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집 범우문고 46
서정주 지음 / 범우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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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증. 시나 좀 못 쓰든지. 어찌 이런 절창을 세상에 떨구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서정주가 1915년생. 그의 나이 서른일 때 조선은 식민지에서 벗어난다. 조금만 더 참지 그걸 바로 눈앞에 둔 채 변절을 하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일제가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1940년대, 황순원은 평양에서 교사를 하다가 고향인 빙장리로 돌아와 은둔한 채 남몰래 조선어로 소설을 썼고, 서정주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던 김동리도 절필을 선언하고 사천의 양곡배급소에 들어가 일을 하기에 이른다. 당시 만 나이로 스물일곱 살의 미당은 일본어로, 황군에 입대해 영미 귀축 타도하기 위해 조선 젊은이의 한 목숨 깨끗하게 산화시키자고 노래를 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그를 변호하지 못하겠다. 미당의 시는 국보급이다. 하지만 국보급 시를 더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모르겠다. 앞에서 말했듯, 시나 좀 우습게 쓰던지 하지 이리 피 끓는 절창을 세상에 부려놓고 이젠 돌아오지 않으니 이걸 어찌하리.
  미당은 특별한 시각을 지녔음이 분명하다. 그의 초기 시 꽃뱀, <花蛇>에서는 ‘아름다운 배암’이 사향 박하麝香 薄荷의 뒤안길에 나타난다. 화려한 무늬의 뱀을 본 미당은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라고 영탄하고 결국은 뭇사람들의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麝香 芳草ㅅ길 /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 우리 할아버지의 안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 石油 먹은듯… 石油 먹은듯… 가쁜 숨결이야” 한 번 에로티시즘을 자극하고는 결국 “우리 순네는 스믈난 색시, 고양이 같은 고흔 입설… 슴여라! 배암.” 한 여인의 입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본다. 가수 송창식이 불러 더 유명해진 <푸르른 날>에서도 단풍은 그냥 드는 것이 아니라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하필이면 가을꽃이 필 자리에서 그만 초록이 지쳐, 초록이 이젠 지쳐서 단풍이 든단다.
  이 양반 생전에 공덕동이던가 대흥동이던가 또는 염리동인가에서 살았는데, 친구 집에 놀러가려면 댁의 낮고 긴 담을 따라가다 담을 지나치자마자 언덕빼기로 올라가야 했다. 그래 담 넘어 미당(으로 짐작되는 노인)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홍수환이 카라스키야를 때려눕히던 그날인가 싶은데 확실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미당 부부가 그리도 금슬이 좋았단다. 부인이 먼저 세상을 등지자 깊은 시름을 하다 곧이어 자신도 뒤를 따라 갔다는 기사를 읽고 감회에 젖었던 일이 엊그제 같다. 그게 무려 20년 전 일이다. 그는 <내 아내>라는 시를 지어 시 속에서 아내를 이렇게 그렸다.



  나 바람 나지 말라고
  아내가 새벽마다 장독대에 떠 놓은
  섬천 사발의 냉숫물.


  내 襤褸와 피리 옆에서
  삼천 사발의 냉수 냄새로
  항시 숨쉬는 그 숨결 소리.


  그녀 먼저 숨을 거둬 떠날 때에는
  그 숨결 달래서 내 피리에 담고,


  내 먼저 하늘로 올라가는 날이면
  내 숨은 그녀 빈 사발에 담을까.  (전문) * 첫 연 세 번째 줄 ‘섬천’은 ‘삼천’의 오식 같다.


  셋째 연에 등장하는 ‘피리’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의 피리인 것이 시집을 다 읽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모든 파란을 잠재울 수 있는 피리. 아내가 먼저 죽으면, 숨결을 달라고 해서 피리에 담겠다. 그러고 나면 피리를 불 때마다 자신의 모든 시름을 이길 수 있는 소리가 될 거라는 의미. 내가 먼저 죽으면 내 숨결이 아내의 빈 사발에 담겨 있어 냉수 한 사발을 마실 때마다 항상 냉수 냄새로 아내의 옆에 있을 수 있다니 미당은 참 운 좋은 한 세상 살다 갔다.
  나는 부모 얘기해가며 청승떠는 걸 무지하게 싫어한다. 그런데 미당의 시 <어머니> 끝 구절엔 두 손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은
  永遠과, 그리고는 어머니뿐이다.


  아니 그런가. 어머니가 “꿈의 마지막 한 겹 홑이불”이라니. 세상에 어떤 빌어먹을 시인 나부랭이가 있어서 이리 마음 저리는 한 줄 싯귀를 만들어놓고 갔는지. 이런 것들 말고도 편편이 절창이고 명시들이다. 그래 서정주가 더 미운 거다. 읽을 수도, 읽지 않을 수도 없는 시인. 그리하여 말 그대로 애증의 시인. 어쩔 수 없다. 책장 저 속에 숨겨놓고, 겉으로는 절대 서정주를 읽지 않는다고 거짓 주장을 하며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훔쳐볼 수밖에. 어떻게 이런 시를 읽지 않고 한 세월을 살 수 있겠는가 말이지.


  歸 蜀 途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 三萬里.
  흰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


  신이나 삼어줄ㅅ걸 슲은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메투리.
  은장도 푸른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머리털 엮어 드릴ㅅ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구비 구비 은하ㅅ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을로 가신 님아.  (전문)


 * 옥날메투리는, 신 중에서는 으뜸인 메투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신발이였느니라. 귀촉도는, 행용 우리들이 두견이라고도 하고 솟작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 귀촉도… 그런 發音으로 우는 것이라고 地下에 도라간 우리들의 祖上 때부터 들어 온 데서 생긴 말슴이니라. (시인의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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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3-20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는* 참 잘 써요... 정말. 중고등학교 때 이 사람 시 읽고 느낀 센세이션이란!
정말 애증의 시인입니다. ㅎㅎ 오랜만에 봐도 또 좋군요.

Falstaff 2020-03-20 15:34   좋아요 1 | URL
맞아요. 차라리 그러지나 말지 말입니다. ^^;;
 
세계를 재다
다니엘 켈만 지음, 박계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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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켈만의 <에프F>를 재미있게 읽어 그의 다른 작품을 하나 더 읽어보고 싶어 고른 책. <에프>는 일란성 쌍둥이를 등장시켜 인물들은 전혀 모르는 채로 상호간 소통불능의 상태를 재미있게 서술했다. <세계를 재다>에서는 완벽하게 다른 성격을 지닌 독일의 두 천재 알렉산더 폰 훔볼트 남작과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박사를 캐스팅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물을 잰다, 즉 측정하고자 한다는 것. 이를 위해 젊은 시절의 훔볼트 남작은 프랑스 남자 봉플랑과 함께 멕시코와 아마존 일대를 탐험하며 남아메리카의 오리노코 강을 누비기도 하고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졌던 침보라소 산을 등반해 18세기 사람으로 가장 높은 고도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었다.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활화산의 분화구로 들어가 지구의 속은 펄펄 끓는 용암으로 되어 있다는 걸 발견하기도 하고. 반면 가우스 박사는 태어나자마자 천재라는 특별한 족속으로 구별되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학습능력과 문제를 읽는 시선을 가졌으나, 다른 학문은 조금 멍청한 사람들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쉽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학문, 이젠 자신이 얼마나 탁월한 존재인지를 과시하기 위한 학문이 된(이 내용은 김용운 한양대 수학과 명예교수가 방송에 나와서 한 얘기다.) 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을 한다. 이어서 물리학, 천문학, 심지어 측지학까지 마음만 먹으면 어떤 학문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달하는 진정한 천재였다. 과거형을 사용하는 건, 아쉽게도 어떤 천재든지 천재라는 타이틀에는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 속의 늙은 가우스는 젊은 시절에 5분이면 다 이해하고 정리까지 마쳤을 논문을 이젠 하루 종일 집중을 해야 겨우 이해가 된다는 이야기를 몇 번 하기도 한다.
  <세계를 재다>는 이렇게 유통기한이 지난 한 명의 천재와 또 한 명의 탐험가이자 지리학자이자 기상학자이자 해양학자를 등장시켜 이들의 과거를 회상하고, 활동무대가 완벽하게 상이했으나 결국 그들이 공통적으로 찾고자, 알고자 했던 건 같았다는 (특히 훔볼트의) 자각으로 결론을 맺는다.
  책은 1928년 9월, 괴팅겐에 있던 가우스에게 독일 자연과학자 회의에 참석해달라고 그토록 유명한 귀족 훔볼트가 특별한 초청장을 보내, 실로 몇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괴팅겐을 떠나 베를린 행 마차를 타는 난리법석으로 시작한다. 가우스는 정말로 여행을 싫어해 그냥 괴팅겐의 천문대에 박혀 있고 싶지만 그래도 훔볼트 남작은 한 번 보고 싶어 두 번째 아내가 낳은 아들 오이겐과 함께 길을 나선다. 가우스의 첫 번째 아내 요하나가 어떤 여자인가 하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니며, 평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가우스 앞에서 그가 가우스인지도 모른 채 말해버린 여자다. 천재의 눈으로 봐서는 그냥 덜 멍청한 수준이고, 내 수준으론 도무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똑똑한 여자다. 가우스가 날 봤다면? 뭐 사람으로 뵈지도 않았겠지. 근데 둘째 아들 오이겐이 가우스의 눈으로 보기에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은 수준. 우리 눈으로는 보통, 또는 보통보다 조금 높은, 그냥 서울대 합격했을 정도. 가우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다만 오이겐 한 명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이겐의 생각이다. 이건 책의 거의 마지막에 나온다. 거 보시라. 천재라고 행복할 거 같아? 돈 많다고 행복할 거 같아? 천만의 말씀. 사는 건 다 그게 그거다.
  흠. 또 이야기가 삼천포 시로 빠졌는데, 가우스가 얼마나 천재였느냐 하면, 나 대학 다닐 때 김X호 선생이 수업을 하다 학생들이 알아듣지 못하면, 자신의 (실력은 모르겠고) 교수법이 도무지 해독불가일 정도로 개판인 건 조금도 생각 안한 채, 뻑하면 가우스는 열다섯 살 때 <산술에 관한 논고>를 썼느니 안 썼느니 했을 정도다. ‘니나’라는 이름의 러시아 출신 단골 창녀를 찾아가서도, 요하나와의 결혼 첫날밤에 그녀의 위에서 일을 치르던 중에도 목성의 위성이 목성을 도는 괘도에 관한 오류에 대한 방정식이 번쩍 생각이 나 얼른 몸을 일으켜 기어이 떠오른 공식을 종이에 적어놓은 다음에 후반전을 시작했다는 거 아닌가. 확실히 인간이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와중에 어떻게 타원을 도는 오차誤差에 관해 궁리를 할 수가 있었는지. 하버드 의과대 다니는 인간들은 연인의 몸을 만지면서도 서로 상대방 피부 속 뼈의 라틴어 이름과 개수를 센다며? 그건 진짜로 뼈의 외곽을 만지니까 그럴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목성의 위성이 어쩌구저쩌구... 1부터 n까지의 수를 더하기 한 합계가 n(n+1)/2 인 것을 밝혀낸 인간이 가우스인데, 그때 나이가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이었다.
  훔볼트로 말하자면 남작의 아들로, 위로 형이 한 놈 있어서 나중에 국가의 고위 공무원이 된 후에 훔볼트 대학을 짓는다. 그러니까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은 이 책의 주인공 훔볼트의 형이, 동생 알렉산더, 알렉시의 눈부신 업적을 보고 질투가 나, 여기서 이야기하는 질투는 지극히 생산적이고 모범적이고 발전적인 질투를 언급하는 것이지만 솔직히 질투는 질투니까, 동생보다 더 오래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기 바라는 형이 만든 학교다. 하여간 이 형제들의 바람직한 양육을 위해 어머니가 괴테를 찾아가 아들 키우는 법에 관해 컨설팅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괴테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하니, 아들 형제를 키우는 분들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읽어보시라.


  -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것들의 다양함을 뚜렷이 보여주는 형제
  - 즉 행위와 향유의 풍부한 가능성들을 가장 모범적인 현실로 만드는 형제
  - 그들의 감성을 희망으로, 정신을 여러 가지 생각으로 충족시키는 하나의 극작품과도 같은 형제.

  로 키우라고 했단다. 근데 문제는 아무도 괴테의 위와 같은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고. 만일 괴테의 이 편지를 가우스에게 보여주었으면 아마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말았을 걸?
  어쨌든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알렉시 훔볼트는, 소년시절에 재능에 있어 자신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형의 악의에 찬 장난으로 죽을 위기를 몇 번 넘긴 다음, 드디어 정확한 세상의 사이즈와 무수한 선들(위도, 경도, 자오선 기타 등등)을 위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드넓은 강과 밀림으로 들어가 진짜로 죽을 고생을 하며 여러 가지 광물과 식물, 심지어 인간 시체의 표본들을 박스에 담아 (스페인 여권으로 떠났으니) 일부는 스페인으로, 일부는 형에게 보내기에 이른다. 훔볼트가 인류학적으로도 흥미가 있었는지, 그는 완전한 나신에 몸에다 갖가지 그림만 그리고 다니는 아마존 여인의 머릿속에 머릿니가 몇 마리 들었는지 세보기도 하고, 화살촉에 발라 이웃한 종족을 쏴 죽인 다음 그 고기를 먹는 식인종에게 독을 얻어 직접 꿀꺽 삼키고는 애매한 몽환 속을 헤매보기도 하고, 날아다니는 새의 똥을 찍어먹어 보기도 하는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다닌다. 그것이 괴테의 양육법이 낳은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엽기발랄한 행위를 하고도 끝내 식인종의 만찬 식탁엔 오르지 않고 다시 유럽으로 귀환해 이름이 만방에 떨치니 어찌 나폴레옹이 자신을 위해 괴팅겐을 포격하지 않았다고 자랑하고 다니는 가우스일지언정 그의 초대를 뿌리칠 수 있었으랴.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진짜 재미는 작가 다니엘 켈만이 요소마다 숨겨놓은 유머 코드를 발견하고 함께 낄낄거리는 거라는데,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두 마에스트로를 좇아 서양식 유머를 ‘모두’ 발견하기는 극동의 아시아 사람에겐 조금 무리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는 할지라도 도무지 추천은 하지 못하겠다. 대신 켈만의 다른 소설 <에프>는 한 번 읽어보셔도 무난할 듯하니, 그저 참고만 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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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3-19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닌 이럴 수가...

저도 며칠 전부터 이 책 읽고
있었거든요 놀라워라 ~

다만 <거장과 마르가리타> 읽
느라 미처 못 읽는 사이에 까비...

Falstaff 2020-03-19 10:1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 책, 아이디어가 참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장하고 함께 읽는 건 무리지요. 거장이 워낙 사람을 확 빨아들이는 작품이라서요. ^^
 
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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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레산드로 바리코, 도대체 이 사람 누구야! 아랫배를 압박하는 요의를 억누른 채 <이런 이야기>를 마저 다 읽고 얼른 화장실 다녀오면서 머릿속에서 떠오른 의문. 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음악학자, 극작가, 영화감독, 문예창작교수를 모두 아우르는 58년 개띠 아저씨란다. 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피아노 분야에서도 학위가 있다고 하고,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경력도 있고, 신문에 기고하는 음악평론가, 문화시평가로도 활약했다고도 한다. 하여간 박학다식하면서도 소설도 썼는데 내가 읽은 <이런 이야기>가 이이의 여섯 번째 소설작품이라고 한다. 하여간 나는 이 책을 읽자마자 다른 작품을 얼른 책방 보관함에 집어넣었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재미있다. 소설이 아니고 현실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들. 그것을 기묘한 역사의 인연 속에서 이별과 회상과 끊이지 않는 애정과 사랑으로 적절하게 빚어 가슴 속에 묻어둔 채 실행하지 못한 현대인들의 꿈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작품. 그리하여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책을 읽으며 실행하지 못한, 한때는 찬연히 빛났던 자신들의 꿈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근데 그게 사는 거야. 한 때 꿈이었던 걸 품기만 한 채 평생을 아쉬운 마음으로 사는 거. 이 이야기는 소설이잖아.
  이야기는 1897년 7월, 이탈리아 토리노 근방으로 추측되는 시골 평야지대에서 태어난 울티모 파르리라는 남자의 한 평생을 좇아간다. 6대에 걸쳐 쇠똥을 몸에 칠하고 살아야 했던 리베로 파르리 씨는 프랑스 태생의 맹랑하고 직선적인 플로랑스라는 아가씨와 결혼해 아이를 딱 하나만 두겠다는 의미에서 첫아들임에도 ‘마지막 아들’이라는 뜻의 ‘울티모’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이 아이가 낳자마자 시들시들, 골골해 죽을 고비를 넘기는 순간이 몇 차례였음에도 못생기기는 했으나 ‘금빛 그늘’, 어디에서도 그의 존재를 알 수 있고 누구나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묘한 구석이 있는 성인으로 자라난다. 아버지 파르리 씨는 가구나 마차, 농사짓는 데 쓰는 장비 등을 고치는 손재주가 있는 사람으로, 어느 날 피에몬테 토종 소 파소네 스물여섯 마리를 팔아치우고 백리근동에 자동차가 한 대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라주 자동차 정비소”를 세워 드디어 자신 대에 몸에서 쇠똥 냄새를 지우는데 성공한 사람이다. 정비소를 세우기는 했지만 자동차 정비에 관해 어디 배울 데가 있어야지. 그리하여 프랑스 글자로 쓰인 “자동차 공학” 한 권을 사서 열심히 익히기는 했지만 파르리 씨가 불어를 어떻게 읽어.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이라 엉뚱하게도 엄마 플로랑스가 책을 몽땅 외울 정도가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평야지대 완벽한 오지 사람들이 차를 살 때까지 기다리려면 말 그대로 하세월일 텐데 이를 어째? 집과 정비소를 담보로 은행 빚을 얻어 쓰고 그럴 즈음인 1911년의 저녁 무렵, 완벽한 운전복을 입은 한 사내가 정비소로 와 묻는다.
  “무례하게 굴고 싶지는 않지만,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이 진흙탕 한복판에 정비소를 열었나요?”
  파르리 씨, 대답하기를.
  “들녘 한복판에서 휘발유가 떨어져 오도 가도 못하는 멍청이들을 믿고 하는 일이지요.”
  운전복을 입은 사내는 서른여섯 살 먹은 당대의 부자, 담브리시오 백작. 이런 인간들이 묵시록적 파국을 맞을 숙명으로 거의 신비스러우리 만큼 능숙하게 해치우는 일이 바로 ‘사치’다. 그리하여 담브리시오 백작은 뜻이 맞는 파르리를 자신의 정비공으로 고용을 하고 함께 자동차 경주, 즉 랠리에 참가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백작과 아버지는 ‘차’라는 달리는 기계에 집착을 하는 반면, 우리의 주인공 울티모는 달리는 차를 관찰하고 직접 타보기도 하며 느낀 바, 결국 차를 포함한 혼돈에 맞서는 규칙, 우연을 굴복시키는 질서, 급류를 길들이는 강바닥, 무한을 헤아리는 유한의 수로 자신이 평생을 걸고 탐색하고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길”을 선택한다. 이후로 울티모는 자신이 맞닥뜨리게 되는 중요한 인물, 사건, 경험 등을 길의 평탄과 회전과 높고 낮음으로 해석하여 자신만의 자동차만이 다닐 수 있는 길, 서킷의 재료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열다섯 살이 되는 1912년, 울티모는 읍내에서 처음 상영되는 무성영화를 보러 갔다가 바로 앞자리에 눈이 부신 아가씨가 어깨와 목, 팔을 모두 드러낸 드레스 차림으로 앉아 있어서, 그것을 기점으로 그의 어린 시절은 종막을 고했다고 하는데, 귀에서 뺨을 거쳐 목에 이르는 선, 목에서 다시 가슴으로 죽 떨어지는 선, 어깨를 통과해 팔로 이어지는 선 등을 전부 하나의 길로 형상화 시킨다. 조금 더 커 자신이 참전했던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카포레토 전투(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와 같은 전투, 매우 유사한 에피소드)에서의 어처구니없는 후퇴와, 포로수용소에서 당한 구타, 미국에서 아름다운 엘리자베타와의 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활주로 등도 자신이 만들 길의 재료, 길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담브리시오 백작이 파르리의 아내 플로랑스에게 남편을 자신의 정비사로 고용하는 일을 상담할 때, 백작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해준 이야기로 플로랑스를 설득한다. 내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하셨지요.
  “네가 너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사랑하다면, 절대로 그의 꿈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해. 네 아버지의 꿈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터무니없는 꿈은 바로 너야.”
  이 말을 들은 울티모의 엄마 플로랑스가 대답하기를,
  “꿈에 관한 당신의 말이 나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해요. 하지만 그런 말은 책에서만 맞아요. 실제의 삶에서는 거짓이죠. 삶은 훨씬 더 복잡해요. 내 말을 가벼이 여기시면 안 돼요.”
  그래, 이제 살아보니 플로랑스라는 젊은 엄마가 현명했다. 꿈은 아름답지만 진짜로 살아가는 것은 훨씬 더 복잡하다. 비록 이 책이 평생 꿈 하나를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힘으로 온전히 버티어내는 인간에 관한 아름다운 서술이기는 하나, 이건 책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책 또는 책으로 대표되는 사람의 상상력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는 거 아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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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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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우리말로 번역해 출간한 아디치에의 소설책은 올 클리어. 우습기도 하지, 이이의 데뷔작을 제일 끝으로 읽었으니. 민음사에서 더 이상 내지 않을 것 같은 시리즈인 “모던 클래식”을 통해 읽은 순서로 치면 <아메리카나>,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단편집 《숨통》이었는데, <아메리카나>가 단행본으로 개정판이 나온 것을 보면 다른 책들도 단행본이든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처럼 세계문학전집으로 이름만 바꿔 개정판이 나올 것 같다. 그건 출판사 사정이니까 뭐, 알아서 하겠지.
  소감? 단도직입적으로 독후감 시작하자마자 소감? 좋다. 읽는 도중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왜 그랬냐고? 읽어보시면 안다. 국가와 국민과 사회정의를 위해 활수하게 선행을 베풀고 정부에 저항도 하는 큰 기업가 유진 아치케 씨가 가정에서는 지독한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고, 가족의 아무도 이 무시무시한 정신적, 육체적 독재자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질식할 듯한 분위기. 여기에 가늘고 긴 손가락과 창백한 피부색, 금발머리를 한 예수에 대한 교조적인 복종과 계율과 의식과 터부 속에 짧은 생애지만 살면서 자신이 웃어본 적이 있는지도 모르는 아들 추쿠카 자자와 딸 캄빌리, 그리고 아내 비어트리스.
  그럼에도 이 소설에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버지 유진 아치케 사장이 지난 시대의 대표적인 나이지리아 작가 아체베의 작품에서 본 인물, 자신은 이보족 전통의 문화를 고수하지만 아들만은 영국인의 종교를 좇아 신문물을 익혀 성공하는, 이 장면에서 ‘아들’역인 것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유진 사장의 의식으로 보면 아직 살아있는 여든이 넘은 늙은 아버지는 시대에 뒤떨어져 지옥의 유황불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는 불쌍한 이교도에 불과하여 그저 가끔 돈 푼이나 집어주고 거의 부자의 연을 끊고 지낼 정도로 가톨릭 환자 증세를 보인다. 현명한 여동생이자 나이지리아 대학의 교수이지만 몇 달째 봉급이 나오지 않아 결코 부유하지 않은 과부 이페오마가 정의하듯이 유진 사장은 전형적인 식민지 시대의 산물이다. 식민지가 만든 괴물이 사회의 최정상부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나이지리아가 아직도 반(半)식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 그러나 내가 읽기로 애국자이자 엠네스티 월드에서 인권상을 수상할 정도의 양심적 지식인이기도 한 유진 아치케 씨 본인이 가정 내에서는, 자신이 속한 민족이 오랜 투쟁 끝에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던 식민주의자였다.
  유진 씨는 그리하여 아버지의 토속문화를 철저하게 이단시하고, 같은 가톨릭이라 하더라도 이보족의 언어로 찬송하고 자기 민족의 전통에 대해 반감이 없는 여동생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된다. 오소독스하고 질서정연한 부르주아 지식인, 엘리트 중의 엘리트, 비교할 수 없이 도덕적인 삶과 헌신, 기타 모든 허망한 가치관을 유일한 삶의 목적으로 두면서 가족 구성원에게 굳은 신념으로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는 절대자. 이에 대한 대가로 풍족한 삶과 성당의 제일 앞자리 가족석과 사립학교에서의 교육을 보장한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이 자신의 뜻과 어긋나게 행동할 때 식민주의자로서의 본질이 드러나는데, 이게 바로 가혹한 처벌이다. 오른손은 글씨를 써야 하니 아들의 왼손 손가락을 불구로 만들고, 아들과 딸의 발등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임신한 아내의 배를 단단한 나무로 된 탁자로 내리쳐 낙태하게 만들고 심심하면 안와골절을 유발하는 펀치력도 자랑한다. 아디치에는 의도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내가 본 가정 내 아치케 선생은 자신이 완전히 벗어났다고 의심 없이 생각하는 과거의 식민주의자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도로를 닦고, 학교를 지어 국민들을 교육시키고, 제도를 개선하고, 공장을 지어 산업을 발전시키고, 선진 농업을 도입했다는 명목으로 모든 산물을 착취하며 잔인한 폭력으로 저항을 짓밟은 세력들.
  나이지리아의 유일한 정론지 《스탠더드》 신문의 사설을 통한 독재자와 독재 권력에 양심적 투쟁을 벌이며,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열심인 외적으로 선한 사람의 폭력성과 그 속에서 점점 질식해가는 가족 구성원을 지켜보는 일. 여기에 소설을 더욱 재미있게 이끌어가는 인물 셋만 더 꼽으라면, 옛 나이지리아의 지혜롭고 순수한 정서를 잃지 않은 유진 아치케의 아버지 파파은누크와 현명하지만 현실적이기도 한 이페오마 고모. 제삼세계에서 바람직한 사제상을 만드는 아마디 신부 역시 백인 사제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20세기 말에 반(半)식민지 상태의 사회에서 적절한 사제의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계속되는 쿠데타와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들에 의한 독재정치에 나라는 점점 부패해가고, 폭력과 허위와 기만에 허덕이다가 더 이상 나이지리아라는 땅에서 살 수 없는 질식 상태에 이른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미국행 비자를 얻기 위해 미국 대사관 앞에 길고 긴 줄을 선다. (이 장면은 이이의 다른 소설에도 잘 묘사가 되어 있다.) 이때, 대사관 앞의 긴 줄에 섰던 이페오마 고모의 친구,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동료 교수 치아쿠는 끝까지 나이지리아에 남겠다고 각오하며 고모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학력자들,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떠나. 약자들을 남겨두고 가지. 독재자들은 계속 군림해. 약자들이 저항을 못하니까. 너는 이게 순환 고리라는 것을 모르니?”
  1970년대 초, 내 부모도 미국 대사관 앞에 줄을 섰었다. 그때 나는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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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유령일 뿐 민음사 모던 클래식 71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유디트, 라고 하면, 아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대가리를 뎅거덩 잘라 머리끄덩이를 들고 장군의 천막을 나선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과부, 또는 버르톡이 작곡한 <푸른 수염 영주의 성>에서 이제 푸른 수염과 막 결혼한 어린 신부를 연상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나는 ‘유디트’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1970년, 칠공년 개띠 태생 독일인 작가 유디트 헤르만을 떠올릴 거 같다. 단편 소설 일곱 편을 엮어 간행한 헤르만의 두 번째 작품집 《단지 유령일 뿐》, 이젠 품절이라 당분간 구하기 쉽지 않을 이 책의 새것과 다름없는 중고를 헌책방에서 구입해 읽고는 단박에 반해버렸다. 일곱 작품의 거의 모든 주인공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여성. 유디트 헤르만은 주인공들을 가까이는 같은 독일의 뷔르츠부르크, 이어서 아이슬란드 올루르프스부디르의 여름별장, 베네치아, 체코에 있다고 하는 소금물 온천도시 카를로비바리, 미국 네바다 주 오스틴 지역 사막에 있는 완전 허름한 호텔 인터내셔널, 몰다우가 내려다보이는 체코 프라하의 언덕배기 집, 그리고 노르웨이 트롬쇠로 보내는데, 각 지역의 자연경관에 집중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무엇보다 사람들 사이의 오해와 관심, 무관심, 신경전 같은 미묘한 신경의 뒤섞임을 집중해 탐색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섬세한 신경줄을 포착하는 눈길이 기가 막히게 내 타입이라 작가 유디트 헤르만을 도대체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
  첫 작품 <루스>부터 단박에 빠져든다. 루스가 ‘나’에게 말한다. “절대 걔와 시작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줘.” 루스는 덩치가 좋지는 않지만 잘생긴 연극배우 라울을 사랑한다. 하지만 아들 하나 있는 홀아비 라울은 루스를 소 닭 보듯 하고 심지어 같이 잔적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라울이 나에게 “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니? 나 때문에 루스를 배신할 거니?”라고 묻자 나는 기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나’가 라울을 사랑하게 돼서? 그건 직접 읽어보셔야 아실 것.
  두 번째 작 <차갑고도 푸른>을 제일 좋게 읽었다. 아이슬란드에서 관광 가이드를 하는 요니나와 마그누스 커플에게 사진 한 장이 소포로 도작한다. 발송인은 베를린에 사는 요나스. 요니나는 동거남 마그누스가 사진을 발견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숨기면서 독일인 커플 요나스와 이레네가 올루르프스부디르에 있는 자신들의 여름별장을 방문했던 1년 전의 추억을 떠올린다. 아이슬란드의 머리 좋은 청년들은 대륙으로 떠나 공부를 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떤 시점이 되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이들도 10여 년간 베를린과 빈에 살다가 귀국한 경우.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요니나는 아무것도 아닌 한 순간, 다시 생각해봐도 특별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잠깐의 사이에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사랑이란 원래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서.
  일곱 편 모두 다 재미있다. 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또는 그것에 관한 밀고 당김, 얽혀버린 관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 번째 작품 <아쿠아 알타>는 베네치아에서 은퇴 후 여행을 온 부모님을 만난 딸의 감정 같은 것을 부드러운 시각으로 그리기도 했으며, 표제작 <단지 유령일 뿐>은 자동차를 이용해 미국 일주를 결심한 엘렌과 펠릭스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지역의 한 허름한 호텔에서 남루한 행색의 도로 공사 노동자를 만나 어쩌면 진정한 인생이라 할 수 있는, 작지만 반짝이는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장면도 들어 있다.
  그럼에도 역시 이 작품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을 매개로 한 사람들 사이의 의견불일치, 소통단절, 의식의 이격離隔 등이다. 이렇게 말하면 별다른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사실이 그렇다. 어차피 소설은 삶의 모방임에야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을 공유하는데 있어서, 개인감정의 표현 방식은 대단히 중요한 법. 유디트 헤르만은 여기에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지금 화자 또는 주인공의 감정선이 이전에 있었던 어떤 계기와 연결이 되고, 또 증폭하여 독자로 하여금 무릎을 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이 작품집에 관해서야 이렇게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읽어봐야 안다고. 지금 종이책은 절판이지만 E-Book으로는 판매하고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정말 오랜만에 유디트 헤르만, 낯선 여자한테, 단 한 번의 눈길로 사랑에 빠져버렸지 뭐야.

 

 

유디트 헤르만 Judith Herma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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