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조지 웰스 - 눈먼 자들의 나라 외 3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최용준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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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버트 조지 웰스, H.G. 웰스의 책은 <투명인간>과 <모로 박사의 섬> 두 권을 읽었다. 그 외에도 <우주전쟁>이나 <타임머신>같은 과학 추리극, 혹은 과학적 픽션, 자칭 ‘SF 소설의 아버지’다운 작품이 있으나 장편이라면 읽은 두 권으로 만족하겠다. 그래 현대문학사의 세계문학‘단편선’이 아니었다면 그냥 넘어갔을 작가이지만 과연 SF의 아버지가 쓴 단편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읽어보게 됐다. 물론 33편의 작품을 저렴한 가격으로 읽을 수 있다는 유혹도 큰 몫을 했고.
  조지 웰스의 흥미는 과학, 우주, 지적인 우주생명체, 생체학, 생물학, 심지어 심령학까지 인간의 섬세한 감정의 선을 따라가는 기존 문학이 해왔던 것들을 빼면 나머지 거의 모든 분야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첫 작품 <퇴짜 맞은 제인>은 자기하고 연애하던 배달부 윌리엄이 상점에서 판매원으로 승격을 하고, 당연히 이에 따라 급여가 올라가니 생각이 달라져 다른 여성과 결혼한 것에 열을 받아,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 행진’ 이후 교회 밖에서 하객들이 딸 아들 많이 낳으라고 쌀을 뿌릴 때, (자신을 걷어찬 신랑이 아니라) 신부를 향해 장화를 던졌지만 엉뚱하게 불쌍한 신랑의 눈두덩에 맞은 일은 코믹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작품은 어째 조지 웰스치고는 조금 낯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상적 사건이어서 조금 의아하기는 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실린 <원뿔>에 이르러 자신의 아내와 불륜관계를 맺어오다가 내일 야반도주를 획책하는 오랜 친구를 유인해 제철소의 용광로 부근에 던져버림으로써 처참하게 태워 죽이는 리얼 묘사를 읽으면, 역시 웰스, 라는 말이 비로소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한 뻥쟁이 생물학자가 위조 추천장을 들고 자신을 방문한 자에게 푸른색의 작은 병 속에 든 것이 살아있는 콜레라균이라고 했다가 방문객이 알고 보니 테러리스트이어서 병을 훔쳐 달아난다. 긴박한 마차 추격전 끝에 급박한 처지에 이른 테러리스트가 콜레라균을 마셔버려 스스로 생물학전 병기가 되어버리는 사건. 그러나 병 속에 든 건 전염병 콜레라가 아니라 온 몸을 푸르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병원체였다는 <도둑맞은 세균>으로 초반부부터 자신이 직접 자기 작품을 골라 만든 단편집에 기름칠을 한다.
  이어서 동물의 의식을 혼란하게 만드는 향기를 내뿜은 후 촉수를 뻗어 피를 빨아 먹는 아름다운 흡혈 식물, 보르네오 섬에 있는 천문대에 날아든 희귀한 큰 날 원숭이(large flying ape) ‘클랑우탕’과의 혈투, 지표 아래서 300년 전에 살던 괴조 ‘아이피오르니스’의 알 세 개를 발견해 이 가운데 하나를 부화시켰다가 새끼 상태에서 벗어나자 어쩔 수 없이 새와 생사가 걸린 혈투를 벌여야 했던 이야기, ‘공간의 뒤틀림’ 현상으로 매우 좁은 시야만 갖게 된 한 남자가 런던에서 남극의 현장 중계를 보게 되는 이야기, 자신을 학대하는 발전기 기사를 바로 그 발전기로 감전시켜 태워서 죽이는 아시아 흑인 이야기, 자신의 집에 밤을 틈타 들어온 거대 나방이 일으킨 망상, 환각상태 이야기, 스페인 보물이 묻힌 밀림 속에서 황금 덩어리를 발견하지만 지도에 중국어로 표시되어 있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는 탐험가 이야기, 머리 좋은 천애 고아이자 건장한 젊은이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유증하는 뛰어난 정신과학자의 불멸 이야기, 수술을 받다가 간 문맥이 절단당해 죽음에 이르러 저 세상을 구경했다가 살아나는 이야기, 하플로테우시스라는 이름의 해저 두족류(오징어, 문어, 낙지, 주꾸미, 꼴뚜기 같은 종류)와의 치열한 한 판 승부 등등 실로 신기한 소재들의 만찬이 독자 앞에 벌어진다.
  저자 서문에서 허버트 조지 웰스는 이렇게 말한다. 책의 뒤편에도 씌어있다.
  “나는 이 책이 신사의 서재보다는 요양소 침대나 치과의 응접실, 기차에 있었으면 좋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읽는 것보다는 잠깐 읽고 또 잠깐 읽고 했으면 좋겠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꾸며 낸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며, 상당수는 쓰는 동안 무척 즐거웠다. 운운.”
  맞다. 위에 내가 소개한 것들을 보시라. 참으로 기묘한 이야기가 망라되어 각기 한 편씩 읽으면 실로 흥미가 솟을 만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내가 책을 읽는 방식은 한 권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다른 책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편. 그래 한 방에 이 책도 다 읽었는데, 이틀 반 걸렸다, 처음엔 정말 재미있게, 몰두해가며 읽었으나, 틀림없이 보통의 사람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할 너무도 낯선 이야기가, 너무도 자주, 무려 서른 세 번이나 나오니까 작품의 효용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과학, 지적인 우주 생명체, 생물학, 변종 포유류부터 듣도 보도 못한 해저동물에서 흡혈식물을 거쳐 유령과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망라되는 모든 것이, 한 300쪽 넘어가면 점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바뀌어 가는 것을 독자 스스로 느끼게 된다. 설마? 의심스러운 분은 직접 나처럼 무식하게 읽어보시라.
  어쨌든 이 작품집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위에 인용한 작가의 말대로 하는 것이리라. 그리하면 적어도 일 년 동안은, 보름에 한 편 정도를 읽는다면, 엽기발랄한 한 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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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8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 지음, 서정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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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는 1828년 사라토프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교에 다니다가 자퇴하고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역사, 철학, 언어학을 배운다. 이후 본격적으로 유물론에 빠져, 자연스레 자유사상과 혁명에 집중하게 된다. 당연히 이로 인해 1862년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수용소에 투옥되고, 이 때 수용소에서 대표작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집필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1889년까지, 러시아가 얼마나 넓은지 감안하시기 바라는데, 전국의 수용소를 전전하며 무려 27년간 수용생활을 하다가 61세에 석방이 되고, 곧바로 죽는다. 수용소에서 무슨 병이 들었는지, 아니면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서 면역력이 약해져 급사를 했는지는 책 뒤에 쓰인 연보만 가지고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책의 내용은 당연히 19 세기 중반, 로마노프 왕조 치하에서 읽을 수 있는 최고의 의식화 교재다. 이거, 다른 사람들 눈에는 모르겠으나 내 의견으로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을 빙자해 독자로 하여금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꿈꾸게 만드는 전향 권유 책자다. 그래 이 책의 열혈 독자를 꼽아도 목록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프로 혁명꾼 플레하노프를 위시하여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미야코프스키 등등. 심지어 레닌은 책꽂이에 체르니셰프스키의 전집을 장만해놓았을 정도라니 소련에서는 아마 대를 이어 필독서 목록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소설의 외양을 갖추기는 했지만, 소설로 읽어도 차라리 19세기 초반, 야박하게 얘기하자면 18세기 후반에나 어울릴 서사구조와, 등장인물의 정형화된 성격을 가졌다(라고 나는 읽었다).
  물론 스토리 자체는 재미있다. 역자가 번역을 하면서 스토리 라인의 시간적 공간을 헷갈렸는지, 원작 자체가 그런지 모르겠지만 날짜 자체가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앞에서 말 한 날짜와 장소가 뒤에서 다시 얘기하는 때와 곳이 다르기도 하고, 연도가 다르기도 한데, 이 정도는 봐주자. 작가가 다른 곳도 아니고 수용소에서 썼다니까 낮엔 노동하고 밤에 틈을 내서 끼적이는데 완벽한 퇴고는 불가능했을 수도 있으니.
  그럼 이야기의 시작 부분만 좀 들춰보자.
  프롤로그. 첫 문장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1856년 7월 11일 아침 모스끄바 철도역 근처에 있는 뻬쩨르부르그에서 가장 큰 한 호텔의 종업원들이 약간 겁을 먹은 듯 부산을 떨고 있었다.”
  종업원들이 기겁을 한 날이 1856년 7월 11일 아침이 아니라 7월 21일 임은 421쪽 부근에 가면 알 수 있는데 말 그대로 프롤로그니까 아직 독자는 그런 건 눈치를 챌 방법이 없고, 다음 구절을 보면 ‘모스끄바 철도역 근처에 있는 뻬쩨르부르그에서 가장 큰 호텔’이라면 호텔이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 나는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큰 호텔 근처에 모스크바로 가는 열차를 위한 역이 있다, 따라서 호텔은 페테르부르크에 있다고 확정하고 읽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저 뒤로 가면 모스크바 철도역 부근에 있는 모스크바에서 제일 큰 메트로폴 호텔(아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다음 문맥상 호텔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모스크바 행 역이 맞다. 왜냐하면 호텔에 숙박한 신사가 새벽 두시 반 경 (당시의)임시다리 리찌야나 교에서 권총으로 머리통을 쏜 뒤 (네베로 보이는) 강에 빠져 북해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하여간 한 젊은 신사가, 평소 안하던 짓인 최고급 호텔,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큰 호텔에 들어 룸서비스로 저녁을 거하게 차려 먹고, 물론 마지막 만찬이었겠지만, 새벽에 자신의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 넣은 채 네바 강에 빠져 죽은 건, 일단 ‘공식적으로’ 사실이다.
  다음날, 페테르부르크 상류층의 여름별장이 밀집해 있는 바실리예프스키 섬, 까멘노이 오스뜨로프에 있는 방 셋짜리 작은 별장. 어떤 분위기의 집인지 궁금하시면 도스토옙스키의 역작 <백치>를 읽어보시면 단박에 짐작을 하실 수 있을 터인데, 이 집에서 여자 주인공 베라 빠블로브나가 페테르부르크 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편지를 받고 기겁을 한다. 죽은 남자에게서 온, 그러나 아직 그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받은 편지.
  “내가 당신 마음의 평안을 해쳤나 보오. 나는 이제 그만 무대에서 사라지려고 하오. 나의 결정에 만족해하고 있소. 당신들 둘을 변함없이 사랑하오. 안녕.”
  이 편지를 옆에 선 젊은 남자가 집어 든다. 그러니 프롤로그에서 딱 봐도 이건 두 남자와 한 여자 간의 삼각관계.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것 세 개만 고르라면, 불구경, 싸움구경, 그리고 삼각관계. 이 책은 다행스럽게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주제 중의 하나에 관한 책이구나, 라고 김칫국물을 벌컥벌컥 들이켰겠습니까, 안 들이켰겠습니까? 일단 프롤로그만 읽은 상태라고 가정을 하면 말씀입니다.
  이어서 본문이 나온다. 첫 번째는 우리의 주인공 베라 빠블로브나. 어려서부터 독한 엄마의 치마 아래 겁나게 고생만 하다가, 엄마가 보기에 꾸미기만 괜찮게 꾸미면 그래도 비싼 값에 팔아먹을 수 있을 거 같아, 불어, 독일어 교습에다가 피아노 레슨에 괜찮은 성악적 재질까지 두루 갖추어 놓고, 점점 자라 열일곱 살 되매, 최고급은 아닐지언정 근사한 드레스에 비싸지 않은 보석으로 치장을 해놓고 보니, 아파트 관리인을 하면서 무급 공직자를 하던 아버지가 근무하는 부서의 늙은 장관이 침을 흘리며 껄떡대기 시작했고, 이어 옆 부서의 또 다른 늙은 장관까지 눈독을 들이는 걸로 봐서 잘 만 하면 한 식구 팔자 고치는 건 시간 문제였단다. 그리하여 가장 괜찮은 배필을 골랐고, 자기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돈 많은 소유주의 아들이자 (작가가 소설을 쓰고 있다고 주장하는 1860년 기준) 현재에는 장교로 복무하고 있는 미하일 이바노비치 스또레쉬니코프.
  그런데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자유와 혁명에 관한 꿈을 꾸다가 수용소에 처박힌 유물론자인데 주인공을 이런 룸펜 부르주아한테 엣다, 여기 있다, 건네줄 수 있나, 어디. 그리하여 사달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어디서 책 한 권 변변한 거 읽어본 적도 없고, 관련 수업 한 번 들어본 적도 없지만 구태의연한 여성차별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태생적으로 공동생산, 공동소비, 이익분배 같은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 신기한 뇌구조다. 게다가 베라 빠블로브나와 연결이 되는 인텔리겐치아들은 모두 선하고, 체력적으로 건강하고, 키가 크고, 완력이 대단하고, 빠짐없이 사회주의 혁명 사상에 푹 절어 있다. 베라에게 처음 접근하는 인물이 드미트리 세르게이치 로뿌호프. 이어서 역시 대단한 인내심과 천재적, 아니, 수재 이상의 능력을 지닌 의사 알렉산드르 마뜨베이치 끼르사노프. 단호한 성격과 대단한 결단력, 도라이 수준의 집행력을 지닌 엄격주의자 강철 사내 라흐메또프 등등.
  그.러.나. 내가 자주 주장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마르크스의 가장 큰 오류는 그가 인간을 과하게 선한 집단으로 전제한 것. 이 책의 작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체르니셰프스키는 사회주의적 공동생산과 공동생활과 이익의 공동분배라는 과정이 극단적인 유토피아 적 결과물로 나타나리라고 상상했다. 1권 까지는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며 읽기에 재미가 작지 않았지만, 2권으로 들어가서는 베라 빠블로브나의 개꿈 이야기로 스토리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기색이 보여 언짢기 시작하다가, 심지어 소설의 형식을 깨고 의식화 자료에 준하는 공상적 설명문으로 채우려 한다. 독자는 벌써 21세기도 20년이 지나 까질 대로 까졌는데 말씀이다.
  하나 더. 이 책을 읽으라 하지 못하는 것 가운데 중요한 이유는, 교정, 교열. 이제 글자 좀 틀리고 맞춤법 어긋나고 그런 거 가지고 시비하지 않겠다. 문장이 개떡인 것이 자주 눈에 띈다는 거. 개떡이라는 게 어떤 개떡 수준이냐고? 여태 A는 a의 대문자다, 라고 주장하다가, 주장하고 있으면서 갑자기 다음 문장에 A는 b의 대문자다, 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불행하게 여기서 b가 a의 오식이어서 왜 갑자기 이런 문장이 나왔는지, 이게 무슨 특별한 뜻이 있어서 그렇게 쓴 건지 오리무중일 경우도 몇 번 생긴다. 간단히 얘기해서, 독후감을 읽는 당신은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만수무강에 전혀 지장이 없으니 굳이 돈과 시간을 써서 이 위대한 사회주의자의 소설을 읽을 필요는 없으리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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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동화집 1 펭귄클래식 126
그림 형제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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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째 이런 책을 다 읽었느냐고? 별 걸 다 읽는다고? 할 말 없다. 그림 형제가 지은 잔혹 엽기 동화책을 언젠가 한 번은 읽어봐야겠다고 작심한 것이 벌써 몇 년이다. 펭귄 클래식에서 이 동화집을 두 권에 걸쳐 만들어 딱 맞춤했다. 한 권만 읽어봐도 괜찮을 거 같아서. 그래 1권을 사서 읽었다. 지난번에 <이솝 우화집>을 읽은 이유와 비슷하다. 거기다가 미국 드라마 <그림>을 본 게 조금 영향을 끼치기도 했고.
  이거, 옛날이야기 책. 59쪽에 달하는 서문은 읽어보지 않았는데, 동화집에 실린 것들이 그림 형제가 창작한 것이라기보다 당시, 그러니까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엽까지 독일 지역을 탐사하며 채취한 민담을 담은 책이라고 한다. 형제 중에 둘째 빌헬름이 이 책을 만드는데 더 큰 역할을 했단다.
  우리나라 옛날이야기도 많다. 와우, 근데 독일 사람들도 참 별나다. 대개 옛 이야기라면 노변담화, 긴긴 겨울밤 할머니가 손자녀에게 화로에 감자며 밤이며 땅콩이며를 구워주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라 좀 엽기, 괴기, 귀기가 섞인 건 어쩌면 당연하지만, 우리나라 민담의 경우엔, 적어도 내가 들은 것들은 이 그림 형제가 채집한 것들에 비하면 참 온순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로 신발을 곱게 벗어놓은 다음 치마를 뒤집어쓰고 물에 빠져 죽(이)거나,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달거나, 사형의 경우에도 그냥 목을 벤다, 이 수준이잖은가. 근데 와우, 독일 사람들, 만만치 않다.
  중국의 주나라 문왕 희창이 유리에 갇혀 있을 때 은나라 마지막 왕인 걸왕이 아들 백읍고를 잡아 푹 끓여 몸에 좋은 곰탕이라면서 희창에게 하사한다. 문왕 희창은 뽀얀 곰국 국물이 큰아들의 뼈와 살을 고와 만든 것임을 즉각 알면서도 걸왕이 있는 도읍을 향해 세 번 절한 다음 밥 한 그릇을 말아 국물 한 방울을 남기지 않고 싹 먹어치운다. 이 내용은 성인들을 위한 야사에서나 나온다. 중국인들도 그랬다. 그런데 독일의 할머니가 손자 손녀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악독한 계모가 의붓딸을 죽여 그 뼈와 살로 수프를 끓여 놓으면 친아버지가 고기와 국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 먹어치우고, 살을 깨끗하게 발라먹은 뼈는 식탁 바닥에 툭툭 던져버린다. 딸의 뼈와 살이 내 생명의 엑기스라서 버리느니 싹 먹어치운 건가? 나쁜 인간을 죽여도 참수가 아니라 그냥 찢어 죽인다.
  근데 우연하게도 같은 시기에 라틴 아메리카를 탐험한 키 작은 훔볼트 남작은 원숭이 고기를 한 점 먹고, 그게 사실은 인간의 고기라고 농담을 하니까 문명인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을 리가 없다고 질색을 했을까? 자기네 나라 민담에서도 인육 섭취에 대한 것이 있었음에도. 물론 웃자고 하는 말이다.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펭귄 클래식에서 낸 <그림 동화집>이 재미있는 것은 비슷한 내용의 민담이 있을 경우 그것들을 바로 이웃해 배열을 해놓아 어떻게 변주가 되었는지 독자가 비교를 해가며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 독일만큼 오랜 세월 한 민족이 여러 나라, 여러 지방으로 쪼개져 있던 곳도 별로 없을 것. 그리하여 비슷한 이야기가 서로 달리 분화해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게 변주가 되었던 건 당연한데, 이걸 그림 형제가 체계적으로 채집해 정리했다는 뜻이다. 어떤 이야기인지는 우리나라 사람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굳이 소개하지는 않겠다.
  이 책은 <이솝 우화집>에 비해 많이 재미있다. 읽을 만도 하다. 근데 이미 머리통이 굵어진 성인이라면 굳이 새삼스레 외국의 옛이야기를 읽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쓸 필요까지는 없을 거 같다. 간혹 서양 소설에 룸펠슈틸츠헨 이나 라푼첼 같은 이름도 낯선 이야기를 거론하는 일이 있어 궁금할 수는 있겠지만. 근데 어느 책이더라 ‘룸펠슈틸츠헨’을 몇 번씩이나 인용하던 책이? 꽤 유명한 책이었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집에 유소년이 있다 하더라도 59쪽에 달하는 서문이 앞에 달린 서양의 ‘옛 이야기책’을 읽어보라고 권할 필요도 없을 거 같고. 근데 동양이나 서양이나 왜 계모에 대해서는 그리도 야박하지?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계모들은 자신의 소생이 아니어서 홀대한다는 오해를 받을까봐 오히려 의붓자식들에게 더 잘하던데. 의붓자식이 속을 썩이면 내 배로 낳은 친자식을 두드려 패서 화풀이를 할지언정. 혹시 계모에 대한 공포를 심어줌으로 해서 친엄마에게 더 애정을 갖게 하려는 꼼수 아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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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02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그림동화전집 1, 2권 동서문화사 것으로 다 읽었어요! ㅋㅋㅋㅋㅋ 읽고 나서 결론은 그림 형제가 동화 작가가 아니라 걍 신화전설민담 수집가라는 것, 그래서 걍 닥치는 대로 모은 것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림동화! ‘동화‘가 아닌 동화 ㅋㅋㅋㅋㅋㅋㅋㅋ 노간주나무 이야기인가 그건 정말 끔찍해요.... ㅎㅎ

Falstaff 2020-04-02 15:30   좋아요 0 | URL
아, 다 읽으셨군요. 전 1권만 가지고 만족하렵니다. ^^
정말 엽기 자체예요. 제목을 민담집이라고 하지 왜 동화집이라 붙였는지 참. ㅋㅋㅋ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거면 펭귄보다 훨씬 더 많이 실렸을 거 같은 걸요!!

잠자냥 2020-04-02 15:40   좋아요 1 | URL
네 그래서 비슷한 이야기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냥 펭귄 것 한 권 읽으신 것으로 괜찮을 거 같아요. ㅎㅎㅎ

Falstaff 2020-04-02 15:48   좋아요 0 | URL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민담 수집이라 그런지 어쨌든 옛날 이야기치고 재미는 있더라고요. ㅋㅋㅋ
 

 

  이 책들이 참 좋았습니다. 근래 읽은 책들 가운데 마음에 든 책 열권을 꼽았습니다. 골라놓고 보니 정말 하나도 빼지 않고 참 괜찮은 책들만 골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편집도 두 권, 시집이 한 권 들어 있는데, 외국사람이 쓴 단편집을 이번만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없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장편의 경우엔 약간의 책 읽은 세월을 가진 분이 읽기 좋은 작품이 한두 권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아니더라도 별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제가 읽기에 감동도 받고, 공감도 하고, 새롭게 느끼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역시 책 읽는 일은 읽는 본인과 작품이 어떤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 소양이 깊지 않은 제 추천이 믿을 만하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책을 선택하시는데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순입니다.




1. 유도라 웰티, 《유도라 웰티》, <낙천주의자의 딸>

 

  대표 단편선과 장편소설 한 편. 둘 합쳐서 한 권으로 쳐주시라. 낯설지만 좋은 작품을 쓴 미국 남부 작가 웰티의 단편소설 서른두 편과 장편소설 한 권을 말 그대로 “우연히” 읽는 행운이라니. <낙천주의자의 딸>은 아쉽게 품절이지만 기회가 닿으면 선택하시기를. 《유도라 웰티》, 완고하다는 선입견을 주는 미국 남부에서 곱게 자란 부르주아의 딸 같지 않게 작품 속에서 마치 고딕소설에서 본 듯한 신체 결손자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다른 미국의 남부 출신 작가들답게 삐딱하지 않다. 미국식 지방주의 작품 가운데 이만한 단편소설을 읽을 기회도 그리 많지 않을 듯.


 

2. 박재삼, 《박재삼 시집》

 

  가난한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 아련한 추억과 고독과 궁상스런 삶을 살았던 시인이 빚어내는 깔끔한 슬픔. 이런 것을 일컬어 우리는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넘치지 않는 미학, 피를 토함도 없고, 술기운에 기댄 울분도 없고, 스스로를 산산이 헤치는 자해도 없이 자신의 슬픔을 노래했던 시인.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 소리 죽은 가을 江을 처음 보겠네.” 젊음이 가질 수 있는 슬픔이라는 특권. 아, 저 먼 먼 곳에서, 잊고 살았던 당신의 슬픔이 문득 까마득한 바람소리로 당신의 허파를 지날지도 모른다. 한 시절에 시인들은 이런 시를 썼다.



3. 블라디미르 나부코프, <창백한 불꽃>

 

  더 이상 황당한 상상력도 없다. 말 그대로 인간 상상력의 끝을 보여주는 작품. 이 책을 읽다가, “이게 뭐지?” 의문을 한 번 이상 품어보지 않은 독자들 있으면 거수 바람. 겉으로는 영문학자 킨보트가 위대한 현대 미국 시인 존 셰이드가 쓴 <창백한 불꽃>을 출판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 자신이 머리말과, 존 셰이드의 시, 그리고 무려 280여 쪽에 달하는 킨보트의 주석을 달아 만든 책이다. 그런데 문제는 머리말부터 시작해 독자들이 일반적으로 지루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주석을 읽으면서 확 깬다. 그리하여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어야 할까, 독자를 진퇴양난으로 몰아가는, 나부코프는 진짜 장난꾸러기.



4. 헤르만 브로흐, <현혹>

 

  한 집단이 전체주의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브로흐. 우상 한 명을 만들어 우상으로 하여금 한 커뮤니티를 훌륭하게 이끌고 갈 수 있다는 착각이 땅 위를 덮을 때, 어떤 지경이 벌어지는가 하는 경고. 단지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에게 린치를 가할 수 있는, 과거 순수했던 사람들. 이들의 세계는 오직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만 국한되어 있다. 한 무리의 생각할 수 있는 포유류에게 헛된 꿈을 주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브로흐는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처음엔 꿈이 헛된 것인 줄 알다가 점차 꿈이 이루어질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지는 무리들. 불행하게도 그 무리를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5. 막스 프리슈, <슈틸러>

 

  ‘화이트’라는 이름의 독일계 미국인 ‘나’. 미국과 멕시코에서 살다가 이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스위스 취리히로 가는 열차 속에서 몇 년 전 스위스에서 있었던 소련 스파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행방불명 상태에 빠진 ‘슈틸러’라는 인물로 지목받아 스위스 경찰당국에 체포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슈틸러라는 인물을 아는 모든 사람, 친척, 친구, 애인들이 ‘나’가 슈틸러임이 분명하다고 증언하고 나선 것. 심지어 내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임무를 띤 국정변호사까지도. 나는 정말 나일까? 나가 한 공간에서만 나이고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이름을 가진 타인일 수도?



6.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약속>

 

  뒤렌마트의 범죄소설은 <판사와 형리>도 읽었으나 <약속>이 더 재미있었다. 왜 ‘더’라고 하는가를 이야기하면 책의 결말을 말해버려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고, 뒤렌마트, 프리슈와 더불어 20세기 중반 ‘독일어’ 문학계를 흔들었던 인물이 추리물을 썼으니, 우리가 여태 읽어왔던 일반 추리소설과는 아예 기초부터 다르다. 소녀를 대상으로 하는 연쇄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사건이 당대의 천재로 불리고 박사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늙은 형사 마태 박사에게 배당이 된다. 근데, 소설을 시작하자마자 뒤렌마트는 마태의 현재 직업이 취리히 변방 목 좋은 주유소의 주유기 앞에 쪼그리고 앉은 모습을 스케치해버린다. 이 주유원이 왜 이 모양이 됐을까, 하는 내력을 밝히는 건데 뒤렌마트답게 제대로 뒤틀어버렸다.



7. 앤절라 카터, <써커스의 밤>

 

 고딕소설의 끝판 왕. 맨발로 서서 188cm의 키에 넉넉한 몸매. 이런 체격이면 도무지 서커스의 공중그네와는 어울리지 않을 걸? 그러나 천만에.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헬렌 페버스에게는 진짜 날개가 달려 있어 날갯짓을 훨훨 몇 번 하면 서커스 천막 꼭대기까지 한 번에 훅 솟구칠 수 있는 것. 헬렌을 캐스팅할 수만 있으면 서커스 단장은 커다란 수익을 잡을 수 있어서 헬렌이 주로 머무는 장소는 호화호텔의 스위트룸이고 가능한 한 최고의 사치를 하지만 원래는 버려진 기아 출신으로 한 창녀가 데려다 키웠다. 이 놀라운 서커스의 여왕이 영국과 대륙, 시베리아까지 누비면서 자신의 것을 하나하나 상실하게 되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는 읽어봐야 아실 것.



8.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의 필력을 유감없이 증명하는 명작. 가을비의 첫 방울이 쏟아지는 추운 새벽, 호흐마이스 벌판을 가르며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근동에는 폐허가 된 성당밖에 없고 그나마 종탑이 무너져 종소리가 벌판을 가를 수는 없는 일. 음울한 종소리와 함께 이 망해가는 집단농장에 들려온 소식 하나. 모두가 이미 죽은 줄 알았던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나가 농장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것. 이리하여 집단농장은 다시 한 번 활기가 생기기 시작하고 일종의 착란 현상이 벌어진다. 이것은 누가 읽어도 카프카를 한 단계 확장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강력 추천.



9. 유디트 헤르만, 《단지 유령일 뿐》

 

  유디트 헤르만, 단번에 이 여자를 사랑하게 만든 소설집.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실은 단편집. 무대는 독일의 뷔르츠부르크를 포함해 세계 각국. 이를테면 아이슬란드의 여름별장, 베네치아, 체코의 온천도시 카를로비바리와 몰다우가 내려다보이는 프라하, 미국 네바다의 사막, 노르웨이의 트롬쇠를 망라하는데, 각 지역의 자연풍광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현지인과 독일인, 또는 그곳에 간 독일 사람들 사이의 의식의 흐름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완전 내 스타일. 세상 어디에 있어도 사람들 사이에는 이해와 오해, 관심과 무관심, 신경전 같은 미묘한 의식의 떨림이 있게 마련. 이런 투명한 거미줄을 포착하는 작가의 예리한 눈매를,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10. 알레산드로 바리코, <이런 이야기>

 

  사람의 꿈에 관한 이야기. 자기만의 ‘길’ 즉, 차가 다니는 도로를 만들겠다는 꿈을 꾼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린 책. 일찍이 허약한 체질과 체격을 가지고 태어나 어려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못 생긴 남자 울티모. 그러나 ‘금빛 그늘’을 지녀 어디서든지 돋보이고 다중 속에서도 누구나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분위기를 가진 사내. 20세기 초에 울티모는 자신의 아버지가 열광했던 차를 타보고, 관찰해본 바, 차와 차 비슷한 유동물체를 근본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길, 도로에 관심을 두면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기 위한 인생으로 접어든다. 삶의 모든 굴곡을 한 도로로 만드는 질료로 사용해버린 울티모. 책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아름다운 상상에 관한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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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3-31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약속>
.. 이거 끌리네요. 보관함 푱~

Falstaff 2020-03-31 12:30   좋아요 0 | URL
ㅎㅎ 예상치 못한 범죄 소설일 겁니다.
정의라고 언제나 이기지는 못한다더군요. ^^;;

잠자냥 2020-03-31 14:04   좋아요 0 | URL
저도 담았어요! 전자책 있으면 더 좋은데 이건 아직 없더라고요.

Falstaff 2020-03-31 14:32   좋아요 1 | URL
유령은 전자책 있던데요.
그것도 담으시지.... ^^

비로그인 2021-04-21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감사합니다. 고전만 한참 읽고 있었는데, 추천해주신 책 천천히 다 읽어볼게요. 또 좋은 책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

Falstaff 2021-04-21 21:33   좋아요 0 | URL
이렇게 얘기해주시니 제가 더 고맙고 ㅎㅎㅎ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
그래도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 즐겁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

비로그인 2021-04-21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에요. 저 알라딘 책만 사고, 댓글 처음 다는데, 20년 전 센스네요. 보헤미안... 아 부끄럽다.. 폴스타프, 멋진 캐릭터죠. 정말 멋진.. 추천 감사드리구요. 좋은 밤 되시길! ^^

Falstaff 2021-04-21 21:48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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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이야기. 책 껍데기에 “자전적 이야기”라고 씌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쓴 작가의 픽션인줄 알았다. 1935년 헝가리 태생의 작가가 소련에 의하여 공산화되자 아버지가 감옥에 가는 등 가족해체를 겪고, 가난 속에서 20대 초반에 엄마가 됐을 때, 김춘수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으로 각인된 헝가리 민주화 운동과 이에 따른 (크리스토프의 주장에 의하면) 3만 명의 학살을 겪은 뒤 오스트리아를 거쳐 스위스로 망명을 가게 된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던 아고타에게 스위스 망명이란 건 모국어인 헝가리어를 버리고 낯설고 발음하는 대로 표기하지도 않아 어렵기 짝이 없는 프랑스어라는 벽을 대면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새롭게 문맹의 상태에 접어들었다는 이야기. 과히 새로운 건 아니다. 체코 출신의 문맹 한 명이 쓴 글을 우리는 열독하고 있지 않은가. 밀란 쿤데라
  이 속에서 공장노동자로 일을 하며 육아를 하고, 틈틈이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프랑스어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1부 <비밀노트>를 써서 국제적으로 대박을 칠 때까지, 자신은 결코 프랑스어에 익숙하지 못하리라는 고백. 이런 내용을 수식 없이 담백한 문장으로 기술해놓은 에세이.
  그런데 이 팸플릿을 양장본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겠지만, 반양장이라면 너무 얇아 책이 휘어져버릴 테니, 다 읽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그것보다 조금 더 필요한가? 하여간 이런 자료를 책으로 만들어 정가를 무려 11,000원으로 책정하는 한겨레출판에게 나는 욕할 자격이 없다. 그냥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명성에 눈이 멀어 책의 사양, 페이지 구성 등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 편하니까, 책방 가서 사는 거보다 조금 더 싸기도 하니까 앉아서 손가락 몇 번 놀려 사 읽은 주제꼴이니.
  그저 사람은 이름이 나야 한다. 1935년 헝가리 출신으로 아고타 크리스토프보다 굴곡 많은 당시의 인생을 산 사람은 쌔고 쌨다. 크리스토프는 어쨌거나 먹고 사는 데 별 걱정 없는 서방세계로 망명해 배는 곯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행적을 깔끔한 문장으로 이렇게 수채해놓으니 저 극동아시아의 변방에서도 책이 어떤지도 모르고 ‘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이름 하나 믿고 선뜻 사서 읽는 거 아닌가 말이지.
  이 정도의 분량은 다른 작품의 뒷면에 서비스로 달아주면 안 될까?
  안 되겠지? 이래봬도 신자유주의 시댄데 어찌 현금 지불 없이 한 줄의 글을 읽게 내버려 두겠어?
  기대가 컸는데 말씀이야. 그래 실망도 더 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우리말로 바꿨더라도 문장 하나는 정말 깔끔하지 뭐야. 원문은 얼마나 더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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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0-04-0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만으로 작가적 소임을 다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후에 나온 작품들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부분적인 변주나 일종의 잔향 정도로만 읽혀서요.
그나저나 한국 출판사들, 시집도 아닌데 저 정도 분량의 작품을 단행본으로 내놓는 관행은 좀 지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Falstaff 2020-04-07 13:40   좋아요 0 | URL
조금 지나면 크리스토프의 다른 소책자 <약속>도 읽을 예정입니다만, 이 책과 비슷한 팸플릿 수준이면서 간행하는 출판사가 다릅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그냥 샀습지요.
말씀하신대로 <약속>을 끝으로 크리스토프는 이제 졸업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