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호르헤 셈프룬 지음, 윤석헌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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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서재 친구 ‘서산_影' 님의 글을 읽고 서슴없이 사 읽은 책.
  호르헤 셈프룬. 이런 사람을 파란만장하다, 라고 해야 할 터. 1923년 12월 생. 아버지 호세 마리아 데 셈프룬 이구레아는 법률학자이며 톨레도 도지사를 지냈으면서 시집도 두 권을 낸 박식하고 부유한 부르주아이며, 어머니 수사나 마우라 가마조는 아버지(호르헤의 외할아버지)가 무려 다섯 번이나 수상을 역임한 가문 출신이니 남편보다 더 휘황찬란한 정통 귀족이었다. 부모가 금슬이 좋아 순서대로, 마리벨, 수사나, 곤살로, 호르헤, 알바로, 카를로스 프란시스코, 이렇게 두 딸과 내리 다섯의 아들을 두었으니, 프랑코가 내전만 일으키지 않았으면 엄마 소원대로 입헌군주국 스페인의 대통령이나 작가가 되었을 호르헤 셈프룬이었다. 그러나 1936년 7월에 시작한 내전으로 정국은 돌이킬 수 없는 혼돈으로 치닫고 와중에 스페인 공화국의 처절한 분열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이때 호르헤의 아버지 호세 셈프룬은 재 네덜란드 스페인 공화국의 공사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는데, 당연히 일곱 아이 모두와, 취리히 호수 인근 베덴스빌 마을 출신 독일어 가정교사 여성이며 나중에 계모가 될 여인을 데리고 벨기에 국경을 넘는다.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떴다.
  벨기에 국경을 넘을 당시부터 벌써 유럽 각국이 프랑코가 세운 부르고스 정부를 인정하는 분위기라 스페인 공화국의 외교관 여권을 가진 자들을 체포해야 할지, 통과시켜야 할지 망설이던 수준이었으니, 39년에 뮌헨협약에 의거하여 독일의 전차와 기관총 부대가 프라하에 진입을 하던 즈음 스페인 공화국의 기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다만 시간문제였다. 이 책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는 스페인의 내전시기, 즉 ‘나’ 호르헤가 열다섯 살 시기를 즈음한 시절,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칼뱅 중학교를 거쳐 파리의 앙리4세 고등학교에 재학할 무렵의 시절을 그린 자서전적 작품이다. 그렇다고 1939년만 서술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이 처음 기억난다고, 분명히 어머니였을 것이지만 누군가에 의하여 끊임없이 주입된 내용이 기억으로 정착되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1925년경부터 1990년 프랑코 사후 필리페 곤살레스 정부의 문화부장관을 지내며 마드리드 알폰소 11세 거리의 장관 공관에 거처하던 시기까지 일정한 순서 없이 글의 진행에 따라 필요한 기억을 서술하기 때문에 읽는데 집중이 필요한 책이다.
  게다가 60년이 넘는 드라마틱한 세월을 살았으니 숱하게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빽빽하게 등장하고, 다양한 사건을 설명하여야 하는데, 문제는 여태까지 말한 소재나 스토리 등 일종의 하드웨어가 아니라, 이이가 빌려 쓰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시를 비롯한 문학, 현학적이기까지 한 신학과 주로 공산주의 쪽 철학이라는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다. 본문이 360쪽 정도의 분량이지만 문장 자체가 유려하고, 지적이고, 섬세하기까지 해서 저절로 꼼꼼하게 읽을 수밖에 없어 여간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나중에 큰 누나 마리벨과 결혼하는 아버지의 비서, 그리고 이 책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을 헌정한 ‘장 마리 수투’에 의하여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입문한 후에 프랑스어에 몰두, 이후 지드의 <팔뤼드>를 비롯해 말로의 <인간 조건>, <희망>,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 심지어 작가 자신이 전에 쓴 작품 등 소설까지 섭렵하는 과정. 마드리드가 함락됨으로써 이제 조국을 떠나 망명지의 낯선 영토에서 모험을 나서야 하는 장면들이 빼어난 문장과 인용으로 나타난다.
  호르헤 셈프룬의 생애를 감추고 독후감을 쓰려 했지만 특이한 경험을 공유하지 않으면 읽는 분들이 공감하지 못하겠기에 소개한다. 이이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 교도였으며, 이에 당연히 영향을 받았을 셈프룬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가지 않으려 갖은 노력(거짓말)을 해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된다. 내전 중에 헤이그에 공사로 나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네덜란드,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에 왔고, 파리에서 공화국의 패배, 독일의 프라하 점령과 폴란드 침공,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전투 한 번 없이 파리를 내준 프랑스와 페텡에 의한 비시 정부를 겪으며, 반파시스트 운동의 일환으로 적극적인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해 활약하다가 스무 살 때인 1943년에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해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내진다. 부헨발트에서의 경험이 워낙 커서,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독일어를 구사하는 덕택에 다른 수용자들에 비해 나은, 그러나 상상도 하기 힘들만큼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남아 1945년 소련군에 의하여 해방이 되고나서도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때문에 천생 작가인 셈프룬일지언정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고 십여 년을 보내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1945년 스페인 공산당에 가입해 여러 가지 가명을 쓰면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넘으며 세포 또는 스파이로 활약한다.
  1964년에 이르러 스페인 공산당에 의하여 추방된 이후에 비로소 (프랑스어로)글을 쓰게 되니 자연스럽게 부헨발트 수용소 등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많은 소설과 산문, 영화작업 등을 했고, 나중에 스페인의 문화부장관까지 역임하다가 2011년에 자연사하는 인물이다. 그러니 초년 운이 좀 복잡해서 그렇지 한 시절 잘 살다 간 사람이긴 하다.
  이 자전적 작품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는 자신의 소년시절이 공식적으로 끝났다고 하는 1939년을 기억해 20세기 말에 쓴 것으로 그 시절, 스페인 공화국이 멸망해서 파시스트가 집권을 하고,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때가 자신에게는 찬란한 빛의 시절이었음을, 그러나 지독하게 우울한 빛의 시절이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약간의 독서력이 있는 분들에게 후회 없는 선택일 것이라고 권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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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별장, 그 후 민음사 모던 클래식 70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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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디트 헤르만의 두 번째 작품집 《단지 유령일 뿐》을 읽고 단박에 헤르만의 팬이 됐다. 그러나 당시엔 이이의 작품집들이 모두 품절일뿐더러, 헌책방 주인들도 헤르만의 진가를 알아보는 눈은 있어서 헌책 값으로 무려 새 책 정가의 몇 배를 요구하는지라, 조금 더 기다려보자 했다가 품절이 풀려 드디어 사 읽어본 유디트 헤르만의 첫 번째 작품집이다.
  이 작가의 작품집을 읽어보고, 검색도 해보았다. 아무래도 단편을 전문 작가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저번에 《단지 유령일 뿐》을 읽고 쓴 독후감의 결론으로 “사랑을 매개로 한 사람들의 의견 불일치, 소통단절, 의식의 이격離隔”이라 말한 바 있다. 이번에 《여름 별장, 그 후》를 읽어보니, 굳이 ‘사랑’이란 범위 안에서 이야기할 필요 없이, 처음부터 작가가 천착해온 것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 단절,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소외감, 건조함을 염두에 두어왔던 것처럼 보인다.
  《여름 별장, 그 후》에는 모두 아홉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는데, 《단지 유령일 뿐》과 달리 모든 개별 작품 사이의 공통점이 없는 독립적 단편소설을 엮어 놓았다. 아직까지 단 두 권의 작품집을 읽었을 뿐이지만, 단편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당연히 헤르만을 읽어봐야 하리라.
  첫 작품 <붉은 산호>부터 매력적이다. 이 책의 커다란 매력 가운데 하나는 각 단편들의 첫 문장이 매우 의미심장하다는 것. <붉은 산호>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심리 치료 상담을 받았고, 그 때문에 붉은 산호 팔찌와 내 애인을 잃었다.” ‘나’에게는 675개의 작은 산호 구슬로 만든 팔찌가 있었는데, 이건 증조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거였다. 증조할아버지는 난로 엔지니어로 대단한 미모의 아내, ‘나’의 증조할머니와 함께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방방곡곡을 다니며 난로의 제작 방법을 널리 알리고 큰돈을 벌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네바 강이 만든 삼각주 지역에 바실리치 오스트로브 섬이 있어, 우리의 예빤친 장군을 비롯한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의 많은 여름별장 가운데 한 곳에 집을 얻어 살았는데(도스토옙스키, <백치> 참조), 다만 증조할아버지가 그 거대한 나라를 다니느라 집에 자주 올 수 없었던 것이 흠. 독일에서 온 창백한 얼굴에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혼자 지낸다는 소식은 섬 전체에 퍼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조할머니는 저녁 빛과 슬프고 아름답고 낯선 어떤 것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바로 이 슬픔과 아름다움, 낯섦이 러시아 영혼의 특징이고 이런 특징으로 무장한 러시아의 예술가들과 학자들은 증조할머니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증조할머니는 그들이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들 가운데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가 사랑과 함께 선물한 것이 바로 산호 팔찌. 증조할아버지가 오랜만에 돌아와 블라디보스톡에 한 번 만 더 다녀오면 모든 일이 끝나니 그 다음에 바로 독일로 귀국하자고 주장하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증조할머니는 의도적으로 산호 팔찌를 드러내보였고, 누가 선물했는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그리하여 그날 밤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곱사등이 이삭 바루브를 니콜라이 세그게예비치에게 보내 결투를 신청해, 다음날 오전 여덟 시, 심장을 관통당한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만다.
  이런 내력을 가진 산호 팔찌. 지금 나는 산호 팔찌가 주인공 화자 ‘나’의 손목에 채워진 내력을 이야기했을 뿐이고, 왜 ‘나’가 심리치료를 받아야 했는지, 애인은 어떻게 잃었는지에 대하여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마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황제의 신부>가 생각나는 큰 스케일로 꾸려도 충분할 것 같은 소재를 갖고 열여섯 페이지에 불과한 단편소설을 만들었으니 문장들이 얼마나 축약적이겠는가. 올 3월에 읽은 《단지 유령일 뿐》에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제일 앞에 실린 단편 <붉은 산호> 말고도 거의 모든 단편이 충분히 장편으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스토리 라인을 가졌다. 그러나 이 작가는, 물론 직접 읽어보시면 충분히 알겠지만, 천생이 단편소설 스타일이라 스토리보다 촘촘한 문장으로 더욱 존재가 드러난다. 어떤 뜻이냐 하면, 비록 번역한 우리말로 읽었지만 하나라도 뺄 수 있는 문장이 없다는 것. 그런 문장으로 사람들의 화해 불가능한 개별성을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으니 어찌 이이의 작품이 재미없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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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먼 나라를 아르십니까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신석정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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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정. 1907년생. 네 살 때 조선의 주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간 식민지의 젊은 시인은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시대의 절망 속에서 어머니를 불러 저 먼 나라로 가자고 했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은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는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시렵니까?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부분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마지막 세 연이다. 물론 이렇듯 신석정의 초기 시는 일종의 퇴행을 보는 것같이 어머니를 소환하고, 자연과 소년기의 동경 같은 천진스러운 시선을 보여주기는 한다. 176cm의 키. 20세기 초에 태어난 사람이 176cm라면 상당히 큰 키의 남자인데 이런 이가 어머니, 혹은, 그렇게 가오리다 / 임께서 부르시면, 이라 노래한 것을 웃지 말라.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ㅡ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임께서 부르시면> 부분 



  물론 처음엔 이렇게 시작했으나 신석정 같은 강골의 시인도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이나 만해를 빼고는 별로 기억에 없다. 나부터도 시를 읽고 미루어 짐작한 천생 서생 신석정의 강단이,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모두 거부하고, 친일문학잡지 《국민문학》으로부터 청탁 편지를 받자 박박 찢어버리고 4년이 넘게 아예 절필을 한 정도인지는 알지 못했다. 석정의 고향이 부안. 바로 아래 동네인 고창에 석정의 8년 손 아래로 오직 시 하나만 보면 한국문학사의 위대한 시인이 있었으니 바로 서정주다. 스물일곱 살의 미당이 영미귀축을 물리치기 위해 성스러운 전쟁에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동안 석정은 공식적으로는 붓을 똑 부러뜨리고 고향에 칩거하여 이런 시를 썼다.



  고운 심장心臟



  별도
  하늘도
  밤도
  치웁다


  얼어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
  한 줄기 가는 어느 난류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래도 서러울 리 없다는 너는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전문)



  그런데, 참 우스운 일이 있다. 식민 치하에서 석정은 그들의 중요한 요구를 들어준 바 없었어도 무사했던 반면, 1960년대부터 곤욕을 치루기 시작한다. 61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들에게 이런 시가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었나 보다.


  시끌한 / 바람이 불더니 / 어둠 속에 / 3월은 가고, / 다냥한 / 햇볕이 들더니 / 어둠 속에 / 4월도 가고, / 푸르른 / 숨소리 들리더니 / 슬프도록, / 빛나는 5월은 와도, / 화관을 / 씌우던 ‘5월제’는 옛이야기. / 언젠가는 / 퇴원할 민주주의를 / 5월이여 / 너도 기다리기에 지쳤지? (후략)   <푸른 문 밖에 서서> 부분


  그래서 군인들에게 붙들려가 8일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고 하며, 이후 1969년에도 민주공화당이 삼선개헌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와중에 이번엔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는데, 당시 남산에 갔다하면 제 발로 걸어나오는 사람이 없던 시기였다. 이미 나이도 예순세 살에 달한 (당시 기준으로) 노인이 그 험한 꼴을 당했으니 얼마나 참담했을꼬. 그리하여 석정의 시는 이제 어느새 다시 초기 서정시 쪽으로 방향을 바꿔 이 시집의 마지막 시집도 아래와 같은 시로 마감한다.



  슬픈 구도構圖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워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줄 지구도 없고
  노루 새끼 한 마리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  (전문)



  지금 시대에 석정 같이 시를 쓸 필요도 없고, 쓸 수도 없겠지. 그러나 그의 시편들, 그 고운 멀고 먼 나라의 빨갛게 익은 능금 같은 시들의 효용은 아직도 독자의 마음을 간질이고, 적신다. 한결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 부안 초입에 있는 석정 생가에나 한 번 가볼까 싶다. 이런 서정시를 쓰는 강건한 지사가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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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지배철 2023-06-11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중학교 다닐 때 같은 교정 내의 고교 평교사로 재직했었습니다,몇번 우연히 먼 발치로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요,비교적 큰 키에 이국적 외모 그리고 부드럽고 인자한 모습으로 한 눈에 띄었었죠,나중에야 신석정 시인이라는 걸 알았고요,제 기억으로는 둉료 선생님들도 깍듯이 대하시더라고요 작품도 좋지만 실제가 인간적으로 더 멋있었던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Falstaff 2023-06-11 16:10   좋아요 0 | URL
아휴, 문수봉 님께서 노장이셨군요. 저는 비봉의 봉우리 하나로 기억할 뿐입니다만.
가지고 계신 추억의 한 페이지가 많이 부럽습니다. 저도 서라벌 중학교를 졸업해서 그 동네 출신 작가들의 엽기적 무협을 많이 듣고는 했답니다. 그래도 석정 선생을 직접 뵌 것 만 하겠습니까.
 
먼 별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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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에 볼라뇨는 두 작품,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과 <먼 별>을 발표한다.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에서 나오는 마지막 열전列傳인 “악명 높은 라미레스 호프만”은 이렇게 시작한다.


  “악명 높은 라미레스 호프만의 작가 이력은 틀림없이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이던 1970년 또는 1971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아메리카의 나치문학, 을유출판사, 2009, 172쪽)


  반면에, 오늘 읽은 <먼 별>은,


  “내가 카를로스 비더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었던 1971년이나 1972년 무렵이었다.”


  볼라뇨는 본문을 시작하기 전에 ‘서문’ 형식으로 이 책 <먼 별>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의 마지막 장, 칠레 공군 라미레스 호프만 중위의 이야기임을 딱 밝히고 시작한다. 그러니 라미레스 호프만 중위는 <먼 별>에서 나오는 곡예 비행사 카를로스 비더 공군 중위와 같은 인물로 봄이 마땅하다. 작가는 앞서 발표한 작품의 한 장章을 할애한 라미레스 호프만 이야기가 “지나치게 도식화되어 서술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곧바로 같은 인물을 주요 등장인물, 심지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후속작품을 써서 제목을 <먼 별>이라고 붙였을 수 있다. 그러니까 <먼 별>은 이름을 ‘카를로스 비더’로 바꾼 “악명 높은 라미레스 호프만”의 상세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화자 ‘나’와 친구 비비아노 오리안이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칠레 제2의 도시인 콘셉시온 대학에 다닐 때였는데, 젊은 시인이었던 후안 스테인이 운영하는 시 창작교실이었으며 당시 카를로스 비더가 사용하던 가명은 ‘루이스 타글레’였다. 이이는 건장한 체격의 미남에 누구보다도 옷을 ‘지나치게’ 잘 입고 다녔으며, 어떤 복장을 하더라도 늘 값비싼 브랜드의 것들만 몸에 걸쳤는바, 당연히 많은 여성들이 루이스 타글레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창작교실엔 일란성 쌍둥이 베로니카와 앙헬리카 가르멘디아 자매도 등록을 했고, 당연히 매우 아름다운 자매라서 ‘나’와 비비아노를 비롯한 거의 모든 남자들이 어떻게 한 번이라도 수작을 부려볼까 궁리하는 모습이 훤하게 보였을 정도였다. ‘나’는 앙헬리카를, 비비아노는 베로니카를 마음에만 두고 언제 고백을 해야 하나, 고민만 한창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불쑥 나타난 루이스가 그만 베로니카의 마음을 홀랑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한편 시인 후안 스테인은 친한 시인 친구가 있었으니 ‘디에고 소토’라는 인물. 후안 스테인은 칠레의 전통 가정시 같은 서정시를 하는 반면에 디에고 소토는 좀 과격한 초현실주의 비슷한 전위적인 시 작풍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소토의 창작교실은 의과대학 안에 있어서 늘 해부실의 포르말린 냄새가, 심하거나 약하거나 간에 공기 중을 떠돌아 이를 잊기 위해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워 대고는 했다. 당시 콘셉시온에 있던 일종의 경쟁업체인 두 시인의 창작교실에 동시에 등록을 하고 다닌 인물이 딱 세 명이 있었으니, ‘나’와 비비아노, 그리고 타글레였다. 이쯤 되면 또 문득 떠오르는 볼라뇨의 다른 작품이 있다. 그렇다. 전위적인 “내장 사실주의” 시를 창작하기 위한 그룹의 구성원들의 이야기인 <야만스러운 탐정들>. 이 책에서는 야만스러운 ‘탐정들’ 대신에 야만스러운 ‘시인들’이란 말을 상당히 잦은 빈도로 사용한다. 이미 2년 후에 발표할 작품의 제목을 이때 구상한 듯하다.
  젊은 시인 지망생들이 갖가지 시를 쓰고 있던 시절에 타글레는 다른 시인 지망생들하고 완전히 구별되는 태도를 견지한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타글레의 시를 혹독하게 비난을 해도 열을 받기는커녕 불평 없이 수용을 하고, 남의 시 작품에 대해서는 언제나 신중하고 간결하게 비평을 할뿐더러, 항상 예의바른 톤의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 즉, 자기가 지은 시와 무심하게 거리를 유지하는 독특한 지망생인데, 이런 태도는 디에고 소토로 하여금 타글레의 시가 자기 작품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런 눈치는 다들 별로 다르지 않아 시 동인지를 만들기 위해 몇 명이 모여 논의하다가 잡지 안에 타글레의 시를 포함시키자는 의견이 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는 일화도 겪는다.
  여기까지 읽을 때, 그냥 그런 소설이겠거니 했다. 왜냐하면, 고백하건데 <아메리카의…>를 읽은 지가 오래되어 작품의 연관성도 예상하지 못했고, 그래서 이후 벌어질 쇼킹한 사건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1973년이 되어 피노체트가 대통령 궁에서 저항하던 아옌데를 죽이고 정권을 잡는다. 콘셉시온에도 계엄령이 발령이 되어 어수선한 시절을 맞아 가르멘디아 자매들은 콘셉시온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나시미엔토의 부모 집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부모님은 자매들이 열다섯 살 때 교통사고를 당해 한 날 한 시에 즉사를 해서 지금은 큰 이모 에마 오야르순 여사와 마푸체 족 인디오 가정부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이 집에 루이스 타글레가 방문을 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유쾌한 잡담을 하다가, 큰 이모 오야르순 여사를 비롯한 자매들이 너무 늦은 시간이니 하루 자고 날 밝으면 떠나라고 제의를 했고, 못이기는 척 하면서 타글레가 이를 받아들여 이층에 빈 방을 하나 얻었는데, 평소에 눈이 맞아 있는 상태였던 베로니카의 침실에 몰래 들어가 한 번 관계를 한 다음, 모든 여자들이 깊은 잠에 빠진 암흑의 공간에서 1층으로 내려간 타글레가 에마 이모의 방에 소리 나지 않게 들어가더니 베개로 노인의 얼굴을 덮어 누름과 동시에 휘어진 단도로 단숨에 목을 그어버렸다. 이어 다시 방에서 나와 하녀의 방에 잠입해보니, 타글레가 신 혹은 악마는 아니어서 마푸체 족 인디오 가정부는 이 새벽에 몸을 숨겨 벌써 달아나버려 빈 침대만 남아 있었다. 때를 맞춰 차를 타고 도착한 네 명의 남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15분이 지난 다음에 일사불란하게 다섯 명의 남자가 집을 떠났는데, 집에서 시신은 절대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었으며, 이때 집에서 나온 살인자는 타글레가 아니고 ‘카를로스 비더’였던 거였다. 여기까지가 총 10 장章 가운데 첫 번째 장의 내용이다.
  이후 남아메리카에서 독일의 제4 제국 건설을 꿈꾼 카를로스 비더의 활약상이 펼쳐지고, 활약의 결과물을 찍은 사진 전시가 문제가 되어 공군에서 추방된다. 그 후 유럽으로 흘러간 것을 ‘나’의 친구 비비아노가 끈질기게 추적을 해 그 결과를 기록한 것이 <먼 별>이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관련 있는 이이의 다른 두 작품을 떠올리게 되는 천생 볼라뇨 소설. 볼라뇨의 팬이라면 꼭 읽어야 할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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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 1 창비세계문학 79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엄지영 옮김 / 창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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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까지 읽은 요사의 작품을 출판 순으로 나열해보자.


  1. <판탈레온과 특별 봉사대> 1978
  2. <나는 훌리오 아주머니와 결혼했다> 1982
  3. <세상 종말 전쟁> 1984
  4. <새엄마 찬양> 1990
  5.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노트> 1998
  6. <염소의 축제> 2001
  7. <천국은 다른 곳에> 2003
  8. <나쁜 소녀의 짓궂음> 2007


  1은 코믹한 정치소설이고 2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희극.
  3은 심각한 수준의 농민반란,

  4와 5는 연작이라고 볼 수 있는 에로티시즘과 미술 비평
  6은 라틴 아메리카의 고질병이었던 군부독재를 다룬 정치소설 

  7은 명백하게 고갱을 염두에 두고 쓴 미술 천재에 관한 이야기
  8은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에 개인사를 겹쳐놓은 재미있는 잡탕.


  그럼 이번에 읽은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는 어느 범주에 들까? 군사정부 시절, 이들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던 부르주아 가정을 중심으로 정치적 혼란과 가족 구성원을 둘러싼 수다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염소의 축제>와 <나쁜 소녀의 짓궂음>과 비슷한 범주에 넣어도 될까?
  나는 여태 요사의 대표작으로 <세상 종말 전쟁>과 <천국은 다른 곳에>를 들어왔다. 두 작품이 워낙 다른 성격이라서 하나의 대표작을 고르는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작가라고 생각해왔는데, 작가는 직접 쓴 <까떼드랄 주점에서의 대화> 서문의 마지막에서 놀랍게도,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만약 불구덩이 속에서 내 작품 중 하나만 구해야 한다면, 나는 주저 않고 이 작품을 선택할 것이다.”

  이 문장을 읽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옆에 노트 한 권을 펴 놓고 손에 볼펜을 쥐고 첫 장을 넘긴다. 이해가 가고 눈에 그림이 그려지시지? 비장한 마음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이 세계적 설레발 꾼이 다른 건 다 불에 타 버리는 걸 자신의 눈으로 보더라도 이 책만은 불구덩이에서 빼내겠다지 않는가 말이지. 그런데 참고해야 할 것이 하나가 더 있으니 서문을 쓴 시점이 1998년 9월. 위 작품 리스트에서 6, 7, 8번은 세상구경을 하지 않은 상태였던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힘을 주고 단어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짚어가며 읽어야 했으며, 그것도 (특히!) 스페인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창비 특유의 표기법에 대책 없이 난타 당해가며 공개하기에 쪽팔릴 정도로 빽빽한 메모를 해 무려 여덟 페이지를 메우고 난 후에야 책 읽기를 마칠 수 있었다. 아, 물론 진짜로 ‘뻬루’ 사람들이 그렇게 발음하겠지만 읽기에도 곤란한 우리의 등장인물들, 주인공 싸발라 싼띠아고를 비롯해 그의 술친구 까를리또스, 애완견 바뚜깨, 주근깨가 빽빽하게 박힌 친한 친구이자 나중에 매부가 되는 뽀뻬예 아레발로 등을 꼼꼼하게 읽어나가니, 이게 웬 일? 글쎄 교정에서 놓쳐 그대로 드러난 오식, 오타, 빠진 글자 등이 눈에 확, 다른 책들보다 훨씬 선명하게 보이더라는 것. 야, 창비가 다른 건 몰라도 교정, 교열에 관해서는 굉장히 신경 쓰는, 타의 모범이 되는 회사인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더구만 그래, 아오!
  애칭 ‘싸발리따’라고 불리는 주인공 싸발라 싼띠아고는 1948년 꾸데따를 성공시켜 집권한 마누엘 아뽈리나리오 오드리아 장군 시절에 제약회사와 건설회사를 경영하는 품위 있고, 점잖고, 아랫사람과 유색인종에게 너그럽고, 하인 하녀 운전수들에게 활수하여 그들의 애로사항을 잘 들어주고 해결까지 해주는 천생 호인처럼 보이나 사실은 바로 그것들을 무기로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위 하게 만드는 진정한 의미의 초고단수로 교활한 인물인 페르민 씨와 쏘일라 여사 사이의 2남 1녀, 아들-아들-딸 가운데 두 번째 아이로, 어려서부터 놀랍도록 명석한 두뇌로 늘 전교 1등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겨 주위의 기대를 받았으나 부르주아나 고관들의 자제들이 주로 다니는 까똘리까 대학 대신 천한 유색인, 소위 촐라들이 많이 다니는 싼마르꼬스 대학을 선택하여 부모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이 싼마르꼬스 대학으로 말할 거 같으면 뻬루, 에잇, 편하게 쓰자, 페루에서 가장 급진적 학생운동의 본산으로 툭하면 반정부 시위를 해대고, 현재 법에 의하여 불법행위로 간주하고 있는 공산당의 세포가 침투해 있는 곳이었으니, 정경유착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아빠 페르민 씨 입장에선 실망이 대단하긴 했겠다.
  근데 그건 조금 나중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지금의 싸발리따는 싼마르꼬스 법과를 3학년 2학기까지 끝냈나 못 끝냈나 확실하게 밝히지 않아 특정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고 일단 집에서 뛰쳐나와, 독신생활을 고집하는 큰아버지 끌로도미로 씨의 주선으로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잘 나가는 신문사 ‘끄로니까’지(紙)에 입사해 지방소식 담당기자를 거쳐 나이 서른을 조금 넘은 현재는 당당하게 사설을 쓰는 논설위원의 자리에 앉았으니 언론계에선 나름대로 성공을 한 인물이다. 그럼 뭐해. 봉급쟁이는 봉급이 얼마냐가 가장 중요한 성공의 척도임에, 페루의 언론계는 다른 산업에 비하여 박봉으로 악명이 높아서, 가족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유색인 간호사 출신의 배우자 아나와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집에서 그냥저냥 즐기며 사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근데 부부 사이에 애가 없다. 주위에서 보면 이런 경우는 대개 혼인 전에 임신을 해서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중절을 하고는 그 후유증으로 생긴 불임일 확률이 높다. 이 부부 역시 혼인 전에 임신을 하고 중절 수술을 받은 건 맞는데 서로 동의 아래 딩크족으로 사는지, 아니면 역시 중절수술의 후유증인지는 딱 집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여간 그래서 파트타임으로 간호사 일을 하는 아나가 어느 날 흰 털투성이 강아지를 사양하지 못할 수준의 선물로 들고 와서 잔뜩 정을 붙이고 살던 중에 일이 벌어진다.
  하필이면 당시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광견병이 유행을 했다. 나 초등학교 다닐 때 서울에서도 광견병이 유행했던 적이 있어 동네 넝마주이들이 날마다 개 잡아 포식했던 적이 있는데 그게 페루에서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그래서 대 ‘끄로니까’ 지의 논설위원인 싸발라 싼띠아고는 일주일에 두어 번씩 광견병 예방을 촉구하는 사설을 써 제꼈고, 이에 자극을 받은 리마 시청에서는 임시직 고용인들을 풀어 리마 시내에서 눈에 띄는 개, 물론 혼자 다니는 개들을 몽땅 잡으라는 지시를 내려 한 마리당 1쏠(당시 페루의 화폐단위. 지금 대강 보면 한 만 원 이쪽저쪽 하는 거 같다.)을 지불했다. 그랬더니 흑인과 원주민들 사이의 혼혈들을 주축으로 한 개 사냥꾼이 막무가내로 개만 봤다하면 잡아갔는데, 하루는 싼띠아고의 아내 아나가 목끈을 하고 산책을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험악하게 생긴 흑인이 목끈까지 빼앗아 그 길로 바뚜께를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아나는 넋을 잃고 멍하니 서 있다가 곧바로 집에 들어와 엉엉 울어대다가 집에 들어온 남편 싼띠아고를 앞에다 놓고 드잡이를 시작했다. 빨리 가서 개 찾아오라고. 하긴 애 없는 대신 키우는 개니 정도 들만큼 들었겠지.
  부잣집 도련님 출신인 싼띠아고가 리마 어느 구석에 유기견 보호소가 있는 줄 아나. 그리하여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위치를 알아내 빈촌 가운데도 빈촌인 ‘뿌엔떼 델 에헤르시또’의 개 보호소, 라기 보다 도살대기소에 가서 우여곡절 끝에 아들 같은 바뚜께를 구출해내는데 성공한다. (비참한 환경의 개 집합소, 귀가 먹먹하게 만드는 개 짖는 소리, 질퍽질퍽 물이 고여 있는 흙바닥과 개의 분변, 파리 떼 등을 천하의 이야기꾼 요사가 묘사해놓은 건 이 글을 읽는 분의 건전한 식사를 위해 생략하는 것을 용서해주시라.)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이 순간에 닥스훈트 한 마리가 유독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했고, 천하의 빈민굴, 여기까지 온 잘난 기자양반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기도 한 관리인이, 인디오와 흑인 혼혈을 천하게 부르는 호칭인 쌈보 몇 명을 불러 모종의 행동을 지시했고, 이들은 자루에다 닥스훈트를 집어 자루의 주둥이를 묶더니, 인간의 역사에서 진짜로 발생을 해서 기록까지 해놓았던 일인데, 진나라 시황제가 어머니와 가짜 환관 노애嫪毐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린 아들, 그러니까 씨 다른 형제 둘을 자루에 넣어 고깃덩어리가 될 때까지 때려죽인 것을 그대로 흉내 내 거구의 쌈보 두 명이 두꺼운 몽둥이로 자루에 든 닥스훈트를 두드려 패 유혈이 낭자하게 죽여 버렸다.
  근데 이 가운데 한 명의 쌈보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드는 싼띠아고. 순식간에 머리를 확 돌려보다가 드디어 알아본다. 한 때 자신의 집에서 아버지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암브로시오 빠르도. 물론 싼띠아고는 그의 성姓 ‘빠르도’까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가 빠르도인지도 몰랐지만. 그리하여 싼띠아고는 암브로시오에게 아는 척을 하고, 암브로시오는 또 싼띠아고의 아버지인 페르민 씨를 존경하는 바가 대단하여, 아이고 도련님, 하필이면 여기서 뵙네요. 페르민 나리는 건강하신가요? 큰 도련님하고 떼떼 아가씨는 다 결혼 하셨고요? 부터 시작해 오랜만에 싸발라 가문의 사람들을 만난 기쁨에 눈물이 앞을 가리는 거다. 작은 나리, 이렇게 진흙탕에 서서 이럴 것이 아니라 어디 가서 맥주라도 한 잔 하면서 이야기나 좀 하시지요. 하면서 암브로시오가 싼띠아고를 데리고 간 추레하고 지저분하고 중국인이 카운터에 앉아 있는 레스토랑 겸 술집의 이름이 바로 “까떼드랄.” 이 주점에 들어 싼띠아고와 암브로시오는 무려 댓 시간에 걸쳐 길고 긴 대화를 하며 맥주를 무지하게 많이 마셔댔고, 다음날 아침, 많이 마신 맥주 탓에 어질어질한 두통을 안고 암브로시오가 했던 이야기들, 그 사이사이에 싼띠아고의 회상을 엮어내 본문만 천 쪽이 넘는 장편소설의 막이 드디어 올라간다.
  흠. 이렇게 해서, 나는 본문의 내용을 한 마디도 소개하지 않고 독후감을 끝낼 수 있었던 거디었던 거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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