에도 변변한 연애경험도 한 번 없고 매력도 없는 그저 그런 남자였다. 독자는 상수의 친구 이름이 ‘은총’이라고 나올 때 단박에 은총이가 E임을 눈치 챈다.
  * 상수가 아버지한테 코뼈가 부러지는 수난을 겪은 것이 2002년 한일 월드컵 시즌. 다음 해 입학해 2003년 학번이라 치자. 대학 4년, 군대 2년이면 2009년 졸업. 10년 이상의 경력이라니까 딱 10년 잡으면 이 책이 나오고 1년이 더 흐른 2019년. 하지만 작품의 시간적 공간은 상수와 동갑인 경애가 서른다섯 살인 2015년. 만 나이라면 2016년. 작가는 이리 꼬치꼬치 따지는 독자가 별로 달갑지 않겠지?
  경애의 E에 관한 상실보다 더 중요한 건 선배 산주와의 연애 사건이었다. 캠퍼스 커플로 소문이 자자했던 산주-경애라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이가 차 결혼을 염두에 두어야 할 시기가 도래하니 산주는 구로동에서 미용실 운영하는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경애 대신에 남부럽지 않은 화목한 가정 속에서 곱게 자란 동창 가운데 한 아가씨를 선택하고, 경애에게 딱 부러지게 이별을 통보한다. 밸 없는 경애는 결혼 후에도 산주의 결혼이 자기의 영혼을 전혀 잠식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산주가 참석할 수도 있는 각종 모임에 빠지지 않고 발을 들여놓은 것은 물론이고 겉으로도 스스럼없이 산주와 지내려 하는데, 동창들 눈에 이게 어떻게 보이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경애와 산주가 모텔에 들었고, 경애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왔을 때, 산주는 양말 하나 벗지 않은 채, 가야겠다고, 자기가 태워줄 테니 옷을 입으라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제의를 거절한 경애는 그길로 택시를 타고 강북 강변도로를 질주해 집에 들어가고 둘은 완전한 종막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015년 늦봄 또는 초여름. 한 시절 머리카락을 밀어버리고 파업에 앞장서던 홍보팀 박경애가 파업 중 성희롱 사건으로 파업이 실패로 끝나버리자 총무팀에서 사무용품 배급 업무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영업3팀으로 발령받고 며칠 후, 점심시간에 회사 앞에서 경애를 불러낸다. 다시 이어지는 감정의 끈. 몇 년 전 경애는 사랑의 고통과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에 관해 인터넷 애정 고민 상담 SNS인 ‘언니는 죄가 없다’ 약칭 ‘언죄다’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고, 언죄다의 운영자 ‘언니’로부터 일상적인 조언을 들은 바도 있었다. 새로이 산주가 등장함에 따라, 너랑 자고 싶어 다시 따뜻하게, 경애는 몇 년 만에 또다시 언죄다를 방문해 자신의 고민을 탈탈 털어놓는다.
  상수의 또 다른 고민은 자신이 마치 여자인 것처럼, 처음에는 사소하게 시작한 여성 상대 연애관계 상담 SNS가 최근에 심각한 해킹을 당해 근 십년 동안 자신에게 고민을 호소한 여성들의 연애 스토리가 다른 계정에 올라가면서 희롱과 조롱과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예전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은총의 여자친구, 이미 죽은 은총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긴, 미안해 내가 좀 늦을 것 같아 눈을 먼저 보낼게, 인터넷 닉네임 ‘피조’의 고민을 날 것으로 알게 된 것 등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심지어 일상적 업무에도 큰 방해를 받기 시작했다는 것.
  문학작품, 시나 소설에서 우울은 어느 정도여야 할까. 정답은 없겠지. 내가 생각하는 문학작품 속의 슬픔과 우울은 보라색이다. 이 색의 특징은 저 한 귀퉁이에서 작게 앉아 자기존재를 찬란한 광휘에 담아 반짝인다. 만일 보라색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면 그림은 천박해진다.
  소설은 또 경애-상수 사이의 유난한 우연을 매개로 하고 있다. 물론 소설이란 장르 자체가 우연, 또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나 사건을 대상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과한 운명적인 우연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내가 우울한 분위기로 일관하는 작품을 대단히 좋지 않게 생각하는 부류임에도, 오랜만에 참 괜찮은 우리 장편소설을 읽었다는 것. 2018년에 이 작품을 읽고 상찬하던 이유가 있었다는 것. 다만 한 가지 억지로 까탈을 잡아서 기어코 별점 하나를 깎아야 했던 건 작가가 꼭 결말을 내고 끝을 맺었어야 했는가 하는 점. 소설이 영화 같은 필요는 없으니까. 해피 엔딩이나 언해피 엔딩은 진짜 삶에는 별로 없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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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2-06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책이었군요. 전혀 생각도 못한 전개네요. 제목만 보고는 전 그냥 연애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좋은 정보 잘 알아갑니다.

Falstaff 2020-02-06 12:4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옙. 실전 연애는 경애와 유부남 선배 사이에 연애랄 것도 없는 것만 있더군요. 두 주인공 다 공히 우거지 죽상인데 문장의 힘이 좋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케이 2020-02-06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천시 중구 인현동이면 제가 결혼 전까지 10년 넘게 살았던 동네 주변입니다. 자연히 관심이 가서 책과 작가를 검색해보니 김금희 작가가 심지어 저랑 같은 학교 다녔네요. 불이 났던 건물.. 아직도 동인천에서 영업 잘하고 있답니다. 제가 매일 지나다녔거든요.
1999년도면 저도 인천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이라 분위기가 생생한데, 작가가 그 시절을 어떻게 묘사했을지 참 궁금해집니다. 좋은 리뷰 항상 감사드려요.

Falstaff 2020-02-06 14:00   좋아요 1 | URL
작가는 서울 구로동에 사는 경애를 중심으로 했으니 그저 인천이라면 극장이 있는 동인천, 주안, 인하대 근처를 잠깐 묘사하는 정도입니다. 아, 차이나타운 길 건너 동구 화수동 스케치도 나오는군요. E의 집이 화수동에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 아들이었으니까요.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근데 1999년이면 하이텔 동호회는 거의 없어졌을 때 아니었나요? 궁금.... ^^;;

케이 2020-02-06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바로 하이텔 가입자여서 기억하는데, 2000년까지는 하이텔 동호회가 꽤나 흥했답니다. 1999년도면 아마도 최전성기였을 거예요. 생각해보니 저 역시도 꽤 큰 하이텔 영화동호회 회원이었어요. (거기서 제 닉네임은 무려 ‘타락천사‘ 였답니다. 푸하하 창피하네요.) 동인천의 극장은 애관극장을 모티브 삼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소설에 잠깐 나오긴 해도, 제가 아는 옛날 인천의 묘사가 궁금해서라도 언제 한번 읽어봐야 겠습니다.

Falstaff 2020-02-06 15:02   좋아요 0 | URL
책 속에서도 애관극장, 정확하게 나옵니다. ㅋㅋㅋ
아마 기억하시는 거하고 매우 비슷할 겁니다. 저도 집안이 쫄딱 망해서 20대 초반부터 장가들기 전까지 인천에 살아 대강 알거든요. 재미있습니다 타락천사님. ^^

케이 2020-02-06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부망천‘의 역사가 깊네요. (어떤 정치인이 말한 ˝이혼하면 부천가고 망하면 인천간다.˝는 말의 줄임말) 저희 집 역시 사정이 안좋아서 수도권 최고 싼 지역 찾다가 동인천으로 오게 된거라..
근데 인천의 좋은 점도 있어요. 다같이 못살아서 위화감은 덜 느끼는 점. (이게 좋은 점인진 잘 모르겠지만ㅋㅋ) 분당에 살다 망해서 인천 온 전학생이 인천 너무 더럽고 애들도 불량해서 너무 싫었는데 애들끼리 서로 아빠 직업 뭔지 모르는 거 보고 속은 편했다고 하더군요 ㅋㅋㅋ 저 역시 우리집만 가난하다 이런 생각은 안하고 살았어요. 별것도 아닌 걸로 말이 길었습니다.ㅋㅋ 책은 한번 꼭 읽어볼게요!
 
존재인 척, 아닌 척
박금산 지음 / 뿔(웅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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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는 우울한 소설.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서사의 진중한 재미라기보다 곳곳에 배치한 경쾌한 스냅들을 이야기하는 거다. 이 책이 2012년에 나왔는데, 당시 작가들, 물론 지금도 많이 다르지는 않겠지만 그들과 책의 편집인들이 가장 신경 쓴 것이 혹시 독자들의 가독성 아니었나 싶다. 여유로운 편집에 널찍한 행간과 자간, 짧은 대화 등은 280여 쪽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순식간에 읽어치우게 만든다.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번역해 우리 작가 한강에게 맨 부커-인터내셔널 상을 받게 한 데버러 스미스가 한국 소설의 역자translator로 갖는 이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가독성, 이 가운데서도 ‘짧은 장편’인 점을 꼽았던 것이 기억난다. 전편을 번역하기 위해 다른 나라 문자를 영어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소비하는 시간에 비해 반도 걸리지 않는다고 얘기하는 것을 인터뷰 기사로 읽은 적이 있다. 아직 <채식주의자>는 읽어보지 않아 잘 모르겠으나 (늦어도 3월엔 읽을 예정이다. 이젠 읽을 때가 됐다.) 박금산의 <존재인 척, 아닌 척>을 보면 꽤나 사연이 많은 등장인물 세 사람, 두 커플의 이야기 역시 매우 속도감 있게 진도를 뺀다. 그래서 후다닥 읽어낼 수 있는 미덕이 있지만 그렇게 읽고 나니, 머릿속에 남는 게 별로 없다. 아닌 게 아니라 방금 책 읽기를 마쳤음에도, 진짜 책을 덮자마자 랩탑을 켜고 자판을 누르려 하고 있음에도 뭐 뚜렷하게 기억나는 게 없다. 이거 슬픈 일 아냐? 읽을 때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정작 남은 건 별로 없는 현상. 이래서 소설은 조금 머리가 아파야 제 맛이다.
  주인공은 남자 김병호이며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작가는 김병호를 줄곧 ‘그’라고 부른다. 공무원 아버지는 봄이 오면 바다로 낚시를 다녔고, 할아버지는 일흔 살에 머리를 민 후 섬에 들어가 중처럼 멋진 죽음을 맞았다. 일곱 살 많은 형은 전방 하사관으로 근무하다 추석 특식을 지게에 지고 GP로 오르는 중에 아군이 깔아놓은 지뢰를 밟아 폭사하여 ‘그’로 하여금 군대 면제를 받게 해주었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어머니(그 당시에!)는 아빠하고 스키 여행을 가서 아빠로 하여금 사랑하는 아내하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뜰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세상의 때가 왕창 묻은 내가 대강 책을 읽으며 짐작하기를, 군대에서 죽은 맏이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버지는 부정부패 공무원 비슷해서 차남 김병호가 외국어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해군사관학교를 가려 하는 걸 알고 나자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를 권할 정도의 뇌물을 챙겨놓은 것 같다. 그런데 왜 장남은 장교도 아니고 하사관으로 군복무 중에 죽었을까? 요트로 하는 세계일주와 육군 하사관이 어울려? 하긴 이런 거 다 아퀴가 맞으면 한국 소설이 아니긴 하다. 현재 아내와 별거 중으로 아들 림을 보모 김명임 씨, 남편과 사별하고 생계가 막막했던 여자로 다섯 살짜리 아들 키우며 문학 전공했고 교육학을 부전공한 40대 여자에게 월 25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함께 키우고 있다. 책이 나온 시점이 2012년이라 밝혔는데,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월 250만 원 준다면 보모 하겠다고 나설 지원자가 한 250 미터쯤 줄을 설 거다. 대학 졸업 후 취업하기 싫어 대학원에 진학하고, 어떻게 하다 보니 박사과정에 들어섰을 때 아내 이진진을 만나 결혼, 지금은 애 딸린 별거남이자 작은 회사의 오너 비슷해 보인다.
  이진진. 남편 김병호와 동갑. 열일곱 살 때 미대에 진학할 목적이 아니라 그냥 해보고 싶어서 유화 한 점을 그려 항공회사가 주최하는 공모전에 움직이는 계단 같이 생긴 용dragon 그림을 그려 냈다가 덜컥, 상을 받은 재원. 대학 졸업하고 굴지의 회사에 입사 성공. 이제 며칠 후에 정식 입사하게 된 시점에 김병호를 만나 마음이 끌려서 출장 간 아버지 차 빌려 서울 외곽의 모처에 차를 세우고 뒷좌석에서 차가 들썩거리도록 허겁지겁 흠흠. 이후 입사는 했으나 주 52시간 근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 전이라 애인 김병호와 제대로 된 데이트 할 시간도 없고, 정신 제대로 박힌 여자 직원들은 육아하다가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시점이면 도무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퇴사하는 반면 후배 여자 직원한테는 범 같은, 깡패 남자 같은 선배 노릇을 하는 대신 상사한텐 천생 여자처럼 살살 애교부리며 뒤로 챙길 건 다 챙기는 ‘년’들은 승승장구하는 꼴을 보고 자신이 여자를 증오하는 여자가 되기 싫어 팍 때려치운다. 아, 부럽도록 질투난다. 그러면서도 아들 보모한테 월 300만 원씩 주자고 주장할 수 있는 여성 가장이 아무 대책 없이 앞으로 딱 4년만 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는, 적어도 시댁이나 친정 둘 가운데 하나가 막강한 재력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얘긴데, 그렇게 집안에 아무 돈벌이 없이 고시 공부를 하다가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난데없이 산골로 귀촌, 성공리에 자리를 잡아 남편더러 애 데리고 들어와 함께 산골에서 살자고, 자기는 죽어도 다시 도시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중이다.
  소규모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김병호. 어느 날 외근을 나갔다가 갑자기 몇 년 전에 자기가 쓰던 피디에이를 판 Y시의 수협 구판장에서 일하는 신미애라는 이름의 여성이 문득 생각났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그러다가 난데없이 한 때는 따오기 섬, 곡도라고 불렸던 백령도가 떠오르고, 생각난 김에 오늘 갔다가 내일 오자는 마음이 생겨 보모 김명임 씨에게 아들 림을 하루만 댁에 재워달라고 부탁해 그대로 실행에 옮긴다. 사는 일 가운데 내 맘대로 되는 게 뭐 하나나 있나? 휴대전화를 배터리와 분리해 승용차 사물함에다 처박아 놓고, 차 문을 닫은 다음 정작 그가 가기로 결심한 곳은 신미애가 살고 있는 Y시. 급기야 고속열차도 아니고 무궁화호 막차에 오른다. 누구나 열차를 타면, 특히 그게 밤 열차라면 옆에 근사한 이성이 앉아 더 근사한 밤을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하지만 그런 행운은 거의 언제나 나를 외면한다. 늙은 남자가 신발을 벗은 채 앞좌석에 발을 올려놓고 잠을 청하는 걸 보고 그는 식당차와 다른 빈 좌석을 왔다 갔다 하며 밤을 보내고, 그의 행적을 수상하게 본 여객전무는 승무원을 시켜, 아니, 승무원은 고속열차의 경우를 칭하는 것이고 그냥 열차에선 차장이라고 한다니 차장이라 다시 말하자, 차장은 혹시라도 그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려 시도하다 실패하면 행패나 부리지 않을까 싶어(요샌 열차 문이 전동식이라 사람이 열 수 없단다.) 유난히 그에게 친절을 가장해 접근한다. 차장의 이름이 안영. 해녀 겸 소규모 밀수업에 종사하는 엄마와 밀입국 브로커로 재산을 불리고 진짜 돈이 생기자 온갖 여자 수집에 열을 올리는 아빠 사이의 외동딸이 아침에 퇴근해 Y시에 있는 집으로 가던 길에 역에서 그, 김병호를 만나 아침 식사로 장어탕에다 소주 세 병을 까고, 몽돌 해변에서 2차로 맥주도 마시고, 술김에 집에도 함께 간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안영은 열 번 만나기 전까진 절대 몸을 허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말했다시피 그는 하루 기한으로 여행을 왔고. 그리하여 둘은 맺어지지 않을 거 같지? 인생이 다 애초에 결심한 대로 살 수 있으면 그게 인생인가 어디. 안영의 집에서 작가 스스로 고백하듯 이상李箱이 쓴 <날개>의 주인공처럼 그는 안영이 출근한 낮 시간 동안 그녀의 옷들을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고, 심지어 팬티와 브래지어를 착용해보기도 하면서 열흘을 뭉개버린다. 드디어 열하루 째가 됐을 때, 둘은 근처 호텔에서 이틀 밤을 보내며 만리장성을 쌓게 되는데, 김병호는 안영에게 처자식 다 버리고 올 테니 우리 둘이 한 번 살아보자, 라고 호소를 할까?
  이래서 저 위에 내가 말하기를, 등장인물 세 명과 두 커플이 만드는 이야기라고 했다. 소설의 요지는 김병호의 삶, 그냥 한 번 저질러버리는 거, 아무 뜻 없이 되는 대로 한 번 해보는 일탈에 관한 것인데, 곳곳에 유머 코드가 잔뜩 숨어 있기는 하나 정작 읽어보면 장착되어 있는 우울의 크레모아, 정확한 군사 용어로 하자면 M18A1이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잠복해 있어서 읽고나면, 글쎄 내 경우에만 그랬는지 몰라도 감정이 헤쳐놓은 벌집 모습으로 너덜너덜해질 수 있다. 물론 나는 책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지 조금도 말하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결말이 언제나 독자로 하여금 충격을 받게 하는 건 아니라는 점.
  이상해. 휴일에 독후감 쓰면 꼭 길어진다는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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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4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2-04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기 불안정과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0
리브카 갈첸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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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목은 <Atmospheric Disturbances> 그냥 <대기 불안정>이다. 제목을 그대로 하면 책을 많이 팔 만한 호소력이 없으니 원제목에다가 굳이 “그 밖의 슬픈 기상 현상들”을 붙였다. 말 그대로 사족.
  작가 리브카 갈첸으로 말할 거 같으면, 캐나다에서 출생해 유년시절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 1981년 다섯 살 때부터 94년에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오클라호마의 노먼에서 살았단다. 아버지는 오클라호마 대학의 기상학과 교수, 엄마는 국립재해기상연구소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했으니 전형적인 이과 인텔리 집안의 따님이다. 이이의 재능은 오클라호마를 떠난 후에 빛을 발한다. 프린스턴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2학년이 되자 때려치우고 원래는 미국 내 유대인의 치료를 위해 남북전쟁 전에 세운 의학교, 시나이 산 의과대학 (Mount Sinai School of Medicine)으로 전학해 2003년에 신경정신과 의학박사(사실은 박사급과 거의 동급이긴 하지만 박사는 아닌 MD) 학위를 받는다. 그럼 의사로 일을 하면 될 것을 아직도 학문에 미련이 남아 3년 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예술학위(Master of Fine Arts)까지 얻었으니, 이이는 20대에 박사학위 두 개를, 그것도 이과-문과로 수집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다. 여기다가 외모도 매력적으로 생겼다. 한 마디로 밥맛없다. 공부를 잘하면 좀 덜 생겨도 되잖아. 나 같이 못 생기고 공부 못하는 인종은 어떻게 살라고 말이야. 큼.
  리브라 갈첸은 아버지 츠비 갈첸을 존경했던 것 같다. <대기 불안정>은 이이가 쓴 첫 번째 소설인데, 작품 속에 이미 죽었다고 하는 츠비 갈첸의 애매모호한 모습이 그가 쓴 논문, 가족사진, 작가 리브라를 안고 찍은 사진이 직접 등장할뿐더러, 심지어 논문 속의 기상도와 논문의 내용까지 그대로 차용하고 있으며, 진짜 죽었는지 아니면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영국의 왕립기상학회의 간부급 비밀요원으로 일하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가 츠비 갈첸의 이름을 빌어 기상의 무기화를 연구하고 있는지 많이 혼돈스럽게 만든다. 여기에 작가 리브라의 직업 가운데 하나인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그의 전공과목인 분열증에 관한 소견과 물리학적 정의 같은 것이 마구 섞여 있어서, 이렇게 말하면 잘난 척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지만, 문과만 공부하신 분들은 아예 책을 읽지 않으시는 것이 만수무강에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아주 중요한 문제 하나를 소개해보자. 50대에 접어든 신경정신과 의사 ‘나’ 레오 리벤슈타인이 어느 날 집에 있는데, 아내 레마와 똑같이 생긴 도플 갱어가 자신이 레마입네, 하고 다리가 긴 똥개 한 마리를 데리고 오는 거였다. 이 가짜 레마가 하는 행동, 하는 말이 자신의 아내와 상당히 비슷하지만 ‘나’는 단박에 가짜인 사실을 알아내고 즉시 사랑하는 진짜 아내를 찾을 결심을 하고 만다. 이것을 읽는 순간 독자는 신경정신과 전문의 ‘나’가 분열증에 걸린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게 되고, 이후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그가 생각하는 온갖 잡다한 논리에 설득을 당해야 하는데 그 가운데 ‘도플러 효과’가 나온다. 도플러 효과는 파동에 관한 물리학적 현상으로 (1970년대의)고등학교 2~3학년 이과 물리 교과서에 소개가 됐던 것으로, 쉽게 얘기하면 앰뷸런스가 내가 탄 차로 다가올 때와 멀어질 때의 소리 크기가 다르게 느껴지는 현상을 말한다. 작가는 이 도플러 효과를 애정문제에도 적용시켜 특정한 사람이 내게 다가올 때의 애정의 크기와 멀어져갈 때의 크기가 사실은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입장에서는 다르게 느낀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후반에 가면 한술 더 떠서 ‘도플 갱어’를 넘어 ‘도플러 갱어’라는 걸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책의 내용은 레마의 고향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그녀를 찾아 간 ‘나’가 레마의 엄마 마그다를 만나고, 자신의 분열증 환자 하비가 자신이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영국의 왕립기상학회의 비밀조직원들과 연락이 닿아 그들의 지령을 수행하려 파타고니아 섬까지 가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다. 겉으로는 ‘나’ 레오 리벤슈타인 박사가 사랑하는 아내 레마가 혹시 전남편 또는 애인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대신 ‘나’에게 가짜 레마를 보낸 것으로 짐작해 진짜 아내를 찾아가는 오디세이아지만 다 읽으면 작가가 죽은 아빠 츠비 갈첸 박사에게 보내는 경의라고 결론을 낼 수 있을 듯하다. 읽어보실 분은 읽어보시라. 다만 나는 경고했다. 물리학을 배우지 않은 문과 졸업생들은 자신의 만수무강을 위해 이 책을 멀리 하시는 것이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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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시 아가씨의 아주 우아한 시골 생활 민음사 모던 클래식 19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소연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원래 제목은 <The Country Life>, 그냥 <시골 생활>이면 된다. 앞에서 ‘시골 생활’을 꾸며주는 ‘어느 도시 아가씨의 아주 우아한’이란 형용구는 말짱 필요 없다. 촌스러운 제목 <시골 생활>만 가지고도 1998년에 서머싯 몸 상을 받은 작품이다. 위키 백과를 읽어보면 이 책은 스텔라 기번스의 <춥지만 편안한 농장 Cold Comfort Farm>과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 영향을 받아 쓴 작품이라고 한다. 책의 뒤표지에 보면 《뉴스데이》라는 매체가 “현대판 <제인 에어>. 더 이상 시골 생활은 우울하지 않다.”라고 평을 했다는데, 이 사람들 혹시 위키 백과 보고 쓴 거 아냐? 레이철 커스크가 이 책을 쓰고자 했을 때부터 코미디 작품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할 정도로 곳곳에 비록 폭소를 터뜨리게 하지는 않지만 재미있는 표현들을 묻어놓고 있다. 일인칭 관찰사 시점으로 주인공 ‘나’의 이름은 대담하게 자신이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20세기 소설가 스텔라 기번스를 그대로 가져다 써서 ‘스텔라 벤슨’으로 했다. 스물아홉 살의 똑똑하고 학위도 있고, 법무관이라는, 아니면 그와 유사한 직업과 직위에 재직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뛰어나게 빼어난 외모는 아니지만 어디 가서 빠진다는 소리 들어본 적 없는 외모를 가진 이이가 선택한 가장 불행한 행위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온순한 성격을 지녔으며 높은 공부도 한 에드워드와 결혼을 해버린 일인 거 같다. 잘 읽어보시라. 에드워드는 나를 사랑했지만, 내가 사랑했다는 얘기는 없다. 사랑한 것 같았다. 또는, 사랑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수준. 뭐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세상의 많은 부부가 둘 다 서로 미칠 듯 사랑해 결혼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나는 저이를 사랑하고 있다, 라고 스스로를 최면상태에 빠뜨리고, 몽롱하게 취해서 결혼을 해버리고, 살다가, 차도 사고, 애(들)도 낳고, 조금 더 큰 전셋집으로 옮기다가 드디어 양쪽 허리에 한 주먹씩의 비계가 생길 때쯤 내 집 장만도 하면서 그냥 그렇게 한 인생 사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게 꼭 나쁜 것도 아니고. 다만 그러기 위해선 부부가 동시에 소위 ‘무난한’ 성격이어야 하겠지만.
  이 책의 주인공 스텔라 벤슨이 시청 호적계에서 결혼을 하고, 로마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일은 벌어졌다. 테라스가 있는 고층 호텔. 스위트룸인지 아닌지는 책에 나와 있지 않지만 테라스가 있다면 숙박비가 가볍지는 않았을 듯. 양가 부모와 친구들 가운데 스텔라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는데, 신혼여행 도중에 스텔라가 테라스에서 떨어졌다는 소식으로만 전해졌다. 그럼에도 살아 있다고? 그렇다. 떨어지기는 했지만 아스팔트와 충돌한 건 아니고 쇠로 만든 테라스 기둥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구조되었다는 얘기. 역시 아무도 모르는 이유이며, 책을 끝까지 다 읽어도 독자마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 길로 스텔라는 짐을 꾸려 에드워드 혼자 로마에 남겨둔 채 혼자 런던 행 비행기에 올랐으며, 스텔라 부모의 명의로 된 집에 도착해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파콰슨 씨에게. 지금 이 순간부터 퇴사함을 알려드리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이로 인해 불거질 모든 불편한 일들에 심심한 사과를 표합니다. 스텔라 벤슨 드림.”
  직장을 때려치운 거다. 이어서 부모에게도 한 장.
  “아버지, 어머니께. (중략) 오랫동안 불행했어요. (중략) 어머니 아버지 탓도 많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만나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공평할 것이라고, 아니 제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떠납니다. (후략)
  마지막으로 에드워드에게도 한 장.
  “휴가 잘 보냈나요? (중략)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랍니다. 스텔라가. 추신. 이 편지를 읽는 당신 얼굴이 눈에 선하군요.”
  그리하여 이 ‘어느 도시 아가씨’가 아니고 아직 이혼신고가 끝나지 않은 ‘어느 도시 유부녀’는 신문에 실린 짧은 광고 하나만 주머니에 넣고, 트렁크에 옷 몇 벌과 신발 두 켤레, 기타 자질구레한 것들만 챙겨 런던을 떠나 버클리 인근의 시골마을 힐탑으로 떠나면서 좌충우돌의 코미디를 시작한다. 이이의 새로운 직업은 매든 씨네 막내아들 마틴의 오-페어. 오-페어au pair는 원래대로 하면 외국가정에 입주하여 아이 돌보기 등과 집안 막일을 하면서 아주 약간의 보수를 받으며 언어를 배우는 (보통) 젊은 여자를 일컫는 말이다. 스텔라는 영국 여자니까 사실 오-페어라기보다 일종의 ‘보모’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런데, 사실 이 내용은 모르고 읽어야 더 재미있지만, 스텔라가 하는 짓을 보면 뭔가 나사가 반쯤 풀려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면 대단히 충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든지. 저렇게 직장 상사, 부모, 남편에게 세상이 끝난 것처럼 이별 편지를 쓰고 이제 비록 산간벽지는 아닐지언정 시골 촌구석으로 세상의 눈을 피해 평생을 고독하게 살려 하는 사람이 오-페어를 원하는 고용인이 원하는 조건마저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말이지. 고용인은 처음부터, 오-페어는 양쪽 다리를 다 쓰지 못하는 장애인 막내아들의 생활을 도와주어야 하며, 일환으로 일주일에 두세 번 가야하는 장애인 센터에 데리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운전면허가 필수요건이었음에도 자신이 운전면허도 없고 자동차 운전을 해본 경험조차 없다는 걸 깜빡 잊어버린다. 물론 이것 때문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두 장chapter 생기기는 하지만 그리 개운하지는 않다. 게다가 런던을 출발하기 전에 시골로 거처를 옮기면 돈은 하나도 필요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수표책을 그냥 두고 왔다는 것도 스물아홉, 우리나라 나이로 서른이나 먹은 사람이 할 짓이며, 그런 생각을 할 수준이냐고. 매든 저택에 머문 이후 며칠이 지나도 빨래를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아무 생각 없고, 연탄을 때지 않는 오랜 숙소에 사람의 피를 노리는 아주 작은 곤충들이 서식할 수 있다는 짐작도 못하며, 뜨거운 햇볕이 피부를 지글지글 구워버릴 때까지 뙤약볕 아래에서 낮잠을 잘 수 있겠어? 자, 여기에서 독자들은 양해를 하자. 이게 다 날 때부터 도시 사람으로 자란 주인공이 시골 또는 자연에 관해 완전히 무식했다고 여기도록 노력해야 하리라. 깨끗하게 내리 쬐는 태양 아래 한 쪽으로 걸어가다가 몸의 왼쪽만 2도 화상을 입어 분홍색으로 부풀어 오르게 된 런던 처자를 보고 그냥 웃어야 하지, 넌 그것도 몰랐냐고 타박을 하면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반 아래로 떨어지고 마니까.
  시골 부르주아 집에 일종의 하인으로 취직한 도시 인텔리겐치아. 저택엔 완고해보이지만 순진한 구석도 있고 마음도 넉넉할 것 같기도 한 가장 매든 씨, 피어스. 매사 신경질적이고 깐깐하며 완고해 보이는 것은 물론 사사건건 은근히 ‘나’ 스텔라와 신경전을 벌이는 매든 부인, 파멜라. 이들의 두 자매와 두 형제.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가 삶의 매사를 도와주어야 하는, 약간 삐딱해 보이는 성격을 가진 마틴. 이들 시골 부자를 바라보는 동네사람들의 지극히 곱지 않은 눈길과 부자와 유력자 사이의 결코 끊이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비방, 이것들이 다 웃음의 한 소재로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처음에 말했듯이 포복절도나 박장대소하는 웃음이 아니라 유머 코드로 문득, 문득 드러나기 때문에 더욱 재미를 느낄 수 있으리. 물론 독자들의 필독서 까지는 멀고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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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치는 소년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8
김종삼 지음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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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열고 첫 번째 나오는 시 <물통>을 읽는 순간, 아, 40년 만에 이 시집을 다시 읽어보는구나, 라고 영탄한다.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전문)



  단박에 알아챘다. 제대로 된 문장은 처음 네 줄, “희미한 풍금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뿐. 독자는 다음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가 난데없이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땅 위에서”, 다음에 뭐가 어떻게 됐는지 오리무중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낯선 표현을 나는 김종삼을 통해 처음 읽어봤으며, 이제 그리고 40년이 흘러도 당시에 느꼈던 낯섦을 단박에 알아차리는 것이다. 다름 아닌, 별다를 것 없는 인간들을 찾아다니면서 기껏해야 물 몇 통을 길어다 준 일밖에 없는 물통을 노래하며 시인은 어떻게 그리고 왜 희미한 풍금소리가 툭툭 끊어지는 청각자극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것뿐인가. 평생, 어딘가에 부딪혀 깨져 쓰지 못하게 될 때까지 우물가에서 마당이나 부엌까지 왕복운동만 했을 물통의 어디에서, 어떤 모습에서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에 영롱한 날빛까지 확장시켜 연상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그건데, 그래서 땅 위에서 어떻게 됐다고? 시를 이리 쪼개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그냥 읽어가면서, 결국엔 한 문장이 완성되지 못하는 여운을 그대로 체감해보는 것도 아주 멋진 일이 된다는 것, 그게 스무 살 구상유취의 청년에게는 놀랄만한 일이었나 보다.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 총서” 시리즈가 출발할 당시의 나는 수많은 가난한 학생 중의 한 명이었고, 그리하여 시집 한 권을 사려면 먼저 도서관에서 시집을 읽어보고 꼭 사서 생각날 때마다 읽어볼 시집만 구입해야 했던 시절. 당시 그런 절차에 입각해 산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와 황동규의 <三南에 내리는 눈>,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 황지우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가 지금도 책꽂이에 꽂혀있....는줄 알았는데, 김수영은 나중에 전집을 사면서 누구한테 준 모양이다. 하여튼 당시에 김종삼의 시집은 내게 구입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건 혹시 유신과 한국적민주주의 아래에서 허덕이던 스무 살 청년의 시각에서 볼 때 쓸데없이 여기저기서 돋는 서양취향, 예컨대 표제시 <북 치는 소년>에 쓰인 것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 서양 나라에서 온 /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것 때문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당시의 젊은이들은 김종삼 같은 순수 서정시를 향해 또렷한 논리를 대며, 지금 한가하게 음풍농월이나 하고 있을 때인가, 이런 장르에 종사하는 시인, 작가들을 째려보았을, 용감하지만 야만의 시절이었다.
  세월은 겁난다. 이제 “좀 가노라니까 / 낭떠러지 쪽으로 / 큰 유리로 만든 자그만 스카이라운지가 비탈지었다. / 언어에 지장을 일으키는 / 난쟁이 화가 로트렉 씨가 / 화를 내고 있었다.”는 시 <샹뼁>의 제목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를 한 없이 궁리하다가 불어 '샹파뉴Champagne'를 일본 사람들이 “シャンペン”이라 쓰는데 우리말 음가가 바로 ‘샹뼁’인 걸 알고는 그저 한 번 씩 웃을 뿐이니. 그러나 아직도 시 안에 유럽의 유명한 음악가, 화가, 소설가, 시인들이 무작정 등장하는 걸 읽으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라고 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유럽인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시에 관해 조예가 없는 내가 읽기로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그런 거다. 이이는 시인으로 출발 자체가 포스트 모던이었던 것 같다. 해설을 쓴 황동규는 처음 발표한 시를 <園丁1>이라 했는데 연보를 보면 나이 서른넷에 《현대예술》에 <돌각담2>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데뷔작인 <돌각담>을 읽어보자.


  광막한지대이다기울기
  시작했다잠시꺼밋했다
  십자형의칼이바로꽃혔
  다견고하고자그마했다
  흰옷포기가포겨놓였다
  돌담이무너졌다다시쌓
  았다쌓았다쌓았다돌각
  담이쌓이고바람이자고
  틈을타凍昏3이잦아들었
  다포겨놓이던세번째가
  비었다   (전문)


  문장과 문법과 구두점을 포기하고 한 줄에 열 개의 글자를 나열해 시를 썼다. 글자 하나하나가 다 돌담을 만든 돌로 기능하는 것 같은 시각 효과가 돋보인다. 아쉬운 건 마지막, 그러니까 제일 아래 돌이 겨우 세 개밖에 없어 전체적 균형이 잡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차라리 처음 줄을 세 글자로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김종삼의 초기 시들은 데뷔 시 <돌각담>과 달리 포스트모던 하고는 거리가 있다. 황동규가 해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 같은 것을 많이 썼다고 하는데 난 그게 더 좋다. 예를 들어 <묵화> 같은 노래.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전문)


  얼마나 좋은가. 짧기도 하고. 김종삼의 시는 대개 간략한 편이다. 시인 전봉래는 1957년에 김광림과 함께 3인 공동시집을 낸 전봉건의 친형으로 남은 시는 딱 한 편밖에 없는 기인인데, 김종삼과 같이 이북에서 월남을 해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1년에 부산 피난지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찬란한 이 세기에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소. 그러나 다만 정확하고 청백하게 살기 위하여 미소로서 죽음을 맞으리다.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있소.”라는 멋부린 유서를 남긴다. 이이를 위하여 부제를 ‘全鳳來 형에게’ 로 단 짧은 시 <G 마이나>를 썼다. 왜 시가 ‘사단조’가 아니라 ‘G 마이나’인지는 굳이 따지지 말자. 바흐를 틀어놓고 죽은 시인.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바흐 가운데 사단조 음악은 사실 없지만.4



  물
  닿은 곳


  神恙5
  구름 밑


  그늘이 앉고


  묘연한
  옛
  G 마이나  (전문)



  나는 이 시가 시인의 초기 수줍고 순수한 시보다 더 좋지 않다. 폼이 좀 난다는 측면에선 모르겠지만 이 시를 제대로 감상하자면 여간해 알기 힘든 전봉래 시인을 검색해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한 다음에 읽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어림도 없지 않은가.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이 시집을 읽는 동안 나는 자잘한 재미를 숨길 수 없었다. 같은 시집을 40년 만에 읽는 일. 그것도 예전에 읽었는지 까마득하게 몰랐다가 시집을 열어 첫 번째로 나오는 시로 단박에 먼먼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 어찌 재미있지 않을까. 확실하게 안 것은, 김종삼 시인과 화해하기 위해 몇 십 년 세월이 필요했다는 점. 참으로 세상은 오래 살고 봐야할 일이다.


 


 

  1. 정원사를 다른 말로 '원정'이라고 한답니다. 가축을 먹을 목적으로 도살하는 사람을 한때는 백정白丁이라 불렀듯이 뒤에 정丁자가 붙는 말은 해당 일을 하는 사람을 낮추어 부르는 것이라 더 이상은 쓰여지지 않을 단어 같습니다.
  2. ‘돌담’ 돌로 쌓은 담을 일컫는 이북 말입니다.
  3.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시인이 만든 시어 같습니다. 얼 동, 저녁 혼. 한 겨울의 황혼무렵을 노래한 것 같습니다. 시어를 만드는데는 암만해도 표의문자인 한자가 표음문자인 우리말보다 훨씬 유리하지 않을까요?
  4. 역시 G-minor, 사단조 하면 바흐가 아니라 모차르트가 생각납니다. 교향곡 25번과 40번, 피아노 협주곡 20, 24번, 현악5중주 K.516 등등.
  5.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전에 없는 단어입니다. 신神은 귀신, 하느님을 뜻하고 양恙은 근심이나 병을 말하는데, 신의 근심인지, 아니면 다음 줄에 등장하는 구름을 신의 근심으로 비유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만... 시인 전봉래의 죽음이 하늘의 근심이라는 뉘앙스의 시어는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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