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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가운데 좋은 작품도 드물지 않습니다. “좋은 작품” 속에는 아마추어가 평가할 수 없는 “문학적으로 높은 성과를 지닌” 것도 있겠고,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독법” 안에서의 것도 있겠습니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문학적으로 어떻다, 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성공했다고 하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높은 박스오피스를 향유하고 있지만, 사회적인 시각으로 보면 경계해야 할 작품을 말합니다. 당연히 많은 독자들이 상찬하고 있는 책 가운데 골랐습니다. 그리하여 열 개의 높은 인기를 향유하고 있는 작품을 고른 아래 글을 다 읽으시고 팬심에 그어진 스크래치 때문에 마음 상해하실 분도 틀림없이 한두 분이 아닐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자 했을 때부터 정말로 쓰고 있는 지금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건 아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돌을 던질까, 뭐 걱정까지는 아니어도 쉽게 쓰게 되지 않더군요.

  말이 깁니다. 비난은 나중에 받는 것으로 하고 일단 시작하고 보겠습니다.





1. 존 윌리엄스, <스토너>

  진짜 착한 소설이다. 무엇보다, 잘 읽힌다. 유려한 문장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이끄는 대로 거부감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미주리 주 깡촌 시골에서 대를 이어 농장을 경영했으면 하고 바라는 부모가 없는 돈을 대 농과대학에 보냈더니 뜻밖에 영문학과 글쓰기에 놀랄 만한 잠재력이 있음을 발견하고, 숱한 고생 끝에 젊은 나이에 테뉴어가 되는 인물, 스토너의 인생. 이 한 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숱한 사람들, 특히 여성이 희생된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친구들이 죽어가는 동안 연구활동에 매진하고, 별로 사랑하지 않는 세인트루이스 은행장의 딸과 혼인하고, 젊은 여성과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한다. 스토너의 성공 뒤엔 특히 여성의 희생이 줄을 잇는다. 그런데, 독자들에겐 이런 과정이 마치 스토너가 희생자인 것처럼 읽힌다.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스토너만큼 비겁한 데다가 파렴치까지 한 인간도 별로 없다. 존 윌리엄스의 장애인과 여성을 보는 시각에 큰 문제가 있다.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면 이렇게 주장하는 것도 타당하다. "이게 책이냐!" 최루 가스 가득한 뽕짝.




2.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이 책은 읽고나서 독후감도 쓰지 않았다. 겉으로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하고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숙고해볼 것을 주장하고 있으나, 하퍼 리의 시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흑인 톰 로빈슨을 누명 쓴 범죄자라고 하는 건 뭐 전형적인 착한 미국 소설 스타일로 볼 수 있는데, 어쨌거나 착한 역의 부 래들리(2 미터쯤 되는 키에 숨어 살고 다람쥐와 고양이의 날고기를 먹고 프랑켄슈타인보다 더 흉측하게 생긴)에 대한 선입견도 서양의 동화(또는 크리스마스 영화 <나 홀로 집에 2>의 옆집 할아버지)에서 흔히 나오니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악역을 맡은 유얼 집안 사람들을 향한 시각이다. 그들은 흉한 외모에 거친 성정, 어디로 보나 친밀한 구석이 없는 완벽한 시골 도시의 하층계급이다. 난폭한 성정의 가난한 하층 계급을 가해자로 지정한 이 작품을 쓸 당시의 하퍼 리가 35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진 루이즈가 여덟 살 소녀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35세의 하퍼 리가 본 시각이 아니라 조숙하되 아직 철없는 루이즈의 시선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작가 하퍼가 나하고 같은 리李, 또는 이씨 성을 갖고 있어서 웬만하면 이 작품은 목록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지만, 선을 위해서라면 진실의 은폐도 가능하다는, 이게 60년대 초반까지 일반적인 중산층 미국인의 계급 인식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보통의 시민이라면, 인간 말종은 더러운 하층 인민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 책의 광고문구처럼 성경만큼 많이 팔리는 작품의 필자라면 작지 않은 문제다.




3.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일본계 영국인. 잠자고 있다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자기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니까 몰래카메라 찍는 줄 알았다는 소감을 남긴다. 나도 소식 듣고, 이시구로? ‘이 씨 구라’ 아냐? 했다. 내가 읽은 이시구로는 이 두 작품이 전부다. 그런데 둘 다 매우 수상하다. 전체주의를 경험하고, 그것에 의하여 좋은 영향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러웠다. <부유하는…>의 주인공인 화가 오노는 군국주의에 적극 가담한 전범으로, 일본이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지 간에 이젠 상황을 좀 더 낫게 만들 기회가 왔다고, 복구 중인 도쿄 시내를 바라보며 감격해 한다. 잘못에 관한 유감표명은 시집 못 간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장인 짜리한테 말로 한 번 하는 것이 전부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는 달링턴 가문에서 35년간 집사 생활을 한 스티븐스를 등장시켜 충실하고도 무비판적 복종의 미덕을 자랑한다. 하지만 달링턴은 나치의 수장 히틀러와도 연결이 되는 친독파이며 파시스트로 영국 내 파시즘을 신봉하는 세력의 우두머리다. 일본과 영국에서 가장 높은 정도의 전체주의 의식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변호하고, 은폐하고자 하는 이시구로를 어떻게 수상한 정치적 작가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인간의 책을 몇 권 더 읽어볼 작정이긴 하다.




4. 올가 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이 양반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하지만 이시구로처럼 나로 하여금 경멸하게 만든 작가는 아니고, 다른 작품들은 다 좋은데 이 책 딱 한 권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도 독자 마음에 다 들 수는 없겠지. 폴란드와 체코의 접경지역, 산악지방 작은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주인공은 대규모 교량 건설 일을 한 경험이 있는 퇴직 건설 엔지니어 야니나 두셰이코. 여성이다. 폴란드 전국체전에서 투해머 종목 은메달 출신이니 건장하고 아직도 힘이 장사일 듯. 이이가 개 두 마리와 함께 오직 세 가구만 있는 폴란드판 설국의 산골에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식처럼 키우던 개 두 마리가 총에 맞아 살해당하고 만다. 시간이 더 흘러도 상실감은 마음의 상처로 남았는데 주민 왕발이 죽어 염을 하는 가운데 자기 개를 죽인 인물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게 된다. 이리하여 두셰이코 여사는 개 두 마리의 복수를 위해, 작은 산골 도시의 유명인사, 심술궂기도 하고 나쁜 버릇이 있기도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기독교도들의 아버지도 있고,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서장,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모피공장 사장 등도 있다. 이에 두셰이코 여사의 사이코패스적 행동을 시작해 관련된 모든 사람을 죽이고, 시신을 훼손하기도 한다.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점을 문제 삼는 것은 토카르추크의 수려한 문장과 호소력 가득한 필력이 독자로 하여금 개 두 마리 때문에 유력자 네 명을 죽이는 사이코패스 주인공을 지지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잘 쓴 소설은 자주 이런 것이 문제다. 뭐가 중한지 독자를 현혹하는 것.




5. 코맥 매카시, <모두 다 예쁜 말들>

  이 작품을 넣을까 말까, 오래 생각했다.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이라서. 내가 평소 말하는 게 왈왈거리고 제스츄어가 커서 이 책 같은 자극적인 폭력이 출몰하는 작품을 좋아할 거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러나 아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조마조마한 스릴러나 폭력물, 하드 코어 포르노 같은 건 아예 못 본다. 이런 거 말고도 즐길 거리는 얼마든지 많으니. 처음 읽은 매카시는 <카운슬러>였다. 아무것도 몰랐는데, 매카시의 명성은 알고 있었다. ‘카운슬러’라니 얼마나 따뜻한 제목인가. 그래 읽었다가, 아휴, 거 참. 딱 한 권으로 작가를 포기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두번째 고른 작품이 <모두 다 예쁜 말들>이었다. ‘말’이 말horse인 줄은 알았다. 당시 바로 전에 읽은 게 애니 프루의 단편집이라서 비슷한 서부극인줄 알았다. 역시 코피났다. 불과 열여섯 살의 청소년이 미국 남부의 황량한 메사지역을 배회하는 장면까지는 좋았다가, 멕시코 국경을 넘어서면서 잘못 만난 동료 지미 때문에 휩싸이게 되는 감금과 폭력이 시작되자, 아주 넌더리가 났다. 매카시는 열여섯 살의 주인공 존을 큰 재난을 만나게 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보통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고, 터미네이터, 아니면 적어도 람보 비슷한 초인적 인내를 지닌 인간이나 견뎌낼까 말까 할 고통을 부여한다. 미국 소설답게 존이 고통의 의식을 훌륭하게 통과하는 건 물론이다. 뭐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미쳤나. 아무리 젊어도 안 할 수 있으면 안 해야 좋은 게 고생이다.




6. E.M. 포스터, <인도로 가는 길>

  글 좋은 작가를 한 줄로 “나래비”를 세운다면 앞쪽에서 얼마 가지 않아 포스터가 서 있을 것이다. 피렌체에 대한 선망을 심어준 <전망 좋은 방>을 제일 먼저 읽었다가 폭 빠졌다. 그러나 이후 포스터의 책을 읽을 때마다, 작품 전체로 보면 마음에 드는데, 책마다 유독 몇 군데서 신경을 긁는 경우가 생겼다. 그래서 고백하거니와, 난 여전히 식민주의, 반식민주의의 사고방식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국가도 사람과 같아서 탐욕에 끝이 없다. 언제 식민주의 비슷한 것이 다시 태어날 지 모른다. 러시아-우즈베키스탄 전쟁을 보라. 이것 때문에 <전망...> 이후에 읽은 것들에 아주 조금의 불만이 있는 수준이었다가, <인도로 가는 길>에서는 폭발하고 만다. 완벽하게 영국식 식민주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러 번 얘기했듯이 우리나라가 분단은 됐을지언정 그중 다행인 것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인도를 비롯한 승전국 식민주의자들은 쉼없이 이야기한다. 물론 덜 떨어진 일본의 민족주의자들도 이들과 똑 같은 말을 한다. 식민을 통해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너희들끼리였다면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적어도 한 세기는 더 걸렸을 거라고. 이 의견을 정확한 단어와 문장으로 설명해 놓은 작품이 <인도로 가는 길>이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어소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 그렇다. 알다시피 영국은 바로 옆나라 아일랜드를 제외하고 어떤 과거 식민지에도 사과나 유감을 표명해본 적이 없다. 근대화를 이루어주었다는 망상 때문에. 이 책에서도 포스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한다. “인도가 영국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즉시로 멸망하게 될 거”라고. 포스터가 생각하는 인도인 역시 “인도의 해방을 위한 단 한 번의 기회는 유럽에서 큰 전쟁이 다시 일어나는 일 말고는 없다”고 주장한다. 영국인들이 주장하는 인도는 이랬다.




7. 막심 고리키, <어머니>.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세 작품을 문학의 한 장르인 소설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가장 연장자인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의 주인공 베라 파블로브나는 거의 무학에 가까울 만큼 공부와 관련이 없는 여성인데 천부적으로 여성 차별 반대, 공동 생산, 공동 소비, 이익 분배 같은 기초 사회주의사상이 몸에 익었고, 신기하게도 19세기 중반에 친분을 맺는 사람들 역시 하나같이 혁명가나 사회주의자들이다. 오스트롭스키의 주인공 파벨은 단연 불굴의 투쟁 정신으로 무장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혁명에 투신하며, 고리키의 주인공 모자 역시 아무 머뭇거림이 없이 시위와 집회에 앞장선다. 이 세 명의 작가들이 만들어 낸 영웅들의 공통점은, 아무 의심이 없다는 것. 즉,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공동생산, 공동소비, 이익의 균등한 분배의 결과가 유토피아라는 진리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마르크스의 가장 중대한 오류는 사람의 본질을 너무 선하게 봤다는 점인데, 이 세 작가들의 오점은 마르크스를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예수의 유일한 공통점은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거 딱 하나다. 사회주의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또다시 권력투쟁이었다. 이 책들이 곤란한 건, 감동적인 작품이라는 점.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어가는 스토리라인. 인간을 참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굳은 신념과 행동이라고 생각하게 유도하는 절묘한 문장. 그러나 이 책들은 소설이 아니다. 의식화 교재일 뿐이다.




8.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소설이냐, 르포냐. 르포의 성격이 강한 소설이라고 해야 맞겠다. 오래 전에 읽은 <1984>는 기억이 나지 않고, 어려서부터 숱하게 만화로, 요약본으로 접한 짧은 소설 <동물농장>도 별로 시원찮게 읽었는데 <카탈로니아 찬가>에 이르러 거의 손절했다. 청소년 시절에 읽은 <동물농장> 덕에 오웰은 골통 보수 인물인 줄 알고 살아온 세월이 오래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으면서 이이가 스페인 내전에 무정부주의 당의 일원으로 참가했다는 것을 알았다. 원래는 좌파였다. 그럼 <동물농장>은 공산주의에 관한 시니컬한 우화가 아니라, 권력투쟁에 성공한 볼셰비키를 향해 비아냥거린 거였었구나, 오랜 세월 우리나라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국민들에게 사시를 유도했구나, 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나는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보이는 오웰의 두 가지 사고방식을 혐오한다. 첫째는 그의 총구. 즉 펜이 프랑코의 팔랑헤 당이 아니라 등 뒤의 동지 가운데 한 분파인 볼셰비키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전 중에 그는 끊임없이 볼셰비키에 의한 무정부파에 대한 탄압과 불공평한 지원을 시비하고 있다. 작가로서의 오웰에게는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스페인의 파시즘을 격파하기 위한 총탄’으로서의 펜이 훨씬 더 중요했다. 적전분열의 대표적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두번째는 “인간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살육과 인간의 고통”을 동반하는 전쟁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점이다. 품위가 먼저인가, 생존이 먼저인가? 품위 유지를 위하여 불특정 대다수의 죽음과 부상과 고통과 재물의 손괴를 수반하는 전쟁을 찬성한다고? 세상에 추악하지 않은 전쟁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는 내 믿음과 완전히 상충하는 작가다.




9. 필립 로스, <유령 퇴장>

  작가와 함께 늙어가는 주인공 네이선 주커먼 역시 늙었다. 암으로 전립선을 제거하여 큼지막한 기저귀를 하지 않으면 외출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전직 교수. 전립선을 제거하지 않았을 때까지는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들을 한 학기에 한 명씩 자빠뜨리던 수작질의 명수. 그러나 대중에게 인기가 높은 소설을 끊임없이 생산해낸 베스트셀러 작가. 이런 주커먼이 전립선을 제거한 환자를 위한 새로운 시술법이 소개되었다는 걸 알고 뉴욕으로 와서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작품. 소설은 숱하고 숱한 우연으로 점철되고, 필립 로스 또는 변태 노인 네이선 주커먼은 시간이 날 때마다 징징거린다. 자기가 죽은 다음에 자신의 생애나 작업물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확 얘기해버리고 말겠다. 소설 자체로 봐도 이미 필립 로스는 이야기거리가 다 떨어졌거나 스토리를 끌고 갈 동력이 바닥난 듯하다. 그리하여 짧은 소설 한 편 속에, 적어도 세계적인 성가를 누리고 있는 소위 거장의 작품 속에서, 늙은 작가에게 심하게 말해 유감이지만, <유령 퇴장>만큼 숱한 우연과 공교로움이 도사리고 있는 “장편소설”은 읽어본 적이 없다. 이 책에서 말하는 유령은 늙어 꼬부라진 필립 로스인 동시에 작가와 함께 늙어간 늙은 변태 네이선 주커먼 혹은 이들이 죽은 다음의 상태를 일컫는다. 독후감에 썼다시피, 만일 로스가 양심이 있으면 이런 책은 돈 받고 파는 대신, 자신의 책을 읽은 독자에게 다만 몇 푼이라도 보상하면서 나눠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아니면 자기 죽은 다음엔 어떻게 하지 말아 달라는 얘기를 하덜 말든지 말이지.




10. 윌리엄 트레버, <펠리시아의 여정>

  나만큼 윌리엄 트레버를 좋아하는 독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시중에 팔고 있는 그의 모든 번역 단행본은 다 내돈내산이다. 트레버의 작품을 명작, 걸작으로 부르기는 쉽지 않지만 어떻게 하나같이 이렇게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지. 오, 그의 문장같이 면도날처럼 심장에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주의하시라. 잘 쓴 문장은 가끔 무섭다. 나는 책방의 독자서평에서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이 책의 평점으로 별 다섯 개 만점을 주었다. 어쩔 수 없었다. 작품의 제일 마지막에 눈에 번쩍 뜨일 만한 반전의 코다coda를 이루고 있으니. 독자는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다 읽고 나서도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범죄자인 사이코패스를 동정하거나 두둔할 수 있다. 매혹적인 약속은 애인을 속이고, 장엄한 웅변은 대중을 집단화 하며, 기막힌 문장은 간혹 독자를 현혹한다.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이 그러하다. 이 책을 읽은 독후감만큼 쓰기 곤란한 적도 없었다. 대중이 볼 수 있는 독후감에 마지막 절정을 내보일 수 없어서. 이제 이 책이 나오고 읽을 사람은 다 읽었다고 치고 말하자면, 윌리엄 트레버, 이 늙은이가 여전히 아름다운 문장으로 독자를 현혹하고 있었다. 조금쯤 수상하지만 그래도 친절이라고 양해해줄 수 있는 수상함을 지닌 후덕한 중년 남성. 그의 불우한 과거와 삶의 방식이 독자의 감성을 촉촉하게 만들면서 독자는 그의 정체가 악질 사이코패스인 것을 뻔히 아는데도 여전히 그를 동정하게 한다. 문학의 힘, 문장의 힘이 이래서 무섭다. 나는 여전히 트레버의 열렬한 팬이지만 그가 웅변가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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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1-13 09: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번과 4번, 8번은 같은 생각입니다.
시대의 한계를 알고, 비판적으로 읽어내는가에 달려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이시구로는 독자가 비판하게 하도록 쓰고 있단 생각입니다.
7번은 학생때 감동스럽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 다시 읽으면 어떨지 잘 모르겠습니다.;;
5,9번은 읽지 않아서 모르겠구요.
이런 비평, 좋은데요!

Falstaff 2022-11-13 11:28   좋아요 3 | URL
아이고 좋아라.... ㅋㅋㅋㅋ
전 이 페이퍼 올리면 귀싸대기부터 한 방 얻어터질 줄 알았는데 우와, 첫 말씀이 ˝같은 생각˝이라 하십니다. 을매나 좋은지.
이시구로의 <....화가> 읽고 화가 많이 났었는데, 열이 식으니까, 혹시 이 양반이 이런 인간도 있다, 읽는 사람이 알아서 읽어라, 이건가 하는 마음도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나날>을 읽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시구로가 두 번 연달아 같은 방식으로 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수상한 정치적 의도 밖에 남지 않더군요. 두 작품을 저울 위에 올려놓으면 당사자의 입을 통해 독백을 해버리는 <....화가>가 더 ˝나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ㅎㅎㅎ 이 페이퍼는 그냥 제 감상이지, ˝비평˝ 뒤꿈치도 아닙니다. ^^;;;

망고 2022-11-13 14: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골드문트님 이 페이퍼 너무 좋아요😃 스토너는 읽을땐 정말 잘 썼다 문장 좋다 했었는데 점점 뭔가 좀 찜찜한 기분이 들었었는데 골드문트님 평이 딱 제 생각이었어요 앵무새 죽이기도 명성에 비해 굉장히 불편한 지점이 많았구요 가즈오 이시구로는 어쩐지 그럴거 같아서 읽을 마음도 생기지 않았구요ㅋㅋㅋ 제가 포스터 작품들을 진짜진짜 좋아해서 두번 이상 읽었지만 인도로 가는 길만큼은 찜찜해서 한번 읽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골드문트님 글에 완전 공감했어요 필립 로스는 맨날 똑같은 얘기를 쓰고 있지만 그 힘있고 화내는 문장들을 읽는 재미가 너무 좋아서 책산걸 후회하진 않지만ㅋㅋㅋ골드문트님이 하시려는말은 잘 이해했어요^^아 그리고 마지막 트레버의 펠리시아의 여정ㅠㅠ 저도 트레버 너무 좋아하는데 이 소설은 실망이었거든요 가해자를 동정하는 시선을 교묘하게 포장해 놓은...근데 다들 너무 좋아하셔서 조용히 입닥치고 있었는데ㅋㅋㅋ골드문트님 글에 속이 뻥 뚫리는 느낌입니당😆😆😆

Falstaff 2022-11-13 17:29   좋아요 4 | URL
음하하하하..... 역시 기분 좋습니다. 본문에 썼다시피, 이런 페이퍼 올렸다가 조리돌림 당하는 건 아닐까 싶었던 마음도, 조금은, 있었습니다만 오히려 이렇게 공감의 말씀을 해주시는 분이 먼저 탁, 나서주시니까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문학적 소양은 별로 없는 딜레탕트가 쓴 페이퍼라서 그냥 이런 의견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새파랑 2022-11-13 16: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골드문트님이 언급하신 책 중에 7권을 읽었습니다. 저중에 좋다고 생각한책이 4권(스토너, 부유하는 화가, 카탈로니아, 펠리시아) 인데 전 현혹된 사람이었습니다 😅

필립로스의 <유령퇴장>은 많이 공감됩니다 ㅋ

Falstaff 2022-11-13 17:32   좋아요 3 | URL
오오,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요. 이 페이퍼는 백퍼 아무런 공부도 없는 제 생각만 가지고 쓴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느낌/감상˝ 아니겠습니까. 새파랑 님께서 좋게 읽으셨으면 무조건 그게 좋고 옳은 판단 아닐까 합니다. 책과 작품에 관한 견해에 대해서는 새파랑 님의 견해가 옳습니다!!!1

coolcat329 2022-11-13 2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중에 딱 두 권 읽었는데, 그 중 하나가 <남아있는 나날>이고, 심지어 제가 아주 좋아하는 소설이라 흐흑...좀 슬픕니다. 😢 저는 저 소설을 이시구로가 영국의 제국주의와 우월주의, 또 주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스티븐슨을 통해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국 사회를비판했다고 봤거든요.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어떤지 궁금하네요.
트레버 책은 사놓고 아직 안 읽었는데 사이코패스를 동정하게 만드는 그런 문제작이었군요.

골드문트님 이런 페이퍼 왕팬입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Falstaff 2022-11-13 21:28   좋아요 2 | URL
글쎄, 아니라니까요. 젤 중요한 건 쿨캣 님이 느끼신 것이지 제가 한 말은 전부 아마추어의 오해....일 수도 있어요. 괜히 제 글 보시고 감상을 고정시키시면 안 됩니다. ㅜㅜ
세상은 그저 다양한 게 제일 좋습니다! 이렇게 보고, 저렇게 느끼고, 그저 지지고 볶으면서 사는 게 진짜 사는 맛 아니겠습니까. ^^;;;

공쟝쟝 2022-11-14 13: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하........ ㅋㅋㅋㅋㅋㅋ 이쁜 말 대 잔치 싫어하는 사람 또 만나서 반갑네요....... 꼽으신 책의 목록과 까닭들을 보니 걸드문트님은 저자들의 글에서 나오는 무의식을 읽어내시는 것 같아요. 별로 추천할만한 좋은 관점들이 아닌데도, 그게 문장이 예쁘다고 올려쳐지는 거 참 꼴배기 싫다..... 이런 거죠? 저는 쓰신 모든 내용에 거의다 공감합니다.
제 경우 <스토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책이라는 생각요. 제게는 필요한 글이었다는 생각. 일과 노동과 인간에 지쳐 하루하루 바빴던 당시의 저에게는 이이의 신간 편한 하고 싶은 거 하는 고요한 인생이 읽기에 좋았고요, 그래서 내 인생이 안되니까 배알이 꼴렸고요, 그래서 싫지만, 그래도 부럽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이상적으로 부러워하면서 읽고 아, 이렇게 살고 싶다.. 일케 되더라고요....
....... 그나 저나 골드문트님도 참 반골이시네요ㅋㅋㅋㅋㅋ 오늘 책사러 들어왔다가 추천 목록인가? 하고 반가운 마음에 훑어 봤다가 ㅋㅋㅋ 잠깐 놀란 뒤ㅋㅋㅋㅋㅋ 아 추천이 아니구나 ㅋㅋㅋ 안심했습니다...ㅋㅋㅋ

Falstaff 2022-11-14 18:08   좋아요 3 | URL
ㅋㅋㅋ 지금 시간이 오후 다섯 시 오십 분. 근데 벌써 꽐라. ㅋㅋㅋㅋ 시간을 잊는 나날들이 언제나 후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늘 즐거울 수 있어요. 시간 구애 받지 않고 마음 먹으면 마음 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 아오, 그러나 조심스럽습니다. 저 같은 백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 거 같아서요.
책을 읽는 것도 그렇더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지극히 개인적인 일인 독서와 감상의 자유도 언제나 자유롭지는 않은 거, 이거, 참... 정말 끔찍하더군요. 특히 책 읽는 거에 관해선 빵빵하신 분들이 밀집해 있는 알라딘 서재 같은 곳에서는 말입죠
이 페이퍼를 구상한 건 벌써 일 년이 넘었을 겁니다. 근데 쓰기 쉽지 않더라고요. 단지 제 생각 때문에 멀쩡한 작품에 흠을 내는 일일 수도 있고, 책에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기어이 흉을 내면, 에효, 저도 그 마음 알거든요. 그래 하루 이틀, 한 주일, 두 주일, 한 달 두 달 넘기다가 기어이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다행스럽게 댓글 달아주신 분들이 고맙게도 선의에 입각해 얘기를 해주셔서 그렇지, 속 터지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근데 제가 반골이라고요? ㅋㅋㅋ 이쪽에서도 반골, 저쪽에서도 반골.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alummii 2022-11-14 2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단 저도 코맥 매카시는 손대지 말아야겠어요 ^^ 카탈로니아찬가는 저도 손절ㅋㅋㅋ

Falstaff 2022-11-15 06:36   좋아요 2 | URL
오, 아닙니다, 아니예요.
매카시 좋아하시는 분들은 거의 매카시 매니아가 되게 하는 매력이 있고요, 오웰도 단호한 매력이 있는 작가라는 평이 일반적입니다.
제가 이 페이퍼 쓰면서 걱정했던 것이, 저 때문에 다른 분들도 이 작품들을 경원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손절하지 마시고요, 일단 도서관에서 한 작품 정도를 읽어보시고 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

다락방 2022-11-15 09: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 님의 이 페이퍼에 저도 동의합니다. 이게 작가가 글도 엉망으로 썼으면 사실 욕하기가 더 쉽잖아요. 저는 그런 경우에 별 하나 혹은 두 개주고 니 생각 다 드러난다 이자식아!가 되어버리는데, 글을 잘 써놓으면 되게 마음이 복잡해져요. 저는 제가 개인적으로 골드문트 님의 이런 페이퍼를 쓰게 된다면 제일 처음에 놓을 책이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입니다. 그 책 정말 잘썻다고 저는 생각하고 필립 로스 진짜 우와.. 막 이랫단 말이죠. 그런데 여성에 대한-특히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분에서 진짜 제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더라고요. 와, 이렇게 잘 쓰면서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나. 저는 휴먼 스테인 때문에 필립 로스가 너무 미워요. 너무 미운데 또 읽고 싶고.. ㅠㅠ 아무튼 그렇습니다. ㅠㅠ

Falstaff 2022-11-15 16:11   좋아요 2 | URL
ㅎㅎㅎ 맞아요. 글이나 못쓰지 말입니다.
필립 로스는요, 남자이면서 페미니스트도 아닌 제가 읽기에도 여성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불편합니다. 휴먼 스테인을 어떻게 읽으셨는지 짐작이 갑니다. 미국의 목가를 제외한 로스의 다른 책 전부 그렇더라고요. 어떤 분 페이퍼의 댓글을 통해, 필립 로스 손절했다고 얘기했었는데, 이것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저는, ㅎㅎㅎ 위 댓글에서 쟝쟝님한테는 좋은 책이었다는 걸 알게 된 스토너 ㅎㅎㅎ 를 읽으면서도 유독 여성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성공 또는 그나마 무난한 삶을 꾸릴 수 있었는지, 여성의 희생에 관해서는 아무런 찬사나 칭찬이나 기타 긍정적인 평가는 왜 없는지 속이 좀 터지는 느낌이 들면서.... 작은 바그너 아냐? 했습니다. 바그너는 여성들의 희생을 통해 남자 새끼들이 구원을 받는 동시에 (가증스럽습니다만) 여성들의 희생에도 찬사를 보내니까 바그너보다 더 드런 놈이구나, 라고 ㅋㅋㅋㅋㅋㅋ
본문에 쓰지 않았지만 펠리시아의 여정에서도 50대 뚱보 힐디치는 꼭 힘이 약하고 어린 여성들만 골라 살해한단 말입니다. 여성주의 공부하시는 분들이 이 점을 꼬집는 평을 저는 읽어보지 못해서... 상당히 유감이었습니다. 윌리엄스와 트레버가 기가 막힌 글을 쓰기는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라서, 더 의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잠자냥 2022-11-15 16:57   좋아요 2 | URL
뚱보 힐디치가 꼭 힘이 약하고 어린 여성들만 골라 살해하는 거 진짜 격분할 만한 일이죠. 내가 달려가서 총으로 쏴 죽여버리고 싶고. 그런데 그 감정은 너무나 마땅해서 굳이 지적하지 않은 게 아닐까요. 저부터도 그랬습니다- 대놓고 나쁜놈이니까요. 오히려 필립 로스가 그리는 마초적인 인물들이 애매하게 더 사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필립 로스 싫음..............(필립 로스는 필립 로스가 그런 생각하는 사람 같은데 트레버는 트레버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닌 거 같은 그런 차이랄까요.....)

다락방 2022-11-15 17:48   좋아요 3 | URL
골드문트 님에게 태클을 걸고자 하는 건 아니지만요, 제가 <펠리시아의 여정>을 읽고 쓴 리뷰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린 여성의 입장, 세상이 어린 여성을 대하는 형태에 대해 썼습니다. 펠리시아의 여정에서 여성주의적 입장으로 아니 굳이 그게 아니어도 힐디치 뿐만이 아닌, 힐디치 가 아닌 다른 남성 등장인물들도 모두 여성혐오를 하고 여성폭력을 하고 있으니까요. 힐디치 전에는 순진한 여성 임신시킨 남자가 있고 그 전에는 가사노동을 맡기는 그 어린 여성의 가족이 있죠. 펠리시아의 여정을 쓴 윌리엄 트레버는 제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건, 여성의 처지를 알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사실 최근에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집 <그의 옛 연인>을 읽었는데 그것보다 펠리시아의 여정이 더 좋았어요, 저는.

Falstaff 2022-11-15 19:43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남자가 페미니즘 이야기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저는 두 분을 생각하면서 트레버 얘기한 게 아니거든요. 그냥 어떻게 읽다 보니 그랬다는 것이지요. 저도 별 다섯 개 줬잖습니까. 아무쪼록 심각하게 생각하시거나 기분 언짢아 하지 않으시기 바랄 뿐입니다.
그저 독자 서평 쉰 개 올라왔으면 적어도 한 편 정도는 뭐.... 그런 수준이었는데 말입니다.

잠자냥 2022-11-15 16: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이제 읽었네요. 놓쳤으면 큰일날 뻔!!!

다른 건 소소하게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특히 윌리엄 트레버가 그 범죄자를 동정하라고 그렇게 쓴 것 같지는 않거든요.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 학대의 경험 때문에 동정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게 주된 감정은 아니라서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암튼, 그런데 1번에서 존 윌리엄스 페미니즘 관점에서 보면 진짜 좀 문제 있는 작가라고 생각하는데요, 그의 다른 작품 <오직 밤뿐인> 보면 진짜 고개가 절레절레.... 전 그래서 그의 작품을 더 읽게 되지 않더라고요.

가즈오 이시구로는 그런저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차라리 sf 계열 작품이 가장 나은 것 같아요. <나를 보내지 마>, <클라라와 태양> 같은. ㅎㅎ

Falstaff 2022-11-15 21:30   좋아요 2 | URL
오, 트레버는 힐디치를 동정하라고 쓰지 않았습지요. 근데 글을 너무 잘 써서 독자가 저절로 힐디치 편에 서서 읽게 만드는 겁니다. 서평을 쓴 많은 분들도 스토리의 중심을 힐디치로 하면 어땠을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쪽팔린 고백이지만... 저처럼 말이죠.
딱 이 수준입니다. 제가 냥님하고 다른 건, 권총이 있더라도 쏴죽이는 대신 경찰에 신고해서 평생 콩밥을 먹이는 쪽을 택했을 거라는 거 딱 하나. ㅋㅋㅋ

잠자냥 2022-11-15 17: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음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저는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 볼 때 작가의 생각 자체가(여혐) 글러먹은 것 같은 작가는 점점 안 읽게 되는데, 그런 작가가 1번과 9번이고요. 1번은 글도 그렇게 뻑가게 쓰는 타입은 아니라서 더 제외하기 쉬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좀 아리까리한데 그놈의 읽은 정 때문에 놓지 못하는 작가가 가즈오 이시구로, 그리고 포스터이고, (포스터는 문제의 <인도로 가는 길>만 안 읽고 있습니다....)
매카시는 작품이 주는 그 불쾌한 느낌 때문에 손이 잘 안 가고...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 촌스러워서 이제는 손이 안 가는 작가가 7번과 8번입니다...

암튼 아주 재미나게 읽어습니다!

Falstaff 2022-11-15 19:53   좋아요 3 | URL
오, 저는 포스터, 이 양반의 책은 계속 읽을 거 같습니다. 식민주의만 빼면 정말 빼어난 작가 아닌가 싶어요. 이씨구라도 한 두 권 더 읽어볼 생각인데 sf로 선택을 하겠습니다. ㅋㅋㅋ 고맙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트레버는 번역서가 나오는 족족 내돈내산 예정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근데 이런 남자 믿지 마세요. 자칭 페미니스트. ㅋㅋㅋㅋㅋ

마루누나 2022-11-21 2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ㅋ 이 책 재밌었어요.... 그런데 빡쳐요!
재밌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ㅎㅎㅎㅎ

Falstaff 2022-11-22 06:1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어떤 책이요? 하긴 거의 다 재미있긴 합니다. ^^

파랑 2022-12-20 15: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동의가 되는 것도 있고(스토너, 앵무새 죽이기ㅎㅎ) 동의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특히 뼈쟁기와 카탈로냐 찬가는 제가 각 작가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 충격!ㅋㅋㅋㅋ 물론 전 오웰은 소설보단 논픽션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재미있고 흥미로운 페이퍼입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22-12-20 15:47   좋아요 1 | URL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읽은 느낌이 다 같으면 그게 무슨 재미겠습니까. 서로 다른 생각하는 사람들이 복닥복닥 해야 그게 사는 재미지요. ^^

yamoo 2023-02-15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최곱니다. 다 떠나서 올가 토카르추크의 책은 제 생각과 완전 일치!! 저도 올가의 책 중이 책만 별로였습니다.

펠리시아의 여정도 그렇고요...단지 전 스토너의 경우 너무 감명깊게 읽었기에 그런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했는데, 리뷰를 보니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코맥 매카시는 신의 아이 이후 안 읽을 계획입니다. 언급하신 모두가 예쁜말들을 읽을까 생각하다가 얇은 신의 아이 읽었는데, 전자를 읽었다면 문트님처럼 내상이 심했을 거라 생각합니다!!ㅎㅎ

Falstaff 2023-02-15 16:11   좋아요 1 | URL
ㅋㅋㅋ 스토너는 여혐 뽕짝 맞습니다. 게다가 온갖 차별이 다 등장하는데, 워낙 문장이 좋아요. 많은 사람들이 홀딱 넘어가버립니다. ^^
 
엽란을 날려라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지 오웰 지음, 박경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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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조지 오웰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동물농장>, <1984> 그리고 <카탈로니아 찬가> 이렇게 세 권을 읽어보았다. <1984>는 저 까마득한 시절이라서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 새삼스레 다시 읽어볼 생각은 없다. <동물농장>의 독후감은 딱 한 줄, “유통기한을 넘긴 알레고리”라 썼고, <카탈로니아 찬가>의 독후감에는 그의 호전성과 시각적 착란현상을 발견하고는 필요 이상의 모진 소리를 해댔었다. 과한 비난을 한 것에 관해서는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지금도 반성하고 있지만 독후감을 새로 쓴다 해도 좋은 말은 못한다. 독자들의 찬사를 누리고 있는 소설작품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을 갖고 있는 작품들을 골라 소개하려 준비 중이다. 이 목록에 <카탈로니아 찬가>가 들어 있을 정도로 싫어한다. 돼지갈비 집 “장항선”에서 카운터를 보는 수염 난 노인 장항선이 북방 사람 갑옷을 입고 가끔 유튜브에 나와 외치는 고함이 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카탈로니아 찬가>를 생각할 때마다 “장항선”의 불친절한 카운터 노인 장항선이 생각난다니까.

  조지 오웰을 이토록 좋아하지 않으면서 또 이이의 작품을 읽은 이유는, 내 돈 주고 오웰의 책을 읽는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며 책값 역시 비싸기로 악명이 높은 지만지에서 나와 결코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으나, 이 작품이 <동물농장>이나 <1984>, 심지어 <카탈로니아 찬가>보다 일찍 쓴 초기 작품이어서, 숱한 독자들이 조지 오웰, 조지 오웰,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한 권만 더 읽어보자는 마음이 들었고, 한 달에 세 권 구입 요청을 할 수 있는 동네 도서관에 한 권의 여유가 더 있어서 사 달라고 신청을 했더니 고맙게도 사 주어 휘리릭, 읽었다.


  조지 오웰은 한국전쟁이 터지기 정확히 47년 전인 1903년 6월 25일에 인도의 벵골 지역에서 딸 하나를 둔 공무원 아버지와 반영반불(半英半佛: 반은 영국인, 반은 프랑스인) 엄마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다. 엄마는 아이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았고, 아버지는 무려 8년 동안 폭염의 인도에서 돈을 벌어 아이들 양육비를 보내주는 기러기 아빠로 지내다가 1912년 귀국해 살림을 합친다. 오웰은 열네 살 때 공부를 엄청 잘해 국왕 장학금을 받아 다른 곳도 아니고 이튼 스쿨에 입학해 졸업한다. 이튼을 나왔다 하면 다음 코스는 당연하게 왕립 사관학교, 또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였을 텐데, 이때부터 좀 삐딱선을 타던 오웰은 열아홉 살이 되는 1922년에 제국주의 경찰이 되어 버마로 가 거기서 경찰훈련학교를 졸업한 후 인도 제국주의 경찰 소속으로 버마, 즉 미얀마에서 근무한다.

  1928년이 되자마자 정식으로 경찰에서 뛰쳐나온 오웰은 파리로 건너가 본격적인 무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929년 말에 영국으로 돌아와서 여전히 가난한 작가 지망생으로 전전하면서 진보 문예지 “아델피”에 기고도 하고 편집장 리처드 리스 경을 만나 죽을 때까지 지속될 우정을 쌓기도 한다. 이후 갖은 형태의 개고생을 해 급기야 구빈원 구경까지 한 오웰은 1932년 4월, 런던 근교의 호손스 남자 고등학교에서 임시 교사생활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글을 발표/출간하는데 이때부터 본명 에릭 블레어를 버리고 필명 조지 오웰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시작할 때부터 대차게 나는 전업작가를 할 것이다, 라고 문학에 목숨을 걸고 가장 비루한 삶을 살면서 글을 쓰다가 몇 년 버티지 못하고 (젊은 시절의 “몇 년”은, 내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무지하게 길고 지루한 시간이다) 빵을 벌기 위해 남자 고등학교 교사로 돌아오는데, 이 기간을 소설로 쓴 것이 바로 <엽란을 날려라>이다. 에릭 블레어 또는 조지 오웰 대신 주인공으로 ‘고든 콤스톡’이라는 스코틀랜드 혈통의 중산층 청년이 등장하고, 잡지 “아델피” 출판사의 편집장 리처드 리스 경 대신 잡지 “적그리스도”의 선한 발행인 이자 부유한 귀족 출신 레블스턴이 조연을 맡는다. 호손스 남자 고등학교 대신 “뉴앨비언 광고회사”에서 빵을 버는 것으로 각색을 해놓았지만, 주인공 하는 꼴을 보면 오웰과 거의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오웰의 바이오그래피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여성이, 소설의 흥미유발을 위해 서른 살에 육박하는 숫처녀 로즈메리를 등장시킨다.


  엽란이 무얼까? 나는 엽란이 설마 이 엽란葉蘭일까,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이 엽란이 맞았다. 관상용, 꽃꽂이용, 약용으로 쓰이는 상록 다년초. 영국인들, 특히 중산층 계급이 집안의 미화를 위해 창문이나 테라스에 엽란 화분을 두는 것이 1930년대 초에 굉장히 유행이었나 보다. 주인공 고든 콤스톡은 할아버지 시절엔 꽤 떵떵거리면서, 많은 이들에게 뒤로 온갖 독설과 저주를 받으며 살았지만 지금은 거의 완전히 몰락해 살아남은 열한 명의 딸, 아들이 남긴 콤스톡 가문의 유일한 남자 후손이다. 여자 후손도 딱 한 명 남았으니 고든의 다섯 살 많은 누이 줄리아. 줄리아는 가문에서 가장 총명한 고든이 콤스톡 가의 중흥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지만, 희생만 겁나게 하다가 결혼도 못하고, 결혼은커녕 연애도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책이 끝난다. 전형적인 희망고문의 예랄까.

  고든은 주 2파운드를 받고 매케츠니 씨의 서점에서 일하며 이튼과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신사들을 우습게 아는 걸로 시간을 보낸다. 책방 점원이 정식 직업이고 꿈은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돈도 버는 거다. 그렇다고 완벽한 무명은 아니다.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평생 친구가 될 레블스턴이 도움을 주어 첫번째 시집 《쥐》를 출간해 권위있는 잡지사의 서평에 “앞길이 유망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니 젊은 마음에 앞으로 셰익스피어 만큼은 아닐지라도 예이츠나 워즈워스 수준까지는 가비얍게 올라갈 것 같았을 듯하다. 그렇지 않았으면 “뉴앨비언 광고회사”에서 주급 4파운드 10실링을 받고 일했으며, 어여쁘다고 까지는 할 수 없지만 몸에서 건강한 청량미를 뿜뿜 내뿜는 순결한 로즈메리와의 사내 연애를 포기하면서 절반도 안 되는 급여의 별 볼 일 없는 책방 점원 노릇을 하겠는가. 고든이 보기엔 세상의 모든 건 전부 돈으로 귀결한다. 돈과 교양. 영국 같은 나라에서 돈 없이 (유명 사교)클럽에 가입할 수 없는 것처럼 돈 없이는 교양적인 인간이 될 수도 없다.

  이 고든 콤스톡은 책이 시작할 때부터 궁상의 극을 달린다. 1934년, 스물아홉 살인데, 담배갑에는 겨우 네 개피가 남아 있고,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시를 쓰지 못해 하류 중산층 정도가 거처하는 아파트에 돌아가 시를 쓸 때까지 담배 피우고 싶은 걸 참아야 하는데 문제는 오늘이 수요일이고, 금요일까지 들어올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거다. 누나 줄리아한테 또 돈을 얻기엔 벼룩이도 낯짝이 있지 도무지 못할 짓이고. 하여튼 독자로 하여금 짜증을 유발할 정도로 가난의 장면이 계속된다. 이런 거 어디서 봤다.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 <굶주림>에 비하면 고든 콤스톡의 가난은 아이들 장난이다. 애초에 고든의 돈,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에 대한 저항은 돌아갈 피난처, 뉴앨비언 광고회사가 있었던 상태. 사실 함순의 <굶주림>도 하도 굶어서 머리카락이 뭉텅뭉텅 빠지는 와중에도 자기 주머니에 들어온 돈을 더 형편이 어려운 노파에게 건네 주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등장하지만 애초에 허망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고든 콤스톡의 어리광에 비할 바는 아니다.

  조지 오웰은 고든 콤스톡의 상황에 기대 끊임없이 주장한다. 나만의 방과 연 수입 5백 파운드가 없었다고. 방과 1년에 5백 파운드가 없이 글을 쓰기 위해 이렇게 고생했었다고. 오웰이 청년기에 겪은 젊음 특유의 객기를 폄훼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이런 모진 경험을 각오하고 창작, 또는 자신의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거는 젊음의 용기를 가상하게 생각한다. 비록 내 아이들과 내 친척이 그렇게 한다면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유하겠지만. 그렇게 힘든 일이다. 자신을 걸고 일을 하는 건. 내가 좋아하지 않는 오웰이지만 작품 속 주인공이 지나온 길을 직접 경험해본 오웰의 용기도 새삼스럽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계속 머리속에서 떠오른 인물은 에인 랜드가 쓴 <파운틴 헤드>의 주인공 청년 하워드 로크. 기본적으로 하워드 로크는 건장하고 튼튼한 반면에 <엽란을 날려라>의 주인공 고든 콤스톡은 “좀이 먹은 듯 얼룩덜룩한 얼굴”에 “뼈대가 가냘픈 작고 연약한 몸, 불만 섞인 투의 동작”을 숨기지 못하는 젊은이다. 오웰은 당시 사람으로 매우 키가 큰 185cm 정도였지만. 하워드 로크는 건축가로 일하지 못할 때는 직접 공사판의 인부로, 채석장 잡부로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는 불굴의 투사였지만, 고든 콤스톡은 자신이 적으로 규정하는 ‘돈’의 폭력, 또는 흐름 속에 몸을 맡겨 스스로를 포기해버리는 단계에 접어든다. 왜 이런 결론으로 치닫는지는 스포일러의 위험 때문에 차마 밝히지는 못하겠고.....까지는 아니다.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괜찮은 돈벌이. 이게 콕스톡의 질곡인 동시에 든든한 퇴각처였던 거다.

  재미는 있지만 오직 읽는 재미일 뿐이다. 그러나 조지 오웰을 좋아하지 않는 내 말을 믿지 마시기를 바라며 할 수 있는 건, 특별하지 않다는 거. 굳이 찾아서 읽을 필요가 있을 정도는 아니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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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11-11 0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 저도 이 책 비슷한 시기에 지만지에서 나온 서보 머그더 책하고 같이 도서관에 신청해서 받았는데요. 앞에만 읽다가 결국 반납했어요.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어요…. 조지 오웰 아주 어릴 땐 대단한가 싶었는데 읽을수록 제 취향은 아니더라고요. 저는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너무 투명한 정치성이 버겁더라고요. 좀 촌스런 느낌….. (제가 이렇게 느끼는 작가류에 또 루쉰이 있습니다)

Falstaff 2022-11-11 13:57   좋아요 3 | URL
지만지 오웰은 비추, 서보는 강춥니다! ㅎㅎㅎ 책값 비싸니까 오히려 처음부터 도서 신청해서 읽어야지, 이렇게 마음먹게 되고요, 그래서 더 편하더라고요. ㅋㅋㅋㅋ
오웰은 하여튼 제 눈 밖에 나서 도서관에 책이 있으면 모를까 더는 안 읽을 겁니다.
루쉰은, 홍상수 <생활의 발견> 올드, 올더, 올디스트 버전 같아서 역시 안 읽습니다. ㅋㅋㅋㅋㅋ

테레사 2022-11-11 1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인생,위건부두로 가는 길.. 두권을 읽었어요.근데 저는 이 두권이 다 좋았어요.하하..소설은 명서믈 듣기만해도 제 취향이 아니라 패싱하였던 기억..

Falstaff 2022-11-11 13:59   좋아요 0 | URL
파리 런던이 이 엽란하고 비슷한 류의 소설이라는 얘긴 들었습니다. 그것도 궁상맞나요? 그것도, 위건도 안 읽어봤습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보겠습니다!!
파리 런던 좋으셨으면 엽란도 재미나게 읽으실 듯합니다!

테레사 2022-11-11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인생은 일종의 수기같던데..아닌가..오웰이 직접 겪은 일을 엮은 것이고 위건은 르포르타쥐..장르입니다.

Falstaff 2022-11-11 19:2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전 파리-런던 하고 위건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그게 수기 또는 르포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hnine 2022-11-12 0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아직까지는 조지 오웰을 좋아하는 사람이랍니다.
다 찾아 읽는다고 읽었는데, 엽란...은 아직 안 읽었고,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인생은 읽었는지 안읽었는지 가물가물하네요.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확실하게 읽었는데, 테레사님 말씀처럼 소설 아니라 르뽀 같은 책이지요. 기자 출신 경력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글이었어요.
긴 글 다 읽아보니 골드문트님이 조지 오웰 싫어하신다는거 맞나? 하는 생각이...^^ 싫어하는 사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셔서요 ^^
아무튼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2-11-12 09:20   좋아요 0 | URL
책 좀 읽는다, 하는 사람들한테는 아무리 유명해도 자신과 맞지 않는 작가가 있잖습니까. 저는, 기가 막히게 잘 쓰는 지는 분명히 알겠는데, 좋아하게 되지 않는 유명한 소설가가 한 명 있습니다. 헤밍웨이 말입지요. ㅎㅎㅎ
오웰(이 양반은 잘 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이나 헤밍웨이나 지들이 기껏해봐야 작가, 소설가 밖에 더 됩니까. 전 소설 소비자고요. 독자가 싫으면 싫은 것이지만, 오웰은 헤밍웨이와는 달리 좋아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싫답니다. <카탈로니아 찬가>가 결정적이었는데요, 그건 나중에 페이퍼 한 번 쓰겠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건강하시지요? ^^
 
불가코프 중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김성건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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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하일 아파시예비치 불가코프는, 당연히, 평론가들이 20세기가 낳은 명작으로 평가하는 <거장과 마르게리타>를 제일 먼저 읽게 되고, 백 명 가운데 아흔 두 명은 이 책으로 단박에 불가코프 빠, 이름하여 ‘불빠’의 일원으로 가입하면서 그의 다른 작품을 탐험하기 시작한다. 이후 그가 쓴 다른 작품들을 수색해 읽어가며, 처음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후광 덕택에 실제 자신이 느낀 감정보다 조금 과장된 찬사를 보내다가 아.마.도. 세번째 불가코프 부터는, 아흐, 이거 참 기대 이하인데, 라는 느낌을 숨길 수 없다가, 그럼에도 그놈의 정 때문에 눈에 보이는 족족 읽지 않을 수는 없는 작가들 가운데 한 명이 되는 거 같다. 나만 그러는 건가? 이번엔 그의 중단편집이 눈에 들어왔지만 다행스럽게도 백수가 말이지 정가 20,800원, 판매가 2만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하기엔 위험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어, 도서관에다 사달라고 졸라 책 들어왔다는 문자 받자마자 득달같이 데려와 읽어버렸다. 본문만 337 페이지인데 아침 여덟 시부터 읽기 시작하면 밥 먹는 시간 30분 빼고 오후 다섯 시 반이면 다 읽는다. 지만지 답지 않게 편집이 널럴한 편이라서.

  중편 하나와 열두 편의 단편을 실었다.

  죽기 전까지 출판하지 못한 걸작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빼고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면, 레닌과 스탈린, 특히 스탈린 치하에서 문학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좋은 작품을 만들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워낙 강력한 검열과 출판금지 딱지를 붙이니 글을 써야 먹고 사는데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고, 그렇다고 손 놓고 지낸 의사생활로 돌아갈 수는 없어서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가구, 책, 옷, 기타등등 온갖 것을 다 팔아먹은 다음에도 며칠씩이나 배를 쫄쫄 굶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남의 집 담벼락을 넘겠는가, 체제가 바라는 대로 원고지를 채워주겠는가? 사는 게 그렇지 뭐. 간혹 자신이 진짜 마음먹고 쓴 작품도 있을 수 있겠고, 그건 또 검열을 무사통과하기 힘들 것은 당연할 터인데, 그런 건 그냥 가지고 있다가 망실되거나 다행히 살아 남으면 나중에, 좋은 세상이 온 후에 출판해 처자식한테 ‘거꾸로 효도’ 한 번 할 수도 있는 거. 사는 게 별거냐, 다 거기서 거기지.

  이 양반이 우크라이나 키이우 출신이다. 1891년생이니까, 러시아 제국 키예프 주, 키이우 태생이었다가 소비에트 연방에 병합되었으니 한 번도 우크라이나 국적을 가져본 적은 없다. <고요한 돈강>의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하고 비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숄로호프는 스탈린한테 극한의 귀여움을 받은 것과 달리 불가코프는 고생만 열나게 하다 겨우 마흔아홉 살에 숟가락 놨다.


  책을 읽으면 저절로, 지금 작가가 자기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스물두 살 때인 1913년에 불가코프는 키이우 의과대학에 입학을 하고, 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선에서 의료활동을 해야 했다. 16년 졸업생일 당시 모스크바에 소환되어 스몰렌스크 지역으로 배치, 니콜스코예, 뱌지마 등지에서 군의관으로 지내다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맞는다. 여기서 보시라. 16년의 모스크바는 니콜라이 황제가 다스렸으니 황제군에 징집을 당했던 것이고, 17년이면 볼셰비키가 집권했던 것이어서 불가코프는 대단히 애매한 상황에 처하고 만다. 어쨌든 끊임없이 징집해제를 요구해 18년에 제대를 하고 키이우에서 성병 전문의로 밥을 먹고 살다가, 이제 적군과 백군의 내전이 발발해 백군의 주요 진영인 키이우 의사였던 불가코프 역시 백군 군의관으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자신이 백군 군의관이었기는 하지만 스탈린 통치하에 다시 백군 만세, 우크라이나 만세를 외칠 수는 없어서 책의 첫 두 편에서는 주인공인 백군 군의관이 백군의 잔혹한 린치에 질려 자비로운 볼셰비키 군이 하루빨리 키이우 근방의 중요한 도시 슬로봇카를 접수해달라고 간절하게 바라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왕년의 황제군이 정말로 잔혹했던 건 사실이지만, 적군이라고 특별히 자비로웠던 건 아니다. 심지어 스탈린이 귀여워했던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읽어봐도 그렇다. 사람의 목숨이 사과 한 알보다 가치가 없던 20세기 초의 내전에서 백군의 전통적 터전에 들어온 적군 입장이라면 주민 누가 간첩이나 암살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 부당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불가코프 식 백군은 루시퍼, 적군은 가브리엘의 방정식이 생긴다.


  실제로 백군이 내전에 패하면서 저 위대한 거짓말쟁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버지를 비롯한 백군 장성들과 장교들은, 가능하면 가족 모두를 데리고, 아니면 홀몸으로라도 서유럽으로 망명을 감행한다. 이때 불가코프는? 마찬가지로 망명을 결심하고 모든 준비를 마치지만, 사주에 역마살이 끼지 않아서 그랬는지 이이는 때를 맞춰 티푸스에 걸리는 바람에 국경을 넘는 것보다 생사의 경계를 더 빨리 넘을 뻔했다. 그래 결국 망명을 포기해야 했던 불가코프는 이후 지긋지긋한 의사 생활을 때려치우고 본격적인 전업작가/극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굳히면서 수도 모스크바에 정착한다. 정착과 동시에 본격적인 굶주림의 시절이 찬란하게 열리는데, 이때의 경험을 이 책에 단 한 편 실린 중편소설 <소맷동에 쓴 수기>에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다. 즉, 티푸스 발병으로 41도가 넘는 열에 들끓으며 헛것을 본 이야기부터 온갖 궁상맞은 가난의 모습을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을 들먹이면서까지 가감없이 토로한다. 만일 망명에 성공했다면 우리는 훨씬 풍요로운 불가코프를 누릴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불가코프는 1940년에 사망한다. 작가생활을 전적으로 스탈린 치하에서 해야만 했다는 말이다. 시대가 엄혹하면 문학도 얼어붙는다. 굳이 우리나라의 70년대 문학을 들먹일 필요 없다. 북한 문학은 생각해볼 가치도 없다. 당연한 거니까. 불가코프는 작가로서 참으로 재수없게 하필이면 그런 시절을 살아야 했고, 그리하여 대표작 <거장과 마르가리타>조차도 문학적 성과, 성가와 관계없이 작가가 죽고 26년이나 흐른 다음에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한 작품 말고는 뛰어나지 않은 작품만 쓴 작가라고 여기는 것보다,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판이 깔리지 않은 불행한 작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일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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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11-08 07: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하필 그 중요한 때에 티푸스에 걸려 망명을 못하다니 정말 운도 지지리 없네요. ㅠㅠ

Falstaff 2022-11-08 07:27   좋아요 1 | URL
옙. 그때부터 고생만 겁나게 하다 갔으니, 불가코프 개인으로 봐서는 그냥 의사로만 사는 편이 훨씬 좋았을 겁니다.

레삭매냐 2022-11-08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가코프가 키이우 출신이라면
우크라이나 사람인가요...

불가코프의 파란만장한 생을
골드문트님의 리뷰를 통해
알게 되었네요 :>

저도 꼴랑 마르가리타만 읽은지라.

Falstaff 2022-11-08 15:09   좋아요 1 | URL
옙. 우크라이나 사람입니다. 우크라가 요즘 침공을 받아 동정을 사서 그렇지 뭐 바람직한 지역은 아닙지요. 그 동네 사람들 만큼 험한 인종도 별로 없습니다. 폭력 영화에서도 그러잖아요. 우크라이나 인간들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요. ㅎㅎ 근데 카자크 사람들은, <고요한 돈 강> 읽어보면, 이런 우크라이나 사람들 보고 ˝약골˝이라고 하더군요.

stella.K 2022-11-08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오, 이 사람 정말 불행이 말도 못하겠더군요. 말도 못한 핍박을 받고도 끝까지 작가로서의 펜을 꺽지 않았던. 진정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이책을 하루만에 종주하셨군요. 아, 저도 좀 그런 자세가 필요한데 꼴랑 한두 시간 붙들고 나가 떨어지니 저는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것습니다.ㅠ

Falstaff 2022-11-08 15:13   좋아요 1 | URL
불쌍한 인간입지요. 그냥 편하게 의사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요즘도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연 수입 5백 파운드가 필요한데 내전 후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에 극작과 소설을 써서 밥을 먹고자 했으니, 그것도 판판히 얻어 터지면서 말입니다.
스텔라 님도 이 책 잡으시면 후딱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

바람돌이 2022-11-08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불가코프의 삶이 이랬군요. 골드문트님 글속에서 작가들의 삶을 알 수 있어서 항상 좋아요. ^^

Falstaff 2022-11-09 05: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트인 데로 가는 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김윤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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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1862년 5월,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왕국이 될 오스트리아 제국 수도 빈의 레오폴드슈타트, 프라터 가 16번지에서 저명한 후두학(또는 이비인후과) 전문의 요한과 루이제 슈니츨러 부부의 장남으로 출생한다. 이 당시 빈에서도 요즘 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의사는 의사 가문끼리 혼인하는 것이 유행이라 루이제 역시 의사 가문 출신이었으니, 이들의 맏아들인 아르투어 슈니츨러는 물론이고 세 살 아래 동생 율리우스마저 의학공부를 해 의사가 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근데 문제는 글, 이 가운데서도 문학을 하고 싶어하는 건, 일종의 딴따라 성향과 비슷해서 누군가가 악착같이 말리지 않으면 저절로 그짝 패를 따라 가거나 그짝 물살에 휩쓸려버리기가 일쑤다. 우리의 조선시대에도 넘치는 끼 때문에 가문이고 지랄이고 간에 다 때려치우고 광대패나 사당패를 따라 나선 자제들 이야기를 가끔 들었던 것과 한 가지로. 슈니츨러의 문학에 대한 경도는 아버지 노老슈니츨러가 효과적으로 방파제 역할을 했다. 1885년, 약관 스물세 살에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아르투어는 아버지가 재직하고 있는 빈 시립병원에 들어가고, 87년엔 아버지가 간행하는 의학잡지를 위해 일하다가 급기야 88년엔 아버지의 조수 의사로 일하게 됐으니 참 갑갑하긴 했을 거 같다.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끔 작품을 발표하던 슈니츨러는 90년부터 후고 폰 호프만스탈, 펠릭시 잘텐, 리하르트 베어-호프만 등과 교유하는데, 유념하시라, 이들 모두 유대인이고, 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반유대주의가 노골적으로 시작할 무렵이었다. 하여튼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1893년, 하릴없이 서른한 살이 된 슈니츨러에게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오게 마련인 기회가 온다. 아버지 노슈니츨러가 세상을 등진 것. 슈니츨러는 이제 마음 편하게 시립병원에서 나와 개업의가 되는 동시에 거의 완전히 자유롭게 창작생활로 접어들게 된다. 아직 혼인 경험이 없던 슈니츨러는 서른다섯 살 되던 1897년에 마리 라인하르트가 “세간의 눈을 피해” 사생아를 낳고, 2년 뒤에 패혈증으로 사망하는 충격을 당한다. 이때의 경험으로 십년 후인 1909년, 슈니츨러는 <트인 길로 가는 길>을 써 발표하고, 발표한지 110년이 지나 2019년, 우리나라에서도 번역해 나로 하여금 읽게 만들었다. 일본은 우리보다 백년 먼저 번역, 출간했다. 뭐, 그렇다는 거다.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작품으로는 남녀 여러 명이 두 줄로 서서 서로 체인징 파트너 하면서 춤을 추는 군무의 일종을 제목으로 딴 <라이겐>을 읽어보았다. 그리 특징적인 작품이 아니라 크게 인상적이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그래도 파격적인 내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은 했더랬다. 그러다 요새 갑자기 이이의 희곡작품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검색해보니 <테레제>와 함께 딱 두 권뿐인 장편소설 <트인 데로 가는 길>이 눈에 띄어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책값 비싸게 찍으려면 맘대로 해라, 난 도서관에서 빌려 읽겠다!


  주인공 게오르크 폰 베르겐틴 남작의 27세부터 28세까지 약 일년 간의, 시대소설이라기보다 연애소설이다. 주인공 소개를 해보자. 지난 4월에 미국으로 영구 귀국을 앞둔 연인 그레이스와 시칠리아에서 애수 어리고 다소 지루한 이별여행을 마치고 귀국했고, 늦봄엔 블레트 호숫가의 빌라에서 마지막으로 음악에 관해 대화를 하고는 평화롭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아버지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청년이다. 슈니츨러의 전작 <라이겐>도 그렇고 이 작품도 그렇지만 일단 작품 전체에서 다양한 음악 이야기가 나온다. 게오르크의 직업이 작곡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슈니츨러가 서양에서도 음악이라고 하면 전세계, 다른 지방 사람들은 일단 좀 꿇리고 들어가는 빈 사람이라서 그렇기도 하겠다. 즉 음악이 마치 공기처럼 이들의 일상에 충만하다는 것. 게오르크의 아버지 노老베르겐틴 남작도 작은 체구의 성악가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에까지 골인해 맏아들 펠리치안을 낳고, 다음해 게오르크까지 낳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병약한 체질 때문에, 아마 폐결핵 아니었을까 싶지만, 지중해 지역으로 아이들과 함께 요양생활에 들어가고 아버지는 호텔을 전전하며 생활한다. 이때 형제는 시칠리아, 로마, 튀니스, 케르키라, 아테네, 몰타, 메라노, 리비에라, 피렌체 등등에서 살게 되며, 넘쳐 넘쳐 흐르던 노베르겐틴 남작의 재산까지 완전히 폭삭 망하게 하진 않았지만 거의 거덜을 내버리고는 어머니는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가 9년 전이고 게오르크가 열여덟 살.

  지금은 아버지마저 작고했으니 상중이다. 시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의 반유대주의 선동시절이며, 굳이 연대로 따지자면 1904년 정도가 아니겠는가 싶다. 역자는 1900년 전후라고 각주를 달았다. 아무리 상중이라도 젊은 남자가 하루 종일 집밖 출입을 삼가며 애도만 할 수는 없잖은가. 시묘살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하여 게오르크도 친구들에 이끌려 사교모임에 참석하게 되면서 본문만 670 페이지가 넘는 연애소설을 시작하는 거다.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문학 공부를 할 때, 호프만스탈, 잘텐, 베어-호프만 등 유대인 작가들과 교류를 맺었다는 건 위에서 얘기했다. 이 영향을 받아서인지 <트인 데로 가는 길>에서 주인공 게오르크 폰 베르겐틴 남작도 주로 유대인과 좋은 유대를 맺는다. 로스너 가족, 에렌베르크 가족, 작가 하인리히 베어만, 나이가 좀 더 된 작가 에드문트 뉘른베르거, 뷔너 부인과 뷔너 양, 예비역 장교 데메터 슈탄치데스, 골로프스키 가족, 독설 전문가인 나이 든 오버베르거 부인, 궁정고문관 빌트 씨, 슈타우버 씨와 아들 박사 등등.

  참. 이거 먼저 얘기하자. 이 책 재미있다. 근데 진짜로 읽어보실 분께 미리 한 말씀 드리자면, 등장인물이 무수하게 많다. 읽다보면 막 헷갈릴 정도다. 예를 들어 에렌베르크 가족, 이렇게 썼지만, 에렌베르크씨와 에렌베르크 부인, 아들 오스카어, 딸 엘제가 다 완전히 다르게 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네 명이라고 봐야 한다. 이것저것 다 합하면 수십 명의 이름과 성격을 몽땅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기니까 그건 미리 각오를 하시라. 위 문단에 거론한 건 오직 유대인들뿐이다. 여기에 드문 빈도이기는 하지만 친유대 성향의 선량한 랠프 스켈튼, 쇤슈타인 백작도, 반유대 성향의 골통들도 몇 명 포함된다.

  게오르크는 전에 『서동시집』에서 시 두 편을 골라 곡을 붙여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메조)소프라노 아나 로스너 양에게 악보를 전해준 적이 있다. 작곡을 했으면 자신의 노래를 성악가가 직접 부르는 걸 들어봐야 할 터이니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루는 그게 생각나 주로 유대인이 많이 사는 파울리너가세의 허름한 건물을 방문한다. 늘 어렵게 생활비를 벌어오느라 뼛골이 빠진 로스너 씨는 그를 보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누추한 곳을 남작님께서 직접 방문해주시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바치고, 아들 요제프는 소파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남작과 함께 조금 시간을 죽이다가, 그가 누이와 함께 문이 열린 방에 들어 노래를 하고 반주를 하는 동안 불쌍한 엄마를 졸라 돈을 타내 반유대성향을 감추지 않는 친구들과 어울리러 나간다. 이때까지는 게오르크와 아나 양 사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워낙 유대인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게오르크는 돈냄새와 음악에 관한 조예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탁월한 유대인들 역시 극진하게 생각해주는 대상이라서 시오니즘을 주장하는 에렌베르크 씨 가족이 베르겐틴 형제를 위해 만찬을 베풀고, 이 장소에 빈에서 방귀 깨나 뀌는 유대인들이 모두 모이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소박하지만 우아한 드레스 차림의 아나 로스너 양이 등장한다. 더구나 놀랍게도 에렌베르크 여사는 로스너 양이 등장하는 순간, 게오르크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를, “아나 로스너 양은 당신을 위해 초대했어요.”란다. 세상 사는 일이 다 그렇다.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보내주고 함께 반주하고, 노래하면서도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가, 당신을 위해 초대했다는 말로 갑자기 파르르, 저 신경줄기가 떨리기 시작하는 거. 이리하여 이들은 연애에 들어가기 시작하고, 창 밖으로 교회당의 오르간 소리가 들리는, 공동주택으로 개조한 옛 대저택의 궁륭천장으로 된 나지막한 방을 얻어 자신들의 연애장소로 만들어버린다. 아무리 망해도 남작 집안의 자제이니 이 정도야 뭐. 나 연애하던 시절 생각하니 솔직히 부러워 죽겠다. 방을 얻었으면 어쩌겠나. 결국 덜커덕 걸려버렸다.

  4개월 동안의 이탈리아 커플 여행을 포함한 9개월이 지나고 아나 로스너 양은 정말 잘생긴 아들을 낳는다. 아이를 낳으면 대개 작은 노인처럼 쪼글쪼글한 주름투성이인데, 형의 이름을 따서 펠리치안이라고 이름 지은 아이는 환한 얼굴에 파란 눈동자를 지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다만 게오르크는 예술가 사이에서 드물지 않은 빈도로 발견할 수 있는 자유주의자라서 결혼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연애소설이라고 했다. 연애소설의 8할은 사실 이별 소설이다. 커플이 연애를 하고, 방을 얻어 몸을 섞고 잉태를 한 후, 4개월 동안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혼인을 안 해? 더구나 아이를 다른 부부에게 맡기고 애 아비는 독일로 가서 지휘자 생활을 시작하고 이후 벌어질 일은 차차 생각해본다고? 이러니 작품의 중간부터 이 연애소설도 결국 이별로 끝을 맺겠다고 짐작하는 건 타당하지만, 과연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과거 경험처럼 아이 낳은 후 2년 만에 여자가 죽을까? 그렇게 비극적인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진짜? 안 알려줌.



  그러나, 현대의 여성주의 시각으로 보면 게오르크의 행각이 불쾌할 수도 있으니 감안하실 것. 스토리의 중요한 전환이 작품의 중간 부분에 발생을 하는 관계로 내용 서술에 애를 먹었고, 당연히 소개한 스토리는 절반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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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1-04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만 670 페이지가 넘는 연애소설‘, ‘연애소설의 8할은 사실 이별 소설‘ 이라니 너무 흥미로울것 같아요! 저는 이 작가의 <라이겐>을 사두고 아직 읽진 않았습니다.

잠자냥 2022-11-04 08:34   좋아요 0 | URL
구스톨 소위 언제 만나요?

다락방 2022-11-04 08:42   좋아요 0 | URL
제가 요즘 구스톨 소위 만나고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요. 좀 기다리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11-04 15:11   좋아요 0 | URL
근데 다락방 님 보시면 <라이겐>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좀 빡치지는 않겠어요?
 
제르미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6
에밀 졸라 지음, 강충권 옮김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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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축하합니다, 민음사!!!!! 4백 번이 넘어서 처음으로 에밀 졸라가 나왔습니다! 전 세계 문학전집 가운데 최초 기록일 겁니다. 4백 넘어서 ‘첫‘ 졸라! 우러러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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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11-02 19: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드디어 민음사에서도 나왔군요. 오 반갑네요!

Falstaff 2022-11-02 19:56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민음사의 졸라. 졸라를 전집에 포함한 게 기적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얘네들, 별 짓을 다 해요.

coolcat329 2022-11-02 20:44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아 이게 왜 이렇게 웃기죠?

alummii 2022-11-02 20: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그러고보니 4백번 넘어서 나오다니 ...졸라는 졸라 문학동네껀데...!! ㅋㅋㅋㅋ

Falstaff 2022-11-02 21:43   좋아요 4 | URL
ㅋㅋㅋ 그게 어딨어요. 번역 잘 해서 좋은 책 내면 대빵이지요.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11-02 20: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백자평에 오늘의 촌철살인상을 수여합니다.
아 졸라!!! 좋아요. ^^

Falstaff 2022-11-02 21:44   좋아요 2 | URL
ㅋㅋㅋ 고맙습니다. 바람님 눈매가 매워요!! ^^

새파랑 2022-11-02 2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밀졸라하면 문학동네인데 드디어 민음사에서도 나왔군요 ㅋ 번역비교하는 재미도 있을거 같아요~!!

Falstaff 2022-11-03 06:56   좋아요 6 | URL
궁금한게, 이게 새 번역인지, 아니면 절판된 책을 사온 건지 모르겠단 겁니다.
요즘 하는 짓 보면 구번역을 사 온 거 같고, 만일 새 번역이라면, 아직 시중에 나오지 않은 루공-마카르 총서가 열 작품이나 되는데 왜 하필이면 제르미날을 번역했는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거고요.
하여간 이런 세계문학전집 내는 민음사는 미스테리오조 자체입니다.

그레이스 2022-11-03 09: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기다릴걸 그랬나요^^;;

Falstaff 2022-11-03 15:44   좋아요 1 | URL
오, 벌써 사셨나봅니다. ^^

그레이스 2022-11-03 15:46   좋아요 1 | URL

저는 문학동네로 사놓았어요
골드문트님 평을 보고 다시 살지 결정해야겠네요 ㅋ

Falstaff 2022-11-04 15:12   좋아요 1 | URL
뭐 두 종을 다 사실 필요가....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