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순양함 무적호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2025년 첫 독후감의 대상이 될 작품을 어떤 것으로 할까? 도서관 서가를 기웃거리다 스타니스와프 렘을 선택했다. <솔라리스>를 인상깊게 읽었으며, 광막하고 ‘광활’이라는 단어만 가지고는 택도 없는 무한대의 공간 속으로 탐험을 떠난 인간과 마주치는 의사 불통의 생명체 이야기. 이 놀라운 상상력에 반했던 것이었는데, 그사이 벌써 일년 반이 지났다. 다른 렘도 읽겠다고 서가에 갈 때마다 눈 여겨 보긴 했으나 쉽게 고르지 못했다. 제목이 근사하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새해를 여는 첫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선택한 책이었지만 정작 읽고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스타니스와프 렘, 혹시 이 작자 자신이 우주에서 온 외계인 아니었을까?


  무적호. 라이라 성좌 우주기지에 주둔한 우주선 중 광자 엔진을 탑재한 최대규모의 2급 순양함이다. 20층 건물 높이의 웅좌를 자랑하는 순양함에는 83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는데 모두 중앙 갑판에 자리한 터널형 동면실에 잠들어 있다. 비교적 짧은 항해라서 극저온 동면 대신 체온 10도 이상을 유지하는 인공수면을 적용하고 있다. 비행하는 동안 함정의 운행은 고 지능 로봇인 오토마톤들이 수행하고 있다. 인공적으로 잠이든 지 7개월 만에 동면실에서 승무원들이 눈을 뜨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이후 “무적호”라고 씀>는 1964년 작품이다. 그런데 이 첫 장면, 어디서 봤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2009년 작품 <아바타>. 21세기식 백인 기병대와 인디언의 결투를 다룬 서부극이라 볼거리는 많지만 스토리는 너무 구태의연해서 지루했던 영화인데 그럼에도 우리나라 최고 관람수 1천4백만 이상, 전세계 역대 최고 박스 오피스 29억 달러 이상을 기록한 소위 전무후무한 작품. 나는 <무적호> 오프닝을 보면서, 카메론 감독이 <무적호>의 오프닝을 적어도 읽어보았거나 슬쩍 빌려왔을 것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시작부터 기대감을 바짝 끌어올렸다. 이 작품이 우주생명체와의 상봉을 다룬 삼부작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솔라리스>에는 행성 자체가 거대한 생명체였다. 이번엔 과연 어떤 것이 등장할까, 작가가 렘이니만큼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가 도착한 행성은 ‘레기스3’. 상공에서 내려다보니 행성은 뭉글뭉글한 검붉은 구름으로 뒤덮였다. 바다와 어두컴컴한 분화구들이 흩어져 있는 대륙으로 구성되어 있는 행성. 겉으로 보기엔 대륙은 모래와 암석만 있으며 생명체의 흔적은 전혀 없다. 상공8백 미터에서 하강한 무적호는 드디어 사막행성의 땅을 밟아 레기스3 행성의 일출과 구름, 바람이 있는 세계와 조우한 것이며 이제는 이 세계와 접촉해야 한다는 사실을 돌이킬 수 없었다. 순양함의 목적은 이 행성에 도착해 활동하던, 1년 전에 마지막 신호를 우주기지에 보낸 후에 불가사의할 정도로 갑자기 사라져버린, 무적호와 같은 등급의 콘도르호를 수색하기 위한 것이다. 콘도르 호에는 무적호 호르파흐 선장에 비해 우월하지도 않고 못하지도 않은 거의 동년배의 선장이 있었으며, 항해사를 비롯한 간부들, 과학자들의 수준 역시 무적호와 같은 수준이었음에도 실종되어 버렸으니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해사이자 주인공인 로한이 사병 두 명을 데리고 함정 밖으로 나와 시료를 채취해 분석한다. 토양의 방사선 수치 0.02. 거의 없는 수준이다. 대기는 질소 78%, 아르곤 2%, 이산화탄소 0%, 메탄 4%, 산소 16%로 구성되어 있다. 선장이자 사령관은 보고를 듣고 해양에 산소를 만드는 해조류나 해초류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바다에 무인 로봇을 투입해보니 정말로 심해로 갈수록 다양한 수생동식물이 서식하고 있었다. 의문점. 왜 바다생물이 육지로 이동을 포기했을까? 해안에서 멀어질수록 생명종이 많고 밀도도 높은 이유는?

  이어서 콘도르호도 발견했다. 함정 주위의 사막 모래 속에는 콘도르호 승무원의 것이 확실한 인간의 유골이 잔뜩 묻혀 있다. 함정 내부에서는 시신들이 극도로 건조한 상태에서 바싹 마른 미라 형태로 버려져 있다. 그러다 아직 생생한 시신 형태를 한 승무원을 발견한다. 터널형 동면실로 들어가 얼어 죽어버린 병사. 과학자들은 시신의 뇌에 자기장을 투입해 마지막으로 본 장면 또는 정보를 얻으려 하지만 ‘파리’ 또는 ‘파리떼’ 같은 것만 인식하고 말았다. 파리를 본 것이 마지막으로 뇌에는 아무런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평소에 SF를 잘 읽지 않는 나는 아직도 몰랐지만 SF 좋아하는 독자는 눈치를 챘을 거 같다. 행성 레기스3의 내륙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학살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할 것이라고. 그렇다. 이 정체불명의 것, 지금부터 60년 전인 1964년에 발표한 소설에서 렘은, 나는 여전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기상천외한 방식의 진화론을 펼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상상력을 장착한 천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이래서 내가 초두에 스타니스와프 렘이 우주에서 잠깐 지구 행성에 왔다 간 외계인일지도 모른다고 한 것.


  작품의 여섯 번째 챕터, “라우다 박사의 가설”에서 라우다 박사가 사령관 호르파흐 선장에게 함정 밖에서 승무원을 백치로 만들어버리는 것들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레기스3의 내륙에 살았던 생명체는 화석 분석 결과 5백만년 전에 멸종했다. 그 이전에 라이라 제타 행성계의 여섯 번째 행성에 고도의 문명을 이룬 외계인이 살았다는 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라이라인이, 행성계의 폭발을 감지해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든지 아니면 그저 과학 탐사였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이곳에 정찰선을 보냈으나 원인 불명으로 모두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가정하자. 라이라인들도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한 오토마톤과 함께 왔다는 건 이미 무적호의 탐사로 밝혀냈다. 이 오토마톤은 자체 수리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몸집이 큰 로봇에 이상이 생기면 정상으로 기능하기 위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부품이 필요해서 오토마톤들은 작은 크기의 다양한 기능을 가진 부품을 다량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행성 동물이 오토마톤을 공격했을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오토마톤과 수리 로봇이 행성 동물을 멸종시킨다. 이후에 덩치가 크고 다양한 무기가 있는 소수의 오토마톤은 이제 작은 쪽으로 더 발달한 정밀 부품들의 어마어마한 무리와 마지막 대결을 벌여 모두 망가지고 만다. 이걸 라우다 박사는 “무생물 진화”라고 칭한다. 아무 생각의 능력이 없는 작은 부품들이 특정 충격에 반응하여 한 순간 거대한 수량이 밀집하여 각기 신호를 전달하는 와중에 일종의 집단적인 뇌, 사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동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한테 위협이 될 수 있는 개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기계이건 간에 그 개체를 집단으로 공격해, 아무 감정이 없는 기계여서, 완전히 망실할 때까지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해, 유기 생명체일 경우 그걸 죽이는 것보다 뇌의 기능을 정지시켜 생명체의 기능을 없애는 것이 더 에너지가 적게 든다는 것을 학습한 이후에, 콘도르호의 수면실에서 발견한 동사 시체에서 보았듯이 뇌를 백지화하기 시작했다는 가설.

  지금 라우다 박사가 하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쓰느라 두서가 없을 지 모르지만 직접 읽어보면 호소력이 있다. 인공지능 시대를 살고, 스티브 호킹 박사의 의견에 따르면 인공지능에 의하여 멸망할 운명을 가진 우리 종의 입장에서 이 가설이 틀렸다고 주장할 아무런 이유 또한 없다. 그걸 렘 선생은 희대의 천재 호킹 박사가 스물두 살 때 생각해낸 거다.


  이 의외의 동체, 생명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지금처럼 ‘동체’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나중엔 결국 ‘그들’이라고 하는 것과 대면한 무적함의 과학자들은 정말 인간답게 그것들과의 최종적인 복수전을 도모한다. 인간이 발명한 가장 강력한 로봇 무기 ‘사이클롭스’까지 투입시켜 검은 구름 모양의 파리떼와 일전을 벌이지만 사이클롭스는 장렬한 싸움 끝에 뇌, 컴퓨터가 이상작동을 해 총구를 거꾸로 돌렸다가, 무작정 사막을 헤매는 신세가 되어 결국 무적호에 의하여 분쇄되기에 이른다.

  이때 주인공 로한이 사색을 시작한다. 은하계 중심설.

  “인간과 비슷하거나 이해 가능한 것만을 추구하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몫이 아닌 일, 즉 인간과 관계없는 사안에 간섭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레기스3에 존재하는, 그게 생명체이건 비생명체이건 간에 “수백만 년 동안 이미 생존의 균형을 이루어 실재하는 대상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누구한테도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이 행성의 활발하고 적극적인 존재는, 동물이나 사람이라고 불리는 단백질 복합체와 비교해서 월등하지도, 그렇다고 열등하지도 않”아서 인간은 애초에 복수전을 꿈꿀 권리가 없기 때문에 이대로 행성을 떠나는 것이 옳다는 취지. (p.253)

  그러나 함정 밖에, 하필이면 파리라고 이야기한 검은 구름이 밀집해 있는 근처에, 이미 죽었을 것이 거의 확실한 승무원 네 명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미 시신 상태일 것이니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그냥 두고 떠나버릴 것인가, 아니면 전멸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색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사령관 호르파흐와 항해사이자 주인공인 로한이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고, 대화의 결론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참 다양한 공상적 아이디어를 포함한 SF의 명작. 2025년, 모두 다양하고 발칙한 아이디어로 혼자만의 독특한 한 때를 만드시기 바란다. 117년만에 가을 폭설이 내린 늦고 늦은, 만추의 가을 새벽에 씀.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5-01-02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엇, 마지막 문단이...? 시재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죠. 그냥 조크인건가요? ㅋ
암튼 폴님도 새해 건강하시고 좋은 책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Falstaff 2025-01-02 16:34   좋아요 1 | URL
앗, 마지막 문장이요? ㅎㅎㅎ 작년 11월 말에 2025년 처음 올릴 독후감을 썼다는 얘깁지요. ㅎㅎㅎ
별 님도 늘 건강하시고 걍 연초에 로또 한 장 퍽, 맞으시기 바랍니다!

yamoo 2025-01-02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또 간만에 별5 출현이네요..ㅎㅎ 그것두 SF라뉘!!

폴스타프님!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건강하고 즐거운 한 해 되시길 빕니다~~(분명히 그렇게 재밌게 사실 거 같다는..^^;;)

Falstaff 2025-01-02 20:33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책입니다. 게다가 생각할 거리도 있어요!
<솔라리스>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것과 맞먹습니다. 순 재미로만 보면 이 책이 윗길일 수도 있습니다. ㅎㅎㅎ 즐기시면 좋겠네요!
올해 늘 좋은 일만 생기기 바랍니다. ^^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새소설 15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충남 예산에서 출생한 75년 토끼띠. 이 책 나온 2024년에 만 49세. 글을 쓰던 23년엔 세는 나이 마흔아홉. 딸 둘을 둔 엄마라는 것만 밝혔으니, 독자도 더 알려 하지 말자. 명지전문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2006년에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했다. 책방에서 김이설 검색하면 공저 포함 마흔 권이 올라온다. 나름대로 꾸준히 쓰고 있다. 나이 마흔아홉. 살만큼 산 거 같은 나이. 바로 직전까지 인생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이젠 말과 행동을 하고 싶은 대로 하던 버릇을 조금씩 내려 놓아야 할 때. 김이설은 이 시절의 여성 셋을 호출했다. 미경, 정은 그리고 난주. 소위 경장편. 경장편이 뭔가 하면, 장편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좀 남우세스럽고 그렇다고 중편이라 하기엔 좀 아쉬운 분량의 소설을 말한다. 출판사 자음과모음이 회사의 자랑인 고급 기술력으로 널럴하게 편집해 딱 2백쪽을 넘겼다. 김이설은 2023년 여름에 출판사로부터 경장편 한 편을 의뢰받고 쓰기 시작했는데 이게 말이 쉽지 동력을 얻기가 만만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연재를 할 터이니 미리 읽고 숙제 검사를 해줄 독자를 모집해 이 소설의 초안을 썼다고, 작가 후기에 밝혔다. 재미있는 사람이군. 그렇게 해서 매주 원고지 서른 장을 썼단다.


  김이설은 딱 자기 나이 또래 대학동창을 호출했다. 그래서 당연히 자기의 시절이다. 소위 X세대, 수능 0세대. 수능을 여름에 한 번 보고, 겨울에 또 봐서 둘 중에 좋은 점수를 대입에 적용한 아주 짧은 또는 유일한 학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94학번이다.

  아주 오래 전, 박완서는 “여자 나이 마흔아홉”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엔 2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출산과 육아를 시작해서, 마흔아홉 정도 되면 맏딸이 대학을 졸업해 딱 결혼적령기에 다달았다. 엄마는 딸아이 남자친구와 그 가족의 재산, 학력, 가정, 성격, 외모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둘 사이에 접착제를 붙여주든지 매몰차게 정리를 해주었고, 필요에 따라 아이의 손을 잡고 병원에 일차 왕림해 처녀막재생수술도 받게 해야 했다. 어디서 나오더라? <휘청거리는 오후>던가?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에 출연하는 세 명의 주인공 가운데 난주가 딱 이렇다. 대신 아들만 둘이고, 아이들에게 올 인해 (아이들 말고)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시켰더니 이젠 자기 아내한테만 입이 무거운 남편을 그대로 닮아서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한 달에 용돈주는 날 딱 하루 빼고, 엄마한테 말 한 마디 안 한다. 박완서 시절처럼 아들 일에 말이라도 보태려면 엄마 조언이나 도움 필요 없으니 제발 그만 놔두라고 타박이나 한다. 남편은 직장과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한테만 온갖 정성을 쏟아 한 달에 두어번 넘어 제주도니 동남아니 골프 치러 다니는데 정말 골프를 치러 가는 건지, 친구들하고만 가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젊은 시절엔 질투도 나고 신경질도 나고 바가지도 박박 긁어보았지만, 이제는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될까봐 알고 싶지 않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는다.

  이렇게 제법 사는, 그래봤자 인 서울도 아니고 안양이긴 하지만 겉으로만 유한마담으로 지내면서 난주의 우울증은 째각째각 시간이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결국 병원에 다녀야 했고, 약을 복용해야 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아무 연락도 없이 일주일간 혼자 강릉으로 떠나 숱한 남자와 술을 마셨고, 그 가운데 몇 명과는 섹스를 했어도 마음이 허전한 건 마찬가지였다. 일주일 내내 남편한테, 아들한테 카톡 한 자,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가, 일주일이 되자 남편이 문자를 보내 “둘째 제대할 때까지만 참아주면 좋겠다.”라고 한다. 왜? 제대하면 어떻게 하게? 두 달 있으면 제대하니 그때 헤어지자는 말인가? 군대 있을 때 이혼이라도 하면 아이가 탈영할까봐? 정작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는 난주. 난주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 갱년기 증상이란 것을 알게 된다. 물론 딱 이렇게 한 마디로 하면 재미없다. 그래서 우리는 굳이 소설책을 읽는 거 아닌가.


  정은은 애초부터 여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아빠가 희망퇴직해서 받은 위로금과 퇴직금, 은행 융자를 만땅으로 받아 시작한 사업이 쫄딱 망해서 세 남매 가운데 막내는 대학 구경도 하지 못하고 지금은 어느 동네 사는지 알고는 있지만 연락해본 지도 오래다. 신입생 시절에 연애를 했다가 그애의 어머니와 누나가 삼풍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던 중에 백화점이 무너져 죽었다. 심각한 슬픔에 빠진 남자친구. 그 무거운 상실과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남자친구의 고개를 받아줄 어깨가 너무 무거울까봐 헤어졌다. 그게 남은 시절 내내 크게 후회가 되고 오래도록 창피한 일인 줄은 몰랐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의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적은 연봉을 주는 작은 회사에 다니던 남편은 친정아버지처럼 조기 퇴직을 하고 퇴직금과 은행융자를 받아 키드 카페를 열었다. 사업을 시작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코로나가 닥쳤고, 은행에 이자도 내지 못해 키드 카페를 접었다. 이후 하는 일마다 족족 말아먹기 시작해 이제 거의 모든 거래 은행에 한도에 꽉 차도록 대출을 받은 것도 모자라, 이자와 원금을 갚기 위해 제2 금융권에서 남편이름이 아닌 정은의 이름으로 억대의 대출을 받았는데, 이자 기한이 지나면 정은의 휴대폰으로 독촉전화 또는 독촉메시지가 온다. 이걸 남편한테 전하면, 같은 나이의 남편은 즉각 “미안해요. 내일 중에 처리할 수 있어요. 다음엔 이런 일 생기지 않게 할께요.” 꼭 존대를 붙여 답글을 쓴다.

  친구들한테 가오가 있어서 들어간 계약직 도서관 사서 자리에서는 벌써 잘렸고 지금은 낮엔 학교 급식사로, 밤엔 음식점 주방보조로 일한다는 걸 말하지 못한다. 손과 손가락이 두툼해지고 결 따라 가늘게 갈라진 건 벌써 오래. 원래 없는 사람이 군살은 많은 법이라 허리와 아랫배, 윗배, 가슴, 목, 어디 한 군데 퉁퉁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건 좋은데, 민망하게 오줌을 참지 못한다. 극심한 요실금으로 이제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다고 얼른 가게 되지 않는 진퇴양난. 친구들과 강릉에 오면서도 바지와 팬티, 그리고 잠옷바지는 서너 벌씩 가져온 건 다 이유가 있어서이다. 첫날 밤 잠을 자다가 그만 침대 위에서 요실금이 시작하는 걸 얼른 알아채고 급하게 화장실에 들어가 씻은 다음, 아랫도리를 벗은 채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모습은, 다행스럽게 술에 만땅 취한 친구들이 보지 못했다고 오해한다.


  미경에게 강릉은 저 옛시절의 첫사랑 성희 언니의 고향이다. 94년 겨울에 성희언니 집에서 보낸 시간들. 성희 언니. 한 시절 사랑했지만 결국 다시 남편한테 가버린 사람. 그 시절까지 진지하게 의식화 학습에 몰두하던 언니와는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린 해에 이별하고, 불과 몇 년 전에 죽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삼십대 초반이었을 테고, 심근경색으로 죽을 때는 오십대 초반이었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나이든 성희 언니라니.

  미경은 도서관 사서 관련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다니다가, 취직을 하자마자 언니가 엄마를 맡겨 버렸고, 혼자서는 도무지 아픈 엄마를 돌보며 직장생활을 할 수 없어서, 이모가 사는 보은군 도서관에 지원해 그리고 이사 가서 산다. 바쁘고 급할 때마다 잔정 없고 깊은 정도 없는 이모에게 잠깐 엄마를 부탁할 수 있으니까. 엄마가 어디 특정한 곳이 불편하거나 이상증세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아프다. 아프다고 주장한다. 현대과학이 밝힐 수 없는 고통.

  내가 읽기에 미경은 깔끔하다. 입도 무겁다. 남의 일에 참견하려 하지 않고, 그러기 위해 어떤 사정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다 알고 있다.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표내지 않을 뿐.


  이 세 명의 중년 여성이 강릉으로 길을 떠났다. 스물네 살 시절에 함께 강릉에 간 적이 있어서 이번이 25년 만에, 그저 단톡방에서 습관적으로 시작해본, 우리 그냥 떠나볼까? 난주의 제의에 설마 했던 것이 우연히 뜻이 맞은 거였다. 25년 만에. 25년 전에 강릉에 갔을 때는 난주가 결혼하기 석 달 전이어서 소위 처녀여행, 처녀파티 비슷한 기분을 수도 있었겠지. 그래서 난주가 지나가는 세 명의 남자들한테 3대 3으로 놀자고 제의했고, 여섯 명의 청춘들이 정신이 빠질 정도로 술을 마셨으며, 셋은 평택인가 천안에서 놀러온 남자들과 각자 하룻밤을 보냈는데, 석 달 후에 결혼을 해야 하는 난주가 덜컥, 임신을 해버렸다. 강릉에서 돌아와 한 달이 지나 임신중단 수술을 받은 난주는 모텔방을 대실해 미경을 불렀고, 미경은 전복죽을 싸와 난주에게 먹인 일이 있었다.

  25년이 지난 겨울. 이제 이들에게 젊음이란 지나간 흔적에 불과하다. 스물네 살 때는 마흔아홉이 그렇게 멀리 보이고 생각도 하지 못할 나이였는데, 이제 앞으로 25년 후에 다시 강릉에 온다면 그땐 일흔네 살. 그렇게 멀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어쩌면 당장 다음 달부터 생리가 멈춘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시절을 맞은 세 명은 그렇게 지난 세월을 돌아보고, 지금 세월을 결국 이야기하며, 에라, 술이나 마시자, 옛 방식으로 시간을 때운다. 그것 말고 함께 시간 때우는 법을 25년 오랜 세월 내내 별로 배우지 못해서.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12-31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31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리틀 아이즈
사만타 슈웨블린 지음, 엄지영 옮김 / 창비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사만타 슈웨블린. 이름 슈웨블린Schweblin으로 짐작하면 20세기에 독일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와 정착한 집안인 거 같다. 1978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졸업 후에 소설 쓰기에 전념한다. 2002년에 <소란의 핵심>을 발표해 데뷔했으며 이후 부커상 외국어부문 최종심에 두 번 오르는 등 맹활약을 하면서 국내외의 다양한 문학상을 섭렵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은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문학 객원교수로 지내고 있다. <리틀 아이즈>가 처음 읽는 슈웨블린인데, 2018년 작품으로 번역 기간을 거쳐 2020년에 두 번째 부커 인터내셔널상의 최종 리스트에 올랐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는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지만 미역국 먹은 후에 번역을 해 2021년 창비에서 나왔다. 창비는 책의 띠지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올 겨울에 어울리는 단 한 권의 SF∙공포소설

  스산하고 고요하게 숨통을 조여오는 서스펜스”


Samanta Schweblin


  출간 전에 창비_인스타를 통해 가제본 본을 독자에게 뿌렸으나, 무료로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 놀랍게도 인터넷 책방 독자리뷰에 만점을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서 띠지에 어떻게 쓰인 지 모르는 상태에서 읽었건만, 이걸 SF∙공포소설이라고 주장하면 거 참, 게다가 숨통을 조여오는 서스펜스 우짜고 한 건 그저 웃자고 했던 일 같다. 우리 모두 다 함께 웃자고.


  처음엔 나름대로 긴박하고 경박하게 흘렀다. 장소는 미국 인디애나주의 사우스벤드라고 하는 작은 마을. 동네에 요주의 인물로 점 찍힌 맹랑한 고등학생 카티아와 에이미의 그룹에 새롭게 로빈이 들어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셋은 피의 맹세를 하고 평생 함께 할 것임을 기념하기 위한 의식으로 서로 자기 가슴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리하여 부모가 직장에 간 틈을 이용해 로빈의 집에 가서, 넓은 거실에 모여 앉았고, 로빈이 조금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쫄기는 싫어서, 셋 모두 훌러덩, 브래지어를 풀렀더니, 덜러덩, 가슴이 아래로 툭 떨어졌는데, 이걸 향해 서 있던 동물 인형의 눈이 깜빡, 하는 순간 카메라에 찍혀버렸다. 카티아가 인형한테 누구 가슴이 제일 예쁘니? 하고 물어보고, 로빈이 위저 보드의 알파벳을 가져오니까 인형이 단어를 조립해 만들어 보이기 시작한다.

  “금발”

  카티아가 당연한 결과라는 듯 자랑스럽게 웃었으나, 저런 저런. 인형은 계속 글자를 만들어 나간다.

  “개 같은 년들.”

  셋은 학교에서 생물 수업을 함께 듣는 좀 모자란 욍궁둥이 수전을 입에 올리며 걔를 왕따시키는 건 물론이고 어떻게 돈까지 갈취할 것인지 따따부따 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자기들이 몹쓸 짓을 하고 있어서 욕을 먹을 만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욕을 듣는 거하고는 다른 일이니까. 인형이 글자를 조립하는데:

  “너희는 내게도 돈을 줄 것이다. 녹화된 가슴 한 쪽에 400 총 2,400달러”

  아이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로빈도 억지로 웃는 시늉을 했다. 에이미가 누구한테 받을 거냐고 물으니까, 인형은 또다시 단어를 쓰기를,

  “돈을 주지 않으면 가슴 영상을 수전에게 이메일로”

  이제 심각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형은 계속 쓴다.

  “나는 똥싸는 로빈 엄마와 자위하는 로빈 여동생 영상도 가지고 있다. 각 6장씩.”

  여태 인형 또는 애완동물 겸해서 스스로 움직이는 동물 인형을 집안에 갖춰 놓았더니, 세상에나, 이게 특정 앱으로 연결된 사람의 명령에 의하여 움직이는 장치였던 거다.


  ‘켄투키’라고 부르는 이 인형의 외형은 두더지, 토끼, 까마귀, 판다, 용, 부엉이 등이고, 몇 번째 버전인지는 모르겠으나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아르헨티나 멘도사 여자 알리나는 멕시코 비스타르모사에서 지낼 당시 신품을 279달러 주고 구입했다. 알리나 같은 사람을 ‘켄투키의 주인’이라고 하자. 반면에 스페인어를 쓰는 라틴아메리카의 아줌마 에밀리아는 고액의 연봉을 받고 홍콩으로 일하러 간 아들이 상당한 돈을 주고 얻은 IP를 통해 독일 중부의 에르푸르트라는 작은 도시에 사는 코걸이를 한 아가씨 에바의 켄투키와 연결을 했다. 스스로 인형이자 관찰자 켄투키가 ‘되는’ 대가였다. 즉, 알리나는 켄투키가 있는 공간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 위하여 279달러를 주고 인형을 샀으며, 엄마 혼자 두고 홍콩에 돈 벌러 간 에밀리아의 아들은 엄마가 심심하지 않게 다른 사람이 사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도록 돈을 지불한 것. 책의 제목 ‘리틀 아이즈’는 인형의 얼굴에 박힌 조그만 두 눈알을 의미한다.

  별의 별것을 다 보겠지?

  제일 앞에 나오는 불량소녀 예비자 로빈의 집에 있던 켄투키는 보아하니 초기 모델 같은데, 그게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켄투키 주인이 켄투키가 된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은 채 엄마는 화장실의 문을 열어 놓은 채 용변을 보았으며, 여동생은 켄투키가 옆에 있거나 없거나 그냥 자위를 해버렸고, 불량소녀 셋도 켄투키 앞에서 훌러덩 브래지어를 벗어 던져버렸다. 켄투키가 된 사람은 원격지에서, 지구 반대편일 수도 있는데,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그걸 다 보면서 녹화를 떠 놓았고 그걸 빌미로 이제 로빈에게 2,400달러, 약 3백만원을 갈취하려 하는 거다.

  뒤에 보면 녹화를 뜨기 위한 소프트웨어는 앱이 지원하지 않는다. 개발자가 이런 경우도 예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요가 방법을 창출하는 법. 사람들은 곧바로 태블릿의 장면이나 영상을 휴대폰으로 다시 찍거나 녹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켄투키가 된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에밀리아 같은 경우엔 자기 주인 에바가 잘 생기기는 했지만 좀 지저분하고 면도도 며칠 안 한 거 같고, 털이 숭숭한 거구의 애인 클라우스와 짙은 밤을 보낸 아침 둘 다 홀랑 벗은 채 거실을 돌아다녀도 클라우스의 큼지막한 음경도 모른 척하려 애쓴다. 반면에 에바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클라우스가 에바의 지갑을 뒤져 지폐 몇 장을 꺼내는 걸 본 순간에 돌변, 어떻게 하면 에바에게 클라우스가 돈을 훔쳐간 걸 알려줄 수 있는지 갑작스런 흥분에 휩싸인다. 자기가 보기엔 명백한 절도행위니까. 독일 에르푸르트 경찰서 전화번호도 찾아보고, 에바의 집을 둘러보다가 알게 된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도 하고.

  이런 경우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사는 그리고리도 마찬가지여서, 이 청년은 전문적으로 IP가 날아간 켄투키의 IP를 새로운 ‘켄투키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판매를 하고 있는 일종의 중개상인데, 일을 하다가 브라질 북부의 외딴 마을에서 납치, 유괴된 아이를 발견하고는 구출해주기 위해 아이의 엄마, 관계 경찰서에 신고를 하는 등 갖은 애를 쓴다. 그래서 아이가 탈출에는 성공하지만 혹시 켄투키의 이런 기능을 이용해 아이의 부모가 자기도 모르는 돈벌이를 한 건 아닌지 조금은 의심하면서, 아직은 법 테두리를 벗어난 건 아니지만 일종의 범죄일 수도 있는 IP 중개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는 일도 있다. 세상에는 언제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거거든.


  다른 거 다 놔두고, 정말로 자기 집 안에 자신과 가족 모두를 관찰할 수 있는 타인의 눈을 두고 싶어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그렇게 많을까? 작 중간 이후에는 켄투키가 전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하는 걸로 설정이 되어 있는데, 나는 좀 회의적이다. 아직 화상전화가 일상수준에 오르지 않은 일.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이다. 변기에 앉아 유튜브 보며 매화타령을 하고 있다가 마침 힘차게 방귀가 나오기 바로 직전에 전화벨이 울렸고, 습관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른 순간, 같이 도봉산에나 가자고 좋은 마음으로 바깥 사돈이 전화를 준 것이었는데 아뿔싸 하필이면 이때 아까 나오려던 힘찬 방귀가 진동을 해버렸으면 그걸 어째? 아니면 덥디 더운 여름날 윗도리를 벗고 소파에 앉았는데 전화가 오면, 전화 한 통 받자고 허겁지겁 와이셔츠 입고 넥타이 메고 슈트 찾아 입어야 하는 거야? 최종 면접 보고 결과 기다리는 회사에서 온 전화일 수도 있잖아. 그런데 집안에, 켄투키가 된 인간이 접속을 했으면 어떤 시간이든지 자기 사생활을 거의 완전히 노출해야 하는데 말이지. 이게 가능하다는 전제부터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건 말았건 간에.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4-12-30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화타령에 빵 터졌습니다. 그 어찌 나랏님 거시기를...ㅋㅋㅋ
근데 가제본 받은 사람들 조차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니 거 참...

Falstaff 2024-12-30 11:32   좋아요 1 | URL
예전에 어른들이 많이 얘기하지 않았나요, 매화타령? ㅋㅋㅋ
창비는 안 그럴 거 같았는데, 책 팔아먹기 전에 가제본 판을 먼저 뿌리더라고요. 영숙이 <아빠한테 갔었니?> 시절부터 그러기 시작한 거 같은데, 좀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뭡니까, 모양 빠지게. 하긴 창비도 옛날 창비지 지금이야 뭐 창피잖아요, 창피. <창작과 개피>
 
날개 달린 두약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32
구레이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작년 늦가을에 구레이를 처음 읽고 1년만에 또 구레이를 읽는다. 전에는 멀리 떨어져 살지만 이젠 고속열차가 생겨 80분이면 도착하는 허베이성의 늙은 아버지와 베이징에서 전동칫솔 사업을 하는 아들과의 관계, 참 오랜 세월지지고 볶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그린 <물이 흘러내린다>이었고, 이번엔 아버지가 죽어 제사를 지내는 와중에 왕년에 춤선생을 하던 병든 어머니와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온 아들 나생羅生의 서걱거리는 관계를 묘사한 <날개 달린 두약>이다. 두약杜若은 어머니의 이름 ‘방두약’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75세의 모친. 반백 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한 집에서 산 부부답지 않게 모친은 죽어 누워 있는 고인에게 별로 정도 없고, 애틋하지도 않고, 애도하고 싶은 마음도 나지 않으며, 전혀 슬프지도 않다. 오히려 조문객이 올 때마다 빈소 위에 향을 살라 향 연기를 맡을 때마다 눈물도 나고, 콧물도 나고, 조금만 심해도 기침을 콜록거리는데 이때마다 요실금으로 요도에서 티스푼 두 개 이상의 오줌이 질금, 새 나온다. 심할 때는 한 큰 술 15cc까지 왈칵. 그리하여 방두약 여사가 입을 만한 바지는 다 냄새가 나고, 젖어 있어서 입을 것도 없다. 75세라 무릎이 말을 듣지 않아 재채기할 때마다 화장실 드나들기도 힘들어 딸도 아닌 아들을 부른다. “나생아! 얘가 어디 갔어? 나생아, 내 말 안 들리니?” 그래서 대답을 하면, “요강 좀 가져와라.” 요강을 침대 뒤편에 놓으면 내려와서 졸졸졸, 한 시절 수돗물을 쏟던 것 같은 맹렬하고도 맹랑한 음향 대신 이젠 일흔다섯의 노파답게 졸졸졸 흘리다가 바지 올린 힘도 없어서, 나생아, 다시 아들을 불러 바지를 추켜달라고 하는 방여사.

  평생 아내한테 다정다감하게 이야기해본 적도 거의 없고 그저 방에 틀어박혀 책과 신문과 잡지와 하여간 뭔가를 읽고, 뭔가를 쓰기만 하던 남편이 죽었는데 뭐 내가 슬퍼하거나 좋은 곳으로 가라고 빌어줄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방두약 여사는 자신이 생전에 부조, 부의금을 특정 집안에 얼마를 했으니, 그이도 이번에 적어도 몇 위안의 부의금을 내야 마땅할 터, 얼마나 가져왔나, 이것이 궁금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겠지. 오랜만에 아들이 왔으니 오히려 더 힘이 없어 보이고 싶고, 실제보다 훨씬 약해 보이고 싶은 마음. 지 아비를 닮아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이런 어미한테 무뚝뚝한 친절이라도 지가 도리상 베풀지 않을 수 있어? 하는 마음. 거기다 하나 더. 문상객이 오면 문상이나 하고 부의금 내고 그냥 가면 되지, 꼭 여사를 찾아서 애도를 전하는 인간들한테는 자신이 얼마나 깊은 슬픔에 싸여 있고, 평소에 늙은 부부가 서로 얼마나 의지를 하며 살았는지, 또한 죽어 누워있는 남편과 방두약 여사와 아들 나생이 지극하게 화목한 가정이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때문에 문상객이 오면, 주로 방여사 젊은 시절에 여사한테 춤을 배우던 학생들이었는데, 춤이라 해도 정식 중국춤이나 현대춤 말고, 공장 다니던 여공들 가운데 제일 나이도 많고 춤도 잘 추던 여사가 어린 또는 젊은 여공들에게 춤을 가르쳐준 수준이기는 하지만, 제자 앞에서 아들 나생이 자기한테 얼마나 잘 해주는지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깊다. 그리하여 자기가 오줌 눈 요강을 씻어 오라고 부탁이 아닌 지시를 하고, 이를 짐작한 아들도 아무 대꾸 없이 씻으러 가는 걸, 이렇게 씻어라, 저렇게 씻어라, 요강 앞에 표시난 곳을 위로 해서 두어라, 별의별 사소한 것까지, 차마 식모한테라도 그러지 않을 잔소리마저 쏟아낸다. 나생은 장례식만 끝나 훌쩍 떠날 것이니 이 지긋지긋한 잔소리와 의무를 후딱 해치우기는 하는데, 이게 그리 오래갈 것 같지는 않지?


  그런데 극작가 구레이로 말할 것 같으면, 베이징공과대학과 대학원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후 제약회사의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무대의 꿈을 버리지 못해 극작과 연출의 세계로 뛰어든 인물이다. 자기가 쓴 극작을 자기가 연출해 무대에 올리기 위해 직접 극단도 만들어서. 나도 대학 다닐 때 물리학과에 다니며 연극에 빠져 살던 친구한테 힌트를 얻어 희곡을 읽기 시작했지만, 21세기의 소장 작가군에 든다는 구레이는, 내가 단 두 작품만 읽어보아 확언할 수는 없지만, 처음엔 그리 심각하지 않게 시작했다가 점점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는 것까지는 당연한데) 도무지 설핏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방두약 여사는 일흔다섯 살을 만나 뇌졸중을 겪고 있는 상태라 의식이 좀 혼미하다. 문상객이 가져온 부의금 봉투를 열어 금액을 확인하며 좋아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화려했던 젊은 시절이 눈에 보이고, 그때 그 장면이 젊은 배우들이 나와 (상중임에도) 젊은 두약과 함께 실제로 춤을 추기도 하며, 당시의 멤버이지만 이미 고인이 된 아가씨 역시 등장하는 등, 관객과 독자 입장에선 눈 앞에, 머리 속 무대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 어떤 상황인지 매우 애매해진다. 눈알을 크게 뜨고 활자를 하나하나 다시 읽어봐도 마찬가지. 이럴 때는 얼른 책 뒤로 넘어가서 해설을 읽어보는 것이 제일 낫다.

  작품은 두 가지 스토리로 나뉘어 전개된다. “하나는 젊은 방두약의 춤, 친구들, 딸의 죽음, 그리고 남편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아이(어린 시절 죽은 딸 나잉잉)가 읽어주는 소설 속 노인과 모친의 오버랩이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상가집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것들, 내가 앞에서 말한 향냄새, 요실금, 부의금 금액 같은 거 말고, 후반부 들어 관객과 독자를 헛갈리게 만드는 요인이 두 가지라는 것인데, 이게 굳이 관객과 독자를 이해시키고자 하지 않는다. 관점은 오직 하나. 작품의 주인공인 방두약 여사의 관점이다. 그래서 결국엔 돌이키지 못하게 망가져버린 가족간 관계이기는 하지만 한때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까지 포기했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거다.

  대개 이런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옆에서 함께 연극을 본 친구가 “어땠어?” 하고 물으면 도무지 할 말이 없다. 분명히 한 편 잘 보고 재미도 있었는데 그걸 언어로 만들어 대답하기가 쉽지 않은 경험은 다들 한두 번씩 가지고 계실 듯. 이 작품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구레이는 한 작품을 공연할 때마다 디테일을 계속 수정해간다는데, 아마도 대본을 수정할 때마다 관객들은 조금씩 더 미궁에 빠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연극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장땡이다.


.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4-12-27 0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사만타 슈웨블린, <리틀 아이즈>
화요일. 김이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목요일. 스타니스와프 렘, <우주 순양함 무적호>
금요일. 티파니 D. 잭슨, <그로운>

자목련 2024-12-27 09:20   좋아요 0 | URL
한국 소설을 선택하는 기준 같은 게 있으실까요?
문득, 궁금해서요^^

Falstaff 2024-12-27 12:04   좋아요 1 | URL
거르는 작가들이 많습니다. 요즘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작가들도 거의 다 한 권 씩 읽어본 거 같은데요, 어떻게 두 번 읽게 되지는 않더군요. 한 엄마 배에서 나온 씨 다른 형제 자매들 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작가들은 탐색중입니다. 출판사를 보고, 미리보기 통해서 문장을 어떻게 쓰는가도 보고 뭐 그렇습니다. 특별한 건 없고요. 다들 비슷하시리라 생각합니다.

yamoo 2024-12-27 17:49   좋아요 0 | URL
공선옥 작가의 작품들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Falstaff 2024-12-27 17:52   좋아요 1 | URL
공선옥은 제가 63 토끼 여사님들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이이 막 서른 됐을 때부터 좋아했으니까 찐팬 맞습니다.

hnine 2024-12-28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큰술 15cc... 본문에도 그렇게 써있나요? ㅋㅋ 작가 경력을 보니 이해가 갑니다.
혹시 제약회사 재직 시절 요실금 관련 연구를 했던 경력이 있는 건 아닌지.
그러니까 이 책의 주인공은 아들이 아니라 두약 여사님이신 건가요?

Falstaff 2024-12-28 17:44   좋아요 0 | URL
설마 본문에 그게 나왔겠습니까. 걍 제가 쓴 겁니다. ㅋㅋㅋ
넵. 방두약 여사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네요. ^^
 
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보리스 빅토로비치 사빈코프. 복잡한 인물이다. 1879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에서 바르샤바 지역 군사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8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생폭동 또는 학생 파업에 가담해 1899년에 퇴학당한 후 나중에 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했다. 일찌감치 사회주의 혁명에 뜻을 두어 숱하게 체포, 구금, 유배, 탈출을 반복한 그는 1904년 러시아제국 내무부장관 비체슬라프 폰 플레베와 1905년 모스크바 총독 새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왕자의 암살, 폭탄테러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세바스토폴 감옥에서 간수와 옷을 바꿔 입고 유유히 탈출에 성공한다고, 이때 대신 감방에 머문 간수가 사빈코프로 오인받아 교수형을 받았다고 위키피디아에 나오는데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다. 하여간 이 테러 이후 사회주의 혁명당 테러리즘 분과는 점점 힘을 잃었고 사실 테러의 필요성이나 지지도 현격하게 줄어든 상태였다. 탈옥 후 프랑스로 망명을 떠난 사빈코프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에 입대했지만 1917년 2월 혁명 이후 급하게 러시아로 귀국했다. 1917년 2월 혁명, 율리우스력으로는 3월 8일에 발생한 혁명으로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러시아 공화국이 들어섰으나, 사실상 정부는 무주공산. 유럽 각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서로 권력을 먼저 차지하기 위하여 급거 귀국길에 올랐으며, 그 유명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봉인열차도 이 시기에 있었던 일인데, 같은 기차를 타지는 않았지만 레닌, 트로츠키, 제르진스키와 동시에 러시아 땅을 다시 밟았다.

  1917년 러시아 공화국의 임시정부에서 남서부 (내전) 전선의 위원과 잠깐 전쟁부 차관보로 지내기도 한 사빈코프는 쿠데타에 가담한 혐의로 관직에서 떨려나가고 사회주의 혁명당에서도 퇴출당한다. 이후 10월 혁명을 거쳐 볼셰비키가 권력을 차지한 다음에는, 도무지 뜻을 같이 할 수 없는 볼셰비키에 저항하는 무장세력, “조국과 자유 수호 연합”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건 엄연히 반혁명 세력으로 혁명의 대세를 무시한 대가로 조직은 와해되고 사빈코프도 다시 유럽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폴란드와 소련의 전쟁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폴란드 정부에 의하여 다시 추방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계속했다. 역시 정점을 찍는 그의 뻘짓은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에 가담해 볼셰비키에 맞서 싸웠다는 점일 것이다. 볼셰비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해도 명색이 테러리즘을 주장하고 실천했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선봉에 섰던 아나키즘의 대표적 인물이 어찌하여 러시아 부르주아 잔재들과 뜻을 합칠 수 있었는지, 나도 이 대목에서 헛웃음만 나왔다.

  영국의 비밀정보국과 은밀한 협력을 하고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존경의 찬사를 보내기도 한 사빈코프를 소련 비밀경찰은 내버려둘 수 없었을 터. 1924년에 소련 보안당국은 한때 사빈코프의 공모자들을 이용하여 그를 소련으로 유인해 체포, 기소하여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으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10년형으로 감형, 모스크바 루비얀카 감옥에 구금했다. 이곳에서 공식적으로는 사빈코프가 교도소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해 삶을 마감했다고 발표했지만, 사실은 스탈린이 사빈코프를 과하게 인간적으로 대하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자 국가안보부 요원들이 그를 창밖으로 집어 던진 거 아닌가, 이런 의혹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보리스 빅토로비치 사빈코프는 전형적인 귀족출신의 혁명가였다. 젊은 시절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테러리즘에 경도하다가 정작 혁명이 발생하여 콩고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걸 볼셰비키들이 다 차지할 것처럼 보이니까 여태 자신의 투쟁 대상이었던 부르주아, 귀족들과 합세해 반혁명 세력으로 당당하게 백군의 기치를 들고 내전에 임한 인물. 그는 러시아 지역에서 테러의 중요성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으며 스스로도 더 이상 테러작전을 수행할 동력을 상실했던 1909년에 롭쉰이라는 필명으로 <창백한 말>을 출간하여 테러리즘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다. 비록 사빈코프가 적극적으로 주창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이는 무정부주의를 지지하면서 볼셰비키 소비에트에 반대하느라 정신없었던 인물을 우리는 한 명 알고 있다. <카탈로니아 찬가>에서의 조지 오웰. 결국 오웰의 의견이 옳은 것으로 판명이 되긴 했지만 당장 프랑코 파시스트군과 전투를 앞둔 상황에서, 적이 눈 앞에 도사리고 있는데 오히려 총구를 거꾸로 들고 볼셰비키만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린 일을 나는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면에서 사빈코프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아무리 그렇다고 백군에 가담해?


  그러나 작품 <창백한 말>은 제법 근사하다. 문장이 간결하다. 암살용 비수 같다.

  작품은 모스크바가 고향인 러시아 출신의 테러리스트가 쓴 일기 형식의 기록이다. 일기니까 화자는 당연히 ‘나.’ ‘나’는 190X년 3월 5일 저녁에 대영제국 국민이자 엔지니어, 조지 오브라이언이라는 이름으로, 터키와 러시아를 여행할 목적이라는 명목 하에 1등칸 열차를 타고 도착했다. 3킬로그램의 다이너마이트를 직접 들고. 폭탄을 가지고 왔다는 건 작품 초반에 등장인물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실제로 지금 ‘나’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모스크바 총독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공을 처단하기 위하여 ‘나’를 연모하는 화학자 에르나도 조직원의 한 명인데, 이이가 맡은 일이 폭탄을 만드는 것이며, 작품 속에서도 폭발의 위험을 무릅쓰고 폭탄제조 광경이 소개되기 때문이다. 하늘색 눈동자에 굵게 땋아 내린 숱 많은 머리카락을 가진 에르나를 ‘나’ 조지는 “오래 전에 내게 몸을 맡긴 여자”라고 소개한다. 에르나는 조지를 사랑하지만 조지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젊은 장교의 스무살 먹은 젊은 아내이자 분방한 사랑을 향유하고 있는 옐레나라는 여성한테 빠져 있다. 그래도 조지는 에르나와 키스하고, 함께 잔다. 물론 언젠가 자신과 함께 할 것이라는 에르나의 기대도 냉담하게 무지르고 만다. 조지에게 삶에서 중요한 건 없다. 어떻게 보면 거의 완벽한 허무주의자. 그래서 테러리즘에 그토록 빠져들 수 있겠지.

  조지를 팀장으로 하는 테러 소집단은 모두 다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지와 에르나, 그리고 세 명의 승용마차 마부 표도르, 바냐, 하인리히. 공장 직공 출신 대장장이였던 표도르는 아내가 황제의 공권력에 의하여 살해당했다. 하인리히는 대학에 다니다가 사회주의의 승리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 테러리즘에 합류했고, 바냐는 종교적 이유로 좀 복잡하다. 에르나는 사는 일이 수치스럽다는 것이 내세우는 이유다. 조지는 앞에서 말한대로 허무주의자. 그는 테러의 대상인 모스크바 총독을 전혀 증오하지 않고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총독은 오직 그에게 반드시 죽여야 하는 대상일 뿐. 무엇을 위해? 테러 자체와 혁명을 위해. 테러 자체를 위한 테러. 이게 조지의 삶의 이유. 실제로 중앙위원회에서 안드레이 페트로비치라는 노 혁명가가 페테르부르크에서 3등 열차를 타고 직접 모스크바에 도착해 조지에게 총독 암살을 당분간 미루라고 해도 그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다. 일단 살인의 마음을 정하고 그것이 테러 자체를 위한 일이라고 단정했으면, 자신과 동료의 목숨을 걸고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인물이다.

  이런 조지가 변해야 <창백한 말>은 끝난다. 어떻게 변할까? 그저 힌트만. 종교적 이유, 사랑과 희생에 관한 성서적 담론을 입에 달고 다니는 바냐. 그리고 조지가 사랑하지만 결코 조지만 사랑하는 건 아닌 유부녀 옐레나. 이 두 명을 통해. 그리하여 결국 중앙위원회에서 임무를 준 테러를 깨끗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뻔한 내용이지만 거기까지 끌고 가는 문장의 힘이 단단하다. 여지없이 암살자의 칼날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