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가시 대산세계문학총서 184
시마오 도시오 지음, 이종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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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마오 도시오라는 일본 소설가의 이름은 처음 들었다. 요즘 활발하게 세계문학을 소개하고 있는 문학과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 184번으로 출간했는데, 전적으로 출판사와 대산 총서의 명성을 믿고 읽었다.

  시마오는 1917년 요코하마에서 태어나 부모의 고향인 후쿠시마를 오가며 성장했다고 책의 앞 갈피에 소개가 되어 있다. 1917년생 일본인 남자. 초년 운을 잘 견디더라도 애초에 아주 드문 확률로 자연사 할 팔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다. 시마오 역시 다를 바가 없어서 규슈 제국대학을 조기졸업한 1943년 10월에 해군 예비학생을 지원, 뤼순 해군 예비학생 교육부에 입학한다. 1944년 2월에 1기 어뢰정 학생으로 요코스카 해군수뢰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5월에 소위로 임관한다. 1944년이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연합군에게 밀리던 시기, 시마오는 특공병기 ‘신요’로 배치되었다. ‘신요’라는 것에 주목해야 할 터. 신요 또는 신요 보트는 쉽게 이야기해서, 가미카제 비행대의 해상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1인용 또는 2인용 보트에 폭탄을 가득 싣고 적의 구축함 같은 대형선박에 직진하는, 자폭 공격단이다. 오키나와 근해에서 실전 투입한 적도 있고,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신요 부대가 주둔했었다 하는데, 워낙 열악한 보트라 전쟁 말기에 일본 해변과 주변 도서에 배치만 했을 뿐 본격적인 전투 무력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한 인격체가 정상적인 전투요원이 아니라 백 퍼센트 사망을 전제로 하는 자살 특공대에 들어가, 틀림없이 가까운 시기에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늘 세뇌를 당한 것이 문제였다. 이렇게 지금 당장, 아니면 내일 또는 모레에 갑작스럽게 죽게 되더라도 별로 동요하지 않을 정도의 상태가 된 병사. 드디어 1945년 8월 13일, 시마오에게 특공전 출격 명령이 떨어지고, 이제 죽음의 시행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리틀보이와 팻맨이 버섯 구름을 일으켜 일본은 이미 거덜이 난 상태, 작전은 취소되고, 일본은 조건 없이 항복하고, 시마오는 죽음 바로 앞에까지 갔다가, 다시 삶으로 복귀해야 했다. 가고시마 현, 아마미 군도, 가케로마 섬에 주둔한 시마오 소위는 결국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비자발적 자살과 옥쇄의 명예 대신 섬에 사는 고운 아가씨를 아내로 삼아 도쿄로 이사해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시마오의 초기 작품은 죽음을 숙명이라고 생각해야 했던 전쟁 말기의 자살 특공대 경험을 많이 담았다고 한다. 다른 한 편으로는 죽음 대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남아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전후 불안감을 드러내기 위해 초현실주의 소설을 썼단다.

  시마오 도시오의 대표작으로 오늘 독후감을 쓰는 <죽음의 가시>를 든다. 평론가들은 전형적인 일본식 사소설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글쎄, 자기 나라의 문학에 정통한 일본 평론가들의 주장이 맞기는 하겠지만, 이웃 나라의 한 독자인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로테스크한 상세 묘사가 깊고도 독한 여운을 주는 것 때문인지, 전후 데카당 문학의 하나로 봐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전후 데카당이라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를 말하지만, 1차 대전엔 그저 명함만 걸어 놓은 일본에서 전후라면 당연히 2차 대전을 들어야 한다. 이 작품은 1960년부터 1977년까지 발표한 열두 편의 단편소설을 묶어 하나의 장편으로 엮은 것으로, 완성에 무려 17년에 걸린 역작이기도 하다.


​  화자 S 도시오는 저 남쪽의 섬에서 군복무를 하다가 섬처녀 ‘도호’와 결혼해 전쟁이 끝나고 도쿄에 정착,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둔 결혼 10년 차 소설가다. 부업인지 본업인지 하여튼 소설가 말고 한 주에 두 번 야간학교에서 세계사와 사회 과목을 가르치며 돈을 벌고, 당연히 모자란 소득은 소설이나 수필 같은 것을 잡지와 신문에 기고해 원고료를 받아 충당하며 산다. 무대가 1950년대 중순이니까 그 시절을 생각해보자. ‘나’ S 도시오는 제국대학을 졸업한 인텔리겐챠, 아내 도호는 저 멀고 먼 작은 섬 출신에 가방끈 역시 보잘것없는 촌 여자. ‘나’의 친구들 역시 좋은 교육받은 동료 작가와 잘 나가는 저널리스트. ‘나’는 당연히 이제 비상을 준비하는 작가 초년생으로 여러 문학 집단의 동인이어서 그들과의 “문학적으로 효용이 있는” 친구들과의 대화가 필요하여 날이면 날마다 형이상학적 논의를 해갔으며, 동아시아의 이런 부류들이 종종 그러했듯, 아내가 아닌 여성과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작품에서는 한 마디, 입도 벙긋하지 않지만 ‘나’의 마음 깊은 곳엔 작은 섬 출신의 배운 거 없는 아내를 우습게 아는 마음이 넘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내 도호는 10년간 아이 둘을 낳고, 기르며, 남편 ‘섬기고’, 없는 살림 쪼개 꾸리느라 애면글면 했다가 이제 30대에 접어들어 자아가 생겼을 무렵. 처음엔 의심만 하고 설마, 설마 하다가, 마음 속에 짚이는 바가 있어서 수고비로 거금 5만엔과 함께 흥신소에 의뢰해 남편의 생활을 추적한다. 흥신소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나’와 다른 여자 사이의 온갖 생활을 총천연색으로 브리핑해주고, 결정적으로 집안 청소 도중에 ‘나’의 일기장을 발견해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아내기에 이른다.

  이런 줄도 모르고 태평하게 외박을 하고 해가 꼭대기에 떴을 무렵 느긋하게 집에 들어오니, 집은 텅 비어 있고, 서재의 책상과 다다미 바닥과 벽에 잉크가 피처럼 끼얹어져 있었다. 이 한 가운데 너저분하게 내버려진 문제의 일기장. 아내와 두 아이는 멀리 떠나려다 영화관에 가 영화를 반도 보지 않고 그냥 돌아와, 1년이 넘는 지옥 같은 심판의 나날을 시작한다. 아내는 십년 너머 참다가 드디어 폭발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지금 사는 게 아니라고, 죽겠다고, 똑바로 기억하라고, 당신의 내 삶의 전부였다고, 몸과 마음을 다 바친 대가가 이거라고, 신문 성 문답을 시작한다. 사흘 동안 잠도 자지 않으면서. ‘나’는 물론이고 여섯 살 신이치, 네 살 마야를 먹일 밥도 짓지 않는 아내 도호. 집요하게 계속 물고 늘어지는 심문의 결론은 맹세 3장, 여자와 관계를 끊을 것, 절대 자살하지 말 것, 아이들 양육을 책임질 것. ‘나’는 즉각 이를 맹세하고 진심으로 여자와 관계를 끊겠다고 마음먹고, 정말로 끊어버린다.

  아내는 다음 날, 일기를 쓰고 여자한테 편지를 보냈던 만년필, 그리고 여자에게 보여주었을 내의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새 만년필과 내의를 사온다. 하지만 책상과 벽에 뿌려진 잉크 자국은 어떻게 하나. 몸과 마음을 씻는 의미로 목욕탕에 다녀오니 아내는 결혼할 때 입던 비단으로 지은 기모노를 입고, 얼굴과 입술에 화장을 한 채, 손님이 오면 사용하려 아껴 두었던 깃털 이불을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만 ‘나’의 가슴은 철렁 내려 앉는 거였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이제 문제는 이 일로 아내 도호의 정신이 착란 증세를 일으키기 시작한다는 것. 시도 때도 없이 착란 또는 발작이 일어나고, 그랬다하면 끈질기게 ‘나’와 여자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집착과 연상을 하면서 ‘나’의 귀싸대기를 후려치기 시작해 둘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는데, 시도 때도 없으며, 아이가 보거나 말거나 상관도 없으며, 아침이거나 새벽 두 세시거나도 가리지 않으며, 전철이거나 버스 안이거나 길거리거나 병원 안이거나도 없다. 결국은 ‘나’가 노끈이나 가죽 허리띠를 목에 두르고 양 손으로 잡아다녀 곧 죽어버리겠다고 힘을 주어 얼굴이 붉게 땡땡 부어오를 때까지 조르고 나서야 아내는 긴 하품을 끝으로 발작 혹은 착란 증세를 멈추는 거였다. 한 번도 아니고 수시로 이런 장면이 등장해 읽어 나가기가 매우 힘들다. 부부싸움이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원형경기장의 글래디에이터들의 검투 장면이 차라리 읽고 보기에 나을 정도다.

  이들은 도쿄 동부 변두리 고이와 역 근방에 살다가, ‘나’ 혼자 외출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 지경에까지 다다라 야간 학교로 강의를 갈 때조차 처자식을 다 데리고 가야 했으니, 거의 모든 돈벌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도호는 입원을 포함한 신경정신과 치료가 반드시 필요해서, 고이와 집을 팔고 남부 변두리, 거의 농촌 지역으로 이사를 해야 했는데, 거기서도 사달은 멈추지 않아 결국 아내와 ‘나’는 환자와 간병인으로 입원을 하고, 아이들은 남쪽 멀리 처가 식구네도 보내기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 이 작품은 스토리보다, 아휴,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내 경우엔 읽으면서 고문당하는 듯한 환장하는 기분 때문에 내가 다 미쳐버리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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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몽스트르 Le Monstre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박철호 옮김 / 제철소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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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 개의 희곡을 담은 희곡집. 당연히 소설책인 줄 알고 아내 이름으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첫빠따’로 읽은 책. 크리스토프라면 당연히 이 시대의 명작에 올라야 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대표로 꼽아야 하고, 이 책으로 크리스토프의 팬이 된 독자들은 소품인 <문맹>과 <어제>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이제 나한테, “작가 이름 하나만으로 책을 선택하는” 몇 안 되는 그룹의 한 명이다. 이이가 헝가리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지역으로 망명을 하고, 프랑스 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로 지내다가 결국에 이방의 언어인 불어로 작품 활동을 한 시인이었다는 건 알았는데, 희곡을, 그것도 여러 편을 쓰고, 이 가운데 많은 작품을 실제로 공연까지 한 극작가이기도 하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놀랍고, 반갑고, 독특한 세계관과 그로테스크한 표현방식을 지닌 그가 어떤 극작품을 썼는지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  제목 “르 몽스트르 Le Monstre”는 네 번째로 실린 작품 <괴물>이다. 실제로 공연을 한 작품들의 경우엔 초연 무대와 장소, 이후 공연의 이력 같은 정보를 제일 먼저 소개한 걸로 봐서 <괴물>은 아직 초연을 하지 않은 듯하다. 극작가 크리스토프 대표작을 꼽으라면 거의 <배회하는 쥐>를 거론한다는데, 이 책 《르 몽스트르》를 보면 대부분 작가의 이름값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비유, 풍자, 함의, 그리고 부조리 적 시각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자신이 초년 팔자에 헝가리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다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시대에 새까만 밤의 장막을 뚫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스위스까지, “자유를 찾아” 나선 ‘헝가리언 디아스포라’의 일원으로 다양한 체제, 그리고 서구에서까지 계속된  젠더 차별을 경험한 것이 이렇게 여러 모습의 비유와 풍자를 그려내게 했을 터이다.

  첫 작품 <존과 조>는 그러나 새롭지 않았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내용. 1975년에 스위스에서 초연을 하고, 1993년에 독일어로 번역 출판했다고 하니까 내 기억 속의 장면과 <존과 조>의 유사한 내용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도저히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존과 조는 이 정도면 사이가 괜찮은 친구다. 둘 다 가난한 건 마찬가지. 그래도 조가 훨씬 궁상맞다. 둘이 식당에 들어가 음료와 술 등을 주문하다가 약간의 오해가 생겨 주머니에 있는 돈을 싹 긁어서 계산을 마치고, 이때 돈이 훨씬 적었던 조가 가지고 있던 복권을 현금으로 계산해서 존에게 넘겨준다. 여기까지만 봐도 다음에 어떤 내용인지 확 짐작이 가시지? 하필이면 이제 존의 소유가 된 복권이 당첨이 되고 만 것. 조의 머리는 복권이 존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존의 행운을 축하해주어야 하지만, 가슴에서는 웃기지 마라, 그건 애초 내 것이었지만 존이 만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냐, 하는 갈등에 빠진다. 그래서 칼부림이 나느냐고? 아무리 크리스토프가 좀 엽기적인 면이 있어도 설마, 설마가 사람 잡을 지는 모르지만.


​  두 번째 작품 <엘리베이터 열쇠>는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나 페미니즘 드라마로 보는 것이 일단 제일 편하다. 주요 등장인물은 여인과 남편, 그리고 남편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의사다. 이때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를 열고 닫는 열쇠가 있어야 했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여자도 당연히 엘리베이터 열쇠 하나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부부가 사는 아파트는 통로가 오직 엘리베이터 하나밖에 없는데, 처음 입주할 당시엔 시내에서 떨어진 외곽지역, 아파트만 나서면 울창한 숲이 있고 새들과 벌레들이 밀집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도시화가 진행되어 낮이고 밤이고 훤한 불빛과 자동차의 엔진 소음이 그치지 않는다. 하루는 다리가 조금 간지럽다고 남편한테 이야기를 했고, 남편 자크는 그렇느냐고, 도시 현대화를 위해 일하는 건축가이기도 한 남편이 알겠다고 하더니 친구인 의사를 불러왔다. 의사는 아주 간단한 시술 한 번으로 다리 신경을 깔끔하게 마비시켜 이후부터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봤자 풀과 나무와 새와 곤충을 볼 수 없으니 그래도 행복했다는 아내. 이제 다시 자동차 소음이 시끄럽다고 하니 남편 자크는 또 의사를 데려와 큰 고통 없는 간단한 시술로 귀머거리를 만들었고, 불빛이 피곤하다고 하자 시신경을 끊어버렸다. 이젠 슬픔에 잠겨 울부짖는 아내를 위해 마지막으로 혀를 절단하는 간단한 시술을 하는 찰라, 차라리 목숨을 가지고 갈지언정 목소리만큼은 그냥 두라는 아내의 간절한 외침을 묵살하는 남편에게 그녀는 어떻게 했을까? 이미 간단한 시술을 위해 침상에 누워 있음에도?


​  세 번째 실린 작품은 명실공히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최고의 극작품이라 굳이 이 자리에서 소개를 하느니 직접 읽어보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네 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인 <괴물>, 이게 아주 의미심장하게 정치적이다.

  거의 알몸 상태로 살고 있는 원시 종족 사회. 이들은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 어귀에 깊은 함정을 파고 함정 속에 뾰족한 부비트랩을 설치해 빠지면 죽게 만드는 장치를 해두었다. 북아메리카 북부 지역에서도 회색곰이 집안에 침입해 위해를 가하는 걸 막기 위해 비슷한 장치를 하는 걸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영화에선 곰 대신에 사람, 알렉 볼드윈이 빠져 허벅지에 말뚝이 박히기는 하지만. 하루는 이 함정에 엄청나게 크고 괴상한 모습을 지닌 괴물이 빠졌고, 촘촘하게 박힌 부비트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효를 하고 있어서 마을에 큰 사달이 난다. 여태까지 본 어떤 짐승하고도 비슷하지 않은 끔찍하고 악취가 풍기고 사나워서 두려움을 일으키는 괴물. 남자들이 창을 꼬나잡고 몰려가 마구 찔러대도 괴물은 끄떡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덩치가 더 커져가기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괴물의 등짝 위에 핀 꽃에서 퍼지는 중독성 방향에 사람들이 몰리고, 이 사람들을 하나씩 잡아먹을 때마다 엄청난 속도로 커져, 결국 옆 마을까지 완전히 잠식을 해서, 사람들은 주거지를 더 변방으로 옮겨야 했던 것. 주거지만? 당연히 아니지. 주거지를 포함한 모든 생활의 터전까지다.

  그리하여 이들이 내린 결론은 괴물의 꽃과 방향을 흠향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자는 것. 이를 위하여 단호한 마음으로 한 번도 괴물의 꽃과 향기를 보고 냄새 맡지 않은 젊은 용사이자 최초의 괴물 발견자인 놉을 대장으로 해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자 하지만, 이미 괴물의 꽃냄새에 취한 사람들은 괴물에게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아, 결국 놉과 마을의 장로만 남고 모든 사람이 놉의 칼 아래 죽어버린다. 괴물 또한 사람을 잡아먹지 못해 소멸해버리고.

  이 괴물은 무엇을 대신했을까? 나는 읽으면서 저절로 자본주의를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확장함에 따라 도시 빈민의 주거지는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본의 단맛에 취해 기꺼이 자신의 노동을 싼 가격에 팔아 넘기기를 계속한다. 또는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뒤로 가면 갈수록,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역자 박철호의 해설을 보니, 역자도 자본주의에서 시작했지만 근본적인 것은 공포심 아니었겠는가, 주장한다. 반면에 나는 또 자연스럽게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정체성을 떠올려, 자신이 젊은 시절에 조국을 떠나게 했던 소비에트 정권을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됐건, 소비에트가 됐건, 공포심이 됐건 간에 문제는 권력이다. 그것도 한 집단을 단체로 마취시킬 수 있는 권력.

  이 괴물을, 대중의 희생 없이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 알고 있을 듯. 알고는 있을 듯. 혹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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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6-10 0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펀딩으로 이런 책이 나왔었군요! 펀딩하는 줄 알았다면 했을 텐데!! 저런이런!!! 늦게라도 사러 갑니다~!

Falstaff 2023-06-10 13:4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즐기셔요. 색다른 희곡들이더군요.

stella.K 2023-06-10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간표지가 인상적이네요. 옛날같으면 불온서적을 생각했을텐데 보는 순간 고추장을 생각했으니 격세지감인건지 아님 속세인임을 드러낸건지 알 수가 없네요.ㅠ 어쨌든 모처럼 좋은 시간이셨겠습니다.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3-06-10 13:45   좋아요 1 | URL
남자들한테 ˝빨간 책˝은 요즘 말로 야설 책이었습니다. ㅋㅋㅋ 우중충한 거무튀튀한 표지를 하고 있었는데요 제목도 죽여줬습니다. 아이고, 세월이 아름다운 제목이 기억나지 않네요.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3-06-11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고타 크리스토프에 골드문트님의 희곡 별 다섯이라니 ㅋ 필독서네요~!!

Falstaff 2023-06-11 16:06   좋아요 1 | URL
ㅎㅎㅎ 뭐든지 문학작품은 독자하고 맞느냐 안 맞느냐, 이게 제일 중요한 거 같습니다. 아무쪼록 새파랑 님하고도 맞는 작픔이기를 바랍니다.
아마 크리스토프의 책이니 안 읽으실 수는 없을 듯합니다만. ㅋㅋㅋㅋㅋ
 
눈먼 부엉이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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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서 가장 번화하고 가장 땅값이 비싼 지역이 아마 테헤란로 일 거 같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그곳 땅 3.3㎡이 6천만 원이라고 했던 것까지 기억이 난다. 그냥 기억이 난다는 것이지 관심도 없다. 아무리 이모네가 서초동 땅부자라도 나한테 한 평이라도 줄 리 없는데 뭐 하러 그런 데다 신경을 쓰나. 마찬가지로 이란의 테헤란에 가면 서울로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란. 예전 지명으로 하자면 페르시아다. 페르시아는 북아프리카에서 발현한 아랍하고 다르다. 전에는 종교도 달랐다. 페르시아는 원래 배화교, 조로아스터교 신자가 많지 않았나? 그러다가 6세기, 7세기 들면서 동로마에 해가 떨어지는 시점과 맞춰 페르시아도 전립선 부실한 아저씨처럼 시새푸새 해졌고, 이때를 틈타 저 남서쪽의 사막지역에서 이교도 사라센들이 막강한 힘으로 밀어붙여 급기야 페르시아 사산 왕조를 거덜내버렸다. 이후 페르시아는 무주공산이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 영향권의 이란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배화교를 버리고 마호메트교로 개종을 했지만 끝까지 배화교를 지키던 사람들은 (하여간 사막 종교들의 질투심이란!) 알라 말고 신이 없다는 신념으로 배화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걸 견디다 못한 이란(페르시아) 내 배화교도들은 배를 타고 인도 뭄바이 근방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을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 “파르시”라 부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파르시 족으로는, 록 그룹 <퀸>의 리드 보컬 고 프레디 머큐리, 지금은 뉴욕 필하모니의 음악감독으로 있는 지휘자 주빈 메타, 그리고 어쨌든 세계 최고의 자동차 회사 가운데 하나인 인도 타타모터스 대표 타타 등이다.

  사산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유럽인 눈으로 볼 때 그저 그런 변두리인 아시아 지역의 야만스런 나라로 지내다가, 걸핏하면 십자군이네 뭐네 하는 유럽 연합군대한테 두드려 맞기도 하고, 사실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맞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때려주면서 논두렁 건달 노릇을 착실하게 하며 천 년을 잘 견뎌왔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람 문화의 정체된 답답한 요소들이 사회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글쎄 테헤란에 있는 국립 축구장에 십만 명이 들어간다는데 거기에 여자가 한 명도 없다잖아. 그러다가 1925년 리자 샤 팔레비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을 하더니 칭왕을 해 왕좌를 깔고 앉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단 궁정 여성들에게 차도르를 착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암만해도 눈에 번쩍 띄는 것을 개선해야 제일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랬는데 이 팔레비 1세는 1920년대 유럽의 (위험한) 혁명 사상과 민주주의, 그리고 이란에서 앞으로 자신이 누릴 권력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개혁을 위한 수입품목에서 빼 버렸다. 그리하여 문학적으로 보면 여성들의 얼굴에서 차도르를 벗겨낸 이 시절이 오히려 깊은 어둠에서 길을 잃은 시대였다고 한다.

  1903년에 테헤란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난 사데크 헤다야트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지만, 주위에서 기대하는 엔지니어링엔 영 소질도 없고 희망도 없어서 엔지니어가 되는 조건으로 1925년에 떠난 벨기에-프랑스 유학 중에 기계제도機械製圖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대신 아방가르드 예술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모파상, 체호프, 릴케, 슈니츨러, 포, 카프카 등에 더 몰두를 했다 한다. 와중에 우울증 증세가 심각했는지 1차 세계대전 당시 격전지였던 마른 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투신한 적도 있었다. 그래 풍덩 빠지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죽을 팔자가 아니었는지 다리 아래에 노도 젓지 않고 그냥 물결 흐름에 맡겨둔 보트가 한 척 있었고, 보트 안에는 선남선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가, 뭔가 옆에서 크게 풍덩, 하고 빠지는 소리가 나는 통에 김이 새서 고개를 들고 보니 젊고 잘 생긴 페르시아 귀족 청년이 빠져 죽고 있는 거였다. 용감한 프랑스 청년은, 다행스럽게 빨리 뛰어들 수 있게시리 옷을 벗을 필요가 없는 상태여서 곧바로 다이빙을 감행, 헤다야트를 살려주었다. 프랑스 청년은 몰랐으리라. 자기가 살린 청년이 24년 후에 스위스에서 비자 연장이 거부당하자 가스를 틀어놓고 기어이 자살에 성공하리라는 것은. 이 청년이 이란의 문학적 어둠의 시대에 찬란하게 빛을 발하던 거의 유일한 작가가 되리라는 것도.


  사실 작가 소개를 하면서 너무 말이 많았다. (나도 왜 이런지 몰라. 한 번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도무지 걸리지 않으니 말이지) 이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1925년부터 6년간 이어지는 유학생활에서 그가 아방가르드 예술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는 거였다.

  이 책 <눈먼 부엉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미리 언질을 준다. 나는 원서를 직역하면 저런 번역문이 나올 것인가, 처음부터 매우 궁금해졌다. 뭔가 들은 것 같은 구절이 있지? 유명하기는 한데 느므느므 지루한 영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떠올리는 건 나 하나? 만일 내 의견이 맞다면, 이 문장은 우리나라의 중견 소설가이기도 한 역자 배수아가 번역을 하며 우리 독자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읽힐 수 있는 표현을 쓴 거 아닌가 싶었던 거다. 이래서 소설가가 번역한 작품은 내가 안 좋아하는데, 만일 내 생각이 틀리면 배수아한테 미안하게 됐다, 직역이 ‘영혼을 잠식한다’, 라고 되어 있다면 말이다. 여기다가 고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덧붙이면, 애당초 이야기 자체가 데카당, 아니면 적어도 데카당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품일 수밖에 없을 거란 걸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데카당 문학의 매력이지만 동시에 약점이기도 한 게 미문, 아름다운 문장이다.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자 나는 필통에 그림을 그려 파는 필통화가다. 하루는 아버지와 일란성 쌍둥이이자 삼촌이라고 주장하는, 하지만 친아버지일 수도 있는 작자가 사업 관련해서 집에 온 적이 있다. 이란의 신년인 노루즈 지나고 13일째 되는 날이었다. (노루즈 끝나고 13일. 책에서 계속 나온다.) 집에 마땅하게 대접할 술도 없고, 아편도 없어서 어떻게 할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어려서 유산으로 받은 포도주가 식품보관소 선반에 있다는 게 생각나 의자 위에 올라섰는데, 벽에 적당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고, 구멍을 통해 장면과 사람 몇 명의 모습이 보이던 거였다.

  집 뒤편 공터에 곱사등이 노인이 마치 인도의 요기 같은 자세로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에 앉아 있고, 한 소녀, 아니,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검푸른 메꽃을 노인에게 건네는 모습. 검정 주름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단번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마법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건 지켜보는 사람에게 통렬한 비난을 던지는 눈동자로 바뀌어, 나는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그(소녀의 눈동자)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다’”도 좀 흔한 표현이다. 이것도 원문에 이렇게 쓰여 있는지 궁금하다.)

  소녀는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 넓은 이마, 눈썹이 가늘면서도 양쪽이 길게 서로 이어졌으며, 반쯤 열린 도톰한 입술의 얼굴이었다. 섬세하면서 가녀린 팔다리와 가볍게 늘어지는 몸동작을 하는 것으로 보아 쓰러질 정도로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 딱 한 번 본 소녀, 여자.

  이것을 주인공 나는, 너무도 깊고 현기증 나는 절망의 심연으로 몰아넣은 잊을 수 없는 체험이며, 심지어, 작가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는 건 습작 중이거나 데카당 작가 밖엔 없는데, “최후의 그날까지 인생에 무서운 독으로 작용할 것이며, 고통의 흉터로 이 일 이후 나의 모든 다른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한다. “찰나의 광채 속에서 아주 짧은 순간,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불운의 전모를 보았으며, 그것이 지닌 숭고한 아름다움을 알아차렸”는데, 삼촌이 가고 3일 후 문제의 포도주를 다시 선반 위로 올려 놓으려 의자에 오르니 벽의 구멍이 말끔하게 메워졌다고 말하니, 독자는 이걸 믿어, 말아? 아무쪼록 열내지 마시라. 데카당은 간혹 그런 법이니.

  작품의 시작점은 이 일이 있고 나서 두 달 나흘이 지났을 때이다.

  이제부터 작품의 나머지는 전부 여태 나왔던 사람들, 터번을 쓰고 목에 몇 겹의 숄을 두른, 썩어 검게 변한 앞니를 가진 늙은이, 소녀라기 보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여자, 그리고 나. 이 세 명의 변주, 그것도 무한 변주를 시작한다.

  작가 사테크 헤다야트는 그래도 앞 부분에서 독자에게 적절한 힌트를 던진다. 화자 나는 알코올과 아편을 탐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 실제로 ‘나’가 노루즈 끝나고 13일째 벽의 구멍을 통해 본 사람들을 두 달 나흘을 찾아 배회하고는, “아편의 몽롱한 환각 속에서만 나타나는 꿈의 형상” 같다고, 완벽하게 조화로운 육체의 선, 날씬하게 키가 큰 형상이 그러니까 아편을 피우고 있는 상태에서 본 홀로그램일 수도 있는 것이어서, 뒤에 여러 번 나오는 꿈 속 장면처럼, “한 이란 아편쟁이의 고백”일 수도 있다는 걸 독자들은 염두에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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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6-09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쇠락을 전립선 부실한 아저씨로 비유 ㅋㅋ
옷을 벗을 필요없는 프랑스 남자 근처에 떨어져 목숨 구한 일...ㅋㅋ
근데 소설 내용도 그렇고 결국 마지막 작가의 삶이 참 슬프네요.

Falstaff 2023-06-09 16:33   좋아요 1 | URL
앗! 재미나게 읽으셨습니까? ㅎㅎㅎ 기분 좋습니다.
제 3국의 작가들이 대부분 이이하고 적어도 공감하지 않았겠습니까. 헤효...
 
솔라리스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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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작가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건 (우연히 이 책의 작가와 이름이 같은)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에비치와 브루노 슐츠를 연달아 읽고, 한 방에 뻥, 나가 떨어진 직후였다. 이 두 명의 소설가에 비톨트 곰브로비치를 얹어, 1920년대, 30년대 폴란드 유대인들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고 영탄했던 것이 작년(2022년) 여름이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동네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도서관에 가보니 아이고, 왜 그렇게 읽을 책이 많은 지 만일 여태 돈벌이를 했더라면 진즉에 사서 읽었을 책들은 메모리에서 까맣게 삭제되고, 은퇴 전에 사 책장에 올려 놓은 책들도 도무지 읽을 시간이 없게 되어버렸다. 집에 있는 거야 언제든지 읽을 수 있지만 도서관 책은 왠지 좀 서둘러서 읽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이 드는 현상, 이거 나만 그런 거야? 이렇게 1920년대와 30년대 폴란드 작가들의 놀라운 전위성에 깜짝 놀랐던 기억은, 어느 책 속에서 스타니스와프 렘을 읽은 것이 자기의 독서력에 큰 행운이었다는 얘기를 읽고, 아, 스타니스와프 렘, 비트키에비치 말고 렘도 있었지, 폴란드 작가들이 있었지, 기억이 다시 살아나 즉시 렘의 작품을 검색해보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 읽을 렘으로 <솔라리스>를 골랐다. 이건 작품의 명성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연의 힘이었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1920년대 작가가 아니고, 1921년에 태어난 유대계 폴란드인이다. 비트키에비치와 슐츠, 그리고 곰브로비치도 유대계 폴란드인, 아쉬케나지였다. 렘은 그래도 잘 나가는 의사의 외동 아들로 태어나, 그것도 IQ 180에 빛나는 영재로 태어나, 의과대학을 다니다가 2차 세계대전을 맞아 항독 운동도 하는 등, 동시대에 폴란드 땅에 살던 유대인으로는 이례적으로 건강하게 살아남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 의학을 계속 공부할 수 있었다. 공부와 함께 곧바로 SF 소설을 쓰기 시작해 5년 후인 1951년엔 그까짓 의사 안 해, 나 글을 쓸 거야, 전업작가로 나선다. 새벽 네 시에 글쓰기를 시작하는 규칙적인 글쓰기 직업인으로 60권이 넘는 책을 썼다고 하니, 이게 사람이야, 기계야? 혹시 모른다 베데스타 행성에서 우주선을 타고 도착한 외계인이었는지도. 다행히 맨 인 블랙, 검정 선글라스에 검정 수트를 입은 미국인에게 걸리지 않은 외계인이었을 수도 있겠지.


​  지구에서 우주 모선母船 프로메테우스 호에 탑승해 물병 자리를 궤도 비행하다가 캡슐을 이용해 솔라리스 행성 상공 몇 백 미터 위에 있는 우주정거장으로 출발하는 화자 ‘나’, 크리스 캘빈.

  지구인들이 백년 전에 발견한 솔라리스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다. 하나는 붉은 태양, 다른 하나는 푸른 태양. 이 두 개의 태양이 서로 비슷한 힘의 인력을 발휘하고 있어서, 두 개의 인력 사이에 낀 작은 행성은 불규칙한 공전을 해야 하는 관계로 수명이 길지 않을 거란 점은 아마추어 물리 애호가라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이에 더하여 가모프와 셰이플리 이론이란 것도 있다고 한다. “두 개의 태양을 가진 행성에서는 생명체가 발생할 수 없다.” 작은 행성이라고 말은 했으나 그건 엄연히 행성이 공전하는 두 개의 태양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솔라리스의 지름은 지구보다 20% 더 컸다. 행성의 육지 면적은 유럽대륙보다 작은 반면에. 이후 지구 곳곳의 연구소는 독자적으로 또는 초국가적으로 솔라리스 행성을 탐사하기 시작했고, 셰너헌이 지휘하는 오텐스쾰트 탐사대는 이 별의 바다가 유기적인 물질이라고 발표했다. 유기적인 물질. 즉 생명체라는 것. 이어 생명과학자들은 솔라리스의 바다가 생명체의 원시적인 형태로 거대한 유동성의 세포이자 무시무시한 단일체일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천문학자와 물리학자들도 바다라는 고도로 진화한 유기체가 행성의 궤도에 능동적이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어서 두 개의 태양 사이를 적절하게 공전하고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이것 말고는 도저히 적합한 공전의 이유를 댈 수가 없었던 것. 천체/물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원형질의 기계”라는 역설적 명칭으로 불렀고 곧 이를 공식화 했다. 그럼으로 해서 가모프와 셰이플리의 이론은 폐기된다.

  대신 시비토와 비타의 가설이 등장한다. 바다가 항상성을 갖춘 바다로 단번에 진화해, 진화는 유기체 즉 생물만 가능한 일인데, 환경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실제로 솔라리스 행성의 바다는 지구의 바다처럼 넘실넘실, 바람이 좋으면 남실남실, 폭풍이라도 불면 우르릉꽝꽝 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끈적거리는 액체 같단다. 그래서 솔라리스학을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 바다를 놓고 ‘천재적인 바다’냐 아니면 ‘중력을 조정하는 젤리’냐의 논쟁에 불이 붙은 적이 있었다. 이게 주인공 크리스 캘빈이 태어나기 십 수년 전 이야기란다. 그러니까 솔라리스 행성 자체가 무게 1,700억 톤이 나가는 단 하나의 개체, 즉 생물로 인정을 했고, 지구인들은 자신들이 생명체를 구분하는 방법을 써서 솔라리스를 폴리테리아 문門, 신시티알리아 목目, 메타모르파 강綱이라고 해놓았다. (린네의 분류 방식, 문⊃강⊃목⊃과⊃속⊃종,인데 목과 강의 순서가 뒤집혔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러다가 이 즈음 해서, 솔라리스 연구는 사실상 중단되었는데, 이게 연구의 의미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어서인지, 포기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여튼 솔라리스 상공에 떠 있는 우주정거장 폐쇄까지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았으며, 이건 정거장을 폐쇄하면 지구 학계의 노골적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라서 차마 주장할 학자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캘빈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빈이 구태여 우주 정거장을 향하기로 한 것은, 자신이 솔라리스학을 공부하게 된 가장 중요한 선배인 기바리안이 정거장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거장엔 세 명의 연구원이 탑승하고 있다. 기바리안과 스나우트, 그리고 몇 번 나오다가 끝내 흐지부지되고 마는 사르토리우스. 그러나 기바리안은 캘빈이 도착하는 날 아침에 자신의 방, 기밀복을 걸어 놓은 옷장 틈바구니에서 죽은 채로 서 있는 것이 발견된 상태였다. 사인은 치사량의 페르노스탈을 주사했기 때문이었고, 거의 틀림없이 신경쇠약 또는 우울증, 아니면 심각한 편집증에 시달렸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동료 스나우트 박사의 귀띔에 의하면. 그런데 이 별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가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캘빈. 스나우트는 캘빈에게, 이곳, 솔라리스 상공의 우주정거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은 일종의 섬망상태라고 일러주었다. 캘빈이, 사실은 독자인 내가, 보기에 스나우트 박사 본인부터 섬망상태에 빠진 것 같았으며, 섬망도 카라마조프 형제들이 유전적으로 가지고 있는 섬망과도 다른 착란 상태와 비슷하지 않나 싶었다. 물론 뒤로 갈수록 스나우트 박사는 어려운 와중에도 비교적, 아니, 훌륭하게도 정상 사고를 멈추지 않았지만 하여튼 처음에 보기에 그랬다는 뜻이다. 스나우트가 크리스 캘빈에게 말한다. 누군가를 만나더라도 절대로 공격하지 말라고. 누구를? 정거장엔 오직 세 명만 있었고, 이제 다시 세 명이 되었는데 또 누가 있다고?


​  기바리안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는 동료 탑승 과학자 사르토리우스와 공동으로 몇 십 년 전에 베르통, 셰너헌 탐사대가 행했던 탐사 방식, 솔라리스 바다를 향해 고단위 X선을 투사할 계획이었다. 고단위 X선은 위험성 때문에 국제연합에서도 사용을 금한 방식이지만, 솔라리스 바다를 향한 호기심은 금지까지도 해제를 시켜버렸고, 위험한 방식의 탐사를 시행하자마자 우주정거장 안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였다.

  좋다. 이것까지는 알려드리지. 탑승자들의 기억 속에 가장 심각하게 남아 있는 사람이, 기억 속의 연령대 그 모습으로, 심장 박동을 지니고 호흡까지 하는 그대로, 살아있는 상태로 탑승자가 잠든 사이에 나타나 언제나 옆을 지키고 있다는 것. 예컨데 크리스 캘빈이 도착한 다음날 잠에서 깨는 순간 예전에, 벌써 십 년 전에 자살해버린 크리스의 연인 하레이가 흰 드레스 차림으로 침대 옆에 앉아 있던 것. 기분이 어땠을까? 잠에서 막 깬, 그리하여 비몽사몽일 것이 틀림없는 상태에서 긴 머리카락을 내려뜨린, 죽은 지 십 년이 넘은 여자가 큰 눈으로 자신을 내려보고 있으면.

  그러나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지 말 것. 어마어마하게 큰 생명체,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생명체가 어쩌면 상상도 하지 못할 능력을 갖추고 있을 수도 있으니. 세상살이도 그렇다. 다른 이를, 혹은 한 사건을 자신의 시각으로만 판단하지 말 것.


​  놀라운 SF 소설. 나는 SF가 실제 삶의 은유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여태 이 장르를 가비얍게 알던 나는 반성해야 하리라. 정말 렘을 읽은 건 내 독서력에 한 전환이 될 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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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6-06 08: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서관 책은 조급함 때문에 먼저 읽게 되더라고요. 이 작품은 영화도 그렇게 명작으로 칭송받더라고요.

Falstaff 2023-06-06 08:4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숨어 있는 책들도 참 많더군요.
저도 영화를 좀 찾아 봐야겠습니다.

유부만두 2023-06-06 09:04   좋아요 2 | URL
저도 그래요.

stella.K 2023-06-06 09: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도서관 보다 한동안 모처에서 하는 이벤트 책이 그랬어요. 도서관 책은 가질 수 없지만 이건 가질 수 있거든요.ㅋ 근데 지금은 집에 있는 책이라도 열심히 읽자로 바꾸었습니다. 너무 안 읽어서.ㅠ
SF도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야 읽을 수 있는 거 같습니다. ㅋ

Falstaff 2023-06-06 10:58   좋아요 1 | URL
이벤트 책이란 것도 있군요! ㅎㅎ 첨 알았습니다.
SF도 순 재미 위주가 아니더라고요. 렘한테 많이 배웠답니다. ^^

다락방 2023-06-07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서 사두었는데 SF 라는 장르적 특성이 저로 하여금 읽지 않게 만들었어요. 그러나 이렇게 반성할 정도라 하시니, 저도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저에게도 전환이 될 만한 일이기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SF 읽기 싫어요 ㅠㅠ)

Falstaff 2023-06-07 14:51   좋아요 0 | URL
저도 여간해서는 SF 안 읽는데, 이건, 사실 도서관에 있어서 읽은 거지만, 아주 예상 외였습니다. 도전해보셔도 좋으실 듯하지만.... 내가 싫으면 한성 판윤도 안 하는 겁니다. ^^

coolcat329 2023-06-07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은 작가 이름부터 너무 부담스러워 찜만 해두고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골드문트님께서 뭔가를 또 배우셨다니 대단한 책 같습니다.
근데 어렵지는 않은지요? 저는 sf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더라구요.

Falstaff 2023-06-07 14:53   좋아요 0 | URL
SF니까 아무래도 과학용어나 허구성 과학 이론 같은 것도 드물지 않게 나옵니다. 독자는 그냥 속아주면 되는 거고요.
예를 들어 태양이 두 개인데 행성이 둘 다를 공전하면 생물이 살 수 없다....는 누구의 정리,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거거든요. 그래도 콱 믿어 버리는 겁니다. ㅎㅎ
 
엘리엇 - 영혼의 순례자 위대한 작가들 5
피터 애크로이드 지음 / 책세상 / 1999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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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틀림없이 토마스 스턴즈., 즉 T.S 엘리엇의 전기biography다. 어린 시절부터 제일 읽기 싫어했던 장르가 『소년 소녀 위인 전기 전집』 같은 전기물이었다. 이제 나이 들어 마음이 좀 바뀌었느냐고? 갑자기 난데없이 톰 엘리엇의 전기를 읽겠다고 책을 빌렸으니 말이지. 게다가 번역한 시는 시에 대한 반역이라고 입에 침을 튀던 작자가 시인의 전기를 읽겠다니, 하 참,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곧 숟가락 놓는다고 하는데 혹시 이 경우가 그거 아닌가? 걱정하지 마시라. 난 톰 엘리엇에 대한 관심은 1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엇의 전기를, 그것도 색인까지 합해 무려 570 페이지에 달하는, 큰 판형, 조밀한 조판, 빽빽한 자간을, 몽땅 눈에 힘을 주어 읽은 것은, 엉뚱하게도, 엘리엇을 향한 존경의 마음이 아니라, 전기를 쓴 피터 애크로이드가 네 편의 작품, <플라톤의 반란>, <혹스무어>, <디 박사의 집>, <어느 시인의 죽음> 이것들이 내 마음에 파박, 오이디푸스의 눈알을 찌른 브로치의 바늘처럼 박혀 있었던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인터넷 책방에서 “피터 애크로이드”를 검색하면 이 네 권의 소설과 전기 <엘리엇>, 이렇게 다섯 권이 뜬다. 그리하여 읽는 김에 언젠가는 비록 전기물이기는 하지만 <엘리엇>까지 읽어 치우겠다고 다짐한 것이 3년 하고도 두 달이 지났다. 문제는 하나 남은 <엘리엇>이 절판 상태이며, 헌책방에서는 어마어마한 값을 부르고 있어 오금이 저려 하루이틀 미뤘었는데, 고맙게도 동네 도서관 개가실에 딱 하나가, 중간 부분 이후엔 손길을 타지 않은 상태로 고이 올려 있었던 것. 와우, 피터 애크로이드다! 주저할 이유가 하나도 없이 대출을 해서 곧장 열람실에 올라가 딱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고, 아이고, 죽을 똥을 쌌다. 글쎄 내가 전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니까.


​  피터 애크로이드는 1949년에 런던 이스트 구역에서 태어난 전기작가, 소설가, 비평가인데 주요 관심은 런던의 역사와 문화를 다시 구성하는 일이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혹스무어>에 관해서 류춘희는 《문학적 탐사와 역사적 탐색의 메타 서사》에서 “일어났어야 하는 일을 일어났음 직한 방법으로 글을 쓰는 애크로이드의 저작능력은 그의 해박한 지식과 공모하여 전기나 역사에 대한 독자의 해석을 치밀하게 교란시킨다.”라고 말했다. 18세기 초에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이 활약을 했고 (이이를 기억해두시라. 다른 책에서도 렌의 이름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런던 대화재 당시에 불타버린 성당을 복원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실제로 그의 서기였던 니콜라스 혹스무어(작중 이름은 니콜라스 다이어)를 골라 애크로이드가 탄생한 동쪽 지역의 교회 여섯 개를 복원하는 작업을 맡긴다. 시간은 갑자기 250년이 흘러 1980년대로 변하고, 당시 니콜라스가 건축한 교회 지하실의 납골당에선 한 소년이 목이 졸린 채 죽어 있다. 이 두 사건, 교회 건축과 소년의 죽음이 어떤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그것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작품은 결코 추리나 범죄소설로 분류하면 안 될 듯하다. 오히려 포스트 모던이라고 해야 마땅할 듯.

  인류 최후의 혁명이 끝난 태평성대에 다시 반란을 꿈꾸는 또다른 인류를 그린 <플라톤의 반란>도 빼어나고, 하여간 특별한 작가라서 늘 기억하고 있었다. 미국 아마존에서 애크로이드를 검색해보면 독자 평점이 극과 극을 달린다.

  런던에 사는 로만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자라,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경험이 있고, 겨우 일곱 살의 나이에 자신의 성 정체성이 게이라는 걸 알게 된 소년 피터. 하여간 사람은 공부를 잘 하는 게 좋다.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멜론 장학금을 받아 예일에서 학위를 따, 세상의 독자들에게 극심한 호오 논쟁을 일으킨 소설가가 되었으니 뭐 이 정도면 괜찮게 살았다 싶다.


​  근데 전기물 <엘리엇>은 길어도 너무 길다. 상세해도 너무 상세하다.

  재미 있는 것 몇 개.

  엘리엇의 조상은 17세기 말엽에 거의 맨 앞에서 몇 번째로 메사추세츠에 도착한 잉글랜드 사람으로 보스톤 근교 세일럼에 정착해 살았다. 거기서 틀을 좀 잡고 살기 시작할 쯤해서, 난데없이 마녀 사냥이 벌어진다. 아서 밀러가 <시련>에서, 며칠 전에 소개한 마리즈 콩데가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에서 사람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그것도 흑인 여성에겐 눈 뜨고 읽기 힘들 만큼 잔인하게 고문하고, 목 매달고, 뉘어놓고 가슴팍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아 서서히 깔려 죽게 만들고, 이런 짓을 그래도 재판이라는 형식을 통해 진행시켰는데, 엘리엇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역시 배심원의 한 명으로 참관을 해 유죄 취지의 의견을 냈다고 한다. 그는 이후 당시 결정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세일럼을 떠나 20세기 말에 고속도로로 차를 몰고 여덟 시간 거리였던 세인트루이스, 그저 허허벌판인 프랑스 풍의 도시, 볼 것은 오직 하나, 훗날 톰 엘리엇이 자유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는 허클베리가 신나게 장난치던 장소, 미시시피 강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했단다.

  나는 피터 애크로이드의 팬이라서 이 책을 읽었지만, 엘리엇만 나오면 죽고 살지 못하는 광팬이 아니라면 살 수도 없고, 읽기도 힘든 책을 구태여 읽어보시라 권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알아서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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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6-03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6-03 15:38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