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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부엉이
사데크 헤다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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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수도 서울에서 가장 번화하고 가장 땅값이 비싼 지역이 아마 테헤란로 일 거 같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에 그곳 땅 3.3㎡이 6천만 원이라고 했던 것까지 기억이 난다. 그냥 기억이 난다는 것이지 관심도 없다. 아무리 이모네가 서초동 땅부자라도 나한테 한 평이라도 줄 리 없는데 뭐 하러 그런 데다 신경을 쓰나. 마찬가지로 이란의 테헤란에 가면 서울로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란. 예전 지명으로 하자면 페르시아다. 페르시아는 북아프리카에서 발현한 아랍하고 다르다. 전에는 종교도 달랐다. 페르시아는 원래 배화교, 조로아스터교 신자가 많지 않았나? 그러다가 6세기, 7세기 들면서 동로마에 해가 떨어지는 시점과 맞춰 페르시아도 전립선 부실한 아저씨처럼 시새푸새 해졌고, 이때를 틈타 저 남서쪽의 사막지역에서 이교도 사라센들이 막강한 힘으로 밀어붙여 급기야 페르시아 사산 왕조를 거덜내버렸다. 이후 페르시아는 무주공산이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 영향권의 이란으로 굳어지게 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배화교를 버리고 마호메트교로 개종을 했지만 끝까지 배화교를 지키던 사람들은 (하여간 사막 종교들의 질투심이란!) 알라 말고 신이 없다는 신념으로 배화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하기 시작했고 이걸 견디다 못한 이란(페르시아) 내 배화교도들은 배를 타고 인도 뭄바이 근방으로 이주했는데 이들을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 “파르시”라 부른다. 우리가 알고 있는 파르시 족으로는, 록 그룹 <퀸>의 리드 보컬 고 프레디 머큐리, 지금은 뉴욕 필하모니의 음악감독으로 있는 지휘자 주빈 메타, 그리고 어쨌든 세계 최고의 자동차 회사 가운데 하나인 인도 타타모터스 대표 타타 등이다.
사산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 유럽인 눈으로 볼 때 그저 그런 변두리인 아시아 지역의 야만스런 나라로 지내다가, 걸핏하면 십자군이네 뭐네 하는 유럽 연합군대한테 두드려 맞기도 하고, 사실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맞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때려주면서 논두렁 건달 노릇을 착실하게 하며 천 년을 잘 견뎌왔다. 그러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슬람 문화의 정체된 답답한 요소들이 사회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글쎄 테헤란에 있는 국립 축구장에 십만 명이 들어간다는데 거기에 여자가 한 명도 없다잖아. 그러다가 1925년 리자 샤 팔레비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을 하더니 칭왕을 해 왕좌를 깔고 앉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단 궁정 여성들에게 차도르를 착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암만해도 눈에 번쩍 띄는 것을 개선해야 제일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그랬는데 이 팔레비 1세는 1920년대 유럽의 (위험한) 혁명 사상과 민주주의, 그리고 이란에서 앞으로 자신이 누릴 권력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개혁을 위한 수입품목에서 빼 버렸다. 그리하여 문학적으로 보면 여성들의 얼굴에서 차도르를 벗겨낸 이 시절이 오히려 깊은 어둠에서 길을 잃은 시대였다고 한다.
1903년에 테헤란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난 사데크 헤다야트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지만, 주위에서 기대하는 엔지니어링엔 영 소질도 없고 희망도 없어서 엔지니어가 되는 조건으로 1925년에 떠난 벨기에-프랑스 유학 중에 기계제도機械製圖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대신 아방가르드 예술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모파상, 체호프, 릴케, 슈니츨러, 포, 카프카 등에 더 몰두를 했다 한다. 와중에 우울증 증세가 심각했는지 1차 세계대전 당시 격전지였던 마른 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투신한 적도 있었다. 그래 풍덩 빠지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죽을 팔자가 아니었는지 다리 아래에 노도 젓지 않고 그냥 물결 흐름에 맡겨둔 보트가 한 척 있었고, 보트 안에는 선남선녀가 “사랑을 나누고” 있다가, 뭔가 옆에서 크게 풍덩, 하고 빠지는 소리가 나는 통에 김이 새서 고개를 들고 보니 젊고 잘 생긴 페르시아 귀족 청년이 빠져 죽고 있는 거였다. 용감한 프랑스 청년은, 다행스럽게 빨리 뛰어들 수 있게시리 옷을 벗을 필요가 없는 상태여서 곧바로 다이빙을 감행, 헤다야트를 살려주었다. 프랑스 청년은 몰랐으리라. 자기가 살린 청년이 24년 후에 스위스에서 비자 연장이 거부당하자 가스를 틀어놓고 기어이 자살에 성공하리라는 것은. 이 청년이 이란의 문학적 어둠의 시대에 찬란하게 빛을 발하던 거의 유일한 작가가 되리라는 것도.
사실 작가 소개를 하면서 너무 말이 많았다. (나도 왜 이런지 몰라. 한 번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도무지 걸리지 않으니 말이지) 이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1925년부터 6년간 이어지는 유학생활에서 그가 아방가르드 예술에 많은 관심을 두었다는 거였다.
이 책 <눈먼 부엉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미리 언질을 준다. 나는 원서를 직역하면 저런 번역문이 나올 것인가, 처음부터 매우 궁금해졌다. 뭔가 들은 것 같은 구절이 있지? 유명하기는 한데 느므느므 지루한 영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떠올리는 건 나 하나? 만일 내 의견이 맞다면, 이 문장은 우리나라의 중견 소설가이기도 한 역자 배수아가 번역을 하며 우리 독자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읽힐 수 있는 표현을 쓴 거 아닌가 싶었던 거다. 이래서 소설가가 번역한 작품은 내가 안 좋아하는데, 만일 내 생각이 틀리면 배수아한테 미안하게 됐다, 직역이 ‘영혼을 잠식한다’, 라고 되어 있다면 말이다. 여기다가 고통에 관한 이야기라고 덧붙이면, 애당초 이야기 자체가 데카당, 아니면 적어도 데카당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작품일 수밖에 없을 거란 걸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데카당 문학의 매력이지만 동시에 약점이기도 한 게 미문, 아름다운 문장이다.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자 나는 필통에 그림을 그려 파는 필통화가다. 하루는 아버지와 일란성 쌍둥이이자 삼촌이라고 주장하는, 하지만 친아버지일 수도 있는 작자가 사업 관련해서 집에 온 적이 있다. 이란의 신년인 노루즈 지나고 13일째 되는 날이었다. (노루즈 끝나고 13일. 책에서 계속 나온다.) 집에 마땅하게 대접할 술도 없고, 아편도 없어서 어떻게 할까, 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어려서 유산으로 받은 포도주가 식품보관소 선반에 있다는 게 생각나 의자 위에 올라섰는데, 벽에 적당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었고, 구멍을 통해 장면과 사람 몇 명의 모습이 보이던 거였다.
집 뒤편 공터에 곱사등이 노인이 마치 인도의 요기 같은 자세로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에 앉아 있고, 한 소녀, 아니,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검푸른 메꽃을 노인에게 건네는 모습. 검정 주름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단번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마법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그건 지켜보는 사람에게 통렬한 비난을 던지는 눈동자로 바뀌어, 나는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나는 그(소녀의 눈동자) 안에서 ‘길을 잃어버렸다’”도 좀 흔한 표현이다. 이것도 원문에 이렇게 쓰여 있는지 궁금하다.)
소녀는 불쑥 튀어나온 광대뼈, 넓은 이마, 눈썹이 가늘면서도 양쪽이 길게 서로 이어졌으며, 반쯤 열린 도톰한 입술의 얼굴이었다. 섬세하면서 가녀린 팔다리와 가볍게 늘어지는 몸동작을 하는 것으로 보아 쓰러질 정도로 매우 허약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 딱 한 번 본 소녀, 여자.
이것을 주인공 나는, 너무도 깊고 현기증 나는 절망의 심연으로 몰아넣은 잊을 수 없는 체험이며, 심지어, 작가가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는 건 습작 중이거나 데카당 작가 밖엔 없는데, “최후의 그날까지 인생에 무서운 독으로 작용할 것이며, 고통의 흉터로 이 일 이후 나의 모든 다른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고 한다. “찰나의 광채 속에서 아주 짧은 순간,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불운의 전모를 보았으며, 그것이 지닌 숭고한 아름다움을 알아차렸”는데, 삼촌이 가고 3일 후 문제의 포도주를 다시 선반 위로 올려 놓으려 의자에 오르니 벽의 구멍이 말끔하게 메워졌다고 말하니, 독자는 이걸 믿어, 말아? 아무쪼록 열내지 마시라. 데카당은 간혹 그런 법이니.
작품의 시작점은 이 일이 있고 나서 두 달 나흘이 지났을 때이다.
이제부터 작품의 나머지는 전부 여태 나왔던 사람들, 터번을 쓰고 목에 몇 겹의 숄을 두른, 썩어 검게 변한 앞니를 가진 늙은이, 소녀라기 보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여자, 그리고 나. 이 세 명의 변주, 그것도 무한 변주를 시작한다.
작가 사테크 헤다야트는 그래도 앞 부분에서 독자에게 적절한 힌트를 던진다. 화자 나는 알코올과 아편을 탐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 실제로 ‘나’가 노루즈 끝나고 13일째 벽의 구멍을 통해 본 사람들을 두 달 나흘을 찾아 배회하고는, “아편의 몽롱한 환각 속에서만 나타나는 꿈의 형상” 같다고, 완벽하게 조화로운 육체의 선, 날씬하게 키가 큰 형상이 그러니까 아편을 피우고 있는 상태에서 본 홀로그램일 수도 있는 것이어서, 뒤에 여러 번 나오는 꿈 속 장면처럼, “한 이란 아편쟁이의 고백”일 수도 있다는 걸 독자들은 염두에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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