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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5
버나드 맬러머드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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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버나드 맬러머드는 미국의 소설가로 솔 벨로우, 조지프 헬러(아니, 이이도?), 필립 로스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20세기 미국 유대 작가로 불린다고, 위키피디아는 설명하고 있다. 위에서 조지프 헬러를 거론할 때 왜 “아니, 이이도?”라고 의문을 표했는가 하면, 유대인 가운데 전쟁에 참가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헬러는 1942년에 열아홉 살의 나이로 공군에 입대해서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이 되어 당시의 경험을 밑천 삼아 명작 블랙 코미디 수준의 반전소설 <캐치-22>를 쓴 작가. 맬러머드는 1914년생으로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된 진주만 폭격이 일어났던 1941년엔 스물일곱, 사실상 참전을 목적으로 미국의 젊은이들이 입대하기 시작했던 1942년엔 스물일고여덟. 대학 학부를 졸업했으니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인공 존 밀러 대위처럼 장교로 입대해 전쟁하기 딱 좋은 나이에 이이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토마스 하디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따고, 194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눈치 받았겠다고? 눈치 주는 거 모르는 척하는데 도가 튼 종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이란 거 모르셔? 그래, 그래. 유대족이 아닌 백인 가운데서도 그랬던 인간이 있지. 스토너라고. 1차 세계대전이었지만. 갑자기 웬 스토너? 생각날 때마다 그가 미워서 그런다.
맬러머드의 주요 작품은, 나는 운동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안 봤지만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인공을 한 영화의 동명 원작이자 데뷔작인 <더 내츄럴>. 1984년 작품 출간 이후 31년만에 영화로 만들어져 유명세를 탄 작품이다. 그러나 실제로 맬러머드가 소설을 써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즉 전업작가로 성공할 떡잎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두번째 작품인 <점원>이 전미도서상 최종심까지 올라갔을 때라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인 1958년 개의 해에 단편소설집 《마술통》으로 기어이 전미도서상을 받는다. 불과 8년 후엔 러시아 제국의 반유대주의를 그린 <The Fixer: 수선공>으로 두 번째 전미도서상과 미국작가들의 꿈인 퓰리처 상을 받았으니 대단한 성가를 누렸을 텐데, 설마 유대인들이 이리저리 밀어줘서, 소위 문화계 내의 유대 마피아들이 여기저기에서 압력을 넣은 결과는 아니겠지? 아니라고 믿자. 의심해봐야 증거도 없고 괜히 정신건강에만 좋지 않다. (내가 왜 이리 심통을 부리느냐 하면, <점원>이 정말 전미도서상이라는 큰 상의 심사에서 최종심까지 올라갈 만큼 대단한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우리나라의 누가 말했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고. 유대인 엄마 아빠한테 물총 잘 맞는 것도 실력이긴 실력이겠다. 꽤 오랫동안 노벨 문학상을 줄 때에도 특정 작품에 대해 심사를 했던 적이 있다. 어디선가 이이가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였다가 미역국 먹은 적도 있다고 들은 거 같은데 도무지 어디서 본 것인지 찾지 못하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여튼 노벨상 못 받았다. <점원>은 전미도서상 수상엔 실패했지만 미국 문화계 유대인협회에서 주는 ‘전미유대종족문학상’은 받았다고 한다. 그래, 이 정도면 양해해주지. 흠.
작품의 무대는 뉴욕의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 빈민가라고 하면 너무 험악할 거 같아서 그렇게 쓰기는 조금 무리다. 이 동네에 60세 노인 모리스 보버 씨가 있어 한 자리에서 21년 동안 식료품점을 운영하고 있다. 아침 여섯 시에 병에 든 우유 박스와 빵을 들여놓고, 이름은 모르지만 폴란드에서 온, 할머니까지는 아니고 나이 든 여자에게 3페니어치 빵을 파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해 밤 열 시까지 꼬박 계산대 뒤에 서서, 정말 하루 종일 그렇게 서 있으면 하지정맥류로 인한 관상동맥 이상으로 벌써 세상을 떴을 터이니, 오전의 상당한 시간 동안은 유대여인인 아내 ‘이다’가 가게를 좀 봐주는 식으로 일주일에 7일을 쉼없이 열고 있었다. 식료품점이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길 건너에 독일 이민자가, 다른 곳에서 온 것도 아니고 하필 독일에서 온 이민자가 최신식 식료품점을 내는 바람에 이젠 그야말로 파리만 날리고 있어서 혹시 등장할지도 모를 멍청하고 불쌍한 인간에게 이 감옥살이 itself를 헐값에라도 팔아버리고 싶어한다. 가게 말고 위층에 방이 있어 푸소 가족에게 세를 주었는데, 하다못해 이 푸소 가족들마저 길 건너에서 식품을 사고는 혹시 모리스가 볼까, 들킬까 싶어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레 드나들 정도니 뭐 말은 다 한 거다. 모리스와 이다 사이에는 맏딸 헬렌이 있고, 아래로 에프라임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과거시제니까 당연히 아들은 병들어 죽었다. 그러나 부모 마음에는 크고 크고 또 큰 상처로만 아직도 살아있다.
식료품점이 장사가 얼마나 안 되는지, 유대인들이 자식 교육 하나에는 정말 열심인 거 아시지? 똑똑하고 문학에 관심이 지대한 헬렌을 대학에 보내려고, 어떻게 해서라도 보내보려 노력했지만 비싼 등록금을 댈 수 없어서 헬렌은 비서 자리를 얻어 취직을 했고, 야간대학에 1년을 다녔지만 주경야독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서 너무 힘들어 때려치우고 말았다. 여기까지면 그래도 없는 집안이 다 그렇지, 하고 넘어갈 수 있으나, 이 집구석은 장사가 안 되도 너무 안 돼, 헬렌이 받은 봉급의 거의 대부분을 (‘가게’ 말고)가계에 보태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소설에서나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 같은 유대인이자 좀 멍청한 친구 줄리어스 카프는 어떻게 하다가 주류 영업권을 따고, 잘 사는 친척이 종자돈을 대주는 바람에 가난한 동네에 주류판매점을 개업해 대박이 난 인물이다. 가난한 동네가 술은 더 많이 팔리는 건 뉴욕이나 런던이나 춘천이나 마찬가지다. 돈이 많아지면서 저절로 똑똑해지기 시작한 카프 사장은 어느 날 밤, 가게 맞은 편 도로에 불 꺼진 승용차가 서 있는 걸 보고 일찌감치 문을 닫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애초에 영업이 잘 되는 주류판매점을 털려고 했던 두 명의 권총강도는 꿩 대신 닭이라고 카프네 말고 가뜩이나 장사 안 돼 돈이 떨어지긴 했지만 하필이면 그날이 헬렌의 봉급날이라서 봉급 받은 대부분을 가지고 있던 모리스 씨네 식료품점에 쳐들어와 돈을 다 털어가고, 그것밖에 없냐고, 더 내놓으라고 협박하다가 급기야 권총으로 쏴 죽이지는 않고, 권총 손잡이로 모리스의 이마를 후려쳐 까무러치게 만들어버린다. 이때 때린 놈은 동네 전담 경찰의 아들 워드 미노그, 폭행을 말리다가 졸도하기 일보직전의 모리스에게 물 한 컵을 떠다 준 놈은, 흠.
그해의 11월의 화요일. 동네에 한 젊은 남자가 등장한다. 검은 턱수염, 낡은 갈색 모자, 갈라진 에나멜 구두와 해졌지만 검정 롱코트를 입은 남자는 며칠 동안 모리스 씨네 식료품점을 관찰하는 것 같다. 프랭크 알파인이라는 이탈리아 계로 부모가 없어서 보육원에서 자랐는데, 누이가 가리발리 부인이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그건 거짓이라고 실토한다. 그가 어떻게 해서 식료품점에 들어오고, 척 보니까 돈 한 푼 없는 걸 알아챈 모리스 씨는 (없는 자들에게는 언제나처럼)차와 빵 같은 걸 먹여 보내고 그랬는데, 어느날 밤 글쎄 지하실에서 뭔 소리가 나길래 집안에 하나 있는 남자라고, 몽둥이를 든 채 지하실 문을 열고 불을 비춰보니 이 추운 날에 거기에 프랭크가 잠들어 있는 거였다. 프랭크는 이때 자신의 신상에 관해 전부 털어놓고 급여는 없어도 좋으니 그저 먹여주고 지하실에서라도 잠만 재워주면 자기가 점원으로 일해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군식구 하나를 더 들일 수 없는 모리스 보버 씨. 거절을 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프랭크는 오히려 더 열심으로 가게를 청소하고, 물건을 받고, 모리스 씨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친절로 손님들을 맞은 결과, 놀랍게도 놀라운 매출을 올리고 만다. 와우. 근데 모리스 씨, 이때는 몰랐다. 나중에는 눈치를 챘지만.
프랭크 알파인이 가게에 쳐들어온 권총 강도 가운데 물 한 잔을 떠온 강도였으며 갑자기 올라간 매출은 당시 자기 몫으로 워드 미노그가 프랭크한테 준 돈의 전부였다. 프랭크, 얘 정체가 뭐야? 회개한 검은 양? 좀 웃긴다.
이 작품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 유대성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양인데 나는 한 집단으로의 유대인이란 종족이 있다는 것에만 초점을 둔다. 그들의 정체성과 폐쇄성, 그리고 종교에 관해서는 특히 관심이 없다. 작품의 말미에 랍비 하나가 나와 누가 유대인인가, 하는 문제를 설파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게 뭐? 나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냥 훅, 읽고 지나쳤다. 그건 이 작품이 나온 1950년대에나 중요한 것이지 지금에 와서 유대인인지 아닌지 뭐가 중요한가 말이지. 소설 속에 모리스의 딸 헬렌이 등장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니 틀림없이 연애하는 장면도 나온다. 헬렌을 둘러싸고 부모, 이웃 간에 유대인은 유대인끼리 혼인을 해야 하고, 유대인이 아닌 족속들은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것도 줄창 나오지만 그래서 뭐?
말이 나온 김에 하나 정확하게 하자. 역자 이동신. 나이도 좀 있는 거 같은데 헷갈린 모양이다. 위에 모리스와 이다 보버 부부 사이에 큰 딸, 효녀 중의 효녀 헬렌이 있다. 헬렌의 연애담도 당연히 등장한다. 그리하여 한 장면이 나온다. 별로 바람직하지는 않은 씬이다. 어쨌든 이제 막 결합을 하려는 순간, 헬렌의 입에서 욕설이 터진다.
“잠시 후, 그녀가 소리질렀다. ‘개자식 ᅳ 포경도 안 한 개자식!’” (p.249)
헬렌도 유대인이니까 여기서 말하는 건 상대가 할례를 안 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포경도 안 한”은 “포경(수술)도 안 한”의 뜻이란 건 안다. 하지만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저자, 역자는 일반 독자하고 똑같이 쓰면 안 된다. 포경은 包莖, 감쌀 포, 줄기 경. 줄기를 감싸고 있는 것, 인간종의 수컷에서 줄기를 감싸고 있는 건 뭐 다들 아시는 것과 같이 소위 “조껍데기”다. 그러니 “포경도 안 하다”는 줄기를 감싸지도 않은 것, 즉 할례를 했다는 뜻이다. 하고자 하는 의미와 완전히 반대되는 말이니 틀린 번역이다. 우리도 알고 쓰자. 대신 “할례도 안 하다” 또는 “포경수술도 안 하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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