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 대산세계문학총서 181
샤를 드 몽테스키외 지음, 이자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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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테스키외의 소설? 작가 이름을 잘못 읽은 줄 알았다. 철학자이며 법학자. <법의 정신>이 세상의 명저로, 당대의 클래식으로 알려진 사람인데 설마 다른 집안 사람이겠지. 그런데 내가 아는 몽테스키외가 맞았다. 그가 소설도 썼다. 그것도 서간체 소설로 18세기 초에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륙과 영국에까지 필명을 날리고 발행부수도 당시 수준으로는 거의 밀리언 셀러 비슷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가 나오고 서간체 소설이 유행하기 시작해서 영국의 사무엘 리차드슨이 <파멜라>를 썼고, 피에르 쇼데를로 라클로도 <위험한 관계>를 썼단다.

  나는 우연히 <파멜라>도 <위험한 관계>도 읽어봤다.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와 더불어 18세기 작품이며 서간체 소설인데, 21세기를 사는 독자가 읽고 공감하며 즐기기에는 과하게 올드하다. 물론 그렇다고 읽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19세기도 아니고 18세기, 17세기 문학작품을 선택할 경우엔 처음부터 올드 스타일, 지금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을 수 있음, 당연시 여기던 젠더와 계급, 인종 차별 등을 충분히 감안하셔야 할 것이라는 도움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일 뿐이다. 물론 지금 읽어도 포스트 모던처럼 읽히는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도 있지만 로렌스 스턴은 예외적인 경우이다. 특히 서양의 문학 작품을 읽으면 작품 속에서 자주 거론하는 고전들 <업둥이 톰 존스 이야기>니 <모험적 독일인 짐플리치시무스>니, 심지어 인용 순위 1번을 차지할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마저도 일단 “읽어내고야 말겠다.”라는 비장한 각오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말씀. 당연히 내 경우에 한해서 하는 말이며, 대산세계문학총서에서만 골라봐도 그랬다는 거.


​  전에 읽은 어느 책에서 (율리 체의 <잠수 한계 시간>이다!) 대학원 졸업하면서 지도교수 인터뷰를 하는데, 학위 논문을 쓰느냐 아직 수준에 미치지 못했느냐, 하는 자격을 위한 구술시험에서, 교수가 인터뷰이에게 질문을 하기를, 답은 뻔하게 몽테스키외이긴 하지만, 질문의 핵심은 몽테스키외의 정확한 철자, 알파벳이었다. 주인공은 철자는커녕 몽테스키외가 어쩌고저쩌고 몽테스키외인 줄도 모르는 거라, 내놓고 교수한테 비아냥거렸고, 그래서 당연히 낙방하는 줄 알았지만 지도교수를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는 에피소드를 재미나게 읽은 적 있다. 이 독후감 읽는 분 가운데 무슨 몽테스키의 알파벳을 컨닝 없이 쓰실 수 있는 분께 만 원 드림.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 Charles Louis de Secondat Montesquieu. 어떠셔? 후덜덜하지?

  보르도 근교에서 태어난 귀족의 자재다. 혁명 이전에 귀족이었으면 정말 귀족이다. 혁명 끝나고 갑자기 정권을 잡은 코르시카 촌놈 보나파르테가 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개나 소나 싸움 한 번 잘했으면 그냥 던져주던 것이 작위였고, 이때 작위 받은 신 귀족들은 혁명 전 골수 귀족들한테 은근히 야코가 죽어 슬슬 눈치를 봤었다니까. 18세기에도 프랑스의 상류계층은 군인, 성직자, 즉 “적과 흑”이 제일이고 이 다음이 법관. 몽테스키외는 제3의 상류층이면서, 품위에 맞지 않게 소설도 썼다. 하긴 이 당시, 프랑스의 계몽주의가 정점을 달릴 이 시점엔 몽테스키외와 함께 백과전서학파의 대표선수로 이름을 날린 드니 디드로도 재미는 없지만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하기도 한 <운명론자 자크>를 썼으니 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지금 말은 슬쩍 하고 지나갔지만, 이 책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의 중요한 힌트 하나를 던졌다. 때는 바야흐로 절정을 달리던 계몽주의 시대. 게다가 몽테스키외는 계몽주의, 백과전서파의 대표. 이러면 책이 재미가 있을까, 없을까? 딱 부러지게 얘기하면, 당시엔 정말 재미있었을 것 같다. 근데 지금은 아니다. 왜 그런고 하니, 몽테스키외가 엄숙한 법학자이며 철학자일지라도 일단 소설을 썼고, 상류계급에서는 적과 흑에 이은 넘버 3의 떨거지인지라 불만이 없을 수 없어 소설을 통해 자신의 불만을 다 털어놓을, 아니, 배설해버렸을 터이고, 당연히 이 와중에 적과 흑들의 심기를 조금이나마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책을 사 읽어볼 당시 세미 부르주아들이 볼 때 얼마나 상쾌했을 것이냐, 하는 점이다. 그렇겠지? 그렇다니까. 하지만 이후 3백년이 흐른 지금 발랑 까진 현대의 독자가 읽으면, 그저 피식, 옛날엔 꼰대들이 이런 식으로 놀았군. 하고 그만일 확률이 높다. 나처럼.

  실제로 몽테스키외가 이 책을 출간하고, 진짜로 읽어본 적과 흑, 가운데 빨간 제복을 입은 군인들은 원래부터 책 읽기를 그리 즐기지 않아서 시비를 걸지 않은 것 같고, 흑black, 사제들이 열을 받아 주교한테 쪼르르 달려가, 주교님, 몽테스키외라고 하는 스키가요, 소설을 하나 써서 냈는데요, 주교님은 절대 읽어보지 마셔야 합니다. 뇌심혈관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 특별히 조심하셔야 하거든요. 요 지랄을 했고,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는 게 나 같은 유물론자나 프랑스 주교나 비슷비슷해서, 주교는 득달같이 <어느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사 읽어봤더니, 이게 정말 스팀이거든. 그리하여 “신을 모독하는 불경스러운 언어” 운운하며 비난을 한 바 있으며, 몽테스키외는 무려 흑의 두목께서 이리 얘기를 하시니, 상당부분을 수정 및 삭제해 개정판을 내기에 이른다. 물론 오늘날 번역 출판한 것은 다 원복시킨 것이기는 하지만.


​  몽테스키외가 왜 난데없이 페르시아인의 편지를 썼느냐 하면, 프랑스에서 벌어졌거나 지금 하고 있는 일련의 불만스러운 사태를 프랑스인의 입을 통해 원고지를 메꾸었다면, 부르봉 왕가와 그들의 똘마니인 적과 흑이 프랑스 산 주둥이를 내버려두었겠느냐,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점을 고민했겠지. 그리하여 프랑스에 처음 와보는, 그러나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프랑스 국경을 넘어가지 못하는 반 유배를 당한 페르시아, 당시 시각으로 얘기해서 대 아시아 지역 사람이 바라본 프랑스/유럽 문화의 모순점을 유럽인들이 미개한 종교로 치부하고 있는 무슬림과 비교하여 이야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름 재미있게 스토리를 전개한다.

  때는 1711년 4월. 페르시아의 대 귀족 우스벡이 고향 이스파한을 떠나 수도 쿰에서 하루만 머물고 트뤼키예로 향하며 친구 루스탄에게 보내는 편지를 1번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앞으로 160 개의 편지가 더 나와 어느덧 1720년이 되고, 이 사이 7십여 년 동안 왕좌를 깔고 앉았던 루이 14세가 숟가락을 놓고, 증손 루이 15세가 다섯 살의 나이로 왕위를 이으며 루이 15세가 15세 될 때까지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펼치게 된다. 페르시아의 대귀족이라고 하지만 우스벡은 뭐 별 거 아닌 거 가지고 왕의 눈 밖에 나서, 작품 내내 모든 아시아가 다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하고 또 그게 크게 틀린 건 아니지만, 아시아 나라에서 왕의 눈 밖에 났다 하면 대부분 골로 능지처참이나 참수를 당해야 하는 것이 일반상식이라 우스벡 역시 이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서, 페르시아 환도에 목이 잘리느니 일단 왕이 생각을 바꿀 때까지, 그게 언제가 될 지는 모르긴 하지만, 일단 페르시아를 튀자, 튀긴 튀는데 혹시 모르니까 이왕 가는 거 멀리 튀자, 하고 굳게 마음을 다진 후, 수없이 많은 처첩들의 장소, 하렘에 든다.

  페르시아 거 참 웃긴 나라였다. 대귀족이고 남편이잖은가. 두번째 아내와는 혼인 식을 올리긴 했지만 우스벡이 매일 시도를 했어도 아내는 무려 몇 달 동안 처녀의 몸이었단다. 결혼을 해도 남자와 피부를 대는 것 자체를 명예, 정절, 절개의 훼손으로 생각했다고 하니 이거 확실히 비정상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스벡이 거의 유배를 떠나기 전날 밤에는 많고 많은 처첩들을 한 방에 몰아놓고, 이 사람들도 좌식 생활을 하니까, 금침에 비스듬히 누운 우스벡은 모든 처첩의 옷을 홀랑 벗기고, 이후엔 어떻게 했는지 나도 모른다. 책에도 안 나온다.

  다음날 길을 떠나며 환관 대장에게 하렘과 처첩들의 정조, 절개, 명예에 관한 권한을 위힘하고 길을 나서는데 가관은 가관이다. 당연히 책의 마지막에 가서 이 처첩들의 웅변으로 일부다처와 하렘의 일은 독하게 욕을 먹기는 하지만 우스벡은 유럽으로 향하면서 내내 하렘 걱정뿐이다.

  물론 파리에 도착하고 나서는 무슬림의 시각으로 본 그리스도교 특히 로마 가톨릭의 부패, 허위 같은 것에 관한 신랄한 비난, 유럽 문명과 문화의 허실, 제도와 상업, 계급의 불평등에 관하여 침을 튄다. 이게 바로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가 하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였겠지.


​  이 책은 처음에 사서 읽고 책꽂이에 꽂아 놓을 생각이었다. 비록 재미로 치면 좀 떨어질 것 같지만 고전이고, 몽테스키외의 소설이란 희소성도 있고, 기타 등등 뭐 그랬는데, 가장 중요하게 망설이다가 결국 도서관 개가실에서 눈에 띈 다음에야 읽게 된 것은, 서간체 소설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여태 서간체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본 적이 없다. 암만해도 그게 께름칙했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난 서간체 소설을 좋아하지 않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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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5-06 0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골드문트님 리뷰가 더 재미날 것 같습니다 ㅋㅋ “몽테스키외라는 스키가요 책을 썼는데요” ㅋㅋㅋㅋ

Falstaff 2023-05-06 16: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 독후감을 즐기셨다는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stella.K 2023-05-06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음 이 사람 이름을 들었을 때 공저자의 대표와
그 밖의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몽테스키외인 줄 알았다는.ㅋ
근데 좀 아깝네요. 제가 3초 기억자라 이 사람 이름이
그렇게 긴 줄 몰랐습니다. 한 번에 썼으면 문트님한테
도서지원금 받을 수도 있었을텐데...ㅠㅋㅋ
이번 생에 이 사람 책을 읽을 것 같지는 않네요.^^

Falstaff 2023-05-06 16:27   좋아요 1 | URL
아이고, 이번 생이라니요. 그럼 이 지긋지긋한 인생을 한 번 더 사시려 했단 말입니까?
그냥 한 번 읽어보셔요. 이이가 싫으시면 몽테스키 등등 가운데 한 명인 볼테르의 <미크로메가스>, <깡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읽을 만합니다. 심지어 추천 목록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고요. ^^

2023-05-08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9 0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09 0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빛과 영원의 시계방 초월 2
김희선 지음 / 허블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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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 네 권의 김희선을 읽었다. 처음 낸 단행본 《라면의 황제》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장편소설 <무한의 책>은 요즘 작가들과 완전하게 다른 김희선 만의 세계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대로만 하면 앞으로 30년 후에도 독자들이 찾아 읽을 좋은 소설가가 될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미리 얘기해두자. 여태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내용 모두, 내가 건방지게 무슨 견해가 있어서 하는 평론질이 아니라 한 독자로 작품을 읽고 난 감상, 즉 한 아마추어 독자의 독후감일 뿐이라는 점. 이런 의미에서 조금 매몰차게 이야기하자면 세 번째 읽은 단편집 《골든 에이지》와 장편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를 읽은 다음에는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처음 두 권 이상을 기대했건만 작품(들)에 공감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었다. 그래, 김희선은 조금 쉬고 나중에 읽자, 마음을 먹고 기다리다가 알라딘의 서평이 좋아 다시 이이의 단편집을 골랐으니 지금 읽기를 막 끝낸 《빛과 영원의 시계방》이다.


​  책을 읽은 “나의” 감상을 단 한 문장으로 쓴다면, “드디어 김희선이 돌아왔다.” 《골든 에이지》에서는 작품마다 억지와 작위 같은 것이 보여 즐거이 읽지 못했는데, 《빛과 영원의 시계방》은 전 작품을 통해 시간과, 인공지능과, 차원의 연속 또는 순환과, 현실인식과 사회성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이 요소들이 여덟 편의 단편 속에서 적절하게 변주, 연결되고 있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최적의 상태로 이야기하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 것 같다.

  단편 소설이라서 각각의 스토리를 소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더구나 작품들이 독특한 주제를 갖고 있는 바에 미리 김을 빼놓는 것은 앞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욕이나 먹을 일이다. 다만 몇 가지만 말하자면, 두 번째 실린 <달을 멈추다>를 읽으면서 나는 최민식도 출연한 헐리웃 영화 <루시>가 줄곧 떠올랐다. 사람의 뇌를 슬라이스 해서 스캔한 후 컴퓨터에 저장을 하면, 육신은 숨을 거두어도 뇌의 활동, 인간이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은 영생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루시>에서 마지막 장면, 사람 자체가 컴퓨터와 결합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게 봤으며, <무언가 위험한 것이 온다>를 이런 식으로 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즉, 우주 바이러스를 이용하여 (이게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비슷하게) 한 인간의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쳐들어가 원래 있던 영혼을 간단하게 제압해, 그 인간의 영혼은 육신을 갈아타면서 영생을 이룰 수 있다는 것보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었겠느냐, 하는 거다. 스웨덴의 뇌과학자가 저 통일신라 시대의 월명사와 같은 인물로 <제망매가>를 썼다는 것, 시간은 결코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상호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이게 윤회인가, 아닌가. 아니다. 시간의 다양한 흐름일 뿐이다.

  사실 나는 유물론자로(20세기 말에 젊고 예쁜 문학 공부하는 한 여성이 나더러 그랬지, 흥, 유물론자 좋아하네! 그이는 지금 뭐하고 사는지 몰라.) 영혼 같은 건 뇌의 원자 신경조직이 만들어내는 화학작용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니까 영혼=생각. 더 쉬운 얘기로 하자면, “영혼이란 없다.” 하지만 내가 영혼 따위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영혼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영생을 이룰 수도 있다는 아이디어까지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이 AI화 하고, AI화 했으니 당연히 컴퓨터 기억장치에 내장이 되어, 즉 영혼이, 창조까지 하는 AI 단계로 들어가 전압이 흐르기만 하면 언제까지라도 영생하는 단계라는 건데, 사실 영생이라기보다 인간 문명이 유지되는 선까지이기는 하지만, 인간문명이 사라지면 전기를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 기껏해야 대 빙하기가 도래할 3만년 정도라도, 그게 어디야 3만년이, 몸은 없어질지언정 영혼, 뇌활동, 생각일 뿐이겠지만,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을까? 하긴 생로병사가 없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이제 겨우 수십 년을 산 나도 그동안 경험하고 배우고 읽고 해서 쌓인 메모리가 즐겁지 않은데 무려 3만년동안 이 짓을 한다고 생각하니, 아이고. 난 그저 때가 오면 소멸하는 그런 인류가 되련다.


​  시간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살을 붙이면, 일찍이 시간여행을 떠나는 소설작품은 좀 있었다. 저 멀리 <타임 머신>도 있고, 가까이엔 복거일이 쓴 <시간 속의 나그네>도 있었다. (모두 여섯 권으로 된 복거일의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3권까지만 읽으시라. 20년 후에 완결한 후반부는 완전히 그냥 보수가 아니라 꼴보수로 자리를 굳힌 복거일의 신자유주의 신념 빼면 아무것도 없으니) 이 두 작품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지만 시간의 흐름은 딱 하나밖에 없어서 후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미래 제작물, 예를 들어 플라스틱이나 금속제품 같은 것을 절대로 남기지 않아야 하는 반면에, 김희선의 경우엔 아무 제재가 없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는 길은 다양하기 때문이다. 무수한 경우의 시간 길을 통해 우주가 흘러간다는 생각은, 또한 자연스럽게 현재의 우주가 커다란 거북이의 등껍질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며, 이 커다란 거북이는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다른 거북이의 등껍질 위에 있다는 생각으로까지 확장한다. 1990년대 초에 복거일의 시간여행에 매료되었는데, 이제 김희선을 읽으니 복거일도 확실히 낡았다. 근데 이 거북이 장면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화 MIB, <맨 인 블랙>의 로커(사물함)을 차용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로커 안의 로커, 그 안의 로커, 로커 밖의 또다른 로커.

  이 책에서 김희선의 시간에 대한 집요한 사색은 계속된다. 현상의 삼차원에 한 차원을 보태는 의미에서 시간이라면, 그것을 AI와 연결해,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니터가 진실인지, 모니터 밖에 앉은 당신의 세계가 진실인지도 당연히 의문문을 던져야 하고, 김희선은 정말로 그러고 있다.


​  김희선이 돌아왔다. 이 책이 내가 아는 김희선이다.


  옥의 티.

  “떡갈나무 탁자는, 밀라노 칙령이 선포되고나서 얼마 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쳐졌다. 그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책 『고백록』을 그 떡갈나무 탁자에서 썼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p.49)

  :  『고백록』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아니라 성직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이다.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글을 써서 돈을 받는 사람은 늘 조심해야 할 터.


​  하나 더? 인류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이 1962년 소련 과학 당국의 ‘꿈의 기록’에 관한 프로젝트에 참여를 강요당하는 과정에 뇌과학자가 “블랙홀”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블랙홀이란 개념은 벌써 있었지만, 미국의 천체물리학자가 최초로 블랙홀이란 단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한 해가 1962년이다. 소련은 블랙홀이란 단어를 최강의 냉전 상대국인 미국인이 제안한 게 재수없어서 다른 단어를 사용한 걸로 기억하는데 어떤 단어인지는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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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5-04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시간은 정말 어려워요^^

영혼(정확히는 뇌)가 AI에 올라타는 것으로 우리는 영생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떤 소설에선 늪 속의 유기물로 합쳐지고 어떤 소설에선 곰팡이 같은 균류에 합쳐지는데 이젠 가상세계에 남게 되겠네요. 뭔가 잊혀질 권리가 점점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Falstaff 2023-05-05 07:30   좋아요 1 | URL
오랜 인터넷 동무님하고 얘기하다가....
영혼이 AI에 올라타서 기계의 몸은 얻는 일, 다른 사람과 육체를 스왑하는 일은 이미 <은하철도 999>에서 나온 아이디어이며, 애거사 크리스티의 <네 번째 남자>에서 이미 다른 육체로 영혼이 옮겨다니는 빙의를 경험했다 등등....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제가 은하철도 이전 세대, 많이는 아니고 바로 전 세대라서 미처 몰랐거든요.

꼬마요정 2023-05-05 10:11   좋아요 1 | URL
아!! 맞네요. 은하철도999는 기계몸으로 가는 거였죠? 다른 사람과 육체를 바꾸는 이야기 중에 오래된 건 달마대사 이야기일 거 같아요. 갑자기 생각나요. 그리고 울트라맨도 있네요. 테레시아스는 남자 여자 모두의 몸으로 살기도 했죠. 오오 소름 돋아요. 세상에 옛날 사람들 천재인가봐요!!!

얄라알라 2023-05-07 18: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님과 골드문트님,
알라딘 서재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계십니다. 물론 존재 자체로 감사드리지만, 이렇게 꼼꼼히 알려주신 덕분에 잘 모르고 실수할 경우를 줄여주시니까요. [고백록] 저자 이름 기억하는 데만도 3초 걸리는 저로서는 황제와 성직자를 구분해야함을 오늘 첨 생각해보았습니다.

김희선 작가님 골드문트님 리뷰 읽으면 기분 좋으시겠어요. ˝돌아왔다!˝^^ 애정 담뿍 담긴 응원!

Falstaff 2023-05-07 21:22   좋아요 2 | URL
아이고, 제가 어떻게 cyrus 님하고 같은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까. 그저 그냥 황감하지만 기분은 좋네요.
제가 김희선 데뷔 때부터 재미나게 읽었었는데 그만 최근 두 권이 마음에 안 들어 왜 이러나 싶었었거든요. 뭐 그저 아마추어가 책 읽은 감상이니 진지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답니다. ^^
 
아이리스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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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산세계문학총서 71번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별과 사랑>을 흥미롭게 읽어 포니아토프스카의 1988년 작품 <아이리스>가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을 했지만, 정기구매 예정인 도서라 해서 신청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달 후, 정말 개가실 신규 도착 서가에 이 책이 꽂혀 있어서 마치 소매치기의 손놀림처럼 재빨리 낚아챘더니 책의 첫 번째 독자로 등록되는 순간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다른 사람이 갈피를 넘겨본 적이 없는 새 책은, 책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법이다. <별과 사랑>은 사실 읽은 지 오래라 상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할 줄 아는 건 천문 관측밖에 없는, 그래서 다른 방면의 것들에 관해서는 재수없기 그지없는 멕시코 과학자가 자기한테는 오직 천문학 연구가 낙후한 멕시코를 위해 바칠 수 있는 애정이었다는 것을, 라틴 아메리카에서 크게 유행한 환상문학적 요소를 제거한 포스트 붐의 한 형태, 리얼리즘 방식으로 쓴 것이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작품을 읽고 시간이 오래 흘러 확정하지 못한 채, 그저 “것 같다.”라 말하는 것을 양해해주시면 좋겠다. 이렇게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가 내 기억에 새겨진다.

  그저 작품만 그랬던 건 아니었다. 이이의 독특한 신분도 흥미를 끌었었다. 25년 정도 오래된 인터넷 동무님이 일러준 내용.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우리가 마리 퀴리로 알고 있는 퀴리 부인이다. 퀴리 부인의 둘째 딸 에브 퀴리가 어머니 마리 퀴리의 전기를 썼고, 전기의 일부가 학창시절 국어교과서에 나왔다고 한다.


​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

  “예.”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아라.”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투스 포니아토프스키는 1764년에 왕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예술가와 학자들을 보호하고 나라의 결점을 알아 대책을 궁리했지만 용기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  이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투스 포니아토프스키가 폴란드-라투아니아의 마지막 군주인 스타니스와프 2세이며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의 고조 할아버지다.

  그리하여 작중 주인공 마리아나가 프랑스에서 살 때의 베스 할머니는 당연히 공작부인이었고, 네 아들, 블라디미로, 에스타니슬라보, 미겔, 카시미로와 네 명의 며느리와 할아버지를 포함해 모두 열 명의 공작과 공작부인이 밀접하게 지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아이리스>가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의 자전적 작품이라는 걸 밝힌 셈이다.

  그러면 어머니 쪽은? 작가의 어머니는 멕시코 사람이다. 그것도 고위 귀족이어서 부르주아 귀족은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늘 타도의 대상이 되는 법이라, 멕시코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멕시코에서는 혁명이 하도 많이 일어나 언제, 어떤 혁명을 얘기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가족 모두가 프랑스로 건너와 살다가 폴란드 왕족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파리에서 엘레나를 낳았다. 이때가 1932년. 잔나비 띠 소녀 엘레나가 열 살이 되던 1942년엔 독일이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고 비시 괴뢰정부가 나치에 협력하던 시기. 이미 연합군에 입대해 전투중이었던 아버지 때문에라도 더 이상 프랑스에서 사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아 어머니의 고향 멕시코로 떠나고, 작품에서도 아버지를 뺀 가족 모두가 대서양을 건너는 것이 같다. 맞다니까, 자전적 소설이.


​  작중 주인공 마리아나는 자매 가운데 언니다. 한 살 적은 동생 소피아는 매사 반항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시끄러운데다가 활발해 자유스럽게 춤추는 걸 즐기는 반면, 마리아나는 생각이 많고, 생각이 많으니 세상살이에 온갖 걱정거리가 많은 동시에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자기 주장이 있어도 그걸 굳이 주장해서 세상 시끄럽게 만드느니 차라리 입 속에 담아 놓고 조금 불편하지만 일신상의 편안함을 중요시한다. 하기 싫은 피아노 교습도 꾸준히 받지만 당연히 성과가 큰 건 아니다. 책 읽기와 엄마 루스의 눈길을 조금이라도 많이 받기를 소원하는데 어떤 성향인지는 이 정도면 아실 듯. 자매는 파리에서 유년과 소년시절을 보낸다. 완벽한 프랑스식 교육을 받아, 프랑스 여성 가정교사 마드무아젤 뒤랑의 요강을 비우지 않았다고 귀싸대기를 맞으며. 물론 마리아나는 한 가지 이유로 두 번 따귀를 맞는 적이 없었지만 소피아는 마드무아젤 뒤랑에게 눈길로 칼날을 던지면서도 줄창 따귀를 얻어터졌다. 엄마 루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어떻게 매일 그리도 파티며, 쇼핑이며, 바람 피우는 거 같지는 않지만 그리도 맨날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는지 마리아나가 엄마 얼굴 한 번 보기도 바쁠 지경이었다. 이렇게 살았다. 금발을 가진 마리아나는 자기가 프랑스 사람이 아니며, 엄마 역시 프랑스 사람이 아닌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미국 출신인 베스 할머니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매거진에 나온 사진을 통해 보여준 멕시코는 가슴이 아래로 축 처지고 머리뼈가 울퉁불퉁한 흑인 여자들투성이며, 이 여자들은 사람을 통째로 구워먹고 삶아먹는 식인종으로, 이런 사람들만 사는 곳이었거늘.

  왜 할머니가 멕시코 사진을 나쁜 의도로 보여주었을까? 전쟁의 전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일단 남프랑스에 살고 있던 조부모댁으로 거처를 옮긴 마리아나 가족은 이미 어머니가 멕시코 행을 결심한 상태였다. 폴란드 공작인 할아버지와 미국 출신 할머니 기준으로 삼류국가에 지나지 않는, 심지어 미국의 변소로 불리는 멕시코로 친손녀들을 아빠도 없이 데리고 가겠다니 사실 손녀들과는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진짜로도 그렇다. 그러니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 없었겠지. 하여튼 그래도 갔다. 몇 달 걸리는 항해 동안 소피아는 죽기 바로 전까지 뱃멀미를 했지만 멕시코에 어쨌거나 도착을 했고, 이때부터 마리아나는 다시 갈등 속으로 던져진다.

  “넌 멕시코인이 아냐.”

  “아냐, 난 멕시코인이야.”

  “아니라니까. 넌 양키야.”

  “난 멕시코 사람이야. 내가 멕시코 사람으로 살고 싶으면 멕시코 사람인 거야.”

  “아냐, 넌 금발의 양키야.”

  마리아나는 엄마가 멕시코 사람이리라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했으면서 열 살 먹은 자신은 벌써 멕시코 사람으로의 정체성을 가지기로 작정을 한 것처럼 묘사를 했다. 뭐 그럴 수 있지. 라틴 아메리카 백인들의 문제는, 아직도 자신들이 유럽인인 것으로 아는 점이라고 주장한다. 누가? 로마 가톨릭 신부 자크 퇴펠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럽에서 건너와 멕시코 사람들의 고혈을 뽑아 돈을 벌어 저택을 짓고 살며 여름마다 두어 달씩 유럽으로 휴가 떠나는 것들. 마리아나 식구들이 프랑스에서 살다가 왔으니까, 주로 프랑스 출신 멕시코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는데, 그이들한테 너네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프랑스 사람이라고 한단다. 정작 프랑스 사람들은 멕시코 국적으로 가지고 있는 프랑스 이민자들을 동포라고 생각도 안 하는데 말이지.

  갑자기 자크 퇴펠 신부? 마리아나는 멕시코에서 살면서 드디어 중학교에 들어가고, 전쟁이 끝나서 아빠도 멕시코로 이민 와서 제약 사업을 하게 되는 세월 속에서 스카우트, 즉 소녀단 수련 과정에서 이 자크 퇴펠 신부에게 크고 크고 또 큰 영향을 받는다. 유럽 출신의 부르주아들이 멕시코 현지인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기름과 피를 빨아 치부하는데 여념이 없어서, 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등의 혁명성을 심어준다. 이에 깊이 영향을 받은 마리아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부모를 설득해, 멕시코에선 흰 피부의 남자들은 절대로 하지 않을 짓, 예를 들면 가래침을 힘껏 뱉는다든지, 만인이 바라보는 데도 나무 이쑤시개를 쓱 뽑아 이 사이의 음식 찌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밖으로 튕겨버리는, 손톱 밑이 새까만 신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이 결과, 아버지와 소피아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은 반면에 어머니 루스와 마리아나는 완전히 자크 퇴펠 신부한테 반해버린다. 사회주의적 혁명을 웅변하는 신부는 식비와 주거비를 한 푼도 내지 않으면서 백인 부르주아의 저택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어 그곳에 들어와 살게 되며 어머니와 큰딸을 현혹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성장소설적 분위기로 탈이 바뀐다.

  재미있다. 종교에 관심이 전혀 없는 나는 신부 등장 이후에 오히려 흥미가 반감했지만 종교를 가진 분들은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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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5-02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소설가가 왜 이렇게 많은지요!^^
내용의 배경으로는 프란츠 파농도 생각납니다.
이 책도 저장합니다~

Falstaff 2023-05-02 11:38   좋아요 1 | URL
파농은 프랑스라도 앤틸리스 제도의 프랑스령에서 태어난 유색인이니까, 포니아토프스카보다는 다음 주에 독후감을 올릴 마리즈 콩데와 더 비슷할 듯합니다. ㅎㅎㅎ
파농.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

그레이스 2023-05-02 11:41   좋아요 1 | URL
최근에 읽었는데, 유색인으로서의 심리와 문화정체성을 너무 잘 파헤쳤더라구요. 자신에 대한 정직한 탐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잠자냥 2023-05-02 1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 왠지 금수저일 거 같았는데, 은수저였군요...
근수저인 저랑 다락방이 곧 읽어보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5-02 13:34   좋아요 1 | URL
이 양반 정도의 출신 성분은 아직 구경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전쟁 당시에 꼼짝 않고 파리에 있다가 아빠 따라 폴란드로 갔으면 숙청 최우선 순위였겠지만요.
이 책 역시 별점을 네 개 줄까, 다섯 개 줄까 고민하다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ㅋㅋ

stella.K 2023-05-02 1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매치기의 손놀림처럼 재빨리 낚아채시다닛!
정전기가 파박 일어날 것 같습니다.ㅎㅎ
그런데 책을 잘 안 읽는 울나라 정서상 이렇게 잘 안 알려진 책은
그렇게 재빠르지 않으셔도 되지 않았나 싶네요.ㅋ
근데 평소 소설에 조예가 깊으신 문트님이나 재밌게 읽지
저같이 실팎한 사람은 읽을 수 있으려나 싶은데 마지막 부분을 읽으니
정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신부가 등장하니 정말 구미가 당깁니다.ㅋㅋ

Falstaff 2023-05-02 19:26   좋아요 2 | URL
아주 재미나요, 신부가 등장한 다음 부터는요.
사춘기 소녀들이 딱 그 시절에 얼토당토 않는 사람을 흠모하는 감정이 드러나는데, 그런 건 경험해보지 못했던 터라 더 흥미로웠던 지도 모르겠습니다. ^^

coolcat329 2023-05-03 0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조 할아버지가 왕이었다니 소설가들 중 최고 계급아닌가요? ㅎㅎ
지금 아는 작가도 안 읽은 책이 수두룩한데 이렇게 자꾸 알게되네요~^^

Falstaff 2023-05-03 16:11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한 제일 높은 귀족의 자제입니다.
그럼 뭐해요, 벌써 21세기인 걸요. 촌스럽게 귀족은 무슨... 그죠? ㅎㅎㅎ
이 사람 작품이 괜찮습니다.
 
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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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 년 전 유디트 헤르만의 작품집 《단지 유령일 뿐》을 읽고 단박에 70년 개띠 작가에게 반해버렸다. 참 주책도 없이 독후감 끄트머리에 이렇게 써버렸다.

  “정말 오랜만에 유디트 헤르만, 낯선 여자한테, 단 한 번의 눈길로 사랑에 빠져버렸지 뭔가.”

  이후 또다른 단편집 《여름 별장, 그 후》도 찾아 읽었으나 《알리스》는 품절 또는 절판이라 도통 구할 수 없었는데 은퇴하고 다니기 시작한 도서관에서 발견해 상호대차를 통해 읽었다

  짧은 단편집. 또는 다섯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 장편. 이번에 작품들을 관통하는 것은 죽음이다. 알리스Alice라는 이름의 여인이 주변에서 죽음을 맞는 다섯 명의 경우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  알리스는 남자 미햐를 만났다. 사랑했고 그렇다고 결혼한 건 아니었으며 함께 살았다. 2000년 6월에 둘은 여행을 떠났으며 즐거운 휴가를 즐기고 휴가의 마지막 날엔 괜찮은 식사에 괜찮은 와인을 마시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별했다. 우리는 내일 헤어지는 거야. 그래. 미햐가 말한다. 내일 가서 집을 정리할 테니까 너는 며칠 있다가 와. 그렇게 둘은 마치 계약기간이 끝난 운동 선수들인 것처럼 그렇게 평화롭게 이별했다. 여전히 사랑하지만 뭐 그냥 헤어져보는 게 어떨까? 그래, 인생은 생각보다 길 수도 있으니 이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네. 집에 돌아간 알리스는 살던 집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을 알았고 그의 물건만 정확하게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둘러 보지도 않고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체온, 그거 하나 만이라도 남겨두고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부질없는 생각을 한 번쯤 해보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전한 삶은 계속됐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생활은 계속 해야 하는 것이라서.

  몇 년 후, 마야의 전화를 받았다. 독일 남서부에 있는 자를란트 주의 츠바이브뤼켄에서 미햐가 죽어가고 있다고. 알리스는 알고 있었다. 마야를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미햐와 결혼해서 등에 하트 모양의 반점이 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미햐는 돌이킬 수 없이 암이 깊어져 이제 모르핀을 주사해 고통을 덜어줄 뿐 최후의 날이 내일 혹은 모레가 될 지도 모를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가 죽기 전에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알리스는 동의했다. 그리하여 기차를 타고 츠바이브뤼켄에 도착해 마름모꼴 무늬 환자복을 입은 미햐,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말라 해골같이 보이지만 손은 언제나 그랬듯이 부드럽고 따뜻한 미햐를 정말로 볼 수 있었으며, 미햐가 듣기도 하고 감촉도 느낄 수 있다는 간호사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도 마야가 없는 틈을 타 입술에 평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스타일의 키스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미햐는 죽는다. 그날 오후 알리스는 기차를 타고 베를린으로 떠난다. 숙소에 앉아 더 이상 미햐가 누워 있지 않은 병원을 바라보며 하룻밤을 더 보낸다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아서. 가족인 마야와 아이는 남아서 처리할 일이 있다. 알리스는 마야와 베를린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며 기차역까지 가는 택시에 오른다.

  유디트 헤르만은 쉽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죽어가는 모습이 사실 그리 아름답지 않다. 알리스가 전에 사랑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지도 모르긴 하지만, 이미 죽음의 손톱이 어루만져 겨우 호흡만 이어가는 환자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장면만 빼면 심지어 드라이한 문장으로 죽음이라고 말하는 인생 자체를 간결하게 정리한 작품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알리스는 그곳에서 한 주 정도의 시간을 보내면서 미햐의 마지막 곁을 지켰으나, 그의 숨이 넘어가자마자 장례절차에 전혀 개입하지도, 참여하지도 않고 곧바로 집과 생활이 있는 베를린으로 떠난다. 죽음으로 이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되었다는 것이겠지. 미련을 더 두어 무엇을 할까.


​  두번째 작품 <콘라트> 역시 죽음의 이야기. <미햐>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죽는 사람의 이름이 콘라트이다. 콘라트가 알리스를 초청한다. 마침 여름이라 북이탈리아의 호숫가에 있는 자기 집에 놀러와 휴가를 즐기라면서. 친구를 데리고 와도 좋다고 해서, 알리스는 안나, 루마니아 남자, 이렇게 세 명이 독일에서 차를 몰고 북이탈리아로 향한다. 사실 처음 가보는 집이다. 콘라트가 구식 방법인 편지를 써서 오는 방법과 약도 같은 것을 보내주어 그것만 보고 따라간다. 드디어 도착한 노랗게 벽을 색칠한 집. 벨을 누르니 나타난 사람은 콘라트의 아내 로테. 콘라트는 심하지 않지만 열이 올라 지금 2층 침실에 있다면서 지금 모습을 보이는 걸 싫어해 나중에 보자고 한다. 유럽 사람들은 그것이 예절인 모양이다. 그래도 이들은 어차피 휴가를 온 것이니 첫날부터 빙하가 녹아 모인 물이라서 차디찬 호수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일광욕을 하고, 가까운 식당에서 괜찮은 식사와 뻗어버릴 만큼 술을 들이켠다. 그러는 동안 콘라트의 열이 점점 더 높아지고 내일 아침, 거의 새벽에는 환자를 입원시켜야 하겠으니 루마니아 남자가 운전해 주는 일을 자원한다.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았고 지금은 완전히 만취상태인데.

  그러나 만취/숙취 운전으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병원에 입원한 콘라트 씨는 점점 상태가 좋아지지 않았고, 급성 폐렴으로 번졌으며, 며칠 후 세상을 뜨고 만다.

  휴가객들은 한 사람의 생명이 꺼져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찬 호숫물에서 수영을 하고, 위험해 보일만큼 멀리 헤엄쳐 나가기도 하고, 차례로 루마니아 남자와 관계를 갖기도 한다. 죽음은 죽음이고, 삶은 삶이니까. 콘라트는 관에 실려 알프스를 넘어 고향 독일로 향하고, 세 명의 여행객은 다시 차에 타서 지루한 운전을 시작한다.


​  세번째 <리하르트>에서는 리하르트의 커플인 마르가레테가 부탁 전화를 한다. 담배와 물이 필요하다고, 사실 그 밖엔 필요한 게 없지만 담배와 물은 정말, 당장 필요하니까 사다 달라고. 그래서 알리스는 동거인 라이몬트가 책을 보며 침대에 누워 있는 토요일 오후에 편의점에 들러 생수와 여자들이 피우는 슬림라인 담배 두 갑을 사서 중증환자 리하르트가 누워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리하르트는 죽는다. 네번째 작품 <말테>는 이미 죽은 알리스의 외삼촌이다. 40년 전 3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4월에 태어난 알리스는 말테 삼촌을 본 적도 없다. 살면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슬금슬금, 가끔 기어나오기도 했던 말테 삼촌의 행적을 찾아보고, 삼촌의 애인이 삼촌보다 열 살 정도 많았던 프리드리히 씨였다는 걸 알아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문득 기억이 난 알리스는 전화번호부에서 프리드리히 씨의 전화와 주소를 알아내 연락을 해, 만났다. 이미 40년이 흐른 오래된 죽음. 시간에 의한 부식된 죽음의 잔해. 그렇다. 덧없다. 마지막 <라이몬트>는 <말테>보다 더 세월이 흐른 날, 남편인지 여전히 그저 동거인인지 밝히지 않은 반려자 라이몬트의 죽음이다. 평소 알리스보다 오래 살겠다고 말해온 남자. 말 한 대로, 마음 먹은 대로 되면 그건 인생이 아니어서 라이몬트가 일찌감치 생을 접었다. 다시 홀로 남은 알리스. 이이는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한 죽음, 또는 죽음과 관계된 일을 다시 한 번 회상하면서 마지막 작품 속에서 앞의 네 죽음을 소환하며 마지막 작품을 맺는다.


​  유디트 헤르만 다운 작품집, 혹은 연작 장편이다. 화려한 수사 대신 서늘한 바람으로 공간을 채우는 헤르만. 이이를 감상하는 포인트는 단연 문장, 또는 문체다. 냉정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죽음의 극복이나 삶의 연속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 이렇게 글을 쓰니 어떻게 한 자리에서 다 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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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29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알리스> 망한 반디 통해서
어렵사리 구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는 지인이 한국에서 책은 일단
언제 절판될 지 모르니 당장 읽지
않아도 사두어야 한다고 했었는데
격공하는 바입니다.

저마니 스타일의 심드렁하면서도
뭐랄까 인간 내면의 무언가를 톡톡
건드리는 맛이 아주 기냥.

Falstaff 2023-04-29 17:16   좋아요 1 | URL
오, 반디. 오랜만에 듣는 이름입니다.
하여튼 유디트 헤르만, 독자를 은근히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작가입니다. 진짜 제 취향입니다. ㅋㅋ

coolcat329 2023-05-01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유령..골드문트님 강추로 사뒀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네요.
이런 책도 있군요..
죽음을 소재로 한 연작소설이라니 끄립니다. 몽환적인 표지도 이쁘구요.
저도 일단 구해보고 못 구하면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 겠습니다.

Falstaff 2023-05-02 05:30   좋아요 1 | URL
제 취향에 딱 맞는 작가입니다. 다른 분들한테도 맞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고요. 아무쪼록 쿨캣 님도 즐기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 이런 스타일을 꽤 좋아하거든요.
 
성벽 안에서 -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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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라는 부제목을 가진 조르조 바사니 선집 1권이다. 조르조 바사니라면, <금테 안경>, 조르조 바사니 선집 2권으로 나온 짧은 장편소설이 워낙 유명해, 나도 당연히 <금테 안경>을 읽고 바사니의 글에 반했었다. 그게 바사니를 기억하게 된 내력이다. 그의 선집을 다 읽어야지, 했다가, 어떻게 까맣게 잊고 세월이 벌써 6년이 넘는다. 시간은 정말 쏜 살이다.


​  바사니는 1916년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유대인 부르주아 가정의 맏이로 태어나, 유년기부터 1943년까지 27년 동안 페라라시의 치스테르나델폴로 거리의 저택에서 산다. 이곳에서 왕립 고등학교도 다니고 볼로냐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 기차 통학을 하며 음악, 미술, 문학 등 부르주아 유대인에게 어울리는 다양한 문화적 탐험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1939년에 이탈리아 검은 셔츠당이 악명 높은 인종법을 통과시켜 바사니는 고난을 겪기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적극적인 반 파시즘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읽은 책 《성벽 안에서》의 작품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에 나오는 주인공 부르노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페라라의 유대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고,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의 주인공 루제로 요즈처럼 치스테르나델폴로의 저택에 살다가, 부헨발트 같은 곳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게 검거되어 짧게 감방생활을 하고 돌아오니 반파시즘 활동을 하는 파르티잔이 자기가 살던 저택을 점령하고 있는 것 등,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 씬이 많이 들어 있다. 책 속의 몇몇 작품에서, 주인공의 부모는 아들을 적절한 시간에 여권을 받게 해 출국/도피시키려고 하는 반면, 당사자인 늙은 부모는 이 나이에 어디를 방황하라는 얘기니, 라고 페라라에 머물다가 파시스트들에게 체포당해 부헨발트 같은 곳으로 끌려가 가스실의 재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도 사실인지 궁금해서 위키피디아나 상세한 연표를 훑어보았는데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  나는 제일 앞에 실린 첫 작품 <리다 만토바니>를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 놀랍게도 유대인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유대인일 수도 있는 등장인물이 한 명 나오기는 하지만 그가 유대인이건 유대인이 아니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한 명의 선한 남자다. 끈질기기는 황소 힘줄 같은.

  리다 만토바니가 출산하는 것이 첫 장면이다. 어려서 죽은 리다의 오빠 이레네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보니 로마 가톨릭을 믿는다. 근데 리다는? 리다의 엄마 마리아 만토바니 역시 20년 전 마사피스칼리아의 공장 직공에게 홀딱 빠져 리다를 낳는다. 이후 불과 이삼 킬로미터 떨어진 들판에 있던 고향집을 영원히 떠나야 했으며, 이후 지금의 이곳에서 나머지 생을 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딸 리다는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 가문 가운데 하나인 카마이올리의 아들 다비드가 대학 진학을 앞두고, 아직 채 끝나지 않은 사춘기적 방황의 일환인 것이 분명한데, 스스로 노동자로 살겠다는 치기어린 각오를 한 후, 격에 어울리지 않는, ‘격’의 격차조차 염두에 두지도 못할 하급 시민 중에서도 하급 시민의 딸 리다와 나름대로는 열애에 빠져, 짧은 시간 동안 방을 얻어 같이 살다가, 당연히 임신으로 했는데, 출산일이 다가오니, 사생아의 아버지가 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춘기 시절을 빠져나가는 한 무책임한 유대인 청년이, 세상을 보는 눈이 번쩍 뜨임으로 해서 그저 주머니 속에 든 몇 백 리라를 건네고는, 허약하지만 결코 일찍 죽을 팔자는 아닌 자기 아들의 얼굴도 한 번 보지 않고 결별을 고한다.

  사생아 아들을 낳은 사생아 여인은 뭐 그럴 수도 있지, 별로 고민하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엄마 마리아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렇게 할머니 마리아, 엄마 리다, 아기 이메네오, 세 식구가 사는 집. 이들에게도 이웃이 있다. 가장 중요한 이웃은 리다보다 한 서른 살 정도 많은 오레스테 베네티 씨. 살린궤라 거리에 자리한, 인쇄소까지는 아니고, 책 제본소의 사장이다. 매사 신중하고 생각이 깊으며 선한 성격까지 가지고 있으니 거 참,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할 밖에. 그런데 여자들도 눈이 삐었지, 뭐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반듯하고 성실한 이 남자가 여태 결혼은커녕 약혼도 한 번 해보지 않은 숫총각, 아니, 아니, 설마 이미 멸종한지 오래라고 하는 숫총각이기야 하겠어, 하여간 노총각이란다. 마리아 만토바니는 한 눈에 척, 알아본다. 베네티는 틀림없이 리다 때문에 오는 거야. 참 생각도 깊지, (폐를 끼칠까봐) 어떻게 저녁식사가 딱 끝났을 때를 골라, 들러서 두 시간 정도 이런저런 세상 사는 이야기도 하고, 1907년의 겨울이 가장 추웠는데 포 강이 꽝꽝 얼어붙었었다는 얘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 툭 던지면서, 리다, 나하고 결혼할래?

  마리아는 이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나이 많은 베네티 씨의 입에서 결혼하자는 소리가 자신이 아니라 리다를 향해 나오니까 조금 어이도 없고 기도 막히겠어, 아니겠어? 리다는 아버지 뻘인 베네티 씨가 애초에 자신한테 청혼할 수 있다는 걸 짐작할 수준이 아니어서 그저 어리둥절. 하여간 이렇게 어영부영 청혼은 무시되고, 물론 단칼에, 싫어! 하지는 않았지만 안 하는 걸로 확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끝난다. 그러나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착한 성품의 베네티 씨는 또한 쇠심줄이기도 해서, 이후에도 줄기차게 이 쌍과부 집을 드나드는데, 어느 새 쌍과부 집 식구 가운데 유일한 사내인 이메네오가 중학교를 들어가고, 졸업하고, 베네티 씨가 흔쾌하게 이메네오를 자신의 도제로 삼아줄 때 쯤해서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마리아가 폐렴으로 숨이 넘어갈 때, 오레스테 베네티는 마치 자기가 죽은 이의 친 오라비나 되는 것처럼 사제도 불러오고, 동네 여인들도 불러와 경야를 보내게 하기도 하고, 있는 것이 돈 말고는 별로 없으니, 페라라에서 가장 비싼 무덤 자리를 사서 장사지내준 후에 드디어 리다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내고 만다. 햐, 내가 리다라도 결혼하고 만다. 좋은 외모는 아니지만 이렇게 성실하고, 돈 많고, 앞으로도 돈을 쌓아놓을 수 있는 제본소도 팽팽 잘 돌아가는 걸로 가지고 있고, 아내 알기를 하늘처럼 아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빨리 죽을 나이라면 말이지.


​  선한 오레스테 베네티 씨가 유대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돈이 많고, 1935년의 어려운 시절에도 손에서 결혼반지를 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빌미 삼아, 유대인이랄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근데 이건 작가 바사니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억지로 물 끌어와 내 밭에 대는 일, 아전인수我田引水다. 나머지 작품 속에서는 유대인들이 빠짐없이 등장해 그들이 겪은 고통과 눈치를 묘사하고 있음에야.

  유대인 작가들 가운데 내가 조르조 바사니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뭐 무엇보다 문장이 매력적이어서 그렇지만, 유대인 핍박의 궁상맞은 장면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있다. 깔끔하게, 그냥, 울 부모 수용소로 끌려가 거기서 돌아갔다. 이렇게 말 하고 마는 정도다. 반 파시즘 운동을 할 때도 파시즘에 의하여 고통을 받았던 한 부류로만 선을 딱 그어버린다. 사회주의자, 민주주의자, 유대인, 이 정도로. 나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였느냐 하면,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주주의자, 소수민족, 유색인들이 파시스트한테 받은 고통과 상처와 같은 수준으로 유대인의 피해의식을 처리했다고 본다. 물론 유대인에게는 조금 더 심했겠지. 그래서 실제로 조르조 바사니가 당시에 반 파시즘 운동에 참여했듯이, 작품 속에서도 유대인 등장인물은 사회주의자나 파르티잔들과 협력을 모색하고 친밀하게 지내며 여러 방향으로 선을 대고 있기도 하다. 요즘 유독 유대인 작가들의 작품을 열라 읽게 되는데, 조르조 바사니 순서가 오니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동안 묵혔던 귓구멍 속 귀지가 다 떨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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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4-27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사니군요! 1작품읽고 더 읽어봐야할 작가군에 등록한지 오래되어씁니다만..잊고 지냈습니다. 문트님 독후감을 보니 다시 콜렉션의 의지가 솟네요! 무려 별5..주문하러 고고~~

Falstaff 2023-04-27 17:48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