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장 세계문학의 숲 11
샤오홍 지음, 이현정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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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사의 장>은 2018년 여름에 샤오홍의 새까만 후배 극작가 티엔친신(田沁鑫)의 희곡<생사장生死場>으로 읽었다. “낳고 살고 죽는 마당.” 재미도 있어서 읽자마자 곧바로 도서관 검색해 관심도서 등록하고, 그땐 퇴직 전이라 그러고 말았다가, 이제 남는 건 시간밖에 없는 세월이 닥쳐 정말 읽어보려고 하니까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건만 책이 낡아서 차일피일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단편집 《가족이 아닌 사람》을 읽어봤지만 흥미유발에 성공하지 못했던 것도 이 책 읽기를 오래 머뭇거리게 만든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오늘 진짜로 읽기를 끝낸 순간 드는 마음은, 진작 읽어볼 것을.


  책을 열면 서문이 나온다. 이렇게 시작한다.

  “4년 전의 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2월에 나와 처, 아이는 상하이 자베이(閘北)의 전화 속에서 피난으로 혹은 죽음으로 인해 중국인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후 화자 ‘나’도 상하이의 영국인 조계지로 피난을 가 비교적 안전하게 중국-일본 전투 시기를 평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고 썼는데, 이게 “서문”이란 챕터로 중편소설 <생사의 장>을 시작하는 걸로 오해해 본격 감상 무드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이 소설의 원고가 내 책상에 도착한 것은 올 봄이었다.”

  흠. 좋아. 화자는 남자 가장으로 소설가가 직업인 사람이고, 누가 원고를 주어 소개한다는 형식을 취한 것이로군. 이렇게 읽어갔는데, 아뿔싸, 이건 말 그대로 서문, 샤오홍의 본문이 나오기 전 앞에 붙인 서문introduction이었던 거다. 좋다. 계속 읽었다. 드디어 서문이 끝나고 이 글을 쓴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헉, 루쉰이다. 1935년 11월에 써주었단다. 샤오홍이 1934년에 탈고하고 35년에 루쉰이 도와주어 출간할 수 있었던 작품으로, 샤오홍의 대표작품이 되었다고. 저 내몽고 지역인 하얼빈 근동 지주집에서 낳았지만 여자아이라는 것 때문에 대강 키워 싸가지 없는 청년한테 시집보내 인생 망가뜨리고, 일본에 유학해 거기서 공부한 공산주의에 경도된 상태로 돌아와 글을 쓰는 한편 나름대로 사회운동에도 참여하다 서른한 살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 작가.

  대표작인 <생사의 장>은 샤오홍(蕭紅)의 고향인 중국 동북지방에 크지 않은 강이 인접한 농촌마을을 무대로 작은 사람들의 생로병사를 다루고 있다. 작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덩치가 작은 종족을 말하는 게 아니고, 실제로는 중국에서도 동북 사람들 덩치가 제일 크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가진 거 없는 서민, 소작인, 약자를 일컫는다.

  대강 둘러봐도 집 앞에 백양나무가 있는 꾀죄죄한 집에 사는 절름발이 농부 얼리반과 머리 속에 볼트 너트가 한 개 정도 빠져서 도대체 원한 같은 걸 품지 못하고 생각이 우왕좌왕하며 돼지소리 같은 목소리를 지닌 곰보댁 부부. 이들 사이에 나서 전봇대 보고 고무래정丁자도 모르는 아들 오다리 가족. 소 기르고 농사 짓는데 만족하지 못해 시내 나가서 발전적인 일을 해 볼 요량으로 아들과 함께 작은 닭장을 일컫는 ‘어리’ 장사를 시작했다가 나중엔 재고만 쌓는 자오싼. 자오싼의 아내이기는 하지만 전남편이 하도 두드려 패는 바람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데리고 무작정 가출을 해 다른 남자하고 살다가 살기가 하도 팍팍해 이번엔 자기 몸만 빠져나와 3혼 중인 아내 왕씨 아줌마. 자오 집안의 아들 핑얼은 진짜 아들이 아니고 이른바 개구멍받이 같아 보이는 사생아라서 어린 말과 늙은 어미 말 사이의 교류를 이해하지 못한다.

  지주댁 둘째 아들 나리가 소작료를 올려 받으려 하자, 자오싼은 동네에서 (좋은 쪽으로) 왈짜라고 볼 수 있는 리칭산을 비롯, 젊은 축 몇몇과 함께 낫을 시퍼렇게 갈아 지주댁을 습격하려는 모의를 하기도 한다. 이를 알게 된 왕씨 아줌마는 세번째 남편한테 어디서 구했는지 구식이긴 하지만 소총 한 자루를 내주기도 하는데, 이거야말로 돼지 목의 진주 목걸이, 개 발의 편자. 자잘한 좀도둑이 들자 배나무 몽둥이로 종아리를 후려치는 바람에 좀도둑의 다리가 몽당, 하고 부러져 버렸다. 이 바람에 시내 유치장에 들어간 것을 지주댁 둘째, 웬수 같은 둘째 도련님이 힘을 써 풀어내고, 집에 있는 황소를 팔아 반은 합의금으로 쓰고, 반은 둘째 도련님이 활동비로 쓴 걸 갚아줬다. 풀려나오자 마자 자오싼 선생의 몸과 눈에서 독기도 함께 스르르 풀어져 늙어 죽을 때까지 젊은 시절 낫과 총을 들었다 놓은 추억만 곱씹으며 사는 인생으로 변한다. 뭐 그렇게 사는 거지 세상 사람들 전부 혁명가일 수 있나?

  엄마하고 둘이만 사는 진즈는 조막만한 자기네 밭에 토마토를 키우는 처녀(였던 젊은 여성). 동네에 청예라는 멋진 이름의 청년이 있었는데 삼촌인 푸파와 함께 살았다. 푸파 삼촌이 젊은 시절에 물고기 잡는 일을 했다가 마침 눈에 쏙 들어오는 아가씨가 있어서 어느 날 하루 날을 잡아 아가씨 손목을 잡아 끌어 마구간으로 들어가서, 만리장성을 쌓았고, 이게 처음 벽돌 한 장 올려놓는 일이 힘들지 그 다음부터는 일도 아니어서 몇 번 또 얼렀더니 중국인의 위대한 번식력은 숨길 수 없었던지 그만 아가씨 배가 볼록 튀어나오기 시작해버렸다. 그리하여 지금 숙모는 집에서 엄마한테 실컷 두드려 맞은 다음에 급하게 매파를 넣어 푸파한테 시집을 온 것. 그땐 푸파 청년이 늘 살가울지 알았겠지.

  청예의 숙모가 청예에게 말한다. 내 짐작에 그 처녀가 아이를 뱄을 거 같은데? 처녀한테 장가들려면 시간이 없어. 서둘러. 시집을 오면 그 처녀도 변할 거야. 안색도 어두워지고 너도 그애를 마음에 두지 않게 될 거야. 때리고 욕하게 될 걸!

  아니나다를까, 청예는 진즈가 시집온지 넉 달 만에 낳은 딸 작은 진즈가 하루종일 빽빽거리며 울기만 한다고 집어 던져 모진 세상 그만 살게 만들어버린다. 그런 서방새끼를 견디지 못한 진즈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고. 하지만 누가 먹여살려? 진즈는 하얼빈으로 나가 삯바느질을 하다가 가장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인 몸을 팔기도 하며 1위안을 마련해 얼른 돌아오지만, 돈을 본 엄마는 하루가 지나자 다시 서둘러 하얼빈으로 돌아가서 돈을 더 벌어오라고 한다. 인생이 다 그렇다. 우라질.


  20세기 초반의 중국 동북지역하면 잊지 못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폐 페스트의 창궐.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주 괴뢰국의 탄생. 폐 페스트가 먼저다. 이쪽 동네에 샤오홍의 새까만 후배 작가가 있어서 내가 좋아하기로 결심했다. 츠쯔젠. 이이가 쓴 장편소설 <백설 까마귀>가 폐 페스트의 창궐과 이에 대항해 싸우는 하얼빈 시내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이얼구나 강의 오른쪽> 뒷부분에 대 일본 전쟁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눈이 더 번쩍 띄었을 지도 모르지. 아니, 아마 그랬을 걸?

  샤오홍의 이 촌동네에서도 폐 페스트가 창궐해 하얼빈에서 무릎까지 오는 긴 흰 옷을 입고 하얀 마스크를 쓴 외국 사람이 동네에 일차 왕림을 해 사람들에게 주사 치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벌써 병에 걸려 강력한 항생제를 주사해도 겨우 살똥말똥한 아이들한테 결코 주사를 맞추려 하지 않는 주민들. 엉겁결에 붙들려 주사를 맞고 역병을 피해 어떻게 이렇게 재수없을 수 있을까 한숨을 쉬지만 결국 그래서 역병을 피한 사람들 이야기. 하여간 이 동네에서도 숱한 사람이 죽어 나간다. 그래서 지주가 소작인들한테 허용한 소작인들을 위한 땅, 공동묘지에 사이좋게 묻힌다. 비록 들개가 어슬렁거리면서 시신을 파내 오도독뽀도독 뼈 채 갉아 먹어버리기는 하지만서도.

  이런 와중에 봄이 오면 개구리, 두꺼비, 남생이 같은 양서류, 포유류부터 시작해 돼지, 암소, 개, 고양이 그리고 사람까지 줄줄이 새끼를 낳기 시작한다. 역병이 들어 죽어 묻히는 동시에 악을, 악을 쓰며 낳아 놓으면 또 상상을 초월하게 높은 영아사망율로 눈물바람을 하고. 그래서 낳고, 살고, 죽는 마당, 제목이 생사의 장이 되는 것이겠지.

  여기서 끝나면 말도 안 한다.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이에 대항하는 무력단체가 비 온 다음 날 죽순 돋듯 생기는데, 이게 진짜 저항군인지, 비적단인지, 저항군이면 혁명군인지, 민국군인지 우매한 백성들은 구별도 못하고 그냥 들어가 버리고, 하여간 누군가와 싸우다 죽어버리고, 그렇게 죽은 청년들의 어머니는 너 없는 세상, 내가 살아서 뭐하리, 진득하고 쓰디쓴 독을 먹고 명을 재촉한다.

  하여간 눈물이 앞을 가리는 참상. 그땐 다 그랬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샤오홍도 그래서 작품의 제목을 생사의 장이라 한 거겠지. 이이는 천생 단편작가이다. 이 중편 정도의 소설 <생사의 장>도 단편 분량의 에피소드가 연속적으로 펼쳐져 읽기에 수월하고 절대분량도 많지 않다. 하루 뚝, 하면 책 다 읽고 독후감도 쓰고 쐬주도 한 잔 마실 수 있다. 독후감 다 썼으니 나도 이제 나가서 돼지 가브리살에 쐬주 한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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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1-10 0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레오 페루츠, <심판의 날의 거장>
화요일. 백승연, <함수의 값: 잎이와 EP 사이>
목요일. 힐러리 맨틀, <시체들을 끌어내라>
금요일.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표범>
 
내 삶의 예쁜 종아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575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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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열 달 만에 다시 황인숙을 읽었다. 사실 이 황인숙이 혹시 그 황인숙인가 싶었지만 그렇지 않겠지, 그렇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서가에서 뽑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뿔싸, 처음엔 잘 나가다가 중간부터, 아오, 다시 유기 들고양이 밥 주는 괭이 엄마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괭이 밥 주지 말라는 동네 늙은 남자, 난닝구만 입은 영감탱이한테 이 루저, 루저, 루저, 루저야! 이런 욕밖에 할 줄 모르는 대졸 루저 시인. 자치 시에서도 유기동물한테 밥 주지 말라잖아. 그럼 주지 말아야지 뭘 잘났다고 없는 살림에 비싼 고양이 사료 사다가 평균 생존기간이 3년에 불과한 ‘야생’ 영역동물을 먹여 살리느냐고. 58년 개띠 아줌마니까 지금 예순여섯? 신춘문예 당선 시의 제목부터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였으니 시인의 고양이 사랑이야 인정하겠지만 집에서 애완으로 키우며 집사노릇 하는 거야 뭐라 하지도 않고 오히려 권장할 만하겠지만 신경 예민한 사람한테는 발정나서 새벽부터 울부짖는 야생고양이 소리에 새벽잠 설치는 인간들도 많을 터, 밥 주는 종족과 새벽잠 없는 늙은이들의 갈등은 고양이 밥 주는 순간부터 이미 담보되었던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줄창 시만 읽으면 되긴 되는데, 시를 읽을 때도 그놈의 고양이 타령을 연속으로 읽게 되니 그것도 맛이 안 나긴 한다. 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앞으로 이 양반의 시를 읽지 않는 거 하나밖에 없는데, 그러기에는 또 고양이 안 나오는 작품 가운데 괜찮은 것이 섞여 있다는 말이지. 이 시집에서도 표제로 쓴 시를 한 번 읽어보자.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오르막길이

  배가 더 나오고

  무릎관절에도 나쁘고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지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지름길은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    (전문 p.5)



  시인은 여전히 남산 남동쪽 후암동 근방 언덕배기에 사는 모양이다. 그래 집에 가려면 오르막길을 허청허청 걸어야 하니 이게 나이 들어가면서 쉽지 않다. 이왕 오르니 위안을 해본다. 매일 이 길을 오르면 배도 들어가고, 걷는 게 무릎관절에 좋다고 하고, 발목도 가늘어지고 종아리도 통통해지겠지, 그럼 얼마나 좋을까? 하는 위안. 2연으로 옮겨 읽으면, 많고 많은 오르막 중에서 지름길을 꼭 오르막이다. ‘지름길’이 갖는 중의성. 더 힘들어야 몸을 쉴 수 있는 집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이름하여? 중딩 때 배우셨지? 유클리드 물리학의 운동량 보존의 법칙. 더 고생해야 더 빨리 도착한다. 근데 뭐가? 당연히 너와 나의 삶이. 그래서 누구나 다 마찬가지인 마지막 행 “마치 내 삶처럼”은 차라리 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마치 내가 뭐라도 아는 것처럼 한 마디 하고 싶어진다. 이런 기분이 아마추어의 큰 병이다. 그로 인해 간혹 화가 되기도 하는 병.

  일찍이 지난 번에 읽은 시집 《자명한 산책》에서 황인숙이 단호하게 휘두른 날선 칼이 떠오른다.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겻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자명한 산책, <강> 부분)



  하긴 뭐 두 시집 사이에 19년 세월이 있으니 어찌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황인숙이 예순네 살에 낸 이번 시집에는 나이든 시인들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자신의 주위의 사람들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이중에 재미있는 시도 있다. 친구도 아니고, 친구의 아내도 아니다. 친구하고 이혼해 다른 남자와 사는 친구의 전처를 생각하는 시인.



  친구의 엑스와이프



  친구의 엑스와이프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도 무척이나

  나한테나 잘해!

  친구는 입을 비죽거리겠지만

  너는 아무 때나 흔해터지게 볼 수 있고,

  네 엑스와이프는 이제

  만나기 힘들어졌지

  너 때문에!

  헤헤, 특유의 애교스러운 웃음소리 귀에 선한데

  잘 웃는데 어딘지 슬퍼 보인 얼굴 눈에 선한데

  친구 앞에선 이름도 꺼낼 수 없다

  나를 엑스친구 만들까봐서


  친구가 사랑했던 친구의 엑스와이프

  다른 사람 아내 된 지 좀 된

  친구의 엑스와이프   (전문 p.14)



  시를 다 읽은 순간 시 감상도 바로 끝나서 깔끔하긴 한데, 좀 그렇다. 그냥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가게 앞 파라솔에 맥주나 무알코올 음료를 올려놓고 그저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놓은 듯하다. 생활시가 대개 이러하다. 생활시로 독자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는 함민복처럼 금호동 언덕배기에 오랜만에 올라와 오수를 빨아들이는 똥차, 그 옆을 지나가는 막 목욕탕에서 나온 처녀같이 절묘한 비유가 없이는 대개 그렇다. 다음 페이지에 실린 생활시 <오늘 할 일>도 마찬가지다.



  바람, 파람, 휘파람

  변기 뚜껑 내리고 걸터앉아 멍때리다가

  문득 휘파람 불어본다

  내친김에 곡조를 붙여볼까

  잘 될까 몰라

  심호흡한 뒤 입술에 힘주고

  나오느니 웬

  봄처녀 제 오시네

  머리카락 엉켜서 바짝 마른

  욕실 바닥 내려다보며

  새 풀옷을 입으셨네

  휘와 바람이 따로 놀고

  숨 가쁘다

  휘파람, 파람, 바람

  청소부터 하자   (전문 p.15)



  좀 약하지? 애초에 화장실에 볼 일 보러 온 거 아니라 봄맞이 대청소라도 시작했을 지 모르겠다. 그래 처음부터 변기 뚜껑을 내리고 걸터앉았지. 근데 힘도 좀 딸리고 그래서 하기가 싫은 거다. 요샌 생각도 잘 되지 않아 어떻게 앉은 김에 멍때렸다. 며칠 전에 읽은 볼라뇨의 <부적>에 나오는 주인공 우루과이 시인 아욱실리오 라쿠투레가 번쩍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래 휘파람도 불어보고, 곡조를 넣어 시인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노래 가운데 <봄처녀>를 선택했지만 그것도 노래라고 숨이 딸리는 거다. 시새푸새해져 바닥을 내려다보니 당신의 화장실하고 거의 틀림없이 바짝 마른 머리카락이 새 풀옷을 입을 것처럼 엉겨있다. 뭐 많이야 엉겨 있겠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지.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나서야 에잇 청소부터 하자, 하고 마음 먹는 그림. 사소하고 사소한.

  이제 육십이 넘어 새로 취직할 수 있는 가망은 푸시시 날아가버렸을 시인. 자칭 백수는 백수인데, 심한 백수라서 제목을 <빈사의 백수>로 달았다. “빈사의 백조”는 1905년 미하일 포긴이 만든 짧은 독무. 이 작품의 제목만 가져왔다. 근데 분위기는 시원하다.



  남산 위에 저 서울타워

  파르라니 빛나고나

  바람 많이 불어서

  산꼭대기 공기 맑을 테다


  아, 왜 이렇게 답답하지

  맑고 푸른 저 빛의 빨대를

  확 휘어 당겨

  빨아 들이켜고 싶고나


  오늘 밤 훠이훠이

  산에 올라가볼까

  그런다고 내 속이

  뻥 뜷릴까    (전문 p.16)



  광경은 시원하건만 시인, 백수의 가슴 속은 꽉 막혔다. 그래서 공기 맑을 것이 틀림없는 산 위에나 올라볼까, 생각하는 시인 또는 백수. 여기서도 아마추어 독자는 또 마지막 두 행에 시비를 건다. 꼭 “그런다고 내 속이 뻥 뚤릴까” 즉 “그래도 내 속은 꽉 막혀 있기만 하다.”라고 말하는 거 같다. 


  이 고양이 엄마는 고양이들이 욕을 얻어먹는 것도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검정 비닐봉투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고양이가 싸질러놓은 분변을 치우기도 한다. 나나 당신한테 드럽지 고양이 엄마들은 조금도 더럽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한밤에 동네 한바퀴 돌면 검정 비닐봉투에 가득 차고, 그걸 버리는 것도 일인데, 날마다 종량제 봉투에 담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버리기도 뭣하다. 시인을 자세히 보면 야밤에 CCTV도 켜놓고, 지금 작동중이라는 엄포성 프라스틱 경고문도 있지만 여전히 불법으로 쓰레기가 투척되어 있는 모습과 주민들의 이런 행위를 옹호하는 것 같다. 저 뒤에 가면 자기도 여기다 고양이 똥을 슬그머니 투척하고는 했으니까 당연하겠지. 잘 한다. 잘 하는 짓이다.



  그 동네 어느 심야



  고양이만 지나가도 저러더니

  택시만 지나가도 저러더니

  눈이 와도 저러는구나

  한국어로 영어로

  CCTV 작동 중이라고

  너는 가비지라고

  페널티라고

  종량제 봉투 하나 없이

  검정 봉투 노랑 봉투 찢어진 봉투

  수북수북 쌓인 제 발치 째려보면서

  전봇대 여인 낭랑한 목소리로 따박따박

  아랑곳없이 눈은 투척되고

  성능도 좋아, 여인을 지치지 않고 경고하고


  하늘이 터진 듯 눈 쏟아져 내렸다

  언젠가 눈은 그치겠지만

  그 동네 사람들은 그치지 않지

  주민 승!   (전문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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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5-01-09 0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기 바라는 마음이신 거 맞아요? 엑스시인 될까봐서를 부제로 ㅋㅋ 저도 읽은 시집들인데 생활시가 그랬었나 기억이 안나요. 저에게는 어땠나 들춰보려고요. 역시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아

Falstaff 2025-01-09 06:44   좋아요 1 | URL
예. 좀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안 그러는 게 더 자연스러운 거 같아서요.
괭이 시만 아니면 이이의 시가 좋은데, 아휴, 어쨌든 자기 좋은 시만 쓰면 그게 장땡이지요 뭐.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그레이스 페일리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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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스 페일리(1922~2007)는 우크라이나 출신 사회주의자 유대인 이민 부부 굿사이드 집안의 늦둥이 막내딸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언어가 좀 복잡하다. 우크라이나지만 러시아어를 사용했고, 그쪽 유대인이라 당연히 이디시어도 썼으며, 사는 곳이 미국이니 영어는 저절로 배울 수밖에 없었다. 언어사용만 복잡한 게 아니라서, 이이의 커리어를 보면, 먼저 시인으로 시집을 출간했고, 이어서 평생 세 권의 단편집만 낸 단편소설 전문 작가이며,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강사를 지냈으니 교육자이기도 하고, 1950년대에는 반핵운동, 이후에 반베트남전, 반이라크전 등 조금 진하게 반전운동에 참여했다가 며칠이기는 하지만 철창에 갇혀 나랏밥 먹은 전력도 있다. 당연히 페미니스트로 스스로 임신중단을 경험했으며 임신중단권을 계속 주장했다. 원래 이름은 그레이스 굿사이드. 열아홉 살 때 영화 카메라맨 제스 페일리와 결혼해 노라와 대니를 낳았으나 이혼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그랬는지 이후 굿사이드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페일리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84세에 유방암 치료를 받았지만 죽었다. 그 나이에 뭐하러 고생스럽게 치료를 받았는지.

  평생 세 권의 단편집과 몇 권의 시집만 내고도 미국예술문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단편소설을 위한 펜-멜러머드 상 등 숱하게 많은 상을 받았으니, 이만하면 작가/시인으로 한 평생 원 없이 살다 갔다고 봐도 좋겠다. 이 책의 서문 격으로 2007년에 일본에서 출간한 같은 제목의 단편집을 번역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개글 “그레이스 페일리의 중독적인 ‘씹는 맛’”으로 시작한다. 무라카미가 뉴욕에서 열린 페일리의 낭독회에 직접 참석해서 페일리를 만난 소감 등을 쓴 것인데, 원래 미국 단편소설을 지극하게 애정하는 무라카미답게 거의 열광적으로 페일리를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의 영향으로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극히 의식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우익 편에서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가담해왔다. 또한 두 아들을 혼자 힘으로 길러낸 강인한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최근에는 페미니즘 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p.6)

  이렇게 주장했다.

  와, 무라카미가 정말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 맞아? 유대인 정체성을 의식한 건 맞는데, 나머지는 다 틀렸다. 어떤 우익이 반핵, 반전 시위를 하고 낙태권 합법화를 주장하나? 페일리는 부모부터 사회주의자였으며, FBI는 이이를 공산주의자로 판단해 무려 30년 동안 그레이스 페일리 파일을 보관했다. 모르지, 2007년 앞뒤로 일본에서는 공산주의자를 우익이라고 불렀는지도. 두 아들? 49년생 노라가 대니의 누나니까 남매. 왜 유난을 떠느냐 하면, 서문에서 먼저 무라카미가 하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다 믿고 책을 읽었더니 읽으면서 “우익 운동가”가 이런 의견을 낼 수 있으니 미국이 참 다양한 나라이기는 한 모양이다,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은 게 웃겨서 그렇다. 무라카미 상, 나오기만 하면 영락없이 나를 웃겨줘. 고맙습니다.


  본문만 269쪽에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실었다. 무라카미는 앞에서 인용한 서문 격의 잡문을 통해 “열성적인 독자는 그것을 소중하게 숙독하고 맛을 완전히 이해하고자 노력하는데, 질 좋은 오징어를 씹듯이 몇 번이고 곰곰이 맛을 음미하는 것과 같다.” (p.8~9) 라고 주장한다. 2007년에 번역했으니 원작이 미국에서 출판되고 30년이 넘은 시점에 읽어도 여전히 그렇다는 말이다. “질 좋은 오징어 맛”이 이 책의 핵심이라는데, 나도 “씹는 맛”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질 좋은 오징어 맛”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일본산 오징어 맛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그래봤자 고릿고릿한 냄새의 오징어 조직이 이 사이에 틀림없이 박혀 있을 터. 내가 말하는 “씹는 맛”은 말 그대로 “씹는” 재미. “씹다.” 영어로 chewing. 이게 내 의견이다.

  첫번째 작품 <소망>에서 화자는 새로 지은 도서관 계단에 앉아 있다가 전남편을 만난다. 27년동안 같이 살다가 헤어진,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속 좁은 말을 하는 버릇이 있는 남자. 말들이 막힌 관을 뚫는 배관공의 와이어처럼 정말 좁다랗게 생겨서 귓속을 파고 들어 목을 타고 거의 심장 부근까지 와 닿곤 했던 쪼잔한 남자. ‘나’는 이디스 워튼이 쓴 두 권의 책 <환희의 집>과 <아이들>을 빌렸다. 50년 전에 뉴욕에서 살던 사람이 27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주는 책. 그레이스 페일리는 카메라맨 제스 페일리와 25년을 살고 5년 별거한 후, 30년만에 이혼했다. 화자는, 그리고 작가 자신도 역시 지금 남편이든 전남편이든 한 남자하고만 살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도 않았고, 한 평생이란 것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으며, 그래서 그랬나? 한 남자의 됨됨이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 페일리는 몰랐겠지. 전남편도 함께 사는 동안 한 여자의 됨됨이를 도무지 알지 못했다는 걸. 그래, 그래. 결혼생활이란 건 평생을 살아도 서로 됨됨이를 알지 못하는 것들이 그냥 부비면서, 그러다가 나중엔 기대면서 사는 거야. 아니면 그냥 부비다가 끝나버리거나.

  이러다가 딱 결론에 다다른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2년 전에 심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이날, 오늘 생애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걸 발견한 후, 누가 나를 평가하려 할 때 자신은 플라타너스 나무와 달리 뭔가 절절하게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방금 빌린 책 두 권을 반납하기로 결정한다.

  원래는 <환락의 집>이 별로 재미가 없었음에도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읽어보려 했던 것이지만 그냥 때려치우고 말았다는 것. 즉, 지금까지의 것들을 그냥 씹어버린 거다. 내가 말하는 씹는 맛이란 이런 것. 무라카미는 이것을 질 좋은 오징어 맛이라 했다.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표제작인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들>이었다. 주인공은 알렉산드라. 병원에 입원해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종종 들르는 작가 여사님. 아마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 정도? 이이에게 애인이 생긴다.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가느라 탄 택시의 운전수, 데니스. 데니스는 그룹에서 보컬로 활약하기도 하고, 몇 사람이 뭉쳐 몇 명의 아이들을 공동으로 키우기도 하는 좀 별난 자유주의자이고 가끔가다가 입이 험해지기도 한다. 아버지는 진짜 작가의 아버지 아이작 굿사이드 선생처럼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먹고 살기에도 팍팍한 와중에 의과대학을 마쳐 의사로, 배고픈 이민자에서 한 방에 미국 중산층으로 점프한 이력을 지녔다. 젊었을 때 숱한 문학작품을 읽어 그쪽으로도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주장한다.

  어때? 작가 직업의 알렉산드라 입장에서 거 참 골치 좀 아프겠지?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알렉산드라에게 딸이 지은 또는 생각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딸이 이야기를 하니, 곰곰이 듣고 있다가 자기 주장을 죽 펼치면서 이야기를 자기 말대로 고쳐보란다. 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원을 모른 척하기도 그래서 그렇게 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아이고, 저걸 어쩌나, 아무리 마흔이 넘었다고 해도 긴 장화 안 신고 (침대 위의)만리장성을 넘어가면 생기는 현상 있지? 글쎄, 있을 게 없는 거야. 그렇다고 데니스 손잡고 시청 호적계로 쪼르르 달려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고. 이제 정말로 아버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건데 알렉산드라는 어떻게 했을까? 당연히 안 알려드리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혹시 그냥 씹고 넘어가지 않을까? 혹시 그렇다는 말이다, 혹시.

  벌써 반백 년 전에 쓴 단편을 모은 책이다. 무라카미가 일본어로 번역한 지도 20년 가까이 흘렀다. 여전히 이 단편들을 읽으면서 새롭게 눈이 번쩍 뜨이기를 바라는 건 조금 무리인 듯. 가끔 이런 작가들이 있는데, 실제보다 조금 과대 포장되어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고 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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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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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만에 볼라뇨 라이브러리에 한 권을 추가한다. 도서관에서 계속 눈독을 들인 책. 한 권쯤 안 읽은 볼라뇨도 있는 게 좋아, 은근히 이런 생각도 가지고 있어서 그동안 미루고 있다가 읽었다. 처음부터 볼라뇨를 좋아한 건 아니다. 처음 읽는 낯선 방식의 소설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에 경기를 했고, <안트베르펜>은 이거 또 뭐야 싶었는데, 후에 생각해보니 초기에 읽은 이 두 작품을 통해 나도 모르게 로베르토 볼라뇨에게 익숙해졌던 거다. 그리하여 이후 다른 볼라뇨 애호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에 집중하게 됐고,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볼라뇨는 몇 권 남지 않았다. 남은 것도 야금야금 읽어야지.


  화자이자 주인공은 몬테비데오 출신의 우루과이 여자 아욱실리오 라쿠투레. 자칭 멕시코인들의 친구이며 멕시코 시의 어머니이다. 모든 시인을 알고 있고 시인들 역시 모두 자신을 안다고 믿는다. 아욱실리오가 우루과이를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년가량 살다가 최종적으로 멕시코시티에 와서 정착한 이유는 스페인 시인 레온 페리페와 페드로 가르피아스가 조국을 떠나 멕시코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욱실리오가 멕시코에 도착한 것은 1967년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65년 또는 62년일 수도 있다. 독자는 좀 헛갈릴 수 있다. 정착하기 위하여 멕시코에 온 해를 5년씩이나 왔다갔다할 수 있을까 싶어서.

  <부적>은 아욱실리오 라쿠투레가 훗날, 아마도 1980년대의 어느 날 지난 세월을 기억하면서 쓴 글일 것이며, 아욱실리오는 시인,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탐정들의 흔적이 드러나는 <2666>에서 보듯 초현실주의 시를 쓰는 부류, “내장사실주의”의 일원일 것이라서 시공에 관한 한 상당한 신축성을 가질 수 있다. 예컨대 작품의 뒤편에서 등장하는 스페인의 여성 시인 레메디오스 바로를, 시인하고는 실제로 아이 컨택, 눈과 눈길이 마주친 적도 없지만 이이의 상념 속에서 자신이 레메디오스 바로를 찾아갔으며 무료로 집안일과 부엌일을 해줄 테니 당신은 시 쓰기에만 전념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한다. 또는 그렇다고 믿는다. 레메디오스 바로가 생을 접은 해가 1963년. 그러니 아욱실리오 라쿠투레가 그 시인과의 인연에 대하여 언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962년에 멕시코시티에 도착했어야 하기 때문에.

  아욱실리오가 레메디오스를 찾아갔다고? 그렇다. 사실이 아니어도 사실이다. 독자는 그렇게 믿지 않지만 믿는다. 이이가 멕시코시티에 도착해 한 번에 두 명의 스페인 노시인과 교류를 하며, 1962년 또는 63년에 레메디오스 바로에게 했듯이 레온 페리페와 페드로 가르피아스가 시작詩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집안 일 일습을 다 해주었다(고 주장한다). 1968년에 사망한 레온 페리페는 자신을 ‘예쁜이’ 혹은 ‘나의 소중한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하면서 가끔 돈 몇 푼을 건네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이는 돈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자신이 집안일을 해주는 것은 “순전히 억누를 수 없는 존경심에서 하는 일이라고요.”라고 대답했다. 페드로 가르피아스는 레온 페리페와 달리 돈이 아니라 집안일을 해주는 대가로 주로 철학책을 선물해주었다. 가르피아스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67년. 따라서 아욱실리오는 늦어도 1967년에는 멕시코시티에 있어야 했던 것.

  두 명의 노시인 가운데 페드로 가르피아스만 기억해도 좋다.


  화자 ‘나’이자 멕시코 시의 어머니인 아욱실리오 라쿠투레는 가르피아스가 67년에, 페리페가 68년에 사망하자 그들의 집에서 나와 멕시코국립자치대학 인문대학을 빙빙 돌며 역시 자발적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가끔 교수실에서 타이프를 쳐주거나 프랑스어에 관한 한 대학의 전문가보다 더 양호한 편이어서 간혹 보수를 받으며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돈으로 다락의 작은 월세방을 얻거나 시인 또는 그들의 친구집에 얹혀 지내며, 숙박은 물론, 가능하다면 삼시 세끼 내장을 채우는 것도 빌붙어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하루도 좋고, 사흘도 좋고, 일주일이면 더 좋은데, 한달 두달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가, 결국 어떤 경우라도 마지막엔 이젠 좀 나가달라는 집이나 방 주인의 직접적인 말을 들은 후에야 친절하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은혜는 잊지 않겠다고 인사하고 집이나 방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그러니 시인들의 집에서 무료로 집안일을 해준 것이 아니라 대신 잠자리를 얻고,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건 실컷 먹을 수 있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이런 상태에서 드디어 9월 18일이 온다.


  1968년 9월 18일. 멕시코국립자치대학. 1968년. 전 유럽과 북미를 휩쓸던 젊은이들의 자유와 반전시위. 이 충격이 멕시코시티에 다달았다. 멕시코에서는 두 가지의 악재가 더 보태졌으니, 제도혁명당에 의한 독재정권과 불과 며칠 앞으로 다가온 멕시코시티 올림픽이 그것이었다. 멕시코국립자치대학 학생들은 독재철폐, 정치범석방, 집회의 자유 보장, 올림픽 철회를 외쳤으며, 이에 대한 친절한 응대로 멕시코 정부는 시위진압경찰과 군대를 학원에 투입해 당연히 사정없이 두드려 패며 교수, 교수의 비서를 비롯한 교직원, 학생들을 체포 구금해버렸다. 이 일은 10월 2일, 올림픽이 열리기 불과 열흘 전에 행해진 유명한 “틀라텔롤코 광장에서의 학살”의 전초전 역할을 하는데, 그건 며칠 후의 일이고, 딱 이 당시 여자화장실에서 아욱실리오 라쿠투레는 스커트를 올리고 (볼라뇨가 쓴 대로 옮기자면) 발목을 족쇄처럼 움켜쥐는 방식으로 팬티가 걸린 채 좌변기에 앉아, 용변을 본 것이 아니라 이이의 취미대로 자기만의 공간에서 페드로 가르피아스의 더없이 섬세한 시를 읽고 있었다. 사실 이 장면은 한 가난한 망명 또는 유랑 인텔리겐치아의 눈물을 앞을 가리는 비참한 장면인데도 독자가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을 수밖에 없는 건 로베르토 볼라뇨 특유의 장난끼 가득한 문장 때문이다. 아욱실리오가 저 꼭대기에 걸린 환기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코피가 흘러 휴지로 코를 막은 교수와, 이제는 자기 친구라고 할 수도 있는 비서들이 군인들의 엄격한 눈길을 받으며 비칠비칠 걸어가고 있었다. 존경하는 고 돈 페드로 가르피아스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장면이었으리라.

  교정에 아직도 틀림없이 군경이 있어서 아욱실리오는 화장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심지어 언제 젊은 남자 군인이 여자화장실의 출입문을 왈칵 열어젖힐 지 모르는 일이라 개별실의 문조차 열어놓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후 정말로 한 병사가 화장실에 들이닥쳤고, 이어서 상관인 듯한 인간이 지나가자 “근무중 이상 무” 보고를 하더니 다시 문을 닫고 나가는 거였다. 다시 개별실로 돌아와 있던 아욱실리오는 이때까지 문 아래로 보일지 몰라 여전히 같은 복장인 채로 두 발을 동동 들고 있었으며, 군인이 물러난 이후 화장실에 혼자 남은 이이는 세면대의 거울을 보고, “아욱실리오 라쿠투레여, 우루과이 시인이여, 버텨라!”라고 외쳤다. 물론 밖에서 들리지 않게 속으로만.


  이렇게 해서 아욱실리오 라쿠투레는 1968년 9월 18일부터 9월 30일까지, 그나마 다행히 세면대에 물이 공급되는 바람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오직 물만 마시면서, 도저히 변기 위에 앉은 상태로는 잠을 잘 수 없어 여름이라도 차디찬 화장실 타일 위에 쪼그려 누워 12일 밤을 보낸 후 구조되었던 거였다. 구조된 이틀 후에 멕시코 현대사에서 가장 잔인한 기록이 될 틀라텔롤코의 학살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아욱실리오 본인은 멕시코국립자치대학 인문대학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고 자신은 생각하며 살게 된다). 이 당시에는 다 있었지만 이후 멕시코시티에서 앞니 네 개를 상실한 아욱실리오는 마음 속 한 구석에 12일 동안의 감금, 구속의 영향이 가장 크게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겼으리라. 이후 이이는 남들과 대화를 할 때, 웃을 때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리는 것이 버릇이 되었는데, 사실 이건 세계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제스처이긴 하지만, 시인, 시를 통해 세상에 발언하는 아욱실리오 입장에서는 범인의 경우보다 더 많은 은유적 의미가 담겨 있음은 물론이겠다.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건 독자 마음인 것도 당연하고.

  이후 <부적>은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 아메리카 젊은이들의 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비롯한 자유정신에 대하여 나머지 분량을 할애한다. 이 속에 <야만스런 탐정들>에 등장하는 시를 쓰는 젊디젊은 시인도 나오고,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전설적인 시인, 작가도 언급하는데, 나는 당연히, 다른 작가가 아니라 로베르토 볼라뇨가 쓴 작품이기 때문에 그가 만든 ‘허구’의 시인, 소설가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데 만원 건다.

  무엇을 일컬어 부적이라고 했을까? 젊은 라틴아메리카 청년들의 용기와 도전, 그것들을 통해 일군 자유와 지양. 아, 이건 미리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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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01-0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라뇨 전집을 오래 전에 사서 쟁여 두었죠. ㅎㅎㅎ
헌데 언제 읽을지...^^;;

Falstaff 2025-01-06 16:38   좋아요 0 | URL
새털 같은 날들인데 뭐가 걱정입니까? 언젠가 읽으시겠지요. ㅎㅎㅎ
 
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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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티파니 Danielle 잭슨은 뉴욕주 몬트로즈에 있는, 주로 백인뿐인 웨스트체스터의 (헨드릭 허드슨) 고등학교에 다녔고 잭앤드질의 회원이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졸업 후 하워드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뉴 스쿨 대학에서 미디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내셔널 지오그래픽, NNC 아메리카 등 다양한 네트워크 및 미디어 회사에서 10년 이상의 커리어를 쌓는다. 2009년에는 단편 공포영화 <필드 트립>의 각본과 감독을 맡기도 했다.

  위키피디아에 소개하는 잭슨의 소설 작품은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하이틴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 그것을 둘러싼 보편적 미국인의 사고방식, 사고방식을 소통하는 채널 또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추가하자면 작가가 청소년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던 장르인 공포물이거나. 잭슨의 홈페이지에서, 만일 다른 직업을 선택할 수 있으면 어떤 일을 하겠느냐는 팬의 질문에 이이는 “공포에 휩싸인 것을 창작하거나 가르치는 일”이라 대답할 정도니까 공포 장르에 지극한 관심이 있다고 봐도 좋겠다. 십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R.L. 스타인, 35개 언어로 무려 4억 권 이상을 판매하여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팔린 공포소설 시리즈 <구스범프>를 쓴 로버트 스타인의 열렬한 팬이며,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 역시 많은 판매부수를 자랑하는 ‘공포의 왕’ 스티븐 킹 같은 인물들이다. 따라서 티파니 잭슨의 작품이 다분히 서스펜스 적인 구도를 갖춘 것 역시 자연스러울 수 있는 일. 다른 작품은 읽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로운>은 확실히 그렇다. 흑인 하이틴에 대한 성을 포함한 폭력 범죄, 흑인 여성의 피해에 관한 삐딱한 사적, 공적 시선, 공포스러운 수준인 그루밍과 가스라이팅. 나는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에 관해서 말로만 어떤 것이다, 들었을 뿐이라서 작중 수퍼스타 코리 필즈가 주인공 인챈티드 존스에게 가하는 행위에 아예 질려버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소설과 영상을 통해 코리 필즈의 행위와 유사한 것들을 적지 않게 읽고 봤다. 그게 <그로운>의 등장인물들이 가하고 당하는 수준까지 아니었을 뿐, 완력이 있거나 권력이 있거나, 돈이 많은 인간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장악하려는 장면은 살면서 여러 번, 어떻게 생각하면 자주 목격하지 않았을까 싶다. 더 세밀하게 생각해보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역시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을 가하거나 당하지는 않았을까? 인간이라는 종은 자신이 가한 건 잘 기억하지 못하고, 당한 건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틀림없이 정도의 차이지, 나도, 당신도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을 가한 적도 있고 당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더 조심해서 살자는 뜻으로.


  안챈티드 존스. 애칭 ‘챈티’는 노래도 잘하고 수영실력도 수준급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며 17세, 반년 후엔 성년인 18세가 될 고등학생이다. 챈티가 다니는 파크우드 고등학교는 카운티에서 엄격한 복장 규정이 없는 유일한 사립학교라서 흑인 학생이라고는 전교에 열 명밖에 없다. 그렇게 까다롭지 않은 학교 규정에 집중을 방해하는 머리 모양을 금지한다는 항목이 있어서 가닥가닥 굵게 땋은 드레드록스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어버렸다. 흑인으로 살기가 만만치 않다. 흑인 아이라 불량스럽다, 흑인 아이라 머리 모양이 저렇다, 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알아서 긴 거”였다.

  존스 가족은 원래 외할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살았다. 챈티는 어려서부터 물, 수영장에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바다처럼 파도가 치거나 강처럼 흐르는 물 속에서 수영하는 것을 좋아해 하루 종일이라도 물 속에 있을 수 있었지만,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빌리 할리데이, 에타 제임스 같은 클래식한 재즈부터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어리사 프랭클린, 다이애나 로스 같은 팝스타까지 다 좋아하다가 이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니 자기 역시 다섯 옥타브를 넘는 음역과 풍성한 성량을 가지게 됐다. 당연히 학교에서 알아주는 노래꾼이 되었는데, 거의 유일한 절친 가브리엘라, ‘갭’이 챈티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엄마에게 거짓말을 해서 엄마가 운전하는 엄마 차를 타고 BET 방송국에서 하는 뮤직 라이브 오디션에 참가해, 1등을 먹었으면 1만 달러를 받을 수 있었는데, 장렬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백스테이지에서 눈물을 찔끔찔끔 짜고 있을 때, 심사위원은 아니지만 오디션 도중에 불쑥 등장해 심사위원 자리에 앉아 있던 수퍼, 수퍼 중의 수퍼스타 코리 필즈가 어느 새 챈티의 뒤에 다가와 목덜미 가까이에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이렇게 속삭이는 거였다.

  “좋은 노래였어.”

  코리가 몇 살이냐고 물었고, 열일곱이라는 챈티의 대답을 들은 아주 잠깐 조금 실망한 듯하더니, 다음 주 토요일의 자기 공연에 챈티와 부모를 VIP석에 초대한다.

  “입구에서 내가 초대했다고 말하면 될 거야, 브라이트 아이즈.”

  브라이트 아이즈? 그가, 무려 코리 필즈가 나를 ‘브라이트 아이즈’라고 부른 거야? 챈티는 흐물흐물 녹아버린다. 일찍이 열세 살에 이미 수퍼스타가 되어 마이클 잭슨의 재림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오른 곡이 열다섯, 15세에 첫번째 그래미 상을 받은 이후 음악상이라는 음악상은 모두, 아니지, 에미상 하나 빼고 메이저 어워드는 몽땅 수집한 미국 대중음악계의 천재가 나를 초대한 거야?


  존스 가족이 재정적으로 여유로워 다양성이 부족한 뉴욕의 부자동네 하트데일로 이사왔고 아이 둘을 엘리트 사립학교에 넣은 것도 모자라 10대 흑인 커뮤니티인 윌앤드윌로우 클럽에 가입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는 전기노조에 가입해 2교대로 일하며 케이블을 수리하는 일을 하고, 이사와 동시에 간호학교를 다녀 자격증을 딴 엄마는 병원에서 간호사 일을 하며, 집세와 아이들 사립학교 등록금, 수영 과외활동 지원비, 윌앤드윌로우 회비와 행사 참가비를 조달하느라 쌔가 빠지고 있는 중이다. 아이들이나 적은가? 맏이 챈티, 둘째 딸 셰이, 밑으로 딸 아들 쌍둥이 펄과 피닉스, 막내딸 테스티니까지 다섯을 키울 생각하면 머리가 찌근거리겠지? 걱정하지 마시라, 다 살게 되어 있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 존스씨와 존스 부인도 맏딸 챈티의 손을 잡고 코리 필즈 콘서트에 VIP로 참석해서, 공연을 즐긴 후, VIP라는 것이 공연 후에 백스테이지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하며, 절대로 푸르지 않은 그린룸까지 들어가 숱한 스타들과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그린 라이트를 말하는 것인지 처음 알았고, 이를 충분히 즐긴다. 평소 우상으로 알던 조금 나이든 가수들까지 모두 와 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을 터. 몸에 걸친 의상과 액세서리에서 큰 차이가 있지만 티파니 잭슨은 그딴 것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으며, 팝스타들 역시 삶에 허덕거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부와 스스럼없이 짧지 않은 동안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데 머뭇거리지 않는다. 여기에다가 코리 필즈는 얼마나 부부에게 점잖고, 정중하고, 상냥한지. 그는 부모에게 말한다. 따님 인챈티드 존스 양이 노래에 상당한 재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배워야 합니다. 레슨이 필요합니다. 자질이 너무 출중하기 때문에 제가 무료로 레슨을 해주고 제 공연에 세워보려 합니다.

  실제로 엄마 라토야 존스 여사는 챈티와 함께 웨스트사이드에 있는 코리 필즈의 펜트하우스에 설치한 음악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구경하고, 세 시간 동안의 첫번째 레슨 시간을 갖게 된다. 엄마는 세 시간 동안 레슨을 받을 딸에게 나름 엄격하게 말한다.

  “예의를 지켜. 숙녀처럼 행동하고.”

  그러나 챈티가 보기에 코리한테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애수哀愁”가 있었던 것이니 코리의 친절과 따스함과 상냥함과 애정이 바야흐로 그루밍의 시작이었던 것을 챈티도, 존스 여사도, 독자도 몰랐던 거였다. 코리가 주장하는 스튜디오의 규칙: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도 몰라야 함. 음악을 만드는 게 아니고 우리의 목소리가 공기중에서 사랑을 나누어야 함.

  이렇게 애수 속에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의 강철 발톱이 돋아, 드라마는 미성년자 성착취와 폭력과 약물 강제와 감금과 살인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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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1-03 0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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