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 트릴로지
스테파노 마시니 지음, 조원정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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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파노 마시니는 1975년에 플로렌스에서 태어난 소설가, 극작가, 에세이스트인데,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이 지금 방금 내가 읽기를 끝낸 <리먼 트릴로지>, 즉 <리먼 삼부작>이라고 한다. 마시니는 플로렌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밀라노의 피콜로 극장, 플로렌스의 마치오 뮤지컬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리먼 트릴로지>를 발표하고 이게 영국과 브로드웨이에서 대박이 나 평론가들에게 극찬을 받은 끝에 미국 브로드웨이 연극상인 토니 최우수 연극상까지 수상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영미 외에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 스페인, 그리스, 아르헨티나, 알제리, 멕시코. 페루, 러시아, 그리고 당연히 우리나라에서 무대에도 올려졌다고 위키피디아에 쓰여 있다. 우리나라에는 서울예술대학 공연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안드레아 파치오토 교수가 희곡 작품집 출간에 정성을 쏟고 있는 출판사 지식을위한지식(지만지)에 출판을 제안해 이를 받아들여 주한 이탈리아 대사관 등록 공인 번역사 조원정의 번역으로, ‘현대’ 이탈리아 극작가의 작품으로는 아마도 첫 출판물이라고 한다. 파치오토 교수는 책의 해설과 작가 소개도 썼다.


​  그러나 이 책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 즉 눈에 뜨일 정도를 넘어서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건 2015년에 밀라노 피콜로 극장에서 이 작품을 공연할 때 연출을 맡은 연출가 루카 론코니가 쓴 서문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정말 한 번 휘리릭 열어본 적이 있는데, 분명히 희곡, 드라마라고 알고 있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아서, 이거 또 문제작, 읽어내기는커녕 읽어갈수록 뇌가 헝클어지거나 심하면 꼬여버려 최악의 경우에 뇌졸중이 올 정도로 부조리하거나 형이상학적 작품 아닌가 싶어 약간 쫄아 있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한다. 이런 상태에서 진짜로 연출을 한 연출가의 허리상학적 서문을 읽는 일은 독자로 하여금 더욱 야코가 죽게 만드는 일이었다. 요즘 진보적인 희곡/연극은 극작가보다 연출가와 드라마트루기(또는 드라마터지)의 비중이 더욱 중요해지는 거 같은데,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이 <리먼 트릴로지> 아니겠나 싶다. 그러니까 희곡을 놓고 이것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지, 어떤 상징을 차용, 응용 또는 창조할 것인지는 당연히 연출가의 몫이다. 연출가 론코니는 자신의 연출 경향을 매우 지적으로, 독자의 기가 죽을 정도로 현학적인 표현을 구사했다. 그랬을 뿐이다. <리먼 트릴로지>는 2008년 숨이 끊어진 미국 4위의 글로벌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 사의 탄생부터 쇠망까지를 조망한 작품으로, 이를 “흑인 노예로 유지되던 앨라배마의 ‘라인의 황금’이 결국 신성을 지닌 경제 지수가 지배하던 월스트리트의 황혼에 도달하기까지”의 바그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구라를 치니, 거 참, 입담 한 번 대단하다.


​  자, 현대, 근대도 아니고 현대 이탈리아의 극작이라고 나처럼 쫄지 마시라. 작품의 특징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희곡이며, 따라서 분명히 등장인물이 있고 특정 대사를 하긴 하다. 하지만 등장인물을 특정하지 않는다. 즉 누가 이런 대사를 하라는 것도 없고, 특별한 지문도 없다. 무대에 대한 묘사도 당연히 생략하고 오히려 소설과 드라마 사이의 경계가 달군 프라이 팬 위의 버터처럼 스스륵 녹아버렸다. 극작가 스테파노 마시니는, 내가 이탈리아어를 아는 것도 아니고, 원본을 본 것도 아니라, 이게 운문인지 산문인지도 구별이 가지 않는데, 그냥 마치 자유시를 쓰듯이 이야기를 툭툭 할 뿐이다. 한 스토리와 여러 명의 등장인물을 가지고 누구에게 어떤 대사를 시킬 것인지는 전적으로 (드라마터지의 사용여하를 포함해서) 연출가가 결정할 사항이다. 또 모르지, 연출가가 배우들을 다 모아놓고 스터디를 하는 수도 있으니. 그게 더 좋은 거 같기는 하지만 론코니 같이 콧대가 높아 보이는 먹물 연출가 같은 경우에 자만심에 기스 날까봐 그냥 고집대로 할 수도 있고. 정말이다. 자유시 같은 스토리 말고 아무것도 없다. 이러하니 그냥 스토리를 말해야 할밖에.

  2008년에 미국에서 터진 리먼 브라더스 사태는 이 투자은행의 부채 6,130억 달러가 문제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충격이 크긴 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하여 조금 덜 쇼크를 먹었다. 그건 이 사태가 터지기 십년 전에 외환위기를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어서 외화보유에 각별한 신경을 쓴 기업과 정부가 상대적으로 건실한 재무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기억한다. 혹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지만 십년 전에 얻어터진 악몽이 너무 커서 뭐 이 정도 쯤이야, 하고 넘겼을지도 모르고. 그것도 아니면 당시 내가 잘 나가던 반도체 분야에서 빵을 빌어먹고 있어서 충격 자체를 느끼는 감이 진짜로 별로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원래 미국 내의 부동산, 주로 집값의 거품이 꺼지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관련해 수많은 미국 중산층 시민이 집도 절도 없이 홈리스나 텐트족으로 대책 없이 추락했으며, 이럴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대규모 정리해고까지 당해 졸지에 극빈층으로 떨어진 실제 장면이 당시 외신을 타고 TV를 통해 시청할 수도 있었다.

  스테파노 마시니는 이런 불행의 방아쇠를 당긴 리먼 브라더스의 탄생부터 추적하기 시작한다. 리먼 브라더스는 독일 바이에른의 림파르에서 출발해 뉴욕에 도착한 헤이움 레만 Heium Lehmann과 그의 두 형제 이매뉴얼과 메이어, 이렇게 삼형제가 앨라배마에서 연 작은 포목점에서 시작한다. 19세기 초중반에 외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은 미국 세관에서 관원이 부르기 쉽게 이름까지 멋대로 바꾸는 바람에 헤이움 레만은 헨리 리먼 Henry Lehman으로 되고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의 형제관계도 저 야곱의 아들 열두 형제들에서 볼 수 있듯이 개과 동물과 비슷해서 장자, 둘째, 막내 이렇게 차근차근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큰형 헨리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머리, 둘째 이매뉴얼은 실행하는 팔, 막내 메이어는 이 둘을 중재하는 식물인 감자로 비교한다. 왜 감자가 둘을 중재하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여튼 막내 메이어가 머리 하나는 팽팽 잘 돌아가서 초기 리먼 브라더스의 이익과 사업 번창을 위해 중요한 아이디어를 많이 낸다. 그의 아이디어로 포목점은 농기구와 씨앗 같은 것도 파는 만물상이 되었다가 때마침 닥친 대화재를 기점으로 목화 중개업으로 도약한다. 게다가 메이어가 장가를 잘 들어 당시 미국 남부의 시골 부자집엔 피아노를 연주하는 딸이 하나 이상은 꼭 있던 때인데 하필이면 거의 전문 피아니스트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아가씨와 결혼해 아내 덕에 목화를 대규모로 매집하는 놀라운 영업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의 모든 물산과 돈이 모이는 곳이 뉴욕의 거래소. 장남 헨리는 아깝게 황열병으로 일찍 세상을 뜨고, 둘째 이매뉴얼이 뉴욕 사무소에서 목화 판매를, 셋째 메이어가 앨라배마에서 목화 수집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다가 합중국 남부에 의하여 분리독립전쟁이 발발해 목화 중개업은 사양길에 접어든다. 부자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틴 형제는 종전 후 메이어가 앨라배마 주지사를 만나 자신이 앨라배마를 다시 복구할 테니 자금을 대라고 배팅하는 데 성공해 드디어 유대인의 혈관 속에 유장하게 흐르는 돈놀이, 좋은 말로 금융업 진출의 기반을 닦는다. 이후 뉴욕에서 형제가 만나고, 리먼 브라더스 은행을 설립해 큰 규모로 번성시킨다. 위에서 말했다. 전통적 삶을 유지하는 유대인 형제 간에는 다툼도 없이. 이들은 나이를 먹고, 동생이 먼저 죽고, 형도 죽어서 가족은행은 2세 필립이 회장을 맡는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철도에 투자해 더 큰 돈을 모은 리먼 브라더스는 이후에도 유정油井, 석탄, 철강 등 가리는 것 없이 다양한 투자로 더욱 몸집을 불린다. 세월은 흐르고 1세대에 이어 2세대, 3세대까지 몽땅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드디어 리먼이란 이름을 쓰지 않는 리먼 브라더스의 회장이 자리에 몇 번 더 앉은 다음에 충격적인 리먼 브라더스의 서브모기지 사태가 벌어질 때까지.


​  재미는 있지만 공연하는 데 다섯 시간 이상이 걸리는 대작이란다. 그리하여 희곡 한 편이 본문만 무려 574쪽 분량이다. 글 자체가 자유시 같다고 했으니 글자 수로 따지면 그리 많은 분량이 아니라서 읽는데 부담이 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나 정도는 어림없고 연극이나 극작 공부를 좀 한 탄탄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이런 작품을 선뜻 출판한 지만지 출판사도 대단한다. 번역의 수준은 내가 모르지만, 우리말로 바꾼 번역문 또한 매끄러워 까탈 잡을 일이 없다. 하여튼 이 작품이 현대 이탈리아 희곡 가운데 처음이라니 <리먼 트릴로지>를 시작으로 앞으로 다양한 이탈리아 희곡이 번역 출간되었으면 좋겠다. 이탈리아 영화는 자주 본 반면 희곡/연극은 거의 없었다는 걸 감안하면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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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류리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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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유력 일간지인 아사히 신문은 지난 천 년 동안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아리시마 다케오를 선정한 적이 있다. 나는 이이의 작품 가운데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대산세계문학총서 91번, <어떤 여자> 만 읽었는데, 아사히 신문이 무슨 마음으로 “천 년” 역사의 일본 문학 가운데 아리시마를 최고의 문인으로 선정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여자>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지만 21세기에 읽기에는 좀 심한 뽕짝기가 풍겼기 때문이다. 아, 물론 재미있는 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만 “천년 역사 가운데 최고”라는 “으마으마한” 계관을 쓰기엔 좀 그렇다는 뜻. 일본 문학이 11세기에 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소설이라고 주장하는 <겐지 이야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천 년 역사라는 건 인정하겠지만 에이, 아리시마라니 좀 과했다 싶었다. (천년 가운데 최고의 한 명인 줄 알았는데 글을 고치는 지금, 더 검색해보니까 ‘가장 뛰어난’ 문인이 무지하게 많더라. 저널리즘이 뭐 다 그렇지.)

  《아리시마 다케오 단편집》이 새로 나온 건 알고 있었다. 근데 불과 3년 전에 읽었지만 스토리가 거의 생각나지 않는 <어떤 여자>의 지은이라는 걸 기억하고는 백수가 내 돈으로 사서 읽기엔 무리라고 생각해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서 방금 전에 다 읽었다. 마음에 들었다. 본문만 352 페이지. 하지만 딱 세 작품이다. 순서대로 <사랑을 선언하다>가 176쪽, <태어나려는 고뇌>는 일본 축마서방筑摩書房에서 낸 《아리시마 다케오 전집》에 장편소설로 분류되었다고 했으나 앞에 실린 작품보다 분량이 약간 적어 104쪽, 마지막 <카인의 후예>는 72쪽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편소설이라고 읽는 것과 비교하면 분량이 만만하지 않고, 그래서 단편으로 치면 좀 더 복잡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읽기 전에 세 작품이 차례로 1915년, 1918년, 1917년에 발표한 점을 감안하는 것이 좋다. 즉 지금부터 한 세기 전의 동아시아 지역에서 쓰인 작품이라는 것. 당시에 아무리 탈아입구를 주창했고 심지어 유럽의 강국 러시아와 한 판 맞짱을 떠서 이긴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숨막히게 고루한 의식에서 그리 많이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물론 아리시마 다케오의 의식은 당시 일본의 일반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아리시마는 도쿄에서 대장성(지금의 재무성)의 관료 생활을 한 아버지, 요코하마 영화학교를 졸업한 신여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요코하마 세관장으로 직을 옮기자 그곳에서 소년 시절에 미국인 목사 가정에서 영어를 사용하며 지내기도 했다. 귀족 자제들이 다니던 학교에선 늘 우등을 했고, 외가와 연이 있는 삿포로 농학교, 현재의 홋카이도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기독교 세례, 군 복무를 마치고 도미, 해버포드와 하버드에서도 공부를 했으니 20세기 초반에서는 일본이라고 해도 대단한 교육을 받은 셈이다.

  아리시마는 귀국해서 소설을 쓰는 한편 문학활동에도 열심이었지만 (제국시절이니까)신민들이 놀라 자빠질 정도로 정말 열심이었던 것은 연애사였다. 그것도 남편이 있는 15세 연상의 여기자 하타노 아키코. 앞 뒤 다 제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이들은 가나자와 시에 있는 별장으로 떠나 마지막 밤의 비극적이지만 치명적으로 환상적인 몸의 의식을 치룬 후, 두 명 다 대들보에 목매달고 만다. 그리고 먼 훗날 의사 출신 소설가 와타나베 준이치는 이 사건을 기념해 유부남과 유부녀가 마지막 날 정사 도중 시안화칼륨, 즉 청산가리를 탄 포도주를 입에 머금고 상대의 입으로 전해주어 완벽하게 결합한 상태에서 자살로 끝나는 소설 <실낙원>을 쓰게 한다. (이 책이 일본식으로 되게 야~하고 재미나지만 지금은 절판이다. 어머나, 세상에. 도서관엔 있다, 있어!) 당시 일제에 의하여 강점당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윤심덕이 관부연락선 위에서 연인과 함께 투신한 사건이 이와 관련이 있다고들 하는 모양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관심없다.


​  먼저 읽은 <어떤 여자>, 그리고 아리시마의 연애담을 미루어 보면, 이이의 초기작이며 원제는 그냥 <선언>인 <사랑을 선언하다>가 가장 아리시마답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처럼 꼴랑 한 작품 읽고 거기에 작가의 바이오 정도만 훑은 다음 작풍作風이라고 책임감 없이 말할 수 있는 아마추어라면. <선언>은 1912년 9월에서 시작해 1914년 2월까지 A와 B사이에 오고 간 서간들을 모은 서간체 소설이다. 당시 일본의 여성 이름은 주로 아들 자子자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말로 ‘코’라고 발음해 작품에 Y코 라는 여성이 자주 거론된다. 그리고 작품 말미에 Y코 양의 수기가 실려 있다. 그렇게 서른일곱 통의 편지와 Y코 양의 수기로 된 소설. 왜 우리말 제목을 사랑을 “선언”하다, 라고 했을까? 누가 누구한테 누구를 사랑한다고 선언했을까? 이것 일러드리지 못한다. 결론이라서. 다만 작품을 쓰고 벌써 한 세기 이상이 지났으니 조금 까진 독자들은 초반부터 어떤 결말이 준비되어 있는지 뻔하게 눈치챌 수 있어서 아쉬웠다. 물론 당시의 윤리를 가진 일본(또는 식민지 조선) 독자들이라면 꽤나 충격적인 결말이라고 열광할 수 있었겠지만, 더 이상은 아니라는 게, 거 참, 시간이 무섭기도 하고 뭐 그렇다.

  A는 신체 건강하고 매사 긍정적인 현재적 인물. B는 없는 집안에 고학으로 대학을 다녔는데 폐결핵에 걸려 당분간 시오바라라는 곳에 가서 학업을 중단하고 요양을 하는 중이다. A가 먼저 절친 가운데서도 베프인 B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두 명 다 생물학을 전공하는 과학도다. 혈기 왕성하고 욕망 충천한 청춘들이라 편지는 몇 번 지날 필요 없이 당연하게 연애 문제로 접어들고, A는 여덟 살 때부터 옆집에 사는 신혼부부의 새댁에게 상당한 정도로 집착하면서 여성을 향한 갈망이 시작되었으며, 열두 살 때는 누이동생이 자기 친구와 친구의 언니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었는데 그만 누이 친구 언니한테 꽂힌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지금은 얼마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홋카이도 노보리베츠 온천에 가서 완고한 할아버지와 함께 온 고바야시 성姓을 가진 작은 사슴 같은 우아하고 연약해 보이는 소녀한테 홀랑 빠졌다고 한다. 도쿄의 고이시카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 사실 지금은 학교에 나가지도 않고 여학생들 등하교 시간에 맞춰 여학교(들) 주변을 어슬렁대며 쉼 없이 눈알을 굴리고 있었단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나가기 시작한 교회에서 문제의 여학생을 발견했다고 하니, B는 자신의 기독교 교적이 있는 교회다, 내가 도쿄에 가겠으니 여비를 보내라(B는 가난한 고학생)는 소식과 함께 정말로 도쿄로 와서, 무려 여학생을 A에게 소개를 해주니 이이가 바로 여주인공 Y코 양이다.

  문학작품이나 음악, 연극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연애는 대개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는 속도라서 이로부터 일년 이내에 A는 Y코 양과 약혼을 하게 된다. 때는 20세기 초. 아무리 약혼했다고 해도 이들은 서로의 맨몸을 본 상태가 아니다. 이 정도가 지난 후 A의 고향 센다이에선 잘 나가는 사업체를 운영하던 A의 아버지가 중환에 걸리고 결국 세상을 뜨는데, 알고 보니 사업체도 이미 거덜이 났고, 비밀리에 제분소 하나만 예전 하인의 명의로 남아 있어서, A는 학업도 때려치우고 센다이에 내려와 제분소 운영과 어머니와 누이동생 N코 양의 부양에 힘을 쏟아야 했다. 반면에 학업에 뜻이 있는 B는 병세가 호전되어 요양 중에 쓴 유전학 관련 논문 여섯 편을 가지고 도쿄의 학교로 돌아가, A와 목사의 뜻을 따라 Y코 양의 집, 코바야시 가에서 머물기로 한다. 이후에도 길고 긴 편지 왕래가 계속되는데,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어떤 결말이 나올지 다 눈치 채셨지?


​  <태어나려는 고뇌>는 일본판 <데미안>이라고나 할까? 새는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기 위해 별 지랄을 다 한다. 그럼 자기만의 방과 연수 5백 파운드가 없지만, 자질이 무척이나 훌륭한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질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고 있으며,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받지 못한 예술가 지망생이 알 껍데기를 까고 예술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용기가 있어야지 뭐. 세상에 뛰어나고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어도 평생의 의무, 즉 먹고 살고 부양하기 위한 의무 때문에 자질을 펴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무수한 사람들의 대표 선수 한 명을 소개하는 작품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세상 사는데 빵이 먼저 아냐? 예술이 먼저인 사람은 빵을 벌어다줄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거나, 더 쉬운 방법, 부자 할아버지나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거나 해라. 괜히 천분의 일의 확률만 가지고 예술합네, 하면서 평생 궁상떨지 말고. 얼마 살지 않았지만 엄혹한 세상엔 말이지, 무엇보다, 빵이 먼저더라.

  마지막 <카인의 후예>는 다분히 자연주의적이다. “독사는 칵 죽여버려야 해.” 하는 우리나라의 <카인의 후예>하고는 다르다. <태어나려는 고뇌>에서와 마찬가지로 홋카이도의 무자비한 눈 폭풍을 배경으로 못 배우고 가난하지만 완력 하나는 죽여주는 거친 사내의 거친 삶이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 냈다.


​  아리시마 다케오 속에는, 작품을 쓰고 벌써 백 년 이상이 지난 상태에서, 아직도 찬란한 것이 문장이다. 문장과 문장을 엮어 한 단락을 만들어 내는데, 이 단락 또는 문단이야말로 작가들이 꼬불쳐둘 수 없는 지문과 같은 것. 이 섬세함을 어찌할꼬. 물론 읽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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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4-01 07: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작가인데 이렇게 좋은 집안에 앞날이 창창한 작가가 사랑 때문에 세상을 뜨다니 저로서는 참 이해가 안가네요. 😓

Falstaff 2023-04-01 08:47   좋아요 2 | URL
에구.... 술몸살이 장하게 나서 한 보름 끙끙 앓다가 이제 좀 회복됐나 싶어 한 10km 좀 넘게 뛰고 왔더니 삭신이 ㅋㅋㅋ 발에도 물집이 큼지막하게 잡히고 그렇네요. (흠. 운동화 바꿀 때가 된 거야!)
뭐 연애지상주의지요. 그럴 수 있고 실제로 그러긴 했는데 좋아 보이지는 않죠? 저도 그렇더라고요.

stella.K 2023-04-01 11: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황순원이 이분의 영향을 받았을까요? 카인의 후예는 황순원 표인 줄 알았는디...
이 작가 읽어보고 싶네요.
이제 지만지 책 비싸다고 해야 다른 책값이 거의 비등하게 올랐으니 더러는 사서 볼 수도 있겠다 싶네요. 지만지가 이대로만 있어준다면. ㅋ
근데 문트님 건강하시네요.
10킬로를 뛰시다니. 저는 지난 주 토욜날 모임에 갔다왔는데 4천 몇보 걸었다고 나오더군요. 그날이 가장 많이 걸었던 날이었을 겁니다. 어제도 나갔다 들어왔더니 다리가...😆

Falstaff 2023-04-01 11:38   좋아요 3 | URL
황선생이 당연히 아리시마의 <카인의 후예>를 읽었을 겁니다. 제목을 지을 때, 일본과 교류가 완전히 없었을 당시라서 아리시마의 작품을 염두에 두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황선생과 아리시마의 작풍도 완전히 다르고 작풍도 거의 반대편에 있잖아요.
ㅎㅎㅎ 은퇴 전까지는 몸이 엉망이었습니다. 완전 D 형이었습지요. 이젠 좀 괜찮고요, 못 입고 걸어놓기만 한 옷들이 전부 맞아서 길 가다가 마넌짜리 주운 기분이 듭니다.
 
시녀들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지음, 김재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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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5년 반 전에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 9번,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어느 계단의 이야기》를 정말 흥미롭게 읽고(생각할수록 기막힌 작품이다!) 그의 다른 작품이 번역 출판된 것이 없다는 게 속이 상할 정도로 안타까웠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기다리던 부에로의 다른 책이 2022년 12월 말에 드디어 책가게에 깔려 내 눈에 띄었다. 기다리는 동안, 하, 세월 진짜 빨라, 어느새 은퇴를 한 나는 구입해 내 책장에 꽂아놓는 대신 얼른 동네 도서관에 (아내 이름으로)희망도서 신청을 하고, 책이 들어왔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가 (중간에 배고파 천 원짜리 육개장 맛 컵쌀국수 하나 먹은 거 빼고) 그 자리에서 한 방에 읽은 다음, 지금 개가실에 붙은 PC에 앉아 있다. 참 좋은 세상이다.

  대산총서 독후감에도 썼듯이 1916년 스페인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난 부에로는 1934년의 내전 때 인민전선에 가담했다가 종전 후 팔랑헤 일당들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공화파 입장에서도 전쟁 끝났을 때는 나름대로 복수심에 불타 인민전선 쪽 가담자들에게 마구 사형을 선고했겠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진짜로 다 죽이면 스페인 사람들의 국민 단백질, 돼지는 누가 키우고, 걔네들 안 먹는 삼겹살은 누가 한국으로 수출하나 싶어, 집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덟 달 정도가 지나면 종신형으로 감형, 다시 몇 년 후엔 슬그머니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짜로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부에로의 아버지와 친형도 이때 총살당해 죽었다.

  그러나 그건 나중 일이고 부에로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에 남달랐지만 그것보다 그림 그리기에 더 남달랐다고 한다. 가족들 모두 마드리드로 이사를 하고 귀여운 막둥이는 화가가 되기 위해 베야스 아르테스 학교에 들어간 때가 1934년. 마침내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날갯짓을 막 하려던 참에 전쟁의 참화 속으로 끌려들어간 꼴이다. 며칠 전 독후감을 쓴 <열차는 정확했다>의 하인리히 뵐과 대단히 유사한 경우. 내전이 끝나고 근 6년여를 여러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감방 안에서도 동료들의 초상, 정식 초상은 아니고 그저 캐리커쳐 수준 아니었을까 싶은데 하여간 그런 것들을 그려주면서 세월을 죽였을 정도였단다. 왜 이 양반의 미술 취향에 관해 말을 길게 하느냐 하면, 지금 읽은 책의 제목 <시녀들>이고, 책 좀 읽는 분께서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휙 떠올릴 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시녀들”은 1599년에 나서 1660년에 세상 뜬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로드리게스 다 실바 이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 Las Meninas>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시면, 아, 이거로구나, 라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내전 동안 연극을 포함해 실력있는 문화 예술 관계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베리아 반도를 떠버리는 바람에 스페인은 이후 한동안 문화적 공백기를 맞아야 했단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오늘의 극작가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그는 1947년에 <어느 계단의 이야기>를 발표하고 로페 데 베가 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연극으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내가 읽기에는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가 미세하게 더 좋았지만 스페인에선 <…계단 …>이 먼저 성공을 하고 이어서 데뷔작인 <…어둠 속에서>가 알려졌단다. 하여간 초기작의 성공 이후에 이름이 나고, 벨라스케스 서거 3백년을 맞아 한때 화가 지망생이기도 했던 바에로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벨라스케스의 진짜 성격과 행동은 다음으로 하고, 그를 최고의 정의파로 다시 각색한 작품을 만들었으니 이게 <시녀들>이다.


​  역자 김재선이 “학회지에 실린 논문을 일부 요약하고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실제의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노예가 그림 기술을 익히려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고용인의 급여를 착복하기도 했고, 권력에 무한하게 아부해가면서 최고의 명예 가운데 하나인 산티아고 기사단 단원이 되고자 안달복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자기 노예에게 그림 기술을 알려주고, 왕을 통하여 자유인이 되게 했으며, 옛날 옛적 자신의 그림 <이솝>의 모델이 되어 준 늙은 페드로를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게 보살피려고 하며, 산티아고 기사단이 되는 것도 왕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보답해준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럼 이게 뭐야? 이거 허위사실 적시, 즉 범죄행위 아냐? 아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에로는 벨라스케스의 사망 3백년을 기념해 창작물에 관한 시각, 아름다움을 보는 미감, 인간 본성의 악함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지 벨라스케스가 진짜로 선하고, 냉정하고, 정의롭고, 속화되지 않은 예술혼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스페인 판 용비어천가를 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2부로 되어 있다. 1부를 이끄는 것은 스페인 궁정의 사치와 위선과 질투를 포함한 음모, 그리고 헛된 짝사랑과 진실한 배우자(벨라스케스)를 향한 쓸데없는 투기 같은 것으로 꽉 메워져 있어 좀 지루할 수 있는데 2부로 넘어가면 진짜 본론이 등장해 흥미진진, 절정과 결말을 향한 행진을 시작한다. 모든 것은, 연극이니까 당연하겠지만, 오직 하나, 아름다움의 분별과 정의와 정직을 위해 복무한다. 그리고 이런 미덕이 밝혀지는 곳은 고깔모자를 쓰고 기둥에 묶인 채 화형에 처해 죽느냐, 스페인 땅에서 추방되느냐, 아니면 서양식 능지처참인 환형에 처해지느냐의 기로에 선, 이름도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종교재판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이 극작을 법정 드라마라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터.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화가이고 고야가 나오긴 전까지, 물론 고야가 등장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어깨를 견줄 경쟁자가 없을 스페인 미술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인물이다. 당연히 궁중화가였으며, 궁중화가라도 같은 궁중화가가 아니라 왕을 위한 그림만 그리는 왕의 화가였다. 잘 나가니 좋겠다고? 천만의 말씀. 내 독후감에 수없이 썼다시피 밖에서 보기에 아무리 유복한 인간이라도 한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기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는 같은 궁정화가이자 자신보다 선배 화가, 즉 벨라스케스가 궁정화가가 됨으로써 최고의 자리에서 밀려버리고 수치스럽게도 자신도 모르는 채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본 ‘부분(색의 사용)’을 모사해 마치 자신의 창작물인 것처럼 스스로도 착각하고 있던 앙헬로 나르디에게 질투를 받으며, 나라가 어떻게 되든 백성을 갈취해 왕과 자신의 부만 쌓으면 그만인 후작은 왕이 일개 화백을 총애해 식부장관의 자리에 오른 벨라스케스를 시기한다. 그가 식부장관에 오르긴 했는데 같은 시기에 식부장관직을 희망했던 사촌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는 디에고만 사라져주면 장관 자리가 자기한테 올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으며, 공주의 시녀 가운데 한 명인 도냐 마르셀라 데 우요아는 벨라스케스는 전혀, 전혀 관심이 없건만 자기 혼자 열라 짝사랑에 빠졌다가 그게 어긋나버리자 거꾸로 그를 구렁텅이에 빠뜨려 복수하고자 한다. 이런 삶이 행복허겄어? 사는 게 다 그렇지.

  게다가 먼 과거에 자신의 모델이 되어준 페드로 브리오네스는, 그림 속에 담긴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던 천민 출신인데, 하인 생활을 하다가 주인 대신 도둑의 누명을 써 8년 동안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일을 하기도 하고, 풀려난 후엔 군에 입대해 플랑드르 전쟁에 나갔다가 자기 부하들이 연대장한테 부당한 일을 당하자 격분해 결투를 신청해 상관을 살해해 수십 년 동안 도피생활을 한 반쯤 맹인이기도 하다. 이런 온갖 안 좋은 상황에 처한 벨라스케스라고 읽는 “진정한 예술인”은 자신을 향해 노골적으로 뻗어 오는 폭력적 음모에 맞서 당당하게 쌍권총을 뽑아드니,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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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3-30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부예로 바예호 새 책이 나왔군요! 이런이런! 사야지! 하고 가격 눌렀다가 깜놀.......
저도 도서관을 이용하겠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

Falstaff 2023-03-30 13:18   좋아요 1 | URL
ㅎㅎ 못보셨는지 알았습니다. 눈에 띄었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읽으셨을 분인데 싶었거든요. ㅋㅋㅋ

잠자냥 2023-04-04 10:52   좋아요 1 | URL
<시녀들>로 땡투 받으셨을걸요. 도서관에 신청하고 기다리기 답답해서 전자책으로 질렀습니다. 전자책은 그나마 좀 싸다능...ㅋㅋㅋㅋ

Falstaff 2023-04-04 13:02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셔요.
 
열차는 정확했다
하인리히 뵐 지음, 사지원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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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뵐의 작품을 많이 읽은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세어보니 꼴랑 네 편을 읽고 많이 읽었다고 여겨온 거다. 조금 창피하네.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천사는 침묵했다>. 이게 전부다. 이러니 도서관 개가실을 뒤지다가 뵐의 <열차는 정확했다>를 발견한 순간 깜짝 놀라 집어 들을 수밖에 없었겠지.

  뵐은 1917년 쾰른에서 목공예 마이스터 가문에서 태어나 1939년에 쾰른 대학 독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1939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 그는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징집당해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초기부터 참전했으니 온갖 참상은 다 경험했을 뵐은 1944년에는 수 차례 탈영을 감행해 드디어 미군의 포로로 붙잡히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1945년에 나치가 벌였던 최후의 대항전에 참전하지 않고 전쟁을 마친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천사는 침묵했다>에서 하필이면 나치가 항복선언을 한 1945년 5월 8일에 탈영을 했다가 붙잡혀, 베를린에서는 히틀러가 자살하고 항복문서에 나치 잔당이 인감도장을 찍었지만 이 사실이 말단 전투중대까지는 하달되지 않았던 5월 9일에 총살당할 예정이었던 한스 슈니츨러 이야기를 쓴 바 있다. 이 작품도 재미있어서 더 이상의 스토리는 언급하지 않겠다. 하여간 젊은 시절의 전쟁 경험은 하인리히 뵐을 극도의 반전주의자로 만들었으며, 물론 기본적인 양식과 양심 등이 뒷받침 했겠지만 이를 테면 그렇다는 것이며, 독일민족이 유대인에게 가했던 학살과 핍박과 약탈에 관해서 대단한 죄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뵐 역시 원래는 아시아 유색인이긴 하지만 하도 오랜 세월 유럽 등지에 섞여 살아 거의 백인처럼 보이는 유대 족에게는 틈만 나면 사과와 유감을 표시한 반면, 독일인이 아프리카에서 야만적(이라고 지들이 멋대로 생각한) 흑인에게 자행한 살인과 고문과 학대와 착취 등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선언한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아우슈비츠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도 마찬가지다.

  하여튼 그리하여 내가 읽은 뵐의 작품을 거칠게 구분하면 ①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처럼 거대 현대 조직이 개인에 가하는 폭력의 고발, ②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이 전쟁 중 또는 전후 폐허가 된 독일과 독일 시민들의 황폐한 삶, 그리고 ③ <천사는 침묵했다>와 <열차는 정확했다> 같이 전쟁 자체에 대한 반대와 전쟁의 비극성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주제가 있는지 더 읽어봐야 할 터이다. 읽은 것이 짧아 이렇게 밖에 나눌 수 없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내가 하인리히 뵐에게 매료된 것은 전후 폐허가 된 도시와 전쟁 중 군인, 민간인들의 불안감을 묘사하면서도 그게 직접적인 전쟁의 장면을 그려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심리적 동요와 절망을 “대단히 섬세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두번째 읽은 <…어릿광대…>부터 뵐의 모든 번역서를 읽어봐야겠다고 작심할 정도로 좋아하기 시작했는데(물론 곧바로 잊기는 했으나), 지금 <열차는 정확했다>를 읽고 나서 이 작품이야말로, 평론가들이 뵐의 대표작이라고는 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한테 아직까지는 뵐의 소위 “최애”작품으로 등극했다. 전쟁 중 군인들과 군인 있는 곳에 반드시 존재하는 매춘부가 핵심인물로 등장하는 극강의 반전소설이지만 정작 군인들이 총 쏘는 장면이 한 컷도 등장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한 심리소설로 일관한다.

  주인공 안드레아스는 1920년생이다. 자신의 소원은 위대하다는 평을 듣지 못할지언정 피아니스트가 되는 거였다. 그러나 당시(1930~4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도 대학물을 먹어야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처럼 독일에서도 바칼로레아에 합격을 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안드레아스는 피아노 연습보다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하려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 했고, 그래서 입학 자격을 얻었지만 곧바로 세계대전이 터져, 그것도 염병할 나의 조국이 전쟁을 터뜨려 열아홉 살부터 거의 한 번도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보지 못하고 말았다. 시점은 1943년 가을. 벌써 만으로 4년째 전쟁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3년 반 전인 1940년 프랑스 아미앵에서 전투 중에 포탄의 폭발 충격으로 어느 집 담장 밑까지 날아간 적이 있었다. 이때 구멍 뚫린 벽돌로 마무리한 담장 위에서 땅에 누운 자신을 내려다보던 한 여인의 눈을 안드레아스는 결코 잊지 못한다. 어둠 속의 비 맞은 모래 같은 색깔의 슬픈 눈을 가진, 예쁘지도 않고 윤기가 나지도 않았던 좁고 긴 얼굴의 아가씨를 그는 나머지 평생 가슴 속에 새기고 다니고 있었다. 단 한 순간만 경험했던 찰나의 사랑. 이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오직 하나, 거의 사시에 가까운, 검은 모래처럼 불행으로 가득한 눈, 그것은 안드레아스,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이후 그는 동부전선으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휴가를 얻어 라인 강변의 고향에서 몇 주를 보낸 후 이제 귀대하기 위해 정확한 시간에 도착한 열차를 탄다. 친구이자 가톨릭 사제인 파울의 전송을 받으며. 그는 이번에 가면 도저히 살아서 돌아올 것 같지 않다. 아무리 고쳐 생각을 해도 불운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안드레아스는 사제 파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저 바퀴 밑으로 뛰어들 수 있을 거야… 그래, 탈영병이 될 수 있어. 뭐라고? 원하는 게 뭐야? … 난 미쳐버릴 지도 몰라. 그게 내 정당한 권리인 것처럼 말이야. 미친다는 건 정당한 권리야. 나는 죽지 않을 거야.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끔찍한 일이지.”

  파리에서 출발해 저 남부 폴란드 프레미슬로 가는 전선휴가병열차에 탑승하고 정거장을 바라보면서 “이제 다시는 이 정거장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까지 비난했던 내 친구의 얼굴도 다신 보지 못할 거야.”라고 회한에 찬다. 열차가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 도르트문트 정거장과 주전자에 커피를 담아 귀대병에게 봉사하는 피곤하고 지저분한 차림의 잿빛의 소녀, 길가에 있는 녹색 집 앞의 붉은 빛이 나는 갈색 나무, 검은 머리에 노란 옷을 입고 손으로 자전거를 잡고 있는 소녀, 부드러운 잿빛 푸른 구름이 가득 찬 이 지역의 하늘, 열차의 창 가장자리에 앉았다가 라테보일의 어디론가 날아간 작은 파리 같은 것을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란 어두운 예감, 자신은 렘베르크와 체르노비츠 사이에서 죽을 것이라는 예감에 젖어든다.

  이런 안드레아스에 접근하는 두 병사. 나중에 하사관 빌리라고 밝혀지는 수염쟁이와 지벤탈 병장이 본명/계급인 노랑머리. 이들 역시 전쟁으로 인해 불행해진 다양한 사람들의 일원이다. 빌리는 15개월만에 휴가를 얻어 집에 갔으나 자신의 소파 위에서 자기가 보낸 브랜디와 과일주를 마시고 있던 소련군 포로와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나머지 휴가일정을 포기한 채 귀대 열차에 올랐으며, 노랑머리는 파견분대의 대장 격인 상사가 분대원들을 계속적으로 성폭행하고 이에 응하지 않은 나이든 유부남 병사를 권총으로 쏴죽여버린 것을 목격했다. 전쟁만 아니라면 한 명은 잘 나가는 정비공장, 다른 한 명은 휘장가게의 사장으로 유복한 삶을 누리고 있을 텐데. 물론 안드레아스는 지금쯤 마음 놓고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었겠지.

  전쟁은 군인에게만 불행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민간인에게도,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나운 폭력과 상처를 주기 머뭇거리지 않는다. 작품의 후반에서는 폴란드 매춘부이자 저항군, 레지스탕이기도 한 올리나와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펼쳐지는데 차마 이것까지는 이야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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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3-28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발견했다니 행운입니다! 전 이 책 출간됐을 때 희망도서 신청해야지 해놓고 여태 까먹고 있었네요. (다른 책에 밀림 ㅋㅋㅋ) 문트 님 덕에 신청하러 갑니다~

Falstaff 2023-03-28 14:25   좋아요 1 | URL
이 책이 나왔을 때가 책을 안 읽었던 몇 개월 딱 그때더라고요. ㅎㅎㅎ 정말 도서관에서 발견한 게 행운이었습니다.
즐겁게 읽으셔요!!

레삭매냐 2023-03-28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메이저 출판사에서
내주었으면 하는 커다란 바람이...

Falstaff 2023-03-28 14:26   좋아요 3 | URL
메이저는 이 정도는 좀 양보해줘도 좋지 않겠나 싶어요.
지만지 번역도 좋고 교정도 좋고, 제본이 좀 후지다는 분 계시지만 전 양장이 괜히 무겁기만 해서 반양장을 더 좋아합니다.
다만 가격이 좀 쎄서 그게 하나 지랄이지요. ^^

그레이스 2023-04-04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사놓고 아직 못읽고 있네요
골드문트님 요사이 지만지 도장깨기 중이신가요?
피드를 내리는데 계속 지만지 표지가!

Falstaff 2023-04-04 21:43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제 인생에 남의 도장을 깨는 건 없습니다. 저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뭔 힘이 남아돌아서 남의 도장까지... 그렇지요? ㅎㅎㅎ
요즘에 지만지가 마구 책을 출간하기 시작했거든요. 전에 비싸서 사 읽을 엄두도 못 냈던 것이 무려 할인까지, 세월과 인플레이션을 생각하면 대폭 할인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마구 찍고 있거든요. 그래 새로 나온 책들을 저와, 아내와, 아이 이름으로 희망도서 신청해서 아주 만족하게 즐기고 있답니다.
다 좋은데, 간혹 예전 번역을 판을 바꾼 이야기도 하지 않고 걍 낸 경우도 있더라고요.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18
류전윈 지음, 오수경 옮김, 모우선 각색 / 연극과인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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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전윈의 동명 장편소설을 모우선이 각색해 희곡으로 다시 썼고, 이를 공연까지 한 작품이 연극전문 출판사 “연극과 인간”의 중국현대희곡총서 시리즈의 18번으로 나왔다. 이 책 역시 내 집 현관문에서 1층에 머물러 있는 엘리베이터를 불러 타고, 큰 네거리 두 개의 붉은 신호등에 걸려 대기했다고 쳐서 8분 정도 걸리는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것. 나 말고 우리동네 누군가가 희망도서 신청을 해 들여놓은 책이라는데, 나 말고 누가 또 중국현대희곡에 관심이 있는지 거 참 궁금하네. (혹시 이 독후감을 보시면 연락 한 번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쐬주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동네에 괜찮은 북어탕 집 있습니다. 북어탕에 쐬주 마시면 다음날 속이 좀 편합니다.)

  나는 원작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희곡을 읽었다. 그리고 곧바로 검색해 원작을 빠른 시간 안에 읽기로 결심을 했다. 류전윈의 작품을 찾아보니,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가 작가의 “가장 성숙하고 호방한 대표작”인 <말 한 마디 때문에>의 후속작이란다. 그러니까 중국현대희곡총서 18번의 희곡을 읽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원작자의 <말 한 마디 때문에>와 원작, 이 두 권을 미리 읽어 두는 것이겠다. 물론 희곡을 읽지 않은 채 원작만 읽고 곧바로 연극을 관람하든지.

  희곡을 읽거나 연극을 보는 일은 장편소설을 읽는 것하고 완전하게 다르다. 장편소설은, 이 작품의 원작을 예로 들자면 도서출판 아시아에서 2009년에 번역 출간했는데 옮긴이의 말을 포함해 328쪽. 본문만 대강 3백 쪽 정도 분량이면 하루에 다 읽어 치울 수는 있지만 조금 무리다. 나 같은 백수는 할 수 있으나 평일의 직장인한텐 많이 무리. 그러나 이것을 연극으로 공연하고자 하면 어떻게 됐든 길어야 두 시간 안쪽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각색자는 원작의 곁가지를 (거의)모두 걷어내고 스토리 라인의 핵심만 뽑아 이를 축으로 다시 구성해야 한다. 그러면서 장편소설의 재미를 살려낼 수 있을까? 있어야지. 그래야 이름난 각색자이며 극작가일 터. 이 책의 각색자 모우선(또는 머우썬)은 1980년대 중국 실험극의 선구자로 이름을 날리다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지더니 20년만에 돌아와 이 작품을 각색한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비단 이름값이 아니더라도 희곡을 읽으면서, 지금 읽기는 건조하게, 그냥 그렇게 읽고 있지만 좋은 연출을 통해 무대에 올리면 재미있는 연극이 되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내용을 거칠게 언급하자면, 근현대 중국의 평민을 그린 작품이 대개 그러하듯이 매우 토속적이고 삶을 위해 어떤 짓을 다 하고 구질구질하다. 원작과 같은 해에 출간된 작품이 옌롄커의 <풍아송>이었다는데, 류전윈을 옌롄커, 쑤퉁과 더불어 당대를 풍미하던 젊은 작가 3인으로 꼽았을 만큼, 이들과 비슷한 중국 농촌지역 사람들의 적나라한 삶의 모습을 그렸다. 원작은 앞으로 읽어볼 예정이지만 희곡만 가지고는 옌씨, 쑤씨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작품은 78세에 세상을 뜰 예정인 늙은 조청아 할머니가 자신의 이름이 바뀐 내력을 읊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머니 배속에서 나와 처음으로 받은 이름은 강교령. 아버지는 교령이 어렸을 때 심원 땅에서 비명에 죽은 ‘강호’라는 작자고 엄마는 오향향이다.

  2막으로 된 작품이다. 1막은 하남성 연진 땅 양씨 촌에서 두부를 팔던 양씨의 아들 양백순이 이끌어간다. 양씨에게 아들이 셋 있었는데 큰애는 학교 갈 나이가 지났고, 둘째 백순이 더 똑똑했다. 서양식 학교가 개교를 했으나 한 집안에 아들 둘을 다 보낼 수 없어서 하나만 보내기로 했다. 똑똑한 것이 교육을 받으면 부모 곁을 떠날 거 같으니 거짓 제비뽑기를 해서 좀 멍청한 막둥이 백리를 입학시킨다. 백리는 계모가 낳은 아들. 백순은 평소엔 식초를 팔지만 그것보다 상가에서 곡을 해주는 곡소리꾼으로 유명한 나장례의 소리에 반해 있었다. 하루는 나장례의 소리를 들으러 양을 돌보라는 아버지의 지시도 무시한 채 구경갔다가 구경도 못하고 아버지한테 크게 경을 쳐 그만 집에서 쫓겨나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증씨를 만나 돼지 도살하는 법을 배우고 함께 살다가 증씨가 새로 들인 아내에 밉보여 쫓겨나 몇 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온갖 천대를 받아 또다시 가출, 연진 성당에서 복사를 하는 조씨를 만난다. 이이를 통해 이태리에서 중국 선교를 위해 파견 온 첨 가톨릭 신부를 만나 이름도 양모세로 바꾸고 기독교를 접한다. 그러나 도통 교리를 이해할 수 없다. 첨 신부는 중국에 온지 40년 만에 무려 여덟 명의 신자를 확보하는 성과를 올리지만 본국의 누이동생에겐 수십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노라고 구라를 풀었다. 하느님도 용서하시리라. 이 덕분에 얼굴 한 번 못 본 조카가 외삼촌을 숭앙해 천주에 귀의해서 훗날 밀라노 교구의 대주교가 되니까. 중국에 와서 중국인 말고 이태리 외조카를 선교해버린 꼴이었다. 하여간 여기서 농사도 좀 짓다가 데릴사위가 되는 조건으로 과부가 된 만두가게 주인 오향향과 결혼해 이름도 양모세에서 오모세로 바뀌고 수양딸 강교령도 생겼다.

  오향향이 왜 결혼을 서둘렀을까? 은세공을 업으로 하는 유부남 고씨와 수년 동안 십계명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네 이웃의 남편을 탐하지 마라.”를. 이이는 이제 모세와 결혼을 하고도 남편 모세와는 소 닭 보듯 하고 여전히 고씨와 하얗게 불꽃을 태우고 있다. 그러다가 결국 고씨가 오향향을 옆구리에 꿰고 도망을 치고 말았다. 오모세는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주위 사람들이 이것들을 찾아야 한다고, 그래서 복수를 해줘야 체면이 선다고 충동질을 하는 바람에 의붓딸 강교령, 이젠 오교령이를 데리고 아내를 찾는 시늉을 하기 위해(진짜 찾으면 살인이 날 것 같아 그냥 시늉만 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우씨 라는 장돌뱅이한테 교령이를 유괴당하고 만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교령이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조씨 집안에 팔려가서 수양딸로 지내게 되고 당연히 이름 또한 오교령에서 다시 조청아로 바뀐다. 이후 우씨 마을의 우서도에게 시집을 가 3남 1녀를 낳고 의붓아버지 오모세와 함께 집을 나온지 70년이 넘은 78세에 세상을 뜬다. 조청아의 둘째 아들 우애국 이야기가 2부에 펼쳐지기는 하지만 그것까지 소개하기엔 지면도 부족하고 워낙 큰 이야기를 너무 짧게 요약하면 재미도 없고 그렇다.


​  스토리는 희곡을 통해 아는 것이 축약된 내용이라 더 쉽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원작을 읽어보는 게 훨씬 좋으리라 생각한다. 희곡은 공연을 전제로 쓰는 것이라 그것을 염두에 두고 감상한 소감은, 내용은 중국 하남성에서 벌어지는 몇 대에 걸친 서민적 대하saga이지만, 공연의 방식은 그리스 고전의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스 고전에서 특정 서사를 보다 빨리 전개하고 관객들에게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 쓰는 것이 코러스의 활용이다. 모우선은 그리스 고전 적 코러스를 적용하되 저 오래전부터 유구하게 내려오는 중국 곤곡(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1)의 창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앞의 어떤 것과, 누구와 연관이 있는지 파악한다. 또 배우들이 직접 스토리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자이자 한중연극교류협회 회장인 오수경은 희곡임에도 이럴 경우엔 “… 한다.”나 “…이다.” 처럼 문어적 표기를 번역에 사용했다. 적절한 거 같다.

  희곡에 관심이 있으면 읽어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원작을 먼저 읽고 결정하는 편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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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3-25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원작 소설 갖고 있어요~잊고 있던 책인데 이 책도 조만간 읽어봐야 겠습니다.

Falstaff 2023-03-25 13:13   좋아요 0 | URL
옙. 저는 차근차근, <말 한 마디 때문에> 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즐기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