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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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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위화를 읽는다. <원청>이 위화가 <제7일>을 발표한 이후 8년 만의 작품이란다. 나도 가장 최근에 읽은 위화가 <제7일>이었다. 제일 처음에 읽은 위화는 당연히 <허삼관 매혈기>였다. 우리나라 초판이었는데, 1990년대 어느 날 한겨레 신문이던가 신문 서평에서 극찬하는 기사를 읽고 동네 책방에 갔더니 없다고 해서, 책가게 쥔한테 한 권 주문해 읽었다. 그게 재미 있었는지 위화의 작품은 제법 읽은 편이다.
<원청>을 읽으면서 갑자기 팍, 머리에 이런 생각이 꽂혔다.
“위화를 더 읽을 필요가 있을까?”
이 대단한 거짓말쟁이의 대단한 입담이 이젠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거였다. <인생>, <형제>, <가랑비 속의 외침> 등등 중국 근현대사 인물들의 징글징글한 삶의 묘사가 마치 프레스에서 찍혀 나온 제품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작가는 진심을 다 해 쓴 결과물을 이렇게 단칼에 매도하면, 그게 비록 독자의 권리이긴 하지만 심하게 야박한 입방정이라는 것은 안다. 그저 입 다물고 나만 위화를 이제는 더 읽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그걸 구태여 내놓고 이야기해서 위화를 매우 재미있게 읽고 있는 다른 독자들의 김을 새게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아, 여기서 잠깐. 위화는 여전히 재미있고, 독자의 감정을 적어도 세 옥타브 정도는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자유자재로 소위 “나빌리는” 솜씨를 발휘한다. (“나빌리다”는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접어 나빌래라”의 변형입니다.) 여전히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입담 덕분에 날 새는 지도 모르고, 엉덩이에 뾰루지 나는 지도 모르게 책에 빠지게 하는 중원 고수의 검법을 휘날린다. 내 이야기의 중심은, 이제 그의 화려한 검법이 다 그게 그거인 거 같다, 하는 아쉬움이지 조자룡 헌 칼 쓰는 듯한 그의 무공이 이젠 쇠한 거 같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그러면, 위화만? 아니다. 색채는 다르다. 그래도 위화와 더불어 중국 근현대사의 시골이나 소도시의 서민들이 시대를 겪어가는 광경을 그리는 비슷한 세대 작가들, 예를 들면 옌렌커, 쑤퉁, 류전윈 같은 이들이 물론 독특한 자신들의 세계는 각기 다르지만 거의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이들을 (내 마음대로) 퉁 쳐, 3세대 중국 작가라고 한다면, 이제 이들 그룹의 소설이,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내게는 별 효용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하기는, 내게도 잘못이 있다. 애초에 작품 수가 별로 없는 다이호우잉으로 중국 현대 소설에 매료되기 시작해서, 모옌을 거친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3세대 작가들을 거치면서 다시 다이호우잉을 그리워하게 된 거다. 그러니까 이들 말고 다양한 중국 작가들을 읽어봤어야 했는데 위화, 옌렌커 등에 너무 쏠려 버렸고, 급기야 그리하여 질린 것 같다는 말이다. 조만간 찬쉐의 <마지막 연인>을 읽을 계획이다. 이 작품은 3세대 작가들과 다른 이야기, 다른 문체를 하고 있기를 바란다.
린샹푸林祥福 우리나라 발음으로 임상복 씨는 황하에서 북쪽으로 구식 마차를 타고 하루쯤 되는 거리에 있는 농촌의 유지였다. 물론 가상의 농촌이라 황하 이북이라도 그게 푸양에서 하루인지 지난에서 하루인지에 따라 매우 다르지만 청나라 말기에 경성이라 불렸던 베이징이 가끔 거론되는 걸로 보아 지난에서 하루 거리 같은데, 그런 건 크게 의미는 없다. 린샹푸는 북중국 사람답게 기골이 장대하고 힘도 장사였는데다가 손재주도 좋아 농한기를 이용하여 근동의 이름난 목수(들)에게 목공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이 건장한 청년이 목공에 관해서는 말 그대로 청출어람이라 남들 2년 걸려 배울 것을 2주일 정도면 뚝딱 해치워 버리는 수준이어서 부드러운 나무를 다루는 연목 목수일과 목공 최고의 기술이라고 하는 경목 목수일까지 다 마스터해버렸다. 아버지는 다섯 살 때 돌아가고, 어머니마저 19세 때 세상을 접어, 4백여 무畝, 정확하게는 476무의 전답과 방 여섯 개 벽돌 저택, 그리고 백여 권의 책을 유산으로 갖게 됐다. 1무가 2백 평이니 476무면 9만5천 평이 넘는다. 린씨 가문은 대를 이어 농사를 지었지만 책 읽기도 게을리하지 않아서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학제學帝였던 옹정제의 저술까지 나름대로 (시골 수준으로 보면) 깊이 있는 공부도 한 셈이다. 다른 한 편으로 일찍이 최고의 경목 목수이자 린씨의 선생이기도 했던 쉬경목이 평하기를 “부잣집 도령 같지 않게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품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린씨 사람들은 9만5천 평의 전답을 꾸리면서 매해 추수가 끝나면 소출을 마차에 싣고 현성을 나가 현물을 금괴 작은 것으로 바꾸었는 바, 일년 소출이 대강 작은 금괴 하나 정도였으니, 작은 금괴를 ‘참조기’라고 일컬었다. 참조기 열 마리가 모이면 큰 금괴 하나로 다시 바꾸었는데 큰 금괴는 ‘수조기’라고 했다나. 물론 중요한 건 아니다. 작품이 본격적으로 펼쳐질 당시에 린샹푸의 비밀 금고엔 수조기 열일곱 개, 참조기 세 개가 있었다. 이런 린샹푸 앞에 저 남쪽에서 도착한 사람들이 나타난다.
총명하고 정의롭고, 영국 젠틀맨보다 더 신사인 린샹푸는 애초부터 믿지 않았으나 자기들이 남매라고 주장하는 젊은 남녀, 남자는 아창이요, 여자는 샤오메이가 나타났다. 점잖은 린샹푸는 아무리 안 보려고, 보면 지는 거다, 보면 지는 거다, 속으로 다짐을 해도 자꾸 샤오메이가 입은 밝은 꽃무늬 치파오의 옆 면이 좍 트여 있었고, 거기다가 젊은 샤오메이가 얼마나 어여쁜지 관심이 생기긴 했지만, 남매라는 걸 믿지 않은 바에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하루를 묶고, 다음날 아창이 부탁하기를, 자신들의 경성에 이모부를 찾아 의탁하려 하는데 어디서 사는 지 몰라 날이 걸릴 거 같다, 둘이 움직이면 비용이 많이 든다, 등등을 이야기하면서 남자 혼자 다녀올 터이니 그동안 샤오메이를 머물게 해줄 수 있겠느냐는 거다. 활수한 린씨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해서 아창 혼자 길을 나서고, 샤오메이는 남는 방에 거처하게 되니, 여섯 칸 넓은 집에 젊은 청춘 둘만 남았고, (19세기니까) 당연하게 샤오메이는 청소와 부엌일 등을 하며 순식간에 안주인 노릇을 하게 됐다. 그리하여 몇 달 후, 린샹푸는 샤오메이를 데리고 부모산소를 찾아 둘이 혼인하겠다고 고한다.
둘이 신혼의 깨소금으로 열심히 참기름을 짜기 시작해 몇 달 후, 샤오메이는 고향의 부모를 위해 관왕묘에서 재를 올릴 예정으로 길을 떠났다. 출발하기 전에 린샹푸의 새 옷과 새 신발을 두 벌씩 손바느질로 깔끔하게 지어 놓고, 자기 없는 동안에 밥 굶지 말라고 밥도 한 솟 단지, 반찬도 찬장 가득 장만해 놓았어도 마음 좋은 린샹푸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샤오메이가 아주 나가버렸다는 것을. 기껏해야 며칠 있으면 와야 하는데 보름이 지나도 오지 않아 이상하다, 정신이 번쩍 들어 비밀 금고를 열어보니 에그머니, 수조기 일곱 개와 참조기 한 개가 없어진 거다.
그러나 한두 달이 흐르자, 다시 꽃무늬 치파오를 입은 샤오메이가 자기 발로 돌아왔다. 금괴는 탕진했지만 자신이 린샹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린씨는 저번 일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아 생긴 일이라서 그랬다고 결론을 내고, 이번엔 정식 절차를 거쳐 결혼식을 올린다. 시간이 흘러 샤오메이는 딸을 낳았다. 그리고 가을이 되자, 어느 날, 딸 아이가 목에 힘이 생겨 고개를 들어올릴 수 있게 된 날, 샤오메이는 아이가 먹을 죽 한 사발을 남기고 다시 사라져버렸다. 이번엔 금괴에 손도 대지 않고.
린샹푸는 땅을 저당 잡히고, 금괴도 은표로 바꾸어 옷에 꿰매고, 참조기 하나는 은화로 교환해 주머니에 넣은 다음, 아이를 포대기에 잘 싸 가슴에 안은 채, 등엔 커다란 짐을 지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아창과 샤오메이의 고향이라고 하는 원청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원청이 어디일까? 황하를 건너고, 양쯔강을 건너도 아무도 원청이란 곳을 알지 못한다. 원청이 정말 있기는 한 것일까? 이 책을 읽은 중국의 한 독자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는 원청이 있다.”라 했다고, 작가 서문에서 위화는 말한다. 알지 못하지만 반드시 가야 할 곳. 평생을 걸고 찾아야 하는 사람, 연인, 아니면 프로젝트가 있는 곳. 또는 파라다이스나 유토피아. 아니면 그저 누군가 지나가는 거짓말로 일러 준 허위의 도시.
재미있는 작품이다. 독자를 웃기고 울리기도 한다. 비적(토비)가 벌이는 폭력이 과하게 적나라해서 가끔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나는 좀 다른 위화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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