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푹한
윤해서 지음 / 시간의흐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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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에 윤해서의 《코러스크로노스》를 읽고 쓴 독후감의 한 문장을 따서 2020년에 윤의 장편소설 <0인칭의 자리>에 그대로 옮겨 썼으니 바로 이러했다


​  “내 독서목록에 이 작가를 보탠다는 것이 축복이다.”


​  구라같지? 정말이다. 당시 우리나라 작가들이 쏟아내던 고만고만하고 우중충한 소설들 속에서 윤해서를 발견하고는 번쩍, 이 81년생 부천태생의 작가가 도대체 누구야? 누군데 이렇게 참신한 시각으로 사물과 사람을 조망해 전위적으로 쓸 수 있는 거야? 깜짝 놀랐었다. 그렇다, 번쩍하고 깜짝. 그러나 이런 감격도 잠깐. 두 번째 읽은 윤해서, <0인칭의 자리>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그리하여 이이의 다른 작품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굳이 찾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코러스크로노스》의 작품들은 스토리도, 시간도, 세계도 사라져버리고 대신 작품 안, 그러니까 문장 속에는 회화와 음악이 틈입하고,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기어이 소나타 형식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소나타 형식이다. 문학에서 간혹 시도하고 있는 대위법이 아니라. 서사와 시간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회화성과 운율이라니, 말 다했지 뭐. 이건 다른 얘기로, 윤해서와 그리 맞지 않는 독자들이 읽으면 경끼하기 딱 좋게 깔맞춤된 소설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반면에 <0인칭의 자리>에서는 산문과 운문을 상호보완 또는 경계를 파괴하려고 한 것 같은데 아쉽게도 《코러스크로노스》를 읽은 후 갖게 된 기대에 미치지 못했었다. 그리고 2022년. 윤해서가 다시 돌아왔다. 역시 시간과 서사가 마구 엉켜버린 소설 <움푹한>을 가지고.

  제목이 <움푹한>이다. 그러면 “움푹함”이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을까? 책 속에 비교적 상세한 설명이 나오기는 한다. 물론 독자가 설명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내가 이해한 움푹함은 일종의 블랙홀이다. 한 방에 확 빨아들여 일단 안에 들어갔다 하면 세상의 모든 것과 단절된 것처럼 감각이 사라지는 현상. 마치 작품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의 아이디어로 만든 도심 속 공원 사일런스 파크 Silence Park의 중심에 지은 완벽한 정적의 건물인 “고요의 집”처럼. 참고로 한 마디 보태자면 “고요의 집”이 장편소설 <움푹한>의 1장 소제목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을 제일 앞에 두고 이후 그것을 설명하다가 마지막에 다시 등장시키면서 작품이 끝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고, 작품 속에서도 시간대는 순식간에 좌충우돌 변하기 십상이니 독자는 정신 좀 차리고 책을 읽어야 할 듯.

  네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있다. 웬수 같은 언니와 엄마한테 치어 없는 집에서 대학에 가기 위하여 2년간 아르바이트를 했고, 진학 후에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휴학을 반복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영국 유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또다시 일을 했지만 정작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하니 변변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했던 조경 전문가 김운. 사실상의 주인공인 주이영과 절친이며 엄마와 언니 대신 1층에 살다가 거북이 한 마리가 담긴 어항을 남겨주고 요양원에 들어간 할머니를 회상하며 가족간 소외를 견뎌가고 있다.

  새벽 다섯 시에 집에서 나와 한강변을 따라 달리기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주현우는 주이영의 친오빠이며, 이영이보다 나이가 많아 이영이 속이 상할 때면 자주 업어주기도 했던 친구같은 남매이고, 직업은 작곡가다. 윤해서답게 주현우가 작곡하는 음악은 감정을 완전하게 건조시킨 절대음악 쪽이다. 현대 작곡가니까 당연히 들으면 보통의 감상자의 귀에는 소음처럼 들릴 것이라 지레짐작은 하지 마시라. 음악 분수에서 거꾸로, 즉 허공을 향해 물입자를 쏘아 올려 마치 빙산인 것처럼 효과를 낼 때 배경음악으로도 사용하니까 현대음악 치고는 듣기 순한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집을 나가 독립해 살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이영의 방문에 걸린 작은 칠판에는 하얀 분필로 “곧 돌아오겠음.”이라 쓰여 있지만 이영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마태오는 학살이 일어나기 5년 전에 르완다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미국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미국인으로 살아간다. 워싱턴에서 사학을 전공하다 경영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 주이영과 운명 같은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들은 르완다로 갈 생각도 있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주이영의 땅인 한국에 와서 동거하기에 이르렀고, 이영이한테 한국어를 배워 이영하고 매우 유사한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나라 사람과 비교하면 큰 키와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지고 있지만 미국인과 비교해서는 그렇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작은 키와 작은 몸이 주이영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와 닿았던 것은 오빠 현우를 닮은 시선이었다. 물론 현우는 현우대로, 마태오는 마태오대로 그것에 관해서는 이영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 주이영은? 모른다. 고등학교 동창생인 김운과 함께 졸업 겸, 민물 거북을 바다에 방생하려고 한 겨울에 강릉 바다로 기차를 타고 떠나기도 하고, 워싱턴 공원에서 큰 개 옆에 누워 개의 몸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를 즐기다가 마테오를 만나 사랑을 꽃피우기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취직을 하기도 했지만 어느 날 업무 차 상급자와 함께 강릉으로 출장을 갔다가 자신이 운전한 차가 상급자를 태운 채 바다에 빠져 남자 상급자는 익사를 하고 이영이는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이영은 프리다이빙 자격이 있을 정도로 수영이 능숙해 가족과 친구들은 아직 살아있으리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작품이 자주 그러하듯,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늘 불행하다.

  문제는 주이영의 실종이다. 세 등장인물은 원래부터 말도 없고, 침잠하고, 늘 생각에 잠겨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참 재수없다, 라고 생각할 정도라고 보이는데, 이젠 정신건강도 매우 심각하게 불량해져 있다. 왜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들은 이 윤해서 언니를 포함해서 작품이 이리도 우울한지, 이것에 관해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울해도 정도가 있지, 실종된 주이영을 제외하고 전부 애초 기질이 우울한데다가 절친과 누이와 연인의 갑작스러운 실종 때문에 독자까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하긴 주이영 역시 우울에서 크게 예외는 아니다. 워싱턴의 배터리 캠블 공원에서 이영은 매일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오늘의 움푹함이 필요해.”

  움푹한 곳에서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돌아올 뿐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듯, 마음이 머물 공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도 흩어지지 않게.

  주이영은 몇 년 후, 자신의 실종이 나머지 등장인물에게 움푹함, 그것도 심하게 움푹한 움푹함이 되어버린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우울과 상실과 허무가 돌이킬 수 없게 깊어지는 움푹한 구멍. 아, 너무 많이 이야기한 건지 모르겠다.


​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첫째가 과도한 우울의 습관 때문이다. 아주 우울이 뚝뚝, 철철, 우르릉꽝꽝 떨어진다, 40일 동안 내린 폭우처럼. 둘째가 주이영의 실종 사건이 과하게 작위적이다. 특히 실종 사건, 자동차를 바다에 거꾸로 빠뜨리기 위해서, 반드시 주이영이 강릉 바다에 빠져 실종되어야 하니까 여러 경우를 상정했겠지만, 아쉬워라, 더 오래 고민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건 내 의견일 뿐, 결정은 작가의 몫이다. 그리하여,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후하게 점수를 주지 않는 건 독자인 내 마음대로이니, 이것도 이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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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4-25 0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 느낌 !!!
좋은데요!
뭔가 있을것 같은...
블랙홀, 음푹함..
그렇네요
윤해서 입력합니다!

Falstaff 2023-04-25 08:13   좋아요 1 | URL
넵. 흥미로운 책입니다. 근데 이런 류의 작품을 좋아하셔야 할 텐데요. 완전 독자의 기호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거 같아서 말입죠. ^^;;
 
버너 자매 을유세계문학전집 114
이디스 워튼 지음, 홍정아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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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디스 워튼은 내게 좀 특이한 작가다. <기쁨의 집>을 불만족스럽게 읽고, <순수의 시대>를 읽은 다음에 다시는 워튼을 찾지 않겠다고 작심을 했다. 아니다, 거꾸로다. <순수의 시대>를 3년 반 전에 먼저 읽었구나. 하여간 그런데 이후에 <이선 프롬>과 <여름>, 이 완벽한 두 권의 뽕짝을 어떻게 하다가 그것도 내돈내산으로 읽으면서 전근대적이긴 하지만 약간의 호감이 생겼다가, <암초>까지 와서는 이것 참,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작가로 여기게 됐다. 그렇다는 말이다. 기껏해야 딜레탕트, 아니면 한 아마추어 독자가 이렇게 생각이 변해온 것뿐이다. 처음 <순수의 시대>와 <기쁨의 집>에선 지긋지긋하게 나를 괴롭히는 계급의식을 극복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디스 워튼 표 섬세한 심리 묘사를 놓치고 아메리칸 청교도 부르주아의 잘난 척에 심하게 반발했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다시 그것들을 읽어보지는 않겠지만 하여간 그랬다. <이선 프롬>과 <여름>은 읽을 때는 재미나게 읽어 놓고, 조금 시간이 지나니까 그게 생각만큼 인상깊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은 앞에 읽은 장편 두 편이 뒤에 읽은 짧은 장편 또는 긴 중편보다 더 윗길이지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다섯 번째 읽은 <암초>로 말끔하게 정리가 된다. 긴박한 스토리를 꾸려나가면서도 심리소설이란 이런 것이라는 듯, 이제서야 이디스 워튼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을유문화사에서 낸 작품집 《버너 자매》가 시중에 풀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단 관심 집중, 그럼에도 이제야 읽었으니 만시지탄이랄 밖에.


​  표제작 <버너 자매>는 좀 긴 중편, 또는 짧은 장편으로 분류할 수 있을 터인데, 그건 작품의 길이 측면에서 본 것이고, 구조상으로는 중(단)편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버너 자매, 앤 엘리자와 에블리나 버너에 관한 시선만 유지하는 시각으로 쓰였다는 말이다. 함께 실린 <징구>와 <로마열熱>도 단편이니까 이 책은 단편집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당연히 여성들이 이야기의 주가 되고, 세 편 다 워튼 표 심리묘사가 아주 탁월하다. 세상의 모든 수작은 심리소설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디스 워튼 만큼 섬세한 심리와 탁월한 반전을 독자에게 즐기게 해주는 작가는 별로 없지 싶다. 단편집 또는 작품집을 읽을 때 흔히 즐겁게 읽은 작품도 있는 반면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다고 독후감을 쓰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행스럽게도 세 작품 다 마음에 들었고, 마음에 든 이유는, 글쎄 이렇게 이야기하면 젠더 차별일 수도 있겠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남성들이라면 쓰기는커녕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바늘같이 섬세한 심리소설을 만들어 냈기 때문 아닐까? 하여간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턱뼈에 약한 통증이 왔다. 턱이 턱, 하고 떨어져버려서. 거 참. 워튼을 며느리가 집 나갔다가 돌아온 시에미 보듯 했으면서 어느 순간에 이렇게 찬사를 늘어놓고 있는지, 사람 마음이 간사하기가 짝이 없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딱 하나 있는데, 번역을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세계문학 시리즈로 찍은 프랭크 노리스의 <맥티그>와 똑같이 홍정아, 김욱동 공역이란 것. 해설 역시 <맥티그>하고 판박이로 김욱동이 썼다. 다만 다른 건, 《버너 자매》는 홍정아, 김욱동 공역이고, <맥티그>는 김욱동, 홍정아 공역이라는 거 하나. 어떤 형태의 번역을 공역이라고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초벌 변역은 홍(또는 김)이 하고, 재벌 번역을 김(또는 홍)이 했다는 거야, 아니면 <버너 자매>는 홍이 하고 <징구>와 <로마열>은 김이 했다는 말이야? 책원고지 밥 먹은 내력으로 봐서 원고료는 똑같이 배분… 했겠지. 왜 내가 이거 가지고 유난을 떠느냐 하면, 두 명의 공역자 가운데 한 명은요, 제가 무지 안 좋아하거든요. 그이 때문에 이 책 선택에 시간이 들었는지도 모르거든요. 누구냐고요? 절대 안 알려드립니다.


​  <버너 자매>의 무대는 미국의 뉴욕이다. 발표는 전쟁중이던 1916년에 했지만 작품의 시대는 전쟁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시절, 그러니까 늦어도 1910년대 초반, 부르주아 전성기 시절. 하지만 화려한 뉴욕의 번화가가 아닌 뒷골목에 자리잡은 작지만 깔끔한 가게 “버너 자매”. 주로 여성용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그게 그것인 보닛 하나를 팔아도 미세하게 눈에 돋보여 여성들이 좋아해 즐겨 찾고 좋아하는 상점이다. 실과 천을 비롯해 옷핀, 바늘, 뜨개실 같은 것들과 삯바느질도 한다. 언니는 결혼하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앤 엘리자로, 동생 에블리나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희생할 수 있는 독실한 기독교도 정도로 보면 된다. 에블리나 역시 착한 마음씨와 눈썰미, 그리고 놀라운 손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가게를 열어 조금씩 저축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스테이크도 구워 먹을 수 있는 수준의 살림을 꾸려나가게 하는 살림꾼이다. 이렇게 모자란 것 없이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던 버너 자매. 아참, 모자란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남자. 하필 막이 오르면 동생 에블리나 버너의 생일이다. 언니는 동생에게 줄 생일선물로 탁상시계를 골랐다. 집에 시계가 없어 동생이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대충 옷을 걸치고 밖에 나가 저 멀리 서 있는 교회의 시계탑을 보고 시간을 아는 일이라서 벌써부터 시계를 선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길 건너 시계점에 가서 탁상시계를 하나 사온 거다. 문제는 독일 출신으로 보이는 시계포 사장 허먼 래미가 한 서른 살 정도이고 그리 인물이 빠지는 것도 아닌데다가, 건강이 조금 안 좋아 보이긴 하지만 원래 여자와 남자 사이에 애정이 싹트려면 별 게 다 좋아 보이는 법이라서 그것도 매력적이었다. 원래는 귀금속과 사치품 전문점인 티파니(오드리 헵번 나오는 <티파니의 아침>에서 그 ‘티파니’가 맞다!)의 관리자였다가 건강 때문에 사직을 했다고 한다.

  시계에 문제가 생겨 다시 허먼 래미와 연결이 되고, 저녁 식사에 래미 사장을 초대해가며 우정을 돈독히 하다가 자연스럽게 허먼 래미는 언니 앤 엘리자에게 청혼을 한다. 하지만 앤 엘리자는 동생 에블리나가 허먼 래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확신해서 래미의 청혼을 거절하고, 래미는 꿩 대신 닭이라고 동생 에블리나한테 또 청혼을 한다. 에블리나는 당연히 좋아서 죽지, 좋아서. 여태까지는 그리도 돈독한 자매 사이가 한 남자가 등장하면서 미세 균열이 일어나고, 언니한테 거절당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동생한테 청혼을 한 남자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자매들도 한심하기는 한데, 빠지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 생기지도 않았으며, 건강까지 좋지 않은 남자와 선뜻 결혼하겠다는 건 또 뭔지. 하여간 소설에 나오는 연애는 번갯불에 콩을 구워 먹어요. 작품을 생산한지 백년이 훌쩍 넘은 오늘날, <버너 자매>를 읽는 독자는 둘 가운데 하나로 결말이 나겠구나, 하고 짐작을 한다. 첫째는 래미 사장이 에블리나에게 청혼을 해서 승낙을 받기는 하지만 결국엔 언니 앤 엘리자하고 혼인을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래미 사장이 하는 짓을 보니 이 결혼은 초장부터 깨진 쪽박이거나 중혼일 수 있겠다, 하는 것. 그러나 어느 쪽으로 갈 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  그러나 나는 <버너 자매>보다 단편 <징구>와 <로마열>을 더 재미있게 읽었다. 심지어 빼어난 워튼 표 심리묘사가 흥미진진하기까지 했다. 두 단편 모두 미국의 상류층 여성들이 출연진이고 심지어 남자는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징구>는 상류층 여성들의 위선과 속물성을 사정없이 까발리는 통쾌한 작품이며, <로마열>은 어려서부터 친구 사이인 앤슬리 부인과 슬레이드 부인의 숨막히는 신경전, 그것도 오래 전에 로마에서 있었던 한 남자에 관한 신경전인데 진짜 재미있게 읽었다. 단편소설인 만큼 스토리를 더 이야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읽어보시라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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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4-22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순수의 시대> 읽기 시작했는데! 그럼 골드문트님은 읽으신 것 중에 <버너 자매>가 제일 괜찮으셨다는 거죠?

Falstaff 2023-04-22 16:59   좋아요 1 | URL
에휴, 본문에 썼다시피, 이 양반의 책과 제 합이 많이 애매한 바, 뭐라 답을 드리기 쉽지 않네요. 하여튼 본격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된 작품은 <암초>였고요, 점점 디스카운트 했던 소품이 <이선 프롬>하고 <여름>이었습니다.
이 책 뿐만 아니라 워튼의 책들을 지금 생각하면, 아슬아슬한 심리묘사가 놀라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그레이스 2023-04-24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징구!
알겠습니다

Falstaff 2023-04-24 21:15   좋아요 1 | URL
옙. 어느 출판사가, <징구> 한 편으로 책을 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다락방 2023-05-10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징구> 라는 책 제목으로 단편 세 편이 실려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골드문트 님이 리뷰하신 <로마열>도 들어 있습니다. 제가 읽은 <징구>에 실린 <로마열>은 <로마열병>으로 실려있는데, 아주 기가 막히게 재미있게 읽었더랬어요. 리뷰하신 <버너 자매>를 읽고 싶은데 그렇다면 제가 가진 단편집과 두 편의 단편이 겹쳐버리네요. 아까워라.. 그래도 버너 자매 읽어볼래요!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ㅎㅎ

잠자냥 2023-05-10 17:31   좋아요 0 | URL
:( 제가 그래서 이 책을 사지 않은 것이지요…. 버너자매만 어케 읽고 싶네 ㅋㅋㅋㅋ 도서관 찬스!

Falstaff 2023-05-11 05:25   좋아요 0 | URL
징구, 그 책 가지고 계시면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게 갑인데, 다락방 님은 잘 안 가시는 거 같아요 말이죠.
버너 자매 읽으시면 속 좀 터질 거 같아서 강추는 못하겠고요, 그래도 마음이 땡기면 읽으셔야지요 뭐.
결말에 제가 두 경우를 두었잖아요. 근데 사실은 두 경우 다 구라랍니다. 아주 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어요. ㅎㅎㅎ

은하수 2023-05-1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곧 읽을거라 골드문트님 리뷰가 끌렸답니다^^
버너자매보다 뒤에 두 단편을 먼저 읽어보고 싶을 정도예요~~

아... 그리고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Falstaff 2023-05-11 15:25   좋아요 1 | URL
재미있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
 
빛과 영원의 시계방 초월 2
김희선 지음 / 허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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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안 좋아하는 독자도 이 책 읽으면 빠져버릴 걸? 하여튼 나는 스트루가츠키 형제들보다 더 재미나고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이게 진짜 김희선이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진짜 김희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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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4-20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론 옥의 티는 있지. 없으면 그게 사람이냐!

잠자냥 2023-04-20 17: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문트가 SF를! 띠용?! ㅋㅋㅋㅋ

Falstaff 2023-04-20 18:10   좋아요 1 | URL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생긴다니까요! ㅋㅋㅋ

자목련 2023-04-21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 님이 별5를 주신 한국문학이라니, 궁금하네요!

Falstaff 2023-04-21 15:59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저도 한국문학 좋아해요.
요즘 우리 책들이 다 비슷비슷, 우중충해서 잘 안 읽는 것뿐입니다. ^^
 
말 한 마디 때문에 아시아 문학선 12
류전윈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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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전윈의 <말 한 마디 때문에>를 읽은 것은, 지난 달에 이이가 쓰고 모우선이 각색한 희곡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 읽고나서 쓴 독후감에서 이야기했듯이, 류전윈의 원작을 읽어볼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맞게도 동네 도서관 개가실에 <만 마디….>의 전편 격인 <말 한 마디…>가 있어서 거의 반사적으로 집어 들었다.

  류전윈은 1958년생 개띠 작가로, 허난성 신샹시 옌진현 출신이다. 작가가 열다섯 살 때인 1973년에 처음으로 고향 옌진현을 떠나 군에 입대해 복무를 했다는데,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열다섯 살짜리를 군대에서 받아주었던 모양이다. “인민”의 공화국에서 대가리에 쇠똥도 벗겨지지 않은 열다섯 살 아이, 우리나라 학제에 의하면 중학교 3학년생에게 총을 잡게 했다니, 대단하다, 대단해. 그런데 그 나라에선 군대에서 교육도 시키는 모양인지 1978년엔 다른 곳도 아니고 북경대학, 즉 베이징대학에 입학한다. 류전윈의 청소년기 시절 중국은, 인구는 많은 반면에 대학의 수도, 학교의 입학 정원도 극히 적어 학교의 등급은 차치하고 대학에 입학한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상당히 비싼 총명탕을 몇 사발이나 들이켰다는 증거였다. 입학시험에 합격하면 옌진현 정도의 촌에서는 큼지막한 현수막 깨나 걸렸을 터인데 하물며 다른 곳도 아니고 베이징 대학이라니, 류전윈이 공부도 엄청 잘했던가 보다. 그럼 생김새는 좀 모자라야 할 텐데 그것도 아니다. 생기기도 잘 생겼지, 소설을 써도 쓰는 족족 베스트셀러에 문학상을 수집하는 게 취미일 정도라니, 좀 재수없지?

  왜 작가가 허난성 신샹시 옌진현 출신이라고 소상하게 밝혔는가 하면, 이 책 <말 한 마디 때문에>의 부제가 “옌진을 떠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챕터를 제외하고 작품의 무대는 옌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양쟈좡楊家莊, 즉 양씨 성 집성촌에 사는 두부장수 나이든 양, 라오양老楊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첫째가 장자요, 둘째가 거부요, 셋째가 그이인데 화수분이라고 합죠,는 아니고, 첫째가 사는 데 악착 같은 바이예(百業), 둘째가 작품의 주인공으로 온갖 굴곡을 겪을 팔자인 바이순(百順), 막내가 양아치까지는 아니더도 적극적으로 한 평생 놀고 먹고 싶은 소원을 가진 바이리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옌진 현이라는 행정단위 이곳저곳에 산포한 숱한 X좌장, 씨족 마을의 라오X가 등장해서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다. 이 책 재미 있어서, 당신도 한 번 읽어보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힌트를 드리자면 무지하게 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하는 장편소설이라 등장인물을 일일이 다 기억할 필요가 없으니 나처럼 라오리, 라오서, 라오쥔, 라오됭, 라오주, 기타등등의 라오들을 전부 외우려고 쓸데없이 뇌 용량을 소모하지 않으셔도 좋다는 점. 뒤쪽으로 가면 작가가 알아서 서너 번씩이나 친절하게 중요한 인물들을 시간/세월 순서대로 정리해주니까. 이렇게 등장하는 라오들은 전부 무슨 장사를 하거나 특정한 기술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들이다. 라오양도 양씨 집성촌 양쟈좡에 사는 두부 만들어 파는 두부장사요, 뤄쟈좡의 랴오뤄 뤄창리는 식초를 만들어 팔면서 누가 죽었다 하면 상가집에 달려가 장사 지내는 일을 진두지휘하는 함상 일 전문가이며, 쩡쟈좡의 무릎이 좋지 않은 라오쩡은 50리 안쪽에서 경사나 상사가 있을 때 돼지를 잡아주는 돼지 백정이고, 라오쟝은 옌진 시내에서 큰 염색공방을 하며, 라오루도 시내 근교 대나무밭에서 죽업사竹業社를 하면서 주인공 바이순과 인연을 맺는다. 그러니까 가난한 제조/상인이거나 돈을 좀 벌어 그럴싸한 업장을 가지게 된 제조/상인 출신의 공방 사장 정도다.


​  현대 중국 문인들의 소설을 읽어보면, 생각나는 대로 지금 하고 싶은 얘기와 연결이 되는 인물이라면 모옌을 필두로 다 고만고만한 연대의 쑤퉁, 류전윈, 옌롄커, 위화 등의 경우에, 우리나라 독자들이 같은 동아시아 사람임에도 중국인들은 참 독특하다고 느낄 정도의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에 너무 많은 인구가 살아 어린 시절부터 그만큼 대단한 경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극성을 떨어 그런지, 어디서 들은 바와 같이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작가들의 유소년기에 문화혁명이라는 여차하면 언제 목숨이 날아갈지 모르는 격변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극도로 이기적 유전자가 발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이 작가들의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거나, 같은 의미로, 대단히 솔직하다. 솔직해서 그럴 수도 있다. 우리나라나 일본사람들은 감정을 속으로 삭이는 대신 그들은 생존을 위하여 (현대 중국인의 특색인) 큰 소리로 항의하거나, 정말로 실행하면서 타인의 시선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보인다. (그럴 때마다 좀 징글징글하기도 하다.)

  양바이순이 제일 좋아하는 건 상갓집에서 사회를 보는 “함상喊喪” 전문가 뤄창리가 큰 소리로 노래하듯이 장례를 집행하는 걸 구경하는 일이다. 중국의 장례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장례 전문가 “함상”쟁이가 있어서 손님 등장부터 상주와 인사, 문상, 문상 후 음식 대접 같은 일련의 절차를 크게 외쳐 장례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바이순이 학질에 걸려 끙끙 앓고 있을 때, 집에 있던 돼지가 탈출을 감행해 열이 펄펄 끓는 바이순만 집에 남고 남은 가족 모두가 돼지를 찾으러 갔단다. 이때 바이순의 한 살 위 친구 리잔치가 들러서 30리, 12km 거리에 있는 라오왕이 죽어 아마 뤄창리가 함상 노릇을 할 터인데 구경가지 않겠느냐고 유혹을 했고, 악마의 목소리는 언제나 황홀한 법이라 순식간에 열이 내리며 진땀도 멈춘 것 같아 단숨에 30리를 뛰어간 적이 있다. 그러나 왕씨 상가엔 엉뚱한 함상쟁이가 한참이나 모자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어 정작 뤄창리 구경도 못하고 그냥 돌아오는 동안 집에서 키우던 양 한 마리가 울을 넘어 도망가고 말았다. 이에 열을 잔뜩 받은 아버지 라오양은 지게 작대기로 양바이순의 대갈통을 후려 갈기며 당장 양을 찾아오라고, 찾지 못하면 들어오지도 말라고 호통을 치고 학질 걸린 아들을 한 밤에 내쫓고 말았다. 이때가 20세기 초 국민당 치하였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밤이면 들판에 늑대가 배회했다고 하니 깡촌은 정말 깡촌이었겠다. 어디 가서 양을 찾나. 그냥 마을 어구의 타작마당 헛집에서 잠을 청했다. 딱 이 시점에 모종의 일로 억하심정이 생긴 이발사 라오페이가 가슴에 날이 시퍼런 칼을 품고 아내와 처남을 쳐죽이려 밤길을 나섰다가 길가에 쭈그려 앉은 바이순을 밟았고, 이것도 인연이라고 밥도 먹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바이순을 데려가 이미 문을 닫은 밥집의 현관문을 쿵쿵 두르려 주인을 깨우더니 양고기 볶음 국수를 한 그릇 사주어 바이순이 맛나게 먹었다는 거다. 그게 맛이 있어서 맛이 있었겠나. 옛사람 말씀대로 기갈starvation이 감식이었겠지. 배고픔과 갈증飢渴이 단 음식甘食, 이게 맞는 말은 물론이고 진리다, 진리. 그런데 양바이순이 이때는 몰랐다. 라오페이가 불쌍한 꼴을 당하고 있던 소년 바이순을 데리고 가서 한밤에 문을 닫은 식당을 두드려 주인을 깨우고 기어이 볶음 국수를 한 그릇 먹게 하면서 자신도 한숨 돌려 여유를 찾아 서서히 증오가 풀려 아내와 처남 죽일 생각을 접게 했으니, 하룻밤 추위에 떨더라도 젊은 학질 환자 바이순의 숨은 넘어가지 않았을 터이라, 정작 사람 목숨 살려준 건 라오페이가 아니고 양바이순 자신이었다는 걸. 그것도 칼 맞아 죽을 라오페이의 아내와 처남 두 목숨과 더불어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당할 라오페이의 목숨까지 말이지. 그걸 그럼 나중엔 알게 되느냐고? 아무렴. 양바이순도 몇 년 후에 거의 비슷한 짓을 하게 된다.

  그렇게 순한 바이순, 백번이나 순한 바이순百順이 무슨 수로? 당신이 바이순이라면 학질에 걸린 아들을, 아무리 미운 둘째 아들일지언정(나도 둘째 아들이다, 왜!) 겨울 한밤에 내쫓는 아버지한테 기쁜 마음으로 두부 만들어 파는 법을 배우고 싶겠어? 그래서 인연을 맺은 김에 라오페이를 따라가 이발 기술을 배웠으면 하는 의견을 피력하게 되고, 라오페이는 도제관계를 맺기 위하여는 너무 깊은 정이 들었던지라 자기 대신에, 우리나라만큼 백정 일을 천시하지 않는 중국이라서 그랬겠지만, 쩡쟈좡에서 돼지 잡는 라오쩡의 도제로 보낸다. 물론 처음부터 돼지를 잡지는 못하고 닭과 개를 잡는 일부터 천천히 진행하다가 아픈 무릎이 도지는 바람에 생각보다 빨리 실전, 즉 돼지도 잡게 되면서 칼부림 한 번 제대로 할 줄 아는 검사劍士가 되고, 이때 몇 년 전 라오페이처럼 한밤에 칼을 품고 길을 나섰다가 역시 동네 어귀 타작마당의 움집 곁을 지나며 한겨울 밤에 홑옷을 입은 여자 아이를 밟아 볶음국수를 사 먹이는 일이 생겨서 그날 그 일을 떠올리니, 인생은 역시 수레바퀴야.

  바이순의 팔자 한 번 기구하고 기구하다.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직장생활을 길게 이어가지 못하는 바이순은 심지어 이탈리아에서 온 신부의 도제가 되기도 하는데 결국엔 그리스도교에 감화 감동을 받지 못하고 이별하지만, 하여간 신부의 도제가 된 기념으로 이름을 양바이순에서 양모세가 되고, 양모세로 한 일 년을 산 다음엔 중국식 만두인 만떠우 장사를 하는 우샹샹이란 과부의 데릴남편으로 들어가면서 양모세가 우모세로 성까지 바꾸는 일까지 생긴다. 이 작품의 부제가 “옌진을 떠나는 이야기”. 이건 당연히 우리의 주인공 양바이순이 어쩔 수 없이, 예전 스승으로 <논어>를 가르쳐준 라오왕을 예로 삼아 옌진을 떠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을 나서게 되는 참으로 기구한 팔자를 그리고 있다.

  재미있다. 그래서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스포일러가 될 거 같아 이쯤에서 말아야겠다. 읽는 도중에 모우선이 각색한 희곡을 이 책 읽은 다음에 봤으면 더욱 좋았을 거란 생각까지 들었다. 희곡 <만 마디를 대신하는 말 한 마디>는 이 책과 후속편인 <만 마디…> 두 권의 스토리를 고스란히 담았다. 후속편은 몇 달 있다가, 희곡의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을 때쯤 해서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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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4-20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류전윈 생김은 딱 제 스탈인데요?
근데 재수없는 사람 맞는 것 같습니다. ㅎㅎ
그렇죠. 정말 삶은 징글징글한 것 같습니다. ㅠ
저도 언젠가 읽어보겠습니다.

이 시리즈 괜찮은가 봅니다.

Falstaff 2023-04-20 16:38   좋아요 1 | URL
ㅎㅎㅎ 류전윈이 스타일입니까. ㅋㅋㅋ
2부작이라던데, 이 책에선 옌진을 뜨고, 다음 책에선 돌아오는 모양이더군요.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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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이름 하나만 딱 보고 고르는 책 가운데 유진 오닐이 있다. 오닐의 책은 하여간 눈에 보이는 족족 읽어 치운다. 물론 그렇다고 오닐을 일부러 검색해서 안 읽어본 오닐 어디 숨었나, 뒤지는 수준은 아니고 온라인이나 도서관이나, 현금 주고 사지는 않는 동네 책방에서나 눈에 띄기만 하면 읽는다. 이 책도 우연히 눈에 띄었고, 곧바로 도서신청을 해서 빌려 읽었다.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Mourning Becomes Electra》라니 당연히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을 현대식으로 리메이크 한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짐작이 맞았다. 아이스퀼로스의 삼부작에는 오레스테스를 주축으로 해 아가멤논의 도착해 그날로 목욕하다가 아내에게 살해당하는 <아가멤논>, 오레스테스가 친모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친모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쪼개 죽이는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그리고 오레스테스가 운명의 여신들에게 쫓기다가 아테나의 설득으로 복수의 여신이 복수를 포기하는 <자비로운 여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아가멤논 가문(아트레우스 가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인류를 넘어서 신화 시대까지 아울러 가장 심한 콩가루 집안으로 세상의 온갖 명예와 부귀와 엉망진창의 가족관계와 죽음과 복수 같은 구토유발 요인을 소중하게 간직한 대단한 집안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숱하게 많은 작가, 화가, 극작가, 시인 나부랭이들이 아가멤논 가문의 이야기를 차용하여 작품을 만들거나 작품 속에 인용해왔다. 어떤 것들이 있나, 한 번 정리해보려 했으나 다른 건 모르겠는데 내가 미술 쪽에 많이 약해서 양심상 그러면 안 되지 싶다.

  오레스테스 중심의 아이스퀼로스 삼부작과 달리 유진 오닐의 삼부작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는 무대를 트로이 전쟁에서 확 끌어올려 1865년 미국의 남부 분리독립 전쟁이 막 끝난 시점이며, 장소는 그랜트 장군의 직속부대에서 활약한 육군 준장 에즈마 매넌 장군의 저택이다. 아가멤논 당대와 아들 오레스테스네 집구석의 엽기만발한 칼부림도 막장이지만 아가멤논 윗대의 야단법석이 훨씬 더 막강하다. 그러나 유진 오닐은 현명하게도, 마치 아이스퀼로스처럼, 아가멤논의 윗대에 관해서는 극과 관련이 있는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춘다. 신화상에선 아이기스토스, 드라마에선 애덤 브랜트.

  전직 판사이자 시장, 현직 육군 준장 에즈마 매넌의 아버지 에이브 매넌 씨는 캐나다 출신의 간호사 마리 브란톰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그런데 정작 마리와의 연애에 성공한 건 에이브의 동생 데이비드 매넌이었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애덤 브랜트.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교조적으로 엄숙한 기독교가 판치던 곳이 미국 동부였던 바, 장자 에이브와 매넌 가문은 (당시엔 하녀 급이었던)한갓 간호사 따위와 연애를 해 아이까지 퍼질러 낳은 데이비드를 파문해버렸고, 그의 상속분은 거의 헐값으로 몰수해버렸다. 세월이 흘러 이제 애덤 브랜트는 세상 멋진 사내가 되었으며, 에이브의 아들, 그러니까 데이비드의 조카이자 애덤의 사촌형이 운영하는 선박회사 소속 플라잉 트레이즈 호의 선장으로 근무하면서 사촌형수인 크리스틴을 유혹하는 데 성공해 틈틈이 뉴욕의 호텔에서 한 시절 당할 여인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크리스틴과 뼈와 살이 타는 밤을 만들고는 했다. 아이스퀼로스의 극작품에서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처럼.

  애덤 브랜트는 다분히 캐나다 간호사 출신 천한 계급의 어머니를 욕보인 매넌 가문에 복수하기 위해 사촌 형수를 특정해 유혹한 것으로 진정으로 원하던 복수의 끝은 형수를 매개로 사촌형과 결투 끝에 그의 숨을 끊어 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벌써 세상은 19세기의 미국. 결투라니, 어림도 없다. 대신 이들의 딸인 라비니아한테도 껄떡거리기 시작하는데, 라비니아야말로 저 신화시대의 엘렉트라가 환생한 인물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쳐 있어 애덤의 유혹은 말 그대로 이도 들어가지 않는다. 뭐 이런 스토리다. 크리스틴은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진심으로 남편(이 될) 에즈마 메넌을 사랑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지긋지긋한 시댁식구들과 시댁 가문의 엄격한 격식, 냉정한 몸가짐 등등에 넌덜이가 나, 시媤 자가 들어가는 모든 것, 시금치 뿐만이 아니라, 시모노세키, 시오노 나나미, 시오도어 루즈벨트도 싫어했는데, 어쨌거나 그러면서도 딸 라비니아와 아들 오린을 생산했다. 그러나 그때 뿐, 이젠 남편 에즈마의 살갗이 닿는 것도 징글징글하다. 대신 빈자리를 애덤 브랜트로 메우고 있는 건데, 아이고, 그냥 이혼을 해버리지, 그냥 참고 살다보니 신화적인 비극이 19세기 미국땅에서도 벌어지고 마는 걸 크리스틴은 몰랐었지.

  작품은 전쟁이 끝나고 메넌 장군이 집으로 돌아오는 날 시작한다. 라비니아는 엄마가 브랜트와 뉴욕에서 만나 키스하고 방으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새나오는 신음소리까지 이미 들어버린 상태. 엄마도 현장을 들켜버렸으니 라비니아한테 이실직고해야 했고, 아빠에 대한 라비니아의 비정상적인 애정을 알고 있는 크리스틴은 저것이 아빠한테 다 일러바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리스 신화에서는 욕탕에서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아가멤논의 얼굴 위에 어두운 천을 씌운 다음 클뤼타임네스트라가 직접 도끼로 머리통을 쪼개 죽이는 반면, 이미 과학의 시대에 접어든 미국에서는 정부 애덤 브랜트가 준비해준 화학의 힘을 이용해 심장병 약이라고 구라를 치고는 독약을 장군의 목구멍으로 넘겨버린다. 신음을 하는 장군, 문 밖에서 엿듣던 라비니아가 문을 왈칵 열어젖히고 방으로 들어오자 아빠는 두번째 손가락으로 엄마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저년이 한 짓이야! 약 때문이 아니야!”

  어떠셔? 정말 《오레스테이아 삼부작》하고 비슷하다.


​  그럼 신화에서 오레스테스 역을 맡은 이 콩가루 집안의 아들 오린은? 가문도 좀 문제다. 전쟁이 터져 시장major를 하던 아버지는 장군 계급장을 달고 전장으로 떠났는데 아들 오린은 정말로 참전하기 싫었다. 그러나 엄격한 누나 라비니아는 엄마 크리스틴이 아들 오린을 자기보다 천배는 더 사랑하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문의 명예와 영광의 지속을 위하여 입대할 것을 강권해 소위 계급장을 달고 참전을 하기는 한다. 전쟁터에서 누구보다 겁이 났지만 여차하면 자신이 지금 겁내고 있다는 것이 뽀록 날까봐, 그래서 가문의 명예에 스크래치가 갈까봐 오히려 더욱 위험한 작전이 벌어지면 선봉에 서겠다고 자원하고는 했다. 그러다가 도가 심해지자 거의 미치는 수준에 임박해 아무도 돌진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벌떡 일어나 악을 쓰며 돌격 앞으로, 약진을 전개하고, 그걸 바라보던 동료 비슷한 미친 놈들도 함께 으아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용맹하게 돌격을 감행해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건만, 행운이 언제나 있는 건 아니라서 머리통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아직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가, 아버지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죽었다는 전갈을 받은 후에 머리에 흰 붕대를 칭칭 감은 상태로 집에 돌아온다. 그러나 정작 오레스테스로 읽고 오린으로 발음하는 이 아들은 머리의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이 아니라 전쟁 중에 숱하게 겪은 비참한 상황의 기억에 의한 고통, 즉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끔찍하게 시달리고 있다. 그것이 간혹 공격성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비정상적 사고로 나타나기도 해 오린만 등장하면 얘가 무슨 짓을 할지 독자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든다.

  유진 오닐의 극작품을 보면 가족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참 할 말이 많다. 이 작품에서도 아버지와 라비니아, 어머니와 오린, 나중엔 라비니아와 오린 사이의 애정이 예사 가족들 사이에서 따사로운 눈길로 기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딸이 어머니를, 아들이 아버지를, 동생이 누나의 애인을, 누나가 동생의 애인을 질투할 정도의 사랑이 흔하게 모습을 드러내 당혹스럽다. 뭐 이 작품만 그런 게 아니긴 하다.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에서도 그렇고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도 조금 그런 기미가 보인다. 내 생각엔 오닐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지 않고, 오닐이 젊은 시절, 청소년 시절부터 그리스 신화와 그리스 극에 깊은 관심을 두어 기본적으로 어딘가에 그리스의 (특히) 비극 요소를 심어두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전을 읽어두면 이런 것이 편하다. 후에 고전을 인용하거나 변용하거나 리메이크한 작품을 읽을 때 전혀 무리없이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유진 오닐이니까 이런 대작을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바꾸어 공연시간이 무려 다섯 시간이 넘는 작품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닐 듯하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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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4-18 1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유진 오닐은 작가 이름만 보고 무조건 읽습니다. 유진 오닐은 자기 가족사를 작품속에 변용해서 투영해 넣는 솜씨가 일품인 거 같아요. 결국 대부분이 본인과 본인 가족의 이야기다 보니 울림도 좀 남다른 거 같고... 하여간 기막힌 작가입니다.
그나저나 최근에 지만지에서 유진 오닐 단막극선이 출간되었는데, 역시 가격이 사악해서 도서관에 신청했는데 신청이 안 되더라고요....?
관리자에게 문의하라고만 뜨고....... -_-; 쳇 제 돈 주고 사봐야 할 거 같습니다.

꼬마요정 2023-04-18 12:34   좋아요 2 | URL
진짜 가격 너무 사악해요 페이지 수도 많지도 않구만.. ㅜㅜ 전 이 가격이길래 600 쪽은 넘는 줄 알았네요ㅠㅠ

Falstaff 2023-04-18 13:13   좋아요 1 | URL
오닐 작품은 읽기 전에 ˝이번엔 어떤 가족이 등장하나?˝ 호기심이 팍팍 듭니다.
ㅎㅎㅎ 울 동네 도서관은 착해서 사달라면 거절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출간 5년 안에만 신청하면요.
요정님. 도서관 가세요. 진짜 좋아요.

꼬마요정 2023-04-18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겠어요!! 아트레우스 가문은 모든 막장의 원형 같습니다. 옛날 사람들 천재인 듯!! 담아갑니다^^

Falstaff 2023-04-18 13:14   좋아요 1 | URL
옙. 당시 그리스 사람들 머리 속에는 뭐가 들었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stella.K 2023-04-18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다섯 시간요? 엄청나네요.
실제로 공연되기는 어렵겠네요. 그냥 소설로 쓰지...
몇년 전 도 선생님 작품인가? 우리나라에서 공연됐다고 하던데
그게 6시간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도 장시간 공연을 즐길 줄 아는 문화가 됐구나 싶기도 하지만
그때 이후로 또 했다는 소식은 못 들은 것 같습니다.
리뷰 사악하고 재밌게 쓰셨네요. ㅎㅎ

Falstaff 2023-04-18 15:49   좋아요 1 | URL
몇주 전에 독후감 쓴 <리먼 트릴로지>도 다섯 시간을 훌쩍 넘긴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공연도 했고요.
도저히 연극으로는 공연하지 못할 것 같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저는 관람하지 않았는데요, 누가 조시마 장로 역을 해서 대사를 할 지는 무척 궁금했습니다. 정동환이 했더군요. 이순재의 말에 의하면 발음이 제일 좋아서라던데, 수긍이 가더랍니다.
별 거 아닌데 독후감 재미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ㅎ

coolcat329 2023-04-19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전을 읽으셔서 이런 작품도 즐기실 수 있으시니 부럽습니다.
희곡 좋아하시는 골드문트님은 지만지 드라마 정말 너무 좋으실 거 같아요.
도서관에 주문해서 보면 되니 비싸도 상관없구요 ㅎㅎ

Falstaff 2023-04-19 16:21   좋아요 1 | URL
에구, 부럽긴요. 대신 전 백수잖아요. 쿨캣 님도 시간 많은 시절이 올 겁니다. 될 수 있으면 늦게 오기 바라겠습니다. ㅎㅎㅎ
지만지 드라마 좋아요. 비싸서 좋아요. ㅋㅋㅋ 다른 사람들 비싸서 망설일 때 많이 읽고 허풍떠는 재미도 있답니다. 너무 솔직하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