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 열린책들 세계문학 246
케이트 쇼팽 지음, 한애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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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0년에 출생해 1890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미국 페미니즘의 선구적 작가라고 한다. 쇼팽의 연표를 보면1 아일랜드에서 이민 와 대단한 성공을 거둔 아버지와 19세기 중반까지 서부로 가는 경계였던 세인트루이스의 프랑스 계 커뮤니티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한 어머니로 이루어진 부르주아 가정의 딸로 태어난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버리고, 자매들은 다들 어려서 죽고, 아버지의 첫 아내 케이트의 큰 어머니가 낳은 배 다른 형제들은 또 전부 남북전쟁의 남부 연합군으로 전사해버린다. 그래 외갓집에서 어머니, 외할머니, 외증조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스무 살에 오스카 쇼팽과 결혼해 쇼팽이란 이름을 갖고 뉴올리언스에 정착해 8년 동안 여섯 아이를 낳는 왕성한 생식력을 자랑한다. 이곳에서 살던 시기가 나중에 소설을 쓰는데 주요 무대가 된다고 한다. 하지만 스물아홉 살 때 남편이 사업을 말아먹고 다시 루이지애나로 거처를 옮기는 것도 잠시 3년 후 이번엔 남편이 모기에 피를 빨려 말라리아로 죽어 과부가 된다. 이때가 쇼팽이 서른두 살. 이후 2년간 당시 양가집 여자답지 않은 생활, 자유연애, 공개 흡연, 홀로 거리를 걷는 행위 등을 서슴지 않고 하고 다니다가 다시 친정이 있는 세인트루이스로 돌아간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고 나서 세상이 허전해 우울증이 심해지자 집안 주치의이기도 했던 산부인과 의사의 권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단편소설을 처음 발표를 한 때가 마흔 살이었단다.
  우리나라에서도 마흔에 글을 쓰기 시작한 작가가, <나목>으로 여성동아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천만 원의 상금을 건 1회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해 등단한 박완서 선생이 있지만 19세기에 나이 마흔이면 지금 나이로 환갑은 훌쩍 넘겼지 않을까? 하여간 케이트 쇼팽은 1904년 쉰네 살에 죽을 때까지 겨우 14년 동안만 작가로 활동하며 두 편의 장편소설과 다수의 단편을 발표하는데, <각성 Awakening>은 이이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고, 대표작이며 문제작으로 일컫는단다. 쇼팽이 스무 살 이후에 살았던 뉴올리언스와 루이지애나에는 프랑스, 스페인에서 이민 오거나, 캐나다에 살던 프랑스계 이민들의 재 이민이 상류계층을 이루어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 <각성>에도 주요 등장인물은 빠짐없이 프랑스 어를 적어도 알아듣거나 심지어 능숙하게 구사하는 장면들이 일관되게 나온다.
  흔히 미국하면 유럽에 비해 진보적인 기분이 들고는 하지만 19세기의 미국은 유럽보다 훨씬 보수, 반동적인 지역이었다. 이 책에서도 여성, 이중에서 결혼한 여성들의 미덕은 자식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남편을 공경하며 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없애고 가정의 수호천사가 되어 (암탉처럼2) 날개를 펼쳐 가정과 집안 살림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자상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런 관점이라면 미국의 여자들은 전부 다 질식해 제 명대로 살지 못했을 거 같지? 천만의 말씀이다. 낳자마자 이런 환경의 지배 아래 살면 스스로 남성에 의한 보호를 편하게 받아들이며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처럼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각성>을 읽고 주인공 에드나 퐁텔리에의 부정에 흥분한 당시 여자들도 무지하게 많았을 거라 생각한다. 우연히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나라의 한 트랜스젠더가 명문학교인 청파여대에 입학하려다 재학생들의 비판으로 뜻을 꺾은 뉴스가 떴다. 고정관념이 그런 거고 언제나 무서운 것은 기득권과 권력이다. 무엇이든지 새로 시작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 그러나 구약성서에서 쓰여 있듯이 세상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나. 책을 읽어가노라면 저절로 <인형의 집> 노라가 떠오른다.
  작품은 뉴올리언스에서 남쪽으로 80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는 그랜드 아일 섬의 여름 별장에서 시작한다. 나는 첫 장면에서 존 벤빌의 <바다>를 회상했다. 벤빌의 작품에서 보면, 여름휴가를 온 사람들 사이에서도 엄연하게 계급이 존재하는데, 첫째는 휴가지에 여름별장을 보유한 족속들이고, 둘째가 별장을 통째로 세낸 사람이며, 셋째가 호텔에 숙박하며 여름을 나는 부자들, 넷째가 별장(팬션)에 방을 몇 개 빌려 약식 월세로 여름을 나는 쁘띠 부르주아, 마지막 다섯째가 현지 주민이라 했다. 이걸 보면 주인공 에드나가 안주인인 퐁텔리에 식구들은 기껏해야 네 번째 그룹밖엔 안 되지만3 이들과 또 한 가족인 라티뇰 씨 가족은 뉴올리언스의 최고급 주택가인 에스플러네이트가街의 저택에서 사는 지역의 부르주아들이다. 아일랜드와 미국의 휴양문화에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모양이다. 미국 남부의 휴가지에서는 한 팬션에 부르주아부터 쁘띠부르주아, 서민들이 함께 여름을 나며 놀랍게도 친목까지 다진다.
  주로 뉴올리언스 시내에서 여름을 나기 위해 도착한 이 팬션은 예전 르브룅가家의 호사스런 여름별장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이젠 르브룅 여사가 여름별장으로 운영하며 덕택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며 두 아들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아들, 로베르와 빅토르. 남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로베르는 뉴올리언스의 상점의 직원으로 평범한 고용인이기는 하지만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어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며 지금은 여름휴가를 맞아 어머니와 함께 예전의 자기 집안 별장에서 손님들을 도와주면서 그들의 말벗 역할을 하고 있는 20대 청년. 눈치 채셨지? 우리의 주인공 에드나 퐁텔리에 여사는 아들만 둘 둔 스물여덟 살 주부. 이들이 수영을 하고 돌아오며 소설은 시작하는데, 사실 말이 수영이지 에드나는 어떻게 하면 사람의 몸이 물에 뜰 수 있다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 중간의 내용을 대폭 건너뛰어 이야기해서, 어느 날 에드나 혼자 수영하는 법을 저절로 익히게 되고, 그러면서 보다 더 멀리 헤엄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바다에서 헤엄을 치며 어느 순간 더 이상 먼 바다로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겠다는 두려움이 왈칵 솟았던 것을 기점으로, 에드나의 의식은 돌변한다. 남편에 대한 복종을 당연한 미덕으로 여기던 에드나는 남편 레옹스 퐁텔리에가 “당신은 당장 방으로 가.”라고 말하자, “다시는 나한테 그런 식으로 명령하지 말아요.”라고 대꾸하기 시작해, 여태까지는 최고의 남편이고 더 이상 훌륭한 남자는 없는 걸로 알았다가 이젠 자기 자신만의 “삶의 희열”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한다. 물론 “삶의 희열”이란 구체적인 단어는 책 저 뒤편에 나오니, ‘자신만의 삶’으로 대체해 이해해도 충분히 좋다.
  앞에서 언급한 <인형의 집> 노라가 바로 이 지점에서 집구석을 박차고 너른 세상으로 나간다. 그런데 에드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탤 것이 있다. 최고의 남편, 제일 훌륭한 남자를 남편으로 두고 있음에도 어느새 팬션집 큰아들, 기껏해야 상점의 점원에 불과한 나이어린 청년 로베르와 사랑에 빠져버린 것. 에드나는 그것이 사랑인지 모른다. 로베르가 갑작스럽게 오늘 밤 당장 돈을 벌러 멕시코로 떠나기 전까지는. 에드나는 자신의, 자신만의 삶과 떠나버린 사랑을 가슴에 안고 뉴올리언스의 저택으로 돌아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의 벽을 향해 첫 번째 달걀을 던지게 될까.
  짧은 소설이다. 본문이 243쪽에서 끝나는 분량에서 벌써 반 이상 말해버린 거 같다. 세상을 향해 여성의 자아를 외친 소설은 결국 평등의 해협을 건너지 못했다. 케이트 쇼팽이 죽고 60년이 지나 해협에 삐걱거리는 나무다리를 놓은 후에야 비로소 선구적 작품이라 일컫는 <각성Awakening>을 다시 출간할 수 있었으니, 기구하다면 기구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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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후 케이트 쇼팽의 일생은 위키백과와 책 뒤편의 역자 해설 참고했음.

2.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말씀.

3. 책 속에 이들의 숙소를 펜션이라 써놓았으며 여러 식구들이 하루에 세 번 한 자리에서 식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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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4
이솝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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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한 것들이 있는 줄 알았다. 어릴 적부터 흔하게 들은 우화가, 어렸을 적 읽은, 동화작가의 윤문작업을 거친 것보다 덜 재미있게 읽힌다. 금도끼, 은도끼도 이솝 우화일 줄이야. 어느날 나무꾼이 실수로 도끼를 연못에 빠뜨렸는데 수염이 허연 산신령님이 연못에서 불쑥 솟아나와 금도끼를 손에 들고 나무꾼에게 얘야 울지 말고 이걸 봐라, 이 도끼가 네 도끼냐, 물었다는 그림책 기억나시지? 이솝의 우화에는 산신령이 아니라 헤르메스, 즉 전령, 여행, 상업, 도둑의 신이다. 내용은 산신령 이야기하고 똑같다.
  우화가 재미있는 것이 읽는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람 사는 데 다양하게 적용시킬 수 있다는 점. 노인이 나귀에게 풀을 뜯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적군이 몰려오는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이 어마뜨거라 싶어서 나귀에게 외치기를,
  “빨리 도망쳐라, 적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려면.”
  그러나 나귀가 콧방귀를 픽 뀌더니, “영감님, 만약에 적들이 쳐들어오면 쇤네한테 짐을 두 곱으로 지게 하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었다.
  “네가 무쇠로 만든 마징가 제트로 아닌데 설마 그리 하겠느냐.”
  라고 답을 해주니 나귀는 이렇게 말했다나.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년이다 다 똑같은데 내가 무엇을 한다고 적을 피하겠습니까.”
  사람 사는 세상, 새삼스럽게 이솝 우화를 다시 들춰볼 거 없이 그냥 여태 산대로 살아도 무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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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20-02-13 1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어렸을 때 무거운 소금 나르는 것이 싫어 개울에서 일부러 넘어졌다가 나중에 물에 젖어 무거운 솜을 짊어지게 된 당나귀 얘기를 읽으며 인간이 참 못됐다고 생각했답니다. 너무 무겁고 힘들면 당나귀가 그럴 수도 있지. 꼭 그렇게 벌을 주어야만 하는가... 당나귀가 너무 불쌍하다 생각도 했어요. 혹시 양치기 소년도 이솝우화 인가요? 저는 양치기 소년도 얼마나 심심했으면 그랬을까 싶고 ㅋㅋ 이솝우화가 지금 생각해보면 애들이 읽기엔 좀 가혹한 면이 있었던 거 같네요.

Falstaff 2020-02-13 10:47   좋아요 1 | URL
ㅎㅎㅎ 케이 님은 어려서 참 착한 어린이였을 거 같아요.
양치기 소년은 유럽 쪽 아닌가 싶네요. 저도 그림동화집 1편만 한 번 읽어볼까 궁리중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솝은 역시 여우의 신포도입니다. ^^

케이 2020-02-13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우의 신포도 얘기하시니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 삽화까지 떠오르네요. (역시 책은 어려서 읽어야 하나 봅니다) 여우의 정신승리 참 긍정적이고 귀엽고 본받을만 해요 ㅋㅋㅋ 오늘 리뷰도 감사합니다~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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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작가상에 빛나는 김혜나의 두 번째 장편소설 <정크>를 2018년에 읽고 나서 참으로 징글징글하게 징징거린다고 불평을 하고는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나 행크 치나스키가 등장할 것인가 하고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있다. 행크 치나스키? 찰스 부코스키가 쓴 일련의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골통 남자다. 많이들 아실 듯. 네 개의 중단편이 실려 있는 작품집 《대도시의 사랑법》에 등장하는 주인공 박X영이 조금은 행크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 남성 동성연애자라는 것. 그렇다. 이 책은 퀴어 문학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책 뒤에 실린 평론가 강지희의 작품해설 앞부분을 보면, 남성 동성애자의 침대를 놀라운 상상력으로 광화문 광장으로 확장시키고 있는데, 우리나라 대표 출판사 창비가 선택한 평론가가 하시는 말씀이니 틀림없는 진실이겠지만, 솔직히 동성애자들이 나하고 무슨 관계인가, 그들이 동성애를 하건 말건 그건 그들 소관일 뿐이라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나는 더 이상 강지희의 놀라운 크레센도를 읽어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 책은 그냥 퀴어 소설집이고, 동성애자도 그냥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다만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을 일컬을 뿐이다.
  내가 처음 읽어본 퀴어 소설은 윌리엄 S. 버로스가 쓴 <퀴어>였고, 두 번째가 이것도 퀴어 문학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모두에 얘기한 김혜나의 <정크>였으며 《대도시의 사랑법》은 이셔우드의 <싱글 맨>에 이어 네 번째 작품(집)이 된다. 아, E.M 포스터의 <모리스>가 퀴어 소설의 조상님 쯤 되려나? <퀴어>도 그렇고 <정크>도 그랬는데, 박상영의 작품집에서도 제일 앞에 실린 <재희>도 마찬가지로 '거칠다.' <재희> 때문에 행크 치나스키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이것도 강지희의 평론에 쓰여 있는 줄 모르겠으나 사람들이 박상영의 작품을 퀴어 문학으로만 읽을까 우려스럽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퀴어 소설이라는 측면 또는 희소성 때문에 독후감을 쓰며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상찬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리라.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 소설이기 전에 연애소설이다. 아쉽게도 연애 중, 흔히들 말하기를 ~ing 형은 한 편도 없고 다 지나간 사랑을 회상하는 형식을 취한다. 어차피 연애소설이란 건 근본적으로 이별과 상처, 더 나아가 추억에 관한 소설이다.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중단편도 마찬가지다.
  잘 쓴 연애소설 네 편을 읽을 수 있는 기회. 난 더 이상 퀴어 소설이니 레즈 소설이니 하는 말은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다. 그냥 연애소설이이라고 하면 될 것을. 내가 읽어본 어떤 남성 작가도 사랑과 이별과 추억과 기다림과 아픔과 상처를 박상영처럼 감각적으로 쓴 것을 읽어보지 못했다. 이 책의 미덕은 박상영이 꾸려내는 이야기의 행렬matrix이 우울의 골짜기로 빠지지 않고 슬픔의 영역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하지만 중단편 소설의 줄거리를 공개하는 우스운 일은 하지 못하겠다.
  근데, 본문이 309 페이지에서 끝나는 이 책의 편집이 매우 불량하다. 처음 책을 들춰보고 겉표지를 확인했다. 이거 창비가 만든 책 맞아? 맞다. 한 페이지에 열아홉 줄1. 한 줄에 원고지로 30자. 총 본문 302쪽. 200자 원고지로 계산해보면 19*30*302/200 = 원고지 861 매로 책 한 권을 만드는 신기의 편집술을 과시했다. 책의 여백을 생각하면 850매도 들지 않았을 거다. 박상영도 마찬가지다. 책을 내주겠다고 해도 좀 기다리라고, 아직 책을 만들 분량이 아니라고 했어야지. 이런 현상을 우리는 쉬운 말로 양심불량이라 일컫는다. 이렇게 네 편의 중단편, 원고지 850매 정도를 모아놓고 정가 14,000원, 10% 깎아서 12,600원을 받고 싶을까? 이런 편집을 하면 불쌍한 건, 뭐 독자들이야 돈을 좀 더 내야 하는 거밖엔 미치지 않겠지만, 제일 불쌍한 건 열대우림의 나무들이다. 309쪽 읽는데 마음만 먹으면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책을 만들기는 해야 하겠는데 너무 얇으면 보기 뭐 하니까 책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이런 편집을 했으리라. 에라 이.... 이 책 나오기 한 달 반 전, 창비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 2019. 여름>호에 4년 만에 신경숙의 작품을 실었다. 이런 편집이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양심이 집나갔던 시기. 결국 창비도 신자유주의의 기수가 되고 말았던 거디었던 거디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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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같은 출판사 창비에서 나온 같은 사이즈의 <밀크맨>은 한 쪽에 스물세 줄로 편집했다. 네 줄 차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시지? 무려 20퍼센트 이상, 본문을 240여쪽으로 만들 수도 있는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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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의 색 오르부아르 3부작 2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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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은행장의 아들 에두아르 페리쿠르. 열흘만 더 지나면 종전협정에 서명을 할 터인데 얼마 남지 않은 전쟁에서 기어이 공을 세워 진급을 하고 싶은 앙리 도네프라델 중위의 명령과 조작에 의해 벌어진 소규모 전투 도중 어딘가에서 팽팽 날아온 파편에 맞아 아래 턱 전부와 혀를 날려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오르부아르>의 후속작품. 전편에서 에두아르가 거의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착한 누나였으나 어려서부터 양가집 딸로 교육받아  속마음은 어땠을지언정 누구에게나 늘 친절을 베풀어왔기 때문에 일찍이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선량한 ‘구식여자’ 마들렌. 마들렌은 이미 <오르부아르> 시절에 생긴 거 딱 하나 보고 동생 에두아르의 철천지원수인 앙리 도네프라델과 결혼해 아들 폴을 낳고 이혼한 상태이다. 주위 사람들은 에두아르가 베르됭전투에서 전사한 줄 알지만 사실은 전쟁 후 고통스럽고 긴 치료를 마치고 원수이자 매형인 앙리에서 복수를 한 후에 호텔 현관 앞에서 하필이면 아버지의 승용차 앞으로 몸을 날려 자살한 시점에서 별로 지나지 않은 1927년에 소설은 시작한다. 에두아르가 죽은 후 날이 갈수록 골골하던 아버지 마르셀 페리쿠르 씨도 삶의 의욕을 조금씩 놓기 시작하더니 몇 십 년 전에 모교인 국립고등공예학교 졸업생 가운데 아깝게 수석졸업의 영예를 놓쳤던 귀스타브 주베르에게 조금씩 권한을 대행시키다가 어느 새 거의 전적으로 경영을 맡기는 수준에 이르렀고, 평생 워크홀릭 상태에 있던 사람이 손에서 일을 놓으면 대개 그러하듯이 어느 날 실없이 그만 숟가락 놓고 말았다. 여기서 조금 이상한 장면이 나온다. 페리쿠르 은행장의 죽음에 파리의 신문은 “프랑스 경제의 한 상징이 사라지다.”는 등을 1면에 대서특필했으며, 춥고도 추운 장례식 날에는 가스통 두메르그 대통령까지 참석할 정도였는데, 작품의 중반에 가면 세계적인 공황이 닥친다면 마르셀 페리쿠르가 세운 것과 같은 중소은행은 도무지 버틸 방도가 없다고 평가한다. 중소은행의 총수의 장례식에 대통령이 떠? 좋다, 뭐. 두메르그 대통령과 마르셀 페리쿠르가 평소에 형, 동생 먹었을 수도 있겠지.
  페리쿠르관館, 페리쿠르 저택이라고 불리던 집에서는 할아버지 마르셀, 엄마 마들렌, 아들 폴, 가정교사 앙드레 델쿠르, 여자 집사 수준의 절세미녀 하녀 레옹스 피카르 양, 정원사 레몽과 요리사와 하녀들이 있었으며, 하녀들은 전래대로 지붕 아래 다락방, 가정교사 앙드레는 3층의 작은 방에 거처를 정했다. 일찍이 페리쿠르 씨가 마들렌의 재혼 상대로 점찍은 후계자 귀스타브 주베르에게 마들렌은, 은행을 위해 자기 대신 경영을 해줄 남편을 얻기 위해 결혼은 할지언정 더 이상 자식을 낳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전남편 앙리를 떠올리며 정부는 몇 명을 두어도 좋지만 절대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해달라는 조건을 제시했었다. 그리하여 주베르가 결혼을 기다리는 중에 어처구니없게 마들렌은 가정교사 앙드레와 우연히 한 침대에 들게 되고, 그제서 난생 처음으로 성적 쾌감을 알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보다 열댓 살이 많은 주베르 씨가 눈에 들어올 수는 없는 일. 앙드레의 침실이 있는 3층으로 밤마다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기는 마들렌의 행적을 본인만 모르고 모든 이들은 기대에 넘쳐 발개진 얼굴을 하고 층계를 오르는 마들렌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러니 결혼이 이루어 질 턱이 있나. 이런 작은 소동이 지나가면서 그나마 적수공권에서 일종의 자수성가를 했다고 만족하며 살아왔지만 아직 스스로 성공하지 못한 고용인이라는 한계에 갇힌 주베르 씨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것도 머리 좋고 추진력 있으며 거기다가 인내심과 기획력까지 겸비한 인물이.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눈을 감은 할아버지 마르셀 페리쿠르. 평소에 할아버지를 그리도 따랐으며 할아버지 역시 아무리 바쁜 일정이라도 손자가 함께 놀자고 요구를 할 때 한 번도 거절해본 적이 없었던 추억을 갖고 있는 폴이 그의 길지 않은 삶에서 완전히 조부를 떠나보내는 심정은 어땠을까. 아니면 평상시에 손자 폴 페리쿠르에게, 또는 유일한 계승자 폴로 대변하는 페리쿠르가家를 향한 끊임없는 저주가 페리쿠르관 위에 떠돌고 있어 누가 슬쩍 밀었을까. 그래서일까. 검은색 천개를 아래 할아버지의 관이 빠져나올 때를 맞춰 저택의 3층 꼭대기에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흰 셔츠를 조금 풀어놓은 폴이 양 팔을 벌린 채 위태롭게 서 있다가 그만 자유낙하를 해버린다. 폴의 몸체는 검은 차일, 천개에 한 번 튕기고 다시 붕 떠오르다가 할아버지의 단단한 참나무 관에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져 박히고 만다. 내출혈로 인해 귀에서 피가 철철 흐르기 시작하고 마침 가까운 자리에 서 있던 의사 푸르니에 박사가 얼른 폴에게 다가가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앰뷸런스가 도착해 엄마 마들렌, 앙드레, 레옹스와 함께 병원으로 이송하는 등 대통령까지 참석한 장례식은 엉망이 되고 만다. 폴은 며칠 만에 깨어나긴 했지만 이후 대마비對痲痺 상태, 즉 영원히 두 발로 서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원래는 장례행렬에 마들렌과 폴의 뒤에서 줄레줄레 따라갈 예정이었던 마르셀의 동생 샤를 페리쿠르가 난데없이 상주가 되어버린다. 샤를은 몇 선을 거친 국회의원으로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들의 뜻을 모아 정치적 진영을 초월해 많은 사람을 결집시킬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게 끝이다. 무슨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따지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로 선거 때마다 수많은 자금을 쏟아 부은 바람에 형 마르셀의 지원을 받아야 했으나, 이런 종류의 사람과 주위 인물들이 보통 생각하는 건 정작 도움을 준 은인의 공을 폄하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들에게 가혹했다고 하는 원망의 마음을 갖는 일이다. 실제로 샤를은 좀 덜하지만 그의 처, 나중에 난소암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생을 마감하는 오르탕스는 마르셀과 그의 딸에 대한 악감정을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한다.
  이 작품은 전작인 <오르부아르>와 비슷하게 주인공에게 누가 악행을 하고, 이것을 되갚아 주는 형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악당이 존재해야 한다. 누굴까. 앞에서 본 귀스타브 주베르씨. 약혼까지 이르렀다가 파혼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냥 흐지부지된 50대 초반의 남자. 아무 이유 없이. 사생활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 그냥 소문만 지저분하게 나지 않게 해달라는 건 비단 주베르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마들렌의 경우도 마찬가지니 앙드레와의 관계가 크게 걸림이 되지는 않는다고 믿는 사람. 그는 이 수치의 경험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고 한다. 대신 마음속에 꽉 박아두겠다고 맹세한다. 게다가 작품이 더 진행하면 아직도 마들렌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때, 마들렌은 폴의 불구로 인해 마음이 약해진 것과 절묘하게 분위기가 어울려 주베르씨가 착각에 빠져 키스를 하게 된다. 이때 마들렌은 주베르에게 매운 귀싸대기를 날려 주베르의 자존심을 뒤꿈치로 완전히 짓이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마들렌도 실수였음을 자각하고 그래서 사과의 편지로 화해하는 듯했으나 그런 건 쉽게 지워지지는 않는 법. 가뜩이나 주베르씨는 페리쿠르 가문에 수십 년 간 기껏해야 부잣집 마름 같은 대우만 받아왔다는 피해의식이 가득한 상태였으니.
  문제는 돈이다. 역시. 페리쿠르 씨의 유언장 낭독. 딸 마들렌에게 600만 이상의 현금과 저택. 참고로 현금이라고 하는 건 단위가 프랑스 프랑이며 1년 이내 현금화가 가능한 단기 채권과 주식 등을 포함한다. 손자 폴에게는 21세까지 마들렌이 관리하는 국채 3백만. 아우 샤를에게 현금 20만, 전사한 아들 에두아르를 기념하기 위해 참전용사클럽에 20만, 귀스타브 주베르에게 10만, 샤를의 지독하게 못생긴 두 딸 로즈와 자생트에게 각각 5만, 조케클럽과 서부자동차클럽과 기타 몇몇 클럽에 각각 5만, 저택의 직원 일동에게 1만5천을 유증한다. 이를 평생 돈 관리 업무에 매진해온 귀스타브 주베르 씨가 평가하기를 마르셀 페리쿠르 씨가 죽으면서 아우 샤를의 따귀를 후려 친 격이며 자신한테는 적선을 베풀어주었다고, 즉 한 푼 던져주었다고 하는 수준이다. 그러니 객관적으로 봐도 귀스타브와 샤를에게는 마르셀 페리쿠르의 남은 재산을 더 빼앗을 조금의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여기에 앙드레 델쿠르. 이 청년은 작가, 아니면 적어도 저널리스트 또는 작가의 꿈을 꾸고 있는 자인데 돈에 대해서 거의 청렴한 수준이고, 명예욕은 있으나 마들렌을 제외한 다른 여성을 탐하는 것 같지도 않으며, 심지어 마들렌에게조차도 그리 큰 욕정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실제로 그렇다. 폴이 추락해 이제 더 이상 아이에게 가정교사 역할을 할 수도 없는데 그냥 저택에 머무는 것은 페리쿠르관에 있어야 봉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마들렌이 주선을 해 파리에서 가장 판매부수가 많은 일간지 “수아르 드 파리”지 1면에 페리쿠르 씨의 장례식 장면을 취재해 실을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날 아주 딱 맞춰 집의 손자 폴이 3층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 바람에 현장취재도 못하고 함께 병원으로 가 밤을 새워야 하는 처지에 떨어진다. 비록 밤을 새워 현장을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상력 하나로 장례식 기사를 써 생생한 르포 기사를 신문에 게재할 수 있어서 신문사 사장 쥘 기요토씨로 하여금 그가 기자로서의 장점 두 가지, 자기가 못 본 사건을 묘사하는 능력과 알지 못하는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인정을 받는다.
  그래서 독자는 돈과 관련해 마들렌을 망하게 하는 원흉들로 귀스타브 주베르, 샤를 페리쿠르, 앙드레 델쿠르를 지목하고 이들이 서로 연계해서 페리쿠르가를 몰락시키리라고 짐작을 할 수 있으나, 여기까지 읽었음에도 풀리지 않는 건 왜 폴이 할아버지 장례식 날, 많고 많은 날 중에서 하필이며 딱 그날을 골라 3층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게 됐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더 읽어야 한다. 이 정도면 독후감을 읽는 분께 충분히 호기심을 품게 했다고 생각해 나는 이쯤에서 마감하려 한다. 20세기 초반에 프랑스에서 곱게 자란 규방의 여인이 혼자 험한 세상 속의 악당들을 처치할 도리는 없을 것. 그리하여 한 명의 흑기사가 등장하니 뒤프레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평민 신분으로 전편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들이 어떤 연대를 누구와 맺는지, 어떻게 마음먹은 대로 한 번도 어긋나지 않고 1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차례대로 해치우는지, 또 내가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다른 악당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처치하는지 궁금하시지? 간단하다. 읽어보시면 된다. 6백 쪽이 넘는 장편이지만 재미있어서 후다닥 읽어치우게 된다. 그러나 진짜로 읽어보시기 전에 명심할 것은 진짜 인생은 이들의 활극과 달리 절대로 마음먹은 대로, 계획한 대로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 슬프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게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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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인 안녕 문학과지성 시인선 528
하재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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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는 시작을 “19xx년생.” 이렇게 했는데, 시집의 앞날개에 시인이 자신의 나이와 학력을 밝히지 않았는데 구태여 일종의 개인정보를 공개할 필요가 없다 싶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시겠지 뭐. 이 시집에 하재연의 세 번째이며 두 번째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을 낸 이후 7년 만에 빛을 봤다고 한다. 7년 만에 시집 한 권. 좋다. 한 시절 내가 참 좋아했던 시인이 있었다. 달달한 시어로 희망과 풍경과 슬픔과 기쁨과 현실을 조근조근하게 이야기했던 시인. 그러다가 정신 차려 다시 보니 이 양반이 마치 풀빵 기계에서 붕어빵 찍어내듯이 비슷비슷하게, 즉 정형화된 시편들을 대량생산하고 있더란 거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이젠 거의 없어졌지만 예전에 회사들마다 경쟁적으로 요란한 사보 만들기 시합이 벌어졌을 때, 한 달에 수십 권의 사보에 비슷한 수필이면 수필, 시론이면 시론 등 온갖 아는 척 잘난 척 같은 걸 끼적여주고 편 당 한 30만 원 가량 수금을 하던, 아직도 이름만 대면 누군지 알 정도의 잘 나가는 시인, 아니 희망과 슬픔 도매업자. 누구라고? 맞습니다, 그이. 지금도 그이 이름 검색해보면 다른 시인들과의 모음 시집 말고 자신만의 이름을 단 시집, 동화, 수필집 중에서 절판이나 품절 빼고 당장 살 수 있는 것들만 서른한 권이다. 그이에 비해 7년에 한 권 시집을 낸 하재연이 얼마나 시에 관해 구두쇠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시집의 가장 앞에 내세운 시 <양양>을, 마침 짧기도 하니 읽어보자.



  열 마리 모래무지를 담아두었는데
  바다로 돌려보낼 때
  배를 드러낸 채 헤엄치지 못했다고 했다.


  집에 와 찾아보니
  모래무지는 민물고기라고 했다.


  누군가의 생일이라 쏘아 올린 십 연발 축포는
  일곱 발만 터져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다고


  노란 눈알이 예뻤는데


  물고기는 눈을 감지 못하니까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 했다.  (전문)



  이거 참. 나이가 몇인데 모래무지를 돌려보낸다고 바다에다 방생을 하나 그래. 시인은 좋은 마음에서 모래무지에게 넓고 넓은 바다의 자유로운 삶을 돌려주려 했으나 바다에 살이 닿은 순간 눈알이 노란 모래무지는 죽어 배를 내놓고 둥둥 떠오르고 만다. 하긴 바다라는 무한의 공간과 죽음이란 것이 우주적인 시각으로 봐서는 동일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생일 기념으로 쏘아올린 십 연발 축포와 대구를 만들어놓는 건 좀 그렇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닌데, 열 발이 터져야 비싸게 주고 산 축포가 제 값을 하는 셈이지만 겨우 일곱 발만 터졌으니 30퍼센트의 실패인가, 아니면 행운의 숫자인 일곱이 나왔으니 행운의 별점인가 헛갈린다는 의미, 이것이 바다라는 무한의 자유 또는 죽음을 맞은 노란 눈알의 모래무지 방생하고 비슷한 기분이기는 힘들지 않겠나 하는 것뿐이다. 아닌가? 민물고기 모래무지를 바다에 방생하는 장소가 양양, 날마다, 밤마다 양양의 바닷가에서는 누군가의 생일 기념 축포가 쏘아져 올라가니 모래무지를 방생해 살거나 죽거나 할 확률 7할과 3할의 경계, 그날도 일상적인 축포가 터진 장면을 묘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고.
  시집 2부의 첫 시도 제목을 <양양>으로 했다. 그 시에서는 모래무지 대신 해마가 등장한다. “(전략) 눈 뜬 해마는 식물 같아, / 수컷이 새끼를 낳는다지. // 너는 해마가 약으로도 쓰인다고 / 멸종 위기라고 // 물에 사는 고기들이 / 다 고기인 건 아니라고. // 다음 날이 도착했는데 // 죽은 해마와 / 나는 사람이 먹어야만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문제는 대한민국 강원도 양양군과 접해있는 바다에는 해마가 살지 않는다는 거. 그러니 이건 시인이 머릿속에서 바다와 해마라는 특이한 생물을 상상하면서 쓴 것일 텐데 독자인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해마와 수컷이 자기 배 속에 수정란을 포란하고 있다가 새끼를 낳은 습성과, 다음 날이 도착했을 때까지, 아니면 도착함과 동시에 “죽은”해마, 그리고 먹어야 살 수 있는 인간에 관하여 생각했는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하겠다는 말이다.
  시인은 음절 ‘양’ 또는 ‘영’처럼 입술이 벌어지는 ‘ㅇ’과 닫히는 ‘ㅇ’에 관심이 있다. 대표적인 단어가 “안녕.” 사실 ‘안’은 입술이 벌어지게 하는 것은 ‘ㅇ’이 아니라 모음 ‘ㅏ’이지만 시인도 알고 썼으니 독자도 맞춰서 읽어야 에티켓일 것이다. 입술이 닫히는 ‘ㅇ’도 받침 ‘ㅇ’이 아니라 입술이 (조금) 닫히는 모음 ‘ㅕ’인 것과 마찬가지로. 근데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니, 아닐 확률이 거의 100퍼센트지만 시인은 ‘ㅇ’을 쓰기 시작할 때의 점과 끝날 때 마지막 연필이, 볼펜이, 만년필이 시작점과 맞추느냐, 마주치지 못하느냐 하는 일에 신경을 많이 쓰는 거 같다. 만일 처음과 끝이 만나 원을 이룬다면 윤회, 우주가 되는 것이고, 마주치지 못한다면 처음은 탄생, 끝은 죽음의 한 사이클에 머무는 거라고. 맞아? 그건 독자 개개인이 판단하실 일. 하여간 시인이 보기엔 “안녕, 하는 입술이 벌어지는 ㅇ과 닫히는 ㅇ을 / 소리 없이 흉내 내며 눈이 그칠 줄 모”르는데 눈 속에서 “토성의 고리가 되어버린 어떤 죽음을 생각”한단다. (<양피지의 밤>) 이 죽음은 말할 것도 없이 W.G. 제발트일 터.
  이번 시집의 중요한 시적 소재 가운데 하나는 음악. 아예 시의 제목을 <해변의 아인슈타인>이라고 박아놓고 시작하는 시는 필립 글래스가 작곡한 동명의 오페라를 염두에 두고 쓴 것 같은데, 필립 글래스의 작품을 듣는 일 자체가 지적 수준이 어느 단계에 오르지 않은 나 같은 이들에게는 고문일 뿐이라서 그런지 “검은 지구의 밤하늘이 조금 더 / 검어졌습니다.”로 끝나는 시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그저 감감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페이지를 넘기면 <평균율>. 피아노 공부하는 분들이 피아노의 구약성서라고 한다는 바흐의 작품이지만 나도 평균율 1집과 2집, 합해서 넉 장의 CD를 한 번에 다 들은 경험은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녹음으로 딱 한 번뿐이다. 그것도 솔직히 음악 감상이 아니라 인내심 테스트 수준이었음을 고백하겠다. 그런 음악을 “오늘 엄마와 손잡는 꿈을 꾸었어, / 내일도 손을 잡아줘 조금 힘껏, 아프지 않게 // 세계를 열두 가지 색으로 나누면 무지갯빛이 아니라 / 희고 검은 색들만이 나는다.”라고 하면서 엄마와 손을 잡는 꿈을 꾸는 소년시기임에도 세계가 일곱 개의 흰 건반과 다섯 개의 검은 건반, 합해서 열둘의 희고 검은 색만 남는다는 건, 피아노를 연습하는 고통을 이야기한 것인지, 평균율이 세상을 대표하는 예술이라는 뜻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하재연의 시집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과하게 우울하다는 거. 첫 시 <양양>에서 민물고기 모래무지를 무지하게끔 바닷가에다 쏟아버려 죽이는 것으로 시작해 마지막 시 <행성의 고리>에서 “우리는 어디선가 이어져 있겠지 / 찌그러진 타원형의 바깥들에 매달려 / 계속해서 바깥이 되어가고 있겠지 // 검은 우주처럼 // 끝없이 돌면서 / 팽창하면서”라고 노래하며 기어이 안착하지 못하고 안쪽 행성 대신 행성의 고리에 머무는 우울한 코다로 마감한다. 오늘 독후감을 시작할 때 저 위에서 예로 든 시인은 당시 우울의 극에 달했던 사회분위기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슬픔과 동시에 기쁨을 노래했던 바, 당시 독자들에게 새로이, 아름다움은 슬픔 속에 있다는 놀라운 진실을 밝혀, 반백년에 조금 모자란 세월 동안 그걸로, 아직도 먹고 산다. 그러나 우울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극도의 우울로 나름의 터전을 잡은 극소수의 몇몇 시인을 제외하고, 아니, 그들이 이미 우울과 절망의 효용을 다 소진해버렸기 때문에 아직까지 남은 우울은 우중충함 또는 개인 화장실과 비슷한 것 외 새로운 우울의 전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다. 시인들이? 그럴 리가 있나. 독자인 내가 그렇다는 말이지.
  나는 너무나 자주 우울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1 이젠 색다른 우울, 우울의 새로운 전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당분간 옛 시인들의 노래를 감상해보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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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수영의 시 <거미>,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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