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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류리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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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유력 일간지인 아사히 신문은 지난 천 년 동안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아리시마 다케오를 선정한 적이 있다. 나는 이이의 작품 가운데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대산세계문학총서 91번, <어떤 여자> 만 읽었는데, 아사히 신문이 무슨 마음으로 “천 년” 역사의 일본 문학 가운데 아리시마를 최고의 문인으로 선정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여자>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지만 21세기에 읽기에는 좀 심한 뽕짝기가 풍겼기 때문이다. 아, 물론 재미있는 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천년 역사 가운데 최고”라는 “으마으마한” 계관을 쓰기엔 좀 그렇다는 뜻. 일본 문학이 11세기에 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겐지 이야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천 년 역사라는 건 인정하겠지만 에이, 아리시마라니 좀 과했다 싶었다. (천년 가운데 최고의 한 명인 줄 알았는데 글을 고치는 지금, 더 검색해보니까 ‘가장 뛰어난’ 문인이 무지하게 많더라. 저널리즘이 뭐 다 그렇지.)
《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이 새로 나온 건 알고 있었다. 근데 불과 3년 전에 읽었지만 스토리가 거의 생각나지 않는 <어떤 여자>의 지은이라는 걸 기억하고는 백수가 내 돈으로 사서 읽기엔 무리라고 생각해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서 방금 전에 다 읽었다. 마음에 들었다. 본문만 352 페이지. 하지만 딱 세 작품이다. 순서대로 <사랑을 선언하다>가 176쪽, <태어나려는 고뇌>는 일본 축마서방筑摩書房에서 낸 《아리시마 다케오 전집》에 장편소설로 분류되었다고 했으나 앞에 실린 작품보다 분량이 약간 적어 104쪽, 마지막 <카인의 후예>는 72쪽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편소설이라고 읽는 것과 비교하면 분량이 만만하지 않고, 그래서 단편으로 치면 좀 더 복잡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읽기 전에 세 작품이 차례로 1915년, 1918년, 1917년에 발표한 점을 감안하는 것이 좋다. 즉 지금부터 한 세기 전의 동아시아 지역에서 쓰인 작품이라는 것. 당시에 아무리 탈아입구를 주창했고 심지어 유럽의 강국 러시아와 한 판 맞짱을 떠서 이긴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숨막히게 고루한 의식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물론 아리시마 다케오의 의식은 당시 일본의 일반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아리시마는 도쿄에서 대장성(지금의 재무성)의 관료 생활을 한 아버지, 요코하마 영화학교를 졸업한 신여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요코하마 세관장으로 직을 옮기자 그곳에서 소년 시절에 미국인 목사 가정에서 영어를 사용하며 지내기도 했다. 귀족 자제들이 다니던 학교에선 늘 우등을 했고, 외가와 연이 있는 삿포로 농학교, 현재의 홋카이도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기독교 세례, 군 복무를 마치고 도미, 해버포드와 하버드에서도 공부를 했으니 20세기 초반에서는 일본이라고 해도 대단한 교육을 받은 셈이다.
아리시마는 귀국해서 소설을 쓰는 한편 문학활동에도 열심이었지만 (제국시절이니까)신민들이 놀라 자빠질 정도로 정말 열심이었던 것은 연애사였다. 그것도 남편이 있는 15세 연상의 여기자 하타노 아키코. 앞 뒤 다 제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이들은 가나자와 시에 있는 별장으로 떠나 마지막 밤의 비극적이지만 치명적으로 환상적인 몸의 의식을 치룬 후, 두 명 다 대들보에 목매달고 만다. 그리고 먼 훗날 의사 출신 소설가 와타나베 준이치는 이 사건을 기념해 유부남과 유부녀가 마지막 날 정사 도중 시안화칼륨, 즉 청산가리를 탄 포도주를 입에 머금고 상대의 입으로 전해주어 완벽하게 결합한 상태에서 자살로 끝나는 소설 <실낙원>을 쓰게 한다. (이 책이 일본식으로 되게 야~하고 재미나지만 지금은 절판이다. 어머나, 세상에. 도서관엔 있다, 있어!) 당시 일제에 의하여 강점당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윤심덕이 관부연락선 위에서 연인과 함께 투신한 사건이 이와 관련이 있다고들 하는 모양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관심없다.
먼저 읽은 <어떤 여자>, 그리고 아리시마의 연애담을 미루어 보면, 이이의 초기작이며 원제는 그냥 <선언>인 <사랑을 선언하다>가 가장 아리시마답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처럼 꼴랑 한 작품 읽고 거기에 작가의 바이오 정도만 훑은 다음 작풍作風이라고 책임감 없이 말할 수 있는 아마추어라면. <선언>은 1912년 9월에서 시작해 1914년 2월까지 A와 B사이에 오고 간 서간들을 모은 서간체 소설이다. 당시 일본의 여성 이름은 주로 아들 자子자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말로 ‘코’라고 발음해 작품에 Y코 라는 여성이 자주 거론된다. 그리고 작품 말미에 Y코 양의 수기가 실려 있다. 그렇게 서른일곱 통의 편지와 Y코 양의 수기로 된 소설. 왜 우리말 제목을 사랑을 “선언”하다, 라고 했을까? 누가 누구한테 누구를 사랑한다고 선언했을까? 이것 일러드리지 못한다. 결론이라서. 다만 작품을 쓰고 벌써 한 세기 이상이 지났으니 조금 까진 독자들은 초반부터 어떤 결말이 준비되어 있는지 뻔하게 눈치챌 수 있어서 아쉬웠다. 물론 당시의 윤리를 가진 일본(또는 식민지 조선) 독자들이라면 꽤나 충격적인 결말이라고 열광할 수 있었겠지만, 더 이상은 아니라는 게, 거 참, 시간이 무섭기도 하고 뭐 그렇다.
A는 신체 건강하고 매사 긍정적인 현재적 인물. B는 없는 집안에 고학으로 대학을 다녔는데 폐결핵에 걸려 당분간 시오바라라는 곳에 가서 학업을 중단하고 요양을 하는 중이다. A가 먼저 절친 가운데서도 베프인 B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두 명 다 생물학을 전공하는 과학도다. 혈기 왕성하고 욕망 충천한 청춘들이라 편지는 몇 번 지날 필요 없이 당연하게 연애 문제로 접어들고, A는 여덟 살 때부터 옆집에 사는 신혼부부의 새댁에게 상당한 정도로 집착하면서 여성을 향한 갈망이 시작되었으며, 열두 살 때는 누이동생이 자기 친구와 친구의 언니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었는데 그만 누이 친구 언니한테 꽂힌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지금은 얼마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홋카이도 노보리베츠 온천에 가서 완고한 할아버지와 함께 온 고바야시 성姓을 가진 작은 사슴 같은 우아하고 연약해 보이는 소녀한테 홀랑 빠졌다고 한다. 도쿄의 고이시카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 사실 지금은 학교에 나가지도 않고 여학생들 등하교 시간에 맞춰 여학교(들) 주변을 어슬렁대며 쉼 없이 눈알을 굴리고 있었단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나가기 시작한 교회에서 문제의 여학생을 발견했다고 하니, B는 자신의 기독교 교적이 있는 교회다, 내가 도쿄에 가겠으니 여비를 보내라(B는 가난한 고학생)는 소식과 함께 정말로 도쿄로 와서, 무려 여학생을 A에게 소개를 해주니 이이가 바로 여주인공 Y코 양이다.
문학작품이나 음악, 연극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연애는 대개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는 속도라서 이로부터 일년 이내에 A는 Y코 양과 약혼을 하게 된다. 때는 20세기 초. 아무리 약혼했다고 해도 이들은 서로의 맨몸을 본 상태가 아니다. 이 정도가 지난 후 A의 고향 센다이에선 잘 나가는 사업체를 운영하던 A의 아버지가 중환에 걸리고 결국 세상을 뜨는데, 알고 보니 사업체도 이미 거덜이 났고, 비밀리에 제분소 하나만 예전 하인의 명의로 남아 있어서, A는 학업도 때려치우고 센다이에 내려와 제분소 운영과 어머니와 누이동생 N코 양의 부양에 힘을 쏟아야 했다. 반면에 학업에 뜻이 있는 B는 병세가 호전되어 요양 중에 쓴 유전학 관련 논문 여섯 편을 가지고 도쿄의 학교로 돌아가, A와 목사의 뜻을 따라 Y코 양의 집, 코바야시 가에서 머물기로 한다. 이후에도 길고 긴 편지 왕래가 계속되는데,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어떤 결말이 나올지 다 눈치 채셨지?
<태어나려는 고뇌>는 일본판 <데미안>이라고나 할까? 새는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기 위해 별 지랄을 다 한다. 그럼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가 없지만, 자질이 무척이나 훌륭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질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고 있으며,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받지 못한 예술가 지망생이 알 껍데기를 까고 예술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용기가 있어야지 뭐. 세상에 뛰어나고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어도 평생의 의무, 즉 먹고 살고 부양하기 위한 의무 때문에 자질을 펴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무수한 사람들의 대표 선수 한 명을 소개하는 작품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세상 사는데 빵이 먼저 아냐? 예술이 먼저인 사람은 빵을 벌어다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거나, 더 쉬운 방법, 부자 할아버지나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거나 해라. 괜히 천분의 일의 확률만 가지고 예술합네, 하면서 평생 궁상떨지 말고. 얼마 살지 않았지만 엄혹한 세상엔 말이지, 무엇보다, 빵이 먼저더라.
마지막 <카인의 후예>는 다분히 자연주의적이다. “독사는 칵 죽여버려야 해.” 하는 우리나라의 <카인의 후예>하고는 다르다. <태어나려는 고뇌>에서와 마찬가지로 홋카이도의 무자비한 눈 폭풍을 배경으로 못 배우고 가난하지만 완력 하나는 죽여주는 거친 사내의 거친 삶이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 냈다.
아리시마 다케오 속에는, 작품을 쓰고 벌써 백 년 이상이 지난 상태에서, 아직도 찬란한 것이 문장이다. 문장과 문장을 엮어 한 단락을 만들어 내는데, 이 단락 또는 문단이야말로 작가들이 꼬불쳐둘 수 없는 지문과 같은 것. 이 섬세함을 어찌할꼬. 물론 읽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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