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아가씨 페이지터너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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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츠바이크를 읽는다고 기분이 설랬다. 제목 <우체국 아가씨>만 보고, 속으로 <어느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같은 소품을 기대했는데 어라, 430페이지 짜리다. 음. 만만하지 않군. 이렇게 생각하고 첫 페이지를 열었다. 역시 츠바이크. 작가 특유의 쓸쓸한 문장으로 사람의 정서를 살살 긁어내린다. 오전에는 거의 할 거 없는 우체국 여직원. “여직원”이라고 했다 해서 성차별 운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체국은 관료주의의 특권계급이 신성시 하는 사무공간에서는 눈에 띄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성장”과 “쇠퇴”의 법칙 미 적용 지대라고 하면서, 교체할 수 있는 “정부 비품”은 여성이 유일하다고 썼다. 본문을 읽어보면 한 15년에서 20년 정도 여직원이 근무하다가 그만 두면 다른 젊은 여직원이 바로 그 자리를 물려 받아 다시 15년에서 20년 정도 똑같은 일을 한다는 의미다.

  수도 빈에서 기차 타고 두 시간 거리, 크렘스 시에서 멀지 않은 곳의 보잘것없는 마을 클라인-라이플링 우체국의 여직원 크리스티네 호프레너. (여기서 처음으로 고개를 갸웃거림. 츠바이크가 크리스티네라는 이름의 여성을 흠모한 적이 있었나? 혹시 첫사랑이야?) 궁정고문관을 했던 삼촌이 우정사업부의 고관한테 청탁을 해 조카에게 얻어 준 일자리로 1926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제공황의 고난 속에 그래도 억지로 먹고 살아가고 있던 크리스티네의 권태가 뚝뚝 떨어지는 우체국 오전, 정말로 오랜만에 황동 전신기에서 모스 부호가 울리기 시작하고, 원통형 수신기에 용지를 가져다 댄 크리스티네가 전보을 읽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  “크리스티네 호프레너. 클라인-라이플링. 오스트리아.

  너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든지 날을 정해 와라. 오기 전에 미리 도착시간을 알려다오. 클레르-안토니.”


​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게 살고 있는 스물아홉 살의 크리스티네에게 이게 웬 전보. 그러다가 클레르라는 이름이, 30년 전에 지역에선 제법 커다란 스캔들을 일으키고 집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건너간 이모, 클라라인 것을 알아챈다. (나도 이제는 확실히 알아챘다! 그래서 별 하나 뺀다.) 미국 남부에서 목화 중개 사업을 크게 성공시킨 이모부 안토니 반 볼렌, 네덜란드 출생으로 이름의 ‘반’은 독일의 폰von처럼 귀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흔하게 반 고흐처럼 두 번째 이름으로 쓰는 것뿐인 이모부가 이제 사업을 두 아들에게 맡겨놓고 부부동반 해서 스위스 남동부 중에서도 최남단, 풍광 좋은 알프스의 엥가딘 계곡에서도 가장 비싼 팰리스 호텔에서, 크리스티네의 엄마이자 이모의 친언니한테 한 번 놀러 오라고 했던 것이고, 엄마는 전쟁 중에 병원에서 일하다가 얻은 다리 부종 때문에 꼼짝 못한다면서 괜찮다면 크리스티네를 두어 주 휴가 겸해서 보냈으면 좋겠다 했던 것.

  크리스티네의 가족은 오스트리아에서도 가장 유명한 박제 장인 집안이었으나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오빠가 전사하고, 전시에 무슨 사치 장식품인 박제, 집안 경제도 거덜이 나, 그래서 아빠도 몸이 아프건만 의사한테 한 번 보여줄 생각도 못한 채 와중에 최절정의 젊음을 향유하려던 크리스티네는 바로 그 젊음이 흐지부지, 시새푸새 빠져나가 버렸다. 살면서 휴가다운 휴가를 지내보지 못한 크리스티네는 그리하여 등나무 가방에 간단한 짐을 챙겨 넣고 알프스 행 기차에 오르고,


​  여기까지 읽은 다음, 나는, 책을 덮어버렸던 거디다.

  왜? 이미 읽은 책이거든.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라는 제목으로. 이게 원래 제목이 Rausch der Verwandlung, “변신의 중독”이다. 독일어 제목만 그대로 우리말로 고쳤어도 애초에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인데, <우체국 아가씨>라니, 거 참. 우리나라에 츠바이크 팬이 많아 나같이 덜 떨어진 독자라면 책을 또 사서 후회하고 자빠지지 않겠나 하는 출판사가 뇌를 좀 굴렸는지 모르지만, 진짜 그랬으면, 지옥 간다, 지옥 가.


  내가 이렇게 거품 문다고 해도, 이 책은 읽어보시라. 진짜 츠바이크, 소위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반전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니. 어쨌든 나는 츠바이크 말고, <Rausch der Verwandlung> 또는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가 아닌 <우체국 아가씨>라는 책을 읽다가, 더 읽을까, 하다가, 이만큼 읽어준 것만 해도 충분히 성의는 보여준 거다, 싶어 덮어버렸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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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8-09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작품이 형편없어 덮었다는 건줄 알았네요. 그리고 말씀하신 그 사람이 바로 접니다. 집에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갖고 있었는데 <우체국 아가씨>를 또 샀지 말입니다? 그게 같은 작품인줄 전혀 모르고요. 하아- 출판사들 너무해요 ㅠㅠ
아주,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Falstaff 2023-08-09 11:06   좋아요 0 | URL
ㅎㅎㅎ 다락방님이 그러셨다고요? 저는 정말 사려고 하다가 다행히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눈에 띄었답니다.

건수하 2023-08-09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번에 다락방님이 사셨고 누가 얘기해주셔서 전 안 읽었지만 알고 있었는데....
골드문트님 이번엔 사서 읽으셨군요. 안타깝습니다 ;ㅁ;

어쨌든, 매력적인 반전의 마무리... 읽어볼 책에 추가했습니다 :)

Falstaff 2023-08-09 11:06   좋아요 0 | URL
사기 바로 전에 안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요. ㅋㅋㅋ
안 읽으셨으면 돈 들여 구입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책입니다!

Jeremy 2023-08-09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독일어 직역본이 아니라 영어판의 번역본인가 봅니다.

이 책의 영어판 제목이 <The Post Office Girl>이라서
원래의 책 제목, 독일어로 <Rausch der Verwandlung> 를 영어로 직역하면
아마도 <The Intoxication of Transformation> 쯤,
즉 님 말씀대로 <변신의 중독> 정도 되겠지만
이렇게 평범하고 직관적인 책 제목, <우체국 아가씨> 도
나름 받아들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뭐, 어쨌든
이 책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엄청난 가난에 시달리던
Vienna, Austria-Hungary 오스트리아-헝가리 비엔나 인근의
작은 마을에서 우체국 여직원으로 일하던
크리스틴 호플레너 Christine Hoflehner 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까요.

영어권에서는 Stefan Zweig 를 <시작>하기에 좋은 소설로 평가받고 있답니다.

Falstaff 2023-08-09 11:0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그럼 이 책이 중역본일 수도 있겠군요.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3-08-09 09: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는 당연히 골드문트님이 이 책이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인줄 알고 계시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체국 아가씨> 리뷰 쓰신다고 해서, 아니 왜 이 책을 또 읽으셨지 했더랍니다..... 미리 귀띔해 드릴걸....

츠바이크는 국내에서 이미 나왔던 책을 제목만 살짝 바꿔서 다시 내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주의해야 합니다.

Falstaff 2023-08-09 11:09   좋아요 0 | URL
윽, 또 있어요? 저도 속으로, 츠바이크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작품을 썼네... 의아해 했던 작가 가운데 한 명이었는데 그런 것이 있었구먼요. ㅎㅎㅎ 돈 되는 정보,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3-08-09 11:41   좋아요 4 | URL
<연민>(넥서스, 2007년) 도 <초초한 마음>(문학과지성사, 2013년)으로 다시 나왔잖아요. 이 두 작품 원제는 <Ungeduld Des Herzens>입니다.
그리고 츠바이크의 단편은 이렇게저렇게 조합을 달리하고 제목 살짝 바꿔서 발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저도 츠바이크 좋아해서 신간 나오면 살펴보는데, 사기 전에 검색해보면 예전에 다른 제목으로 나온 경우가 많더라고요.

stella.K 2023-08-09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좀 빡치셨겠는데요? 저도 예전에 크리스티네 읽은것 같은데 전 언제부턴가 츠바이크를 잘 안 읽게 되더군요. 근데 책이 저러고 나오니까 사 볼까하는 생각이 들긴하던데 그런걸 좀 출판사 측에서 미리 알려주면 헷갈리지도 않고 좋을텐데 왜 그걸 공지하지 않을까요? 어찌보면 그것도 범죄라면 범죄일 수도 있을것 같은데. 출판 산업이 취약하다보니 이리봐주고 저리봐주고 하니 그런거쯤 이런들 어떠하리 가볍게 생각하는가 봅니다. 글고 츠바이크의 원제를 좀 존중해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원작자는 하난데 출판사에서 책 낼 때마다 제목을 바꿔치기하면 엄한 독자 열받죠.😡

Falstaff 2023-08-09 15:17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이라 빡치지는 않았습니다. ㅎㅎㅎ
저도 츠바이크의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같은 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근데 안 읽기엔 글이 너무 좋은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 트레버하고 비슷한 정서도 있는 거 같고요. 근데 제가 뭘 알아야지요. ^^

레삭매냐 2023-08-09 13: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호곡... 하마터면 살 뻔했에요.
안 그래도 서점에 갈 때마다 만지작
거리던 책이었는데.

기록을 뒤져 보니 <크리스티네>는
12년 전에 읽은 책이었더라구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08-09 15:18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이게 문제예요. 책 좋아하시는 분들, 관심 저자 등장하면 일단 지르고 본 다음에 후회할 거 있으면 후회하는 거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3-08-09 13: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당연히 북플의 고수님들은 이 책이 <크리스티네...>와 같은 작품으로 알고 계실 거라 생각했어요. ㅎㅎ
저는 이 책이 새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기에 아 드디어 나왔구나! 하고 샀는데 고수님들이 모르고 또 사셨다니 놀랍네요.

Falstaff 2023-08-09 15:19   좋아요 1 | URL
에휴... 저는 고수 아닙니다.
당연히 몰랐습니다. 오히려 쿨캣 님 같은 분이 매사 꼼꼼하셔서 실수가 없을 거 같은 걸요. ㅎㅎㅎ

bitsogul 2023-08-09 14:59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빛소굴 출판사입니다.

저희 출판사의 책 <우체국 아가씨>에 관심 가져주시고 이렇게 리뷰를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목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말씀 올립니다. 일반적으로 원제 <Rausch der Verwandlung>로 알려진 이 작품은 츠바이크 사후인 1982년 독일에서 처음 출간된 작품입니다. 상기한 원제는 츠바이크가 직접 지은 것은 아니고, 원고를 편집했던 편집자 Knut Beck가 지은 것입니다.
츠바이크의 유고 원고에 등장한 가제는 Postfräuleingeschichte이고 이것이 영문판 <The Post Office Girl>의 제목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요컨대 이 책을 출간한 발행인은 <변신의 중독>으로, 츠바이크는 집필 중에 <우체국 아가씨 이야기>로 제목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이 상황에서 빛소굴 출판사는 츠바이크가 집필 중 고려한 제목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더욱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여 <우체국 아가씨>를 최종 제목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영문 중역본이 아니고, 옮긴이 남기철 교수님은 독문학 박사입니다.

늦었지만 바로잡기 위해서 한 말씀 더 올립니다. 이 책이 개정판임을 알리는 내용을 포함한 서지정보를 온라인 서점에 동일하게 전송했습니다. 예스24에는 정보가 제대로 반영되었지만 알라딘과 교보문고에는 이 정보가 누락되어 있음을 파악했습니다. 미리 파악하지 못하여 혼란을 드린 점 대단히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서지정보를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이런 문제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서지정보란뿐만 아니라 출판사에서 배포하는 상세페이지에도 복간 사실을 뚜렷이 명시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착각으로 책을 구매하신 고객님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립니다. 만약 환불이 가능하신 상황이라면 다소 번거로우시더라도 환불 진행해주시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시면 빛소굴에서 나온 다른 책을 보내드리는 것으로 미진한 보답이라도 드리려 합니다.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연락주실 이메일은 아래에 적어두겠습니다.

bitsogul@gmail.com

Falstaff 2023-08-09 16:01   좋아요 6 | URL
ㅎㅎㅎ 제목에 관해서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크리스티네 변신에 중독되다> 보다는 <우체국 아가씨>가 훨씬 좋다는 의견입니다. 출판사가 원 제목을 직역해서 번역서를 내야 한다는 법도 없잖아요. 제 오랜 인터넷 친구 말마따나 로버트 테일러, 비비안 리 나오는 영화 <Waterloo Bridge>보다는 <애수>가 훨씬 매력적인 제목인 것과 같이요.
다만 이 책이 나오기 전에 <크리스티네...>가 있었으며, 그것의 새로운 번역이라는 것을 독자가 미리 알 수만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말씀입지요.
제 독후감의 요지는 다 각설하고, 이미 전 번역을 읽은 분은 선택에 주의하시고, 안 읽은 분은 매력적인 작품이니 읽어보시라는 거....라는 건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독자들끼리 노는 곳에 저자, 역자, 출판사께서 말씀을 보태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빛소굴 출판사처럼 진솔하게 말씀하시는 회사를 여태 경험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친절한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번창하시기 바랍니다.

stella.K 2023-08-09 16: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일이 말복인데 골드님 계 타셨네요.
출판사에서 저런 댓글도 보내주고. 축하해요. ㅎㅎ
근데 빡친다면 알라딘에 쳐야지 출판사는 아니었네요. 이런...ㅉ

Falstaff 2023-08-09 16:23   좋아요 2 | URL
윽, 내일이 말복입니까? 아휴... 세월이 참.
글쎄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 그냥 그렇다니까요. ㅋㅋㅋㅋㅋ
 
소용돌이 대산세계문학총서 175
호세 에우스타시오 리베라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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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롬비아 소설. 콜롬비아 작가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당연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 다음이 <폐허의 형상>과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을 쓴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와 <청부 살인자의 성모>의 작가 페르난도 바예호. 그리고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의 알바로 무티스와 <과부마을 이야기>를 쓴 제임스 캐넌. 콜롬비아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20세기가 열리기 전부터 지금까지 하고 한 날을 쿠데타와, 혁명의 탈을 쓴 반란으로 숱한 민간인들이 죽어 나갔고, 콜롬비아는 이에 더하여 전세계 코카인의 80퍼센트를 공급했던 메데인과 칼리의 마약 카르텔(파블로 에스코바르!) 덕택에 드센 이웃나라하고 비교할 수도 없이 치안이 개떡 무인지경이었는지라 조금 살 만한 집안의 자제들은 미국이나 멕시코, 스페인 등지로 이민을 가버리던지, 하여간 그쪽에서 살다가 에스코바르가 강변에 검은 색의 하마 몇 마리를 남기고 지붕에서 총맞아 죽은 이후에 귀국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위에 예를 들었던 작가들 중에서도 가브리엘 마르케스, 가브리엘 바스케스, 페르난도 바예호, 제임스 캐넌이 이런 축이다. 알바로 무티스와 오늘 읽은 호세 리베라는 비록 정쟁은 심했지만 적어도 에스코바르가 오직 마약 하나를 팔아 전 세계 7위의 부호로 꼽히기 전 사람, 그러니까 노땅 축에 들어 평생 콜롬비아를 떠나지 않고 작품을 쓴 사람들이고. 호세 에우스타시오 리베라의 생몰연대가 1888~1928. 이렇게 오래 전 사람인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콜롬비아 기준으로 최상의 교육을 받아 법학과 정치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소네트 55편을 발표했으며, 1924년에 유일하게 남은 장편소설 <소용돌이>를 출간했다. 이 작품에서 필을 받은 리베라는 후속으로 <흑점>을 써 거의 완성한 거 같은데, 1926년에, 미쳤다고 그걸 뉴욕까지 가지고 가서, 거기서 택시에 두고 내렸는지, 지하철 철로 위에 흩뿌려졌는지 하여간 분실했다. 그리고 2년 후, 콜롬비아에서 불과 마흔 살의 나이로 날 때부터 입에 물고 다니던 은수저를 뱉고 천국의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했다.


​  <소용돌이>의 주인공은 ‘아르투로 코바’라는 이름의 피끓는 청년이다. 이 청년이 알리시아 아가씨와 연애를 하는데, 자기들 원하는 대로 연애가 이루어지면 그건 소설도 아니라서, 젊은 연인은 양가 모두로부터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하지만 이미 불이 확 붙어버린 상태. 불이 붙어도 너무 붙어서, 탈 대로 다 타버려 이제 재가 되어 그랬는지 아르투로가 보기에 알리시아의 두 눈에서 불행을 감지해버렸고, 이 때는 벌써 순수한 애정에 대한 희망을 버린 상태였단다. 그럼 뭐냐 하면, 애초부터 애정이 많은 남자도 아니어서 그랬는지, 알리시아가 자신에게 후회를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불안감을 진정시켜주는 존재 비슷하다고 여겼다. 그래도 한 번 사랑한다고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투철했던 거 같은데, 사실 알고 보면 그러지 않았더라도 알리시아는 나름대로 한 평생 이럭저럭 살만 했었으니, 부모가 늙었지만 돈이 무척 많은 지주한테 시집을 보내 남편이 죽기만 하면 그날로 팔자가 활짝 필 수 있게 다 조치를 해두었던 찰나였다. 하여간 아르투로의 자존심 혹은 소유욕 때문이었는지 더는 견딜 수 없을 즈음, 아르투로와 알리시아 커플은 수도 보고타를 떠나 말 잔등에 올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저 광막한 지평선이 끝도 없이 펼쳐지는 오리노키아 지방의 광활한 지역, 이 중에서도 카사나래로 야반도주를 떠난다. 이렇게 작품은 시작한다.

  평원에서의 자잘한 에피소드도 있다. 한참 잘 가다가 자칭 보안관이라고 주장하는 혼혈인 페페 모리요 리에토, ‘피파’라는 작자가 등장하여 시비를 좀 걸다가 스스로 알리시아의 종복이 되기를 자청한다. 그렇지만 그날 밤에 피파는 돈과 물건이 든 안장을 채운 말을 훔쳐 유유히 사라진다. 물론 저 뒤로 가면 다시 나타나서 한 번 더 이들의 종복을 자청하고, 또다시 배신을 한 후에 한 순간 비명으로 생을 마치긴 하나 그렇게 큰 비중이 있지는 않다.

  60세가 넘은 돈 라파엘. 아르투로의 아버지 친구이기도 하고, 과거엔 잘 나갔지만 지금은 쇠락한 사람 특유의 품위를 간직해서 1부가 끝날 때까지 연인들의 충실한 도우미로 활약하는 돈 라파엘, 돈 라포는 현재 평원을 떠돌며 일종의 보따리 장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세 명은 사이 좋게, 당연히 경험 많은 돈 라포가 될 수 있는 대로 편한 일정을 잡아 고단한 행진을 며칠 동안이나 거듭한 후, 드디어 황포 돛대는 휘날리지 않지만 이름만은 라 ‘마포리타’라 지은 촌락에 도착한다. 이곳에 백인의 집이 있어서 집 주인은 피델 프랑코, 안주인은 그리셀다 아가씨.

  피델 프랑코로 말씀드릴 거 같으면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아라우카 경비대에 중위로 복무하다가 그리셀다에게 찝적거리는 경비대장을 칼로 폭폭 찌른 후 탈영을 해 아무도 찾지 않는 카사나래로 와서 가우초 일, 물론 가우초도 나름으로 최고 가우초를 해서 살고 있다. 그리셀다 아가씨가 귀에 에메랄드 귀걸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림이 그리 궁색하지 않은 거 같다. 실제로 근동의 대목장주 수비에타 노인이 소 천 마리 또는 그 이상을 싼 가격에 팔겠다고 제의하니까, 돈 라포와 뜻을 맞추어 선뜻 천 마리 이상의 소를 사겠다고 덥석 제의를 받기도 한다.


​  그런데 이때, 수비에타 노인의 집에 얹혀 있으면서 수작을 부리는 악당 바레라가 있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백인들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라틴 아메리카 밀림에서 인디오들의 씨를 말려가며 노예노동을 통해 고무채취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악당 바레라는 카사나래 일대를 돌아다니며 물라토, 인디오, 심지어 백인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비차다 지역의 고무농장에서 일할 일군을 모집하고 있다면서, 그곳에서 일을 하면 삼시 세끼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 일당으로 5 페소를 지급할 것이라고 떠들고 다닌다. 이게 당시엔 파격적인 조건이었나 보다. 카사나래의 거의 모든 목동, 가우초와 식구들은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매일 술이나 마시고, 빈둥빈둥거리고, 소 젖도 짜지 않아 벌판에 암소들의 곡소리만 처량한 거였다.

  아르투로 커플이 임시로 지내고 있는 마포리타에도, 특히 두 여인이 광막하고 벌판 밖에 없는 살벌한 카사나래에서 사는 것보다 밀림 속이기는 하지만 보다 나은 복지를 약속하는 비차다로 떠나고 싶어 한다. 이 집엔 현명한 물라타 (백인과 인디오 사이의 딸) 노파 세바스티아나와 그녀의 삼보(흑인과 물라토/물라타 사이의 소생) 아들 안토니오가 있었는데, 젊은 여성 둘을 제외한 모두는 말을 탈 수 없는 울창한 밀림은 사람 살 곳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 와중에 우리의 주인공 아르투로는 자기 커플에게 숙소와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피델의 아내 그리셀다와 할 건 다 했으나, 그렇다고 피델 모르게 두 여자를 데리고 비차다로 갈 수는 없었다. 딱 이 때 수비아토 노인이 소 천 마리를 싼 값에 팔겠다고 했고, 돈 라포와 피델이 돈을 구하러 떠난 사이, 아르투로는 노인의 집에 쳐들어가 온갖 술주정을 부렸고, 정신이 들어 마포리타로 돌아와보니, 이미 두 젊은 여자는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이는 관계로 의심을 했었는 바, 바레라를 따라 비차다로 달아난 다음이었다.


​  뭐 스토리가 그렇다는 거다. 이게 1부. 이어지는 2부는 아르투로, 피델, 삼보 안토니오, 다시 등장해 뒷덜미를 잡힌 인디오 출신 피파, 이 네 명이 여자들을 찾아 나선 여정. 한 번 더 이야기하자면, 스토리가 그렇다는 것.

  스토리보다 더 중요한 건, 라틴 아메리카의 독자들이라면 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극동아시아의 독자인 내가 읽기로는 끝도 없는 벌판과 열대 밀림이 펼져치는 파노라마. 이걸 묘사하는 1920년대의 조금은 예스러운 화려한 문장들. 그것만 감상해도 충분하다. 말로는 쉽지만 광경 자체를 진짜로 본다면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은 대평원의 노을. 습지 원시림을 싹 쓸어가는 수억 마리 병정개미들의 행진, 지옥같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사람을 흰 뼈만 남기고 몽땅 뜯어먹는 피라니아. 이런 놀라운 자연 속에서 어쩌면 라틴 아메리카의 붐 문학은 이미 배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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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미국인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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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엄 그린, 이라고 하면 당연히 <제3의 사나이>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흑백영화 <제3의 사나이>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컷의 장면을 담고 사는데, ① 폐허가 된 빈의 대관람차에 오른 해리 라임(오슨 웰스)가 평생 친구인 홀리 마틴스(조지프 코튼)에게, 지상의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라고 하면서, 저 가운데 하나 혹은 둘이 지워진다고 한들 세상에 어떤 영향을 주겠느냐, 라고 했던 대사와, ② 말 그대로 비처럼 쏟아지는 낙엽을 뚫고 걸어와 차를 옆에 세워둔 채 담배 한 개비를 물고 그녀를 바라보던 장교 캘러웨이(트레버 하워드)를 완전히 무시하고 가던 길을 계속 걷던 애너 슈미트(알리다 발리)의 장면이었다. 나처럼 보통의 독자가 그린을 소설문학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처음 만나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 살다가 우연히 책을 좋아하는 습관을 들였을 경우, 책 가게에서 그레이엄 그린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되면? 어떤 작품이 됐던 간에, 일단 구입을 하고 본다. 이게 정상이다. 나도 마찬가지라 여태 <권력과 영광>, <제3의 사나이>, <그레이엄 그린 – 정원 아래서 외 52편>, <브라이턴 록>을 사서 읽었고, 이제 다섯 번째로 읽는 그린, <조용한 미국인>은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역자 고 안정효의 해설을 보면, 그레이엄 그린 자신이 대중적 호소력에 의존하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은 대중 소설가였으며, 그런 화법의 추리소설들을 스스로 오락물(entertainment)라고 불렀다고 한다. 오락물로의 소설. 이건 필연적으로 다수 작품을 영화로 다시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서, <조용한 미국인> 역시 스스로 “헐리웃 키드”인 안정효가 아주 재미있게 영화 버전의 그린 작품들을 비교해가면서 설명/해설한다. 진짜로 읽어 보시라. 대중예술로의 영화와 소설, 헐리웃 은막 위에서 펼쳐는 환상과 꿈이란 시각으로 보면 안정효의 해설과 <조용한 미국인>이 얼마나 재미있나 말이지. 이 작품의 무대가 1950년대 초반 인도차이나, 베트남에서의 대 프랑스 독립투쟁 시기였다. 안정효는 게다가 처음엔 카빈 소총을 들고, 후에 본격적으로 악명 높은 베트콩의 땅굴 소탕 작전 당시엔 M16 소총을 들고 베트남 전선에 직접 투입이 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니 상황을 기가 막히게 잘 표현했겠다 싶다. 그러나 딱 거기 까지다. 그레이엄 그린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토머스 파울러는 영국의 신문사에서 사이공으로 파견한 종군 기자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선을 누비는 종군 기자 말고, 베트남 전쟁이 늘 그랬듯이 똑부러진 전선이 있다고 말하기 힘들어 주로 사이공에 머물면서 이슈가 있을 때마다 간혹 전선을 둘러보고 기사를 쓰는 정도다. 나이가 지긋한 파울러는 영국에 아내와 다 큰 자식들이 있지만 도무지 가정에 정을 붙지 않아서 아주 오랫동안 베트남에 발을 붙이고 있다. 부부간에 금슬이 좋은 적이 없어 인도차이나로 오기 전에 앤이란 아가씨와 정분이 나기도 했으나 원래 불륜이란 것이 늘 그렇듯이 책임없이 헤어진 바 있고, 베트남에서는 후엉凰 암컷 봉황이란 이름의 날씬한 베트남 여성 특유의 낭창낭창하고 뇌쇄적인 여성과 동거를 하고 있다. 마음 같으면 아내와 이혼을 하고 후엉과 재혼을 하고 싶으나, 아내가 하필 성공회 고교회파라서 이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이들 사이를 한 미국 남자가 파고 든다. 올든 파일. 32세. 미국 경제지원단 소속으로, 홍보나 연극 어쩌면 극동분야 연구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학위를 받아 인도차이나의 발전, 그리고 작품 속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인도차이나의 공산주의화를 저지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자 파견된 아주 진지하고 순진한 남성이다. (세상에 순진한 남자가 어딨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까 늙은이 토머스 파울러와 연애를 하고 있던 후엉, 50년대 초반 작품의 여주인공답게 매혹적인 얼굴과 몸매에 어울리게 속이 시원할 정도로 무식한 지적 수준을 지닌 후엉에게 한 눈에 반해 기어이 파울러의 품에서 낚아채, 미국으로 데려가서 뉴 잉글랜드 부모님을 접견시키고 보스턴에서 신혼살림을 꾸리는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진짜로 파울러한테서 여자를 데려오는 데 성공한다. 파울러는 당연히 열통이 터지지만 나이든 영국인답게 며칠 후 이들의 관계를 인정하고 어차피 깨진 쪽박, 그나마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수준에 이른다.

  그러나, 책을 열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자 토머스 파울러는 이 조용한 미국인 파일을 음침한 냉혈동물이며 겉만 번지르르한 허풍선이라고 단정해버린다. 이 때는 독자가 아직 갈피도 잡지 못하고 있을 즈음으로 파일이, 다카오로 가는 다리 밑 강물에서 익사한 변사체로 발견이 된다. 흙탕물에 빠져 질식사해서, 폐에 다량의 진흙을 발견한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여태까지 파일을 설명한 구절들, 조용한 미국인이니 허풍선이니 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파울러가 파일의 시신에 대고 독백을 하기를, 적어도 쉰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이란다. 그러니 어떻겠어? 이 작품은 파일의 정체,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파일이 무려 50여 명의 사람을 죽였으며, 누구를 죽였는지를 밝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파울러의 파일에 대한 독백이 상당히 앞부분에 나와서 소개를 하는 것이지, 아니면 모른 척했을 텐데, 하여간 독후감 쓰기는 편해졌다. 파일더러 아메리칸 합중국에서 파견한 “경제지원단” 소속이라고 했는데 적어도 50명의 인명을 살상한다? 그럼 그는 경제지원단의 명함을 가지고 다니는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전략사무국)의 후신인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 중앙정보국)의 일원일 수도 있다. 책에서는 얼핏 가능성만 이야기하는 바, 파일 및/또는 파일이 속한 조직은 어차피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무력으로 지배하는 데 실패할 것으로 전망하고, 만일 권력을 베트남 시민들에게 이양할 것이라면 공산주의를 주창하는 베트콩이나 베트민한테는 절대 집권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에 세력도 약하고 행동도 극악하지만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테 장군을 지지하기로 결정해 대량 살상무기를 지원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듯이, 이것들이 미국이 지원한 무기로 사이공 시내에서 다중을 향한 무차별 테러를 저지르는 거였다. 이 내용을 밝히는 것도 께름칙한데 어떻게 또다른 주인공 파일이 죽음에 이르는가, 하는 건 정말 말할 수 없다.

  1950년대 전 세계인들이 미국과 서유럽 헤게모니에 현혹당한 일은,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 것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였다는 거. 나중에 보니까 공산주의 하는 나라가 하나도 빠짐없이 극한의 독재를 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 결과적으로 당시의 투쟁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였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게 되었다는 거. 세상 참 살기 어렵다, 그지? 뭐 그런 거다. 올든 파일은 1950년대 초의 미국이라면 당연히 행했을 세계질서 재편작업의 일환으로 매우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이기도 한 행위를 하다가 미국 역사에 한 줄도 남기지도 못하고, 장가도 못 들고 그렇게 죽어갔다. 삼가 명복을?

  아무리 그레이엄 그린을 좋아한다고 해도 식민지에 관한 그의 시각에는 동의하기 쉽지 않다. 주인공 토머스 파울러가 인도차이나 독립전쟁의 당사국 국민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도, 파울러의 모국인 영국 역시 식민 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바에, 식민지 베트남에서 파울러는 철저하게 국외자로만 존재한다. 베트남이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결정이 될지,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나중에 파일에 의해 대중 50명 이상이 희생을 당한 후에야 베트남 내 좌익세력과 모종의 일을 꾸미는 것을 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편 피우고, 후엉의 몸을 만지고, 파일에 은근한 질투를 하고, 이혼해주지 않는 아내 때문에 포기하는 마음이나 먹고, 뭐 이런 것이 주류다. 다른 건 아닌데, 이런 면에서 좀 그린 답지 않다. 하긴, 그린에게 무슨 철학적, 또는 역사적, 탐미적 작품을 바란 건 아니지만, 아니, 아니, 그러면 됐지. 세상 모든 작가가 다 진지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재미있게 잘 읽었다. 하지만 그린 치고는 조금 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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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8-04 06: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오늘도 삽질해 봅니다. 다음 주 예정 독후감입니다.
화요일, 호세 에우스타시오 리베라 <소용돌이>
수요일, 스테판 츠바이크 <우체국 아가씨>
목요일, 윌리엄 트레버 <마지막 이야기들>
금요일, 쓰시마 유코 <빛의 영역>

stella.K 2023-08-04 15:35   좋아요 1 | URL
쉬엄쉬엄 읽으십시오. 눈에서 땀띠나십니다.ㅋㅋㅋ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더위를 먹은 나머지 골드님을 시기 질투하고 있는가 봅니다. 사탄 원수 마귀를 물리치십시오.ㅠ ㅋㅋㅋㅋ 😆
아, 빛의 영역 기대됩니다.^^

Falstaff 2023-08-04 15:4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오늘은 하루 종일 책 한 페이지도 들춰보지 않았습니다.
어제 위스키 마시고 뻗었다가 하루종일 빌빌거렸습니다.
좀 있으면 또 쐬주 마시러 나가야 합니다. 매운 낙지가 안주로 좋으려나, 흠... 큰일입니다. 오징어, 낙지, 문어... 이런 종류 안주 싫어하는데 말입니다. ㅜㅜ

자목련 2023-08-04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이야기들>기대할게요.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Falstaff 2023-08-04 08:46   좋아요 1 | URL
앗,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
어제 위스키 좀 마시고 자버렸더니 지금 강시...처럼 변해서 도서관도 못가고요 흑흑흑....
 
오렐리앵 1 창비세계문학 92
루이 아라공 지음, 이규현 옮김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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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세계문학 시리즈 나와 반갑습니다. 말로만 듣던 아라공이라서 관심 많았습니다. 쉬르레알리즘, 다다이즘 뭐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습니다. 참 다행이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한 단어도 안 빼고 다 읽었습니다. 놀랍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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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8-03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살까말까했는데 이 리뷰를 읽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Falstaff 2023-08-04 06:5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저도 가끔 좋은 일 하고 삽니다. ㅋㅋㅋㅋ

페크pek0501 2023-08-03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문학 시리즈 중 사려던 책이 민음사에 없을 때 아쉬웠는데 앞으로는 창비세계문학을 찾아봐야겠군요. 좋은 정보입니다. 창비세계문학은 단편집으로 몇 권 갖고 있습니다.^^

Falstaff 2023-08-04 07:00   좋아요 0 | URL
민음사는 예전에 나왔던 책 별로 교정도 안 하고 그대로 베껴 다시 찍는 일을 자주 해서 말이죠. ㅎㅎㅎ 다 일장일단이 있더군요. ^^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익명의 여인 지음, 염정용 옮김 / 마티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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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작년 10월에 서강대에서 트랜스내셔널주의 사학을 연구하고 있는 임지현 교수의 책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을 읽을 당시 메모했던, 책 속 인용도서 몇 권 가운데 한 권을 고른 것이다. 임지현은 초국가적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우리 안의 파시즘”과 “대중 독재” 같은 신선한 생각 거리를 장만하기도 했는데,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서는 문제제기만 할 뿐 똑 부러지는 결론을 내지 않고 끝냈다. 대중 독재 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녁에 필연적으로 꽂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대중,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좌파) 안의 파시즘이란 것을 눈 밝은 독자들이 눈치만 채게 했다. 그리하여 정말 피곤할 뿐더러 쓸모 없는 다음 논제가 벌어지는데, 좌파 파시즘도 나쁜 것인가 하는 것. 대주제가 파시즘이다. 우파냐 좌파냐는 그냥 양념이고. 어떤 집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던 파시즘은 나쁜 것이다. 이건 두 번 생각하는 것도 칼로리 낭비다.

  하여간 오랜만에 읽은 현대 사학자의 책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재미있어서 늘 기억하다가 당시 메모가 눈에 띄었고, 때마침 도서관 개가실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뽑아 읽었다.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이하 “함락된”으로 씀>.


​  <함락된>은 1945년 4월 20부터 6월 22일까지 독일 베를린 변두리 지역에 살고 있던 서른 살 정도의 전직 기자 출신 여성이 쓴 일기다. 드디어 제국의 수도에서도 무기가 그르렁거리고 요란한 폭발음도 들리고, 아군인 용맹한 독일 병정들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수척하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늙은 여성보다도 느린 걸음으로 터벅터벅 걷거나, 20세기도 거의 절반을 채운 이 시대에 비쩍 마른 말이 끄는 수레를 밀며 이동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주민들은 사이렌이 불기만 하면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지하 대피소로 피하는 것에 이골이 났는데, 만일 그러지 않았다가는 정말로 소련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을 맞은 민간인 거주용 건물 속에서 집과 함께 세상을 하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시민들은 굶주림과 추위와 부상 또는 죽음의 위협을 날마다 체감하고 있어서, 곡식 가루 백 그램, 색깔이 푸르게 변해버린 버터 한 덩이를 위해서 손톱을 세워가며 악착을 떨어야 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사는 곳. 지하 대피소 안에서는 그들은 비록 가끔씩이기는 했지만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진짜 가끔씩은 술도 찔끔 한 방울씩 돌아가며 마시기도 했다.

  임지현의 책 <희생자…>에서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소련군에 의한 독일여성에 대한 성폭행이 말 그대로 “무시무시”할 줄 알았다. 일찍이 솔제니친을 통해 소련 정부가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자국 병력을 얼마나 가혹하게 수용소에 감금했는지, 쇼샤를 통하여 소련 내 유대인 수용소에서 그들이 얼마나 독한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했는지 설득을 당한 나는, 점령지역 안에서 소련군의 눈에 뜨인 독일 여성들의 가장 흔한 피해가, 강간폭행이나 강간살인이며 그것이 전체 범죄의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 임지현이 자신의 책에서 슬쩍 의도한 것보다도 많이 약한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소련군의 범죄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냥 그렇다는 뜻이다. 어느 것이 더 사실과 가까울까?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읽고 들은, 소련 군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독일 여성들에 대한 무차별, 폭력적, 심지어 악마적이기까지 한 성폭행과 무명여인이 <함락된>에서 묘사한 내용 중에서.

  유럽 지역에서는 다양한 전쟁이 숱하게 있었다. 이 가운데 어느 종족도 싸울 때마다 족족 이기는 법이 없어서, <함락된>을 읽으며 이 사람들은 전쟁에 지고 있음을 체감하게 되면 여성 스스로도 점령군에 의한 성폭행을 숙명처럼 각오하고 있구나, 라고 이해 또는 오해하게 만든다. 사람들, 여성도 있고 남성도 있다. 그러나 남성의 대부분은 전선에 가 있기 때문에 거의 8할 이상이 여성이다. 이들이 지하실에서 대피를 하고 있을 때, 아무리 통신이 두절되었다 하더라도 말은 바람에 따라 전해오는 법, 이제 독일의 파국이 거의 확실할 무렵, 지하실에서 여성들이 논의를 시작한다. 별로 심각하지 않게.


​  “지하실. 밤 10시. 오늘은 대포 소리가 뜸했고, 시간이 다가왔음에도 공중공습도 지금까지는 없었다. 불안한 쾌활함이 살아났다. 온갖 이야기들이 나왔다. W부인이 외쳤다. ‘러시아 병사가 배 위에 올라타는 게 미군 병사가 머리에 올라타는 것보다야 낫지.’ 그녀가 달고 있는 검은 상장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농담이다. 벤 양이 지하실이 울리도록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디 솔직히 말해봅시다. 우리 모두 분명 숫처녀는 아니잖아요.’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나는 누가 아직 숫처녀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수위의 둘째 딸은 숫처녀일 것이다.” (p.32~33)


​  이후 비슷한 묘사가 두 번 정도 더 나온다. 그러니까 유럽 여인들은 군인들에 의한 능욕행위가 전쟁의 일부로 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다. 전쟁이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전쟁 중 기근과 폭격에 의한 사망과 부상 같은 것들의 두려움만 해도, 반드시 전장에 나가있지 않더라도 사람을 충분히 고갈시킬 수 있을 불안인데, 여기에 능욕에 대해서도, 겁탈 행위 이후엔 성병과 임신의 공포에서 자유스럽지 못하게 된다.

  이러다 정말로 소련군이 진주하고, 그날로 화자 ‘나’는 두 명의 소련군에게 능욕을 당했으며, 쉰 살이 넘는 임시 동거인인 미망인 역시 계단참에서 아직 턱에 수염도 나지 않은 소년병에게 같은 일을 당한다. 익명의 여인은 또 다른 소련 사병에게 당하고, 이왕 당할 바에 우두머리 늑대 한 명을 잡아서 조련시켜, 한 마리의 늑대에게만 당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익명의 여인은 기자 출신이고, 젊은 시절 유럽 각지를 여행했으며 모스크바에서도 짧게 살아 간단한 러시아 말을 쓸 줄 알았으니까. 이래서 익명의 여인은 어줍지 않게 자기에게 로미오의 연담 비슷한 고백을 한 하사관과, 후에 소령계급의 장교인 우두머리 늑대를 찾아낸다. 게다가 이에 대한 답례로 그들이 물러날 때까지 정어리 통조림, 고기 통조림, 따뜻한 검은 빵, 보드카, 럼, 등 온갖 먹거리를 전쟁 중 가장 “풍족하게” 즐길 수 있었고, 하급 병사들이 접근하지도 못했다. 임지현은 자기 책에서 소련군 능욕의 대가, 주민에 대한 보상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뭐 그는 그가 집필하는 책의 목적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물론 익명의 여인이 소련군 하사관이나 소령 그리고 육체적 교섭은 없었지만 상당한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던 장교 몇 명과 만나면서, 특히 소령, 하사관의 일종의 현지처 노릇을 하면서 성적인 수치심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하다못해 그들의 애무를 즐기고 엑스터시를 느끼는 것이 대단히 수치스럽고 모멸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결국 국부에 심하게 쓰라린 상처를 입고 만다. 생각해보라. 하고 싶어서 했나, 죽지 못해 한 일이지. 다만 점령군에게 몸을 내주고, 저항 했다가는 목숨으로 대가를 치루어야 하니까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건 생각도 못했을 터이니 그건 그냥 넘어가더라도, 능욕 자체를 대단한 수치로는 생각하지 않는다(또는 그렇게 읽힌다). 이게 내가 여러 소설작품이나 영화 같은 걸 통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그리고 더 진실과 가깝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나는 게 먼저니까.


​  사병이 독일 여성을 능욕하려는 것을 장교가 보고 못하게 한다. 그러니까 소련 병사가 이렇게 말한다. 독일 놈들이 레닌그라드에서 했던 걸 기억하지 못합니까? 아이들 다리를 잡고 휘둘러 벽에 몸통과 머리를 부딪혀 죽게 하고 아이의 어미를 (이하 생략)

  전쟁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정당하지 않다.

  소련군이 베를린 중심지로 더 진격을 하고 며칠 후, 연인 게르트가 돌아온다. 익명의 여인은 그에게 자신의 일기를 읽어보라고 건네준다. 그는 읽었고, 여인을 쳐다보더니 말을 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도 떠났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옛 연인에게서 도피하는 편을 택한 것. 여인은 이 모습에 관해 말한다. “남자들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들고, 너무나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보인다. 나약한 성gender가 된 남자들. 여자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움튼 일종의 집단적인 환멸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여성들을 지배하던 남자들, 강한 남자를 찬미하는 나치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남자들이 전쟁에 져서 이렇게 된 것이지, 이겼으면 여전히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됐든, 저렇게 됐든, 여자를 위해서, 또 남자를 위해서, 전쟁은 반드시 없어야 한다.


​  세월이 흘러 익명 여성의 본명은 밝혀졌고, 책 후기에 누구라고 쓰여 있으며, 2001년 아흔 살의 나이로 숨이 졌다고 했지만, 내 독후감에서 그녀, 익명을 고수하기 바랐던 분의 이름을 노출시키기 싫다.





 * 혹시, 독일여성 2백만 명 이상이 소련군에게 강간을 당했으며 이것도 대부분 윤간의 형태였다, 70번(회) 윤간을 당한 경우도 보고되고 있다, 등등의 자료는 오랜 냉전 기간 중에 소련을 악의적으로 광고하기 위해 이쪽 진영에서 만들어낸 것인가, 하는 의심을 잠깐 했다. 반면에 이 책을 쓴 익명의 여성은 소련이 점령한 독일민주공화국, 즉 동독 지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체제를 그대로 보여줄 수 없어 실제 내용에 상당한 분식을 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해야 했고. 둘 다 사실이겠지만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 받아들이는가, 하는 건 다시 독자의 몫으로 넘어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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