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등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2
다와다 요코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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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제작 <헌등사>를 포함해 다섯 편의 중단편을 실은 작품집. <헌등사>는 185쪽 분량이라 우리나라 출판계의 분류에 따르면 장편소설이라 할 수도 있겠다. 하긴 분량으로 따져서 장, 중, 단편으로 구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나는 이 《헌등사》에 나오는 작품들을 읽고나서 2018년에 시작하는 다와다 요코의 소위 Hiruko 3부작의 배경을 정확하게 알게 됐다. “Hiruko 3부작”은 일본 열도가 태평양 상에서 사라졌는지, 침몰했는지 하여간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진 상태에서 모어mother tongue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일본인 여성 Hiruko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체류하며 같은 모어를 쓰는 Susanoo를 찾는 이야기가 1부 <지구에 아로새겨진>이고, Hiruko와 친구들이 Sunanoo의 실어증을 치료하는 것을 돕다가 이미 침몰해 없어졌을 지도 모르는 Hiruko와 Sunanoo의 고향으로 떠나는 <별에 어른거리는>이 2부, 아직 번역 출간해 나오지 않은 <태양제도>가 3부로 되어 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에서 일본 지진 관측 사상 최강의 지진(강도 9.0~9.1)이 발생한다. 이어 평균 10미터, 최대 소상 높이 40.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진해일이 닥쳐 도호쿠와 간초 지방의 태평양 연안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이로 인해 1만8천여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40만 명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이것 외에도 도호쿠 지역의 원전 29기 가운데 11기가 운전 중단이 되었으며, 이 가운데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의 1호기부터 3호기에 멜트 다운이 일어나 대량의 방사능 물질이 유출되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같은 레벨인 7단계 사고로 분류되었으며 2012년부터 “귀환곤란지역” “거주제한구역”으로 설정되었다.

  당시 오에 겐자부로를 위시한 사회, 문화 등 각계의 인물들은 1945년에 원자폭탄 피폭을 직접 경험한 기억이 남아 있어 1만 8천명의 사망/실종보다 방사능 오염을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여 대규모 반핵 시위에 접어들게 된다. 다와다 요코는 당시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위에 참가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이 역시 경제적(싼 값)으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예상하지 못한 사고로 대형 재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공황에 접어든 것 같다.

  그래서 이 책 《헌등사》의 단편들을 보면, 일본 공군 자위대의 전투기가 (당연히) 폭탄을 싣고 비행하다가 기체 결함으로 추락을 하는데, 하필이면 그게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 꼭대기로 정확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일본 전역이 마치 핵폭탄이 터진 것처럼 방사능에 오염되어, 이에 피폭된 사람들이 강이나 개울 같은 하천을 찾아가 몸을 담구는 장면까지 묘사한다. 피폭자들의 하천행은 분명히 오타 요코가 1945년 히로시마 피폭을 직접 당하고 쓴 소설 <시체의 거리>에 나오는 장면을 리메이크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원자로 파괴에 의한 방사능 유출의 피해를 원자폭탄으로 인한 타격과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정도로 여긴 셈이다. 또는 또다시 대형 지진이 발생해 원자력 발전소가 여기저기에서 파괴되어 일본의 거의 모든 지역의 토지는 물론이고 인근해 해수까지 전부 방사능에 오염되었거나, 지진의 여파로 지금의 위치에서 더 동쪽으로 밀려나가 유라시아 대륙과 아예 거리가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런 상태가 《헌등사》 출간 4년 후에 나올(나오기 시작할) Hiruko 3부작의 기본 개념이 되는 거였다.


  그런데 한자어와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독자가 이 책을 읽고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것이다. 多和田葉子, 다와다 요코 여사는 위 문단에서 길게 쓴 다분히 디스토피아 적 미래관을 소설로 쓰면서도 일본어와 한자어를 오가며 현란한 문자 또는 언어유희를 즐기고 있다. 그런데 그게 대부분 한자어와 일본어, 가끔은 영어와 일본어 사이에 벌어질 수 있는 것들을 깔고 간다. <헌등사>을 보면, 일본은 국토가 유라시아 대륙과 완전히 분리된, 즉 쿠릴열도와 이어진 대륙과의 연결 끈에서 완전히 떨어진 이후, 오염되어 야생동물이 거의 몽땅 멸종한 토지와 해양수 때문에 자의반타의반으로 쇄국정책을 벌이고 있어서, 외국어 사용조차 금지했거나 금지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지금은 못쓰게 된 전자제품에 영어로 쓰인 Made in Japan이란 글씨를 보고, Made? 마데? 재팬, 일본까지? 라고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Made를 ‘마데’라 읽는 건 그럴 수 있지만 우리나라 독자들은 “A부터 B까지”를 일본어로 하면 “AからBまで” 즉 ‘A가라B마데’로 읽는다는 걸 알아야 웃을 수 있다. 한자어와 일본어로 하는 언어유희는 생략한다. 이런 식이다. 일본어도 할 줄 아느냐고? 조또. 우리말로 ‘조금’이란 뜻이다. 라떼 일본어 독해를 못하면 마르크스를 읽을 방법이 없어서 시쳇말로 얻어 터지면서 배웠다.

  원래 쉽지 않게 소설을 쓰는 다와다 요코가 이런 언어 유희까지 벌이고 있으니 정말로 《헌등사》를 읽으실 분은, 구간이 절판이라 틀림없이 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2번으로 나온 책을 읽으실 터인데, 신중하게 결정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내 기준으로 드리는 말씀이니 심각한 고려사항은 아니다. 어쨌든 나는 이야기했으니 됐다.




  근데 "현혹" 또는 "선동"에 대해 조금 생각을 해보자. 아, 먼저 전제로 깔아야 할 것이 있다.

  1 > 0.9999999999999……

  이 부등식이 맞다고 생각하시면 안 읽으셔도 된다. 괜히 오해만 불러올지 모르니까.


  원자력 발전을 포기한다면? 그러면 남은 것은 화석연료, 수력, 태양광, 풍력 등이다. 화석원료를 이용한 전기발전은 필연적으로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어서 적어도 2차 함수 곡선을 타고 급격화할 지구 온난화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태양광과 풍력 등은 경제성 문제가 걸림돌이고. 게다가 우리나라 같은 지형은 지독하게 태양광과 친하지 못하다. 일본도 마찬가지. 이 두 나라가 원자력 발전소의 문을 닫고, 앞으로 원전을 더 짓지 않기 위하여는 그래도 태양광의 효력을 극대화할 수 있게 과학적, 산업기술적 발전에 박차 정도가 아니라 거의 모든 국가적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내 의견이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렇다. 당장 내일부터 원전 가동을 중단한다고 치자. 그러면 전기료는 지금보다 적어도 3배 이상으로 오르지 않을까? 3배가 뭐야, 최소한 그렇다는 것이지. 거리는 어두워지고, 점포는 해 떨어지면 문을 닫아야 하며, 부잣집 청소년들도 대학입학을 위한 학원 순례를 멈추어야 한다. 왜? 전기 없는 어둠 속에 틀림없이 범죄가 도사리고 있을 터이니. 앞으로 더욱 뜨거워질 것이 분명한 여름 밤의 열대야도 에어컨 없이 지낼 각오를 해야 하고, TV 사이즈도 작은 것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지 모른다. 나머지 집에 있는 필수 가전제품은 전부 신제품, 작은 사이즈로 개비해야 할 터이고, 적지 않게 내다 버려야 할 걸? 기타 등등, 기타 등등. 농담 같지? 천만의 말씀. 30년 넘게 밥 먹고 살던 직장이 태양광 근처 산업이다. 그래서 전기산업에 관해 좀 안다. 말로만 원자력 발전 반대 집회 가서 투쟁, 투쟁, 투쟁, 목이 터지게 외치고나서 집에 들어가자마자 에어컨 빵빵 돌리시는 분들은 정말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원자력 발전을 해야 한다는 취지는 아니다. 태양광이나 풍력 등을 이용한 전기 생산이 지금보다 훨씬 효용이 좋아질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원자력 발전을 참아주는 게 어떠냐는 제안일 뿐. 지금은 전기 없이 또는 비싼 전기료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만, 일단 편함을 맛본 후에는 불편을 견디기가 훨씬 어려운 법이다. 특히 해 진 다음의 범죄를 또다시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면 원자력 발전을 당장 멈추어도 설마 죽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참고로, 나는 원전 중단보다 화력발전 중단에 의한 지구온난화 예방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는 1인이다. 원전사고는 국지적 피폐화이고, 지구온난화는 전지구적 멸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파리 기후협약을 가비얍게 탈퇴한 트럼프, 거 참.

  원전 오염수 방출에 관한 진보적 과학자가 TV에 나와서 문제없다고 한 적 있다. 그 양반 말이 맞다. 몇 백만 톤의 오염수가 해발 몇 백 미터 아래의 파이프 라인을 통해 곧바로 해류에 합류한 다음 태평양을 한 바퀴 돌고, 남극해를 거쳐 아프리카 남단을 기점으로 일부는 대서양으로 빠져나가고, 일부를 뺀 좀 더 많은 나머지가 인도양을 통과해 다시 태평양으로 와서 우리나라 황해에 머물기도 하고, 동해로 빠지기도 하고, 다시 일본 동쪽 태평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무려 몇 백만 톤의 오염수가. 그럼 바닷물 속에 오염 성분이 들어 있겠지? 맞다 들어 있다. 얼마만큼이냐 하면 0.000000…퍼센트. 이게 TV에 출연한 진보성향 과학자가 한 말이다. 한 TV 방송에서 그래픽으로 설명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하, 거참, 그런 현혹이라니. 바닷속 파이프라인 배출구의 직경이 한 100미터 이상이다. 그러니 그래픽을 보는 시청자는 당장 “오염수가 저렇게 많이 배출되는 거구나!” 경악을 할 수밖에 없지. 오에 겐자부로도 그랬고, 오늘 《헌등사》를 쓴 다와다 요코도 그랬다. 그들이 하는 말이 0.000000…퍼센트도 오염은 오염이지 않느냐, 하는 것. 다시 부등식 하나.

  0.000000…퍼센트 > 0

  이 부등식은 틀렸다. 수학적으로 0.000000…퍼센트 = 0. 통계학적으로 0.000000…퍼센트와 0의 차이는 의미가 없다. TV에 나왔던 진보 성향의 과학자가 한 말이 바로 이거다. 통계학적으로, 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몇백만 톤의 오염수 방출은 그것만으로 바다를 오염시킬 수 없는 거다. 수학적으로 어떻게 저 부등식이 틀렸는지 설명해드릴 수 있는데, 너무 길어진다. 정 궁금하면 개별적으로 연락주시라. 과녁에 절대 도달하지 못하는 화살의 패러독스도 깨 드리겠다. 이해하건 못하건 그건 내 책임이 아니고.

  다와다 요코는 독일인인지 일본인인지, 아니면 이중국적자인지 모르겠지만, 일본 태생의 일본인으로 태생적 원자폭탄과 원자력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사고가 외골수로 치닫고 말았다. 공군 자위대 전투기가 추락을 하는데 그게 일본에 10기밖에 남지 않은 원자력 발전소 지붕 위로 정확하게 떨어져 폭발한다고? 당연히 그럴 수 있지. 다만 확률이 0.000000…퍼센트 = 0 이라서 그렇지. 이건 소설이다.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전혀 가능하지 않은 전제를 깔 수도 있다. 그게 작가의 권리이니까. 불만은 없는데 책 한 권을 몽땅 같은 주제로 해 놔서 내가 심통이 좀 났던 거 같다.

  생각보다 우리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진복자가 진짜, 진짜 많다. 그걸 신념처럼 믿는 진복자들. 진짜로 복받은 이들. 좋겠다. 그저 1찍이나, 2찍이나, 정치가 과학적 진리 위에 있다니까. 신도들을 보는 거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복, 진복 많이 받으시라.



  지난 초봄에 건강검진 받고 근 30년 꼬리표를 달고 다니던 지방간이 싹 없어졌다는 결과를 듣고 너무 기분이 좋아 다시 만날 쐬주를 장복했다가, 12월 들어 또다시 절주 중이다. 그랬더니 시간이 많이 나는 바람에 요즘 독후감이 길어지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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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5-01-28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지방간 탈출하신 거와 쐬주 가끔은 드실 수 있으시다니 말입니다^^
저도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의 방향이 궁금했는데 쓰신 글을 읽고 나니 조금 감이 오네요.
아직은 원자력 발전을 해야한다는 것을 수긍하지만 다른 에너지원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아쉽네요. 저흰 태양열 발전을 하고 있는데.... 대규모 발전이 우리나라 지형상 어렵단 단점이 있군요. 잘 읽고 갑니다. 즐거운 명절 되세요.


Falstaff 2025-01-28 11:0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지방간. 꽤 오래 고생했습니다만 이젠 남의 이야기입니다. 몸무게만 빼면 될 것을... 근데 그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ㅋㅋㅋ
현재 태양광 기술 가지고는 거의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혁신적인 태양광, 풍력, 조수 발전 등 자연의 힘을 빌릴 수 있는 전기생성에 획기적이고 또 획기적인 기술이 개발되어야할 거 같습니다.
저는 원자력발전 말고, 화석연료 발전을 더 빨리 해소해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올해 여름이 작년 여름보다 얼마나 더 더울지 벌써 걱정이 된답니다. 이제 백수거든요. 전기요금 부담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화력발전을 더 하면 할수록 지구온난화는 2차 함수적으로 급상승할 것 아니겠습니까.

stella.K 2025-01-28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밤이 너무 밝잖아요. 거 좀 약간 줄이고, 몇년 전에 전등 10촌가? 몇초 끄기 만으로도 에너지를 줄였다는데 예전에 민반공훈련도 했던 저력있는 나라에서 가전제품 사이즈 안 줄여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우리나라는 전쟁나 폭격 맞기 전까지는 옛날로 절대 못 돌아가죠. 우리 때 에어컨 있는 집이나 틀 수 있는 건데 요즘 아이들 그거 절대 이해 못 하잖아요. ㅠ
암튼 간 회복하신 거 축하합니다!^^

Falstaff 2025-01-29 09:50   좋아요 1 | URL
10초 끄기 가지고는 택도 없을 겁니다. ㅎㅎㅎ 편의성을 맛본 사람들이 과연 후퇴할 수 있을지, 이거 어려운 문제 아닐까요?

우끼 2025-01-29 0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혹과 선동에 넘어간 전복자의 신념..ㅎㅎ 시니컬하네요.
이미 본문에도 언급하셨지만, 원자력 발전소는 1차적으로 인근 지역에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히고 있어요.
대형사고가 나지 않은 발전소 인근 주민들도 방사능 질환인 갑상선암 확률이 높은 상황인데요. 때문에 탈핵을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노동자들과 인근주민들은 피폭위험에 항시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원자력 발전소로 생산된 전기는 그 지역에서 사용하는 게 아니라서, 송전을 해야 해요. 송전과정에서 많은 전력이 유실되지요. 그걸 송전하기 위해 송전탑도 세웁니다. 때문에 송전탑 인근 주민의 암 발생률도 높아요.
내 안전과 편리가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할 수밖에 없다면, 다시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말하려면 다른 존재의 피해를 당연시하는 시스템의 문제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혹과 선동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대형 사고날 위험은 확률싸움일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피폭되면 피해는 100%인걸요.

히로시마 원폭피해자 3세들은, 피폭때문에 피해를 입은 상태인데도 아직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내부피폭은 대물림된다고 하지요..
1980년대에 원자력 발전소 노동자의 아이가 2회 무뇌아가 탄생한 적이 있었어요. 그 후 한수원은 핵발전소가 원인이 아니라고 말을 했지요. 그 사건 이후로도, 대형사고는 아니더라도 사고는 있었고, 심지어 부품을 빠뜨린 경우도 환경단체와 시민들이 밝혀낸 바가 있습니다.
후쿠시마 핵오염수는, 심지어 관리된 오염수도 아니므로 어떤 핵종이 어떤 농도로 들어있어서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몰라요. 도쿄전력이 핵오염수 방출 전에 낸 보고서에 IAEA는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다고 말했지요.
지구온난화 가능성을 과학자들이 언급한 건 1970년대로 알고 있어요. 그당시엔 지구온난화는 가설 중 하나였어요. 오히려 태양과 멀어지기에 추워질 것이다. 빙하기가 올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죠. 이렇게 지구가 넓고 대기가 큰데, 인간이 내보내는 이산화탄소 배출량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을 수 있어요. 지금은 기후재앙을 당연한 상황으로 받아들이지요. 방사능도 마찬가지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때가 되면 이미 늦으니, 지금부터라도 사용하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구요...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는 방안을 어떻게든 논의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미 늦었다고도 생각합니다만, 이 이상 늦지 않기 위해서라도요.
이 와중에 포스코는 작년에 석탄화력발전소를 기어이 완공하여 가동도 한걸로 알고 있으나……

Falstaff 2025-01-29 09:58   좋아요 0 | URL
아이쿠, 긴 댓글을 써주셨군요.
원자력발전과 화석연료화력의 단점은 많이 학습이 된 거라고 생각합니다.
송전은... 태양발전, 풍력발전도 송전이 필요하니 특별하지 않고요.
포스코의 화력발전은, 철강과 반도체만큼 전기를 많이 사용하는 산업도 별로 없는데, 전력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고 판단하면, 기업 입장에서 발전소를 짓는 건 당연합니다. 짓지 말라고 하면 하는 수 없이 공장을 다른 나라로 옮겨야 하고요. 여기서 실업율 증가 운운은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인간종만큼 오래 번창한 포유류도 없습니다. 실컷 즐기다가 자기들이 만든 핵이든지, 이상기온이든지, AI든지 하여간 끝까지 즐기다가 이제쯤 멸종하는 것도 아쉽지 않을 듯합니다.
전기 사용량의 대량 감축은... 가능하겠어요?
독일을 봐라! 이런 의견도 있는데, 이웃 프랑스에서 원자력으로 생산한 전기를 비싸게 사서 쓴다는 겁니다. 국가간 님비 같아서 좀 웃깁니다.

우끼 2025-01-29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 짓든 다른 나라에 짓든, 화석연료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량은 같지 않겠습니까? 누가 가까이서 피해입고 황폐화되느냐의 차이이지요.. 물론 배출된 이산화탄소 총량을 생각하면 가까이 있는 사람만 피해입는 것은 아니겠지요. 철강, 반도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필요한 산업이냐고까지 물을 수밖에 없겠네요.. 기업에 의존해야하는 지금의 일자리 시스템도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구요. 그와중에 많은 땅을 적은 농업인이 농사지어서 먹여살리는 문제도 있구요. 그렇게 농사지으면 또 땅이 황폐화되어 오래 농사짓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지요...
한편으론 해마다 쏟아지는 산업폐기물 량이 어마어마한데, 그걸 빈땅처럼 보이는 농촌마을에서 구매하여 땅에 묻는다더라구요. 겉보기엔 아무문제 없어보이지만 인근 농사짓는곳까지 유독성물질이 흘러들어오면 아무리 해도 농사짓긴 어려워지는 거구요. 그걸 막으려 애쓰지만, 산업폐기물이 계속 생산되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요..
이대로 가다간, 가까운 미래에 식량문제가 걱정이기도 합니다. 안그래도 기후변화로 농산물 수확량이 줄었다고 9월 기후정의행진에서 발언하는 농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현재는 누군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게 전제로 정책이든 의사결정이든 진행되는데, 그걸 결정하는 사람들은 그곳을 터전으로 삼아 가열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외지인들이고요. 어차피 결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피해가 오지 않는 사람들요.
이미 에너지나 주거권 이동권에서 배제된 존재들도 의사결정에서 배제되어 있구요.
이대로는 괜찮지 않으니 어떤 생존방식이 가능한지, 자연이든 지역이든 대상화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행위자로서 대우하여 함께 의사결정하는 방도는 무엇일지 고민하는게 광장에서건 다른곳에서건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말로만 민주주의가 아니라 어떤 것이 민주주의일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기업은 돈이 많으니, 어떤 상황에서건 답을 찾겠지요. 그 결과가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하기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기업의 전환도 필요하고 의견을 들어야겠지만, 그게 그들의 논리를 온전히 수용해야한다는 의미만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2024년에 한국에서 열린 후쿠시마 핵사고 13주기에 열린 에너지 전환 대회에 온 독일분들이 있었어요. 독일에서 탈원전 해놓고 이웃 원자력 생산전기 사다 대부분 전력 충당한다는 이야기 거짓뉴스라고 말한걸 들은기억이 있어서요.
기사로 나온 내용을 찾아보니 2024년 시사인 기사에, 우크라이나 전쟁등의 이유로 2023년에 독일이 2.5%전력을 수입했고 그중 35%가 원자력이라 하네요. 2023년 기준 2.5%의 35%수입도 국가간 님비라고 보지 못할 바는 없겠으나..
21년,22년의경우 프랑스에 독일이 에너지 수출했다는 기사도 있네요.
독일의 사례가 참조점이 될 수는 있겠으나, 한국과 독일의 상황이 다르기도 하구요. 독일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민들이 탈핵을 주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참고로 태양광은 대량송전보다는, 그지역에서 생산 그지역에서 소비하는 방식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전력생산량도 들쑥날쑥하구요.
 
바질 이야기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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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 아이가 청소년 시절을 관통하여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그린 연작단편집. 모두 아홉 편으로 쓰였는데 핏제럴드가 더 오래 살아 이야기들을 다 합해 장편소설로 다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잠깐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긴, 그냥 이대로 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틀림없이 핏제럴드가 내 취향인 듯한데, <위대한 개츠비>는 우리말 문장하고 맞지 않는지 어찌 제 맛을 알지 못해 다른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다고 작심하고 해와 달만 보내고 있으며, <밤은 부드러워라>도 틀림없이 내 취향이라는 것만 확인했을 뿐 목불인견의 우리말 문장이 공포스러워 이것 역시 다시 읽어봐야겠다, 마음만 먹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나한테 핏제럴드는 하여간 뭔가 꼬여 있는 작가인 것이 틀림없다. 누군가의 지도편달 없이 함부로 책을 읽은 것에 기대 말해보자면, 핏제럴드는 미국문학의 고전이라기보다 한 상징 또는 우상이라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이이 또래 작가라면, 같은 나이의 존 더스 페서스와 세 살 아래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꼽을 수 있어서 흔히 “잃어버린 세대”의 맨 앞줄에 세우고 있는데 어찌 그렇게 작풍들이 다를까 싶다. 이 가운데 제일 개인적이고, 젊음 속에서 갈등하며, 발산하다가 좌절하기도 하는 이가 핏제럴드,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더스 페서스와 헤밍웨이는 고전이 될지라도 핏제럴드는 그깟 고전 대신 하나의 우상으로, 상징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제목만 읽고 향신료로 쓰는 한해살이 풀 - 바질이구나, 핏제럴드가 음식이나 먹는 이야기를 쓴 모양이지? 아마 에세이겠다,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1번 타이틀을 달고 출간했다니, 그러면 읽어봐야 하는 거다 싶어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었다. 흠. 좋은 걸! 핏제럴드의 장편은 위에 쓴 이유 때문에 감격하는 데 실패했고,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단편집도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오호, 마음에 든다. 책을 읽는 데는 독자인 내가 왕이다. 내 마음에 들면 최고고 아니면 꽝인 거다. 근데 바질이 한해살이 풀 이름이 아니었다. 단편소설 아홉 편의 주인공 이름이 바질 듀크 리, 이 아이의 성장기를 쓴 바질 이야기였다.

  바질이 반바지를 입고 다니던 열한 살 시절의 일화를 그린 첫 작품 <그런 파티>. 핏제럴드가 애초에 바질을 주인공으로 해 연작을 쓰려 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맨 첫 작품에서 되바라지기 시작한 바질이 여자 아이들의 이마나 뺨에 키스를 할 수 있는 게임을 한 번 경험하고, 에그머니 이거 참 바람직한 게임이네 싶어서 바로 다음날 다시 파티를 열고자 하는 작고 작은 에피소드인데, 당시 매체가 열 살, 열한 살 어린이의 키스게임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퇴짜를 놓았고, 핏제럴드는 이름을 바질에서 ‘테런스 팁턴’으로 바꾸어 다시 제안했지만 결국 팔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첫 작품도 주인공이 바질이 아니라 테런스로 표기되었으며, 독자는 이게 온전히 바질 듀크 리의 연작 성장소설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다.


  책을 읽으면서 약간 혼란스러운 것은, 남자 아이들이 겪는 사춘기는 거의 완벽하게 이해가 되지만, 이들이 사랑과 성에 눈을 뜨는 시기에 그 대상이 되는 사춘기의 여자 아이들의 심리적 변화와 태도는 여전히 그리고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는 거. 여성 독자의 경우에는 내 반대 입장일 수도 있겠다. 정말 사춘기 남자애들이 이럴까? 맞다, 정말 그렇다. 핏제럴드 본인은 허약 체질에 체구도 작아 스포츠는 구경하는 데만 몰두한 대신 작품 속 주인공 바질을 자기의 평생 로망인 작은 체구의 뛰어난 축구스타로 만들어 놓고, 엉뚱하게 장래 희망이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 장관을 거쳐 최연소 대통령을 할 것이다, 실크햇과 망토를 휘날리면서 뉴욕 금융가의 금고를 터는 신사 괴도 루팡을 선망하기도 하며, 눈만 한 번 찡긋하면 동네 예쁜이들이 줄을 서서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키스를 빈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공상도 한다. 이건 유년 시절부터 여자 아이들과 비교해 빈도가 높은 혼자 놀이에 익숙할 때부터 내려오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오은영도 아니면서.

  그러나 틴에이지에 접어들면, 이런 공상이 말 그대로 공상일 뿐, 현실은 아무리 돌팔매질해봐야 언제나 요지부동이어서, 예일대학은커녕 삼각지 대학도 언감생심이며, 동네 예쁜이는커녕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사는 보람이, 슬기, 다정이조차 내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이러면서 슬슬 인생을 배우는 거다. 인생 배우는 게 뭐 있어? 깨지면서 크는 거지. 어디서 칭찬 한 마디 들으면 아무한테나 조금 살을 더 보태 침을 튀면서 마치 세상이 자기 것이 될 것처럼 으스대고, 자기 나름대로 좀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할 뿐임에도 듣는 사람 귀엔 세상 둘도 없이 아니꼽게 들리리라는 건 생각도 못하는 게 바로 으스대는 건데, 그게 얼마나 꼴불견인지 당연히 몰라, 자기 스스로 왕따의 길을 걷기도 하는 거, 그게 인생이지 인생이 별 거야? 그래, 그렇게 크는 거다. 아, 어쩌면 나하고도 그리 많이 비슷한지.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스콧 핏제럴드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아니면 적어도 사는 데 어려움이 거의 없는 중산층 이상이다. 이 책의 바질도 그리 큰 부자는 아니지만 죽은 아버지가 물려준(핏제럴드의 경우 엄마가 외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재산을 운용하여 얻는 수익으로 열다섯 살이 되자 (핏제럴드와 같은)고향 세인트폴을 떠나 뉴욕 근방의 명문사립학교인 세인트레지스 스쿨(작가는 뉴먼스쿨)로 유학하고, 뮤지컬인 것처럼 보이는 공연을 관람하며 인생을 즐긴다. 다른 작품에서도 소비생활 하나는 끝내주게 만끽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향유한다. 독후감을 읽는 분은 내가 계급에 대해 과하게 예민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글쎄 그게 눈에 보이는 걸 어쩌랴. 이 책에서도 자산 운용에 문제가 생겨 엄마가 큰 손실을 입게 되어 예일대학 말고 주립대 가면 안 되겠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될 때 바질이 기어이 예일을 가고 싶어서, 내가 보기에는 심각하게 진지하지는 않은 수준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나름대로 애를 썼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조금 우습. 그렇게 일을 하고, 마음에 드는 아가씨와 데이트를 하기 위하여,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아가씨한테 대타를 보내기 위해 두 주일 동안 일한 임금을 대가로 쓴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거지. 하긴 아직 사춘기 소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이렇게 대가리 커져서 어떻게 사업을 하다가 백만장자가 되면 기어이 미스터 갯츠비 꼴이 난다는 거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바질은 11세, 13세, 15세, 16세, 17세. 초등학생이었다가 꿈에도 그리던 예일대학 프레시맨까지의 성장소설이니 위에 쓴 것처럼 엄격하게 읽지 말기.

  읽는 내내 키득거리고, 고개를 끄덕거렸으면서 한편으로는 짠했다. 십대 사춘기 시절의 중구난방과 야단법석, 그리고 좌충우돌. 수많은 실수와 잘못과 작은 거짓말과 기타 등등. 앞으로 20년이 가고, 30년이 가고, 40년 그리고 더 오래, 아마도 기억이 남아 있을 때까지 어쩌면, 어쩌면 사는 내내 가슴 속에 깊이 남아 불쑥 떠오를 때마다 쥐어짜는 아쉬움, 후회, 안타까움으로 먹먹하게 만들 자잘한 것들의 기억을 가는 먹줄로 새겨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절의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던 진흙탕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가슴이 쿵 무너진다. 나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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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1-27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그 바질이 아니었군요^^
마지막부분 공감합니다.

Falstaff 2025-01-27 11:21   좋아요 1 | URL
제가 음식(또는 향신료)에 관한 에세이라고 생각한 것도 일리가 있지요? ㅎㅎㅎ
뭐 다 그렇게들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
 
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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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아일랜드 리머릭 카운티의 해안 및 절벽 구조대원 아버지와 성인 문맹퇴치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폴 린치 Paul Lynch는 유럽의 명문학교인 더블린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해 영어와 철학을 전공하다가 중도에 때려치우고 만다. 이후 지금은 폐간된 선데이 트리뷴에 들어가 부편집장과 수석영화평론을 하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두 다섯 작품을 발표했는데 2023년에 부커상을 받은 <예언자의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폴 린치는 시리아 내전과 내전에 따른 난민문제, 곤경에 처한 난민에 대한 서방세계의 무관심에서 작품의 힌트를 받아 <예언자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아직 직장에 다녔다면, 이 책은 아마도 우리나라 시장에 나오자마자, 2024년 11월 23일이나 24일 정도에 다 읽고 독후감까지 썼을 것이다. 대신 나는 11월 18일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하고 다른 책들과 함께 12월 중순에 받아 읽었다. 그렇다, 날짜가 중요하다. 전 같으면 읽었을 시기인 11월 24일과 진짜로 책을 읽은 오늘 12월 중순 사이에 우리나라에는 20대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 책 <예언자의 노래> 속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은 극우 정당인 국민동맹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비상대권법을 발효해 아일랜드의 헌법을 정지시켜 버린다. 책에서 말한 ‘비상대권법’이 12월 3일 밤에 잠깐 발효되었다가 곧바로 사라진 우리나라의 비상계엄과 같거나 매우 유사한 법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12월 3일 이후에 이 책을 읽은 우리나라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인공 아일리시 스택에 감정을 몰입할 수 있었고 비상대권법을 근거로 공안당국이 저지르는 폭력에 더욱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이 비상대권법을 발효한 시기는 영국이 브렉시트를 선언한 다음이니까 2020년 이후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아일랜드의 통화는 유로화고, 영국령 북아일랜드는 파운드화를 사용하니 이 의견이 옳을 것이다. 21세기 들어 아일랜드는 기록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세제 개편을 단행하고 세계최고 수준의 지원을 약속해 숱한 다국적기업이 아일랜드에 공장도 짓고, 사무실도 내고, 심지어 위장전입까지 서슴지 않아 2020년대의 아일랜드는 유럽에서도 속으로 알찬, 알부자 나라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다. 2022년 기준 1인당 GDP가 9만7천여 달러로 세계 2위에 올랐다. 이 마당에 아일랜드에서, 집권당이 아무리 우익 보수 골통을 넘어 히틀러의 사생아라고 하더라도 정말 비상대권법을 발효해서, 이에 반대하는 숱한 사람을 체포, 구금, 그리고 유사이래 보지 못한 첨단 고문에 이은 살해, 학살을 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것이다. 근데 그걸 누가 알아? 2024년에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이 떨어질 줄 누가 알았느냐고? 난 그날 밤 술 취해 자고 있다가 마누라가 흔들어 깨워 계엄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리 귀를 쫑긋해도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지 않기도 하고, 나 혼자 죽으면 억울하지만 전쟁 터져서 함께 죽으면 그나마 덜 억울하다, 잠이나 자자, 계속 잤다는 거 아니냐 말이지. 김정은이 쳐들어오는 거 말고는 비상계엄을 때릴 이유가 없잖여? 안 그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일랜드에서 비상대권법과 연이어 체포구금, 고문과 대량학살을 상정하는 건 조금 무리다. 비상대권법에 반대하는 반군들이 정부군과 비슷한 수준으로 무장해 정부군과 싸울 수 있는 환경이라면 애초에 비상대권이건 비상계엄이건 시도하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처음부터 의아했다.

  또 하나의 궁금점은, 의회민주제 하의 집권당인 국민동맹당이 왜 비상대권법을 통과시켰을까, 하는 점이었다. 작가는 여기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물론 이걸(비상대권법을 발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건 역사학의 범위겠지만, 독자도 이에 관해 작은 힌트 정도는 알아야 되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 그것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그리하여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집권당에 의한 비상대권법이 처음부터 정당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독자에게 주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점. 혹시 알아? 누백년, 누천년간 아일랜드를 식민 지배했던 잉글랜드가 또다시 군사적 도발을 획책하고 있었는지. 대처 수상도 아르헨티나의 작은 섬 포클랜드 때문에 전쟁을 벌였던 적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다. 영국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라다. 신사의 나라? 웃기고 자빠졌네.


  하여간 작품 속에서 정부군은 나쁜 너네편이고 반군은 착한 우리편이다. 착하기는 하지만 내전 기간이니 정부군만큼 거칠다. 어쩔 수 없다.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판에 이 사정, 저 사정 다 봐줄 수는 없는 거니까. 이런 의미에서 비슷하게 거칠다는 뜻이다.

  주인공은 아일리시 스택 여사. 분자세포 생물학 박사로 연구소의 중요부분 임원으로 근무하다가 작품 중간쯤 가면 정부에서 점지한 낙하산에 의하여 해고당한다. 이이한테는 네 아이가 있다. 첫째가 열여섯 살이었다가 열일곱 살이 되는 아들 마크. 둘째가 딸 몰리. 셋째는 열두 살 사내아이 베일리. 막내는 늦둥이 아들로 이제 이가 나기 시작하는 벤. 남편 래리는 아일랜드 교원노조 부위원장이다. 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이제 교원노조 전임으로 옮겨 교사 업무는 하지 않고 노조일에 전념하고 있다. 당연히 진보진영에 속해서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비상대권법에 반대하여 며칠 후 교원을 비롯한 대중 행진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니까 소위 비상대권법이 발효되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소설의 앞부분은 아일랜드 또는 유럽의 한 나라에서 극히 비정상적인 정치적 집단이 괴물 같은 비상법을 선포하고, 이에 따른 후속조치를 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읽힌다. 아직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닐 때, 남편 래리는 물론이고 아직 맏이 마크도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시간에 현관을 두드리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가르다 치안국(Garda Siochana: GNSB)의 깡마르고 팔팔한 젊은 형사 버크와 나이들고 뚱뚱한 스탬프. 이들이 남편이 집에 있느냐, 언제 들어오느냐를 묻고, 없다,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답을 듣고는 명함 한 장을 건네면서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전화 부탁한다는 말을 전한 후 점잖게 돌아간다. 래리가 돌아와 이 말을 전했고, 마크도 돌아와, 모든 가족이 잠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불안한 래리는 조용히 혼자 일어나 옷을 입고 경찰서로 자진 출두해 스탬프 형사를 찾아간다. 이들은 구면. 래리는 더블린대학 축구팀 미드필더였고, 스탬프는 게일스대학 축구팀이었는데 이 해에 게일스가 더블린을 무참하게 깨버렸단다.

  스탬프는 말한다. 스택의 행동은 국가에 불화와 동요를 심는 것으로 이 일을 하는 사람은 국익에 반하는 단체의 요원이거나, 무슨 짓인지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일 터인데, 어느 경우든 결국은 국가의 적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당시의 양심을 잘 살펴보고 지금이 그런 경우가 아닌지 확인하기를 강력히 권고한다고. 이 정도면 세계 2위의 GDP를 자랑하는 부유한 나라의 형사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 까지다.

  래리 스택은 집에 돌아왔고, 숱한 노조원의 연속적인 행방불명에도 불구하고 교원노조의 행진 시위를 추진하면서 점점 초췌해지고 황폐되어간다. 사방에서 옥죄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눈길과 협박. 그럼에도 래리와 교원노조는 일정에 맞추어 정말로 행진 시위를 강행하고, 아일랜드 경찰과 정부군은 기마대, 그리고 최루탄을 쏘아가며 이들을 폭력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래리는 당국에 체포되고 이후 작품 속에서 종적이 사라진다. 주인공이자 아이들의 엄마인 아일리시 스택은 그래도 남편이 열악하기는 하지만 특정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것이라 마음을 다스리면서 자기가 당장 맡아야 할 큰 의무, 네 아이들을 탈 없이, 무사하게 간수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게다가 치매가 어느 정도 진행된 것처럼 보이는 친정 아버지도 돌봐야 하고.

  이후 비상대권법 하의 아일랜드는 유럽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그것도 1970년대 이전의 라틴 아메리카 독재자들 치하와 비슷한 분위기로 점점 악화된다. 이를 대서양 넘어 스택 가족보다 더 상세하게 관찰하고 있는 이가 있으니 ‘아냐’라는 이름의 아일리시 스택 여사의 동생. 동생은 캐나다에서 치매가 있는 늙은 아버지와 언니 가족을 아일랜드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기꺼이 거금을 쓰기로 결심한다. 즉, 앞에서 말한 시리아 내전 당시의 난민 문제를 거론하기에 이른다. 내전 측면에서는 시리아의 예를 따르고, 비상대권법으로 상징하는 독재는 라틴 아메리카의 예를 따른 작품이라고 봐야 하겠다.

  이 정도면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 지는 다 짐작하실 수 있을 터.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열여섯 살인 맏아들 마크는 체제에 반대하는 래리 스택의 아들이라는 죄 때문으로 보이는데, 의학이나 법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영민한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열일곱 살 먹는 생일 다음날 아일랜드 정부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떨어졌고, 엄마는 이모의 도움으로 북아일랜드로 탈출하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 래리 스택의 아들로 그럴 수 없어서, 콱 반군에 가입해버린다. 그리고 역시 조금 시간이 지나 작품에서 사라지지만 죽은 것 같지는 않다. 당연히 마지막 장면은 가르쳐드릴 수 없다. 하긴 열린 결말이라 어떻게 끝나는 지는 독자가 상상하기 따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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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1-24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F. 스콧 피츠제럴드, 《바질 이야기》
화요일. 다와다 요코, 《헌등사》
목요일. 올가 토카르추크, 《기묘한 이야기들》
금요일. 레오 페루츠, <9시에서 9시 사이>

stella.K 2025-01-2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과 겹치는 부분이 있네요.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정말이지 요즘처럼 나라꼴 잘 돌아간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바닥을 봐야하나 싶은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뭔가의 통찰력을 얻게해 줄런지 암튼 관심이가네요.

Falstaff 2025-01-24 16:03   좋아요 0 | URL
아휴, 답글 썼다가 지웠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합죽이가 되려고 합니다. ㅋㅋㅋ 합!!

stella.K 2025-01-24 16:15   좋아요 0 | URL
ㅎㅎ 아, 왜요? 이럴 때 하시는 거지 또 언제하겠습니까? 아쉬운데요? ㅋㅋㅋ
 
울프홀 1 - 맨부커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작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1
힐러리 맨틀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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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크롬웰, 하면 나는 청교도 혁명 시절에 패권을 쥔 올리버 크롬웰을 연상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을 겸했던 스튜어트 왕가 찰스 1세의 목을 뎅겅 잘라버리고 스스로 최고 권력자인 호국경의 자리에 앉았던 난세의 영웅. <울프홀>의 주인공은 이 올리버 크롬웰의 먼 친척이라고 하는데 말이 먼 친척이지 110년 이상 나이차가 나 올리버의 증조부나 고조부 뻘인 토머스 크롬웰 제1대 에식스 백작이다. 성이 같다고 직계 후손은 아니다. 위키피디아는 올리버가 토마스의 누나 캐서린 크롬웰의 외증손자라고 쓰여 있다. 근데 성이 같다고? 그렇다. 착한 누나 캐서린이 여러모로 좋은 남자인 모건 윌리엄스와 결혼해 리처드를 낳았는데, 리처드가 소년시절일 때 당시 잉글랜드를 휩쓸던 역병에 걸려 남편이 죽는 바람에 조카를 토마스 크롬웰이 거두어 키운다. 리처드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닫는 총명한 소년이었다가 재기가 번득이는 청년으로 성장하며 외삼촌 토머스 크롬웰을 거의 최상급 수준으로 보필한다. 그러던 하루 리처드 윌리엄스가 외삼촌에게 다가와, 이왕 외삼촌이 자식처럼 키워주는데 이름을 윌리엄스에서 크롬웰로 바꾸겠다고 제의했고, 토머스 크롬웰이 이를 수락하여 리처드 크롬웰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애초 가정폭력을 최고의 취미생활로 여기던 대장장이 아버지 월터 크롬웰 선생한테 맞아 죽기 일보직전에 매형 모건 윌리엄스가 뒷돈을 대주어 대륙으로 도망한 토머스 크롬웰과 달리 올리버의 진짜 혈통인 윌리엄스 가문은 귀족 끄트머리 떨거지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책 속에 다 나온다.


  대장장이 아버지 월터에게 심각한 수준으로 폭행을 당한 소년 크롬웰이 매형의 도움으로 대륙에 건너가 한 일은 프랑스 군대에 입대하는 것.

  잠깐. 이 작품은 소설이다. 토마스의 아버지 월터 크롬웰이 귀족이나 젠틀맨이 아니었던 건 맞지만 할아버지가 양모가공업을 하고 윔블던 지역 저택에 살며 규모는 확실하지 않으나 지주였던 걸로 보아 소설처럼 막 나가는 종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위키피디아는 월터 크롬웰을 “성공한 상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16세기의 야만스러운 잉글랜드 사람 답게 죽을 죄만 아니라면 법을 위반하는 것을 꺼려하지는 않았지만. 반면에 소년 토머스는 책에 나오는 대로 어린 싸움꾼이었던 건 확실한 듯하다. 소년 크롬웰은 (책에서처럼 아버지한테 맞아 죽기 직전에 도망한 것이 아니라) 심하게 싸움을 했던지 하여간 처벌을 피하기 위해 영불해협을 건너 플랑드르에 도착, 프랑스군에 입대한다. 처음엔 전투병과에 복무하다가 보급병으로 옮겨 최초로 회계 장부의 세계로 접어들 계기를 잡는다.

  프랑스군에서 제대하고 이탈리아로 넘어간 크롬웰은 16세기에 만발한 르네상스 문화를 직접 몸으로 만끽하면서 인본주의에 대하여 개안하는 한편, 피렌체의 은행가 프레스코발디 가문에서 본격적으로 금융업과 함께 “인류가 생산한 가장 중요한 과학 가운데 하나인 복식부기”를 배운다. 작품 속에서 크롬웰은 이탈리아 시절에 회계 장부, 금융,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평생의 자산이 될 남다른 기억력을 키우는 법을 배웠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다양한 유럽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계기. 언어는 세월이 가면서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부터 5백년 전의 유럽엔 각양각색의 언어가 있었고, 영국만 해도 웨일즈 사람이 하는 말을 잉글랜드 사람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스페인의 16세기 카스티아, 발렌시아, 바스크 등등의 언어 등을 대강이라도 이해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작중 크롬웰은 지금의 영국, 스페인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언어를 (내 수준에는) 통달하다시피 했으니 언어능력도 싸움실력 만큼 대단했던 모양이다.

  훗날 헨리8세의 최측근으로 왕의 첫번째 부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혼인무효 소송을 만들어내고, 앤 불린을 왕비의 자리에 올렸으며, 의회에서 수장령을 승인받아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완수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역사를 토머스 크롬웰의 시각으로 쓴 것이 이 책 <울프홀>이다.


  튜더 왕조의 헨리8세가 아직 클레멘스 교황이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앤 불린과 결혼식을 올린 1533년의 잉글랜드는,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중종 말기였는데 조선과 달리 왕과 신하들의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하지 않아 그랬는지 우리의 왕조실록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빈약한 자료만 있어 그만큼 허구로 채울 공간이 넉넉했을 수도 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이 작품을 쓴 힐러리 맨틀이 <울프홀>의 다음 작품인 <시체들을 끌어내라> 후기에서 직접 한 말이다. 그만큼 맨틀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물론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겠지만, 펼치고 있고 그런 자유가 눈에 띄기도 한다. 독자는 상관하지 않는다. 재미있고 큰 줄거리가 사실과 합당하기만 하면.

  영국의 역사 가운데 헨리8세의 자유연애만큼 독자의 흥미를 끄는 것도 별로 없다. 이건 우리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세상 공통이다. 영국이 제공한 가장 유명한 재미거리 또는 스캔들이 바로 헨리8세의 캐서린과의 결혼무효소송, 동시에 임신 6개월 상태에서 치룬 앤 불린과의 결혼식, 그리고 “천일의 앤”, 맞지? “내 목이 가늘어서 힘들지 않을 거야.” 복면을 쓴 망나니를 보며 날리는 인생 마지막 멘트. 올드 팬들은 아마 거의 다 기억하실 걸?

  자신의 재혼을 위해 종교개혁을 해버리는 헨리8세. 왕 옆에 토머스 크롬웰이 없었다면 이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정신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청빈을 내세우면서도 막대한 소유권을 향유하고, 정치적으로 입법권과 파문권으로 협박하는 가톨릭이 청소년시절부터 르네상스 정신에 입각해 생활했던 크롬웰은 지극히 마땅하지 않았던 거였다. 여기에 이제 부패할 대로 부패한 성직자들의 축재와 성적 문란과 이에 따른 사생아 문제 같은 다양한 부작용 등등. 이제 가톨릭은 개혁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까지 와 있던 상태였다. 넓지 않은 잉글랜드 여기저기에 난립한 수도원과 부속 토지. 아메리카 경영으로 금과 은을 수척의 배로 실어오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날이 가난해지는 잉글랜드 왕실. 크롬웰은 가뿐하게 철가면을 쓰고 대대적으로 수도원을 정리하여 귀속재산을 왕의 금고에 쓸어 담을 수 있었던 것.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16세기 잉글랜드에서는 크롬웰 말고 이런 격한 변혁을 가능하게 할 인물은 없었다.

  3부작 가운데 1부 격인 <울프홀>은 종교개혁을 완수하고, (주로 교황청을 일컫는 바) 국외의 법령이 아니라 오직 잉글랜드의 법령에 따라 재판하며, 잉글랜드의 왕이 잉글랜드 종교의 수장이 된다는 수장령을 반포하면서, 끝까지 이 법에 반대하는 존 피셔와 토머스 모어를 참수하고 작품은 2부로 넘어간다.


  그러면, 제목 “울프홀”은 무엇일까? 성castle 또는 저택의 이름이다. 토마스 크롬웰이 평소 존경했던 토머스 모어의 참수형을 참관하고, 모어의 딸 매그에게 런던교에 전시된 아버지의 머리를 거두어 장사 지낼 수 있게 해주라는 (실제로 대단히 특별한 혜택인) 명령을 내린 후, 왕비 앤과 함께 전국 순시에 나선 헨리8세 무리에 뒤늦게 합류하기 위하여 향한 곳. 존 시모어 경의 저택이다.

  존 시모어 경은 아들-아들-딸-딸을 두었는데, 차례로 에드워드, 토머스, 제인, 리지(엘리자베스). 이 양반은 늙은이가 주책이 없어서 장남 에드워드의 아내와 수년에 걸쳐 불륜을 저지르다 아들한테 현장에서 발각된 이력이 있다. 에드워드는 열을 받아 자신의 두 아들이 진짜 자기 아들인지 아니면 동생인지 알 길이 없어 자기 호적에서 파내 사생아로 만든 다음 아내를 수도원으로 보냈던가, 친정으로 보냈던가 하여간 그랬다. 그럼에도 존 경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아들 근처에 어른거렸다가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장남 곁에서 참견을 하는 바람에 나중엔 구박을 조금 받기는 해도 아비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딸 제인은 궁에 들어가 앤 왕비의 시녀를 하고 있다가 휴직원을 내고 울프홀에 내려와 있는 상태. 궁에 있을 당시 크롬웰이 (자기 짝이 아닌) 참한 아가씨로 눈 여겨 보고 있었다가, 아니나 다를까 앤이 천일 만에 목이 날아간 다음에 헨리8세의 세번째 아내가 되어 아들이자 후임 왕인 에드워드6세를 낳고 산후합병증으로 열흘만에 세상을 등질 예정이다.

  그러니까 “울프홀”은 1부 <울프홀>을 위한 제목이라기보다 2부 <시체들을 끌어내라>를 예견하는 제목이라고 볼 수 있을 터. 앤 사후 헨리8세의 후계를 출산하는 제인의 집을 향해 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곤란함은, 나는 종교에도, 영국 왕의 바람기에도 전혀 흥미가 없는 인종이기 때문이었다. 종교(바티칸)과 국가, 왕과 교황, 사제와 정치인을 둘러싼 진흙 속 개싸움을 보는 기분이랄까. 만일 영국인이었더라면 훨씬 더 흥미진진할 수 있었겠다. 큰 틀은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운 것, 틈틈이 읽은 역사책에 나온 것들, 기타 등등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 된 내용만 가지고도 충분하다. 하물며 그것을 둘러싼 음모와 스릴, 공포, 서스펜스 그리고 하다못해 그럴 듯한 베드씬도 없는 책. 영국 왕의 바람기와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는 관심 없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뭐, 어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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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3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3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1-27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의 사극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

Falstaff 2025-01-27 11:20   좋아요 1 | URL
^^;; 전 셰익스피어 <헨리 8세>를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드릴 말씀이... ㅋㅋㅋ
 
밤에 돌다리 밑에서 열린책들 세계문학 292
레오 페루츠 지음, 신동화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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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열다섯 편과 에필로그로 되어 있는, 연작 장편일 수도 있고 단편집으로도 읽을 수 있는 책. 이 책은 1924년에 쓰기 시작해 1951년에 완성해 53년에 출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무려 27년에 걸쳐 작품을 완성했다는 이야기인데 1938년에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 후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유럽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기간이 있었다고 해도 상당히 오랜 기간이다. 짐작하자면 한 이야기를 27년에 걸쳐 끊어내고, 갈고, 다듬고, 빛을 내는 데 27년이 걸렸다기보다 중심 또는 주인공을 둘러싼 이런 저런 에피소드를 오스트리안 유대인으로 20세기 초중반 험한 시기를 관통하면서 생각날 때마다 단편 분량으로 써 놓은 것을 말년에 다시 정리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면 저절로 연작 장편이 되겠지. 나는 이 작품을 당연히 하나의 장편소설로 여겨 초장부터 메모를 하며 읽고 있다가, 첫 장부터 장편소설 치고 놀라운 속도감과 장면전환에, 이거 이렇게 3백여 페이지를 밀어붙일 수 있을까, 경기를 했거니와, 오히려 단편 연작, 즉 연작 장편이란 걸 알게 되니 차라리 안심이 되던 거였다.

  다 읽고 생각하니까, 에필로그를 빼고 열여섯 편 모두 개별적인 스토리를 갖춘 단편소설의 외형을 갖추어 충분하게 즐길 만하다. 하지만 이왕 읽을 거면 애초 작가가 27년에 걸쳐 쓰고 순서를 정한 대로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는 편이 훨씬 좋겠다는 거. 읽어가면서 아하, 그렇군. 앞 장면이 이래서 나온 거구나,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썩 좋다는 말씀. 이왕 이 책을 읽으려면 책방의 책광고나 이 책 뒤표지에 써 있는 작품소개 같은 것을 일체 읽지 말고 시작하시라. 즉,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에서 작가가 물감 묻힌 붓이 지나가는 대로 그려질 그림을 감상하시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터이니.

  지난번에 레오 페루츠를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메모를 해두었는데, 이번에 안 써먹으면 기회가 없거나, 있더라도 내가 잊을 거 같아 소개한다. 페루츠하고는 한 세대가 차이가 나는 오스트리아 작가 프리드리히 토르베르크는 페루츠의 작품 스타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프란츠 카프카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은 불륜의 결과.”

  페르츠가 카프카보다 한 살, 크리스티보다 여덟 살 많다. 그래도 어떤 의미인 줄은 알겠다.


  작품은 1589년 가을의 보헤미아, 프라하 유대인 마을에서 시작한다. 이른바 게토인데, 게토Ghetto. 십자군 전쟁 시절부터 유럽인들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심각해지자 유대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교의 명령으로 유대인 정착촌에 담장을 두르고 자치권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 애초에 게토를 만든 목적이었다. 프라하의 유대인 정착촌은 작품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죽은 후 벌어질 예정인 30년 전쟁이 되어야 본격적인 게토로 담장을 두를 것이라, 작품 속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에서는 궁중의 고급관리들도 남의 눈에 띄는 것만 애써 무시하면, 돈을 빌리거나 뜯어내거나 갈취할 목적이 아니기만 하면 천한 유대인 마을을 찾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아무 진흙 골목으로 들어가 문만 열면 되는 시대였다.

  여기까지 써 놓고 작품의 스토리를 보이기 망설여진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페루츠의 스타일이 정말로 카프카와 크리스티가 벌인 작지만 사소하지 않은 불륜의 결과물이라면, 특히 엄마가 애거서 크리스티라면, 결말을 유추할 수 있는 어떤 빌미도 언급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쯤에서 독후감을 뚝 잘라 버리기도 아쉽다. 좋다. 제일 앞에 배열한 작품 <유대인 도시의 페스트>만 소개하기로 하자.


  16세기 말. 유럽은 반세기 전에 혜성같이 등장한 가톨릭 이단 사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창해 소위 신교가 들불처럼 번졌고, 이에 못지 않은 기세로 동쪽에서 시작한 흑사병, 역병, 페스트가 창궐, 앞으로도 몇 백 년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인류 수천만 명을 거덜 낼 계획이었으며, 작품을 시작하는 1589년의 프라하에서도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까맣게 태워 죽이고 있었다.

프라하의 유대인 도시, 라기 보다는 유대인 지역에 광대 두 명이 살았다. 곰의 탈을 쓰고 곰 흉내를 내며 곰 춤을 추는 코펠. 그리고 바보 예켈레. 유럽 문학에 등장하는 광대들은 어리석고, 보잘것없으며, 미운 털이 박힐 만한 짓들만 골라 하는 바람에 주인과 객들한테 얻어 터지기를 물 마시듯이 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들의 거친 농담과 우스꽝스러운 짓은 거의 언제나 지혜롭고도 날카로운 해학과 역설을 내포하는 바람에, 언제나 내가 이야기하듯, 광대와 점쟁이들이 하는 말과 예언은 틀림없이 들어맞는다. 이 작품 속의 광대 코펠과 예켈례는 그 정도까지 현명한 소위 ‘유로지비’ 수준은 아니고 하여간 이들, 극의 광대나 점쟁이들 수준이 되어야 볼 수 있을 죽은 아이들을 목격하는 것으로 한 부유한 유대인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광대들의 주 수입원이 유대인 결혼식에 가서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짓을 해 하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일이었는데, 페스트가 창궐하는 통에 유대인들도 양심이 있어 사람이 죽어 나가는 마당이니 애도나 하자 싶어 결혼식을 하지 않는 바람에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신세가 됐다. 이들이 머리 굴리기를: 유대인 공동묘지에 그만큼 새 무덤이 생겼을 터이니, 조문객들이 망자의 영혼이 먼 길 가는 데 쓰라고 동전 푼 깨나 비석 위에 올려두었을 터, 그거라도 가져다 밥 사먹자.

  그래 유대인 공동묘지에 갔더니 정말 새 무덤이 엄청 많고, 묘비마다 다만 몇 푼이라도 대부분 동전이지만 가끔은 무려 은화도 있어서 이게 무슨 횡재, 싶었건만 이때 하얀 내복을 입은 아이들이 새 무덤 위에서 흰 빛을 내며 춤을 추고 있어서 기겁을 해 거품을 물고 도망을 쳤다. 두 광대는 자신의 목숨이 여태 붙어 있는 것이 자기들 눈으로 본 것을 알리라는 신의 뜻임을 깨닫고 위대한 랍비를 찾아가 본 것을 이실직고한다. 동전 몇 푼 얻은 것도 내놓지는 않았지만 숨기지 않고 얘기한 건 물론이다. 어두운 밤에 지혜의 서른두 개 숨은 길을 지났으며 마법으로 변신하여 인식의 일곱 개 문을 통과한 고매한 랍비는 이 유대인 구역에 죄인이 하나 숨어 매일매일 악행을 저지르고 있어서 대 역병이 도시를 덮쳤고, 이 죄인 때문에 죽은 아이들의 영혼이 무덤 속에서 평화를 찾지 못하는 거라고 설파했다.

  위대한 랍비는 광대들을 다시 공동묘지로 가게 해서 그게 누구인지 알아오라고 시켰고, 아이의 유령 하나를 꼬여 물어봤더니, “하느님 외에 그걸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바로 당신이예요.”라는 대답을 받아왔으니, 단 한 사람이 광대가 아니라 위대한 랍비, 자신을 일컫는 거란 걸 단박에 알아차린 고매한 랍비는 홀로 집을 나와 게토의 밤거리를 걸어 강으로 내려갔고, 물가를 따라 어부들의 오두막을 지나 돌다리에 이르렀다.

  돌다리 밑에는 빨간 장미 한 송이가 달린 장미 덩굴이 있었고 옆 땅에는 로즈메리가 자랐는데, 장미 이파리가 로즈메리의 흰 꽃에 닿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를 꽉 휘감고 있었다. 고매한 랍비는 몸을 숙여 로즈메리를 뿌리째 뽑아내 간음을 저지른 여자의 머리에서 마법을 풀고 로즈메리를 강에다 던져버렸다. 로즈메리가 흘러가다가 강물 속 깊이 가라앉자 즉각 유대인 거리에서 페스트가 사라졌다.

  이날 밤 유대인 거리 드라이브루넨 광장의 집에서 유대인 마이슬의 아내 아름다운 에스터가 숨을 거두었고, 프라하 성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가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꿈에서 깨어났다.


  다분히 유럽 동화를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환상적인 분위기의 작품을 레오 페루츠는 얼마나 실감나게, 동화적으로 썼는지, 읽는 맛이 대단하다. 이어지는 열네 편의 단편소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보다 더 부유한 유대인 마이슬과 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 사이를 왕복 교차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엮여 나간다. 조금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한 번도 서로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에스타가 어떻게 제국의 사치스럽고 극도로 낭비가 심한 황제하고 연결이 되는지 차근차근 알게 되니, 그걸 알아가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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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01-21 14: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지난 주 토요일에 저 이 책 받았습니다. ㅎㅎㅎ 기대됩니다. 책 다 읽고 리뷰 다시 읽으러 올게용!! 폴스타프 님이랑 읽는 책 겹쳐서 좋아요!!!!

Falstaff 2025-01-21 15:17   좋아요 2 | URL
재미있는데요, 크게 기대하지는 마세요. 저도 좋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