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인즐링
토머스 미들턴 지음, 조성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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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뒤편에 실린 지은이 소개를 읽어보면, 토머스 미들턴(1580~1627)은 '또 다른 셰익스피어'로 불릴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유일한 극작가라고 했다. 그의 희극과 비극은 동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으며, 아리스토파네스, 입센, 라신과 비교되고, 17세기 중엽 영어권 최초의 여성 전업 작가 애프러벤, T.S. 엘리엇까지 숱한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셰익스피어의 16년 연하니까 영국의 르네상스 뿐 만 아니라 세계 르네상스 문학에서 거의 독보적 존재로 이름을 굳힌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수는 없겠지만, 토머스 미들턴이란 극작가가 있었다는 것만 알지 정말로 그의 작품은 단 한 편도 읽은 적 없고, 우리나라에서 막을 올렸다는 공연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도 기억에 없는 사람을 "또 다른 셰익스피어니”, 다른 이름도 아니고 아리스토파네스, 입센, 라신과 맞먹을 수 있다는 등의 말을 하면 조금 무리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여튼 토머스 미들턴은 미미하게 시작해 젠틀맨의 위치에까지 오를 정도로 입신양명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아버지를 다섯 살 때 여의긴 했으나 학업을 끝마치지는 못했지만 옥스퍼드에 입학했다. 이때쯤 극단 생활에 매력을 느껴 학교를 때려 치우고 '딴따라의 길'로 접어들긴 했지만, 대부분의 극단 종사자처럼 사주팔자에 역마살이 낀 건 아니라서 극단에 소속된 작가, 배우가 아니라 요즘 말로 프리랜서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인 <체인즐링> 역시 야외무대가 아닌 완전한 실내 극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쓴 것으로 보아 프리랜서가 맞다는 짐작도 해본다.


​  작년 연말에 오에 겐자부로가 쓴 <체인지링>을 읽은 적 있다. 오에의 '체인지링'이 미들턴의 '체인즐링'과 같은 단어다. 다만 일본어의 제한된 발음과 표기방식으로 쓰인 카타카나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서 "Changeling"이 '체인지링'이 된 것일 뿐이다. 오에 작품의 독후감에서도 한 번 이야기했지만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체인즐링의 사전적 의미를 다시 소개하면, (1) 주저하는 사람, (2) 아무도 모르게 뒤바뀐 사람 혹은 아이(아이의 경우 요정에 의해서 바뀜), (3) 모자란 사람을 의미한다. 근데 내 경우에는 (2)번의 의미 말고 달리 쓰인 경우는 보지 못했다.

  19세기, 양보해서 18세기도 아닌 17세기 초반에 쓴 희곡이 현재와 비교해서 어떤 특징이 있고, 당시의 주류 연극행위에 관한 성격이 어떻고 하는 건 중세 영어를 연구하는 영문학자에게 맡겨 두기로 하자. 미들턴이 <체인즐링>을 처음 공연하고 정확하게 4백년이 흐른 오늘, 공연이 아니라 희곡을 읽은 현대인의 감상을 솔직하게 적고자 할 뿐임을 먼저 양해해주기 바란다.

  미들턴과 로울리가 공동작업을 해 완성한 <체인즐링>은 스페인의 버만데로 성과 인근의 정신병원, 이렇게 두 장소에서 번갈아 펼쳐지는데, 성 안에서의 비극과 정신병원의 희극 씬이 서로 교차해 전개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5막에 가서 인물들이 합해져 비극으로 마감한다. 역자는 해설에서 이를 주 서사(버만데로 성)와 보조 서사(정신병원)으로 설명한다. 보조서사의 주요 등장인물 가운데 두 명인 안토니오와 프란시스커스는 나중에 성주 버만데로의 하인으로 밝혀진다. 주 서사나 보조 서사나 주제는 같다. 불륜과 부정. 지금은 아침 드라마의 막장에서조차 발견하기 힘든 범죄 등등.


  스토리를 이야기해보자.

  먼저 보조 서사. 정신병원. 병원장은 나이 많은 알리비우스. 나이가 많으니 전립선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아 배뇨에 문제가 있고, 그것보다 더 심각한 발기부전을 겪고 있는 바, 알리비우스의 이마에도 뿔이 돋으려고 하는지 근질근질하기 시작한다. 배우자는 자기 나이 근처에서 찾는 것이 현명하다는 진리를 무시하고 병원장이니 4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돈푼 깨나 만지는 덕분에 새파랗게 젊고 아름다운 이사벨라를 아내로 맞이한 건 뭐 알리비우스 개인의 욕심을 채운 거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사벨라 역시 뜨거운 피가 흐르는 절정기의 여성인데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이 의심 많은 원장선생은 아내를 자기 병원 안에 들여놓고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게 해버린다. 아닌게 아니라 아름다운 이사벨라를 탐하는 남자들이 많긴 하다. 이 가운데 위에서 얘기했듯 버만데로 성주의 하인 안토니오와 프란시스커스는 곧 숨이 넘어갈 만큼 상사병에 걸려 얼굴에 노랑병이 들어 죽어가려다가 드디어 고의로 미친 척을 해, 병원에 입원하는데 성공한다.


​  그리고 주 서사. 처음부터 끝까지 로만데로 성이다.

  막이 올라가면 주인공 알세메로가 친구 자스페리노와 함께 몰타로 항해를 하려다 바람이 좋지 않아 출항하지 않고 버만데로 성을 방문한다. 연극의 속도를 위해 곧바로 알세메로는 여주인공 베아트리스와 마주치고, 둘은 언제나처럼 한 순간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이미 알론조 드 피락쿠오와 정혼했고 일주일 후에 결혼을 할 예정이다. 아뿔싸. 알세메로는 이제 막 세상의 기쁨을 알았구나, 하는 순간에 사랑을 다시 거둬들여야 함을 알고 단칼에 포기해버리지만, 베아트리스는 정혼자 알론조를 자신의 남편으로 나쁘지 않게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알세메로한테 뭐가 씌었는지 그를 위한 사랑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때 등장하는 버만데로 가의 하인 드플로레스. 콰지모도보다 흉하게 생긴 얼굴을 한 사나이. 자신이 자신의 외모를 품평해 놓은 것을 보자.


​  "내 얼굴이 꽤 추하다는 건 인정해. 매독에 걸려 얼굴에 흉터 자욱이 가득하고, 마녀 같은 턱, 대여섯 가닥의 머리털이 서로 붙어 있기 두려워서 얼굴 여기저기 구석에서 중얼대고나 있고, 여물통 같은 주름에 비열하고 정직하지 못한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고인 돼지만큼 추악한 얼굴"

  콰지모도를 창안해낸 빅토르 위고는 19세기 사람이다. 19세기 작가는 이처럼 못생긴 인물의 내면에 사랑이 가득한 성정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지만 17세기 초반 미들턴 시대의 작가들은 이런 인물에게 대개 괴물인간이나 악당, 비열함과 비겁함을 선사해주었다. <체인즐링>에서도 마찬가지로 드플로레스는 성주의 아름다운 딸 베아트리스를 사랑, 사랑 좋아하네, 사랑 말고 욕정의 대상으로 생각해온 인간이다. 당연히 베아트리스는 극의 도입부에서 흉한 외모의 드플로레스에게 "가까이 오지 마, 냄새가 지독해." 같은 경멸의 말도 서슴지 않는 기피 대상이었지만, 어떻게 하면 정혼자 알론조 대신 알세메로와 결혼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드플로레스에게 다정하게 제의를 하니, 괜찮은 남편감이라고 생각해온 알론조를 죽여 달라는 거였다. 알론조에게 그만한 대가를 치루기로 약속을 하고.

  그리하여 드플로레스는 알론조에게 성을 안내해줄 테니 구경 좀 하시라고 제의하고 이를 받아들여 한 바퀴 돌던 중, 좁은 틈바구니를 가야하는 동안 무장을 해제하라고 하더니 가슴에 품고 있던 단도를 알론조의 가슴에 정확하게 박아버린다. 이 당시 젠틀맨 정도의 일년 생활비가 백 파운드였다는데, 베아트리스는 드플로레스에게 3백 파운드를 주고자 한다. 그러나 드플로레스는 천만의 말씀. 베아트리스의 순결한 몸을 원한다. 일단 몸을 얻으면 돈이야 저절로 따라오는 거란 걸 알고 있는데 이 악당이 미쳤냐 말이지. 자기 목숨은 워낙 하찮은 거라서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백해 둘이 같이 죽는 길을 갈 거라고 협박을 하니, 결국엔 매독에 걸린 흉터 자욱이 가득하고 대여섯 가닥 머리털이 얼굴 여기저기에 붙은 드플로레스 앞에 누울 수밖에.

  알론조가 죽었다. 연극이니까 속도감을 위해 베아트리스는 일 분의 애도기간도 없이 곧바로 알세메로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여성의 순결은 명예와 직결되는 가치였다. 첫날 밤에는 당연히 출혈을 수반해야 했지만 이미 그건 드플로레스와 그렇게 해버렸으니 이걸 어쩌나. 고민하다가 베아트리스는 알세메로의 의약품 상자에서 신기한 약물을 발견한다. 처녀 감별 시약. 티스푼으로 하나를 먹이면 곧 하품을 하고, 재채기를 하고, 크게 웃다가 약효가 떨어지면 처음보다 우울해진다. 베아트리스는 자신의 순결한 하녀 다이아판타에게 이 시약을 먹여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관찰을 하고, 남편 알세메로가 자신은 너무 수줍어 결혼 첫날 밤은 도저히 얼굴을 보여줄 수 없으니 불을 끈 다음에 더듬어서 침대에 오르겠다고 요구해 허락을 맡는다. 하녀 다이아판타와 알세메로의 친구인 자스페리노가 베아트리스-드플로레스의 이야기를 우연히 옅들은 다음이다. 근데 허락했다고? 그렇다. 알세메로가 처녀 감별 시약을 아내에게 먹여 보았고, 아내는 하녀에게 일어난 현상을 그대로 연기해 새색시의 순결 여부를 확신했었으니까.

  그리하여 결혼식을 올린 날, 베아트리스는 아직 남자의 손길을 경험해보지 못한 하녀 다이아판타를 완전히 어두운 신방에 자기 대신 들여보내기에 이른다. 즉, 아무도 모르게 뒤바뀐 사람, 체인즐링의 사전적 의미 가운데 (2)에 속한다는 말씀.


​  이후 어떻게 되느냐? 이 책 읽어 보실 분이 별로 없을 거 같아서 시원하게 말씀드립자면, 베아트리스 입장에서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하녀를 살려 둘 수 없다. 그리하여 악당 드플로레스는 베아트리스의 묵인하에 다이아판타의 방에 불을 지르고 총으로 쏴 죽인 다음, 불에 타 죽었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친구 자스페리노가 알세메로에게 진실을 밝혀 두 악당은 최후를 맞는다. 물론 훨씬 드라마틱하게.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대의 음담패설, 혹은 야한 상징들로 가득하다. 하긴 셰익스피어도 간간히 그런 농담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심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뭐 그래서 더 재미라도 있으면 좋은데, 정의는 살아 있다, 결국 정의가 이긴다는 식의 권선징악의 길을 똑바로 걷는 작품이라서,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당시엔 어떤 평가를 받았고, 영문학적 위치를 감안하지 않은 아마추어 독자의 감상으로는 굳이 책값 비싼 지만지 드라마 책을 사서 읽을 필요까지는 있겠나 싶었다. 나처럼 도서관에서 희망도서 신청을 해 "첫빠따"로 읽을 수 있으면 장땡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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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12-17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제목과 비슷해서 착각할 뻔했어요. 시대도 인물도, 영화랑 다르네요^^ 영화나 소설이나 (2)번 의미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지만^^

Falstaff 2022-12-17 17:31   좋아요 0 | URL
아하. 보신 영화의 원작이 바로 이거, 맞을 겁니다. 영화화 하면서 각색한 거겠지요.

yamoo 2022-12-17 1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두 문장...이거로 인해 저는 패수~~
이런 친절한 멘트, 너무 사랑합니다. 문트님..^^
이 한 권은 건너 뛸 수 있군요..ㅎㅎ

Falstaff 2022-12-17 17:31   좋아요 1 | URL
ㅎㅎㅎ 너무 오랜 텍스트라 도무지 권하지는 못하겠더라고요. ^^

그레이스 2022-12-1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침드라마;;;
여기서부터 골드문트님 써주시는 글 읽고 패스할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침드라마 보진 않지만 우연히 한번 보면 그 한편으로 앞뒤 스토리를 다 꿰게 되는데...

이 소설은 그래서라기보다 막장 스토리때문인듯 합니다.^^

Falstaff 2022-12-19 06:28   좋아요 1 | URL
본문에도 썼지만 17세기 초에 읽었으면 재미있었을 듯합니다. 근데 지금은 아니에요. ^^
 
아비가일
서보 머그더 지음, 진경애 옮김 / 프시케의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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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너의 인생에 닥친 변화는 집에 떨어진 폭탄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버렸다.”

작품은 이 같이 격렬한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주인공 비터이 게오르기너는 불과 열네 살. 언뜻 생각이 들기를, 아직까지는 행복할 권리만을 향유해야 하는 헝가리 군대 장군의 외동딸인데 무슨 특별한 곡절이 있을까 싶지만, 때는 1943년, 2차 세계대전에 헝가리가 참전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에 같은 부다페스트에서 열네 살 동갑내기 청소년 시절을 지내던 다른 헝가리 작가 한 명이 얼핏 생각난다. 케르테스 임레.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운명>, <좌절>,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3부작을 쓰게 될 유대인 소년. 임레는 유대의 피를 타고 났다는 누구나 아는 질곡을 짊어졌으나, 기너는 왜.

오늘 <아비가일>의 독후감은 쓰기가 매우 어렵다. 작품의 앞쪽에 소설의 방향을 확 바꿀 결정적인 전환점이 닥친다. 그러나 나는 그게 무엇인지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걸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작품의 초반 스토리 위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도 또한 아쉽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렇게 해야 다른 이들이 이 책을 더 흥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것을.

게오르기너, 기너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위었다. 홀아비가 된 아버지 비터이 장군은 기너의 양육과 교육을 위하여 동유럽 귀족들이 항용 그러하듯 프랑스 여성 마르셀을 고용해 기너를 맡겼으니, 기너에겐 마르셀이 거의 어머니와 비슷한 존재였으리라. 마르셀은 프랑스 동부의 알자스 출신이어서 기너는 자연스럽게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그리고 이것들과 비슷한 체계를 갖고 있는 라틴어를 능숙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너의 인생에서 폭탄처럼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4년이 지난 해엔 헝가리가 히틀러의 위협에 굴복할 수밖에 없어서 프랑스는 헝가리의 적국으로 변했고, 적국의 여성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대편 장군의 집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동안 마치 모녀 사이처럼 파리, 런던, 베를린, 로마, 스위스 등지를 함께 여행하기도 하는 등 숱한 인연을 맺었던 현명한 마르셀은, 전쟁이 끝난 후에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자신의 물품을 많이 남겨놓은 채 프랑스행 열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르셀 한 명이 기너가 뺴앗긴 모든 것은 아니었다. 기너는 부다페스트 집에서 공립인 쇼코러이 어털러 국립 김나지움을 통학하고 있었다. ‘미모’라는 이름의 고모가 있어서 매주 목요일에 고모네 집에서 무도 티파티가 열렸고, 부다페스트의 상류층 인사들이 많이 왕래를 했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지만 이 가운데는 연극배우, 오페라 가수, 그리고 열네 살 먹은 기너가 언젠가는 아내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쿤츠 페렌츠 대위 같은 젊은이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맹렬한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기너는 쿤츠 페렌츠, 즉 쿤츠 페리 대위도 자신을 그만큼 사랑한다고 믿었다. 미모 고모네에서 열리는 주간 댄스 티파티. 하지만 마르셀은 페리 대위를 좋게 보지 않았다. 반면에 고모는 첫사랑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이해하고 기꺼이 기너의 수호천사를 자청했으니, 기너는 얼마나 고모를 좋아했을지 짐작할 수 있을 듯.

상류사회의 화려함과 부드러움, 즐거움을 대변하는 이 모든 것을, 그러나 아버지 비터이 장군은 한 순간에 몰수해버렸다. 대신 동부 헝가리 대평원을 넘어 국경 근처 가상의 교육도시 ‘아르코드’로 보내 머툴로 주교의 이름을 딴 여자 기숙하교로 전학하게 만든다. 아버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어머니처럼 지내던 마르셀이 귀국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실제로 마르셀에게 자신의 경솔한 여동생 대신 어떤 군인도 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당부했던 적이 있었기도 해서, 마르셀 대신 미모 고모를 집으로 들여 함께 지내면 어떻겠느냐는 기너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는 기너를 그저 멀리 보내려 할 뿐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고모는 기너에게 언질을 준다. 네 아버지가 갑자기 결혼할 것 같아. 그래서 널 멀리 보내려 하는 것일 거야. 기너 생각으로는 아버지의 재혼은 당연한 것이고 자신도 새어머니와 잘 지낼 수 있을 거 같다. 그래도 고모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오빠가 변했어. 더 우울해하고 더 말이 없어. 비현실적이야. 여자가 있을 거야. 이제 두고 봐라.”

그러나 장군은 누구에게도, 미모 고모에게조차 기너의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장군이 기너와 부다페스트를 떠나는 것도 비밀로 부친 채, 엄격한 칼뱅주의 신교 기숙학교라 별로 챙길 짐도 없는 기너만 태워, 예외적으로 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새벽에 직접 차를 운전해 동부 헝가리 평원을 건넌다. 헝가리 동부를 흐르는 티서 강변의 작은 마을에 도착해 장군은 기너에게 묵직한 달이 달린 아주 곱고 가는 목걸이를 선물한다. 엄격하고 작은 달. 기너는 이에 대한 답례로 왜 그랬는지, 담배를 피우지도 않는 아버지에게 작은 재떨이를 사 건넨다. 아버지의 눈길이라니. 그는 말한다. 언젠가 이 순간은 아주 소중해질 거야. 신이시어,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주소서.

드디어 교육도시 아르코드 근방에 도착한 부녀는 시내가 보이는 벌판에 서서 마주본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렇게 당부한다.

“자신을 돌보겠다고 약속하렴. 다 큰 성인처럼 조심하겠다고. 네가 아니라, 우리 곁을 떠난 네 엄마처럼. 들었니, 기너? 키스해주렴. 그리고 학교에 내가 널 놓고 가더라도 제발, 울지 말아라. 적어도 내 앞에서는.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

건조하게 스토리만을 전해서 그렇지, 나는 이 대목에서 책을 읽으며 첫번째 눈물이 흘렀다. 얼핏 인용한 부분만 읽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신파 같을 수도 있다. 신파 기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외동딸이 두 살 됐을 때 홀아비가 되어 평생 혼자 살면서 장군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 딸 아이를 저 먼 지방에 홀로 보내 놓았다고 이런 약한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군인, 그것도 장교, 장군으로서는 격이 떨어진다. 그러나 왜 이렇게 격 떨어지는 대사가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나는 차마 밝힐 수 없다. 오히려 여태까지 이야기도 말짱 생략한 채 “정말 재미있으니 그냥 읽어보시라.”라고만 하고 독후감을 끝내고 싶다.

서보 머그더는 <도어>보다 <프레스코>보다 이 책에서 더 매력적인 문장과 호소력으로 스토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물론 앞서 읽은 책보다 “더 좋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화적이기도 하고, 서보 시절의 강압적인 헝가리 체제를 충분히 은유하기도 했지만, 반전을 주장하며, 희생에 저항하는 아름다움 등을 넘치게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물론 성인들에게도 그러하지만 특히 고등학생 정도의 젊은이들이 읽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다.

이제 스토리는 겨우 10 퍼센트 정도 왔다. 드디어 기너는 자신이 다녀본 세상의 어느 곳과도 같지 않은 아르코드의, 땅딸막하고 하얗고 차갑고 창문들이 작고, 철을 두른 철창문으로 닫힌 머틀로 주교 학교를, 완고한 수위의 확인을 거쳐 들어가게 된다. 이곳에 힘든 짐을 진 무수한 학생들. 엄격한 계율과 금지와 검열과 의무와 획일과 고집과 벌과 수많은 죄와 상상할 수도 없는 청결과 경쟁과 비밀과 소녀들의 모임과, 소근대는 웃음과, 장난과, 배신과, 따돌림과, 협의와, 작은 정의와, 다툼과, 화해와, 즐거움과, 눈물과, 갈증 속에서 그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의 부다페스트의 소녀 기너는 당연히 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겪게 되는데, 오직 하나, 기너에게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가 있었으니 정원 저 편에 물항아리를 든 조각상. 그것의 이름이 바로 “아비가일”이었으니,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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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2-12-15 0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 아비가일이 누군지 알지롱~

Falstaff 2022-12-15 07:2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는 입틀막!

scott 2022-12-15 11:56   좋아요 1 | URL
저도 🖐🖐🖐

그레이스 2022-12-19 10:30   좋아요 1 | URL
아비가일은 다윗의 둘째부인?^^

Falstaff 2022-12-19 06:29   좋아요 2 | URL
또한 느브갓네살의 수양딸이기도 합지요. ^^

자목련 2022-12-15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도어>가 무척 좋았던 기억으로 남았는데 골드문트 님의 별5개,
이 책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Falstaff 2022-12-15 13:13   좋아요 0 | URL
이 책 재미있습니다. 다만 굳이 재미를 포함해 ‘읽는 맛‘의 순서를 정한다면 도어=프레스코>아비가일로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순위는 말짱 필요 없습니다. 전 서보의 작품은 다 좋더라고요!

yamoo 2022-12-15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총평이 없어 어떤지 몰루겠습니다. 보통 쓰신 후에 재미진다, 읽어서 후회없다 이 책을 왜 이제서야 알았을까 등의 평이 보이면 바로 구매하는 편인데, 이 책은 그런 짧은 평이 없네요...별 5개나 주셨는데....이제 10퍼센트 읽고 계셔서 그런가??

어쨌거나 어느 정도 재미진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어요~~^^

Falstaff 2022-12-15 13:1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책 읽다가 세 번 울었다니까요!

scott 2022-12-15 13:52   좋아요 1 | URL
전 머그더 이전 작품들 영어판으로 읽었는데 산도르 마라이 작품과 비슷했습니다
눈물은 안 흘렸고
문트님은 👌번 울보 되쉼

Falstaff 2022-12-15 14:39   좋아요 1 | URL
마라이 산도르의 소설도 진짜 좋지 않습니까? ㅋㅋㅋㅋ
스콧 님은 강철심장!

yamoo 2022-12-15 17:05   좋아요 2 | URL
음....아주 감명깊은 작품이라고 받아들이겠어요!ㅎㅎ

alummii 2022-12-15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프레스코 읽다가 포기했어요 ㅠㅠ 서보 머그더는 저랑 안맞나봐요 ㅠㅠ

Falstaff 2022-12-15 14:36   좋아요 1 | URL
안 맞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ㅎㅎㅎ 전 아니 에르노하고 진짜 안 맞아요. 가즈오 이스구로하고도 억수로 안 맞습니다.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2-12-16 07:41   좋아요 1 | URL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떠나지마” 도 별로셨어요??? (재고해 주십사…)

Falstaff 2022-12-16 16:06   좋아요 0 | URL
ㅎㅎ 남아있는 나날하고 세상의 화가, 그리고 이번에 녹턴 읽었는데요, 이 세 권의 책만 가지고 말씀드리자면, 도저히 제가 좋아할 수 없더라고요.
27일에 야박한 평을 해도 양해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yamoo 2022-12-15 17: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뉘!! 저도 아니 에르노하고 이시구로 억수로 안 맞았습니다!!ㅎㅎ

Falstaff 2022-12-15 17:16   좋아요 2 | URL
앗! 그렇습니까!!
12월 27일, 일찍이 없었던 노벨 문학상 수상자에 대한 험담이 벌어집니다.
ㅋㅋㅋㅋ 이거야말로, 개.봉.박.두!!! ㅋㅋㅋㅋㅋ

alummii 2022-12-15 21:0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전 이시구로는 억수로 좋아하는데예~~~아니 에르노하고는 안 맞심니더 ㅋㅋㅋㅋ걍 나랑 안 맞는걸 우째요 ㅋㅋㅋ

Falstaff 2022-12-15 21:21   좋아요 1 | URL
alummii 님은 27일 리뷰를 꼭 보셔야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2-12-19 1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궁금해서 안 읽을 수가 없겠는데요...아버지는 기너를 왜? 거기다 골드문트님이 눈물까지 ...

scott 2022-12-19 18:41   좋아요 2 | URL
👌번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머그더 도어 명작이고 이 작품은 헝가리에서 드라마로도 제작 된적이 있을정도로 대중적인 작품입니다 ^^

coolcat329 2022-12-19 18:46   좋아요 2 | URL
아 ~이 책 내용이 미스터리한게 드라마로도 어울리네요.
꼭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2-12-19 18:49   좋아요 2 | URL
ㅎㅎㅎ 그리하여 이 작품은 뽕짝 맞는데요, 그걸 엮어가는 스토리가 말입죠, 콕콕, 눈물샘을 찌르는 겁니다. ㅎㅎㅎㅎ
 
눈뜨는 봄
프랑크 베데킨트 지음, 김미란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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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천하게 베데킨트를 읽은 느낌으로 이 골치 아픈 극작가를 정의하자면, 가히 당대의 반항아,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1864년 독일 하노버에서 출생한 반항아는 후에 자신이 생산해낼 극작품에서만 반항아가 아니어서, 스위스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법학을 전공하기 위해 뮌헨으로 유학을 했을 때부터 하라는 법 공부는 안 하고 미술, 음악, 공연 같은 예술 방면으로만 전력을 기울이다가 급기야 열 받은 아버지로 하여금 베데킨트 가문 족보에서 호적을 파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화해를 하고 일년 남짓 다시 법을 공부하는 시늉을 하는가 했더니 그만 훌륭한 경제적 배경이 되어 주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다시 소위 예술을 향유하느라 물려받은 유산을 거덜내 버린다. 역자 김미란이 쓴 해설을 보면 이이가 짧게나마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 직장생활이라는 것이, 자신의 이름을 대면 가문에 누를 끼칠까 봐 그랬는지 “코르넬리우스 미네하”라는 이름으로 극장에서 소위 “낭독 예술가” 생활을 했을 뿐이다. 완전 거지꼴이 된 베데킨트는 진정한 예술가 답게 먹고 사는 데 가장 필요하지 않은 형이상학인 자존심을 버리고 누이동생한테 가서 빈대 붙어 살게 된다. 이 와중에도 유부녀인 스트린드베리히 여사와 불륜을 저지르며 아들도 낳고 그랬으면 누이동생 말고 여사님한테 용돈이나 좀 받아쓰든지 말이지, 쯧쯧.

  하여간 프랑크 베데킨트는 잘난 직장생활을 하기 바로 전에, 즉 누이동생한테 빌붙어 살던 시절인 1890년에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단 극작품을 발표하니 <Fruehlings Erwachen: 눈뜨는 봄> 또는 <사춘기>. 지금 독후감을 쓰고 있는 희곡이다. 여기서 추리를 하나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크 베데킨트 자신이, 당연히 본인의 성격이나 형질 또는 싹수나 싸가지는 감안하지 않고, 아들에게 기어이 법률을 공부하도록 강요했던 의사 아버지를, 당대가 빌헬름 2세 시절 ‘독일제국’ 환경이었음을 감안하면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건만, 과하게 완고한 기성세대, 즉 왕꼰대 정도로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아버지 베데킨트 씨로 말할 것 같으면, 미국 시민증을 갖고 있었다가 헝가리 배우 출신의 스위스 여성을 만나 다시 독일로 이사해 아들 프랑크를 낳았는데, 프랑크가 하필이면 자유분방한 엄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독하게 사춘기를 앓는 걸 나름대로 마음 아파했을 수도 있다. 뭐 여기까지는 추측이다, 추측. 그러나 베데킨트는 사춘기를 겪었던 스위스의 김나지움 시절에 당시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생식의 문제, 성적 본능 같은 것으로 고통스러워 했을 것이다. 남자로 태어나면 다 그렇다. 그리고 갈증과 고통이 정말 끔찍스럽다. 그러나 딱 그 시절엔 성과 생식에 대한 갈증과 고통이 유독 자신만 덮치는 것 같이 생각하고는 한다. 이런 경험이 베데킨트의 데뷔작인 <눈뜨는 봄: 청소년 비극>에서, 김나지움에 다니는 남학생(들)과 같은 나이의 소녀들 간의 생식과 성에 관한 관심과 집착, 질풍노도처럼 휩쓸어 지나가는 삶의 종결에 대한 선망과 실행, 심지어 동성애까지, 빌헬름 시대의 시각으로 본다면 여차하면 맞아 죽을 수도 있을 이단, 반역, 전도가 청소년들에 의하여 저질러지고, 반면에 기성세대에 의하여 책임회피, 수수방관, 과도한 엄격과 처벌, 비겁함이 드러난다.


​  멜히오어 가보어, 열네 살의 김나지움 학생으로 학업성적이 뛰어나 학급에서 3등을 하지만 교사들도 이 아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1등을 할 수 있는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심지어 독일에서도 예외적으로 1등 실력의 멜히오어가 가장 친하게 지내는 모리츠 슈티펠은 학급에서 꼴찌 성적에서 벗어날 듯 말 듯한 성적이다. 여차하면 유급을 당할 위기에서 간신히 3개월 간의 유예를 받았지만 극의 후반부에 가면 기어이 유급을 거쳐 퇴학처분을 받는다.

  모리츠는 열네 살 소년들이 가장 궁금해할 여성의 몸에 관한 호기심으로 충만해 있고, 아마도 몽정일 것 같은데, 특정한 성징을 경험한지 얼마 되지 않아 생식과 성에 관한 것을 멜히오어에게 물어본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은밀한 성적 지식은 교사, 부모가 아닌 친구를 통해 과장된 환상과 지식으로 포장되어 머리 속에 반입하게 되나보다. 그러나 멜히오어는 성적 지식도 나름대로 자연의 생물을 관찰함으로써 감을 잡고 여러 다른 책자와 개방적인 성향의 어머니를 통해 익숙해 있어서 모리츠에게 <동침>이란 제목의 성교육적 글, 말이 글이지 거의 논문 수준의 길이로 써 준다. 나중에 이 일 때문에 멜히오어의 젊은 청춘이 완전히 결딴이 나지만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세상에 누가 있어서 알겠는가. 다 팔자지. 그래서 함부로 글로 써서 남기지 말라는 거다. 하여간 모리츠는 멜히오어와 친하게 지내면서 생식과 유희로의 성에 관한 것 말고도 라틴어 작문 등 어려운 과목을 배우며 (내가 보기에)비교적 건전한 사춘기를 겪고 있었는데, 세상의 많은 극작품이 그러듯이 하루는 벼락을 맞고 만다. 학업성적 미달 사유로 유급에 이어 퇴학처분을 받은 것. 온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심각한 실패자라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 모리츠는 멜히오어의 엄마에게 아메리카로 가는 뱃삯을 부탁하면서 만일 가지 못한다면 자살해버리겠다고 편지를 보낸다. 모리츠 생각에 자신을 제일 인정해준 사람이 멜히오어의 어머니인 가보어 부인이었기 때문. 부인의 친절하고 애정 넘치는 거절 편지에도 불구하고 모리츠는 기어이 자기 머리통에다 권총을 쏘아 죽어버리고 만다. 열네 살 짜리가 학업 성적이 모자라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멜히오어의 옆집에는 열네 살 동갑내기 건장한 여자애 벤들라 베르크만이 엄마와 함께 산다. 완전히 구세대인 베르크만 부인은 막내딸이 건강하게 생리를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아이는 황새가 물고 온다고 말하고, 벤들라는 황새가 아이를 굴뚝에서 떨어뜨리는지, 창문을 통해 던져주는지 궁금해하다가, 급기야 열네 살의 진동이 충동하는 갈증을 이기지 못해, 엄마에게 어떻게 하면 아이가 생기는지 설명 해달라 조른다. 엄마는 먼저 ①결혼을 하고 ②배우자를 반드시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면 ③여태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게 되고 ④이후에 어느 날 황새가 날아온다고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얼마 후 모범생 멜히오어가 사춘기적 고독과 소외감에 휩싸여 건초장 2층의 건초더미에 누워 있다가, 굳이 멜히오어 말고 아무도 없는 2층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엉겁결에 두 열네 살짜리가 첫경험을 하고 만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으면서도. 그러니 벤들라는 아무 걱정이 없다. 엄마가 이야기한대로 결혼하지도 않았고, 사랑하지도 않았으니 자신의 몸에서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터이라서.

  이렇게 비극은 19세기 말의 청소년들에게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었다.

  그럼 멜히오어는? 위에서 이야기했다. <동침>이란 소논문. 그리하여 이 아이는 모리츠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하는 제단에 올라야 한다. 멜히오어를 누가 심판할 것인가. 당연히 김나지움의 판관, 즉 교사들이다. 프랑크 베데킨트는 이 판관들, 율법의 개들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 주었다.

  교장 조넨슈티히(일사병). 교사 아펜슈말츠(원숭이 비계), 크뉘펠디크(몽둥이), 훙거구르트(굶주린 띠), 크노헨브루흐(골절상), 충겐슐라크(혀 놀림), 플리겐토트(파리 시체).


​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겠다. 내 별자리가 다행히 물고기자리라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낳음을 당하고, 사육도 당하고, 교육을 받으며, 과거분사와 행렬을 공부하는 동시에 또다시 사춘기를 겪느니, 단테 알레기에리의 글이 진실이라면, 영원히 연옥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편을 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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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2-12-13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는 돌고 도는가요. 이런 책이 있으면 뭐해요. 애들은 읽으면 당당하게(?) 따를테고 안 읽으면 반항으로 같은 길을 갈테죠. 베데킨트kind 아들도 그랬을려나…

가보어 부인이 데미안 엄마 에바 부인 같은 분위기인가요?

Falstaff 2022-12-13 07:42   좋아요 0 | URL
이 작품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비율로 등장한 도라이 작가들의 시대, 소위 벨에포크 당시의 것으로 보시는 것이 여러가지로, 특히 혈압 올라가는 걸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ㅎㅎㅎ 그리하야 청소년이 읽으면 그리 좋은 영향을 받으리라 기대하기도 쉽지 않더군요.
기보어 부인은 선량하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곱게 자라고 곱게 산 전형적인 세미/쁘띠 부르주아 부인입니다. 진심을 다해 모리츠에게 거절의 편지를 보내지요. 데미안은 읽은지 반세기에 가까워 가물가물 합니다. ^^;;

유부만두 2022-12-13 07:47   좋아요 1 | URL
얼마전에 데미안을 다시 읽었는데 … 뭐 … 국어 시험 밑줄 용 노골적 상징 많고요 소년의 성장에 친구 엄마가 마돈나로 ;;;
프루스트도 스완 부인에게 그리 매달리더니 십대 소년들은 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걸까요? 지들 엄마한테나 잘하지. (분노)

Falstaff 2022-12-13 16:10   좋아요 0 | URL
십대 소년들 안 그렇습니다. ㅎㅎㅎㅎ 친구 엄마는 그냥 친구 엄마예요. 물론 99.9%의 십대 소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친구 엄마는 아들의 친구니까 더 잘해주는 거겠지요. 인생살이 그렇게 복잡하면 어떻게 삽니까. 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12-14 0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어.. 저도 다시 태어나지 않을 건데요.. 사실 이 생도 이어갈 생각을 하면 종종 벅차기는 한데......(남은 생동안... 사람들은 왜 그런 걸까? 나는 왜 이런 걸까...?에 대한 질문은 좀 즐기기로 했지만) 제가 현시점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여남의 생겨먹음이 이렇게까지 다르단 말인가?!?! 에 천착 중이라서요.ㅋㅋㅋ 걸드문트님이 언급하신........ ˝딱 그 시절엔 성과 생식에 대한 갈증과 고통˝ 이게 그러니까... 제가 정말...... 그 몸으로 안살아봐서 겸손하게... 고통... 스러울 정도 입니까? 그러면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요? ㅋㅋㅋ (남성연대 강화하는 방식 말고요) 아니 그게 그렇게 고통스러워서 저렇게 ... 어휴... 제가 진짜 로스옹의 포트노이 읽다가 ㅋㅋㅋㅋㅋㅋㅋ
아... 사춘기 청소년의 생식에 대한 갈망은.... 이 정도의 고통이란 말인가..... 그런데 다른 방식은 없단 말인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다가......... 아니다... ㅋㅋㅋ 어휴,,,,, 내가 낳을 아들도 아닌데 남의 집 아들 왕성한 번식욕을 내가 왜 걱정해....

아... 주절주절 길었는데요... 제가... 아침부터 댓글을 다는 이유는.... .. 어제 오랜만에 교보를 가서요. 골드문트님 생각나서 지만지 시리즈 앞을 좀 서성이다 왔어요. 이 시리즈가 그렇게 비싼 시리즈란 말이지? 으흠~ 이러면서. 다행이 사지는 않았습니다! 올해 제 책 쇼핑은 끝났거든요. 헤헤.

Falstaff 2022-12-14 09:28   좋아요 1 | URL
옙. 저는 상당히 괴로웠습니다. 이순원이 쓴 <19세>를 보면 다른 남자들도 거의 비슷한 거 같더군요. 진화를 통해 그렇게 디자인 된 거 같아요. 안 그랬으면 인간종은 벌써 멸종했을지도 모르지요. 여자는 이렇게 안달이 난 수컷들을 고르기만 하면 되니까 남자 만큼 갈급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ㅎㅎㅎ 지만지, 느므 비싸서. 요즘에 중판을 열라 찍으면서 가격을 조금 내렸거든요. 그동안의 인플레를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의 가격인하인 셈인데 워낙 비싼 가격이었더래서 구매자 입장으로 보면 아직도 비쌉니다. 그래도 노력이 가상하더군요.

공쟝쟝 2022-12-14 09:35   좋아요 1 | URL
이미 오래전(?) 고통을 상기시켜드렸다면 죄송합니다 ㅋㅋㅋㅋ 아 그거 참 슬프네요… 생리통도 고통스러워요… 유부만두님 페이퍼에서 (로렌스가 자궁을….) 보시면 알겟지만 ㅋㅋㅋㅋ 자궁은 절대 번식하고 싶은 고통과는 다른 고통입니다…. 진심으로….. 아주 아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경쟁하자는 아니지만요…. 학교 성교육부터 다시해라 ㅠㅠㅠ 자궁으로 인해 생기는 고통은 갈증형태의 통증이 아닙니다. 해소가 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ㅋㅋㅋ 아놔 ㅋㅋㅋ 이걸로 페이퍼 써야겠네 왜 여기서 천자만자 ㅋㅋㅋ 아무튼 경험에 대한 증언 감사합니다. 참고하겠습….

공쟝쟝 2022-12-14 09:45   좋아요 1 | URL
잠깐 댓글달다 또 유부만두님 페이퍼에 다녀왔네요? ㅋㅋㅋㅋ (나는 남자를 몰랐구나..) 골드문트님!!!!!! 추측대로.... 수컷의 그러니까 한쪽 성의 일방적인 성년기 이후의 무분별한 발정(?)과 그들만의 계급 투쟁이 ㅋㅋㅋㅋㅋㅋㅋ 진화적 요구에 의한 것이라면......
역시 이 종은....... 멸망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 나는 인간적인, 얼마나 인간적인 인간인가? (엥?ㅋㅋㅋ) 그럼 이만... (꾸에엑ㅋㅋ)
 
피렌체의 여마법사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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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을 많이 한 스코틀랜드의 귀족. 조지 루이스 하우크스방크. 하우크스방크 중의 하우크스방크. 일찍이 카리브 해에서 주로 스페인 상선을 대상으로 잔인한 약탈을 일삼던 해적으로 악명을 떨쳤으나, 노략질한 황금을 자신의 기업이 기록한 상업적 이익이라고 생각해, 약탈물품의 상당부분을 한 번도 빼지 않고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꼬박꼬박 세금을 바쳐온 47세의 남자. 반짝반짝한 눈동자와 깨끗한 피부에 전설적인 칼솜씨를 자랑하고 흰 황소처럼 힘센 하우크스방크 오브 하우크스방크는 그동안 바친 세금의 대가로 엘리자베스 1세의 친서를 해적선 스카타크호의 선장실 비밀 벽 함에 간직한 채 인도 무굴제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대영제국의 대사’ 자격으로, 임무는 힌두스탄으로 가서 무굴제국의 황제에게 처녀왕의 친서를 전하고 황제의 답장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항해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난 후, 선원 하나가 선실 저 구석에서 밀항자 한 명을 발견해 데리고 온다. 밀항자는 피렌체 사람으로 겨자색 더블릿과 긴 양말을 신고, 밝은 색 마름모꼴 가죽을 이어 붙인 알록달록한 긴 외투를 입었는데, 이 외투는 베네치아의 유대인 보석상으로부터 카드 게임을 해 얻은 것이었다. 주로 다이아몬드를 취급하는 유대인 보석상은 최고의 재단사에게 특별히 주문을 해 수많은 주머니를 감추고 있으며, 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었든지 간에 중량을 몸 전체에 골고루 분산시켜 여간해 무게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어렸을 때부터 눈속임, 손기술 등등을 시전하는 마술사로 교육을 받은 이 여행자에겐 최고의 의상이었다. 이 밀항자 또는 여행자는 전직 해적단의 법률에 의거하여 조만간에 대양의 푸른 파도 속에 빠져 죽을 운명이었지만, 놀랍게도 스카타크 호 갑판장의 귀에서 살아 있는 물뱀을 끄집어내는 묘기를 부려 죽음의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그런 여행자의 얼굴에는 조금도 긴장한 모습이 없었다나?

  이 여행자로 말할 거 같으면 이름을 우첼로라고 하고, 일찍이 비밀스런 모험에 나선 몸으로 자신의 비밀은 당대의 가장 강력한 여마법사가 건 저주에 의하여 지켜지리라고 주장한다. 세상을 얼마나 쏘다녔는지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러시아어, 영어, 포르투갈어, 이렇게 일곱 개 언어로 꿈을 꿀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고, 말을 할 줄 아는 건 여기다가 몇 개의 언어를 더 보태야 하는데, 사람을 더욱 경악시키는 건 이이, 우첼로의 기가 넘어가는 마술솜씨조차 시시하게 보일정도로 찬란하고 현란한 말솜씨로, 가히 천 날 하고도 하루 동안 더 수다를 떤 셰헤라자데 왕비와 버금가거나 능가할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이니 16세기 초. 아직 오디오와 비디오는 출현할 기미조차 없던 시절이라서 당시에 가장 인기 있었던 즐길 거리는 셰익스피어가 장악해버린 연극, 그리고 방랑시인, 즉 트로바토레가 돈을 받고 운율을 섞어 이야기를 노래하는 서사시, 이 다음이 노변담화, 요즘 같은 늦가을부터 시작해 밤이 긴 겨울 내내 화로 앞에서 군밤을 까 손자들 입에 넣어주며 느긋하게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하는 전래 이야기였던 지라, 스카타크 호의 선장 하우크스방크 오브 하우크스방크 역시 놀라운 입담을 가진 여행자 우첼로를 즉각 선장실로 초빙하여 그가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자신의 비밀을 먼저 밝혔으니, 피노키오 또는 살라미 소시지처럼 희미하게 회향 냄새를 풍기며 탁자 위에 턱, 올려놓은 선장의 얼룩덜룩한 문신이 새겨진 음경이었다. 그러나 우첼로는 선장의 비밀에 대하여 무게와 크기에 적절한 존경심을 표할지언정 여마법사가 건 저주 때문에 자신의 비밀을 들은 사람 가운데 아직 명줄이 붙어 있는 사람은 딱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위협한다. 이에 기가 죽을 선장이 아니라서 그는 침실 벽판 뒤 숨겨진 나무상자를 꺼내 진품 수집품을 보여주는데, 기가 질릴 만큼 크고 투명한 보석,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스페인 금괴, 고대 소그디아나 이교도 여신이 잊힌 영웅에게 사랑의 증표로 주었다는 비단 손수건, 고래 뼈에 수사슴 사냥 장면을 정교하게 새긴 세공품, 여왕 폐하의 초상화가 든 로켓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우첼로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  “아르칼리아 또는 아르갈리아라고 불리는 모험가 군주는 마법의 무기를 가진 위대한 전사로 무시무시한 거인 네 명이 수행했으며, 안젤리카라는 여인과 함께 다녔는데, 안젤리카는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피를 이은 고귀한 공주로…


​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자, 선장은 입에 흰 거품을 조금 물고 그만 혼절해버리고 만다. 마술을 썼을까? 아니다. 손기술을 써 선장의 하우스와인 잔에 적절한 양의 아편을 넣었던 것으로, 아편은 베네치아의 유대인 보석상 샬라크 코르모라노의 외투 어느 구석에서 슬그머니 흘러나왔던 거였다. 이후 여행자 우첼로는 잠 한 숨 자지 않고 쓰러진 선장 하우크스방크 오브 하우크스방크의 병상을 지키며 가끔 흑흑, 오열도 숨기지 않으면서 간병에 전념해 선원들조차 눈물이 앞을 가리게 만드는 데 성공한다. 물론 선원들이 비탄에 잠겨 겨우 잠에 빠지는 새벽 시간에는 선장실 곳곳을 뒤져 숨겨진 벽판 뒤 창고에 모셔져 있는 온갖 보물상자 일곱 개를 더 발견해서, 알록달록한 마름모꼴 가죽을 덧대 만든 외투의 속주머니를 채웠고, 마지막 여덟 번째 벽판 뒤 상자에서 드디어 목표로 했던 엘리자베스 1세의 봉인이 찍힌 친서를 발견한다. 이날 새벽, 적정량의 아편을 흡수한 선장이 숨을 거두어 예를 갖춘 장례의식을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짙은 안개 속에서 비상탈출 보트 한 척이 내려지고, 이 보트를 탄 우첼로는 안개 속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데, 이곳은 바로 힌두스탄 무굴제국의 항구도시 수라트 근처였다.

  수라트에 도착한 여행자는 곧바로 무굴제국의 수도로 향하지 않고 부란푸르, 힌디아, 시론, 나르와르, 괄리오르, 돌프르, 아그라를 거쳐 위대한 군주 아불파트 잘랄우드딘 무하마드, 그러나 ‘황제’라는 뜻의 아크바르로 불리워, 위대하고 위대한 자, 아크바르 황제, 즉 황제 황제를 두 번 사용할 정도의 유능하고 총명하고 무용이 넘치는 독재자가 군림한 도시로 흘러오게 된다. 아크바르 황제로 말할 것 같으면 몸집이 크고 강인한 남자다운 남자로, 소년시절엔 암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이 일 때문에 심란해져 이후 영원히 육식을 끊기로 맹세한 무슬림 채식주의자였다. 평화만을 바라는 전사이자 철학자 왕으로, 야만인 철학자인 동시에 울보 살인자일 뿐 아니라 아첨과 굴종에 중독된 인물이기도 했다. 오직 담화의 즐거움을 위해 정복을 포기할 수 있는 세계를 갈망할 정도로 이야기를 즐기는 이 왕은, 다른 무슬림 제왕들과 마찬가지로 할렘에 수다한 처첩을 거느린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황실 할렘의 귀인들 중 한 명은 아크바르가 생각해낸 상상의 아내로 실재하지 않았으며, 그는 이 상상의 여인을 ‘조다’라고 불렀다. 황제는 살아있는 수많은 진자 왕비들이 유령이고, 존재하지 않는 조다바이가 진짜라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으며, 황궁 내의 아무도 이를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다는 황제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전하의 아내 가운데 가장 추하고 성질 못된 처라 해도 피와 살로 이루어졌나이다. 결국 저는 그녀와 상대가 될 수 없나이다.” 상상 속의 왕비, 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굴제국의 수도 시크라에서는 이야기 속의 그녀는 엄연하게 존재하는 곳이었다.

  이런 황제 앞에 모습을 드러낸 주인공이자 이야기꾼 우첼로. 그는 ‘모고르 델라모레’ 즉 사랑의 무굴인이란 이름으로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엘리자베스 1세의 친서를 개봉한 뒤, 원문을 영어로 읽은 다음, 유창한 페르시아어로 이를 극적이라 할 만큼 왜곡해 번역해 설명해준다. 이후 모고르 델라모레는 특유의 입담으로 아크바르 황제를 확 휘어잡는 데 성공하지만, 한때는 해적선이었던 스카타크 호의 선원들이 곧바로 시크라에 도착해 우첼로, 또는 모고르를 고발하면서, 그는 실상 자신의 본명이 니콜로 베스푸치로 굳이 족보를 따지자면 아크바르 황제의 할아버지이자 무굴제국의 창시자인 바바르의 여동생이며 위대한 여마법사였던 카라 쾨즈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모고르 델라모레 또는 니콜로 베스푸치는 어떻게 해서 무굴제국 황제의 여동생 카라 쾨즈가 중앙아시아에서 튀르크를 거쳐 피렌체로, 이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게 되었는지,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  이것으로 사이비 마술사 우첼로 또는 모고르 델라모르, 또는 니콜로 베스푸치가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길게, 그러나 내 나름대로는 간략하게 쓰려고 애쓰면서 소개했다. <피렌체의 여마법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  “궁전 도시 아래, 하루의 마지막 빛 속에서 반짝이는 호수가 녹은 금으로 이루어진 바다처럼 보였다.”


​  나는 이 문장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몇 번을 읽었다. 저녁 노을이 황금색으로 호수 면을 비추는 광경을 이 시대 최고의 입담꾼 살만 루슈디는 이렇게 묘사했던 거였다. 넓고 넓어서 광활한 호수가, 세상에나, 녹은 금이라니. 거대한 수도 시크라 옆에는 수도 만큼이나 웅장한 급수탑이 우뚝 서 있고, 세상의 모든 나그네를 주눅들게 하는 코끼리 엄니로 만든 탑이자 도시의 랜드마크인 히란 미나르가 굽어보고 있었다. 모고르 델라모르는 이 모든 것들을 둘러보는 동시에 도시 입구의 황금 호수를 떠올리며, “물이 없으면 말짱 다 헛것이지. 황제라 해도 물이 없으면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변할 거야. 물이야말로 진짜 군주이고 우리는 모두 그 노예지.”라고 독백한다.

  도무지 살만 루슈디의 입담은 어디서 끝이 날까. 루슈디 만큼 화려체를 난만하게 사용하는 작가가 있기는 할까. 자유자재로, 세상의 모든 방향을 향해 날뛰는 그의 독특한 상상력 하나만 가지고도 그의 환상 세계를 엿볼 가치가 있다. 올해 테러를 당했지만 제발 건강하라. 비겁한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고 더 많은 작품을 생산하기를 기원한다. 정말 이야기 나라의 아크바르 오브 아크바르, 황제 중의 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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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2-12-10 08: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은 리더 오브 리더, 독자 중 독자, 이야기 잘 들..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루슈디도 47년생 동갑내기 스티븐 킹과 함께 계속 이야기를 풀어내길 기대합니다. 건강을 회복하면 이번 사건도 강한 정신력으로 이야기 속에 녹여내지 않을까요.

Falstaff 2022-12-10 16:29   좋아요 0 | URL
에구, 제가 무슨... 그저 일반 독자 하렵니다. ㅋㅋㅋ
옙. 루슈디는 죽을 때 죽더라도 노벨 문학상 타고 숟가락 놔야 합니다!

stella.K 2022-12-10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양반 지금은 어떤가 모르겠네요. 굳건하고 꿋꿋한것 같긴합니다만.
취향이 저랑은 맞을 것 같진않지만 마지막 말씀이 저를 후비네요. ㅎ
언제고 한번 도전해 보겠슴다.
좋은 주말보내십시오.^^

Falstaff 2022-12-10 16:31   좋아요 1 | URL
이이하고 합이 맞지 않으면 정말 읽기 곤란할 것 같습니다. 스텔라 님이 그러시군요. 저도 <악마의 시>에서 조금 그랬는데 익숙해지니까 아이고, 느므느므 재미진 양반이라 계속 읽게 되더라고요. ^^

포스트잇 2022-12-10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궁금합니다. .. 도대체 이 정도 책을 완독하시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리나요?
책을 읽으신 뒤 이 정도 페이퍼를 쓰실 수 있다는 것도 저처럼 게으른 독자에게는 놀라울 따름입니다.

Falstaff 2022-12-10 16:33   좋아요 2 | URL
에이, 알라딘 서재에선 명함도 못 내밉니다. 일년에 천 권 육박하시는 분도 몇 분 계시고 책장 무게 때문에 아파트 붕괴 위험 있는 분도 한두 분이 아니고 그런데 쇤네가 어떻게.... ㅎㅎㅎ 이 책은 읽는데 3일 걸렸군요. ^^

잠자냥 2022-12-11 11:52   좋아요 1 | URL
문트 님 쇤네에 빵 터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잘 어울리는 겈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12-11 16:3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실생활에서도 ‘쇤네‘라는 단어 자주 씁니다. 처음엔 좀 이상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금세 적응되더라고요. ㅎㅎㅎㅎ

coolcat329 2022-12-11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만 루슈디 한 권도 읽어보질 못했어요. <한밤의 아이들>과 <광대 샬리마르> 갖고 있는데 내년에는 꼭!읽어보렵니다~

Falstaff 2022-12-11 16:36   좋아요 1 | URL
아오, 좋은 책들만 가지고 계시는구먼요! 둘 다 대빵입니다.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레이스 2022-12-18 2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 끌리고, 제목! 끌리고, 스토리! 읽어야겠습니다.
게다가 골드문트님의 평가까지...!

Falstaff 2022-12-19 06:30   좋아요 1 | URL
옙. 이 책 정말 재미납니다. 명작까지는 아니지만 손에 잡았다 하면, 완전 끈끈입니다. 안 떨어져요. ㅋㅋㅋㅋ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하인리히 만 지음, 모명숙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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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만은 자신보다 20세기 중반까지 독일 문학을 대표했던 토마스 만의 친형으로 더욱 유명하다. 엄격하고 철학적인 작품을 썼고 자기도 이와 비슷한 성격/성품을 지닌 토마스 만과 대조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어머니를 닮아 개방적이고 활달하고 적극적 의사소통을 했던 하인리히 만은 살면서 자주 동생 토마스와 의견충돌을 일으켰고, 그보다는 약간 적은 회수로 의절을 했다가 화해를 반복한다. 그러나 이건 형제들의 일일 뿐, 토마스의 자식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형적 독일인인 친아버지보다 큰아버지 하인리히를 더 좋아해 더 따랐다 한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살던 때도. 그는 1920년대 후반에 베를린에서 거주하며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정치에까지 참여하는 바, 오스트리아 출신의 콧수염난 아마추어 화가가 독일의 권력을 쥐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한다. 망명 프랑스에서 독일인민전선 준비위원회 의장과 사회민주당 명예총재를 역임하면서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앙리 4세>를 출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미국으로 거주를 옮긴다. 공산주의자에 가까웠던 하인리히 만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9년에 동독 정부로부터 예술 및 문학 1급 훈장을 받고 50년에 동독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79세를 보름 앞두고 사망, 11년 후인 1961년에 그의 흰 뼈가 함에 담겨 동베를린 행 비행기에 오른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 읽을 수 있는 책은 낭트칙령을 선포하여 종교전쟁을 끝낸 부르봉 왕가의 시조를 다룬 대표작 <앙리 4세>와 오늘 독후감을 쓰고 있는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 딱 두 편이다.


​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의 주인공인 운라트 선생의 진짜 이름은 라트”Raat”다. 네덜란드 말로 벌집이라는 뜻이 있는 걸로 봐서 조상이 양봉을 했던 건 아닐까 싶다. 라트 박사는 김나지움에서 만25년간 라틴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문학을 가르치고 작품을 시작하는 시점엔 26년째 10학년,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고 있다. 이이가 젊은 시절에 한 과부를 알고 지냈는데, 과부가 선생이 먼 곳까지 유학 가서 공부를 해 학위를 받을 때까지 모든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었단다. 그래 선생은 급여가 그리 많지 않은 김나지움에 직장을 얻자마자 곧바로 과부에게 청혼해 혼인을 해 아들 하나를 두었다. 지금은 과부가 죽고도 많은 세월이 지났으며, 하나 있는 아들은 선생보다 결코 더 잘 생기지도 않은 데다가 눈 한쪽을 잃어버렸다. 아들이 대학시절에 좋지 못한 사교모임에서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점잖지 못한 여성들과 노느라고 대학졸업 국가고시에 최하 네 번의 고배를 마신 후에, 더 이상 열을 받으며 노후를 지낼 수 없는 라트 선생은 호적에서 아들 이름을 파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홀아비 신세로 엄한 하녀의 눈치를 보면서 홀로 살고 있다.

  오랜 세월 누구와의 교류도 없이 오직 라틴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고전문학만 연구하면서 홀로 지내다 보니 라트 박사의 삶은 외골수로 치달아 현재 관심이 있는 것은 첫째가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불변화 품사에 관한 논문 작성과, 자기 학급의 문제아 세 명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 전부를 망칠 수 있도록 “포박”하는 일이다. 김나지움 10학년. 이들 가운데 세 명의 문제아를 소개하자면 키젤라크, 폰 에르춤 백작, 그리고 가장 경멸해 마지않는 로만이다. 폰 에르춤은 공부 머리가 아예 없고, 로만은 학업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수업시간과 상관없이 다른 책들만 파는 학생으로 벌써 두 학년을 꿇어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아 열일곱 살이다. 두 명은 하여튼 성적이 안 되어 유급을 한 반면에 키젤라크는 축제 때 라트 선생의 별명을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괘씸죄에 걸렸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별명? 그렇다. 사내아이들, 젊은 수컷들의 몸과 뇌에서 자동 지시하는 일들, 욕구를 좇고, 소동을 일으키고, 주먹질을 하고, 다치게 하고, 못된 장난을 치고, 쓸데없는 객기와 남아도는 힘을 헛되게 써버리는 일에 점령된 사춘기 소년들의 정글. 이들은 인생이 허여한 몇 년 안 되는 동안의 특권으로 교사들에게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지어준다. 나도 아직 고교 시절 교사들의 별명을 몇 개 잊지 않고 있다. 개밥그릇, 혼수상태, (어느 학교나 빠지지 않고 있는) 미친개, 멍게 등등. 이들은 라트 선생에게 선생의 이름을 아주 약간 바꾸어 운라트Unrat라는 별호를 지어주었다. 오물rubbish라는 뜻이다.

  그런데 운라트 선생이 자기 별명에 유독 발광을 하는 것은, 25년 동안 자신이 가르쳤던 5만 명의 시민 전부가 자신을 똑같이 오물이라는 뜻의 아름답지 아니한 수준을 넘어 경멸스러운 별명으로 부르는 일이다. 가뜩이나 편협하고 편집광 적이고, 외고집인 선생은 선생이 듣고 있다는 걸 아는지 마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학생 누군가가 자신의 가청권 안에서 자신을 ‘운라트’라고 호칭을 하면 뺑, 돌아버린다. 그리하여 누가 선생의 모습으로 보면 겁을 먹었으면서도 복수심에 불타는 눈빛을 한 57세의 노인(1905년 작품으로 당시 57세면 상 할아버지였다)한테, 학생들의 주름진 외투들 속에 혹시라도 단도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닌지 엿보는 떳떳하지 못한 폭군의 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 작품의 제목에 나오는 “어느 폭군”이 김나지움 안에서의 운라트 선생을 일컫는다. 폭군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천만의 말씀. 역대의 폭군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 암살이나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속에서 살았다. 원래 폭군tyrant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수의 우둔한 군중에 의한 민주주의가 저지르는 만행을 극복하기 위해 독재정이 출발했던 것과 비슷하다. 독재정의 우두머리에 한 미친 작자가 앉아버리면 그게 폭군이 되는 거고, 민중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도편추방이란 조금은 어이없는 제도를 또 장만했던 거 아닌가 말이지. 운라트 선생은 그러나 바람직한 폭군이 아니라 로마 시대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네로, 콤모두스 같아서 적어도 매년 한 명 이상은 자신을 오물이라고 공개적으로 부른 학생을 처단해야 만족하고, 한 해를 보람있게 보냈다, 라는 소감을 남겼다.


​  하여간 작품 속의 해에 걸려든 문제아 세 명 가운데서도 가장 골치 아프고, 그래서 반드시 처단해야 하는 학생으로 선생은 로만을 선택했다. 실러의 시 <오를레앙의 처녀>에 관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그게 있을 수 있는지도 상상 못할 문제에 관하여 에세이를 쓰라는 시험을 치루는데, 가장 빨리 시험 노트를 메운 다음 태연하게 다른 책을 보고 있던 로만을 선생은 교실 밖으로 내보낸다. 이후에 작문 노트를 들춰보니 로만이 지은 야릇한 시 <고귀한 여배우 프륄리히 양에게 바치는 경의>가 적혀 있다. 이 가운데 한 귀절.


​  그대는 뼛속까지 타락했소.

  그렇지만 그대는 위대한 예술가요.

  그리고 그대가 일단 산욕産褥에 든다면


​  선생의 문제는, 아이들이 고등학생이라는 걸 간과한다는 거다. 내가 아직도 어처구니없어 하는 담임교사 한 분이 있는데,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음악과목에 열성이던 홍XX 선생으로, 이이가 하루는 가르치다가 뭣 때문에 열을 잔뜩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겨우 열 살 백이 아이들 80명을 앞에 두고 “내가 왜 <사운드 오브 뮤직>을 여섯 번이나 봤는지 알아?”라고 절규하던 장면이다. 틀림없이 선생은 꼬맹이들을 자기 수준으로 올려놓았던지 아니면 자기가 열 살 수준으로 스스로 내려갔던 터이다. 운라트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하나, 가장 위협적인 문제아, 결코 ‘운라트’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경멸하고 있음을 내비치는 아이. 예를 들어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 “선생님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여기에 오물(운라트) 냄새가 지독하게 난단 말입니다.” 라고 발언하는 식으로.

  이리하여 선생은 오랜만에 저녁시간에 길거리에 나서 극장에도 가보고, 직업소개소라고 생각했지만 엉뚱하게 ‘선원 알선인’ 사무실에도 들어가 하계공연 입장권도 요구해보고, 카페 센트럴에 몇 년 만에 가보기도 하고, 심지어 저녁 식사중인 제화기능장 린트플라이슈의 집에 방문해 필요하지 않은 장화를 맞추면서 어디 가면 여배우 프륄리히 양을 만날 수 있는지 묻기도 한다. 왜? 프륄리히 양이 누군지 알아야 문제아 로만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다가 부두 노동자 두 명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들을 따라 가게 되는데, 이들은 얼핏 보기엔 가정집 같은 술집 “푸른 천사”로 들어간다. 선생도 이들을 좇아 입구에서 프륄리히 양이 여기에 있는지 물어봤는데, 빙고, 드디어 찾았다. 이곳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 그리하여 선생은 평소라면 출입할 생각도 하지 않을 하층계층 사람들 전용 술집에 용감하게 입성해 참으로 어여쁘게 생긴 프륄리히 양을 눈으로 보는 순간, 누군가 급하게 출입구 쪽으로 뛰어나가는 것도 발견하니, 바로 자신의 타겟인 문제아 3인방이었다.

  집에 돌아온 운라트 선생. 이젠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불변화 품사에 관한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두 명 때문에. 로만과 프륄리히. 이후 어떻게 될까? 통 크게 알려드린다. 57세의 운라트 선생, 프륄리히한테 꽂혀버린다. 여배우에게 바칠 최고급 샴페인과 꽃을 위해 처음엔 조금씩 돈을 낭비하다가 당연히 점점 규모가 커져 버린다. 하지만 정작 로만이 사랑했던 여인은 프륄리히가 아니라 도라 브레드포트 여사였던 것이고, 브레드포트 여사가 불과 얼마 전에 출산을 해 산욕 운운하는 시를 썼는데 감히 여신과 같은 도라 브레드포트 여사의 이름을 내놓고 쓰기 힘들어 여배우 프륄리히의 이름을 빌렸을 뿐이었던 거다. 세상이 뭐 다 그렇지. 그러나, 아직 스토리는 반이 넘게 남았다. 운라트 선생이 언제, 어떻게 종말을 맞을지는 당연히 안 알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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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12-08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이 재밌는 거예요, 골드문트님이 재미있게 쓰신 거예요? 별명이 오물이라니 좀 불쌍하기도 ㅎㅎ

Falstaff 2022-12-08 16:5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책이 재미 있겠지요! 저야 곁가지 헛소리만 보태는 걸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yamoo 2022-12-08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인리히 만의 작품은 좀 지루하더군요. 몇 권을 읽어봤지만 50페이지를 넘는 게 없었어요. 왤케 재미가 없던지...지금 읽으면 다를려나요??

Falstaff 2022-12-08 19:2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재미가 괜찮은 편에 듭니다. 뭐 그렇다고 명작의 반열까지 이야기하는 건 무리이긴 합니다. 이 책 말고 하인리히 만의 작품은 <앙리 4세>만 번역해 나온 걸로 아는데요, 저도 <앙리 4세>는 참 번거롭게 읽었습니다. 당사자가 들으면 기겁하겠지만 혹시 역자의 우리말 실력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가 지금도 궁금합니다.

yamoo 2022-12-09 16:58   좋아요 0 | URL
엔날 책들에 단편집에 보면 하이리히 만의 단편들이 꽤 실려있었어요. 영문과 수업시간에도 만의 작품을 영어판으로 읽어봤는데 재미와는 영~~

<앙리4세>는 어떤가요?

Falstaff 2022-12-10 06:11   좋아요 0 | URL
<앙리 4세>를 이렇게 얘기하면 열 받는 분 많을 텐데요, 너무 엄격한 번역이 가독성을 좀 떨어트리지 않나 싶었습니다. 헌책방에서 찾아 읽으시면 좋겠는데 굳이 비싸게 사 읽으실 필요까지는 없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