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9
제럴드 머네인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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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은행나무의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를 시작으로 여성 작가들의 작품만 열다섯 번 출간했다. 그리하여 나는 여성시대를 맞이하여 여성작가만을 위한 세계문학 시리즈가 등장한 것으로 알았다. 작가의 젠더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구성도 만족스러워 여성 작가만 천착하는 것에 불만이 없었다. 작품만 좋으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은행나무는 에세 시리즈의 열여섯 번째 순서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름을 크게 내지 않은 제럴드 머네인의 작품 <평원>을 선택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에세 시리즈에서 처음 나온 남성 작가라서. 별 일이 다 있네.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오스트레일리아(이하 “호주”)에서는 사뮈엘 베케트의 뒤를 잇는 천재라고 이름이 높고, 호주 땅을 떠나본 적도, (하다못해 나도 타본 적 있는) 비행기를 탄 적도 없으면서 십 년이 넘게 꾸준하게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자의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리고 있단다. <평원>을 읽어본 내 소감을 노벨상과 관련시켜 말해보자면, 아뿔싸, 세월이 너무 지났다. 작품은 스웨덴 한림원 지하실에 사는 늙은 토끼들의 취향과 맞아 떨어질 것 같은데, 아쉽게도 나하고 생일이 같은 1939년생으로 올해 85세. 한림원 토끼들은 이제 더 이상 늙은이한테 상을 안 주기로 결심을 한 것 같다. 스웨덴까지는 자기 차를 운전해서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살던 밀란 쿤데라도 한림원 구경을 못하고 죽었고, 커다란 팬덤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 필립 로스도 스웨덴 행 티켓을 끊었다가 취소하고, 끊었다가 최소하고 또다시 끊었다가 취소하면서 죽었다. 그러니 제럴드 머네인도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편이 만수무강에 좋을 듯하다.

  제럴드 머네인은 1939년 초에 빅토리아주 멜버른 변두리에서 경마장 도박에 재산을 날린 철없는 아버지의 네 자매 가운데 한 명으로 태어났다. 숱하게 이사를 다니다가 작은 만灣bay에 살던 부유한 할아버지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아 어린 제리는 수영도 안 배우고, 물도 바다도 마땅하지 않아 훗날 평원을 향해 내륙쪽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역자해설에 쓰여 있다. 역자 해설에 나온 인생기가 위키피디아보다 훨씬 흥미진진하다. 열일곱 살에 맬버른에있는 라살 대학(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57년에 난데없이 가톨릭 사제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몇 달만에 못살아, 못살아, 하며 뛰쳐나온 후 얼마나 질려버렸는지 아예 신앙조차 잃어버리고 만다. 이제는 스스로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 이후 13년간 공무원, 초등학교 교사, 공공기관 에디터 등을 하다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교사를 만나 결혼을 하고 직장을 때려 치운다. 그리고는 전업 주부(主婦 말고 主夫)를 선언, 세 아이의 양육과 가사에 힘을 쏟는다. 동시에 틈틈이 워드 프로세서나 PC가 아닌 구형 타자기에 종이를 끼워 양손 둘째 손가락으로만 자판을 두드려가며 시와 소설, 단편소설, 수필을 쓰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다.

  아내가 먼저 떠난 일흔 살의 제럴드 머네인은 외딴 시골 마을 고로크Goroke의 ‘자기 방’에 머물고 있다. 그야말로 자기만의 방과 연금을 받고 있으니 늙었다 해도 이제 작품을 쓸 최고의 환경을 마련한 셈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카프카를 인용하며 자신의 방을 떠나지 않고 머물면 세상이 스스로 그 방으로 찾아올 것이라 한 바 있다.” (p.148) 카프카뿐일까? 루이 페르디낭 쎌린느가 쓴 <밤 끝으로의 여행>에 나오는 한 소년은 낡은 사진을 보면서 자신이 그곳에 가본 적은 없지만 진정한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진정한 여행’은 가서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 자연을 상상하고 정의하고 구성하는 일일 수도 있다. 어차피 짧은 시간이 지나면 직접 눈으로 보고 기억한 것조차 왜곡될 것이니.

  <평원>은 이런 의미에서 머네인의 작은 방에 스스로 들어온 호주의 광활하고 황량한 내륙 지역이었을 터.


  17세기부터 시작한 유럽인에 의한 식민지 지배는 당연히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시절과 똑같이 해변지역부터 유럽 문명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주로 호주 남동부에 몰린 대도시, 멜버른이나 시드니 같은 도시, 즉 ‘외곽 호주’에 머물지 않고 내륙 깊숙한 곳에 들어가 물론 농업도 일부 했지만 주로 거대 목축장을 운영했다. 말이 거대 목축장이지 희박한 인구밀도를 지녔던 백호주의 시대에 목장이란 소 한 두 마리가 목장 한 구석에 숨어버리면 찾는 데만 몇 주일이 걸릴 수 있고, 그것도 산채로 발견한다는 보장이 없을 정도로 광대한 땅덩어리라는 의미다. 주로 대단히 건조하지만 한 번 비가 쏟아졌다 하면 여태 그냥 저지인 줄 알았던 건천이 도도한 강이 되어 흐르면서 이럴 줄 몰랐던 초기 개척자들을 8백 킬로미터 떨어진 바닷가까지 휩쓸어버리기도 했다. 그리하여 한 번 내륙, 평원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주로 목축 부르주아로 구성된 넓은 땅 소수민들의 커뮤니티이기는 하지만 외곽호주 사람과 문화에 스스로 차별을 지었다.

  토지와 가축을 토대로 한 부르주아들의 커뮤니티. 이들이 누리는 한정된 문화는 마치 수많은 식객을 거느린 맹상군 같은 고대 중국의 공자公子를 연상시킨다. 외곽 호주에서 자라고 공부하다 이제 평야의 것을 연구하거나, 예술로 표현하고 싶어하거나, 작중 주인공처럼 영화로 남기고 싶어하는 각종 학자, 예술가들은 어디인지 밝히지 않은 호주의 대평원 지대 부르주아들이 아지트 삼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위스키에 취해 있는 호텔로 모여 그들의 후원을 바라 열심히 자신과 자신의 작품 구성을 프리젠테이션 한다. 화자인 영화제작자는 이 가운데 한 부르주아의 마음에 들어 그의 저택 별관에 몇 년 동안 기거하며 영화를 찍고자 하지만 그러하지 못한다. 앞에서 페르디낭 쎌린느의 책에 등장하는 소년처럼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진정한 평야, 평야의 본질을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작품은 결코 쉽지 않다. 내 경우를 말해보자.

  처음엔 한 영화제작자가 평원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좋고 아니어도 좋은데 한 편의 영화를 찍기 위하여 평원의 호텔에 들어온다. 이 호텔은 권태에 절고 전 부르주아들이 들러 위스키를 마시며 하루 종일 예술가, 작가들을 면담하면서 누구를 후원할까 선택하는 장소이다. 이들은 남는 것이 시간과 돈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천만의 말씀. 비록 해안지역의 호주인과는 관점이 다르나 나름대로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독특한 문화관과 예술관을 가지고 있다. 주로 평원에 대한 것이다. 오직 평원에 살았고, 그것도 아주 오래 살아서 평원이 내포하는 무수하고 뜻 깊은 침묵과 풍요, 때로는 헐벗음, 더위와 폭우 같은 자연현상, 외곽 호주인들은 알아채지 못할 핵심을 뜻한다.

  화자 역시 이들과의 면담을 기다리며 기다리는 동안 평야를 관찰하기도 하고, 별의 별 생각을 다 드러내는데, 나는 내가 뭐하러 평생 구경 한 번 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는 호주의 황량한 평원에 대한 글을 그것도 참 재미없게 쓴 것을 읽고 있는지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이 책을 통해 비록 2백쪽도 되지 않지만 나는 틀림없이 인내심 함양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얼른 얼른 후다닥 읽어치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드디어 영화를 제작하는 화자가 부르주아 일곱 명과의 인터뷰를 시작하자, 그 장면을 시점으로 내가 읽는 속도는 매우 느려졌다. 이제 단어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던 거다.

  제럴드 머네인의 독특한 시각과 문장. 스토리는 차라리 없어도 좋다.


  “(화자 ‘나’는) 긴 대화를 통해서 이곳 사람은 일생을 일종의 또 다른 평원으로 이해한다는 확신을 얻는다. 이들은 오랜 세월에 걸친 여정이니 하는 진부한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평원인 가운데 실제로 여행을 해본 사람이 극소수라는 것을 알고 거의 매일 놀라고 있다. (중략) 자신의 좁은 지역을 마치 그 새롭게 발견된 머나먼 땅 너머라도 되는 듯 정교하게 묘사하여 동등한 영광을 얻는 이들이 수십 배 더 많았다.) 그런데 그들은 이야기와 노래에서 ‘시간’을 말할 때면, 친숙하지만 두려운 평원처럼 그들에게 밀려오거나 물러난다고 표현한다.” (p.100)


  오랜 세월 평원에 거주하고, 평원의 독특한 문화에 자부심을 느끼는 부르주아 목장주들은 자기 영지의 끝까지 말을 타고 가본 사람이 거의 없으면서 어디는 어떻고 등을 상세하게 말할 수 있다. 아마 내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셀린느의 <밤끝으로의 여행>을 떠올렸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이 작품은 애초에 기대했던 소설이 아니라 일종의 심리적 여행 또는 방황을 목적으로 한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특정 목장주의 후원을 받아 그의 도서관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면서부터 영화제작자는 평원의 형상을 필름에 담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갈수록 머네인의 문장은 독자를 확 잡아 끌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내가 (특정 부부의 아내) 그녀를 은밀히 지켜보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현재 상황과 어떤 다른 여인이 차지하게 된 어떤 저택과 광대한 영지 사이의 간극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은 들어가지 못한 드넓은 어느 평원을 사색하고 있는 것이다.” (p.110)


  이제 평원은 다양한 의미로 변화한다. 그럼에도 어디까지나 평원은 평원인 채로. 부르주아라고 해서이 광막한 평원 속에서 늘 행복한 건 아니다. 질식할 정도의 권태와 우울은 노동할 필요 없어 저절로 길고 길게 확장하기만 하는 시간을 보내야만 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제 화자, 영화제작자를 몇 년간 후원한 목장주도 이렇게 말한다.


  “날 보게. 내가 눈을 감고 있어. 곧 잠이 들 거야. 내가 의식이 없는 게 보이면 내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내 두개골을 깔끔하게 열어주게. 이렇게 술을 잔뜩 마셨으니 칼날 같은 건 느끼지 못할 거야. 맥이 뛰고 있을 그 창백한 뇌를 들여다보게. 칙칙한 색깔의 뇌엽들을 떼어내는 거야. 그리고 강력한 렌즈로 자세히 살펴봐. 그렇게 해도 평원을 알려줄 건 아무것도 보지 못할 거야. 평원은 오래전에 사라졌어, 내가 보고자 했던 그 땅은.” (p.133~134)


  제럴드 머네인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는 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평원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머네인은 그것을 자기만의 방에 들어 앉아 오직 머리 속에서 이미 알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더 진중하게 읽을 것을. 경솔하게 달린 것을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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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죽던 날 거장의 클래식 4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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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옌롄커? 그렇다. 흥미로운 작가라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처음 옌롄커를 읽을 때는 이 양반이 말하는 것에 도무지 적응을 하지 못해 참 별나게 소설을 쓴다, 헛웃음을 친 후 일단 멀리 했다. 그러다 무슨 연유가 있어 다시 읽고, 또다시 읽은 다음에 비로소 무릎을 탁, 치며 아하, 옌롄커의 독특한 문법이 이렇구나, 감을 잡을 수 있었으니, 나도 참 늦게 깨닫는 형광등이다.

  옌롄커는 1958년, 소위 58년 개띠 작가. 중국의 20세기는 청나라가 망하고 민국과 대일전쟁과 내전을 거쳐 1949년에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이후 마오 정권에서 대약진운동, 대기근, 문화혁명, 개혁개방에 이르는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시간을 보냈다. 급격한 역사적 변혁 속에 상대적으로 문화적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어서, 아방가르드 문학을 지칭하는 선봉先鋒문학은 80년대 들어와 마윈, 위화, 쑤퉁 같은 이들의 독특한 문체의 실험으로 시작했다고 중국의 바이두 백과는 설명한다.

  내가 중국의 ‘선봉파’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얼마 안 되었다. 위화, 쑤퉁, 마윈 같은 작가의 독특한 문체 정도는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수준이라 여겨서 그저 중국스럽다, 뭐 이런 정도로. 그래도 소설하나는 참 재미나게 썼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그런데 난데없이 등장해서 내 귀싸대기를 후려친 작가가 있었다. 찬쉐. 이이의 책을 읽고 정신을 차릴 수 없어서 잘 쳐다보지 않는 ‘해설’을 보니 찬쉐를 일컬어 ‘선봉파’의 일원, 또는 기수라고 했다. 음. 그렇군. 그렇다고 당장 찬쉐한테 열광한 건 아니다.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한 찬쉐의 소설 가운데 한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다. 알겠는데, 찬쉐가 내 취향에도 맞고 카프카 또는 크러스너호르커이와 비슷한 것도 알겠지만, 그들과 비교하지 못할 만큼 선뜻 읽기가 부담스럽다. 찬쉐를 읽고 감탄한 다음에 옌롄커를 읽으니, 이이의 독특한 문체가 이제는 친숙한 거였다. 찬쉐가 선봉파, 그러나 위화, 쑤퉁, 마윈과 차별되는 선봉파라면, 옌롄커는 소프트한 찬쉐 진영의 선봉파 일원일 수 있겠다 싶다. 아, 서재 친구님들, 지나가다 들른 나그네들, 이 말 믿지 마시라. 완전한 아마추어 독자의 헛소리니 행여 이런 얘기를 옮기지 마시라. 심각하게 창피당할 살煞이 있으니.

  찬쉐와 옌롄커의 공통집합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초현실적 관점이라고 본다. 이 의견은 옌롄커의 <작렬지> 독후감에도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주인공의 상태에 따라 지형지물과 건물과 심지어 천기天氣까지 휘까닥 바뀌는 장면. <해가 죽던 날>에서도 이런 표현이 자주 출몰한다. 찬쉐의 작품에서도 연인의 마음에 따라 6층 아파트가 갑자기 45층 스카이라운지로 변하기도 한다. 미리 염두에 두고 읽으면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을 터.

  <해가 죽던 날>에서는 집단 몽유 증세가 발현한다. 집단 몽유? 그렇다. 이미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사탄 탱고>와 <저항의 멜랑콜리>에서 경험했던 바이다. 개별적 인간 한 명의 몽유 현상, 꼭 이름을 ‘몽유’라고 하지 않지만 그와 비등한 현상은 카프카 이후 숱한 작가들이 사용했으니 익숙할 터이고. 물론 집단 몽유 현상도 헤르만 브로흐 같은 이들도 간혹 사용해 그리 낯선 건 아니지만, 옌롄커의 집단 몽유는, 하이고, 읽어보면 참으로, 정말로 중국스럽다. 오해하지 마시라. 지금 “중국스럽다”라는 표현을 멸칭이나 비하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옌롄커의 중국스러움은 그가 천착해오고, 그 결과 숱한 노작들이 중국 내에서 판매 금지 판정을 당하게 만든 20세기 중국의 유니크한 환경에 대한 지독한 은유니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해번의 카프카>에서 그랬다. 세상의 모든 것은 메타포라고. 그러나 그는 중국의 현대사를 메타포로 한 방에 조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반면에, 옌롄커는, 했다.

  (오늘 서문이 왜 이렇게 장황해? 논문 쓰니?)


  중국의 중심은 중원이라고, 중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면 중원召南의 중심 자오란 현은 중국, 중화사상에 입각해 세상의 중심이다. 자오란 현의 가오톈 진鎭에 속한 가오톈 촌村이 작중 무대. 때는 바야흐로 음기와 양기가 마구 뒤섞인 삼복더위 음력 6월 6일 용포절龍袍節. 얼마나 덥고 건조한지 벌레들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가 몸이 한 마디씩 끊겨 가루가 되어버렸단다. 화자는 리녠녠李念念.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은 십대 초반의 소년이며 다분히 러시아 소설에 등장하는 유로지비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는 착한 심성이어서 사람들은 ‘바보 녠녠’이라고 부른다. 담을 마주한 옆집 아저씨, 베이징에 살고 있지만 가끔 집에 와서 작품을 쓰는 옌롄커 아저씨만 샤오녠녠(小念念)이라 불러준다. 오뉴월 뙤약볕이 얼마나 지독하고 모진지 온열질환에다가 더위로 인한 스트레스로 싸움박질을 멈추지 않아 요즘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수를 헤아리지 못해 녠녠의 집인 ‘신세계 장례용품점’은 옷장 안에서 벌레가 슬고 있던 재고마저 몽땅 팔려 나가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아버지 리톈바오李天保는 15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키지만 천둥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게 다다. 반면에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괜찮은 용모를 가지고 있으나, 안타깝게 젊어서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전다. 어머니는 마음 깊은 곳에서, 만일 자신이 다리를 절지만 않았어도 좋은 사람이기는 하더라도 결코 남편, 리톈바오하고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는 회한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아느냐고? 5백쪽이 넘는 분량의 소설에서 한 번쯤 이렇게 말을 하지 않았겠어? 아니더라도 가오톈 진 최고 부자의 누이동생이라면 당연한 거다.

  외삼촌 샤오邵는 18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에 화장장을 운영한다. 맞다. 죽은 사람을 불살라 뼈만 남기고 그걸 쇠몽둥이로 빻아 골분으로 만들어 유족에게 건네는 사업, 당시 중국의 장례의식은 거의 전부 매장이었지만,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사람이 죽을 때마다 매장을 하면 나중에 국토가 전부 무덤이 될 것이 틀림없어서 당국은 매장을 금지하고 화장으로 전환했다. 게다가 공산 전체주의 시절이었으니 시책은 즉각 시행했다. 하지만 시골 사람들이 이제 막 죽어 슬픔에 싸인 자식들이 부모를 어디 쉽게 화장을 할 수 있었겠을까? 가장 중요한 “남의 눈”이 보고 있는데 말씀이지. 그래서 녠녠의 외삼촌 샤오 화장장장火葬場長은 매장 사실을 고발한 사람한테 4백 위안의 보상금을 지불하겠다고 광고를 했고, 당시 선풍적으로 짓기 시작한 기와집이나 이층집을 꿈도 꾸지 못해 장가들기도 벅찼던 짧은 키의 리톈바오가 정말로 동네 사람들의 불법을 밀고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모은 돈으로 남부럽지 않은 기와집을 번듯하게 올린 직후에 샤오 화장장장의 키 큰 누이를 아내로 맞을 수 있었던 거였다.


  화장 시설 초기라서 요즘같이 전기로電氣爐가 아니고 시신에 석유를 뿌린 다음에 불 태우는 방식이었는데, 사실 말이 좋아 화장이지, 비위가 약하신 분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불의 온도가 높지 않아 수분과 단백질과 지방으로 구성된 고기를 태우는 일하고 그리 크지 않아서, 태우는 과정에 사람의 기름이 졸졸 흐르게 된다…고 한다. 외삼촌 샤오 장장은 이 시신 기름을 모아 드럼통에 담아 현과, 향과 성의 여러 공장에 내다 팔아 부수입을 챙겼는데, 사람의 기름이야말로 참으로 다양한 방면으로 재가공하거나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매우, 매우 우량한 자재/재료였단다. 조금 역겨울 소지가 있어서 사람, 시신의 기름을 사용하는 용도는 소개하지 않겠다.

  리톈바오의 아버지도 죽었다. 예전에 당연히 극비리에 매장 사실을 신고했음에도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리톈바오가 자기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자고 아예 나발을 불기 시작했고, 톈바오는 죽은 자기 아버지를 남의 도움 없이 직접 업어서, 한겨울에 화장장까지 옮기다가, 동네 사람들이 이를 가여이 여겨 사실은 오해가 아니었지만 오해인 줄 알고 오해도 풀 겸 합심해 할아버지 시신을 화장장까지 운구해 화장을 시작했다. 톈바오는 이때 처음으로 시신을 태울 때 시신 기름이 나오는 것과, 그것을 모아 비싼 값에 판다는 걸 알게 되고 쇼크를 먹어, 손위 처남, 그러니까 샤오 장장에게 시신 기름 전량을 자기가 사겠다고 선언했다. 샤오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다리를 저는 누이의 복지를 위해 무척 싼 돈만 받기로 하고 이후 1천 위안 이상으로 가격이 올랐음에도 십년이 넘도록 같은 가격으로 전량을 매부에게 넘겼다. 리톈바오는 그걸 다시 좋은 가격으로 팔아 부자가 되는 대신, 바러우 산맥의 줄기로 짐작되는 폐광에 십년이 넘도록 모아 두었다. 당연히 나중에 처리하겠지. 어떤 용도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십년 세월동안 죽은 사람들의 기름이니 어찌 함부로 쓸 수야 있겠는가?


  하여간 그해 음력 6월 6일에 가오톈 진에서 몽유는 시작했다. 샤夏씨 아저씨의 아버지가 꿈 속에서 도랑에 빠져 익사하는 것으로 시작해 숱한 사람들이 소환을 당하는 것처럼, 향촌의 진과 푸뉴산 산맥을 이어 곳곳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꿈 속에서 떠돌기 시작했다. 세상과 천하가 전부 몽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소설 속의 허구겠지만, 이런 몽유 현상이라니. 1100년 이래로 가오톈 진에서 몽유하는 사람은 매년 여름마다 있었지만 이렇게 집단으로 몽유하는 건 듣느니 처음이고 보느니 처음이었다.

  옌롄커 좀 읽어서, 집단 몽유로 현대 중국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이 은유의 규모가 실로 경악스럽다. 처음엔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는 감각하지도 못하고, 잊은 지 오래된 저 까마득한 시절의 바람, 경험, 후회 같은 것을 꿈 속에서 실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사고도 나고 진짜로 죽기도 한다. 물론 그럴 때마다 녠녠의 장례용품 상점은 호황을 누리지만. 그러나 몽유가 퍼지고, 진의 많은 사람들이 몽유로 인해 일탈행위를 하는 것을 본 ‘깬 시민’들은 몽유를 핑계로, 자기도 몽유 중이라고 칭하며 절도, 강도, 약탈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정의의 사나이 리톈바오와 그의 아들 리녠녠은 별의 별 수단을 다 해 잠든 사람들을 깨워 강도와 약탈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집, 상점을 지키라고 하지만, 거대한 몽유의 손톱은 심지어 작가 옌롄커에게도 마수를 뻗친다. 옌롄커는 작품을 쓰기 위해 스스로 몽유를 선택한다. 극소수의 누군가한테는 몽유가 잃어버린 꿈과 생존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반면에 거의 모든 사람한테는 집과 재산을 털리고, 육체까지 잃어버리는 재앙으로 다가온다. 실제로 진 밖에 사는 사람들은 쇠붙이와 몽둥이로 무장을 하고 진을 약탈하기 위하여 마치 좀비 집단처럼 진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키 작은 리톈바오와 그의 아들 샤오녠녠은 어찌할 것인지. 몽유하는 자와 좀비. 비슷하다. 그러다가 몽유하지 않는 자와 좀비도 비슷해진다. 사는 게 다 그렇다. 옌롄커, 이 자는 미친 거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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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2-09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끔 그런 책이 있긴하죠. 내내 이거 뭐지? 하다가 어느 날 이런 거였어? 하며 눈이 떠지는 책. 그러면 머리가 맑아지면서 막 읽고싶은 책! 아, 저는 언제 이런 체험을 해 봤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형광등 이라뇨. 당치않으십니다. ㅠ 근데 독서가 일천한 저는 지금 이 책을 읽으면 안 될 것같네요. 나중에 한번 도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Falstaff 2024-12-09 16:1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 형광등 맞습니다.
별 님도 언젠가는 옌롄커를 읽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레이스 2024-12-09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 옌렌커를 왜 이리 많이 사놨는지... 누군가에게 영업당했겠죠? ㅎㅎ
찬쉐도 당황스러웠지만 리뷰 쓸 때쯤 끄덕이듯 옌 렌커도 그럴듯 하네요.^^

Falstaff 2024-12-10 04:13   좋아요 1 | URL
사 놓으셨으면 조만간 읽으시겠지요. ㅎㅎ
이 양반이 좀 거칠어서 저도 처음에 적응하기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중세의 가을 동서문화사 월드북 144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희승맑시아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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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책을 8년 5개월 만에 읽었다. 그때 쓴 독후감을 다시 보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좋다, 얼굴에 철판 깔자. 시간이 지나면 같은 텍스트를 읽고 감상이 바뀌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사용하는 말버릇이 바뀌는 것도 자연스러울 터, 괜히 창피해하지 말자.

  중세. 1차 십자군 전쟁부터 시작해 르네상스 시기 전까지. 암흑의 시대라고 일컫는 5백년. 기사도라는 이름의 허례와 왕실, 귀족의 사치를 위하여 모든 사람들을 지옥의 고통으로 협박하며 노예생활을 강제하던 시기. 오직 죽은 다음에야 어린 백성들이 누릴 수 있는 천국의 행복을 미끼로 전쟁과, 약탈과 중세를 서슴지 않았던 야만의 시절을 이들은 살았다. 그러나 중세를 살던 당사자들은 “탄생, 결혼, 죽음과 같은 주요 사건들은 성스러운 의식에 따라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당연히 아주 적은 소수의 왕가와 귀족들에 국한해서 그랬다는 것이리라. 그들의 신비롭게 빛나던 출생으로 시작해 결혼을 통과해서 죽음까지 이어지는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과 틀에 박힌 말의 되풀이, 무수한 의식과 서식, 은근하게 진행되는 사후 지옥행에 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다. 오직 부와 영예에 집착하는 탐욕만이 횡행한 유럽의 5백년. 우리는 그것을 중세라고 부른다.


  동서문화동판에서 찍은 《중세의 가을》. 이 책을 번역한 이희승맑시아가 누군가? 이 출판사에서 번역작업을 한 많은 사람이 이미 고인이 되었으며, 그리하여 오래전에는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을 일본어 중역이 아니었을까 하는 증명되지 않은 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희승맑시아는 2010년에 고려대대학원 불문과에서 공쿠르 형제의 작품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2010년 대학원 졸업이면, 군대 3년을 포함해도 21세기에 대학에 입학했다고 짐작할 수 있어서, 1980년 이후에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대학원생 시절에 이 《중세의 가을》을 번역하여 초판을 2010년 12월에 출간하니, 독자는 20대 청년이 작업한 것을 읽은 거다. 여기까지는 직접 확인했다. 이후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희승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마르시아Marcia라는 가명 또는 소위 닉네임으로 강남의 어학 학원에서 강사를 했다 한다. 한 번 더 말한다. 어학 학원 강사는 인터넷에 흐르는 정보이며, 확인한 바 없다. 어쨌거나 이래서 역자 이름이 ‘이희승맑시아’가 된다는 것.

  그런데 본문이 끝나고 뒤에 붙은 해설 “하위징아의 생애와 《중세의 가을》”은 이렇게 시작한다.


  “1966년 9월 27일 아침,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네덜란드 북부의 중심 도시 호로닝언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하위징아의 고향을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계획한 네덜란드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p.514)


  무려 61쪽에 달하는 해설은, 아쉽게도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았다. 8년 전에 나는 당연히 이희승맑시아라는 노학자가 1966년에 하위징아의 고향을 방문했었겠거니 싶었다. 1966년이면 우리나라 박정희 정권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마감하던 해인데, 하위징아라는 사학자를 연구하기 위해 귀한 달러를 써가며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정도니까 박정희 군사정권도 인정했던 상당한 권위자, 석학이거나, 이름으로 비추어 보아 우리나라 출신의 유럽이나 미국에 사는 학자 정도로 생각했다. 어때, 그럴 듯하지? 지금은 더 이상 아니다. 누군가가 쓴 《중세의 가을》의 해설/논문을 그대로 혹은 61쪽으로 편집해 번역한 것으로 본다. 원본이 누구의 해설/논문이냐고? 내가 알면 귀신이게? 짐작도 못하겠다.


  책은 “중세의 가을” 즉 중세가 쇠퇴기에 접어든 15세기에 집중한다. 물론 15세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당연히 중세가 싹튼 시절부터 중세 안에 있었던 거의 모든 정치, 전쟁, 궁전, 사랑, 기사도, 신앙, 예술과 미학 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가운데 5백년, 물론 이전 5백년과 이후 5백년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모든 행위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히 신앙이었다. 신앙 오리엔티드 에이지. 모든 길은 신앙으로! 하다못해 사랑의 표현까지 그렇다. 시인 페노렐의 노래:


  사람들이 ‘신의 어린 양(Agnus Dei)’을 읊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성 크레페(Saint Crepais)에게 믿음을 나타내고

  교회 두 기둥 사이에서

  그녀는 나에게 달콤한 페(paix믿음)을 주었네.

  나는 이 ‘평화의 입맞춤’에 굶주려

  사랑에 빠진 나의 심장은

  그녀가 너무도 빨리 멀어지자 당혹스러웠다네.”  (p.183)


  위에서 페paix는 평화의 입맞춤으로 사람들이 차례로 작은 조각(성물이겠지)에 입맞추는 것을 뜻하는데, 키스를 하기 위해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혹시 모르지, 중세 시절에는 부부가 침대 위에서 합법적인 성생활을 즐기기 전에 침대 머리맡에 무릎을 팍 꿇고 두 손으로 모아, “오 천주여, 지금부터 부부가 간음하고자 하오니 제발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고 앙망기도를 했을 지도.

  농담 같다고? 물론 농담이 7할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나는 8년 반 전에 독후감에서 이렇게 썼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아직도 건설중인 독일 쾰른 성당과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석조 고딕 건물에 현혹되는 아시아인의 유럽동경. 나는 그걸 정말 아쉽게 생각한다. 기독교의 신이 이루 셀 수 없는 노동자들, 자기가 만든 아들 딸들의 생명을 죽여가며, 그들로부터 착취한 자금으로 만든, 그토록 화려한 신전에서 자신을 찬미하기를 바랬을까?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성서를 읽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어미의 태내에서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삶의 고해를 견뎌내고 있는 동안 질투의 하느님은 어느 다른 신보다도 화려한 성막을 짓게 하고, 솔로몬 임금 시절엔 눈부시기 견줄 바가 없는 성전을 금과 은으로 치장해 건축했으며, 제사장에게 에봇이라고 칭하는 당시 수준에서 최고로 화려한 제사 복장을 갖추게 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황소 2만2천 마리와 양 12만 마리를 태웠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이 거대한 무리들이 불에 타는 동안 발생하는 미세먼지를 흠향하고 있었던 거다. 8년 전에 나는 순진했다.

  이들의 후예가 바벨탑보다 약간 낮은 높이로 예배당을 지으면서 백성들한테는 사후 천국, 생전 지옥의 진리를 설파한 시절이 바로 중세. 프랑수아 비용의 《유언집》에 어머니를 기리며 지은 <성모의 발라드>에 나오는 대목.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가련한 노파,

  글자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네.

  나는 교회당 안에서 바라보네.

  그림 속의 천국에는 하프와 비파가 있고,

  지옥에서는 죄인이 유황불에 고통받네.

  이는 나를 두렵게도 하고, 또 즐겁고 기쁘게도 한다네. (p.248)


  지옥의 유황불이 없는 중세를 모든 권력자, 왕실, 귀족, 성직자는 지탱할 수 있었을까? 유황불 없는 지배를? 어미의 태에서 나오자마자 지옥의 유황불은 시작하고 있었다. 백성의 삶 자체가 지옥의 유황불이었으니까. 그러나 학습만큼 무서운 것도 없어서, 이들은 죽은 후 영속하게 될 사후세계에서 지옥의 유황불에 탈 걱정만 했을 뿐. 이런 맹목적인 신앙은 저절로 성물 숭배를 발생시켰고, 어이없게도 가장 위대한 성직자,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조차 죽은 후의 치욕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중세 말기 백성들의 성물 숭배, 그건 예를 들어 여태까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 명백한 최후의 만찬에 쓴, 사용했다고 알려진 성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오른쪽 가슴, 간을 찔러 검은 피를 흘러내리게 했던 성창, 마지막으로 입었던 (십자가에서 정말로 마지막으로 입었던 고쟁이 말고) 겉옷인 성의를, 다만 한 조각이라도 갖고 싶어하는 어린 백성들의 숭배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중세 시대엔 그게 꼭 일반 백성이 아니라 귀족들도 비슷한 생각이 있었던 거였다. 이후 세월이 지나 그리스도 성물 말고, 성인으로 축성된 성직자들의 유물, 더 나가서 심지어 유골, 뼛조각 하나라도 갖고 싶어하는 성향이 거의 폭력적인 수준으로 증가해 기원 11세기를 여는 해인 1000년 무렵 움브리아Umbria 산속에 사는 사람들은 성 로뮈알드를 때려죽여 그의 시신 일부나마 집안의 신주단지 대신 갖고 싶어 했단다. 여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걸려든 거다.

  “1274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탈리아 포사누오바Fossa nuova 수도원에서 숟가락 놓았을 때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값비싼 (이 단어를 다시 확인했다, ‘값비싼’이라 했다. 간혹 팔아먹기도 했던 모양이다.) 성유물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스승의 몸을 글자 그대로 가공, 보존했다고 한다. 목을 자르고 그 시체를 삶아 조리했던 것이다.”  (p. 250)


  근데 왜 책의 제목을 《중세의 가을》이라고 했을까? 앞에서 이야기했다. 하위징어가 단전에 힘을 모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15세기, 이 암흑의 절정기에서 암흑의 다음 단계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거다. 르네상스, ‘르네쌍스’는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종로1가에 있던 고전음악 감상실 이름이었지만, 하여간 르네상스의 태동은 “당연하게도” 중세시대에 발아하기 시작했던 것. 그것을 포착하기 위한 하위징아의 서술이 《중세의 가을》이리라.

  책 좀 읽는 독자들은 동서문화사 또는 동서문화동판을 좀 우습게 아는데 사실 이건 출판사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어쨌거나 믿음을 주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이 책, 놀랍게도 20대 역자 이희승맑시아의 젊은 문장으로 읽는 《중세의 가을》은 매우 매끄럽다. 간혹 “너무” 매끄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연히 역자의 우리말 실력을 높게 평가해야 하겠지만, 원래 텍스트를 쓴 하위징아의 문장 역시 놀라울 정도라고 한다. 나는 안다. 법학자, 사학자 가운데 글 써서 먹고 사는 시인, 작가보다 훨씬 명문장을 휘날리는 인물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것을. 요한 하위징아도 글 좋은 사학자였던 거였다.

  읽어 보시라. 잘 몰랐던 세계를 보는 눈이 떠지는, 깜박 놀랄만한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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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12-06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옌롄커, <해가 죽던 날>
화요일. 제럴드 머네인, <평원>
수요일. 에나 번스, <노 본스>
목요일. 서정춘, 《귀》
금요일. 천쓰홍, <귀신들의 땅>

잠자냥 2024-12-06 07: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8년 5개월 만에 또 읽으셨군요?! 저도 이 책 다른 색깔로 읽었는데 번역문, 하위징아문장 둘 다 매우 매끄럽다는 데 동의합니다…. 생각보다는 재밌었던 책! 해설은 … 아마도 폴 님 추측이 맞지 않을까 싶네요!

Falstaff 2024-12-06 07:52   좋아요 2 | URL
이 책 전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앞으로 10년 뒤에 읽으면 또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책입니다. ㅎㅎㅎ

stella.K 2024-12-06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오늘 리뷰는 으리으리하네요. 알라딘 서재 초창기 때까지만 하더라도 언제고 한번 읽어봐야지 한 걸 지금은 아예 잊고 살다시피했는데 막 읽고싶게 만드네요. 역자가 거의 천재끕 수재였네요.
그래도 요즘 같이 책값 비쌀 때 동서문화사만한 책이 없지 싶은데 말이어요. 삼중당 문고가 아직 건재했으면 쌍벽을 이루지 않았을까요? ㅎㅎ

Falstaff 2024-12-06 15:29   좋아요 0 | URL
윽, 으리으리하긴요. ㅎㅎㅎ 이 책 재미있더라고요. 오죽하면 제가 두 번 읽었겠습니까.

yamoo 2024-12-06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문지판 현대의지성 시리즈로 갖고 있읍죠~ 끝내주는 책이라 아니할 수 없어요!

Falstaff 2024-12-06 15:29   좋아요 0 | URL
옙. 역사 공부 말고 그냥 재미로 읽어도 훌륭한 책입니다!

갱지 2024-12-06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에 예전부터 일본본 번역으로 유명(?)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일본 걸 가져오던, 막 찍어내던, 결과적으로는 다른 곳에선 아예 낼 생각이 없는 책들을 내니까-.

Falstaff 2024-12-06 15:32   좋아요 1 | URL
우스운 것이 일어중역이 오히려 읽기가 더 수월한 경우가 참 많다는 겁니다. 동서문화동판의 우리말 번역도 원문의 내용을 다음으로 하면, 우리말 하나는 직역본보다 월등한 책이 많습니다. 이 출판사 말고는 읽기 힘든 것도 많고요. <고요한 돈강> <장 크리스토프>는 아직도 이곳 말고는 전작 번역 구경하기 쉽지 않을 걸요?
 
잘못 태어난 자를 위한 달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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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후감을 쓰기 위해 화면을 열어놓고 시작하기가 쉽지 않아 한참을 망설였다. 어떻게 첫 문장을 시작할까? 읽으면서 계속 떠오르는 오닐의 다른 극작품 <밤으로의 긴 여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쓴 작품이라서 그럴까, 등장인물의 분위기가 유사해서, 특히 3막, 두 주인공 제임스 타이론 2세와 조시 호건의 장면이 <밤으로의 긴 여로>의 어머니와 제이미를 연상시켰다. 독자의 가슴을 후벼 판다는 뜻이다. 특히 나처럼 알코올 의존증세가 있는 독자들은 더 그렇지 않았을까.


  주요 등장인물은 세 명. 크지 않은 토지를 소작하여 농장을 운영하는 필 호건 씨와 그의 딸 조시. 그리고 땅의 주인이자 단역 연극배우로 활약중인 마흔 살의 독신남 제임스 타이론 2세. 이외에 호건 씨의 막내 아들 마이크와 농장의 울타리를 이웃한 또다른 지주 스테드먼 하더가 잠깐 등장한다. 그러니까 소작농 호건 씨와 딸, 그리고 독신 지주 제임스 사이의 드라마인데, 유진 오닐의 후기작 답게 참 절절하다.

  오닐 자신이 네 번의 퓰리처 상과 노벨 문학상을 받았음에도, 대단히 우울한 가족사를 짊어졌다. 호텔에서 태어나 호텔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대중적인 연기를 하던 떠돌이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훗날 모르핀 중독자가 된 어머니 사이에서, 선천적으로 알코올 의존에 의한 우울증 인자를 가지고 태어났던 것 같다. 형 제임스는 아버지의 부재와 알코올 중독이 가정이 불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라고 아버지를 크게 원망했으며, 부모의 사랑을 받는 막내 유진에게 질투와 사랑이란 애증을 갖고 있다가 결국 많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 삶을 끊어버리고 만다. 오닐은 또한 자신의 알코올 의존증과 이에 따른 우울증 등으로 세 번의 결혼을 했다. 맏아들 유진 2세는 예일대 그리스 문학 교수를 하다가 역시 가족의 유전자 안에 도사린 알코올 의존증을 이기지 못해 마흔 살의 나이로 자살했고, 둘째도 헤로인 중독으로 부모에게 버림받아 자기 가솔들과 극빈하게 살다가 역시 자살해버렸으며, 막내딸은 열여덟 살 때 자기보다 서른 여섯 살이 더 많은 영국의 위대한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과 결혼해버렸다.

  50대로 접어든 유진 오닐은 후기 시대로 들어간다. 이제 무대에서 각광을 받고, 각종 기관에서 상을 받는 외적 출세에 관해서는 마음을 조금 접었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1940년대 초반을 말하는데, 당시 나이로 50대면 이제는 인생을 다시 돌아보고 지난날을 후회하며, 가끔은 시절 때문에, 내가 시절에게, 시절이 내게 가했던 가해를 떠올릴 때마다 부르르 진저리를 치기 시작했을 수 있다. 그랬던가, 그는 자신의 지난 세월, 특히 “가족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와 용서”를 염두에 두기 시작했고, 이런 환경에서 위대한 극작 <밤으로의 긴 여로>를 만들었으며, 자신의 진짜 체험이 들어갔기 때문인지 죽고 25년이 흐르기 전에 발표를 하거나, 공연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으나, 죽은 지 3년 만에 희곡은 출판되었고, 스웨덴에서 초연의 막이 올라, 오닐이 사후에 네 번째 퓰리처 상을 받는 등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킨 것은 물론이고 이후 미국, 미국을 건너 전 세상 극장가에 새로운 창작 방식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잘못 태어난 자를 위한 달>을 읽으면서 <밤으로의 긴 여로>를 연상하는 일은 사실 어쩔 수 없다. <… 여로>에 등장하는 알코올 의존증 환자 어머니와 아들 제임스의 망가지는 모습이 <잘못 태어난 자를 위한 달>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소작인 호건 씨와 지주 제임스의 형태로 바뀌기는 하지만. 호건 씨는 제임스 씨와 자주 얼굴을 마주치는 곳, 즉 집의 바깥, 주로 술집에서는 이해심 많고 사람 좋고, 활달한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제임스의 대사에 의하면 그렇다는 건데, 집에서는 독선적이고 아들한테 구타도 서슴지 않는 폭군이다. 딸 조시 호건만 빼고. 이 조시 호건이 오닐의 작품 가운데 이례적인 주연급 여성이다.

  카슨 매컬러스의 고딕 작품에서 주로 등장하는 키가 많이 큰 여성처럼 조시는 180센티미터의 키에 몸무게도 81킬로그램에 달한다. 크고 단단한 유방, 엉덩이와 허벅지하고 비교하면 날씬하게 보이는 굵은 허리. 특별히 근육은 보이지 않지만 엄청나게 튼튼한 길고 매끄러운 팔. 어느 남자보다 힘이 세서 보통 두 명의 남자가 할 수 있는 노동을 혼자 거뜬하게 해치운다. 그러나 조시에게 남자 같은 면이라고는 없다. 천생 여자. 거친 머리카락과 해를 많이 받아서 주근깨가 촘촘하고 그을렀지만, 검푸르게 푸른 큰 눈동자가 아름다운 느낌을 주고 특히 미소가 매력적이다. 옷도 대충 일하기 편한 싸구려 원피스를 입었고, 일할 때는 대개 맨발 차림이다.

  이 거친 야수 같은 아가씨는 집안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는 독재자 아버지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맞붙어 주먹다짐을 한다 해도 도무지 완력으로 당할 수 없고, 말로도 마찬가지다. 주로 1막에서 호건 씨가 되로 주면 조시가 말로 되돌려주는 형국이다. 조시는 이제 아들 가운데 하나 남은 막내 마이크에게 마이크도 모르게 짐을 싸서, 아버지 침대 밑에 숨겨놓은 돈을 몽땅 꺼내 주며, 너도 나이가 찰 만큼 찼으니까 일찌감치 도시로 가 일을 하고 있는 형을 찾아가라고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은 자기도 알고 있는 큰 덩치의 여자 괴물이라서 관심을 받을 수도, 사무실에 일자리를 얻거나 괜찮은 남자의 배우자가 되어 아이 낳고 살림하는 주부로 살 수도 없으리라, 그래서 아버지 죽을 때까지 일을 돕다가 이후에 스스로 농장을 꾸려 사는 수 말고는 다른 길을 찾지 못하리라 여기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조시는 마을의 많은 남자와 만난다. 그냥 만날 뿐이다. 그러다보니 마을에서는 조시 호건이 마을의 모든 총각들은 물론이고 유부남들도 숱하게 잡아 드셨다고 소문이 났다. 조시는 NCND,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킁, 코바람만 한 번 불뿐이다.


  이제 땅과 집의 소유자인 제임스 타이론 2세가 등장한다. 유진의 자살한 형의 이름과 같다.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한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며 사는 캐릭터다. 마흔 살 먹은 잘 생긴 남자. 농장에 내려오지 않을 때는 브로드웨이에서 분명 단역일 것 같은 배우로 활동하며 여성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조시도 그렇고 제임스도 그렇고, 그렇게 보인다는 거다. 많은 여성 편력은 여성을 판단하는 높은 수준의 시각을 갖추게 했고, 이런 제임스가 보기에 180센티미터, 81킬로그램의 전혀 예쁘게 보이지 않는 괴력의 소유자 조시가 아직 훼손되지 않은 순정을 가지고 있고 소위 ‘따뜻한 여성성’을 보일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채며, 접근하고 싶어 한다.

  때마침 울타리를 마주한 이웃 농장주 하더와의 사이에 불화에 빠진 호건 씨는 하더가 비싸게, 적정가의 두 배가 넘는 가격으로 자기 소작지를 제임스한테 사서 나를 쫓아내려는 건 아닐까 싶은 ‘없는 자의 피해의식’에 싸이게 되고, 탁 보니까 제임스가 자기 딸한테 마음이 있는 것도 같으니, 둘을 혼인의 굴레로 얽어매면 어떨까, 궁리하게 된다. 그리하여 더러운 작전을 지시하고, 역시 농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같은 걱정에 빠진 조시도 이에 동의하게 되는데, 밤에 제임스와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조시는, 그가 오면 술을 권해 아예 인사불성으로 만들어, 자기 침대에 올려 함께 자는 시늉을 하면, 딱 시간을 맞춰 아버지와 증인들이 총을 들고 방에 난입하면 결혼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

  그런데 제임스를 보자. 어머니와 함께 서부를 여행하고 있다가 호텔에서 어머니가 뇌질환으로 급사해버리고 말았다. 이 시절에 제임스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고 있어서 몇 년 간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던 시절. 그러나 어머니의 시신을 화물칸에 태우고 바로 앞 차를 전세내 혼자 동부로 오고 있으면서 어떻게 주체할 수 없는 상실감에 휩싸이고 만다. 하나 남은 가족 어머니의 황당한 주검을 싣고 기차 안에서 제임스는 드디어 입술에 술을 댔으며, 함께 술을 마셔줄 짝을 찾기 위해 객석을 돌아다니다가 차장에게 제제를 받아 다시 돌아오기도 했지만 기어이 다시 나가서 늙고 못생긴 창녀 하나를 데려온다. 그래서 동부까지 오는 내내 며칠 동안 위스키에 절어 지내다가 너무 취해 어머니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한 아들. 어머니라는 형상, 또는 이미지 혹은 의지가지로 그렇게 큰 여성 180센티미터에 81킬로그램이 넘는 고딕식 미인을 선택한 것일까? 나는 그렇게 본다. <밤으로의 긴 여로>와 동시절에 쓴 마지막 작품이라서. 가족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와 용서의 측면에서.

  제임스는 알았다. 누구에게 듣거나, 무슨 증거가 있어서 안 것이 아니라 그냥 알았다. 동네에서 가장 많이 구설수에 올랐으나 전혀 까딱도 하지 않는 조시 호건, 이 아가씨가 아직 동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제임스가 조시의 집으로 오겠다는 밤, 그는 오지 않고, 아버지가 먼저 와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그리하여 오해가 깊어진 조시는 급기야 원래 계획대로, 술을 먹여 억지로 동침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으로 약속을 하는데, 늦게나마 제임스가 조시의 집으로 걸어온다.

  이렇게 해서 앞에 내가 대강 이야기한 제임스의 스토리가, 점점 취해가는 와중에 노출되는 것이며, 그러나 그 끝은 동침의 침상 위가 아니라 방으로 가는 계단에 앉아, 제임스가 머리를 조시의 크고 단단한 유방에 기댄 상태에서, 자신과 가족,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연민과 용서를 바라는 긴 독백 또는 고백을 하는 거였다. 이렇게 제임스가 아닌 유진 오닐은 한 발, 한 발, 자신의 마지막으로 가는 걸음을 걷고 있었다. 이후 그는 과도한 알코올 의존증에 따른 수전증 혹은 그때까지 병명이 알려지지 않았던 파킨슨 씨 병으로 그의 마지막 날까지 작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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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2-05 18: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24 서재의 달인에 선정되신 거 축하 드려요
앞으로도 좋은 작품 리뷰 많이 남겨 주세요~~~

오늘도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24-12-05 18:28   좋아요 1 | URL
에흐... ㅋㅋㅋ 쑥스럽습니다. 은하수 님이야말로 저보다 무척 높은 단계의 달인이신 걸요!

은하수 2024-12-05 18:39   좋아요 2 | URL
무슨 그런 과찬의 말씀을요^^
올 한해 덕분에 무척 즐거웠답니다. 좋은 책도 많이 알게 되어 더없이 감사하답니다^^

coolcat329 2024-12-05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점심먹으며 읽다가 다 못 읽고 이제서야 다시 완독했습니다. 항상 작품 이야기 시작하기 전 작가의 삶에 대해 브리핑을 해주시니 참 편합니다.
유진 오닐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 저 알콜의존 우울 유전 인자가 참 야속하네요. ㅠㅠ 결국엔 이겨내지 못하고 고생하다 떠났으니...
조시가 <슬픈 카페의 노래>의 어밀리아랑 정말 비슷한 거 같아요.
이 희곡, 진짜 연극으로 본다면 저 고백장면 많이 슬플 거 같아요.

Falstaff 2024-12-06 04:29   좋아요 0 | URL
예. 반 점짜리 별이 필요합니다. 이거 읽고 바로 별점을 매긴 앱에 별 네개 반으로 했었습니다. <...여로>가 있어서 차마 다섯으로 올리지 못했었던 거 같군요.
좋은 책은 어딘가에 늘 있더라고요. ㅎㅎㅎ
 
진홍빛 하늘 아래
마크 설리번 지음, 신승미 옮김 / 나무의철학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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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크 설리번은 미국 보스턴 변두리에 있는 메드필드 출신의 58년 개띠 아저씨로 198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말끔하게 면도한 흰 와이셔츠의 미국 남자,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사하라 사막에 가서 투아레그 족 유목민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도 했다. 귀국해서 저널리즘 일을 조금 하다가 서른 살이 되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주로 미스터리, 서스펜스 물이었으며 나름대로 꽤나 인정을 받은 걸로 보인다. 이 책 <진홍빛 하늘 아래> 서문에 따르면, 마흔일곱 살이던 2006년 초엔 그동안 글 써서 번 돈을 몽땅 까먹고 인생 최악의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고 한다. 친동생이 과하게 술을 마시는 바람에 세상을 떴고, 소설은 독자들에게 외면 받았으며, 업무상 분쟁에 휘말려 개인 파산을 신청할까 말까 기로에 서게 되어 차라리 고속도로를 달리며 적당하게 자살로 위장해 죽어버리는 것이 남은 가족들에게 보탬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니까 정말 막바지까지 몰리기는 했던 모양이다. 이때 몬태나 보즈먼에서 있었던 만찬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열일곱 살짜리 이탈리아 소년의 영웅적 이야기를 들어 소설로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그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곧바로 연락을 해서, 직접 이탈리아로 날아가 그를 인터뷰하기에 이른다. 동시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탈리아 상황에 대한 조사를 해, 영웅적인 소년의 활약을 통해 북이탈리아 지역의 세계대전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에 이르니, <진홍빛 하늘 아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책으로 설리번은 다시 기사회생하는 데 성공해 아직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모양이다. 잘 했다.


  작품은 1943년 6월 9일, 이탈리아 롬바르디 주의 주도 밀라노를 주무대로 펼쳐진다. 패션 명가 밀라노에서도 가장 첨단을 달리는 명품 가방가게 “레 보르세테 디 렐라”를 운영하는 포르치아와 미켈레 렐라 부부의 2남1녀 가운데 맏아들인 17세 키다리 소년 주세페, 애칭 ‘피노 렐라’가 주인공이다. 그보다 두 살 아래로 키가 크지도 않고 앞으로도 그리 크게 자라지 않을 예정이지만 깡다구 하나는 밀라노에서 당할 수 없는 청년으로 성장할 동생 도메니코, 애칭 ‘미모’의 형이자, 작품이 끝날 때까지 어린시절에 머물 치치의 큰오빠다. 이때까지 밀라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세계 전쟁이라는 이슈는 듣자마자 잊어버려도 상관없는 뉴스 기사에 불과했다. 재벌은 아니지만 부유한 명품 제조공장과 상점을 운영하는 유복한 가정의 여드름쟁이 피노는 아직까지 여자친구는 없었지만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나 실망이나 좌절하고는 거리가 먼 정의파였다.

  먼저 짚고 넘어가자. 마크 설리번이 주 특기로 다루는 장르가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물이다. 이런 장르 문학의 경우에 읽으면서 내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등장인물이 딱 두 가지 부류로 갈린다는 점이다. 착한 우리편, 나쁜 너네편. 이 책에서도 나치와 독일인,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 두체 무소리니를 두령으로 하는 파시스트는 한 명도 빼지 않고 전부 나쁜 너네편이고, 이에 비밀리에 대항하는 시민군과 인종을 가르지 않고 나치에게 핍박받는 사람들을 스위스로 피난시키는 가톨릭 종사자들은 모두 선한 우리편이다. 주인공 피노 렐라는, 읽으면서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정말로 피노가 겪은 일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자료를 수집한, 2차 세계대전 당시 북부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치열하지만 프랑스 전선에 가려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장면을 살리기 위해 당시 이탈리아의 중요한 인물들과 전부 직접 만날 기회를 얻으며, 그들로부터 정보를 제공받거나 훔칠 수 있던 것은 물론, 직접 전쟁의 중요한 장면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를 위하여 피노 렐라는 10대 초년 시절부터 이탈리아에 면한 남알프스 지역의 수목한계선을 넘는 고산지대까지 등산을 즐겼으며, 프로 수준급의 스키 실력을 가진 상태로 소설을 시작한다. 이후 알프스의 까마득한 암벽 가까이에 있는 교회 겸 남자기숙학교 카사 알피나로 피난을 가서 유럽 그랑프리 포뮬라 전 챔피언을 아버지로 둔 친구를 사귀어 그에게 놀라운 정도의 운전실력까지 보유한다. 185cm에 75kg으로 시작한 17세 소년은 키도 더 크고 근육도 빵빵해져 놀라운 완력까지 지니는 정의의 사나이로 변신하며, 이에 맞추어 주변 인물들도 모두 반 나치, 반 파시즘의 시민 저항군에 가세한다.

  주변인 가운데 중요한 사람으로 먼저 기숙학교 카사 알피노의 건장한 50대 레 신부와 신부의 수석 보좌관과 요리사 역할을 하는 보르미오 수사. 이들은 밀라노 산타마리아 나센테 성당의 일데폰소 슈스터 추기경과 긴밀한 연락을 하며 유대인을 비롯한 피난민들을 험난한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로 망명시키는 역할을 한다. 당연히 뛰어난 등산과 스키 실력을 가지고 있는 피노 렐라가 이들을 안전하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가면서 한 명도 낙오시키지 않고 국경을 넘겨주는데, 당연히 이런 작품에서는 모진 고난과 극복, 또다시 앞의 것보다 더 독한 고난과 극복을 반복한다. 이건 국룰이 아니라 세계적인 법칙, 이른바 ‘세룰’이니까. 지금 우리나라에서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는 <정년이>의 김태리도 그렇잖은가?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이다.


​  당연히 작가 마크 설리번이 1943년에 열일곱 살 청소년이었던 이탈리아 노인과 인터뷰했다는 건 믿는데, 그리하여 그가 주장한 걸 결정적으로 번복할 수 없어서 그랬는지, 작가도 매우 가톨릭 친화적이다. 당시 교황이 비오 12세.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배경으로 하는 카사 알피노의 정의로운 레 신부는 밀라노의 슈스터 추기경과 긴밀하게 협조를 하고 있으며, 추기경은 또한 레 신부의 유대인 망명 협조를 비오 12세에게 보고를 하여 교황도 이를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독자에게 이런 도움을 교황이 총괄했다는 암시를 줄 정도이다. 우리나라 가톨릭계에서도 2차 세계대전 당시 비오 12세와 로마 가톨릭이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큰 힘을 쏟았다고 광고하고 있지만,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 천주교사에서 조선인 신분의 영광스러운 첫 번째 주교였던 노기남이 추축국 일본제국을 미친듯이 찬양한 다양한 증거들을 연상하면 별로 믿고 싶지 않다. 또한 비가톨릭 쪽에서는 비오 12세와 히틀러의 협조 여부로 시비를 걸고 있기도 하다. 마침내 2차 세계대전 당시 비밀문서가 보관기일을 넘겨 열람이 가능하지만 아직도 이에 대해 명쾌하게 어떠했다, 라고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내 생각, 단지 정말 생각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말해보자면, 교단도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 유대인을 구하기도 했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히틀러에게 그래, 그래 하기도 했겠지. 그러니 내놓고 유대인 학살에 관해서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도 않았거나 못했지 않겠나 싶다. 나치군의 탱크와 장갑차가 바티칸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교황이라 해도 쉽게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을 수 있었겠어? 교황도 총 맞으면 죽거든. ‘진짜 용기’라는 거, 이거 아무나 내는 게 아니거든. 제사 지낼 때나 제사장이고, 교황이고, 사제이지 한낱 인간인 건 다 마찬가지거든.


​  밀라노에 미영 폭격기의 공습이 본격화하자, 피노의 부모는 아들 둘을 카사 알피노에게 피난을 보내고, 열여덟 살이 되기 몇 달 전에 피노만 다시 밀라노로 부른다. 이제 18세가 되면 이탈리아 정부는 피노를 파시스트 군대에 보내 독일의 대 소련 전선에 투입, 총알받이나 대포밥으로 삼을 것이니, 차라리 독일군 건설대에 자원입대해 전선이 아니라 후방에서 명을 보존하라고 강권한다. 도무지 말릴 수 없고, 비타협적인 명령에 몸이 익은 천생 사업가인 엄마 포르치아가 간단하게 선언한다. 넌 아직 미성년자야. 결정은 내가 한다. 넌 독일 토트 조직에 입대해!

  그리하여 피노는 전선 대신 이웃 도시의 중앙역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가 벌건 대낮에 공습을 당해 오른손 둘째와 셋째 손가락이 덜렁거릴 정도의 부상을 입어 잠깐 귀가조치를 받고, 귀가 첫날 마침 (고급 레지스탕스 지위에 있던) 외삼촌의 가죽 가게 앞에 서 있는 고장난 6륜 구동 다임러를 발견, 알프스에서 운전을 배울 때 함께 익힌 정비 실력으로 불과 몇 분만에 말끔하게 고쳐준다. 이게 누구 차인가 하면 회의를 할 때 히틀러의 바로 왼쪽 옆에 앉는다는 군수품 전권대사 한스 레이어스 장군의 전용차였다. 정부 돌리에게 가방 하나를 선물로 사줄까 하고 들렀다가 시동이 꺼져 화가 단단히 난 레이어스 장군은 그 자리에서 피노를 자신의 전용 운전병으로 고용한다.

  고민에 빠진 피노. 가뜩이나 독일군에 입대해 이두박근에 하켄 크로이츠 완장을 달고 다니는 것이 못마땅해서 탈영해 저항군에 들어갈까 고심하던 차에 이제 장군의 운전병이라니, 이게 뭔 일인가 싶어 잔뜩 부어올랐다. 그러나 그의 현명한 외삼촌 오스트리아 사람 알베르트는 이것을 천재일우라고 여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탈리아 전역의 물류이동에 관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는 레이어스 장군의 운전병이라면 누구보다도 고급 정보를 접할 기회가 많으니, 이제는 마음먹고 독일군의 정보를 빼오는 첩보원으로 일하라는 거였다. 그가 정보를 가져오면 모종의 루트를 통해 영국 정보국으로 송신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숱한 연합군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하면서. 책을 읽어가다 보면 정말로 그가 말한 장소에 미군과 영국군의 폭격기가 폭격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리고 이제 열여덟 살이 된 피노 앞에 피할 수 없이 등장해야 하는 숙명적인 스토리가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맞다, 연애. 레이어스 장군의 정부 돌리. 그녀의 집에 가정부로 있는 스물네 살의 여성이 누구냐 하면, 피노가 작년 이후로 애타게 찾고 있던 환상 속의 여인인 안나. 궁금하지? 그래, 그래. 시원하게 말해준다. 안나와 얼려 피노는 총각 딱지를 뗀다. 됐어? 그러나 잊지 마시라.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북부 이탈리아를 다룬 소설이라는 것을. 전쟁 자체에 이미 숱한 비극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도.


​  이야기 자체는 재미있다. 그래서 속도도 팍팍 나간다. 아쉬운 점을 말하자면, 마크 설리번이 이 작품도 다분히 미스터리 서스펜스에 어울릴 어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영화를 염두에 둔, 아니, 다시 말하자.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 헐리우드 영화. 심각하고 중요한 일을 애써서 다 마치고나서 꼭 한 마디 농담을 던져야 직성이 풀리는 등장인물을 보는 듯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이 그랬다는 말이 아니라 이를테면 그렇다는 거다. 기껏 심각하고 긴박한 스토리를 진행하다가 이런 디테일에서 독자의 헛심을 빼버리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그리하여 에피소드 자체가, 아휴, 한 때의 베스트셀러에 대해 아마추어가 이렇게 말을 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작위적이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불만은 사소하다. 그저 이런 작품은 재미 있으면 그걸로 장땡이다. 아쉽게 품절 상태이니 도서관에 들르실 일이 있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다. 다만 해설 없이 655쪽까지 달려야 하는 것이 조금 부담이 될 수도 있을 터. 인생이 그렇지 뭐 다 좋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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