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폴리스
돈 드릴로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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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돈 드릴로로 <코스모폴리스>를 선택했다. 오직 작가 돈 드릴로의 이름 하나만 보고 골랐지만 카피는 2013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같은 제목의 영화, 65회 칸 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출품된 작품이라는 점을 더 강조했다. 책의 초판도 2013년이니 영화의 개봉에 맞춰 후다닥 번역, 교정, 편집, 출간한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내가 사서 읽은 책이 초판 1쇄본인데도 책 표지가 사진과 같지 않고 영화의 한 컷을 빌려다 썼다. 토마스 핀천 같은 현란한 맛은 좀 덜 하지만 그래도 핀천과 함께 20세기 후반 미국의 대표적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로 꼽히는 드릴로의 작품성보다, 2013년에 개봉해 무려 1.2만명(네이버 영화 통계자료), 즉 1만2천명의 박스오피스를 자랑한 희대의 망작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로버트 패틴슨이 주인공 에릭 패커로 분했음에도.

투자의 귀재가 있다고 치자. 미국에서 달러를 빌려올 때 금리가 연 1% (1% p.a)로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데 현재 환율이 달러당 1천원이라서 1억 달러(천억 원)를 가져와 4% p.a의 한국 국채에 투자하면 연간 3% p.a의 수익인 30억 원의 세전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국제 거래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라서, 1년 사이에 원화가 급격하게 떨어져, 그것도 11개월 동안은 안 그랬는데 딱 마지막 달에 급격하게 추락하는 바람에 달러당 1.500원이 됐다면, 이제 미국 전주錢主에게 돌려주어야 할 원금은 천억 원이 아니라 1,500억 원이 된다. 세전 이익도 예상 이익 30억원에서 45억원으로 늘었지만, 환율 차이로 인한 원금 상승분 500억원을 감안하면 투자의 귀재는 최하 455억 원을 손해를 봐야 한다. 진짜로 우리나라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1997년 ‘IMF 사태’라고 일컫는 외환위기 당시. 정부와 모든 기업이 이런 상태였으니 딱 한 방에 나라가 거덜이 날 수밖에.

미국인들도 마찬가지다. 방 네 개에 창문 두 개짜리 뉴욕 서민 아파트에 살던 선량한 패커 부부는 다섯 남매와 시아버지, 이렇게 여덟 식구가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아버지 마이클 씨가 병을 앓았고, 병을 끝까지 숨기다가 더 이상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을 때는 이미 두 달의 시간만 남았었다. 아버지가 죽고 현명한 어머니는 다섯 남매를 그래도 착실하게 교육시켜, 이 가운데 한 명인 에릭 패커가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된다. 처음엔 웹사이트를 열고 주가를 예상해 사이트에 올리기만 하면 그가 꼽은 회사의 주가가 상당한 실적을 기록하는가 했는데,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에릭이 선택해주는 은총을 내리기만 하면 해당 회사의 주가는 곧바로 말 그대로 수직 상승하는 잭팟을 터뜨리게 된다. 이야말로 신의 선택. 약간의 시간이 지나 이제 에릭은 웹사이트를 닫아버리고 자산 운영회사를 창립해 보통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막대한 부를 지닌 거부가 됐다. 그리하여 실로 길고 긴 하루가 될 2000년 4월의 어느 날, 22일 전에 은행업으로 재산을 모은 전설의 쉬프란 가문의 적자이자 법정 상속인인 엘리스 쉬프린과 결혼을 했고, 결혼의 당사자 엘리스와 에릭을 비교하자면, 부자이며 법정 상속인 vs. 부자이며 자수성가한 남자, 교양있는 여자와 가차없는 남자, 여린 여자와 강한 남자, 재능있는 여자와 머리있는 남자의 결합이며, 여기에 보너스로 여자는 매우 아름답다는 선물도 있는, 유럽의 귀족 가문에서나 볼 수 있는 대단히 전략적인 혼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럽식 정략결혼이라면 혼인을 해서 대를 이어갈 자손 하나를 만든 후에는 서로가 서로의 사생활을 간섭하지 않고 알아서 즐기는 삶이 보통이었듯이, 에릭 패커는 정숙한 아내를 둔 것으로 만족하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바람을 피우는 즐거운 삶을 살기 시작했고, 책의 전편을 두고 자주 언급하는 “비대칭적 전립선”으로 하여금 발기부전 증상이 오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열심히 그런 삶을 살기로 결심을 한 바 있었다. 실제로 결혼하고 22일이 지났건만 아직 아내와 첫날밤도 치루지 않았으며, 작품의 시간적 무대인 4월의 어느 날 만해도 오전에 그의 딜러이자 유언 집행인 지지 판처와 그녀의 아파트에서, 오후에 근무가 끝난 자신의 여성 경호원 켄드라 베이즈와 시내 호텔에서 자일로플렉스 사에서 나온 방탄조끼를 입은 채 섹스를 치룬다.

2000년에 일본의 이자율은 0%에 가까웠던 것은 다 기억하실 것으로 안다. 세상의 모든 자연에는 각 종마다 일정한 패턴을 그린다는 것에 착안하여 이를 투자에도 접목해, 하는 일마다 대박을 친 에릭 패커는 자신의 거액을 걸고 일본에서 엔화를 차입하는데 성공한다. 이자율이 바닥이고, 아무리 분석을 해봐도 엔화는 앞으로 약세 국면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약세가 아니더라도 절대 강세로 반등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그러나 이게 웬일. 엔화가 강세를 띠기 시작하는 거 아닌가 말이지. 이 상황에서 2000년 4월의 어느 날, 미국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하여 하루 종일 교통을 통제하는 날이며, 유명해도 너무 유명한 래퍼가 죽어 대규모 장례식으로 한 번 더 교통을 통제하는 날이기도 하고, 이 모든 불편함을 참고 참다가 불만이 폭발해 시민들의 폭동이 터져버리는 길고도 길고, 피곤하기도 피곤한 날, 에릭 패커의 하루가 열린다.

에릭은 돈 개념이 없다. 숫자를 들으면 반드시 이 숫자가 소수prime number인지 아닌지를 따져보는 습관(나도 이런 습성이 조금 있다)이 있는 것과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돈 1억 5백만 달러를 써서 89(소수)층, 274미터 높이의 지상 최고 주거용 아파트를 사고, 자기는 꼭대기 복복층 형의 회전하는 방에서 잠은 자는 불면증 환자로, 불면으로 기가 죽거나 우울하면 맨션 안의 48개 방을 돌아다니는 걸 취미로 하는데, 이 방들은 피트니스 수영장, 트럼프 실, 체육관, 상어가 살고 있는 수족관, 영사실 등등으로 되어 있다. 에릭에게 돈은 이것을 향유할 수 있는 수단이라기보다, 자신이 돈을 써서 이것들을 살 수 있어 자신의 소유로 만드는 행위, 즉 돈이란 형태가 없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매개일 뿐이다. 물론 자신은 그런 줄 모르지만. 그러니 별 생각 없이 어마어마한 수준을 넘어 입이 쩍 벌어질 만한 돈을 써서 자신이 궁리한 패턴을 믿고 엔화를 차입한 것이고 오늘 안에 한 번 더, 이번엔 자신이 가진 나머지 모든 돈을 엔화에 던질 예정이다. 천재니까. 천재가 내린 결정이 어긋나면 그때 천재가 아닌 것이 되니까.

대규모 투자회사의 회장이지만 이제 겨우 나이 스물여덟 살. 28세 맞다. 에휴, 난 뭐 하고 살았나 몰라. 이 젊은이는 패커 투자회사의 회장실을 자주 옮기는 것으로 유명하고, 게다가 사무실에 있기보다 몇 대 보유하고 있는 리무진을 타고 뉴욕 시내를 배회하면서, 필요하면 중역이나 주임을 불러 함께 태우고 다니며 그들과 회의를 하지만 당연히 일방적으로 결정을 한다. 그들의 역할은 자료를 전해주거나 생각/의견을 말해 결정에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보조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도 에릭이 리무진에 태운 중역이나 주임의 면모를 보면 이러하다.

기술팀장 샤이너. 작은 체구의 동안. 회장은 3년 동안 이이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의견이 필요하지 생긴 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생긴 것만? 그럴 리가. 정 붙여 좋은 거 없으니까. 시스템만 해킹 당하지 않으면 된다. 언제나 안전하기만 하면.

(옆에서 지나가는 택시 뒷자리에 탄 아내 엘리스 발견. 함께 간식 먹음)

통화(currency) 분석가 마이클 친. 수학, 경제학 박사. 22세. 거터펑크족. 아직 애송이. 너무 과하게 엔화에 투자하고 있다고 분석결과 보고하지만 결론은 위에서 이미 설명.

(애인 디디 판처와 베드 씬 후, 로스코 채플의 모든 로스코 그림 구입 문의. 나만 보고 싶어!)

재정주임 제인 멜먼. 휴일 조깅하다가 난데없이 불려나옴. 조깅 팬츠와 탱크톱 차림. 싱글맘. 손실 감수하고 엔화 투자에 손 떼기를 권하지만 역시나.

닥터 잉그램. 닥터 네비어스의 대타로 리무진 안에서 건강 일일 검진. 아래 옷 홀랑 벗고 전립선 촉진 당하면서 (이거 무지 아픕니다) 고통을 참고 제인과 계속 토의(라기 보다 수다)

(길 막혀 잠깐 들른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시인 아내 엘리스. 점심식사. 에릭, 당신한테 섹스 냄새가 나.)

이론 담당 주임 비자 킨스키. 작은 키의 여자. 사생활에 관해 조금의 틈도 없는 여자. 폭동을 함께 겪음.

(호텔에서 근무 끝난 경호원과 베드 씬)

(다시 만난 엘리스. 외환투기 손실을 자기 돈으로 보태주겠다고. 그러나 여전히 에릭, 당신한테서 섹스 냄새가 나.)

그러니까 하루 종일 리무진 안에서만 일을 한 거다. 톰 크루즈가 출연한 <마니어리티>에서나 볼 최신 첨단 장비로 무장한 리무진의 통신 시설이 이를 가능하게 했으며, 심지어 에릭은 리무진을 “프루스트 시키기”도 했다. 프루스트 시키기가 뭐냐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온다. 소음을 참지 못하는 작자가 방을 코르크로 한 번 덧씌운 거. 이처럼 에릭은 차 내 소음을 줄이기 위하여 방탄 리무진의 모든 틈새를 약하디 약한 코르크로 메우라고 명령을 내려, 오래 공을 들여 결국 그렇게 했다는 말씀. 이걸 이룬 건 뭐? 맞습니다. 돈입니다. 돈이 돈 한 겁니다.

자신이 점점 변하기 시작해 서민 아파트 다섯 남매 가운데 하나였다가 이제 피도 눈물도 없는 거대 부자가 되면서 이 와중에 얼마나 사람들에게 안 된 일을 시켰는지 전혀 몰랐겠지. 뭐 다 그런 거긴 하다. 이제 부자 중에서도 무지하게 부자이긴 하지만 불면증 환자에다가 사랑하지 않는 섹스리스 결혼생활에 점점 가학, 피학으로 몰려가는 젊은 영웅 에릭 패커는 머리가 벗겨지고 목이 없는 강건한 남자, 체코제 최신 디지털 권총으로 무장한 경호주임 토발이 없으면 시내를 활보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태가 된 유명한 자리에 앉게 된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선 돈은 많지만 참 가련한 인생일 수도 있다. 세상에 오직 자기 한 명만 사는 무수한 군중 속의 외톨이.

하긴, 다 좋을 수 있나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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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등산가의 호텔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아르카디 나타노비치 스트루가츠키 / 현대문학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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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빈기 관류 뮤르시 외곽에 비행물체가 출현했으며, 그곳에서 황록색 피부에 다리가 세 개, 눈이 여덟 개 달린 인간 형상의 존재가 내렸다. 스캔들에 목마른 삼류 언론은 앞다투어 그들이 우주에서 온 존재라고 보도했다.……”

책을 열면 1장 앞에 위와 같은 서문 격의 첨언으로 시작한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작품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십억 년>, <노변의 피크닉>, <신이 되기는 어렵다>를 읽었고, 작품들을 통해 형제들의 주된 관심사는 외계 어딘가에 있을 지능을 갖춘 생명체, 그들과의 소통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료적이고, 고결하고, 늘 광이 나는 단추를 달고, 불쾌할 정도로 법을 준수하며, 다정한 남편, 모범적인 아버지, 사람 좋아하는 동료, 정 깊은 친척”이라는 모든 구속을 탈탈 털어내 가볍고 경쾌하고 수정처럼 청결해지기 위해, 오직 홀로, 세상 모든 길의 종점, 온통 눈으로 덮인 산악지역에 자리한 “죽은 등산가의 호텔” 2층 건물에 주인공 ‘나’, 페테르 글렙스키 경위가 도착해 작품을 시작하면서도 이 책이 추리소설이 되리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도 갇힌 건물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해 불세출의 탐정 푸아로가 독자들과 치열한 두뇌 싸움을 하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스타일즈 저택의 살인사건>과 상당히 유사한 구성을 갖추었다는 것도. 물론 이게 다가 아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이 누군데 옛 추리소설 작가의 플롯을 베끼겠으며, 자신들의 관심사를 꽁꽁 묶어 두기만 하겠는가. 다만 독후감에서는 나중에 어떻게 마감할지에 관해서 말을 아끼고, 딱 이 선까지 하겠다는 뜻이다.

호텔 주인 알레크 스네바르 씨는 호텔과 주위의 골짜기, 그리고 저 멀리 병목고개까지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지역 유지다. 예전엔 그저 “쉼터”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 호텔이었지만 6년전 청년 한 명이 까마득한 암벽을 오르다가 (실제로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바”)알루미늄 재질의 카라비너가 끊어지는 바람에 수직으로 2백 미터를 추락하고, 그가 지른 단발마의 비명이 눈더미를 진동시켜 순식간에 산사태가 일어나 눈 4만2천 톤과 함께 땅을 때린 이후 이름을 “죽은 등산가의 호텔”로 바꾸었으며, 그가 묵었던 객실은 당시 그대로 보존해 ‘객실 박물관’이라 칭했다. 이쯤해서,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책 두어 권 읽은 독자(나)는 몇 년 전에 눈과 함께 땅으로 자유낙하 했던 건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일 것이며 당시 사고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일부러 만든 일로 사고 때문에 해를 입은 지구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증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고자는 당연히 그곳을 기반으로 지구인 또는 지구의 특정 기구와 소통을 모색하며 일종의 대사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심 말이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하나뿐인 샤워장에서는 이를 이용하기 위한 대기자가 줄을 섰음에도 불구하고 15분간이나 더운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콧노래도 불러가며 누군가가 샤워를 즐기고 있었는데, 기다리다 못한 대기자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아무도 없는 샤워장에 고물 트랜지스터가 켜 있기도 하고, 사람이 지나간 적이 없는 복도에 물 묻은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기도 한다. 여성 혼자 자는 방에 누군가가 침대를 사용한 것처럼 시트가 흐트러져 있기도 하고, 샤워 후에 몸을 닦기라도 한 듯 수건이 젖어 있었던 적도 있으며, 미모의 귀부인이 홀로 사용하는 방의 창문을 밖에서 누군가가 훔쳐보기도 하는 중세 마법의 시대에나 볼 수 있는 현상이 일어나니 그런 믿음이 강화될 수밖에.

등장인물은 호텔 주인 알레크 스네바르와 주인공 페테르 글렙스키. 그리고 몇 명 더 있다.

먼저 25세가량의 통통하고 땅딸막하고 혈색 좋은 가정부 겸 요리사 아가씨 카이사. 정조 관념이 없고 남자를 좋아하는 약간 모자란 여성이다.

6년 전에 죽은 등산가와 함께 도착해 여태 호텔에서 지내고 있는 세인트버나드 수캐, 렐.

유난히 큰 키, 연미복을 입고 다니며 서커스에서 최면술과 마술을 전문으로 하는 세계적인 마술사 듀 바른스토크르 씨와 그의 조카 브륜. 브륜은 알렉산더 대왕의 애마 부케팔로스라고 이름 붙인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십대인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구분이 안 가서, 호텔에 묵는 휴양객의 관심을 받는다.

시몬 시모네라는 이름의 인공두뇌 소속부대 대위이자 물리학자. 국가에서 가장 유능하고 천재적인 진짜 물리학자라는 건 저 뒤의 에필로그에서나 밝혀지지만 본문 중에선 압도적인 당구 실력을 갖고 있고 암벽 등반을 취미로 하는, 그러나 눈이 많이 온 관계로 암벽을 타지 못해 방에서 희한한 자세로 벽에 붙어 있고는 한다.

그리고 모제스 씨 부부. 모제스 씨는 전직 장군들이나 입는 금줄 두른 바지를 입고 다니며 안하무인, 목불인견이다. 반면에 부인 올가는 기묘한 미모를 갖고 있는데, 까무잡잡하면서도 푸르스름한 어깨, 우아하게 기다란 목을 지닌 미인 중의 미인이다. 반면에 호텔 주인 스네바르 씨가 글렙스키에게 해준 말에 의하면 아무래도 모제스 씨가 간혹 올가 여사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우리의 주인공 글렙스키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 독자가 만날 수 있는 등장인물은 이게 다다. 아직도 마법사, 하느님, 악마, 유령, UFO 등을 모두 믿는 철학자 겸 시인 겸 과학자 겸 엔지니어이기도 한 호텔 주인 스네바르는 글렙스키에게, 은하계에 생명체가 살아 있는 태양계만 약 백만 개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인간 이상의 지능을 갖고 있으며, 이들 중에서 또 지구에 관심을 둘 확률은 얼마나 되는지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물리학자 시모네는 곧바로 -e의 -1제곱, 즉 1/(-e), 굳이 비슷한 수로 말하면 2/3 정도의 상당히 높은 확률이라고 대답한다. 수학자 오일러의 수 e를 아시나? 약 2.72 정도를 말하는데 설명하자면 로갈리즘(로그)부터 시작해야 해서 되게 복잡하다. 그냥 넘어가자. 독자는 점점 외계인 또는 그들의 장비, 그것도 아니면 소모품 정도의 출현을 기대하게 되고. 일찍이 <노변의 피크닉>에선 지구별로 수학여행 왔다가 버린 쓰레기를 갖고 지구인들이 골머리를 썩인 경험이 있지 않은가 말이지. 그러나 여간해 장면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눈보라가 극에 달한 어느 밤, 검정 택시를 함께 타고 도착한 두 사람, 바이킹이나 북국 신화의 신 같은 외모를 한 올라프 안드바라포르스 씨와 단단하지만 작은 체구의 볼품없는 사내 힌쿠스 씨가 등장하면서 작품은 전환점을 맞는다. 불과 다음날,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큰 눈사태가 병목고개를 덮친 밤, 천하장사와 거구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올라프 씨가 정면으로 넘어졌으나 고개가 완전히 천장을 바라보는 자세로, 즉 목뼈가 완전하게 부러져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면서 외계인에 관한 기대는 극적으로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추리소설 <스타일즈 저택의 살인사건>과 닮아가기 시작한다. 과연 숙박인 가운데 누가 건장한 거인 올라프 씨의 목을 부러뜨려 죽일 수 있을까. 전혀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올라프 씨와 함께 택시를 타고 온 스스로 결핵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미성년자 전문 상담원인 힌쿠스 씨는 또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짓만 골라서 하는데, 늘 독한 술을 벌컥벌컥 마시며 호텔의 지붕에 올라 뭔가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숙박객 가운데 형사가 있으니 바로 주인공 글렙스키 경위. 그는 수표나 어음 위조, 세금 포탈 등의 경제범죄 전문 형사라서 난데없이 벌어진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쓰기는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나름대로 잠 한숨 못 자고 사건의 단서를 찾으려 전력을 기울이다가, 피해자 올라프 씨의 가방에서 이상한 형태의 장비를 발견하고 이를 증거품 가운데 하나로 호텔 금고에 보관한다.

이 와중에 눈보라는 더욱 거세지고, 이 눈폭풍을 걸어서 뚫고 또 한 명의 사내가 호텔에 도착하는데, 파랗게 얼고, 상처입고, 거의 죽기 직전의 루아라비크 L. 루아라비크 씨. 그는 눈동자가 하나는 A를 다른 하나는 B를 향하기도 하고, 오른팔은 어깨까지 없으며, 다리를 사용해 걷기에 상당히 불편한 몸을 하고 있다. 헐리웃 영화 <맨인블랙>에서 외계인이 간혹 연출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 될 듯하다.

자, 이제 결말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그건 당신이 직접 읽어보셔야겠다. 하여튼 스투르가츠키 형제의 상상력은 아주 매력적이다. 내가 읽기에 결말 근처가 좀 과하게 작위적이지 않은가 싶은 아쉬움이 조금은 남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이야기해도, 역시 스투르가츠키 형제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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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2-07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사두었는데 외계인... 뭐죠? 저는 외계인에 약한데 말입니다. 흐음..

잠자냥 2023-02-07 12:11   좋아요 0 | URL
아스트랄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2-08 06:07   좋아요 0 | URL
앗, 제가 이 책에 외계인이 등장한다고 했나요? 음.... 비밀인데 말입죠. ㅋㅋㅋ
SF 선호하지 않는 분은 좀 거리낄 듯합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세트 - 전6권 로마제국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 외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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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망사 3권에서 눈길을 끈 것은 성직자 성 암브로시우스, 현제wise emperor 테오도시우스, 훈족의 위대한 군주 아틸라, 그리고 서로마제국의 멸망이다.

쇠망사 1권에서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승인하지만, 겉으로는 잘한다, 잘한다, 말을 할 뿐 정작 황제 본인은 죽음의 침상에서야 겨우 세례를 받았고, 쇠망사 2권에서는 질투의 하느님에 의하여 뒷방 영감 신세로 떨어진 유피테르 이하 이교의 신들을 영웅적인 철학자 황제 율리아누스가 잠깐, 황제가 전쟁터에서 칼 맞아 죽을 때까지 복권시켰다가 다시 찌그러졌다는 얘기까지 했었다. 쇠망사 3권으로 가면, 이후 자기 말고 다른 신을 섬기는 꼴을 못 보는 기독교의 신이 본격적으로 불칼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최전방에서 유피테르를 비롯한 로마의 오래 묵은 신들의 조각상을 파괴하고, 신전을, 그냥 두고 교회 예배당으로 쓰면 될 것을 비싼 대리석 같은 초호화 자재들로 지은 신전까지 마구 파괴해버리는데, 집 나가서 아직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검은 양인 내 머리 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이 대목을 읽으며 아프가니스탄에 있던 최고最高의 최고最古 불교 예술품인 부처 석상에다 폭탄을 설치해 터뜨려버리던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생각났는지 몰라. 하긴 난 천국 가긴 텄다, 텄어. 이제 기독교가 들어오고 불과 반 세기밖에 안 되어 사람들 생각이 언제나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수준까지는 안 갔을 터이니, 간혹 이교도 적인 생각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말이지. 이런 사고 행위조차 얄짤없이 배척하고 탄압하고 가능하면 때려 죽일 거 같은 사람이 바로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 암브로시우스 주교와, 용감하고 전략적이며 훌륭하게 동서 로마 제국을 두루 살피던 현제 테오도시우스가 쿵짝을 맞춰 아예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 비슷한 수위까지 끌어올리니, 거봐라, 거봐. 내가 쇠망사 2권 독후감에서 이제 다신교를 믿는 로마에 기독교가 들어왔으니, 질투의 하느님이 엄청 바빠질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벌써 천년 가까이 비 오는 날 말뚝을 팍 박아버리고 터를 다진 유피테르 이하 다양한 신족들이 겨우 반백 년이 되지 않아 전부, 몽땅 거덜이 나버렸으니, 거참, 대단하다 대단해.

암브로시우스 주교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성인이다. 그래 이름 앞에 ‘성聖’자를 달고 다녀야 할 정도로 어린 백성을 귀애하고, 가난한 이들을 동정하며, 음으로 양으로 사람들 마음을 다독일 줄 아는 그야말로, 주교님한테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지 몰라, 그야말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인 양반이다. 근데, 다 좋은데, 얘기가 이교, 다른 종교, 잡신들 쪽으로 나왔다 하면 갑자기 요괴인간으로 변신해 찌르고, 베고, 자르고 하면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니 정말 무섭다, 무서워. 이이에게 사랑해야 할 이웃은 엄연히 같은 그리스도교인들 뿐인 거였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세속 재산에 관해서는 또 얼마나 욕심이 많은지, 교회 건물, 토지, 노예(교회도 노예를 소유한다면), 현금, 금괴, 은괴, 보석, 귀금속으로 만든 성구, 태피스트리 등등, 사실 이게 다 황실과 원로원을 협박해 얻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라는 나라가 망하든 말든, 아니 이건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아니라 다른 대주교들, 동시에 몇 명 있었다고 기번이 이야기하는 교황들 얘기지만, 하여간 당시 기독교, 믿어도 된다고 승인 받은지 겨우 50년 정도 된 종교에 종사하는 직업인들이 그랬다는 말씀. 보면 로마 속주 곳곳에 다 예배당이 있고, 그것도 큰 예배당이 있어서, 예배당마다 한 명 이상의 주교, 또 한 명 정도의 대주교가 있었는데, 아직 정확하게 나온 건 아니지만 눈치를 보니까 이 대주교들이 또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서로 교황을 칭한 거 같다. “거 같다.”라고, 정확한 거 아니고 이제까지 읽어본 걸로 추리를 하자면 그렇다는 거. 친구 가운데 사제, 성당에서 미사 집전하는 제사장 말고 공부하는 먹물 사제가 있어 물어볼까 싶지만, 성당 다니라고 그럴까봐 안 물어봤다. 하여튼 ‘인상적인’ 성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엄청 인상 깊었다’. 예수 믿는 분들은 나보다 ‘훨씬 인상 깊게’ 읽을 거 같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최후의 제대로 폼 나는 황제라고 할 수 있겠다. 때는 바야흐로 로마의 전성기가 지나고, 로마가 이젠 시들시들해진 것을 눈치 챈 야만족들이 시도 때도 없이 속주를 침범해 약탈과 살인을 저질러 눈 번히 뜨고 당하고만 있었다가, 이제 제대로 된 황제가 등장해 말 그대로 한 번 뜨면 제대로 청소기 돌려 말끔하게 야만족들을 소탕하고 다녔던 거다. 기번이 재미난 것은 그러나 이 용맹하고 똑똑한 황제의 단점도 기어이 이야기하고 만다는 점. 바로 평화시, 아니다, 평화로울 때만 그런 건 아니고 하여튼 위급하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면 게으르고, 늘 (나처럼) 술에 절어 있고, (이건 나 같지 않음)사치스럽고, (이것도 나하고 다름)환락을 좋아하는 군주였단다. 신나게 놀고, 마시고, 섹스 파다가 야만인들이 대규모로 몰려온다든지 몇 개의 부족이 연합해 덤빈다든지 한다고 누군가가 불평을 하기만 하면, 아, 씨, 한 번 나가볼까, 한 마디 하고 이때부터 작전을 짜기 시작하는데 이게 시작부터 보통이 아니란다. 작전 짜고, 진군 코스 정하고, 지리적 판단해서 공격 방법 택하는 거 하나하나가 정말 전쟁이란 예술을 하는 거처럼 신출귀몰, 제갈량 바로 뒷자리 정도는 된다. 게다가 얼마나 용감한지. 제갈량은 쌈은 못했거든.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물론 이후에도 군인 황제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백전백승이라 과장할 수 있는 마지막 황제였다. 그러나 다 좋을 수는 없는 법. 이이한테는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 이렇게 아들 둘이 있었다. 아쉽게도 전부 함량 미달. 그저 저 두메산골에서 농부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인물에게 아르카디우스한테는 동로마제국, 호노리우스한테는 서로마제국을 맡겨 본격적으로 로마가 두 국가 체제로 확정하게 만들어버린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건 나라가 망하는 걸 지켜보는 일밖에 없다. 물론 두 아들 재위기간에 망하지는 않지만 쓰러져가는 나라의 전형적인 상태는 점점 심하게 곪아간다. 그리하여 서로마 제국부터 문을 닫고, 닫기 전에 한 번 더 괜찮은 황제가 등극하지만 재위기간이 하도 짧아 그저 그러다가 놀랍게도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마지막 황제로 제국은 셔터를 내린다. 아이러니. 로마를 건국한 것도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 로물루스. 거기다가 황제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로마 사람들은 마지막 황제에게 이름은 어찌 됐건 아우구스투스 호칭을 주는 대신 멸칭을 써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또 한 명. 훈족의 영웅 아틸라. 이 양반의 후손들이 지금도 헝가리 평원지대에 터를 잡고 살아 헝가리 식 발음으로 하자면 “어띨러”다. 보면 중국의 북방에서 몽고족 혹은 몽고족 옆에 살다가 걔네들한테 얻어 터져 서쪽으로 이동한 흉노 비슷한 족속인 것처럼 보인다. 틀림없지 싶다. 한나라 최고 미인 왕소군을 훔쳐간 민족. 유목민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서 말 타고 고기 육포 씹어가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리다가 눈에 보이는 마을 있으면 약탈하고, 처첩 삼고, 죽이고, 불 싸지르고, 뭐 이렇게 살던 야만인인데, 세월이 좀 흘러 냉정한 승부사이자 엄혹한 장수가 나와 로마와 속주의 기술까지 섭렵해 성문을 때려 부수는 파성기를 비롯한 무기를 제작하고나서 전 유럽을 강타한 인물이다. 위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덩치 크고 힘 센 인종들한테 모피를 비롯한 말린 대구, 넙치 등을 공물로 받고, 아래로는 흑해, 크름 반도 이하 지방까지 그야말로 말 가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다 때려잡았던 인물이다. 동로마제국은 물론이고 서로마제국 언저리까지 와서 로마의 속국들이 연합군한테는 한 번 패전을 한 적도 있지만, 전투에 지는 건 병가의 상사라, 다시 훗날을 도모해서 맞은 거에 두 배 이상으로 코피 터뜨려준 왕 중의 왕, 영웅 중의 영웅, 아틸라. 저 서로마제국으로 원정을 가 이탈리아 아가씨와 혼인을 하고 잔치를 벌여 술을 잔뜩 퍼마신 다음에 신방에 들었는데, 다음 날 해가 저물어도 텐트에서 나오지 않는 거라, 대왕님께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문을 따고 들어가보니, 동맥 어디가 내출혈로 끊어져 한 대야의 피를 쏟고 죽어 있었단다. 이후 아틸라가 이끄는 종족들은 순식간에 헤쳐모여, 서로 왕을 해보겠다고 뿔뿔이 흩어져 전부 망가져버리고, 아틸라의 아들이 이끄는 순종 훈족 몇몇은 헝가리 동쪽의 황무지 넓고 넓은 평야에서 아직도 살고 있으니, 네모난 턱에 검은 머리카락, 약간 찢어진 눈을 하고 있다니, 시간 있으면 한 번 가보시든지.

에드워드 기번. 역사학자가 참 글도 맛있게 써서 읽는 맛이 보통이 아니다. 다만 너무 길어서 눈이 뱅뱅 도는 것만 아니면 더 좋았을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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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2-04 0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쇠망사 1, 2의 독후감은, 서재에선 뜨지만 독자리뷰엔 빠지는구나. 1인 1리뷰인 모양이다. 그게 공평한 거 같기도 하다.

공쟝쟝 2023-02-04 07:47   좋아요 1 | URL
ㅎㅎㅎ 나중에 로마역사 공부 필요해질 때 레퍼런스 삼겠습니다!!

Falstaff 2023-02-04 16:18   좋아요 2 | URL
토욜이라 오늘은 좀 일찍 일과를 끝내고 이제야 답글 답니다.
서재는 휴대전화에서 답글쓰기가 안 돼 불편하군요.
로마 역사 공부하시려면 이 책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거 같네요.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프랑스혁명 전에 쓰인 책이라서, 후대의 연구가 더욱 많이 보태진 근현대 사가들의 역작을 고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2023-02-04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덕분에 로마사 공부하는 기분! ^^

Falstaff 2023-02-04 16:19   좋아요 1 | URL
앗, 그렇습니까. 기분 좋습니다. 이 책은 재미로 읽으시면 좋을 듯하네요. 글도 참 잘 쓰는데 우리말 역자도 힘을 보탠 거 같더군요. ^^

stella.K 2023-02-04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아니 천하의 골드문트님이 친구가 무서워
알고 싶은 것도 못 물어 보시다니요.ㅋㅋ

지난 주 아틸라 전기 영화를 조금 보다가 말았는데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훈족 뭔가 동양스러운데 말입니다.
자꾸 유혹하시네요.ㅠ

Falstaff 2023-02-04 16: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 친구가 무척 바쁜 인간입니다. 가톨릭 대학의 교수로 있지만 연구 또는 강의차 바티칸에도 자주 가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런 친구는 사제직 은퇴할 때까지 그냥 연락 안 하고 내버려두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사제 은퇴...는 너무 늙어서 하는 바람에 그때까지 살아 있으려는지 몰겠습니다. ㅋㅋㅋㅋ
주제페 베르디가 아틸라를 되게 우스운 꼴로 만들어(각색해) <아틸라>라는 오페라로 만들었습니다. 초기 작품(아홉 번째)으로 전형적인 19세기 벨칸토 오페라라서 자주 공연하지는 않지만 들을 만합니다. DVD로도 나와 있으니 아마 U-tube에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

유부만두 2023-02-05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어요. (루슈디 톤 같아요) 그런데 로마제국 샷따 3권에 내렸는데 나머지 세 권엔 어떤 내용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Falstaff 2023-02-05 10:2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서로마 제국이 셔터 내렸습니다. 동로마제국은 더 오래가고 이어서 신성로마제국이 로마의 후예라고 구라를 칩니다. 영국인, 브리타니언들은 자기들이 진정한 로마의 자손들이라고, 심지어 망한 트로이 장군 아이네이스의 후예라고 아득바득 우기는 촌극까지 벌입니다.
원래 기번은 서로마제국의 멸망까지만 쓰려 했는데 주위에서 권하기도 하고 자기도 욕심이 생겨 동로마까지 집필을 했다고 하는군요.

그레이스 2023-02-05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훈족의 왕 아틸라>가 인상적이었어요
악마로 몰아갈 정도로 나타나기만 하면 두려움에 떨게 하는 전투력. 하지만 그것은 로마인들의 시각이고.^^

역사가들이 로마사에 천착하는 이유가 있겠죠?

Falstaff 2023-02-06 06:57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오죽했으면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의 대이동...때문에 로마가 문을 닫았겠습니까. 유럽인들 입장에서 보면 되게 쪽팔린 한 페이지겠지요. ^^
 
노스트로모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4
조지프 콘래드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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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비밀요원>, <로드 짐>에 이어 네 번째 읽은 콘래드. 그의 데뷔작 <올마이어의 어리석음>을 읽으면 현재 구입할 수 있는 콘래드의 픽션은 다 읽는 셈이다. 일찍이 제임스 미치너가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와 더불어 네 명의 잉글랜드 대표 소설작가로 꼽은 인물이다. 이런 굉장한 상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말로 번역해 출간한 책이 너무 적다. 이이 스스로도 전업작가 치고는 과작인 편이기도 했으니. 역시 콘래드의 전성기라고 하면 20세기가 시작되던 부근에 출간한 일련의 장편소설을 들 수 있다고 하는데, 우연히도 내가 읽은 네 편과 목록이 일치한다. 나는 처음 읽은 <암흑의 핵심>이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오래 전에 읽었지만 내가 읽었는지도 모른 채 다시 사서 읽어봤고, 내용이 아주 아주 조금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 아, 지금 두번째 읽는 것이구나, 알아챘을 정도였다. 인터넷 이전 시절의 독서란 그냥 혼자만 읽는 행위였으니 이런 일도 흔했다. 쉰 살이 넘어 다시 읽어도 별로 인상깊지 않았다가, <비밀요원>과 <로드 짐>에 한방이 아니라 원투펀치 제대로 얻어맞고 훅, 갔다. 이 책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4. 415번으로 나왔지만 알라딘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구분이 되어 있지 않은 바람에 신간 도서 알람이 뜨지 않아 여태 나온 줄 모르고 있었다가 우연히 발견해 서둘러 읽게 됐다.

<암흑의 핵심>은 콩고 내륙으로 이어지는 강을 따라 가서 깊숙한 내지로 들어갔고, <비밀요원>은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실제로 있었던 테러 사건을 그렸으며, <로드 짐>은 말레이 반도 정도의 오지에서 ‘주님’ 또는 ‘주인님’으로 섬김을 받던 짐이라는 이름의 백인 이야기라서 차례로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를 무대로 했다. 아다시피 콘래드가 젊은 시절 오래 선박 노동자, 심지어 처음엔 선박 주방보조로 일하다가 영국인으로 귀화를 했으며, 자격시험에 차근차근 합격해 차례로 항해사, 선장까지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익숙하게 오지의 환경을 책에 담을 수 있었다. 근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재미있는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보면, 당연히 카리브해의 이름없는 바닷가 도시가 무대인데, 난데없이 조지프 콘래드라는 이름의 산적이 산맥에 횡행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이 이야기가 마르케스 특유의 허풍 또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구라가 아닐까 여태 생각했었다. 하지만 웬 걸. 콘래드가 젊은 시절에 정말로 라틴 아메리카에 무기, 그래봤자 소총류가 아닐까 싶긴 하지만, 무기를 밀수한 전력이 있다니 그럼 정말 산적질 한 것하고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어쩐지 <노스트로모>에서 가상의 코르디에라 산맥과 대평원을 누비는 도적떼를 기가 막히게 묘사하더라니까. 산적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무기 밀수도 이 책에서 나온다. 마르케스가 이 책을 읽고 콘래드라는 이름의 도적 두목을 만들어 낸 것이 확실하다!

미리 말하고 시작하자. 이 책, 대박이다. 명작, 걸작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미진할 수도 있지만 이 선 바로 아래 작품군에서는 윗길로 칠 만하다.

몇 작품 읽지 않았다. 콘래드는 19세기 말에 서인도 제도를 비롯해서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적 오지를 다니지 않은 곳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귀화한 영국인으로 오히려 영국인보다 더 영국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다녔던 유사 영국인으로, 얼핏 보면 가난하고 미개한 유색인들에게 친밀하고 후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밀한 곳의 콘래드는 세상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백인들에 의하여 굴러가고,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며, 기타 지역의 나라들은 부정과 부패와 야만과 가난과 독재와 고문과 폭력과 살인과 기타 등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미개”로 충만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유럽 백인들에 의한 간섭이 필수적이라는 의견이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다(이런 의견은 백낙청의 역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읽은 영향이 크다는 것을 고백한다). 또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콘래드의 작품이 다른 작가들의 것보다 낫게 읽히는 이유는, 특히 <노스트로모>가 그런데, 백인(영국)에 의한 개선 또한 그들의 이익과 이익에 의한 종속에 의한 것이고, 결과 역시 처음엔 현지인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나중엔 현지 유색인들의 저항을 수반하게 될 것이라는 정치적 견해를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오지 속에서 군주 비슷한 위치를 확보했다가 실제로 멸망하거나(암흑핵심, 로드짐) 그렇게 될 조짐이 확연하게 보인다(노스트로모).

<노스트로모>는 칠레 위에 태평양을 면한 가상의 나라 코스타구아나 공화국의 옛 옥시덴탈 주, 지금 이름으로 술라코 주, 술라코 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찰스 굴드라는 이름의 영국 이민 3세. 할아버지는 볼리바르 휘하의 영국 군대를 이끌고 코스타구아나의 독립전쟁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며, 탐험가, 상인으로 당연히 이름난 상류계급의 지위를 향유했다. 주지사를 역임한 삼촌 해리는 연방제를 주창하다가 독재자 구스만 벤토에 의하여 체포되어 총살당했고, 아버지는 사업을 해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미 문을 닫은 산토메 은광산의 채굴권을 주는 대신 5년 간 예상하는 채굴 수익을 대가로 미리 지불하라는, 거의 집행 명령을 내려버린다. 이때 찰스 굴드는 공부를 하기 위해 영국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이로 인해 이름만 채굴권을 얻었을 뿐 거의 빈 손이 되어버린 것을 한탄한 반면, 찰스는 새롭게 흥미가 생겨 본격적으로 광산학을 공부하다가, 자신이 직접 광산 엔지니어가 될 게 아니니까 차라리 광산 경영을 공부해보자고 마음을 바꿔 이 방면으로 뛰어 든다. 그러다 운이 좋아 미국의 철광왕 홀로이드 씨와 연결이 되어 그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은광을 개발하고, 부패한 코스타구아나의 원주민(또는 혼혈)출신 고위관리들에게 뇌물을 듬뿍 뿌려가며 번창일로로 접어든다.

이제 세계의 금고로 떠오른 술라코. 이 사이에 민주주의자 리비에라 대통령이 국방장관 몬테로이 군대에 패망해 험한 코르디에라 산맥을 넘어 술라코로 피신하고, 술라코에서도 정권이 바뀌어 폭동이 일어나지만, 천 명에 한 명 나올까 싶은 대장부, 명성을 먹고 사는 남자, 부패할 수 없이 청렴한 사나이, 미첼 선장 수하의 노동자 십장인 일명 노스트로모, 본명 잔 바티스타, 별칭 카파티스 데 카르가도레스가 부하를 이끌고 어렵사리 실권한 대통령을 구해 망명시킨다. 하지만 권력을 쥔 정권이 틀림없이 술라코 세관 창고에 쌓여 있는 은괴더미를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법. 부패 정권과 하수인은 은괴를 포탈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가치를 지닌 은괴를 그들에게 넘겼다가는 불법, 야만, 폭력적인 정권이 확고하게 정착할 것이라, 술라코의 왕이라고 불리는 찰스 굴드 사장은 부패할 수 없는 사나이 노스트로모에게 은괴를 싣고 바다를 건너 모처로 옮기라고 전한다. 술라코 시는 불법, 야만적인 적과 투쟁을 할 것인가, 그들의 처분에 맞게 적응을 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프랑스계 언론인 청년 돈 마틴 드쿠. 그는 과감하게 술라코의 분리독립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이 시에는 전직 장군 바리오스와, 드쿠가 북아메리카에서 밀수해 온 중고, 그러나 현지에서는 최고급 성능을 지닌 라이플로 무장한 군대도 있고, 산적이라는 불명예를 씻고자 방위군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에르난데스도 있으며, 무엇보다 독립만 된다면 시민 전부에게 복지를 약속할 은광이 있음에야.

이 작품엔 이런 것들만 있는 건 아니다. 고독. 그것도 절대 고독이 또한 큰 의미를 지니고 등장한다. 굴 속에서 온갖 보석과 금덩이를 지키던 용 부름Wurm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왜 이런 말을 하느냐고? 그거야 읽어보면 아시지. 책 좀 읽는 사람이면 책장에 보관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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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2-02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민음사 출간되고 첫 독자 리뷰 맞죠?
저도 이 책 찜해놨는데 🌟 5라니 참 반갑습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조지프 콘래드라는 산적이 나온다니 정말 재밌네요. 슬라브 인들을 보면 참으로 강하고 무서운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콘라드 작가가 저에겐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20살에 배운 영어로 이렇게 영문학사에 한 획을 긋다니 대단한 거 같아요.
저도 <암흑의 핵심> <로드 짐> <비밀요원> 세 권 읽었는데 <올마이어의 어리석음>과 이 책도 꼭 봐야겠어요.
올마이어는 중고로 한 권 있던데 담아만 뒀네요.
먼저 이렇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02-02 14:14   좋아요 1 | URL
옙. 그렇더라고요, 첫번째 독자 리뷰.
잉글랜드 톱4 - 여자 두 명, 남자는 전부 외국인 출신의 영국인입지요? ㅎㅎㅎ 재미납니다.
올마니어, 흠 이거 얼른 사야겠습니다. 도서관에도 없던데요.
농담입니다. ^^

coolcat329 2023-02-02 14:21   좋아요 1 | URL
톱4 중 남자는 모두 외국 출신 맞네요. ㅎ
올마이어 그 사이 중고가 14권이나 나와있네요~
사셔도 되네요~^^

yamoo 2023-02-03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스트로모 꼭 구입하겠어요! 불끈~~!!

Falstaff 2023-02-03 16:11   좋아요 0 | URL
옙.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고요. 명작, 걸작까지는 아닙니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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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순 무렵. 다섯 살, 여섯 살, 연년생 두 딸의 엄마 루시 바턴은 맹장수술 후 염증 증세가 심각해져 무려 아홉 주 가량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다. 조부모와 세 분의 친척 아주머니가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담당의사로부터 자상한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열네 살 때 독일군 병사 출신인 아버지가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바람에 병원에 오기를 매우 꺼려하는 남편 윌리엄은 일리노이주의 벽촌 앰개시 마을에서 남편 그리고 중년에 접어든 아들과 함께 살고 있던 루시의 어머니에게 뉴욕까지의 항공료, 공항에서 병원에 가는 택시요금을 보내주고, 오셔서 자기 대신 딸 좀 보살펴주시라, 장모를 호출한다. 이렇게 모녀는 정말 오랜만에 만남의 닷새를 보내는데, 심지어 루시-윌리엄 부부의 결혼식 때 마저 루시의 가족은 아무도 참석을 하지 않았던 터였다.

왜 그랬을까? 어떤 의미에서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이 책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 PTSD에 관한 소설이다. 17세기 초, 최초로 대서양을 건너 매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에 정착했던 청교도였다가 세월이 흘러 이 가운데 용맹한 사람들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서쪽으로 영역을 넓힌 소수의 대열이 있었고, 이들은 한 편으로 원주민을 학살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을 기만하고,사기를 치고, 뒤통수를 때렸으며, 위스키로 현혹해가며 광활한 농장을 개척하였지만 모든 이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라서 이 가운데 극히 일부는 같은 청교도 후예들의 하부 구조를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가운데 바턴 씨도 있었다. 바턴 씨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돌아와 일리노이주 앰개시 마을에 정착해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았으며 혼인 후에도 삼촌의 집에 딸린 차고를 조금 보수해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농기구를 수리하는 기술자로 종종 농기구수리점에서 해고를 당했지만 며칠 후 다시 고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아 좋거나 훌륭한 수리 기술을 보유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아내는 바느질을 해 마을사람들의 옷을 지어주고 삯을 받아, 안팎으로 벌이를 해도 아들, 딸, 딸로 구성된 세 남매는 종종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이들은 작은 시골마을에서도 지평선까지 다른 집이 거의 없는 옥수수 밭 가장자리에 살았으며, 삶의 고단함은 부모로 하여금 때때로 아이들에게 충동적으로 매질을 하게 만들었다. 주로 엄마가. 이런 집안의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환영받지 못해 학교 친구들은 남매들을 보면 코를 쥐는 시늉을 하면서 “너희 식구들한테서는 냄새가 나!”라고 놀려댔으니, 또래에 의한 가혹한 말의 회초리는 남매들에게 평생 짊어지고 다닐 수밖에 없는 상처를 남겼을 수밖에. 비록 지금은 아니라고, 그렇게 크게 아프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말이 없고, 제스처도 없고, 터치도 없는 아버지 바턴 씨는 전쟁 당시 독일에서 갑자기 독일 청년 두 명을 마주친 적이 있는데, 화들짝 놀란 바턴 씨는 도망가는 그들의 등을 향해 총을 발사했으며 이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바턴 씨가 다가가 시신을 똑바로 돌려놓자 그들이 생각보다 훨씬 젊은 청소년들이었고, 군인은 물론 아니고, 청년도 아직 채 되지 못한 이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은 그를 더욱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이끌었으나, 당시엔 참전 후유증에 관한 연구도 없었고, 사례도 (많이는) 보고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당연히 인정받지도 못했다. 바턴 씨는 전쟁이란 폭력 속에서 자신이 직접 가한 폭력과, 전투 중 수도 없이 목격했을 피폭력과 위험상황을 경험하는 물리적/직접적 외상을 겪었으며, 이 후유증으로 발생한 사회부적응은 이이가 가정을 이룬 다음에 차례로 아내와 아이들로 하여금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서적 내상을 입게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가운데 막내 루시. 처음에는 추운 것을 싫어해 학교가 파한 후, 집에 가봤자 보온을 하지 않은 추운 집에서 덜덜 떠는 것보다, 중앙난방이 되는 교실에서 숙제를 다 하고, 교실의 학급도서를 어두워 글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아 이게 습관이 되었는데, 즉각 숙제를 하고, 책을 읽는 일을 몇 년 하는 바람에, 비록 가족 가운데는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학교를 마칠 때는 전액, 전 학년 장학생으로 시카고 소재 대학 입학 자격을 따버리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진학하고, 공부를 하고, 두 번째 사랑을 해 스무 살에 윌리엄과 결혼해서 딸 둘을 낳고 키우다가, 맹장염 후유증으로 입원을 하고 나서야 정말 오랜만에 모녀는 상봉한다. 남편 윌리엄의 아버지 역시 2차 세계대전에 참전은 했지만 독일군으로 미군에게 잡혀 동부 해안에서 감자를 재배하는 노역을 하다가 한 유부녀와 사랑을 했던 사람. 종전이 되자 독일로 돌아갔다가 연인을 잊지 못해 다시 미국으로 와, 유부녀와 야반도주를 감행해 매사추세츠에 정착한 이였다. 이 사실을 알고 바턴 씨는 독일인과 만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막내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거였다.

루시를 제외한 바턴 가족은 여전히 일리노이 주 앰개시 마을 또는 이 근방에 살면서 아직도 아버지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서 비롯한 집단 PTSD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오빠. 1980년대 중반에 나이 서른여섯의 미혼이며 직장이 없고, 저 지평선 가까이에 있는 피더슨 씨네 헛간에서 내일 도살장에 끌려갈 돼지들 옆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마음씨 좋은 가정의 꼬마 아가씨가 주인공인 동화적 소설을 주로 읽으며 지낸다. 책 뒤편에 오빠가 루시를 만나는 장면을 보면 그리 이상한 성격은 아닌 듯하지만 이이 역시 사회부적응 기질이 있는 건 분명하고, 더구나 시골 마을에서 어머니의 속내의와 하이힐을 신고 읍내를 활보하여 자신이 게이라는 걸 만방에 고한 바 있어 더욱 외톨이가 되었을 수 있다. 그나마 나중엔 아버지와 같은 직업인 농기구 수리 기술자로 일하며, 아버지와 달리 수시로 해고당하는 일은 없다고 하니 아주 느린 개선 또는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개선 또는 회복.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꼽은 건 사랑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용의 소설은 주변에 많이 있지만, 별로 특별하지 않은, 어쩌면 상투적인 스트라우트에게 많은 독자들이 감탄하는 것은, 이이의 독특한 감수성을 잘 담아낸 그릇, 문장이 아닐까 싶다. 한 방향으로 가면서 에피소드들조차 방향에 어긋나지 않으며 극한의 가난과 고통과 외로움과 다툼 같은 것을 부정하지 않는 솔직함. 이런 누추함의 적절한 배치가 독자를 아리게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스트라우트는 루시 바턴의 딸들에게도, 이런 상처까지 상속된다는 것을 구태여 밝히고 있다. 어차피 사는 일이 상처를 치유하고 또다른 상처를 입히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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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1-31 07: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 님의 이 리뷰를 읽으니 저는 제가 얼마나 소설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지 깨닫게 되네요. 뭐랄까, 골드문트 님은 소설의 바깥에서 책을 읽고 그 소설의 흐름을 짚어내시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저는 소설의 안에서 읽어서 전체적 흐름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 루시 바턴 두 번 읽었는데 골드문트 님의 이 리뷰를 읽노라니 또 이 책이 완전히 새롭게 보입니다. 골드문트 님의 이 리뷰가 참 좋습니다!!

Falstaff 2023-01-31 17:03   좋아요 1 | URL
아휴.... 이제야 하루 일정이 끝났습니다. 댓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제 독후감은 말 그대로, 제가 책 읽고 느낀 감상을 쓴 거뿐이예요. 그냥 하나의 의견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충분할 거 같고요, ㅎㅎㅎ 다락방님한테 칭찬 들은 거 하나 가지고도 참 기분 좋습니다. ^^

그레이스 2023-01-31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나 가족이 아닌 타인의 사랑에 기대서 살아간다는 주인공의 고백이 넘 가슴아팠습니다. 가족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다면, 그런 심리적 장애를 갖지도 않았겠죠?!

Falstaff 2023-01-31 17:07   좋아요 1 | URL
그니까 말입니다. 아쉽습니다. 근데 가족 가운데 사랑을 줄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예 없으면 어떻게 할지.... 루시 언니가.... 더 괴로울/힘들었을 거 같았다는 게 참.....
지금 오후 5시인데요 이미 혈중 알코올이 더 이상의 댓글을 쓰지 말라네요. ㅎㅎㅎ

yamoo 2023-02-03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어보니, 이 책은 제가 읽으면 대량 실망할 거 같습니다. 사랑타령하는 책은 이제 더이상 안 읽고 싶어요..ㅎㅎ

Falstaff 2023-02-03 16:12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개인 취향이 제일입니다.
근데 사랑 타령은 아니고 가족 사이 특유의 파문 같은 거 있잖아요. 그걸 파고 드는데 옴찔합니다.

자목련 2023-02-07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윌리엄>도 읽어주시면 안 될까요?

Falstaff 2023-02-08 06:11   좋아요 0 | URL
다음 스트라우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인데 2월 28일에 페이퍼 올릴 예정이고요, 그 다음 스트라우트으로 <오, 윌리엄>이 올라올 겁니다. 별 거 아닌 제 서재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