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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익명의 여인 지음, 염정용 옮김 / 마티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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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년 10월에 서강대에서 트랜스내셔널주의 사학을 연구하고 있는 임지현 교수의 책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을 읽을 당시 메모했던, 책 속 인용도서 몇 권 가운데 한 권을 고른 것이다. 임지현은 초국가적 관점으로 역사를 보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우리 안의 파시즘”과 “대중 독재” 같은 신선한 생각 거리를 장만하기도 했는데,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서는 문제제기만 할 뿐 똑 부러지는 결론을 내지 않고 끝냈다. 대중 독재 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녁에 필연적으로 꽂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대중,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좌파) 안의 파시즘이란 것을 눈 밝은 독자들이 눈치만 채게 했다. 그리하여 정말 피곤할 뿐더러 쓸모 없는 다음 논제가 벌어지는데, 좌파 파시즘도 나쁜 것인가 하는 것. 대주제가 파시즘이다. 우파냐 좌파냐는 그냥 양념이고. 어떤 집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던 파시즘은 나쁜 것이다. 이건 두 번 생각하는 것도 칼로리 낭비다.
하여간 오랜만에 읽은 현대 사학자의 책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재미있어서 늘 기억하다가 당시 메모가 눈에 띄었고, 때마침 도서관 개가실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어서 주저하지 않고 뽑아 읽었다.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 이하 “함락된”으로 씀>.
<함락된>은 1945년 4월 20부터 6월 22일까지 독일 베를린 변두리 지역에 살고 있던 서른 살 정도의 전직 기자 출신 여성이 쓴 일기다. 드디어 제국의 수도에서도 무기가 그르렁거리고 요란한 폭발음도 들리고, 아군인 용맹한 독일 병정들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수척하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늙은 여성보다도 느린 걸음으로 터벅터벅 걷거나, 20세기도 거의 절반을 채운 이 시대에 비쩍 마른 말이 끄는 수레를 밀며 이동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주민들은 사이렌이 불기만 하면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지하 대피소로 피하는 것에 이골이 났는데, 만일 그러지 않았다가는 정말로 소련군(을 포함한 연합군)의 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을 맞은 민간인 거주용 건물 속에서 집과 함께 세상을 하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미 시민들은 굶주림과 추위와 부상 또는 죽음의 위협을 날마다 체감하고 있어서, 곡식 가루 백 그램, 색깔이 푸르게 변해버린 버터 한 덩이를 위해서 손톱을 세워가며 악착을 떨어야 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사는 곳. 지하 대피소 안에서는 그들은 비록 가끔씩이기는 했지만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진짜 가끔씩은 술도 찔끔 한 방울씩 돌아가며 마시기도 했다.
임지현의 책 <희생자…>에서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소련군에 의한 독일여성에 대한 성폭행이 말 그대로 “무시무시”할 줄 알았다. 일찍이 솔제니친을 통해 소련 정부가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자국 병력을 얼마나 가혹하게 수용소에 감금했는지, 쇼샤를 통하여 소련 내 유대인 수용소에서 그들이 얼마나 독한 방법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했는지 설득을 당한 나는, 점령지역 안에서 소련군의 눈에 뜨인 독일 여성들의 가장 흔한 피해가, 강간폭행이나 강간살인이며 그것이 전체 범죄의 대부분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 않았다. 임지현이 자신의 책에서 슬쩍 의도한 것보다도 많이 약한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소련군의 범죄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냥 그렇다는 뜻이다. 어느 것이 더 사실과 가까울까?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읽고 들은, 소련 군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독일 여성들에 대한 무차별, 폭력적, 심지어 악마적이기까지 한 성폭행과 무명여인이 <함락된>에서 묘사한 내용 중에서.
유럽 지역에서는 다양한 전쟁이 숱하게 있었다. 이 가운데 어느 종족도 싸울 때마다 족족 이기는 법이 없어서, <함락된>을 읽으며 이 사람들은 전쟁에 지고 있음을 체감하게 되면 여성 스스로도 점령군에 의한 성폭행을 숙명처럼 각오하고 있구나, 라고 이해 또는 오해하게 만든다. 사람들, 여성도 있고 남성도 있다. 그러나 남성의 대부분은 전선에 가 있기 때문에 거의 8할 이상이 여성이다. 이들이 지하실에서 대피를 하고 있을 때, 아무리 통신이 두절되었다 하더라도 말은 바람에 따라 전해오는 법, 이제 독일의 파국이 거의 확실할 무렵, 지하실에서 여성들이 논의를 시작한다. 별로 심각하지 않게.
“지하실. 밤 10시. 오늘은 대포 소리가 뜸했고, 시간이 다가왔음에도 공중공습도 지금까지는 없었다. 불안한 쾌활함이 살아났다. 온갖 이야기들이 나왔다. W부인이 외쳤다. ‘러시아 병사가 배 위에 올라타는 게 미군 병사가 머리에 올라타는 것보다야 낫지.’ 그녀가 달고 있는 검은 상장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농담이다. 벤 양이 지하실이 울리도록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디 솔직히 말해봅시다. 우리 모두 분명 숫처녀는 아니잖아요.’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나는 누가 아직 숫처녀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아마 수위의 둘째 딸은 숫처녀일 것이다.” (p.32~33)
이후 비슷한 묘사가 두 번 정도 더 나온다. 그러니까 유럽 여인들은 군인들에 의한 능욕행위가 전쟁의 일부로 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다. 전쟁이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전쟁 중 기근과 폭격에 의한 사망과 부상 같은 것들의 두려움만 해도, 반드시 전장에 나가있지 않더라도 사람을 충분히 고갈시킬 수 있을 불안인데, 여기에 능욕에 대해서도, 겁탈 행위 이후엔 성병과 임신의 공포에서 자유스럽지 못하게 된다.
이러다 정말로 소련군이 진주하고, 그날로 화자 ‘나’는 두 명의 소련군에게 능욕을 당했으며, 쉰 살이 넘는 임시 동거인인 미망인 역시 계단참에서 아직 턱에 수염도 나지 않은 소년병에게 같은 일을 당한다. 익명의 여인은 또 다른 소련 사병에게 당하고, 이왕 당할 바에 우두머리 늑대 한 명을 잡아서 조련시켜, 한 마리의 늑대에게만 당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익명의 여인은 기자 출신이고, 젊은 시절 유럽 각지를 여행했으며 모스크바에서도 짧게 살아 간단한 러시아 말을 쓸 줄 알았으니까. 이래서 익명의 여인은 어줍지 않게 자기에게 로미오의 연담 비슷한 고백을 한 하사관과, 후에 소령계급의 장교인 우두머리 늑대를 찾아낸다. 게다가 이에 대한 답례로 그들이 물러날 때까지 정어리 통조림, 고기 통조림, 따뜻한 검은 빵, 보드카, 럼, 등 온갖 먹거리를 전쟁 중 가장 “풍족하게” 즐길 수 있었고, 하급 병사들이 접근하지도 못했다. 임지현은 자기 책에서 소련군 능욕의 대가, 주민에 대한 보상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뭐 그는 그가 집필하는 책의 목적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하여간 그렇다.
물론 익명의 여인이 소련군 하사관이나 소령 그리고 육체적 교섭은 없었지만 상당한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던 장교 몇 명과 만나면서, 특히 소령, 하사관의 일종의 현지처 노릇을 하면서 성적인 수치심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하다못해 그들의 애무를 즐기고 엑스터시를 느끼는 것이 대단히 수치스럽고 모멸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결국 국부에 심하게 쓰라린 상처를 입고 만다. 생각해보라. 하고 싶어서 했나, 죽지 못해 한 일이지. 다만 점령군에게 몸을 내주고, 저항 했다가는 목숨으로 대가를 치루어야 하니까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건 생각도 못했을 터이니 그건 그냥 넘어가더라도, 능욕 자체를 대단한 수치로는 생각하지 않는다(또는 그렇게 읽힌다). 이게 내가 여러 소설작품이나 영화 같은 걸 통해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그리고 더 진실과 가깝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나는 게 먼저니까.
사병이 독일 여성을 능욕하려는 것을 장교가 보고 못하게 한다. 그러니까 소련 병사가 이렇게 말한다. 독일 놈들이 레닌그라드에서 했던 걸 기억하지 못합니까? 아이들 다리를 잡고 휘둘러 벽에 몸통과 머리를 부딪혀 죽게 하고 아이의 어미를 (이하 생략)
전쟁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정당하지 않다.
소련군이 베를린 중심지로 더 진격을 하고 며칠 후, 연인 게르트가 돌아온다. 익명의 여인은 그에게 자신의 일기를 읽어보라고 건네준다. 그는 읽었고, 여인을 쳐다보더니 말을 더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도 떠났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고 옛 연인에게서 도피하는 편을 택한 것. 여인은 이 모습에 관해 말한다. “남자들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들고, 너무나 비참하고 무기력하게 보인다. 나약한 성gender가 된 남자들. 여자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움튼 일종의 집단적인 환멸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 여성들을 지배하던 남자들, 강한 남자를 찬미하는 나치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남자들이 전쟁에 져서 이렇게 된 것이지, 이겼으면 여전히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됐든, 저렇게 됐든, 여자를 위해서, 또 남자를 위해서, 전쟁은 반드시 없어야 한다.
세월이 흘러 익명 여성의 본명은 밝혀졌고, 책 후기에 누구라고 쓰여 있으며, 2001년 아흔 살의 나이로 숨이 졌다고 했지만, 내 독후감에서 그녀, 익명을 고수하기 바랐던 분의 이름을 노출시키기 싫다.
* 혹시, 독일여성 2백만 명 이상이 소련군에게 강간을 당했으며 이것도 대부분 윤간의 형태였다, 70번(회) 윤간을 당한 경우도 보고되고 있다, 등등의 자료는 오랜 냉전 기간 중에 소련을 악의적으로 광고하기 위해 이쪽 진영에서 만들어낸 것인가, 하는 의심을 잠깐 했다. 반면에 이 책을 쓴 익명의 여성은 소련이 점령한 독일민주공화국, 즉 동독 지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체제를 그대로 보여줄 수 없어 실제 내용에 상당한 분식을 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해야 했고. 둘 다 사실이겠지만 두 가지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 받아들이는가, 하는 건 다시 독자의 몫으로 넘어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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