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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스
돈 드릴로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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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돈 드릴로로 <코스모폴리스>를 선택했다. 오직 작가 돈 드릴로의 이름 하나만 보고 골랐지만 카피는 2013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같은 제목의 영화, 65회 칸 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출품된 작품이라는 점을 더 강조했다. 책의 초판도 2013년이니 영화의 개봉에 맞춰 후다닥 번역, 교정, 편집, 출간한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내가 사서 읽은 책이 초판 1쇄본인데도 책 표지가 사진과 같지 않고 영화의 한 컷을 빌려다 썼다. 토마스 핀천 같은 현란한 맛은 좀 덜 하지만 그래도 핀천과 함께 20세기 후반 미국의 대표적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로 꼽히는 드릴로의 작품성보다, 2013년에 개봉해 무려 1.2만명(네이버 영화 통계자료), 즉 1만2천명의 박스오피스를 자랑한 희대의 망작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로버트 패틴슨이 주인공 에릭 패커로 분했음에도.
투자의 귀재가 있다고 치자. 미국에서 달러를 빌려올 때 금리가 연 1% (1% p.a)로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데 현재 환율이 달러당 1천원이라서 1억 달러(천억 원)를 가져와 4% p.a의 한국 국채에 투자하면 연간 3% p.a의 수익인 30억 원의 세전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국제 거래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라서, 1년 사이에 원화가 급격하게 떨어져, 그것도 11개월 동안은 안 그랬는데 딱 마지막 달에 급격하게 추락하는 바람에 달러당 1.500원이 됐다면, 이제 미국 전주錢主에게 돌려주어야 할 원금은 천억 원이 아니라 1,500억 원이 된다. 세전 이익도 예상 이익 30억원에서 45억원으로 늘었지만, 환율 차이로 인한 원금 상승분 500억원을 감안하면 투자의 귀재는 최하 455억 원을 손해를 봐야 한다. 진짜로 우리나라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1997년 ‘IMF 사태’라고 일컫는 외환위기 당시. 정부와 모든 기업이 이런 상태였으니 딱 한 방에 나라가 거덜이 날 수밖에.
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방 네 개에 창문 두 개짜리 뉴욕 서민 아파트에 살던 선량한 패커 부부는 다섯 남매와 시아버지, 이렇게 여덟 식구가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아버지 마이클 씨가 병을 앓았고, 병을 끝까지 숨기다가 더 이상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을 때는 이미 두 달의 시간만 남았었다. 아버지가 죽고 현명한 어머니는 다섯 남매를 그래도 착실하게 교육시켜, 이 가운데 한 명인 에릭 패커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된다. 처음엔 웹사이트를 열고 주가를 예상해 사이트에 올리기만 하면 그가 꼽은 회사의 주가가 상당한 실적을 기록하는가 했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에릭이 선택해주는 은총을 내리기만 하면 해당 회사의 주가는 곧바로 말 그대로 수직 상승하는 잭팟을 터뜨리게 된다. 이야말로 신의 선택. 약간의 시간이 지나 이제 에릭은 웹사이트를 닫아버리고 자산 운영회사를 창립해 보통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막대한 부를 지닌 거부가 됐다. 그리하여 실로 길고 긴 하루가 될 2000년 4월의 어느 날, 22일 전에 은행업으로 재산을 모은 전설의 쉬프란 가문의 적자이자 법정 상속인인 엘리스 쉬프린과 결혼을 했고, 결혼의 당사자 엘리스와 에릭을 비교하자면, 부자이며 법정 상속인 vs. 부자이며 자수성가한 남자, 교양있는 여자와 가차없는 남자, 여린 여자와 강한 남자, 재능있는 여자와 머리있는 남자의 결합이며, 여기에 보너스로 여자는 매우 아름답다는 선물도 있는, 유럽의 귀족 가문에서나 볼 수 있는 대단히 전략적인 혼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럽식 정략결혼이라면 혼인을 해서 대를 이어갈 자손 하나를 만든 후에는 서로가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고 알아서 즐기는 삶이 보통이었듯이, 에릭 패커는 정숙한 아내를 둔 것으로 만족하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바람을 피우는 즐거운 삶을 살기 시작했고, 책의 전편을 두고 자주 언급하는 “비대칭적 전립선”으로 하여금 발기부전 증상이 오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열심히 그런 삶을 살기로 결심을 한 바 있었다. 실제로 결혼하고 22일이 지났건만 아직 아내와 첫날밤도 치루지 않았으며, 작품의 시간적 무대인 4월의 어느 날 만해도 오전에 그의 딜러이자 유언 집행인 지지 판처와 그녀의 아파트에서, 오후에 근무가 끝난 자신의 여성 경호원 켄드라 베이즈와 시내 호텔에서 자일로플렉스 사에서 나온 방탄조끼를 입은 채 섹스를 치룬다.
2000년에 일본의 이자율은 0%에 가까웠던 것은 다 기억하실 것으로 안다. 세상의 모든 자연에는 각 종마다 일정한 패턴을 그린다는 것에 착안하여 이를 투자에도 접목해, 하는 일마다 대박을 친 에릭 패커는 자신의 거액을 걸고 일본에서 엔화를 차입하는데 성공한다. 이자율이 바닥이고, 아무리 분석을 해봐도 엔화는 앞으로 약세 국면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약세가 아니더라도 절대 강세로 반등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러나 이게 웬일. 엔화가 강세를 띠기 시작하는 거 아닌가 말이지. 이 상황에서 2000년 4월의 어느 날, 미국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하여 하루 종일 교통을 통제하는 날이며, 유명해도 너무 유명한 래퍼가 죽어 대규모 장례식으로 한 번 더 교통을 통제하는 날이기도 하고, 이 모든 불편함을 참고 참다가 불만이 폭발해 시민들의 폭동이 터져버리는 길고도 길고, 피곤하기도 피곤한 날, 에릭 패커의 하루가 열린다.
에릭은 돈 개념이 없다. 숫자를 들으면 반드시 이 숫자가 소수prime number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는 습관(나도 이런 습성이 조금 있다)이 있는 것과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돈 1억 5백만 달러를 써서 89(소수)층, 274미터 높이의 지상 최고 주거용 아파트를 사고, 자기는 꼭대기 복복층 형의 회전하는 방에서 잠은 자는 불면증 환자로, 불면으로 기가 죽거나 우울하면 맨션 안의 48개 방을 돌아다니는 걸 취미로 하는데, 이 방들은 피트니스 수영장, 트럼프 실, 체육관, 상어가 살고 있는 수족관, 영사실 등등으로 되어 있다. 에릭에게 돈은 이것을 향유할 수 있는 수단이라기보다, 자신이 돈을 써서 이것들을 살 수 있어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행위, 즉 돈이란 형태가 없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매개일 뿐이다. 물론 자신은 그런 줄 모르지만. 그러니 별 생각 없이 어마어마한 수준을 넘어 입이 쩍 벌어질 만한 돈을 써서 자신이 궁리한 패턴을 믿고 엔화를 차입한 것이고 오늘 안에 한 번 더, 이번엔 자신이 가진 나머지 모든 돈을 엔화에 던질 예정이다. 천재니까. 천재가 내린 결정이 어긋나면 그때 천재가 아닌 것이 되니까.
대규모 투자회사의 회장이지만 이제 겨우 나이 스물여덟 살. 28세 맞다. 에휴, 난 뭐 하고 살았나 몰라. 이 젊은이는 패커 투자회사의 회장실을 자주 옮기는 것으로 유명하고, 게다가 사무실에 있기보다 몇 대 보유하고 있는 리무진을 타고 뉴욕 시내를 배회하면서, 필요하면 중역이나 주임을 불러 함께 태우고 다니며 그들과 회의를 하지만 당연히 일방적으로 결정을 한다. 그들의 역할은 자료를 전해주거나 생각/의견을 말해 결정에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보조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도 에릭이 리무진에 태운 중역이나 주임의 면모를 보면 이러하다.
기술팀장 샤이너. 작은 체구의 동안. 회장은 3년 동안 이이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의견이 필요하지 생긴 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생긴 것만? 그럴 리가. 정 붙여 좋은 거 없으니까. 시스템만 해킹 당하지 않으면 된다. 언제나 안전하기만 하면.
(옆에서 지나가는 택시 뒷자리에 탄 아내 엘리스 발견. 함께 간식 먹음)
통화(currency) 분석가 마이클 친. 수학, 경제학 박사. 22세. 거터펑크족. 아직 애송이. 너무 과하게 엔화에 투자하고 있다고 분석결과 보고하지만 결론은 위에서 이미 설명.
(애인 디디 판처와 베드 씬 후, 로스코 채플의 모든 로스코 그림 구입 문의. 나만 보고 싶어!)
재정주임 제인 멜먼. 휴일 조깅하다가 난데없이 불려나옴. 조깅 팬츠와 탱크톱 차림. 싱글맘. 손실 감수하고 엔화 투자에 손 떼기를 권하지만 역시나.
닥터 잉그램. 닥터 네비어스의 대타로 리무진 안에서 건강 일일 검진. 아래 옷 홀랑 벗고 전립선 촉진 당하면서 (이거 무지 아픕니다) 고통을 참고 제인과 계속 토의(라기 보다 수다)
(길 막혀 잠깐 들른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시인 아내 엘리스. 점심식사. 에릭, 당신한테 섹스 냄새가 나.)
이론 담당 주임 비자 킨스키. 작은 키의 여자. 사생활에 관해 조금의 틈도 없는 여자. 폭동을 함께 겪음.
(호텔에서 근무 끝난 경호원과 베드 씬)
(다시 만난 엘리스. 외환투기 손실을 자기 돈으로 보태주겠다고. 그러나 여전히 에릭, 당신한테서 섹스 냄새가 나.)
그러니까 하루 종일 리무진 안에서만 일을 한 거다. 톰 크루즈가 출연한 <마니어리티>에서나 볼 최신 첨단 장비로 무장한 리무진의 통신 시설이 이를 가능하게 했으며, 심지어 에릭은 리무진을 “프루스트 시키기”도 했다. 프루스트 시키기가 뭐냐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온다. 소음을 참지 못하는 작자가 방을 코르크로 한 번 덧씌운 거. 이처럼 에릭은 차 내 소음을 줄이기 위하여 방탄 리무진의 모든 틈새를 약하디 약한 코르크로 메우라고 명령을 내려, 오래 공을 들여 결국 그렇게 했다는 말씀. 이걸 이룬 건 뭐? 맞습니다. 돈입니다. 돈이 돈 한 겁니다.
자신이 점점 변하기 시작해 서민 아파트 다섯 남매 가운데 하나였다가 이제 피도 눈물도 없는 거대 부자가 되면서 이 와중에 얼마나 사람들에게 안 된 일을 시켰는지 전혀 몰랐겠지. 뭐 다 그런 거긴 하다. 이제 부자 중에서도 무지하게 부자이긴 하지만 불면증 환자에다가 사랑하지 않는 섹스리스 결혼생활에 점점 가학, 피학으로 몰려가는 젊은 영웅 에릭 패커는 머리가 벗겨지고 목이 없는 강건한 남자, 체코제 최신 디지털 권총으로 무장한 경호주임 토발이 없으면 시내를 활보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태가 된 유명한 자리에 앉게 된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선 돈은 많지만 참 가련한 인생일 수도 있다. 세상에 오직 자기 한 명만 사는 무수한 군중 속의 외톨이.
하긴, 다 좋을 수 있나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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