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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세트 - 전6권 ㅣ 로마제국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 외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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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두번째 권은 로마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콘스탄티누스부터 동로마제국의 첫번째 황제 발렌스의 죽음까지 다루었다.
1권보다 훨씬 재미있다. 물론 이건 내 경우에 그렇다는 것. 1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자 역사상 유일하게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숫사자의 탈을 쓰고 입장해 직접 검투사 대결을 벌여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황제 콤모두스부터 시작해 콘스탄티누스의 등극까지 였는데, 콤모두스 이전 황제 가문의 내력은 조금 알고 있던 터라 무릎을 칠만큼 재미지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에 관한 (내 입장에선) 지독하게 지루한 설명이 무려 두 장章에 걸쳐 설명하고 있어서 짜증이 났었기 때문이었다.
2권이라고 해도 시작하자마자 동로마제국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콘스탄티누스 황제, 오직 기독교를 공인했기 때문에 “대제great emperor”라고 불리는 이이가 콘스탄티노플을 창건하고 그곳에서 로마와 유사하지만 똑같지는 않는 정치제제를 비롯한 사회적 시스템을 설명한 후 이어서 황제의 품성과 그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기 후에 치루었던 전투/전쟁, 세 아들에 의한 로마의 분할 통치와 내전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역사책 읽으면서 무슨 흥미진진이냐고? 모르시는 말씀. 가장 기본적인 역사의 시스템을 이루는 건 정치와 경제, 문화, 사회, 이 가운데 특히 정치와 경제 시스템이다. 하지만 나 같이 역사에 관심이 있는 보통의 독자가 제일 곤혹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이 시스템 분석 역사다. 우리나라를 예를 들자면, 전혀 이야기가 될 것 같지 않은 이슈, 고려시대 토지 제도가 조선시대 제도에 영향을 준 방식 등을 논하는 김정배 선생의 책을 나는 읽어낼 자신이 없다. 반면에 누가 누굴 죽이고 왕이 됐는데, 새로 왕이 된 임금이 이를 축하하기 위한 만찬 자리에서 조카한테 칼을 맞고, 하는 식의 위진남북조 시대 사마 씨 역사 같은 건 그야말로 흥미진진하다. 친척끼리 너무 죽여대서 나중엔 좀 그만 죽였으면 하는 심정까지 든다. 진짜다. 시간 나면 한 번 찾아 읽어보시라.
그런데 에드워드 기번은 여기에 한 술 더 뜬다. 대제라 칭하는 콘스탄티누스의 투철한 군인정신이나 새로운 도시를 개척하는 프론티어의 모습에 방점을 두는가 싶었다가, 성격적 결함이나 의심투성이,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 의심이 많아질 수밖에 없겠지만 하여튼 이런 그늘진 모습까지 서슴없이 서술을 하는데, 자신의 발언에 꼬박꼬박 증거를 들이대니, 만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자손이 아직 숨을 쉬고 있다면 기함하다가 넘어가지 않을 도리도 없겠다 싶다. 콘스탄티누스는 미천한 출신의 정실부인 미네르비나와의 사이에 장남 크리스푸스를 둔다. 일찍 홀아비가 된 그는 선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인 파우스타와 재혼해 세 딸과,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 3형제를 더 둔다. 그리고 정치적 야심이 1도 없는 두 명의 형들에게 갈루스-율리아누스 형제, 달마티우스-한니발리아누스가 있었고, 여동생들도 결혼해 수십명의 친조카, 외조카를 두었다. 그러나 30년도 안 되는 세월이 흐르면, 이 가운데 그때까지 숨을 쉬고 있던 건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와 조카 율리아누스 딱 두 명 뿐이었다. 이중에서도 가장 재능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맏아들 크리스푸스는 불과 열일곱의 나이에 부황제로 임명해 전쟁터에 보냈더니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작전과 중원을 휩쓰는 초절정의 검술로 연이어 승전보를 전한다. 소위 “대제”라고 하는 콘스탄티누스는 맏아들의 넘치는 인기에 졸지에 좌불안석, 자고로 세상에 태양은 오직 하나만 있어야 하는지라, 엣다 모르겠다, 대궐로 불러들여 좋은 말을 하더니 단칼에 죽여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알아두시라. 친아들이었다, 친아들.
이왕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나온 김에 기독교 공인에 관한 이야기를 읽은 소감도 하나 꽝.
로마의 매력 가운데 하나가 다신교와 그리스로부터 물려받은 재미나고 재미난 신화, 전설, 민담, 야사野史, 기타등등. 안 그런가? 이게 다 백색 대리석으로 기막히게 조각한 숱한 신들의 경연에서 비롯했다. 이 신들은 신들의 아버지인 유피테르부터 나름대로 다, 개과dog family 동물과 비슷하게, 서열을 갖고 있어 그저 서열에만 복종하면 신도 그렇고 인간들도 그렇고 먹고 사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가끔 까불어대는 족속이 있어 이런 작자들이 신화를 만들어냈을 뿐. 이렇게 숱한 신이 사이좋게 잘 살고 있다가 기독교의 신, 야훼가 들어왔다. 드디어 야훼가 들어와버렸던 거였다. 사랑의 신이자 질투의 신. 종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제일 중한 첫번째 엄명을 내린 다음, 계명을 받은 모세가 자신을 따라온 유대인들한테 가보니 잔뜩 취해서 황금 송아지한테 절을 하고 있는 걸 보자마자 질투의 불칼을 내리 꽂았던 신이, 로마 땅에 들어와 온갖 이단의 신들을 목격했으니 이제 야훼는 새롭게 할 일이 무척 많이 생겼을 수밖에. 다 때려잡아야 했을 터이니 말이지. 구약을 읽어 보시라. 야훼가 가장 참지 못하는 것이 자기 백성들이 다른 신을 섬기는 거였다. 고대 유대인들은 거의 모든 종교가 그랬듯이 자살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구약 시대에 만일 진정으로 스스로 죽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면 야훼가 보는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는 시늉만 하면 됐다. 곧바로 불칼을 맞아 즉사, 적어도 고통을 모르고 단칼에 갈 수 있었으니.
못 말리는 질투를 로마의 땅 위에서도 시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로마는 기록의 시대. 물론 전에도 기록은 했지만 구전에 의해 전해지다가 후세에 의해 기록을 한 거하고, 직접 본 사람이 기록한 거하고 같을 수가 없어서 이번엔 점잖은 체면에 직접 뛰어들지 않고 야훼의 대리인들을 통해 질투를 구현하기로 결정한다. 누구? 주교와 대주교. 아직 교황이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주교와 대주교는 처음엔 숱한 기독교 교파끼리 지들이 더 잘났다고 서로 대가리 터지게 싸움박질을 한다. 아직 이교의 신들하고 맞짱을 뜨기엔 유피테르의 힘이 덜 빠지기도 했다.
용감무쌍하고 유능한 군인이자 전술가이며 탁월한 학자이기도 한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 다음, 다음 황제로 있을 때, 이이가 젊었을 때 그리스에 유학해 철학을 깊게 공부한 적이 있어 그리스의 종교에도 믿음이 깊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누스 이후 로마 황제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비호받고, 돈도 받고, 땅도 받고, 건물도 받고, 귀족과 부호들한테 기독교 교회에 기부도 많이 하라고 협박도 해주는 바람에 기세등등하고 콧대도 높았던 야훼에 반대해 다시 그리스 로마의 신들을 경배하기에 이른다. 물론 당시에 벌써 기독교의 힘도 막강해져 그들을 박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유피테르 집안 사람들이나 애인들을 경배해도 저 위대한 성군 솔로몬이 했듯이 신전에 황소 2만 2천마리, 양 12만 마리를 소신 희생해 공중에 미세먼지를 분사할 수는 없었다. (이 책에는 황소 2만 2천마리는 내 의견과 같은데, 양은 120 마리라고 써 있다. 확인하기 위해 다시 구약을 꺼내긴 싫지만 내 말이 맞을 거다.)
기독교 말고,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인 주교와 대주교의 버릇을 잘못 들인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본인이다. 본인은 죽음의 침상 위에서야 겨우 세례를 받은 주제에 거의 모든 일에서 기독교를 거의 최우선하는 정책을 밀어붙인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으로부터 정식 종교로 인정받고 불과 30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정치적으로는 아직 아니지만 종교적으로는 황제마저 주교와 대주교의 아들의 위치에 앉히기에 이른다. 왜 그랬느냐 하면, 콘스탄티누스가 아니더라도 무릇 황제의 자리에 있으면 얼마나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겠는가.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종교에서도 집전의 자리에 있게 되면 밥이라도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교, 대주교들은 자신들의 위세를 확장하는데 결코 게으름이 없었다. 당연하지. 유독 기독교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정치력 지수 political index라는 것이 있다면 대통령, 수상, 국회의원을 누르고 챔피언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종교 지도자라고 하니까. 이것만 해도 그런데 황제가 직접 시간 날 때마다 기독교를 찬양하고 직접 미사에도 참가하고 그러니까, 수도 콘스탄티노플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로마에서도 돈 좀 있고 원로원 의원이나 의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 귀족들이라고 별 수 있나? 다들 믿거나 적어도 믿는 시늉은 할 수밖에. 그이들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 독자들이 이해하고 넘어가자. 용감한 철학자 황제 율리아누스가 다시 다신교를 주장하자 얼른 기독교를 버리고 개종하더니, 사후 요비아누스 황제가 등극하니까 또다시 개종하는 것처럼. 인생 뭐 있냐, 다 그게 그거지. 역사책 읽으면 제일 많이 느끼는 게 그거다. 인생 뭐 있어? 기독교를 안 좋아하느냐고? 아니다. 좋아하지는 않지만 싫어하지도 않는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나한테 믿으란 얘기만 안 하면 된다.
율리아누스 황제를 알게 된 것이 이 책을 읽으며 진짜 좋았다. 종교 이야기 빼고. 완전하지 않은 용감한 천재. 그는 젊은 나이에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에서 다 이긴 싸움을 하다가 창을 맞아 죽는다. 황제가, 말 위에서.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될 뻔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보병 사병 출신이다. 쫄딱 망한 귀족이라 장교도 아니었다. 거기서 황제의 가문이 시작했으니 그의 후손들이 차지한 황제 자리, 여기에 등극하려면 칼부림에 능숙해야 했다. 군인 황제의 전통이 내려오며, 직접 칼을 들고 적과 싸우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겼는데, 세상에나. 다 이긴 전쟁을, 마치 신과 같은 영웅적 철학자 황제가 급사하자마자 단박에 전세 역전, 로마군은 전투에도 지고 철수하며 판판히 깨지다가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으니, 황제의 손실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그토록 유능한 황제 스스로가 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 돼? 말도 안 되니까 더욱 재미있다.
이 책은 율리아누스 황제 이후로도 조금 더 진행해, 아시아 북동부에서 발현한 훈족에 밀려 로마를 할 수 없이 침공했던 고트족과의 싸움으로 본격적으로 로마제국이 쇠망해지기 시작할 때까지의 역사가 쓰여 있다. 흥미진진하다. 웬만한 소설책보다 훨씬 재미있다. 글쎄 이 맛에 역사책 읽는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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