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열매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구판) 4
나탈리 사로트 지음, 남수인 옮김 / 열림원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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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탈리 사로트라면 1950년대 누보로망의 기수로 알고 있었는데, 책의 앞날개를 보니 “이제는 그와 같은 분류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는 독자적인 시학을 가진 세계적인 대가로 평가되고 있다.”고 쓰여 있다. 책의 한국어 초판이 2002년. 사로트는 1900년에 러시아에서 태어나 1999년까지 살았다. 그러니까 러시아 출생에, 프랑스에서 살면서 파리 문과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해 옥스퍼드에서 수학한데다가 1921~22년엔 베를린에서 역사와 사회학을 수강하며 외국인을 위한 독일어 학사 자격증을 획득했단다. 이 정도면 언어에 수재가 있다고 봐야 하겠다. 어떤 이유로 사로트를 읽어보자고 마음을 먹었는지 벌써 잊었다. 이번에 사로트를 두 권 장만해서 1963년에 출간한 <황금열매>를 먼저 읽고 며칠 후에 83년, 작가의 나이 여든세 살에 출간한 <어린 시절>을 읽을 예정이다.
  먼저 <황금열매>를 읽었다. 1963년 작품이면 이이가 누보로망의 간판을 달고 활동할 때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듯하다. 당연히 책은 읽기 쉽지 않다. 나도 첫 페이지를 열고 읽어나가긴 했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근 50쪽까지 진도를 빼며, 읽어나가다 보면 저절로 스토리를 알 수 있겠지 싶었는데, 천만의 말씀. 처음부터 다시 읽어도 이하동문일 거 같은 느낌이 (강하게)들었다. 이럴 때 해결방법의 하나, 최후의 방법이기도 하고. 조금 쪽팔리지만 어쩔 수 없다. 책의 제일 뒤편, 해설을 조금 읽어보는 것이다. 그래 역자해설 세 페이지를 읽고 다시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두 번째로 읽었더니, 거봐라, 쪽팔린 건 순간이고 재미있는 건 적어도 며칠은 간다.
  첫 장면에 <세상의 기원>으로 유명한 화가 쿠르베의 전시회를 나서는 커플이 등장한다. (<세상의 기원>은 네이버 이미지 검색에는 나오지만 구글 이미지에선 19금 처리해서 보기 힘들다. 세상에 야만스런 구글 같으니라고. 교양과목을 말이지.) 누군가가 쿠르베의 복제화가 그려진 그림엽서를 건네자 남자는 엽서를 거의 쳐다보지도 않고 여자에게 건넨다. 엽서를 준 인물은 당연히 기분이 나빠 남자를 째려보고, 민망해진 여자는 남자의 에티켓 없는 태도에 불만을 표시한다. 알고 보니 남자는 며칠 전 관객이 뜸한 평일을 골라 쿠르베 전에 다녀왔단다. 이때 하필이면 신문에 미술평론을 쓰는 ‘뒤뤼’라는 작자와 마주쳤는데 입에 침을 튀며 “대단한 전시회예요. 모두 걸작이더군요. 특히 <개의 두상>이 끝내줬어요.”라고 허풍을 떨었단다. 그러면서 평론가들의 몇 가지 모습, 형편없는 졸작을 끝없이 치켜세우는 벨록, 콩과 팥을 구별 봇하고 언제나 터무니없는 평론을 써 갈겨대는 마자유 등을 거론하며 이런 짓은 영화, 연극, 소설, 연주회, 전시회가 다 마찬가지라고 23쪽까지 떠들어댄다.
  그럼 <황금열매>라는 그림이 나오느냐고? 아니다. 브레이에라는 사람이 쓴 <황금열매>라는 길지 않은 소설이 진짜 주인공, 主人公? 사람이 아니니까 주물공主物公 혹은 주작품공主作品公 정도 되겠구나. 작품은 ‘황금열매’라는 소설의 탄생부터 소멸까지 한 사이클을 그린다.
  처음에는 “그런데 저.... 황금열매 읽어보셨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가 만나는 사람마다 반드시 물어봐야 하는 지식인들의 필수 대화소재가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간혹 극소수 조심스레 “황금열매가, 글쎄요, 난 별로인데요. 온통 그 얘기뿐이기는 하지만 말이지요.”라고 솔직하고도 용기 있는 사람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훌륭하다. 우리 문학에서 그에 비견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스탕달 이후로, 뱅자맹 콩스탕 이후에 쓰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브륄레가 신문에 기고한 이후에 감히 ‘황금열매’에 대해 저항하는 분위기는 단번에 분쇄되어 버린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르그리 박사가 ‘황금열매’의 구성에 약간의 결함이 있다고 이야기하자 박사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발현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건 “언어가 고전적인 것 같지 않고, 복잡하고 바로크적이고 무겁고 때로는 어색하기까지 하며 기본적으로 어려운 책이지만, 현대성 때문에 작품은 마음에 든다.”는 수준에서 멈춘다.
  책 ‘황금열매’를 처음에 사람들이 규정하기를, 속된 말들에 실려 가는 모든 것들, 예컨대 ① 물컹한 것, 흐리멍덩한 것, 줄줄 흐르는 것, 끈적이는 것들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며, ② 요란한 웃음, 이글거리는 눈초리, 흥분된 몸짓, 땀에 젖은 손 같은 것 없이, 품격 있는 조심성, 더없이 우아한 정중함, 수줍음, 당당한 자부심으로 충만하다는 거였다.
  이러던 것이 조금 더 시간이 가면 오랜 친구들끼리 비밀리에 속삭이기 시작하기를,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사람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는 ‘황금열매’가 과즙이 풍부한 과육을 기대하는데 씹기만 하면 이를 부러뜨리는 금속 열매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들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이들의 눈과 미소에는 호의, 공모성, 친밀감, 감탄이 동반되는 건 당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열매’가 아주 멋진 책이라는 판결이 여전히 유효하지만 어느 날 누군가가 감히 큰 소리로 말을 하지 못하고 쭈뼛거리며 옆에 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근데 이거 모조품 같은데요, 그렇죠?”라고 의문을 표시하기에 이른다.
  정말 브레이에가 누구를 차용해서 ‘황금열매’를 썼을까, 아니면 작가가 창조해낸 작품을 평론가와 독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헤쳐보고 해부하고 심지어 발기발기 찢어 뒤져본 후에 이 부분은 틀림없이 셰익스피어야, 여긴 토마스 만인데? 근데 브레이에가 독일어는 할 줄 알아? 프랑스어 판이 나왔잖아, 아냐, 조이스를 참고한 것이 분명해. 등등의 숱한 뒷이야기들. 그 후에 이 책은 어떻게 됐을까? 그것까지는 독후감에서 얘기해주지 못하겠다. 괜찮은 책이니 직접 읽어보시고 알아내시라. 근데 읽기가 수월하지는 않으니 각오는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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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서버 - 윈십 부부의 결별 외 35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9
제임스 서버 지음, 오세원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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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흥미롭게 읽고 제임스 서버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책의 앞날개를 보면 마크 트웨인을 잇는 20세기 미국 최고의 유머작가라고 소개한다. 짧은 소개 글을 봐도 이이의 인생 자체가 유머....라기보다는 우화 같다. 세 형제 가운데 둘째였는데 일곱 살 때 형제들과 빌헬름 텔 놀이, 머리 위에 사과를 얹어놓고 활 쏘는 장난을 하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그 자리에서 실명을 한다. 이 일을 기점으로 서버는 우울한 소년기를 맞이하게 되고 남들과 어울리지 못해 혼자 그림을 끼적인 것이 나중에 괜찮은 삽화가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단다.
  그리하여 이 단편집 《제임스 서버》에 실린 서른여섯 편의 작품엔 소설책에서는 드물게도 작가 자신이 그린 삽화가 꽤 많이 들어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주기도 한다. 근데 위의 문단에서 서버를 가리켜 ‘유머작가’라고도 하고 ‘우울한 소년기’라고도 했다. 서버는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을 하고 나중에 뉴욕에서 산 모양이다. 이 단편집의 무대 역시 콜럼버스와 뉴욕이 대부분. 거의 모든 작품이 조금 특별한 인물을 관찰한 기록이다. 특별? 그게 아니면 적어도 기이한 사람들. 주인공이거나 화자 ‘나’가 관찰한 등장인물은 대부분 뭔가가 결핍되어 있는 경우가 많고 그런 기이함, 책을 읽는 독자와의 다름을 서버는 유머로 치환시켜 놓지 않았나 싶다.
  첫 작품 <에마 인치, 떠나다>는 메사추세스 케이프코드 연안의 고급한 휴양 섬 마서스비니어드로 휴가를 떠나는 부부가 그곳에 있을 동안 요리사로 에마 인치 여사를 고용을 하고, 고용계약을 해지할 때까지의 이야기다. 겉으로 보면 호리호리한 몸매를 한, 기억에 특별히 남을 만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중년 여인이지만, 인치 여사가 커다란 갈색가방을 들고 열일곱 살 먹은 보스턴 불테리어 종인 늙어 죽기 직전의 개 ‘필리’를 안고 도착한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보니, 요리사는 모든 이동을 자신의 두 발을 이용한 도보를 통하지 않으면 매우 불안해하며, 언제 죽을지 모를 늙은 필리를 안거나 걸리거나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하는 강박증 증세가 있는 여인이다.
  두 번째 작품 <토파즈 커프스단추 미스터리>의 주제는 놀랍게도, 고양이의 눈동자는 늦은 밤에 번쩍번쩍 빛나는데 왜 사람 눈은 그렇지 않을까,에서 시작한 부부간의 일상적인 다툼이 남편으로 하여금 고양이 눈과 같은 높이를 하게하고, 즉 네 발로 엎드려 있게 만든 다음 차 전조등을 비치는 실험을 야밤에, 진짜 도로에서, 부인께서는 한 방울의 알코올도 흡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생각해보시라 자정이 넘은 시간 깜깜한 밤에 남자가 네 발로 아스팔트 위에 엎드려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모습을, 순찰 중이던 경찰관들이 발견하자, 변명을 하기를 길 위에 토파즈로 만든 커프스단추를 떨어뜨렸다고 둘러댄다는 이야기다.
  서버가 만든 가장 유명한 우스갯소리는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음식은 웨딩 케이크”라는 말이 있단다. 당연히 결혼을 경험한 남자들, 아니다, 여자들도 포함한 (거의)모든 결혼 경험이 있는 인류들은 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를 하겠지만 서버는 유독 힘겨운 첫 번째 결혼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작품 속에 유별나게 드센 여자와 소심한 남자 커플이 많다고 역시 책 앞날개에 씌어 있는 바, <토파즈 커프스단추 미스터리>가 처음 읽을 수 있는 그런 류의 작품이다.
  단편소설이라고는 하나 단편이라기보다 콩트 수준에 어울릴 분량의 작품이 많아서 더 이상 책의 내용을 밝히기는 좀 면구한 느낌이 들어 그만두겠으나, 편편이 말 그대로 유머 또는 가벼운 고소를 흘릴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고, 가끔은 (역시 유머 코드를 그대로 포함한 채)생각지도 않게 굵직하게 각 시대의 ‘웃긴 모습’,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지역적으로 웃기고 있는 장면을 포착하기에 이른다.
  이 책은 생각날 때마다 한 편씩 읽어도 좋고, 나처럼 연이어 한 권을 몽땅 읽어도 괜찮겠다. 서양, 특히 미국식 유머이기는 하지만 100년 전에 쓴 작품도 있어서 이젠 극동의 독자가 읽어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유머코드이며, 그러기 때문이겠지만 배를 잡고 웃어야 하는 장면은 없다. 이이의 삽화를 보기만 해도, 아,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구나, 하실 수 있을 것.
  근데, 당신이 미국인이라고 가정하고, 당신은 그레타 가르보가 좋은가 아니면 도널드 덕이 더 좋은가? 왜 묻느냐고? 그거야 책을 읽어보시면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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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10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반쯤 읽다가 말았는데, 우울한 유머 작가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웃기려고 읽었는데, 웃기기보다는 우울해져서 걍 책을 살포시 내려놓은 기억이 나네요. ㅎㅎㅎ 남은 절반을 다시 읽어야겠어요!

Falstaff 2020-04-10 11:59   좋아요 0 | URL
예. 어느 하나 개운하게 웃기고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꼭 뒷맛이 떱떠름하니... ㅋㅋ

CREBBP 2020-04-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반 정도 읽은 것 같습니다. 무슨 새 소리 강박증 생기는 얘기가 인상깊었어요.^^

Falstaff 2020-04-13 12:32   좋아요 0 | URL
기묘하게 분명 희극인데 뭔가 캥기는 게 꼭 들어 있어서 편하지 않다는 거였습니다. 의식 속의 별의 별 것들을 다 나열했더라고요. 하여간 흥미있는 작가였습니다. ^^
 
고향 - 이기영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20
이기영 지음, 이상경 책임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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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에 중등교육을 마친 나는 이기영이란 작가의 이름을 그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 유행하던 카프 문학에 종사한 인물, 이 정도로만 알았다. 예비고사, 본고사에 카프 문학에 대한 문제는 절대로 나오지 않으니 사실 이름마저 거의 잊고 지내다 이번에야 읽어봤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다룬 <고향>이 문제제기의 범위와 해결 방법에 다양한 한계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자본주의의 변화 속에서 몰락해가는 대부분의 농민계급과, 재빨리 신문물의 흐름에 편승해 단번에 상위계급으로 상승하는 일부 자본가를 그리는 리얼리즘적 성취가 매우 놀라운 수준이라는 걸 직접 확인하게 됐다. 이런 작품과 작가가 단지 휴전선을 넘었다는 이유 하나로 (내가 경험한)국어시간 현대문학사 강講에서 소홀히 지나쳤다는 건 대단히 큰 손실이었던 것 아니었겠나 싶었다. 적어도 내가 읽기로는, 이기영의 3년 선배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을 쓴 이광수의 어떤 작품보다 <고향>이 더 낫다.
  <고향> 첫머리는 김희준이라는 양반 찌끄레기가 5년간의 동경유학을 마치고 고향 원터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이는 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열네 살, 말이 열네 살이지 만으로 열 셋도 되지 않아 할머니 회갑을 맞아 두 살이 더 많은 복임이한테 싫은데도 억지로 장가를 들었다. 큰누이 같고 못생긴 아내하고는 정 없이 살다가 도무지 버틸 수가 없어서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을 했던 터. 그래도 그냥 내빼지는 못했던지 5년 만에 집에 와보니, 이런, 네 살 먹은 아들 정식이가 있어 생전 처음으로 한 번 안아 보았던 것.
  실제의 이기영을 보자면, 나이 열네 살을 먹어 조모의 회갑을 더욱 경사롭게 만들기 위해 열여덟 살 처녀 조병기와 결혼하고 기영이 혼인하느라 쌓인 빚에 가세가 쪼들려 다니던 학교를 중도 퇴학하기에 이른다. 이 혼인을 아내 조병기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열여덟 먹은 처녀에게 열네 살 소년이 서방이라고? 아이고 이를 어째. 거기다가 보통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 머리통을 밀어 발간 중대가리일 테고, 첫날밤은커녕 오줌이나 안 쌌으면 다행이라 생각했을 터. 하여간 이기영은 어찌어찌 변통을 해서 학교를 다시 다녔는지 소학교를 졸업하고 반 년 간 잠업강습소에 다녔다 하며, 이이의 고향인 충남 아산군 배방면 인근에 동방방적이라는 방적회사가 있어서 (지금은 없어졌다. 이후 아산과 천안 인근의 가장 큰 규모의 ‘동방마트’를 거쳐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나중에 노동쟁의가 벌어지는 장소를 인조견 생산 공장으로 특정하지는 않았을까 싶다. 주인공 김희준 속에서 다양한 이기영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기는 하다.
  김희준은 5년간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도시에서 하다못해 펜대 잡고 월급 받는 일을 하지 않고 대신 농촌 현장에 들어가 스스로 소작농이 됨으로써 농민들을 의식화시키고 이들이 지주와 마름에게 타당한 권리를 요구하게 만든다.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은 건, 그렇다고 농민, 소작인들이 김희준의 뜻에 맞을 정도로 의식화되느냐 하면 그게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 이 부분이 러시아 작가들, 한 번 마음먹었다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죽음과 고문 따위도 겁내지 않고 오직 투쟁과 혁명의 선두에 서길 마다하지 않는 막심 고리키,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 지난주에 읽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작품 속의 영웅적 투사들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기영이 만든 대부분의 소작인들은 쟁의 중에도 자그마한 이득을 위해 같은 소작인들끼리 주먹질하고, 혹시 소작이 떼인다든지 하는 일신상 불이익이 닥치지는 않을까 불안해한다. 배고파 우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못해 쟁의규약을 충분히 어길 수도 있는 선 위에서 갈팡질팡하여 이의 해결을 위해 쟁의 지도자 김희준은 기적 같은 행운과 만나야 한다. 그러다 결국 쟁의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무기는 큰 희생을 담보로 한 지주 또는 지주의 대역인 마름과의 투쟁이 아니라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지주의 사생활과 연관된 불명예로 협박하는 것이다.
  이 내용을 고리키나 오스트롭스키가 썼다면 소작인들은 차돌처럼 단단하게 단결하여 죽창을 들고 마름의 집에 쳐들어가 눈에 보이는 족족 무릎을 꿇리고 승리를 얻어낸 다음, 장검과 소총으로 무장한 동네 헌병한테 전부 총 맞아 죽었을 거다. 고리키, 오스트롭스키를 폄하하는 뜻이 아니다. 러시아나 식민지 조선이나 당시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들이 당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 농민을 계몽하는 것이었으리라. 러시아 작가들은 계몽적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접근방식이 과하게 혁명적이라서 오히려 비과학적일 정도로 리얼하지 않았던 반면에 이기영은 보다 실제적이라 리얼하기는 하지만 덜 교화적이라는 건데, 이제 세월이 지나 이기영의 작품이 더 나아 보인다는 뜻 정도.
  계몽의 정도도 이광수의 <흙>에서 보는 무결점의 허숭과 비교하면 김희준은 사회운동의 뜻을 실천으로 옮기는 실천가이기는 하지만 못생기고 자기보다 두 살이 많아 도무지 여자 같아 보이지는 않는 아내를 두고 읍내에서 술집을 하는 과부의 막내딸 음전이의 덜퍽진 엉덩이가 눈에 꽂혀 허리를 한 번 부르르 떨기도 하고, 어린 시절 감꽃을 따 소꿉장난을 하던 갑숙이,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자신의 진정한 적수인 민참판댁 마름인 안승학의 맏딸을 여전히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사람 냄새가 난다. 등장인물들한테.
  다만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부자인 민참판댁 마름 안승학과 읍내에서 포목, 잡화상에 고리대금까지 하는 권상철 두 명은 개전의 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악질로 묘사했다. 하긴, 정의의 사회주의자의 이름으로 무찔러야 할 상대가 조금이라도 선한 면이 있으면 그들의 투쟁이 타당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어서이기는 하겠지만.
  아쉬운 점을 조금만 더 들자면, 1930년대 당시 장편소설은 대개 신문연재를 하는 편이었고, <고향>역시 1933년부터 약 일 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했기 때문에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 그리하여 소작인 거개가 문맹이라 그랬던지 소작쟁의는 그나마 자유롭게 쓸 수 있었겠지만 노동쟁의 부분은 며칠 연재분량을 통째로 편집 당해 어떻게 전개가 됐고 승리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고향>은 거의 완전히 조선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고 풀린다. 이것 역시 검열 때문이겠지만 ‘개명’을 수반하는 식민주의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 또한 크게 우회하여 설명할 뿐 (검열을 당해 삭제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직접적인 반反식민, 그게 불가능했다면 우회적인 반反식민적인 메시지도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는 점. 심지어 5년간 일본 유학을 한 김희준이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한 경호더러 방으로 들어오라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하이리나사이.おはいりなさい.”
  이외에도 무수한 일어 표현이 등장하는데, 자꾸 이이를 비교해서 유감이긴 하나, 일어 표현이 이광수보다 더 잦다.
  <고향>은 위에서 이야기한 아쉬운 한계, 또는 문제점이 있음에도 내가 읽어본 우리나라의 현대 고전 가운데 제일 재미있고 흥미로운 작품으로 꼽을 수 있겠다. 이런 책을 이제야 읽다니 참으로 만시지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뜻이 있으면 한 번 읽어보시라고 작품의 스토리는 거의 다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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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4-09 1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 작품 읽고 염상섭의 그 지루한 <삼대>보다도 훨씬 잘 쓰인 작품인데, 왜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안타까웠던 적이 있었지요. 아마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이기영이 월북한 인사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0-04-09 11:09   좋아요 2 | URL
그죠, 그죠? 이 책 괜찮지요?
월북에다가 이광수처럼 북송 도중 죽지도 않고 기어이 영웅 칭호까지 받아 특별한 묘역에 묻혔을 정도니 남쪽 사람들이 읽기를 허락하지 못했겠지요.
근데 이기영의 본처가 낳은 맏아들의 자손들이 아직 아산에서 살고 있다는데 살면서 무슨 불이익 같은 건 안 받았는지, 참 안쓰럽습니다. 받았을 것 같아서요.

유부만두 2020-04-09 15:27   좋아요 1 | URL
아... 전 삼대 재밌게 읽었는데요;;; 주말 드라마랑 도스토예프스키 저리 가라다 했는데 이기영 작품은 또 얼마나 대단한 걸까요!
그나저나 삼대 그 불륜 치정 내용이 고등학교 필독서 였으니 참...

유부만두 2020-04-09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석영이 엮은 한국단편선에 이기영의 북측 가족을 만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남의 가족은 고초를 겪다 조용히 생을 마쳤다고 나오고요.

Falstaff 2020-04-09 15:49   좋아요 1 | URL
예. 이기영의 북쪽 가족은 월북해서 만난 여자가 아니라 네 살 위 아내 조병기하고 도무지 살 수 없어 서울에서 동거하던 신여성 사이에서 생긴 가족이라 하더군요.
아마 거기 태생 아들(인가 손자)이 좀 높은 공무원 계급으로 지금도 잘 살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근데 북한 같은 전체주의 체제에서 죽을 때까지 김일성 찬양 같은 것만 써야 했으니 작가로서는 행복하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어제 불초한 서재를 방문하신 분의 글을 읽고, "오정희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그이의 책 다섯 권을 박스 세트로 발매한다는 걸 알았다.

 

 

 차례로 작품집 《불의 강》, 《유년의 뜰》, 《바람의 넋》, 《불꽃놀이》, 중편소설 <새>를 한 박스에 담았다.

  오정희. 이이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이 아마 제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작품집에서 대상작인 <저녁의 게임>이었을 거다. 1979년? 하여간 70년대 후반이다. 오정희를 읽기 전까지 문학, 특히 소설이라고 하는 건 현대를 살아가는 건강한 시민이 그저 교양의 하나로 간혹가다가 읽어주는 예술의 한 형식 정도라고 인식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이의 첫 단편집 《불의 강》을 읽게 된다. 오정희를 기점으로 나는 문학과 소설이라는 재미의 중독에 빠져 본격적으로 책을 읽게 되지는 않았을까.

 책장을 뒤지면 그 시절에 산 오정희의 책이 다 있다. 취중에 책장을 조금 뒤져 불의 강》과 《바람의 넋》을 찾았다. 한 번 보자.

 

 

《불의 강》은 동네 서점에서 산 건데, 당시 책방 사장은 책을 꼭 비닐로 싸서 팔았다. 처음엔 좋았다. 하지만 오래 보관하면 보시듯이 책 전체가 우글쭈글해진다. 책은 나이를 먹어 조금씩 붓는 반면, 화학물질인 폴리에틸렌은 전혀 변하지 않으니 쭈그러질 수밖에.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함으로써 오정희의 데뷔작이 되는 <완구점 여인>이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다. 독특하게도 작품을 쓴 역순으로 만들었다. 1968년 신춘문예니까 작품은 1967년 11월 말에 신문사로 발송했을 것. 이때 이이의 나이 만 이십 세를 넘긴지 한 20일쯤 됐을 때다. 놀랍게도 여성간 동성애를 은유한 작품이면서, 섬뜩한 느낌이 난다.

  내 책장의《불의 강》은 1977년 초판본. 그래 본문은 이렇게 생겼다.

 

 

  세로쓰기. 작은 활자. <미명未明>이란 단편인데 이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가운데 쯤에 있어서 사진 찍기 편해 우연히 걸린 것. 책 주위의 갈변은 훨씬 심하다. 사진으로 찍으니 갈변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는데 진짜로는 심각한 수준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오정희에게 빠져버린 건 유명한 <중국인 거리>가 실린 작품집 《유년의 뜰》을 읽고나서다. 괜히 이이의 작품이 이러니 저러니 따따부따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몇몇 이웃을 비롯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좋은 단편소설을 추천해달라면 당연히 《유년의 뜰》을 이야기한다.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오정희의 모든 단편소설을 섭렵해보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오정희는 위의 "오정희 컬렉션" 다섯 권 모두하고, 도서출판 나남이던가에서 나온 《야회》를 비롯해 《옛 우물》, 《돼지꿈》, 동화책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 등이다. 인정한다. 나는 '오정희 빠'다.

  1990년대 후반, 문창과 학생과 문학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벌써 오정희를 읽는 학생이 없다고 했다. 어떻게 단편소설을 쓰려하는 학생이 이이를 거치지 않을 수 있을까가 굉장히 궁금했다. 같은 단편소설이라도 나는 오정희가 다른 어떤 단편 작가들보다 더 좋다. 한 시절, 오정희 때문에 절망에 빠져 소설 써볼 꿈을 접은 젊은이가 한 두명이 아니었다. 그이가 전성기 시절에 쓴 작품들을 모아 컬렉션이 나왔다니 어찌 영업글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보냐.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꺼내 본 오정희, 그리고 《불의 강》. 이 책의 뒷면엔 오정희의 20대 모습이 담겨있다. 세월이 참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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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 2020-04-29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저녁의 게임>을 한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고스톱을 배웠습니다. 물론 글로요.

Falstaff 2020-04-29 16:29   좋아요 0 | URL
진짜 화투로 고스톱을 쳐보셔도 재미있습니다. 빠지지만 않으면요. ^^
 
그날이 오면 범우문고 277
심훈 지음 / 범우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충청남도 당진 시로 들어가는 초입에 예부터 줄다리기로 이름난 고을이 하나 있었으니 기지시다. 기지시리로 가자면 당진 행 왕복 이차선 도로로 당진읍내 거진 가다가 왼쪽 오른쪽 작은 로터리가 나오면 바로 거기가 거긴데, 로터리를 넘지 말고 근방에다 일단 차를 세운 후 가게 앞에 의자를 내놓고 앉은 영감님한테 냉장고 속 시원한 사이다 병이나 하나 들이밀고 ‘필경사’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묻는 편이 좋다. 그래 골목을 뒤져 이젠 왕복 일차선의 농로를 따라 야트막한 언덕(이랄 것도 없는 오르막)을 따라 가면 송림 입구에 흐트러진 초막이 한 채 있으니, 붓으로 밭을 가는 필경사筆耕舍라. 이제 서해안 시대를 맞아 송악 IC로 가기 위해 34번 국도에서 38번으로 갈아타면 얼마 가지 않아 왼편 언덕배기에 고동색 표지에 흰 글씨로 ‘필경사’라 씌어 있으니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필경사. 서울 노량진에서 태어나 경성일고, 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다니다 3.1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장렬하게 퇴학을 맞은 후 중국 유학을 한 댄디보이 심훈이, 만년에, 그래봐야 만 35세에 요절을 해 만년이랄 것도 없지만, 하여간 죽기 4년 전이니까 만년은 만년 아닌가 싶어서, 그때 이미 서울 생활을 접고 당진에 정착한 부모님을 따라 멀고 먼(그러나 지금은 맘만 먹으면 한 시간 반이면 도착할 수 있는) 당진으로 내려가 붓으로 세상의 밭을 가는 필경사를 짓고 글을 썼으니, 이 집에서 쓴 대표작이 바로 조선의 대표적 브나로드 문학작품인 <상록수>. 내가 유일하게 읽어본 심훈. 그것도 어느 새 40년이 훨씬 넘었다. 어휴, 세월이란 대체.

 

​심 훈


  나는 한 번도 심훈을 시인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신문기자 출신의 소설가일 뿐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가 쓴 시 <그날이 오면>을 읽을 기회가 있어서, 이후 언젠가는 심훈의 시집을 한 번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참 오랜 세월 끝에 드디어 이이의 시집을 들춰보게 된 것. 심훈. 옛 사진에 포토 샵으로 포장한 반半 초상화를 보면, 역시 부잣집 도련님, 거기다가 댄디보이의 모습이라 이이가 그리 억센 울분과 갈망과 염원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몰랐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날이 오면>을 한 번 읊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 끊지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1930.3.1. (첫 번째 연 넷째 줄 ‘끊지기’는 ‘끊어지기’나 '끊기기'의 고어, 또는 시어, 아니면 출판사 오식인 것 같습니다.)



  심훈 역시 시인으로서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의 모습도 시어를 통해 고백하기도 하지만, 예상 외로, 거의 대부분의 시가 식민지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어두운 광경과, 독립을 향한 애절한 갈망,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 스러진 선후배 동지들에 관한 애절한 안쓰러움 같은 것들이다.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이 독후감을 읽는 분은 아시고 계셨을 듯하니 나는 반성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다. 예를 들어 <만가輓歌>라는 노래의 일부를 보자.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의 관을 메고 나간다.
  만장도 명정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조차 못 입힌 시체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떼메어 내오던 옥문을 지나
  철벅철벅 말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 같이 껌벅이는데
  동지들은 옷을 벗어 관 위에 덮는다
  평생을 헐벗던 알몸이 추울 상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 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준다.  (부분) - 1927. 9.



  동지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모진 고생을 하다 거의 죽어 나왔나보다. 출옥한지 불과 며칠 만에 세상을 등진, 수의조차 입히지 못한 알몸을 그냥 얇은 관에 담아 비가 오는 황혼에 몇 명의 동지들이 비를 맞으며 서대문 형무소 근방의 무악재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이다. 비가 온다니 땅이 언 겨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추울까봐, 옥 속에서 엄동의 세월을 보내고 이제 자유를 찾은, 넋이 떠난 동지가 추울지도 몰라 동지들이 자기 옷을 벗어 관을 덮어줄 때 가로등은 도깨비 불 같이 껌벅이던 어스름 녘.
  반면에 슬픈 희망의 노래도 있다. <어린이 날>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해마다 어린이날이면 비가 내립니다.
  여러분의 행렬에 먼지 일지 말라고
  실비 내려 보슬보슬 길바닥을 축여 줍니다.
  비바람 속에서 자라난 이 땅의 자손들이라,
  일 년의 한 번 나들이에도 깃이 젖습니다그려.


  여러분은 어머님께서 새 옷감을 매만지실 때 물을 뿜어 주름살 펴는 것을 보셨겠지요?
  그것처럼 몇 번만 더 빗발이 뿌리고 지나만 가면 이 강산의 주름살도 비단 같이 펴진답니다.


  시들은 풀잎만 얼크러진 벌판에도 붐이 오면은
  하늘로 뻗어 오르는 파란 싹을 보셨겠지요?
  당신네 팔다리에도 그 싹처럼 물이 올라서
  지둥치듯 비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말라고 비가 옵니다.
  높이 든 깃발이 그 비에 젖습니다.  - 1929.5.5. (전문)


  그러나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비분강개의 시 몇 수를 빼고, 심훈의 시를 상찬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 더 솔직하게 고백하자. 나는 시를 잘 모른다. 이이가 더 오래 살아 한 여든 살 쯤에도 시를 썼다면 내게 훨씬 와 닿는 작품을 많이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하여튼 서른 몇까지 젊은 심훈의 울분과 갈망, 격정과 슬픈 희망과 깊은 애도의 시편들에 나는 공감할지언정, 어쩐지 조금은 미숙하고 거친 것 같다. 이이의 정 반대편에 선 글 좋은 미당의 시를 읊고 바로 뒤에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런 내 의견이 옳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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