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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도락 - 여름 ㅣ 식도락
무라이 겐사이 지음, 박진아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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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뒤에 일본의 논픽션 작가 구로이와 히사코가 쓴 겐사이의 <식도락>에 대한 작품론이 실려 있다. 이 글에 의하면 1911년까지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작품과 작가 둘을 꼽으라면 도쿠토미 로카의 <불여귀>와 더불어 무라이 겐사이의 <식도락>이 꼽힌다고 했다. 그러나 구로이와의 작품론 제목이 “잊힌 메이지의 계몽 소설가”다. 일본에서는 먹는 일, 그것도 맛있게 먹는 주제라면 <맛의 달인>과 우리나라 20대 대통령도 좋아한다는 <고독한 미식가> 같은 것들이 연속해서 크게 히트를 치는데, 이런 맛과 요리 문화의 비조가 무라이 겐사이의 <식도락>이란다. 어차피 이제는 거의 읽히지 않는 작가의 바이오그래피를 자세하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건 생략하고, <식도락>은 모두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네 4부로 되어 있는 신문 연재 소설로 호치신문에 1903년 1년 연재하는 동안 도쿄 시내의 종잇값이 천정을 뚫게 만들 정도로 인기를 끌었단다. 그래서 아직 연재 중임에도 단행본으로 출간하기 시작했고, 계절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네 권을 합해서 당시로는 생각하지 못할 엄청난 숫자인 10만 권이 팔렸는데, 놀랍게도 이게 자비 출판이었으니 순이익 전부 무라이의 개인 통장으로 들어갔을 것 아니었겠느냐, 하는 말이지. 앞에서 그냥 수사적 의미로 도쿄의 종잇값이 치솟았다, 라고 했는데, 진짜로 도쿄의 을지로 인쇄골목에서는 이 작품 <식도락> 때문에 표지용 종이와 제본용 실이 품절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상급 무사 계급 출신의 무라이 겐사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출세를 포기하고 아들 교육에 전념해서 도쿄외국어학원에 진학해 러시아어를 공부시키기도 하는 등 아들에게 서양문물을 익히게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부 머리가 있는 무라이는 스무 살 때 미국 유학을 한다. 이렇게 서양 문물을 익힌 무라이의 눈에 비록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국 일본의 낙후성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이런 사정에서 자신 스스로가 기자로 입사한 호치신문에 연재소설을 쓴 것이 바로 <식도락>. 메이지 유신 전까지는 생선을 제외하고 국법으로 육식을 금지시켜 상대적으로 빈약한 일본 가정의 식단부터 서양식으로 바꾸는 것으로 일본의 낙후성을 벗어나게 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내가 읽은 <식도락 – 여름>에는 기대했던 일본 전통 음식이나 레시피가 아니라 서양식 또는 벌써 일부 일본화 한 서양 음식의 종류와 레시피 같은 것을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일본 음식도 많이 나오기는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라는 뜻이니 오해하지 않으시기 바란다.
우리나라 전래 음식의 레시피는 간장, 된장, 소금, 파, 마늘, 생강, 참/들기름, (과일이나 꿀을 이용한) 감미료, (고추 말고) 산초 등을 주 부재료로 해서 여러 방식으로 조리하는 반면에, 하긴 내가 유명한 드라마 <대장금>마저 보지 않아 그저 어린 시절의 기억에 의하면 그렇다는 건데, 일본 음식은 간장(이나) 된장, 미림(이거 맛술 맞나?), 당대 최고 가격의 조미료였던 백설탕이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음식을 먹을 때마다 들척지근하고 개운치 않게 느꼈나보다. 이건 당연히 우리 음식 맛에 길들여져서 그런 것이지 우리 음식과 일본 음식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낫다, 덜하다 라는 의견이 아니다.
일본 음식이 한 열 번 나오면(실제로는 수십 가지가 나오지만 예를 들어 그렇다는 건데) 서양 음식이거나 일본화 한 서양음식의 레시피는 스무 번쯤 소개를 하는데, 일본과 서양음식에서 공통적으로, 내 입맛을 기준으로 하자면, 과도하게 첨가하는 것이 버터와 설탕, 그리고 토마토 소스이다. 버터와 설탕은 당연히 서양에서 건너온 것이니 1903년 현재, 서양 문물은 일본 가정 안에까지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던 것이고, 강한 자를 보면 그들의 대부분을 일단 흡수하고 싶어한다고 흔히 생각하는 대로, 식탁마저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때문 아닐까 싶었다. 반면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저보다 강한 자가 나타나면, 네가 잘나면 얼마나 잘 났니, 하면서 오히려 거꾸로 빗대가는 성향이 있….니? 있지? 아닌가? 모르겠다.
<식도락>은 엄연히 소설이다. 그리하여 스토리가 있는데, <식도락 – 여름>은 이 시리즈의 두번째 이야기다. 여름의 주인공은 나카가와 가문의 남매다. <식도락 – 봄>은 읽어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안 읽을 건데, 그래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몰라도 나카가와의 동생 오토와 아가씨가 나카가와의 절친 오하라와 약혼을 한 사이다. 책을 펼치면 앞으로 시댁 어른이 될 예비 시부모가 오하라에게 들러 혼사에 관한 일을 처리하고자 도쿄로 오고 있는 중이다. 오토와 아가씨가 바로 일본의 가정식 요리의 대가, 우리나라로 치면 KBS 2TV에서 (지금도 하고 있는 지 모르지만) 방영한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의 패널, 요리 연구가 심영순하고 비슷한 인물인데, 나이는 심사장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스무 살 미만의 아가씨다. 당시엔 여자 아이가 열 두어 살 만 되면 주방 살림에 눈을 떴을 때라 해도 그토록 모든 상류층 음식을 통달한 모습을 보이기에는 무리지만, 소설이다 소설, 독자가 양해하자. 바로 옆집에 사는 약혼자의 부모를 위해 나카가와의 또다른 절친 고야마의 부인과 함께 쌀 요리, 국물 요리, 고기 요리, 생선 요리, 디저트 등등으로 36품의, 거의 진탕 때려 먹는 수준의 밥상을 차려주고, 아직 정식으로 예비 시부모에게 소개된 바가 아니라, 손님이 도착하자마자 총총히 오하라의 집을 빠져나간다.
알고 보면, 시골에서 청소년기까지 지낸 오하라는 공부머리가 좋아 대학에 진학을 하고 싶었는데 부모의 경제 수준으로는 언감생심이라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 큰아버지가 하루는 부르더니, 내가 학비와 최소한의 생활비를 대줄 터이니 너는 걱정하지 말고 그저 공부나 겁나 해라, 고맙지? 고마운 줄 알면 너 대학 마치고 지금은 코 찔찔이지만 그때쯤 다 큰 처녀가 돼 있을 네 사촌동생이자 내 막내딸 오다이와 혼인하는 것도 생각해보아라, 이러던 거였다. 당시엔 뭘 알겠나. 알아도 그렇지, 당장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 그리고 졸업할 때까지 생활비도 보태 준다는데, 더구나 아직 연애도 해보지 않은 시점에 이걸 해, 말아, 망설일 작자가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그리하여 넙죽, 아이고 큰아버지,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풀을 묶어 갚아야 하겠습니다, 대답한 다음, 몇 년간 도쿄로 와서 공부 열라 하고 나름대로 신문물에 눈을 뜨고, 비슷한 신념으로 뭉친 절친 나카가와의 동생과 사랑이 싹 터, 청혼을 했고, 승낙을 받았으니, 예전 은인인 큰아버지와 했던 약속은 어떻게 될꼬?
뭐 우리나라도 이런 경우가 숱하게 있었다. 촌에서 전통적인 조혼 관습에 따라 어린 나이에 서너 살, 심지어 예닐곱 살 많은 신부와 결혼을 하고 경성이나 도쿄로 유학을 가서는 새로 자유연애를 한 다음, 돌아와 이미 애까지 하나 낳았거나, 애도 하나 없이 시집살이만 겁나 하다 시들어버린 나이든 (아무것도 없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와 이혼해버리거나 지독한 갈등에 빠지는 이야기, 이게 한 둘이야?
어쨌거나 예비 시부모가 왔는데, 오긴 왔는데, 딱 부부만 온 게 아니라, 큰아버지, 큰어머니, 그리고 사촌 여동생이자 결혼 대상자(일 수도 있었던) 오다이까지 다섯 명이나 쳐들어온 것이고, 오다이는 결혼 적령기이기도 하지만 시골 출신의 대단한 먹보가 되어, 자신의 예비 경쟁자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음식이란 것도 모른 채, 무려 서른여섯 가지 음식을 우걱우걱 흡입해버린다.
위에서 쓴 건 그냥 스토리가 그렇다는 것이고, 진짜 핵심은 나카가와와 오하라, 그리고 고야마, 이 삼총사가 일본/일본인의 생활과 사고방식의 개선을 통해 일본을 서구와 다름없이 발전시키기 위하여, 늘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고야마의 ‘감정망국론,, 나카가와의 ‘풍류망국론’ 그리고 오하라의 주장인 ‘마음의 예의’를 일본인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잡지를 만들게 되는 과정이다. 잡지를 돈 없는 청춘들이 만들 수 없어서 물주를 하나 잡아야 하겠는데, 누가 수익성 없이 최초 몇 년 간 적자만 낼 것이 뻔한 잡지를 위해 투자를 해줄까? 이게 고민이었다. 이때 혜성같이 나타난 은인 후보자가 히로우미 자작. 자작에게는, 일본의 자작? 난데없는 일본의 작위가 일본 근현대사에서 제일 웃기는 거 가운데 하나, 그 중에서도 백미라고 생각하는데, 하여간 이 자작의 영애, 다마에 아가씨가 나이 들어 결혼 적령기가 되자, 자작 영애쯤 되면 손에 물 묻힐 일이 없는 신분이기는 하지만 자작 나리께서 그래도 머리가 깨인 사람이라, 딸에게 가정 요리를 익히게 하고 싶었다. 이 문제에 대해 고야마도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았고, 그걸 또 전해 들은 고야마가 당연히 나카가와 댁네 오토와 아가씨를 천거한 것. 그럼 딱, 그림이 그려지지? 오하라는 오토와와 약혼을 했고, 고야마는 이미 결혼을 한 몸이니, 이제 아직 연애에도 돌입하지 못한 유일한 측근이자 주인공 나카가와에게 한 근사한 여인이 다가오게 되리라는 것을.
하지만 <식도락 – 여름>은 4부작 가운데 2부다. 어떻게 맺어질지 슬쩍 끄트머리만 비출 뿐 이야기는 갑자기 이렇게 끝난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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