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이야기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엘리자베스 개스켈을 읽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된다. 2015년 여름이었으니 딱 8년 전이다. <남과 북>을 읽었는데, 빅토리아 시대에도 이런 ‘여류’ 작가가 있었어? 놀랐던 적이 있다. 과학과 산업과 무엇보다 자본의 세기, 19세기에 부르주아 계급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속에서 가난한 공장 직공들의 저항을 바라보는 시선이 놀랍도록 따뜻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에게 직원들의 복지를 요구하는 자본주의 아내.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로 읽었다. 잉글랜드의 농업중심인 남부와 공업지역인 북부, 자본과 노동, 인권, 노동자 복지 등등, <남과 북>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조지 엘리엇 보다 더 재미있었다. 요새는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북과 남>이란 제목으로 새로 나왔다. 이후 <크랜포드>도 읽었고 그게 재미 있어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읽기는 했지만 지금 기억하는 건 별로 없다. 어쨌든 엘리자베스 클레그헌 개스켈의 책은 눈에 보이면 읽으려고 한다. 《고딕 이야기》는 동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 한 달 만에 받아 뚝뚝 읽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낸 개스켈의 《회색 여인》하고 겹치는 작품(“늙은 보모 이야기”)이 있고, 마녀와 유령이 등장하는 플롯(“빈자 클라라 수녀회”)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은행나무 에세의 개스켈과 휴머니스트 캐스켈, 두 권을 다 읽으면 좋겠지만 그건 돈과 시간이 많으면 그렇게 하셔도, 아니면 두 권을 각기 좌우 양편에 놓고 왼 손바닥에다 침을 탁 뱉은 다음에 오른 손가락으로 냅다 쳐서 침이 튀는 방향에 놓인 책을 고르시는 것도 현명하겠…….지?


​  다음은 역자 박찬원에 관하여. 박찬원은 좋은 교육과정을 밟은 후 지금은 전문 역자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나라 중견 역자다. 나도 이 양반의 번역서 꽤나 읽었다. 재미있게 읽은 순서로 치면 두 번째 자리에 가져다 놔도 고맙지 않을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부터 시작해 <지킬 박사와 하이드>, <벤자민의 시계…>, <펠리시아의 여정>, <아가씨와 철학자> 등등. 이렇게 꼽아보니 번역에 관해 내가 까탈을 잡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근데 《고딕 이야기》는 아니다. 왜 한자어를 쓸까? 자신이 한자어를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쓰니 문장 속에 인용하기엔 엉뚱한 단어를 고를 수밖에. 난공불락하고 또 뭐가 있었더라, 하나가 더 있었다. 또, 사실 역자에게 이런 말을 하면 너무 가혹할 수 있지만, 여태 불만 없이 읽은 역자라서 애정을 갖고 얘기한다고 믿어주시면 좋겠는 바, 비문이 많다. 이이의 우리말 수준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발생하는 비문은, 독자가 읽으면서 뭔가 이상한데 하여튼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는 있다, 라고 느끼게 되기 때문에 더 해롭다. 개스켈의 문장은 복문이 많다. 그리하여 크게 주어와 술어를 찾을 수 있지만, 문장 안에 든 절節이 비문일 경우엔 대책이 없다. 예를 들기 위하여 책을 다시 읽지는 않겠다. 같은 문장을 몇 번 확인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는 정도에서 끝내겠다. 역자를 포함해 글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비문을 발생시킨다. 이건 숙명이다. 그러면 문제는? 퇴고와 출판사의 칼 같은 교정작업. 나는 역자의 실력이 아닌, 이 “퇴고와 교정”에 시비를 걸고 있는 중이다.


​  모두 일곱 편의 단편과 중편을 담고 있는 책. 전부 다 고딕 이야기. 고딕. “중세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공포와 신비감을 불러 일으키는 유럽 낭만주의 소설 양식의 하나.”라고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나와 있다. 계속 설명을 하기를, “고딕소설들은 잔인하고 기괴한 이야기를 통해 신비한 느낌과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유발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지금 시대도 고딕 소설은 쓰이고 있다. 나는 고딕, 하면 저절로 앤젤러 카터를 떠올리는데, 이이 외에도 카슨 매컬러스, 구스타프 마이링크(이 양반은 여기 끼기에 너무 올드한가?), 그리고 최제훈 같은 이도 고딕하고 관련이 있겠다. 나는 작년 봄에 휴머니스트와 은행나무에서 한 방에 두 권의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책을 내놓았고, 그것들이 또 모두 고딕 중단편이란 걸 알고, 어떻게 개스켈 같은 이가 고딕 소설을 썼는지 한 편으로는 의아해 하고, 한 편으론 흥미로웠으며, 또 한 편으론 조금 실망도 했다. 지금은? 아니다. 개스켈의 고딕도 보통 고딕이 아닌 것을 확인했다.

  고딕 소설의 구분법. 책을 읽다가 오소소해지는 느낌. 가족들 다 잠든 한밤이 아니더라도, 가을바람 스산한 그믐밤이 아니더라도, 한 여름 대낮에 고딕 소설을 읽으면서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끼치면 그건 일류 고딕이다. 한밤이라면 갑자기 뒤통수가 뻣뻣해져서 혹시 뒷벽 창문에서 누군가 들여다보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 비록 7층 아파트일지라도, 고개를 돌려 컴컴한 창문을 힐끗 쳐다보게 만들면 특급이다. 거기다 적절한 수준의 에로티즘까지 소스로 뿌려주시면, 환상이지 뭐. 그러나 일단 침을 닦으시라. 개스켈의 작품에서 에로티즘을 바라는 건 벼락맞아 죽은 살구나무에 꽃 피길 기다리는 것하고 비슷할 터이니.


​  엘리자베스 크래그헌 개스켈은 19세기 사람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 나오는 여러가지 상황이 예상 외로 어디선가 본 듯한 구성일 확률이 높다. 예컨데, 네댓 살 정도에 갑자기 조실부모한 로저먼드 아기씨가 보모와 함께 후견인인 아기씨의 삼촌인 퍼니벌 경의 대저택으로 가서 살게 됐다고 치자. 저택엔 입구에 잡초 하나 없고 건물을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도, 나무도 없이 황량한 저택인데, 저택의 주인인 퍼니벌 경은 거의 언제나 여행을 떠난 상태로 여든이 멀지 않은, 마르고 키가 크고 청각을 거의 상실해 나팔형 보청기를 사용하는 퍼니벌 부인이, 원래 하녀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늙은 부인의 오래된 친구로 늘 옆에 있는 냉정하고 무감정한 스파크 부인이 저택을 지배하고 있다. 저택은 동관, 서관, 북관이 긴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어서 어린 로저먼드 아가씨는 자유롭게 뛰놀 수 있다. 다만 동관 만 빼고.

  왜 동관을 빼? 고딕 소설에선 당연한 거다. 뭔가가 감추어져 있는 비밀스런 곳이니까. 곧이어, 아니면 뜸을 잔뜩 들인 다음에 결정적으로 파국이나 반전이 그곳에서 시작할 터이니. 많이 본 것 같다. 어려서부터 질리게 본 디즈니 만화에서. 또 숱한 영화를 통해.

  그런데 재미있다. 이 내용이 <늙은 보모 이야기>이고, 이것 말고 <빈자 클라라 수녀회>,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도 그렇다. 일곱 작품이 실렸다. 일곱 개 다 좋기를, 설마, 바라시는 건 아니겠지?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하수 2023-07-22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렇게 갑자기 끝내신다구요? 좀 더 써주시지...열라 읽다 휙 뺏긴 느낌..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다는 아녀도 아무튼 재밌단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편안한 주말 되세요.

Falstaff 2023-07-22 13:2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렇게 중간에 뚝 끊어야지 읽는 분들이 궁금하셔서라도 책을 읽어보시지 않을까 싶거든요.

잠자냥 2023-07-22 0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지 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7-22 13:29   좋아요 1 | URL
귀신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3-07-23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고딕소설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장르여서...!

Falstaff 2023-07-23 21:01   좋아요 1 | URL
넵. 고딕은 여차하면 눈에 차지 않아서 오히려 쓰기가 더 힘들 거 같더라고요.
 
황사를 벗어나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73
캐런 헤스 지음, 서영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캐런 헤스. 그러니까 이이의 시댁 식구들이 헤스, 알파벳으로 쓰면 Hesse 집안 사람들이란 얘기다. 시할아버지나 증조 시할아버지 형제 가운데 혹시 ‘헤르만’이라는 이름을 쓰는 양반이 있었을까? 왜 나는 쓸데없이 이런 게 궁금한 지 몰라. 하여간 캐런 헤스는 1952년 용띠 여사님으로 메릴랜드 볼티모어 출신이다. 근처에 있는 토우슨 주립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다가 랜디 헤스를 만나 결혼하는 바람에 학교 때려 치웠다. 이후 메릴랜드 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심리학과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 도대체 한꺼번에 몇 가지를 한 거야? 학교를 졸업하고 남편, 두 아이와 함께 버몬트주의 브래틀보로로 이주해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아동문학과 청소년문학에 전념하고, <황사를 벗어나서>를 이이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위 내용은 위키피디아를 참고했다.


​  캐런 헤스가 낳고 자란 메릴랜드 주도 그렇고, 가족을 이루고 산 버몬트도 그렇고, 다 미국의 북동쪽 지역인데 어찌 대표작이라고 하는 <황사를 벗어나서>의 배경을 오클라호마 북서쪽 끄트머리 팬핸들 지역으로 설정을 했는지 궁금했다. 1930년대 초반의 오클라호마라고 하면 우리는 어딘지 벌써 익숙한 기분이 든다. 이건 백이면 백 겉멋이 잔뜩 들어 폼잡기 좋아하는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의 대표작 <분노의 포도> 때문이다. 안 그런가? <분노의 포도>에서는 주인공 톰 조드가 만기 출소를 하고 오클라호마의 집으로 돌아가 대기근을 견디다 못해 캘리포니아로 갈 준비를 하는 가족과 합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931년의 마지막 풍작 이후 내리 몇 년 동안 극심하게 적은 강우량과 건조한 먼지를 견디다 못한 조드 가문의 오클라호마 탈출, 캘리포니아 생존기가 <분노의 포도>였다면, 죽으나 사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척박한 땅에 박힌 뿌리를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오클라호마 땅에서 곱디 고운, 먼지dust 같은 황사와 황사 폭풍, 이것에 동반하는 황사 폐렴과 모든 결핍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린 것이 <황사를 벗어나서>라고 할 수 있다. 조드네 식구들의 고향 탈출이 충분한 이유가 있듯이, 끝까지 헐벗은 팬핸들 고향을 지키며 상실과 가난 속에서 버티고 사는 주인공 빌리 조 켈비네 식구 역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여간 생존해 나간다는 것. 모진 목숨 가뿐하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그 속에서 자신을 형성한다는 것. 그리고 다분히 미국적이라는 것이다.

  미국적? 그렇다. <분노의 포도>도 그렇고 <황사를 벗어나서>도 그러니, 어떤 결말이 날지, 읽으면서 속으로 초조해 하지 마시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터이니.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까 혹시 스포일러 아닐까 싶네.


​  이 책 이야기를 하면서 “운문소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읽어본 바 있어서 그리 낯설지 않다. 오히려 푸시킨 보다 <황사를 벗어나서>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훨씬 더 현대적이라서 더 흥미롭고, 무슨 뜻인지 재까닥 알겠고, 호소력 있었다. 운문 소설, 시로 쓴 소설이라 작품의 길이가 짧아졌지, 이걸 스타인벡처럼 산문으로 썼으면 아무리 짧게 써도 5백쪽은 넘지 않겠나 싶다. 그만큼 운문, 시가 독자들에게 더 강하고 즉물적으로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 빌리 조가 우울한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밤 열차를 타고 가출을 하는 한 부part가 있는데,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겪은 에피소드, 그리고 아버지와의 화해 같은 것 가지고도 한 권의 소설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자꾸 빌리 조, 빌리 조, 하니까 남자 아이 같지? 아니다. 1920년 8월에 부엌 바닥에서 맨발, 맨 엉덩이로 웅크려 앉은 폴 켈비가, 남편 베이어드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의사가 오기도 전에 출산한 딸이다. 아버지는, 암만해도 오클라호마 농촌지역이다 보니 조금이라도 더 큰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아들을 원해 미리 이름을 빌리 조로 지어 놓았는데 딸이 나왔고, 다시 이름을 짓기도 그래서 그냥 빌리 조를 호적에 올려 버린 거였다. 이 빌리 조 켈비로 말할 거 같으면 어려서부터 다리가 길고, 입은 크고, 뺨은 자전거 손잡이처럼 옆으로 벌어지고, 훗날 피아노의 몇 옥타브를 한 손에 거머쥘 큰 손과 빨강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얼굴, 좁은 엉덩이를 가지고 있어서 학교 체육 선생이 농구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꼬드길 정도였지만 정작 빌리 조 자신은 피아노 연주하는 것과 사과를 한 볼 가득히 베어 먹는 걸 좋아한다. 여기다가 총명하기도 해서, 다니고 있는 중학교가 오클라호마 전 지역의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성적을 기록하는데, 빌리 조는 여기서도 시험을 치룰 때마다 1등을 먹는다. 비록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 무심하게 말하고 넘어가지만.

  1920년생 빌리 조가 중학교 다닐 열네 살. 1934년 갑술해. 엄마는 빌리 조 이후로 처음 임신을 하고, 지난 세계대전 당시 말도 못하는 곡물 가격 상승에 힘입어 떼돈을 번 미국의 농부들이 초지와 산림을 무분별하게 개간하여 농지로 만들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한 순간에 전장에서 농지로 변한 유럽 땅에서 새롭게 농사를 시작해 미국의 농부들은 거덜이 나기 시작했다. 무분별한 개간은 토지를 건조하게 만들었고, 1930년대 들어와 큰 가뭄이 들자 오클라호마, 아이오와 등등엔 건조한 먼지들이 폭풍과 함께 사람의 일상에 공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했다. 고운 흙먼지는 농기계와 자동차 뿐만 아니라 집안의 세밀한 틈새를 뚫고 들어와 모든 세간 위에 뽀얗게 쌓이고 농부들의 코와 귀와 기도와 식도까지, 점막의 습기에 엉겨 진흙탕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 남고, 소년소녀들은 사춘기를 맞고, 누구를 좋아하기 시작하고, 그러나 모든 가족들이 다 그런 건 아니라서 어떤 집엔 특별히 개별적이고 치명적 불운이 쳐들어오고, 어떤 집은 이 와중에도 별 어려움 없이 지나가기도 하는데, 우리의 주인공 빌리 조네 집은, 아무래도 주인공 집안이다 보니까, 다른 집보다는 그래도 좀 특별한 불운을 맞이하며, 그 불운이 어떤 건지는 내가 차마 지금 이야기할 수는 없다.

  작품은 1934년 1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2년 동안 켈비 집안, 식구들에게 벌어지는 일이다. 캐런 헤스의 본역이 아동문학과 청소년 문학이라 했다. 굳이 그렇게 구분을 하자면 이 작품도 청소년 문학으로 나누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물론 청소년 문학은 성인이 읽어도 재미있는 경우가 수다하다. <황사를 벗어나서>도 그렇다. 때로는 윌라 캐더의 지방주의적 건강함과 생명력을 보는 듯하고 때론 가슴이 찡, 한 장면도 나오고 그렇다.

  대체적으로 미국적이고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청소년 문학적이다. 이 정도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듯.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3-07-20 0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청소년 문학 맞네요. 뉴베리 메달 수상작이니까요. ^^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3-07-20 14:07   좋아요 1 | URL
옙. 재미납니다! ^^

잠자냥 2023-07-20 0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품 그 감동 포인트에서 울컥해가지고 별 다섯 줬던 거 같아요. ㅋㅋㅋㅋ
아니면 스무살 잠자냥이라 아직 뉴베리상 수상작에 꽂히는지도?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7-20 14:08   좋아요 1 | URL
저는 어느 장면인 줄 알지요. 그런 장면은 여기다 못 올립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3-07-22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오클라호마에 남은 가족들 이야기군요. 분노의 포도에도 떠나지 않고 남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보려면 이 책을 읽으면 되겠어요~

Falstaff 2023-07-22 13:28   좋아요 1 | URL
넵. 운문 소설이라서 읽는 속도도 훨씬 빠릅니다.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
 
야생의 심장 가까이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 독후감은 써 놓고 저장하는 걸 깜박 잊어버려 싹 지워졌다. 그래서 책 읽고 9일이 지나 다시 썼다. 기억이 가물거린다. 하여간 달려보자. 다른 이들의 소감과 차이가 있더라도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짧게 쓰겠다.)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처음 읽는다. 브라질 작가를 많이 읽은 것도 아니지만 19세기에도 물라토 출신 소설가 마사두 지 아시스가 엽기적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포스트 모던하기도 한 <브라스 꾸바스 사후 회고록> 같은 것도 발표했을 정도로 그럴싸한 근대 문학의 전통을 이어갔으리라고 추측했었다. 브라질 작가 작품들이 활발하게 번역되어 나오지 않아 읽어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생각을 늘 하고 있던 건 아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이러다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에 관한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920년에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리스펙토르는 태어나자마자 브라질로 이민을 가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로스쿨을 다녔으며, 스물두 살 때인 1942년에 첫 번째 장편소설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써 다음 해에 발표해 브라질 문단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후 외교관과 결혼해서 1959년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이혼해 다시 리우로 돌아와 작품을 쓰면서 여생을 보내다 난소암으로 생을 마친 작가다. (위키피디아 참조했음)

  리스펙토르의 일생을 검색하기 전에 책을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줄에 쓰인 "리우에서 1942년 11월"을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나는 이이가 인생을 이젠 제법 살아서, (연보에 의하면 이혼하고 다시 브라질로 돌아온 1959년 이후) 세상을 좀 알게 되어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쓴 것인 줄 알았다. 근데 스물두 살짜리가 이런 작품을 썼다니. 아오. 책 광고 글 특유 극도의 찬사가 리스펙토르, 또는 이 작품 <야생의 심장 가까이>에 관해서는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이 작품은 스토리로 읽는 책이 아니다. 나는 첫 문단부터 리스펙토르의 화법에 확 끌렸다. 한 번 보시라.


​  "아버지의 타자기 소리가 탁-탁... 탁-탁-탁... 이어졌다. 시계가 먼지 없는 뎅-그랑 소리로 깨어났다. 정적이 잠잠잠잠잠잠 이어졌다. 옷장이 뭐라고 말했지? 옷-옷-옷. 아니, 아니야. 시계와 타자기와 정적 사이에는 귀가 하나 있다. 듣는, 커다란, 분홍빛, 죽은 귀. 세 가지 소리는 햇빛과 반짝이는 작은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림으로 이어져 갔다."


​  이것이 어린 주아나의 기억 속에 잊히지 않고 남아 있는 한 장면이다. 아버지는 타자기로 시를 쓰고, 딸도 아버지를 흉내 내어 시를 써 보여주지만 아버지는 그리 다정하지 않다. 주아나는 인형 아를레치를 가지고 놀이를 한다.

  "아를레치는 파란 차에 치어 죽었다. 요정이 나타나 그녀를 도로 살려냈다. 딸과 요정과 파란 차는 주아나 자신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그 놀이는 따분했을 것이다."

  주아나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와 사는 장면은 아주 짧다. 아버지는 가끔 자신을 떠난 여자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이제는 사소하고 아프지 않은 고통으로, 소리 없는 감탄사 '아!' 순간의 모호한 상념으로 남은 엘자. 딸 주아나를 낳고 자신을 떠나버린 아내.

  삼촌 집에서 살다가 기숙학교에 들어간 주아나. 아무리 엄격한 학교라도 선량한 교사는 있는 법이라, 교사가 말한다.

  "어쩌면 너는 행복해질 수도 있어." 주아나에게 드는 의문, 의문들.

  "행복해지면 얻는 게 뭔가요?" "행복해지면 어떻게 되나요?" "다음엔 뭐가 오나요?" " 행복해지는 건 무엇을 위한 거예요?"

  선생은 주아나에게 종이에 이 질문들을 적어 간직하고 있으라고, 훗날 성인이 된 다음에 다시 읽어 보라고 권하지만, 주아나는 대답한다. "싫어요."


​  이 모든 스토리에서 주아나의 내적 감정이 작품의 9할 이상을 차지한다. 이 감정이랄까, 의식이 함의하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 글. 이걸 읽는 일이 그렇게 즐겁지는 않다. 폭풍처럼 쏟아지는 은유가 범위의 제한도 없이 지평선과 수평선을 너머까지 펼쳐지는데, 절반 분량을 읽을 때 까지는 도대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 깊은 안개 속에서 더듬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2부에 접어들 즈음, 이제 눈에 익어서 그랬는지, 익은 게 아니라면 눈이 저절로 떠져서 그랬는지,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름대로 '추리'할 수 있었고, 초장과 비교하면 훨씬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점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에 경탄할 수 있었다. 다시 이야기하면, 대책없이 쏟아지는 은유의 폭격, 이것들의 의미를 나는 '추리'할 수 있었을 뿐, 이해했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책 한 권을 읽으면서도 모험을 해보고 싶은 분들은 충분히 한 번 도전해볼 만하겠다.


.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7-18 08: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리스펙토르의 책을 한 권 도서관에서 빌려왔다가 다섯장도 채 못읽고 그대로 반납했어요. 전 도저히 못읽겠더라고요. 어휴,이건 내가 읽을 책이 아니다 싶었는데, 오늘 골드문트 님의 리뷰를 보니 왜인지 알겠네요. ‘스토리로 읽는 글이 아니고‘, ‘폭풍처럼 쏟아지는 은유‘ 때문이었음을 …

Falstaff 2023-07-18 09:10   좋아요 0 | URL
자칫하면 안개 휩싸인 골짜기로 빠져들어가기 십상이더군요. 짧지만 함부로 읽었다가 쌍코피 줄줄 흐를 책입니다. 일찌감치 포기하신 게 어쩌면 더 바람직하지 않았겠는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저도 읽고나서 한 20일 흘렀는데 거의 기억나는 것이 없더군요. 위에 인용한 문장들하고, 행복에 관한 질문 정도만 남았습니다.

물감 2023-07-18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의 시간>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한 절반 읽고 접었습니다. 횡설수설 기법이랄까, 여튼 이렇게까지 인내해서 읽어내고 싶진 않았어요ㅋㅋ

다락방 2023-07-18 11:4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대출했다가 못읽고 반납한 책이 <별의 시간> 이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7-18 11:5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예전같았으면 억지로 읽고 비평이라도 남겼는데, 이제는 시간낭비 감정낭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덮어야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7-18 15:28   좋아요 0 | URL
저도 <별의 시간>이 더 유명해서 그거 먼저 읽으려 했는데, 울 동네 도서관에서 이상도 하지, 그 책이 대출불가인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야생의 심장...>을 읽었다는 거 아닙니까. 다 팔자지요 뭐.

coolcat329 2023-07-19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사 실종. 의식의 단어화‘ 제목이 다 말해주네요. 이 책 읽고 조용히 포기하신 분들도 계시구요...올려주신 발췌문 읽어보니 저도 안 될 듯 싶네요. ㅎㅎ

Falstaff 2023-07-19 17:51   좋아요 1 | URL
저도 추천은 못하겠더군요. 아무 생각없이 읽다가 독자 취향에 맞으면 대박이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작품들....아니겠느냐, 하는 심정입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3-07-23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이런 책을 다시 기억해서 리뷰하신 건가요?

Falstaff 2023-07-23 21:00   좋아요 1 | URL
따옴표에 든 문장은 읽다가 메모해놓은 겁니다. 설마 기억했겠습니까. ㅎㅎㅎ
 
카디프, 바이 더 시 - 조이스 캐럴 오츠의 4가지 고딕 서스펜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하빌리스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조이스 캐럴 오츠가 1938년생이니까 여든다섯 살인가? 다작의 여왕이다. 장편소설을 쉰여덟 편, 천편에 육박하는 중단편 소설을 썼다. 아침에 너댓 시간 쓰고, 오후에 또 쓰고, 저녁 먹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 완벽한 전업작가. 쓴 작품의 양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되어 나온 책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은 편이다. 곱게 나이 든 할머니인데 미국 현대 고딕 소설의 대가라고 하고, 그로테스크의 여왕이라고도 불린다. 전형적인 미국 작가로 이이의 관점은 전적으로 미국 위주다. 우리나라에서 이이의 대표작으로 꼽기도 하는 <카시지>의 경우가, 내가 읽기로는, 그랬다. 이럭저럭 맞춰보자면, 미국적인 작가이고, 그로테스크의 여왕, 현대 고딕. 이러면 대강 감을 잡을 수 있으니, 하여튼 나는 글 좋은 대중작가라고 본다. 작품 속에는 리얼한 폭력을 담고 있으며 자주 철철 피가 흐르고, 그걸 역겹기 바로 전까지 상세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카디프, 바이 더 시》도 예외가 아니다. 이 중단편집은 2020년에 초판 출간했는데 초판 표지에 내놓고 “네 편의 서스펜스 노벨라”라고 박아 놓았으며, 우리나라 번역본 표지에는 여기에 단어 하나를 추가하여 “4가지 고딕 서스펜스”라고 했던 바, 나는 깜짝 놀라길 “4가지”? 혹시 “싸가지”를 이야기하는 건가? 했는 줄 알고 말이지. "싸가지 고딕 서스펜스" 완전 새로운 장르의 소설 말씀이야. 하여간 네 편 모두 여성 피해자가 극한 상황까지 몰리는 사건을 그렸으며, 언제나 그렇듯이 악당은 권력과 완력을 가지고 있는 남성이다. 물론 다 죽어 마땅한 새끼들이다. 아니, 죽여 마땅한 새끼들. ‘죽어’와 ‘죽여’, 점 하나의 엄청난 차이란! 하여간 그렇다.

  내가 읽은 소감은 그냥 오츠. 오츠한테 기대했던 딱 그만큼의 오츠. 오츠, 하면 많은 독자들이 <좀비>나 <흉가>, <악몽> 같은 걸 떠올리는 듯한데, 나는 <카시지>와 <사토장이의 딸> 딱 두 작품 읽고 더 이상은 내 돈 내고 오츠를 사서 읽지는 않기로 했다. 《카디프, 바이 더 시》 역시 도서관 개가실의 신규 구입 도서 책장에 놓인 것을 보고 잽싸게 읽었다. 잘했다.


​  네 편의 노벨라, 중편 소설이 들어 있는데,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카디프, 바이 더 시>는 시poem 옆의 카디프(라는 이름의) 아가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서 몇 번 보신 바 있는, 또는 내가 생각하기에 누구나 한 번은 영화를 통해 본 경험이 있을 것 같은 다음과 같은 장면에서 시작한다. 술에 취한 건장한 남자가 엽총이나 권총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온다. 집엔 세 명의 아이들과 엄마가 있었다. 먼저 엄마의 머리를 향해 총을 두 방, 빵빵, 쏘아 죽이고, 큰 딸한테도 가슴과 목에 빵빵 쏴 아직 열살도 안 된 목숨을 거두었으며, 이어서 어린 아들이 눈에 띄자 역시 한 방, 빵, 쏴서 죽여버리고 만다. 이제 겨우 두 돌 아홉 달이 된 막내 클레어는 개수대 아래 어두컴컴하고 냄새나는 공간, 배수관 뒤편, 거미줄과 머리카락이 함부로 흩어져 있는 작고 작은 공간으로 몸을 구기고 들어가 더러운 공간보다 더 작게 웅크리고 있다. 조금 후, 남자의 발과 다리가 보이고, 시커멓고 축축하게 번들거리는 뭔가가 바짓단에 묻어 있는 것도 보이지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거의 혼절 상태에 이른 막내를 발견하니 가족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다. 살인자는 아빠. 처자식을 쏴 죽인 다음 남은 총알을 자신의 옆통수를 관통시켜 자살해버린 사건. 세월은 흐르고 흘러 클레어는 다른 가정이 입양해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한 통의 전화가 와 옛 사건이 벌어진 집과 일대의 땅을 상속받았음을 전해준다. 그리하여 저 기억 속, 어쩌면 평생의 트라우마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아 있던 아득한 곳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야기, 이게 타이틀 롤 <카디프, 바이 더 시>다. 내 말 맞지 않나? 작은 피난처에 몸을 피한 유년의 나. 영화에서 본 장면이지? 이 책의 초판이 2020년이니까 오츠도 영화의 한 장면이 인상 깊어 그걸 꺼내 작품으로 썼을 거 같다. 뭐 아니면 말고.

  흠. 이거 스포일러 맞는데, 엣다 모르겠다, 얘기하자면, <카디프, 바이 더 시>에서 진짜 악당이 처자식 죽인 아빠가 아닐 수도 있어서 결론을 미루더라도, 두 번째 <먀오 다오> 부터는 진짜 개자식들이 나온다. <먀오 다오>에서 출연하는 개자식은 사춘기를 맞은 주인공 미아의 의붓아빠 패리스 로크. 하긴 이 중편에 나오는 남자 치고 개새끼 아닌 게 거의 없기는 하지만 이외에도 사춘기를 맞아 가슴이 봉긋해져 손만 대도 아픈 가슴을 고의적으로 툭 치고 “아, 미안, 젖소” 하며 지나가는 한 학년 위의 뎀스터도 마찬가지다. <먀오 다오> 악당들의 공통점은 성희롱, 또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을 통해 처음 들은 단어인 ‘성비위’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개자식들은 충분하게 (또는 죄에 비해 과하게) 벌을 받기는 한다.

  세 번째 작품 <환영처럼, 1972>는 가장 역겨운데, 성공회 신부 공부를 하다가 때려 치고 대학에서 강사질을 하는 젊은 악당 사이먼과, 유명 시인의 계관/권력을 자랑하는 61세 늙은 교수 롤런드 B가 등장한다. 이 새끼들 가운데 한 명은 젊고 똑똑한 학부 2학년 학생 앨리스를 임신시키고, 당시에는 전 미국에서 낙태 수술이 불법이었으며 간혹 야매로 해주는 의사가 있더라도 학생신분으로는 엄두를 내기 힘들 만큼 많은 돈을 요구해 절망에 빠진 앨리스에게 문제 해결을 위하여 자신과 결혼을 해 애 낳고 키우자고 제의를 한다. <환영처럼, 1972>는 별로 주의하지 않고 읽으면, 읽다가 갑자기 숨이 턱, 하고 막힐 만큼 분노하게 되고, 안타까워하다가, 한숨을 푹 쉬면서 끝장, 그러니까 결론에 이르게 만든다.

  마지막 작품 <살아남은 아이>는 첫 번째 이야기 <카디프, 바이 더 시>와 달리 아이 죽이고 자살한 인간이 아빠가 아니라 엄마, 살아남은 아이가 딸이 아닌 아들, 일 것 같은데 오츠 작품은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앞에서 내가 말하기를, 이 책에서 나오는 (사춘기 중이거나 지난) 남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다 개자식들이라고 했다. 그러니 정말 이 집안의 아빠는 무고한 거야? 읽어 보셔야 안다니까. 하여튼 엄마가 죽는 방식도 어디서 본 거 같다. 차고 안에서 틈을 막아 놓고 시동을 건 다음 배기가스가 차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수면제 칵테일 한 잔 마시고 잠에 빠져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편안하게 죽음에 이르는 방법. 토미 리 존스와 수잔 서랜든이 주인공을 한 <의뢰인>에서 나오는 자살 미수 장면이다.


​  이제 소감. 딱 조이스 캐럴 오츠. 그러나 여태 오츠의 트레이드 마크인 그로테스크의 여왕이란 별호가 어울리는 작품을 읽어보지 않아 그런 줄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내가 알던 오츠 보다 강도가 훨씬 셌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오츠가 매년 거의 빠지지 않고 노벨 문학상 수상자 후보에 올라간다고 하는데, 미국 땅 안에서 잘 팔리는 작가라 하고, 또 읽어보면 정말 글을 쉬우면서도 (아마 짧은 단문 위주로 써서 그렇기는 하겠지만) 흥미진진하게, 때론 복장 터지게 만드는 솜씨가 대단하다는 데 다른 의견이 없긴 하지만, 감동이라든가, 공감이라든가 하는 것까지 바라지는 못할 것 같다. 심지어 어제 밤에 <환영처럼, 1972>의 마지막 장면이 꿈 속에서도 나와 아주 진저리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자다가 벌떡 깼지 뭐야, 잠 깬 김에 방광 한 번 비우고 다시 자긴 했어도), 솔직하게 말해서 이 책이 인상깊지는 않다. 높은 대중성으로 영화화하면 괜찮은 수준의 박스 오피스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조이스 캐럴 오츠. 여전히 나는 이이의 책을 돈 주고 사서 읽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백수거든. 아무 책이나 살 수 없거든.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3-07-15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만로도 짓눌려 숨이 막히는데요?
… 수고하셨습니다.

전 오츠의 “좀비”가 좋았고요 (역시 피 철철이지만 읽으면서 소설/문학의 보호막이 생생했어요) “카시지”는 실망스러웠어요.

오츠가 문학 교수여서 독후감을 여럿 썼는데 그 글들은 좋아요.

Falstaff 2023-07-15 10:04   좋아요 1 | URL
미국 소설 보면 오츠를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더라고요. 문화 차이인지 저는 여간해서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고요. 도서관에서 이이의 책을 좀 읽어보려 합니다.

stella.K 2023-07-15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다! 그로테스크! 며칠 전부터 이 단어가 생각이 안 나서 머리에 파리가 들어 앉은 느낌이었는데 여기서 보게되네요. ㅎㅎ
가끔 그런 작가가 있긴 하더군요. 하루종일 글만 쓴다는 사람. 그럼 책은 언제 읽지하는데 글을 안 쓸 땐 읽겠죠? 아니면 소싯적에 많이 읽어둬서 채울 건 없고 뽑아쓸 것만 남아있거나.
저의 엄니보다 하나 적네요. 근데 여전히 쓰고 있다니 대단해요. 그렇게 다작이면 대표작 몇권만 읽어도 될 것같네요. 문제는 제가 고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죠. ㅋ

Falstaff 2023-07-15 16: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로테스크...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 많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막 미칠 거 같은 순간도 있어요. 전엔 걍 단어가 줄줄 떠올랐는데 이젠 영 아니더라고요. 뇌가 쉬었어요. 묵은지도 아니면서.... 흑흑흑.....
 
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책을 읽으면서, 페이지가 넘어감에 따라 이 작품을 읽은 다음에 마음먹고 독후감을 쓰려면 원고지 3백장도 쓰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메르시어는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나 베른 고등학교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배웠단다. 서양 소설을 읽으면 학생들이 가장 고통을 겪으며 배우는 과목이 라틴어와 그리스어인데 여기에 히브리어까지 더 했고,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철학자다. 이후 유명 대학 철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21세기 들어 대학에까지 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한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껴 은퇴를 했으니 좌파 지식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야 나는 파스칼 메르시어가 <리스본 행 야간열차>의 지은이라는 걸 알았는데, <…야간열차>는 제목 때문인지 좀 스릴러나 추리극 아닐까 싶어서 여태 거들떠보지도 않은 책이었다. 지금 후회하고 있다. 좀 읽어볼 것을. 하긴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조만간에 빌려 읽겠다.

  철학자들이 소설도 많이 쓴다. 인상 깊게 읽은 철학자가 쓴 소설로 나는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가 쓴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꼽는다. 피어시그는 책에서 십대 아들을 모터사이클 뒷자리에 태우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질, 품질, Quality가 무엇인지, 소설의 기법을 이용하여 독자에게 차근차근 알려준다. 이 책 <언어의 무게> 속에서 파스칼 메르시어는 언어, 언어를 기호화하는 문자, 문자의 집합으로 만들어지는 단어, 단어의 연속인 문장, 문장을 발음할 때의 독특한 음감, 이것들이 각 민족의 입 안 발성기관을 통해 나오면서 같은 뜻일 망정 미묘하게 다르게 전달하는 뉘앙스를 재미있게, 정말 재미있게 풀어냈다. 말 가운데서도 선정된 몇 가지 단어를 중첩 사용함으로써 이 단어를 쓰는 사람들만의 바운더리를 형성하는 권력 기구, 좌파 지식인이니까 당연히 그들을 향한 비판의 시선까지 매우 다양하게 언어를 이야기한다.

  나도 평상시에 언어와 언어의 사용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바라, 메르시어의 주장을 정독해서 읽어야 했고, 그리하여 피어시그의 모터사이클 관리술을 읽을 때 하고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부분을 이해했다고 믿었는데, 세상에 뭐든 다 좋을 수는 없는 것이라서 630쪽에 불과한 책 한 권을 읽는데 무려 나흘이나 걸렸다. 게다가 작품 속에는 장편소설이라고 해도 요즘 장편소설 하고는 좀 다르게 중요한 조연들이 숱하게 나오고, 그러니까 당연히 심각한 에피소드도 많이 달려 나오고, 친절한 철학자이자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는 주인공 사이먼 레이랜드로 하여금 이미 11년 전에 죽은 예쁘고 마음씨 착하고 매사에 능력 있어서 돈도 잘 벌었던 아내 리비아에게 결코 짧지 않은 편지를 자주 써서 그동안의 내용을 요약해 독자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주는 친절을 베풀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과공은 비례라서過恭非禮, 이런 친절은 처음엔 괜찮았으나 5백 쪽이 넘어가면서부터는 도무지 읽기가 싫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뭐하러 아까 한 이야기를 다시 또 듣고(읽고) 있을까, 싶었던 거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유명 철학자라서 그런지 신중하고 진지한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일정 수준 이상의 텐션을 유지하며 읽게 만들었다. 나 아니고 당신이 읽더라도 이 책은 정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예 읽지 말던가, 아니면 마음을 독하게 먹고 시작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  원고지 3백장 정도의 독후감. 이것도 과장이 아니다. 이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서로 뒤섞여 있다. 그래도 귀띔을 해드리자면, 메르시어가 심성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서 모든 이야기(들)의 결말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

  위 단락에서 메르시어가 대학에서 교수질을 하다가 때려치운 것이 (한 시절엔)상아탑(이라고 불리던 곳)에서도 자본주의의 논리가 횡행하는 것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 바 있다. 그런데 작품의 주인공 사이먼 레이랜드를 보자면, 조부 크리스토퍼 셀던 레이랜드 경은, 경sir니까 귀족은 귀족이지만 세습하지 않는 귀족으로, 인도의 독립을 강력 반대하던 인물이며, 이것 때문에 아들 애슈턴 첸들러와 마찰을 빚었었다. 하지만 애슈턴 챈들러가 잘한 것이라고는 프랑스와 독일의 피가 흐르는 아내를 맞아 아들 사이먼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뿐이었다. 그리 총명하지 않아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학벌 콤플렉스가 있었는지 아들과 함께 옥스퍼드 대학에 구경 갔다가 잘 정돈된 잔디를 발 뒤꿈치로 파헤쳐 놓기도 한다.

  애슈턴 첸들러의 동생이자 사이먼의 삼촌인 워런 숀은, 동양의 언어를 평생 공부한 사람이다. 이이들이 말하는 동양은 서아시아 지역. 워런 숀은 저 라오스 문자까지 해독하기 위해 다 늙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은 인물이다.

  아무리 좌파 작가라도 일단 배워야 작품을 쓰는 거니까 공부는 그렇다고 치자. 사이먼은 김나지움을 나와 옥스퍼드 존 던 학교에 들어가 1년 만에 그곳에서 도망 나온다. 존 던은 영국의 위대한 시인. 하지만 존 던 학교에서는 존 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존 던을 망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서 몇 번을 망설이다 런던으로 뛰쳐나간다. 열일곱 살이었는데 세 살을 더 보태 스무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벨사이즈 리트리트 호텔의 야간 경비원으로 취직해 조금씩 돈을 모은다. 몰타 여행을 하기 위하여. 평소 좋아하는 워런 삼촌의 집에 걸려있는 지중해 지도를 보면서 지중해를 감싸고 있는 모든 지역의 언어를 알고 싶다고 이야기한 바 있었고, 이때 삼촌이 “몰타는 빼지 말아라.”라고 말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진짜로 가게 되는데, 아무리 가보고 싶었지만 정말로 가보면 기대한 것에 훨씬 못 미치는 일은 다 경험해 보셨지? 사이먼도 그랬다.

  다시 런던의 호텔 야간 경비원으로 돌아와 독일어로 된 아동 도서를 번역할 기회를 잡고, 이러저러한 일로 이탈리아 여성 리비아 페르토트를 사랑하게 되고, 결혼도 해서 딸과 아들을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장인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중견 출판사를 통째로 차지하게 된다. 십여 년을 아내가 경영하고 자신은 번역 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11년 전엔 아내가 장인과 같은 증상인 급성 심정지로 세상을 떠 이제 처가 재산이 몽땅 자기 재산이 된다. 그리고 작품을 시작하자마자, 런던 북부의 햄스테드에 사는 워런 삼촌이 숟가락을 놓으면서 집을 통째로 상속해준다. 좋아, 좋아.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지. 그런데 어쨌든 좀 세월을 두긴 했지만 장인이 죽어, 아내도 죽어, 삼촌도 죽어서 이제 사이먼은 무지하게 많은 돈을 갖게 되는데, 대학에도 자본주의 논리가 쳐들어온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만 둔 교수…가 쓴 소설의 주인공답게, 사이먼 레이랜드는 자기 주변에 돈 때문에 곤란을 겪는 친구들에게 펑펑 돈지랄을 하기 시작한다. 천천히 망해가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문 닫을 일만 남은 친구의 출판사에 5십만 파운드의 돈을 출자해주는 것이 아니고, 증여를 하는 걸로 사이먼의 활수한 돈지랄은 시작한다. 10년을 바쳐 천 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쓴 파올로의 작품의 출판비를 자기가 내겠다고 하고, 러시아 작품을 훌륭한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는 실력을 지닌 안드레이 쿠츠민을 위하여 트리에스테의 건물 한 동을 통째로 사서 쿠치민한테 월세를 제해주기도 한다. 이거 안 웃겨? 이러면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가? 난 정말 궁금했다. 사이먼의 돈지랄이 언제까지 갈지. 근데 딱 거기까지.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몇 사람들에 국한한다. 대신 프란체스카라는 돈 많은 작가의 미발표 소설을 통해, 돈을 준 사람이 아니라 돈을 받은 사람의 채무감 같은 걸 무지하게 상세하게 그렸다. 돈 주는 것도 쉽지 않다는 말이지.


​  나는 여태까지 작품과 작가에 관하여 언짢은 점만 골라 썼다. 앞으로도 훨씬 더 많이 쓸 수 있다.

  이 책이 얼마나 좋은 작품인가를 쓰려고 하자면 아예 독후감이 끝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랬다.

  특히 초두에서 말한 특별한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자신들을 다른 집단들과 특정 시키고자 하는 백색 카스트와 흑색 카스트에 대한 신랄한 필설 같은 것이 매우 재미있었다.

  꼭 빼지 말고 독후감에 써야 하는 것으로, 역자 전은경이 정말 고생했겠다는 것이다. 작품의 제목을 보시라. “언어의 무게”. 언어가 얼마나 큰 무게를 갖는지를 작가가 철학적 의미까지 넘치게 담아 설명하는 책의 번역을 어떻게 가볍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한 번 인용해볼까? 주인공 사이먼 레이랜드의 직업도 번역자인데 그가 말하기를;


​  “번역자만큼 책을 자세히 읽는 사람은 없다네. 불필요한 반복이나 틀린 점, 리듬에서의 더듬거림, 미끄러진 장면, 필요하지 않은 모든 것, 다시 말해 진부하고 형편없는 것들을 발견해내지. 다른 언어로 복제하려면 모든 것, 정말 모든 것을 캐내야 하니까. 어떤 문장을 읽으며 내가 그저 복제하는 게 아니라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네. 번역자만큼 작가에게 가까운 사람은 없지. 번역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강한 친밀함, 연인 사이의 육체적 친밀함보다 더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주네. 번역자는 시간이 좀 흐른 후에는 작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한 것, 그의 상상력에 숨어 있는 알파벳을 알게 되니까. 그 알파벳이 번역자에게는 지극히 낯설 수도 있네. 그럴 때 번역자가 느끼는 낯섦은 평범한 만남에서 느끼는 그 어떤 것보다 싸늘하고 위협적이지. 번역은… 낯선 내면세계로 향하는 엄청난 침입일세. 위험하지. 번역자는 작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또한 그 누구보다고 더 심한 상처를 줄 수 있다네.” (P.301)


​.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7-13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301페이지 너무 좋네요. 저도 이 책을 갖춰두고 있습니다.

작가의 전작인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주인공이 교수였던 걸로 기억해요. 다리 위를 지나다가 자살하려던 여자를 구해주는데 그 여자가 포르투갈 여자였나, 그래서 포르투갈 어에 매력을 느끼고 갑자기 그 언어에 대한 열정으로 막 공부하던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그 소설을 통틀어 그 장면, 외국어에 열망을 느끼고 몰입해 공부하던-이 제일 좋았어요. 그 장면 때문에 영화를 봤는데, 영화에서는 제가 원했던 만큼의 그런 장면을 볼 수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래돼서 희미하지만요.

아, 저도 이 책 읽어야겠어요. 저는 나흘 이상이 걸릴듯 합니다.

Falstaff 2023-07-13 17:12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 댓글 아침에 읽고... 이노무 알라딘은 셀폰에서 답글쓰기가 언짢아서 말입죠, 야간열차 읽어봐야겠구나 싶었는데요, ㅋㅋㅋㅋ 아래 대화모음 보니까 다시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3-07-13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00장으로 다시 써오거라.

Falstaff 2023-07-13 17:11   좋아요 0 | URL
정말 3백 장 쓸 거 같다니까요! 근데 쓰면 뭐합니까. 누가 읽는다고. ㅋㅋㅋ

잠자냥 2023-07-13 17:13   좋아요 0 | URL
저랑 락방이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3-07-13 0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큭 저 이 책 사실 작가의 전작이 제겐 별로였어서 이 작품도 노관심이었는데 이 글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다락방 2023-07-13 10:37   좋아요 1 | URL
리스본이요? ㅎㅎ
저도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만큼 좋진 않았어요. 찌찌뽕~

잠자냥 2023-07-13 11:01   좋아요 0 | URL
찌찌뽕~ 저는 영화도 그냥 그랬어요........-_-

다락방 2023-07-13 11:39   좋아요 0 | URL
저도 영화도 별로 …

Falstaff 2023-07-13 17:13   좋아요 1 | URL
도서관 가셔요. 그게 장땡입니다. 맘에 들면 소장용으로 한 권 사시면 되지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